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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 총독부 관리가 백제유물 빼돌렸다”

    ◎익명의 일 수장가가 기증한 문화재 정리 과정서 밝혀져/당시 공주 송산리 고분 발굴한 다케시/출토품 상당수 일 공동상에 팔아넘겨/문화제에 관한한 “일인의 양심은 없다” 입증 조선총독부 시절 문화재 발굴을 책임진 일본인 관리가 백제시대 보물급 유물을 빼돌려 골동품상에 돈을 받고 팔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문화체육부는 지난달 19일 익명을 요구하는 일본의 70대 사업가로부터 백제시대 귀고리 한쌍을 비롯해 고려시대의 옥으로 만든 장신구와 은으로 만든 팔찌 등 모두 3백77점의 우리 문화재를 돌려받았다. 이 장신구들은 기증받을 당시 모두 작은 진열 상자 안에 가지런히 정리된 채 유물 하나하나에는 유물의 수집경위와 출토지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보물급으로 평가되는 백제 귀고리 한쌍에는 각각 「순금으로 만든 귀고리로 공주감옥소 뒷산에서 총독부박물관 노마모리 다케시씨가 발굴했다(순금제이식 공주감옥소 이산 출토 총독부박물관 야수 건씨 발굴)」는 설명이 붙어 있었던 것.노마모리 다케시(야수 건)는 바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1927년 공주 송산리 1∼5호분과 1930년 평남 대동군 오야리 고분 등을 발굴한 장본인이다.그가 이때 쓴 조사보고서는 1936년 조선총독부가 간행해 아직도 학계의 중요 자료로 쓰이고 있다. 기증자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일본은행장을 지낸 자신의 아버지가 1920년대와 30년대에 도쿄의 골동품상을 통해 사들였던 것.주로 경주 부여 동래 진주 등지의 고분에서 나온 유물을 집중적으로 모아 품목별로 분류해서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백제귀고리 한쌍 역시 골동품상에서 사들인 것.노마모리가 출토품을 몰래 일본으로 가져가 골동품상에 돈을 받고 넘긴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전문가들은 일단 이 귀고리가 송산리 고분 출토품은 아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아마도 총독부 차원의 발굴과는 별도로 다른 고분을 도굴했으리라는 추정이다.그렇다해도 그가 참여해 공식적으로 발굴한 유적에서도 중요 출토유물을 상당 수 빼돌렸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노마모리가 왜 떳떳치 못한 행위를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숨기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두가지로 분석한다.하나는 출토지와 발굴자를 당당히 내세움으로써 희귀한 백제시대 금속유물이라는 것을 증명해 더 많은 돈을 받아내려 했다는 것.또 하나는 당시 일본사회에 총독부 차원의 발굴사업 담당자가 도굴을 해서 우리 유물을 팔아먹는 파렴치한 행위를 해도 당연시 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어 이같은 일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우리 학계는 지금까지 제국주의 일본이 역사왜곡과 문화재의 조직적 약탈을 위해 우리 땅에서 발굴을 했지만 그 발굴에 참여한 당사자들은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학자적 양심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던 것으로 보고 있었다.그러나 이번 일로 문화재에 관한 한 당시 「일본인의 양심」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 백제를 다시본다를 마치고/전문가 좌담

