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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첩보장교 대한제국에 오다/카르네프등 지음(화제의 책)

    ◎러 첩보장교 19세기 대한제국 여행기 19세기 말 대한제국을 여행하며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던 러시아의 육군대령등이 각각 쓴 여행기록 4편을 모았다.한국의 행정·사회체제를 비롯 지리·기후등 자연조건과 민중의 사는 모습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 당시 발생했던 일본인의 명성황후 시해,아관파천,동학혁명,갑오개혁등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보고들은 내용과 그에 따른 분석도 곁들였다.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세력경쟁을 하던 시대상황을 반영하듯 일본에 대한 민중의 혐오감을 강조하기도 했다. 기록자들이 군인·관리등 공직자였고 여행 목적이 정보수집에 있었던 만큼 기록이 자세하고 객관적이란 인상이다.사료적 가치와 함께 읽는 재미도 뛰어난 책이다. 이르계바예브등 옮김 가야미디어 5천원.
  • 궁궐:3/“경복궁 싫다”태종이 창덕궁 창건(서울 6백년만상:40)

    ◎임진왜란·인조반정·순조때 대형화제/세임금 폐출된 곳… 후원으로 비원 조성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태종은 서울 천도를 결심한다.태종은 경복궁은 창건때부터 좋지 않은 일이 잇따라 정궁을 다시 지으려했다.그러나 선왕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조준등 중신들의 반대여론에 밀려 이궁으로 지은 것이 창덕궁이다. 정궁은 아니면서도 가장 많은 임금이 정사를 살폈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리는등 수많은 궁중 비사를 간직한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태종 4년(1404) 10월 경기·충청·강원에서 군병력과 승려 농민들을 동원,공사에 들어간 창덕궁은 이듬해 10월 완공됐다.규모는 경복궁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태종은 창덕궁에 든지 6년만에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긴뒤에도 계속해서 정전과 누각을 지어 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을 건립했다.그리고 세종 원년(1419) 인정전이 완공돼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출 수있었다. 단종과 연산군이 폐출되는 비사를 간직한 창덕궁은 임진왜란발발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피란에서 돌아온 조정은 경복궁의 터가 불길하다고해 가장 먼저 창덕궁 중건에 착수,광해군 원년(1609)에 완공했다.이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중건(1867)될때까지 「조선의 정궁」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경운궁에 거처하던 광해군은 창덕궁이 완공된 뒤 「선왕의 상중」이라고 이런저런 핑게를 둘러대며 궁에 들기를 꺼려했다.그러나 마지못해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20일만에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이의신이라는 술사의 말에 의존하던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노산군(단종)과 연산군이 폐출됐기 때문에 창덕궁에 들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광해군 일기」는 전하고 있다. 중건 5년만에 중신들의 성화에 못이겨 창덕궁에 든 광해군은 8년뒤 인조반정으로 노산군·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맛봐야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창건하면서 조성됐던 후원을 재정비했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비원이다.비원은 북악에서 뻗어나온 완만한 산기슭 6만여평에 정자와 연못을 만들어 이룩한 조선조 정원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원 연경당 뜰에는 괴석들이 석분에 담겨 눈길을 끄는데 이들 석분은 광해군 일기에 『기화·이목·괴석을 널리 모아 동산을 만들고 정자를 지어 소요해 그 화려함이 일찍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조반정이 있던날 창덕궁엔 두번째 큰 불이 나 인정전등 몇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됐다.이에 따라 인조 25년 6월 (1647) 광해군이 공들여 지었던 인경궁의 전각을 헐어 창덕궁 재건공사를 시작,그해 11월 복구공사는 완료됐다. 이후에도 크고작은 화재가 발생했으나중창은 없었다.그러나 순조 3년(1803)12월에 또 다시 대형화재가 발생,인조반정때 실화를 면했던 인정전등 주요전각이 모두 소실됐다.이듬해 완공된 인정전은 국보 2백25호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번에 걸친 대화재로 중건과 재건을 거듭한 창덕궁은 19세기에 접어 들면서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양기탁선생 묘소를 찾기까지/백범이 남긴 약도로 사후56년만에 확인

    ◎유족들,제자와 함께 정확한 위치 찾아/“유해봉환위해 정부차원 지원 있어야” 『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산과 골이야 아무리 깁허도 우리마음은 당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물과 불이야 아무리 겁나도 우리마음은 해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달과 놀이야 아무리 발거도 우리마음은 빗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총과 칼이야 아무리 무셔도 우리마음은 뚜룰수 없누나/…』(양기탁 「아해들 노래」 중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자 언론선각자로 평생을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한 우강 양기탁선생(1871∼1938)의 묘소가 중국 강소성 율양현의 한 시골마을에서 후손들에 의해 발견됐다. 상해에서 내륙쪽으로 7시간 이상 버스로 달려가는 강소성 남부의 작은 마을 대부진 남문두에는 아직도 우강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생존하고 있어 그들의 증언을 통해 우강이 기거하던 고당암터와 묘소터를 확인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해서 7기간 거리 우강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를 창간하여 외세의 침입에 항거,「행동하는 필봉」으로 민족자존의 횃불을 드높였다.또 일제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만주와 중국대륙을 무대로 민족적 자각과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이번에 그의 묘소가 사후 56년만에 유족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것은 오는 7월18일 대한매일신보 창간 90주년을 앞두고 더욱 뜻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우강의 묘소는 정확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가족들은 물론 애국선열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해오고 있는 정부와 뜻있는 이들의 애를 태워왔다. 우강의 묘소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백범 김구선생이 해방후 유족들에게 건네주었던 묘소의 약도였다.백범은 우강과는 5년 연하로 신민회 활동에 이어 상해 임시정부등에서 함께 활동해와 남다른 교분을 갖고 있었으며 해방후 우강의 유족인 장남 효손(6·25때 납북)에게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보라며 현장의 위치를 그려 갖다 주었다는 것이다.이 약도는 우강이 말년에 기거하던 고당암과 주변의 뽕나무밭,묘소위치등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3월 이 약도를 들고 묘소를 찾아나섰던 우강의 자부 최선옥씨(76)는 『납북된 남편의 뜻을 40여년만에 이루게돼 여한이 없지만 어서 유해를 모셔와 고국에서 편안하게 영원히 쉬시게 하는 일이 남아있다』며 울먹였다. ○농지개선작업때 이장 우강의 묘소를 찾는 작업은 독립운동가 박은식선생의 손자이자 최씨의 사위인 박유철씨(56·건설공무원교육원장)가 4∼5년전부터 모친(최윤신·77)의 중국에 사는 친척들을 통해 수소문하면서 시작됐다.그 결과 대략적인 위치가 파악됐으며 이번에 박씨가 모친·장모와 함께 현장을 답사,백범의 약도와 비교해보고 생존한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게 된것이다. 우강의 묘소는 원래 고당암 앞의 뽕나무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60년대 모택동이 대대적으로 전개한 농지개선작업때 4∼50ⓜ 남쪽으로 이장했으며 오늘날에는 밭 한가운데 거의 형체를 알아볼수 없게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유족들이 이 마을에서 만난 제자이자 이장을 역임했던 번정재씨(79·농업)는 『선생은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학문이 높고 기공의 경지가 높아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선생이 기거하시던 고당암에는 늘 기공을 연마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덧붙였다. 우강의 유족측은 올 가을쯤 다시한번 강소성의 묘소를 방문,구체적인 유해봉환을 위한 절차를 현지정부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까지는 반드시 유해봉환이 이뤄질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도 관심을 기울여 줄것을 강력히 촉구했다.◎양기택선생의 항일 족적/대한매일신문 창간… 국권회복 앞장/신민회 결성… 독립군 양성 등 무장투쟁 말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돼가던 1871년 4월2일 평양에서 태어난 우강은 소년시절 한학을 배운뒤 15세때 상경,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25세때 부친과 함께 미국인 게일의 한영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그 과정에서 일본 미국등을 다니며 선진문물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이어서 1898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개혁당 당원으로 활약하는등 활발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을 맡기도 했다. 우강의 가장 큰 업적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이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관할권을 내세우는등 침략을 노골화하자 이를 견제하고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따라서 당시 영국 데일리뉴스의 임시특파원으로 서울에 와있던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을 사장으로 하고 자신은 총무를 맡아 새신문을 창간했던 것. 국한문 혼용의 국내용 신문과 별도의 영문판도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잔혹한 통감정치 하에서도 전국각지의 의병활동을 상세하게 다루고 국채보상운동을 펴는등 국운이 쇠하여가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끝까지 민족에게 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심어 국권회복운동의 불씨를 재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강은 또 안창호·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대한매일신보 사무실내에 본부를 두고 활동을 벌이던 신민회는 1909년 전국대회를 열고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어서 한일합방을 앞둔 1910년 3월에는 신민회가 만주 망명을 결정하고 서간도에 기지를 마련,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치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이같이 신민회의 활동이 해외거점을 확보하자 일제는 1911년 7월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날조,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하고 신민회를 해체해버렸다.이어 13년에는 총독암살사건(일명 「105인사건」)으로 6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4년만에 감형으로 출소한 우강은 16년 주거제한지인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를 탈출,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했다.그러나 2년뒤 18년에 천진에서 일본경찰에게 다시 체포돼 국내로 압송,전남 거금도로 유배됐다. 20년 4월 유배를 끝나고 서울에 와있던 우강에게 새로 창간된 동아일보가 고문및 편집감독으로 추대를 제의해 왔지만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그는 거절했다. 34년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 우강은 김규식 조소앙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그러나 그는 주석직도 얼마 가지 않아 사임했으며 모든 관직을 떠나 강소성 율양현으로 들어가 선도에 몰입하다 38년 4월,67세로 이국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우강은 이같은 공로로 62년 독립유공자중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받았으며 86년 독립기념관의 독립유공자 임정위원 42인에 추대됐다. ▷연보◁ △1871 평남 평양 소천출생 △1885 한성외국어학교 영어수학 △1895 게일의 영어사전편찬 도움 △1900 나가사키 유학 △1904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7 신민회 조직 △1913­5 「양기탁 보안법 위반사건」 및 「105 사건」등으로 투옥 △1916 만주로 탈출 △1918 전남 거금도 유배 △1922 만주에서 의성단 조직 △1926 임정 국무령 추대,거절 △1934 임정 주석 선출 △1938 강소성 담양현 고당암에서 선도연구중 사망
  • 안중근의사 유품 곧 귀국/친필유묵·사진 등 모두 71점

