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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탐험대’ 시리즈/송호정 글

    역사책은 좀 말랑말랑할 수 없을까. 아이에게 재미있는 역사책을 쥐어주고 싶은데 기존의 획일적 접근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한국사 탐험대’시리즈(웅진주니어 펴냄)는 반갑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를 나열하던 틀에 박힌 방식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역사를 재구성한 형식이 참신하다. “역사 공부 하자∼”며 어린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의 해답을 역사 속에서 찾기 위해 가상체험 캠프를 떠나는 다섯명의 어린 주인공들. 게임세대의 정서에 맞도록 그들은 모두 귀여운 캐릭터의 아바타들이다. 예컨대 1권 ‘국가’편(송호정 글, 이용규 그림)은 아바타들이 창덕궁 불로문을 지나는 것으로 운을 뗀다. 불로문을 들어선 순간 갑자기 거대한 성벽 아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서있다. 아바타 친구들이 시간을 거슬러 떨어진 곳은 우리 역사 속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도성 왕검성. 눈 깜짝할 사이에 2100여년 전으로 돌아간 주인공들은 고조선의 재판과정, 전쟁 회의 등을 두루두루 살피며 역사현장을 체험한다. 이들은 부지런히 캠프를 옮겨다닌다.5세기 통일신라, 서방세계에 ‘코리아’란 이름을 널리 알린 고려, 조선과 대한제국…. 천연색 현장사진, 사실감을 견지한 삽화 등이 설명과 함께 다양하게 곁들여진다. 그러나 한국사에 대한 기본정보가 전혀 없는 아이라면 술술술 책장을 넘기기엔 까다로울 수도 있지 싶다. 2권 ‘문화’편(최준식 글, 박은희 그림)이 함께 나왔다. 과학 교통 음식 전쟁 가족 주거 등 다양한 테마의 책들이 잇따라 출간될 예정이다. 초등3년 이상. 각권 9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마지막 황세손’ 빈소 조문객 줄이어

    창덕궁 낙선재에 마련된 황세손 고 이구씨 빈소에는 21일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최규하 전 대통령, 이해찬 국무총리,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 정동채 문화관광부장관 등이 보낸 조의화환이 놓였으며, 김원기 국회의장은 이날 오전 직접 빈소를 찾아 고인의 쓸쓸한 죽음을 애도했다. 이날 오후 2시쯤에는 본관이 전주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빈소를 찾았다. 조문을 마친 이 전 총재는 장례위원들과 환담하며 “고인은 역사의 비극을 대표하는 분이었다. 외로운 말년이었음에도 돌아가신 뒤 장례위원들이 이렇게 애써 주셔서 다행”이라고 위로했다. 이어 정동채 문화부 장관과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함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정 장관 일행을 맞은 이환의 공동장례위원장은 “이번 일이 조선왕실의 마지막 행사인 만큼 낙선재에 상청을 설치해 아침·저녁으로 상식(喪食)을 올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이에 대해 유 청장은 “상청 설치 등의 문제는 문화재위원회에서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다. 이와는 별도로 24일 영결식에 이은 반차행사, 노제 등의 장례행사를 위해 8000여만원의 예산을 집행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반인 조문 첫날인 이날 오전 빈소에는 일본 홋카이도에서 온 일본인 주부관광객 5명이 찾아와 눈길을 끌었다. 이들 중 시오자와라(30)는 “어제 관광안내원을 통해 대한제국 황세손의 별세 소식을 듣고 일부러 조문을 왔다.”며 “한·일 간의 슬픈 역사 때문에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황세손 영결식은 24일 오전 10시 창덕궁 희정당에서 치러지며, 반차행렬과 노제 등 장례 절차를 마친 유해는 남양주시 금곡면 영친왕 묘역에 안장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비운의 황세손 日서 화장될 뻔…

    20일 오후 서울 창덕궁 낙선재. 멸망한 황실의 아픔을 온 몸으로 지켜본 한 사내가 주검으로 돌아왔다. 지난 16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쓸쓸하게 숨진 고종 황제의 황세손 이구(李玖·1931∼2005)씨. 그는 영친왕(1897∼1970)과 일본 왕족 이방자(1901∼1989) 여사의 아들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적통이다. 뒤틀린 대한제국의 역사를 뒤로 한 채 홀로 죽음을 맞은 이씨는 빈청(殯廳·빈소)이 마련된 낙선재에서는 외롭지 않았다.300여명의 전주 이씨 종친들이 그를 맞았다. 이날 낙선재 돌계단에서 그를 대신한 귀국 보고가 낭송되자 “저하, 드디어 오셨구려….”라는 울음섞인 말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월세 6개월 못내 호텔 전전…비운의 죽음 그의 일본 생활은 대한제국의 마지막처럼 찌들리고 초라했다. 이씨는 일본에서 거주했던 아파트의 월세를 6개월치나 내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그는 외가의 도움으로 일본 왕궁이 보이는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 투숙해 있었다. 그의 마지막을 목격한 호텔 종업원에 따르면 “유카다(일본 전통 홑옷)를 입은 채 화장실 양변기에 앉아 우측 45도 각도로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숨진 그의 품에서는 미국 여권이 나왔다. 이씨는 미국 MIT 유학 시절 미국 시민권을 딴 이중국적자였다. 이 때문에 이씨의 유해를 국내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미국 대사관에 사망 사실을 알리고 주민등록 증명서를 팩스로 받아 다시 주일 한국대사관에 제출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는 생전에 “나 같은 인생이 다시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 정부는 4∼5년전부터 생활비와 품위유지비 명목으로 다달이 100만엔 정도를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생활 형편이 썩 좋지 않았다.”는 전언이다.●일본 천왕 사절 조문 예정 이씨의 유해를 둘러싼 뒷얘기도 일부 공개됐다. 이환의 대동종약원 이사장은 “외가 친지인 나시모토가 밀장(密葬·비밀장례)을 한 뒤 화장을 하자고 제안해 분노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이 영친왕을 끌고 간 것도 부족해 황세손마저 화장하고 숨기겠다는 것이냐.’고 항의했다.”면서 “일본측에 황세손으로서 예우를 강력히 요구했다.”고 말했다. 종약원은 조문하는 종친들에게 유해를 공개할 뜻을 내비쳤다. 이 이사장은 “일본 천왕 사절이 조문할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왕실에서 누가 올지는 모르지만 조선 황세손의 마지막 가는 길을 국왕의 붕어(사망의 높임말) 수준에 맞게 예를 갖출 것”이라고 말했다.●사손(후계자)은 이미 내정, 의친왕 손자 유력 자녀없이 숨진 이씨의 대를 이을 사손(후사를 이을 양자)도 내정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씨는 1958년 미국 여성인 줄리아 여사와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자 1982년 결국 헤어졌다. 이 때문에 종약원은 3∼4년전부터 이씨에게 수차례 사손 책정을 건의했고 이씨는 이에 따라 사손 후보자를 두세차례 만나기도 했다. 이 이사장은 “황세손이 숨지기 1주일 전 문서로 후계자를 내정했고 사인을 했다. 본인 의사가 가장 중요한 만큼 이사회를 통해 검토한 뒤 장례식인 24일 책봉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종황제의 손자로 뉴욕대를 졸업한 뒤 모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의친왕의 손자 이원(43)씨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9일장… 종묘서 노제 장례식은 9일장으로 24일 오전 10시 창덕궁 희정당에서 열린다. 이환의 대동종약원 이사장과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공동장례위원장을 맡는다. 종로4가 종묘 앞에서 노제를 거행하며 운구에는 600여명의 반차행렬이 뒤따를 전망이다.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고종황제릉) 뒤편의 영친왕 묘역이다. 김문식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는 “국왕이 사망했을 때 치러지는 국장(國葬) 절차와 비슷하지만 규모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 日서 별세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씨가 지난 16일 별세했다고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19일 밝혔다.74세. 대동종약원측은 이씨가 일본 나가사키의 한 호텔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이환의 이사장 등은 정확한 사인 규명과 시신 운구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씨는 고종황제의 왕자인 영친왕과 이방자(나미코토 마사코) 여사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나 맏아들 진(晉)이 생후 8개월만에 사망해 사실상 이씨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이었다. 여기다 이씨 역시 자식이 없어 이씨의 사망으로 대한제국의 적통은 끊기고 말았다.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본의 왕공귀족학교(王公貴族學校) 학습원 중등과 재학 때 해방을 맞았다. 고등과를 마저 마친 고인은 맥아더 장군의 도움으로 56년 미국 MIT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그 때 만난 미국 여인 줄리아나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갖지 못했다.이승만 대통령의 반감 때문에 63년에야 귀국,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지만 사업이 부도나면서 79년에 다시 일본으로 갔다.82년에는 대를 잇지 못했다는 종친들의 종용으로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그 뒤 96년 영구 귀국했으나 다시 사업에 실패한 뒤 지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서 요양해 왔다. 장례는 이환의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이사장과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은 ‘황세손 장례위원회’가 주관해 9일장으로 치를 예정이다. 빈청은 고인이 한국에서 있었을 때 머물렀던 창덕궁 낙선재에 마련했으며,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 뒤편 영친왕 묘역(영원 구역)에 마련할 계획이다.(02)765-2124.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사설] 한·일 역사공동위 그래도 계속돼야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3년 활동을 끝내고 어제 최종 보고서를 냈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공통된 인식을 담은 것이 아니라 양쪽 학자들의 주장을 각각 담은 논문을 나열하는 데 그쳤고, 여기 포함된 일본학자들의 역사인식은 우리에게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일본학자들은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이 합법 절차에 의한 ‘병합’이며 식민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기존의 주장에서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게다가 숱한 희생자를 낸 항일 의병·독립 항쟁을 무시한 채 당시 한국인의 국가·국민의식이 희박했다고 폄훼하기까지 했다. 성과라면 고대사 부문에서 일본의 일부 극우학자들이 주장해 온 ‘임나일본부설’이 허구라는 데 합의를 본 정도이다. 이러니 일본학자들의 역사인식이 후소샤판의 역사왜곡 교과서와 다를 바 없다는 둥 더이상 한·일 공동의 역사연구가 필요하냐는 둥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접국가 사이의 과거사란 얽히고설키기 마련인데, 이를 3년동안 공동연구한 것만으로 동일한 역사의식이 형성되기를 기대하는 자체가 무리이다. 독일과 프랑스·폴란드가 역사 공동교재를 만드는 데 30년 걸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번 1차 위원회의 의미는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역사연구를 시작했다는 점과, 양쪽이 쟁점사항별 인식차를 확인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할 일은 공동연구의 틀을 유지·발전시키면서 인식차를 어떻게 메워나갈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학자들이 연구성과를 더욱 쌓아 일본측 주장을 논리적으로 압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도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 한·중·일 공동저술 새 역사교재 ‘미래를‘ 출간