    ◎“문화·사회사적 접근… 백제사 인식 새롭게”/금동향로서 보듯 수입문화를 자기화/학자 동원 알기쉽게 풀이… 독자이해 도와/풍납동토성·아치산성 보존대책 시급/문헌자료 부족… 역사분야 공백에 아쉬움/「백제문화권 개발」은 완벽한 역사 복원위해 학술조사 선행돼야 ▷참석자◁ 김기웅 문화재전문위원·고고학 이기동 동국대교수·한국사 최몽용 서울대교수·고고학 서울신문이 10개월여에 걸쳐 매주 금요일 연재해 온 「백제를 다시본다」가 30회를 끝으로 지난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해 연말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세기적 보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 출현과 더불어 시작했던 이 기획시리즈는 새로운 시각의 백제문화사라 할 수 있다. 이를 마감하면서 그동안 갈채를 보내온 독자 여러분의 기대감을 조금이라도 더 충족시켜주기 위해 관계학자들이 참여한 정담을 마련했다.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놓은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평가가 내려지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김기웅박사=지금까지 백제에 대한 인식은 전문가들만의 영역이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백제를 다시본다」는 일반독자들이 그동안 전문가가 독점했던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백제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여는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여기에는 참여한 학자들이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 써 일반독자들의 백제역사를 이해하는데 한 몫을 했지요.「백제를 다시본다」는 한마디로 현재까지 이루어진 백제연구의 총 결산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동교수=그렇습니다.그동안 백제연구는 너무 세분되어 있었다는 느낌입니다.한 분야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자기 영역을 벗어나면 어두운 것이 현실이었어요.그런데 「백제를 다시본다」를 통해 30여명에 이르는 각 분야 학자들의 전문적 연구결과를 모아놓고 보니 백제역사의 대강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었어요. ○백제연구의 총결산 ▲최몽용교수=사실 이런 유의 기획은 과거 TV에서도 여러차례 시도된 적이 있었지요.그러나 TV가 지닌 한계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많은 전문가가 동원되지 못한 아쉬움이 컸어요.그런 점에서도 「백제를 다시본다」는 좋은기획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김=욕심이겠지만 백제 뿐 아니라 신라나 가야·고구려도 다루었으면 해요.「백제를 다시본다」에서 보듯 한 지역문화를 보편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이=이 시리즈는 지난해 부여 능산리에서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나온 것이 계기가 됐지요.이 향로는 한때 무령왕릉 발굴로 바짝 달아올랐던 백제에 대한 관심이 점차 침체되어 가는 마당에 출토되어 백제를 다시 인식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최=향로가 나온지 10개월이 다 되어가는군요.그동안 이 향로 자체에 대한 해석도 불교·도교,혹은 백제의 건국신화와 연관시키는 등 여러가지로 논의됐습니다.여기에 악기와 의복 기타 미술사적인 연구도 활발했지요.물론 뒤에 총체적인 해석이 나오겠지만 이 향로는 그 하나만 가지고도 다각도에서 조명해볼 수 있는 백제문화의 진수입니다. ▲김=이 향로는 결국 당시 백제가 가지고 있던 문화적 역량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백제는 외국문화를 수입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지만 향로에서 보듯 절대 그대로 수용치 않고 자기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공주 벽돌무덤을 보면 중국의 묘제를 받아들였지만 연꽃모양의 벽화를 그려넣는 등 백제화 시켰습니다.당시 무덤의 양식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문제였지요.묘제를 바꾸는 것은 바로 집권자의 상징을 바꾸는 것이었으니까요.비슷한 예는 석촌동 2·4호고분과 이번에 익명의 일본사람이 기증한 3백77점의 유물 가운데 하나인 백제귀고리에서도 발견됩니다. ○귀고리서도 발견 ▲이=문화분야의 경우 그래도 물질자료가 상당히 출토되어 어느 정도 이야기가 가능합니다.그러나 문헌자료에 의존해야 하는 역사분야는 자료의 혜택을 거의 못받아 연구상의 공백도 많습니다.아시다시피 국내 자료라고는 「삼국사기」가 거의 전부이고 「삼국유사」가 약간 보충하고 있는 정도입니다.「삼국사기」도 그나마 연대기적인 간단한 자료지요.그런데 「일본서기」는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 이르는 2백년 동안 백제와의 교섭을 다룬 자료가 풍부합니다.어떤 시기는 일본의 국내 사정보다 분량이 더 많을 정도니까요.그 때문인지이마니시(금서 용)라는 일본학자가 쓴 「백제사 연구」라는 책을 보면 백제는 외교만 한 나라같은 인상입니다.여기에 해방 이후 우리연구자들도 백제의 국가사를 중심으로 정치제도·중앙관제·지방통제기구·관제·중국과의 교섭사 등을 주로 다루었습니다.연구가 정치사와 외교사에 치우쳐 있었던 셈이지요.그런데 백제 자체의 성격을 알려면 사회사에 대한 연구가 바람직합니다.최근 젊은 연구자들은 고고학적 사고를 일부 동원하면서 백제사의 내부구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종래 정치사에서는 백제는 지배층이 북방에서 남하한 고구려계가 서남쪽의 마한계 토착세력을 정복한 왕조로 지배세력과 토착세력의 이중성으로 심한 괴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백제 멸망도 사회구조의 이중성에서 오는 갈등에서 연유했으리라는 추측이었지요.그런데 「백제를 다시본다」를 통해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니까 그런 이중성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흡수통일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최=토착세력은 고구려계의 정복전쟁 과정에서이미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나머지 공백지대는 백제에 쉽사리 동화되었지요.마한세력이 확실히 남아있었으면 이중적인 구조가 됐겠지만 이미 남하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합니다.서기 369년께에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도 이 남하세력을 복속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이=「일본서기」에는 그들 남하세력을 「남만」이라고 썼어요.굉장히 경멸하는 표현이지요.이질적인 문화 때문이었을 겁니다.그런데 이 「남만」은 바로 백제에서 부르는 그대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이름에서 보듯 백제의 남쪽이지 일본에서는 서쪽이니까요. ▲최=고구려까지 패배시킨 근초고왕의 힘이 아니었으면 남쪽까지 정벌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백제에 흡수되지 않은 이 세력은 처음에는 직산이 본거지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이 세력이 바로 목지국이지요. ▲김=백제의 마한정벌 이후로 추정되는 전남 나주 대안리의 백제고분을 보면 백제가 정벌 이후 행정관을 파견해 지배했을 것입니다.그런데도 백제화 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을 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백제의 내부관계를 알 수 있는 한 예가 되겠지요.이제 문화재 보존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일본서기 기록 많아 ▲최=백제는 기원전 18년에서 서기 475년까지 한성시대,서기 538년까지 웅진시대,이후 서기 660년 멸망 때 까지 사비시대로 나눌수 있습니다.이 가운데 공주와 부여는 앞으로 더 많은 유물·유적을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정부의 백제문화권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조사가 착수되면 유물·유적이 대거 나올 것입니다.유물·유적에 대한 기대와 아울러 보존대책을 지금부터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그런 생각을 미리 안해 실패한 예가 바로 한성백제입니다.올림픽경기장이 주위에 있는 석촌동 3·4호분과 몽촌토성은 그런대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풍납동토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방치되어 황폐화한 상태입니다.전장이 3.5㎞에 이르는 풍납동토성은 지금 5백m만 복원 되었을 뿐 대부분 길이나는 등 원형을 잃어버렸습니다.강 건너에 있는 고구려 산성인 아차산성도 마찬가지입니다.이 두 곳에 가보면 우리에게 문화정책이라는게 과연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올해가 조선을 기준으로 서울 정도 6백년이라지만 더욱 중요한 백제시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합니다.이 두 곳은 유적보존차원이 아니라 단순한 역사관광지로 만 신경을 써도 뛰어난 관광자원이 될 것입니다.올해가 「한국방문의 해」라지만 하다못해 문화유적을 관광수입과 연결시키는 정책만이라도 펴주었으면 좋겠습니다.풍납동토성은 지금 보존하지 않으면 정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풍납동토성은 기원전 18년 백제의 기원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몽촌토성은 4세기 정도로 연구되고 있지요.풍납동토성이 하북위례성,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많아요.강 대안의 고구려 성이 불안해서 도성을 쌓은 것이 몽촌토성으로 보는 거지요. ○단순 관광지 안돼야 ▲김=석촌동고분군을 발굴하니까 적석총 아래에 토광묘군이 나왔습니다.두 묘제는 전혀 이질적이에요.정복자와 피정복자라고 볼 수 있겠지요.이 지역에 대한 재조명도 이루어져야 할 시점입니다. ▲이=조금전 백제문화권종합개발계획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이 계획이 지역개발이라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최=그렇습니다.백제권개발계획이 이미 확정은 됐습니다만 착공하기에 앞서 시간을 두고 학술적 조사를 충실히 하고 학자들의 중지를 모아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행정당국의 백제사에 대한 진지한 접근자세가 아쉬운 시점입니다. ▲이=유적정비도 중요하고 관광휴양단지도 중요하지만 백제역사의 복원이 그 사업의 궁극적 목표라면 내실 있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연구원을 대폭 보강해야 하는 것인데 부여문화재연구소를 활성화시키는 일도 그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연구소를 세워놓고 활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최=그 중요한 부여에 문화재연구소와 박물관을 합쳐 현장에 나가 발굴하고 보고서를 쓸 수 있는 학예직원은 소장·관장까지 포함해 합쳐 10명이 있을 뿐 입니다.일본의 경우 특별사적이 있는 나라에는 이보다 1백배가 넘는 연구인력이 있습니다.문화재 정책이 1백년 앞을 내다보려면 늦더라도 연구인력을 키워야 합니다.공주에도 박물관이 있고 공주대 사학과가 있지만 연구인력은 몇명이나 됩니까.유적·유물이 모두 사라지고나서 도굴됐다느니 매몰됐다느니 그래봐야 이유가 안됩니다.역사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서라도 이제는 문화재 보존·보호문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 입니다.
  • 익산의 유적들(백제를 다시본다:27)

