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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 인 포커스] 쾰러 독일 대통령

    호르스트 쾰러(66) 독일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연임에 성공했다. 기민당(CDU) 후보인 쾰러 대통령은 이날 대통령 간접선출 기구인 연방총회의 1차 투표에서 전체 1224표 가운데 613표를 얻어 사민당(SPD)의 게지네 슈반 후보를 꺾고 5년 임기의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24일 AP통신이 보도했다. 이로써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민당은 9월 총선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게 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2000~2004년)를 역임한 쾰러 대통령의 재선은 사실상 일찍부터 예견됐다. 지난 2004년 5월 실시된 대선에서 기민당·기사당(CSU) 연합과 자민당(FDP) 등 야당연합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그는 이후로도 꾸준히 높은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재임 3년이 지난 2007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여전히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으로 선정됐을 정도. 그의 이같은 인기와 관련, 외신들은 상징적 권한만 갖는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도 도덕적 권위를 바탕으로 국정 전 부문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오는 7월1일 새 임기를 시작하는 쾰러 대통령은 선거 후 연설에서 “중요한 것들을 지키고 필요한 것들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할 것”이라면서 “향후 5년간 최선을 다할 것임을 약속한다.”고 자신했다. 그의 새 임기 초반, 독일 정국구도에는 큰 변화가 있을 전망이다. 현재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사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9월 총선 이후 자민당과 보수 연정을 구성할 계획이며, 사민당 역시 기민당·기사당 연합을 배제한 별도의 연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쾰러 대통령은 기민당, 기사당 외에도 자민당, 바이에른주의 미니 정당인 ‘자유 유권자’(FW)의 지지를 두루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노 前대통령 서거] 프랑스 베레고부아 사건과 닮아

    │파리 이종수특파원│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는 프랑스 총리를 지낸 뒤 자살한 피에르 베레고부아(1925~1993) 사건과 너무 비슷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극적인 삶이 빼닮았다. 대학을 다니지 않고 정부 수반에 오른 자수성가형 인생, 권력의 정점에서 ‘부패와의 전쟁’ 주도, 퇴직 후 부패 혐의 조사 그리고 전직 정부 수반(프랑스의 정부 수반은 총리, 대통령은 국가 원수)을 지낸 뒤 유례 없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한 것도 똑같다. 베레고부아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 1991년 4월부터 1992년 3월까지 총리를 지낸 뒤 1993년 5월1일 자신이 시장으로 있던 네베르에서 머리에 권총 2발을 쏘아 자살했다. 경호원이 그를 발견하고 헬리콥터로 파리의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측근들은 베르고부아가 자살 두달 전에 실시한 프랑스 총선에서 사회당이 패배하자 매우 침울했다고 말했다. 우파인 야당이 풍자 전문 ‘르 카나르 앙세네’ 2월호에 보도된 베레고부아의 ‘부패 혐의’를 총선에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그를 자살로 내몬 주요 혐의는 재정경제산업부 장관을 지내던 1986년 친구이던 사업가 로제 파트리스 펠라에게 100만프랑(당시 환율·약 1억 4000만원)을 무이자로 빌려서 파리 16구의 아파트를 샀다는 것. 또 펠라에게 휴가 비용을 받았다는 혐의도 있다. 펠라에게 베레고부아의 딸이 고가의 항공료를 받았고 부인도 선물을 받았다는 혐의 등 가족들에 대한 조사도 병행되었다. 베레고부아는 빌린 100만프랑의 원금을 나눠서 갚았기에 법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언론들은 그가 무이자로 돈을 빌린 것이 자신의 장관직을 이용한 특혜였다고 비판했다. 베레고부아는 도덕성을 중요시한 정치인이었다. 총리 취임 연설에서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측근이 부패 혐의로 기소를 받자 해임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게 덧씌워진 ‘부도덕의 굴레’를 견딜 수 없어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다는 분석이다. vielee@seoul.co.kr
  • [노 前대통령 서거] 노무현의 공과 2

    [노 前대통령 서거] 노무현의 공과 2

    ■ 금권정치 극복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이 없는 사회” 2008년 1월 퇴임을 앞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바라던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돈도 계보도 없던 소수파 정치인이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지켜 본 금권정치에 대한 환멸이 노 전 대통령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선 후보시절부터 “특권과 차별을 시정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해 공정하고 깨끗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당시 대선에서부터 금권선거가 눈에 띄게 퇴색했다. 금품살포는 물론이고 청중을 대거 동원하는 유세작전도 거의 사라졌다. 이후 불거진 대통령 선거 자금 시비에서 “내가 만약 한나라당이 받은 불법 대선자금의 10분의1 이상을 받았다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2003년 2월 취임식에서 노 전 대통령은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사회지도층의 뼈를 깎는 성찰을 요망한다.”면서 “정치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임기간 중에도 “지난 수십년간 끊어내지 못했던 정치와 권력, 언론, 재계 간의 특권적 유착구조는 해체될 것이며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로 다가설 것”이라고 자부했다. 실제 참여정부는 정치개혁법을 통과시켜 돈 안 드는 선거를 제도화했다. ‘3김 정치’를 청산했다는 평이 뒤따랐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최대 무기인 ‘도덕성’은 친노 인사를 비롯해 형 건평씨,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이 정치자금법이나 뇌물수수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되면서 점차 힘을 잃었다. 결국 노 전 대통령과 가족마저 검찰에 소환되는 처지를 맞았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임기 후 넘어야 할 ‘게이트의 고개’”를 넘지 못한 셈이다. 정치 지도자의 의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정치인과 그 주변의 의식 변화, 법 제도의 착근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지역주의 해소 “지역대결은 답이 없는 감정싸움이며 독재시대의 유산이다. 불신과 적개심을 부추겨 편을 가르고 분노와 증오로 반목하게 하는 것은 정치인이 발명한 득표수단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인 지난 2005년 2월 국정연설에서 여야 의원들을 향해 소선거구제를 개편해줄 것을 이렇게 호소했다. 후보자의 인물 됨됨이와 관계없이 특정 정당의 깃발만 흔들면 무조건 당선되는 선거제도를 바꿔야 망국적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고, 국민통합과 선진국가 진입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정치적 의도가 있는지를 떠나 ‘정치인 노무현’의 언행에는 지역주의 해소라는 일관성이 담겨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부산에서 당선됐지만 이후 3당 통합을 거부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을 잡았다. 김 전 대통령 시절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내기는 했으나 1992년 이후 연거푸 부산 지역에서 국회의원 및 시장 선거에 도전했다가 낙선, 국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바보 노무현’이란 수식어가 따르는 이유다. 2002년 대선 때에도 영남 출신으로 호남에 기반을 둔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지역주의 극복은 재임 기간에도 화두가 됐다. 지역간 균형발전을 목표로 기업도시, 혁신도시, 공공기관 이전, 행정수도 건설, 산업클러스터 정책 등을 추진했다. 그는 2003년 4월 국정연설에서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2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해달라. 이런 제안이 내년 총선에서 현실화되면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 또는 정치연합에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여대야소가 붕괴된 2005년 7월에는 “지역주의 극복은 내 필생의 과업”이라며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다. 한나라당이 진정성을 의심하며 거부하자 “대연정을 않더라도 선거제도만 고친다면 권력을 내줄 수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지역주의 극복은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노 前대통령 서거] “가족압박 등 10년전 방식 되풀이”