    한국·중국·일본의 양심세력들이 머리를 맞대고 집필한 3국 통합 근현대사가 26일 출간됐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동기가 돼 사상 첫 3국 공동 역사서가 탄생한 것이다. 세 나라 역사학자와 시민사회 인사 등 54명이 참여해 3년여 동안 만든 새 역사책의 이름은 ‘미래를 여는 역사’.‘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는 이날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출간기념회를 열고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 명의의 공동취지문을 발표했다. 편찬위원회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반성하지 않고 합리화 하는 것은 이웃나라는 물론 일본국민들에게도 불행한 일”이라면서 “불행한 과거를 넘어 3국이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미래가 펼쳐지기 바란다.”고 밝혔다. ●일제의 침략과 강압정책 공식 인정 ‘미래를 여는 역사’는 16세기 중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3국 역사를 ▲개항 이전의 3국 ▲개항과 근대화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 한·중 양국의 저항 ▲침략 전쟁과 민중의 피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동아시아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등 6개 장으로 구성됐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를 다룬 2장과 3장.‘미래를 여는 역사’는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대한제국이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간섭, 군대해산, 언론탄압, 사법권 강탈 등에 나선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는 일본 극우파들이 만든 후소샤(扶桑社)의 ‘새로운 역사교과서’에서 축소되거나 왜곡됐던 대목이다. 후소샤는 대한제국 병합 과정을 ‘근대화’라고 미화했다. ‘미래를 위한 역사’는 또 “(일본이 주장한)대동아공영권은 식민지 지배를 치장하는 논리일 뿐이며 전쟁수행을 위한 자원, 자재, 노동력 조달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역시 후소샤 교과서에서 각국의 자주독립과 상호제휴에 의한 경제발전, 인종차별 철폐 등에 공헌했다고 미화했던 부분이다.‘미래를 위한 역사’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위안부로 끌려간 한국여성은 대부분 미혼의 10대 소녀들이었다. 한국, 중국, 필리핀 등에서 위안부로 동원된 각국 여성의 수는 최소 8만에서 15만명으로 추정된다.”고 썼다. ●공동 근현대사 탄생의 배경 한·중·일 3국 시민단체와 역사학자들은 2000년 일본에서 출간된 후소샤 교과서가 극우파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반영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한 국제연대에 나섰다.2002년 3월 중국 난징국제학술대회에서 각국 중학생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근현대사 교재를 개발하기로 합의했으며 한국 23명, 일본 14명, 중국 17명이 공동 집필진으로 참여했다. 씌어진 언어와 책의 판형은 다르지만 내용은 모두 같다. 한·중·일을 오가며 11차례의 회의가 진행됐다. 공동교재 총괄 편집위원회에는 한국측에서 교과서운동본부 대표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와 김성보 충북대 교수가 참여했다. 중국측에서 부핑(步平)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장, 우광이(吳廣義) 중국사회과학원 세계경제정치연구소 연구원, 일본측 오비나타 스미오(大日方純夫) 와세다대 교수, 다와라 요시후미(俵義文) 어린이와교과서전국네트워크21 사무국장 등이 포함됐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한민족 위해 일한 배설 기억해야”

