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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플러스 기고] 무술년의 역사적 의미와 전망/류동학 혜명학술원장

    [서울플러스 기고] 무술년의 역사적 의미와 전망/류동학 혜명학술원장

    붉은 닭의 해였던 정유년은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되어 조기 대선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는 기념비적인 한해로 기록되었다. 2018년 무술(戊戌)은 1번째 갑오로 시작하여 을미, 병신, 정유, 무술, 기해, 경자, 신축, 임인, 계묘 순으로 3순(旬)의 육십갑자 중 35번째다. ‘무’는 황이므로 ‘노란 개의 해’이다. 즉 ‘황견의 해’이다. 역사적으로 1598년 무술년은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해 조선에 주둔하던 왜군 전군 철수령이 내려 일본으로 가던 왜군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이 전투 중에 순국한 해이자, 조일7년 전쟁이 종식된 해이기도 하다. 1658년 무술년은 청나라 순치제 재위 15년으로 조선 효종이 북벌운동에 매진하던 때로 청의 요청으로 신류(申瀏)장군이 이끄는 260명이 러시아를 정벌하는 제2차 나선정벌이 있던 해였다. 또한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잉글랜드 공화국을 성립시켰던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한 해다. 1898년 무술년은 1863년부터 조선을 좌지우지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서거했다. 또한 청나라의 서태후가 광서제를 유폐하고 섭정을 실시하면서 캉유웨이가 주도한 무술변법이 좌절된 해이다. 조선에서는 1896년 설립된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 개최와 관민공동회 개최 및 헌의 6조 결의가 있던 기념비적인 해였으나, 결국 극우파의 공격으로 독립협회는 해체되었다. 1958년 무술년의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자유당 126명, 민주당 79명, 무소속 27명, 기타 1명이 당선되었다. 이로써 군소정당들은 몰락하고 양당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2018년의 무술년 간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목·화·토·금·수로 이루어진 오행 가운데 중심은 토(土)이다. 토의 원천적인 진리는 역의 기원인 복희씨가 발견했다는 하도(河圖)의 중앙에 포진한 5토(土)와 10토(土)이다. 여기서 5토(土)는 사물의 구심체가 되어 구심력을 나타내고 있다. 5토(土)는 우주와 같은 광대무변한 하늘의 기상을 담은 무토(戊土)라는 천간으로 표현한다. 무토(戊土)는 주로 중심을 지탱하는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사물의 조절과 조화를 이루게 하고 흡수력이 강한 구심체의 역할을 충실하게 맡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무(戊)년이 들어가는 해에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국운이 상승해 구심체의 현상을 보여왔다. 예컨대 기원전 2333년 무진년에 단군조선이 개국했다. 668년 무진년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698년 무술년 발해 건국, 918년 무인년 고려 건국과 1948년 무자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이 이어졌다. 1988년 무진(戊辰)년에는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다. 2018년 무술년엔 평창 동계 올림픽이 열린다. 이와 같이 무토는 중심을 모으는 작용을 하는 해였다. 이러한 무토(戊土)는 태양을 항성으로 하는 태양계에서 태양의 행성인 지구와 토성으로 볼 수 있다. 지구(地球, Earth)라는 용어가 바로 무토를 나타낸 것이다. 무토의 하늘의 기상(氣象)으로는 저기압, 구름, 안개, 무지개, 우박, 천둥, 번개, 장마, 노을 등이다. 무토(戊土)는 양(陽)의 토로 하늘의 기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하늘의 기상을 담고 있는 무토가 땅의 기운인 지기(地氣)를 만나면 물을 관리하는 진토(辰土)와 불을 보관하는 술토(戌土)로 변한다. 개띠인 술토(戌土)는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뱀띠, 닭띠, 소띠에게는 행운의 방향이 서북방이다. 또한 뱀띠, 닭띠, 소띠에게는 귀인이 나타나는 행운의 한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음력 1월생, 음력 2월생, 음력 5월생은 이동이나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좋다. 단, 음력 3월생은 집안문제나 주거이동 및 부서이동의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내년 무술년의 개띠는 범띠와 말띠와는 인오술 삼합(三合)이라 부른다. 즉 범띠나 말띠는 직장이나 조상 관련 일에 좋게 작용하는 해이다. 또한 토끼띠와는 묘술합으로 부부의 친화력과 같이 좋으므로 토끼띠는 좋은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개띠는 용띠와는 서로 충돌하는 상충(相沖)이라 용띠는 직업적인 문제나 집안 문제로 인하여 불협화음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양띠와 소띠는 개띠해에 서로 으르렁거리는 삼형살이라 갈등구조나 형법적인 문제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진술축미는 각 계절의 환절기 즉 음력 3월(진, 용), 음력 6월(미, 양), 음력 9월(술, 개) 음력 12월(축, 소)생에 해당하고, 띠로는 용(진),개(술), 소(축), 양(미)을 상징한다. 이러한 진술축미는 명리학에서 괴강살, 백호살, 화개살 등 다양한 신살을 만들었다. 개띠는 화개살이다. 화개살이란 화려함이 덮인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하나의 기운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기운이 끝나며 암장(暗藏)된다는 자연순환의 법칙을 적용해 한 계절의 순환주기가 끝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무술년에는 1987년의 헌법체제를 끝내고 새로운 헌법을 개정하여 21세기 대한민국의 지침서가 되어야 한다. 강력한 지방분권형 국가를 지향하여 중앙과 지방이 더불어 잘 사는 대한민국으로 재편해야 할 시점이다. 화개가 드는 해(용·개·소·양띠)에는 소비경제가 위축되고, 경제가 정체기로 어려워지는 공통적 현상이 작용해 왔다. 그 대표적 예가 지난 1997년 정축년 소띠해의 IMF 외환위기와 2003년 계미년 양띠해의 카드대란, 2009년 기축년(소띠)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성장률 0.7%를 기록했다. 2012년 경제 성장률 2.3%를 기록했다 따라서 무술년은 경제위기에 대비해 내실을 다지고 실속있게 생활하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개띠이다. 현지 시각으로 1946년 6월 14일(한국시각 15일로 뉴욕보다 14시간 빠름)에 미국 뉴욕주 뉴욕 퀸스에서 태어난 그의 사주는 병술년 갑오월 경신일에 태어났다. 그는 모험심이 강하고 도전적인 인물이다. 피아가 명확한 기질이지만, 무술년은 가치관의 변화가 많이 동반된다. 8월과 9월에는 트럼프에게는 동반자적인 관계에 금이 가는 어려움이 동반된다. 중국의 황제급 주석인 시진핑은 1953년 6월 15일생(계사년 무오월 정유일 임인시생)이다. 그는 48세 이후 권력을 향하여 진격하는 운세로 특히 2016년 이후 70대 후반까지 천운이 도와 더욱더 날개를 달게 되어 웅비한다. 관심 영역을 글로벌적으로 확대하여 무술년은 새로운 역동성을 보인다. 다만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 비판세력과 충돌하고 입방아에 오르는 조직의 불협화음을 야기한다. 6월경에 파열음이 정점이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진년 계축월 을해일 병자시생으로 무술년은 기존의 가치관의 많은 변화가 동반된다.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한해로 여름 지방선거에서는 본인의 의사가 관철되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다만 가을과 겨울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한편 야당의 홍준표 대표는 보수세력을 응집시키고자 하지만 상황이 쉽게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방선거의 결과에 대해서 6월과 7월에 상당한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으로 내 몰릴 가능성이 높다. 국민의 당의 안철수 대표는 1월에 상당한 번뇌와 고민 끝에 2월부터 자기 가치실현으로 동료들과의 파열음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5월의 파열음을 극복하면 6월에는 소기의 성과를 낼 것이다. 바른 정당의 유승민 대표는 1958년 1월 7일(정유년 계축월 갑신일)에 태어났다. 유 대표는 내년에는 자기 영역을 확대하는 기세로 상당한 약진을 할 가능성이 높다. 단 5월은 본인의 의사와 상대방의 의사가 충돌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은 내년 4월에 측근으로 인하여 배신감과 아픔을 경험할 기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한해이다. 2018년 무술년은 지방분권형 국가로의 헌법개정이 이루어져 대한민국이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동반되고 2019년 기해년의 역동적인 출발을 기약하는 한해로 미래를 준비하고 대한민국의 다양한 세력의 응집을 기약해 본다. 인문명리학자 겸 칼럼니스트 전 안동정보대학 공무원양성과 초빙교수 저서 : 대통령의 천기누설, 대통령의 운명
  • 박근혜, 구속 만기 앞두고 일본 역사소설 ‘대망’ 심취

