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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일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헤이그 추모 열기

    14일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헤이그 추모 열기

    |헤이그(네덜란드) 이종수특파원|‘1000년을 기억할 100년전 큰 죽음’ 14일은 100년 전 ‘망국의 한’을 호소하러 헤이그로 왔던 특사 3인 가운데 한 분인 이준 열사가 순국한 날이다. 열사의 추모식이 열리는 헤이그를 향해 12일 오전 파리를 출발했다. 파리 북역에서 초고속열차를 타고 벨기에 브뤼셀 미디역에서 내려 일반 열차로 갈아탄 뒤 4시간 만에 헤이그(Den Haag)HS역에 도착했다.100년 전 6월25일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른바 ‘헤이그 특사’ 세 분이 내린 곳이다. ●기념관 건물 입구 ‘태극기 휘날리며´ 한국 최초의 검사 이준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알리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대장정에 나섰다. 일제의 감시가 살벌해 조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길이었다.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상설·이위종 열사를 각각 만난 뒤 시베리아를 거쳐 독일 베를린, 벨기에 브뤼셀을 거처 64일 만에 HS역에 도착했다. 낯설고 어색한 풍경의 이국 거리를 지나갔을 열사 3인. 헤이그HS역 정면으로 난 길을 따라 10분쯤 걸어가니 와건스트라트(Wagenstraat)124A번지에 자리한 이준 기념관이 나왔다. 울분을 못이긴 열사가 순국한 드 용(De Jong) 호텔을 개조한 곳이다. 방문객을 맞은 것은 건물 입구에 당당하게 펄럭이는 태극기와 정문의 “이 집은 이준 열사가 순국하신 역사적인 집입니다.”라는 문구다. 좁고 가파른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니 이기항 이준아카데미 원장과 송창주 이준기념관 관장이 ‘유럽 한민족 평화제전’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독립기념관의 지원을 받아 이준기념관도 14일 재개관했다. 당시 만국평화회의는 6월15일부터 10월18일까지 열렸다.3인의 특사가 도착한 것은 6월25일. 기념관에서 걸어서 10분 떨어진 빈넨호프의 회의장에 도착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국권을 상실한 나라의 ‘슬픈 숙명’이었다. 주미 공사를 지낸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다니며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뜬 이위종 열사가 기자회견을 열고 일제 만행을 고발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7월14일 이준 열사가 순국하면서 3인의 투쟁도 종지부를 찍는다. 이준 기념관에는 다양한 자료들이 ‘그날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특사 3인의 이동 경로, 고종의 특사 신임장, 을사늑약 무효를 알리는 트리뷴지 기사…. 대부분 이 원장 부부가 손수 일본·러시아·네덜란드 문서보관소와 도서관의 마이크로필름 등을 뒤져서 모은 것이다. 이날 네덜란드를 관광한 뒤 벨기에로 넘어가는 도중에 기념관을 찾았다는 양윤정(33)씨는 “굳이 100주년이 아니더라도 유럽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들러야 할 곳”이라고 말했다. ●獨·佛 교민들 단체방문 줄이어 열사의 넋을 기리는 ‘제의’는 13일 오전 시내 한 호텔에서 국제학술회의로 막이 올랐다. 평화제전 위원장인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헤이그 특사의 사명은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노력이었지만 독립을 지켜갈 수 있는 스스로의 힘과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만국평화회의는 일제가 지칭한 것이고 당신 언론에서는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세계평화회의’ 등으로 표현했다.”며 “이준 열사 순국은 이후 국내외 자결 순국, 의열 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14일에는 기념식과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헤이그시는 이날을 ‘이준 평화의 날’로 지정했다. 한국·네덜란드 예술가들의 공동 기획으로 헤이그 특사 3인의 도착 장면도 재현한다. 이날 행사에는 김정복 보훈처 장관, 최종무 주 네덜란드 한국 대사,W 데이트만 헤이그 시장 등 국내외 인사 120여명이 참석했다. 독일·벨기에·프랑스 등 인근 국가 교민들도 버스를 동원해 단체로 방문하는 등 700여명이 참석했다. vielee@seoul.co.kr ■대한매일신보 ‘그날의 이준’ ‘이준씨가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파견원으로 갔던 일은 세상사람이 다 알거니와, 어제 동경전보에 따르면 그가 충분(忠憤)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여 만국사신 앞에 피를 뿌려서 만국을 경동(驚動)케 하였다더라.’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분사(墳死)한 소식을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가 1908년 7월18일 호외로 전한 기사의 한 대목이다. 황성신문은 다음날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받아 ‘이준씨는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割剖)하였다는 전보가 도래하였다는 설이 유(有)하더라.’고 이후 오랫동안 믿음을 준 할복자살설을 기정사실화했다. 대한매일신보의 호외는 이준 열사의 서거 소식에 앞서 급박한 대한제국 정부의 움직임을 먼저 다루었다. 기사는 ‘내각대신 여덟분이 회동하여 어제 오후 7시부터 12시까지 황상폐하를 알견하고 해아(海牙·헤이그)에 위원을 파송함으로 당하시는 곤란을 면하실 방책을 올렸다.’고 적었다. 그 방책이란 ▲광무 9년 11월17일에 체결한 신조약에 어보를 찍고 ▲통치를 대신할 황제의 섭정을 추천해야 하며 ▲황제가 직접 동경에 가서 ‘일황폐하’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조약이란 1905년 을사늑약으로, 고종이 이때까지 정식으로 비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대한매일신보는 ‘황상폐하께옵서는 이 세 가지를 다 윤허치 아니하셨다더라.’고 보도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이준열사 외손녀 유성천여사 “100주기 감회 남달라” |헤이그(네덜란드) 이종수특파원|이준 열사의 외손녀 유성천(80) 여사가 열사의 순국 100주년 추모식을 맞는 감회는 뜻깊었다.13일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난 유 여사는 어머니(이준 열사의 외동딸)에게 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준 열사와 가족들에 대한 기억을 들려줬다. 그 속에는 독립운동가 가족이 겪은 신산한 삶이 오롯이 녹아 있다. 유 여사는 “외할머니가 헤이그에서 외할아버지가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은 뒤 큰 충격을 받아서 심장병으로 고생하시다가 결국 제가 초등학교 2학년때 심장판막증으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이어 이준 열사 가족의 삶과 관련 “일제 강점기여서 애국 지사 집안은 말도 삼가해야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외할머니는 동지적 입장에서 외할아버지를 이해하고 내조를 잘 하셨다고 들었는데 헤이그 특사로 가기 전에 독립운동하시다가 투옥되셨을 때 굳건하게 옥바라지를 하셨다고 들었다.”라고 덧붙였다. 100주기를 맞은 소감에 대해 “90주기에 참석한 뒤 귀국하면서 10년 뒤에 다시 이곳에 올 줄 생각도 못했다.”며 “많은 교민들이 오시고 행사를 위해 여러 분들이 노고를 아끼지 않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vielee@seoul.co.kr ■ 이기항 이준아카데미 원장 “청소년에 민족의식 고취” |헤이그 이종수특파원|1991년부터 이준 열사 기념식을 시작한 이기항(71) 이준아카데미 원장이 열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는 소회는 남달랐다. 12일 헤이그 이준평화박물관에서 만난 이 원장은 기념식 준비에 정신없이 바빴다. 이준 열사 기념사업에 뛰어든 동기를 물었더니 소박하게 대답했다.“우연히 발을 담갔다가 ‘호랑이 등 탄’ 심정으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거창한 명분 대신에 매번 상황이 그의 발을 기념 사업에 한 발짝씩 끌어당겼다는 것이다. 1972년 상사 주재원으로 왔다가 사업가로 변신하며 네덜란드에 살던 이 원장은 그저 간헐적으로 열사의 묘적지를 참배하던 교포였다. 격년으로 추모식을 주관하던 이 원장에게 1992년은 이준 기념사업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네덜란드 일간 NRC신문에서 이준 열사가 순국하기 전까지 묵었던 데 용 호텔이 재개발로 매각될 위기에 처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3년 노력 끝에 1995년 사재 20만달러를 쾌척해 ‘사고’를 쳤지만 더 큰 일이 다가왔다. 호텔을 기념관으로 건립하기 위한 자금이 문제였다. 해서 한국에 들어와 소식을 알리고 전경련을 찾아가 기념관 건립 자금을 협찬받았다. “내 나이가 우리 나이로 70이 넘었습니다. 더 바랄 것도 없이 그냥 많이 보고들 갔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이 많이 와서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vielee@seoul.co.kr
  • 새 국새 12월까지 만든다

