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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연천군 원당리 구석기유적/한반도 최고유적 가능성 높다

    ◎건대 최무장 교수팀 조사/최초 선주민이 쓰던 돌연모 찍개 발굴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2리 구석기유적이 한반도 구석기시대의 표준유적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건국대 박물관장 최무장 교수(고고학)팀이 지난 해에 이어 올해도 이 유적 맨아래 문화층에서 가장 원시적인 석기를 찾아내 이를 뒷받침했다.이들 석기류 가운데는 구석기인들이 자갈돌 한쪽면을 떼어내 처음으로 만든 돌연모인 찍개가 주류를 이루었다. 원당리 구석기유적은 임진강가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강가유적.지난해 1차 조사에서 400평을 발굴한 건국대박물관은 올해 2차 조사에서는 300평에 4개의 구덩이를 파들어갔다.그 결과 지층이 맨위의 지표층으로부터 현무암층까지 모두 9개 층위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이들 지층에서 인류가 살았던 흔적을 남긴 이른바 문화층은 위로부터 2번째 심회적색 찰흙층과 4번째 홍갈색 찰흙층으로 밝혀냈다. 인류가 먼저 들어와 살았던 문화층은 4번째 지층인 홍갈색 찰흙층.이 지층에서 단순한 원시적 돌연모 찍개를 위주로 한 긁개,손톱모양 밀개,찌르개 따위의 석기류가 나왔다.이러한 석기를 만들어 썼던 구석기인들은 오늘날 임진강가 원당리유적에 첫발을 들여놓은 인류.지금으로부터 15만∼20만년전인 전기 구석기시대를 살았던 원당리 구석기인들은 한반도 최초의 선주민이기도 하다는 것이 최무장 교수의 견해다. 원당리유적을 한반도 최고의 구석기유적으로 보는 것은 4번째 홍갈색 찰흙층에서 찍개와 같은 단순한 석기가 나왔기 때문이다.돌맹이 한쪽을 다른 돌로 쳐서 떼어냈을뿐 거의 몸들연장에 가까운 걸음마 단계의 석기류인 것이다.찍개는 물론 원당리 말고 다른 구석기유적에서도 나왔다.그러나 다른 유적에서는 찍개와 함께 잘 발달한 주먹도끼 따위의 돌연모를 거느려 원당리유적에 비해 시기가 뒤진다는 것이다.원당리유적이 한반도 구석기 표준유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도 여기서 찾고 있다. 그리고 이번 발굴조사에 나타난 2번째 지층인 심회적색 찰흙층은 후기 구석기인들이 살았던 문화층,지금으로부터 2만년 전후를 원당리에 살면서 단단한 차돌을 가지고 정교하게 다듬은 석기를 남겼다.날카로운 작은 석기가 대부분이나,큰 강돌을 조개모양으로 떼어 칼처럼 사용한 대형긁개가 출토되어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이 유적의 두 문화층 사이에 3번째 황갈색 찰흙층과 4번째 암황갈색 찰흙층에서는 아직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따라서 전기구석기와 후기구석기 사이에 공간으로 남은 3·4번째 지층에서 유물을 찾는 일이 숙제이기도 하다.그러나 유적 이웃 밭에서 후기구석기말에서 중기구석기시대에 유행한 주먹도끼와 같은 석기류가 많이 채집되었다.이를 근거로 발굴을 계속하면 원당리유적에서 공백으로 남은 중기구석기문화를 찾아낼 확률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원당리유적 발굴 지도위원으로 참여한 서울대 임효재 교수(고고학)는 “고형의 돌연모와 지층을 통해 전기구석기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그리고 “지금까지 혼란을 겪었던 구석기시대 편년문제도 해결할 길이 트였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 영국 런던탑(세계 문화유산 순례:42)

    ◎템즈강변 우뚝솟은 도심의 ‘성벽’/1066년 영 침략 불 윌리엄이 권위 상징 축조/높이 27.3m 지하 4.6m 돌로 쌓아 요새로 런던탑(Tower of London)은 말이 탑이지 실상은 도심의 성채다.입구에 들어서면 빨간 제복의 수위인 요우맨(Yeoman)이 눈길을 끌었다.아침이면 문을 열고 밤이면 문을 잠그는 일을 맡은 요우맨은 지금부터 600여년전인 1321년에 창설됐다.그들은 수위임무 말고도 런던탑의 온갖 사연을 관광객들에게 들려주는 안내원 노릇을 즐겨 자청하고 있다. 지금도 런던탑 안에서 생활하는 요우맨은 런던탑의 명물이다.런던탑을 찾은 그날도 요우맨은 과장된 몸짓으로 런던탑의 유령얘기를 꺼냈다.“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나가봤다.그러나 아무도 없었다”는 등 얘기러리는 무진장했다.회색빛의 고색창연한 템즈강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런던 탑의 유령 얘기에는 관광객 모두가 귀를 쫑긋거렸다.그럴 때마다 신바람이 난 요우맨들은 “아직도 귀신이 나온다”고 허풍을 떨었다.귀신이 있고 없고 간에 런던탑에 얽힌잔인했던 피의 역사를 떠올리면 요우맨들의 귀신이야기에 공감이 갈 것이다. ○수위·안내원 ‘요우맨’ 명물 그들이 지금도 귀신을 팔아먹는 런던탑에는 ‘스카폴드 사이트’가 있다.왕비와 귀족들이 처형을 당했던 비극의 장소이다.과부가 된 형수 캐서린과 결혼한 헨리18세는 그것도 모자라 모두 6명의 부인을 두었다.형수이자 아내인 캐서린은 대를 이을 왕자를 바랜 헨리 8세의 기대를 저버리고 여러번 유산끝에 공주 메리를 낳았다.실망한 헨리 8세는 시녀였던 앤 볼레인을 또 아내로 맞았다.그러나 앤 역시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아 왕의 뜻을 거슬린 죄로 사형을 당한다.네번째 부인 캐서린 하워드도 간통죄로 스카폴드 사이트 단두대에 서고 말았다. 나중에 왕으로 등극한 메리여왕이 카톨릭 신자들을 무참히 살해한 곳도 이곳이었다.그 시신을 태우는 쾨쾨한 연기가 매일 런던탑을 뒤덮었고 처형은 도끼로 목을 자르는 잔인한 방법이 동원됐다.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앤의 마지막 소원은 “제발 사형할때 도끼 말고 다른 것으로 해주세요”라는 것이었다.그렇듯 도끼처형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자아냈다. ○왕비·귀족 처형당한 장소 어쩌다 왕궁이 살육의 상징물로 바뀌었을까.런던탑은 원래 왕의 권위와 힘의 상징이었다.1066년 영국을 침략한 프랑스 노르망디의 정복자 윌리엄이 자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영국인들의 항복을 받아 낸 정복자는 그해 크리스마스날 웨스터민스터사원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성을 짓기 시작했다.멀리 켄트지방에서 날라온 돌로 쌓아 지었다.높이 27·3m,지하 4·6m의 화이트 타워를 주축으로 한 성은 외국인 정복자 윌리엄처럼 위용을 드러냈다.지상에서 높은 곳에 출입구를 만들어 성벽을 파괴하는 무기가 닿을수 없게 설계됐다.화재가 나도 불길이 닿지 않는 요새였던 것이다.1666년 런던 대화재때에도 시민들의 불길을 피해 런던탑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런던탑은 항상 하얗게 잘 닦여져 있다.‘흰 성’이라는 뜻의 ‘화이트 타워’로 부르게 된 것도 이때문이다.탑은 런던시내와 템즈강을 내려다 보면서 영국을 9세기동안 호령했다.그리고 왕권과 비례해 런던탑도 커졌다.윌리엄 사후 1백년뒤인 ‘사자왕’ 리차드때부터 확장이 거듭됐다.외국인 정복자의 직계이면서도 색슨계의 이름을 가진 영국왕 에드워드1세때는 외성을 갖추었다. 성 밖에다는 참호를 팠다.그제야 런던탑은 외부의 적들이 침입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철옹성이 됐다.적들이 쳐들어 온댔자 도개교와 성문 등으로 겹겹이 둘러 쌓인 성에 이르지도 못하고 화살세례를 받았다.게다가 1천여명의 군사를 수용할수 있던 워털루 타워는 늘 런던탑을 지켜주었다. 런던탑은 애초부터 많은 비극을 잉태했는지도 모른다.런던탑을 지어놓고도 왕은 사실상 사용하지 않았다.1100년 타워가 완공된뒤 왕의 고문이자 비열한 인격을 지녔던 라눌프 플램바드가 감금된 일이 있다.그런데 2층 창문에서 밧줄을 타고 탈출에 성공했다.그로부터 144년후 같은 장소에 갇힌 웨일즈의 왕자 그루피드도 같은 방법으로 도망하려다 밧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떨어져 숨졌다. ○‘화이트 타워’로 불려 런던탑에서는 한때 동물을 키웠다.헨리3세는 독일 황제와 노르웨이 왕으로부터 받은 표범과 북극곰,프랑스 왕이 보낸 코끼리 따위를 사육하는 라이언 타워를 만들었던 것이다.그러나 1834년 라이언 타워는 폐쇄되고 동물들은 리전트공원 동물원으로 보냈다.런던탑은 5백년동안 영국의 화폐를 찍어낸 역사도 감추어 두고 있다.
  • 아시아 ‘1인극’ 한자리에

