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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생명 3조원 계약자 몫 전환

    3개월동안 금융감독당국과 생명보험업계 사이에 첨예한 마찰을 불러왔던 생명보험사들의 유가증권(주식·채권 등) 투자 평가이익 배분문제가 양쪽 주장을 절충하는 선에서 11일 일단락됐다.감독당국은 평가이익의 상당부분을 주주(생보사) 몫에서 떼어 계약자(고객)에게 돌려주는 데 성공했고,생보사들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타격을 덜 받게 됐다.하지만 실제 계약자의 손에 쥐어지는 액수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란 점에서 시끌벅적했던 것만큼의 고객 실익은 없다는 평가다. ●금융당국 “생보사,부당하게 주주몫 더 챙겼다.” 생보사 투자유가증권 평가익의 회계처리 문제는 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3월 “삼성생명이 계약자 몫으로 배정돼야 할 2조원 규모의 평가익을 자본계정에 부당하게 편입했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 보험은 배당여부를 기준으로 유배당과 무배당 상품으로 나뉜다.유배당 상품은 보험료가 다소 높은 대신 보험료를 운용해서 얻는 이익을 일정비율에 따라 보험사로부터 분배받을 수 있다. 반면 무배당 상품은 보험료가 다소 싼 대신 투자이익을 배당받지 못한다.즉 유배당 보험료에서 생기는 투자이익은 일정부분 계약자 몫이 되지만 무배당 보험료로 인한 이익은 주주 몫이 된다. 2001년 저금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유배당상품이 주종을 이뤘기 때문에 주주와 계약자간 배분 문제가 크지 않았다.그러나 저금리로 자산운용에 어려움을 겪게 된 생보사들이 무배당 상품에만 주력하면서 배당의 태반을 주주가 챙기는 구조로 변했다.이를 바로잡아 실제 돈을 낸 계약자들의 몫을 확대해 주자는 게 애초 금융당국,특히 이 부위원장의 방안이었다. ●당초 안에서 후퇴한 금감위 금감위는 이에 따라 평가 및 처분이익의 배분기준을 자산운용에 따른 총손익이 아닌,책임준비금 비율로 일원화하는 안을 냈다.또 책임준비금 비율 산정은 ‘당해 평가연도’ (당기)가 아닌 ‘보유기간 평균’ (누적)에 바탕해서 산출토록 했다.그러나 업계는 “유가증권 평가이익은 실제로 주주와 계약자에게 배분해 주는 게 아니라 장부상의 이익인 만큼 굳이 나누지 말고 일괄적으로 주주몫(자본계정)에 넣어야 한다.”며 반발했다.삼성생명은 “실제 처분하는 것도 아니면서 정서상 배당에 대한 기대감만 불어넣어 불필요한 논란을 유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주몫은 자본계정에,계약자몫은 부채계정에 포함되기 때문에 기업 재무구조가 나빠진다는 것도 주된 반발 이유였다.감정적인 대목도 작용했다.삼성생명 고위관계자는 이 부위원장의 주장에 대해 “우리가 도둑질한 것처럼 매도당하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고 말했다. 이번에 금감위는 평가익 배분기준을 책임준비금 비율로 하는 방안은 예정대로 강행했으나 책임준비금 누적 산정은 업계요구를 수용해 일단 보류하고 ‘구분계리’(무배당·유배당 별도 회계처리)를 추진하기로 했다.업계는 금감위의 안에 크게 안도하는 분위기다.업계 관계자는 “우리 의견이 충분하게 반영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지만 위헌시비 등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당초 안을 강행하기보다는 업계와 협조해 근본적인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한 것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보험계약자 몫 더 늘어나긴 했는데… 삼성생명의 경우,계약자 몫이 3조 2000억원가량 늘어나게 됐다.기존 규정으로는 유가증권 투자 평가익 7조 7000억원 중 주주몫으로 6조 7000억원,계약자몫으로 1조원이 배정됐으나 새 규정이 적용되면 주주 3조 5000억원,계약자 4조 2000억원으로 역전된다.대한생명,교보생명 등 다른 생보사들도 규모가 삼성생명만큼 크지는 않지만 일정액을 계약자몫으로 돌려야 한다. 그러나 이 돈은 장부상 평가일 뿐 실제 계약자 손에 들어가지는 않는다.금감위 관계자도 “평가이익은 미실현 이익이고 장기간 지속되는 보험계약의 배당원천이기 때문에 현재의 계약자가 직접적으로 배당을 요구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실제 삼성생명은 그룹 지배구조 차원에서도 단순 차익실현을 위해 삼성전자 주식을 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실제로 계약자들에게 크게 도움되는 것도 아닌데 금융감독 당국이 변죽만 크게 울린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조정래의 세상보기] 민심이 응시하는 것

    공적자금 1조원 횡령! 밥굶는 아이들 30만명! 이것은 어느 삼류국가의 이야기가 아니다.바로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이다.이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살맛 떨어지지 않을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생활이 궁핍한 사람들일수록 또다시 이민을 떠나고 싶은 배신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공적자금’이란,6·25 이후의 최대 국난이라 일컬었던 IMF사태를 맞아 부실기업들과 부실금융기관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국가가 대준 돈이다.그러나,그건 국가의 돈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들에게 떠안긴 빚이었다.그러니까 집권자들이 정치를 잘못하는 바람에 국민들은 난데없이 빚벼락을 맞은 것이 공적자금 투입이다.그 액수는 보통 시민들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150조에 이르렀다. 1조란 얼마 만한 돈일까.계산 빠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1억이 만 개가 모아진 돈이란다.그리도 무지무지하고 끔찍스럽게 많은 돈을,그 돈을 효과적으로 잘 쓰도록 관리·감독해야 될 공무원들이 탕진하고,먹어치워버렸단다. 거듭 확인하건데,공무원이란 피땀어린 국민세금으로 월급받으며 오로지 국민을 위해 올바로 일해야 하는 존재다.그런데 자질 부족하고 양심 없는 일부 위인들이 끊임없이 세금도둑질을 해오면서 공무원 사회를 먹칠해왔다.그 검은 손이 결국 공적자금에까지 뻗친 것이다. 공무원들이 그 꼴을 하고 있으니 IMF상황이 건강하게 회복될 리 없고,그 여파로 밥굶는 아이들이 30만명으로 늘어난 것이다.IMF 전에는 배곯는 아이들이 8만명쯤이라고 했었다.세상에는 가지가지 슬픔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슬픔이 밥굶는 굶주림 아니던가.단 한 명의 배고픈 자가 있어도 그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했다.그런데,어른도 아니고 어린것들이 8만명이나 굶주림에 시달렸던 사회.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30만명으로 불어난 사회.썩고 썩은 공무원들이 공적자금을 횡령해 기름진 배를 두드린 것은 바로 30만 어린것들의 먹이를 탈취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 다같이 비겁한 침묵을 버리고 목소리를 합치자.그리고,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외쳐서 묻자.공적자금을 이번에 적발된 자들만 횡령한 것이냐고.우리는 절대로 믿을 수 없으니 공적자금 전체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그동안 국가 발전에 공헌한 점을 참작하여‥….” 우리 귀에 너무나 익은 판결문의 끝부분이다.비리공무원들을 재판할 때마다 판·검사들은 이 문구를 앞세워 국민들을 분하게 만들고,불신을 사왔다.공무원들이 과연 일반 국민들보다 더 국가 발전에 공헌한 것일까.종교와 함께 국가라는 것이 필요악이듯이 그들 또한 필요악이 아닐까. 야당에서는 공적자금에 대한 전면적인 국정감사를 실시해야 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그 일은 어쩌면 17대 국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의미있는 일일지도 모른다.IMF국난은 무능한 김영삼 정권이 불러왔고,공적자금 투입은 전적으로 김대중 정권에서 이루어졌다.갓난애들에게도 350여만원씩의 빚더미를 선물한 그 돈잔치는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객관적 검증이나 결과보고 없이 김대중 정권이 끝났다.그리고 노무현 정권 2년째에 그 횡령사건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국민 전체는 그 막대한 돈이 쓰인 전모를 투명하게 알고 싶어한다.그 검증과 조사는 노무현 정권이 수행해야 할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그러므로 야당의 국정감사 요구에 발맞추어 여당도 국정감사를 하기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그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상생의 정치다. IMF상황에서 유행했던 풍문이 있다.이승만 대통령이 큰 가마솥을 만들었고,박정희 대통령이 거기에 밥을 하나 가득 지었고,전두환이 그 밥을 다 퍼먹었고,노태우가 누룽지까지 다 긁어먹었고,김영삼은 그 솥을 깨버렸고,김대중은 그 조각들마저 외국에 팔아먹으려고 한다.민심이 실린 그 풍문 속에서 ‘대통령’칭호를 받은 사람은 둘 뿐이었다.그 민심은 아직도 살아서 노무현 정권을 응시하고 있다.
  • [조정래의 세상보기] 민심이 응시하는 것

