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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특집] 첫마음, 첫걸음

    [사진특집] 첫마음, 첫걸음

    사진특집_ 첫마음, 첫걸음 사진_ 한영희 취재, 글_ 이만근, 강성봉, 정순화 기자 저 조그만 빛을 보기 위해 지구는 열네 시간의 산고를 견디었다. 인왕산 오전 6시 54분. 우수경 씨(27세)는 열 달 뱃속에 품었던 작은 생명체를 안아 든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머리맡 초음파 사진 속에서 꼬물거리던 ‘콩이(태명)’는 설탕 한 봉지만 한 무게로 예정보다 열흘 일찍 세상에 나왔다. 그녀도 여자에서 엄마로 새로 태어났다. 주둥이 모양이 제각각인 이유는, 저마다 부르고 싶은 노래가 다르기 때문이다. 1,200℃ 고열에서 한 번 더 굽고 나면 유약의 농도에 따라 다른 빛을 품게 된다. 남양주 도자골 달뫼. “공연을 보다가 엉덩이가 간질간질하다고 친구들과 떠들면 될까요?” “안 돼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고 과자를 먹으면 될까요?” “안 돼요~!” “갑자기 불이 꺼질 때가 있어요. 깜깜해지면 박수를 치는 거예요.” “네!” 처음 연극을 보러 나온 성신유치원 장난꾸러기들은 대답도 잘한다. “여러분, 토끼랑 거북이가 경주를 하면 누가 이길까요?” “다람쥐가 이겨요!” 열다섯 군데 회사에 원서를 넣었고, 악명 높은 1인 1시간 압박 면접을 통해 선발된 두산중공업 신입사원 정호영 씨(25세)의 입사 포부. “회사의 부품이 되기보다는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의 첫 출근은 2007년 1월 2일이다. “한 가닥도 남기지 않고 국물까지 싹싹 비우고 나가는 손님을 보면 흐뭇해요.” 마흔이 넘어 처음으로 자신의 가게를 차린 소담국수집 정기홍(46세), 최영민(43세) 부부는 먼지가 앉기 무섭게 새로 들인 테이블을 닦는다. 손님이 계산하고 나갈 때까지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초짜 사장이지만 최고의 국수집을 만들겠다는 꿈은 누구보다 야무지다. 마자렐로주부학교 한글반 열다섯 명 할머니들이 ‘한글 떼기’에 한창이다. 나이 육십에 가나다라를 배우기 시작한 이영수 할머니(62세)는 이제 버스 정류장 이름을 더듬거리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손자가 넷인데, 나중에 편지 쓸라고!” 매일 보는 받아쓰기 시험이 어렵지만 할머니는 오늘도 아침 등굣길이 즐겁다. “오랜 수험 생활 마치고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아쉽지만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저 때문에 애쓰셨던 부모님 건강하셨으면 좋겠고요. 새로 시작하는 대학 생활에 재미난 일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 이런 바람은 좀 이르긴 하지만 건실하고 능력 있는 신랑도 만나게 해주세요.” 2007년 한성여고를 졸업하는 열아홉 혜미의 기도. 날씨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희망에 살짝 닿은 겨울 햇살이 어느 때보다 눈부신 가운데, 내일도 오늘처럼 포근한 날씨가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월간<샘터>2007.1
  • 성과급 쟁의대상 예외

    15일 시작된 현대자동차 노조의 파업은 ‘목적’과 ‘절차’ 두 가지 측면에서 불법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현대차 노조 파업은 법에 규정돼 있는 쟁의 대상이 아닌 성과급 지급을 놓고 벌이는 파업이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밝혔다.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노동쟁의의 대상을 임금과 근로시간, 복지 등 새로운 근로조건의 형성 및 변경과 관련된 ‘이익 분쟁’으로 한정하고 있다. 단체협약이나 근로계약상 기존 근로조건의 해석·이행과 관련된 ‘권리 분쟁’은 쟁의 대상이 아니다.노동부측은 “임금 체불이나 성과급 지급 여부 등은 권리 분쟁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파업을 할 수 없으며 고소나 민사소송 등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행법은 노조가 파업을 시작하려면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파업 찬반투표와 노동위원회의 조정(일반사업장 10일, 필수공익사업장 15일)을 반드시 거치도록 하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투표 없이 임시대의원 대회와 중앙쟁의대책위원회에서 파업을 결의했고 조정절차도 밟지 않았다. 불법으로 규정하긴 했지만 노동부 차원에서 이번 사태에 개입할 여지는 없다. 손해배상과 업무방해 등 법원, 검찰·경찰 등을 통해 민·형사상으로 처리할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시무식 폭력사태, 연장근무·주말특근 거부 등으로 사측이 이미 제기한 형사고발과 10억원 손해배상 소송 규모는 이번 파업으로 눈덩이처럼 커질 것으로 보인다.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CEO칼럼] 인재의 힘/ 정이만 한화63시티 사장

    [CEO칼럼] 인재의 힘/ 정이만 한화63시티 사장

    지난해 말 교수신문이 한국의 사회상을 포괄적으로 함축한 ‘올해의 사자성어’로 ‘밀운불우(密雲不雨)’를 선정했다. 구름만 잔뜩 끼고 비가 오지 않는 상황을 이르며, 뭔가가 이뤄지지 않아 답답함과 불만만 쌓이는 것을 비유한 단어다. 북한 핵문제, 부동산 정책 실패, 황우석 교수 논문 조작사건,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 위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졸속 추진 등 갑갑한 사건과 문제가 많았다는 뜻이다. 기업하는 사람은 새해가 되면 한해의 경제 전망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그러나 연초부터 들려오는 얘기는 한결같이 어두운 것뿐이다. 올해의 경제 전망을 한자성어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의할 수 있을 듯싶다. 무엇 하나 확실하거나 기댈 것이 없어 앞이 보이지 않으니 ‘오리무중(五里霧中)’, 환율·유가·금리·북핵·부동산 등 주요 변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첩첩산중(疊疊山中)’이다. 또 기업지배구조 문제나 집단소송제 같은 법적·제도적 장치가 기업을 옥죄고 경영 환경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으니 ‘사면초가(四面楚歌)’, 대선 정국에다 최근 개헌 논의까지 겹쳐 말 그대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지경에 와 있다고 할 것이다. 한마디로 기업인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단어들이다. 그러면 희망은 없는 것인가. 기업 경영인은 늘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외환 위기때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위기를 겪으며 이때만 지나면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극복한 이후 지금까지도 기업 환경은 날로 어려워지는 것 같다. 이 와중에 느끼는 것이 있다. 기업 환경이 어려워 망하는 기업도 있지만, 제법 알찬 실적을 거두는 기업도 있다. 또한 위기를 기회로 삼아 크게 도약한 기업도 있다. 기업 환경은 중요하다. 하지만 환경 탓만 하는 것은 한가한 소리이다. 문제는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하느냐이고 그 돌파력을 어떻게 갖추느냐에 따라 기업의 성쇠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지난 6일 임직원들과 함께 북한산으로 정기 산행을 다녀 왔다. 눈이 많이 와서 산을 오르내리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특히 하산길이 어려웠다. 하산때 살펴보니 엉덩이를 아예 바닥에 대고 살금살금 내려오는 직원이 있고, 발을 정확히 짚어가며 잽싸게 내려오는 직원도 있었다. 순발력, 민첩성, 판단력이 좋은 직원들은 더욱 빠르게 산을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보면서 어려운 환경은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기업들은 인재를 구한다. 난관을 돌파하고 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인재밖에 없기 때문이다. 긍정적 사고와 창의력, 열정이 넘치는 인재들은 기업을 위기에서 구하고 혁신해 기업을 영속시킨다. 기업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들 인재는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는 심정으로 일에 임한다. 올 연초에는 비관적인 말만 난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도 있다. 올해는 600년만에 맞는 ‘황금돼지의 해’라 한다. 이 ‘황금돼지’가 기업인이 찾는 인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활발한 생산 활동을 하고 만족스러운 경영 성과를 이뤄내고자 하는 바람에서다. 정이만 한화63시티 사장
  • [환경·생명] 폐비닐로 신음하는 국토

    [환경·생명] 폐비닐로 신음하는 국토

    국토가 폐비닐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계절 농업이 보편화되고 비닐 사용량이 크게 늘면서 폐비닐도 비례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수거되지 않고 묻히거나 안전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소각되는 바람에 2차 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다. 비닐은 농업 생산성을 올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재이지만 폐비닐로 인해 농토 오염은 물론 농촌 환경을 크게 해치는 흉물로 자리잡았다. 연근해 바다와 강 속에도 폐비닐이 가라앉아 환경오염과 사고의 원인이 되고 있다. 연간 발생하는 폐비닐은 26만t 정도.2005년에는 26만 4880t이 나왔다. 이중 21만 3723t을 거둬들여 수거율이 81%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거율이 높아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5년 전만 해도 수거율이 절반에 불과했다. 한국환경자원공사에 따르면 2001∼2005년에 발생한 폐비닐은 모두 128만t에 이른다. ●5년간 미수거만 50만t 육박 이 가운데 수거량은 80만 7712t에 불과하다. 나머지 47만 4822t은 수거되지 않고 땅속에 묻혔거나 불법으로 태워버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에 발생, 수거되지 않은 폐비닐까지 더하면 엄청난 양의 폐비닐이 국토를 뒤덮고 있는 셈이다. 폐비닐 가운데는 농업용 폴리에틸렌 필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업용 비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50년대 초.1970년대 비닐 하우스 농사가 본격화되면서 사용량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채소재배 비닐하우스에 주로 사용했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농업 분야에 이용되고 있다. 문제는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재질이라서 사용량에 비례해 그만큼 폐비닐이 나온다는 데 있다. ●젊은층 이농… 수거 엄두조차 못내 경기도 화성시 한 농촌 마을 밭에는 아직도 비닐이 수거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돼 있다. 농민은 “2년 전 농사지은 땅인데 젊은 사람이 없어 비닐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충남 연기군 축산리 산밑 밭에는 고추를 심을 때 깔았던 비닐이 수년째 버려져 있다.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농사를 포기한 땅이라서 절반은 이미 무성한 잡초와 함께 땅속에 묻혔다. 또 대충 걷어낸 비닐 덩이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남해 연근해에도 폐비닐이 쌓여 있다. 때로는 작은 고깃배 스크류가 폐비닐에 걸려 엔진이 멈춰서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바닥까지 내려가는 그물을 쳤다가 끌어올리면 비닐 덩어리가 따라올라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폐비닐을 효율적으로 수거하는 길은 없을까. 현재 폐비닐 수거는 전적으로 농민들의 손에 의존하고 있다. 배출자 수거 원칙을 적용하면 이들이 거둬들여야 하지만 농촌 인구 고령화와 일손부족으로 이마저 여의치 않다. 농민들의 의식도 문제다. 폐비닐로 인한 국토오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냥 태워버리는 경우도 많다. ●재활용 기술개발 투자 서둘러야 조남용 환경자원공사 수원 사업소장은 “수거율을 높이려면 지자체 장려금을 늘리고, 처리 능력을 키워야 한다.”며 “농촌 인구 고령화로 수거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폐비닐 수거에 나서고 있지만 쉽게 줄어들지 않고 있다. 지자체는 폐비닐을 수거하면 장려금을 주는데 지급액이 천차만별이다.㎏당 30∼40원을 주는 지자체가 있는가 하면 최고 300∼400원을 주는 곳도 있다.2005년 폐비닐 수거 장려금은 지방자치단체 100억원과 농림부 30억원 등 130억원에 이른다. 하지만 돈으로 수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농어민 교육에 폐비닐의 위험성을 알리고 수거 우수 마을에 대한 차별 지원 등이 필요하다. 처리 능력을 키우고 재활용 기술 개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폐비닐 처리는 대부분 환경자원공사가 맡고 있는데 2005년의 경우 수거된 21만 6000t 가운데 처리량은 10만t에 불과하다. 올해는 11만 4000t을 처리할 계획이다. 공사가 폐비닐 처리 공장 5곳과 중간 가공시설 8곳을 운영하고 있지만 폐비닐을 처리하기는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아직도 수거해 놓고 처리하지 못한 폐비닐이 35만t이 넘는다. 글 사진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거두면 자원, 버리면 쓰레기 다른 쓰레기와 마찬가지로 폐비닐도 건축자재나 생활용품으로 재활용이 가능한 자원이다. 흙이 묻지 않은 비닐 터널 등은 고무 함지박을 만들거나 고무 디딤판을 만드는 주원료다. 고추밭에 까는 검은색 비닐 등은 물로 씻어 이물질을 털어낸 뒤 이를 녹여 유기용제 등의 재생원료로 쓴다. 한국환경자원공사는 “영농 폐비닐만 제대로 수거해도 연간 167억원의 경제적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폐비닐을 재활용하여 친환경 재생골재를 생산, 도로포장에 활용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흙이나 이물질이 묻어 있는 상태의 폐비닐을 그대로 원료로 사용할 수 있어 실질적인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재생골재로 흙과 섞어 도로지반을 다지면 자체의 구멍이 자갈 역할을 하여 흙이 물을 흡수하는 것을 막고, 높은 단열 효과로 도로지반이 어는 현상도 줄일 수 있다. 이 재생골재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공사에 실제로 사용돼 성능 검증을 마쳤으며 골재 원가의 30%가량을 줄이는 효과를 보았다. 폐비닐로 다공성 세라믹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술도 나왔다. 폐비닐을 백토, 점토 및 고령토 등과 섞어 800∼1100도에서 소성시키면 다공성 세라믹 제품이 나온다. 그러나 버리면 그대로 환경을 훼손하는 쓰레기가 된다. 농경지에 그대로 묻히면 땅 속 공기 흐름을 막아 작물이 자라는 것을 방해한다. 자연경관도 크게 훼손해 농촌환경을 더럽히는 원인이 된다. 밭에서 태우면 인체에 해로운 대기오염물질이 발생하고 소각 잔재물을 땅에 묻으면 토양오염의 원인이 된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폐비닐 수거 요령 내가 사용한 비닐은 내가 수거한다는 의식을 갖고 흙·돌·낙엽 등 이물질을 제거한 뒤 배출해야 한다. 이물질이 얼마나 포함됐느냐에 따라 재활용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물질이 30% 이하면 재활용 가치가 높고 수거 보상금도 지급한다. 이물질이 50% 제거된 폐비닐은 바람으로 털거나 물에 씻어 재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물질이 80% 이상 남아 있는 것은 매각이나 소각해야 하는데 엄청난 폐기물처리 비용이 발생한다. 제품별로 따로 수거하면 처리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하우스용 두꺼운 비닐(로덴비닐)과 고추밭 등을 씌우는 얇은 비닐(하이덴비닐)로 구분하고 흰색과 검정색 비닐로 나누어 묶으면 된다. 개인별 수거보다는 마을 단위 수거가 경제적이고 수거에 편리하다. 마을 공동 집하장에 모아놓고 읍·면·동 환경담당에게 연락하면 된다. 지자체는 환경자원공사에 연락, 수거 일정을 정해 전문 수거 차량이 출동, 위생적으로 거둬가고 지자체에서 보상금을 지급한다. 개인 재활용 업체가 수거하기도 하는데 수거량이 미미하고 이물질이 없는 양질의 상태만 가져간다. 이 때문에 폐비닐을 깨끗하게 처리하기 위해선 지자체를 통한 수거가 바람직하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길섶에서] 결별 선언/함혜리 논설위원