    ◎무왕 익산에 새도읍 건설 추진한듯/미륵사와 왕릉 추정의 쌍릉 이웃에/왕궁리 4∼5㎞ 주변 토성·산성 산재/중국문헌에 “무광왕 천도” 기록… 출토유물도 문헌과 일치 삼국시대의 문화유적은 주로 도읍지와 그 도성 밖 가까운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요즘 개념으로 말하면 수도와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고구려와 백제는 몇 차례에 걸쳐 수도를 옮기면서 그 이웃에 귀족문화흔적을 펼쳐놓았다.수도를 단 한번도 바꾸지 않은 신라 역시 경주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형의 문화를 영조했다. 고대국가가 수도를 경영하는 과정에는 대개 몇가지의 공통적 특징이 나타난다.그 하나가 화려한 왕궁을 건설하는 일이다.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문화현상인 것이다.이어 거대한 사찰을 창건하게 되는데,사찰은 국가가 관장하는 국립사찰형태로 창건했다.불교는 사회문화발전에도 기여했을 뿐 아니라 전제왕국의 호국이념으로도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도성을 지척에 둔 자리에는 반드시 왕릉이 축조되었다.삼국시대의 왕릉은 규모도 물론 컸거니와 묘제를 적용한 방법이나 껴묻거리(부장품)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이들 왕릉을 통해 당대의 문화상이 어떠했는가는 백제의 경우 공주 무령왕릉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증거하고 있다.이렇듯 수도로서의 도읍을 경영하는데 왕릉이 수반된다는 사실 이외에 왕도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도성의 경영도 필수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기록엔 없어 이들 삼국의 도읍지는 모두 역사기록에 나오는 수도들이다.그런데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왕도의 모습이 보인다.고대국가가 수도를 경영하는데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 어렴풋이나마 왕도로 떠오르는 땅은 바로 오늘날 전북 익산군 금마면과 왕궁면일대다.그래서 일찍부터 이른바 「백제 익산천도설」이 제기되었다.익산을 왕도로 볼 수 있는 정황은 고고학적 발굴이나 현존하는 유적을 통해 여러군데서 발견된다. 이 지역 금마면 기양리에는 우선 백제 최대의 가람규모를 자랑하는 그 유명한 미륵사터가 남아 있다.5층석탑의 잔영을 겨우 전하고 있지만,미륵사터에 대한 장기적인 고고학발굴에서 찬란한 백제불교문화상을 속속 파헤쳐냈다.그리고 미륵에서 2㎞ 떨어진 금마면 연동리에는 백제불상광배가 갖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는 석불이 남아 이 지역에 융성했던 불교의 실상을 가늠케 해주고 있다. 우리가 「백제 익산천도설」을 어느정도 수용하고 익산지역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이를테면 왕궁면 왕궁리 왕궁평도 그러한 지역의 하나다.여기에는 왕궁이 있었다는 구전의 전설이 전해내려오고,실제 백제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현재 5층석탑 1기가 남아 있고,그 이웃에서 제석사라는 새김글씨가 든 백제기와가 출토되었다.제석사가 세워졌던 자리로 추정되는 절터에서는 목탑의 주춧돌이 발굴되기도 했다. ○「궁려사」 기와 출토 이 왕궁리에서는 고고학발굴결과 사구석유구와 함께 관궁사라고 새긴 기와를 발견함으로써 익산천도설에 더 가까이 접근한 바도 있다.어떻든 왕궁리유적은 백제의 왕궁이 자리한 가운데 왕실의 원찰로서의 제석사가 창건되었으리라는 추론을 뒷받침한다.이 왕궁리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유적은미륵사다.왕궁평에서 3㎞에 불과한 미륵사는 도성 이웃의 대가람으로 창건되어 미륵하생의 이상향적 불국토를 염원하는 불심을 담았을 것이다. 왕궁리를 중심축으로 한 반경 4∼5㎞ 안에는 백제시대의 여러 성곽이 있다.미륵산성을 비롯,왕궁리토성,익산토성 등이 그것이다.왕궁평을 왕궁이 세워졌던 자리로 본다면,북쪽으로 국립사찰격의 미륵사와 주변 성곽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닌가 한다.그래서 8·15이전에 이미 익산일대의 유적배치상을 통해 중국 낙양의 수도경영형식과 근사하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그뿐이 아니라 익산지역에는 백제왕릉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존재함으로써 고대국가 수도 경영형식과 꼭 맞아떨어진다.이에 따라 「백제 익산천도설」은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다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우리 사서에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이를 전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했다.문헌사학과 현존 유적및 고고학발굴성과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익산천도설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얼마전에 소개되었다.일본인학자 목전체량이 중국문헌에서 백제천도 사실을 적은 기사를 발견한 것이다.9세기경에 찬술된 이 자료는 「백제무광왕천도 지모밀지 신영정사 이정관십삼년… 천대뢰우 수재제석정사」라고 기술하고 있다.여기서 우선 정관13연은 AD639년으로 백제 무왕40년에 해당한다.그리고 무광왕으로 표기한 왕은 무왕을 가리킨 것이 틀림없다. 이 중국문헌에 나오는 지모밀지가 어딘지는 확실치 않다.그러나 지모밀지로 도읍을 옮겨 새로 지은 절이 제석정사라고 기술함으로써 「제석사」라는 새김글씨가 들어 있는 익산 왕궁리 출토 명문기와의 절이름과 일치한다.또 제석사가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후 목탑에서 꺼낸 유물들을 일일이 예로 든 대목도 눈길을 끈다.왜냐하면 현존하는 왕궁리 5층석탑을 해체복원할 때 발견한 김판금강반약경·사리함·사리병 등이 목탑속에서 꺼냈다는 불구유물기록과 똑같기 때문이다. ○사비와 별군 추정도 그렇다면 중국 문헌자료에 나오는 제석정사와 오늘날 절터만이 남아 있는 제석사는 같은 절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또 제석사 목탑에서 꺼냈다는 불구들과 왕궁리 5층석탑에서 나온 불구유물 역시 서로 상관관계를 갖는다.이로 미루어 지모밀지는 오늘날 익산 왕궁면 왕궁리일대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이다.특히 정관13년은 백제 무왕의 재위 연간이고,익산 미륵사를 무왕때 창건했다는 「삼국유사」기록을 신빙성을 가지고 다시 떠올려볼 수도 있다. 이들 문헌자료나 고고학자료들은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한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인지 모른다.그러나 학계는 대체로 사비도성의 별도로 익산지역을 수도로 경영했을 것이라는 쪽과 천도를 준비한 단계로 보는 쪽도 있다.백제 익산천도의 꿈이 실현되었는지 아니면 끝내 실현을 못보았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는 앞으로 풀릴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정부가 현재 이 지역을 대상으로 대규모 국책발굴사업을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무왕이 왜 익산으로의 천도계획을 구체화했는가를 짚어볼 차례다.거기에는 광활한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는데 필요한 거점확보정책이 깔려 있을 것이다.또 한편으로는 무왕 때까지도금마일대에 활거한 마한의 세력집단을 융합 내지 통합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내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석왕동 쌍릉/능산리고분과 같은 굴식돌방무덤/“무강왕릉” 구전… 무왕부부묘 가능성 무왕(?∼641년)은 사비시대 백제의 지위를 한껏 격상시킨 정복군주다.불교문화를 꽃피우면서 신라를 위협,낙동강유역까지 진출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는데도 크게 공헌했다.특히 익산천도의 꿈을 키운 군주로도 유명하다. 무왕의 익산천도가 실현되었는지의 여부는 떠나 그가 묻힌 지역도 익산지방이라는 설이 제기되어왔다.오늘날 행정구역상으로 전북 이리시 석황동에 있는 쌍릉을 무왕의 능묘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무강왕릉이라는 전설을 지닌 이 쌍릉은 북쪽의 것을 대왕묘,남쪽의 것을 소왕묘로 부르고 있다.1915년 일본인 다니이(곡정제일)에 의해 백제말기인 7세기경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밝혀졌다. 대왕묘는 지름 30m,높이 5m 정도이고 소왕묘는 지름 24m,높이 3.5m정도인데 모두가 원분이다.내부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부여 능산리고분 돌방과 같은 형식의 널돌(판석)을 사용했다.대왕묘의 경우 널방(현실)을 남북 장축의 장방형 편면을 이루었다.남벽 중안에 널길(선도)이 나 있고 널길은 널돌로 막았다.4면의 벽과 바닥·천장은 다듬은 널돌로 조립한 형태다. 그리고 바닥 중앙에는 한 단이 높은 석재 한장을 가지고 널받침을 마련해 놓았다.조사당시 유물은 이미 도굴되었으나 널만은 그냥 남아 있었다.이 나무널은 복원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이 널에는 관못과 관고리가 달렸다.관고리에는 여덟 잎사귀의 연꽃형 밑동쇠(좌금구)가 달려 호사스럽다.널의 크기는 길이 2.4m,너비 0.76m,높이 0.7m로 되어 있다. 이 능묘는 무왕이 창건한 미륵사 등의 유적이 이웃에 산재한 사실을 감안하면 무왕과 왕비의 무덤일 가능성도 엿보인다.특히 무왕의 익산천도의지와 연관해볼 때 그 가능성은 더욱 짙다.설령 익산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장차 꿈을 실현시킬 염원을 가지고 무왕 스스로가 생전에 이 지역에 묻히길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 6세기 횡혈식 석실분 발굴/김해 유하리서

    ◎호석·시상대 등 구조 완벽/동의대 박물관팀 부산 동의대박물관 발굴단(단장 임효택)은 7일 경남 김해군 장유면 유하리 654의 1에서 원형의 봉분·호석·묘도·연도·시상대 등 거의 완전한 구조의 6세기 후반경 횡혈식 석실분과 어린이·노인을 포함한 5명 이상의 사람뼈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도굴로 인해 약간의 토기조각과 철도자편 1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유물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고분이 전해오는대로 가락국 2대왕인 거등왕의 능이거나 장군묘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단은 이 고분이 6세기 후반께 이 지역을 장악했던 지배자와 가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횡혈식 석실분이 이처럼 완전한 형태로 발굴된 것은 극히 드문 일로 당시 묘제와 사회상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또 5명 이상의 유골이 한꺼번에 발굴됨에 따라 가야말기부터 가족을 한무덤에 잇따라 장사지내는 추가장이 횡구·횡혈식 석실분을 통해 이루어졌음이 입증되는 한편 고대 한국인의 신체적 특성을 밝히는데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 묘제의 특징(백제를 다시본다:22)