    새 국새 12월까지 만든다

    새로운 국새 제작을 위해 내로라하는 ‘국보급 장인’ 33인이 뭉쳤다. 이들의 ‘혼’이 담긴 국새는 오는 12월 그 모습을 드러낸다. 국새제작단은 4일 정부중앙청사에서 ‘국새 제작 설명회’를 갖고 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했다. 우선 국새 제작을 총괄하는 단장은 민홍규 세불옥새연구소장이 맡았다. 민 단장은 전통 기법으로 국새를 제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고종황제 때의 대한 국새, 영화 ‘한반도’에 쓰인 대한제국 국새 등이 그의 작품이다. 민 단장은 “제주를 비롯, 전국 8도에서 모은 가장 좋은 흙으로 제작한 거푸집에 18K 합금으로 된 가로·세로·높이 각 99㎜의 국새를 찍어내게 된다.”면서 “인문(글자)은 훈민정음체, 인뉴(손잡이)는 봉황 모양”이라고 설명했다. 민 단장 외에도 국새를 장식·보관하는 데 필요한 ‘국새 의장품’을 만들기 위해 각 분야의 대표 장인 32명이 참여한다. 여기에는 중요무형문화재만 10명이 포함돼 있다. 의장품 중 국새를 보관할 내함은 백동으로, 외함(인궤)은 철갑상어 가죽으로 각각 제작된다. 함을 넣어둘 함장은 금색이 가미된 옻칠로 단장한다. 국새를 올려놓을 방석인 석은 한지 수백장을 다진 뒤 비단으로 싼다. 국새를 올려놓는 상인 인상·배안상·소배안상, 상 위에 까는 비단천인 복건, 장식용 끈인 매듭인끈·다회끈 등도 국내 최고 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모두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네번째로 제작되는 새 국새는 정부중앙청사 19층 국무회의실 옆 국새실에 보관된다. 국새는 외교문서 등에 쓰이는 국가의 상징인 만큼 국새를 꺼내기 위해서는 무려 8개의 잠금장치를 풀어야 한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CEO칼럼] 영상전화의 힘을 아십니까/조영주 KTF 사장

    [CEO칼럼] 영상전화의 힘을 아십니까/조영주 KTF 사장

    정조는 왕에 즉위한 후,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화성에 능을 조성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치안을 위해 임금이 80리 밖으로 나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는데, 한양에서 사도세자의 융릉까지 길은 100리(약43㎞)가 넘었다. 융릉을 자주 찾고 싶었던 정조는 멀쩡한 100리 길을 80리 길로 부르게 하여,12년 동안 13번을 찾았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도 고종이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능에 전화를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곡을 했다. 예전 임금들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뭉클하게 느껴지는 일화들이다. 요즘은 참 그리움이 많은 시대다. 예전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이 드물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학교나 직장 때문에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돌아가신 부모님도 그립고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살아 있는 가족들과 헤어져 있는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그리운 가족을 만나기 위해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되고, 서울역과 고속버스터미널은 귀향객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만약 그리움을 저축하는 은행이 있다면, 그 은행이 아마 우리나라 최대 은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우리나라의 정보통신은 이렇게 커져가는 그리움 때문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유선 전화의 경우도 18세기 말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지만, 보편화된 서비스는 아니었다. 물론 장비가격이 비싸고, 통신망이 좋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답보를 거듭하던 유선 전화는 1970∼80년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산업화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 늘어났고, 매번 많은 비용을 들여서 고향을 찾을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전화는 그리움을 메우는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역할을 해 왔다. 올해 3월 듣는 전화의 시대를 넘어, 얼굴을 보며 통화하는 영상전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서비스 개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가입자는 이미 100만명을 훌쩍 넘어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다. 그간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수 많은 그리움들이 영상전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해소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 본다. 나 또한 예전에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했지만, 이젠 영상전화를 통해 얼굴을 뵈며 안부를 여쭐 수 있게 됐다. 영상전화 서비스는 이렇게 사랑과 정을 깊게 할 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도 바꾼다. 이제까지 청각장애우들은 이동통신서비스의 사각지대에 있었지만, 이젠 영상전화를 통해 만나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말을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게 됐다. 건설현장이나 지방 사무소의 현황을 파악할 때나 매장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도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고로움과 번거로움을 영상전화 서비스를 통해 편리하게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시각은 사람 감각의 80%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래서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옛 속담도 있다. 지금은 영상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고객이 전체 이동통신가입자의 3%에 불과하지만, 이제 영상전화 서비스는 고객의 일상속에서 튼튼하게 자라날 것이다. 앞으로 영상전화가 가족, 연인, 친구들간의 정과 사랑을 더욱 깊게 하는 ‘사랑의 서비스’는 물론 고객의 삶을 보다 편리하게 하는 ‘생활의 필수품’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여 고객의 더 큰 사랑을 받게 되길 기대한다. 조영주 KTF 사장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4) 매산리 석불입상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4) 매산리 석불입상