    인터넷을 뒤지다가 ‘일을 재밌게 하는 방법 10가지’라는 것을 발견했다.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들이었다.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쓸데없이 내 기운을 빼는 것과는 과감히 결별하라.’는 것이었다. 오래 고여서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는 웅덩이물 같은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라고 충고했다.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 버리기 힘든 것들을 버려야 버리는 재미가 더욱 크다고 했다. 당장에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워하는 마음, 섭섭했던 마음, 이루지도 못하고 부담만 안겼던 계획들, 오래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습관들이 결별해야 할 대상으로 꼽혔다.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인간관계도 중요한 정리대상이다. 주소록을 들여다보니 3년 넘도록 서로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득하다. 이들에게는 결별을 선언하기로 했다. 새 주소록에 옮겨 적지 않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많은 사람들과 복잡하게 맺어진 인간관계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고, 정말 소중한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새영화] 마파도2 - 걸쭉한 입담 또 보여주마

    오는 18일 개봉하는 영화 ‘마파도2’의 진짜 재미는 오히려 영화 밖에 있었다. 기자 시사회 때 김지영, 여운계, 김을동, 김형자, 길해연 등 중견 여배우 다섯명이 한꺼번에 무대에 오른 모습을 보는 것은 뿌듯했다. 영화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기에.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이 ‘빡센 할매’들의 옛날 사진이 차례로 뜬다.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저들에게도 저렇게 아름다웠던 한때가 있었구나! 전작의 인기 때문에 기대치가 높아진 탓일까.‘마파도2’의 웃음은 강하지 않다. 이야기는 촘촘하지 못하고, 이를 때우려 종종 억지 웃음을 강요하기도 한다. 여전히 일확천금을 좇는 충수(이문식)는 재벌회장 박달구의 청탁을 받고 그의 첫사랑 ‘꽃님이’를 찾으러 동백섬으로 떠난다. 충수와 정체 모를 꽃미남 기영(이규한)이 함께 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뒤집히고, 눈을 떠보니 도착한 곳은 또 마파도다. 영화는 잠시 꽃님이 찾기는 뒷전이고 욕쟁이 할매 5명의 욕세례와 충수의 수난사로 채워진다. 기영과 달리 구박덩이로 전락한 충수는 매번 깨지고 다치고 똥바가지를 뒤집어 쓴다. 개그콘서트처럼 연관성 없이 이어지며 몸짓 코미디가 난무하는 장면에서 충수는 웃기기보다 안쓰럽다. 충수가 마파도가 동백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만 영화는 1시간여를 허비한다. 이후 충수의 ‘꽃님할매’ 찾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할매들의 첫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친절한 금자씨’ 등의 패러디나 소녀로 돌아간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다소 재미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 후반부, 뭍으로 나간 것으로 설정된 진안댁(김수미)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방점을 찍으려고 하나 역부족이다. 사람마다 웃음 코드가 다르기에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욕쟁이 할머니들의 ‘오진’ 입담에 배를 잡고 넘어갔던 관객들이라면 여전히 반색할 영화다.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현천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파리브르타 트리코나 아사나

    [현천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파리브르타 트리코나 아사나

    파리브르타(Parivrtta)는 회전하는, 둥글게 혹은 뒤로 돌린다는 뜻이고, 트리코나(Trikona)는 삼각형이다.그것은 회전하는 삼각형 자세이다. 이는 티타 트리코나 아사나의 비튼(역)자세이다. 1. 타다 아사나로 선다. 2.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껑충 뛰어 다리를 90∼105㎝ 벌린다. 양팔을 어깨와 일직선이 되게 옆으로 벌리고, 손바닥은 아래로 향한다(사진1). 3. 오른발은 오른쪽으로 90도, 왼발은 오른쪽으로 60도 회전하고 무릎에 단단히 힘을 주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발을 정확한 위치에 둔다. 이때 왼쪽 다리는 밖으로 쭉 뻗어야 하며, 무릎은 힘을 주어 단단히 유지한다. 4. 숨을 내쉬며, 왼쪽손바닥을 오른발의 바깥쪽 마루 위에 두기 위해 몸통을 오른쪽 방향으로 완전히 돌린다(사진2). 이때 오른팔을 위로 쭉 뻗어 왼팔과 일직선이 되게 하고 시선은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응시한다. 양어깨와 어깨뼈를 쭉 뻗어 편다(사진3). 무릎에 힘을 주어 단단히 유지하고 오른발의 발가락이 마루에서 떨어지게 하지 않는다. 왼발의 바깥 부분이 마루에 잘 붙어 있어야 함을 명심한다. 5. 정상호흡을 하면서 이 자세로 30초간 유지한다. 6. 숨을 들이마시며, 왼손을 마루에서 떼어 원래 위치로 돌려서 1번 자세가 되도록 하고, 숨을 내쉬며 반대쪽도 같은 방법으로 행한다. 몸이 유연하지 못한 사람과 초보자들은 목침을 이용하여 이 자세를 지속할 수 있다. 오른쪽 발목뼈 옆에 목침을 두고 왼쪽 손바닥으로 목침을 짚고 오른팔을 천장을 향해 쭉 뻗는다(사진4). 7. 양쪽 모두 같은 시간 동안 이 자세로 있는다. 이 자세는 각각 서너 번 깊은 호흡을 함으로써 조절될 수 있다. 8. 적당한 시간을 이 자세로 지속한 후 숨을 들이쉬며, 원래의 자세로 돌아와 타다 아사나로 선다. 이것이 이 아사나의 최종 단계이다. # 효과 이 아사나는 넓적다리, 종아리, 오금의 근을 유연하고 강하게 하여 발목부터 엉덩이근육까지 다리 전체의 혈행을 돕는다. 또한 가슴이 활짝 펴지게 됨으로써 척추와 등의 근육까지도 충분한 혈액 공급이 되어 굽은 등, 요추, 어깨, 흉추 부분의 관절염에 도움을 주는 아사나이다. 비트는 자세를 통하여 복부 기관이 자극이 되어 소화기능을 원활히 하게 되고, 변비 치료에도 효과적이다. # 요가교실 프라티아하라의 단계에 도달하면, 구도자는 자기 자신을 찾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매력적이지만 치명적인 관능적 욕망의 마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욕망들을 만들어낸 창조주를 자기 몸 속에 새김으로써 욕망에 대한 절연물이 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또한 신의 유상인 지식의 등불도 필요하다. 진실로,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속박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해방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만약 그것이 욕망의 굴레에 묶여 있다면 속박이 되고, 거기에서 벗어나 있다면 우리는 자유를 맛볼 것이다. 아헹가 요가센터 053)981-3553 http:///www.iyengar.co.kr 아사나 전지은
  • “선생님! 전공과목이 여학생 성추행인가요”

    “선생님! 전공과목이 여학생 성추행인가요”

    “선생님이 우리반 여학생들의 가슴 등을 자꾸 만져요.” 중국 대륙에 한 초등학교 교사가 수업시간에 공부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어린 여학생에게 성추행을 자행,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 베이징(北京)의 한 초등학교 컴퓨터 교사는 최근 자신이 가르치는 어린 여학생들을 상대로 성추행을 자행한 혐의로 붙잡혀 충격을 주고 있다고 북경신보(北京晨報)가 8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양의 탈을 쓴 이리’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장본인은 올해 28살의 치훙보(祁洪波)씨.현재 베이징시 위위안(育園)초등학교 컴퓨터과목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지 교사의 성추행 사건은 지난해 상반기 발생했다.당시 이 학교 여학생인 샤오쉐(小雪·가명)의 어머니 왕(王)모씨는 작년 6월 딸로부터 이상한 얘기를 들었다.좀체로 말을 잘 하지 않는 샤오쉐가 느닷없이 “우리 학교 컴퓨터 선생님은 정말 미워”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다. 이를 이상히 여긴 왕씨는 딸을 상대로 집중 추궁했다.하지만 샤오쉐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쉽사리 털어놓지 않았다. 화가 난 왕씨는 “선생님은 존경받아야 하는 훌륭하신 분이신데,왜 그렇게 미워하느냐?”고 호통을 쳤다.그제사야 샤오쉐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컴퓨터 선생의 성은 지씨이고 수업시간에 공부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여학생들의 가슴이나 엉덩이,음부 등을 상습적으로 만지고 다닌다는 충격적인 얘기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해 왕씨는 차근차근 대응해 나가기로 했다.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진 학생들의 학부모와 통화를 해본 결과,성추행은 사실로 밝혀졌다.이를 바탕으로 피해 학부모의 진술을 듣고 의견을 모은 뒤 고대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그해 6월 26일 파출소는 치 교사를 불러 조사를 벌였다.경찰은 조사를 벌인 뒤 그를 현장에서 체포했다. 경찰 조사결과 지 교사는 그해 4월 부임해와 3개월째 교사 생활을 해왔다.컴퓨터 수업 시간을 이용해 여러차례 14살 미만의 류(劉)모양 등을 포함해 어린 여학생 14명의 음부나 가슴,엉덩이 등을 마구 만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법원은 피고인 치훙보는 수업시간이라는 자신의 강점을 이용해 공공장소에서 어린 여학생을 성추행해 그녀들에게 정신적 충격을 준 점이 인정된다며 아동 성추행죄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했다.하지만 뻔뻔스러운 치 교사는 이에 불복,항소할 예정이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주택대출자 이자+α 부담 ‘눈덩이’

    주택대출자 이자+α 부담 ‘눈덩이’

    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만기 일시상환으로 대출을 받은 고객들의 부담이 커질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3년 단위로 돌아오는 만기 연장 때 최근 강화된 담보인정비율(LTV)이나 총부채상환비율(DTI) 적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금리 상승과 함께 시중은행에서 ‘돌려 막기’용 대출을 막고 있어 분할상환 조건으로 돈을 빌린 대출자들 역시 부담이 늘어날 전망이다. ●올해부터 일시상환대출 만기도래 2006년 말 기준으로 국민은행의 원리금 만기 일시상환과 분할상환의 비율은 46.0대54.0, 신한은 54.6대46.4, 우리는 55.0대45.0이다. 일시상환과 분할상환의 비율이 거의 5대5다. 장기 모기지론이 나오기 전인 2004년에는 일시상환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일시상환 대출기간은 보통 3년. 절반 가까운 주택담보대출이 그동안 강화된 LTV나 DTI 규제 적용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상당 물량의 주택담보대출이 만기가 돌아오면서 연장을 해야 한다. 이에 따라 그동안 강화된 LTV 60%와 DTI 40% 규제에 따라 해당 금액만큼 갚아야 하는 셈이다. 문제는 DTI. 은행들은 기존에 대출금액 산정에 LTV의 비율은 감안했지만 개인의 소득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DTI 40% 규제가 만기 연장하는 대출자에게 그대로 적용되면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2억∼3억원까지 한꺼번에 갚아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된다. ●DTI·LTV 규제 유예기간 필요 분할상환 대출자들의 부담도 점점 커지고 있다.2004년부터 판매된 분할상환 담보대출 상품의 원리금 납부도 올해부터 시작된다. 분할상환의 대부분은 3년 동안 이자만 낸 뒤 이후 원리금을 분납하는 형식이다. 주택담보대출의 97%는 변동금리 대출이다. 금리 상승에 따라 이자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금리가 낮은 다른 은행의 돈을 빌려 기존 은행의 대출을 갚는 대환대출 역시 최근 주요 시중은행들이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은행권에서는 초기에는 높은 DTI를 적용하고, 단계적으로 비율을 하향 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연구원도 초기에는 일정 유예기간을 부과한 뒤, 장기적으로 LTV와 DTI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최근 지적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일시상환 대출자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주택담보대출을 규제했던 지난 2002년과 유사하게 기존 조건의 대출자들에게는 완화된 규제로 연장 만기를 해줄 필요가 있다.”면서 “분할상환으로 대출을 받은 경우는 양도세와 원리금·이자 부담 등을 잘 따져서 피해를 입지 않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개인파산 신청 작년 12만건