    ◎부여지역선 굴식돌방무덤이 주류/석실바닥 장방형… 삼국중 가장 발달/아치형 널방·물갈음한 널동 등 독특/토착묘제인 독무덤도 능산리·중정리일대 다소 분포 우리는 옛 무덤을 가리켜 고분이라고 부른다.그러나 고고학에서는 옛 무덤이라고 해서 모두 고분의 개념을 부여하지 않는다.역사적이나 고고학적으로 자료가 될 수 있는 무덤을 고분으로 파악하고 있다.또 고분은 시대에 따라 여러가지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무덤의 축조방식을 묘제라 일컫는 것이다.삼국시대의 무덤,특히 지배계급으로서의 실력자들의 무덤은 도읍지를 중심으로 축조된다.그것도 언덕처럼 생긴 거대한 분구를 이룬 무덤들이 떼로 만들어지고,돌널(석곽)이나 돌방(석실)등의 내부구조를 갖추었다.또 거기에는 껴묻거리(부장품)를 넣어 무덤의 주인공이 지배층이었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 백제시대의 고분 역시 도읍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그리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백제의 고분 변천은 크게 전기(AD2세기∼475년)한성(서울)시대,중기(AD475∼538년)웅진(공주)시대,후기(AD538∼660년)사자(부여)시대로 구분한다.전·중기를 거쳐 사비시대에 이르면 잘 정비된 무덤이 영조되어 백제고분문화의 진수를 오늘날까지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고분 내부구조 다양 사비시대 고분들은 다양한 묘제를 가지고 출현했다.널무덤(토광묘)을 비롯,독무덤(옹관묘),화장무덤,구덩식돌널무덤(횡혈식석실분)등이 그것이다.이 가운데 백제후기 사비시대 도읍지였던 부여지역에서는 굴식돌방무덤이 특히 주류를 이루었다.그리고 백제불교의 일본전파를 뚜렷이 입증하는 화장무덤과 더불어 여러점의 뼈그릇(장골용기)도 남겨놓고 있다. 사비시대의 굴식돌방무덤은 언덕 위나 언덕 비탈,언덕 앞자락을 입지로 잡아 축조했다.또 산기슭이 부채꼴로 펼쳐진 지세를 이용한 흔적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경우 지형을 살펴보면 북쪽에 높은 산이 있고 앞쪽에 해당하는 남쪽에는 평지가 있다.그리고는 서쪽에는 나성이위치한 언덕이 뻗쳐있고 동쪽에는 이에 상응하는 언덕이 자리잡았다.외형이 반구형인 언덕으로 서상총,동상총,동하총등의 왕급 무덤들이 축조되었다. 이들 능산리 굴식돌방무덤은 내부구조는 신라·가야의 고분보다 다양하다.굴식돌방무덤은 고구려를 필두로 신라·가야에서도 일찍부터 나타나지만 5세기중엽 백제지역에서 가장 다양하게 변화하고 발전한다.고구려와 가야의 굴식돌방무덤의 기본평면이 방형이라면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은 장방형으로 발전하는 것이다.또 돌방무덤을 만드는데 사용한 석재,벽면의 구성및 천장형태,널길(선도)의 위치 등도 백제적 특징을 지니고 나타난다. 백제 굴식돌방무덤들은 몇가지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그 하나의 예가 주검을 안치한 널방(현실)의 평면이 장방형을 이룬 가운데 사방의 벽을 돌멩이와 막돌을 포개 안쪽으로 기울게 쌓은 형식이다.이 때에 천장은 큰 널돌(판석)4∼5장을 덮어 마감하고 널길은 남벽 동쪽으로 치우쳐 터놓았다.이 형식의 대표적 고분유적으로 부여 능산리 할석총이 있다. ○고구려·가야식 탈피 그 다음 형식은 널방의 평면은 역시 장방형이지만 사방의 벽을 다듬은 돌이나 물갈음한 큰 널돌을 가지고 축조한 굴식돌방무덤이다.이 형식의 굴식돌방무덤 천장은 대개 양쪽 끝이 경사지거나 평평한 평천장을 이룬다.또 천장이 반원통을 이룬 경우도 있다.널방 바닥에는 1∼2개의 널받침(관대)을 마련했다.널길은 남벽 좌우 한쪽에 치우친 것과 중앙에 위치한 예가 있는데 널길 입구에는 돌문(석비)시설을 갖추었다. 이같이 다듬거나 물갈음한 널돌을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는 능산리 제3호분,능산리 벽화고분,능산리 중하총이 꼽힌다.이들 고분은 저마다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능산리 서하총의 경우 널방의 동·서벽은 잘 다듬어진 큰 널돌을 각각 4장씩 맞물려 세우면서 북벽은 위아래로 2장을,남벽은 널길문 위에 1장을 세워놓았다.천장은 동서벽 위에 1단의 고임돌을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놓고 널돌 4장을 가로질러 마감시켰다. 능산리 벽화고분은 널방의 사방벽면과 천장을 1장짜리 화강암·편마암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그 거대한 판돌을 물갈음한 뒤에 세우고 나서 그림을 그렸다.벽면에다는 사신도,천장에다는 비운과 연화도를 그려넣은 이 벽화고분 바닥에는 장방형 벽돌을 깔았다.벽돌을 가지고 널받침도 만들었다.한마디로 죽음의 세계를 화려하게 가꾸어준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주검의 집을 멋을 부려 축조한 또 다른 예는 능산리 중하총에서도 찾아진다.널방의 4면벽을 벽돌모양으로 가지런히 다듬은 돌로 쌓았다.그 공인들 오죽했으랴,하는 마음이 든다.동서벽에 해당하는 긴벽을 쌓으면서도 예사롭게 처리하지 않고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점점 오그라뜨렸다.그래서 널길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면 아치형 널방을 만나는 것이다.널방 바닥에는 방형의 널돌을 바둑판처럼 깔고 석회를 발랐다. 이 가운데 능산리 벽화고분과 중하총은 사비시대 백제고분의 백미다.삼국시대에 백제고분에서만 볼 수 있는 수준높은 건축기술의 산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백제시대 고분을 통틀어보면 삼국 어느 나라에 비해 다양하게 변화하였고 백제적인 독자성을 끊임없이 추구했다.전기 한성시대에는 고구려적 요소의 돌묻이무덤(적석총)과 봉토분을 차용했으나 이를 곧 탈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따라서 중기웅진시대에는 돌묻이무덤 대신에 분구의 외형이 반원형을 닮은 가장 백제적인 봉토분이 출현하는 것이다. ○벽화고분 등 백미 우리는 지금까지 사비시대를 중심으로 그 이전 한성과 웅진시대의 고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그러나 백제강역의 토착묘제로서의 독무덤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독무덤을 기술할 차례가 되었다.광복을 맞기 직전에 왕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 이웃에서 60∼90㎝가량의 구덩을 파고 묻은 독널(옹관)들이 발견되었다. 이밖에 부여 중정리에서는 부식된 암반 중심부에 지름과 깊이가 각각 30㎝정도인 구덩을 파고 안에 뼈단지를 묻은 다음 돌로 덮은 뼈단지무덤도 발견되었다.부여 염창리에서도 비슷한 뼈단지가 출토되는 등 사비시대 도성 언저리의 여러 독무덤 존재는 흥미를 끄는 무덤유적이기도 하다. 어떻든 고분은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많은 자료를 던져준다.당시의 사상으로부터 문화와 예술,때로는 결정적 역사기록까지도 제시하고 있다.특히 제사유적설이 있는 김동용봉봉래산향로 출토지점 바로 옆이 능산리 고분군이고 보면,두 유적은 같은 역사와 맞물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능산리고분/모두 7기로 왕급 무덤 추정/백제 굴식돌방무덤의 대표적 유적 백제 전시대에 걸쳐 백제문화요소를 가장 많이 함축한 고분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고분군이다.부여읍에서 논산가는 길을 따라 동쪽으로 3㎞ 떨어진 해발 1백21m의 능산리산 남쪽 경사면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고분군은 3기씩 앞뒤로 2열을 이루고,맨 뒤에 1기가 더 있다. 왕릉으로 전해지는 이 고분군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15년 일인학자 구로이타(흑판승미)가 2호(중하총)와 3호(서하총)를 조사하고부터다.이어 1917년 야스이(곡정제일)가 1호 (동하총)와 4호(서상총),6호(동상총)를 각각 발굴조사했다.이 가운데 1호분에는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유명한 고분으로 떠올랐다. 이 고분군이 들어앉은 자리와 주변지세는 명당으로 알려졌다.동쪽에 청룡,서쪽에는 백호에 해당하는 능선이 튀어나왔다.또 앞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냇물과함께 더 멀리에는 주작으로 풀이될 수 있는 안산이 솟았다.그 너머로는 백마강이 흐르니,풍수지리적으로 입지조건을 잘 갖춘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발굴 당시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없었다.단지 도굴자들이 내팽개친 몇점의 유물만이 수습되었을 뿐이다.5호분 널받침 위에서 칠목관조각,금동맞새김장식,금동꽃모양장식이 나왔다.그리고 2호분에서는 칠기조각,여러점의 금동못 등이 나와 사비시대 백제의 공예술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짐작케했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2호분이 6세기 중엽,1호분이 7세기 전후,3·4호분은 7세기 이후로 편년되었다.이들 고분을 통해 본 사비시대의 문화상은 외래문화를 백제화한 본격적인 백제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한성시대의 고구려 문화 영향기나,웅진시대의 중국 남조문화수입기와는 크게 대비되는 것이다.
  • 집유석방 도굴범/항소심 법정구속