    “과거 거물의 입을 열 때 치사하지만 아들, 딸을 소환해 압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학수사를 하는 중수부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올해 초 대검에 근무했던 한 검사장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전망을 하며 내놓은 말이다. 10여년 전에는 특수 수사의 최고봉이라는 대검 중수부도 가족을 압박하는 방법을 사용했지만 과학수사가 발달한 현재의 대검 중수부는 ‘치사한’ 수사는 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검찰은 수개월간의 수사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노 전 대통령 주변으로 640만달러의 돈이 흘러간 정황을 포착했다. 중수부는 이 돈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포괄적 뇌물’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은 ‘몰랐던 일’이라고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수사가 검찰과 노 전 대통령 간 진실게임으로 변하자 검찰은 저인망식 수사로 노 전 대통령을 압박했다. 노 전 대통령을 소환한 지난달 30일까지 검찰은 아들 건호씨를 다섯 차례나 불러 조사하고 조카사위 연철호씨도 체포해 조사했다. 또 권양숙 여사를 비공개 소환조사했으며 노 전 대통령 소환 이후에는 딸 정연씨와 사위까지 검찰로 불러 조사했다. 권 여사의 재소환도 계획하고 있었다. 가족들에 대한 꾸준한 압박이 이어진 셈이다. 재경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가족을 압박하는 것이 효과적인 수사기법이기는 하지만, 사실 가장 비인간적이고 피의자를 벼랑 끝으로까지 몰고 갈 위험성이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덕성’에 대한 결벽증까지 있는 노 전 대통령에게 충격적인 사실이 언론을 통해 나오기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 부부가 박 전 회장으로부터 억대의 시계를 선물로 받았다거나 이 시계를 권 여사가 집 부근에 버렸다는 내용 등이었다. 검찰은 ‘나쁜 빨대’를 색출하겠다면서 강한 반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정연씨가 미국 뉴저지주에 160만달러짜리 아파트를 사려 한 정황이 포착됐다며 노 전 대통령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계약서는 정연씨가 검찰 수사에 대비해 찢어 버렸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서 결국 검찰은 박 전 회장의 진술 외에 640만달러가 노 전 대통령의 돈이었다는 점을 밝히진 못했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을 정신적으로 압박하기만 한 셈이다. 법원 형사재판부의 한 부장판사도 “법원은 진술에 의존한 뇌물 사건을 엄격히 심리하고 있으며 검찰이 진술의 구체성, 공여자의 진실성 등을 최대한 입증해야 한다.”면서 “이번 수사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뇌물을 수수하거나 이를 지시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할 검찰이 오히려 노 전 대통령 쪽에 정말 몰랐다는 증거를 대라고 입증 책임을 지우는 양상이 엿보여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고 전했다. 오이석 유지혜기자 hot@seoul.co.kr
  • [사설] 전직 대통령 비운의 역사 고리를 끊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온 국민은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 빈소가 차려진 봉하마을에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분향소까지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고, 전 세계도 노 전 대통령 서거에 충격과 슬픔을 함께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 유가족에 삼가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한다.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 뒤 봉화산에서 바위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지키려 했던 것은 도덕성과 자존심이었던 듯하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여만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기에는 63세라는 노 전 대통령의 나이가 젊었을지 모른다. 형에 이어 부인, 아들, 딸까지 모두 비리에 연루돼 있다는 의혹은 진실 여부를 떠나 밤잠을 이루기 어려울 정도의 심적 부담이었을 것이다. 유서에서 ‘앞으로 받을 고통이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다.’고 밝힌 대목은 심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그대로 보여준다. 다만 심적 고통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단절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금할 길 없다.노 전 대통령은 도덕성을 정치 밑천이자 상징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탈권위주의를 몸으로 실천했고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깨끗한 정치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내리기에 인색할 국민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기업체 사장을 죽음으로 몰고갈 정도로 거침없고 거친 표현으로 민주주의를 한단계 성숙시킨 자신의 업적을 희석시켰던 측면도 있다. 링컨을 닮고자 했으면서도 링컨식 국민 화합보다는 승부사적인 편가르기를 해서 비난을 사기도 했다.노 전 대통령을 갑작스럽게 잃은 우리의 아픔과 슬픔은 너무나 크다. 전직 대통령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대통령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가 가야 할 바람직한 길을 제언해 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몇 안 되는 원로다. 그런 전직 대통령을 떠나보냈다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고, 국민적인 불행이다.노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우리가 할 일은 수난과 비운의 전직 대통령 역사 고리를 단절시키는 일이다. 이제는 전직 대통령 본인 또는 가족들이 비리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거나 구속되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이다. 아울러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정치·사회적인 시스템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박연차 수사와 관련해서도 노 전 대통령이 관련된 부분은 수사가 중단되었다고 하더라도 천신일씨 등 다른 권력 비리는 끝까지 파헤쳐 비리척결의 귀감을 삼아야 한다.땅콩농장 농부와 빈농의 아들, 고집스러운 점, 인권 관심 등에서 닮은 꼴로 미국의 지미 카터와 노 전 대통령은 화제를 모았다. 노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환경운동도 카터의 해비탯 운동과 비슷한 점이 많다. 하지만 카터는 백악관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음에도 의회에 나가 에너지 문제에 고견을 낼 정도로 존경받고 있다.우리는 왜 카터와 같은 전직 대통령을 갖지 못하는지, 우리 사회의 무엇이 잘못돼 있는지를 냉철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전직 대통령이 국가적 큰 일이 있을 때 고견을 내놓을 수 있고, 국민들이 그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국민적인 과제라고 본다.
  •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전직 대통령 수난사

    역대 대통령의 비극적인 운명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끊이지 않았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9명의 전직 대통령 대부분은 하야, 시해, 가족 구속, 검찰 수사 등 수난과 비운에 시달렸다. 전직 대통령의 수난사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주의 체제의 싹을 틔운 이 전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이어가다 4·19혁명으로 하야했다.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하와이로 망명, 결국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4·19혁명 후 대통령직을 수행한 윤보선 전 대통령은 5·16군사쿠데타로 도중 하차했다. 윤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 반유신 운동 등으로 모두 3차례에 걸쳐 사법처리돼 최초로 법정에 선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으로 종신 집권 체제를 구축했으나 18년 장기집권 끝에 1979년 10월26일 측근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절명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근대화의 틀을 마련하고 경제발전을 견인했지만 그의 권력욕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현직 대통령 시해’라는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집권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1980년 신군부의 권력 탈취로 8개월 만에 하야했다. 그는 1989년 신군부의 쿠데타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다 국회 광주특위에서 국회모독죄로 기소됐고, 1996년 12·12쿠데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항소심 공판에 강제구인됐다. 군부를 업고 대통령직에 오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반란 및 내란 수괴죄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전 전 대통령은 육사 11기 동기이자 자신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노 전 대통령에 의해 백담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민주화 시대를 연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아들이 구속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재임 중인 1997년 한보 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고 2004년에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김 전 대통령 자신도 2004년 안기부 예산의 선거전용 의혹 사건인 ‘안풍(安風) 사건’의 증인으로 채택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차남 홍업씨와 3남 홍걸씨가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아픔을 겪었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인 ‘도덕성’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중 갑작스럽게 서거해 비운의 역사를 이어갔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진보도 보수도 “가슴 아프다”