    개인파산 신청 작년 12만건

    서울 송파구 마천동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장모(79)씨 부부는 동네 사람한테 7000여만원을 빌려준 뒤 받지 못했다. 장사마저 안돼 ‘카드돌려막기’로 생활비를 충당해왔으나 빚은 늘어만 갔다. 가게를 처분했지만 5000여만원의 빚이 남아 최근들어 개인파산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전북 김제시에서 벼농사를 하던 이모(56)씨는 농약·비료값, 농기계 임대료 등으로 6500만원의 빚을 졌다. 이씨는 서울로 올라와 일용직을 전전했지만 늘어나는 빚을 끝내 갚을 수 없어 개인파산을 신청했다. 이처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신청을 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7일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개인파산 신청 건수는 12만 2608건에 달했다.2005년 3만 8773건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은 물론 2002년(1335건)에 비해서는 4년만에 무려 90배 이상 급증했다. ●왜 이렇게 늘었나 경기침체에 따른 영향이 주된 요인으로 지적된다. 하지만 이보다는 금융기관과 협의해 어떻게든 빚을 갚기보다는 파산 선고를 통해 빚을 청산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도덕적 해이라는 얘기다. 빚잔치를 벌여 채무를 모두 해결하는 개인파산과 달리 소득에서 기초생활비 등을 제외한 빚을 최대 5년간 갚아가고 나머지는 탕감받는 개인회생 신청은 지난해 5만 6112건으로,2005년 4만 8541건에 비해 15%가량 증가하는 데 그친 것이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는 빚 상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줄어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법원이 개인파산·면책결정을 너무 쉽게 내리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법원의 면책허가율은 2000년 57.5%에서 2003년 90%, 최근에는 98%까지 높아졌다. ●개인파산 적정 범위 논란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의 한 판사는 “법원은 법에 정해진 면책결정 사유에 따라 결정한다.”면서 “개인파산 신청자 중 의심이 가는 채무자들은 실사를 벌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에서 개인회생 업무를 담당하는 관계자도 “일부에서 개인파산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있지만 아직 통계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숫자”라면서 “이른바 ‘신용불량자’들도 결국 제도를 통해 다시 경제생활을 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빚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는 것은 개인파산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개인파산상담자 노인·여성 많아 법률구조공단 배명섭 계장은 “주로 자식이나 남편의 빚을 대신 진 60∼70대 노인이나 40∼50대 여성이 개인파산 관련 상담을 한다.”며 “개인파산자들이 어디에 얼마만큼의 빚을 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큰 어려움”이라고 말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서울광장] 사고무친 노무현/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사고무친 노무현/진경호 논설위원

    #1.첫째, 그는 돌출적인 행동과 무분별한 발언으로 항상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둘째, 그는 우물 안 개구리요, 핵 장난의 위험을 외면하는 철부지다. 셋째, 그는 감정의 기복에 따라 언제 무슨 깽판을 벌일지 모른다. #2. 신체 허약하나 두뇌 명철함. 행동은 불안한 거동이 많으며 악화의 우려조차 엿보임. 지나치게 자만심이 강하여 타(他)와 비협조적임. 진작 이 경구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사회 변혁을 외치는 화려한 언술 뒤로 잔뜩 응어리진 분노와 독선, 그 유아독존적 아집을 흘려보지 말았어야 했다. 노무현 변호사를 정계에 입문시킨 선배 변호사 김광일 전 국회의원이 2002년 12월 대선 직전 기자회견에서 내지른 외마디(#1)를, 이보다 훨씬 앞서 노 대통령의 중학교 3학년 생활기록부에 담임교사가 조심스레 남긴 글귀(#2)에 한번쯤 귀와 눈을 열었어야 했다. 경구는 현실이 됐다.“대통령 못 해먹겠다.”로 시작한 ‘무분별한 발언’은 “미국이 없었더라면 북한 수용소에 있었을 것”에서 “미국 엉덩이 뒤에서 형님만 믿는다고 하는 게 자주 국민의 안보의식이냐.”“흔들어라. 난데없이 굴러 들어온 놈…”으로까지 나갔다. 형용모순의 ‘좌파적 신자유주의’를 내세운 정책 행보 또한 왼쪽 오른쪽 광폭으로 넘나들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의로까지 갔다. 국민들은 그런 감정의 기복과 명철한 두뇌와 불안한 거동의 부조화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하지만 이조차 맛보기였던 모양이다. 지난 연말 두 팔을 내지르던 민주평통 연설이 예사롭지 않더니 새해 들기가 무섭게 노 대통령의 입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할 말 꼬박꼬박 하겠다.”며 국민들의 평가부터 내동댕이쳤다. 공무원들에게는 “가장 부실한 영역이 미디어”라며 언론과의 일전을 독려하고 나섰다. 그를 권력의 정점에 세우고도 등을 돌리게 돼 괴로운 국민들에게 ‘앞으론 당신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겠어.’라고 외치는 노 대통령에게서 40여년 전 경남 김해시 진영 시골마을의 소년 노무현이 오버랩된다. 고무와 천으로 만들어진 부잣집 아이의 책가방을 칼로 북북 찢어댔고,‘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 유독 가난을 심각히 여기며 자랐고’, 잘 사는 읍내 아이들에 맞서 가난뱅이 시골 아이들의 대장이 됐던 노무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뿌리칠 수 없는 그 피해의식이 마구 터져 나오는 듯하다. 임기말 대통령의 숙명도, 권력의 무상함도 아니다. 편가르기 정치, 뺄셈정치의 잔해일 뿐이다. 하나를 갈라 반을 얻고, 이를 또 쪼개 그 반을 취하고, 다시 나누고, 홀로 남고, 결국엔 자신마저 갈라 놓는 정치 말이다. 그 정치가 지금 국민 10명 중 9명을 등지게 하고 자신에게 우호적이던 언론마저 돌려 세운 것이다. 그런 정치이기에 언론이 국민과 자신을 가르는 불량품이 되고, 그런 불량품에 속아 소비자 주권을 망각하는 불량국민이 되는 것이다. 여당의 많은 인사들조차 노무현 때리기에 나선, 고립무원의 노 대통령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부질없을 듯 하다. 들을 의사도, 여유도 없거니와 덧셈정치에 익숙지 않아 실천할 능력도 없어 보인다. 차라리 국민들이 움직이자. 그는 결코 ‘왕따’가 아니며, 지난 4년 많은 것을 이뤘으며,2008년 2월24일 자정까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대통령임을 일깨우도록 하자. 따뜻한 편지 한 통을 보내자. 그의 친구가 되자. 경구를 흘려 들은 모두의 책무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희망 2007 새벽을 여는 사람들] (5) 장애아 생활재활교사 강진희씨

    [희망 2007 새벽을 여는 사람들] (5) 장애아 생활재활교사 강진희씨

    ‘버림받은 아이’라는 말은 각박한 세상이 붙여준 단어일 뿐이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에게는 이 아이들이 오히려 더 소중한 존재다. 성경에 나오는 일곱 천사 중 하나인 ‘라파엘’의 이름을 딴 서울 종로구 체부동 ‘라파엘의 집’에 모여 사는 아이들은 무지개와 같은 희망을 꿈꾼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몸이 불편해도 앞날은 결코 어둡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바로 곁에서 그림자처럼 이들을 돌보는 생활재활교사 강진희(25·여)씨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5일 새벽 6시. 어슴푸레한 형광등 불빛이 새어나오는 ‘라파엘의 집’은 동이 트기 전부터 분주하다.2층 양옥집은 밖에서 보기엔 고요하지만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기지개를 켠다. 강씨 등 교사들은 새벽녘부터 아이들을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의 용변을 챙기느라 부지런히 식당과 침실을 오갔다. 강씨의 앳된 얼굴에는 생기있는 미소가 넘쳐흘렀다. ●30여명의 천사들과 새벽을 연다. 라파엘의 집에는 모두 30여명의 보호 아동들이 지낸다. 부모가 없거나 경제적인 곤란을 겪고 있는 가정으로부터 위탁된 아이가 15명, 낮 동안에만 머무르고 부모가 퇴근할 때 데려가는 아이들이 15명 정도다.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는 6명의 생활 교사와 일일출퇴근제인 4명의 주간 교사가 이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있다. “언젠가부터 봉사활동을 하지 않는 날에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아이들 생각이 떠나질 않더라고요.‘이것이 내 천직이구나.’하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그가 처음 이곳을 찾은 것은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1학년 때인 2001년 3월. 동아리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우연한 선택은 대학 문턱을 나설 즈음엔 그의 장래 진로로 바뀌었다.“처음엔 아이들을 위해 제가 봉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아이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제가 더 힘을 얻는 것 같아요. 학생 때는 우민이라는 아이를 아들이라 부르며 예뻐했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제 아들 같아요.” 그는 얼마 전에는 말이 어눌한 하은이(9)가 ‘엄마∼’라고 불러 남몰래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안쓰러운 마음과 벅찬 감동이 한꺼번에 밀려오더란다. ●“아이들의 ‘엄마∼’란 말에 눈물” “밥 먹는 것, 배변 보는 것 하나하나가 쉽지 않아요. 남들은 20분이면 뚝딱 끝내버릴 식사지만, 이곳 아이들은 씹는 것 자체가 어렵고, 역류증으로 먹은 음식을 자주 토해버려서 한 시간은 족히 걸리죠. 배변 기능도 떨어져서 늘 기저귀를 차고 있고 용무도 항상 관장을 통해 보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9살 정연이의 엉덩이에 관장약을 넣었다. 정연이는 싫다는 듯 몸을 바둥거렸지만, 배를 누르는 선생님의 노련한 손길에 초록색변이 쏟아져 나오자 금세 얌전해졌다. 그의 손은 어느새 변으로 흥건해졌지만, 이에 아랑곳없다는 듯 선생님의 얼굴은 정연이가 무사히 배변을 마쳤다는 기쁨에 환하기만 하다. 그는 이 길에 대해 한번도 믿음이 흔들려 본 적이 없지만 가끔씩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친구들이 ‘언제까지 할 거냐.’ ‘힘들지 않냐.’라고 캐물을 때 서운하고 화가 나기도 해요.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지만 대부분은 그를 축복하고 격려해준다. 부모님도 잘 어울린다며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기억에 남는 후원자가 있느냐는 물음에 선생님은 대뜸 ‘윤 아저씨’를 떠올린다.“봉사를 오시면 항상 아이들을 안아주는 것은 물론 기저귀 갈기, 빨래, 목욕 등 온갖 궂은 일은 다하세요. 그래서 신상에 대해 여쭤보면 자기는 ‘외계에서 왔다.’고 하고 절대 이름을 밝히지 않으세요.” 이외에도 고마운 사람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고마운 분들은 10년 넘게 2000∼3000원씩 꼬박꼬박 돈을 부쳐주는 고정 후원자들이다. 그의 새해 목표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는 것. 사이버대학에도 등록해 본격적으로 사회복지 과정을 공부해볼 계획이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제17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 1회전(4국)] 2006년의 스타 온소진 3단

    [제17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 1회전(4국)] 2006년의 스타 온소진 3단

    제1보(1∼13) 온소진 3단과 홍기표 2단은 재작년 16기 비씨카드배에도 참가해서 본선에 진출했다. 그러나 모두 1회전에서 고배를 마시고 탈락하고 말았다. 당시 두 기사는 모두 무명의 기사였기 때문에 그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뒤로 1년이 흘렀다. 어린 기사들에게 1년은 충분한 시간이다. 온소진 3단은 2006년이 아마 생애 최고의 한해로 기억될 것이다. 한국바둑리그에서 한게임팀에 와일드카드로 선발된 그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고마워했는데, 그 고마움을 성적으로 갚았다.1지명자와 세번 만나서 모두 이기는 기염을 토하며(조훈현 9단에 2승, 최철한 9단에 1승) 한게임팀의 복덩이로 불리게 됐다. 그 결과 그는 1월3일에 있었던 한국바둑리그 시상식에서 5지명자의 베스트선수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한국바둑리그에서 탄력을 받은 온 3단은 GS칼텍스배에서 이창호 9단을 물리치는 등 좋은 성적으로 본선리그에서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좋은 성적으로 랭킹이 수직상승해서 2007년 1월1일 랭킹은 14위, 또 2006년 통합랭킹은 12위로 톱기사 대열에 합류하기 직전이다. 반면 홍기표 2단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작년 그 상태 그대로이다. 그러나 소문으로는 홍 2단도 무섭게 달라졌다고 한다. 프로기사들끼리 연습으로 두는 자체리그전에서 발군의 성적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기사들 사이에서 강하다고 소문이 나면 대체로 1년 안에 큰 일을 내곤 한다. 어쩌면 2007년은 홍기표 2단의 해가 될지도 모른다. 백2의 화점에 대뜸 흑3으로 하나 걸쳐 놓고 흑5로 둔 것은 백이 우하귀에 두면 흑가로 둬서 좌변에 미니 중국식 포진을 펼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온3단은 백6으로 걸쳐서 주문을 거슬렀다. 흑7의 협공에서 11까지는 최신 정석 가운데에서도 최신 정석이다. 이 형태가 처음 등장한 것이 벌써 10년 정도 흘렀지만 최근 새로운 형태가 발견되면서 다시 각광 받고 있다. 그 최신 정석은 백12가 나에 뒀을 때 등장하는데 이번에도 온 3단이 약간 수순을 비틀었다. 온 3단이 처음부터 상대의 주문을 조금씩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유승엽 withbdk@naver.com
  • [프렌치 리포트] (11) 경쟁 싫어… 개혁도 싫어