    서울형사지법 항소6부(재판장 양태종부장판사)는 2일 백제후기 횡혈식 석실 고분인 전남 함평군의 신덕고분을 도굴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석방된 추창군피고인(48·서울 도봉구 미아7동)과 김재중피고인(55)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징역1년의 실형을 선고,법정구속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추피고인 등이 도굴한 신덕고분은 백제후기 고분중 유일하게 내부구조가 밝혀진 고분』이라며 『피고인들의 도굴로 백제후기 고분의 내부및 매장유물들이 상당부분 훼손된 점등을 고려할때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죄질에 비해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판단,실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추피고인등은 91년 3월25일 전문 문화재 도굴범 2명과 함께 전남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 야산에서 당시 미발굴 상태였던 백제후기의 횡혈식 석실고분인 선덕고분을 파헤쳐 국보급 문화재에 해당하는 유공3경장경대호(구멍이 3개 뚫린 도자기)3점을 비롯,도자기와 철제갑옷등 65점의 유물을 도굴한 혐의로 구속기소됐었다.
  • 중국/도굴문화재 해외 밀반출 성행/“유물팔아 한몫 잡자”

    ◎시장경제 도입이후 한탕주의 만연/토용·화석 등 종류 다양… 「가짜」도 많아 중국대륙에 시장경제가 본격 도입된이래 최근들어 문화유적지나 고분들에 대한 도굴이 성행하면서 여기서 발굴해낸 골동품들에 대한 해외밀반출이 크게 늘고 있다.사회주의 강경좌파가 집권할 당시의 금욕생활로부터 풀려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시대로 접어든후 배금주의·한탕주의가 만연하면서 해외에서 고가로 팔리고 있는 문화유물을 통해 한목 잡으려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들어 대륙에서 홍콩으로 밀수해 들어가는 문화재급 골동품들이 부쩍 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분명해지고 있다.홍콩의 사우스차이나 모닝 포스트지는 오늘날 고분도굴단이 중국문화재 보존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을 정도이다.이제 중국의 범죄조직들은 호화차량 절도나 전자제품 마약밀수 그리고 불법이민 등을 대상으로 삼던 범주를 벗어나 중국문화유산의 심장부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홍콩이나 마카오 등지를 통해 서방으로 흘러들어가는 골동품들중에는 고대의 공룡인 디노사우르 알화석에서 옛 황제들의 시신을 호위하던 토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과거에는 기껏해야 청동제품이나 접시,꽃병정도에 그쳤으나 이제는 그 질이나 가격 숫자등에서 과거와는 판이하게 높아지고 많아졌다. 근래에 들어 중국대륙 여기저기에서 경제건설을 위해 땅을 파헤치는등 토목사업을 많이 벌이면서 우연케도 옛 고적들이 새롭게 발견되기도 하고 고고학자들에 의해 산동성이나 신강위구르지역등에서까지 춘추전국시대의 유물들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고분들에 관한 관심이 점점 더 높아가고 있다. 중국골동품은 홍콩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가는게 보통이다.지난해말에는 1백만달러어치가 넘는 1백7개의 골동품을 싣고 심수에서 홍콩으로 넘어가려던 한 트럭이 붙잡혔다.그후 불과 4개월만인 지난 4월초에는 같은 장소에서 청동불상에서부터 도검 병마총 왕실용장식물등에 이르기까지 2백50여점의 골동품이 실린 트럭이 또 발견됐다. 홍콩에서는 지난 92년에 중국골동품 2백96점을 압수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2백38점을 압수했으나 올해 들어서는 지난 4월중순에 이미 지난 한햇동안 처리한것보다 훨씬 많은 4백54점을 적발하기에 이르렀다.홍콩에서 압수된 중국문화재는 중국으로 되돌려 보내지는데 지금까지 6천여점이 반환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중국문화재가 일단 세관을 거쳐 홍콩으로 들어가면 비교적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어서 심지어 디노사우르 알화석을 팔겠다는 광고까지 신문에 실린적이 있다.이 알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국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것들로 일단 홍콩만 벗어나면 유럽이나 미국등지로 손쉽게 흘러들어 거액의 현금으로 바뀐다. 골동품 밀반출이 유행하면서 가짜 골동품이 범람하고 있는 것도 한 특징.토용으로부터 화병 접시등 각종 자기류나 문화재에는 모조품등 가짜가 없는게 없다.한 일본인은 수백 수천년됐다는 도자기를 수십점 구한후 이를 이삿짐에 갖고 나가기위해 세관원을 매수키로 마음먹고 우선 반출가능 여부를 판별해주도록 했다.놀랍게도 그는 돈한푼 들이지 않고 떳떳하게 반출할 수 있었다.그 세관원은 수백년전 것이라는골동품들을 보자마자 단번에 『이것은 5년전에 ○○에서 만든 것이고,저것은 10년전 ○○에 있는 ○○공장에서 만든 것이군요』라며 『세금 물릴게 하나도 없다』는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한국의 이조백자가 뉴욕에서 3백만달러에 거래된 이후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여행객들중에도 골동품가게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 가야 옥전 고분군서 왕릉급 3기 도굴

    【협천=강원식기자】 국가사적지 제326호로 지정돼 있는 경남 합천군 상책면 성산리일대 후기가야시대의 옥전고분군 가운데 아직 발굴되지 않은 왕릉급 분묘3기가 최근 도굴된 것으로 조사됐다. 옥전고분군 복원정비를 위해 지난달 23일부터 이 일대 26기의 대형 고분군에 대한 기초조사를 하고 있는 경상대박물관조사단(단장 조영제교수)은 11일 이들 고분군 가운데 M5·M9·M15호분등 지름 10∼20m크기의 왕릉급 고분 3기가 도굴된 것이 확인돼 다수의 유물이 도난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일본서 돌아온 청동 자루솥/출토지·유출경로 “아리송”