    ◎일 소장자,기증 뜻밝혀 안중근의사의 친필유묵 3점과 관련사진원본 7점,한·일강제병합직전 대한제국 관련사진 61점이 국내로 돌아올 전망이다. 한·일불교복지협의회 일본측 회장인 가키누마 센신(폐소선심·62)스님은 9일 보훈처를 방문,『안의사유품을 소장하고 있는 정심사(정심사)의 쓰다 고도(진전강도·81)주지스님이 「한국정부가 원할 경우 안의사 유묵등 모두 71점의 한국관계자료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며 안의사유품 기증의사를 정부측에 전해왔다. 보훈처는 이와 관련,『가키누마스님은 안의사유품 소장자인 쓰다 고도스님의 위임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유품전달의사만을 전해왔다』면서 『쓰다 고도스님의 기증의사가 확인되면 정부로서는 관련유품을 받아들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 한국근대 유교 개혁운동사/유준기 지음(화제의 책)

    ◎구한말 유림들 유교 개혁운동사 대한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기 직전인 구한말에 선각적인 유림들이 국가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유교개혁운동을 벌인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하나로 엄연히 존재했던 유교개혁론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한 민족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게 지은이의 결론이다. 지은이는 이를 위해 박은식·이승희·이병헌등의 유학자와 강화학파를 분석,이들이 전통유교의 불합리성을 극복하기 위해 공자교·대동교등의 종교적 형태를 갖춘 뒤 이를 통해 국가의 중심사상을 재정립하고 민족의식을 고양하려는 과정을 보여준다. 총신대 역사교육학과 교수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에 몰두해온 지은이의 역작이다. 삼문 9천원.
  • 신팔균선생/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이끌어(이달의 독립운동가)

    ◎충북 진천에 사립학교 세워 인재 양성/만주망명후 독립군 총지휘… 일 괴롭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이후 수많은 선열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벌여왔다. 동천 신팔균선생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친 대표적인 애국선열로 손꼽히고 있다. 선생은 김좌진,홍범도,김동삼등과 함께 만주를 무대로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한 무장이다. 선생은 부친이 한성부판윤과 좌변포도대장등을,조부가 금위대장·삼도수군통제사·형조와 병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출신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한 선생은 육군참위로 임관,강계 진위대에서 첫 근무를 했다. 선생은 1909년 대한제국군대가 해체되자 인재양성에 힘을 쏟기로 하고 충북 진천에 사립 보명학교(현 이월국교 자리)를 세웠다. 이와함께 전국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갖고 80여명으로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을 결성,항일무장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데도 성공했다. 대동청년단은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단체로 광복때까지 은밀한 활동을 벌였다. 이 단체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보안 때문이었다. 이들은 처음 단체를 출범하면서 단원이나 단명등에 관한 사항은 일절 문자로 표시하지 않으며 경찰등에 체포될 경우 다른 단원을 연루시키지 않는다는 「피의 서약」을 맺었다. 선생은 1910년 마침내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종지부를 찍고 일제통치가 시작되자 무장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선생은 일단 만주로 망명,독립운동 단체 중광단에 가입했으며 3·1운동에 앞서 만주 동삼성의 민족지도자 38인 가운데 1인으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선생은 이어 만주 서간도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경학사의 후신인 한주회 소속 독립군단 서로군정서에 가입,군단무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후진교육을 맡았다. 당시 교관으로는 일본육사출신인 지청천과 김경천,한말 무관출신인 김창환등이 학생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청산리독립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선생을 비롯한 애국투사들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3·1운동을 전후해 만주지역에는 50여개의 독립군단이 조직됐으며 이들은 각각 일제에 전쟁을 선포하고 일제 주재소와 헌병대등을 습격하는등 맹렬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선생도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을 이끌고 수시로 일제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을 가졌으며 친일주구들을 처단하는등 용맹을 떨쳤다. 독립군부대는 그러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1천여명의 병사를 잃은 일제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지역의 한인들을 무차별 살육하는등 초토화작전으로 맞서자 어쩔 수 없이 근거지를 이동하게 된다. 당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북만으로 옮겼으며 선생이 활약하고 있는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등은 남만의 홍경현으로 이주했다. 1922년 봄,남만에 있던 독립군부대들은 강력한 독립군단의 조직을 위해 기존 부대를 해체,대한통군부를 결성했으며 이 통군부는 그해 가을,북만의 독립군부대까지 결합시켜 대한통의부로 새로 출발했다. 선생은 1923년 대한통의부 의용군사령관에 임명돼 독립군병력을 총지휘하게 된다. 이 의용군은 5개중대와 유격대,헌병대로 조직됐으며 각 중대는 5백∼9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됐다. 의용군은 당시 압록강 접경에서 일제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며 국내에도 잠입,게릴라전으로 일제를 괴롭혔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이 의용군은 1923년 1월 유격대원 7명이 평북 창성군 후평주재소를 습격,일경을 사살하는등 무수한 전과를 남겼다. 선생은 그러나 1924년 7월 홍경현 밀림에서 야외군사훈련중 중국 마적 3백여명의 급습을 받고 총격전을 벌이다 총에 맞아 쓰러져 42세로 운명했다. 선생은 『일제와 싸우다 죽으려했더니 중국사람과 싸우다 죽는구나』라고 외치며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생을 숨지게 한 마적들은 사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장작림 군벌부대와 경찰들로 밝혀졌다. 한편 선생이 순국할 당시 서울 셋방에서 만삭의 몸을 이끌며 살고 있던 부인 임수명여사는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쓰러져 운명,일가족이 조국독립에 몸을 바친 셈이 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추서했다.
  • 양기탁선생/대한매일신보 창간… 항일의식 고취(이달의 독립운동가)