    [프렌치 리포트] (11) 경쟁 싫어… 개혁도 싫어

    프랑스인들은 불안하다. 지금까지는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었는데, 앞으로는 아등바등 살아도 편안한 삶을 보장받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서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인들은 경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돈을 좀 더 많이 벌고, 좀 더 잘 살기 위해 악착같이 사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금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골치 아픈 정치와 경제는 엘리트들에게 맡기고, 국민들은 안정된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하면서 국가가 제공하는 의료·복지·교육의 혜택을 받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런 장밋빛 인생도 이제는 종말을 고해야 한다. 과잉복지로 인한 재정부담이 날로 가중되는데다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본질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분배와 사회적 평등을 우선시하는 프랑스식 사회주의 경제 모델은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속에서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곳곳에서 경쟁을 강요받는다. 프랑스인들의 개혁 거부 증세도 심각해지고 있다. ●변화에 대한 강한 거부 2005년 상반기 프랑스에서 최대의 이슈는 유럽연합(EU) 헌법 비준을 묻는 국민투표였다. 그해 5월29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프랑스 국민의 55%가 유럽연합 헌법에 반대표를 던졌다. 유럽헌법은 25개 회원국 모두 찬성해야 공식발효되기 때문에 유럽헌법은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경제적으로 통합된 유럽을 정치적으로도 통합해 미합중국에 대적할 수 있는 유럽 합중국을 이룩한다는 원대한 계획에도 급제동이 걸렸다. 프랑스는 유럽헌법을 발의한 나라이며 유럽통합을 선도해온 나라다. 프랑스가 유럽헌법을 부결시킨 것은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반대표를 던진 데 대해 르몽드 등 프랑스 언론은 ‘민심의 표출’이라고 평가했다. 시라크 정권에 대한 불만과 유럽통합 작업에 대한 반대여론이 합쳐진 결과라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EU가 중·동부 유럽으로 확대되면서 동유럽의 근로자들이 몰려와 이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것을 우려했다. 실업률이 10% 가까이 되는데도 동유럽의 저가 노동력에 서비스 시장을 열어주겠다는 정부의 태도가 마음에 들 리 없다. 노동자들은 특히 유럽헌법의 도입으로 프랑스가 신(新)자유주의의 국제질서에 편입된다는 데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프랑스의 좌파들은 유럽헌법이 EU 내에 자유시장 경제를 급속히 파급시켜 지금까지 쌓아온 전통적 사회보장망을 파괴할 것이라고 예단했다. 프랑스인들이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자극한 셈이다. ●한계에 달한 프랑스식 사회경제 모델 유럽헌법 국민투표를 계기로 유럽에서는 앞으로 어떤 사회로 갈 것인지에 대한 토론에 불이 붙었다. 같은 해 10월27일 EU 정상들은 런던에서 비공식회담을 열어 유럽의 미래를 논의했다. 당시 순번제 의장국이었던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이 자리에서 회원국 정상들에게 유럽 발전을 위해서는 앵글로색슨 모델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앵글로색슨 모델은 개방과 경쟁만 유도할 뿐 평등과 분배를 외면한다고 비판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프랑스 국민의 여론을 의식해 이렇게 강변했지만 속마음은 정반대였을 것이다. 사회보장 비용 때문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와 경기침체에 따른 높은 실업률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경제시스템을 개혁해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분배와 사회적 평등을 우선시하는 ‘라인란트 모델’의 양축을 이뤄왔다.2차 대전 이후 도입된 라인란트 모델은 지속 성장만 담보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지만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세계화의 소용돌이속에서는 더 이상 유지가 어렵다. 복지비용 부담에 따른 프랑스의 공공부채 규모는 2006년 국내총생산(GDP)의 65%나 된다.2006년 재정적자는 380억∼390억유로에 이를 전망이다. 의료·연금·가족 보험 등 사회보장 비용은 2004년 119억유로,2005년 116억유로의 적자를 기록했다.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정부가 복지와 분배에 우선을 둔 경제정책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다. ●번번이 실패한 개혁시도 드 빌팽 정부는 경제시스템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국가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개혁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고용창출을 위한 국가 재정운용, 소규모 기업의 고용확대, 실업자의 노동시장 복귀를 위한 인센티브제 도입을 정책과제로 제시하고는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최초고용계약(CPE)’제 도입이었다. 고용주가 26세 미만의 직원을 채용할 경우 처음 2년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골자다. 기업주에게 투자의욕을 고취시키고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노린 선택이었다. 프랑스의 청년 실업률은 23%에 달하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것이 드 빌팽 총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불쑥 내민 이 제도에 대학생들과 노동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정년을 보장받고 편히 살아온 프랑스인들에게 이 제도는 라인란트 모델의 포기를 의미했으며, 또한 무한경쟁을 의미했다. 소르본대학의 점거농성으로 시작된 반대시위는 2006년 봄 프랑스 전역을 강타했고 결국 정부는 이 제도의 도입을 백지화했다. 정치평론가 자크 아탈리의 ‘미테랑 평전’에 따르면 사회당 정권에서도 저성장, 높은 실업률, 이민자 문제, 주택난이 심각했다. 그래서 80년대부터 여러번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국민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포기했다.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고 1995년 집권한 중도우파 정부는 수차례 개혁을 시도했으나 2003년의 연금제도 개혁 외에는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르 몽드는 “프랑스인은 65%가 실업을 걱정하고 영국과 덴마크의 높은 성장을 부러워한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복지모델을 고수하겠다는 것은 심각한 모순이다.”라고 꼬집었다.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프로배구] ‘꼴찌의 반란’은 계속된다

    프로배구 대한항공은 그동안 시쳇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프로에 접어든 뒤 세 차례 신인드래프트에서 알토란 같은 새내기들을 쏙쏙 뽑아갔지만 성적은 만년 4위. 아마추어 초청팀 상무와 한국전력을 제외하면 ’만년꼴찌’. 그런 대한항공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상전벽해’란 옛말이 대한항공을 염두에 둔 말은 아니었을까. 3일 인천 도원체육관. 사흘 전 “일 한번 내겠다.”고 내뱉다시피 말한 뒤 디펜딩 챔피언 현대캐피탈을 격침시킨 문용관(48) 감독의 대한항공이 이번에는 겨울리그 9연패의 주인공인 ‘호화군단’ 삼성화재마저 거꾸러뜨렸다. 그것도 2세트를 빼앗긴 뒤 내리 3세트를 따낸 대역전극. 대한항공이 삼성을 이긴 건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실업 시절인 지난 2000년 1월9일 부산에서 벌어진 슈퍼리그 경기에서 3-2 승리를 거둔 뒤 무려 7년 만이다. 프로 원년 4전 전패와 지난 시즌 7연패 등 프로 11연패를 합쳐 27경기 만에 거둔 꿀맛 같은 승리다. 올시즌 첫 라운드에서 나란히 삼성과 4승1패를 기록, 프로 3년 만에 처음 2위로 치고 올라간 대한항공의 이날 승리는 ‘삼바 용병’ 보비(37점)의 힘만으로 일궈낸 건 아니었다. 사실 대한항공은 이제까지 모래알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사령탑을 교체하는 등 온갖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다른 구단의 ‘구타 파문’에 덤터기로 휘말리기도 했다. 올해엔 노장 세터 김경훈까지 은퇴, 팀은 그야말로 기장에다 항법사까지 없는 ‘고물비행기’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선수들의 자포자기 플레이가 팬들에겐 더 밉보였다. 1년간 선수들의 생각을 뜯어고친 건 문용관 감독. 남자배구의 전성기를 풍미한 뒤 인하대 감독을 거쳐 지난해 3월 차주현 전 감독의 후임으로 기장 자리를 꿰찬 문 감독은 선수들을 어르고 때론 협박까지 해가며 팀을 굳은 돌덩이로 만들었다.“초청팀 상무의 별명이 ‘불사조’지만 이제 우리가 그 별명을 꿰찼다.”고 한 문 감독의 소감은 의미심장하다. 두 차례 듀스 끝에 세트스코어 2-2를 만들어 맞은 마지막 5세트. 대한항공은 피를 말리는 접전을 펼치다 12-13까지 끌려갔지만, 리베로 최부식의 천금 같은 디그(스파이크 건져내기)에 이은 보비의 후위공격으로 13-13 동점으로 따라붙었고 신영수(17점)가 스파이크와 블로킹으로 내리 2점을 뽑아 거짓말 같은 역전 드라마를 끝냈다. 한편 현대캐피탈은 이날 상무를 3-0으로 셧아웃시켰다. 여자부에선 KT&G가 센터 김세영과 브라질 용병 루시아나 아도르노의 활약에 힘입어 초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GS칼텍스를 역시 3-0으로 잠재웠다.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시·시조 당선작]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이강산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손을 씻을 때마다 오래전 죽은 이의 음성이 들린다. 그들은 서로 웅얼거리며 내가 놓친 구절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손끝으로 따라가며 책을 읽을 때면 글자들은 어느새 종이를 떠나 지문의 얕은 틈을 메우고 이제 글자를 씻어낸 손가락은 부력을 느끼는 듯. 가볍다. 마개를 막아놓고 세면대 위를 부유하는 글자들을 짚어본다. 놀랍게도 그것은 물속에서 젤리처럼 유연하다. 그리고 오늘은 글자들이 춤을 추는 밤 어순과 문법에서 풀어져 서로 뭉쳤다 흩어지곤 하는. 도서관 세면기에는 매일 새로운 책이 써지고 있다. 마개를 열어 놓으며 나는 방금 씻어낸 글자들이 닿고 있을 생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햇빛을 피해 구석으로 몰린 내 잠 속에는 오랫동안 매몰된 광부가 있어 수맥을 받아먹다 지칠 때면 그는 곡괭이를 들고 좀 더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가 캐내온 이제는 쓸모없는 유언들을 촛농을 떨어뜨리며 하나씩 읽어본다. 어딘가 엔 이것이 책을 녹여 한 세상을 이루는 연금술이라고 쓰여 있을 것처럼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세상에서 오래도록 낡아갈 하나의 문장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때까지 목소리를 감추고 시간을 밀어내는 정확한 뜻이다. ■ 당선 소감-쓰자마자 휘발하는 시는 매순간 절망하는것 프랑스 해변의 민박집에서 나는 TV가 있는 독방을 요구했다. 이제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TV소리를 크게 해놓고 바지를 벗었다. 벗어놓은 바지에서 비린내가 흘러나왔다. 이국의 언어들이 차츰 공간을 메우면서 열어놓은 창으로 바람이 불쾌한 소문처럼 커튼을 한껏 부풀렸다. 커튼이 한 덩이의 절정을 토해놓았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나는 반성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은 폭력적이다. 쓰자마자 백지에서 휘발되는 언어를 가지고 싶었다. 나는 언어의 물질성과 의미의 비정형성 사이가 아찔하다는 것을 안다. 허천난 사람처럼 껴안고 핥아도 시의 육체는 매순간 절망할 것이지만 심장을 꺼내들고 생을 고민하는 일과 같이 이것이 내가 가진 가장 확실한 증명의 방식이 될 것이다. 부족한 작품을 믿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뵐 때마다 내 1인칭의 권위가 욕심을 부리는 김명인 선생님과 이창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목요팀 형들과 종원, 소현, 철규 그리고 내가 기쁜 마음으로 부르는 많은 이름의 주인들이 함께 있어 좋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부모님께 좋은 소식이 먼저 찾아가 조금은 죄송하고 많이 기쁘다. 생각해보면 혼자 찾아간 이국의 해변에서 나는 아주 오래전 처음 육지로 나와 폐를 느끼는 양서류처럼 아득하고 막막한 한 호흡이었다. 그것이 내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이강산 약력 1978년 전남 광양 출생,2005년 고대 국문과 졸업, 고대 국문과 대학원 재학 ■ 심사평-유연한 언어구사 돋보여 예선을 통과해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우선 배호남의 ‘사군자의 꿈’, 백상웅의 ‘층층나무의 잠’, 김강산의 ‘엉덩이’, 이산(본명 이강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 등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다시 대상자를 좁혀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이 최종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배호남의 ‘사군자의 꿈’은 잘 다듬어져 시적 안정감을 느끼게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약점이었고, 백상웅의 ‘층층나무의 잠’은 현실적인 체험의 추상적 표현이 그 나름의 객관성을 확보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김강산의 ‘엉덩이’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였지만 외설적인 부분을 조금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와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두 편 모두 장단점이 있어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형적인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는 그 유연한 언어 구사와 분방한 상상력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시인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박은지의 ‘진짜이든 가짜이든 어쨌든 가방’은 명품 백과 가짜 백을 대비, 여성들의 내면적 심리를 실감나게 살려냈다. 그러나 기성시인의 작품을 모방한 흔적이 엿보였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결국 보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보여 준 이산의 ‘연금술사의 수업시대’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신경림 최동호
  • “국민연금 공격적 투자”

    “국민연금 공격적 투자”