    박근혜, 구속 만기 앞두고 일본 역사소설 ‘대망’ 심취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 만기를 앞두고 일본 역사소설 ‘대망’을 열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12일 교정당국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재판이 열리지 않는 때 10.6m² 크기의 독방에서 주로 ‘대망’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망’은 일본의 3대 영웅으로 꼽히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전국시대 통일기 인물들을 그려낸 소설이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00년 동안 일본 전국시대를 끝내고 에도막부 시대를 개막한 일본의 영웅으로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개인적인 비극과 모욕, 생사 고비를 견뎠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을 증명하며 인내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박 전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배한 뒤에도 도쿠가와의 이야기가 담긴 이 소설을 읽었다. 박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대망 속 도쿠가와의 삶에 본인의 처지를 투영하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외에도 박경리 선생의 ‘토지’, 이병주 선생의 ‘지리산’과 ‘산하’ 등 주로 역사 소설을 읽고 있다. 정치권 등에선 이 같은 박 전 대통령의 독서 성향이 출소 후 정치 일선에 복귀하려는 계획과 관련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최근 박 전 대통령은 ‘1심 재판이 끝난 후 적당한 시기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을 주변에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박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 추가 발부 여부는 이번주 내로 정해진다. 1심에서 피고인을 구속할 수 있는 기간을 기소 시점으로부터 최대 6개월로 규정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17일 구속기소됐고, 16일에서 17일로 넘어가는 자정이 구속 만기다. 재판부가 구속 연장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박 전 대통령은 석방되고,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된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日근대화 시발점이 17세기 에도시대라고…

    日근대화 시발점이 17세기 에도시대라고…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신상목 지음/뿌리와이파리/276쪽/1만 5000원외교관으로 16년 살았고, 우동가게 주인으로 5년 살고 있는 저자가 도발적인 화두를 던진다. 흔히 우리는, 19세기 중반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근대화에 있어서 일본에 뒤처진 것으로 여기는데 그런 인식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를 앞지른 것은 더 오래됐는데, 16세기 말 기틀을 닦기 시작한 에도시대(1603~1867년)부터 잰걸음이었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 교과서는 에도시대의 일본을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또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과제 앞에서 중국과 조선을 제치고 일본이 최우등생이 된 원동력을 에도시대에서 찾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며 이 시기가 서구의 르네상스, 대항해 시대에 버금가는 전환의 시대이고 축적의 시대라고 치켜세운다. 저자에 따르면 에도시대의 요체는 도시 인프라 구축을 다이묘(지방영주)들에게 맡겼던 천하보청(天下普請)과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해 도입한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다. 천하보청은 서구를 뛰어넘는 근대 도시를 가능하게 했고 참근교대제는 수십만의 다이묘 일행이 에도를 오가게 하며 에도를 거대한 소비 시장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전국으로 퍼뜨리는 낙수 효과를 일으켰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민속사에 가까운 생활문화사적인 관점으로 에도시대를 들여다본다는 데 있다. 예컨대 저자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소바집을 모티브 삼아 이 시기를 시뮬레이션한다. 도시에 소바집이 있으려면 깨끗한 물과 신선한 재료를 써야 하기 때문에 치수 시설과 상업 해운망이 발달했을 것이라고 설명하며 또 소바집이 번창하며 뒤따르는 관광객 증가, 건강식 인기, 남녀 교제 풍습 변화, 금전 거래 정착, 금융 서비스 발달, 회계 등 상업 종사자 증가, 프랜차이즈 론칭, 광고 도입 등의 파생 효과들을 언급하는 과정이 마치 도시 건설 게임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책을 읽다 보면 에도시대가 있게 한 요인 중 하나로 임진왜란을 언급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허허벌판이었던 에도로 쫓겨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당대 절대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한 사이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에도 개척에 매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 6·25전쟁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자는 고래로 문물을 전수해준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일본에 대한 역사적인 트라우마에서 허우적대고 있다고 꼬집겠지만 말이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드라마 ‘임진왜란 1592’ 영화 ‘귀선’으로 재탄생

    드라마 ‘임진왜란 1592’ 영화 ‘귀선’으로 재탄생

    지난해 9월 방송돼 인기를 끈 국내 최초 팩추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가 해양 블록버스터 영화 ‘귀선’(鬼船)으로 재탄생한다. ‘임진왜란 1592’의 극본과 연출을 맡았던 김한솔 PD가 같은 소재로 영화에 도전한다.김 PD는 25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임진왜란 1592’와 소재는 같지만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 줄 것”이라며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거북선 전함의 전투 장면과 그 위력을 장대하게 그려 낼 생각”이라고 밝혔다. KBS 교양국이 제작한 5부작 ‘임진왜란 1592’는 최고 9%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다큐멘터리 관련 장르로서는 이례적인 관심을 받았다. 팩추얼 드라마는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각본과 연출에 의해 재현하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일종의 유사 다큐멘터리를 말한다. 영화 ‘귀선’은 KBS의 자회사인 몬스터유니온과 영화사 트리니티가 180억원가량의 제작비를 투입해 만들 계획이다. 내년 초 촬영을 시작해 이르면 내년 말 극장 개봉이 목표다. ‘귀선’의 제작 소식이 알려지자 비슷한 소재로 관객 1700만명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 최다 흥행 기록을 세운 ‘명량’(2014)과 비교되고 있다. 김 PD는 “신경이 안 쓰일 순 없다”면서도 “‘명량’이 이순신 개인의 고뇌에 초점을 맞췄다면 ‘귀선’은 민초들의 애환과 거북선 전투 장면에 초점을 맞춰 차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까지 거북선 전투 장면을 제대로 보여 준 영화는 없었다”면서 “역사적 고증에 입각해 실감나는 해상 전투 장면과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민초들의 모습도 그려 낼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귀선’은 이순신 중심에서 벗어나 거북선 돌격장과 민초의 삶을 대변하는 백성까지 3명을 중심인물로 내세울 예정이다. 조선을 침공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에는 ‘임진왜란 1592’에서 같은 역을 맡아 화제를 모았던 배우 김응수가 확정됐다. 이와 관련, 김 PD는 영화 제목에 ‘거북 귀’(龜) 대신 ‘귀신 귀’(鬼)를 쓰며 중의적인 주제 의식을 담으려 한다고 부연했다. 그는 “거북선은 왜적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귀신(鬼) 같은 배로 보였을 것이며 반대로 민초들에게는 전투를 마치고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배 귀선(歸船)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이경형 칼럼] “트럼프는 솔직한 대화를 좋아해”

    [이경형 칼럼] “트럼프는 솔직한 대화를 좋아해”