    중부고속도로에서 일죽인터체인지로 빠져나와 안성쪽으로 조금 달리다보면 용인 백암가는 길과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옵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멀지 않은 곳에 고려시대 몽골군과의 격전지 죽주산성이 있는 비봉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요. 산 아래로 다가가면 위세를 과시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높이 5.6m의 대형 석불이 있습니다. 경기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있어 매산리 석불입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동네사람들은 ‘태평미륵’이라고 부릅니다. 1530년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 곳에 태평원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관계가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원(院)이란 교통의 요지마다 만들어놓은 일종의 관용숙소였지요. 고려 전기에는 이 불상처럼 모자처럼 보이는 사각형 보개(寶蓋)를 쓴 거대한 석불이 경기·충청도 일대에 집중적으로 조성됩니다.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충남 논산의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 대표적이지요. 관촉사 보살입상은 광종 21년(970년)에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매산리 석불입상은 이런 생김새를 가진 석불로는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집니다. 입시기도에 영험이 있다는 대구 팔공산의 갓바위부처도 보개를 쓰고 있기는합니다. 다만 갓모양 보개는 석불이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가 아니라 나중에 올려진 것으로 보고 있지요. 통일신라가 무너진 것은 지방 호족이 성장함에 따라 왕권이 크게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고려 태조도 호족 출신이지만, 새로운 왕조가 세워진 상황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당면과제였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이가 고려의 제4대 왕 광종(재위 949∼975년)입니다. 광종은 후삼국 통일전쟁 시기 포로가 되어 노비로 전락했던 사람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노비안검법으로 호족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었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호족의 자제가 칼을 버리고 붓을 잡게 만들었습니다.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바탕으로 커다란 석불을 곳곳에 조성한 것도 권력이 지방 호족이 아니라 왕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광종은 즉위 11년(960년) 준풍(峻豊)을 연호로 쓰면서 개경을 황도(皇都)로 선포했습니다. 이른바 칭제건원(稱帝建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고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주의식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광종은 천자가 썼다는 12류 면류관을 썼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충남 서산에 있는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비’에는 광종이 면류관을 썼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기 어렵다는 고려 전기 석불의 보개는 바로 황제가 쓰는 12류 면류관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고려 왕조가 출범한 이후 숨죽이며 추이를 지켜 보던 지방 호족들에게, 황제를 부처로 신격화하여 요지마다 세워놓은 석불들은 무언의 경고판으로 역할을 톡톡히 해냈겠지요. 매산리 석불입상은 국가지정 문화재가 아니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미술품으로 크게 대접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 이전에 최초로 황제국가를 표방한 광종의 자주의식이 조형적으로 변용된 사례라는 점에서 적극적인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dcsuh@seoul.co.kr
  • 한·일 역사학자 2명 공동 연구 “독도는 한국땅”

    ‘독도(獨島)냐, 다케시마(竹島)냐.’ 독도 문제 해결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숙제로 남아 있다. 양측 주장이 워낙 팽팽하다 보니 공동연구는 물론 일본내에서의 독도 서적 출간도 꿈꿀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일본에서 출간된 ‘사적(史的)검증 죽도·독도’는 그 자체로도 의미있는 책이다. 일본 최대 출판사인 이와나미(岩波)서점이 출판한 이 책은 김병렬 국방대학 교수와 나이토 세이추 시마네 대학 명예교수가 공동으로 연구해 집필했다. 지난해 12월 우선 ‘한·일 전문가가 본 독도’가 국내에서 출판됐고, 그것의 일본어판이 이 책이다. 나이토 교수는 “일본은 역사적으로 두번에 걸쳐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밝혔기 때문에 1945년 이후에도 독도가 일본령으로 남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화(元和)4년의 죽도도해면허’ ‘2005년 시마네현 무라카미가(家)에서 발굴된 고문서’ ‘1870년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1900년 대한제국칙령 제41호’ 등을 근거로 자신의 견해를 실증해 나갔다. 모두 3부로 구성된 책은 1부를 나이토 교수가,2부를 김 교수가 집필했다. 두 사람의 견해를 종합한 3부는 나이토 교수가 대표 집필을 맡았다. 김 교수는 일본내에서 한국의 독도영유를 비판해온 인사들이 제기해온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울릉도 주민의 생활조건, 기후조건 등을 근거로 독도가 가시거리에 포함되어 있음을 실증했다. 또 일본의 독도편입 문제를 러·일전쟁 수행과 한국병합 과정이란 맥락에서 사료를 들어가며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출간을 지원한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은 “한·일간 공통된 역사적 인식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기초사료에 의거해 검증한 후 그 결과를 서로 공유하고자 할 때 성립될 수 있다.”면서 “일본 최대 출판사의 철저한 내용검증을 통해 출판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13)儒林 누른 세조의 힘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13)儒林 누른 세조의 힘

    조선 세조(1417∼1468)는 불교대호왕(佛敎大護王)으로 불릴 만큼 전무후무한 불교 후원자였습니다. 양주 회암사와 여주 신륵사, 양평 수종사, 오대산 상원사와 금강산 건봉사·표훈사·유점사, 양양 낙산사, 영암 도갑사, 합천 해인사 등 방방곡곡의 수많은 절을 창건하거나 중수했지요. 세조는 온몸의 종창으로 크게 고생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왕위에 오르고자 조카인 단종을 죽이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으니 자업자득이라고 수군거렸지요. 불교에 의지한 것도 업보(業報)를 씻기 위해서라고들 했습니다. 하지만 세조가 불교 중흥에 힘쓴 가장 큰 이유는 왕권을 제약할 만큼 성장한 신흥사대부를 견제하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어린 단종이 집권한 뒤 유신(儒臣) 세력이 부각되면서 왕권과 신권(臣權)의 균형이 무너지자 ‘국정의 원상회복’을 외치며 반기를 들었던 이가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입니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있는 국보 제2호 원각사터10층석탑은 이처럼 세조가 중심에 선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이 벌인 주도권 다툼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소재구 국립고궁박물관장은 “원각사의 창건과 10층석탑의 조성은 세조가 국왕의 권위를 보여주려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세조가 자신의 통치력을 과시할 수 있을 만한 권위의 상징물을 만들고 싶은 의도를 원각사로 구현시켰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교국가의 도성 한복판에, 그것도 주변 어디서나 바라보였을 12m짜리 고층불탑이 세조 13년(1467년) 완성됐을 때 신진사대부들의 굴욕감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제인가 석탑의 8∼10층이 땅에 끌어내려진 뒤 1946년 미군공병대의 크레인이 동원되어서야 제 모습을 찾은 것도 유신들이 가졌던 불쾌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13세에 불과한 성종이 즉위하자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사림정치의 기반이 공고해지면서 성종 5년(1474년) 불상은 회암사로 옮겨지고, 승려들도 내보내 원각사는 절의 기능을 상실합니다. 조광조 등이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만들겠다며 도학정치를 부르짖던 중종시대에 원각사터는 아예 택지로 분양되었습니다. 하지만 명종시대 잇따라 큰 불이 나고, 임진왜란(1592∼1598)을 거치면서 원각사터에는 다시 10층석탑과 탑비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광무 원년(1897년) 공원으로 지정되기까지 300년 동안이나 원각사터는 왕실과 유신들의 상호견제 속에서 빈터로 남아 있게 됩니다. 원각사탑은 고려 충목왕 4년(1348년)에 세워진 라마불교의 영향이 짙은 원나라풍의 경천사10층석탑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대리석탑이지만, 조선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 미술품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미술사적 시각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 가치까지 부여했을 때 원각사탑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가능해질 것입니다. dcsuh@seoul.co.kr
  • “서울대병원 몰역사적 행태”

