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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가방]

    ●근대 문화유적지 5선 한국관광공사는 2월의 가볼만한 곳으로 ‘인천 개항 120년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인천 중구)’ ‘서울 한복판에서 대한제국의 흔적을 만나다.(서울 정동)’ ‘근대문화유산, 군산의 그날을 이야기하다.(전북 군산)’ ‘황금어장 구룡포의 100년 전 골목여행(경북 포항)’ ‘금강변에서 넉넉하게 즐기는 빈티지풍 시간여행(충남 논산)’ 등 5곳을 선정, 발표했다. 주제는 ‘근대 문화유적을 찾아서’다. ●한화리조트 사이버회원 할인 한화리조트는 2월28일까지 전국 체인 리조트를 최고 50%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사이버 회원 패키지’ 상품을 내놨다. 한화리조트 설악은 숙박과 워터피아 2인 이용권을 묶어 12만 9000~15만 9000원에 판매한다. 부산 해운대와 제주는 숙박과 조식 뷔페, 사우나 등을 묶어 각 11만 9000~14만 9000원과 9만 9000~14만 9000원에 판매한다. 1588-2299. ●캐리비안 베이 이용하면 에버랜드는 5000원 에버랜드는 캐리비안 베이 이용객이 에버랜드를 이용할 경우 5000원에 입장할 수 있는 우대 행사를 마련했다. 캐리비안 베이 이용자의 당일 방문에 한한다. 당일 영수증을 에버랜드 매표소에 제시하면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연간회원이나 선물용 티켓을 소지한 고객도 방문 확인증을 받아 우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3월 1일까지. (031)320-5000. ●‘맘 앤 키즈 패키지’ 판매 롯데월드는 2월12일까지 9세 이하 어린이 1명과 성인 동반 보호자 1명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2인 자유이용권 ‘맘 앤 키즈 패키지’를 3만 8000원에 판매한다. 정상가격(6만 1000원)에서 40% 할인된 가격이다. 패키지 구입시 의료보험증 등을 매표소에 제시해야 한다. (02)411-2000.
  • [한·일 100년 대기획]일제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한·일 100년 대기획]일제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일제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일제 이전과 광복 후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동안 경제사가들 사이에는 이른바 ‘근대화론’과 ‘수탈론’이 대립해 왔지만, 이는 경제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먼저 ‘근대화론’은 대한제국을 낙후된 ‘봉건국가’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광복 후의 ‘대한민국 근대화’를 일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따라서 이 견해는 일제시대를 긍정하는 이론인 동시에 일제 이전의 자생적 근대화를 완전히 부정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역사학계에서는 이 이론을 따르는 학자는 거의 없다. 18세기에서 대한제국에 이르는 시기에 이룩한 민주화와 산업화의 실적이 충분히 논증되었기 때문이다. ●수탈론·근대화론은 경제적 측면만 부각 더욱이 ‘근대화론’은 한국인의 치열한 항일운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극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인이 일제시대를 ‘노예상태’로 이해하고 목숨을 던져 투쟁한 것은 ‘근대화’의 고마움을 모르는 무지한 행동이었던가? 또 광복후 대한민국이 ‘근대화’에 성공한 것은 망국의 수치를 씻으려는 자존심의 폭발이 응집력을 높였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수탈론’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일제에 저항한 것은 수탈에 대한 저항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말 의병운동은 경제수탈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국권 박탈에 대한 저항이었고, 일제시대의 항일운동도 마찬가지다. ‘근대화론’이나 ‘수탈론’이나 한국인의 드높은 ‘주권정신’과 ‘문화적 자존심’을 무시한 이론이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은 17세기 중엽부터 찾아온 서양과 직접 교류하면서 경제, 기술, 군사면에서 조선을 앞서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와 인문문화의 수준은 조선보다 낙후되어 있어서 19세기 초까지도 조선에서 간 통신사(通信使)에 열광하면서 조선문화를 배우려고 애썼다. 조선은 쇄국을 하지 않았음에도 서양이 찾아오지 않아 경제와 군사에서 뒤지게 된 것이다. 