    일본 시모노세키항에서 바라보는 대한해협은 잿빛이었다. 한?일 관계사의 빈번한 교류를 말해 주고 있는 시모노세키항의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 앞에 섰다. 400명이 넘는 조선통신사의 장대한 행렬이 객관인 아카마 신궁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떠오른다.여기서 200여m 떨어진 언덕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토 히로부미가 청의 이홍장에게서 항복문서를 받는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서명 현장을 재현한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19세기 말 조선은 청, 러시아, 일본이 노리는 먹잇감이었다. 지난주 관훈클럽 한?일역사기행에 참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정유재란(1592~1598) 때 20만 병력을 집결시켜 출병한 북규슈 나고야(名護屋)성도 답사했다. 국가 생존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과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판독하는 능력에 달렸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정상회담을 앞둔 미국 내 기류는 무겁다. 북한에 억류됐다가 혼수상태로 석방돼 귀국한 미국 대학생 웜비어가 사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잔혹한 북한정권’이라고 규탄했고, 미 조야도 북한을 악마로 보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가 워싱턴에서 언급한 일련의 발언도 파문이 적지 않다. 한·미 양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같지만 방법론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문 대통령의 남북대화 의지는 트럼프 행정부와는 다르다. 북한과의 대화 전제 조건으로 미국은 ‘비핵화’를 들고 있지만 한국은 ‘핵·미사일 중단’을 내걸고 있다. 문 교수는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한·미 연합훈련과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축소할 수 있다고 한발 더 나갔다. 또 “사드 때문에 한·미 동맹이 깨진다면 그게 무슨 동맹이냐”고도 했다. ‘문정인 발언’은 워싱턴 당국에 ‘문재인표 대외정책’에 관한 백신 주사를 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 효과는 불투명하다. 사실 트럼프도 대북 발언에 관한 한 ‘선제 타격’에서부터 ‘영광스럽게 만날 것’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폭이 넓다. 이명박?박근혜 전 정권과는 결이 다른 문재인표 대북정책은 남북한 문제의 주도적 역할을 나름대로 부각시키고 있다. 북핵 문제를 푸는 방법과 옵션이 미국과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다만 지금은 대북 압박·제재 국면이 강조되는 시점이어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최근 국제무대에서 보여 준 그의 외교 스타일은 독불장군에다 예측불허다. 지난달 25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서는 동맹국들이 국방비를 적게 낸다고 면전에서 야단을 쳤다. 이어 이탈리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정상회의에서는 파리기후변화협정의 이행 약속을 거부했다. 가치동맹보다는 미국 우선주의와 비즈니스 협상으로 돈을 먼저 따졌다. 한·미 간 회담 테이블에서도 사드 문제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를 두고 불시에 질문을 던지고 화를 벌컥 낼지도 모른다. 상대방에게 충격을 주어 자신에게 유리한 대답을 유도해 내는 노련한 협상꾼의 기질을 발휘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피플 파워에 의해 출범한 신정부의 당당함을 견지해야 한다. 굳건한 한·미 동맹을 재확인하는 등 큰 틀에서 양국 정상 간 합의를 도출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인 현안은 양국 외교장관 등 관계 장관 후속 회담에서 논의하도록 위임하면 된다. 일본 정치외교학회의 대표적인 석학인 이오키베 마코토 구마모토현립대 이사장은 후쿠오카 관훈클럽 세미나에서 “트럼프와 얘기할 때는 (외교적 언사보다는) 리얼한 얘기를 솔직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사게 될 것”이라고 권고했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인간적인 신뢰까지 확보한다면 큰 성과를 얻는 것이다.
  • 진정한 컬렉터라면 딱 ‘한 점’만 가진다

    진정한 컬렉터라면 딱 ‘한 점’만 가진다

    30년간 조선의 미(美)에 미쳐 조선 도자기를 예찬해 온 컬렉터 전기열(65)씨. 부산의 한 중견기업 회장이자 사설 연구소인 한국조선백자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10여년 전 일본 교토에서 만난 일본인 학자에게 일본 국보인 ‘기자에몬 이도다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겠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기자에몬은 직경 15㎝, 높이 9㎝의 조선 사발로 16세기 무렵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찻잔으로 썼던 것으로 전해지는 기물(器物)이다. 당시 가치는 120억엔 정도로 평가됐다. 그러나 박물관장을 지낸 일본 학자는 서슴지 않고 1000억엔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한화로 1조원이다. “그 가격에 살 사람이 있겠느냐”고 되묻자 정색을 하며 일본의 컬렉터들은 살 것이라고 자신했다. 전 소장은 “머슴 밥그릇으로나 쓰던 조선사발에 대한 지독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조선 도자기의 미와 컬렉터 인생을 풀어낸 ‘조선 예술에 미치다’(아트북스)를 펴낸 전 소장은 20대 청년 시절부터 골동(骨董)인 고미술품을 수집해 온 이름난 컬렉터다. 그의 부친은 부산 온천장에서 요정을 운영했는데 목재 허행면 등 소문난 예술가들이 식객으로 거했다고 한다. 그가 그동안 수집에 투자한 돈은 수백억원. 한때 3000여점까지 모았던 수장품은 입소문을 타고 찾아온 컬렉터들과 옥션 등에서 팔려 현재는 수백점 정도가 개인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그의 수집품은 백자 달항아리, 백자철화 매죽문각병, 분청사기 덤벙문 소병, 사발 등 조선 도자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남관, 이응노, 김환기, 최영림, 이우환, 김창열 등 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도 50여점을 갖고 있다. 지난 3일 부산 해운대 인근의 개인 사무실. 전 소장이 ‘비마’(悲魔)라는 이름의 백자 사발(김해요)을 꺼내 들었다. 비마는 성불 전 경험하는 다섯 번째 마귀로, 세상 모든 게 슬프고 부질없게 느껴지는 ‘심마’(心魔)다. 그는 “이 사발을 볼 때면 곱게 빚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없는, 그저 손맛대로 빚어낸 무심함이 느껴진다”며 애착한다. 그런데 전 소장이 비마를 책상 위에 뒤집어 놓는 순간 별안간 그 사발이 달리 보였다. “영락없는 여성의 젖가슴같지 않나요”라는 그의 말대로 백색 태토에 옅은 노란색 기운을 띠는 사발의 뒤집어진 자태는 젖가슴 형상이었다.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선이 곱고 뚜렷한 사발에서 흙을 매만지는 도공의 탁월한 솜씨가 엿보인다. 그는 “가슴에 품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하고, 그냥 기약없이 쳐다만 보기도 한다”며 “조선 사발은 만지고, 보고, 느끼고, 즐겨야 비로소 그 진가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일본 학자들의 도자기 이론이 아닌 우리 고유의 미감으로, 나아가 컬렉터라면 자신만의 시각과 안목으로 미를 이해하고 판별해야 한다는 지론이다. 그에게 조선사발은 최첨단 과학의 유산이다. 전 소장은 “세계 최고의 사발 기술 종주국이 조선이었다”며 “일본 다이묘들이 조선 사발을 가리켜 일국(一國), 일성(一城)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말한 건 과장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한국의 컬렉터 문화는 태생적으로 일본, 특히 일제강점기와 깊이 연관돼 있다. 미술사학자인 김상엽 박사는 한국 근대 미술시장의 태동을 고려청자의 도굴 수난사에 빗댄다. 김 박사는 “청일전쟁 시기 일본 장사치들이 처음으로 고려도기 거래에 나섰으며 1906년 일본인 아키오가 도굴한 청자들을 경매한 게 국내 미술 경매의 시초”라고 말한다. 우리 근대 미술시장의 태동기가 일제강점기였고 이때 미술품 감식부터 전시기획, 매매상, 거간꾼 등 이전에 없던 직종과 산업이 탄생했다는 설명이다. “1930년대 경성의 인구는 40만명 남짓했고 1935년에도 45만명에 미치지 못했는데, 당시 경성에서 거의 매월 교환회 및 경매회가 열렸고 30개가 넘는 골동상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보면, 당시에 골동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김상엽의 ‘미술품 컬렉터들’ 56~57쪽) 김 박사는 우리의 ‘근대 컬렉터’로 민족지사 오세창, 친일파 박영철, 국내 첫 치과의사인 함석태, 친일파로 해방 후 수도경찰청장을 지내고 국무총리까지 된 장택상, 조선 왕실의 마지막 내시였던 이병직, 민족유산을 수호한 위대한 수장가로 평가받는 전형필 등을 꼽는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이 간송 전형필(1906∼1962)과 송은 이병직(1896∼1973)이다. 간송은 탁월한 안목으로 정평 난 컬렉터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평생 수집한 미술품은 1938년 국내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에 보존됐다. 상당수 작품이 국보급으로, 계미명 금동 삼존불 입상,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등이 대표적이다. 간송이 1935년 일본인 골동상으로부터 사들여 골동계의 전설이 된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당시 돈 2만원으로, 서울의 기와집 열 채 값에 달했다. 간송은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해 민족 교육에도 헌신하는 등 한국의 컬렉터 가운데 독보적인 민족문화 수호자로 꼽힌다.대한제국 마지막 내시 출신이자 구한말의 재력가였던 송은은 수장가뿐 아니라 서화가로 유명한 예술인이었다. 조선 유일의 미술품 경매회사인 경성미술구락부 경매회에서 실명 컬렉션으로 경매를 두 차례나 연 인물이다.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일연의 ‘삼국유사’(국보 306호)를 지켰고 전 재산을 고향의 양주중학교(현 의정부고등학교) 설립에 기부했다. 전 소장은 현대의 최고 컬렉터로 호암 이병철(1910~1987) 삼성그룹 창업주를 꼽는다. 이 회장의 수집품들을 모아 놓은 서울 리움미술관과 용인 호암미술관에는 국보 37건, 보물 115건이 소장돼 있다. 전 소장은 “리움과 호암의 2만여점에 달하는 컬렉션들을 보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안목이 높지 않으면 가치를 알수 없는 고미술품들이 수두룩하다”며 “그 점에서 이 회장은 미적 감각과 인문학적 시각이 탁월한 컬렉터였다”고 평가했다. 현재 활동 중인 국내 컬렉터 규모는 3000~5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 소장은 그러나 대다수가 예술품에 대한 안목이나 심미안을 갖고 있지 않은 ‘투자(투기)형 컬렉터’로 본다. 그에 따르면 국내 미술시장의 ‘큰손’으로 통하는 대형 컬렉터는 20~30명 정도로 압축된다. 이들 정도가 당대 예술품의 ‘수장 경로’로, 예술품의 가치 지표가 된다고 본다. 그는 “컬렉터로 살아온 30년 동안 안목과 역사성, 미에 대한 사유와 관념을 갖춘 컬렉터는 국내에서는 1~2명이 떠오를 뿐”이라며 “안목이 없는 사람에게 골동 귀신이 붙는 것만큼 고약한 경우가 없다”고 말했다. “저 역시 골동 귀신에 홀리고 절박한 심정으로 기물을 찾아 나서죠. 진정한 컬렉터라면 딱 한 점만 소장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전에 충분한 눈으로 기물을 익혀야 하며, 눈앞에 영혼을 흔드는 일생일대의 기물이 나타날 때 혼신을 다하면 수집 인생은 완성될 것입니다. 두 점부터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거든요.” 그가 체험하고 깨닫게 된 컬렉터 인생의 노하우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꽃을 사랑한 日무사들…벚꽃놀이의 숨은 진실