    공적자금 1조원 횡령! 밥굶는 아이들 30만명! 이것은 어느 삼류국가의 이야기가 아니다.바로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이다.이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살맛 떨어지지 않을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생활이 궁핍한 사람들일수록 또다시 이민을 떠나고 싶은 배신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공적자금’이란,6·25 이후의 최대 국난이라 일컬었던 IMF사태를 맞아 부실기업들과 부실금융기관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국가가 대준 돈이다.그러나,그건 국가의 돈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들에게 떠안긴 빚이었다.그러니까 집권자들이 정치를 잘못하는 바람에 국민들은 난데없이 빚벼락을 맞은 것이 공적자금 투입이다.그 액수는 보통 시민들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150조에 이르렀다. 1조란 얼마 만한 돈일까.계산 빠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1억이 만 개가 모아진 돈이란다.그리도 무지무지하고 끔찍스럽게 많은 돈을,그 돈을 효과적으로 잘 쓰도록 관리·감독해야 될 공무원들이 탕진하고,먹어치워버렸단다. 거듭 확인하건데,공무원이란 피땀어린 국민세금으로 월급받으며 오로지 국민을 위해 올바로 일해야 하는 존재다.그런데 자질 부족하고 양심 없는 일부 위인들이 끊임없이 세금도둑질을 해오면서 공무원 사회를 먹칠해왔다.그 검은 손이 결국 공적자금에까지 뻗친 것이다. 공무원들이 그 꼴을 하고 있으니 IMF상황이 건강하게 회복될 리 없고,그 여파로 밥굶는 아이들이 30만명으로 늘어난 것이다.IMF 전에는 배곯는 아이들이 8만명쯤이라고 했었다.세상에는 가지가지 슬픔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슬픔이 밥굶는 굶주림 아니던가.단 한 명의 배고픈 자가 있어도 그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했다.그런데,어른도 아니고 어린것들이 8만명이나 굶주림에 시달렸던 사회.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30만명으로 불어난 사회.썩고 썩은 공무원들이 공적자금을 횡령해 기름진 배를 두드린 것은 바로 30만 어린것들의 먹이를 탈취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 다같이 비겁한 침묵을 버리고 목소리를 합치자.그리고,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외쳐서 묻자.공적자금을 이번에 적발된 자들만 횡령한 것이냐고.우리는 절대로 믿을 수 없으니 공적자금 전체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그동안 국가 발전에 공헌한 점을 참작하여‥….” 우리 귀에 너무나 익은 판결문의 끝부분이다.비리공무원들을 재판할 때마다 판·검사들은 이 문구를 앞세워 국민들을 분하게 만들고,불신을 사왔다.공무원들이 과연 일반 국민들보다 더 국가 발전에 공헌한 것일까.종교와 함께 국가라는 것이 필요악이듯이 그들 또한 필요악이 아닐까. 야당에서는 공적자금에 대한 전면적인 국정감사를 실시해야 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그 일은 어쩌면 17대 국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의미있는 일일지도 모른다.IMF국난은 무능한 김영삼 정권이 불러왔고,공적자금 투입은 전적으로 김대중 정권에서 이루어졌다.갓난애들에게도 350여만원씩의 빚더미를 선물한 그 돈잔치는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객관적 검증이나 결과보고 없이 김대중 정권이 끝났다.그리고 노무현 정권 2년째에 그 횡령사건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국민 전체는 그 막대한 돈이 쓰인 전모를 투명하게 알고 싶어한다.그 검증과 조사는 노무현 정권이 수행해야 할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그러므로 야당의 국정감사 요구에 발맞추어 여당도 국정감사를 하기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그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상생의 정치다. IMF상황에서 유행했던 풍문이 있다.이승만 대통령이 큰 가마솥을 만들었고,박정희 대통령이 거기에 밥을 하나 가득 지었고,전두환이 그 밥을 다 퍼먹었고,노태우가 누룽지까지 다 긁어먹었고,김영삼은 그 솥을 깨버렸고,김대중은 그 조각들마저 외국에 팔아먹으려고 한다.민심이 실린 그 풍문 속에서 ‘대통령’칭호를 받은 사람은 둘 뿐이었다.그 민심은 아직도 살아서 노무현 정권을 응시하고 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2)안의현감(安義縣監) 연암 박지원의 행정론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초등학교 교정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비석 하나가 서 있다.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선생에 관한 역사와 선생께서 활동하셨던 18세기 영조 정조시대의 조선 지성사와 사회사의 한 단면까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사적비(事蹟碑)다.위대한 문학가로서의 면모와 탁월한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함께 느낄 수 있으며,특히 안의현감이라는 지방의 한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행정관 시절의 흥미로운 일화들은 정치와 권력의 남용으로 고통받는 이 시대를 향하여 무언의 꾸짖음을 던지고 있다. 오늘은 산 좋고 물 좋은 지리산 아래 함양 안의면의 오월 녹음을 주우며 그 푸르고 향그러운 색깔 속에 살아있는 한 지성의 인간과 세상을 향한 말씀을 들으려 길을 떠난다. 연암 박지원 선생을 두고 칭송하는 글귀는 매우 많다.‘그의 문장은 천마(天馬)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아 굴레를 씌우지 않았건만 자연스럽게도 법도에 다 들어맞는다.그러므로 그의 문장은 문장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하며,뒷 사람들이 배워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글과 ‘영국에 셰익스피어가,독일에 괴테가,중국에 소동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는 글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이같은 선생은 흔히 ‘양반전’‘허생전’ 등 부패한 사회상과 타락한 양반 사회를 풍자적 기법으로 통렬하게 비판한 소설가로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선생의 나이 44세 때 청나라 여행을 계기로 국내 보수파들의 극렬한 비난을 무릅쓰면서 쓴 ‘열하일기’는 당시 문단에 충격을 던진 놀라운 문체로서 선생의 글이 단순히 글 재주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인간의 삶을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고 가기 위한 위대한 통찰력과 상상력이 결합된 신선함의 상징이었다.여기에서 선생은 행정가 혹은 정치가로서의 안목과 구체적 능력을 암시하기도 했다. ●나이 50에 임금분부로 마지못해 벼슬길 이렇듯 천하 제일가는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선생이었지만 한사코 과거시험을 거쳐 벼슬길에 나아가는 일은 극력 회피했다.주위의 권유가 하도 잦고 간곡하여 몇 차례 과거시험장에 나간 적이 있었다.그러나 답안지를 작성한 뒤에는 이름을 적지 않았고,글 대신 그림을 그려 놓거나 엉뚱한 시편들을 대신 적기도 했는데,이 때 선생이 지은 글은 곧잘 큰 유행이 되기도 했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감탄과 아쉬움을 함께 자아내기도 했다.심지어 임금의 명령으로 과거시험장에 억지로 나간 적도 여러번 있었지만 모두 이름을 적지 않았다.벼슬이나 권세가 깊은 학문과 향기 짙은 문학세계를 해칠 수 있다는 선생의 청정한 지조,혼탁하고 광분한 지성사를 꾸짖어 바로잡을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세상에 나아가면 더욱 세상을 어지럽힐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직과 청빈을 집안의 가훈으로 이어받은 선생 또한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마치 독서하는 군자처럼 살았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떴는데,선생이 나이 50세 때 임금의 거듭된 분부를 차마 뿌리치지 못해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간지 반 년도 못 된 때였다.아내를 여읜 지 얼마 안되어 다시 맡며느리의 상을 당한 뒤로는 끼니 챙겨 줄 사람도 없이 19년여를 혼자 살았다.그 고적하고 불편한 생애의 후반에 이르러서야 선생의 학문과 행정가로서의 세계가 더욱 깊고 넓게 완성될 수 있었다. 선생이 참으로 엉뚱하게도 경상도 안의현감이라는 지방 목민관으로 부임한 것은 1792년 1월이었다.1796년 봄에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5년 동안 안의현감을 지내면서 남긴 업적은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직자와 정치가들에게 변함없는 교훈이자 반드시 닮아야 할 목표로 남아 있다.53세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선생 앞에 맨 먼저 던져진 과제는 아전들의 오래된 폐단이었는데,공금횡령과 현감을 속이고 우롱하는 행동이었다.다른 하나는 공금횡령을 부추기는 주변의 권유와 부정부패를 일삼아야만 출세할 수 있다는 공공연한 현실이었다. ●군량미 향곡 9000섬 야금야금 도둑질 지방관청의 실무 담당자들인 아전은 모두 그 지방 출신자들인데다 오래도록 아전으로 지낸 터여서 관내의 모든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거기에 비해 서울에서 임명되어 오는 현감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아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었다.따라서 현감은 짧은 임기 동안에 안의지역에 관한 일들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떠나는 일이 흔했다.이같은 사정을 알고 있는 아전들이 고의적으로 현감의 임기를 되도록 짧게 만들기 위한 수작을 부리는 폐습이 뿌리 깊었다.부임하는 현감으로 하여금 안의 지역의 행정 업무에는 아예 손도 못대게 하기 위해 교활한 함정을 파서 빠뜨렸다.아전 상호간의 비리를 적은 투서를 익명으로 현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투서자가 익명이기 때문에 투서에 적힌 당사자를 소환하여 조사하면 으레 시치미를 잡아 떼면서 누명을 덮어 썼다고 항변했다.이같은 투서사건을 조사하느라 시일을 보내다보면 현감 본연의 업무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고,그러는 사이에 현감이 무능하다거나 죄없는 아전들을 잡아들여 족치면서 뇌물을 요구한다는 투서가 서울로 보내졌다.결국 현감은 서울로 불려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겨갔다. 아전들의 이같은 행동은 자신들이 저지른 공금횡령 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한 계획적인 짓이었다.아전들이 저지르는 공금횡령의 대표적인 사례는 군량미로 책정된 곡식인 향곡(餉穀)을 도둑질하는 것이었다.각 고을에서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인 대동미 중에서 일부는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는 여러 가지 용도에 대비하기 위해 지방관청에다 보관해 두고 있었는데,이 곡식을 아전들이 야금야금 도둑질하여 선생이 안의현감으로 부임했을 때는 무려 6만여 휘(열 다섯 말이나 스무 말을 일컫는 수량의 단위)나 되었다.10말을 한 섬으로 치면 무려 9000섬이나 되는 엄청난 곡식이었다.아전들의 고질적인 횡령으로 국가와 지방관청은 늘 재정부족으로 허덕였다.선생은 특유의 직관과 지혜로서 아전들의 농간을 혁파하고 그들이 훔쳐 낸 공금을 모두 환수했다.그 과정에서 어느 한 사람도 죄를 묻거나 궁지에 몰아 넣지 않고 깊이 뉘우치면서 기쁜 마음으로 죄를 갚도록 함으로써 안의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선생은 과오를 저지른 아전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도록 다양한 교훈과 모범을 보였다.선생의 정직함과 청빈함이 아전들에게 교훈이 되었다.앞서 간 수많은 현감들의 탐욕과 위선이 아전들을 공금횡령으로 밀어 넣은 것이라고 선생은 말했다.오늘날의 저 많은 국가 공직자들과 지도자들이 다시 살펴봐야 할 두렵고 또 두려운 역사적 교훈이자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기 위한 철학이다.이렇게 채워진 곡식을 두고 서울의 중앙관청 고관들로부터 나눠 갖자는 유혹이 있었다.어차피 없어도 좋은 것이므로 나눠갖자는 제의였다.또한 늘그막에 가난 때문에 지방 수령 노릇을 하니까 적당히 챙기면 가난은 면할 수 있으리라는 중앙의 벼슬아치들이 예사로 주고받는 말은 선생으로 하여금 더욱 청빈하게 만들었다.빈번한 흉년 때마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도울 때 선생이 한결같이 정성을 쏟은 것은 얻어 먹는 사람의 인권과 명예를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또한 부득이 아랫사람에게 곤장을 쳐야 할 경우에는 곤장질이 끝난 후 반드시 사람을 보내 맞은 곳을 주물러 멍을 풀게 했다. ●죄 묻거나 궁지에 몰지않아 모두 감복 “고을 원 노릇은 좋은 일이지만 사람을 매로 다스리는 일만큼은 몹시 괴롭고 싫다.”고 했다. 선생은 지방관청 행정가가 가장 공력을 많이 들여야 할 것으로 몇 가지를 꼽아 실천했다.가난한 사람을 돕되 가난의 원인을 해결해 주는 것,상업과 농업의 중요성만큼 장사하고 농사 짓는 사람의 인권과 명예를 존중해 주는 것,농민들의 노동력을 능률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청나라에서 실시하는 여러 가지 농기계를 제작하여 보급하는 것,지역민들이 자신들의 고장에 대한 긍지를 갖고 살도록 하기 위해 지역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들을 꼽았다. 선생의 이같은 위업은 조선 후기 타락한 양반 관료들의 부패와 탐학의 만연으로 가려져 있었지만,오늘 다시 선생의 청렴과 결백한 행정가로서의 삶은 우리 시대를 향해 또 한 번 꾸짖는다.너는 왜 공무원이 되었느냐고. 선생은 부인과 함께 황해도 장단구 송서면 대현리에 묻히셨는데,지금 누가 그 무덤의 풀을 베고 술잔을 올리는지 알 길이 없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2)안의현감(安義縣監) 연암 박지원의 행정론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2)안의현감(安義縣監) 연암 박지원의 행정론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초등학교 교정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비석 하나가 서 있다.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선생에 관한 역사와 선생께서 활동하셨던 18세기 영조 정조시대의 조선 지성사와 사회사의 한 단면까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사적비(事蹟碑)다.위대한 문학가로서의 면모와 탁월한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함께 느낄 수 있으며,특히 안의현감이라는 지방의 한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행정관 시절의 흥미로운 일화들은 정치와 권력의 남용으로 고통받는 이 시대를 향하여 무언의 꾸짖음을 던지고 있다. 오늘은 산 좋고 물 좋은 지리산 아래 함양 안의면의 오월 녹음을 주우며 그 푸르고 향그러운 색깔 속에 살아있는 한 지성의 인간과 세상을 향한 말씀을 들으려 길을 떠난다. 연암 박지원 선생을 두고 칭송하는 글귀는 매우 많다.‘그의 문장은 천마(天馬)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아 굴레를 씌우지 않았건만 자연스럽게도 법도에 다 들어맞는다.그러므로 그의 문장은 문장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하며,뒷 사람들이 배워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글과 ‘영국에 셰익스피어가,독일에 괴테가,중국에 소동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는 글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이같은 선생은 흔히 ‘양반전’‘허생전’ 등 부패한 사회상과 타락한 양반 사회를 풍자적 기법으로 통렬하게 비판한 소설가로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선생의 나이 44세 때 청나라 여행을 계기로 국내 보수파들의 극렬한 비난을 무릅쓰면서 쓴 ‘열하일기’는 당시 문단에 충격을 던진 놀라운 문체로서 선생의 글이 단순히 글 재주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인간의 삶을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고 가기 위한 위대한 통찰력과 상상력이 결합된 신선함의 상징이었다.여기에서 선생은 행정가 혹은 정치가로서의 안목과 구체적 능력을 암시하기도 했다. ●나이 50에 임금분부로 마지못해 벼슬길 이렇듯 천하 제일가는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선생이었지만 한사코 과거시험을 거쳐 벼슬길에 나아가는 일은 극력 회피했다.주위의 권유가 하도 잦고 간곡하여 몇 차례 과거시험장에 나간 적이 있었다.그러나 답안지를 작성한 뒤에는 이름을 적지 않았고,글 대신 그림을 그려 놓거나 엉뚱한 시편들을 대신 적기도 했는데,이 때 선생이 지은 글은 곧잘 큰 유행이 되기도 했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감탄과 아쉬움을 함께 자아내기도 했다.심지어 임금의 명령으로 과거시험장에 억지로 나간 적도 여러번 있었지만 모두 이름을 적지 않았다.벼슬이나 권세가 깊은 학문과 향기 짙은 문학세계를 해칠 수 있다는 선생의 청정한 지조,혼탁하고 광분한 지성사를 꾸짖어 바로잡을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세상에 나아가면 더욱 세상을 어지럽힐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직과 청빈을 집안의 가훈으로 이어받은 선생 또한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마치 독서하는 군자처럼 살았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떴는데,선생이 나이 50세 때 임금의 거듭된 분부를 차마 뿌리치지 못해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간지 반 년도 못 된 때였다.아내를 여읜 지 얼마 안되어 다시 맡며느리의 상을 당한 뒤로는 끼니 챙겨 줄 사람도 없이 19년여를 혼자 살았다.그 고적하고 불편한 생애의 후반에 이르러서야 선생의 학문과 행정가로서의 세계가 더욱 깊고 넓게 완성될 수 있었다. 선생이 참으로 엉뚱하게도 경상도 안의현감이라는 지방 목민관으로 부임한 것은 1792년 1월이었다.1796년 봄에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5년 동안 안의현감을 지내면서 남긴 업적은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직자와 정치가들에게 변함없는 교훈이자 반드시 닮아야 할 목표로 남아 있다.53세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선생 앞에 맨 먼저 던져진 과제는 아전들의 오래된 폐단이었는데,공금횡령과 현감을 속이고 우롱하는 행동이었다.다른 하나는 공금횡령을 부추기는 주변의 권유와 부정부패를 일삼아야만 출세할 수 있다는 공공연한 현실이었다. ●군량미 향곡 9000섬 야금야금 도둑질 지방관청의 실무 담당자들인 아전은 모두 그 지방 출신자들인데다 오래도록 아전으로 지낸 터여서 관내의 모든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거기에 비해 서울에서 임명되어 오는 현감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아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었다.따라서 현감은 짧은 임기 동안에 안의지역에 관한 일들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떠나는 일이 흔했다.이같은 사정을 알고 있는 아전들이 고의적으로 현감의 임기를 되도록 짧게 만들기 위한 수작을 부리는 폐습이 뿌리 깊었다.부임하는 현감으로 하여금 안의 지역의 행정 업무에는 아예 손도 못대게 하기 위해 교활한 함정을 파서 빠뜨렸다.아전 상호간의 비리를 적은 투서를 익명으로 현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투서자가 익명이기 때문에 투서에 적힌 당사자를 소환하여 조사하면 으레 시치미를 잡아 떼면서 누명을 덮어 썼다고 항변했다.이같은 투서사건을 조사하느라 시일을 보내다보면 현감 본연의 업무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고,그러는 사이에 현감이 무능하다거나 죄없는 아전들을 잡아들여 족치면서 뇌물을 요구한다는 투서가 서울로 보내졌다.결국 현감은 서울로 불려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겨갔다. 아전들의 이같은 행동은 자신들이 저지른 공금횡령 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한 계획적인 짓이었다.아전들이 저지르는 공금횡령의 대표적인 사례는 군량미로 책정된 곡식인 향곡(餉穀)을 도둑질하는 것이었다.각 고을에서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인 대동미 중에서 일부는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는 여러 가지 용도에 대비하기 위해 지방관청에다 보관해 두고 있었는데,이 곡식을 아전들이 야금야금 도둑질하여 선생이 안의현감으로 부임했을 때는 무려 6만여 휘(열 다섯 말이나 스무 말을 일컫는 수량의 단위)나 되었다.10말을 한 섬으로 치면 무려 9000섬이나 되는 엄청난 곡식이었다.아전들의 고질적인 횡령으로 국가와 지방관청은 늘 재정부족으로 허덕였다.선생은 특유의 직관과 지혜로서 아전들의 농간을 혁파하고 그들이 훔쳐 낸 공금을 모두 환수했다.그 과정에서 어느 한 사람도 죄를 묻거나 궁지에 몰아 넣지 않고 깊이 뉘우치면서 기쁜 마음으로 죄를 갚도록 함으로써 안의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선생은 과오를 저지른 아전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도록 다양한 교훈과 모범을 보였다.선생의 정직함과 청빈함이 아전들에게 교훈이 되었다.앞서 간 수많은 현감들의 탐욕과 위선이 아전들을 공금횡령으로 밀어 넣은 것이라고 선생은 말했다.오늘날의 저 많은 국가 공직자들과 지도자들이 다시 살펴봐야 할 두렵고 또 두려운 역사적 교훈이자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기 위한 철학이다.이렇게 채워진 곡식을 두고 서울의 중앙관청 고관들로부터 나눠 갖자는 유혹이 있었다.어차피 없어도 좋은 것이므로 나눠갖자는 제의였다.또한 늘그막에 가난 때문에 지방 수령 노릇을 하니까 적당히 챙기면 가난은 면할 수 있으리라는 중앙의 벼슬아치들이 예사로 주고받는 말은 선생으로 하여금 더욱 청빈하게 만들었다.빈번한 흉년 때마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도울 때 선생이 한결같이 정성을 쏟은 것은 얻어 먹는 사람의 인권과 명예를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또한 부득이 아랫사람에게 곤장을 쳐야 할 경우에는 곤장질이 끝난 후 반드시 사람을 보내 맞은 곳을 주물러 멍을 풀게 했다. ●죄 묻거나 궁지에 몰지않아 모두 감복 “고을 원 노릇은 좋은 일이지만 사람을 매로 다스리는 일만큼은 몹시 괴롭고 싫다.”고 했다. 선생은 지방관청 행정가가 가장 공력을 많이 들여야 할 것으로 몇 가지를 꼽아 실천했다.가난한 사람을 돕되 가난의 원인을 해결해 주는 것,상업과 농업의 중요성만큼 장사하고 농사 짓는 사람의 인권과 명예를 존중해 주는 것,농민들의 노동력을 능률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청나라에서 실시하는 여러 가지 농기계를 제작하여 보급하는 것,지역민들이 자신들의 고장에 대한 긍지를 갖고 살도록 하기 위해 지역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들을 꼽았다. 선생의 이같은 위업은 조선 후기 타락한 양반 관료들의 부패와 탐학의 만연으로 가려져 있었지만,오늘 다시 선생의 청렴과 결백한 행정가로서의 삶은 우리 시대를 향해 또 한 번 꾸짖는다.너는 왜 공무원이 되었느냐고. 선생은 부인과 함께 황해도 장단구 송서면 대현리에 묻히셨는데,지금 누가 그 무덤의 풀을 베고 술잔을 올리는지 알 길이 없다.
  • [횡단보도 이전 반대 수요시장 상인들] 노춘호 상인연합회 총무