망국의 원인은 ‘붓문화’가 ‘칼문화’에 꺾인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대 일본을 건설한 주역이 한국인이고, 그 후로 수 천년간 선진문화를 건네준 것이 한국인이므로, 정신적으로 일본이 한국인을 압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생긴 일본인의 열등의식이 우리의 민족문화를 압살하는 정책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역으로 일본을 마음 속으로 멸시하는 정서를 낳았던 것이다. ●양복·기차 등은 근대화 아닌 서양화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서양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이 점을 무시하고 서양이론을 끌어다가 한일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 시대의 국민정서와도 맞지 않는다. 일제시대 한국인은 ‘대한국인’(大韓國人)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3·1운동에 표출된 국민여망은 ‘대한국’의 회복이었고, 그들의 손에 쥔 것도 대한제국의 국기인 태극기였다. 국외에 세워진 많은 독립단체들도 모두 ‘대한국’ 회복을 저항의 목표로 삼았다. 총독부가 정한 ‘조선’이라는 칭호는 국내에서만 강제로 사용될 뿐이었다. 그 ‘대한국’을 민주공화국 정부로 재건한 것이 ‘상해 임시정부’다. 임정은 태극기를 국기로 삼았고, ‘헌법’에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을 넣어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광복 후의 ‘대한민국’이 ‘대한제국’과 ‘임정’의 국호를 그대로 계승하고, 태극기를 국기로 정한 것은 대한민국이 ‘조선총독부’ 체제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확실하게 계승했음을 말해준다. ‘제헌헌법’에서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1987년의 개정헌법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도 그런 뜻을 함축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바탕을 둔 근대적 주권국가로서 산업화와 근대화의 삽질을 힘차게 시작했다. 정체(政體)는 제국이었으나, 정체의 목표는 민국(民國)이었다. 삼한(三韓), 즉 삼국(三國)의 영토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민족국가 건설의 꿈을 국호에 담았고, 조선시대부터 국기처럼 사용하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와 어기(御旗)로 확정했다. 일제 36년의 침탈에도 불구하고, ‘대한국’의 ‘국권’과 ‘자존심’을 지키려고 집요한 사투를 벌인 것이 역사의 진실이라면, 일제시대를 경제에만 한정하여 바라보는 것은 역사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양복을 입고, 기차를 타고, 영화를 보고, 서양문화를 접했다는 것은 ‘근대화’가 아니라, ‘일본화’나 ‘서양화’로 부르는 것이 옳다. 이런 따위의 ‘서양화’는 이미 1876년의 개항 이후로 우리 스스로 모두 시작한 일들이므로 하등 새로울 것도 없다. ●한국은 붓문화 재인식해야 한국의 정치문화가 일본보다 앞섰다는 것은 과거제도와 이를 뒷받침하는 높은 수준의 유교문화와 치열한 교육열, 그리고 고도로 세련된 민본정치와 관료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봉건국가가 아니었다. 일본은 막부시대 말기까지 이런 정치문화를 갖지 못했다. 높은 인문문화와 교육열의 전통이 지금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온 원동력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의 발전은 ‘기적’이 아니라, 문화선진국의 전통이 되살아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붓과 칼이 부딪치면 당장은 붓이 꺾인다. 그러나 길게 보면, 붓의 위력이 칼을 이긴다는 것이 고금의 진리다. 일본은 이제 칼 문화의 한계를 철저히 반성해야 하고, 우리는 붓 문화의 전통을 한탄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역사학 전공)
  • [한·일 100년 대기획]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한·일 100년 대기획]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꼬박 100년이 흘러갔다. 아시아의 평화와 대한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안중근은 옥중에서 미완성 수고(手稿) ‘동양 평화론’을 쓰다가 형이 집행됐다. 머리말과 목차만을 남겼을 뿐이다. 일련의 상황들은 얼핏 역설 또는 가치의 전복에 가깝다. ‘동양 평화’ ‘대동아공영’을 주창했던 일본의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를, ‘동양 평화를 원하던’ 안중근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총살했으니 말이다. 안중근의 의거 10개월 뒤인 1910년 8월 일본은 한국을 병탄(倂呑)한다. 100년이 지났건만 평가는 엄정하고, 치밀해야 한다. 