    ◎새달 5∼7일 공주시서… 7개국 21개 작품 참가 아시아 여러 나라의 1인극을 한자리에 모은 ‘공주 아시아 1인극제’가 9월 5∼7일 공주시 민속극박물관과 곰나루 야외무대에서 펼쳐진다.민속학자이자 1인극 원로배우 심우성씨의 주도로 마련된 이번 축제에는 일본·베트남·인도 등 아시아 7개국에서 민속적 정취가 담긴 21개 작품이 참가한다.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한국의 ‘장화홍련전’.30년대까지만 해도 실존했던 이야기꾼(일명 이야기장사)의 이야기판을 극으로 재현한 정규헌씨(61)의 발굴민속극 발표무대다.부친으로부터 이야기책 읽기를 배워 열세살때부터 이야기꾼으로 나선 정씨가 과거 사랑방공연물로 인기를 모았던 이야기판을 현대의 1인극으로 자리매김하는 자리다. 일본에서는 1인극을 대표하는 원로배우 2명이 짤막한 9개의 작품을 들고 온다.거리극의 대부 기리야크 아마가사키씨(67)는 떠돌이 광대의 이야기를 그린 거리극 5개 작품을,1인 인형극으로 유명한 미야하라 타치오(71)씨는 ‘금도끼 은도끼’ 등 인형극 4개 짝품을 각각선보인다. 이밖에 △한국=‘키스’(남긍호),‘어머니 날 낳으시고’(윤명숙),‘흙 한 줌,물 한 모금’(한대수) △몽골=‘사랑의 노래’(룹상곰보 차민출룬) △방글라데시=‘삶·전쟁·평화’(질러 라만 존) △말레이시아=‘나’(로 곡 만) △인도=‘차텔지가 보내드리는 말없는 밤’(시리 아쇽 차텔지) △베트남=‘인형의 세계’(밴 혹) 등이 참가한다.문의 02)736­6818.
  • 충북 수양개유적 10만평 사적지 지정

    ◎국내 최대규모… 중기 구석기∼초기 철기 망라/현재도 발굴 계속… ‘한반도 선사문화의 보고’ 충북 단양군 적성면 매곡리 수양개유적이 최대규모의 사적으로 떠올랐다.문체부 문화재위원회가 지난 22일 사적으로 의결한 수양개유적은 모두 10만평.지금까지 규모가 가장 컸던 충남 부여군 송국리유적 4만평에 비해 2.5배가 더 넓다.이처럼 수양개유적을 대단위로 넓게 잡아놓은 이유는 점단위 유적에서 경험한 문화재보호의 한계성을 극복하기위한 조치로 풀이할 수 있다. 이 유적은 중기구석기를 비롯 후기구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철기시대를 망라했다.선사문화(의 보고로 평가받는 보기드문 복합유적이다.지난 1983년 충북대 이융조 교수(고고학) 팀이 중기구석기유적을 발굴하면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 유적은 지금까지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그만큼 여러 시대에 걸친 선사문화유적이 수양개 곳곳에 분포되어 이번에 문화재위원회가 사적지로 의결한 것이다. 이 유적에서는 중기구석기시대의 긁개,찌르개,주먹대패 따위의 석기가 출토되었다.약 2만년전에 수양개로 들어온 중기구석기인들은 강가 자갈층 위에 삶의 흔적을 남겼다.그 다음 단계에 수양개에 자리잡았던 후기구석기인들의 유적에서는 주먹도끼,찍개,좀돌날몸돌과 슴베찌르개 등의 석기류가 쏟아져 나왔다.특히 슴베찌르개는 약 1만7천년전의 수양개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검증한 바 있다. 수양개에서 나온 석기류의 소재는 거의가 판암,수양개유적은 다른 구석기유적과는 달리 석기제작 흔적을 뚜렷이 남겼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돌망치와 모룻돌 같은 석기제작에 필요한 도구들이 나온 석기제작소만도 자그마치 50군데를 찾아냈다.이는 구석기인들의 석기제작행위를 복원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야생동물 젖소(원우) 정강이뼈에 물고기모양을 새긴 조각품이 나와 당시 구석기인들이 지닌 사유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이 밖에 토기조각을 포함한 신석기시대 유물과 청동기시대 유물이 산발적으로 나오고 있다.더구나 지난해는 한반도에서 역사의 새벽을 연 초기철기시대의 삼한사회유적을 찾아냈다.이는 고고학계와 더불어 고대사학계가 수양개유적을 다시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모두 5만평에 이르는 삼한시대 마을유적으로 1차 발굴에서 집자리 26군데를 찾고 많은 유물을 거두었다.유물은 청동의기,철제 무기류와 생활용구,토기,옥제 치레걸이 등으로 되어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이루어진 수양개유적은 남한강 상류의 강가유적.지금은 충주댐을 막아 유람선이 닿는다.이와 더불어 중앙선철도와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간다.또 다른 구석기 동굴유적인 금굴,구낭굴,상시가 수양개와 이웃했다.그래서 이 기회에 남한강상류 선사골화를 한눈에 바라볼 ‘수양개 선사유적발굴관’을 세워 국민교육장으로 활용하자는 여론도 높게 일고 있다.
  • 서해안 신석기역사 다시 쓴다

    ◎연대 2,500년 앞당길 ‘뾰족밑빗살문토기’ 포함/신공항 건설 삼목도에서 관련유물 대거 출토 신공항을 건설중인 인천시 중구 운서동 삼목도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대량의 유물이 나왔다.서울대 임효재 교수(고고학)팀이 발굴한 이들 유물 가운데는 서해안 신석기시대 연대를 2천500년이상 끌어올릴 수 있는 뾰족밑빗살문토기 등이 포함되었다.그리고 돌을 갈아 만든 석열유구와 화덕자리도 함께 찾아냈다. 삼목도 신석기유적 출토유물 가운데 뾰족밑빗살문토기는 중요자료로 평가받고 있다.이 토기는 인천지역 도서를 중심으로 백령도까지만 나오는 신석기시대유물.그 북쪽 천청강에 이르는 해안지역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신석기시대 유물로 확인되었다.그러나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 요령지방 해안인 대련과 여순지역 유적에서는 완형 뾰족밑빗살문토기만도 101점을 공식발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계는 당시 신석기시대 문화전파 경로는 육로라기보다는 해로였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특히 동아시아 고고학계는 중국 요령지방 해안유적에서 나온 뾰족밑빗살문토기의 연대를 전기 신석기시대로 보아왔다.그렇다면 BC1000∼1500년쯤으로 잡았던 우리 서해안의 신석기 연대도 뾰족밑빗살문토기 출토를 계기로 올려잡아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이번에 삼목도에서 나온 토기편은 500여점이나 되어 물량으로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목도유적에서 거둔 시료를 근거로 최근 과학적 연대측정을 실시한 결과 실제 BC4000년쯤 유적으로 분석된 바 있다.이같은 연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교토산업대 야마타(산전치) 교수가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및 수륜연대보정법을 적용해 밝혀낸 수치다.그래서 삼목도유적은 중국 요령지방 해안 신석기문화와의 교류상을 규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서해안 신석기연대를 끌어올릴 확실한 증거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유적에서는 뾰족밑빗살문토기 말고도 어망추와 가락바퀴 따위의 토제품과 의기로 보이는 소형돌도끼와 실용 돌도끼,발화석,석촉등의 석기도 나왔다.신석기문화층 아래 고토양층에서는 지름 12㎝ 정도의 몸돌과 긁개를 포함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어 더욱 주목을 끌었다.이들 구석기류는 약 4만년점쯤 구석기인이라는 선주민이 신석기인에 앞서 삼목도에 먼저 들어와 살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삼목도를 비롯 영종도와 용유도 등 인천 앞바다 3개 도서는 신공항 건설에 따라 지금은 서로 이어진 연육상태.신공항 건설지역 안에는 신석기유적 8군데를 비롯 청동기유적 4군데를 합해 모두 12군데에 선사문화유적이 분포되었다.더구나 이번에 구석기유물이 나와 신공항건설지역은 선사문화의 보고로 떠올랐다. 이번에 삼목도유적 발굴에 참여한 임효재 교수는 “이들 3개 도서의 유적은 주변 서해안 도서지방은 물론 중국 대륙과의 선사문화 교류관계는 밝히는 주요자료라는 점에서 정밀발굴이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그리고 “출토유물을 한데 모아 새로 건설하는 신공항 청사에 박물관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이는 세계 여러 공항시설과 차별화하는 방법일뿐 아니라 이 지역이 동아시아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고도의 홍보전략이라는말을 덧붙였다.
  • 유통업은 불통업(위기의 기업/쓰러지는 왕국에서 배운다:6)