    꽃을 사랑한 日무사들…벚꽃놀이의 숨은 진실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조홍민 옮김/글항아리/256쪽/1만 5000원159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라의 요시노 산에서 지방의 영주 격인 다이묘 이하 5000여명을 모아 놓고 ‘요시노 산 벚꽃놀이’를 연다. 명분이야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병사들의 기분전환을 내세웠지만 사실 자신과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 1598년에는 자신의 후계자 탄생을 명분으로 교토의 다이고 사에서 ‘다이고 벚꽃놀이’를 연다. 요시노 산은 지금도 일본 내 벚꽃 명소로 꼽히고, 다이고 벚꽃놀이는 이후 일본 벚꽃축제의 원형으로 자리잡게 된다. 새 책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은 이처럼 센코쿠와 에도 막부 시대를 주름잡았던 무장들과 식물의 관계를 독특한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 당대의 권력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하나같이 식물을 사랑했다. 이들의 식물에 대한 애정은 곧 가문의 문장으로 이어졌다.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은 제비꽃이 모티브였고, 오다는 모과를 문장으로 썼다. 도요토미 가문의 오동꽃 문장은 현 일본 총리실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다. 하급 무사들도 ‘승리의 풀’로 불리는 벗풀을 문장으로 쓰는 등 당시 식물은 여러 면에서 무인들과 영향을 주고받았다. 사실 식물학자가 쓴 책이니 그대로 읽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연의 이야기라 해도 정치인과 연관돼 있다면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를 액면 그대로 읽기란 무리다. 원예를 사랑한 무장들의 이야기라기보다 무장들이 원예에까지 정통했다는 인식의 단면이 느껴지니 말이다. 도요토미에서 비롯됐다는 벚꽃놀이 역시 비슷한 시각에서 읽힌다. 당대의 최고 권력자가 벚꽃놀이를 여는데 참여하지 않을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진나라의 환관 조고가 그랬듯, 설령 권력자에게 지록위마의 봉변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했을 터다. 식물을 좋아했던 도쿠가와는 에도 막부를 연 뒤 성 안에 전용 꽃밭을 마련하고 식물을 수집했다. 쇼군(將軍)의 취미는 그대로 아래로 이어졌다. 다이묘들은 꽃을 즐기는 자신의 ‘보스’를 위해 진귀한 식물을 재배한 뒤 이를 수확해 바쳤다. 혼돈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할 일이 없어진 무사들도 원예에 눈을 돌렸다. 특히 홋카이도에 펼쳐진 광활한 밭, 아오모리현 쓰가루 지역의 너른 사과밭, 차의 산지로 이름 난 시즈오카의 아름다운 차밭 풍경 등을 일군 이들이 무사들이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무사들은 여러 꽃을 키우며 부수입을 얻기도 했다. 나팔꽃 재배가 유행할 당시엔 이들이 개량한 변종 나팔꽃이 1000여종에 이르렀다고 한다. 책은 이 밖에도 성을 쌓거나 싸움을 하는 데 식물을 활용했던 무사들의 다양한 면모를 전하고 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태양의 후예’ 대상 “인류적 가치 아름답게 구현..사전제작 성공사례”

    ‘태양의 후예’ 대상 “인류적 가치 아름답게 구현..사전제작 성공사례”

    ‘태양의 후예’가 2017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20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2017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시상식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태양의 후예’가 완성도 높은 대본과 출연자들의 열연을 통해 평화와 헌신이라는 인류적 가치를 아름답게 구현했고, 사전제작 방식의 성공 사례로서 국내외 방송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KBS는 2014년 ‘의궤, 8일간의 축제’로, 2014년과 2015년에는 각각 ‘시대의 작창-판소리’와 ‘넥스트 휴먼’으로 대상을 수상한데 이어 2017년에는 ‘태양의 후예가’ 대상을 받음으로써 4년 연속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에서 대상을 거머쥐게 됐다. 총 16부작으로 방송된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최고시청률 38.8%를 기록하며 신드롬적 인기를 얻었다. tvN ‘도깨비’는 창의발전 TV부문에서, tvN ‘시그널’은 사회문화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JTBC ‘비정상회담’은 다양성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배철수는 27년간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진행하면서 라디오를 통한 대중음악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공로상을, 배우 김응수는 ‘임진왜란 1592’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아 전쟁의 원인과 이면을 생생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로 방송출연자상을 수상했다. <이하 2017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수상작(자) 명단> ▲대상=KBS2 ‘태양의 후예’▲최우수상=KNN ‘배리어프리 오페라’▲우수상 창의발전 부문=tvN ‘도깨비’·EBS ‘다큐프라임-녹색동물’·울산MBC ‘소음, 그 달콤한 속삭임’▲우수상 사회문화 부문=tvN ‘시그널’·SBS ‘수저와 사다리’·부산MBC ‘사라진 역사, 귀무덤’▲우수상 지역발전 부문=KBS ‘먼바당 거믄땅’·현대HCN부산방송 ‘시간이 빚어낸 부산의 맛’▲우수상 한류 부문=MBC ‘W’·SBS ‘판타스틱 듀오’▲우수상 다양성 부문=JTBC ‘비정상회담’·에스엠브이 ‘UHD 천하우림기행’▲공로상=배철수▲바른방송언어상=KBS ‘우리말겨루기’▲방송기술상=SBS 뉴미디어개발팀▲방송작가상=강은경▲제작역량우수상=MTN·MBC스포츠플러스▲우수외주제작상=아요디아▲방송출연자상=김응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관군이 외면한 서인의 ‘행동대장’… 칠백의총에 서린 기개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관군이 외면한 서인의 ‘행동대장’… 칠백의총에 서린 기개