    “왜 서울시가 횡단보도를 도둑질하려고 합니까.반드시 지킬 겁니다.” ‘수유시장 상인연합회’ 총무 노춘호(41)씨는 “요즘 횡단보도 이전 문제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다.노씨는 오는 7월 버스중앙차로제가 실시돼 시장 앞에 있는 횡단보도가 없어지면 16년 동안 운영해온 속옷가게의 문을 닫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노씨는 서울시가 상인과 시장을 자주 찾는 주민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횡단보도 이전을 추진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그는 “횡단보도는 우리 생존권과 직결된다.”면서 “300여명의 상인이 모두 떠나야 할 판에 25년이나 된 횡단보도를 갑자기 없앤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노씨가 수유시장에 정착한 것은 지난 88년.결혼을 한 뒤 작은아버지가 하던 가게를 물려받았다.몇 년 동안은 장사가 잘 됐지만 지난 94년 큰 위기를 맞았다.노씨는 “건물 주인이 갑자기 건물을 팔면서 나가라고 해 이사비용도 못 받고 쫓겨났다.”면서 “기왕 하던 일이라 돈을 빌려서 다시 가게를 구해 장사를 계속했다.”고 말했다.겨우 이자를 갚으면서 빠듯하게 생계를 유지하던 중 IMF한파가 들이닥쳤다.그는 “매출이 갑자기 감소하는 바람에 돈을 빌려서 적자를 메우고 매월 수백만원씩 이자를 내는 악순환 끝에 이제 겨우 빚을 다 갚았는데 이번에는 횡단보도 이전이라니….”라며 허탈해했다. 그는 횡단보도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고 한다.그는 “초등학교 6학년 큰딸,4학년 작은딸,1학년 막내아들을 이 시장에서 장사하면서 키워왔다.”면서 “이곳을 떠나면 어디 가서 자리를 잡고 단골들을 다시 끌어들여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노씨는 “일단 서울시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지만 만일 횡단보도를 이전한다고 결정하면 텐트라도 치고 결사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윤기자 jypark@˝
  • 조폭 흉내낸 ‘압구정 10대’

    “형들이 정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까봐 담을 넘어서 학교를 다녔어요.얻어맞는 것도 힘들었지만 도둑질까지 시키는 건 정말 참을 수가 없었어요.” 서울 강남에서 ‘상납형 조직’을 결성,학교 주변에서 상습으로 학생들의 돈을 빼앗고 폭행한 같은 초등학교 출신인 10대들이 붙잡혔다.피해 학생들은 2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보복이 두려워 이같은 사실을 숨겨온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28일 강남구 압구정동 G중학교와 신사동 S중학교 인근에서 재학생들을 상대로 돈을 빼앗고,다른 사람에게 돈을 빼앗아오라고 협박·폭행한 박모(18·K고 1년)군 등 4명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경찰은 김모(16·G중 자퇴)군 등 2명도 같은 혐의로 조사중이다. 박군 등은 2002년 3월 초 G중학교 운동장에서 이 학교 김모(당시 13)군을 협박해 5만원을 빼앗는 등 70여명으로부터 145만원 어치의 금품을 빼앗아 게임오락비 등 유흥비로 쓴 혐의를 받고 있다.조사 결과 이들은 지난해 4월 박군을 중심으로 ‘논현 팸(패밀리)’이라는 조직을 결성,‘전과 있는 사람은 일선에 나서지 말고,필요한 자금은 후배들을 시켜 충당하자.’는 등의 강령을 정하고 조직적으로 이같은 짓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빼앗은 돈을 무통장입금 등으로 ‘대장’인 박군에게 상납하고,액수를 채우지 못한 조직원은 대걸레로 심하게 구타했다. 이들의 범죄행각은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학생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끝에 드러났다.지난 10일 경찰이 G중학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학년 학생 260명 가운데 45명이 이들에게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12명은 5차례 이상 상습으로 돈을 빼앗기고 폭행당했다.피해 학생 대부분은 “보복이 두렵고,공부하기 바빠 모르는 척 했다.”고 밝혔다. 이들이 무서워 담을 넘어 인접 학교 정문을 통해 등하교했다는 G중학교 2학년생 이모(16)군은 “돈을 빼앗아오라고 시켜 그냥 내 돈을 갖다주고 말았는데,점점 액수가 커지더니 수십만원을 가져오라고 했다.”면서 “전화를 받지 않거나 피해 다니면 태권도장이나 권투도장에 가두고 ‘스파링을 하자.’며 때렸다.”고 말했다.동급생 김모(16)군은 “지난달 돈을 안 가져갔다가 5시간 동안 학원도 못가고 압구정동 일대를 끌려다녔다.”면서 “지나가는 할머니의 손가방을 날치기하라고 시키고,큰 상점에 들어가 물건을 훔쳐오라고 협박했는데 한눈을 파는 사이 겨우 달아났다.”고 털어놓았다. 강남경찰서 여성청소년계 김창수 경사는 “범행 학생들은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반면 피해 학생들은 학교생활이 힘들 정도로 엄청난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면서 “학교 폭력은 방치하고 숨길수록 더 악화될 뿐이니 경찰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
  • 꼬리잡힌 도서관 ‘大盜’