    ◎그룹전체 돈줄 죄는 ‘올가미’/“점포만 갖추면” 안이한 발상… 목돈 묶여/진로·삼미 등 실패… ‘현찰장사’인식 바꿔야 “유통업에 섣불리 나선 것을 지금도 통탄해 하고 있다” 부도유예방지 협약의 첫 적용대상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채 자구노력을 펼치고 있는 진로그룹의 고위 임원 H씨가 최근 털어놓은 말이다.잘 알려져있다시피 진로그룹 실패의 주범은 건설과 유통.잘나가는 주류산업을 밑천으로 호기있게 뛰어든 양 산업이 경험부족과 판단착오로 인해 그룹전체를 옭아매는 그물이 돼버렸다. 진로그룹은 그중에서도 유통업에 좀더 많은 아쉬움을 두고 있다.지난 88년 한일상공으로부터 서울 서초동 도매센터를 인수한 것부터가 돌이킬 수없는 실책이라고 여기고 있다.처음부터 오판을 했던 것.지방의 도매상들이 무자료거래가 가능한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을 버리고 세원이 노출되는 진로도매센터를 이용하리라 생각했던 것이 순진했다는 것.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가락동농수산물시장과 같은 도소매를 겸한 준백화점식으로 운영을 했으나 유명 브랜드도 확보하지 못하고 백화점협회에도 가입하지 못하는 등 엉거주춤한 상태로 적자만 눈덩이처럼 불어가면서 그룹의 천덕꾸러기가 됐다.지난해 계열사 적자규모가운데 진로종합유통의 적자가 7백37억원으로 진로쿠어스 3백96억원,진로건설 6백66억원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미도파를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대농그룹의 몰락도 마찬가지.지난해부터 채산성이 떨어지는 섬유사업을 대폭 축소하고 유통업을 주력업종으로 육성키로 했으나 백화점 하나 짓는데 들어가는 돈이 적어도 1천억원이상인 탓에 춘천을 제외하고는 지방주요도시에 대한 신규 출점에 실패했다.이런 가운데 불거진 미도파 M&A사건으로 예상치 못했던 1천억원 이상의 자금을 경영권 분쟁에 투입하고 난 이후 여기저기서 쏟아져들어오는 자금수요를 감당치 못하고 결국 무너졌다. 중견건설업체로 탄탄한 성장을 누리던 한신공영이 갑자기 무너진 것도 의욕적으로 진출했던 유통업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한신공영은 88년 서울 노원점을 시작으로 93년까지 전국에 4개의 백화점을 개설하는 등 건설경기의 침체를,날마다 거액의 현금이 들어오는 ‘현찰 장사’인 유통업진출로 타개하려 했다.그러나 과당경쟁에 휘말려 기대했던 만큼의 매출을 올리지 못할 뿐더러 신용카드의 사용이 늘면서 상대적으로 현금 수금이 줄어들어 고전을 겪게 됐다.철석같이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셈이다. 20여개 슈퍼마켓 체인을 지닌 우성유통을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던 우성건설,건영옴니백화점을 갖고 있던 건영,이태원에 비바백화점을 운영했던 삼미그룹의 연이은 몰락도 같은 맥락이다. 전문가들은 유통업에 진출한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가장 큰 이유로 유통업을 ‘점포를 지어 놓기만 하면 저절로 장사가 되는 산업’쯤으로 여기는 경영자의 무모한 인식을 꼽고 있다.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일부 기업들은 노는 땅에 점포를 짓고 건물과 대지를 담보로 은행돈을 끌어들여 또 다른 점포를 짓고 있다.그러나 불황이 오면 은행 빚을 감당하지 못해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그 어느 산업보다 높은 것이 유통산업이란 지적이다. 한국유통산업연구소김동환 과장은 “유통업에 진출하려면 자본력과 선진유통기법,상품개발력,고급인력자원 등 경영시스템이 골고루 갖춰져야 한다”며 “변화된 유통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땅만 갖고 있다고해서 무작정 덤비다가는 큰코 다치기 쉽상”이라고 충고한다.유통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닌 것이다.
  • 황장엽·김덕홍 주요 진술내용:Ⅰ