    “나의 수백마디 말보다 대한매일신보의 한줄 글이 더 위력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기 대한매일신보를 두고 탄식하며 한 말이다. 이토가 탄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을사늑약 체결 뒤 고종황제의 직인이 없다는 점을 제일 먼저 지적한 신문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박은식·양기탁 선생 같은 민족주의 필진은 날카로운 붓을 휘둘렀다. 물론 대한매일신보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은밀한 지원과 창간자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이 영국인이어서 마음대로 건드릴 수 없었다는 점이 작용했다. 이런 배설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27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성지공원’에서는 서거 96주년 기념행사가 마련된다. 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배설선생기념사업회 진채호(77) 회장을 만났다. 기념사업회는 올해 사업으로 베델·박은식·양기탁 선생의 동상과 기념관을 짓고, 내년에는 ‘세계언론평화상’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엷어져가는 관심 때문에 속이 상한다고 했다.“백범 김구 선생 기념에는 국가가 이런 저런 지원을 합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박은식 선생 같은 분은 백범 이전에 국무령 등을 지내셨습니다.‘법통’을 제대로 생각한다면 이분들도 기념해야죠.” 그래도 조금씩 변화의 기미를 보이는 것이 힘이 된단다.27일 행사에는 김원기 국회의장의 기념사도 낭독된다. 대통령 화환도 처음으로 올 예정이다. “잘 몰랐는데 대통령 화환이란게 받기 어려운 것이더군요. 아마도 정부쪽에서도 기념관 건립 등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배설은 알려져 있다시피 영국 크로니컬지 기자로 러일전쟁 취재차 한국에 들렀다. 당시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과 영국은 동맹을 맺은 상황. 배설은 당연히 일본 편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상황을 보고서는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진 회장이 배설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비록 외국인일지라도 한국에 공헌한 사람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기억 해준다는 게 우리의 자존심과 위상을 드높이는 일입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고종황제 증손자 이혜원씨 고궁박물관 자문위원 위촉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들인 의친왕(義親王)의 손자 이혜원(본명 全惠源)씨가 문화재청 산하 국립 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고궁박물관 측은 혼례·국장의례 등 황실의 생활·문화사와 관련한 자료를 수집, 해석하고, 박물관에 소장된 대한제국 당시의 황실 유물 정리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이씨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고 24일 밝혔다. 이씨는 의친왕이 타계한 1955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은 슬하에 13남 9녀를 두었는데, 이씨는 그중 9남인 고(故) 이종의 장남이다. 의친왕은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보다 손위였으나, 일제가 그의 반일을 두려워해 어린 영친왕을 순종의 후계자인 황태자로 책봉하고, 유학을 명분으로 일본에 인질로 억류해 일본 귀족과 혼인을 시키는 등 비운을 겪은 주인공이다. 의친왕은 이후 3·1운동 뒤 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돼 강제소환되는 등 일제 강점기 내내 일본에 협력하기를 거절했다. 이런 의친왕을 할아버지로 둔 이씨는 천신만고 끝에 해방을 맞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탄압 때문에 아버지 성 대신 할머니의 전(全)씨 성을 사용해야 했다. 국립 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이씨는 별도의 연구실을 두고 생존해 있는 황실 후손들을 만나 이들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과 사진자료, 황실생활과 가족사에 대한 증언 등을 수집, 정리하게 된다. 박물관측은 이들 자료는 고증을 거쳐 추후 연구자료집으로 발간하기로 했으며, 특별전을 통해 일반에도 공개할 예정이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한기총, 대한제국 워싱턴공사관 구입 추진

    한일합병으로 헐값에 일본에 넘어간 미국 워싱턴공사관 건물을 되사려는 운동이 개신교 단체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평신도위원회는 최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평신도지도자 결의대회’를 열고 미국 워싱턴DC소재 ‘대조선 주차(駐箚·주재) 화성돈(華盛頓·워싱턴) 공사관’을 재매입키로 결의했다. 이 건물은 고종 황제가 구한말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운 것으로,1891년 대한제국이 매입했으나 한일합병으로 단돈 5달러에 일본으로 넘어갔다. 건물은 현재 미국인의 개인 소유로 되어 있으며 국내 기독교인들은 지난 3월 소유자를 만나 매도 의사를 확인했다. 박재윤 장로(대법관), 신낙균(전 문화관광부 장관) 권사 등 평신도 지도자들은 앞으로 100만명 서명운동과 함께 재구입 비용 10억원 모금운동을 교계 안팎에서 벌이기로 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대한제국기의 근대화’ 학술대회 김도형 연세대 사학과 교수

    ‘대한제국기의 근대화’ 학술대회 김도형 연세대 사학과 교수

    4일 연세대 연희관에서는 ‘대한제국기의 근대화’와 개혁사업을 주제로 연대 국학연구원과 UCLA간 공동학술대회가 열렸다. 사학자들에게 중요한 시기로 꼽히는 대한제국기를 되돌아보기 위한 자리다. 한국의 근대화 성격을 두고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이 갈리는 지점도 여기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서 있기도 한 이번 공동학술대회의 좌장을 맡은 연세대 사학과 김도형 교수를 학술대회 전에 만났다. 초여름 땡볕에 땀을 흘리는 기자에서 생수 한 통을 건넨 뒤 김 교수는 “학계에서 일제시대 경제발전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운을 뗐다. 그럼 무엇에서 차이가 나는가.“결국 역사변혁의 주체세력이 누구냐, 또 지금 한국 사회의 과제가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한 기본생각 자체가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소농사회론의 맹점은 민중변혁 부정 식민지근대화론은 조선에는 서구적 근대화의 계기인 ‘경영형 부농(富農)’이 없고 자급자족적인 ‘소농(小農)’만 있었다는 ‘소농사회론’을 내세우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소농사회는 부르주아처럼 서구적 방식의 근대화를 이끌 계층이 없어 강력한 국가권력이 개입합니다.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이 권력을 1930년대 일제 파쇼 세력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이들은 또 그 이전 갑신정변 같은 개화파의 움직임이나 광무개혁 같은 고종의 근대화 작업을 모두 부정할 뿐 아니라 동학혁명과 같은 민중적 변혁의 가능성도 부인한다. 조선의 변혁가능성 자체를 봉인한다는 점에서 일제가 내세웠던 ‘조선정체론’과도 비슷하다. 이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긍정론과도 연결되어 있다. 마침 식민지근대화론자로 꼽히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지난달 29일 열린 교과서포럼 심포지엄에서 박정희 시대에 따라다니는 ‘저임금에 기반해 성장했다.’는 꼬리표를 떼버리자고 주장했다. 임금률과 한계노동생산성의 증가 추이가 비슷해 결코 저임금이 아니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 교수의 논리상 그런 주장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수탈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야 자본이 축적되니까요. 수탈은 결국 저임금구조입니다. 이건 영국 등 수많은 국가에서 확인된 사례들입니다. 박정희 시대라면 저임금 대상은 노동자·농민이고, 식민시대라면 조선인이 되는 것이지요.”박정희 시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과 계급·계층간 차별을 함께 봐야 하듯, 식민시대에서도 경제성장과 동시에 일본인·한국인간 차별도 들여다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식민시대를 긍정하려면 박정희 시대를 긍정할 수밖에 없고, 동시에 박정희 시대를 긍정하려면 식민시대를 긍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서 나온다. 한·일 양국 우익 세력의 논리적 친화성에 대한 설명이다. ●식민시대 ‘삶의 질’·‘역동성’ 주목해야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았을까.“역사란 사실 그 자체뿐 아니라 그 사실이 당시 사람들의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따져야 합니다.” 김 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에서 ‘민족’ 같은 개념이 부정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비판했다.“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다못해 개인이 쓰는 일기에도 ‘나’라는 주인공이 있지 않습니까.”식민지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간 논쟁에 대한 대안으로 김 교수는 다양한 가능성과 그 가능성들이 빚어내는 ‘역동성’에 주목하자고 제안했다.“고종과 개화파와 농민운동 등 조선 내부에서도 근대화 움직임이 있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도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현실은 힘의 관계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국면마다 이들간 역학관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다이내믹한 상황을 봐야 합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고종 보면 근대화 파악 가능 고종은 개명군주였나, 도학군주였나, 절대군주였나. 지난해 교수신문 지상을 통해 6개월여 동안 벌어진 논쟁의 주제였다. 풀어서 말하자면 고종이 근대화를 지향했느냐, 안 했다면 전통적 유교 군주에 불과했느냐 아니면 러시아의 차르와 같은 서구적 의미의 ‘왕’을 지향했느냐다. 이 논쟁은 단순히 고종 개인에 대한 평가로 끝나지 않는다. 고종 시대가 곧 한국 근대의 뿌리였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근대화의 싹이 한국에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 논쟁의 뿌리는 30여년 전인 1976년 광무개혁 성격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무개혁은 1897년 대한제국 수립부터 1904년 러일전쟁 때까지 고종이 추진한 근대화작업이다. 이 작업이 실체가 있었느냐를 두고 두 입장이 다퉜다. 신용하 교수 등이 주도한 쪽에서는 개화파에 무게를 뒀기에 왕권강화에 초점이 맞춰진 광무개혁에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반면 김용섭·강만길 교수쪽은 외세에 기댄 개화파보다 동학혁명에서 엿볼 수 있는 농민의 자생적 힘을 강조하는 데 무게를 뒀다. 이 관점에서 광무개혁은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 특히 김용섭 교수는 조선후기 농업경제를 분석, 이때 이미 자본주의의 싹이 있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이 주장은 박정희시대 국사교육 강화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신화라는 비판도 받았다. 시간이 흐른 뒤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조금 색다른 관점을 내놨다. 김용섭·강만길 교수처럼 조선 스스로 근대화하려 했다고 보되 그 힘을 농민에게서가 아니라 고종에게서 찾은 것이다. 이 교수가 고종과 광무개혁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 등 최근 부상하고 있는 일군의 경제사학자들은 반대로 대한제국은 파탄 직전이었기에 굳이 살펴볼 가치를 못 느낀다는 입장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고종은 외세의 바람 앞에서도 유교 경전이나 외우던, 혹은 이미 기진맥진한 조선을 부둥켜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도학군주일 뿐이다. 반면 고종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과대평가하는 것 역시 근거가 빈약하다는 쪽에서는 고종이 서양의 절대군주제를 지향했다고 보는 지적도 있다. 고종의 지향점을 러시아의 차르로 보고 있는 경희대 허동현 교수가 대표적 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8)목포항 100년의 진실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8)목포항 100년의 진실