    23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소식에 국민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침통해했다. 서울광장 등 서울 시내에서는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단 검은 옷 차림의 시민들이 모여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통해 했다. 검찰의 과잉수사가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검찰 수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후진적 정치문화를 꼬집으며 다시는 이 같은 역사의 비극이 재연되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일반 시민 김수현(34·여·약사)씨는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만들고 감옥에 수감됐던 전 대통령들도 버젓이 잘사는데 너무 꼿꼿하신 분이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면서 “마음 고생 많이 하셨으니 좋은 곳으로 가셔서 편히 쉬시길 바란다.”고 애도했다. 김인숙(40·여·주부)씨는 “전직 대통령 중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비록 측근 비리에 연루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권력에 저항해 왔던 본인의 발자취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 이렇게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난 3월 김해 봉하마을에 다녀왔다는 권시영(48·회사원)씨는 “호탕하고 너그럽던 그 웃음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면서 “우리 시대에서 바른 말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른이었다.”고 기억했다. 강희철(29·회사원)씨는 “사회의 일원으로 엄청난 충격이고 슬픔을 감출 수 없다.”면서 “검찰의 수사가 전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지키지 않고 너무 강경하게, 표적형으로 진행된 게 가장 큰 원인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인터넷 주요 포털과 커뮤니티에는 애도하는 국민들의 글이 이어졌다. 다음 아고라에는 이날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추모서명란이 개설돼 오후 6시 현재 모두 8만여명에 달하는 네티즌이 헌화했다. 네티즌 ‘이성재’씨는 “추하고 악한 인간들과 비추어 보니 님은 비록 먼저 갔지만 더욱 빛이 납니다.”라고 적었다. 네티즌 ‘승경(seung-kyung)’은 “(노 전 대통령이) 시대의 희생자라고 생각한다.”고, ‘해다미’는 “아귀다툼하는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큰 별이 졌다.”고 적었다. 노 전 대통령의 공식 홈페이지인 ‘사람사는 세상들’에 개설된 추모게시판에도 2만여명의 네티즌들이 찾았다. 아이디 ‘산유화’는 “이렇게 아프게 님을 보낼 수는 없다.”면서 “햇살 고운 날에 맑은 차 한잔 하고 싶었는데….”라며 글을 맺지 못했다. ●학계 진보 성향의 학자인 서울대의 임현진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대통령이 받은 액수에 비하면 적은 것은 분명한데, 자신이 평소 이야기했던 도덕성에 비춰 아마 검찰의 압박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검찰이 너무 압박을 가한 건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중도 성향의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한국 정치 풍토의 구조적 책임”이라며 “검찰 수사는 전직 대통령을 망신주는 방향으로 기획 수사됐고, 살아있는 권력은 120% 목표를 달성했다고 본다. 이는 역사의 후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살아있는 권력이 죽은 권력을 망신주는 정치적 보복의 악순환은 단절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수학계를 대변하는 서울대의 박효종 국민윤리교육과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이 한국 정치에 이바지한 부분이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평가받기도 전에 그와 같은 비극적인 결정을 했다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검찰의 무리한 수사도 이번 비극의 원인이 될 수 있으나, 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퇴임 후 전직 대통령이 직면하는 ‘비극’은 다른 대통령에게도 공통적인 일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시민사회단체 시민사회단체는 검찰 수사에 대한 비판을 두고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한국 진보연대 장대현 대변인은 “검찰이 수사할 때 친정권 성향 인사보다 노 전 대통령 측에 훨씬 가혹했던 측면이 있다.”며 “정부와 검찰을 강력히 규탄하며 깊은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자유청년연대 최용호 대표는 “일부에서 검찰의 무리한 수사 때문에 죽음을 택했다고 하는데 확실한 사실을 갖고 수사를 한 검찰에 대한 비난은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계 참여정부 시절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에 임명됐다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감사로 사퇴한 황지우 시인은 “자초지종이 어찌됐든 세상을 의롭게 살려던 사람이 자신으로 인한 오류가 압박으로 다가왔을 때 죽음 이외에는 선택의 길을 열어주지 않는 우리 사회의 강퍅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라고 안타까워했다. ‘노사모’ 회장을 맡기도 했던 배우 명계남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이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영화 ‘서편제’의 임권택 감독은 “뉴스를 보고 너무나 놀랐다.”면서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라고 충격을 드러냈다. 평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연기자 권해효는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인지 개인 문제인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 따름”이라고 애도했다. ●종교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권오성 총무 이름으로 낸 애도문에서 “노 전 대통령은 80년대 인권 변호사로 앞장섰으며 결국에 참여 정부를 세워 민주주의와 정치개혁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며 “노 전 대통령이 이뤄낸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가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향후 상황에 제대로 반영되기를 원한다.”고 촉구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의의 서거 소식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으로 큰 슬픔과 충격에 빠져있는 유족과 국민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불교 조계종은 “국민과 애도의 마음을 함께하며, 큰 충격과 슬픔에 잠겨 있을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는 애도문을 내놓았다. 이순녀 홍지민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청문회스타… 대통령… 투신… 풍운의 정치역정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청문회스타… 대통령… 투신… 풍운의 정치역정