    ◎산소 없애 생물 죽이는 ‘기화폭탄’개발 소문/남측 정정혼란때가 전쟁도발 최적기/김정일 전쟁명령 지휘체계 대폭 축소/‘전쟁나면 미국도 사정권’ 승리 장담 ▷북한의 전쟁준비 동향◁ (1)전쟁준비 관련사항 ○김정일의 전쟁관 및 전쟁의지 김정일은 군대가 많고 수십년간 전쟁을 준비해 왔기 때문에 전쟁을 하면 이길수 있다고 생각하며 한국군을 겁내지 않고 있음. 김정일은 김일성이 50% 밖에 독립시키지 못했다면서 자기대에는 무조건 무력통일시키겠다고 하며 “통일조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치적 야욕을 가지고 있음. 북한은 전쟁을 6개월 이상 끌지 않는다고 해서 전쟁물자를 6개월분만 비축하고 있음.북한 특수부대원들에게 한국군 군복을 입혀 북측지역에 침투할 것으로 위장한 후 한국군이 먼저 도발했다면서 서울에 5∼6분동안 포를 쏘아 잿가루로 만든 다음 미군이 증원되기전에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고 미국이 개입하려 할 경우 동경 등 몇개 일본도시를 미사일로 타격하여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함으로써 개입을 저지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음 김정일이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한 70년대초부터 모든 부서는 전쟁준비에 주력하도록 해왔으며 특히 91.12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이 된 이후에는 전쟁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음. 김일성 사망이후 김정일은 수시로 “조국통일의 주력은 군대다.믿을 것은 군대뿐이다.모든 힘을 다해 군대를 지원하라”는 지시를 수시 하달하는 등 오직 전쟁준비에 광분해 왔음. 김정일을 포함한 지휘부는 전쟁시 승리를 100% 확신하고 있으며 일반주민들은 남한군을 「허재비」(허수아비)로 인식하고 있음. 김정일은 “북한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북한이 망하게 되면 세계와 함께 자폭하겠다”고 극언하였음. 북한의 김정일 및 당·정·군 고위간부들은 경제력 등은 남한이 월등하나 군사력은 북한이 우세하여 외부간섭(미국)만 없으면 100% 힘에 의한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음. 한편 주민들은 극심한 식량난으로 차라리 전쟁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 62.10 쿠바사태시 김일성은 “형님 지갑돈은 내 지갑돈만 못하다.항상 내지갑에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쟁준비를 시작,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한다는 정책을 추진해왔음. 김정일은 64년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후 국방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지휘하였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군사분야에 관여해 왔음. 북한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평시체제를 그대로 전시에 적용하는 전시형 국가관리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무기생산은 100% 자체 해결하고 있고 전투헬기·미사일·방사포도 대대적으로 생산하고 있음. 63년 김일성을 수행,평강지구(5군단 사령부)를 방문했는데 갱도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하고 대포출입이 가능케 되어있는 등 완전 지하요새화가 되어 있었음. 산업분야의 전기공급이 아무리 부족해도 지하군사시설에 사용되는 전력은 절대로 다른 곳에 전용할 수 없음. 평양근교 지하 군사시설의 경우 조명·급수·환기장치 등이 완비되어 있음. 92년 창군 60주년 군사퍼레이드시에 본 모든 장비는 자행식이었으며,군내에서는 남한을 3번 “잿가루”로 만들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함. 북한의 특수전 부대들은 부대별로 남한내 미사일기지·공항 등 주요 전략시설에 대한 타격목표를 선정해놓고 있으며 유사시 항공육전대(공수부대)나 쾌속정으로 들어가서 타격하도록 되어있음. 중앙당 간부를 비롯,전 주민들은 군대에 ‘헌납미’를 바치는 등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중앙당에서 군에 대한 간부들의 지원실적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지원활동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음. ○전쟁 도발 시기 과거 북한이 도발의 호기라고 보았던 시기는 ‘4·19’라고 생각하였으나 소련과 중국이 반대했으며 또한 전쟁복구 건설이 겨우 끝난 시기였기 때문에 내려오지 못했으며 지금은 대선문제로 상당히 노리고 있을 것임. 한편 전쟁위기가 높았던 시기는 푸에블로호 사건(68.1)·EC­121 격추사건(69.4)·판문점 도끼만행사건(76.8)때로서 주민들을 모두 소개시킨채 “들어오면 하겠다”는 분위기여서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보였음. 미국과 중국의 태도가 문제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정정이 더 혼란상태에 빠지는 때가 도발의 최적시기가 될 것이며 남한내 지하조직을 이용,혼란을 조성하는 한편 미국의 군사력이 여타 분쟁지역으로 쏠릴때 도발할 것으로 예상함. 김정일을 비롯한 지도부는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민심도 불안해지고 있는 현상황에서 믿을 것은 무력밖에 없기 때문에 전쟁이외에는 출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 ○전쟁지휘 체계 및 군사전략 전쟁지휘체계는 종래 ‘김일성→인민무력부장→총정치국장→총참모장’체계로 되어 있었으나 김일성 사망이후에는 지휘계통을 거치지 않고 ‘김정일→총참모부 작전국장’으로 바로 지시가 내려갈 수 있도록 되어있는 등 김정일의 독단적 명령에 의해 전쟁이 발발할 수 있음. 북한은 전쟁 발발시 평시체제를 그대로 전시에 적용하는 전시형 국가관리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별도의 전쟁지휘기구가 필요없음. 북한의 전쟁 시나리오는 ‘전략전’전략에 입각,십수만명의 특수부대원을 사전에 투입시켜 미사일 기지·비행장 등 주요시설을 타격하는데 이어 기동전을 통해 남한전역을 장악한다는것임. 특히 김일성 사후 미사일·방사포 등 화력을 통해 단시간내 서울을 비롯한 전략지대를 타격·파괴시킨후 협상을 추진한다는 전법을 세워두고 있음.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2년전에 최고사령부 ‘작전조’와 함께 남침 시나리오를 작성하였으며,동 시나리오를 본 군 지휘관들이 당장 실천에 옮기자고 하였으나 김일성이 인민생활부터 먼저 해결한 다음에 해야 한다면서 유보하였음. 전쟁이전 단계에서는 우선 남한을 미·일·중·러 등 큰 나라와 이간시켜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미군철수를 유도하는 것임. 김일성,“미군만 철수하면 제주도를 떼어주어도 좋다”고 언급 미국이 개입할 경우에는 ‘인간어뢰’와 항공기에 의한 자살특공대 등으로 미항공모함을 몇척 까부셔 미국여론이 조선전쟁 참여를 반대토록 유도하며 또한 장거리 미사일로 일본을 초토화하겠다고 위협하여 미국이 물러서도록 유도할 것임. 북한은 동맹조약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지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북침시에는 중국이 북한을 지원해줄 것으로 믿고있음. ○김정일의 군부장악정도 김정일은 최고사령관(91.2)과 국방위원장(93.4)에 취임,명실공히 군통수권을 장악한 이후 대규모 장성진급 및 3선 감시체계(지휘·정치·보위부) 등을 통해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였음. 총참모장조차 김정일의 지시사항만 수행하고 있으며 사소한 반대의견이나 제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군을 장악하고 있고,조명록(총정치국장),김영춘(총참모장),원응희(보위사령관) 등이 측근으로 활동하고 있음.조명록 총정치국장은 공군사령관을 하다가 김정일이 마음이 곱다고 해서 군 정치책임자로 발탁하였음.김영춘 총참모장은 정치적인 감각이 없으며 전략을 쓸만한 인물이 못됨.오극렬 작전부장은 무력부내에 기반을 갖고 있고 머리가 명석하며 김일성이 총참모장직에서 해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이 당작전부장으로 재기용했음. (2)군사력 증강 관련사항 ○무기개발·생산 및 기술도입 실태 북한의 잠수함 건조는 러시아가 해체한 잠수함에서 회수한 강판을 도입하여 사용하고 부품은 외국에서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전자부품 및 장비는 일본에서 도입하고 있음. 김정일은 중국의 무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의 무기 또는 무기개발기술을 도입하고 있지않으며 소련의 신형무기를 얘기해도 “그런 것은 다 낡은 것”이라고 무시하면서 설명서를 보지도 않음. 북한은 무기개발을 위해 필요한 외국기술자 초청은 인민무력부가 외교부를 통해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음. ○군수부문 우대정책 지속 67년 제4기 15차 당 전원회의시 경제·국방 병진정책을 제시한 이후 군수부문 우대정책을 지속 실시하고 있음.동 희의에서 주변국가들의 정세를 분석한후 무력통일을 자체의 힘으로 해야 한다고 결정하였음. 김정일의 군수공장 우대 실태를 보면. 각 공장·기업소는 민수에는 일체공급하지 못하더라도 군수부문에는 계획대로 최우선 공급해야하며 그렇지 않으면 군사재판에 회부토록 하였음.군수공장은 정무원과 별도로 당중앙위 군수공업부(비서 전병호)에서 관장하고 있으며 모든 민수공장에도 군수생산 직장(부서)을 설치하였으며 여기에 대한 검열도 군대가 하고 있음.군수생산계획 집행여부를 평가하기 위해 당중앙위 군사위원,정치국 상무위원,도당 책임비서,공장·기업소 당비서 및 지배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당 중앙군사위원회 명령 총화회의’를 개최하여 실적 부진자는 직위고하에 관계없이 문책하고 있음. ○전쟁물자 비축 군수동원총국에서 전쟁물자 비축을 총괄하며 동 총국은 행정적으로 호위총국과 같은 독자적인 기구로서 정치위원이 중장으로 편제되어 있는 등 중요시되는 기관임. 전쟁물자의 수입은 2경제위원회가 외화벌이를 해서 조달하며 정무원 등 다른 부서에서는 관여하지 못함. (3)핵·생화학·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핵개발 문제 김일성은 64년 중국의 핵실험에 대해 “장수가 바지벗고 칼차는 격”이라고 말했던 점으로 보아 당시만 해도 핵무기를 가지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음. 84∼85년경 당시 주평양 소련대사가 황장엽에게 “북한이 핵을 개발한다는 말들이 많은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면서 NPT가입을 종용한데 대해.황장엽은 “그런게 있겠는가”하는 식으로 대응한후 이를 김부자에게 보고하자 김부자로부터 “묵살하라”는 지시를 받은바 있음. 김영남 외교부장은 85·12 NPT에 가입하고 핵안전협정을 체결(92·4)했으나 군수담당 관계자들은 “NPT 가읍으로 골치가 아프게 되었다”면서 김영남을 비판한 바 있음.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비록 핵무기와 관련시설을 직접 본적은 없으나 92년 IAEA 특별 사찰 문제가 제기되었을때 NPT를 탈퇴(93·3)했다는 점에서 모든 당비서들이 그렇게 믿게 되었듬. ○미·북 핵합의 관련동향 미·북 핵협상시 모든 전략은 김정일이 강석주를 통해 직접 지시했으며 여타기관은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음. 북한이 화력발전소 대신 경수로 지원을 요청한 것은 화력발전소는 완공후 유류 등 원료공급 능력이 없는 반면 경수로는 연료인 우라늄이 대량 매장되너 있기 때문이었을 것임. 경수로 건설 관련 남측인력의 대규모 방북시 신포인근을 철저히 통제,북한주민과의 접촉을 최대한 차단할 것임. ○핵관련 북한내 동향 및 기타사항 91·12 ‘한반도 비핵화선언’에 합의한동기는 대외적으로 평화이미지를 과시하고 남한 내부의 핵관련 정책분열을 조장키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있음. 85·12 NPT 가입은 구 소련으로부터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지원을 얻기 위한 것이었음(85·12 구 소련과 440MW 경수로 4기 공급협력협정 체결). 92·4 IAEA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한 것과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94·10)등은 모두 시간을 벌기위한 전략에서 추진되었고 그 결과 북한은 경수로 건설,매년 50만톤 중유 획득 등의 이득을 보게 되었으며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고 인식하고 있음. 일부 고위층 간부들은 92·4 IAEA와 핵안전협정을 체결 이후 핵사찰 문제로 인해 대북한 국제정세가 긴장하게 돌아가자 자승자박한 것이 아닌가 하고 외교부에 불만을 토로한 바 있음. ○화생방무기·미사일 개발실태 높은 수준의 화학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화학무기 금지협약’에도 가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북한의 확고한 입장이며 상층부에서는 생물무기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인시기하고 있음.북한은 남침시 미국의 개입을 방지하고자 화학무기가 장착된 장거리 미사일로 ‘일본을 초토화’시키겠다고 위협할 것임. 항간에는 포에 장착하여 발사하면 부근의 산소가 없어져 모든 것이 죽는다는 폭탄(기화폭탄 추정)이 개발되었다는 소문이 있음. (4)대남 군사태도 ○대한국·주한미군 인식 북한권력 핵심층과 군 간부들은 북한의 재래식 전력이 세계4위 수준이며,화학무기는 세계적 수준으로 약점이 없는 부대라고 생각하고 있어 한국군의 능력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미군만 없으면 전쟁에서 이길수 있다고 믿고 있음. 남한의 함정·항공기 움직임을 적시에 식별·감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남한 국방비가 북한보다 많다고 하지만 이에 상관없이 수도권에 대한 5∼6분 정도의 포공격으로도 잿가루가 된다고 믿고 있음. 지금까지의 전쟁에서는 미국땅에 포탄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미국은 결코 후방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북한 특공대가 남한과 같이 미국에도 임의의 신간에 침입할 수 있는 것처럼 주민들에게선전하고 있음. 미국이 침공할 경우 인적손실을 감수하더라도 함정·항공기 등을 몸으로 직접 막게되면 미국이 물러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걸프전은 전쟁이 아니라고 하면서 미국과 대응할 수 있는 기술적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함. 91년 걸프전 이듬해 김정일은 미국 무기의 약점을 분석하고 이를 격파하는 영화를 제작,군내 작전국등 지휘부 간부에게 시청케 함으로써 미군도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 고취 교육을 실시하였음. 미순양함 1척을 자폭해서라도 폭파시키면 미국내에 반전여론이 만연되어 한국을 포기하게 될 것이며,남쪽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말만으로도 남한인민들을 전쟁공포로 떨게 만들수 있다고 믿고 있음. ○팀 스피리트훈련 인식 북한 당·정 간부들은 T/S훈련의 목적이 ①훈련을 진행하다 북한의 방어태세가 허술할 경우 북침하거나 ②한반도에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여 북한경제를 마비시키기 위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 동 훈련기간중 전군의 군사장비들이 상시 기동태세를 유지함으로써 유류난 속에서도 막대한 유류소모가 불가피하고 군 병력의 경제건설 활동도 중잔됨으로써 북한경제에 미치는 피해가 상당함. 특히 93·3 T/S 훈련을 핵사찰 문제로 인해 ‘준전시 상태’를 선포하는 등 최고조의 긴장태세를 유지하였는바 김정일은 집무실 지하에 설치된 작전상황실에서 집무를 하였고 중앙당은 각과별로 1명씩 당중앙위원회에서 비상근무를 하였으며 모든 차량을 징발하여 대기시키고 군대를 갱도에 투입하였음.
  • 중 천재시인 고성 시집 ‘나는 제멋대로야’