    압록강의 신의주, 대동강의 진남포, 한강의 인천, 금강의 군산, 그리고 영산강에 목포가 건설되었다. 개항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에 집중되었으니 이는 바다를 통해 들어온 해양제국들이 젖줄인 강을 따라서 식민 내륙까지 뻗어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준다.1897년 7월4일, 조선정부는 각국 사신 앞으로 동년 10월1일을 기해 목포와 진남포 두 항구를 외국통상을 위하여 개항하고 외국인 거주를 허가하는 칙령을 통보한다. ●1897년 10월 자주적으로 개항 청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이노우에(井上馨)영사는 1895년 1월6일 기선을 타고 인천을 떠나 약 한달반 동안 서남해안을 시찰하고 현재의 목포가 가장 합당한 지역임을 건의한다. 그러나 일본의 외압과 무관하게 개항 초기는 아직은 대한제국기로서 제한적이나마 자주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일본의 압력에 의해 개항이 서둘러지기는 했으나 상업을 확장하여 민국의 이익을 발달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칙령에 의해 자주적으로 개항한 셈이다. 목포의 출발은 매우 활기찼다. 자주적이었던 만큼 초기 건설도 일본 뜻대로 되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힘이 미쳤기 때문. 조계지 이외의 도시건설은 전적으로 조선인 손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헌병대목포분견소가 들어서서 위압적으로 나선다. 마침내 1906년에 목포주재 일본 이사청 이사관인 와카야마(若松兎三郞)는 각국 거류지에 관한 권한을 빼앗아 간다. 이로써 목포개항장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만다. 한일합병이 되자 일제는 가장 먼저 시가지를 33정 51구획의 일본식으로 바꾼다. 마치(町)는 일본인 거리, 한국인거리에는 동(洞)을 붙여 이름에서부터 차별한다. 즉 목포는 도시계획상의 이중성을 갖고 태어났다. 서울 북촌의 양반, 남촌의 일본인처럼 일본마을(각국공동거류지역)과 조선마을(옛 목포부)로 나뉜다.‘제국주의신도시’ 목포출신의 동반작가 박화성은 데뷔작 ‘추석전야’에서 ‘남편으로는 늘비한 일인의 긔와집이오 중앙으로는 초가와 넷 긔와집이 섯겨있고, 동북으로는 수림 중에 서양인의 집과 남녀학교와 예배당이 솟아있는 외에 몇 긔와집을 내놓고는 땅에 붙은 초가뿐이다. 다시 건너편 유달산을 보자, 집은 돌틈에 구멍만 빤히 뚫러진 도야지막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히 빈민굴이다.’고 하였다. 일본과 한국으로 분명하게 갈려진 목포시의 이중적 성격을 주목한 고석규(목포대·‘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의 저자) 교수는 ‘일제 강점기 서울을 비롯한 식민지 근대도시는 왜곡된 근대 도시화가 만들어놓은 공간의 이중성과 식민지라는 억압구도가 낳은 대중문화의 이율배반성, 신파성을 동시에 갖는 기이한 도시’라고 압축정리한 바 있다. ●바다는 강을 잃고 강은 바다를 잃어… 목포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산강을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하다. 그래서 영산포 북관정에서 목포하구언까지 내려가는 뱃길을 택하였다. 마침 영산강살리기운동이 한창 벌어지면서 도지사 이하 여러 기관장들이 탄 배에 동승하였다. 배는 영산강을 내려가다 영암 몽탄나루에서 잠시 쉬고 다시 유장하게 흘러가다 하구언에서 막혔다. 그쯤에서 전남도청 이전부지인 ‘남악신도시’가 강가에 보인다. 다시 말하여, 목포는 영산강이 바다와 만나는 길목에 자리잡은 요충지인데 바다는 강을 잃고, 강은 바다를 잃어 엉망이 돼버렸다. 바닷배가 오르락거리면서 바다와 직접적으로 통하는 도시였던 광주시도 바다는커녕 강물조차도 끊긴 단절의 도읍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이중환도 택지리에서 ‘영산강은 서쪽으로 흘러 무안 목포에 이르는데…강 건너는 큰 평야를 이뤄…풍기가 화창하고 땅은 넓고 물자도 넉넉하여 서남쪽 강과 바다는 운수의 이익을 통제하여 광주와 함께 명읍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광주를 오로지 내륙도시로만 간주함은 대단히 그릇된 시각이며, 하구언만 터진다면 충분히 해양연계도시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일본인·조선인 마을 차별 심각 목포는 발전을 거듭했다. 전남의 현관이요 물산집합의 중심지로 조선에서는 제3위를 점할 만한 중요항이자 상업의 요지로 자리잡았다.1930년대에 인구 6만을 돌파하였다. 전남에서는 최초 최대로 근대문명의 세례를 받으며 전국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앞서 있었다. 그러나 그 세례는 사람이나 구역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내려졌던 것은 아니다. 차별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특히 일본과 조선인마을에 대한 차별은 일제강점기 목포도시화의 주요특성이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살기 편하도록 도시를 꾸몄다. 정거장, 관청, 은행, 학교, 시장 그밖에 근대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주요기관을 자신들과 가깝고 편리한 곳에 세웠다. 상하수도, 도로포장, 교통통신, 전기, 가스, 보건, 위생 등도 예외없이 일본인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그네들 거리는 짜임새 있고 깨끗하고 편리하였다. 반면에 조선인거리는 무참하기 그지없었다. 농촌에서 패잔한 무리와 봇짐행상들이 방황하는 곳이 상업도시 목포항의 이면이었다. 청년은 생선장수·지게벌이, 여자는 덕장수·고구마장사, 소년은 겐마이빵·덴뿌라·수건양말장사, 소녀는 콩기름·나물장사 등으로 길거리에 나섰다. 이들은 교통정리를 한답시고 내쫓는 바람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가련한 신세였다. 생활고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걸인도 무리지어 나다녔다. 엄청난 숫자의 유곽거리가 존재하여 창녀들이 득실대고 성병이 만연하였다.‘항구의 낭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비참하였다. ●목포시내는 ‘거리 박물관’ 영산강하구언에서부터 찻길을 내달리며 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목포시 구분법을 제시하였다.“영산강변의 전남도청부지가 21세기형이라면,1980년대 매립지에 1990년대 세워진 하당신도시는 합리주의식이지요. 신식모텔들이 아파트와 공존하는 90년대식 합리주의의 거리를 벗어나면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같은 공공시설이 몰려있는 문화의 거리가 나오지요. 세계은행(IBRD)차관으로 만들어진 1970년대식 거리가 나오는데 보행자중심 거리를 만든다고 어정쩡하게 T자형도로를 만들어 어데서고 직진이 불가합니다. 저기에 삼학도가 보이고 유달산이 있지요. 거기가 조선인과 일본인거리가 판이하게 갈렸던 목포시내지요.” 이쯤되면 ‘거리박물관’이다. 일본식과 한국식,70년대식,80년대식,90년대식,21세기식이 병존하면서 차곡차곡 쌓여져서 항구도시를 만들어 왔다. 지난 백년사를 웅변해주는 목포답사 1번지는 오늘날 목포문화원으로 쓰이는 일본영사관이 아닐까.1900년(고종37년) 러시아건축가의 손으로 지어졌는 바, 최고급 대리석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는 등 백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견고한 모습 그대로다. 이곳에서는 동척을 비롯하여 일본인 조차지역이 한눈에 굽어보인다. 권위적인 위치에 도도하게 자리매김하였다. 목포이사청, 목포부청사 등으로 쓰이다가 광복 후에는 시청, 시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었다. 문화원에서 조금 내려오니 동양척식회사 석조건물이 나온다.1920년대 영산포에서 엄청 몹쓸 짓하다가 이리로 옮겨 왔다고 전해지는 바, 남도의 고혈을 빨아먹고 성장한 기관이다. 동척 목포지점은 전국 최대의 소작료를 거두어들였으며 부동산 담보 대부, 고리대 등으로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었다.1930년대 유행한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은 이같은 슬픈 사연을 안고 흐르는 것이리라. 해군 소유였다가 철폐될 위기에 몰린 것을 시민들이 되살려서 문화공간으로 발돋움할 채비를 갖추고 있으니 동척 부산지점과 더불어 전국에 유일하게 남았다. 백미는 역시 이훈동정원이다.1999평이라는데 우치다니 만빼이란 사람이 1930년대에 세웠다. 광복 이후에 해양경비대가 주둔하였고, 국회의원 박기배 소유를 거쳐서 1947년에 조선내화를 설립한 이훈동(1917년 해남출신)에게 넘어갔다. 목포의 진산인 유달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았으며 입구정원, 알뜰정원, 임천정원, 후원 등으로 이루어진다. 남도에서 가장 큰 정원으로 나무 종류만 113종에 이르러 난대지방식물의 보고다. 일본식 석등은 물론이고 일본식다원정, 연못, 석탑 등이 배치되어 있다. 정원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노적봉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적을 시험할 요량으로 위장볏가리를 두르게 하여 싸움 한번 없이 물리쳤다는 전설의 주인공이 왜식정원을 굽어보고 있다. 실로 아이로니컬한 대목이다. ●충무공 진지가 목화수탈 현장으로 노적봉에 오르니 코 앞에 고하도가 보인다. 이순신이 명량대첩 후에 1597년 10월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겨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하였다가 이듬해 2월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길 때까지 108일 동안의 진영터다.1722년, 통제사 오중주와 충무공의 5대손 이봉상이 유허지에 이충무공 고하도유적비를 세워 오늘에 이른다. 고하도선착장에는 또 하나의 비석이 있으니 조선육지면발상지비다.1899년 일본영사가 미국산 육지면을 시험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재배에 성공하면서 전국으로 육지면이 퍼졌다. 수확기에는 목포항이 온통 흰 목화로 뒤덮였으니 쌀과 더불어 남도수탈의 상징이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영사의 공적비까지 세웠으니 충무공의 진지가 목화수탈의 현장으로 뒤바뀐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목포 100년은 이렇게 슬프게 흘러갔다. 누가 식민지근대를 이야기하는가. 그 누가 계량적 통계수치만으로 식민지축적론과 식민지개발론을 논하는가. 식민지시대의 인간군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항구의 삶은 식민지의 자본축적이 오로지 일본인만을 위한 것이었고 그 열매는 조선인과는 무관함을 웅변한다. 목포항에 산처럼 쌓였던 쌀과 솜은 남도 백성 수탈의 상징이었다. 그러한즉,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서 강조되고 있는 식민지근대론의 허구와 결과론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국내 일부의 탁상이론가들에게 목포항 방문을 강권하고 싶다. 목포항을 1시간만 걷는다면 근대적 개발이 오로지 민족차별 및 착취를 바탕으로 한 날조였음을 금세 느낄 수 있으리라.
  • 서울 자치구 제례의식 잇따라 거행…전통문화 계승 열기

