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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요토미
    202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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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란당시 일본지도 “독도는 조선 땅” 표기/도요토미가 제작 지시

    임진왜란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조선을 침략할때 부하를 시켜 제작한 지도에서 독도를 조선땅으로 표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서지학자 이종학씨(69)가 일본 궁내부 도서관에서 입수해 14일 공개한 「팔도총람(팔도총도)」에 의해 확인됐다.이 지도는 독도(우산도)뿐만 아니라 현재는 일본 영토로 돼 있는 대마도까지 조선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폭36㎝,길이 4백95㎝의 이 지도(사본)는 두루마리 형태로 조선전도와 팔도의 지도등 모두 9개의 채색지도로 구성돼 있다.지도 말미에는 『임진년(1592년) 가을 조선을 정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기쿠 요시타카(구귀희륭)가 가신 24명과 함께 조선땅을 그렸다』고 제작경위를 밝혀놓았다. 이번에 이씨가 공개한 이 지도의 사본은 이 지도의 멸실을 막기위해 명치5년(1872년)에 다시 모사한 것이다. 이 지도는 일본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뒤엎는 결정적 자료로 평가된다.
  • “「임란」은 조선 정벌”/일 또 역사왜곡 물의

    ◎시가현 「히노정요람」 표기/한인단체 반발… 시정 약속 일본 시가(자하)현 가모(포생)군 히노(일야)정이 지난 10월 발행한 「정세요람」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조선침략(임진왜란)을 「조선정벌」이라고 표현해 물의를 빚고 있다. 시가현 한국인단체들은 이 책이 역사를 왜곡한 것으로 조선침략을 미화한 것이며 민족차별이라고 강력히 반발,정당국은 『오래된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점검 부족』이라고 인정해 이를 시정키로 했다고 교도(공동)통신이 13일 보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전전에는 조선정벌이라고 불려 왔으나 침략행위가 분명하다는 비판에 따라 현재 일본의 역사학계 등은 「조선출병」 또는 「조선침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검은 갈매기와 양식어 떼죽음은(박갑천 칼럼)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앞서서는 조짐이 나타난다.비가 오려면서 청개구리가 우는 자연현상만이 아니다.그것은 인간관계에서도 혹은 사회현상에서도 나타난다. 조짐이니 징조니 할 때 쓰이는 「조」자는 고대중국의 점술에서 생겨났다.점술가운데 거북등을 태워서 길흉을 아는 방법이 있었다.거북등 안쪽에 구멍을 뚫은 다음 거기 부젓가락을 대면 거북등 겉쪽에는 홈이 패인다.그 모양을 본뜬 글자라 한다.그렇게 점술에서 생겨난만큼 징조나 조짐은 미래를 말해준다.사람의 슬기는 한가지를 보면서도 그 고갱이를 헤아려야 하는 것.헤아리고서 현명하게 그에 대처해야 한다. 은의 주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판을 벌인다.날짜 가는 줄을 모를 정도였다.측근 신하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그는 숙부이면서 현자였던 기자에게 물어보라고 한다.하지만 온조정이 취해 있는데 자신만 날짜를 안다고 하면 일신이 위태로워진다.그래서 모른다고 대답해 보낸다. 비단 이 일뿐 아니라 주왕이 상아젓가락 만드는 걸 보고 기자는 천하의 화를 알았다고 「한비자」(세림상편·유로편)는 써놓고 있다.말하자면 망조를 낌새챘던 것.기자는 이렇게 생각했다.즉,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음식담을 그릇도 물소뿔이나 옥으로 만들 것이다.그럴 때 음식역시 곰발바닥이나 코끼리고기가 아니면 표범고기를 구하게 될 것이고.비단옷을 찾게되면서 사는 곳도 고대광실로 될밖에 없다.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7년의 왜란을 뼈아픈 마음으로 되돌아보면서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을 쓴다.그 첫머리에 다치바나(귤강광)라는 일본사신 얘기를 내세운 점에 주목해야겠다.임란이 일어나기 6년전에 왔던 그는 조정의 개개풀린 기강을 보고 역관에게 탄식한다.『너희 나라는 망하겠구나.이러고서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뒤넘스럽다 할 일이 아니다.조선에 호의적이었던 그는 돌아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한테 죽는다. 갈매기가 기름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진을 대한다.흑사장으로 개력한 해운대의 사진도 본다.돌고래만 죽은게 아니다.양식장고기는 떼죽음을 했다.가공스런 조짐들이 아프고 절박하게 우리앞에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이대로 간다할때 갈매기나 백사장 모습이 사람모습으로 안된다 할 수 없다.돌고래나 가두리속 고기신세로 안된다 할 수도 없는 일이고.한데 두렵구나.남의 일인양 생각하면서 두려워할줄 모르는 마음들이 더 두렵구나.