    우리가 아는 중봉 조헌(1544~1592)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장이다. 금산 칠백의총에 남은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重峰 趙先生 一軍 殉義碑)에 새겨진 “죽을지언정 국난이 닥쳤는데도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는 사실상의 유언처럼 그의 죽음은 극적이다. 그럴수록 붕당정치가 본격화하던 시절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따른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동서분당 이후 서인의 ‘사상적 행동대장’ 역할을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조선왕조실록에는 조헌이 수없는 상소로 조정을 당혹하게 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의 상소문에는 격렬한 표현의 강경한 비판이 담기기 일쑤였다. 율곡조차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뜻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재능은 미치지 못하며 고집이 극심하여 시세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했다. 조헌의 또 다른 아호는 ‘율곡 정신을 계승한다’는 후율(後栗)이다. 이런 스승조차 제자의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이 마땅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헌은 선조 22년(1589)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신을 보내오자 강경 대응을 촉구하는 ‘청절왜사소’(請絶倭使疏)를 올렸다. 상소는 삼소(三疏)로 이어졌고,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는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가 더해졌다. 군제를 개혁하고 일본과 외교를 끊으라는 상소도 거듭했다. 여기에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거든 이 도끼로 목을 치라는 뜻의 지부상소(持斧上疏)가 이어지자 선조는 같은 해 5월 조헌을 함경도 길주로 유배를 보낸다. 그런데 조헌은 유배가 7개월 만에 풀려 돌아오는 길에 대신들을 꾸짖는 소를 올린다. 선조는 “조신들을 다 탄핵하고 몇 사람만 찬양하면서 직언(直言)이라 하니 웃을 일”이라며 노했다. 그러면서 “조헌은 간귀(奸鬼)”라면서 “아직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조정을 경멸하여 더욱 거리낌 없이 날뛰니, 다시 마천령을 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다시 귀양을 갈 것이라는 뜻이다.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던 동인에게도 귀찮기만 한 존재였을 것이다. 임란 이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칠백의총에서 마주친 부자(父子) 때문이다. 마흔 안팎의 아버지와 초등학교 5~6학년으로 보이는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봉분 앞에 세워진 ‘조헌 선생 일군 순의비’의 복제비 내용을 읽으면서 분개했다. 조헌 의병이 관군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방해에 시달렸다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것 봐,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정부가 문제야”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조헌의 생애를 돌아보면 ‘조선생 일군’과 관군은 어차피 협력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헌을 인정하지 않았던 조정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관군 지휘관이 중봉 휘하에서 싸울 마음은 애초부터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옳다고 믿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저지르고, 집착에 가까울 만큼 매달리는 조헌의 품성은 정치적 반대파의 부정적 평가와 순탄치 못한 벼슬길을 자초했다. 그러나 이런 저돌적인 성격이 또한 ‘금산의 감동’을 만들어 치욕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가 한 가닥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했다. 조헌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의 역사를 따라가는 여행은 아무래도 충남 금산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칠백의총은 조헌과 영규가 의병과 의승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자리에 조성됐다. 불교계에서는 800명 의승이 더 가세해 모두 1500명이었는데, 유림이 주도한 척불(斥佛)의 역사가 의승군의 자취를 감춰 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조헌의 제자들은 금산 싸움이 있은 나흘 뒤 칠백의사의 유해를 한 무덤에 모셨다. 선조 36년(1603)과 인조 25년(1647) 각각 순의비와 사당을 세웠고, 현종은 1663년 이 사당에 종용사(從容祠)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의총을 파헤치고 순의비는 폭파했으며, 종용사는 허물어 버렸으니 치욕이 되풀이된 꼴이었다. 칠백의총의 정문에 해당하는 의총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비각이 나타난다. 1940년 금산경찰서장 이시카와 미치오가 산산조각 냈던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다. 당시 주민들은 몰래 비석 조각들을 땅에 파묻어 보관했고, 1971년 조각을 파내어 비석을 다시 세웠다. 2009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다시 해체해 정밀하게 복원하고 몸돌에서 분리된 상태였던 머릿돌도 이어 붙였다. 일제의 비석 파괴는 조직적이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1943년 경무국장에게 보낸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은 전북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비를 철거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다. ‘황산대첩비가 왜구의 한반도 침입 역사를 보여 주는 것은 자랑스럽지만, 이성계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내용이다. 앞서 ‘조선생 일군 순의비’가 폭파된 것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조헌이 칠백의총이 아닌 충북 옥천에 묻혔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 않겠다. 조헌의 동생 조범은 금산에서 조헌의 시신을 거두어 형이 낙향해 살던 옥천 안읍에 장사 지냈고, 인조 14년(1636) 멀지 않은 지금의 안남면으로 옮겼다. 금강을 막은 대청호가 지척으로 가슴으로 파고드는 공기에서 티끌 하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청정하다. 무덤 아래 사당인 표충사(表忠祠)와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무덤으로 올라가려면 신도비를 모신 비각이 먼저 나타난다. 효종 7년(1656) 세워진 것으로 김상헌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 김상용이 비문 머리글을 전서로 썼다. 청음 김상헌이라면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대표 인물로 절개와 지조의 상징적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선원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스스로 순절한 인물이다. 그런데 선원은 1637년 세상을 떠났으니 신도비 건립이 호란으로 늦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동춘당 송준길 역시 두 사람과 같은 서인의 영수급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이다. 조헌의 고향은 경기도 김포다. 김포시 감정동의 옛집 터에는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가 세워졌고 그를 기리는 우저서원(牛渚書院)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옥천이 조헌을 상징하는 고장이 된 것은 보은현감을 지내다 물러난 그가 한양이나 고향 김포로 가지 않고 이웃한 옥천으로 낙향했기 때문이다. 먼저 옥천에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지었으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부방이다. 그 흔적은 후율당(後栗堂)으로 남았다. 대전과 옥천을 잇는 국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지당(二止堂) 역시 조헌이 주도해 인재를 배출한 뜻깊은 장소다. 금강의 지류인 소옥천이 휘감아 도는 이지당 주변은 그야말로 선경을 방불케 한다. 처음에는 마을 이름을 따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 했으나 송시열이 ‘시전’(詩傳)의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문구에서 이지당이라는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큰 산을 우러르며 그 뜻을 따르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헌은 임진왜란 직후 옥천에서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의승장 영규와 만나 뜻을 모은 곳도 옥천 가산사(佳山寺)다. 조헌의 무덤에서 멀지 않은 옥천 안내면 채운산 기슭에 있는 가산사의 영당에는 지금도 조헌과 기허당 영규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조헌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에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장소가 충북 청주다. ‘조헌 전장기적비’(趙憲 戰場記蹟碑)는 시내 한복판의 중앙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숙종 36년(1710) 청주 서문동에 세웠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옮겼다고 한다. 금산전투에 앞서 조헌 의병과 영규 의승군, 화천당 박춘무의 향토 의병이 합세해 왜군에 빼앗겼던 청주성을 탈환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이 싸움을 이제는 ‘청주대첩’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싶다. 금산전투도 패배한 싸움이라고 할 수 없다. 왕조실록에는 금산전투 직후 ‘금산에 주둔했던 적이 밤에 도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비록 조헌 등의 군사가 순절하기는 했지만, 죽거나 다친 왜군이 매우 많았고 관군이 이를 틈타 공격할까 두려워해 도망가니 호남이 다시 완전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러니 금산 싸움 역시 결과적으로는 ‘이긴 싸움’으로 평가를 달리해야 할 것이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日 역사를 바꾼 주당들의 술버릇