    전액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던 대학졸업생이 취업을 못하자 도둑질에 빠져 ‘대도(大盜)’가 되고 말았다. 서울 성북경찰서는 19일 대학생 행세를 하며 전국의 대학에서 상습적으로 금품을 털어온 장모(27)씨를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장씨는 2000년 8월부터 3년6개월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20여개 대학의 도서관과 교수 연구실 등에 몰래 들어가 330여차례에 걸쳐 현금과 신용카드,전자제품 등 3억 3000여만원어치의 금품을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 장씨는 강원도 춘천 모 대학 전기공학과 출신으로 1∼2학년 때는 전액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실했지만,군 제대 후 4학년으로 복학해 졸업한 뒤 취업길이 막히자 절도 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장씨는 대학 도서관 열람실 빈 좌석에 앉아 주위를 살핀 뒤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사이 짐을 모조리 챙겨 가방을 통째로 들고 나가는 수법을 썼고 교수 수업시간표 등을 파악해 교수 연구실에 몰래 들어가 고가의 금품을 훔쳤다.경찰은 “장씨가 범행 대상 학교의 축제 및 중간·기말고사 일정을 사전에 철저히 파악했고,경찰 추적을 피하기 위해 훔친 금품 중 현금만 사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고 밝혔다. 장씨는 지난 3월 중순부터 대학가를 벗어나 서울 하계동에서 빈집털이를 하다 경찰에 덜미를 잡혔으며,수사 중 장씨 방에서 학생증과 전자제품 등이 무더기로 나와 범행 일체가 들통났다. 이세영기자 sylee@˝
  • 儒林(40)-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40)-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조광조는 서둘러 관복을 입기 시작하였다.의관을 정제하는 것을 도와주던 부인 이씨가 말했다. “바깥 날씨가 몹시 찹니다.속옷을 껴입도록 하시지요.” 흑단령(黑團領)을 입으려던 조광조는 부인의 말에 옷을 더 껴입었다.조광조의 아내는 한산 이씨로 첨사(僉使) 이윤형(李允泂)의 딸이었다.조광조가 열여덟 살에 혼인하였으니 벌써 부부로 함께 산 지 20년이 넘었다.두 사람 사이에 두 아들이 있고,금실은 몹시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일찍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동료 진사 중 아내와 화합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 그 아내를 버리려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조광조에게 칠거지악(七去之惡)에 의지하여 그 의견을 물었던 적이 있었다. ‘칠거지악’이란 유교에서 이르던 아내를 버릴 수 있는 7가지의 경우,즉 ‘시부모에게 불손한 경우’‘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음탕한 경우’‘질투하는 경우’‘나쁜 병이 있는 경우’‘말 많은 경우’‘도둑질한 경우’를 가리킴인데,뛰어난 유학자이면서도 조광조는 아내를 버리려 하는 동료에게 다음과 같이 꾸짖어 말하였던 것이다. “부부는 인륜이 비롯되는 곳이며,만복의 근원이라 관계가 지극히 중하다.부인의 본성이 어둡고 자각이 없어서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남편된 자가 마땅히 바르게 다스려나가 감화케 해서 함께 가도(家道)를 이룩하는 것이 후덕한 일이다.만일 거느리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급히 버리려 한다면 천박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하물며 이 일은 가정 안의 일이라 외인이 감히 의논할 일이 못되는 것이니 자기가 잘 생각해서 처리함이 옳을 것이다.” 조광조가 남긴 ‘정암집’에 실려 있는 이 기록을 보더라도 조광조가 얼마나 ‘집안의 도리’,즉 가도에 충실하였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심려치는 마시오.날이 밝으면 곧 돌아올 것이니.” 조광조는 표정이 어두운 부인 이씨를 보며 다정하게 말하였다. 부인 이씨는 흰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그것은 지난 6월,아버지이자 조광조의 장인이었던 이윤형이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관복을 갈아입고 군사들을 따라가는 조광조에게 부인 이씨는 목이 메어 말하였다. “부디 몸 건강하시옵소서.” 그러나 이씨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된다.왜냐하면 곧 돌아올 테니 심려치 말라는 조광조의 말은 그대로 영원한 작별인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그길로 의금부에 갇혀 죄인이 된 조광조는 곧 능주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마침내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됨으로써 살아생전에는 아내 이씨는 물론 두 아들과도 영영 상봉하지 못하였다. 조광조는 선전관 금오랑이 이끄는 군사들에 압송되어 곧 의금부에 갇히게 된다.의금부에 이를 때까지만 해도 조광조는 자신이 죄인으로 착수(捉囚)될 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국가의 비상사태로 주상으로부터 급히 입궐하라는 어명을 받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입궐하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갑자기 칼을 빼어든 무사 한 사람이 조광조를 가로막고 암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조광조를 압송하던 군사들이 가로막고 나서 조광조는 간신히 생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훗날 알려진 것이지만 조광조를 암살하려던 무사의 이름은 박배근(朴培根).그는 벌써부터 조광조 일파를 제거해야 한다는 30인의 무사 중 한 사람으로 홍경주의 밀명을 받고 사림파의 괴수인 조광조를 단칼에 척살하려 했던 것이었다. 이미 의금부에는 김식을 비롯한 8명의 동료들이 갇혀 있었다.마침내 조광조가 옥에 갇힘으로써 사림파는 한순간에 일망타진됐다.이때가 인시(寅時).조광조의 체포로 마침내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대결은 훈구파의 승리로 끝나버린 것이다.
  • 儒林(40)-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조광조는 서둘러 관복을 입기 시작하였다.의관을 정제하는 것을 도와주던 부인 이씨가 말했다. “바깥 날씨가 몹시 찹니다.속옷을 껴입도록 하시지요.” 흑단령(黑團領)을 입으려던 조광조는 부인의 말에 옷을 더 껴입었다.조광조의 아내는 한산 이씨로 첨사(僉使) 이윤형(李允泂)의 딸이었다.조광조가 열여덟 살에 혼인하였으니 벌써 부부로 함께 산 지 20년이 넘었다.두 사람 사이에 두 아들이 있고,금실은 몹시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일찍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동료 진사 중 아내와 화합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 그 아내를 버리려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조광조에게 칠거지악(七去之惡)에 의지하여 그 의견을 물었던 적이 있었다. ‘칠거지악’이란 유교에서 이르던 아내를 버릴 수 있는 7가지의 경우,즉 ‘시부모에게 불손한 경우’‘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음탕한 경우’‘질투하는 경우’‘나쁜 병이 있는 경우’‘말 많은 경우’‘도둑질한 경우’를 가리킴인데,뛰어난 유학자이면서도 조광조는 아내를 버리려 하는 동료에게 다음과 같이 꾸짖어 말하였던 것이다. “부부는 인륜이 비롯되는 곳이며,만복의 근원이라 관계가 지극히 중하다.부인의 본성이 어둡고 자각이 없어서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남편된 자가 마땅히 바르게 다스려나가 감화케 해서 함께 가도(家道)를 이룩하는 것이 후덕한 일이다.만일 거느리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급히 버리려 한다면 천박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하물며 이 일은 가정 안의 일이라 외인이 감히 의논할 일이 못되는 것이니 자기가 잘 생각해서 처리함이 옳을 것이다.” 조광조가 남긴 ‘정암집’에 실려 있는 이 기록을 보더라도 조광조가 얼마나 ‘집안의 도리’,즉 가도에 충실하였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심려치는 마시오.날이 밝으면 곧 돌아올 것이니.” 조광조는 표정이 어두운 부인 이씨를 보며 다정하게 말하였다. 부인 이씨는 흰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그것은 지난 6월,아버지이자 조광조의 장인이었던 이윤형이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관복을 갈아입고 군사들을 따라가는 조광조에게 부인 이씨는 목이 메어 말하였다. “부디 몸 건강하시옵소서.” 그러나 이씨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된다.왜냐하면 곧 돌아올 테니 심려치 말라는 조광조의 말은 그대로 영원한 작별인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그길로 의금부에 갇혀 죄인이 된 조광조는 곧 능주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마침내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됨으로써 살아생전에는 아내 이씨는 물론 두 아들과도 영영 상봉하지 못하였다. 조광조는 선전관 금오랑이 이끄는 군사들에 압송되어 곧 의금부에 갇히게 된다.의금부에 이를 때까지만 해도 조광조는 자신이 죄인으로 착수(捉囚)될 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국가의 비상사태로 주상으로부터 급히 입궐하라는 어명을 받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입궐하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갑자기 칼을 빼어든 무사 한 사람이 조광조를 가로막고 암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조광조를 압송하던 군사들이 가로막고 나서 조광조는 간신히 생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훗날 알려진 것이지만 조광조를 암살하려던 무사의 이름은 박배근(朴培根).그는 벌써부터 조광조 일파를 제거해야 한다는 30인의 무사 중 한 사람으로 홍경주의 밀명을 받고 사림파의 괴수인 조광조를 단칼에 척살하려 했던 것이었다. 이미 의금부에는 김식을 비롯한 8명의 동료들이 갇혀 있었다.마침내 조광조가 옥에 갇힘으로써 사림파는 한순간에 일망타진됐다.이때가 인시(寅時).조광조의 체포로 마침내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대결은 훈구파의 승리로 끝나버린 것이다.˝
  •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노망을 빙자한 한마디/박완서 소설가

    열흘가량 여행을 다녀왔다.여러 번 갔던 나라를 또 가니까 이왕이면 안 가본 나라를 가지 뭣 하러 가본 데를 자꾸 가냐고,식구들도 친지들도 의아해했다.하긴 그랬다.호기심 없이 떠나는 여행은 설레지 않는다.그건 여행의 기쁨의 절반쯤은 미리 잃고 떠나는 셈이니 굉장한 손해다.아무데나 여기 아닌 딴 곳에서 멍청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던 차에 마침 나에게 적당한 일정과 편안한 일행을 만나게 되었으니 행선지는 어디라도 상관 없었나 보다.그러나 막상 집을 떠나보면 쉬고 싶어 어디를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게 된다.이 세상에 내 집처럼 편한 쉼터가 어디 있겠는가.늙어갈수록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고 적당히 따습고 적당히 딱딱한 내 집 잠자리에 다리 뻗고 눕는 것만큼 완벽한 휴식은 없다.현지의 일기는 불순했고 일행에게 노익장을 과시하고 싶은 객기까지 가세해 나에게는 고단한 여행이었다.겉으로는 재미있어하는 척하면서도 밤이면 친척집에 맡겨진 어린애처럼 우리 집에 갈 날이 몇 밤 남았나,손가락을 꼽아가며 헤아려 보곤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아무리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내 집밖에 없다는 진부한 감회와 안도감을 만끽하기도 전에 뭣 하러 텔레비전은 틀었던지.몸에 밴 습관 때문이었을 것이다.마침 뉴스시간이었다.뉴스시간에 제일 먼저 등장해 지지고 볶고 고함치고 삿대질하는 정치하는 사람들과 정치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저 사람들을 안 보는 게 얼마나 달콤한 휴식이었던가를 비로소 깨달았다.다만 며칠이라도 저 사람들을 안 볼 수 있었으니 여행은 역시 좋은 거였다.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아니 달라진 게 있을 수도 있었다.돌을 던지던 사람이 돌을 맞는 사람이 돼 있을 수도,돌을 맞던 사람이 기사회생 돌을 던지는 사람이 돼 있는지도 모른다.내가 눈이 침침하여 그것을 분간 못할 뿐.나는 이제 눈 어둡고 정신도 예전만큼 명징치 못해 누가 옳은 사람이고 누가 옳지 못한 사람인지,누가 거짓말쟁이고 누가 정직한 사람인지,누가 믿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못 믿을 사람인지 분간하지 못한다.그들 스스로는 알까.워낙 서로 진흙탕을 많이 처발라서 내가 누군지 상대방이 누군지도 분간 못하는 게 아닐까.‘저 꼴 보기 싫어 못살겠다.’라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게 그들의 이전투구는 정말이지 넌더리가 났다. 이나이까지 통과해온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회상해보면 빈곤도 빈곤이지만 정치판도 지금보다 훨씬 더 개판인 적도 많았다.오죽해야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구호가 만백성에게 회자되었을까.그러나 못살겠으면 갈아보면 된다고 믿을 수 있었던 때는 행복한 시대였다.갈아치운다는 건 요샛말로 하면 개혁이 아니었을까.개혁정부가 들어서고 개혁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국민의 표까지 조작하고 도둑질하던 더러운 시대에도 국민들은 선거에 의해 부패한 정권을 갈아보려는 착하고 정결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매번 좌절하고도 꿈을 버리지 않았고 다음 선거를 기다리곤 했다.정치가들이 저렇게 이합집산과 서로 흠집 내기에 열중하는 걸 보면 선거철이 가깝긴 가까운 것 같은데 저들을 갈아 치우고 새로 맞이하고 싶은 새얼굴이 도대체 떠오르지 않으니 어떡하나. 나처럼 희망을 잃거나 분별력이 시원찮은 사람이 선거에 불참하거나 표를 잘못 찍을까봐 염려해서 누구는 좋은 사람이고 누구는 나쁜 사람이라는 걸 가려주겠다는 친절한 단체까지 생겨나고 있다.고마운 노릇이지만 하도 정치가 혐오스럽다 보니 누가 단체를 만든다고 하면 정치적이 될까봐 경계하는 마음부터 갖게 된다.정치하고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모임도 어느 정도의 영향력만 생겼다 하면 정해진 수순처럼 정치적으로 변질하고,기어코 진흙탕까지 묻히고 마는 걸 어디 한 두 번 보았나. 그러고 보니 이 난을 맡으면서도 정치얘기는 하지 말자 작심하고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하고 말았다.아무리 더러워도 피할 수 없는 그 놈의 정치라는 것,그건 이 시대의 질병인가 악몽인가.산뜻하게 깨어날 수 있는 주문 어디 없을까. 소설가˝
  •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노망을 빙자한 한마디/박완서 소설가