    23일 오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줄곧 우리 사회의 주류와 다투는 비주류의 삶을 살았다. 상업고등학교 출신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인권 변호사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대통령 임기 중에도 노 전 대통령은 수많은 성역과 금기에 맞서 고군분투했다. 그가 불러 일으킨 ‘노풍(風)’은 주류 사회에 불어 닥친 비주류의 ‘반란의 바람’과도 같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6일 아버지 노판석(사망)씨와 어머니 이순례(사망)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 자매로는 큰형 영현(사망)씨와 둘째형 건평(67·구속)씨, 누나 명자(81)·영옥(71)씨가 있다. 김해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영 대창초등학교(1959년)와 진영중학교(1963년), 부산상업고등학교(1966년)를 각각 졸업했다. ●고졸로 사시 합격… ‘인권 변호사’로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자란 노 전 대통령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8년 3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당시 강원 원주에 있던 육군 1군사령부에서 부관부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만기 제대 후 노 전 대통령은 같은 고향 출신인 부인 권양숙(62)여사와 1973년 1월 결혼해 아들 건호(36)·딸 정연(34)씨를 낳았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권 여사는 할아버지의 병 문안차 고향에 갔다가 군에서 막 제대한 노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나 연인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고졸 출신에게 사법시험 응시 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을 통과한 뒤 두차례 낙방 끝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유일한 고졸 출신으로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부임했지만 7개월 만에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적성에 맞지 않아서”라는 이유였다. ‘변호사 노무현’은 곧 ‘인권 변호사’로 인식된다. 1981년 5공 정권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혐의로 대학생 20명 남짓을 기소한,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을 변론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에도 학생과 노동자 등이 연루된 사건을 도맡아 변호하면서 ‘인권 변호사’로 알려지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부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정치인 노무현’의 인생은 한마디로 ‘풍운아’라고 요약할 수 있다. ‘좋은 때를 타고 활동하여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그대로 적용된다. 1988년 국회 입성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재야인사 영입 사례로 이뤄졌다. 그는 국회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지며 ‘청문회 스타’로 부각됐다. 1990년 3당 합당 때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를 거부했다가 ‘삼수’의 시련을 겪었다. 1992년 총선 실패, 1995년 부산시장 도전 실패, 1996년 서울 종로 패배의 쓰라린 경험이었다. 계속되는 패배로 정치권의 야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97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로운 기회를 잡는다. 당시 민주당 잔류파와 함께 결성한 국민통합추진회의가 ‘3김 청산과 세대교체’를 내건 이인제 후보 지지 등으로 의견이 갈릴 때 “시대의 과제는 정권교체”라고 주장했다. 이어 1998년 7월 종로 보궐선거에서 6년 만에 원내 재입성에 성공했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종로를 마다하고 부산에 자원 등판했다가 쓴 맛을 보게 된다. ●‘노사모’ 바람 일으켜 대통령 당선 2000년 해양수산부 장관 발탁은 새로운 전기로 작용했다. 대권 도전의 중요한 발판이기도 했다. “정치인 집단을 조직화하고 세력으로 엮어 이끌어 나가는 조직적 리더십을 한 차례도 실험해 보지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했듯, 약점을 보완하는 기간이었다. 2001년 3월 장관직을 떠난 뒤 노 전 대통령은 본격적인 대선 후보경선 준비에 나선다. 변변한 조직도 없었지만 국민참여 경선에 힘입어 ‘이인제 대세론’을 극복했다. 몇 차례 말 실수로 ‘불안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지지도 하락을 겪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4강 열기에 힘입어 상승세를 탔던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해 다시 힘을 얻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소액기부를 유도하기 위해 나눠 준 ‘희망돼지 저금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투표 하루 전날 정 후보의 일방적인 지지철회로 후보 단일화는 깨졌지만 그는 ‘노사모’ 등 팬클럽의 지지를 얻어 대권을 쥐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의 행보 역시 순탄치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중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었다. 16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04년 3월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14일까지 63일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역풍을 불러 일으켜 제3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국회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며 한나라당의 의회 독주에 제동을 걸었다. 노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을 떠받친 것은 ‘충돌’과 ‘도전’이었다. ‘도덕성’은 힘의 근원이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성장기와 자수성가형 인생 스토리는 ‘못 가진 자’에 위안을 주며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측근인 안희정·최도술 씨 등 386세력이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형 건평씨를 둘러싸고 2003년 1월 인사개입설을 시작으로 재임 기간 내내 친인척 비리 의혹이 불거졌지만 노 전 대통령은 그때마다 ‘도덕성’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그러나 그 방패막이로는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지난해 12월 건평씨가 세종캐피탈 대표 홍기옥(59·구속)씨에게서 ‘농협중앙회가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정대근 농협 회장에게 청탁해 달라.’는 명목으로 29억 6300만원을 받아 구속 수감됐다. ●수뢰혐의로 수사받자 비극적 최후 이어 노 전 대통령이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권 여사가 박 회장의 돈을 받아 썼다는 글을 올린 이후 권 여사와 아들 건호씨가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조사를 받고, 노 전 대통령 자신도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를 남겼다. ‘노무현만은 다를 것이다.’고 평가했던 많은 국민에게는 실망을 안겨줬다. 굴곡 많던 정치인생을 버티게 했던 유일한 자산을 잃게 된 셈이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구 시대의 막내가 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남은 盧의 사람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그와 영욕을 함께해 온 친노(親) 그룹은 더 외롭게 됐다. ‘친노 386’으로 불렸던 ‘노무현의 사람들’은 참여정부 시절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로 국정의 중심에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불어닥친 ‘박연차 게이트’ 수사 등의 여파로 세(勢)는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친노 진영은 지난해 총선에서 유시민 김형주 유기홍 김태년 전 의원 등이 잇따라 낙천 또는 낙선하면서 퇴조를 보이는 듯했지만 살아남은 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주당 정세균 대표체제를 지지하는 핵심세력으로 부상했다. 친노측은 내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부활을 모색할 것이라는 관측도 꾸준히 나왔다. 영남권을 중심으로 친노신당 창당 시나리오도 나돌았다. 하지만 지난해 말 참여정부 인사들에 대한 검찰의 사정 수사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노무현 패밀리’의 몰락은 본격화됐다. 도덕성도 땅에 떨어지면서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의 표현대로 ‘폐족’(廢族·조상이 큰 죄를 지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자손)의 위기에 내몰렸다. ‘우(右) 광재’로 불리던 이광재 의원은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지난 3월26일 구속됐다. ‘좌(左) 희정’으로 불린 안희정 최고위원과 노 전 대통령 비서 출신인 서갑원 의원 등도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각각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 등으로 조사받았다. 노 전 대통령을 보좌한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박정규 전 민정수석 등도 구속된 상태다.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박 전 회장과 강 회장도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친노 인사들이 흩어진 가운데 오랜 친구이기도 한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전해철 전 민정수석 등이 노 전 대통령 수사에 대한 변호인단으로 활동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 기록물 관련 작업을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일부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움츠러들었던 친노 진영이 결속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사설] 노 전 대통령 서거, 역사의 불행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너무나 애석하고 비통한 일이다. 있을 수 없고 믿어지지도 않는 일이다. 놀랍다는 말 외에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는 마음을 어떻게 달리 표현할까. 더구나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 뒤 봉화산을 등산하다 바위 아래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퇴임한 지 1년 3개월만에 접한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온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노 전 대통령 서거는 국민 모두의 슬픔이자 역사의 불행이다. 63세를 일기로 서거한 노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켰다. 빈농의 아들에서, 노동현장의 민주투사, 인권변호사,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을 지낸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다. 소외받는 노동자와 학생의 편에 서서 군사정권에 항거한 인권변호사였고, 민주투사였다. 초선의원이던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자신의 명패를 던졌던 청문회 스타였지만 고향인 부산에서 야당 후보 출마를 고집해 ‘바보 노무현’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승부사적인 기질과 도덕성 때문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국회의 탄핵 소추를 당하는 고난도 겪었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은 퇴임 1년 2개월여 만인 지난달 부터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여만달러를 받은 의혹이 제기돼 검찰 수사를 받아 왔다. 부인과 아들·딸이 모두 비리 연루의혹으로 수사대상이 되었다. 특히 미국 뉴욕 아파트 구입 의혹이 최근에 새롭게 제기되면서 노 전 대통령이 받았을 심적 고통은 상당했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중 자신의 홈페이지에 “제가 이미 인정한 사실만으로 저는 도덕적 명분을 잃었다.”면서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도덕성을 최대의 장점이자 상징으로 자부하던 노 전 대통령은 이미지 실추가 인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남긴 유서에서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화장해라.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라고 했다. 도덕성 추락과 자신에게 쏟아지는 곱지 않은 눈길과 손가락질로 인해 받았을 인간적인 고뇌와 심정이 전해진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받은 심적 고통을 아무리 백번 이해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원로이자 전직 대통령으로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에는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퇴임 후 농촌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겠다던 꿈을 이루지 못한 점도 아쉽다. 전직 대통령이 대통령 재직시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은 우리 정치사의 비극이다. 전직 대통령들은 수난과 비운의 역사에 허덕였고, 비리와 부패의 쳇바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은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사면됐고, 다른 전직 대통령들도 아들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 종결을 선언함으로써 노 전 대통령의 혐의와 의혹은 영구미제로 남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면서 전직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거나 구속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 국민들이 할 일이라고 본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 행여 우리 사회가 겪을지도 모를 분열과 반목을 우리는 경계한다. 우리 사회와 온 국민은 노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데 하나가 돼야 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고 악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범정부적이고 사회와 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노 전 대통령 장례가 치러져야 한다. 정부는 이미 노 전 대통령 장례절차 협의 등에 들어갔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 장례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도록 정중하게 치러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깊은 조의를 표하며, 유가족에게는 깊은 위로를 전한다. 전직 대통령이 재임 시절 비리 의혹으로 수사를 받는 불행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슬픔과 아픔도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도덕성 상처” 극단적 선택한 듯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도덕성 상처” 극단적 선택한 듯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 소환 조사를 앞둔 지난달 22일 ‘정치적 자살’을 선택했다. 그는 몰랐지만 그의 가족이 대통령 재임 때 불법자금을 받아 도덕적 명분을 잃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한달이 지난 23일 새벽 김해 봉하마을 뒷산에 올라 그는 ‘육체적 자살’까지 감행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이처럼 검찰 수사와 맞닿아 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40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으며 평생 목숨처럼 지켜 왔던 도덕성과 자존심이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홍진표 교수는 “대통령이라는 명예로운 위치에 있었던 만큼 검찰 수사로 인한 스트레스가 일반인보다 훨씬 심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평생 쌓아 왔던 가치와 명성을 한 순간에 잃음으로써 깊은 상실감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박두흠 교수는 “자존심에 타격을 입으면서 자기애적 사랑이 일거에 사라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정치권에 입문한 후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승부수로 최고 권좌까지 올랐다. 그럼에도 불행한 전직 대통령의 길을 비켜가지 못했다. 특히 도덕성을 최대 무기로 삼아온 그가 뇌물 수수 혐의를 받자 심하게 흔들렸다. 노 전 대통령은 언론에 의혹이 제기되자 지난달 7일 홈페이지 글에서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고 사과했지만, 부인 권양숙 여사가 자신도 모르게 박 전 회장의 돈을 받아 썼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검찰은 박 전 회장의 진술을 토대로 노 전 대통령에게 포괄적 뇌물수수죄를 적용할 방침을 세웠다. 급기야 그는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로 소환되는 수모를 겪었다. 한 측근은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무척 지쳤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조사를 받을 때 “그만합시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검찰이 박 전 회장과 대질신문을 요구하자 거절하며 그는 “내가 대질 안 한다고 했어요. 내가 박 회장에게 이런저런 질문하기가 고통스러워서…”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게다가 권 여사와 아들 건호씨, 딸 정연씨, 사위 곽상언씨까지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면서 ‘부패가족’이라는 불명예까지 덧칠해지자 그는 낙담했다. 검찰은 권 여사의 재소환까지 예고한 상태였다. 때문에 “몰랐다.”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유서에서 “미안해하지 마라.”고 밝힌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진실을 지키기 위한 법정 싸움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검찰 소환 때처럼 경호원을 몰고 김해에서 서울까지 움직여야 하고, 구차한 변명을 반복해야 하고, 부인·아들·딸을 증인으로 불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무죄를 받는다 해도 노 전 대통령이 꿈꾸던 삶을 더 이상 살기는 어려웠다. 그는 입버릇처럼 “농촌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말해왔다. 측근이 고통받는 것도 노 전 대통령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퇴임 이후 재단 설립을 주도했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구속되자 노 전 대통령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강 회장은 지난 19일 첫 공판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소리 내 울었다.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을 벗어던지고 나서도 왜 내가 짐을 떠안아야 하느냐.”고 말했다. 언론 보도로 그 말을 접한 노 전 대통령의 괴로움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은 전직 대통령의 오욕과 비운의 역사를 끊어내려는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가 반복되는 현대사의 비극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다는 것이다. 정은주 오달란기자 ejung@seoul.co.kr
  • [오늘의 눈] 문화부의 이중잣대 유감/강국진 정책뉴스부 기자