    ◎신민회 결성… 만주서 독립군 양성 주도/의용군 국내에 파견,일제기관 등 습격 양기탁선생은 국운이 꺼져가던 대한제국말기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고취한 언론인이자 신민회등 비밀결사를 통해 무장항일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이다. 1871년 4월2일 출생한 선생은 1938년 4월19일에 운명,이달로서 서거 56주기와 탄신 123주년을 맞게 됐다. 평양 출신인 선생은 소년 시절 영어를 배워 1895년 미국인 게일박사의 한영자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사전인쇄를 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길에 근대화된 일본을 보고 감명받은 선생은 귀국후 개화파들이 모인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친러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는 과정에서 체포돼 조사를 받고 나온 선생은 게일박사의 도움으로 도미,3년뒤인 1901년 귀국했다. 노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 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 일을 했다. 선생은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조선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등 침략을 본격화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신문운영이 필요하다고 판단,고종으로부터 황실판공비인 내탕금을 지원받아 신문사 시설을 마련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헌병대의 출판물 검열을 피하기 위해 당시 영국 데일리 뉴스 임시특파원이던 영국인 배설(Earnest Bethell·1872∼1909)을 사장으로 1904년 창간됐다. 이 신문에는 박은식선생을 비롯,신채호·최익·장도빈등이 제작진으로 참여했다.외국인 명의로 발행돼던 이 신문은 일제 통감부의 검열을 피하면서 「일인입불가」를 출입문에 써붙였을 정도로 강한 반일감정을 나타냈다. 국한문혼용인 국내용 신문과 별도로 영문판을 발행한 이 신문은 통감부의 신문지법에 다른 신문들이 얽매여 의병활동을 폭도라고 표현할 당시 의병활동을 높이 평가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의 대변지역할을 수행,1만3천여부의 부수를 자랑했다.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이 신문을 폐간하기 위해 우선 사장인 배설을 영국영사재판소에 치안방해죄로 고소,중국 상해로 추방했다.배설은 형을 마친뒤 서울로 돌아와 옥고 후유증으로 숨졌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안창호선생을 비롯한 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선생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신민회본부는 대한매일신문안에 두었으며 지방지국은 연락망으로 활용됐다. 전국 8백여명의 애국세력이 집결한 신민회는 1909년 독립군 창건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선생의 집에서 전국대회를 열었다. 이날 대회는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했다. 선생은 이 계획에 따라 군관학교를 세울 적당한 장소물색을 위해 만주를 답사했으며 1910년 이동령등이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이처럼 신민회의 활동이 뚜렷해지자 일제는 1911년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꾸며 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투옥시켰다. 이어 일제총독 암살사건(일명 105인 사건)을 날조해 신민회원 8백명을 전원 체포,선생은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4년만에 석방된 선생은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에 유배됐다. 선생은 다음해인 1906년 유배지를 탈출해 만주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중 다시 일제에 체포,국내로 압송돼 전남 거금도에서 2년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유배에서 풀려난 선생은 동양을 순방중인 미국의원단이 서울역에 도착하자 독립만세운동을 펼쳐 또 투옥됐다. 모친 사망으로 일시 방면된 틈을 타 만주로 도피한 선생은 무장항일단체인 의성단을 결성,봉천의 만철병원 습격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4년에는 이청천·김동삼등과 함께 대한군정서·통의부등 만주내 무장항일단체를 통합,정의부를 결성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해 일제기관을 공격하게 했다. 선생은 또 중국내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도 추진,김규식선생등과 함께 1932년 한국대일전선 통일동맹을 구성했다. 1934년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국무회의가 자신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자 이를 수락한뒤 한국독립당·대한독립단·의열단·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등 여럿으로 갈라진 독립세력을 규합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등 독립세력의 분열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미국과 중국내 독립세력의 재규합을 추진,남경에서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 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1938년 68세를 일기로 숨졌다. 정부는 선생에게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임정 법통잇기」 문민정부 의지/서재필·전명운선생 유해봉환 의미