    서울 자치구 제례의식 잇따라 거행…전통문화 계승 열기

    서울 도심에서 한 해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전통 제례의식이 잇달아 열린다. 새 봄이면 왕과 왕비까지 나서 자연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던 우리 조상들의 뜻을 오늘날 되새겨보는 뜻깊은 행사다. 동대문구(구청장 홍사립)는 20일 사적 제436호로 지정된 제기2동 ‘선농단’에서 ‘선농제향(先農祭享)을 올린다. 선농제향이란 조선시대 역대 국왕이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입춘 뒤 첫 해일(亥日)이 되면 선농단에서 농업신으로 모시던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지내던 제례를 말한다. 이때 왕은 제사를 지내면서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친경(親耕)을 몸소 실행했다. 제례가 끝난 뒤 왕은 행사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소를 잡아 국밥과 술을 내렸는데, 그 국밥은 선농단에서 내린 것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라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 설렁탕의 유래가 됐다. ●동대문·성북구등 풍요·안녕 기원 선농재향과 친경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중단됐다가 1979년부터 제기동 마을주민들이 조직한 ‘선농단 친목회’를 통해 매년 곡우(穀雨)날 다시 열리게 됐다.1992년부터는 동대문구를 중심으로 농림부와 동대문 문화원, 선농제향 보존위원회가 공동주관하는 국가행사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본행사에 앞서 이날 오전 10시부터 동대문구청에서 선농단까지 약 1.3㎞구간에서 학생과 주민 300여명이 함께 참여하는 어가행렬이 재연된다. 경찰악대와 의장대, 기마대 등이 어가행렬의 앞뒤를 호위한다.11시 본행사인 선농제향 봉행이 끝나면 커다란 가마솥에 설렁탕을 끓여 참여한 구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준다. 백일장 등 문화행사도 이어진다. 홍 구청장은 “조선시대 임금이 직접 봉행했던 선농제향은 동대문구만의 지역행사가 아니라 전국의 풍년과 안녕을 비는 국가적 행사로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성북구(구청장 서찬교)는 다음달 6일 사적 제83호로 지정된 성북동 선잠단지에서 ‘선잠제례(先蠶祭禮)’를 개최한다. 선잠제례란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고려 시대부터 국가적인 행사로 매년 봄 길한 뱀날(巳日)에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 신위를 모시고 지낸 제례를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날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에 나서는 침잠례(親蠶禮)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선농제향·선잠제례등 다양 이 행사 역시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부터 중단됐다 지난 1993년부터 구청 주관 아래 다시 열리게 됐다.2003년부터는 구청 대신 주민들이 참여하는 ‘선잠제 보존위원회’를 통해 열리고 있다. 이날 행사는 추계예술대 학생들의 제례악 연주와 함께 봉행하게 되며 ▲신을 맞아들이는 의식인 ‘영신례’ ▲신위에게 예물을 올리는 의식인 ‘전폐례’ ▲신위에게 첫 잔을 올리는 의식인 ‘초헌례’ ▲신위에게 둘째 잔을 올리는 의식인 ‘아헌례’ ▲신위에게 셋째 잔을 올리는 의식인 ‘종헌례’ ▲제주가 복을 받아 작을 올리는 의식인 ‘음복례’ ▲축문을 태우는 의식인 ‘망료례’의 순서로 진행된다. 서 구청장은 “왕이 친경을 하고 왕비가 친잠례를 하면서 신하와 백성 앞에 나서 솔선수범하던 정신과 몸가짐을 오늘날 이어받을 수 있는 소중한 행사”라고 설명했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열린세상] 독도, 위기의 순간에 대비를/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일본 역사교과서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여 문제가 된 지 20여년이 넘었다. 한때 전향적인 교과서 서술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1995년 일본의 사회당 당수인 무라야마 총리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를 정점으로 오히려 훨씬 심각한 극우화의 길을 달리고 있다. 그나마 교과서 문제는 역사적 사실의 선택과 해석에 있어서 다양성의 가능성을 남긴다는 점에서 학술적 검토의 여지가 있지만, 공민교과서로 옮겨 붙은 독도영유권 문제는 가부의 결단을 향해 치달아 나가는 우려스러운 모습이다. 우리나라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안으로 모는 것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절묘한 타이밍 때문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는 근거인 시마네현에의 편입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2월 22일에 일어났다. 육전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둔 일본군이 바야흐로 동해에서의 일전을 앞두고 있을 때이다. 이미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어느 지점이든지 수시로 군사적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영토를 유린한 상태였다. 일본이 추천한 미국인 친일파 스티븐스가 외교고문이 되어 대한제국은 외교권도 침해당했다. 대한제국 국토 전체의 안위와 주권 자체가 유린된 위기의 상황에서 일본의 시마네현이라는 한 지방이 독도를 현에 소속시키는, 자기들만 아는 고시를 발하였다. 일본의 한 지방이 발한 고시가 무슨 국제적 외교적 의미를 지닐까마는 곧이어 진행된 외교권의 탈취와 보호국화, 그리고 일본의 한국병합에 의하여, 독도는 최초로 침탈당한 한국의 영토로서, 병합에 의한 전국토 탈취의 전초요, 상징이 되었다. 일본이 패전한 뒤 전후처리를 위한 강화회담이 195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다. 일본의 적극 반대로 우리나라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없었던 이 회의에서, 애초 연합국 측의 초안에 한국영토로 되어 있던 독도가 일본의 적극 로비로 인해 본안에서는 분명하게 명기되지 못했다. 이후 일본은 이를 빌미로 독도영유권 분쟁을 야기했다.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된 뒤 6·25전쟁이 일어나고 전후복구에 경황이 없어 제대로 국토를 보살필 겨를이 없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30여년 동안 극심한 무역역조를 겪은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를 당했다. 이웃나라 한국의 위기에 대하여 일본 금융기관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앞장서서 투자액을 회수해 감으로써 위기를 부채질했다. 