    열흘가량 여행을 다녀왔다.여러 번 갔던 나라를 또 가니까 이왕이면 안 가본 나라를 가지 뭣 하러 가본 데를 자꾸 가냐고,식구들도 친지들도 의아해했다.하긴 그랬다.호기심 없이 떠나는 여행은 설레지 않는다.그건 여행의 기쁨의 절반쯤은 미리 잃고 떠나는 셈이니 굉장한 손해다.아무데나 여기 아닌 딴 곳에서 멍청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던 차에 마침 나에게 적당한 일정과 편안한 일행을 만나게 되었으니 행선지는 어디라도 상관 없었나 보다.그러나 막상 집을 떠나보면 쉬고 싶어 어디를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게 된다.이 세상에 내 집처럼 편한 쉼터가 어디 있겠는가.늙어갈수록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고 적당히 따습고 적당히 딱딱한 내 집 잠자리에 다리 뻗고 눕는 것만큼 완벽한 휴식은 없다.현지의 일기는 불순했고 일행에게 노익장을 과시하고 싶은 객기까지 가세해 나에게는 고단한 여행이었다.겉으로는 재미있어하는 척하면서도 밤이면 친척집에 맡겨진 어린애처럼 우리 집에 갈 날이 몇 밤 남았나,손가락을 꼽아가며 헤아려 보곤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아무리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내 집밖에 없다는 진부한 감회와 안도감을 만끽하기도 전에 뭣 하러 텔레비전은 틀었던지.몸에 밴 습관 때문이었을 것이다.마침 뉴스시간이었다.뉴스시간에 제일 먼저 등장해 지지고 볶고 고함치고 삿대질하는 정치하는 사람들과 정치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저 사람들을 안 보는 게 얼마나 달콤한 휴식이었던가를 비로소 깨달았다.다만 며칠이라도 저 사람들을 안 볼 수 있었으니 여행은 역시 좋은 거였다.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아니 달라진 게 있을 수도 있었다.돌을 던지던 사람이 돌을 맞는 사람이 돼 있을 수도,돌을 맞던 사람이 기사회생 돌을 던지는 사람이 돼 있는지도 모른다.내가 눈이 침침하여 그것을 분간 못할 뿐.나는 이제 눈 어둡고 정신도 예전만큼 명징치 못해 누가 옳은 사람이고 누가 옳지 못한 사람인지,누가 거짓말쟁이고 누가 정직한 사람인지,누가 믿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못 믿을 사람인지 분간하지 못한다.그들 스스로는 알까.워낙 서로 진흙탕을 많이 처발라서 내가 누군지 상대방이 누군지도 분간 못하는 게 아닐까.‘저 꼴 보기 싫어 못살겠다.’라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게 그들의 이전투구는 정말이지 넌더리가 났다. 이나이까지 통과해온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회상해보면 빈곤도 빈곤이지만 정치판도 지금보다 훨씬 더 개판인 적도 많았다.오죽해야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구호가 만백성에게 회자되었을까.그러나 못살겠으면 갈아보면 된다고 믿을 수 있었던 때는 행복한 시대였다.갈아치운다는 건 요샛말로 하면 개혁이 아니었을까.개혁정부가 들어서고 개혁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국민의 표까지 조작하고 도둑질하던 더러운 시대에도 국민들은 선거에 의해 부패한 정권을 갈아보려는 착하고 정결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매번 좌절하고도 꿈을 버리지 않았고 다음 선거를 기다리곤 했다.정치가들이 저렇게 이합집산과 서로 흠집 내기에 열중하는 걸 보면 선거철이 가깝긴 가까운 것 같은데 저들을 갈아 치우고 새로 맞이하고 싶은 새얼굴이 도대체 떠오르지 않으니 어떡하나. 나처럼 희망을 잃거나 분별력이 시원찮은 사람이 선거에 불참하거나 표를 잘못 찍을까봐 염려해서 누구는 좋은 사람이고 누구는 나쁜 사람이라는 걸 가려주겠다는 친절한 단체까지 생겨나고 있다.고마운 노릇이지만 하도 정치가 혐오스럽다 보니 누가 단체를 만든다고 하면 정치적이 될까봐 경계하는 마음부터 갖게 된다.정치하고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모임도 어느 정도의 영향력만 생겼다 하면 정해진 수순처럼 정치적으로 변질하고,기어코 진흙탕까지 묻히고 마는 걸 어디 한 두 번 보았나. 그러고 보니 이 난을 맡으면서도 정치얘기는 하지 말자 작심하고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하고 말았다.아무리 더러워도 피할 수 없는 그 놈의 정치라는 것,그건 이 시대의 질병인가 악몽인가.산뜻하게 깨어날 수 있는 주문 어디 없을까. 소설가
  • 책/오사카 상인들

    홍하상 지음 효형출판 펴냄 ●상호 적어놓은 휘장 ‘노렌'은 곧 신용 1583년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에 역대 최대의 성을 지었고,‘천황'이 있는 교토를 능가하는 경제권을 오사카에 이룩하고자 했다.그래서 그는 후시미·오우미·사카이·히라노 등 일본의 4대 상인을 오사카에 모았으며 쌀시장과 생선시장,야채시장 등 3대 시장을 통해 오사카를 각종 산물의 집산지로 만들었다.본격적인 상인 도시가 된 것이다. 특히 17세기 쌀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한 오사카의 센바(船場) 상인은 ‘돈을 남기는 것은 하,가게를 남기는 것은 중,사람을 남기는 것은 상’이란 신조로 상인정신을 키워나갔다.그 바탕엔 고객이 있는 한 사업은 영원하기 때문에 눈앞의 이익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오사카 상인들’(홍하상 지음,효형출판 펴냄)은 오사카 상인의 명성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오사카 상인들은 최소한 400년 이상 장사를 해오면서 나름의 상인철학과 힘을 쌓았다.“상인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도 놀란다.”는 말은 오사카 상인을 두고 하는 말.천하의 쇼군들도 상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정치를 해나갈 수 없었다.사농공상의 사회였지만 오사카에서만큼은 상사농공(商士農工)의 순으로 상인이 무사 위에 있었다.“밖에서는 무사,안에서는 상인”이란 속담도 같은 맥락이다. 오사카 상인의 상징은 ‘노렌(暖簾)’이다.노렌은 상호를 적어 점포 앞에 내거는 휘장을 일컫는 말이다.이 노렌은 곧 신용을 의미한다.노렌을 내린다는 것은 오사카 상인에게는 죽음과 같은 것.오사카 상인의 정신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노렌은 지킨다.”라는 그들의 말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세계서 가장 오래된 기업 ‘공고구미' 이같은 상인정신의 정수를 간직해온 곳인 만큼 오사카에는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들이 한 둘이 아니다.586년에 세워진 건축회사 공고구미(金剛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의 금세공회사 토리니 피렌체보다 800여년이나 앞선다.600년 역사의 화과자점 스루가야,500년 전통의 이불가게 나시카와,400년 역사의 히야제약 등 오사카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점포나 기업이 500개가 넘는다.세계 5대 전자회사 가운데 하나인 마쓰시타그룹,일본 맥주 시장을 휩쓰는 아사히 맥주,일본산 위스키의 원조 산토리 위스키,세계 최초의 라면개발회사 닛신식품,세계 2위의 비디오 게임 업체인 게임왕국 닌텐도,고품격 백화점의 대명사 다카시마야 등은 일본 경제를 주도하는 오사카의 대표적인 재벌들이다. ●오사카-도쿄 지역감정의 근원이기도 책은 오사카 상인과 일본의 지역감정 문제도 다뤄 눈길을 끈다.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천하를 재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의 본거지인 오사카를 떠나 도쿄로 옮겨갔다.도쿠가와는 누구보다 상업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번주마저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오사카 상인들을 두려워해 그들과 거리를 뒀다.일본의 지역감정은 여기에 그 한 뿌리를 대고 있다.오사카 사람들은 도쿠가와를 싫어하는 반면 도요토미는 신으로 떠받든다.미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바늘 장사와 도둑질로 먹고 살았지만 마침내 난세를 헤치고 천하의 권력을 쥔 입지전적인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서쪽의 중심인 오사카 사람들과 동쪽의 중심인 도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뿌리 깊은 지역감정으로 맞선다.도쿄에 살고 있는 ‘천황'에 대해서도 오사카 사람들은 ‘천황'이 도쿄로 ‘장기 출장을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도쿠가와가 에도(도쿄의 옛 이름)로 천도를 했지만 오사카는 여전히 ‘천하의 부엌’,즉 상업의 중심으로 남아 있다.일본의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도쿄 출신이지만 “음식은 오사카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시골이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싼 값으로 손님에게 승부수 던져 도쿄와 오사카는 일본의 동과 서를 대표하는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여러 면에서 대조를 보이고 있다.심지어 음식이나 말에서도 뚜렷이 구분된다.도쿄 사람들은 메밀국수를 좋아하는 데 비해 오사카 사람들은 밀국수를 좋아한다.국물을 낼 때도 도쿄 사람들은 말린 가다랑어를 사용하는 반면 오사카 사람들은 다시마와 톳을 쓴다.오사카 사람들은 식빵을 두껍게 썰어 먹지만 도쿄 사람들은 얇게 썰어 먹는다.말의 속도도 다르다.오사카 방송국의 아나운서는 1분에 800 단어를 읽지만 도쿄의 아나운서는 1분에 500 단어를 읽는다고 한다.오사카 말이 이처럼 빠른 것은 짧은 시간에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오사카 상인들이 말을 빨리 한 것이 생활화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사카 상인들이 흔히 쓰는 ‘옷소매 아래의 가격’이란 표현 또한 투박하고 거친 오사카 상인의 장사꾼 기질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오사카 상인은 때로는 정찰제도 무시하고 최대한 싼 가격으로 손님에게 승부수를 던진다.자유분방한 오사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분방함이 지나쳐서 일까,야쿠자의 본고장도 오사카다.오사카 번화가인 도톤보리에 단골집이 여럿 있을 정도로 현지 사정에 밝다는 저자는 “오사카 상인은 장사에서라면 결코 지지 않는 ‘상인 중의 상인’”이라고 말한다.1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儒林(유림) 속 한자이야기