    [오늘의 눈] 문화부의 이중잣대 유감/강국진 정책뉴스부 기자

    문화체육관광부가 엄정한 공직기강 확립을 위해 의연히 칼을 빼들었다. 문화부는 산하기관인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대상으로 감사를 진행했고 18일 황지우 총장을 파면·해임하라며 중징계를 요구했다. 한예종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내세울 만큼 문화부의 자랑이었다. 설립 17년밖에 안 됐지만 유수 콩쿠르와 각종 경연에서 1위 수상자만 473명이나 배출했다. 문화부와 한예종에 따르면 황 총장은 학교발전기금 모금을 위해 지난해 11월 사진전을 열기로 했다. 카메라나 현상·인화 비용을 개인 카드로 결제하고 영수증을 학교발전기금 사무국에 제출해 정산하는 과정에서 처리를 잘못해 부인 명의 영수증이 섞여 들어갔다. 문화부는 이에 대해 ‘공금 횡령‘이라고 판단했다. 또 사진전을 위해 틈틈이 사진을 찍은 행위에 대해 근무지를 32회나 무단이탈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3월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한예종이 추진하던 통섭교육에 대해 “하던 일이나 하라.”며 재검토를 지시했다. 그런데도 한예종은 통섭교육을 계속했다고 한다. 문화부는 “장관의 명을 받들어야 할 산하기관장이 장관의 지시를 불이행한 중대한 기강해이” 라고 지적한다. 문화부는 서릿발 같은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도덕성 요구는 형평에 맞아야 한다. 기자는 얼마 전 문화부의 공익사업적립금 문제를 취재한 적이 있다. 스포츠토토(국민체육진흥투표권)의 수익금 중 10%를 재원으로 하는 공익사업적립금이 공식 예산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실상 ‘장관의 쌈짓돈’처럼 운영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당시 논란이 됐던 ‘연예인응원단’에 지원한 2억원의 출처도 이 적립금이었다. 한예종에 대해서만 유독 엄격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적립금 문제를 거론하자 문화부 감사 관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적립금은 예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일부 업무추진비로 쓴 건 맞지만 업무추진비로 쓰지 말라는 규정도 없지 않습니까.” 강국진 정책뉴스부 기자 betulo@seoul.co.kr
  • “광주정신 권력·상품화 안돼”

    “광주정신 권력·상품화 안돼”