  • 고향찾은 「오색팔중」 꽃망울 맺다(조약돌)

    ◎임란때 건너갔다 5월에 귀환한 동백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반출돼 4백년간의 타향살이 끝에 지난 5월 귀환,울산시청 광장정원에 심어진 오색팔중의 울산동백(사진)이 6개월만인 최근 탐스러운 꽃망울을 터뜨렸다.다섯색깔의 여덟겹 꽃이 핀다해서 오색팔중이라 불리는 이 세계적 희귀동백은 울산시청 정원사 이택수씨(47)에 의해 정성스럽게 가꾸어져 왔다. 이 동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가 군주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쳐진뒤 교토시 지장원 춘사(춘사)앞뜰에 심어진 것을 일본을 방문했던 예총 울산지부장 최종두씨(54)등이 원목의 3세나무 3그루를 갖고와 심은 것이다. 이때 함께 가져와 독립기념관과 사천군 조·명합동묘소앞 뜰에 심은 2그루의 동백도 최근 꽃망울을 맺고있다.
  • 미·일·불등 돌며 고문서 찾기… 한국학 발전 이바지 이우성씨

    ◎“해외유출 고서적 수집­정리에 보람”/주로 임진왜란·구한말에 대량반출/국내선 찾아볼수없는 희귀본 수두룩/박제가 산문집등 27종32책 찾아 발간(저자와의 대화) 『우리 선조가 쓴 책들을 복사본으로나마 다시 들여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미국 관계자들이 쉽게 응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해외로 유출된 우리 고문서들을 다시 수집해 들여와 한국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온 이우성씨(68·전성균관대 교수)가 최근 제5차분으로 3종5책을 출간했다.이로써 그의 호인 벽사(누벽외사)를 따 이름붙여진 「누벽외사해외수질본총서」(아세아문화사 펴냄)는 모두 27종32책으로 틀을 갖췄다. 『표면적으로는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으나 특히 일본의 경우는 한국에도 없는 것을 자기들만 갖겠다는 욕심이 있는 듯했습니다』 이씨가 영인본으로 펴낸 책들은 심의·윤현·홍한주·정원용·안석경 등 조선 초·중기의 이름있는 학자들의 문집도 있지만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많다.이번 5차분은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의 한 사람인 초정 박재가의 시문집 및 관계자료들을 묶은 「초정전서」와 조선 성종조의 문인학자인 사숙재 강희맹의 문집을 묶은 「사숙재집」,조선후기의 학자 좌소산 서유본의 시문집「좌소산인문집」 들이다. 이씨는 앞으로 남겨진 최대 과제로 세종때 70∼80권 분량으로 만들어진 「치평요람」의 재간행을 꼽았다.「치평요람」은 서울대 규장각에 30∼40권 분량이 남아있는데 일본 「동양문고」가 보관중인 50∼60권과 함께 보완하면 원래의 형태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치평요람」에는 세종 이전의 정치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을 망라하여 싣고 있는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없는 사실도 실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책들이 해외로 많이 유출된 것은 임진왜란 시기와 구한말·일제초입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우리나라 특유의 호화로운 활자본들이 수없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요토미(풍신)로부터 도쿠가와(덕천)에게 인계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존경각·봉좌문고 등 일본 각처의 장서속에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전 활자본 하면 희귀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웬만큼 유서있는 장서라면 으레 그 활자본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씨는 『활자본으로서 뿐 아니라 그 책 자체가 국내에서 아주 없어져서 책이름조차 잊어버려진 것들이 일본에서는 지금 그대로 전해져 오는것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구한말·일제초의 대량 유출도 주목할 만하다.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왕조실록등을 공공연하게 반출했으며 외국학자들의 손으로 수집·구매해 가져간 책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그 이전 병인양요때에는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고문서를 약취해갔다. 