    ◎우리민족 자존심 회복에도 큰 도움 유해가 4일 미국에서 봉환된 서재필박사와 전명운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뒤 이역만리에 묻혔던 독립운동가들이다. 서박사는 조선말 위기에 처한 민족의 현실을 구하기 위해 우리나라 처음으로 순한글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발행한 언론인이자 정치가·독립운동가로,전의사는 친일 미국외교관의 저격을 기도한 항일투사로 민족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독립신문은 개화기에 독립운동과 자주근대화의 기폭제가 된 독립협회의 창설을 이끌었다는 점이 높이 평가돼 후세에는 독립신문이 발행된 1896년 4월7일을 기념,매년 4월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놓고 있다. 지난해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선생등 상해임시정부요인 5위의 유해가 봉환된데 이어 이번에 다시 두 독립운동가의 유해가 봉환된 것은 유족과 민족의 오랜 염원에 의한 것이다. 현정부는 상해임시정부의 문민전통을 잇고 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애국선열의 유해 국내봉환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같은 정부의의지는 김영삼대통령이 지난해 박은식선생등을 봉환할 당시 『이들 선열을 모시는 것은 새정부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힌데서도 엿보인다. 정부는 이에 따라 지난해 처음으로 중국정부에 협조를 촉구,중국이 유해봉환요청을 수락하자 지난해 6월 선열봉환국민제전 계획을 확정함으로써 선열유해봉환을 국민적 행사로 끌어올렸다. 따라서 두분 유해의 환국은 문민정부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40여년간을 이역만리에 방치해 왔던 독립유공자들의 유해를 모국에 모시게 됐다는 점에서 국민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커다란 계기가 됐다는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864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송재 서박사는 1882년 과거에 급제,김옥균·서광범·박영효등 개화파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서박사는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가담했으나 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자 미국으로 망명,컬럼비아의과대(현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한뒤 제이슨이라는 이름으로 미국국적을 취득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에 대해 무죄가 선언되자 귀국,중추원고문으로 임명된 그는 국민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그뒤 미국으로 건너간 서박사는 현지에서 광복운동을 펼쳤으며 87세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전의사는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친일언행을 일삼자 그를 암살하려한 독립운동가이다. 1884년 서울에서 태어나 16세때 하와이로 이민간 전의사는 철로공사장등지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미국내 항일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그는 당시 미국내의 반일감정을 무마키 위해 미국에 돌아온 스티븐스가 「일본의 한국지배가 한국에 유익하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자 이에 격분,1908년 3월23일 샌프란시스코 페링역에서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쏘았다. 전의사는 대부분의 독립운동가처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47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전선생 유해 봉환하던 날/이 부총리는 3백여명 경건한 환영 ○…서재필박사와 전명운의사의 유해는 4일 하오 2시30분 대한항공 061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반세기만에 그리던 고국 품에안겼다. 선열들의 유해와 영정은 이란 승객들이 내리고 난뒤 비행기안에서부터 국방부 의장대에 의해 운구돼 일반 입국장을 거쳐 공항청사 밖에 대기중이던 6대의 운구용무개차에 영정과 훈장,유골순으로 옮겨진뒤 국립묘지로 봉송됐다. ○…선열들의 유해 봉송에는 미국 현지에서 서박사의 종증손인 서동성씨(59·미국 변호사)와 전의사의 둘째 딸 전경련씨(71),사위 표한규씨(53)등 유족과 봉환단장인 김시복국가보훈처 차장,서박사의 고향인 전남 보성의 유준상의원(민주당),오세응의원등 20여명이 동행했다. 또 유해 봉환위원장인 이영덕부총리와 이충길국가보훈처장,김승곤광복회장이 공항에 나와 유해 봉환식에 참석했으며 서박사의 종손인 서희원 전 이화여대 교수(70),전의사의 종손인 전의식씨(49·서울신문 TV가이드부 부국장)등 유족과 각계인사등 3백여명이 유해를 맞았다. ○…서박사의 유해 환국이 성사된 데는 미국 뉴저지주에서 사업을 하는 재미교포 장익태씨(58)의 숨은 공로가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서박사의 종손인 동성씨와 선후배관계인장씨는 지난 59년 미국으로 건너가 서박사의 유해가 방치되다시피 한 것을 보고 지난 68년부터 지금까지 납골당을 관리해 왔다는 것. 10년 전에도 서박사의 유해를 봉환하려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무산됐다고 밝힌 장씨는 『이제야 유해가 환국하게 돼 한편 섭섭하면서도 감사하다』면서 『84년 작고한 서박사의 둘째딸 서 뮤리얼씨가 겨울에 난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아 내가 유골을 돌보게 됐다』고 말했다. 장씨는 서박사의 유해가 처음 안치됐던 챌튼힐의 납골당이 비가 새는 등 관리가 부실해지자 지난 83년 유해를 필라델피아 웨스트로렐힐로 옮겨 관리해 왔다.
  • 서재필·전명운 선열의 환국(사설)

    평생을 두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서재필박사와 전명운의사의 유해가 4일 미국으로부터 서울에 도착한다.지난해 8월 중국 상해로부터 임정요인 다섯분 영령의 봉환에 이어 두번째로 이루어진 애국선열 영령의 환국이다.내년이면 벌써 광복 50주년,이제야 멀고먼 이국땅에서 숨진 선열들의 유해를 고국에 모셔 안장함은 때늦은 송구함이 없지않으나 그나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서재필박사는 개화기의 독립운동가로,사상가로,언론인으로 우뚝한 자취를 남겼다.국운이 기울어가는 시기에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독립문을 세우는등 애국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18 9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국언론사의 새장을 열었다.우리 언론이 제정한 「신문의 날」4월7일은 바로 독립신문 창간기념일이다.서박사는 일제때 미국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힘쓰다 19 51년 영면하였다.구한말 개화기부터 광복을 맞기까지 그는 현대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긴 거목이다. 일반에겐 다소 생소한 전명운의사는 19 08년 미 샌프란시스코부두에서 대한제국의 미국인 외교고문이던 친일파 스티븐스를 저격했던 독립운동가.『일본의 한국통치는 한국인 모두가 바라는 바』란 망언을 거침없이 해댄 스티븐스는 당시 한국인의 공적이었다.전의사의 권총은 불행히 불발에 그쳤으나 또 한사람의 한국인 장인환의사의 저격으로 스티븐스는 목숨을 잃는다.대한남아의 통쾌한 기개가 미국땅을 뒤흔드는 순간이었다.이 사건은 일본의 침략성과 우리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전의사 역시 47년 이역에서 눈을 감았다. 서박사의 유해는 필라델피아의 한 공동묘지 납골당에서,전의사는 LA 갈보리 천주교공동묘지에서 각각 모셔오게 된다.타계한지 40여년이 훨씬 지난 시점이다. 정부는 이영덕부총리를 위원장으로 「봉환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따로 집행위원회를 조직하여 범정부적으로 유해봉안행사를 갖기로 했다.두분의 안장식은 8일 하오2시 국립묘지 광장에서 엄숙하게 거행된다.이역땅에서 외롭게 숨진 순국선열들의 유해 환국은 민족정기를 선양한다는 점에서 그 뜻이 크다.또한 현대사의 복원이란 점에서 높이 평가될만한 일이다.우리 민족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이들 선열들의 수난과 희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새 문민정부는 해외에 묻혀있는 선열들의 유해찾기 조사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내년 광복절까지 복원되는 중경임시정부청사의 복원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서재필박사,전명운의사 두분의 환국을 맞으면서 다시한번 우리 모두 역사앞에 한점 부끄러움 없는 국민이 되기를 다짐해야 할 것이다.
  • 전쟁기념관 6월에 문연다/서울 용산에…개관 앞두고 마무리단장 한창