    ◎1926년 경주 서봉총서 공식발굴 추정/국립발물관 소장품과 달라… 남분 도굴품 일수도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경북 경주시 노서동 서봉총 출토품으로 보이는 청동자루솥(청동초두)이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와 학계의 관심을 끌고있다.그 이유는 19 26년 당시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참관한 가운데 공식 발굴된 서봉총유물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느냐에 있다.문제의 청동자루솥은 국내 수집가인 진이근씨(47·부산시 중구 중앙동2가)가 최근 일본으로부터 들여와 24일 공개한 것. 소장자가 수없이 바뀐 이 유물의 보관상자 표면에는 「경상북도 경주 서봉총일구이육년 청동산량수류초두」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이어 책이름으로 여겨지는 지나고동정화」라고 써넣은 뒤 이같은 사실을 로슈(능추)가 썼다고 덧붙여놓았다.그래서 첫 소장자 로슈가 누구냐에 초점이 모아지지만 일본 역대 컬렉터 중에는 로슈라는 아호를 가진 인물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경로를 거쳐 처음 청동자루솥을 소장하게 되었을까.궁금증이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다.이에 대해 일본학계는 다만 심증적으로 「지나고동정화」저술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왜냐하면 청동자루솥 보관상자 기록속에 「지나고동정화」가 언급되었기 때문이다.이 저술의 지은이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있는 일본 고고학 초창기의 학자.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60년대 초반까지 금동유물 전문학자로 활약했다. 이에대해 서봉총발굴에 참여했던 일본 원로고고학자 아리미츠(유광교일·84)씨는 자루솥이 한 점밖에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그 한 점이라는 것은 현재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다른 청동자루솥.그러나 서봉총은 2개의 무덤이 쌍으로 붙은 표주박모양의 무덤(표형분)이고,남분이 파괴된 상태에서 북분을 발굴했기 때문에 남분 도굴품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돌아온 청동자루솥은 항아리모양의 몸통 한가운데에 띠를 둘렀고,말굽형 발이 셋 달린 삼발이.그리고 봉황머리의 주둥이와 속이 빈 4각막대형 손잡이,산양 머리모양의 뚜껑꼭지가 돌출되었다.주둥이 반대쪽의뚜껑 가장자리와 몸통사이를 여닫이 경첩으로 연결했다. 이 유물을 살펴본 동국대 정명호교수(고고학)는 뚜껑이 달아나지 않도록 고착시킨 경첩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서봉총 출토 청동자루솥과 바로 다른 점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서봉총의 본래 명칭은 경주지역 고분 일련번호에 따라 부여된 노서동129호분.발굴을 참관한 황태자의 나라 스웨덴(서전)과 출토유물인 금관의 봉황장식에서 각각 한자씩을 따서 서봉총으로 명명했다.그 유명한 금관(경주박물관소장)과 지금은 잃어버린 연호인 「연수원년」과 「신묘년삼월」이라는 새김글자가 든 은합,금제허리띠 등이 출토되었다.새김글씨에 따라 AD451년경 고신라의 무덤으로 보고있다. 어떻든 흘러나간 유물이 되돌아왔다.그러나 청동자루솥에 대한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지는 않았다.그래서 국내 학계는 보고서용으로 가져갔다가 내놓지 않은 서봉총 출토유물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폈다.
  • 광산 안전진단 실시/상공자원부

    상공자원부는 전국 광산에 안전진단을 실시,사고 위험이 높은 광산은 아예 작업을 중단시키기로 했다.대형 사고가 우려되는 광산에는 연간 10회의 안전점검을 실시할 방침이다. 상공자원부는 20일 5개 광산보안 사무소와 업계간 합동회의를 갖고 이같은 내용의 안전관리 대책을 전달,재해 예방에 힘써줄 것을 당부했다.상공자원부는 『안전관리를 잘하는 광산에는 갱도굴진·기계화·공해방지·후생복지 보조금을 기준보다 10% 더 주고 안전관리에 소홀한 광산은 보조금을 줄이겠다』고 밝혔다.또 광산재해를 근원적으로 줄일 수 있도록 채탄기계화 시설에 자금을 지원,기계화율을 현 68%에서 97년에는 90%로 높이기로 했다.
  • 궁남지 발굴 중단 위기/올예산 전혀 책정안돼 백제사 구명차질 우려

    ◎“안압지 능가할 백제유물 보고” 평가/고고학적 가치 커 지속적 탐색작업 필요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토로 백제사 전반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으나 백제사 규명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부여 궁남지(사적 제135호) 발굴작업이 예산이 없어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 궁남지 발굴작업을 벌여온 국립부여박물관(관장 신광섭)에 따르면 지난 90년 1차 발굴 이후 지난해 3차 까지 충청남도의 용역사업비로 발굴작업을 벌여 왔으나 올해는 전혀 예산이 편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궁남지는 지난해 말 3차 부분발굴에서 삼국시대 최초의 논이 확인된 것을 비롯,수레바퀴와 새(조)모양목기등 귀중한 유물을 쏟아냈었다. 궁남지는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35년조(634년)에 기록이 남아있는 유적.지난 67년 현재의 모습으로 아무런 고증없이 정화 돼 있기때문에 원래의 규모보다 훨씬 작아졌다.게다가 현재 궁남지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 연못인지 조차 불분명했던 것.따라서 3차에 걸친 부여박물관의 발굴조사도 현재의 궁남지가 백제시대의 바로 그연못인지를 규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 90년의 1차조사에서는 남동쪽 호안 및 물이 흘러들어가는 시설의 일부를 파악했고 91∼92년의 2차조사에서는 북동쪽 호안의 일부를 확인했다.이번 3차에서는 남동쪽 호안의 일부가 파악된데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정황을 충족시켜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일단 「현재의 연못이 백제의 궁남지」라는 결론을 내릴수 있었다. 부여박물관에 따르면 이제 궁남지의 고고학적 가치가 증명된 만큼 당장 전면발굴은 어렵더라도 축조될 당시 궁남지의 전체 호안을 확인하는 부분적인 탐색발굴은 절대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에게 물에 잠긴 유적은 유물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전해 주는 보물창고처럼 인식된다.공기중에 노출된 유물이 빨리 부식되는데 비해 물속에 잠겨있으면 금속은 물론 목재까지도 원형을 오래 유지하기 때문이다.또 도굴등 후대의 훼손 위험도 크게 줄여준다.능산리 백제향로도 수맥이 지나가는 곳에 묻혀있어 손상을 거의 입지않았고 궁남지의 새모양목기나 수레바퀴도지하수에 둘러싸여 있어 거의 제모습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물에 잠겨있는 유적의 중요성은 신라의 고도 경주의 안압지에서 더욱 극명하게 증명된다.지난 76년말 전면발굴이 끝난 안압지는 신라생활상 연구를 진일보케한 1만7천여점의 유물을 남겨 경주박물관의 제2별관을 안압지 전용으로 꾸미게 했으며 안압지 자체는 80년말 복원되어 현재 경주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고 있다. 역사·고고학자들이 궁남지 발굴을 역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궁남지는 분명 안압지를 능가할 마지막 백제 유물의 보고라는 것이다.또 안압지는 궁남지를 본 떠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안압지가 14년전 복원까지 이루어진 상황에서 궁남지는 현재 전체 규모 조차 파악되지 못한채 발굴작업이 중단될 위기에 있다는 것은 국민화합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 문화적 문맹/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굄돌)

    민속문화란 국민이 따르는 삶의 방식이요,가치이고 태도이다.생활에 있어서 취하는 방식이 물질문화이고 정신에 있어서 선택하는 행동이 가치요,사회적으로 표현된 양식이 사회적 행동이고 태도다. 그간 우리는 문화를 내적의미 추구보다 외적 형식추구,질적인 정신보다는 양적인 물질폭으로 오도하여 왔기 때문에 문화의 공백내지 부재현상을 맞고 있다. 정신의 피폐는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면 서산대사의 부도와 역사를 이야기 해주는 고분의 도굴을 일삼는 망나니 도굴범과 이를 방관하는 국민들로 나타난다.문화의 가치와 중요성을 모르면 찬란한 백제문물의 극치인 6세기 후반 금동용봉봉래산 향로 역시 엿 사먹을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다.김치맛을 좌우하는 젓갈이,조사연구할 전문인력이 없다면 한국에서는 썩은 생선이 되고 일본에서는 이를 연구하는 맛깔스런 토하젓으로 역수출하게 된다. 현재 민속박물관은 연면적 1만7천평 건물대지에 1일 1만4천명의 관람객이 방문한다.청소원 4명과 방호원 10명이 17개의 개방된 전시실을 관리한다.2만점의 유물과 3만점의 정리해야할 자료를 선담연구원 4명이 맡고 있으며 30개 민속연구분야를 4명의 연구원이 꾸려나가려니 생산적 자료제작과 유물관리는 불가능하다.더구나 국제화·개방화에 따라서 문화상품수출에 대비하여 자료축적의 혁신은 커녕 있는 자료를 정리할 가내 수공업 정도의 수준도 못벗어 나고 있다.한국의 12명 민속연구원과 비교되는 일본 역사민속박물관,오사카 민족학박물관의 1백20명의 연구원은 컴퓨터로 왕조실록,동국여지승람을 색인화하여 한국문화 재침략(?)의 자료를 축적하고 있다. 작은 정부는 훌륭한 선택이고 이 시대의 명제이다.하지만 민족의 정신적 기반인 새로 신설된 문화기관은 우선적으로 인재를 공급하여 준 후 추상같은 정밀업무 진단을 통하여 비대한 행정조직의 죽일 부분과 키울부분을 판단,선별하라는 것이 정원동결의 참된 의지라고 생각된다.대통령의 말씀자료를 잘못 해석하는 문화적 문맹인들의 의견이 지배적 관행이 되는 한 국가백년대계인 문화입국은 백년을 지체하게 된다.
  • 국립중앙박물관장 정양모씨(인터뷰)