    유림(13)에 梁柱가 나오는데 梁(들보 량)과 柱(기둥 주)의 공통점은 木자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木자가 들어간 한자는 그 뜻이 나무와 연계되어 나왔으며 本(뿌리 본),末(끝 말) 등과 같이 木자를 이용하여 추상적으로 만든 일부 한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村(마디 촌),材(재목 재),枯(마를 고),梅(매화 매),棟(마룻대 동)과 같이 木자를 제외한 부분이 음이 된다. 柱자도 마찬가지인데 主(주인 주)자가 들어간 한자는 거의가 住(거처할 주),注(물댈 주),駐(머무를 주) 등과 같이 ‘주’로 발음된다. 梁柱는 (대)들보와 기둥으로 집을 지탱하는 핵심 목재(木材)들이기에 국가나 사회의 중요한 인물을 뜻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의미의 한자어로는 柱石(柱石之臣의 준말)과 棟梁(마룻대와 들보)도 있다. 마룻대는 서까래를 지탱하며 집 중앙을 가로로 버텨 주는 가로 막대이며,들보는 집의 상단부를 받쳐 주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얹히는 굵은 나무인데,들보 중에서도 가장 굵고 강한 것이 대들보이다. 우리는 대들보 하면 보통 두 가지 일화를 떠올린다. 하나는 대들보가 이처럼 중요하기에 집을 지을 때 간혹 행하는 ‘대들보 올리는 행사인 上梁式’이다. 이는 家家戶戶(가가호호:집집마다) 그 집을 보호하는 神(귀신 신)이 있는데,그 중에서 제일 높은 신인 상량신(上梁神) 또는 성조(成造)라고도 하는 성주신을 맞이하는 행사로 성주맞이 굿을 하기도 한다. 성주신(상량신)이 가신(家神)으로 모셔지게 된 사연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하늘의 천궁대왕과 옥진부인은 39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다가 불공(佛供)을 드려 아들을 낳았는데,이름을 안심국(安心國)이요, 별호(別號:별도의 호칭)를 성조씨(成造氏)라 했다.성조가 15세 되었을 때 인간들이 집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는 땅에 내려와 나무를 이용하여 집 짓는 것을 가르쳐 주려 했다.그러나 산신(山神)의 반대로 솔씨 서말 닷되를 산에다 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그 후 그가 74세였던 어느 날 그가 심었던 소나무가 생각나서 10명의 子女를 거느리고 땅에 내려왔다가 연장을 만들어 인간들에게 집을 지어 주었다.즉 성조가 인간에게 집 짓는 방법을 처음 가르쳐 준 셈이다.그래서 입주신(入住神)인 성주신으로 모셔지게 된 것이라 한다. 또 하나의 일화는 후한서(後漢書)에 전하는‘양상군자(梁上君子)’이다. 후한(後漢) 말 ‘진식’이라는 사람이 태구현의 관리로 있을 때였다.흉년이 든 어느 해에 진식이 방에서 책을 읽는 중에 마침 도둑질하러 방안에 들어왔다가 미처 나가지 못하고 대들보 위에 숨어 있던 도둑을 발견했다. 그러나 진식은 모르는 척하며 아들과 손주들을 불러 “무릇 사람은 스스로 힘써야 하느니라.나쁜 사람도 본성(本性)이 나쁜 것은 아니고,나쁜 행실이 습관이 되어 나쁜 일을 하게 되는 것이야.예를 들면 지금 저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처럼 말이다.”라고 훈계했다. 그러자 이 말에 마음이 찔린 도둑이 내려와 진심으로 사죄했고,진식은 그를 가엽게 여겨 비단 두 필을 주었다는데,그 후로 그 현에는 도둑이 없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도둑을 미화하여 양상군자라 부르게 된 것이다. 유림(9)에 나오는 禁府堂上(금부당상:의금부당상관)의 직책을 맡은 사람도 棟梁 중의 한 사람이라 생각된다. 정3품인 통정대부 이상을 당상관,정3품인 통훈대부 이하 관리를 당하관이라 했는데,당하관들은 망건(網巾)에 까막관자를 붙인 반면,당상관들은 옥관자(玉貫子:옥으로 만든 관자)를 붙였다. 그런데 당상관들의 옥관자는 망건에서 떼어 놓아도 좀이 먹거나 변색되거나 또는 전국에 몇 개 되지 않아 잃어버릴 염려도 없었다. 그래서 ‘일이 확실하여 조금도 틀림없다.’라는 의미로 ‘떼어 놓은 당상(망건에서 떼어 놓은 옥관자)’이라 하는데,이를 ‘따 놓은 당상’이라 하여 이미 따놓은 벼슬자리를 뜻한 것처럼 잘못 사용되기도 한다. 박 교 선 교육부 연구사
  • [나의 건강보감] 국민소리꾼 신영희 씨

    “득음은 먼놈에 득음이라우?죽을 때꺼정 득음,득음 허다가 말겄제.”우렁우렁한 우조와 애절한 계면조,12박 중모리에서 4박 휘모리까지,그리고 동·서편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의 소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지만 환갑을 넘긴 그는 지금도 제 목으로 내는 ‘소리’가 성에 안찬다.그래서 나이 들수록 ‘명창’이라는 찬사가 부끄럽고,‘국민소리꾼’이라는 말이라도 들을라치면 ‘오메,저거이 먼 소리랑가.’싶어 턱,하고 오금이 꺾인다.“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내가 소리꾼 아부지헌티 받은 것은 이것이 전부라 따른 일 생각한 적도 고,그래서 이것 아니믄 내가 어치케 험한 세상 살겄냐 싶어 젊어서는 20년 30년을 미친년겉이 소리 소리 토했어도 득음은 숭내도 못내봤소.” ●소리꾼 아버지 반대 무릅쓰고 시작 명창 신영희(63).그는 소리꾼이다.그것도 ‘내가 난데…’하고 수염만 훑는 ‘방안풍수’가 아니라 전국 팔도 소리가 있어야할 곳이라면 불원천리 뛰어가는 소리의 전령이다.“세상이 그란다는디 말해 뭣하겄소만 사람이 지 뿌리럴 모르고으게 사람노릇 허겄소.요새 젊은 사람덜 신식노래 좋아허는 거 탓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뭣이 우리 껏인지는 알어야 안쓰겄소.” 영화 ‘서편제’와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박동진 명창의 CF,그리고 그가 TV에서 개그맨 김미화씨 등과 함께 엮은 ‘개그 소리’를 묶어 ‘소리 중흥의 3대 사건’이라고 일컫는다.이렇듯 그는 소리의 대중화에 젊은 시절을 한 허리 뚝 떼어내 바쳤다. “소리,소리 말도 마쑈.나야 내가 좋아서 했제마는,참말로 피눈물 나는 세월 안살믄 소리 못허요.암만 웃음서 해도 소리는 한(恨)이 내는 것 아니요.”열한 살 나던 해,아버지한테 소리를 배우던 젊은 소리꾼이 한 대목 고비를 못넘기고 꺽꺽거리자 그는 대뜸 방문을 열고 들어가 ‘들은 풍월’로 흥부 매품팔러 가는 대목을 뽑아 넘겼다.“그때 울아부지가 내 소리럴 듣고넌 후∼,허고 한숨을 쉬시면서 고개럴 푹 꺾습디다.그때만 해도 여자소리꾼은 기생 취급하던 시절인디,어느 부모가 지 새끼 소리를 시킬라고 했겄소.”그런 아버지를 어머니가 설득했다.“기생이든,말든 명창되믄 안되겄소?”해서 겨우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 소리꾼의 삶을 시작했다.그의 아버지 신치선씨는 진도 어름에 소문이 짜한 소리꾼이었다.그는 소리꾼의 끼를 타고났다.아버지는 그의 손을 끌고 수백리길을 걸어 소리품을 팔러 다녔으며,가는 곳마다 “그놈,한 소리 허겄다.”는 말을 들었다.이듬해,‘소리 한번 원없이 해보겠다.’고 작정한 가족은 목포로 거처를 옮겼으나 신식 바람에 살랑거리는 도회는 소리꾼에게 결코 녹록한 삶터가 아니었다. “유달산 아래 죽교동에서 살었는디,새벽 4시 통금 사이렝만 울리믄 털고 일어나 후적후적 유달산을 타고 올라갔어요.거그 유선각 아래 쬐끄만 바위굴에 들어앉아 바위등을 두들기며 6∼7년 소리연습을 했더니 목이 자리를 잡습디다.” 오빠들 틈바구니에서 선머슴처럼 자라 몸 하나는 실한 그였지만 허튼 공력으로 명창이 될 수는 없었다.열 여섯에 아버지를 여의고 잔칫집,소리판을 전전해 심봉사 젖동냥 하듯 큰오빠 대학까지 공부시키면서도 김상룡 강도근 장월중선 최일환 박봉술 김준섭씨 등 당대의소리꾼은 모두 찾아다니며 내공을 쌓았다.서른 한살나던 73년에는 춘향가 세종제를 완창하더니 마침내 그 이듬해 명창 김소희씨를 만나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그가 요새 선보이는 창법은 바로 김소희씨의 만정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장시간 연습하다 보면 목에 통증… 똥물 접해 “천하는 사람도 앉아서는 득도 못허요.소리꾼 치고 골병 안든 사람 봤소?나도 한창 클 때 주린 속에 하루 열 대여섯시간씩 소리연습을 허고 나면 목울대며 배가 띵띵 붓고 아퍼 내 살인디도 내가 만지덜 못허겄습디다.그때 말로만 듣던 똥물 첨 묵어봤소.”아무리 몸에 좋다 해도 남의 똥은 엄두가 안나 자신의 똥을 우려 마셨다.소리꾼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옹구그럭에 물붓고 그걸 푼 뒤 하루밤쯤 가라앉혀 우러난 물을 마시는디,소리로 골병든 어혈 푸는데는 그만입디다.” 소리는 단전에 기를 모아 내뱉기 때문에 기력이 달리면 절대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그가 지금도 반신욕으로 항상 단전을 따뜻하게 지키고 뜀뛰기로 기력을 키워가는 이유다.“사람마다 목욕법이 다르겄지만,나는 반신욕과 욕탕 뜀뛰기가 좋습디다.”더운 물에 하반신을 담그고 20∼30분쯤 지나 몸이 덥혀지면 간단한 맨손체조로 몸을 유연하게 한 뒤 곧장 냉탕에 들어가 제자리뛰기를 하는데,뛰는 횟수가 한번에 3000번 가량 된다.뜀뛰기를 하다보면 금세 더워져 몸이 오그라 붙는 찬물 속에서도 차갑다는 느낌을 못받는다.“그 운동이 장(腸)을 정리하는 데는 그만이요.소리가 배에서 나는디,장이 시끌벅적허믄 좋은 소리가 나올 턱이 지요.” ●‘똥물 마셔 목 틔우기' 소리꾼 통과의례 소리꾼은 물론 방송일을 같이 해본 사람은 누구나 아는 식도락도 그가 세상을 ‘재미나게’ 사는 방법.“식도락인지는 몰라도 음식은 꼭 가려서 묵지요.조미료로 맛내는 집은 두번 걸음을 안허요.나도 손끝이 매워 음식은 제법 맹근다는 말 듣고 살었지요.”이런저런 밑반찬에 농어·민어매운탕과 게장 등 그의 손맛은 소문이 나 전통음식책까지 펴냈을 정도다.또 사철 집에 홍어가 끊이지 않아 부군인 서석주씨도 “집사람음식 아니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고 할 정도. 지난 81년,그는 월정사로 탄허스님을 찾아가 심청가 중 심청이 유언하는 대목으로 ‘소리공양’을 했다.그의 절창에 노스님은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더니 그에게 무현(無絃)이라는 아호를 내렸다.그후,탄허스님이 입적하기 직전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생전 처음 병실을 찾아 소리를 하기도 했다.이렇듯 ‘소리밭’에 한 줌 거름으로 생애를 묻고 살지만 그는 아름다운 가인(歌人)이다.그래도 ‘소리’와 ‘웃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 글 심재억기자 jeshim@ 사진 강성남기자 snk@ ■소리꾼과 똥물이야기 사실,목을 틔우고 전신의 어혈을 풀어내기 위해 똥물을 마시는 일은 예전 소리꾼에게 통과의례 같은 일이었다.설령 똥물을 안마신 사람도 엄두가 안났을 뿐 몰라서 안마신 경우는 없었다.“소리허다 보믄 목이 띵띵 붓고 잠겨 피를 토하기도 하고,뱃거죽이 붓고 땡겨 ‘이러다가 죽는 것 아닐까.’싶을 때가 있습디다.그때 나도 똥물을 마셨지요.” 지금이야 의사 많고 약이좋아 이런 체험을 하는 사람이 없지만 예전에는 ‘매맞아 생긴 장독(杖毒) 푸는데는 똥물이 최고’라고 했다.일종의 민간요법이다.그는 “그래도 남의 똥은 생각도 못했고 내 걸 썼으니 좀 낫지요.그냥 물에 풀어 말갛게 가라앉은 웃국을 마셨는데,전신에 후끈 열이 돌고 땀이 배어 이불 뒤집어쓰고 한숨 자고 나믄 소리로 골병든 삭신이 정말로 말짱해집디다.” 민간에서는 대나무 마디를 통째로 잘라 돌을 매단 뒤 잘 삭은 똥통 속에 담가 뒀다가 며칠 뒤 꺼내 속에 고인 노란 물을 마셨다.더러는 소줏병 주둥이를 솔잎으로 틀어막아 거르거나,묵은 똥통을 작대기로 휘저어 곰삭은 아래쪽 똥물을 퍼올린 뒤 고운 무명베로 걸러 마시기도 했다. 판소리 연구가인 군산대 최동현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주로 인분을 사용했으나 더러는 개똥을 사용하기도 했으며,이런 방식이 목을 다치기 십상인 소리꾼에게 약이 됐던 게 사실”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심재억기자
  • 강현숙의 뷰티 살롱/매력의 필요충분조건 ‘미소’