그리고 그 위기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일본정부는 1965년 체결한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외환위기의 극복을 위해 일본의 협조가 절실했던 우리나라는 일본의 안을 받아들여 독도를 한·일간의 공동어업수역에 넣고 말았다. 어업협정이므로 영토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애써 자위하면서. 그로부터 이제 불과 6년여, 일본은 본격적으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한다. 미·일동맹의 강화가 그 배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와 그들 나라와의 영토분쟁을 위한 전초전과 같은 느낌도 주고 있다. 그러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계기로 국가의 재도약을 꾀하려는 일본으로서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거센 반발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독도문제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되면서 수면 아래로 잠복할지 모른다. 문제는 미래에 올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다. 북핵문제가 원만한 결론을 맺지 못하거나 또는 북한정권의 붕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경우의 위기이다. 상대의 위기를 기다리면서 치밀하게 징검다리를 하나씩 놓아가는 일본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공민교과서에 올린 주장을 관철하려 들지 모른다. 독도위기의 해법이 결국 한·일간의 교류와 상호이해밖에 없다는 방향으로 흐를 것을 뻔히 알고 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온축된 상호이해가 한순간에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위기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이웃의 과거행적 때문이다. 나쁜 이웃과 함께 사는 게 불행이라는 한탄은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는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대책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가볼까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가볼까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 시대에 ‘경성감옥’으로 만들어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쓰였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그동안 서대문감옥, 서울교도소 등 여러번 이름이 바뀌었지만 한국근현대사의 아픔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는 4만여명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됐고 해방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자들이 수감됐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지난 98년 문을 연 뒤 현재 역사교육의 현장뿐만 아니라 드라마·영화 촬영지, 연인들의 데이트코스 등으로도 애용되고 있다. 특히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 관련 망언 등의 문제와 맞물려 방문객은 하루 평균 2500여명에서 5000여명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고증 거쳐 일제시대 상황 재현 역사관 양성숙 학예사는 “일제가 우리민족에게 저지른 일을 관람객에게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견학코스로 인기가 높다.”며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문서 등을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고 말했다. 역사관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은 일제시대 때 ‘보안과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역사전시관’이다. 벽에 만들어진 관이라는 뜻에서 ‘벽관’으로 불렸던 고문기구에 직접 들어갈 수 있다. 김현지(공릉초6)양은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사흘 동안 이 곳에 갇히면 온몸이 마비되어 죽게 된다는 말이 실감난다.”고 몸서리를 쳤다. 밀랍인형이 잔혹한 고문장면, 옥중투쟁모습 등을 재현한 장면도 볼 수 있다. ‘제13옥사(공작사)’에서는 벽에 뚫린 구멍에 머리를 넣으면 전기고문을 당하는 착각이 들도록 의자가 부르르 떨리는 전기고문, 손톱을 빼는 고문, 상자에 가둬놓는 고문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유관순 열사가 순국했다는 여성옥사(일명 유관순굴)에서는 높이는 1.48m로 허리를 똑바로 펼 수도 없는 1평 미만의 독감방들을 볼 수 있다. ●‘모래시계’ 배경이 됐던 사형장 역사관 뒤편에 자리잡은 사형장은 80년대 암울했던 시대상을 그린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태수(최민수 역)가 우석(박상원 역)에게 ‘나 떨고 있니?’라는 유명한 대사를 남긴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애국지사에 대한 성역화 작업과 유족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이 곳을 개방하지 않고 있다. 사형장에 들어서면 사형수들이 붙들고 통곡했다는 ‘통곡의 미루나무’ 한 그루가 관람객들을 맞는다. 사형수들의 한이 서려 있어 미루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일제시대 당시 400여명이 이 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으로 추산된다. 사형장 안에는 사형수가 앉는 의자 위로 당시에 실제로 쓰였던 굵은 동아줄이 내려져 있다. 개폐식 바닥이 내려가면 의자가 떨어지면서 사형이 집행되는 방식이다. 사형장 바로 옆에는 일제가 사형을 집행한 시신을 형무소 밖 공동묘지까지 몰래 버리기 위해 뚫어놓은 비밀통로인 ‘시구문’이 있다. 일제가 만행을 감추기 위해 이 곳을 폐쇄했으나 92년 입구에서 40m까지 복원됐다. ●봄나들이 코스로도 가볼만 역사관에는 세월의 흔적을 알려주는 철근 녹슨 자국, 바래진 외벽 등이 남아 있어 사진동호회나 ‘디카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실제 수형시설이었던 ‘10·11·12옥사(獄舍)’는 역설적이게도 신혼부부들의 웨딩촬영장소로도 종종 쓰인다. 인물을 생생하게 보이게 하는 빨간색 벽돌건물이 시내에서 흔치않다는 게 이유다. 역사관인 영화 ‘친구’,‘광복절특사’, 드라마 ‘토지’ 등의 배경으로 쓰이기도 했다. 역사관은 2시간에 20만원의 장소이용료를 받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인 목적으로는 대여를 해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며 매주 월요일 휴관한다. 관람료는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려 서대문형무소박물관 출구를 찾으면 된다. 문의 (02)363-9750. 글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박근혜 대표 “동북아 균형자론 비현실적”