    “운용자산이 180조원에 이릅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큰 손으로 불릴 만한 덩치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큰 돈을 안정성에만 집착해 낮은 수익률로 묶어 놓지는 않을 겁니다. 국내 기반시설 건설부터 해외 광산·유전 개발까지 단 0.1%라도 수익이 높은 곳이면 어디든 공격적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보험료는 더 내고 연금은 덜 받게 되는 구조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지난해 말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했다. 이르면 다음달 임시국회에 상정된다. 이 과정에서 누구보다 주목받은 사람이 김호식(58)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이었다. 연금에 대한 불신이 요율 인상으로 현실화됐다는 힐난도 들었고, 재정 안정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는 축하의 말도 들었다.2일 김 이사장을 만났다. ●조변석개식 제도 땜질이 국민 불신 키워 “국민연금이 제대로 운용될지 의문을 갖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법 개정만 성공하면 절대로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전 국민이 혜택을 보는 게 국민연금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자라는 삼성 이건희 회장도 우리 공단으로부터 연금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1988년 제도 도입 초기 연금을 너무 적게 내고 너무 많이 받는 구조로 만들었다가 이를 고치려고 계속 땜질을 해 온 게 불신의 골을 키운 듯하다.”고 말했다.“소득의 3%만 보험료로 내고 평균소득의 70%를 보장받는 터무니 없는 구조로 제도가 출발했습니다. 이후 보험료를 6%,9%로 차차 확대하고 보장액을 60%까지 끌어내리긴 했습니다만 국민들의 불신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지요.” “현 상태대로라면 국민연금이 2047년 고갈될 것이란 추계가 연금개혁에 대한 국민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뻥튀기한 것이란 주장도 있더군요.5년마다 재정추계를 갱신하도록 돼 있는 국민연금법에 따라 2003년 최고 전문가들을 동원해 계산했던 것인데, 지금 계산하면 오히려 더 나쁘게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추계 당시보다 금리가 더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어떨지는 2008년에 나올 추계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빈곤계층의 제도권 편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현재 가입자는 1700만명이 넘지만 실제 연금을 내는 사람은 1200만명 밖에 안 됩니다.500만명 중 상당수는 안 내기보다는 못내는 사람들인데 이들이야말로 정말로 노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저소득층 100만명에 대해 농어민 지원기준을 적용해 보험료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돈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투자 그는 “현재 180조원으로 세계 5위인 기금이 머잖아 200조원을 넘어서면 2,3위 수준이 된다.”고 규모를 소개했다.“안정적이지만 수익성이 떨어지는 채권 투자는 줄이고 그 대신, 주식과 대체투자의 비중을 높여나갈 것입니다. 국내외 주식투자는 지난해 말 12.0% 수준에서 올 연말 16.4%로 4.4%포인트 늘릴 예정입니다.” 공사는 이미 울산신항, 부산~울산 고속도로, 인천공항철도, 지방 하수도사업 등 실물투자를 본격화했다. “금융시장 건전성을 위해서라도 국민연금이 국내시장에 계속 참여해선 안됩니다. 우리 기금의 덩치가 너무 커져 버렸거든요. 해외 진출이 불가피하단 얘기입니다. 싱가포르의 국영투자공사(GIC)와 같은 수준을 목표로 삼고는 있지만 아직은 역량이 달립니다.” 그는 “일단은 따라 하면서 배우는 게 최상책”이라면서 해외 벤치마킹의 방향을 3가지로 제시했다. 우선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경험 많은 해외 자산운용사와 제휴할 계획이다. 현재 7곳으로부터 전략적 제휴 제안을 받아놓은 상태로 연초에 2곳을 선정한다. 또 미국 캘퍼스(캘리포니아공무원퇴직연금), 캐나다 CPP(국민연금) 등 해외 유수의 연기금과도 손잡는다는 복안이다.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는 세계은행(IBRD)에도 사람을 보내 배우고 돌아오게 할 예정이다. “직접투자도 확대합니다. 광업진흥공사가 추진하는 해외 광물개발 펀드와 석유공사의 해외 유전개발 펀드 투자를 우선적으로 검토 중입니다. 하지만 광산 등은 워낙 리스크(위험)가 큽니다. 이번에 리스크관리팀을 실(室) 조직으로 격상했습니다. 수익성도 높여야 하지만 위험관리를 통해 국민들의 소중한 자산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김 이사장은 공단의 자체 의사결정 권한 강화를 강조했다. 그는 “주요 결정사안에 대해 보건복지부의 승인을 받게 돼 있어 업무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약하다.”면서 “예산과 인력은 물론이고 기금운용의 수익성을 더 높이기 위해서라도 공단에 자율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주고 이를 평가하는 식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희곡당선작] 문득, 멈춰 서서 이야기 하다- monologue Quartet/김정용