    서울대병원이 안팎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전신인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사업을 진행 중인 가운데 서울대 교수들까지 기념사업을 비판하고 나서 파장이 예상된다. 서울대 미술대 김민수 교수 등 16명은 16일 성명을 내고 “서울대가 1924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을 기념하고 역사적 자산으로 여기지 않듯이 식민지배의 수단으로 탄생한 대한의원을 서울대병원이 기념하고 계승할 수는 없다.”면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서울대병원의 몰역사적 행태를 규탄한다.”고 밝혔다. 교수들은 “서울대병원은 몰역사적인 기념행사를 강행하며 13억원이란 거액의 세금을 낭비했다.”면서 “서울대 교수로서 서울대병원의 행태에 대해 국민께 대신 사과드리며 앞으로 학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유사한 일에 대해 소명의식을 갖고 적극 대처하겠다.”고 덧붙였다. 앞서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는 지난 14일 정보통신부와 서울대병원을 대상으로 감사원 감사를 청구했다. 민문연은 감사청구서에서 “일제 통감부가 설립한 대한의원은 당시 대한제국이 추진하던 자주적 근대 의학의 싹을 말살하고 통감부가 통제하는 식민지 의료체계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했다. 민문연은 또 박형우 연세대의대 동은의학박물관장, 이재명 변호사 등과 함께 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100주년 서울대병원 뿌리 논란

    100주년 서울대병원 뿌리 논란

    서울대병원이 1907년 설립된 대한의원 창립 100주년기념사업을 추진중인 가운데 일왕이 임명한 일본인 대한의원 창설위원장의 사진이 담긴 개원식 기념엽서가 처음으로 발견돼 논란이 일고 있다. 이는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만들었다는 서울대병원측의 기존 주장을 뒤집는 중요한 자료다. 연세대 의사학과 여인석 교수가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에서 찾아 28일 공개한 이 엽서는 1908년 10월25일 대한의원 개원식을 기념해 발행됐다. 엽서에는 대한의원 창설위원장이었던 사토 스스무(佐藤進)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는 우리나라를 침략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메이지 일왕이 임명한 인물이다. 옆서 밑부분에는 한문 전서체로 “대한의원 개원식기념”이라고 써 있다. 여 교수에 따르면 당시 창설위원회 위원은 전원 일본인이었고 초대 원장은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지용이었다. 조선총독부가 펴낸 ‘총독부통계연보’를 보면 1908년에서 1910년 사이에 경기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18.9%가 대한의원을 이용한 반면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0.5%만 이 기관을 이용했다. 또 일본 군의총감이 설립 실무를 맡았으며 대한의원이란 이름 자체도 이토 히로부미가 지었다고 한다. 여 교수는 “서울대병원은 공식적으로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통적으로 병원을 만드는 것은 백성에 시혜를 베푸는 차원에서 왕이 주도하는 것”이라면서 “만일 서울대병원 주장대로라면 고종황제가 엽서에 나와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즉, 사토 설립위원장을 돋보이게 하는 엽서는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아니라 통감부, 나아가 일본이 주도해서 설립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게 여 교수 설명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대한의원을 부정하는 것은 중요한 역사적 자산을 잃는 것이기 때문에 재조명하고 성찰하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서울대병원 홈페이지에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주도해서 설립한 것으로 설명한 것에 대해 “대한의원을 대한제국이 아닌 통감부가 주도해서 설립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홈페이지 내용은 수정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한편 서울대병원은 13억원을 들여 오는 15일 대한의원100주년기념식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 사업에 대해 학계와 관련 시민단체들에서 반대가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대한의원 설립은 대한제국 황실의 위상을 낮추면서 통감부의 권위는 높이려는 이토 통감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면서 “100주년 기념사업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일제 을사늑약 이전부터 우리 토지등 맘대로 매매

    일제가 1905년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 체결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건물과 토지를 일본 소유로 관리해 온 것을 드러내는 등기부 서류가 발견됐다. 대법원은 27일 2003년 말부터 해온 폐쇄등기부 이미지 전산화 작업에서 경성 소재 일본 영사관이 작성한 등기부를 발견했다고 밝혔다.‘잡지방(雜地方) 건물등기부 제4편’과 현재 서울 중구 주자동 일대를 일컫는 ‘주동(鑄洞) 토지등기부 제3편’에는 1904∼1914년 당시 서울에 살던 일본인들이 건물과 토지를 매매한 사실이 들어 있다. 부동산, 토지 등 물권을 공시하는 등기제도는 한 국가의 주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제가 1910년 경술국치는 물론 1905년 을사늑약 이전에 이를 직접 관리한 점은 사실상의 주권 침탈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해당 지역에 일본인들이 집단 거류했더라도 사용권이 아닌 소유권을 임의로 인정하는 것은 주권 침해 행위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대한제국은 1893년부터 1906년까지 외국인 거주자의 토지·건물 소유관계 증명을 위해 가계·지계 제도를 운영했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한 것이다.일본 영사관이 기록한 건물과 토지 등기부 내용은 통감부가 조선부동산 등기령을 시행한 1914년 이후 법원 등기부로 옮겨 기재됐다. 대법원은 이외에도 인천 차이나타운 원조 등기부에 해당하는 ‘중화민국 인천 조차지 등기부’와 6·25전쟁 당시 인민군 간부가 충남 당진 지역에서 지뢰 매설 방법, 작전계획 등을 적어 놓은 등기부 등본도 발견했다고 밝혔다.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