    이미지 메이킹이나 자기 관리를 위해 성형수술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얼굴만 예쁘다고 진정 예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다니는 친구가 부러워서 차 떼기로 친구의 모든 명품을 도둑질한 20대 여성의 가치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얼굴을 뜯어고쳐 몰라볼 정도의 미녀가 명품 패션으로 치장하고 다닌다 해도 그 얼굴에서 미소를 찾아 볼 수 없다면 그는 아름다운 석고상에 불과하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재산은 인격적 매력(personal magnetism)이 아닐까? 자석처럼 끌리는 인격적인 지적 매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이 매력을 지닌 사람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어디를 가나 주위 사람을 기쁘게 하는 피스 메이커(peace maker)의 역할을 한다.반면에 이것이 부족한 사람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주위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워 메이커(war maker)의 역할을 한다. 세일즈의 기본 원칙은‘당신 자신을 팔아라(Sell yourself)’이다.자기 자신을판다는 말은 판매자의 가치를 높일 때 상품의 가치 역시 높아진다는 의미이다.자기라는 이미지를 세계라는 거대한 시장의 한 상품으로 생각해 보자.만약에 팔리는 상태가 나쁘면 자신의 이미지에 인격적인 매력을 곁들여 다시 한번 광택을 내 보자.자기라는 이미지의 새로운 상품이 어떻게 탄생될지 한번 기대해 보자.따라서 외모 계발과 인격 계발은 절대적으로 나란히 가야 한다.서로 균형이 맞지 않으면 비틀어지게 보이기 때문이다. 자,그러면 인격 계발의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일까? 가장 쉽고도 어려운 게 늘 상냥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다.꽃을 든 여자보다는 잘 웃는 여자가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이다.꽃은 어떤 꽃집에서도 살 수 있지만 잘 웃는 여자 뒤에 숨겨진 인격과 친절은 그녀 아니면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출근 길 스치는 사람들에게 딱딱하고 무표정한 얼굴보다는 오히려 살짝 한번 미소를 지어주자.누가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좋다.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따듯한 미소만큼 좋은 치유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국민대 미용예술아카데미 학과장
  • 대박좇다 30억날린 증권맨 ‘강도로 재기’ 꿈꾸다 쇠고랑/前 팍스넷 분석가, 11억 강도 행각 덜미

    1억원을 넘는 4.5캐럿짜리 다이아몬드,롤렉스·카르티에·샤넬 등 고가의 수입 손목시계 20여점.수북이 쌓인 1만원권 지폐 옆에는 영국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식 기념주화도 놓여 있었다.경제전문 케이블TV의 전직 앵커이자 증시분석사인 한모(44)씨가 지난 1년 동안 서울시내 고급 주택가에서 훔친 귀중품들이다.그는 12일 강도강간 혐의로 구속됐다. ●강도강간 전과자서 잘나가는 분석가로 한씨는 지난해 3월까지만 해도 ‘잘 나가는’ 증시분석사였다.1996년부터 주식 투자로 큰 돈을 번 그는 2001년 10월 인터넷 금융정보제공업체인 팍스넷에 입사,투자정보 사업본부장을 지냈다.경제전문 케이블TV MBN의 증시분석 프로그램에도 고정출연하는 등 이름을 날렸다. 한씨가 추락하게 된 것은 2002년 말.그동안 사업과 주식투자로 번 돈 20억원을 장외시장과 선물·옵션 등에 투자했다가 고스란히 날렸다.빚도 10억원 넘게 졌고,투자실패 때문에 이듬해 4월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그는 “돈도 없고 막막해 도둑질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사실한씨는 지난 82년과 86년에 강도강간죄로 교도소에서 각각 4년,7년형을 살았던 전과자.경찰은 “원래 한씨의 특기는 강도”라면서 “애초에 주식투자했던 밑천도 유명 유아교육용 프로그램을 불법,복제해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 그만둔뒤 10평짜리 ‘강도 사무실' 얻어 본격적으로 강도짓을 벌이기로 마음먹은 한씨는 가족 몰래 강남구 개포동에 10평짜리 아파트를 따로 얻었다.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려면 ‘아지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증금 300만원,월세 40만원짜리 아파트에는 청계천 일대에서 구입한 전기충격기,만능열쇠,전자 진동형 만능열쇠,대형절단기 등 각종 범죄장비를 갖다 두었다.열쇠구멍에 꽂기만 하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만능열쇠와 ‘다이아몬드 감별기’는 필수품.종로 일대 상가에서 구입한 20만원짜리 감별기는 가짜 다이아몬드에 갖다 대면 ‘삑삑’하는 경고음을 낸다. 고가의 귀금속에 비해 처분하기 쉬운 금붙이를 금은방에 팔아 그 돈으로 ‘아지트’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주식투자도 했다. ●훔친 수표는 추적피하려 돈세탁도 한씨는 지난달 30일 이태원동에 있는 주한 영국영사의 사택에 들어가 현금 100만원과 귀금속 7점을 훔치는 등 지난 1년 동안 고급주택가 19곳에서 강도강간 등을 일삼으며 모두 11억원어치의 금품을 훔쳤다.경비가 삼엄한 아파트 단지는 피하고 용산구 이태원동,강남구 역삼동 등지의 고급 단독주택가만 찾아다녔다.사전답사를 통해 주인이 집에 없는 시간을 골랐다. 지난해 4월 역삼동의 빌라에 침입,최모(23·여)씨를 성폭행하는 등 범죄행각을 시작한 한씨는 지난달 31일 오후 1시30분쯤 용산구 이태원의 고급주택가로 숨어 들어갔다.그는 2층 침실에서 잠을 자던 고모(33)씨를 흉기로 위협해 1층 안방 장롱에 들어있던 현금 500만원과 미화 8000달러,수표 4000만원짜리 1장과 100만원짜리 7장 등 모두 8560만원을 훔쳤다.보석함에 들어있던 고급 손목시계와 4.5캐럿짜리 다이아몬드도 빼앗았다. 훔친 수표는 피해자가 추적하지 못하도록 ‘세탁’했다.한씨는 훔친 김모(48)씨의 신분증 사진이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점에 착안,김씨의 이름으로 모증권 방배지점에 계좌를 개설했다.이 계좌에 수표 8560만원을 집어넣었다가 다른 지점에서 현금으로 5050만원을 인출했다.이 돈으로는 사채빚과 신용카드 대금을 갚았다.훔친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려다가 잠복중인 경찰에 붙잡힌 한씨는 “주식에 투자해 한탕하려다 순식간에 망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게 됐다.”고 고개를 떨구었다. 박지연기자 anne02@
  • 주말매거진 We/세상에 이런 일이-국내

    대학로서 3000명 우르르 나 잡아봐 ~ 라 ‘누가 술래고 누가 행인이야?’ 3000명이 넘는 인원이 한 장소에 모여 ‘술래잡기’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지난달 31일 오후 3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tag2003’(playtag.co.to)이라는 사이트에서 주최한 ‘범국민 대규모 술래잡기’에 네티즌들이 구름같이 모여든 것. 이날 술래잡기는 ▲도망자가 술래에게 잡히면 서로 역할을 바꾸는 ‘고독한 술래’ ▲술래에게 잡힌 도망자가 계속 술래가 돼 모두가 술래가 된 다음에야 끝이 나는 ‘무한증식 술래’ 등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다.참가자들은 술래가 되지 않기 위해 마로니에 공원 일대를 필사적으로 뛰어다녀 시민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서울에서의 성공적인 술래잡기에 힘입어 네티즌들은 지난 1일 부산에서 150여명이 모인 가운데 술래잡기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의 놀이를 벌였으며 일산과 대구,인천의 네티즌들도 속속 카페를 결성,지역별로 비슷한 형태의 대규모 술래잡기를 계획하고 있다. 놀이를 최초로 제안했던 오형종(19·ID시시로)군은 “한 스포츠 의류용품업체가 술래잡기를 주제로 만든 광고 동영상에서 힌트를 얻어 우리도 해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해 놀이를 제안하게 됐다.”고 말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 걷기 귀찮아 자전거 ‘슬쩍' “장난으로 훔쳤을 뿐인데 죄가 될 줄 몰랐습니다.”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수서경찰서 형사계.이모(20)군 등 20대 젊은이 3명이 나이 지긋한 경찰로부터 훈계를 듣고 있었다.“학생들이 할 일이 없어 도둑질을 해? 너희들 학생만 아니었으면 모조리 구속이야.” ●음주 뒤 ‘객기’가 화근 전날 고등학교 동창모임에서 술을 마시고 집에 가던 길에 자전거를 훔친 대학생들이었다.이들의 얼굴에선 ‘억울함’과 ‘당혹감’이 교차했다.취중에 장난삼아 벌인 일이라고 항변해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들 모두 강남구 개포동과 대치동의 중형아파트에 사는 ‘8학군’ 출신이었다.아버지가 중앙정부기관 공무원인 사람도 있었다. 괜한 ‘객기’가 화근이었다.적당히 취기가 올라 밤 10시쯤 귀가하던 이들은 일원동의 주택가에서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자전거를 발견했다.이군이 “집까지 걸어가기도 귀찮은데 자전거를 타고가자.”고 제안했다. 자전거 1대를 번갈아 타가며 집이 있는 개포동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자정도 다가오고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웠던지 일행 중 누군가 “2대를 더 훔쳐 1대씩 타고 놀자.”는 얘기를 꺼냈다. 대담해진 이들은 30분 남짓 개포동의 아파트단지를 돌며 2대를 더 훔쳤다.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마지막으로 자전거를 끌고 나오던 신모(20)군이 순찰중이던 60대 아파트 경비원에 붙들렸다.도망칠 기회도 있었지만 ‘이게 무슨 큰 죄가 될까.’란 생각에 순순히 경찰서까지 동행했다. 경찰은 초범인데다 학생 신분이란 점을 감안해 이들을 불구속 입건하는데 그쳤다.다음날 오전 경찰서 문을 나서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실감하지 못하는 듯했다.“법이 이렇게 엄한 줄 몰랐다.이제 우린 전과자가 된 거냐.”며 태연히 대화를 나눴다. 강남 최고급 빌딩 화장지도 비쌀까? 같은 시각 서울 강남경찰서 형사계에도 이모(19)군 등 대학생 4명이 절도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이들이 훔친 것은 두루마리 화장지.광진구 성수동에서 자취생활을 하던 이들은 자취방에 화장지가 떨어지자 대형건물 화장실에는 24시간 화장지가 비치된 것을 떠올렸다. 30일 오후 5시 이들은 화장지를 넣을 빈 스포츠가방을 준비해 역삼동 스타타워로 향했다.‘서울에서 가장 비싼 빌딩이니 화장지 질도 좋을 것’이란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묘한 쾌감마저 느껴졌다.화장실을 돌며 화장지 21개를 챙겼다.범행에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엔 찜찜한 기분도 없지 않았지만 ‘1만원어치도 안 되는데 무슨 죄가 될까.’ 싶었다.하지만 이들은 때마침 연말을 맞아 취약지 순찰을 하던 경찰과 맞닥뜨렸다.불룩한 가방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이들을 경찰이 그냥 보아넘길 리 없었다. 결국 이들은 경찰서로 연행돼 하룻밤을 보호실에서 보내야 했다.학생 신분을 내세워 선처를 호소했지만 법은 엄정했다. 강남경찰서는 31일 이들을 절도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세영기자 sylee@ 돈 안주면 “부처님도 싫어” 돈 문제로 절 주인과갈등을 빚던 주지 스님이 절에 불을 질러 경찰에 붙잡혔다. 경남 거제경찰서는 4일 자신이 주지로 있는 사찰에 불을 지른 ‘이진암’ 주지 김모(47)씨에 대해 일반건조물 방화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는 지난 3일 오전 8시30분쯤 거제시 일운면 옥림리 이진암 건물에 불을 질러 법당 70평과 불상 등을 태워 1억 5000만원의 재산피해를 낸 혐의다. 김씨는 사찰 주인인 김모(80)씨의 부인 강모(72)씨를 폭행해 부상을 입힌 혐의도 받고 있다. 김씨는 돈 문제로 절 주인 김씨와 갈등을 빚어오다 ‘주지를 그만두라.’고 하자 불만을 품고 불을 지르고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밝혀졌다. 35년만에 돌아온 병원비 40만원 돈이 없어 병원 치료비를 내지 않고 달아났던 환자가 35년만에 병원비 40만원을 갚았다. 인천 부평구 부평동 가톨릭대학교 성모자애병원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오전 11시쯤 40대 여자가 병원을 찾아와 안내원에게 “심부름 왔는데 원장님께 전해달라.”며 봉투를 전달했다.봉투에는 현금 40만원과 편지가 들어있었다. 편지에는 “저는35년 전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목숨을 끊으려 음독을 했는데 이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졌습니다.그런데 병원비를 낼 돈이 없어 몰래 도망했습니다.이제야 아주 작은 40만원을 죄스러운 마음으로 보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 하이 서울, 예스 서울신문/외국인 4인 ‘서울 생활’ 방담