    ◎부여 능산리 백제유물박물관 지휘 책임자/“능산리 향로는 분명 백제 것”/전체적 조형·용·연꽃모양 중국과 큰 차이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23일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일수도 있다」는 일부의 문제제기에 대해 『백제미술의 특성을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산하 부여박물관이 맡고 있는 능산리 백제유물 발굴작업의 지휘 책임자이자 지도위원이기도 한 정관장은 『우선 전형부터가 중국것과 완전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향로는 전국시대말에서 한대와 육조시대를 거쳐 원대까지 이어져 왔습니다.현재 중앙박물관에는 중국 향로의 원형을 보여주는 원대 도자 박산로가 있어요.신안앞바다에서 건진 겁니다.능산리것은 준수한데 반해 중국것은 펑퍼짐하고 안정감이 있습니다.산의 배치등 비례부터가 분명히 다릅니다』 정관장은 『전체적인 조형외에도 대략적으로 살펴봐도 용이나 인물들이 중국것은 권위적인데 비해 능산리것은 사실적이고 간결하게 표현되는등 백제적인 특성이 명확히 나타난다』고 밝혔다. 『몸체부분의 연꽃판도 우리 양식입니다.중국향로의 연꽃은 끝이 뾰족하고 과장되어 있지만 우리것은 우아합니다.특히 맨아래 연꽃판에 양각의 문양대신 음각선을 두른것은 백제특유의 기법입니다.또 다리부분(대족부)의 용은 이것이 한국용이지 중국용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얘깁니다.또 뚜껑부분에 나타난 새나 산,바위는 부여 규암외리에서 나온 산경문전의 그것이며 산 밑의 화염문도 부여에서 나온 금동제품과 유사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관장은 「이처럼 화려한 백제유물이 출토된 예가 지금까지 없지않느냐」는 일부의 「전래가능성」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이 백제문화가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경우는 조금 예외지만 금동향로류의 귀중한 유물은 무덤아니면 나올 곳이 없습니다.그런데 백제무덤은 횡혈식으로 도굴꾼들이 마음대로 출입할수 있어요.일제시대 일인도굴꾼들이 다 훔쳐 갔습니다.좋은 유물이 남아있을리가 없지요.이런상황은 고구려도 마찬가지예요.벽화밖에는 남은것이 없지 않습니까.신라도 도굴이 가능한 묘제로 바뀐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정관장은 『훌륭한 유물이 출토된 것도 경사스런 일이지만 이번 발굴로 백제문화에 대해 재인식할수 있는 계기를 만들게 된 것이 더욱 의미있다』고 기쁨을 표시했다.
  • 옛총독부 먼저 헐면 문화재 탈나는가/손보기(일요일 아침에)

    구총독부 건물을 헐자는 데에는 우리 모두가 뜻을 같이한다.「우리의 문화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그뜻인즉 『다시는 만들 수 없는 귀중한 민족의 유산이고 훼손의 위험이 큰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우리는 한마디로 푸대접을 해왔다』고 반성하고 있다.국립박물관을 새로 지은 다음 옮기자는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자.우리는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대해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석가탑 도굴이 실패한 뒤 탑을 보수하려고 문화재위원의 감독아래 전문업자가 옥개석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우지직하면서 도르래 받침기둥이 부러졌다.이보다 앞서 위험하니 기둥을 바꿔야 한다는 충고를 물리치고 그대로 들던 가운데 부러졌다.삭아빠진 전주를 썼던 것이다.『국보 부시는 저놈들』하는 소리와 더불어 당사자들은 간곳이 없다.그 뒤에도 보존을 잘못해서 완전했던 세계의 보물이 크게 상했다. ○빗물 새는 총독부청사 우리는 이러한 악몽을 잊지 않고 있다.박물관의 문화재를 옮긴다면 이같은 일이라도 일어날듯이 생각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 국립박물관 전문가들이 마치 썩은 전주를 가지고 문화재를 옮길 것같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국립박물관 직원들은 여러번 이사를 하였기에 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생각도 들겠지만 그분들은 한편으로 분하게 여길지도 모른다.석가탑의 비극을 일으킬수 있는 사람들이 국립박물관의 지금의 직원들이라고 지레 생각한다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방분산 검토해볼만 사실 국립박물관에서는 해마다 1천점 쯤의 귀중한 유물을 해외 전시를 위해 내보내고 있다.일본으로는 아직 보고서도 내지 않은 유물들을 보내서 전시한 일도 있었다고 들었다.일본까지 문화재를 보내는 마당에 국내에서 옮긴다는 것이 많은 유물을 「훼손시킨다」고 곧바로 생각한다.요사이 심화회는 일진회를 연상시킨다.우리나라의 장관을 지낸 분도 회원으로 들어있다고 한다.일본의 영향을 받았는지 총독부 건물을 다치는 것을 걱정하는 분들이 계시다고 한다. 유물이 지금보다 나은 자리를 찾아 가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하루도 국립박물관을 닫을 수는 없다는 그 누구의 말도 맞는 말이다.옛 총독부 건물에 영원히 두고 옮겨서는 안된다는 말도 아닐 것이다.사실이지 여름이면 빗물이 스며들기도 하는 이건물을 4백80억원이나 들여서 수리했는데도 더 보수해 나가야 하는 형편이다. 현재 소장 문화재의 보존은 이상황에서도 완벽한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지금 지방에 7개의 국립박물관이 있다.그 총건평은 1만5천6백87평이요,전시면적은 3천8백59평이다.현 총독부건물 전시면적은 3천81평이다.지방 국립박물관의 전시실의 절반만을 이용하여 국립박물관의 지방출토문화재를 옮겨서 진열하는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해마다 특별전시를 위해 중앙박물관의 유물이 지방으로 옮겨지는 것도 1천점을 웃돌고 있다.옮기는 것이 그같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문제이다.그같이 위험하다면 지방 전시는 그만두고 총독부 건물안에 잘 쌓아두고 온도 습도 공기 정화와 보존처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날마다 검사 분석하여야 할 것이다.과연 이같은 일을 지금 총독부 건물안에서는 하고 있다는 말인가.정부의 예산 뒷받침은 되어 있단 말인가. 문화재를 아끼자는 생각을 할수 있게된 현실을 기뻐해야 한다.그러나 경복궁을 부수고 총독부건물이 지어져 우리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고 우리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있는 것은 잠시 잊고 있다.왜냐하면 석가탑의 비극 죄악이 지금의 새한국에 찾아올 수도 있다는 우려때문일까.국립박물관 직원들,그리고 정부를 믿지못하고 있는지. ○새건물 짓는데 20∼50년 새로운 새 한국의 박물관을 지어서 꾸미려면 적어도 20년,30년,또는 50년은 걸려야 한다.지은 다음에 옮기겠다는 생각은 2∼3년,또는 5년쯤 걸려서 할 수 있다는 데서 나온 것이리라.이번에 완공된 서울대박물관이 8년이 넘게 걸렸다.총독부건물은 수명이 그리 길게 남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비가 들이치고 천장에 구멍이 나고 이를 깁고 때우고 하다가 한 두곳이 무너질 수도 있다.겉으로 보기에 말짱한 것같다고 국립박물관의 유물 보존 상태가 완벽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전문가는 있는가. 48년만에 정부가 민족정기를 찾고 올바른 사업을 하려는데 개인의 영예를 위한 것이라고 몰아만 가야 할 것인가.우리의 훌륭한 박물관을 지어서 겨레의 긍지를 심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모처럼의 기회를 잃고 후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도굴꾼들(외언내언)