새로 오는 10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더더욱 냉철하고,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 또한 지난 역사의 평가작업으로서 제기되는 몇몇 의문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필요하다. #장면 1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10분 중국 하얼빈 기차역. 일본의 전 총리이자 조선 통감부 제1대 통감(총독)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탄 기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러시아 군복 스타일의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대합실에서 일어나 천천히 플랫폼으로 걸어나갔다. 만 서른 살의 청년,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안중근이다. 이토는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68세의 노정객 이토는 기차 안에서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20분 남짓 대화를 나눈 뒤 모습을 드러냈다. 안중근은 러시아 사열병 바로 뒤쪽까지 다가섰다. 신문기자로 위장했기에 접근에 어려움은 없었다. 이토가 사열병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안중근은 앞으로 뛰쳐나가 품 속에서 권총을 빼내 세 발은 이토에게 명중시키고, 나머지 세 발은 수행원들을 쐈다. 그리고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우레 코레아!(한국, 만세!)”를 외쳤다. 이토는 30분 뒤인 오전 10시 사망했다. 현장에서 붙잡힌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 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고 밝힌 뒤 사형을 선고받았고, 항소를 포기하며 죽음을 선택했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뤼순(旅順) 감옥에서 형이 집행됐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였다. 뤼순 감옥 뒷산에 묻힌 그의 유해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지난해 9월 동상으로나마 돌아온 안중근은 여러 논란 속에서 제자리를 못 잡다가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경기 부천 안중근 공원(구 중동공원)에 어렵사리 정착할 수 있었다. #장면 2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일방적 을사늑약 체결, 1906년 조선 1대 통감으로서 펼친 각종 조선 말살 및 식민지화 정책,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등 일제가 벌인 동아시아 침략에 주도적 역할을 맡는 등 씻을 수 없는 죄과를 남긴 인물이다. 크고 작은 저항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 그는 안중근에 4년 앞서 또 다른 대한제국 청년의 의거로 중상을 입었다.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1906년 3월)하기 직전 수원으로 사냥 나들이를 나서는 등 여유 있는 한때를 보냈다. 해 저물녘 안양을 들러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자리에 앉았는데 을사늑약 체결에 비분강개하던 스물 세 살 원태우가 돌멩이를 여러 개 던져 유리창을 깨뜨렸고, 이토의 얼굴에는 파편 여덟 개가 박혔다. 원태우는 징역 2개월에 장형(곤장 100대)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과 일본 역사 안에서의 평가는 또 다른 극점에 놓여 있다. 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격(格)으로 평가받는다. 빈농의 아들에서 출발한 그는 일찍이 영국 런던대학으로 유학해 화학을 전공하는 등 서구 문물과 근대 교육을 받아들였고, 일본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마련했으며, 내각제 등 일본 정치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다. 초대 총리와 5·7·10대 총리를 지냈고, 추밀원 의장, 귀족원 의장을 맡는 등 36년 동안 일본의 최고 핵심권력에 있었다.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총리에서 몸을 한껏 낮춰 조선의 초대 통감을 자처했으니, 일본에서는 개인의 욕망보다는 겸손하게 대의에 충실한 인물, 동양 평화를 추구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토의 장례는 1909년 11월4일 히비야공원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1963년 발행된 일본의 천엔(円)권 화폐 속 인물이 됐을 정도로 지금도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다.