    ◎문혁시대 어둠을 딛고… 시구마다 서린 순수한 영혼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 시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으로 꼽히는 고성.그의 대표시 모음집 ‘나는 제멋대로야’(김태성 옮김)가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다.아내를 도끼로 살해하고 자신은 목매 자살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천재시인.그는 한국 독자들에게 자전적 소설 ‘잉얼’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세간에 알려진 끔찍한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피상적인 생각만으로 고성의 시를 대하는 독자라면 그의 시에서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시인의 더없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 시구 마디마디에 서려 있기 때문이다.표제작인 ‘나는 제멋대로야’를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영롱한 영혼의 소유자였던가를 알 수 있다. 〈어쩌면/나는 엄마가 응석받이로 키운 아이인지 몰라/나는 제멋대로야/나는 매 순간이/색색깔의 크레용처럼 그렇게 아름답기를/바래…〉.37세로 지상의 삶을 마감한 고성은 세상과 섞여 들어가지 못한 채 세상 밖에서 겉돌며 신음하던 동화같은 인물이다.그의 시 역시 그런 동화적인 순수성과 몽상적인 이미지들로 가득차 있다. 중국 현대 ‘몽롱시’군단의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그는 문화대혁명을 겪은 세대의 어둠과 상처를 생생하게 그려낸다.‘몽롱시’군단은 문혁이 끝나고 자유의 물결이 밀려든 80년대,난해한 은유와 회삽한 시어로 현실을 풍자하고 새 시대의 도래를 노래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고성의 대표적인 시로는 ‘한 세대 사람’을 들수 있다.단 두줄로 된 이 시는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하나의 잠언으로 통한다.〈어둔 밤은 내게 검은 눈동자를 주었으나/나는 오히려 그것으로 세상의 빛을 찾는다〉.그의 시 이면에는 중국 현대사의 양지와 음지가 상징적으로 각인돼 있다.
  • 「착한 신데렐라」 환상 깨기/극단 사조 이색연극 「동화본색」

    ◎부귀영화도 미련없이 걷어차고…/강한 자의식… 때로는 잔인·교활/700여종종 판이한 원곡바탕 각색 왕자가 내민 부귀영화의 유리구두를 미련없이 걷어차는 신데렐라.목적을 위해서는 살인까지 할 만큼 자기방식의 삶을 고집하는 억센 신데렐라가 누비는 무대. 극단 사조가 지난 20일부터 서울 대학로 바탕골소극장에서 공연중인 「동화본색」은 환상속에 자리해온 기존 신데렐라의 순진무구하고 현실순응적인 이미지를 깡그리 부수고 들어간다.여기서의 신데렐라는 강한 자의식,적극적인 행동,거기다가 때로는 잔인하고 교활하기까지 하다.극의 줄거리도 동화의 신데렐라와는 판이하다. 유모의 음모에 말려 신데렐라는 계모를 목졸라 죽인다.유모는 이를 이용,두번째 계모가 되고 아울러 죄책감에 시달리는 신데렐라를 정신병자로 몰아 감금한다.왕실에서 왕비로 삼을 신데렐라를 찾아나서자 새 계모는 유리구두에 맞춰 큰 딸의 발가락을 도끼로 절단,왕실에 들여보내는데 성공한다.그러나 곧 큰 딸은 발이 썩어 가짜임이 탄로나고 왕자는 진짜 신데렐라를 찾아청혼하지만 신데렐라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나선다. 대부분 동화의 원래 테마들은 대개 끔찍하고 잔혹하다고 분석한 찰스 패너티의 「배꼽티를 입은 문화」 등 3권의 동화비평서를 참고로 해서 연출가 김영환씨(43)가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패너티에 의하면 「잠자는 숲속의 미녀」원본은 잠든 미녀가 사냥나온 귀족의 키스를 받고 눈을 뜨지만 강간당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또 「빨간모자」에서는 늑대가 할머니를 통째로 삼킨뒤 빨간모자의 손발을 갈갈이 찢어 놓는다.신데렐라 이야기도 예외가 아니어서 각국에 전해내려오는 700여종의 이야기 가운데는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많은 처녀들이 발을 자르고 신데렐라가 계모를 죽이는 이야기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이처럼 보다 현실지향적인 신데렐라 이야기가 사회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환상일변도로 포장돼 현실과 여성과 도덕을 왜곡하고 있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연출자 김씨는 『환상이 아닌 현실의 신데렐라를 찾아보기 위해 원전 속의 신데렐라를 무대에 올려봤다』면서 『여기서의 신데렐라는 한 행운아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모든 여성들의 일반명사』라고 말했다.그래서 그는 극속의 세 여자를 모두 신데렐라로 간주한다. 8월3일까지.평일 하오4시30분·7시30분,토·일 하오4시·7시(월 쉼).833­9266.
  • 조선중기 이명욱의 「어초문답도」(한국인의 얼굴:108)

    ◎호걸풍 어부­선비풍 나무꾼 기묘한 만남 사실적 묘사 조선중기의 화가 이명욱은 「어초문답도」라는 그림 하나만을 달랑 남겼다.그렇지 않았더라면 조선회화사 뒤안으로 사라졌을 인물인지 모른다.어느 집안에서 언제 태어나서 얼마를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다.다만 임금 숙종이 아끼던 17세기 화원으로 당시 도화서 화원이자 교수 한시각(1621∼?)의 사위라는 사실 정도가 알려졌을 뿐이다. 그의 유일한 작품인 간송미술관 소장품 「어초문답도」는 어부와 나무꾼의 대화를 묘사한 그림이다.어부와 나무꾼이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이 그림에는 사실 그대로를 그리려는 사의성이 짙게 배었다.그래서 어부와 나무꾼의 얼굴은 물론 몸뚱이와 옷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정교한 필치로 그렸다.그리고 대각선이 서로 맞물려 지나가는 화면 한복판에 인물을 그려 넣었다. 그림의 구도부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래서 정교하게 묘사한 인물의 표정과 동작이 살아서 가까이 다가왔다.무슨 말인가를 어부가 먼저 건넨듯 한데 나무꾼은 눈길을 먼데로 돌렸다.그러면서 나무꾼이 입을 연 모양이다.어부는 나무꾼 화답만으로는 모자라 나무꾼 표정을 살피고 있다.화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부의 얼굴이 급기야는 흐뭇해졌다.두 인물은 곧 의기가 투합되어 문답을 계속할 것이다. 어부의 체구가 나무꾼에 비해 더 우람하다.얼굴 윤곽이 굵거니와 근육질의 팔다리를 드러낸 어부는 갓 잡은 물고기를 꾸러미에 꾀어 왼손에 들었다.그리고 오른손에 쥔 낚시대를 어깨에 턱 걸쳤다.나무꾼은 긴 작대기를 어깨에 메었다.그런데 옷이 낡아 어깨께를 다른 헝겊으로 기워 입은 나무꾼은 작은 손도끼를 허리춤에 찼다.나무꾼은 체면을 차려 치포관을 썼으나,어부는 차양만 달린 모자 위로 맨상투를 내놓았다.호걸풍 어부와 선비풍 나무꾼의 기묘한 만남이다. 어부와 나무꾼이 하는 일은 서로 극명하게 다르다.그러나 어부와 나무꾼을 어초라는 말로 자주 썼다.고사에 어초가 나오는가 하면,중국 북송의 문인 동파소식이 1082년에 지은 「적벽부」에도 들어있다.「나나 그대는 강가에서 고기잡고 나무하고,고기와 새우와 짝지어 놀고,큰 사슴 작은 사슴과 벗이나 하며…」라는 내용의 글이 그것이다.「어초문답도」는 동파의 이 산문과 무관치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 AD462년 「왕도의 비밀」을 아시나요