    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이란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국민성금으로 갚자는 ‘나라 빚갚기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은 1907년 1월29일 대구 광문출판사 김광제 사장과 부사장 서상돈의 발의로 시작됐다. 이들은 항일구국지로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의 대구지사원을 겸하고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대구의 유력 인사들이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고 주권을 회복하자.’며 모금운동에 나선 것이다. 당시 일제는 군수품을 들여오면서 담배도 함께 도입, 대구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유통됐으며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제의 담배 유통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특히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의 보도에 의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발행부수 1만부를 자랑하던 최대 권위지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2월21일자에 대구민의소가 발표한 ‘국채보상취지서’전문을 싣고 모금운동에 활을 당겼다. 운동에는 전국 고관이나 양반·부유층은 물론 노동자·농민·부녀자로부터 군인·학생·기생·승려 등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은 계층이 없었다.
  • ‘얼짱 왕자’ 흥영군 이우 납시오

    ‘얼짱 왕자’ 흥영군 이우 납시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에서부터 4대손인 흥영군 이우(1912∼1945)에 이르는 일가가 한 자리에 모인다. 서울역사박물관이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의 사람들’이란 초상화 특별전으로 이들의 만남을 주선했다. 전시회는 오는 27일부터 4월15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이 자리에는 대원군의 초상화 6점과 고종의 어진(御眞·임금의 초상) 3점, 대원군의 아들이자 고종의 형인 흥친왕 이재면(1845∼1912)과 이재면의 아들인 영선군 이준용(1870∼1917)의 초상화 등 모두 12점이 선을 보인다. 이재면, 이준용, 이우의 초상화가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운현궁(雲峴宮)은 현재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남아 있는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 안채인 노락당에서 태어난 고종이 즉위한 뒤 확장·신축하고 궁으로 부르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은 대원군이 되어야 하겠지만, 젊은 누리꾼들의 관심은 온통 흥영군 이우로 쏠린다.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의친왕의 아들. 수려한 외모의 이우는 지난해부터 ‘얼짱 왕자’로 불리며 인터넷 세상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대한제국의 황실이 여전히 존속한다는 설정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TV드라마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서울대박물관의 ‘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특별전이 뜻밖에 많은 가족 단위 관람객들을 불러 모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33세에 세상을 떠난 이우의 초상은 1965년 이당 김은호가 사진을 참고해 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무백관이 임금에게 하례할 때 입는 금관조복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번에 출품되는 초상화는 대부분 어진화사(御眞畵師)인 이한철과 유숙 등 당대의 대표적인 화가들이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초상화법에서 근대 화풍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2)국내 유일의 정사각형 교회 ‘봉화 척곡교회’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2)국내 유일의 정사각형 교회 ‘봉화 척곡교회’

    이 땅의 초기 교회는 대부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졌다는 공통점을 갖는다.100년 안팎의 역사를 자랑하는 초기 교회들이 몇몇 남아있지만 그나마도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되어 원 형태를 온전히 갖춘 것이 드물다. 경북 봉화군 법전면 청량산 자락의 산골마을 척곡리에 서있는 척곡교회(등록문화재 제257호)는 그래서 도드라진다. 선교사가 아닌 일반신도가 세운 뒤 100년의 풍상을 견뎌내며 옛 모습을 지켜온 흔치 않은 자생 신앙터. 초기 예배당이 대부분 기역(ㄱ)자나 일(一)자 형태로 지어졌던 것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정사각형을 띠고 있고, 예배당과 함께 세워진 교육시설인 서당(명동서숙)이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교회다. 봉화군 법전면 내에서 좁은 산길을 타고 10여분쯤 차를 달리면 오른쪽 산 아래에 십자가를 인 허름한 집이 눈에 들어온다. 함석 지붕 한쪽에 아담하게 올린 십자가와 예배당 앞쪽 허술한 철제 종탑에 매달린 종이 아니라면 교회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낯설다. 마을이래야 고작 5채 남짓한 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고 휴대전화 통화도 제대로 되지 않는 산골. 좁은 산길에 노선버스 같은 대중교통은 기대하기도 어려운 만큼 면내까지 가려면 일일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이 깊은 산마을에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집’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선교사들이 지었다면 대부분의 초기 교회들처럼 응당 인총 많은 요지나 높은 구릉의 터를 택했을 터. 그런데 하필 이 첩첩산중의 오지에 교회가 세워진 데는 깊은 사연이 있다. 사연의 주인공은 대한제국 탁지부(지금의 재경부) 관리(당시의 주사)를 지낸 김종숙(1956년 소천) 장로. 당시로선 일종의 외교관 양성소인 외국어학원 일본어 과정을 마치고 참의 승진이 예정되어 있던 김 장로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에 감흥을 받아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고 한다. “일제의 사슬을 끊고 나라가 독립하기 위해선 야소교를 믿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터에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처가가 있던 봉화 유목동으로 낙향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전국 어디서건 기독교 총회는커녕 노회도 조직되기 전.30리 길을 걸어 문촌교회를 다니다가 몇몇 신도들과 기도실을 만들어 신앙생활을 하던 중 1907년 5월17일 마침내 척곡교회를 세웠다. 지금의 자리에 예배당이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09년 3월29일.9칸짜리 정방형 기와집 예배당과 6칸짜리 초가 명동서숙이었다. 예배당은 원래 맨 마루바닥에 기와 지붕이었지만 나중에 긴의자들을 놓았고 함석지붕으로 교체했다. 출입문은 지금은 남쪽으로 나있지만 처음엔 동서쪽에 각각 문을 따로 내 남녀의 출입을 구분했다. 남녀석 가운데엔 광목을 쳐서 목사들만 남녀 신자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예배당 안에 들어서면 북쪽 중심공간인 아치형 강단 장식과 강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방형의 공간이 퍽이나 이채롭다. 궁벽한 산골에서 신자들이 헌금을 내기 어려웠을 것은 뻔한 일. 신자들이 집에서 가져온 쌀을 십시일반으로 교회 살림에 보탰는데 지금도 예배당 양쪽 벽엔 성미(誠米·기도미) 자루가 걸렸던 못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예배당 앞의 명동서숙은 신자들을 교육하던 학교다. 성경과 국어, 산수, 한문을 가르쳤는데 당시 이 지역의 웬만한 주민들은 모두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1칸은 여학생 기숙사, 나머지 5칸은 교실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그 깊은 산골에서 기숙사까지 갖춘 것이 놀랍기만 하다. 명동서숙과 예배당 사이엔 자연석 돌담이 둘러쳐졌는데 지금도 낮은 담장 부분이 남아 옛 모습을 짐작케 한다. 헌신적으로 목회에 나섰던 김 장로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1918년 무렵엔 한꺼번에 120명이나 모여 예배를 보았으며 김 장로는 봉화지역 6개 교회의 시무를 맡을 정도로 척곡교회는 번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야소교 믿음의 뿌리가 나라 독립에 있었던 때문일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앞장섰던 김 장로가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면서 일경들의 탄압을 받았고 명동서숙이 폐교된 뒤 결국 신자들도 흩어지게 되었다. 해방후 몇몇 목회자의 인도로 부분적인 건물증축과 보수작업이 있었지만 워낙 산골인데다 신자들도 모두 도심으로 이전해 옛 신앙터의 명성은 되찾지 못했다. 척곡교회가 세워진 지 올해로 100년.70∼80대의 촌로 10여명만이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스러진 교회가 되었지만 경북 지역에선 또렷하게 남아 있는 ‘믿음의 고향’이다. 김 장로의 장손인 김영성(82) 장로 부부가 교회를 버티고 있는 주인공이다. “척곡교회를 잊지 말라.”는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후 지난 2004년 낙향해 여전도사 1명과 함께 교회를 지키고 있다. kimus@seoul.co.kr ■ ‘교장서 교회지킴이로’ 김영성 장로 할아버지 김종숙 장로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집안의 모태신앙을 받은 김영성 장로는 신앙보다는 교육에 한평생을 바친 교육자다. 어릴 적 명동서숙에서 공부하면서 할아버지의 신앙과 독립운동을 지켜봤지만 목회보다는 교육을 택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인천 모 여고 교장을 끝으로 평생 몸담았던 교직을 정년퇴직한 뒤 부인 안난희(77)권사와 이곳에 내려왔다. 같은 교육자의 길을 걸었던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다. 이민을 가 외국에서 살고 있는 자손들이 “함께 살자.”고 거듭 권유했지만 “척곡교회를 잊지 말라.”는 유언이 귀에 맴돌아 결국 교회 지킴이가 된 것이다. 17년 전부터 가끔씩 내려와 쓰러져가는 예배당이며 명동서숙을 보수하면서 교회 85주년 행사도 치르곤 했지만 지난 2004년 낙향한 뒤부터는 아예 예배당 옆 고택에 살면서 새벽예배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를 인도하고 있다. 주일예배 찬송 때에는 직접 피아노 반주를 하고 예배가 끝난 뒤엔 인근 법전교회로 달려가 피아노 반주와 가스펠을 하며 신자들과 어울린다. 예배당에 남아 있던 초기의 당회록이며 교적부, 면려회록 같은 문서들을 정리하면서 척곡교회의 역사를 새로 쓰기도 했다. 한국 교회사엔 척곡교회 창립일이 1908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907년 당시 척곡교회 교적부에 신도 두사람이 학습교인으로 기록된 점을 발견해 교단 총회에 알린 것이다. 그런 노력으로 척곡교회는 총회사적 교회와 영주노회 사적 제1호로 등록됐고 지난해엔 등록문화재 리스트에도 올랐다. “지금이라도 내가 떠나면 교회가 금세 허물어질 것 같아 떠나지 못한다.”는 김 장로. 그의 마지막 바람은 교회 개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와 신앙 선열들의 역사를 담은 기념관을 세우는 것이다. 특히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봉화경찰서장 앞에서도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아 구속됐다가 해방 후에야 풀려났던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의 국가유공이 인증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올해 탄생 100주년 문인들 작품세계 조명