『해방후 미국쪽으로 흘러 나간 책들도 적지 않은데 여기에는 학술적으로 중요한 각종 잡록·비사 및 수기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중 상당량이 미국 국회도서관·하버드대합불연경도서관·캘리포니아대극동도서관·콜롬비아대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친필로 된 수사본 그대로 유출되어 국내에서는 그 부본조차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 이씨는 30년동안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로 강의 및 연구를 계속하다 3년전 정년퇴임했다.이씨는 은퇴뒤에도 집근처인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에 「실시학사」를 차려 놓고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안병직·김진균·강만길교수 등과는 「다산연구회」를 결성,정약용의 「목민심서」 전7권(창작과비평사 펴냄)을 펴냈으며 30대의 대학원생 10여명과는 「다산경학세미나」를 주1회씩 열고 있다. 또 그는 지난 90년 한·중·일 3국의 학자들을 초청,「국제실학학술대회」를 여는데 앞장섰다.올 10월 제2차 대회가 중국 산동성 제남시 산동대에서 열린다. 이씨 개인적으로는 통일신라에서 개항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중세사를 집필할 계획을 갖고 있다.사회·경제사에 중점을 둘 것이지만 인간중심의 딱딱하지 않은 역사를 쓰겠다는 포부다.
  • 「오색팔중동백」 돌아왔다/임란때 반출된 나무의 “3세”

    ◎일 사찰측과 3년교섭 결실/높이 50㎝짜리 묘목… 어제 울산에 심어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반출됐던 희귀목 동백나무 3그루가 4백년만에 귀환,이중 1그루가 27일 하오 원생지인 울산시 청사 앞 화단에 임시로 심어졌다. 이 나무는 곧 충렬사가 들어설 학성공원으로 옮겨 심게되며 나머지 2그루는 오는 6월1일 충남독립기념관 앞뜰과 경남 사천의 「조·명합동묘소」인 귀무덤 옆에 심어진다. 다섯색깔의 여덟겹 꽃이 핀다해서 오색팔중이라 불리는 이 동백나무는 임란당시 울산성을 점령한 가등청정이 이 일대 학성에서 자생하던 것을 약탈해 일본으로 가져가 군주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게 바쳐진 것이다. 당시 원목은 지난 83년 고사하고 1백여년쯤 전에 삽목해 심은 2∼3세 나무 10여그루가 현재 교토시 지장원 춘사에 자라고 있으며 이번에 옮겨진 나무는 3세인 높이 50㎝가량의 묘목이다. 이같은 결실이 맺어진 것은 지난 89년 1월 교토의 춘사를 찾았던 예총 울산지부장 최종두씨(53)가 사찰 안내 팸플릿에서 이곳에 심어진 동백나무가 조선의울산학성에서 이식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데서 비롯됐다. 이 동백나무의 사연을 알게된 최씨는 오코치(대하내존무)주지에게 한 그루쯤 되돌려 받으려 했으나 거절 당해 귀국즉시 서울 자비사 주지 박삼중스님,재일동포였던 울산 의성시장 대표 박재헌씨등과 의논,오코치 주지에게 최근 한국에 이장한 경남 사천의 귀무덤에 옮겨 심기로 하고 응락을 받았다는 것. 당시 가등청정으로부터 이 동백나무를 헌상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서깊은 지장원 춘사에 심고 다도회를 열때마다 동백꽃의 화려한 자태를 즐겼다고 한다. 한편 울산시는 이 동백나무를 알루미늄 철책망을 만들어 보호키로 했다.
  • 임란때 일본간 희귀동백 “환국”

    ◎왜장이 울산서 발견,도요토미에 헌상/어제 교토 지장원서 “귀환식” 거행 【도쿄 연합】 임진왜란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약탈해갔던 희귀 동백나무의 후예 3그루가 4백여년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희귀수 「5색8중산춘」의 환국 축하식이 26일하오 1시쯤 한국측에서 박삼중스님·최종두 한국예총 울산지부장·정남이 부산여자전문대학장등 30여명이,일본측에서 오코우치(대하내존무) 사찰주지,가키누마(폐소선심)한·일불교복지협회회장등이 각각 참석한 가운데 일 교토(경도)의 지장원(춘사)에서 조촐하게 거행됐다. 5색8중산춘이란 한그루의 나무에서 5가지 색깔에 여덟겹 꽂이 피어난후 질때도 꽂잎이 한꺼번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떨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가 자생지인 울산 학성에서 우연히 발견,아름다운 꽃의 자태에 반해 일본으로 가져갔다.그후 그는 이 희귀수를 군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게 바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이 다도회를 위해 자주 찾던 지장원에 기증했다.