    박근혜 대표 “동북아 균형자론 비현실적”

    ‘대안 있는 비판과 초당적 협조.’ 8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이렇게 압축할 수 있다. 박 대표는 이날 내치와 외치에 걸쳐 대안을 제시하면서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아울러 일본의 독도 망언과 역사 왜곡 등 사안에 따라서는 초당적 협력의 태도를 밝혔다. 먼저 박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을 문제 삼았다.“‘동북아 균형자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한·미동맹을 강화한다.’는 외교정책이 모순”이라고 지적한 뒤 힘과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고 중국·러시아·일본·북한 등 동북아 4국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들어 ‘동북아 균형자론’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그 대안으로 박 대표는 한·미 동맹의 강화를 강조했다. 중국과 일본이 대미 관계 개선에 애를 쓰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 정부가 한·미 동맹을 벗어나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도 한·미 양국의 전향적 자세를 촉구하면서 지난달 미국 방문 때 밝혔던 ‘대담하고도 포괄적 접근’을 공동 전략으로 채택할 것을 거듭 제안했다. 이어 박 대표는 일본의 독도망언 및 교과서 역사왜곡에 대해 “우리의 영토와 주권에 대한 의도적인 도발행위”라고 규정한 뒤 “그 정점엔 고이즈미 총리가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한 듯, 야당 대표로서는 이례적으로 상대국 총리를 직접 거명하면서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는 등 강경한 원칙을 밝혔다. 한편 박 대표는 연설의 전반부를 교육·복지·저소득층 대책 등 민생과 경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나라당=정책 정당’의 이미지를 제고하려고 시도했다. 저소득층 자녀들의 보육·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는 ‘드림 스타트 프로그램’을 제안했고 ▲기초연금제 도입 ▲공공요금 인상 억제 ▲감세 정책 ▲불합리한 규제 혁파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박 대표는 메시지 전달 효과를 높이려는 듯 독특한 비유를 구사해 눈길을 끌었다.‘동북아 균형자론’이 지닌 위험성을 1904년 러일전쟁 직전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에 비유하거나 한·미 동맹을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연인과 같은 관계라서 조심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표현했다. 아울러 상습적 성폭력범에 대해서도 “전자칩이나 전자팔찌를 채워서라도 행동을 감시하자.”고 제안해 눈길을 끌었다. 열린우리당 오영식 원내부대표는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초당적 협력을 약속한 것은 환영한다.”면서도 “동북아 균형자 역할에 대한 비판은 참여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사설] 재확인된 盧대통령의 독도 의지

    청와대가 어제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일본이 독도를 침탈한 역사적 배경 등을 상세히 설명한 것은 시의적절한 행동이었다고 우리는 평가한다. 노 대통령이 지난 23일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새로운 형식으로 강력한 독도 수호 의지를 밝힌 뒤로 우리 국민은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일각에서는 ‘외교전쟁’을 운운한 것이 지나치지 않으냐는 둥 대통령이 외교문제에 마지노선을 그으면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는 둥 논란을 벌여왔다. 그 결과 국민 사이에 알게 모르게 불안감이 조성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배경 설명에서 노 대통령의 진심과 결정 과정이 공개됨으로써 그동안의 우려는 말끔히 씻겨나가리라고 우리는 기대한다. 우리는 또 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 돌발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3·1절 치사에서 일본의 양식에 호소하는 메시지를 보낸 뒤 ‘신 대일(對日) 독트린’과 ‘국민에게 드리는 글’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는 물론 관계장관 회의, 수석·보좌관 회의, 전직 일본대사 면담 등 치밀하고 광범위한 의견 수렴이 확인된 것이다. 러·일전쟁에 따른 대한제국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도를 침탈한 사실을 일본내 일부 세력이 부인하는 데 대해서도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 것 또한 명쾌하다. 청와대는 노 대통령이 직접 의지를 표명한 까닭이 “결코 흥정할 수 없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원칙”이기 때문임을 재확인해 주었다. 일본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독도 문제는 ‘한·일관계보다 상위’라는 우리 입장은 교섭 대상이 아닌 것이다.
  • [책꽂이]

    ●조선의 마음:문학으로 읽는 조선왕조사(신봉승 지음, 선 펴냄) 누구나 접근이 쉽도록 문학적인 감성으로 조선의 역사를 풀어낸다. 창업부터 대한제국의 궤멸까지 철저한 실록을 바탕으로 한 56편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1만 5000원. ●세계의 역사교과서(이시와타 노부오·고시다 다카시 편저, 양억관 옮김, 작가정신 펴냄) 일본의 두 역사학자가 배타적 내셔널리즘을 조장하는 자국의 교과서와 이를 만든 이들의 왜곡된 역사관을 정면 비판하기 위해 쓴 책. 전쟁과 식민지 지배란 테마를 중심으로 한국·중국·싱가포르·독일·미국 등 11개국의 역사교과서를 비교분석했다.1만 3000원. ●산다는 것의 의미(김형석 지음, 마음향기 펴냄) 원로 철학자이자 연세대 명예교수인 지은이가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대화를 나누듯 쓴 철학 에세이. 삶의 의미, 친구, 사랑과 결혼, 성공, 돈, 죽음 등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삶의 비전을 이야기한다.9000원. ●목수(신응수 지음, 열림원 펴냄) 열여섯 살에 목수의 길에 들어서 46년째 대목장의 길을 걷고 있는 외길 장인의 나무와 고건축 이야기. 나무의 생과 나무를 다루는 업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는 목수의 생을 진솔하게 담았다.1만 800원.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효형출판 펴냄) 20세기의 독창적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는 지은이가 나폴리,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등 전 생애에 걸쳐 겪은 대도시의 매혹과 경험을 명쾌하게 풀어냈다.1만 6000원. ●김정일 코드:브루스 커밍스의 북한(브루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따뜻한손 펴냄) 한국 근·현대사에 정통한 석학으로 평가되는 미국의 정치학자인 지은이는 6자회담을 둘러싸고 불거진 북·미 양자간 갈등의 근원이 이미 오래전의 한국전쟁에 있음을 설파한다.1만 4500원. ●패션의 유혹(조안 핑켈슈타인 지음, 김대웅·김여경 옮김, 청년사 펴냄) ‘패션’을 사회현상으로 파악하고, 사회학, 문화연구, 젠더, 미디어 문화인류학, 역사학, 미술, 복식사, 기호론에 이르기까지 거시적인 시각에서 패션 전체를 조망한다.1만 5000원. ●대한민국은 받아쓰기중(정재환 지음, 김영사 펴냄) 우리말 지키기 운동에 앞장서온 방송인 정재환이 생활현장속의 생생한 사례를 엮어 낸 우리말 교양서. 상점 간판에서부터 게시판, 광고판, 자장면집 차림표, 인터넷, 방송 자막까지 자주 만나게 되는 왜곡된 언어·문자환경을 고발한다.9900원.
  • 오락가락 표준시간…사주팔자는?