    판화가 홍성담(54)씨는 ‘5월 광주’를 대표하는 판화가이자 당시 문화선전요원으로 활동했던 시민군이었다. 홍씨는 5월 광주를 겪는 동안 법원 앞에 있던 화실의 커튼을 뜯고 종이를 있는 대로 모아 시민군들과 함께 활동했다. 홍씨가 기억하는 광주 정신은 ‘대동세상’이었다. 홍씨는 광주민주화운동 29돌을 하루 앞둔 17일 “당시 시민군에게 6000여점의 총이 지급됐지만 단 한 건의 총기사고도 없었다.”면서 “높은 도덕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되돌아봤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먹을 것을 내줬고 차량들은 시민군을 태우기 위한 공용차량이었다. 서로를 지키면서 한편으로 뭉쳤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홍씨의 광주 관련작 50여점 가운데 ‘대동세상’ ‘횃불행진’, ‘사시사철-봄’ ‘깃발’ 등만 봐도 총칼이 난무하거나 핏빛으로 얼룩진 그림은 거의 없다. 홍씨는 “광주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겐 악몽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광주가 믿음과 연대의 마당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런 홍씨에게 최근 전남도청 별관 철거를 둘러싼 충돌은 안타까운 일로 다가온다. 그는 “정부가 가장 큰 국가 폭력의 비극인 ‘80년 광주’의 교훈을 잊은 듯 행동한다.”면서 “5·18이라는 숭고한 역사적 사건을 권력화해 상품으로 이용하려는 일부 단체들의 행동도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5월 판화’ 연작으로 광주를 세계에 알리고 민족해방운동사 그림사건으로 고문과 옥고를 치른 뒤 홍씨는 광주를 떠나 1997년 서울로 올라온 뒤 현재는 경기도 안산에 자리를 잡았다. 5월 광주를 둘러싸고 분파가 생기고 계보가 생기는 등 점점 변질되는 과정이 그에겐 기득권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국가 폭력이 낳은 비극의 현대사를 형상화하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2007년 11월부터 일본 도쿄와 제환 등을 순회하며 ‘안티 야스쿠니전’을 벌여왔다. 오는 8월15일 서울 인사동 평화박물관 전시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이제 내년이면 30대 청년으로 접어드는 5월 광주. 그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 지향적인 사고 탓에 구성원간 믿음이 무너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5·18이 남긴 용기와 신뢰, 연대의 의미를 되살려 지도자와 지식인들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해야 하고 서민들은 연대를 통해 불합리한 현실을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박연차 게이트] 권여사 재소환 왜 늦추나

    [박연차 게이트] 권여사 재소환 왜 늦추나

    검찰이 권양숙 여사의 재소환을 자꾸 늦추고 있다. 이유는 딸 정연씨가 미국 뉴저지에서 계약한 160만달러짜리 고급주택 ‘허드슨 클럽’의 실소유주를 둘러싼 의혹을 먼저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주택을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차명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검찰이 의심하는 것이다. 차명 보유로 확인된다면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은 물론 포괄적 뇌물 수수 혐의 입증도 수월해진다. 160만달러 주택이 아킬레스건으로 떠오른 것이다. ●차명보유 확인 땐 도덕성에 치명타 검찰 등에 따르면 허드슨 클럽 400호는 2006년 7월 ‘윙 웡’이라는 사람이 150만달러에 구입했다. 9개월 뒤인 2007년 4월 가족으로 보이는 임 윙이라는 한국계 여성이 윙 웡에게 명목상 1달러를 주고 이 주택을 공동 소유했다. 정연씨는 한달 뒤인 2007년 5월 선(先)계약금 5만달러를 냈고, 넉달 뒤 40만달러를 집주인 임씨에게 송금했다. 잔금을 치르지 않았지만 매매계약은 유지되고 있다고 정연씨는 검찰 조사에서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계약은 통상적인 방식과 크게 다르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미국 부동산 중개인 김모씨는 “보통 계약금은 총액의 10%인데 45만달러는 계약금으로 액수가 많다.”고 지적했다. 다른 부동산 중개인 정모씨는 “계약을 하고 잔금을 치르는 데 보통 2~3개월 걸린다.”면서 “2년이나 매매가 중지된 거래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檢, 주택계약서 사본 확보 나서 객관적인 사실 이외에 권 여사의 해명도 석연치 않다. 권 여사는 아들 건호씨가 LG전자의 미국 본사에 있는 뉴저지주에 근무할 것을 예상해 계약했다가 샌디에이고로 발령나 아파트가 필요없어졌다고 설명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계약금만 걸어 놓은 상태를 계속 유지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검찰 수사망이 좁혀지자 정연씨가 계약서 원본을 훼손한 것도 의문점이다. 계약금을 반환할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데도 계약서를 파기한 것은 그 안에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이 포함됐기 때문이라는 추론이다. 아파트 계약이 이뤄질 때 권 여사를 거쳐간 달러가 주택 구입가인 160만달러와 맞아떨어진다는 점에도 검찰은 주목한다. 권 여사는 2007년 5월 20만달러를 정연씨에게 송금했고, 한달 뒤인 6월에 박 전 회장에게서 100만달러를 받았다. 때문에 검찰은 정연씨 주장과 달리 100만달러는 중도금, 40만달러는 잔금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검찰은 이 주택의 서류상 집주인인 임씨로부터 주택 계약서 사본과 통장 사본을 확보할 계획이다. 제출이 늦어질 경우 형사사법 공조도 검토한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노 前대통령 불구속 기소 명분 쌓기?

    ■ 검찰, 혐의 잇단 유출 왜 검찰이 연일 노무현 전 대통령측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가고 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와 관련해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의 수사에 총력을 쏟고 있는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진술이 곳곳에서 흘러 나온다. 검찰이 직접 브리핑하지 않지만, 언론이 보도하면 부인하지 않는 방식으로 알려진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측의 혐의를 ‘흘리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노 전 대통령은 물론 부인 권양숙 여사의 거짓말 해명을 증거를 통해 드러내 전직 대통령의 도덕성에 일격을 가하는 식이다. 또 다른 방향은 딸 정연씨가 집 계약서를 찢었고, 권 여사가 회갑선물로 받은 시계를 버렸다고 하는 등의 얘기다. 노 전 대통령 측이 불법 행위를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불러올 수 있는 대목이다. 검찰이 지난 12일 정연씨가 2007년 9월 말 박 전 회장에게서 40만달러를 송금받았다고 발표하자 노 전 대통령 쪽은 “100만달러의 일부”라며 추가 수수 사실을 부인했다. 2007년 6월 박 전 회장에게 100만달러를 요청했는데 60만달러는 청와대에서 현금으로 받았고, 나머지 40만달러를 미국 계좌로 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검찰은 태광실업 직원 등 130명을 동원해 10억원을 사흘 만에 100만달러로 바꾼 환전 전표와 “돈을 세어 봤고 50만달러 상자 두 개였다.”는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진술을 연이어 공개했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이 목소리 높였던 ‘증거를 댄’ 것이다. 결국 권양숙 여사가 받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몰랐다는 600만달러와 달리 권 여사도 받지 않았다는 새로운 형태의 돈 40만달러가 생겼다. 게다가 정연씨와 권 여사가 다급하게 증거물을 없앴다고 검찰은 밝혔다. 피고인 가족이 증거를 인멸한 것은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지만, 권 여사 등이 박 전 회장이 제공한 달러나 회갑선물을 ‘검은 금품’으로 인식했다는 방증으로는 파악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빌린 돈”이나 “자연채무”는 아니라는 것이다. 정연씨는 40만달러로 계약한 미국 뉴저지주 아파트 구매 계약서를 “찢어 버렸다.”고, 노 전 대통령은 1억원짜리 스위스제 명품시계 2개를 “집사람이 내다버렸다고 한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검찰의 이같은 수사 행보에 대해 해석은 엇갈린다. 천 회장과 패키지로 처리할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를 앞두고 구속영장을 청구하기 위해 노 전 대통령측의 증거인멸 시도를 부각시키는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한편으로는 검찰이 설령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 기소하더라도 수사팀의 직접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이란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박연차 게이트] ‘빨대’ 선물받은 대검 중수부