  • 외언내언

    소련의 강경보수 세력에 의한 쿠데타는 문자 그대로의 삼일천하였다.현지시간으로 19일 상오4시 거사에서 21일 하오6시까지의 62시간.세계는 거사와 실패에 두번 놀란다. ◆「3일천하」는 우리 역사에도 있다.이번 소련의 쿠데타는 보수회귀에의 성격이지만 1백여년 전의 우리나라 쿠데타는 혁신·개혁 의지를 담았던 것.1884년의 12월4일(음력으로는 10월)김옥균·박영효·홍영식등 독립당(개화당)이 사대·보수정도를 내건 거사였다.새 내각을 짜고 새 정책까지 발표했지만 사흘 만인 6일 실패로.우리가 흔히 「갑신정변」이라 부르는 구한말의 몸부림이었다. ◆일본사람들에게도 「밋카덴카」(삼일천하)라는 말이 있다.짧은 동안의 권세를 뜻하는 말이면서 도요토미(풍신수길:그때의 성은 우채)와 아케치(명지광수)사이의 야마자키(산기)싸움을 배경 삼는다.아케치가 그 주군인 오다(직전신장)를 배신하여 죽이고 집권하려 했으나 도요토미한테 그 싸움에서 짐으로써 꿈은 무산되었던 것.다만 3일은 더 걸린 멸망이었으나 그렇게들 부른다.도요토미의 세력은 이 때부터 커지기 시작했다. ◆한 나라의 정변과 그 추이에 대해 온 세계가 이렇게 충격 받고 관심 가진 일이 일찍이 있었던가.3일 62시간동안 지구촌은 긴장하고 흥분했다.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대한 역류를 저주하면서.하지만 주류의 물살은 거세었다.역류3일에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린 역사에의 거역.생각하자면 역류를 3일천하였다고 할 수도 없다.역류는 시작하면서부터 거스르지를 못했던 터이니까. ◆3일만에 끝난 것은 그나마 다행한일.끝내 거스르려 했을 때 유혈이 그 얼마였겠는가.고르비의 그 특유한 미소를 금방 다시 대하게 되어 기쁘다.지구촌은 행복하다.몇몇 이상자를 빼고는.
  • 「당위」와 「호도」와… 현해탄에 “사죄파고”/서울의 시각

    ◎“주체분명히… 일왕이 직접 솔직하게/과거청산 없인 진정한 동반자관계 기대난” 오는 24일로 예정된 노태우대통령의 일본방문을 앞두고 한일 양국이 불행했던 과거사에 대한 사과문제로 인해 또 한차례 홍역을 치르고 있다. 노대통령의 방일시 아키히토(명인)일왕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수준을 놓고 양국정부가 현격한 입장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방일까지 불과 열흘도 남지않은 시점에서 이 문제가 원만하게 처리되지 못할 경우 양국간에는 자칫 불편한 관계마저도 초래될 우려가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당초 노대통령이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3개국 순방을 연기하면서도 일본방문만은 예정대로 실현시키겠다고 한 것은 다름 아닌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아 아태시대를 함께 이끌어갈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인 협력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이제는 첨단과학기술,산업기술협력,통상 등 보다 경제적 실익이 있는 분야로 양국협력의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는 정부방침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방된지 45년이지났건만 과거에 대한 협상은 아직 완전하게 처리되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난달 30일 한일외무장관회담을 통해 재일한국인차별의 상징이면서 역시 과거청산문제의 일환인 지문날인제,외국인등록증 상시휴대의무 등 이른바 4대악 제도의 개선에 양국간합의를 이끌어낼 때만해도 일왕의 명백한 사과표명문제는 그다지 표면화되지 않은 다분히 「잠복성 이슈」였다. 이 문제는 노대통령이 지난 14일 청와대에서 가진 주한일본특파원들과의 회견에서 『일본이 한일 양국간의 과거사에 대해 사과의 주체임을 명확히 해야하며 사과발언도 아키히토일왕에 의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양국간 최대현안으로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각 일본에서는 집권 자민당의 4역(간사장ㆍ정조회장ㆍ총무회장 참의원의원회장)이 회동,『한국에 대한 유감표명은 84년 고 히로히토(유인)일왕이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했던 수준 이상을 벗어날 수 없고 특히 이번에는 일왕 대신 가이후(해부)총리가 해야만 한다』고 결론짓고 이같은 의견을 일행정부에 전달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양국간의 국민감정까지 겹쳐 사태는 점차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게 현재의 상황이다. 일왕의 사과수준에 대한 양국간의 입장차이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우리측은 이번 방일에서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사과표명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일본의 상징인 아키히토 일왕이 직접 한국민을 상대로 이를 밝혀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즉 84년 당시 일왕이 밝힌 『금세기의 한시기에 있어서 양국민의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 되어서느 안된다고 생각한다』는 표현은 사과가 아닌 유감인데다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는 측의 주체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일본이 명백한 사과와 함께 사과의 