    따사로운 봄볕, 아련한 음악. 그리고……. 명일,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걸음으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신내, 꽃다발을 들고 환한 얼굴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두정, 병원복 차림으로 휠체어를 타고 등장, 잠시 휠체어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디론가 간다. 신흥, 전화기를 들고 등장, 상대가 받지 않는지 계속 버튼을 눌러대다가 퇴장한다. 다시 명일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신흥, 신내, 두정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네 사람. 모두들 잠시 망설이다, 각자 어딘가를 향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네 사람: (동시에)저기……. 짧은 암전. 명일: 그녀를 처음 본 건 두정: 치악산이었습니다. 신흥: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신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신흥: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명일: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해질무렵이었는데, 지금도 기억나요. 두정: 그날 따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명일: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남들이 뭐라하건 전 그때 운명을 느꼈습니다. 두정: 이렇게 될 운명이라 그랬던 걸까요? 신흥: 앞이 깜깜하더군요 신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사람 모습만 보이는 거 있잖아요. 신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것부터 수습해야 할지, 그때만 생각하면……. 두정: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날 일은. 명일: 그날이 제 생애에서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난 날입니다. 신내: 제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라……, 그래도 용기를 내야겠죠? 신흥: 용기가 나질 않더군요, 어떻게 마누라 얼굴을 봐야 할지, 술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술은 입에도 못 대고……. 두정: 술요?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산행하는 날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내려와서 마시면 모를까. 명일: 시간 되시면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명일 주변이 밝아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명일: 이 말이, 제가 그녀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어요,‘술 한 잔 하실래요?’ 참 바보 같았죠, 머릿속에 별별 말이 다 떠돌았는데, 막상 나온 말이 그거였어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런데 그녀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한잔만요?’(미소) 그렇게 시작 했어요. 우리들. 정말 행복했어요, 너무 행복해서 불안할 정도로,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좋은 일만 계속 생기면 왠지 불안해지고 그러는 거. 육상 경기복 차림의 신내 등장. 얕은 숨으로 몸을 푼다. 명일: 하지만 그런 불안도 그녀의 미소 앞에선 힘을 잃고 말았죠.(신내 환하게 미소 짓는다.) 우린 언제나 함께였어요, 몸이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마음만은 늘 붙어 있었죠. 신내: 그만해, 더는 못 들어주겠다. 그래서 대학 떨어지면 누구 탓하려고? 아빠가 그러시더라고요. 많이 놀랐어요, 원래 말씀을 거침없이 하시는 편이시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리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제가 원하는 일에 반대 한번 안 하셨던 분인데, 아빠도 제가 고3이 되는 게 스트레스가 되셨나봐요, 사실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 육상하면서 공부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들으실 생각조차 안 하세요 명일: 그런 우리를 하늘이 시샘했는지 신내: 그만해 명일: 불안함을 현실로 만들어 버리더군요. 신내: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어요. 명일: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신내: 낼 모레가 마지막 시합이에요. 오빠가 와 줄까요?(호루라기 소리) 예, 가요! 암튼 쉬는 꼴을 못 본다니까.(급하게 달려 나간다.) 명일: 다 제 잘못이에요, 급하게 달려 나가는 연수를 잡았어야 했는데, 연수가 제 눈앞에서 붕 떠오르더니 바닥으로 나뒹굴었어요, 아주 잠깐 사이였는데……,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그렇게 몇 바퀴를 굴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더군요. 명일: 수술실 앞에서 내내 기도했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두정: 멀리서 누군가 절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눈을 떴는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하얀 천장, 그보다 더 하얀 형광등뿐이었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명일: 잠깐만 쉬었다 하면 안 될까요? 저 세수좀 하고 올게요. 죄송합니다.(나간다.) 두정: 이제 에베레스트는커녕 문턱하나 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니 죽고 싶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결과가 나와봐야 안다고, 설령 잘못 되더라도 열심히 재활하면 될 거라고 말했지만, 제 몸은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저는 걷지 못할 겁니다. 이제 에베레스트는 제게 있어 그림엽서 속에서만 존재하는 산일 뿐입니다. 신흥: (통화하며 등장)아니라니까 그러네, 왜 내 말을 못 믿어, 다 잘 될 테니까 너무 걱정마……, 나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끝나지 않아,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깟 일로 안 무너져……, 여보 나 믿지? 그래 내가 알아서 잘할게, 그리고 내 전화 말고는 다른 전화는 절대 받지마……, 알아, 알아 당분간 친정에 가 있어, 애들은……, 그래, 너무 걱정마.(끊는다.) 두정: 너무 걱정마, 모두들 저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대한 법이니까요. 이렇게 되고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관대함이란 게 무관심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요,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시죠? 그것도 다 여러분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는 생각입니다.(사이)저도 며칠 전까진 여러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도 못하고 있었죠.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절망이란 놈은 순식간에 저를 이곳에 앉혀 놓고는 두 다리를 옭아맸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신흥: “너무 걱정 마”,“걱정하지 마세요.” 도대체 이 말을 몇 사람에게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길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잡고 걱정 말라고 당부하는 꿈을 꿀 정도였으니까요, 근데 웃긴 건, 그 어느 누구도 저에게 이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저인데도 말이죠. 가해자 취급만 당했어요, 물론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저 잘못 했어요,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딱 까놓고 말해서, 저만 좋자고 프로젝트 진행시킨 겁니까! 다 같이 잘되자고 한 일인데, 일이 틀어지고 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로 돌변하더군요, 같이 진행한 동료들까지도 말이죠,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두정: 다 필요 없습니다. 신흥: 다 필요 없어요. 신내: (등장)꽃이 필요할 거예요, 그쵸? 신흥: 그래서 준비한 게 있습니다. 두정: 전……,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입니다. 신흥: (약병을 꺼낸다)저만 없어지면 됩니다. 두정: 제가 없어지면 모두들 걱정하는 척하다가 금세 잊어버릴 겁니다. 다리병신 하나쯤 없어졌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신내: 아니야, 그건 아니야.(두정 나간다.) 여자가 먼저 꽃을 주는 건 좀 그렇겠죠? 신흥: (병뚜껑이 열리지 않는다.) 이게 왜 이래. 신내: 어떡하지? 신흥: 어떡하지? 신내: 오빠가 와주긴 할까요? 신흥: 깨버릴까? 신내: 용기내서 말하긴 했는데 대답을 못 들었거든요 신흥: 용기가 깨질 때 유리 파편이 섞이면 먹기 힘들 텐데.(열심히 뚜껑을 돌린다.) 신내: 다시 한 번 말해 볼까요? 이상한 애로 보이면 어쩌죠?(사이) 안 되겠어요. 신흥: 안 되겠어. 수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신내: 무슨 수를 써야지……. 명일, 나가는 신흥과 교차되며 들어온다. 신내: 아하! 다시 말하기는 그러니까, 편지가 좋겠어요. 그렇죠? 좋은 생각이죠? 마지막 시합에 오빠가 와주면 더 힘내서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쓰는 거예요. 역시 솔직한 게 좋겠죠? 그래, 그래야겠어요. 명일: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신내: 편지 명일: 편지 얘기는 아직 안 하지 않았나요? 신내: 우선 펜하고 종이가 필요하겠죠? 명일: 적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냥 듣기만 하시면 안 될까요?(신내,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신내, 나간다.) 그럼 얘기가 나왔으니 편지 얘기를 할게요.(잠시 머뭇거리다) 사귀기로 한 날부터,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연애편지를 쓴 건 아니고요, 일기 쓰듯이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나 써서 메일로 보냈어요. 하루도 빼먹지 않았어요, 단 하루도.(웃음)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어느날 술을 잔뜩 마셔서 떡이 된 적이 있었는데요,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차 싶은 거예요, 하루도 빼먹지 않겠다고 약속했었거든요, 늦었지만 변명이라도 해볼 양으로 부랴부랴 컴퓨터 앞에 앉았죠, 그리고 메일을 쓰려고 로그인을 했는데 수신 확인 창이 뜨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 하고 봤더니, 글쎄 제가 전날 밤에 메일을 보냈더라고요, 무슨 말을 썼는지 궁금해서 메일을 열어 봤는데(피식거린다.) 그게, 영어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고 그런 거 있잖아요.fhufhㅈ뎌???ㄷew 이런 거 (웃는다.) 더 웃긴 건, 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fhi롤fwqo어ㅈㅇ……. 명일, 말을 잊지 못하고 정신없이 웃는다. 무대 뒤에서 두정과 신흥의 절규가 들려온다. 명일: (무안해 하며)죄송합니다. 신흥, 두정 서로 반대편에서 등장 신흥, 두정: 이럴 순 없어 두정: 병원 정문도 못가서 잡혀버리다니. 신흥: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신흥, 두정: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내가 아무리 이런 꼴이 됐어도 두정: 병원문턱 하나 신흥: 병뚜껑 하나 신흥, 두정: 내 맘대로 두정: 넘지, 신흥: 열지-못하다니, 왜 하필 이런 일이 나한테 닥친 거야, 왜 하필이면 나냐구, 내가 뭘 잘못했게! 내가 바라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어.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명일: 다시 시작하죠. 두정: 그만하자, 그만해,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내 꼴만 더 우스워지지. 두정, 신흥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신흥: (병을 내밀며) 저……, 이것 좀. 명일: 네? 두정: 뭘 봐! 휠체어 탄 사람 처음 봐! 명일: 네. 신흥: 죄송합니다. 이것 좀 열어 주세요, 부탁 좀 드릴게요.(병을 건넨다.) 두정: 씨발.(술병을 꺼내 마개를 따려한다.) 이건 왜 이렇게 안 열려 신흥: 잘 안 열리죠?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명일: 무리라뇨, 전 괜찮아요.(사이) 알겠습니다. 내일 오면 되는 거죠? 같은 시간에 두정: (술병을 집어던진다) 젠장, 젠장, 젠장! 신흥: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사이) 안 열리면 할 수 없죠 뭐(병을 받는다) 감사합니다. 명일: 안녕히 계세요. 아련한 음악 다시 흐른다. 명일, 천천히 무대를 돌고. 신흥 뚜껑을 열기 위해 애쓰며 퇴장, 두정 지친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퇴장, 신내 편지를 들고 등장, 음악이 끝나면 명일과 신내 각자 자리를 잡는다. 신내: 편지 다 썼어요, 들어 볼래요?(편지를 꺼내 읽는다.) 오빠 명일: 연수야, 야! 신연수 신내: 잘 지내고 계세요? 명일: 난 잘 지내고 있어, 너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신내: 전 무지무지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며칠 전에 오빠에게 했던 말 기억나세요? 명일: 기억난다. 너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신내: 죄송해요, 갑작스럽게 말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쳐 버려서, 놀라셨죠? 명일: 아니야. 네가 미안할 건 없어, 붙잡아 주지 못한 내가 미안하지. 신내: 그래서 말인데요. 오빠가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제 얘기를 못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편지를 써요. 저, 내일모레 있을 시, 도 대항 육상 대회에 시 대표로 나가게 됐어요, 아마도 제 인생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 같아요, 아빠가 육상을 못하게 하시거든요. 마지막 경기를 오빠가 꼭 보러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힘이 불끈 불끈 날거 같아요 어쩌면 한국 신기록을 세울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아빠도 더는 반대 못하시겠죠.-제발 그렇게 됐으면-, 자라나는 한국 육상 꿈나무의 앞길을 열어 주세요, 네 오빠! 우리가 대기하는 곳이 3번 게이트 쪽이거든요, 그쪽 스탠드 앞쪽에 계시면 제가 오빠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꼭 와주셔야 해요, 오빠가 오지 않으면 저는 실망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꼴찌를 할지도 몰라요, 꼭 와야해요, 꼭 꼭 꼭. 명일: 가고 싶어, 그곳에…….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 들려온다, 신내 재빨리 편지를 감춘다. 명일: 저 소리 들려? 우는 소리가 괴상하니까 분명 생긴 것도 이상한 새일 거라고, 확인해 보고 싶다고 몇 시간이나 헤매고 다녔었잖아. 결국 확인도 못해보고…….(목이 멘다.) 두정, 훈련복 차림으로 호루라기를 불며 걸어서 등장. 두정: (버럭)지금 뭐하는 거야! 정신이 있어 없어!(신내 얼른 뛰어 나간다.) 그런 정신 상태로 뭘 하겠다는 거야, 응!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냐? 정말 실망이다. 네놈만은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 같은 녀석은 에베레스트를 입에 담을 자격도 없어! 명일: 미안, 그때 널 잡았어야만 했는데. 두정: 에베레스트는 고결한 자에게만 허락된 곳이다, 약해 빠지고 결점투성이인 인간에게는 절대로 그 하얀 살결을 허락하지 않아! 명일: 그렇지 않아, 다 내 탓이야. 두정: 그깟 집안일 때문에 술에 절어 사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 네가 말했던 꿈이라는 게 고작 이런 거였어? (사이) 그래, 나 이해 못한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 같지? 얼빠진 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어떤 인간인 줄 알아? 바로 너 같이 환경 탓, 상황 탓 하는 것들이야.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뚫고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야. 별것도 아닌 일에 주저앉아 버리는 너 같은 놈은 필요없어!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무슨 염치로 훈련장에 나타난 거야, 나타나길. 다른 팀원들이 너 보면 사기 떨어지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꺼져라,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명일: 제발 나타나줘, 한번 만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내 앞에 나타나줘. 암전. 빛 속에 홀로 있는 신흥 신흥: (반쯤 줄어든 약병을 들고 허탈하게 웃으며)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겨우겨우 열어가지고 스무알을 넘게 먹었는데……, 뭐? 고통 없이 갈 수 있다고? 나쁜 새끼들.(꺽꺽댄다.) 이딴 걸 20만원씩이나 주고 산 내가 미친놈이지.(전화 벨이 울린다, 병을 내려놓고 전화를 확인하고는 배터리를 빼버린다.) 미안해 여보. 날 용서하지 마.(사이) 한심하죠? 저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습니다. 하기야 태어날 때부터 한심한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다보니까,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한심해지는 거지.(사이) 돌아가신 저희 아부지께서 술만 드시면 어린 저를 붙잡고 늘상 하시던 얘기가 생각나네요. 두정: (빛 속에서 등장)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사라진다) 신흥: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알겠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아부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넌 어른이 되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동물이 바로 어른이란 동물이다.” 백번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사이) 그나저나 이제 어떡해야 하죠? 수습할 수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고, 빌어먹을 죽지도 못하고, 어떡해야 하죠? 신내: (빛 속에서 등장) 그럴 땐 초콜릿을 먹으면 돼요, 그것도 아주 진한 다크 초콜릿, 아무리 우울해도 한두 조각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한두 번 혼난 것도 아니고 뭐. 괜찮아요. 초콜릿 하나면 땡이에요.(사라진다.) 신흥: 그 생각도 안해본 건 아닙니다. 근데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예? 그건 너무 고통스럽지 않을까요? 제가 아픈건 딱 질색이라. 명일: (목소리) 연수야, 연수야 신흥: 쉿! 지금 누가 제 이름 부르지 않았나요? 설마 놈들이 여기까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제발 좀 도와주세요,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명일: (목소리)아! 꿈이었구나. 신흥: 윽!(배를 움켜쥔다.) 아 배야, 갑자기 왜 이러지? 뭐 먹은 것도 없는데. 화장실, 화장실……, 크 아퍼, 먹은 거라곤 이것뿐인데,(무언가 떠올라.) 약! 이 약! 개새끼들.(배를 부여잡고 달려 나간다.) 빛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약병. 빛이 점점 번져 공간을 환하게 만든다. 밝아지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신내. 신내: 이 시간이면 항상 이곳을 지나가는데 (두정 등장) 어! 태령 오빠! 두정: (신내의 맞은편에 앉는다.) 왜 불러낸 거야? 신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드릴 게 있어요. 두정: 뭔데 신내: (편지를 건네며) 이거 두정: (받으며) 이게 뭔데? 신내: 나중에 읽어 보세요(얼굴이 붉어진다.) 두정: (읽은 후) 각서……, 야! 지금 너 장난하냐? 신내: 아니에요, 안 빨개요 두정: 이딴 종이 쪼가리를 어떻게 믿어? 신흥 한손에 휴지를 들고 등장, 처절한 소리를 지르며 부리나케 테이블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신내: 전엔 죄송했어요, 제 말만 하고 멋대로 가버려서. 두정: 죄송하다면 다야? 신내: 예, 그치만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요. 두정: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신내: 오빠. 두정: 이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더 이상 난 네 대장이 아니다 신내: 호, 혹시……, 여, 여자친구……, 있으세요. 두정: (단호하게) 없어, 추호도. 난 한번 결정한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꾸지 않아. 마음 같아서는 널 죽도록 패주고 싶지만 옛정이 있어 참는다. 신내: 다행이다. 제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두정: 더 할 말 없으면 나 간다. 훈련중이었거든, 네놈이 그렇게 하찮게 여겼던 그 훈련 말이다. 신내: 그러세요, 예, 가보세요, 편지 꼭 읽어 보시고요, 두정: 두 번 다시 널 만나는 일이 없길 바란다.(각서를 구겨 테이블에 던진다.) 신내: 저도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신내 꾸벅 인사하고는 떠나는 오빠(두정)의 뒷모습을 눈으로 는다. 두정 나간다. 신내는 오빠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뜬다. 신흥 허겁지겁 등장, 숨을 곳을 찾는다. 급하게 숨을 곳을 찾고는 몸을 숨긴다. 신흥: (숨을 몰아쉬며) 하필이면 화장실에서 마주칠 건 뭐야, 그나마 나오는 길에 마주쳤기에 망정이지 들어가는 길에 마주치기라도 했어봐. 아유아유 죽겠네.(두정이 버렸던 병을 발견) 뭐야? 새거잖아.(너무나 쉽게 병을 열고는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뚜껑을 닫아 제자리에 놓는다.) 햐 시원하다.(허탈하게 웃으며) 안좋은 일만 생기는 것 만은 아니구나.(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제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아부지 말처럼 어른이 돼버려서 이렇게 된 걸까요? 가장 더럽고……, 후후후.(사이) 네? 어른이 되기 전에요? 글쎄요, 어른이 되기 전이라……. 그러고 보니 제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그땐 뭐, 다들 그렇겠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랬는데, 샐러리맨 따위가 될 거라고는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 때의 저한테 미안한 생각까지 드네요,(사이) 그럼요, 뭐였냐면요……, 막상 말하려니까 쑥스럽네요, 웃지 마세요, 가수예요, 가수 (웃음) 웃기죠? 가수를 꿈꾸던 청년 도망자 되다! (웃음 소리속에 점점 슬픔이 담긴다.) 명일: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 꿈이었어, 꿈. 연수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연수야.(컴퓨터를 켠다, 윈도 시작음악) 언제까지 너한테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언제 와서 이 편지 읽어 줄래,(창 뜨는 소리, 몹시 놀란다.) 어, 어! 신흥: 아, 아! (배를 움켜쥐고) 또야? (뛰어 나간다.) 명일: (흥분) 틀림없어요. 그녀가 읽은 거예요. 그녀가 읽은 거라고요! 연수는 살아 있어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메일을 읽어요, 안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게 아니었던 거예요,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짧은 사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신흥: (등장) 지독한 놈들, 왜 화장실 앞에서 죽치고 있는 거야, 아, 미치겠네.(반대쪽으로 달려 나간다.) 명일: 봤죠, 네 봤어요, 근데 제가 본건 사고 나서 실려 가는 것까지였어요, 죽은 연수를 본 건 아니잖아요. 장례식요? 어……, 그건……, 아 그래그래, 필요했던 거예요 장례식이, 연수는 큰 사고를 당했어요, 죽지는 않았겠지만 몸이 성치는 않을 거예요,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영화나 소설 보면 죽은 걸로 하고 숨어서 지내는 거, 그래 그거야, 그거.(짧은 사이) 비약요? 그건 선생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겠어요, 연수가 살아있어요! 제 우울증 따위는 한방에 끝났다고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수를 데려가지 않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모습이라도 좋아요 살아 있기만 하다면요, 신흥: (퀭한 얼굴로 등장) 살았다……. 두정: (목소리) 야! 야! 신흥: (소리 나는 쪽을 보며) 젠장! (도망친다.)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낮은 목소리로) 거기 서! 뭐 나한테 속이는 거 있지? 틀림없어,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뭐야? 사실대로 말해봐. 뭐야 대체? 명일: 예? 두정: 뭐라고 했어 지금? 다시 한 번 말해봐. 명일: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으시겠어요, 지금은 연수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짧은 사이) 선생님! 왜 자꾸 그러세요? 선생님은 연수가 살아 있는 게 싫으세요? 비밀 번호를 아는 사람은 연수밖에 없어요, 그런 건 철저한 애였어요, 수신확인이 됐다는 건 연수가 열어 봤단 소리예요. 다른 가능성은 없어요. 두정: 그래 알았어, 너희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이해한다. 알았어, 알았어,(짧은 침묵) 잘 가라, 참 그리고 앞으론 문병 같은 거 오지마라, 훈련에만 전념해, 나 들어간다. 명일: 안녕히 계세요. 연수를 찾아봐야겠어요.(나간다.) 두정: (가다 멈춰서) 개자식들! 신흥: (온 몸엔 상처, 옷은 쥐어뜯겨 엉망인 채로 등장) 개새끼들! 두정: 의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그 자식을 끌어들여? 신흥: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이렇게 패냐 두정: 씨발, 씨발 씨발,(거친 웃음) 신흥: 아, 진짜 아프다, 돈 몇 푼에 아주 사람을 죽이려고 환장을 했구먼, 도망치지 않았으면 골로 갈 뻔했네.(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씨발 새끼들, 아부지, 여보, 나 아퍼.(울음소리 점점 커진다.) 두정: 그만해, 그만해!(울먹인다.) 두정과 신흥의 울음소리가 무대를 가득 메운다. 신내 허겁지겁 들어온다. 신내: 뭐하는 거예요 대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얼른 일어나요 (두정, 신흥 울음을 그친다.) 자 초콜릿 (두정과 신흥 앞에다 놓는다.) 이거 먹으면 힘나거든요, 씹어 먹지 말고 천천히 녹여 먹어요.(사이) 자 가요, 가서 멋지게 1등하고 돌아오면 되잖아요. 그럼 분명 코치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얼른 일어나세요. 시간 다 됐어요. 우리 몸도 풀겸, 경기장까지 뛰어 가요! 오케이.(나간다.) 두정, 신흥 꾸역꾸역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신흥은 두정의 자리로, 두정은 신흥의 자리로 간다. 둘은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초콜릿을 발견하고 집어든다. 신흥: 아깐 음료수 이번엔 초콜릿? 두정, 신흥: (하늘을 올려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초콜릿을 본다.) 뭐야? 둘,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는다. 마법같은 음악 잠깐. 알 수 없는 미소가 둘의 얼굴에 감돈다. 두정, 신흥: 그래, 힘내자, 신흥: 약을 스무 알씩이나 먹고, 그렇게 맞았는데도 안 죽었는대. 두정: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던 거야, 발버둥 쳐 봤자지. 두정, 신흥: 뭔가 길이 있을 거야. 두정: 그렇지? 신흥: 그렇지. 둘, 서로 반대편으로 퇴장, 신내 다른 곳으로 들어온다. 신내: 자! 우리 파이팅하는 거예요! 코치님도 병원에서 틀림없이 우릴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몸을 풀며 두리번거린다.) 아직 안 왔어요, 조금 있으면 시작인데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죠? (관중석으로 손을 흔들며 웃는다.) 엄마, 아빠 여기, 여기.(사이) 차가 막히나?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래, 그래. 오빤 틀림없이 올 거야. 자! 힘내자 연신내. 멋지게 달려서 일등 하는거야, 알았지? (더욱 열심히 몸을 푼다.) 명일 등장. 신내: 어! 오빠! (명일에게) 여기에요, 여기.(환하게 웃으며 인사) 오빠가 왔어요, 오빠가 왔다고요. 좋았어, 아자아자! 명일: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친구들은 모를 테고,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하나? 그래, 일단 아이피 추적부터 해보자, 좋았어, 아자아자! (컴퓨터 앞에 앉는다.) 소리: 여자 800미터 예선전 참가자들은 본부석 쪽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신내: (오빠 쪽을 향해) 꼭 일등 할게요! (나간다.) 두정 등장, 휠체어를 세우고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 재활운동을 시작한다. 각자의 일에 열심인 두 사람. 명일: 안 되네,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두정: 헛 둘, 헛 둘. 한참을 하다 지친 둘. 명일: 아,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야? 