    소설가 이효석과 시인 신석정·김달진의 공통점은. 모두 고인이 됐지만 이들은 모두 대한제국 시절인 1907년 태어나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문인들이다. 2001년부터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를 열어온 대산문화재단과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새해에도 탄생 100주년을 맞는 10여명의 문학세계와 작품을 조명키로 했다. 한국 단편문학의 백미 가운데 하나인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인 이효석은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초기에는 작품에 깃든 사회주의 성향 때문에 ‘동반자 작가’로 불렸고, 이후 ‘돈’ ‘수탉’ 등 향토색 짙은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했다. ´고향인 강원도 봉평 주민들로 구성된 가산문학선양회는 오는 5월25일 봉평면 가산공원에서 추념식을 연다. 매년 9월 메밀꽃밭이 펼쳐진 봉평면 일대에서 개최되는 ‘효석문화제’도 9회째를 맞아 규모를 키우기로 했다. 신석정은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한 뒤 삶의 경건함과 순수함을 노래한 ‘선물’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등을 내놓았다. 시집 ‘촛불’ ‘슬픈 목가’ ‘빙하’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 등을 남기며 목가적 서정시인의 대명사로 꼽혔다. 김달진은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동양적 세계와 유유자적하는 생활이념을 나타낸 작품과 인생을 탐구한 서정시를 함께 보여준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시집 ‘청시’ ‘올빼미의 노래’가 있다. 이들 외에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우리 민요와 신시를 번역 소개한 김소운,1946년 월북해 조선작가동맹 상임위원 등을 지낸 시인 박세영, 애정소설을 많이 발표한 함대훈 등도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문인들이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근대문화재 등록 희비쌍곡선

    근대문화재 등록 희비쌍곡선

    ‘동산(動産)은 웃고, 부동산(不動産)은 울고.’최근 근대문화재 등록이 활기를 띠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난해 7월 문화재보호법 개정에 따라 근대문화재 등록 대상이 시설물·건축물 등 부동산에서 동산까지 확대되면서, 재산권 침해 우려를 낳고 있는 부동산문화재 등록은 난항을 겪고 있는 반면, 동산문화재 등록은 가치 상승에 따라 더욱 활성화할 전망이다. ●활기 띠는 동산문화재 등록 문화재청은 지난달 20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썼던 어차(御車)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근대동산유산으로서 첫번째로 등록문화재 목록에 오른 것이다. 이어 근대기(1902∼1945년) 국가표준 도량형기 331점도 문화재로 등록 예고돼 어차에 이어 동산문화재 2호가 될 전망이다. 또 최근 보존처리를 위해 임진각으로 옮긴 파주 비무장지대 경의선 철마는 2004년 2월에 이미 등록된 만큼 철마를 동산 1호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그만큼 동산문화재 등록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김인규 연구관은 “동산유산 등록과 관련, 내년부터 10개년 전수조사를 통해 교통·통신, 의생활, 주생활 등 분야별로 대상을 선별할 것”이라면서 “연습 비행기, 증기기관차, 자동차 등 최초의 의미를 지닌 동산유산 위주로 등록, 영구히 보존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컬처플러스 강민철 대표는 “부동산유산은 문화재로 등록되면 가치 하락이 우려돼 꺼려하는 면이 있지만 동산유산은 등록되면 오히려 가치가 올라 등록사례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등록문화재, 실보다 득으로’ 그동안 근대문화재 등록은 사옥·기념관·강당·교회 등 시설·건축물 위주로 이뤄져 왔다. 현재 등록된 278건의 70% 이상은 국가 소유이고, 민간 소유는 재산권 제한 논란 때문에 등록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다. 지난해 대구 소재 근대유산에 대한 일괄조사에서 7건이 등록 예고됐으나 소유주의 반발에 부딪혀 화교협회 건물 1곳만 등록됐다. 지난달 등록 예고된 제주도 설촌마을 돌담길 등도 주민들의 반발로 등록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뒤 소유주에 의해 파괴된 비행기 격납고, 자인양조장, 스카라극장, 옛 대한증권거래소 등의 경우도 등록에 따른 사유 재산권 침해를 우려해 벌어진 일이다. 문화재청 이유범 근대문화재과장은 “민간 소유의 경우, 문화재로 등록되면 세제 감면, 공간 활용 등 혜택이 많은데도 지정문화재 기준과 같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대부분 등록을 거부한다.”며 부동산유산 등록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근대유산 등록을 활성화하려면 현행 등록제도의 규제와 인센티브를 동시에 강화하고, 등록문화재에 대한 국민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근대문화유산 보존운동 단체인 도코모모코리아 김정신(단국대 건축학과 교수) 회장은 “등록문화재 제도는 보수비 지원, 재산세·양도세 감면, 상속세 유예, 용적률 보상, 공간의 타용도 활용 등 지정문화재와 달리 혜택이 많다.”면서 “행정기관과 기업, 소유자, 시민단체 등이 근대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제도로서 잘 활용하고 가꿔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기고] 가까운 100년을 돌아보자/이성원 문화재청 차장