주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무부의 고위당국자는 이와관련,일본이 지난 72년 대중국국교 정상화때 발표한 양국 공동성명에서 『일본은 전쟁을 통해 과거 중국인민들에게 끼친 큰 손실에 대해 깊이 책임을 느끼고 깊이 자책한다』고 밝혔다시피 이번에도 일측으로부터 이정도 수준의 사과는 받아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깊은 자책은 분명한 사과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84년 당시의 「유감표명」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또 사과표명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이번 기회에 일왕의 사과는 물론 가이후총리의 직접적인 사과표명,그리고 일본의회의 불행한 과거사에 대한 사과결의까지 얻어낸다는 강도높은 전략을 짜놓고 외교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이원경 주일대사와 방일에 따른 최종실무협의차 도일한 김정기외무부아주국장에게 이같은 지침을 시달,일정부측에 전달하도록 해 『과거청산및 미래지향적 동반자관계 구축을 위해서는 일왕의 구체적인 사과가 있어야 할 것』임을 강력 촉구할 방침이다. 만약 이번에도 일측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사과표명을 얻어내지 못할 경우 내년초로 예상되는 일왕의 방한을 심각하게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노대통령은 이번 방일로 인해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고있으며 방일성과에 대한 국내 평가와 관련,자칫 잘못되면 「통치력의 위기국면」까지 초래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정부 일각에서는 지난번 노대통령의 3개국 순방연기 발표때 일본도 연기했어야만 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측의 이러한 강경한 방침에 비해 일측은 『천황은 「국민의 상징」이며 헌법상으로도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갖지 않는」 존재일 뿐이므로 그의 발언에는 한계가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나아가 가이후총리가 「국민의대표」인 만큼 그가 직접 나서 유감표명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이에 대해 『엄청난 경제력 상승에 힘입어 일본도 이제는 타국에 의해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자존심 외교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양국간의 이같은 입장차이에도 불구,방일을 전면 취소하는 최악의 카드를 쓰지 않고 방일직전까지 절충을 계속해 나갈 방침이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양국간 협상이 어떻게 결말지어질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도 일측이 과거청산과 관련,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어물쩡 넘기려 한다면 한일 양국간의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 양국민간의 앙금은 더이상 치유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결국 이 문제는 해결의 열쇠가 일측에 있기 때문에 전후처리과정에서 유태인 및 이스라엘정부에 대한 완벽한 보상을 한 서독과 같이 일측이 대승적 차원에서 능동적으로 나설 때만 말 그대로 「양국간의 밝은 미래」로 나아갈 것으로 보여진다. ◎동경의 입장/자민당선 84년 유인발언 수준 고수 압력/죄과 반성않고 경협구실,우회 속셈 오는 24일부터의 노태우대통령 일본공식방문을 불과 1주일 남짓 앞두고 한일 양국간에는 일왕의 「사죄의 말」을 둘러싸고 새로운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핵심은 반성의 표현을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군국주의 일본에 강점당해 36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다 진지하고 명확한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반면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제국을 전쟁의 참화속에 몰아 넣었던 일본은 과거의 죄과를 반성하기는 커녕 여러가지 이유를 둘러대며 사죄를 거부한다. 강한자 앞에서는 비굴하며 약해 보이는 존재 앞에서는 무차별 짓밟으려 드는 일본인 특유의 교활한 근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민족적 자존에 직결되는 감정의 문제로 치달을 가능성마저 안고 있다. 한국측의 요구는 물질적 보상에 있지 않다. 『잘못했다』라는 한마디 사과의 말을 정신적 위자로 바라고 있는 것이다. 노태우대통령도 14일 상오 청와대 정원에서 열린 일본특파원들과의 회견에서 이같은 뜻을 밝혔다. 노대통령은 임진왜란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예로들며 지난 84년 전두환 전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때 쇼와(조화)일왕이 표명한 「유감의 뜻」은 『사죄인가 아닌가가 확실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말하고 아키히토(명인)일왕이 말할 내용은 쇼와일왕보다 더욱 진전된 사죄표현이 되도록 기대한다는 뜻을 표명했다. 