  • [한·일 100년 대기획]을사오적은 누구인가

    [한·일 100년 대기획]을사오적은 누구인가

    을사오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다섯 사람을 말한다. 이른바 을사조약으로도 표현하지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방적으로 박탈한 불평등 조약이기 때문에 굴레 ‘늑(勒)’을 써 을사늑약이라 불린다. 을사년에 체결됐다. 어찌나 일제의 무자비한 강압 속에 이루어졌던지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였다. 일본은 군을 추가 파병해 황궁 전체를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대한제국을 압박했다. 늑약 체결 8일 전에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위협했지만 황제는 늑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대신들에게 일일이 가부를 물었고 한규설 참정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하자 이토는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질렀다. 한규설을 비롯해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무대신 이하영만이 을사늑약 불가(不可)를 썼고, 을사오적인 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했다. 을사오적 가운데 이근택은 피란 시절의 명성황후에게 생선을 바쳐 요직으로 진출했지만 돈에 매수돼 일본의 첩자로 변신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날 그는 가족들에게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토록 혁혁(赫赫)할 거요.”라고 자랑했다. 을사오적은 숱한 암살 시도에 시달렸고 칼을 맞기도 했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본강점기 전반에 걸쳐 각종 협약과 합의를 체결하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른다. 게다가 이완용과 이근택의 후손들은 국가에 귀속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수십 차례에 걸쳐 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조선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군림했던 이완용의 후손은 재산 소송에서 일부 승소해 땅을 되찾았으나 주변의 비난에 땅을 팔고 국외로 도피했다. 을사오적 가운데 이지용은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고, 박제순의 상속자 박부양은 10대의 나이에 일본에서 자작 작위를 받고 당시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파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 선진화의 굴레이자 사회 구조적 불평등의 근간으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영친왕 일가 옷·장신구 333점 국가문화재 지정

    영친왕 일가 옷·장신구 333점 국가문화재 지정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일가의 유물이 국가지정문화재가 됐다. 문화재청은 17일 영친왕과 영친왕비가 사용했던 옷과 장신구 333점을 일괄 공개하고 중요민속자료 265호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됐다가 1991년 환수된 이 유물들은 영친왕의 곤룡포와 왕비의 대례복인 적의(翟衣)를 포함, 궁중의례에서 착용했던 것들이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씨줄날줄] 환구단/김성호 논설위원

    일제 36년의 침탈로 수도 서울의 4대문 안에서 가장 큰 아픔의 흔적을 간직한 곳은 경복궁과 환구단이다. 태조 이성계가 왕조의 기세를 펴기 위해 낙점한 조선시대 정궐이 경복궁이고, 고종황제가 국격의 자존을 살려 천제를 올리던 제천단(祭天壇)이 환구단 아닌가. 통치와 집정의 핵심인 경복궁에 식민통치와 수탈의 중심인 조선총독부를 세운 것이나, 황제의 제천단을 허물어 호텔을 올린 일제는 식민 심장부의 눈엣가시를 모두 제거해 회심의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훼손된 경복궁 안 390여칸의 전각이며 정문인 광화문을 복원하려는 국가적 역사는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혼 부활을 겨냥한다. 망가지고 스러진 조선 정궐을 다시 살려내려는 역사는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시작으로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국가적 대사의 뜻대로라면 어두운 과거를 털고 민족정기의 회복을 코앞에 둔 셈이다. 