    ◎백제21대 개로왕시대 배경 액션게임/납치당한 왕비 구출싸고 목숨건 전투/삼국시대 건축양식·의복·무기 등 재현 「왕도의 비밀」은 (주)한겨레 정보통신(02­3444­3721)이 개발한 국산 게임. 백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3차원 액션 게임이다.삼국시대 당시의 건축양식,의복,무기,등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이 특징이다.시나리오 역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7월초 출시예정으로 윈도 95전용. 게임의 배경은 서력 462년 백제 21대 대왕인 개로왕 8년이다.당시 백제의 2대 토호세력인 진씨 문중과 해씨 문중의 왕권 다툼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진다.세자의 책봉을 둘러싼 암투도 극에 달해 있고 난세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영웅의 출현밖에 없다.국민들은 이 영웅이 임신한 해사화 왕비가 낳을 세자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이때 사찰로 불공을 드리러 갔던 왕비가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남은 증거는 몸에 「정」자가 찍힌채 머리가 잘리고 네 다리가 부러진 말들뿐.게이머의 임무는 왕비 해사화를 구출하고 「정」자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다. 등장하는 스테이지는 모두 6개.마을,성안,지하 감옥,호숫가 등이다. 게이머는 주인공 캐릭터인 「목만치」나 「만년」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게임은 캐릭터를 선택한 뒤 지도를 뒤져 열쇠를 얻고 목표를 찾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목만치는 왕비를 구하는 것이,만년은 정자의 비밀을 푸는 것이 주임무다. 일본 사무라이의 원조라고 알려진 검객 목만치는 기본적인 두가지 공격과 방어외에 독특한 개성을 가진 다섯가지의 필살기를 쓸 수 있다. 공격은 검만 사용할 수 있다. 공격 레벨은 5까지 증가한다. 30여종이 넘는 적들도 목만치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으므로 무작정 공격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공격과 방어 말고는 옆으로 피하는 것 같은 다른 동작은 할 수 없고 목만치의 움직임도 느린 편이기 때문이다. 「만년」은 커다란 양날도끼가 무기.방어보다는 공격을 주로 하는 특성을 지녔다. 어느쪽을 선택해도 스테이지가 진행될수록 적들은 점점 강해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키를 누르거나 떼면 순간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적들의 공격을방어하면서 싸우기는 그닥 어렵지 않다. 공격이 성공했을때는 빛이나 별같은 효과를 사용하지 않고 소리와 동작만으로 효과를 표현하는 것도 독특하다. 숨겨진 아이템을 찾거나 곳곳에 있는 비밀문 스위치를 누를 때는 스페이스 바를 사용한다. 아이템은 적 캐릭터가 가진 기의 결정체다.육각형,삼각뿔,육면체로 생긴 아이템을 제때 얻어야 적의 생명력을 없앨수 있다.아이템을 얻지 못하면 적의 공격을 다시 받게 된다. 섬세하고 깔끔한 분위기의 고해상도 화면이 장점이다.오프닝과 엔딩에 등장하는 동영상과 배경음악도 국산게임에서는 돋보이는 수준이다. 다만 1대1 게임이나 네트워크 플레이가 지원되지 않는 것이 흠이다. 4만4천원.
  • 현대무용가 박일규(이세기의 인물탐구:131)

    ◎현란한 율동언어로 대중곁에/춤의 난해성 배제… 음악과의 일체화 추구/검무와 탈출 접목한 새 「무무시리즈」 준비 주어진 모든 틀을 부정하고 신선하게 춤출뿐만 아니라 그는 안무감각,음악적 감각을 겸비한 행정가이자 춤의 결재자이다.일찍이 「무용의 형이상학적 난해성을 배제하여 음악과 춤,춤의 연극성을 추구한」 박일규의 춤을 보고 시인 김영태는 「그는 적어도 언제나 10년 이상 앞장서 있었다」고 말해왔다.그의 춤의 탐험은 무의 상태에서 유의 기능을 순식간에 연결하고 때로는 아다지오,때로는 빗발치는 알레그로로 눈부시게 춤을 구사해 나간다.마치 빛을 보는 것과도 같이 그를 통해 분해된 음악이 광선처럼 춤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알수 있다.그만큼 음악의 연구에 천착해 있었고 무용과 연극을 위한 작곡자로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이고 있다. 그가 음악에 손대게 된것은 춤의 언어가 관객에게 쉽고 재빠르게 전달돼야 한다는 신념에서다.음악 따로 춤 따로가 아닌,음악과 춤의 일체감을 시도한다는 자세로 87년에 발표한 「서울에 핀 여든 여덟개의 장미」는 가수 조용필이 노래한 「창밖의 여자」를 스스로 편곡한 것이다. ○27세에 발레스쿨 입학 179㎝의 헌칠한 키에 잘생긴 용모,본래는 극단 자유에 소속된 연극배우였으나 뛰어난 연기력과 순발력이 국립발레단장이던 임성남씨의 눈에 띄어 「호두까기 인형」에 출연하면서 자연스럽게 발레에 스며들었다.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갖고있는 모든 에너지를 온몸의 동작으로 쏟아부을수 있는 새로운 예술에 매력을 느꼈다.억누를 수 없이 치솟는 영감은 어느때는 스프링처럼 튀어오르고 어느때는 알바트로스처럼 넓고 힘차게 날아오를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로 만들어내는 순수한 도취의 순간을 영원히 쟁취하기 위해 그는 당장 미국으로 갔고 뒤늦은 나이인 27세에 저명한 조프리 발레스쿨에 입학했다.그러나 발레테크닉을 체험하는 동안 지나치게 인공적인 발레보다는 가장 조야한 현실에서 숭고한 추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율동언어로 춤출수 있는 현대무용에 한층 애정을 갖게 되었다.이 새로운 춤형식은 일상적인 것을 초월할 수도 있었고 의외성의 경이로움으로 역작용의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나도 나만의 정의를 가지고 춤을 만들수 있다」는 희망에 들뜬채 초기에는 문학적인 수단으로 창조과정을 밟아 나갔고 다음은 음악을 분석하면서 거기에 맞는 춤의 형태를 선택해 나갔다. 뉴욕에서는 홍콩출신의 현대무용가 챙칭(Chiang ching)의 많은 영향을 받은 셈이었다.챙칭무용단에 소속되어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이었던 존론과 「스프링 브라섬」「타히티안」 등을 춤추기도 하고 공연이 끝날 때마다 춤의 감시자들로부터 예상을 뒤엎는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주로 세컨드 애비뉴 댄스컴패니에서 활동을 벌이면서 도약과 비상의 화려한 극점에 올랐으나 그무렵 시련의 한고비를 맞아 주춤거리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5년만인 85년에 귀국하여 그는 국내활동을 벌이면서도 국제적 페스티벌과 행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지난 88년에는 록펠러재단의 기금을 받아 인도네시아의 사르도노와 함께 「하나둘셋넷」이란 작품으로 아메리칸 댄스페스티벌에 참가,그러나 예술가라면 누구나 기대해 마지않던 뉴욕타임스의 잭 앤더슨의 평은 그의 춤인생을 180도로 전환시키고야 말았다.그의 평은 서두에서는 「움직임과 음악성은 생동감에 빛난다」고 쓰고 있었다.그러나 말미에서는 「코리안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없어 보인다」고 꼬집었다.예술가에게 아이덴티티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와 개성이 없다는 것과 다름없었다.그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내가 해온 것은 무효다.나만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추구한다」는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고 춤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해 「무악」을 가지고 다시 국제무용제에 참가했다.윤이상 작곡의 「무악」은 한국 춤사위를 닮은 특이한 손놀림에서부터 이미 관객을 압도할 수 있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음악은 정지동작과 다이내믹스를 절제하거나 확산시킨다.그리고 그로테스크한 빛과 어둠의 교차속에서 작가는 「한국인의 정신」을 초현실주의적인 추상회화로 그려내었고 「영원불멸의 직조와 심미학적 윤곽의 구축」「아름다운 체구에 번뜩이는 창의력을 지녔다」는 최대의 찬사를받아냈다.그후 그의 창작무는 영상 구음 절규 통곡과 폭소를 함축하여 배경군무가 빗살같은 섬광으로 번뜩이고 도끼같은 날카로움이 도처에 도사렸다.「아직도 그만한 춤을 발견할 수 없다」는 원로 박용구씨의 평은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번뜩이는 창의력 소유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의연하게 대처하는것 같지만 섬약한 감성과 지성감이 복합적으로 대립되어 불의와의 투쟁이 끊임없이 튀어나온다.지난 92년,주변의 원로나 대선배들의 총애때문에 「춤의 해」 기획추진실장,94년 세계무용연맹 한국지부 사무국장에 임명된 것이 선배들을 제치고 독주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슬럼프와 혐오를 겪은 것이 그 한 예이다.그러나 밝고 원만한 성격으로 이를 극복할수 있었고 그의 주변은 「탁월하고도 다양한 그의 재능」이 무용계에 힘이 되고 있음을 믿어주었다.그는 그 기간동안 무대에서 춤추는 대신 자신을 재충전하는 의미에서 살풀이춤과 판소리를 배우고 대금 아쟁 사물놀이 등 우리 악기에 빠져들어 제2의 도약을위한 빈틈없는 준비기간을 거쳤다. 소설 「내가 설 땅은 어디냐」의 작가 허근욱씨의 외아들.소년시절부터 바이올린,성악을 사사하는등 그는 「예능」에 관한한 천의무봉으로 다재다능하다.그래서 그의 춤은 대중화를 시도하지만 누구보다 문학적이고 사고력과 명상력이 심오하다는 평을 듣는다. 지난봄,춤작가전에서 모처럼 「햄릿」을 춤추었고 요즘은 연극원 6월공연인 김우옥 연출 「아리랑」의 음악을 맡고 있다.이제 그는 그 안의 싸움을 끝내고 검무와 탈춤을 접목한 새로운 「무무」시리즈를 가을쯤 선보일 예정이다. 조지 발란신이 그런것처럼 참으로 진정한 춤을 추기 위해서 그는 오로지 음악의 산맥을 탐험하고 있었고 음악을 이루는 악기들에 밀착해 있었으며 이제부터는 자신이 바로 악기인듯이 그의 몸속에서 그만의 춤이 흘러나오는 것을 확신하는 듯하다.주어진 틀을 하나하나 분해하고 신선한 것을 모색할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특이성과 본질을 파악한 그의 춤은 또하나의 색다른 광선으로 관객의 심장을 빗살처럼 관통하게 될 것 같다. □연보▲53년 청주 출생 ▲72년 이대부속고 졸업 ▲74년 서울연극학교 졸업 ▲78년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74­현재 극단 자유극장 단원 ▲76­80년 국립발레단 솔리스트,「골렘」「로미오와 줄리엣」 등 출연 ▲77­79년 KBS극회회원,연극 「환도와 리스」「휘가로의 이혼」 ▲80년 뉴욕 조프리발레스쿨 연수 ▲82­84년 뉴욕대 무용과 졸업,티르드론 댄스시어터 출연 ▲83년부터 챙칭무용단원 ▲84­85년 뉴욕대 예술대학원 무용과 졸업,뉴욕 라마마극장 초청 제3세계무용제 「춘궁기」안무 출연,뉴욕 세컨드 애비뉴댄스컴패니 「FOUR IN ONE」「WHERE AM I STANDING?」안무 ▲85­88년 A.D.F(아메리칸 댄스페스티벌)초청 「1985년 여름」안무,미 브루클린 댄스앙상블 단원 ▲85­현재 서울예전 교수 ▲87년 「동랑댄스 앙상블」 창단 ▲88년 88올림픽 개회식 안무 ▲89년 국제현대무용제 참가 ▲90년 홍콩국제무용제 참가 ▲91년 일본 모리오카시 축제 참가 ▲92년 「춤의 해」기획추진실장 ▲93년 대전엑스포 폐회식 안무 ▲94­95년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 사무국장 ▲95­96년 성균관대 대학원 출강 ▲9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수상〉 서울무용제 음악상(90년) 코파나스상(91년) 문화부장관공로상(93년) 코파나스상
  • 조선화가 김시의 「당나귀 끄는 소년」(한국인의 얼굴:103)