    ◎디오라마·영상시설 갖춰 입체적 전시/군사유물,6·25 무기 등 7만여점 확보 서울 용산의 옛 육군본부 자리에 국내 최초로 건립되는 전쟁기념관이 오는 6월 개관을 앞두고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88년 특별입법된 전쟁기념사업회법에 따라 90년 9월 착공한 이 기념관은 지난해 12월까지 건축공사를 완공하고 현재 6개 전시실 가운데 4개실의 전시품 비치등 내부단장을 마무리했다.나머지 2개 전시실도 오는 4월까지 전시품을 모두 제자리에 진열한뒤 전 전시관의 시험가동을 시작한다. 기념관은 대지 3만5천평 위에 연건평 2만5천평의 지하 2층,지상 4층의 현대식 건물로 전시실과 전우회관·간이식당·지하주차장·수장고·사무실 등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졌다.6천1백59평에 이르는 전시실은 호국추모실·전쟁역사실·한국전쟁실·대형 장비실과 아직 완공되지않은 해외파병실·국군발전실 등 6개실과 비행기·탱크 등을 전시한 옥외 전시실로 되어있다. 전시실에는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조상들의 군사유물과 한국전쟁 참전 16개국등 각국의무기와 장비·복식·군기·문서 등 7만8천35점이 전시되며 현재 83%를 확보했다. 이 기념관의 특징은 정적이고 폐쇄적인 지금까지의 전시방식에서 탈피,생생한 체험적 전시가 될 수 있도록 디오라마와 영상시설을 많이 설치,입체적인 전시가 되도록 한 점이다. 우선 전시실을 들어서자마자 설치된 호국추모실은 호국의 의지를 담은 서울대 미대 한운성교수의 천장화와 동양화가 박정규씨의 「단장의 산하」,통일을 상징하는 윤동구씨 등의 작품 「빛과 물」이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이어 전쟁역사실에는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우리 민족이 외침에 맞서 싸웠던 주요 대외항쟁과 각종 무기·장비·복식·기치·군사제도 등을 문헌자료와 조각·그림·사진 등으로 전시했다.특히 살수대첩과 한산대첩·귀주대첩·처인성전투·매소성전투·진주대첩·행주대첩 등의 전투상황은 디오라마로 생생하게 재현했으며 안시성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은 기록화에 담아 선보이고 있다.이와함께 성곽과 봉수대·거북선·조선시대의 범선과 병선,대한제국의 신식군대 훈련모습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했으며 서구열강의 당시 군사력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실은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겨준 6·25전쟁의 발발배경과 남침·반격·중공군 개입·전선교착·휴전 등으로 구분해 6·25를 객관적인 사실로 보여준다.전선에서의 장병들의 전투상황은 물론 후방 국민들의 전시생활 모습을 디오라마로 재현해 보여준다.특히 전후세대들을 위해 「전쟁체험실」을 설치,전쟁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게 했다. 해외파병실은 우리 국군의 파병배경과 의의 그리고 월남에서의 활동상을,국군발전실은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창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의 발전과정을 각각 실물·사진·그래픽·모형 등으로 소개한다. 강의용전시본부장은 『우리 민족은 전쟁의 영향을 그 어느 민족 보다 많이 받았으면서도 아직 전쟁박물관 하나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제 번듯한 기념관을 갖게돼 다행』이라면서 『국민에게 전쟁의 교훈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산교육장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고원정 장편 「바다로 가는먼길」(이작가 이작품)

    ◎“일성서 벗어 나자” 현대인 심리해부/추리기법 사용… 힘겨운 개개인 삶에 대리만족 제공/이사 남편의 의도된 실종통해/“우리들 참모습은 뭔가” 추적 이 시대의 가장 바쁜 대중작가 고원정(38).그가 완벽한 탈출을 시도했다. 신문잡지 연재말고도 시청자와의 만남(KBS­1TV 다큐멘터리극장 진행),그리고 48권 예정으로 4년간의 대체역사소설 「대한제국 일본침략사」집필돌입등 숨돌릴 여유조차 없이 「바쁜 작가」 고원정씨에게 있어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욕구는 새삼스런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고씨의 새 장편 「바다로 가는 먼길」(상·하 문학동네간)은 고씨 자신 말고도 일상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모든 현대인의 심리를 추리소설 기법으로 파헤친 흥미있는 작품이다. 복잡한 사회생활과 가정에서의 역할로 부대끼다 보면 느닷없이 벗어나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끼면서도 엄두를 내지 못한채 일상에 묻혀사는 현대인의 비극적 삶을 과감하게 벗어나게 만드는 대리만족을 이 작품은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가족 직장 지역사회의 얽히고 설킨 수많은 인연과 이해관계로부터,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도 완벽한 탈출을 꿈꾸고 있지만 실천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그래서 저는 민동욱이라는 우리 모두의 대체인물이 완벽한 실종과 탈출에 도전하도록 등을 떠다 밀었습니다』 이 소설은 직장에서의 위치와 가정의 행복등 어느것 하나 남부러울게 없는 재벌기업의 40대이사 민동욱의 갑작스런 실종과,그의 실종을 의도된 것으로 확신한 부인 오영채가 그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줄거리로 엮어간다. 부인의 추적을 통해 유능하고 촉망받는 엘리트이며 성실한 남편이었던 민동욱은 결국 포르노를 보며 창녀와 관계를 일삼고 여비서와의 사이에 아들까지 두었을 뿐만 아니라 부랑자들과 어울려 그들 세계에서 굴러온 인물이었음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우리 모두의 탈출욕구를 대리충족시키면서 그같은 탈출이 가능한지를 묻고 싶었습니다.한가지 욕심을 부렸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이중,삼중의 가면을 쓰고 있나를 추적해 보여주고 싶다는 점입니다』 『작가는독자에게 흥미를 전달해야 하는 책임감을 저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고씨,그는 이 작품에서도 역시 철저한 흥미를 견지하면서 민동욱이라는 실종자의 위악적인 행태를 꼼꼼한 구성력으로 고발해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우리들의 참모습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추적해가고 있다. 결국국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우리들의 참모습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추적해가고 있다. 결국 사라진 남편의 실제 모습을 찾아나선 부인 오영채의 추적을 통해 이 사회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독자들에게 묻고있는 셈이다.
  • 248명 동학재판기록 발견/당시 연루인사 전원분

    ◎정부기록보존소/“혁명전모 밝힐 획기적 자료” 올해로 동학혁명 발발 1백년을 맞는 가운데 당시 혁명에 가담했던 인사 2백48명의 재판기록 전체가 이달말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소장 김기옥)는 15일 1895년3월부터 1904년8월까지 동학혁명과 관련돼 재판을 받은 이들의 재판기록을 영인본으로 제작,공개하기로 했다. 이들 판결문은 최근 정부기록보존소가 동학 1백주년을 맞아 부산지소 서고에 보존돼 있던 동학관련 판결문을 정밀 조사하다 새롭게 발견한 것들로 학계에서는 동학혁명의 전모를 재조명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판결문은 서장옥 황하일등 동학지도층뿐 아니라 운동에 참가한 일반농민에 대한 것으로 갑오개혁정부나 대한제국정부가 동학관련자에 내린 판결문 전체분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청군을 불러들여 동학운동탄압에 압장섰던 민영순등 민씨세도가에 대한 판결문도 이에 포함돼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동학관련 판결문은 전봉준,손화중,최경선,김덕명등 동학지도층의 것뿐이었으며 천도교 2대교주인 최시형에 대한 판결문은 필사본만 공개됐었다. 한편 이번 판결문을 통해 당시 갑오개혁정부는 혁명을 주도한 동학접주등 지도층에 대해서는 사형등 가혹한 형벌을 내린 반면 일반농민에 대해서는 무죄방면하는 등 회유책을 썼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부패한 관찰사나 자의적으로 동학농민을 처벌한 관리도 형사처벌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함께 1900년을 전후해 속리산을 중심으로 최시형에 대한 신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사실과 일진회가 천도교로부터 원산의 객주회사소유권을 빼앗아간 과정도 밝혀졌다.
  • 인기작가 고원정씨/국내 첫 「단행본 연재」 시도