두정: (숨을 몰아쉬며) 두고 봐 꼭 해내고 말 테니까. 기다려라 에베레스트, 내 네놈을 꼭 밟아주고 말 테다. 소리: 딩동댕동.601호 특실 환자분 면회객이 와 있습니다. 속히 병실로 돌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명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어디서 공사하나?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집중을. 두정: 면회? 누구지? (휠체어에 오른 후 퇴장.) 명일: 도저히 안되겠다. 누구 컴퓨터 잘하는 사람 없나? 아 그렇지! (휴대전화를 꺼내 건다.) 여보세요? 문정이냐? 응, 나 명일인데·…….(통화하며 나간다.) 나가는 명일과 교차하며 신내 등장. 긴장을 풀기 위해 몸을 턴다. 소리: 여자 800미터 세번째 경기가 시작되겠습니다. 선수들은 입장해주시길 바랍니다. 신내 앞으로 나와 몸을 푼 다음 놓여 있는 병을 들고 마시고는 (두정이 버렸던 병) 출발선에 선다. 소리: 차렷, 준비. 소리2: 거기 서 개새끼야! 소리: (총소리) 탕 출발과 동시에 터지는 응원과 환호성 속에서. 슬로 모션으로 출발하는 신내.“안 서면 죽어!” 소리를 등지고 신흥 슬로로 뛰면서 등장. 신내와 신흥 같은 방향으로 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뛰는 두 사람. 신흥이 점점 신내를 따라잡아 이윽고 나란히 뛰게 된다. 신흥이 신내를 앞서가려는 찰나. 신흥의 발이 꼬여 중심을 잃고, 그런 신흥에 걸려, 비명을 지르고 넘어지는 신내. 신흥은 얼른 추스르고 멀리 달아난다. 엎어진 채 그대로 있는 신내에게 빛이 모아진다. 빛은 점점 작아진다. 암전. 다시 서서히 밝아지면 신내의 자리에 서서 홀로 빛을 받고 있는 신흥 신흥: 하하하, 꼴좋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한번은 잡혀도 두 번은 안 잡힌다! 이래 봬도 왕년에 한달리기 한 사람이야 왜 그러셔.(사이) 그나저나 이제 뭘 어떡해야 하지? 집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길거리에서 전전긍긍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약만 안 샀더라도 좀 더 나았을 텐데 (뒤적거려 지갑을 꺼낸다.) 육 만원. 육 만원이라, 이걸 갖고 뭐해……, 인생 허무하다, 나이 서른여덟에 가족 버리고 수중에 딸랑 육 만원 들고서 고민하는 꼴이라니……, 아니다, 아니다. 돈 한푼 없는 것 보다 낫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육 만원으로 새출발하는 거야! 까짓 인생 대역전이 별거야, 나라고 뭐 육 만원의 신화 만들지 말라는 법 있어? (절규한다.) 젠장, 근데 뭘 하냐구! 세 개의 빛이 동시에 들어온다. 빛 속에 나란히 있는 명일, 신내, 두정, 신흥. 명일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고, 신내, 입 주변이 피에로처럼 초콜릿이 범벅인 채로 무지막지 멍하게 앉아 있다. 두정은 한 곳을 응시한 채 얼어있다. 지하철 환승 멜로디가 경쾌하게 울린다. 소리: 이번 역은 전동차를 갈아타실 수 있는 환승역입니다. 다른 전동차를 이용하실 손님께서는 빠뜨리신 물건이 없나 잘 살펴보시고 다른 열차로 갈아타시길 바랍니다. 넷. 각자의 자리를 떠나 각기 다른 사람이 있던 자리로 이동한다. 두정과 신흥 쪽의 빛이 어두워진다. 명일: 틀림없다니까요, 증거요?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돼요, 제가 보낸 메일이 수신 확인이 되어 있었다고요, 왜 그게 증거가 안 되는 건데요, 비밀번호는 연수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니까요.(사이) 그러니까 한번만 조사해달라는 거예요, 저기요, 무슨 얘긴 줄 알겠는데요, 사망신고가 됐다고 해서 꼭 죽었다고 볼 수는 없잖아요.(사이) 말이면 답니까! 제가 미친놈으로 보입니까? 당신들 시민의 요청을 거절하는거 그거 직무 유기야 알아? 민중의 지팡이라며? 친절봉사라며! 이따위로 일할 거야! (사이) 제발요,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조사해 주세요. 연수는 살아 있어요, 죽은 사람 살리는 셈치고 아니, 정말로 죽은 사람 살릴 수 있는 일이니까 한번만 도와주세요? 네? 한번만요. 신내: 안 돼! 안 돼! 아무리 초콜릿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아,(흐느낀다.) 마지막 시합이었는데, 다시는 달릴 수 없는데……, 오빠가 보고 있었어,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끝이야, 전부 끝장나버렸어. 명일: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신내: 코치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입원하실 정도로 열심이셨는데. 명일: 이젠 뭘 어떡해야 하지? 신내: 이젠 뭘 어떡해야 하지? 모두들 나한테 손가락질할 거야, 부모님도 친구들도 오빠도 모두들 한심하게 생각할 거야. 내가 전부 망쳐버린 거야. 어떡해. 멀리서 신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한 손에 낡은 기타를 들고 등장하는 신흥 미친 듯 웃으며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신흥: 하하하, 이거야 이거! (기타를 튜닝하며 흥얼댄다.) “나는야 돈 한푼 없이 기는 도망자라네 하지만 나에겐 낡은 기타와 노래가 있어 둥기둥가.”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육 만원으로 어떻게 새 삶을 시작할까 고민해 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더군요, 이럴 때 의지할 마땅한 친구도 없는 내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갈 곳은 없고 배는 고프고, 그러고 있자니 일단 배라도 채우고 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눈에 띄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오뎅을 집어 들었습니다. 터진 입술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는데,(웃음) 오백원짜리 오뎅이 그렇게 맛있는 거예요, 사실 길거리에 서서 쩝쩝거리며 먹는 사람들을 보면 손가락질 했었는데……, 아! 이래서들 먹는 거구나, 이해가 되더라고요. 막 세 개째 꼬치를 집어드는데 낯익은 노래가 들려왔어요, 포장마차 앞에 있는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노래였어요, 렛잇비였는데, 너무 유명해서 촌스럽게까지 느껴졌던 그 노래가 전혀 다르게 들리는 거예요, 길거리 오뎅과 렛잇비, 저한테는 그냥 그저그런 뻔한 것들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뭐 암튼, 오뎅을 질겅거리며 노래를 들었어요. 렛잇비가 그대로 두라는 뜻이라면서요? 어렸을 때는 왜 그대로 두라는 건지 이해를 못했었는데, 그 순간에 아! 그런 거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그래서 그길로 곧장 중고 악기상으로 달려가 이놈을 장만했습니다. 지금 제 수중에 있는 거라곤 이 녀석과 단돈 삼천원이 전부입니다. 기타와 삼천원이라 뭔가 고독하기도 하고 낭만적이지 않나요? 그래서 결정했습니다.20년 만에 만들 노래의 제목.“기타와 삼천 원” 하하하, 놀라셨죠? 저도 놀랐습니다 이런 완벽한 제목을 만들어 내다니, 제목부터 뭔가 확 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명일: 뭐라고요?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세요. 신흥: 기타와 삼천원 명일: 설마……. 신내, 신흥 쪽을 바라보다 ‘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 뛰쳐나간다. 신흥: (신내가 나간 방향에 대고) 놀라시긴……, 노래가 완성되면 여러분은 지금보다 열배는 더 놀라실 겁니다. 명일: 잘 알겠습니다.(사이) 흥신소요?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일 때문에 찾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둘러 이사를 간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다는 거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흥: 일단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만들었던 노래로 시작할 겁니다. 장소는 뭐, 찾아봐야죠, 설마 서울 하늘아래 제가 노래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가숩니다. 불행한 샐러리맨이 아니라 어릴적 꿈을 이룬 멋진 사람이 된 거죠. 하하하. 자! 그럼 저를 기다리는 무대를 찾으러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흥, 큰 소리로 웃으며 퇴장, 명일 쪽지와 주소들을 확인하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두정: (놀람을 감추며) 웬일이냐? 명일: 여기가 16-28번지 맞죠? 두정: 용케도 올 생각을 했구나. 명일: (떨리는 목소리로) 연수네 집 맞죠? 두정: 다 알고 온 거 아니야? 그런 건 왜 물어. 명일: 저는 연수 남자친구 명일이라고 합니다. 두정: 팀을 맡게 됐다고, 축하한다. 명일: 힘드시겠지만 저도 어렵게 마음먹고 온 것이니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두정: 너하고 할 얘기 없으니까 그만 가봐. 명일: 그 심정 이해합니다. 하지만……. 두정: 사실대로 말하지, 네 얼굴 두번 다시 안 봤으면 좋겠다. 명일: 잘 알겠습니다. 오늘 이후 찾아뵙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신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두정: 꼴 좋다고 웃고 싶겠지, 웃고 싶으면 웃어. 명일: 연수……, 연수 살아있죠? 네? 두정: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명일: 사실대로 얘기해 주십시오. 사고 이후에도 매일같이 연수에게 메일을 보냈었는데 며칠전 그 메일이 모두 수신 확인이 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전에 살던 집에서 이사 하실 때 도망치듯 떠났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수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두정: 상상력이 풍부하구먼. 그따위 소리는 집어치워, 보시다시피 난 글러먹었어. 명일: 그렇다면 제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연수 찾는 걸 포기하지 못합니다. 두정: 내가 그런 소리를 했던가? 그래 그런 말을 했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 상황 탓, 환경 탓 하는 게 아니야, 현실이 그렇다는 거지. 네 놈이 그런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더 이상 널 마주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 조심해서 가라.(나가려 한다.) 명일: 거짓말……, 거짓말이죠? 그럴 리 없어, 저를 포기하게 하려고 하는 얘기죠? 그렇죠? 두정: (멈춰서서 혼잣말로) 고결한 자만이 에베레스트에 오를 수 있다·……, 고결한 자라…….(쓴웃음) 에베레스트.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나간다.) 명일: (절망적으로) 잘 알겠습니다, 폐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나가려다 멈춰서서) 연수야……, 너 정말 없는 거야? 명일이 나가자마자, 박수 소리와 함께 현란한 조명이 무대를 훑는다. 무대 중앙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선글라스를 쓴 신흥이 기타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서 있다. 신흥: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에 들려드릴 곡은 지금의 저를 있게한 바로 그 노래입니다.20년 전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가수의 꿈을 가득 품고 며칠 밤을 새우며 코피를 쏟아가면서 만든 노래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좋은 노래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더해간다는 얘기가 있죠, 그게 바로 이 곡을 두고 한 얘기란 걸 요즘 들어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자 그럼 눈을 감고 제 목소리에 취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빌어먹을 인생.” 신흥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단조롭고 유치한 느낌의 멜로디. 신흥: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뭔지 몰라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산다는 건 무엇일까 산다는 건 무엇일까 각각의 빛을 받으며 세 사람 나타난다. 약통을 들고 있는 명일, 휠체어 위의 두정, 경기 중에 쓰러져 있는 신내. 신흥: 그것이 뭔지 몰라도 신내: 이건 아니야, 명일, 두정: 이건 아니야 신흥: 목적도 모른 채 공부를 하고, 의지와 상관없이 순위가 매겨지고 누구의 인생인데, 내 삶의 주인은 대체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모두: 이건 아니야. 간주. 두정 굳은 표정으로 한곳만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있다. 명일: 전부 제 착각이었습니다. 여동생이 혹시나 하고 비밀번호를 쳤는데 열렸대요, 계정을 없앤다고 그러더군요, 그렇다고 앞으로는 메일 보내지 말라고……, 근데 비밀번호가 뭐였는지 아세요? ‘엠, 와이, 유, 엔, 지, 아이, 엘’이었대요. 명일, 제 이름이었어요.(허탈하게 웃는다.) 연수야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약병을 바라본다.) 신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어떡하지, 일어날 수가 없어, 오빠, 엄마, 아빠, 코치님……. 일어나 달려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모두들 저만 바라보고 있겠죠, 고개를 들 수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 신흥: 이른 아침, 아니 그건 해도 안 뜬 새벽이야. 흔들어 깨우며 하시는 말씀, 얼른 일어나, 얼른 일어나. 늦은 밤에, 아니 그건 달도 지는 새벽이야 지친 나에게 하시는 말씀, 공부 하다 자, 공부 하다 자, 조금만 더 자고 싶어요 제발. 잠도 못 자가며 난 무얼 하는 걸까. 누구의 인생인데, 내 삶의 주인은 대체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간주. 명일 결심한 듯 약을 꺼내 털어 넣는다. 신내는 여전히 그대로 엎드린 채다. 등이 들썩거린다. 두정, 휠체어에 브레이크를 걸고 수건을 감은 숟가락을 꺼내 입에 문다. 명일 쓰러진다. 두정, 있는 힘껏 일어나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온힘을 다해 일어나려 한다. 신흥: 귓가에 맴도는 어머니 말씀. 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일어나,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신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일어나려고 애쓰는 두정 신흥: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명일 갑자기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간다. 명일: 아 배야! 눈물을 흘리며 일어난 신내, 이를 앙다물고 슬로로 뛰기 시작한다, 두정 간신히 몸을 지탱해 휠체어에 오른다. 신흥을 제외한 나머지 빛이 사라진다. 신흥: 인생이란 그런 거야 이유는 없어, 모두들 다 그렇게 살아 일어나, 일어나. 얼른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가 빌어먹을! 일어나, 어서 일어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기쁨에 차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표정이 굳는다.) 여, 여보……. 무대 밝아진다. 신흥 머뭇거리는 사이 신내 천천히 등장한다. 신내: 오빠 신흥: 여, 여보 신내: 어쩐 일이세요? 신흥: 당신이 어떻게 여길……. 신내: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할말 있었는데. 신흥: 그러니까……, 그게 신내: 아무 말 마세요, 부탁이에요, 제가 얘기할 테니 듣기만 하세요. 신흥: 미안해, 정말 미안해. 신내: 사실 저 오빠 좋아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아니에요. 신흥: 그게 무슨 소리야? 신내: 말 그대로예요, 이젠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신흥: 여보, 그러지 마, 제발, 응? 내가 잘못했어, 내가 죽일 놈이야. 신내: 고마워요, 진작 얘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저 꼴찌해서 이런 거 아니에요. 정말 오빠에 대한 마음이 식어 버려서 그런 거예요. 신흥: 내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죽는다는 소리는 말아줘, 부탁이야. 신내: 그러지 마세요, 오빠답지 않아요. 신흥: 난 이미 끝난 놈이지만, 당신하고 우리 창신이 수진이는 아니잖아. 남편, 아버지 잘못 만난 죄밖에 없잖아, 여보, 그러니까 그런 소리 두번 다시 하지마. 신내: 괜찮아요? (사이) 저요? 보세요 전 아무렇지 않아요. 신흥: 많이 생각해 봤는데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 신내: 그래요, 그렇게 해요. 신흥: 이혼하면 놈들도 더는 못 괴롭힐 거야, 자리잡히는 대로 연락할게, 당분간은 어렵겠지만 생활비랑 애들 교육비는 최대한 노력해 볼게. 어떻게든 아빠 노릇은 하도록 할게. 미안해 여보. 신내: 그럼 저 이만 가볼게요, 오빠도 조심해서 가세요. 안녕……, 안녕.(자리를 옮긴다.) 신흥: 놈들이 위치추적을 해서 전화기 못쓰니까, 내가 연락할게. 신내: 오빠도 제가 좋대요, 우습죠? 기껏 마음 정리했는데 고백을 받다니……, 조금만 빨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괜찮아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사이) 저 끝까지 달렸어요,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어요,“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서 레이스를 마쳐!” 목소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 이후엔 아무 생각도 안나요, 어떻게 결승점을 통과 했는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 왔는지……. 정신이 들고 보니까 제 방에 덩그러니 앉아 초콜릿을 잔뜩 쌓아놓고 먹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거울을 봤는데 눈은 너무 울어서 퉁퉁 부어 있고, 입 주변은 초콜릿이 번져서 피에로처럼 되어 있더라고요, 순간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깔깔대고 웃어버렸어요, 한참을 그렇게 웃고 있는데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 왔어요,“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서 레이스를 마쳐!” 눈을 감고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들어 봤어요, 자세히 들어 보니까 제 목소리더라고요,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 보면 처음엔 자기 목소린 줄 모르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한 거였어요, 조금 익숙해지니까 알겠더라고요, 제 목소리인지. 신흥: 그랬어? 그거 다행이네. 알았어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고.(사이) 내 걱정은 하지마, 당신하고 애들이 힘들지 나야 뭐……. 그만 가봐, 수일내로 전화할게, 조심해서 들어가고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든다.) 여보! (사이) 아, 아니야. 애들한테 안부 전해줘.(사이. 혼잣말로) 잘 살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평소에 안해 버릇해서 힘드네. 신내: 근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기는 이미 끝나버렸는데, 레이스를 마치라니,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게 무슨 뜻일까 하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신흥: 자! 이젠 나의 무대를 찾아가 볼까,(기타에게) 가자 로시난테, 갈 길이 멀다. 서두르지 않으면 날이 저문다고.(나간다.) 신내: 800미터 경기는 트랙을 2바퀴 도는 거예요, 작전도 중요하긴 하지만 페이스 조절과 순간의 판단력이 그 어떤 종목보다 중요해요, 처음부터 너무 빨리 달려도 안 되고 페이스 조절한다고 천천히 출발해도 안 되죠, 작전대로 달리다가도 상황에 따라 작전을 포기하고 감으로 스퍼트하는 경우도 많고요. 생각해 봤어요, 나는 지금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달려온 것보다 달려야 할 트랙이 더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알람이네요. 저 이제 그만 가봐야 해요,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나간다.) 텅 빈 무대. 멀리서 전동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로 들려온다. 소리는 멈추지 않고 무대를 가로지른 후 점점 멀어져 간다. 두정 훈련복 차림으로 빈 휠체어를 끌고 등장한다. 휠체어를 세우고 한두 걸음 떨어져 선다. 두정: (휠체어에 대고) 너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위로해 주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다. 잔인하게 들려도 할 수 없어. 다 네 잘못이야, 한 번 더 점검했어야지, 한 번 더 살폈어야지. 그 정신 상태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면 너 때문에 동료들 모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어, 너 이렇게 된 거, 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목숨과 다리를 바꿨다고 생각해, 어찌 보면 이렇게 된 거 너한테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본 게 아닌 인생 선배로서 하는 얘기니까 귀담아 듣는 게 좋아, 휠체어 생활도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괜히 재활한다고 힘 낭비하지 말고 그 다리에 적응하는 편이 나을 거다. 나같이 바른 말을 하는 선배를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라고. 이제 가봐야겠다, 돌아가서 합숙 준비를 해야 하거든, 들어가서 한 숨 자는 게 어때? (휠체어를 밀고 나간다.)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두정이 나간 반대편에서 피골이 상접한 명일이 다리 힘이 풀린 채로 등장 명일: 이렇게, 이렇게 죽는 건가……. 정말 특이한 약이야. 고통스럽냐고 물었을 때 왜 그런 웃음을 지었는지 이해가 돼.(힘없는 웃음) 왜 죽으려고 했는지, 죽기로 결심한 내가 원망스러워지다니……, 아픈 배를 감싸고 변기 위에 앉아 있자니 살려달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그러다 알게 됐어요, 연수를 잃었을 때보다 변기 위에서 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웃음이 나왔어요, 눈물은 줄줄 흐르고 웃음은 멈추지 않고, 아래도 멈추지 않고 (힘없는 웃음) 제가 연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는데, 배가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더 이상 아픈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요?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 명일: 저 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까요? (고개를 숙인다.) 서로 다른 곳에서 나오는 신흥, 신내, 휠체어 탄 두정. 각자 자리를 잡고 선다. 네 사람: 요 며칠 정말 힘들었어요. 세상에서 버려져, 혼자 어딘가에 버려진 것 같은 느낌,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나한테 달려든 것 같은 느낌,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진흙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죠. 두정, 신흥: 왜 하필 나야? 명일, 신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네 사람: 속으로 원망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 봤습니다. 근데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연한 얘기죠, 고민하고 소리 질러서 일이 해결 된다면 이 세상에 힘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신흥: (큰 목소리로) 가수가 되기로요! 두정, 명일: (바로 이어) 받아들이기로요 신내: (이어서) 다시 달리기로요. 네 사람: 많이 겁나고 솔직히 자신 없기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어나야죠, 신흥: (노래한다) 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 네 사람: 변하는 건 하나 없지만 그렇다고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두정: 저, 결국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휠체어를 뒤로 돌리자 자동차 번호판 모양의 판에 ‘에베레스트’라고 쓰여 있다.) 썰렁했나요? 지하철이 들어온다고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지하철이 다가오는 소리, 멈추는 소리, 문 여는 소리. 모두 한발씩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다시. 따사로운 봄볕, 아련한 음악. 그리고……. 명일,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신내, 힘찬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두정,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디론가 간다. 신흥, 기타를 정성껏 보듬으며 어디론가 간다, 다시 명일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신흥, 신내, 두정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네 사람. 모두들 잠시 망설이다. 각자 어딘가를 향해 이야기한다. 네 사람: (동시에) 저기……. 암전. 어둠 속에서 신흥의 목소리 신흥: (목소리) 드디어 완성했습니다.‘빌어먹을 인생’을 이을 평생의 역작.‘기타와 삼천원’ 조명을 받으며 멋지게 등장한 신흥. 노래한다. 신흥: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가수를 꿈꾸는 소년이 살았다네 매일 밤 꿈속에서 노래하던 소년은 매일이 너무나 행복했다네 그러나 어느 샌가 소년은 노래하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네 그렇게,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네. 서울 하늘 아래 어딘가 가수를 꿈꿨던 남자가 살고 있다네 꿈을 잊은 채로 살아가던 남자는 하루가 너무나 힘들었다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노래하던 꿈을 떠올렸다네 그렇게,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네 아, 가진 건 사랑스런 기타와 단 돈 삼천 원뿐이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네, 아, 가진 걸 모두 잃어 남은 것 하나 없어 불행하지만 나에겐 기타와 삼천원 있네,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세상에 내 것이 하나 없어도, 노래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네,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있어 너무 행복하다네. 너무 행복하다네. 박수 소리에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하던 신흥, 키스를 날리며 퇴장한다. 무대 한쪽에서 연수, 차분한 걸음으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태령, 꽃다발을 들고 환한 얼굴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약장수, 전화기를 들고 등장, 상대가 받지 않는지 계속 버튼을 눌러대다가 퇴장한다. 다시 연수가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약장수, 태령,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세사람. 연수: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약장수: 종로 5가입니다. 태령: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연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약장수: 주로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고객이죠. 혹시 필요하신가요? 태령: 네, 그녀를 사랑했거든요. 연수: 사랑했어요, 그래서 많이 미안했고요, 혼자 남겨두고 떠나서 약장수: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태령: 그녀는 떠났지만 전 아직 그녀를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연수: 이제 떠날 거예요, 명일씨를 놓아주려고요, 마음속에서 서서히 사라질 거예요. 약장수: 그 약을 먹게 되면 죽을 각오로 살게 되죠, 태령: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우선은 열심히 달리는 신내를 뒤에서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하고요 연수: 뒤에서 지켜본다는 거 그리 쉽지 많은 않더라고요, 많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약장수: 그것이 문제죠, 부작용이 너무 심해요, 설사가 장난 아니거든요,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하하하. 세 사람 모두 정지. 두정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온다. 무대 중앙에 휠체어를 놓고 나간다. 휠체어 홀로 빛을 받는다. 휠체어: 전 에베레스틉니다. 제 주인님이 붙여준 이름이에요, 전 어디를 가나 주인님과 함께 하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나 할까요.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주인님이 제게 이름을 붙여주고 난 뒤로 가끔이긴 하지만 웃는 모습을 보이시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제 이름이 좋습니다. 지하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휠체어: 지하철이 왔네요, 못다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죠, 저는 지금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거든요. 경쾌한 음악과 함께 암전. ■ 등장인물 명일(25세, 대학생) 신내(18세, 고등학생, 육상부) 두정(32세, 산악인) 신흥(38세, 샐러리맨)
  • [여의도in] 한나라 ‘정운찬 경계령’