    ◎고삐당기는 얼굴에 구김하나 없어 조선의 16세기는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 외래문물에 보다 밝게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다.권력핵심의 사대부,특히 공신이나 왕실과 인연을 맺은 척신들은 새로운 정보에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그런 분위기는 실학이라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바탕이 되었다.그림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선 초기의 화풍을 계승한 가운데 중국 화풍을 조금씩 곁들인 작품세계를 개천했던 것이다. 그 16세기는 조선시대 전체를 전·후기로 나눌때 전기에 해당한다.또 초·중·후·말기로 구분하면 조선 중기(1550∼1700년)라 할 수 있다.그 시기의 대표적 화가는 김시(1524∼1593년)다.대표작으로는 지금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보물 783호 「동자견려도」가 꼽힌다.제목 그대로 소년이 당나귀를 끌어당기고 있는 그림이다.통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다리를 건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당나귀와 기어이 끌고가려는 소년의 모습이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소년은 주인을 따라 한나절 산천바람을 쐬러 나온 모양이다.그런데 집에 돌아갈 채비를차린 주인 나리께 대령한 당나귀가 냇가에서 말썽을 부리고 있다.그러나 뻗대는 당나귀에 질세라 소년은 젖먹던 힘을 다해서 고삐를 팽팽이 거머쥐었다.소년과 당나귀의 대결이 해학적이거니와,박진감이 넘치고 있다.당나귀를 잡아끌고 있는 소년은 신분을 떠나 얼굴이 잘 생긴 홍안의 미소년이다. 소년은 힘을 쓰느라 제법 큰 머리통을 뒤로 젖혔다.당나귀가 말을 제대로 들어먹지 않는데도 얼굴에는 구김살하나가 없다.그래서 표정이 한껏 맑다.골상이 둥글둥글하나 미련스럽지 않은 까닭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기 때문일 것이다.오히려 총명한 인상이다.붓으로 그린 것처럼 확연한 눈썹 한참 아래로 눈매가 초롱초롱하고 복스러운 코에 제법 날이 섰다.도타운 입술에 작은 입을 했다.그래도 소년은 말수가 헤퍼보이지는 않았다. 이 그림은 산수속의 인물에 촛점을 맞추었다.이른바 대경산수인물화에 속하는 이 그림의 형색은 조선 초기의 회화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이는 중국 절강성을 비롯한 강남의 화원들이 15세기 후반부터 주도한 절파의 화풍을 수용한 것이다.그 절파의 흔적은 주산의 바위표면을 도끼로 팬 것처럼 명암을 뚜렷이 구분한 이른바 부벽준기법에서 나타났다. 그림을 그린 김시는 주로 명종과 선조때 활약한 선비화가다.양송당이라는 아호를 가진 그는 이 그림에도 아호를 낙관했다.그리고 김시계수라는 네모꼴 붉은 도장을 찍어놓았다.
  • 알제리 어린이 등 30명 집단살해/회교극단주의자 소행 추정

    【알제 AP AFP 연합】 알제리의 한 마을에서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들인 30명의 민간인이 알제리 총선 선거전이 공식 시작된 14일 밤 무장괴한들에 의해 칼과 도끼,곡괭이 등으로 잔인하게 살해됐다고 보안군 관계자가 밝혔다. 알제리 TV방송은 보안군 소식통들의 말을 인용,수도 알제에서 남서쪽으로 50㎞ 떨어진 체블리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이번 사건은 92년 이래 정부와 내전을 벌이고 있는 회교 극단주의자들의 범행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 북 강계국방대 비밀조직/김정일 도끼 암살기도

    지난 95년초 북한 강계국방대학의 「반김정일 비밀학생조직」이 김정일의 학교방문을 이용해 도끼로 김정일을 암살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모두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귀순한 탈북자 A씨는 11일 『평소 북한에서 잘 알고 지내던 국가보위부 고급요원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이 사건은 북한에서 최대의 반혁명사건으로 알려져 있다』고 밝혔다고 연합통신이 보도했다.
  • 청동기시대 환호 발굴/창원서/마제석검 등 석기 150점도 수습

    창원대 박물관(관장 이영석)은 지난해 12월부터 경남 창원시 서상동 남산유적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기원전 5세기 청동기시대때 축조된 너비 4.5∼10m,깊이 2∼4m,길이 200m크기의 환호(방어를 위해 물을 채우는 시설)를 확인하고 마제석검 10점 등 석기 150점을 수습했다고 9일 발표했다. 이 환호는 해발 100m의 남산 정상에 동서로 파여진채 목책과 망루 흔적이 발견됐고 환호 주변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 사용된 길이 5㎝의 작은 돌도끼와 3㎝짜리 돌끌이 출토됐다.
  • 청동기시대 밭터 첫 발굴/남강댐 수몰예정지구서