    얼마 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탔던 어차(御車)가 문화재로 인정받았다.1910년대 만들어진 이 어차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손상되었으나 최근 완벽하게 수리하여 다시 문화재로 태어났다. 그런데 자동차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고 누가 탔는지를 물어보면 답변이 궁색해진다. 교과서를 통하여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는 열심히 배우지만 정작 우리와 가까운 100여 년 전 모습은 오히려 잘 모르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마도 식민지 세월을 살아온 우리 모습을 돌이켜 보기 싫은 무의식도 은연중 작용했으리라. 그러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아직까지 100년의 세월을 버텨 오며 당시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 그 시대를 기억하게 만든다. 가령 인천의 차이나타운에 가면 우리나라 자장면집 1호이며 올해로 꼭 101년이 되는 공화춘 건물이 문화재로 인정받아 아직 그 자리에 있다. 바로 그 옆에는 인천 개항 후 5년 만인 1888년에 일본·청나라를 비롯한 미국·영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들이 어울려 지내는 ‘만국공원’으로 형성된 자유공원이 있다. 인천 앞바다가 보이는 이 공원에 올라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앞으로 세계 속의 우리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있다. 우리에게 건축물만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지만 우리 할머니가 얼굴에 발랐던 화장품인 박가분, 할아버지가 애지중지하며 탔던 자전거, 방을 밝혀주던 우록표 성냥 등도 그 이전시대와 다른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이런 것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을까. 이제부터라도 가까운 역사,100년의 역사를 돌아보자. 문화재청에서도 근대문화재를 더욱 보존하여 국민들에게 우리 근대 모습에 대한 기억과 관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러면 그 속에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100년에 대한 해답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성원 문화재청 차장
  • 덕수궁 중명전 사적 지정 추진

    덕수궁 중명전 사적 지정 추진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53호)에 대한 사적 지정이 추진된다. 서울시는 고종 황제가 편전(便殿·왕의 집무공간)으로 사용하던 중명전에 대해 문화재청에 사적 지정을 신청했다고 16일 밝혔다. 중명전은 중구 정동 1의11번지(주한 미국대사 관저 서쪽)에 위치한 지하 1층, 지상 2층 벽돌건물로 당초 대한제국 황실의 도서관으로 건립됐으나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고종 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면서 한국 근대사의 주요 무대가 된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1905년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조인됐고 고종 황제가 각국에 밀서를 보내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다 강제 퇴위당한 곳이기도 하다. 건축학적으로는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가장 초창기 풍모를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그러나 1901년과 1925년 두 차례 화재로 외형과 내부가 다소 변형됐다. 시 관계자는 “건물의 역사적 성격 등을 감안해 시 문화재로 두기보다는 이미 사적(제 127호)으로 지정된 덕수궁에 포함시켜 국가 문화재로 관리를 일원화하는 것이 낫다는 시 문화재위원회의 의견을 따라 사적 지정을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근대 국가표준 도량형기 문화재 된다

    1900년대 초부터 40여년간 사용된 곧은자·저울·추 등 국가표준 도량형기 300여점이 문화재로 등록된다. 문화재청은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이 소장한 근대기(1902∼1945년) 국가표준 도량형기(度量衡器) 154건 331점을 문화재로 등록예고했다고 8일 밝혔다. 황동으로 만든 원통형 고리 조분동을 비롯해 곧은자, 되·말, 철재 및 목재 대저울, 저울추 등이 포함됐다. 이번 문화재 등록예고는 기술표준원에서 근대 도량형기의 중요성과 표준 역사를 알리고, 영구보존하기 위해 신청함으로써 이뤄진 것이다. 길이와 부피, 무게를 측정하는 도구인 도량형기는 어느 나라이든 표준을 정해 통용돼왔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 도량형이 지역마다 달라 혼선을 빚었으며,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1905년 3월21일(광무 9년) 서양식 미터법을 바탕으로 대한제국 최초의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이 제정됐다. 이후 새로운 도량형이 정착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예고된 도량형기는 근대기 도량형 제도의 변천사를 실물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가의 표준 도량형 용기로 사용됐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으며, 당시 생활모습과 정부의 계량기 관리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그동안 학계에서 도량형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근대기 대한제국의 개혁 노력에 대한 역사학계의 논쟁에 불씨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근대 도량형기가 문화재로 등록예고되면서 지난 1일 등록예고된 순종·순정효황후 어차(御車)에 이어 동산문화재로서는 두 번째 근대 문화재가 된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천주교 월간지 ‘경향잡지’ 창간100주년