    BC330년 알렉산더대왕은 부하장교들을 죽은지 2백년이 지난 사이러스대제의 무덤에 보내 보존상태를 살펴보도록 했다.그리고 그로부터 6년후에는 자신이 직접 그곳에 가보고는 무덤이 파괴된채 보물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것을 알았다.유골을 모아 다시 안치한후 자신의 문장으로 봉인했지만 그후 수차례 도굴로 무덤속은 완전히 텅비어 버렸다. 고대 이집트 왕들의 시신이 있던 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아무리 정교한 미로를 만들어도 도굴꾼들은 비장된 장소를 예외없이 알아내 부장품들을 발굴해갔다.파라오들은 그 방지에 고심한 끝에 BC16세기 투트메스1세는 1천7백년전부터 계속되어온 피라미드조영을 단념하고 산골짜기 암굴에 왕들의 시신을 매장했으나 도굴꾼들은 미소띠며 고분을 파헤쳐버렸다. 지난 76년 신안앞바다에서 1만여점의 주옥같은 보물이 인양되고 있을무렵 그곳 감시초소일지에는 선박통행이나 어로사실이 전무한 것으로 되어있음에도 도굴범들이 창궐하여 신안앞바다는 한때 「도굴범들의 황금어장」으로 불렸었다. 대체로 도굴범들의고분식별 안목은 전문가 뺨치는 실력이다.그들은 사냥개처럼 냄새맡고 번개처럼 파헤친다. 충남 당진 영탑사에 있던 금동삼존불상도난사건은 지난 68년 현충사 이충무공의 「난중일기」를 훔쳤던 거물급 문화재절도범이 배후조정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는 대학에서 사학과 전공후 공주에서 미술교사를 지낸 인텔리로 문화재 식별안목이 「귀신같다」는 평이다. 이번 전남 함평에서 미발굴의 백제 신덕고분을 파헤친 도굴범들의 안목 또한 문화재 관련자들을 앞지른 결과가 돼버렸다.그들은 「전국 곳곳에 발굴되지 않은 고분이 널려있다」느니 「경주의 한 고분도 자신들의 도굴이 계기가 되어 발굴된 예」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문화재가 한낱 도굴범들의 사유재산이나 문화재 발굴개가의 공적으로 치부될순 없다.만인 공유재산인 문화재를 좀더 철저히 지키고 가꾸는 효율적인 관리정책이 요구된다.
  • 국보급 문화재 도굴 밀매/함평 백제고분서/금동편등 65점 팔아넘겨

    ◎전문업자 2명 구속 서울지검 형사1부(신광옥부장·이종주검사)는 15일 백제시대 고분에서 국보급으로 추정되는 문화재를 도굴·밀매업자들에게 팔아넘긴 추창군씨(47·전과2범·서울 도봉구 미아7동 852)와 김재중씨(55·전과2범·대구시 북구 침산2동 156)등 2명을 문화재보호법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또 오필부씨(52·전과2범)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입건하고 박흥묵씨(49)를 수배했다. 이들은 지난 91년 3월 전남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 산173 소재 백제시대 횡혈식석실고분인 신덕고분을 삽·곡괭이 등으로 파고 들어가 석실안에 매장된 금동편 등 65점의 유물을 훔쳐 이 가운데 10여점을 골동품수집상에 팔아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조사결과 이들은 전라도 일대 야산을 돌며 발굴되지 않은 백제고분을 사전답사한뒤 석실안으로 파고 들어가 매장된 유물들을 파내 이를 브로커등을 통해 1점에 6백만∼2천만원씩 받고 골동품상에 팔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 문화재 19점 회수/문화재관리국/지난 4월부터 주민신고로

    문화재관리국이 지난 4월부터 문화재애호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인이후 밀반출될뻔한 문화재를 주민제보로 되찾은 사례가 크게 늘어났다. 문화재관리국은 지난 5개월동안 10건의 주민신고를 받아 조사한 결과 국보급으로 추정되는 토제등잔(사진)등 모두 5건에 19점의 문화재를 회수했다고 1일 밝혔다. 이 토제등잔은 문화재단속반이 지난 6월10일 한 대구시민으로부터 제보를 받아 20여일동안 추적한 끝에 회수한 것으로,경남 함안의 가야고분에서 지난89년 도굴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등잔이 10개 달린 형태로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어서 국보급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으며 현재 문화재위원회가 문화재지정을 위해 심의중에 있다. 또 2년전에 도둑맞은 삼선암고려동종(경남 유형문화재 제55호)을 지난 4월 대구에서 되찾고 범인 2명을 검거했으며 5월에는 전남 광양만 일대에서 발굴한 해저유물을 거래하던 도굴꾼으로부터 인양문화재 5점을 회수했다. 문화재관리국은 그동안 전국에서 모두 3백38명의 사법경찰관리를 지명받아 문화재사범 단속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한편 시·도와 합동으로 4백18개 문화재매매업체에 대한 점검을 했었다.
  • 문화재 도굴단 일당 7명 검거

    【마산=강원식기자】마 산동부경찰서는 24일 김해군 일대 가야고분을 도굴하는등 전국을 무대로 문화재를 도굴해온 이정호씨(40·마산시 회원구 회원1동)등 7명을 붙잡아 문화재 보호법위반 혐의로 입건,조사를 벌이는 한편 도굴품인 고려청자 21점과 이조백자 2점,가야토기 45점등 모두 68점의 문화재를 증거물로 압수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등은 이날 새벽 김해군 주촌면 원지리 뒷산 가야시대 고분군에서 토기 6점을 도굴하는등 전국을 무대로 각종 고분을 도굴한 혐의다.
  • 문화재도굴·밀매 처벌 강화/3년이상 징역… 벌금형 없애

    ◎국가·지자단체 보호의무 명시/문체부 법개정안 문화체육부는 13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재보호 의무를 강화하는 한편 문화재사범에 대한 처벌을 가중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문화재보호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문화재보호를 위한 시책을 강구하고 국민의 문화재보호 활동을 권장,적극 지원·육성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명시했다. 이와함께 도굴범에 대한 형사처벌을 현행 「10년이하 징역 또는 1천만원이하의 벌금」에서 「3년이상의 유기징역」으로 강화하는등 도굴범,도굴품거래자,발굴문화재 미신고자,훼손자에 대한 형량및 벌금액을 대폭 늘렸다.
  • 이만희작 「피고지고 피고지고」/배금주의 세태 통렬히 풍자

    ◎칠순 앞둔 세 노인의 보물탐사 묘사 연극계 화제작인 「불 좀 꺼주세요」와 「돼지와 오토바이」를 쓴 극작가 이만희씨의 또 다른 작품 「피고지고 피고지고」가 오는 20일까지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다.국립극단은 지난 90년부터 창작극 개발을 위해 중견극작가들에게 작품을 의뢰,공연해오고 있는데 「피고지고 피고지고」는 그 다섯번째 무대이다. 이 작품은 나이 칠십을 바라보는 왕오(이문수반),천축(김재건반),국전(오영수반)등 일확천금을 노리는 세노인의 이야기.순탄치않은 인생을 살아온 노인네들의 순진무구한 얘기로 인물성격과 극적 상황에 따른 현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대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세 노인은 왕년에 사기,절도,밀수등 한가락씩했던 전과범들.어느날 혜초여사(손봉숙반)로부터 보물이야기를 듣고 신라시대의 값진 유물이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골짜기 옛 절터를 몰래 파기로 마음을 정한다.절터가 주요군사시설이어서 삼엄한 경비에 도굴이 쉽지 않자 궁리끝에 산아래에 화원을 만들어 오갈데 없는 노인들이 꽃을 재배하며 연명하는 것처럼 위장한다.그리고 거기서 나온 흙은 서울에서 화원을 경영하는 혜초여사에게 보내 3년동안 감쪽같이 도굴작업을 해왔다.보물이 없는 건 아닐까 의심도 하고 백만장자 꿈도 꾸며 세상과 격리된 생활을 해오던 이들 세노인은 그러나 세상일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에 젖어든다. 「그것은 목탁구멍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불 좀 꺼주세요」등에서 작가 이만희씨와 콤비를 이뤘던 강영걸씨가 연출을 맡았다.이번 공연은 국립극장의 상설공연장화라는 취지에 맞춰 국립극단 공연으로는 처음으로 20일까지 장기공연을 한다.공연시간 하오 7시30분(토·일 하오4시).문의 274­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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