    ◎경작용 석기도 출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경작지(밭터)가 경남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남강댐 수몰예정지구에서 발굴됐다. 경남대학교 박물관은 지난 1월부터 남강댐 수몰예정지구인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1336의2 일대 대평 어은1지구의 유적 발굴조사 결과 기원전 5세기 청동기시대 경작지인 밭터가 발굴됐다고 27일 밝혔다. 이 밭은 120×50m(2천평) 크기로 밭고랑의 가장 긴 부분은 30m,고랑의 폭은 35㎝,고랑의 깊이는 10㎝ 정도이다.밭고랑 사이에서 반달돌칼과 돌도끼,돌낫 등 경작용 석기와 「조」로 보이는 곡물의 탄화물이 발견됐다. 현재 국내 최고의 경작지는 지난 90년대초 발굴된 미사리 백제유적지 밭터(5세기쯤)로 알려져 있는데 청동기시대 밭터가 원형대로 발굴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폴더는 파일이 있는 방(컴퓨터 걸음마:36)

    뚱보 윈시인이 물가에 오두막집을 지었습니다.한쪽에는 솥을 걸고 한쪽엔 요를 깔고 또 다른쪽엔 돌도끼를 놓았습니다.그러다가 집이 좁아져서 지하실을 팠습니다.지하실에는 사과와 배추를 두었습니다.지하실이 좁아서 옆을 넓혀서 방을 하나 더 만들고 물고기를 말려서 저장했습니다.사과와 야채를 둔 지하실방을 채소방이라 부르고 물고기를 저장한 방을 고기방이라고 불렀습니다. 뚱보 원시인의 오두막집을 도스(DOS)운영체제에서는 하드디스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DOS에서는 방을 디렉토리(directory)라고 합니다. 1층을 루트(root)디렉토리라고 합니다.지하실을 서브(sub)디렉토리라고 합니다.채소방을 채소 서브 디렉토리라고 하고 고기방을 고기 서브 디렉토리라고 합니다.1층 루트 디렉토리에는 솥,요,돌도끼라는 파일이 있습니다.지하 1층의 채소 서브 디렉토리에는 사과 파일과 배추 파일이 있습니다.고기 서브 디렉토리에는 물고기 파일이 있습니다.하드디스크는 시콜론(C:)이라 정했습니다.루트 디렉토리는 역슬래시로 표시합니다.행정전산망용 컴퓨터에서는 역슬래시 키가 나오질 못하고 원화 표시()모양으로 나옵니다. 하드디스크의 루트 디렉토리는 C:로 표시가 됩니다.하드디스크의 루트 디렉토리의 솥 파일은 C:sot이 됩니다.루트 디렉토리의 돌도끼 파일은 C:doldoggi가 됩니다.서브 디렉토리는 루트 디렉토리 표시인 역슬래시를 붙이고 씁니다.채소 서브 디렉토리는 C:chaiso가 됩니다.채소 서브 디렉토리의 사과 파일은 C:chaisosagwa로 표시합니다.채소 서브 디렉토리의 배추 파일은 C:chaisobaichoo가 됩니다.고기 디렉토리의 물고기 파일은 C:gogimoolgogi입니다. 윈도95에서는 방을 디렉토리 대신에 폴더(folder)라고 부릅니다.오에스투(OS/2)운영체제나 매킨토시용 시스템7 운영체제에서도 방을 폴더로 부릅니다.윈도3.1에서는 방을 그룹윈도(창)라 부릅니다.윈도3.1에서는 지하실을 파지를 못합니다.그저 1층을 넓히는 도리밖에 없습니다.DOS 운영체제에서는 물건을 1층과 지하실로 나누어 저장할 수 있었지만 윈도3.1에서는 1층에 모든 물건을 두어야 합니다.만일 1층을 넓힐수 없다면 새로운 오두막집을 지어서 그 집의 1층에다 물건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지은 집 1층에 솥,요,돌도끼를 두고 새로 지은 오두막에 사과,배추,물고기를 두어야 합니다.윈도3.1에서는 방을 그룹윈도라고 하니까 처음 지은 오두막집을 오두막1그룹윈도,두번째 지은 오두막집을 오두막2그룹윈도라고 합니다. DOS식의 표현을 빌면 루트 디렉토리에 해당하는 1층만 사용할 수 있는 윈도3.1를 하위 디렉토리 즉,하위 그룹윈도를 만들지 못하는 운영체제라고 합니다.반면에 윈도95는 DOS처럼 하위 디렉토리를 얼마든지 만들수 있습니다.뚱보 원시인말로 표현하면 지하 1층,지하 2층,지하 3층 등 필요하면 얼마든지 지하실을 팔 수 있는 것입니다. 한글윈도3.1의 그룹윈도는 한 그룹윈도 안에 하위 그룹윈도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체계적인 아이콘 관리가 어려웠습니다.한글윈도95의 폴더는 프로그램을 담는 디렉토리나 그룹윈도 역할을 하는 동시에 때로는 프로그램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한글윈도95 초기 화면의 바탕화면에 보이는 휴지통 아이콘은 분명히 한 개의폴더지만 이 아이콘을 두번 누르기하면 폴더의 창이 열리는 것이 아니고 바로 휴지통 프로그램이 실행됩니다.한글윈도95의 폴더는 프로그램의 아이콘들이나 다른 폴더를 담아두는 방역할을 함과 동시에 한 개의 프로그램 아이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글윈도95에서 새로운 폴더를 만들려면 한글윈도95의 바탕화면이나 다른 폴더의 창속에서 「파일」 메뉴의 「새로만들기」를 고르거나 마우스의 오른쪽 단추를 한번 누르면 단축메뉴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새로만들기」를 선택합니다.〈필자=계원조형예술대학 전자출판과 교수〉
  • 예수성의 불탈뻔/이 토리노 대성당 화재/3중 방탄창 뚫고 구출

    【토리노 AP AFP 연합】 17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에 11일 밤(현지시간) 화재가 발생했으나 이곳에 보관돼 있는 예수의 「성의」는 무사하다고 경찰이 12일 밝혔다. 화재는 토리노 대성당의 둥근 천장에서 이날 밤 11시35분(한국시간 오전 6시45분)에 발생,목재로 이뤄진 내부를 전소시켰으나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화인은 일단 누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당안에 보관돼있던 예수의 성의는 그러나 소방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중앙제단 뒤에 있던 성물함의 3중 방탄 유리를 도끼로 부수고 꺼내옴에 따라 화를 입지않았다. 은으로 장식된 유리 성물함이 심하게 손상된 채 소방관의 손에 들려 나오자 주변에서 지켜보던 수십명의 주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으며 어떤 주민들은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뜨렸다고 이탈리아 ANSA 통신이 전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 수의로 사용했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이 성의는 가로 4.10m,세로 1.40m의 아마포로 가시관을 쓴 채 등을 창에 찔리고 어깨에 상처가 난 남자의 몸 앞·뒤 모양이 노란색으로 음각돼있으며 지난 1578년 이래 이곳에 보관돼왔다.
  • 금도끼 은도끼(외언내언)

    『나는 이 배를 ○○○호로 명명하나니 이 배와 승무원 모두에게 신의 축복과 가호가 깃드소서』 새로 지은 배를 선주에게 인도하기 직전에 그 이름을 짓는 명명식에서는 전통적으로 선주측의 여성이 나와 이런 축문을 낭독한 뒤 금도끼나 은도끼로 테이프를 자른다.명명자는 그 배의 대모가 된다. 도끼는 대모가 보관한다.국내에서는 한진해운 조수호 사장의 부인 최은영씨가 20개가 넘는 금도끼와 은도끼를 갖고 있다.가족들이 명명해 온 회사의 전통에 따라 행사를 도맡은 덕분이다.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 김정일씨가 7개,조회장의 외동딸 현숙씨가 5개,조양호 한진그룹 부회장의 부인 이명희씨가 3개 등 조회장의 부인과 딸·며느리들이 모두 40여개 금도끼와 은도끼를 갖고 있다.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기록이다. 반면 해운업계의 라이벌인 현대상선은 대부분 재계와 관계의 고위직 인사의 부인을 명명자로 선정한다.역대 해운항만청장의 부인들이 단골 멤버이고 전경련 등 재계 인사와 통상산업부장관의 부인 등이 고루 참여했다. 역대 대통령 부인들도대부분 선박의 대모가 됐다.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제외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부터 현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여사에 이르는 퍼스트레이디들이 그들이다. 90∼95%의 순도를 지닌 은도끼는 10여년 전부터 금도끼를 대신하는 추세다.도금 제품임에도 금도끼는 50만∼1백만원인 은도끼보다 훨씬 비싼탓이다.조선업계와 해운업계의 불황 때문에 이런 절약풍조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조선소에서 후판을 설계도면대로 처음 자를때 조선소 대표와 선주가 참석해 갖는 강재 절단식과 건물의 상량식에 해당하는 용골 거치식도 간소해지거나 없어지고 있다.재래식 고사로 때우는 사례도 허다하다.멋있고 이국적인 행사가 돈 때문에 간소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을 법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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