    대검 중수부에 최근 ‘빨대’ 한 상자가 배달됐다. 검찰 수사에 방해가 된 ‘빨대를 찾기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경북의 한 여성이 색색의 빨대 묶음을 보낸 것이다. 속된 표현으로 중수부로서는 ‘쪽팔린’ 선물이다. 빨대 선물은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의 지난달 23일 브리핑에서 비롯됐다. 이날 일부 언론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6년 9월 회갑 선물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2억원 상당의 스위스제 명품 손목시계 세트(2개)를 받았다고 보도하자, 수사 정보를 흘린 내부자인 “나쁜 빨대를 색출하겠다.”고 공언했다. 빨대는 취재원을 가리키는 언론계 은어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에게 서면질의서를 보내고,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사는세상’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하던 날 공교롭게도 고가 시계 선물이 보도돼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을 일부러 공격한 것처럼 비춰졌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검찰이 망신을 줄 목적으로 이런 내용을 흘렸다면 나쁜 행위”라고 유감을 표했다. 이에 대해 홍 수사기획관도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고 답했다. 이 같은 강한 표현을 두고 또 한편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소환·조사를 앞두고 검찰이 감춰 뒀던 ‘압박 카드’가 흘러나간 데 대한 내부단속용 엄포였다는 해석도 나왔다. 그러나 결국 검찰은 ‘나쁜 빨대’를 찾아내지 못했다. 홍 기획관이 지난주 말 빨대 선물을 입에 올린 것은 수사 정보를 흘리는 내부에 재차 강력한 경고를 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현 여권이 포함된 3라운드 수사가 그만큼 부담스럽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열린세상] 전직 대통령의 죄/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과 교수

    [열린세상] 전직 대통령의 죄/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과 교수

    “엄마 대통령할아버지 왜 저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모습을 TV로 본 아이들이 물었다. 8살, 6살 때였다. 순간 몹시 당황했던 난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잘 몰랐다. “ 대통령 할아버지가 잘못을 해서 그래.” “대통령도 잘못을 해? “ 질문이 끊이지 않던 아이들은 특히 대통령이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가졌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난 대통령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고 아이들에게 교육의 근간을 무너뜨린 것이 이들의 가장 큰 죄란 생각을 했다. 요즘 또 한사람의 전직 대통령 때문에 우울하다. 다른 전직대통령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마음이 착잡하다. 그에 대한 실망은 늘 언행에 관한 것이었다. 재임 중이나 퇴임 후 그는 참으로 많은 말을 했으나 대부분 나라에 보탬이 되지 않았다. 도덕성 발달에 대한 연구에서 도덕성이 잘 발달된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들을 비교한 적이 있다. 의외로 이들 부모의 훈육방식에는 차이가 없었는데, 온화하고 자율적인 훈육방식이 체벌이나 통제적인 것보다 효과가 있다는 기존 이론과는 다른 결과였다. 도덕성이 잘 발달된 사람에게서 나타난 특징은 부모의 훈육방식과는 상관없이 부모를 신뢰하고 존경한다는 것이었다. 신뢰하고 존경하는 부모 밑에서 도덕성이 잘 형성되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자식이 신뢰하고 존경하는 부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해당범주는 단 하나, 생활 속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부모였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부모가 ‘거짓말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마라. 열심히 살아라.’ 가르치면 효과가 컸다. 그러나 불성실하고 정직하지 못한 부모는 아무리 고운 말과 세련된 방식으로 ‘바르게 살라.’고 가르쳐도 소용없었다. 모든 지위에는 그에 맞는 역할이 있다. 부모, 교사, 성직자, 심지어 학생도 해야 할 역할이 따로 있다. 역할을 제대로 할 때 권위와 명예가 산다. 대통령은 한나라의 통치자로서 최고의 권위와 명예를 가진 만큼 누구보다도 높은 도덕성과 능력과 판단력을 요구하게 된다. 공직사회의 청렴을 부르짖던 대통령이 부적절한 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몹시 실망스러운 일이다. 자연채무니, 형제 같은 마음으로 주고받았다는 얘기들도 기가 찰 노릇이다. 한술 더 떠 그의 한 참모는 다른 전직대통령에 비해 액수가 적다는 것을 강조하며 생계형비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인지 심리학자인 피아제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능력이 유아기엔 타율적이고 이성을 판단할 수 있는 단계로 가면 자율적이 된다고 하였다. 유아기엔 행동결과만을 놓고 그 양을 비교하여 잘잘못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백원을 훔친 사람과 천원을 훔친 사람 중 누가 더 나쁘냐고 물으면 어린아동들은 천원을 훔친 사람이 더 나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자율적 판단단계로 가면 훔친 동기나 과정을 고려하고, 또한 액수와 상관없이 훔치는 것은 다 나쁘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죄는 어쩜 ‘한나라당 불법자금의 10분의1이 넘으면 처벌을 받겠다.’고 한 예전의 그 말인지도 모른다. 그 후 우리는 잘잘못을 판단하는 데 대단한 혼란을 가져왔고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겐 이러한 기준이 스펀지에 물 스며들듯 새겨지고 말았다. 모두가 유아기적 판단을 하게끔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 언론이나 심지어 검찰도 이런 맥락에서 고민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논리가 적용되는 한 우리는 어떤 것도 잘잘못을 가릴 수 없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보다 더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을 가리키며 배짱을 부릴 것이다. 잘못을 한 아이들도 자기보다 더 잘못한 아이들 때문에 반성할 필요를 못 느낄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육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방은령 한서대 아동청소년복지학과 교수
  • 강영중 BWF회장 연임

    강영중 BWF회장 연임

    강영중(60) 세계배드민턴연맹(BW F) 회장이 연임에 성공했다. 강영중 회장은 10일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BWF 정기 대의원 총회에서 말레이시아협회 부회장인 앤드루 캄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제19대 회장에 당선됐다. 131개국 총 232표 중 162표 득표. 이로써 2005년 5월 처음 회장에 오른 강 회장은 2013년 5월까지 4년 더 세계 배드민턴계를 이끌게 됐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경선이었다. 강 회장은 지난 임기동안 BWF를 개혁하며 리더십을 인정받았지만, 대한배드민턴협회 집행부와의 갈등으로 회장직은 물론 BWF회장 재임도 고사하겠다는 의지를 밝혀 왔다. 그러나 스포츠외교력 강화를 위해 회장직을 맡아달라는 정부의 강력한 권유와 BWF 5개 대륙연맹의 재출마 요청을 받아 고심 끝에 출사표를 던졌다. 물론 대리인을 내세운 ‘셔틀콕 마피아’ 펀치 구날란(말레이시아) 전 부회장의 BWF 재장악 시도가 출마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난 20년간 세계배드민턴계를 좌지우지하며 전횡을 일삼다 지난해 퇴출당한 구날란 전 부회장이 이번 선거에 자신의 대리인 앤드루 캄을 내세운 것. 유일한 경쟁자 앤드루 캄은 대대적인 물량공세를 폈지만 워낙 지명도가 떨어져 70표의 득표에 그쳤다. 이번 선거결과는 강회장의 개혁의지와 높은 도덕성, 강력한 리더십이 통한 것으로 보인다. 강회장은 지난 임기동안 미국과 이란을 화해시키기 위한 셔틀콕 외교를 추진했고, 소외국에 대한 다양한 사업을 지원했다. 강영중 회장은 “배드민턴 발전과 대한민국 스포츠외교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면서 “스포츠를 통해 사회에 기여한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은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 박상하 국제정구연맹(ISTF) 회장과 함께 3명의 국제연맹 회장을 유지했다. 또 그동안 꿈꿔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의 디딤돌도 다지게 됐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전대미문의 가족 잔혹사’ 세련된 형식미로 중무장