    한나라당에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에 대한 경계령이 내려졌다. 정 전 총장이 최근 여론조사에서 급부상해 내년 대선에서 범여권의 후보로 선택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정 전 총장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28일 발표한 ‘정치분야 오피니언 리더 100인조사’에서 ‘누가 범여권 대선후보로 가장 적합한가.’라는 질문에 26%의 지지를 받아 고건 전 총리(23%)를 처음으로 앞섰다. 이를 의식한 듯 한나라당은 정 전 총장의 발언에 대해 비난 논평을 내는 등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유기준 대변인은 지난 27일 정 전 총장이 전날 재경 공주 향우회에서 ‘충청인이 나라의 중심’이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하더니 정치에 입문도 하기 전에 지역주의부터 배우는 것은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황우여 사무총장도 28일 “정 전 총장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대책마련도 세우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2006 희망 키우는 아이들] (9) 과학자 꿈 ‘祖孫가정’ 장현이

    [2006 희망 키우는 아이들] (9) 과학자 꿈 ‘祖孫가정’ 장현이

    “우주과학자가 되고 싶어요….” 부모의 가출로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장현(10·광주 K초등학교 3년)이는 “새해 떡국먹고 한 살 더 먹게 돼 너무 좋다.”면서 “하루 빨리 어른이 돼서 할머니를 편안히 모시고 싶다.”고 새해 소망을 밝혔다. 장현이는 한참 예민한 청소년기에 접어들었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때론 우주선을 타고 드넓은 창공을 나는 꿈을 꾼다.”는 장현이는 “빌 게이츠와 같은 유명한 컴퓨터 공학자나 우주선 설계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또 ‘꿈을 이루려면 어릴적부터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다. 여느 집 아이처럼 학원을 찾아다니거나 과외 선생님을 댈 형편도 아니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학과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정부 보조금 47만원으로 두 식구 생활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해 나가지만 그의 꿈은 하늘처럼 높다. 교과목 중 수학이 제일 흥미진진하다는 장현이는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분야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끌린단다.“세계에서 성능이 가장 뛰어난 우주선이나 컴퓨터를 만들고 싶다.” 장현이는 학교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엄마·아빠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여느 결손가정 자녀와 달리 심성도 올곧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린다. ●“논리적인 수학공부가 제일 좋아” 할머니 임모(68)씨는 아들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이혼하는 바람에 핏덩이나 다름없던 한 살배기 손자를 맡아 10년째 길렀지만 아들과 며느리로부터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장현이는 최근에야 꿈에도 그리던 부모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더 이상 상황을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한 할머니는 얼마 전에야 손자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할머니는 “그 얘기를 들은 장현이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을 봤을 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며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기 일을 척척 해내는 손자가 대견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정부 보조금 47만원으로 두 식구가 생계를 이어간다. 할머니는 “손자가 반듯하게 자라는 것을 볼 때까지만 살았으면 한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할머니 건강 걱정하는 대견스러운 손자 딱한 사연을 전해들은 학원에서 장현이의 수강료를 면제해 주자 “자존심이 유달리 강한 손자가 이를 알까봐 쉬쉬하고 있다.”고 할머니는 조심스러워했다. 장현이는 몸이 아픈 할머니를 배려하는 마음도 남다르다.“할머니가 약을 안 드셔도 건강해 질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한다.”며 “빨리 커서 할머니가 편히 쉬도록 해드리고 싶다.”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글 사진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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