    ‘서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주한외국인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피부색도,눈빛도,언어도 다르지만 ‘서울’이란 주제로 한바탕 수다를 떨었습니다.서울에 대한 첫인상,서울에서 감동받은 일,월드컵 이후 서울 사람들의 태도 변화 등 얘기 보따리가 풀어질 때마다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일본인 우에치 규지(37)와 프랑스인 벤자민 주아노(34),미국인 제임스 로겐백(34),모로코인 마리얌 탈비(33)는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서울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벤자민 주아노 처음에 서울에 왔을 때 프랑스 파리보다 큰 도시라 크게 놀랐습니다.넓은 도로,콘크리트 건물들이 눈에 띄더군요.옛 건물이 많은 유럽과 비교할 때 서울은 새롭게 변신하는 역동적인 도시란 인상을 받았습니다.이젠 서울에 있다가 유럽에 가면 그곳이 ‘죽은 도시’란 생각이 듭니다. 제임스 로겐백 서울이 뉴욕과 별로 다르지 않아 당황스러웠습니다.아시아 국가의 수도인 만큼,미국 등 서양과는 사뭇 다를 거라 기대했거든요.언어를 제외하면,패스트푸드점,유명브랜드 가게 등이 미국 대도시와 똑같습니다.너무나 현대적이라 600년 역사를 지닌 도시라 믿기 어려웠어요. 우에치 규지 빈부 차이가 매우 큰 도시라 느꼈습니다.도쿄에선 큰 부자도,아주 가난한 사람도 많지 않거든요.모두가 중산층이지요.하지만 서울에선 100평 넘는 집에 사는 사람도,판자촌에 사는 사람도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리얌 탈비 서울시민에 대한 첫 인상은 매우 정직하다는 거예요.동대문·명동 등에서 상인들은 물건을 밖에다 진열하잖아요.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훔칠 수 있는데 도둑질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어 놀랐습니다. 로겐백 서울시민들은 아주 사소한 일로 감동을 안겨줍니다.얼마전에 면접을 하러가는데 길을 잃었어요.두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휴대전화까지 걸어가며 끝까지 길을 안내하더군요.서울 생활이 고달플 때 따뜻한 서울 시민들을 생각하며 용기를 냅니다. 주아노 서울 시민들은 외국인에게 언제나 넉넉합니다.인구 100만명이 넘는 대도시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예요.외국인을 집으로 흔쾌히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는 사람들.서울시민들에게 받은 감동은 수없이 많습니다. 탈비 동생이 수술을 받아 3개월 동안 휠체어 신세를 진 적이 있어요.지하철을 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도와줬습니다.한번은 혜화역 휠체어 리프트가 고장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어요.40대 중반의 아저씨가 다가오더군요.그리고 한 손으로 휠체어를 들어 옮겨줬습니다.마음 속으로 ‘이왕 도와주는데 두손으로 하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아저씨가 어떻게 알았는지 반대쪽 손을 살며시 보여주더군요.그 분은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어요.그리고 잠시나마 불평했던 것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주아노 월드컵은 서울시민들에게 다양한 세계문화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다른 나라의 서포터스로 활동하면서 외국인을 편견없이 대하게 된 것 같아요. 탈비 월드컵 전엔 흑인 친구들과 서울 시내로 나가기가 꺼려지곤 했습니다.서울시민들의 차별대우로 민망해질 때가 많았거든요.그러나 월드컵 이후엔 그런 경험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피부색으로 차별하는 모습이 사라진 거죠. 우에치 외국기업·외국인 투자자가 점차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서울시민들도 외국인에 대해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로겐백 지난해 여중생 사망사건 이후 반미감정이 고조되면서 위협을 느끼기도 했어요.밤에 술취한 젊은이들이 모여 있으면 겁이 덜컥 났습니다.미국인 친구가 봉변을 당한 적이 있거든요.서울시민들이 미국정부의 정책을 반대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주한 미국인을 미국 정부와 동일시하지 말아주세요.저를 비롯해 미국정책을 반대하는 미국인이 많습니다. 탈비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9·11테러 이후 파키스탄인 등 무슬림들이 한동안 외출을 하지 못했어요.서울시민들이 이슬람 복장을 한 남성들을 보면 “왜 그렇게 끔찍한 짓을 했냐.”고 꾸짖었기 때문입니다.사실 주한 외국인이 무슨 잘못이 있나요. 우에치 외국인들은 독특한 한국문화를 이해하겠다는 애정 어린 눈길로 서울을 바라봐야 합니다.또 서울시민들도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개개인을 한인간으로 존중해 주길 바랍니다.그럴 때 서울이 진정한 ‘메트로폴리탄’으로 거듭날 거라 믿습니다. 정은주 박지연기자 ejung@ ●벤자민 주아노/프랑스인 (34) 서울생활 10년차.94년 군복무 대신 서울 프랑스학교 교사로 부임했다.의무기간 2년이 지났지만,한국문화에 완전히 매료돼 떠나지 않았다.대학교수로 일하다 2000년에 프랑스식당 ‘르 생텍스’를 열었다.값싸고 맛있는 프랑스 요리를 서울시민에게 소개하고 싶어서다.프랑스어로 한국 관광책자를 펴내는 등 ‘민간 외교관’으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마리얌 탈비/모로코인 (33) 서울생활 6년차.모로코로 아랍어를 공부하러 온 한국인을 만나 결혼,딸을 낳았다.딸은 현재 일곱살.98년 박사학위를 마친 남편을 따라 서울에 왔다.한국인들은 혼혈아를 차별한다고 얘길 들어 걱정했는데, 딸을 편견없이 예뻐해줘 너무 고마워한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고향에서 영어교사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보육원 등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우에치 규지/일 본 인 (37) 서울생활 5년차.지난 99년 일본인 아내와 서울에 온 뒤 별정통신업체인 프리즘커뮤니케이션스의 경영기획실장 겸 이사로 일하고 있다.지난해 아들을 낳았다.웹사이트(users.hoops.ne.jp/yorokaji)에 ‘한국사회 체험기’를 올려 큰 인기를 얻었다.부인도 요리학원에서 배운 솜씨로 닭볶음탕·육개장·북어국 등 한국요리 코너를 함께 운영한다. ●제임스 로겐백/미 국 인 (34) 서울생활 2년차.미시간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 법률회사에서 근무했다.뮤지컬을 전공한 덕에 94년부터 연극 3편에 출연했다.연극 ‘나의 아름다운 아가씨’(My Fair Lady)로 홍콩,방콕,싱가포르 등에서 순회공연을 했다.새로운 경험을 위해 지난해 홀연히 서울을 찾았다.지금은 강남구 대치동에서 아이들에게 동요·연극을 영어로 가르치고 있다. ■외국인이 추천한 서울의 명소 좌담에 참석한 외국인들은 서울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서구화된 빌딩 숲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입을 모았다.6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역사도시란 이미지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그래서 이들은 옛 정취를 간직한 곳을 서울명소로 꼽았다.또 이곳만큼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지켜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공통적으로 뽑힌 명소는 인사동.전통의 향취가 물씬 배어나는 소품이 가득해 눈요기에 좋다는 것이다.다만 최근에 외국식 건물이 들어서는 등 ‘개발’ 조짐이 보여 안타깝다고 했다. 주한 외국인은 서울 주변 산에도 큰 매력을 느꼈다.대도시에 북한산·관악산 같은 명산이 위치한 것은 이례적이란 것이다.이들은 “세계 어느 곳을 돌아봐도 인구 100만명이 넘는 메트로폴리탄에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산이 몇개씩 있는 도시는 없다.”고 밝혔다.미국인 제임스 로겐백은 특히 “관악산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서울대생은 누구보다 행복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여유있는 삶의 태도를 강조한 프랑스인 벤자민 주아노는 틈이 나면 종로구 가회동 한옥마을에서 산책한다고 말했다.서울의 ‘어제’를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고향 친구가 찾아오면 제일 먼저 가회동에 데려간다고 했다.그는 “모두들 한옥이 너무 아름답다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고 자랑했다.주아노는 특히 가회동 주민들이 한옥마을을 지키기 위해 서울시의 개발 방침에 적극 반대하고 나선 것을 높게 평가했다.그는 또 “클럽문화의 거리로 유명한 홍대 앞 노천카페에 앉으면 마치 유럽으로 돌아간 것 같아 행복해진다.”고 했다. 일본인 우에치 규지는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게 드는 남산도로,특히 한남동 하얏트호텔 앞에서 힐튼호텔까지의 드라이브 코스가 환상적”이라고 말했다.가족과 함께 잠실 올림픽 공원과 한강시민공원도 자주 찾는다는 우에치는 “시원한 한강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면 그 맛이 일품”이라고 말했다.유일한 여성 참석자였던 마리얌 탈비는 “이슬람교 예배당과 전통 음식점이 있는 용산구 이태원을 가장 좋아한다.”면서도 “밀리오레 같은 패션몰이 있는 명동에 나가 바쁘게 움직이는 서울 시민을 구경하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고 말했다.제임스 로겐백은 “조선의 왕이 살았다는 창덕궁에 가면 옛 가옥구조와 왕조의 법도까지 한눈에 보인다.”면서 “작은 골목길마다 미술관,찻집이 들어서 있는 삼청동은 운치있는 가로수길이 마음에 든다.”고말했다. 박지연기자 anne02@
  • “종교도 상식 통해 삶에 접근해야”도법스님, 종교 문제점 진단

    “종교는 역사적으로 말썽이 많았고 아편 노릇도 했다.지금도 그렇다.종교가 제대로 갔다면 한국 사회가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종교는 과학적이고 건강한 상식을 통해서만 삶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도법(사진·지리산 실상사 주지)스님이 종교의 실상을 이렇게 짚었다. 제주에서 태어나 1965년 금산사 송월주 스님에게 출가한 스님은 실천적 학승으로 이름 높다.현재 각계를 망라한 ‘지리산 생명연대’대표를 맡고 있다.스님이 지리산에서 한국전쟁 등으로 죽은 원혼을 달래는 ‘1000일 기도’를 막 끝내고 16일 오후 광주 원각사에서 2시간여에 걸쳐 ‘평화’를 주제로 설법했다. 스님은 “부처짓하면 부처가 되고 도둑질하면 도둑놈 되지요.”라고 좌중을 향해 수 차례 되물었다.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은 우리가 하는 대로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즉 우리가 생각하고 가꾸는 대로 이뤄지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했다.부처가 된 뒤 부처로 살아간다는 것은 잘못됐다고 잘라 말했다.수행이나 기도,삶이 일치되지 않으면 도둑놈이 도둑질하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고 질타했다. 스님은 ‘불교는 안팎이 없다.’며 평소의 연기적(緣起的) 존재론을 강조했다.“불교는 관계성 논리에 어긋나면 안된다.내면적·정신적 수행과 사고방식은 안맞다.육체와 정신의 분리가 불가능한데 정신이 육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진단했다.또 석가모니 말씀을 빌어 ‘애경제불’을 들었다.“제불은 석가모니나 미륵불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다.본래 부처는 내가 만난 모든 상대들”이라고 역설했다. 스님은 이어 “지금 우리는 진실에 대해 무지하고 왜곡된 진실을 보는 안목이 문제다.불교는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불교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무엇보다 불교는 현재가 중요하다.내세가 중요한 게 아니고 현재가 초점”이라고 힘줘 말했다. 광주 원각사 남기창기자 kc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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