    오락가락 표준시간…사주팔자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시간은 과거 100여년간 4차례나 바뀌는 ‘고초’를 겪었다. 물론 세계의 표준시간은 지난 1884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만국지도회의’에서 영국 그리니치천문대를 통과하는 경선을 ‘본초 자오선’으로 정한 이후 변하지 않았다. 이 때부터 본초 자오선을 중심으로 경도 1도에 4분,15도에 1시간의 시간차가 났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표준시가 아닌 한양의 지방시를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태양이 한양의 남중(南中)에 있는 시각이 정오였으며 표준시계는 자격루였다. 남중이란 천체가 자오선을 통과하는 시점으로,‘태양이 남중하는 정오’ 등의 표현을 한다. 장영실이 경복궁 보루각에 설치한 자격루는 세종 16년(1434년)부터 인정(밤 10시, 통행금지)과 파루(새벽 4시, 통행금지 해제), 정오 등 표준시각을 알렸다. 즉 당시에는 한양을 지나는 경선인 동경 127도가 우리나라 시간의 기준선이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대한제국은 1908년 우리나라가 동경 124∼132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을 감안,127도 30분을 표준시로 제정했으나 1912년 일제에 의해 일본의 표준시인 동경 135도로 바뀌어 종전보다 30분 빨라졌다. 이어 1954년 3월21일 0시30분부터 다시 동경 127도 30분으로 환원됐다. 그러나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결정에 따라 8월10일부터 일본의 표준시로 다시 변경돼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동경 127.5도선에 태양이 남중할 때가 자연적인 시간으로는 정오에 해당하지만, 시계에서는 12시30분을 가리킨다. 이같은 차이에 대한 이유로 세계 각국이 1시간 단위로 표준시를 정하고 있다는 ‘국제적 관례’가 우선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프랑스, 인도, 이란, 중국, 호주 등은 자국 고유의 시간을 유지하기 위해 15분 또는 30분 단위로 표준시를 사용하고 있다. 때문에 일제 식민지 유산의 하나라는 주장과 미군이 작전상 편의를 위해 고쳤다는 추측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지난 2000년 국회의원 20여명은 표준시를 되돌리려는 법률개정안을 제출했지만, 정부가 혼란과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반대해 무산됐다. 혼란과 불편은 ‘사주팔자’를 보는 데도 빚어질 수 있다. 통계학을 바탕으로 한 역술학은 하루를 12개로 쪼개 태어난 시간에 따라 개인의 운명을 점친다. 태어난 시각이 달라지면 운명까지 상반되게 바꿔놓을 수 있다. 예컨대 자시(子時)는 자연적인 시간으로 오후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다. 따라서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은 오후 11시32분이 지나야 자시생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1948∼1951년,1955∼1960년,1987∼1988년 등 3차례 12년간 2∼8월 또는 4∼8월에는 실제 시간보다 한시간씩 앞당긴 ‘서머타임제’가 실시돼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서울광장] 일본국민 여러분에게/이용원 논설위원

    [서울광장] 일본국민 여러분에게/이용원 논설위원

    일본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 땅에서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신문·방송을 통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는 성난 군중이 연일 모여들어 일장기를 불태웁니다. 그 중에는 단지(斷指)를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을 삭이지 못해 한강다리에서 몸을 던진 60대 국가유공자도 있습니다. 일제상품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갑니다. 일개 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했다고 해서 왜 한국인들은 저렇게 분노할까? 이를 지켜보는 여러분의 심정은 놀랍고 또 불쾌하기까지 할 겁니다. 우리 국민이 그러하듯 일본 국민도 대부분 평화를 사랑하고 폭력을 혐오하는 사람들일 터입니다. 그 심정 이해합니다. 일본에서는 싸운 사람들을 어떻게 화해시킵니까? 우리는 가해자더러 사과하도록 하고, 진심으로 상대를 위로하며, 스스로 반성하게 합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일본이 20세기 초 한국을 35년동안 식민통치한 것은 양국민에게 불행한 역사였습니다. 하긴 오랜 역사를 가진, 이웃한 두 나라 사이에 유쾌한 역사적 경험만이 존재할 수는 없겠지요. 문제는 잘못된 과거를 푸는 방식입니다. 아마 일본인으로서는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과거청산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겁니다. 또 천황의 ‘통석(痛惜)의 염(念)’ 발언으로 사과도 끝났다고 할 겁니다. 우리 국민 대다수도 국가간 협정을 뒤집길 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독도 문제는 그와 별개입니다. 독도는 한마디로 한국땅입니다. 한국 역사서의 서기 512년 기록에 독도가 처음 등장한 이래 그 사실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일본은 1905년 다케시마를 시마네 현에 편입했다고 내세웁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이 한국을 병탄한 과정의 일부일 뿐입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그해에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 한국인이 나라를 되찾을 때 독도는 당연히 주인 품에 돌아온 겁니다. 한국정부가 지난 17일 이번 사태를 “해방의 역사를 부인하고 과거 침탈을 정당화하는 행위”로 규정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즉 독도 문제는 영유권 다툼이 아니라 일본의 과거사(침략) 반성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독도가 ‘주인 없는 땅(無主地)’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일본학자인 나이토 세이추 시마네대 명예교수의 글을 읽도록 권합니다.‘시마네현의 100년’등을 낸 그는 대한제국이 이미 1900년 독도 소유를 칙령으로 확인했고, 그에 앞서 일본 정부가 1696년,1876년 등 여러차례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했음을 밝혀줍니다. 도쿄신문 17일자, 산인주오신보 13일자를 보십시오. 독도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일본은(물론 일부 국민이겠으나) 아직 과거의 침략 행위를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됩니다. 한편으로는 답답한 마음도 듭니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을 침략한 가해자입니다. 그러면서도 피해자의 심정을 경험했습니다. 전쟁 막바지에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숱한 국민이 희생되었습니다. 종전 후에는 미군 통치도 겪었습니다. 그런 일본인이 식민지배와 태평양전쟁 발발을 반성하지 않으니 어느 피해국민인들 수긍할 리 있겠습니까. 한국인들은 일본을 독일과 비교합니다. 독일이 종전후 줄기차게 과거를 반성하고 피해국들에 사죄·배상한 것처럼 일본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13일 이스라엘에서 열린 홀로코스트 역사박물관 개관식에 유독 일본인만 초청받지 못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한국민은 일본과 척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독도 문제에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를 일본 국민 여러분에게 기대합니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10월 25일은 독도의 날”

    “10월 25일은 독도의 날”

    “머지않아 10월25일이 ‘독도의 날’로 제정될 것을 확신합니다.” ‘독도의 날’ 제정을 위한 1000만명 인터넷((tokdo.co.kr)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독도수호대 김점구(39) 사무국장. 이 단체는 대한제국 광무4년(1890년) 10월25일 고종 황제가 독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재확인하는 칙령을 공포한 것을 기념해 이날을 독도의 날로 지정하자며 지난해 10월부터 온라인 서명운동에 들어간 데 이어 12월에는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김 국장은 17일 전화통화에서 “지난 16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독도)의 날’ 조례제정 강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성화같이 ‘독도의 날’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면서 “이런 시민들의 뜨거운 열기가 반드시 ‘독도의 날’ 제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명운동 시작 이후 하루 평균 30∼40여명이던 서명인 숫자가 16일 하루에만 640여명이 서명을 남기는 등 참가자가 폭주하고 있다. 김 국장은 “특히 오는 19일부터는 회원 1500여명이 거리로 나서 서명을 받을 예정”이라며 “전국민이 일본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에 맞서 ‘독도의 날’ 제정 서명운동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울릉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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