    천주교 월간지 ‘경향잡지’ 창간100주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발행하는 종합 월간지 ‘경향잡지’(발행인 정명조 주교)가 창간 100돌을 맞았다. 1906년 천주교계의 순 종교잡지로 창간,1933년 주교회의에서 공식 기관지로 인정된 ‘경향잡지’는 거의 매호에 교회소식을 실어 해방 이전의 교회 실상뿐 아니라 시기별 신학 사조나 흐름 파악에 귀중한 자료이다. 창간 이래 대한제국과 일제식민지, 미군정, 대한민국을 관통하며 한국사회를 지켜봐온 천주교회의 증언록이기도 하다. 한국 기네스북 언론·출판 부분에 국내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잡지로 등재되어 있는 ‘경향잡지’는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잡지 출판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정받는다. 일제 강압 속에서 우리글을 지키기 위해 처음부터 순 한글을 지켜왔으며 창간 당시 ‘법률문답’이란 고정란을 설정, 한국 최초로 지상 법률상담을 시작하기도 했다. 1972년도에 발행인을 맡았던 김수환 추기경은 100주년 기념호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말씀의 전달자로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경향잡지’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언제나 밝게 빛나기를 빈다.”고 축하했다. 한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는 ‘경향잡지’ 창간 10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130명의 성지순례단을 구성해 교황청을 방문,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경향잡지’를 봉정하고 돌아왔다. 오는 19일 오후 4시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대강당에서 열리는 창간 100돌 기념식에는 1964년에 주필을 맡았던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을 비롯, 60년 이상 구독하고 있는 장기 독자들이 자리를 함께할 예정이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몰락한 황실 일으켜 세울 구심점 된다면…”

    “여황(女皇)이라니요.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최연장자로서 몰락한 황실을 일으켜 세우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대한제국 황족회’는 29일 낮 서울 힐튼호텔에서 의친왕(1877∼1955)의 둘째 딸 이해원(李海瑗·88) 옹주를 제30대 황위 계승자로 추대하는 대관식을 가졌다. 황족회는 29대 이구(李玖) 황위 계승자의 타계 등을 계기로 대한제국 황손 10여명을 중심으로 결성한 가족회다. 황족회는 “대한제국 황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침탈된 지 100년, 조국이 광복된 지 61년이 됐으나 영친왕(28대·1897∼1970)의 아들 이구 저하가 후사 없이 지난해 7월 일본 도쿄에서 의문사로 타계, 왕가의 맥이 끊김에 따라 해원 옹주를 30대 황위 계승자로 추대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해원 옹주는 여성으로서 대한제국 황실의 법통을 잇게 된다. 황위계승자는 황실의 대표 전권, 황실 유지보존 및 복원 사업권,31대 황위 계승 후계자 지명권 등을 갖게 된다. 이 옹주는 “아버지 의친왕 자녀 후손 중에서는 내가 가장 나이가 많다. 가족의 최연장자로서, 대표로서 역할을 맡게 돼 영광이라면 영광이다. 뿔뿔이 흩어진 황실 가족을 다시 모아 황실을 재건하는 밀알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의친왕은 일제의 혼혈정책으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 황족 이방자 여사와 결혼해야 했던 영친왕과는 달리 일본인과의 결혼을 거부한 채 국내에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다 감금되기도 했다. 이 옹주는 “순종황제가 승하하신 후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이 황위를 승계했어야 하지만 아버지가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제가 반대해 고종황제의 셋째 아들인 영친왕이 황위를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현재 이 옹주는 경기도 하남시의 네 평짜리 무허가 단칸 월세방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황위 승계식에는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황실 친족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황족회는 옹주의 황위계승 사실을 외국 황실협회 등에 공문으로 정식 알리고 외국 황실들과의 교류도 추진해 나간다는 계획이다.연합뉴스
  • [문화마당] 우리나라 공식국명은 대한민국이 아니다/허동현 경희대 한국사 교수

    한 세기 전 이 땅의 사람들은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으로 전락하고 만 참담한 실패의 역사를 쓰고 말았다. 그때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이 되기를 열망하던 민족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도둑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온 해방의 감격도 잠시뿐 미국과 소련이 펼친 냉전의 덫에 걸려 민족은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냉전이 깨진 지 오랜 오늘, 통일은 해방처럼 어느 날 눈앞에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다. 둘이 하나 되는 그날이 오면, 아니 지금도 왠지 ‘대한민국’이 풀뿌리 시민사회를 이룬 우리의 현재를 대표하는 국명으로 미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대한민국은 1948년 제헌국회에서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던 새 나라의 국호는 아니었다. 당시 ‘고려공화국으로 하자.’, 아니 ‘조선공화국이 좋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지만 ‘국명이 나쁘다고 독립이 잘 안 되는 게 아니니, 차차 국정이 정돈되고 나서 대다수의 결정에 의해 그때 법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이승만 대통령의 설득이 주효해 잠정적으로 대한민국을 국호를 삼았던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지 두 달 뒤에 터진 거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 이후 나라를 앗긴 황제의 존재는 기억의 저편 망각의 늪에 빠져버렸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웅변하듯, 그때 이미 우리는 왕정복고를 거부하고 공화국을 꿈꾸지 않았었나? 그렇기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 대한 단절의식을 함축하는 반어적 국명이다. 역설적이게도 제헌국회에서 국명을 논의할 때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보자.’며 ‘대한민국’을 최초로 제안했던 신승우 의원 말마따나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소극(笑劇)을 연출한다. 대한제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종속국이 아니라 자주국임을 만천하에 천명한 국호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기도를 러시아가 삼국간섭을 일으켜 막은 후 이루어진 러·일 두 나라 사이의 세력 균형 위에 세운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았다. 본래 모습보다 크게 보이려 소 앞에서 억지로 배를 부풀리다 소에게 밟혀 죽는 이솝우화 속 개구리를 떠올려 보라. 인간이건 나라건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는 자화자찬은 듣는 이의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법. 대한제국은 외세에 기대어 명맥을 이으려 한 왕조의 유약함을 상징한다. 개구리 배 부풀리기 식의 자대(自大)나 타력을 빌리려는 책략만으로는 덩치 큰 포식자들이 날뛰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돌아온 열강쟁패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덩치 큰 포식자들에 맞서 배 부풀리기를 하는 자대도 아니고, 강자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는 굴종도 아닐 것이다. 우리의 번영과 생존을 지켜줄 현명한 책략과 견실한 자강, 그리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켜줄 자긍이 더없이 요청되는 오늘이기에, 허장성세의 대한제국을 연상케 하는 대한민국보다는 제헌국회에서도 제기된 바 있던 고려공화국이란 국명이 더 살갑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거란의 침공에 맞서 나라를 지킨 강감찬의 신출귀몰하는 전략과 세치 혀만으로 침략군을 물러서게 한 서희의 협상력에 목마르기 때문이요, 세계제국 몽고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60년 항쟁을 벌여 나라를 지킨 고려인의 불굴의 의지가 그립기 때문이요, 밖을 향해 활짝 열린 국제무역항 벽란도와 남녀 간의 자유연애를 노래한 고려가요의 개방성이 한 마을이 된 지구에서 양성평등사회를 꿈꾸는 우리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요, 세계의 중심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문명이라고 뽐내는 중화(中華)에 맞서 높고 아름답다며 또 다른 문명의 빛임을 자긍한 고려(高麗)의 함의가 오롯이 다가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대외적 공식명칭 Republic of Korea와 합치하는 고려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허동현 경희대 한국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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