    ◎잡지에 소설 연재하듯 속편 내/4년간 매달 1권씩 48권 계획/「대한제국 일본침략사」 1부1권 첫선 인기작가 고원정씨(38)가 국내 처음으로 「단행본 연재」라는 방식으로 소설연재를 시작했다. 2월1일 첫권이 서점에 선보인 이 작품은 대체역사소설인 「대한제국 일본침략사」(현암사 간). 고씨는 앞으로 4년동안 매달 1일마다 이 소설의 속편을 내 모두 48권으로 완간할 계획이다. 「단행본 연재」란 잡지에 소설을 연재하듯 정기적으로 후속편을 발표하되 잡지에 끼워넣는게 아니라 매번 그분량만큼을 단행본으로 내는 형태. 이같은 방식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그 예가 거의 없어 출판계는 독자들의 반응을 주목하고 있다. 이번에 나온 「대한제국 일본침략사」의 첫 권은 「제1부­여명」중 「제1권­반역의 칼」편으로 1백20쪽 분량.값은 2천5백원이다. 한편 「대한제국 일본침략사」는 그 내용면에 있어서도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역사의 주요시점에서 주도인물의 대응,사건의 전개가 달랐다면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흘렀을까」를 가정해 보는 대체 역사소설. 고씨는 이 소설에서 대한제국(조선)이 힘을 길러 도전해 오는 일본세력을 물리치고 거꾸로 일본을 합병하는 과정을 그릴 예정이다. 시대배경은 조선조 철종이 즉위한 1849년부터 한일합병이 됐던 1910년까지를 다루기로 했다. 1권「반역의 칼」편에서는 가상인물인 역관 이빈이 개혁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헌종이 승하한 날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변절자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는 과정까지를 다루었다. 작가 고씨는 『새로운 시도인 만큼 솔직히 힘에 부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앞선다』면서 『역사상의 피해자와 가해자로서 뚜렷이 자리매김되어 있는 한일간의 역사를 한번 뒤집어 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뼈아픈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을 풀어보고 싶은 욕망도 있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면서 그러나 역사를 뒤집어 봄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얻어 앞으로 전개될 우리의 역사에 대입시켜 보고싶다는 소망에서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 “구한말 3개 한·일조약 무효”/여·야의원,결의안 국회제출

    ◎민자선 철회 검토 여야의원 20명은 3일 을사5조약,정미7조약,한일합방조약 등 3개 한일조약의 원천무효를 확인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재순과 일본국 특명전권공사 임권조사이에 맺어진 을사5조약과 1907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국 통감 이등박문이 서명한 정미7조약,1910년 이완용과 일본국 통감 사내정각가 서명한 한일합방조약 등은 원천적 무효라고 선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민자당은 이에 대해 이들 조약이 지난 65년 한일협상때 이미 공식적으로 무효화된 점을 감안,이 안건을 철회하는 것을 검토중이다.
  • 영원한 독도(외언내언)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하나 새들의 고향/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땅…』 이렇게 시작되는 가요 「독도는 우리땅」이 발표된 것은 지난 19 82년.독도의 역사와 지이지적 지식을 뭉뚱그려 놓은 가사의 재미와 쉬운 곡조때문에 금방 화제가 됐다.그러나 『반일감정을 부추긴다』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방송금지의 우여곡절을 거친끝에 대중들의 기억속에서 멀어져 갔다. 이 노래가 유행하던 당시 작사자는 색다른 항의를 받았다.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 주장해 온 일본측의 항의가 아니라 항일유족회측의 항의였다.『…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일본땅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가사내용에 『대마도도 우리땅인데 왜 일본땅이라고 했느냐』는 내용이었다. 당시 서울 신촌과 안암동등 대학가엔 「독도는 우리땅」「만주땅은 우리것」이라는 상호를 내건 경양식집과 카페가 문을 열어 대학생들의 발길을 끌었다.「만주땅은 우리것」이라는 카페이름에서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은 일제가 청국과의 불법적인 「간도협정」을 통해 오랫동안 우리 선조들의 생활터전이었던 곳을 남의 나라에 넘겨준 역사가 상기되었다. 독도가 영원한 우리땅임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18세기의 옛지도 3점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국내외의 많은 역사적 문헌들에 독도는 한반도의 부속도서로 표기되어 있고 심지어는 일본의 과거 역사서와 공문서도 독도의 한국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는 터다. 그럼에도 일본은 걸핏하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최근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때도 일본의 산케이(산경)신문은 한면 전체를 할애,독도문제를 제기하고 『종전후 한국이 독도를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억지논리를 폈다. 그런 일본인들에겐 「독도는 우리땅」 보다는 「대마도는 우리땅」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더 나을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 을사늑약(외언내언)

    「늑약」이라는 낯선말을 대한다.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는 뜻을 갖는 말이다.「늑」자에는「굴레」「새기다」라는 뜻외에도「억지로 한다」는 뜻이 있다.그래서「폭력이나 위력으로 빼앗는것」을「늑탈」이라 하고「강제로 휴직시키는것」을 이르면서「늑휴」라고도 한다.1905년 대한제국과 일본사이에 체결된 을사조약이 강제된 것이었다면서 고종황제의 친서는「늑약」이라는 말을 쓰고있다. 그해 11월17일 일본군은 덕수궁주변을 에워싸는 한편 일본공사관과 시내요소요소를 철통같이 경계하면서 성문에는 야포·기관총까지 갖춘 부대를 배치했다.그런 공포분위기 속에서 열린 어전회의는 일단 일본측이 제안한 조약안을 거부한다는데 합의했다.그러나 일본군은 귀가하는 대신들을 붙들고 다시 회의를 열게한다.이토(이등박문)는 강압적방법으로 조약에 대한 찬성을 강요했다.그런다음 고종황제의 윤허도 없이 멋대로 옥새를 강탈하여 조인을 한다.18일 오전2시의 일이었다. 이건 조약이라기보다 힘을 앞세운 항복문서 같은 성격이었다.지금까지 사학계등에서 무효를 주장하여 오는 까닭도 거기 있었다.그사실을 극명하게 입증하여 주는 자료가 이번에 미국컬럼비아대 도서관에서 발견된 고종황제의 친서이다.이친서는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뒤 미·영·러시아등 9개나라 원수들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된것으로 알려졌다.내용은 구구절절이 피맺힌 호소로 일관되어 있다.위협받아 강제로 이루어진 회의이므로 무효라고 친서는 주장한다.『…장차 어떤나라가 짐이 이조약을 응낙운운하였다 주장하는 일이 혹시 있더라도 원컨대 폐하께서는 믿지도 듣지도 말고…』 이게 무효화할 때 1905년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행한 일련의 그릇된 외교조처들은 재론되어 바로잡혀야한다.분노는 새삼스럽게 치민다.그 분노는 현해탄을 오가는 오늘의 일부 일그러진「한일친선」으로도 쏠린다.일본의 모습을 바로볼줄 알아야 한다.
  • “을사조약은 무효” 고종친서 발견

    ◎“내각에 체결 위임 안해… 강압에 의해 맺어”/“국제재판소 제소” 미 등 9국에 협조 요청/서울대 김기석교수,컬럼비아대 도서관서 찾아 【뉴욕 연합】 지난 1905년 대한제국과 일본간에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이 국제법상으로 무효임을 선언한 고종황제의 친서가 90여년만에 발굴됐다. 고종은 미·영·불·독등 9개 열강국 원수들을 대상으로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천명하기 위해 조약체결 다음해인 1906년 6월22일 친서를 작성,미국인 호머 헐버트를 친서전달 특사로 임명했으나 고종의 강제퇴위로 각국 원수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고종의 친서는 헐버트 특사가 소장하고 있다가 재미통일운동가 김용중씨에게 이관했으며 그의 사망후 뉴욕 컬럼비아대학 희귀본 도서관에 보관되어 오던중 하버드대학에 파견된 서울대 김기석 교수에 의해 지난 6월 우연히 발견됐다. 상반부는 한문으로,하반부는 영문으로 작성된 친서에서 고종은 비준권자인 국왕으로서 조정대신들에게 조약체결을 위임한바 없을뿐 아니라 당시 일본이 대신들을 감금한채 강제로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는 조약이 아니라 늑약이며 아무런 법적 효력을 가질수 없다고 밝혔다. 고종은 또 이 친서에서 조약의 무효를 밝히기 위해 국제재판소에 일본을 제소하겠으니 미국대통령과 러시아황제등은 재판과정에서 대한제국을 잘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고종은 친서임을 입증하기 위해 국내문서와는 달리 외교문서에만 쓰는 이희라는 본명을 사용하고 옥새를 압인했다. 이번에 발굴된 친서는 당시 대한제국의 주권자인 고종황제 자신이 직접 을사조약이 국제법적 무효임을 선언한 것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문서보다 가장 확실하게 을사조약이 불법,무효임을 밝혀주는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친서를 발견한 김교수는 『을사조약이 무효이면 그후에 성립된 정미조약(1907),합방조약(1010)등은 모두 무효이며 을사조약으로 강탈당한 대한제국의 정치·경제·외교적 권리가 복원돼야한다』고 말하고 『정부는 이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일본측의 인정과 사과및 배상과 같은 구체적 조치를 요청해야하며 예컨대 일본과 청국간에 체결된 간도협정으로빼앗긴 국토를 회복할 조치도 뒤따라야한다』고 주장했다.
  • 왜 우리에겐 「간디」가 없었나/김재설(해시계)