이렇게 웅장한 경복궁 복원의 거사와는 달리, 1㎞도 채 안 떨어진 환구단이 똑같이 아픈 잔재임에도, 관심에서 먼 채 그늘의 잔재로 남아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환구단이 천제를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나라의 자존과 위신을 세우려는 고종의 통한이 담긴 곳임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곤 이 천구단에서 제사를 드린 뒤 황제에 즉위했다. 삼국시대부터 거행한 제천의례는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원구제 형태로 이어지다 세조 때 폐지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구제라 함은 천자(天子), 즉 황제가 하늘에 드리는 제사였으니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원구단을 빌려 나라의 독립을 천명한 게 우연이 아닌 것이다. 환구단을 보는 일제의 시선이 고왔을리 없다.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3년 뒤인 1913년 일제는 결국 총독부 부속건물인 철도호텔을 세우면서 많은 부분을 헐어냈다. 1967년 조선호텔 건립 때 신주를 봉안하던 황궁우만 빼놓고 그나마 모두 철거됐다니 환구단은 시련의 점철이다. 서울시가 2007년 우이동에서 발견된 환구단 정문을 원래의 자리에 이전 복원해 놓았단다. 뒤늦은 가치의 발견과 역사의 복원이지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뉴스다큐 시선] 연탄을 담은 풍경들[동영상]

    [뉴스다큐 시선] 연탄을 담은 풍경들[동영상]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그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詩, ‘너에게 묻는다’ 중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조선팔도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득바득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연탄차라고. 불이 붙으면 그대로 재가 될 때까지 뜨겁게 더 뜨겁게 자신을 태우는 연탄. 세상을 얼릴 듯했던 겨울 새벽 추위를 모두 몸으로 견딘 것처럼 연탄은 회색빛 재로 변해 버렸습니다. 연탄보일러가 데운 한 칸 방의 온기, 연탄불에 구운 노릇노릇한 고구마의 달콤함…. 젊은 세대에게는 낯설기만 한 연탄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간직한 이들이 있습니다. 연탄재처럼 부서져 가는 기억의 마지막 끝을 일상인 양 잡고 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글 사진 안석기자 ccto@seoul.co.kr 제가 태어난 곳은 서울 시흥동의 연탄공장입니다. 오늘(21일)은 날씨가 좀 풀려서 그런지 공장 너머 지하철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장은 아침부터 트럭 행렬이 이어지면서 휴일인데도 평일보다 더 시끌시끌합니다. 저는 지금 25t짜리 대형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는데 저와 제 친구들이 가는 곳이 부자 동네인 강남이라네요. 저도 이제 ‘강남물’ 좀 먹는 게 아닌가 싶어요. 자! 제가 어디로 가는지 함께 따라오시죠. ●서울 시흥동 연탄공장 이야기 제 고향 ‘고명산업’은 서울에 2개뿐인 연탄공장 중 하나입니다. 날씨가 추워지는 11월은 일년 중 가장 바쁜 시기지요. 하루 연탄 생산량은 30만장 수준입니다. ‘얼마 안 되네.’라고 생각하시나요? 무려 100대가 넘는 차량이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오가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직원분들은 누가 오가는지도 신경도 안 쓰고 일만 하십니다. 제 아버지(?)는 1978년부터 이 공장에서 근무한 신희철 전무입니다. 아버지가 일을 시작했던 1970~80년대만 해도 서울에 연탄공장이 무려 19개나 있었답니다. 그때는 서울의 하루 연탄 소비량이 2000만장이나 됐다고 합니다. 당시 이 공장의 하루 연탄 생산량도 지금의 두 배가 넘는 60만~70만개 수준이었죠. 1970년대 석유파동 때는 하루 100만장까지 찍어내기도 했습니다. 현재 서울 지역 하루 연탄 소비량은 얼마나 될까요. 아버지 말로는 70만장 정도에 불과하다네요. 이 공장은 1990년대만 해도 과거 삼천리연탄(현 삼천리E&E)의 시흥 공장이었습니다. 연탄산업이 사양길을 걷던 1997년, 본사가 시흥 공장을 폐쇄하기로 하자 아예 당시 직원들이 공장을 인수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답니다. 공장을 새로 열 당시만 해도 10명에 불과했던 직원 수는 한때 60명이 넘을 정도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외환위기로 석유 대신 연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경기가 회복되자 직원 수는 자연스럽게 줄어 현재는 27명이 공장에 몸담고 있습니다. 