    ‘전대미문의 가족 잔혹사’ 세련된 형식미로 중무장

    “아마도 당신은 30분 정도 천국에 있을지도 모른다. 악마가 당신이 죽은 것을 알기 전까지.” 영화 시작 전 자막이 심상치 않다. 아일랜드 속담에서 따온 문구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수작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긴장감 넘치는 표제처럼 ‘서스펜스 멜로 드라마’로서의 면모를 자랑한다. 7일 서울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씨네토크) 행사에서 진중권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는 영화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미국식 가정이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우울한 드라마, 경제적 위기를 다룬 사회적 드라마, 충격적 연쇄 살인을 다룬 범죄물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며 이들이 묘하게 결합돼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그리스 비극처럼 강한 카타르시스 카메라는 미국사회 내 중산층 가정으로 줌인해 들어간다. 회계법인 중역인 앤디(필립 시모어 호프먼)는 겉으로 보기엔 모자랄 것 없는 가장이다. 그러나 그는 분식 회계, 마약 중독, 성(性) 문제 등으로 경제적·심리적 위기를 겪고 있다. 그의 동생 행크(에단 호크) 역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 이혼 뒤 딸아이의 양육비를 제대로 대지 못하는가 하면 불륜마저 저지른다. 어느 날 회계 감사 통보를 받은 앤디는 보석상을 털 계획을 세우고, 마침 돈이 궁한 동생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범죄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가족의 균열상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평범한 일상적 풍경이 인물들의 판단 실수로 말미암아 비극으로 치닫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형제의 결점. 형 앤디는 단호하고 결단력 있지만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마약을 탐닉한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자란 동생 행크는 성인이 돼서도 유약하고 우유부단하다. 진중권 교수는 “사소한 잘못이 성격적 결함과 결합되면서 감당할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는 전개가 그리스 비극과 닮아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까지 전범으로 통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의미를 짚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진 교수에 따르면 시학에 등장하는 ‘카타르시스’는 공포와 연민이 유발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승화작용을 말하는데 이 영화 역시 탁월한 묘사로 깊은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 진 교수는 “형제의 도덕성은 매우 평균적인 수준이다. 경제적 곤궁에 처해본 이들이 한번쯤 상상해 봤을 ‘희생자 없는 범죄’를 통해 위기를 해결해 나가려 한다. 범행의 주체, 동기, 방법, 목적이 일상적이어서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형제의 입장에 공감하게 된다. 이 때문에 끔찍한 결말은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관객들은 형제의 비극적 운명이 내 운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강한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고 분석했다. ●모더니즘적 형식미 빼어나 세련된 형식미가 선사하는 쾌감도 뛰어나다. 영화는 범죄 당일을 기준으로 전후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번갈아 왔다갔다 한다. 진 교수는 “내용은 고전적인 데 반해 형식은 모더니즘적이다. 인과관계에 따라 흐르는 고전과 달리 이 영화는 시간상 앞뒤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불규칙하게 흐른다.”며 “그럼에도 정교한 편집으로 복잡한 플롯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와 과거의 플래시백이 교차되는 편집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에 대한 오마주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밖에도 오이디푸스 설화가 현대 가족관계의 파괴를 보여주는 형태로 변주되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두 ‘연기 귀신’의 대결을 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극속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한 필립 시모어 호프먼과 에단 호크 덕분에 ‘전대미문의 가족 잔혹사’는 더 강한 흡인력과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영화는 14일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개봉된다. 청소년 관람불가.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盧 전대통령 소환] 청문회 스타 의원→대통령→포괄적 뇌물 피의자로

    [盧 전대통령 소환] 청문회 스타 의원→대통령→포괄적 뇌물 피의자로

    정치인 노무현의 인생은 ‘풍운아’로 요약할 수 있다. ‘좋은 때를 타고 활동하여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그대로 적용된다. 1988년 국회 입성 과정부터 그랬다. 13대 총선에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재야인사 영입 사례로 발탁됐다. 이어 같은해 ‘5공 청문회’에서 국민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1990년 3당 합당 때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를 거부했다가 ‘삼수’의 시련을 겪었다. 1992년 총선 실패, 1995년 부산시장 도전 실패, 1996년 서울 종로 패배의 쓰라린 경험이었다. 그는 1997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로운 기회를 잡는다. 당시 민주당 잔류파들과 함께 결성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가 ‘3김 청산과 세대교체’를 내건 이인제 후보 지지 등으로 의견이 갈릴 때 “시대의 과제는 정권교체”라고 주장했다. 이어 1998년 7월 종로 보선에서 6년 만에 원내 재입성에 성공했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종로를 마다하고 부산에 자원 등판했다가 쓴 맛을 보게 된다. 그러나 부산에서의 출마는 ‘지역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는 간판을 달며 ‘동서 분할 종식’, ‘국민 통합’이라는 주제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국민적 지지의 출발점인 ‘노사모’도 이 무렵 탄생한다. 2000년 해양수산부 장관 발탁은 새로운 전기로 작용했다. 대권 도전의 중요한 발판이기도 했다. “정치인 집단을 조직화하고 세력으로 엮어 이끌어 나가는 조직적 리더십을 한번도 실험해 보지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했듯, 약점을 보완하는 기간이었다. 2001년 3월 장관직을 떠난 뒤 본격적인 대선 후보경선 준비에 나선다. 변변한 조직도 없었지만 ‘국민참여 경선’에 힘입어 ‘이인제 대세론’을 극복했다. 몇 차례 말 실수로 ‘불안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지지도 하락을 경험했지만 월드컵 축구 4강 열기에 힘입어 상승세를 탔던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 대권을 거머쥐었다. 제16대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는 등 정치적 굴곡은 계속됐다. 그의 20년 정치 인생은 ‘충돌’과 ‘도전’의 역사였다. ‘도덕성’은 힘의 근원이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성장기와 자수성가형 인생 스토리는 ‘못가진 자’에 위로를 주며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했다. 대통령 재임기간에도 이 두가지는 노무현 정부를 떠받치는 기둥 노릇을 했다. 향후 판결 내용에 따라 자연인 노무현은 그에 합당한 권리를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30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과 대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치인으로서의 기반은 사실상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정치의 최선은 대의(大義)를 따르는 것이며, 차선이 대세(大勢)’라고 하던 정치인 노무현은 이제 그 둘을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내려 놓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지운기자 j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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