    日 역사를 바꾼 주당들의 술버릇

    술로 풀어보는 일본사/와카모리 타로 지음/이세연 외 2명 옮김/이상/444쪽/1만 8000원모주꾼이든 아니든, 술에 관한 한 누구나 저마다의 ‘역사’를 하나둘쯤 갖고 있게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특히 유명인들에게서 술과 관련된 다양한 일화들이 전해 온다. 이런 현상이 일본이라고 다르랴. ‘사케의 나라’ 일본 역시 술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게 분명하다. 새 책 ‘술로 풀어보는 일본사’는 바로 이런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일본의 술꾼과 취흥에 대해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차분하게 살피고 있다. 저자 역시 술을 마다하는 이가 아니다. 당연히 책의 전반적인 흐름 또한 술에 호의적이다. 센고쿠 시대의 패자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적장의 수급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을 만큼 술을 즐겼다. 그는 걸핏하면 자신의 주변인들에게도 술을 강권했다. 술에 약한 자신의 오른팔 미쓰히데에게 “칼을 받겠나, 술잔을 받겠나”라며 윽박지를 정도였다. 결국 둘 사이는 멀어졌고, 훗날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최후를 맞게 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주꾼은 아니었지만 술을 멀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술을 이용했던 축에 속했다. 그가 머물던 오사카 성의 법규인 ‘벽서’에 ‘술은 근기(根器)에 따른다’는 조항이 있다. 마실 수 있는 자는 그에 맞춰 마시되 못 마시는 자가 굳이 인간관계상 술을 마셔 취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오늘에도 적용될 만한 조항이지 싶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몹시 술에 엄했다. 이런 도쿠가와를 두고 저자는 “술의 진정한 맛을 느끼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며 혀를 차고 있다. 메이지 일왕은 대를 이은 술꾼으로 유명하다. 그의 선친 고메이 일왕은 매일 밤 술을 마셨는데, 그때마다 합석했던 이가 메이지 일왕의 어머니 나카야마 요시코였다. 우리에게 귀 익은 이토 히로부미도 술을 즐겼다. 메이지 당시 거물 중 거물이었던 그는 술과 유흥에서도 걸출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술과 함께 천하의 정세를 입 밖에 내는 버릇이 있는데다, 여성에 대한 폄하가 심해 그에 대한 호불호는 꽤 엇갈렸다고 한다. 풍족한 시기엔 퇴폐가 극성을 부리기 마련이다. 특히 ‘에도의 향락시대’라 일컬어지는 1804~1830년에 특이한 일들이 많았다. 술 많이 마시기 대회 같은 황당한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반면 퇴폐가 새로운 문화를 낳기도 했다. 덴푸라(튀김)와 가바야키(양념 바른 장어 따위를 구운 요리), 덮밥류, 초밥 등이 술과 함께 태어나 유행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In&Out] 헌법재판소의 위엄/신평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In&Out] 헌법재판소의 위엄/신평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본어에 ‘마보로시’(幻)라는 단어가 있다. 한자로 유추한 우리말의 환상이나 환영이라는 뜻보다는 ‘꿈’이라는 의미를 가리킬 때가 있다. 그것도 ‘간절히 바라는 꿈’의 의미가 내포된다. 우리에게는 철천지원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에서는 마보로시를 좇아 삶을 살아가다 종내 이를 실현시킨 영웅으로 추앙된다. 제2공화국 당시 법까지 만들어졌으나 실제 설립되지는 못했던 헌법재판소가 한국의 법학자들에게는 ‘마보로시’였다. 이런 연유로 1987년 6월 항쟁 끝에 지금의 헌법을 만들면서 자연스레 헌법 속에 헌법재판소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 이후 우리 헌재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헌법 질서를 수호하는 숱한 업적을 쌓았으며 국외에서도 큰 명성을 얻었다. 일본의 공법학자들은 이슬람교도들이 일생에 한 번 이상 메카를 순례하듯이 우리 헌재를 반드시 찾는다. 최근의 일본 헌법 개정 논의에서는 자기들도 헌법재판소 제도를 마련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의결하면서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진다. 그중에서도 헌재 재판관들이 한 사람 빼고는 전부 보수적인 성향이라고 하는데, 과연 6명 이상의 재판관이 찬성해 탄핵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가 주류를 이룬다. 헌재 재판관들은 한국의 법조인 중에서 법적 식견이 가장 뛰어나고, 헌법의 정신을 재판으로 실현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해 선발된 사람들이다. 우리 공동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애국심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압도적인 다수의 국민이 대통령 탄핵을 원하고 있는 현실을 누구보다 엄중하게 받아들일 것으로 본다. 다음으로 헌재가 과연 얼마나 신속하게 결정을 내릴까 하는 질문이 많이 나온다. 박한철 헌재소장의 임기가 내년 1월 31일에 만료되고 이정미 재판관이 3월 13일 퇴임한다. 탄핵 심판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재판관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 이 재판관 퇴임 이후엔 어떻게 할 것인가. 원래 있어야 할 9인이 아니라 7인으로 재판관 수가 줄어든 상태이니 탄핵 결정이 어려워질 것이 아니냐 하는 걱정이다. 재판관의 결원으로 헌재의 인용 결정이 지장을 받는 것을 ‘부당한 보수화의 함정에 빠진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박 소장의 후임자를 임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권한 대행자의 직무범위는 기본적으로 ‘현상 유지’에 그쳐야 한다는 점에서 그가 최고 헌법기관의 장인 헌재소장을 임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면 선임자인 이 재판관이 헌재소장 대행자가 되는데, 그가 3월에 퇴임하는 경우 그 후임자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명하게 된다. 그 사람을 황 권한대행이 임명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2월부터는 8명의 재판관이 심리를 하게 될 것이다. 탄핵 심판 절차가 길어질 것이라는 예측에 대해 나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다. 자칫하면 격한 풍랑 속에서 국가가 절단 나게 생겼는데 어찌 헌재 재판관들이 태연하고 무심하게 심판 절차를 진행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높은 식견이나 공동체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미루어 볼 때 늦어도 이 재판관의 퇴임 전에 결론을 낼 것이 아닌가 한다. 대통령 탄핵으로 빚어지고 있는 엄청난 현상들을 바라보며, 그래도 우리가 힘들여 키워 온 이 나라가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함께 가슴에 품었으면 한다. 헌재는 제2공화국 이후 긴 세월을 돌아 우리가 얻은 ‘마보로시’이자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기관이다. 국내외적으로 큰 아우라를 그리는 헌재의 빛나는 위엄을 믿어 보자. 헌재는 결코 우리의 소망과 기대 그리고 민주공화국의 이념과 국민주권주의를 배반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 [열린세상] 도요쿠니 신사 이야기/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열린세상] 도요쿠니 신사 이야기/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420여년 전에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유재란 와중인 1598년 9월 18일 사망했다. 그러자 조선에 나가 있던 왜군들에게 철군령이 내려졌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에게 뇌물을 주면서 퇴로를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분(李芬·1566~1619)이 쓴 ‘이충무공 행록’에 따르면 진린이 왜군을 보내 주자고 요청하자 이순신은 “이 원수는 결코 놓아 보낼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했다. 진린이 명 황제가 내린 장검을 가지고 위협했지만 이순신은 “한 번 죽는 것은 아까워할 것이 없다”라고 끝까지 거절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 전날 밤 자정 ‘이충무공 행록’은 이순신이 배 위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이 적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라고 빌었는데, 그때 큰 별이 문득 바닷속으로 떨어졌다고 전한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지만 이 나라 바다를 지키는 해신(海神)이 됐다. 도요토미의 사인은 성병의 일종인 뇌매독, 대장암, 이질 등으로 다양한데 심지어 명나라 심유경(沈惟敬)에 의한 독살설도 있다. 도요토미의 부하들은 1599년 4월 13일 장례식을 거행한 후 그를 교토의 방광사(方廣寺) 뒷산에 안장했다. 그리고 도요쿠니(豊國) 신사를 세우고 도요토미를 도요쿠니대명신(豊國大命神)으로 떠받들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은 도요토미를 중심으로 한 일본 서부 세력이었다. 반면 동부 세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도쿠가와는 1600년 세키가하라(關原) 전투에서 도요토미 세력을 꺾고 에도(江戶·도쿄) 막부(幕府)시대를 열었다. 그는 도요토미의 본거지였던 오사카에 두 차례 출진해 도요토미가(家)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도요토미를 신으로 섬기는 도요쿠니 신사를 철폐하고 도요쿠니대명신이란 호칭 사용도 금지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몰락한 도요토미 잔존 세력은 하급 무사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 갔다. 일본이 자랑하는 메이지(明治)유신이란 이렇게 몰락한 도요토미의 후예들이 일왕 메이지를 추대한 쿠데타를 뜻한다. 일본 서부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번 출신의 무사들이 이른바 ‘삿조(薩長)동맹’(1866)을 맺고 막부의 권력을 일왕에게 넘기라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명분으로 일으킨 쿠데타였다. 이렇게 이른바 대정(大政)을 넘겨받은 메이지는 1868년 오사카에 행차해 도요토미에 대해 “황위(皇威)를 해외에 떨쳤음에도 수백 년간 묻혀 있었으니 한심하도다”라면서 신사 재건을 선포했다. ‘황위를 해외에 떨쳤다’는 것은 물론 조선을 침략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방광사 대불전 터에 도요쿠니 신사가 재건됐는데, 때마침 도요토미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가 발견됐다면서 그 자리에 거대한 오륜탑도 축조했다. 그리고 1898년 도요토미 사망 300년을 기리는 거대한 제사를 거행했는데, 여기에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군부 실세 야마가타 아리도모(山縣有朋)가 참석했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극우 낭인조직 현양사(玄洋社)의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도요토미가 완성하지 못했던 조선 정벌 완수를 다짐했고, 불과 22년 만인 1910년 이 다짐은 현실이 돼 대한제국은 일제에 강점됐다. 1945년 8월 15일 이들은 다시 쫓겨 갔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 재점령 기도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푼돈 10억엔으로 위안부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면서 사과 편지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아베 신조의 발언에 이들의 속성이 잘 담겨 있다. 여기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이 조속히 체결돼야 한다”는 해상자위대 다케이 도모히사 막료장의 발언은 ‘군사’라는 이름을 우선 걸어 놓으려는 기도다. 도요토미의 후예들이 300년 이상을 기다려 이 땅을 재점령한 것에 비교하면 지난 71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니라고 이들은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일본 극우파는 변하지 않았는데, 이 문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혼란에서 보듯이 우리만 변했다. 그래서 이순신의 혼령이 더욱 그리워지는지도 모른다.
  • 임진왜란 1592 김응수, “원숭이” 한마디에 앞구르기 수모 당해… ‘열연 빛났다’