    요즈음 일본에는 한국인의 나쁜 점만 들추고 심지어 그들의 식민정책까지 한국에 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책이 잘 팔리는 모양이다.한국인이 그 저자가 아니라 사실은 일본사람이 썼다는 설도 있다.한국인을 제대로 교육시킨 것이 일본이고 그래서 지금 그래도 밥술이나 뜨고 사니 일본 덕 아니냐는 논지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근대교육이 시작된 것은 그들이 지배한 시절이 아니라 대한제국 때임을 분명히 해야 하겠다.지금 유서 깊은 중·고등학교는 거의 고종황제때 개교된 학교들이다.그때 우리의 정부 지도자들과 달리 재야의 지도자들은 젊은이가 깨어야 우리도 생존할 수 있음을 알고 교육운동에 헌신했다.또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이 보편화 된 시절도 그들의 통치 기간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난 뒤의 일이다.그들이 나라를 빼앗아 우리의 교육기관을 장악하고 그 소수에게나마 무슨 교육을 했나,철저한 우민교육이었다.사사건건 우리의 정신적·물질적 유산을 백안시하고 학생들에게 열등감을 주입하는 것도 교육인가.진정한 교육은 그 반대여야 한다.극소수 조선인(그때는 이렇게 불렀으니 그대로 쓰자)에게만 주어졌던 그 기회나마 충직한 식민지 신민을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었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가장 절통한 것은 그 기간 우리에게 과학기술과의 접촉이 차단 되었었다는 사실이다.조선인은 의사나 변호사는 될 수 있었지만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될 기회는 거의 봉쇄 됐었다.예를 들어 1943년 첫 졸업생을 낸 소위 경성제국대학의 이공학부 응용화학과 졸업생 명단을 보자.해방될 때까지 배출된 총 23명의 졸업생 중 조선인은 단 7명.그때 인구비례로 이 땅의 유일한 종합대학이라는 이 학교만은 조선인이 압도적이어야 옳다.하기야 이 경성제국대학도 일본인이 세우고 싶어 세운 학교가 아니다.이 민족의 지도자들이 일으켰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꺾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우리 스스로 대학을 세워 거기서 정말 민족의 장래를 위해 인재를 길렀다면 수많은 엔지니어와 과학자가 배출되고 이 땅에 공업을 일으켜 식민지에서나마 민족자본을 형성 했을 것이다.2차대전에 그들은 우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끌어냈지만 모두 육군으로 몰아갔을 뿐 해군에는 입대시키지 않았다.육군에서는 총알받이로 쓸수 있지만 해군에서는 기술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기술로부터 조선인을 철저히 차단하던 그들에게 우리는 식민지를 영위하기에 너무나 옹졸한 지배자를 본다. 우리에게는 왜 최린·이광수·최남선은 있었지만 간디가 없었는가.그들의 정부가 비교적 민주적일 때 우리에게도 도쿄 한 복판에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일본인 기자들과 독립만세를 부른 지사가 있었다.그러나 군국주의자들의 집권은 우리 지사들의 국내활동을 전혀 불가능하게 했다.단순한 학술단체인 한글학회의 박멸에서 보듯,그들은 힘으로 지배하는 패도는 알았으되 덕으로 다스리는 왕도는 몰랐다.간디의 위대함은 역설적으로 영국의 양도다.또 우리에게 간디가 없었음은 바로 일본의 수치다.
  • 이장영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1920년대 만주항일투쟁 주도/청산리대첩뒤 10개 독립단체 통합/대한독립군단 창설… 초대 참모장 역임 무장독립단체의 통합체인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을 역임한 백우 이장령선생은 1881년 5월20일 충남 천원군 목천면 서리에서 태어났다.어릴 때부터 결단력이 유달리 강했던 선생은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1903년 육군부위로 승진했으나 1907년 8월1일 대한제국군해산령이 내려진 것을 계기로 해외에서의 조국광복투쟁을 결심하고 1907년 11월20일 중국 동북지방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했다.1905년 을사조약후 최초의 국외망명자가 된 것이다. ○충남 천안서 출생 선생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삼원보에 정착한 이회영형제를 비롯한 신민회 간부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선생은 이씨형제와 신흥강습소를 창설하고 교관이 돼 애국청년들의 군사훈련과 독립정신 고취에 헌신한다.1920년 8월 일제의 강압으로 학교가 폐교될 때 까지 2천1백여명의 독립군이 배출된 데는 선생의 공이 컸다. 선생은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을 기점으로 대종교의 지도자 서일·신규식·김헌·김성주를 중심으로 결성된 군정부(일명 대한군정서)의 참모장으로 임명됐다.대한군정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면서 북로군정서로 개칭된다. 북로군정서 소속 군은 북간도지방의 군사주력부대로서 군인을 모집,훈련시키고 무기를 구입하여 임전태세를 확립하는 한편 곳곳에 정보연락기관을 설치했으며 근거지는 왕청현 십리평 일대의 30여리에 걸친 심림지대였다. 북로군정서 군은 소련령의 블라디보스토크등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구입,무장하고 전투훈련을 계속했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은 독립군 대토벌작전을 계획하고 중국에 은근한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중일 양국은 우호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영토내에 독립군 대부대가 무장하고 일본에 항전하고 있는 것은 중국당국에서 독립군을 보호하는 결과이므로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일본의 내정간섭을 불쾌하게 여겼으나 싸울 능력이 없었던 중국은 독립군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독립군에게는 산중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북로군정서 군은 좀 더 실력이 증강될 때 까지는 일본군과의 정면전쟁은 피할 생각이었다.그러나 1920년 9월20일 이범석을 단장으로 이동준비를 서두르던 중 예기지 않았던 훈춘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군의 조종을 받은 마적 4백여명이 훈춘성을 공격하면서 일본영사관을 일부러 습격하고 일경간부 가족 부녀자 9명을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킨다.일본은 이 자작극을 구실삼아 중국당국의 양해도 받지 않고 연대병력을 전격적으로 출동시켜 한국인 부락을 모조리 습격했다.일본군은 북로군정서 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협공작전을 폈으나 북로군정서 군이 이를 인지,서로군정서와 합류하고 백두산지역에 새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안도현으로의 이동을 개시한다.그러나 일군의 집요한 작전으로 일전을 불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렀다.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25㎞에 달하는 긴 터널과 같은 계곡으로 좌우에는 울창한 삼림지대로 겨우 인마통행만이 가능할 정도였다. ○1천2백명 사살 북로군정서 군은 1제대장 김좌진장군과 2제대장 이범석장군의 지휘로 요충지에 군사를 매복시키는등 전투준비를 완료했다.1920년 10월20일 상오 9시 안천소좌가 이끄는 일본군이 지형정찰도 하지 않고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부대의 매복지점에 들어서자 독립군은 일제사격을 가해 일거에 패퇴시켰다.일본군 본대까지 달려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으나 유리한 지형을 이용,포진하고 있는 독립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20일부터 25일까지 10여차례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이 전투가 독립운동사에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이다.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1천2백여명이 사살됐으나 독립군은 불과 1백여명만이 전사했을 뿐이다.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 군의 주도아래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대한정의군정사등 10개 독립군단체는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된다.