노대통령은 특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불행한 역사가 있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해 「잘못되었습니다.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사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강한 쪽이 넓은 마음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괜찮습니다. 이제부터는 잘해 나갑시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하고 한국국민이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측의 사죄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같은 한국측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측은 짜증과 불쾌감까지 나타내며 인색한 반응을 보인다. 자민당의 한 수뇌는 14일 밤 이문제에 관해 『더 깊은 내용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며 애당초 우리들이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며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이 수뇌는 식민지 지배와 더불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 의한 임진왜란까지 예를 들며 『히데요시까지 끌어내는 것은 (일본측이)땅에 꿇어 앉아 빌어도 부족하다는 말인가』라는 망언에 가까운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이날 상오 오자와이치로(소택일랑) 간사장을 비롯한 자민당4역은 모임을 갖고 아키히토 일왕이 말할 내용에 관해 『쇼와일왕이 말한 내용보다 더 진전되어서는 안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이를 정부측에 전달했다. 일본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역사」에 관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반성의 빛을 보인다. 그러나 그 반성은 솔직ㆍ명확한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경제적인)협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민당수뇌의 표현대로 오만한 자세의 그것이다. 올바른 역사인식하의 반성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일본의 「천황」과 총리는 침략행위를 저질렀던 국가에 대해,원수나 수뇌가 방일하거나 자신의 상대국을 방문했을때 「과거의 역사」를 반성한다는 말을 해왔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유감의 뜻」 표명에 머물고 있다. 이것은 같은 침략국이었던 서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몇번이나 반복했던 명확한 「사죄」와는 다르다. 85년 5월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독일패전 40주년을 기념하는 연방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전쟁과 폭력지배 아래서 억울하게 숨진 많은 사람들을 애도합니다.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앗긴 6백만 유태인,전쟁에 시달렸던 모든 민족,그중에서도 소련ㆍ폴란드의 무수한 사자,레지스탕스의 희생자를 생각하며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 지난 68년 3월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방일했을때 쇼와일왕은 『귀국과 일본은 함께 아시아의 일원으로서,또 예부터 깊은 관계를 가진 사이로서 우호적인 접촉을 계속해 왔습니다. 지난번의 대단히 불행한 전쟁후에도 이 전통적인 관계는 급속히 회복되었습니다』라며 얼버무렸다. 74년 포드미 대통령의 방일때에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상접하는 양국은 2세기에 걸치는 연대를 통해 여러가지 기복은 있었으나…』라고 전제하고 『한때 참으로 불행한 시대를 가졌던 것은 유감이었습니다』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 78년 10월 등소평 중국부총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도 『양국의 오랜 역사 사이에는 한때 불행한 일도 있었습니다만 과거의 것으로 끝나고…』라고 말했다. 일본의 가장 큰 피해국이었던 한국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한 말로 사죄아닌 사죄를 대신했다. 84년 전두환 전대통령을 맞은 쇼와일왕은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 양국사이에 불행한 과거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것이 전부였다. 일본측이 자신의 죄과에 대한 사죄에 인색하고 있는 것은 이제 세계 초일류의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자만때문이라고 외교가에서는 보고 있다. 헌법상 규정의 「상징 천황」 여부를 떠나 일본국민의 정신적 구심체 역할을 맡고 있는 「천황」은 「천황의 이름으로」 저지른 전쟁책임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반성의 빛을 보여야만 한다는 것이 도쿄 외교가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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