    임진왜란 1592 김응수, “원숭이” 한마디에 앞구르기 수모 당해… ‘열연 빛났다’

    ‘임진왜란 1592’ 김응수가 원숭이로 불리는 수모를 당했다. 김응수는 ‘임진왜란 1592’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실감나게 연기하며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 9일 방송된 ‘임진왜란 1592’ 3회에서는 명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김응수 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특히 그는 자신을 원숭이라 부르는 오다 노부나가(손종학)의 부름에 원숭이 흉내를 내며 앞구르기까지 하는 열연을 펼쳐 눈길을 사로잡았다. 김응수는 ‘임진왜란 1592’에서 외모를 완벽하게 변신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 원서 역사책을 읽는 등 어학 공부에도 각고의 노력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KBS ‘임진왜란 1592’ 방송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임진왜란1592’ 김응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자체… 예능 텃밭 속 활약 ‘시청률 2위’

    ‘임진왜란1592’ 김응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자체… 예능 텃밭 속 활약 ‘시청률 2위’

    배우 김응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분한 드라마 ‘임진왜란1592’가 시청률 2위를 차지했다. 10일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9일 방송된 KBS1 팩츄얼드라마 ‘임진왜란1592’ 3회는 전국기준 7.6%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 8일 방송된 2회가 기록한 8.1%에 비해 0.5%P 하락한 수치지만 동시간대 2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동시간대 방송된 SBS ‘정글의 법칙’ 몽골 편이 11.4%로 1위를 차지했으며 MBC ‘듀엣가요제’는 5.2%로 3위를, KBS2 ‘어서옵SHOW’는 2.9%로 뒤를 이었다. 한편 이날 방송에서는 궁극적으로 명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김응수 분)의 삶을 재조명해 화제를 모았다. 사진=KBS1 ‘임진왜란1592’ 방송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임진왜란1592’ 김응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완벽 소화 ‘소름 돋는 명연기’

    ‘임진왜란1592’ 김응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완벽 소화 ‘소름 돋는 명연기’

    배우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완벽 변신했다. 9일 KBS1 팩추얼 드라마 ‘임진왜란1592’에서는 ‘침략자의 탄생,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방송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룬 적은 이번이 처음으로, 제작진은 역사의 기록에 충실해 스토리를 재구성했다. 이날 ‘임진왜란1592’ 3부에서 김응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강렬하게 등장했다. 김응수는 비주얼 뿐만 아니라 실제 일본인 같은 발음을 구사하며 리얼리티를 살렸다. 김응수는 역할을 위해 일본어 원서 역사책을 읽는 등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야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일본 주군이 된 모습부터 그려졌다. 임진왜란 6년 전으로, 당시 그는 명나라 정복에 열중해 있었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열등감도 보였다. 사진=KBS ‘임진왜란1592’ 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임진왜란1592 PD 김한솔 “철저한 팩트 검증..대본 수정만 228번 했다”

    임진왜란1592 PD 김한솔 “철저한 팩트 검증..대본 수정만 228번 했다”

    ‘임진왜란1592’ 김한솔 PD가 완벽한 대본을 위해 기울인 노력을 전했다. KBS1TV 팩츄얼드라마 ‘임진왜란 1592’ 김한솔 PD가 “대본 수정을 228번 했다”며 드라마 제작과정의 노고를 털어놨다. ‘임진왜란1592’ 김한솔 PD는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전경련타워동에서 진행된 ‘임진왜란 1592’(극본 김한솔 김정애, 연출 김한솔 박성주) 제작진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임진왜란1592’의 극본과 연출을 맡은 김한솔 PD는 극본을 직접 쓴 과정을 설명하며 “컴퓨터 폴더를 확인해보니 대본 파일이 228개가 나왔고 수정을 228번 했다”며 “그만큼 팩트 체크를 여러 번 했다. 팩트를 발굴하고 전문가들의 고증을 받고 스토리를 짜고 다시 체크를 하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전했다. 김한솔 PD는 “하루동안 믹스커피 28잔을 먹었다”며 쉽지 않았던 극본 탈고 과정을 털어놨다. 5부작인 ‘임진왜란1592’는 지난 3일 1편을 방송했으며 8일 목요일 오후 10시 2편 ‘조선의 바다에는 그가 있었다 하’ 방송을 앞두고 있다. 이어 9일 오후 10시 3편 ‘침략자의 탄생, 도요토미 히데요시’, 22일 오후 10시 4편 ‘삼국대전, 평양성’, 23일 오후 10시 5편 ‘검은 바다, 노량’이 방송된다. 사진=KBS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임진왜란 1592’ 측 “2편 ‘한산대첩’에 제작비 많이 들어”

    ‘임진왜란 1592’ 측 “2편 ‘한산대첩’에 제작비 많이 들어”