선생은 이 단체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됐는데 병력은 3천5백명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이후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고 전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소련영토로 이동,러시아혁명의 와중에 있던 공산계열인 소련군과「동상이몽」식이었으나 한동안 손을 잡는다.속뜻이 달라 소련군과 갈등관계를 유지하던 독립군은 소련과 캄차카반도연안의 어업협상을 벌이던 일본이 『소련영토에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 우호관계상 적절치 못하다』는 근질긴 항의때문에 무조건적인 무장해제를 통고받는다. 1921년 6월28일 소련군은 통보를 무시한 독립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독립군은 이 싸움에서 3백여명이 전사하고 2백50여명이 행방불명이 되는등 큰 피해를 입었다.흑하사변으로 불리는 이 참변후 선생은 중국 동북지방으로 피신했다. ○건국훈장 추서 대한독립군단 재편으로 1924년 3월 대한독립군정서군이 조직되자 선생은 다시 적극 참여했으며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를 열어 독립단체가 통합되려 할 때 윤각과 함께 참가,회의의 주비회장으로 추대되면서 신민부를 조직했고 신민부의 참의원으로 선임됐다. 일제의 압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더욱 가혹해졌으며 선생이 있던 중국 동북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활동의 폭도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평생조국광복을 위해 같이 싸웠던 김좌진이 공산당원에게 살해당하면서 독립운동무대를 상해로 옮기려던 선생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에게 피살되는 불운을 맞게 된다.선생의 나이 51세였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이인영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13도 의병 규합… 1907년 “서울진공” 시도/12월말 8천여명 연합부대 편성·지휘/양주서 집결… 동대문밖 30리까지 진격/무기·병력 열세로 일제에 패배… 한말 15년의병사 마감 『동포들이여,우리는 함께 뭉쳐 조국의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우리는 일본제국의 잘못과 광란을 전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27세 여주서 거병 이인영선생은 1868년 9월23일 경기도 여주군 군북면 교곡동에서 부친 이현상씨와 모친 한씨의 4남매중 맏이로 태어났다. 선생은 27세인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등 압제를 강화해나가자 보다못해 유린석등과 함께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여주에서 의병 5백여명을 규합,왜군과 싸웠다.1896년 여름 고종이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의병해산령을 공포하자 선생은 할 수 없이 의병을 해산하고 경북 문경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이후 일제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군을 해산시킨 뒤 고종을 폐위하는등 더욱 오만무례한 행동을 자행,나라의 형세는 말이 아니었다.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고 있을 때 강원도에서 의병 2천여명을 일으킨 이은찬 이구채등이 선생을 통솔자로 모시기 위해 찾아왔으나 부친의 병이 깊을 때여서 선뜻 허락을 하지 못했다.이은찬등은 나흘동안을 유숙하며 선생의 결단을 촉구하자 선생은 마침내 허락을 하기에 이른다.1907년 7월25일이었다.선생은 즉시 원주로 가 의병원수부를 설치한 뒤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됐다. 선생은 곧 국내외에 격문을 발송했다.일제는 인류의 적이므로 분쇄,조국의 독립을 찾자는 내용이었다.해외동포들에게도 격문을 보내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많은 우국지사들이 이 격문에 감동,의병으로 참가,그 수가 무려 1만여명에 달했다. 선생은 이때부터 1907년 11월까지 원주·철원등 강원 지역에서 38차례나 일군과 항전했다. ○일군 접전 38차례 선생은 시골에서 아무리 일군과 싸운다해도 서울을 일군이 장악하는 한 국권회복은 멀다고 판단,전국의 의병을 하나로 뭉쳐 서울로 진격시키는 전략을 굳혔다.산발적인 의병활동을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통합,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려는방책이었다. 각 의병대장에게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라는 전갈이 전달된다.선생은 13도 창의대진소 원수부가 설치된 뒤 의병장들의 협의끝에 만장일치로 총대장으로 옹립됐다.선생도 이를 쾌히 승락하고 조직을 정비,관동군(강원도지역)6천여명과 진동군(경기·황해지역)2천여명을 축으로 연합대부대를 편성했다. 서울 진격일을 12월말로 정한 선생은 예하 각 의병대장들에게 경기 양주군 구리면 수택리 일대에 진주토록 했다. 선생은 각 의병진에서 결사대원 3백여명도 엄선했다. 선생은 공격개시에 앞서 심복부하인 김세영에게 격문원고를 작성,서울에 가 이를 인쇄토록 지시했다.인쇄된 격문은 김세영이 직접 서울주재 각국영사관에 전달하게 했다. 선생은 이 격문에서 을사조약의 폐지와 13도 창의대진소를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 뒤 2천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한다.그러나 이때 이미 일군은 수천명의 보병과 기마병으로 망우리 일대 군사요충지를 선점,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결사대원이 앞장서 싸웠음에도 연발총무기로 무장하고 정규군대 훈련을 받은 일군 앞에는 불가항력이었다.선발대 의병은 항일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열악한 화살총으로는 패전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선발대는 설상가상으로 각도 의병진들이 기일내에 도착하지 않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됐다.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망우리고개를 넘지 못한 의병대에 후퇴명령을 내리고 패전의 진용을 재정비할 무렵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1907년 12월25일(양력 1908년 1월28일)이었다.선생은 허위군사장을 불러 군무를 위탁하고 총대장직을 사퇴한다.3년상이 끝나면 다시 합세하겠다는 뜻을 알리고 그날로 문경 고향집으로 달려간다. ○42세때 체포·순국 선생이 부친상을 치르고 있을 때 후임 의병총대장 허위는 소요산까지 퇴군하게 되었는데 일군이 산을 태워 공격하는 화공작전으로 나와 의병들은 1908년 5월14일 포천 영평에서 체포되는 신세가 됐다.의병 15년사의 대미를 장식하려던 서울공략계획은 이로써 무산돼 버렸다. 선생은 이후 시영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북 상주,충북금계동으로 피신생활을 하면서 3년상이 끝나는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마음을 먹었다.그러나 부친의 묘를 성묘하는 것이 단서가 돼 1909년 6월7일 금계동에서 9명의 일군헌병에게 붙잡혔다. 일본 헌병의 가혹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낸 선생은 『당시 전황이 그러한데 어찌 부친이 사망했다고 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은 조선의 규칙인데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효요 부모에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신하가 될 수 없다.그러면 그것이 바로 불충인 것이다』고 답했다.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일왕과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09년 9월20일 사형이 집행됐다.42세때였다.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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