    ‘임진왜란 1592’ 2편에서는 한산대첩으로 채워진다. 8일 방송되는 KBS1 ‘임진왜란 1592’ 2편에서는 좁은 수로 견내량에서 돌격, 육박전을 펼치는 거북선의 거침없는 활약상이 그려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판옥선 부대의 대규모 학익진이 펼쳐지면서 조선 수군의 모든 화력을 한꺼번에 쏟아 부어 일본 수군을 궤멸 직전으로 몰고 가는 역대급 해상전투의 장관이 펼쳐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사실상 사형 선고를 내린 전투인 만큼 이는 방송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제작진 측은 “제작비의 대부분을 2편에 쏟아 부었다”고 말할 만큼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고 전했다. 이어 “한산대첩은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지만 조선 수군에 사상자가 발생했던 만큼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필사적인 사투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KBS와 중국 CCTV 합작으로 제작된 ‘임진왜란 1592’는 임진왜란 당시 한, 중, 일 삼국의 상황을 5부작 드라마로 재구성한 국내 최초 팩추얼 드라마로, 이날 오후 10시 2편이 방송된다. 임효진 인턴기자 3a5a7a6a@seoul.co.kr
  • ‘임진왜란1592’ 최수종 숙적 김응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애 첫 응급실행”

    ‘임진왜란1592’ 최수종 숙적 김응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애 첫 응급실행”

    ‘임진왜란1592’ 최수종 숙적인 김응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은 소감을 전했다. 배우 김응수는 1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여의도 IFC몰 CGV에서 열린 KBS 1TV 팩츄얼드라마 ‘임진왜란 1592’(극본 김한솔/연출 박성주 김한솔) 기자간담회에서 촬영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이날 김응수는 “너무 즐겁게 현장에서 촬영하다가 내가 너무 오버해서 응급실까지 실려갔다”며 “촬영하다 응급실에 실려 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고 언급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어 김응수는 “2편 엔딩에서 ‘세계를 정복하겠다. 내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고 하는데 갑자기 몸에 이상을 느꼈다. 근데 몸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스태프들 앞에서 할 수 없어 일단 3컷 만에 오케이 하고 새벽에 자는데 몸이 이상하고 헛구역질도 나더라. 그래서 아내를 깨워 직접 차를 몰고 병원 응급실로 갔다”고 전해 놀라움을 선사했다. 김응수는 ‘임진왜란 1592’에서 천민으로 태어나 일본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인 관백의 자리에 오른 일본의 역사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동아시아 최초, 최대의 삼국전쟁인 임진왜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았다. 한편 KBS와 중국 CCTV 합작으로 제작된 ‘임진왜란1592’는 임진왜란 당시 한, 중, 일 삼국의 상황을 5부작 드라마로 재구성한 국내 최초의 팩추얼 드라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임진왜란1592’ 최수종, 발랄한 점프샷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누구?’

    ‘임진왜란1592’ 최수종, 발랄한 점프샷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누구?’

    ‘임진왜란1592’ 최수종의 발랄한 점프샷이 눈길을 끌었다. 배우 최수종이 이순신으로 분하는 KBS1TV 드라마 ‘임진왜란1592’가 첫 방송을 앞둔 가운데, ‘임진왜란1592’의 공식 인스타그램 속 스틸컷들이 화제다. ‘임진왜란1592’는 KBS와 중국 CCTV 합작드라마로, 1592년 임진왜란 당시의 한·중·일 삼국의 역사적 기록들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최수종이 이순신 장군 역을, 김응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았다. 귀선(거북선) 돌격장 이기남 역은 이철민이, 막둥아 아빠 역은 조재완, 탐망꾼은 백봉기가 연기한다. 이외 다케다 히로미츠(와키자카 야스하루 역), 손종학(오다 노부나가 역), 박노식(김윤방 역), 박동하(고니시 유키나가 역) 등이 출연한다. 지난 7월 ‘임진왜란1592’의 대본 사진 게재로 운영이 시작된 ‘임진왜란1592’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출연 배우들의 명연기 장면부터 촬영 현장 분위기 등이 생생하게 담겼다. 많은 병사들이 피투성이로 쓰러진 전쟁의 참혹한 현장과 바다에 띄워진 귀선의 모습도 담겨 방송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촬영 현장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최수종은 이순신 복장을 한 채 점프샷을 찍어 웃음을 자아낸다. 제작진은 “이순신 장군도 뛰었다 #점프샷 장군의 살아있는 각선미 #반전매력 영원한 원조 #하이틴스타 #최수종 최고!!”라고 적어 폭소를 유발했다. 한편 ‘임진왜란1592’는 3일 오후 9시 40분 1편 ‘조선의 바다에는 그가 있었다 상’ 방송을 시작으로 8일 오후 10시 2편 ‘조선의 바다에는 그가 있었다 하’, 9일 오후 10시 3편 ‘침략자의 탄생, 도요토미 히데요시’, 22일 오후 10시 4편 ‘삼국대전, 평양성’, 23일 오후 10시 5편 ‘검은 바다, 노량’이 차례로 방송된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씨줄날줄] 조선통신사 배 복원/박홍기 논설위원

    [씨줄날줄] 조선통신사 배 복원/박홍기 논설위원

    통신사(通信使)는 조선시대 왕이 일본에 파견한 공식 외교사절이다. ‘믿음으로 통한다’는 통신은 외교의 다른 말이다. 통신사가 처음 일본 교토에 있던 막부(幕府)에 갔다 온 것은 1429년 세종 11년의 일이다. 1590년 선조 23년 일본의 침략 의도를 살피려고 갔던 사절도 통신사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내침에 대비해야”, 부사 김성일은 “그런 정상은 발견하지 못해”라고 보고했다. 정반대다. 선조는 김성일의 견해를 채택했다. 그 결과 임진왜란(1592~1598)이라는 전란을 치렀다. 외교 단절은 쉽지 않다. 이해관계와 맞물려서다. 조선도 그랬다. 철천지원수 같은 일본과 모든 교류를 끊고 싶었지만 결코 단절이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이 먼저 국교 회복을 요구했다. 임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가 죽자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가 체제 구축을 위해서다. 대륙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조선이 필요했다. 조선도 일본의 정세를 파악해야 했다. 국교 회복에는 대의명분이 있어야 했다. 사명대사가 적을 정탐하는 사절(探敵使)로 일본을 찾아 도쿠가와를 만났다. 전쟁을 다시 일으키지 않고 조선인을 돌려보내겠다는 뜻을 확인했다. 조선은 일본의 국서(國書)와 임란 때 왕릉을 파헤친 범인(犯陵賊)의 인도도 요구했다. 결국 국서가 진짜인지, 범릉적이 진범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지만 약속이 이행되자 교류 재개를 결단했다. 임란이 끝난 지 10년째 되던 1607년 선조 40년 통신사가 다시 일본 땅을 밟았다. 한·일 양국이 요즘 말하는 조선통신사의 시작이다. 이후 1811년 순조 11년까지 200년 남짓 12차례에 걸쳐 통신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은 조선에 일본 국왕사(國王使)라는 사절을 보냈다. 통신사절단은 초기에 국정 탐색에 역점을 두다 1636년 인조 14년부터는 막부 쇼군(將軍)의 즉위나 그의 후계자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선린 우호·문화 교류 사절단의 성격을 띠었다. 조선통신사는 한양에서 일본 수도 에도(현 도쿄)까지 왕복하는 데 1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다. 규모는 대략 400~500명이었다. 부산에서 길이 34m, 너비 9.5m, 높이 3m에다 바닥이 평탄한 구조의 평저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쓰시마(對馬)번에서는 1500명 정도가 호위에 나섰다. 내륙에 닿은 뒤 다시 배를 타거나 걸었다. 멀고 먼 여정이었다. 그러나 행렬은 장관이었다. 한·일 양국이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통신사절단이 끊기고 100년이 지나 조선은 일본에 강제 병합됐다. 다시 105년이나 지난 현재도 일본의 그릇된 역사 인식 탓에 관계는 매끄럽지 못하다. 문화재청이 2018년까지 통신사절단이 탄 배를 원형대로 복원하기로 했다. 제작될 배가 한·일 양국의 얽힌 매듭을 푸는 매개체가 되길 기대한다.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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