직원 평균 연령이 60살이 넘을 정도로 평생을 연탄과 함께 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새 직원을 고용하면 되지 않냐고요? 모르시는 말씀. 요즘 젊은이들은 연탄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꺼려합니다. 올 들어 경제가 어렵다 보니 사무실에 석유난로 대신 연탄난로 놓는 분들도 많지요. 그런데 아마 이런 인기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 같네요. 정부 아저씨들이 무연탄 수급 불균형 해소라는, 한번 들으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정책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랍니다. 쉽게 말해 공장에 지급하던 보조금도 줄이고 가격을 자율화한다는 얘기입니다. 벌써 1일부터는 연탄의 공장도 가격이 개당 403원에서 483원으로 올랐답니다. 시설농가 등에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지요. 여하튼 저는 이제 강남으로 갑니다. 트럭에서 잠깐 잠이나 자야겠네요. ●거여동의 연탄 이야기 “47, 48, 49, 50…. 아니다, 49개까지 옮겼지. 다시 합니다, 49, 50, 51….” 어, 이게 무슨 소리야. 벌써 도착했나. 밖을 보니 20대 청년들과 10대 학생, 50대 아저씨가 함께 나란히 줄을 지어 연탄을 옮기고 있습니다. “연탄 200개를 옮기려면 아직도 멀었다.”면서 일행을 재촉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언뜻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남자가 함께 연탄을 들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는 모습도 눈에 띕니다. 부자(父子) 사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어린 친구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걸 보니 부자 사이는 아니군요. 분명히 강남으로 간다고 했는데 여기는 강남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튼 연탄 특유의 냄새가 아침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마을 전체로 번졌습니다. 아! 이제 알았습니다. 여기는 송파구 거여동. 서울에서 가장 연탄을 많이 때는 동네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은 ‘따뜻한 한반도사랑의 연탄나눔운동(한반도연탄나눔운동)’의 무료연탄배달 행사에 온 분들이라는군요. 법무법인 지평지성, 대학생 동아리 단체 ‘케피터즈’ 등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허허, 저렇게 연탄 나르면 안 되는데, 몇 명은 처음 연탄배달을 하는 분들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연탄 몇 번 나르다 보면 땀이 저절로 흐를 겁니다. 자, 이제 제 차례가 됐습니다. 저는 어디로 갈까요. 저의 새로운 안식처는 홀로 사는 김융래(71) 할아버지의 집입니다. 김 할아버지는 자신의 단칸방 옆에 차곡차곡 쌓이는 연탄에서 눈을 떼지 못하시는군요. 아마 5월까지 연탄을 써야 한다며 머릿속으로 연탄 수를 세고 계신 듯합니다. 김 할아버지를 비롯해 한 가구당 들어가는 연탄은 200~300장 수준입니다. 추울 때는 하루 3~4개, 날이 풀리면 1~2개의 연탄을 쓰지만 대부분 어르신들은 날이 조금이라도 풀릴 때에는 한 장이라도 아끼신답니다. 그래야 봄 사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추위를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웃 주민인 안귀래(80) 할머니도 연탄을 쓰십니다. 안 할머니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데요. 몇몇 분들이 연탄을 받지 못하신다고 한숨을 쉬시네요. “지난번에는 연탄 없는 집에 우리 집 연탄을 나눠주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집이 생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안 할머니의 고운 마음에 저도 갑자기 뭉클해집니다. 올해 한반도연탄나눔운동과 함께한 단체는 지난해 300여개에서 500여개로 늘었다고 합니다. 참가자도 3만 2000명에서 5만명으로 늘었다는 것이 원기준 사무총장의 설명입니다. 기업체 등의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지만, 봉사활동 참가자가 많아지니 그래도 힘이 되는 소식 아닙니까? 한반도연탄나눔운동은 봄·여름 사이 전국을 대상으로 저소득층 연탄사용가구 실태조사를 한 뒤 9월부터 본격적으로 연탄 배달을 시작합니다. 원 사무총장의 표현을 빌리면, 연탄봉사활동은 ‘사회적 효도’입니다.. ●노원구 월계2동 연탄가게 이야기 아 참, 말이 나온 김에 얘기 하나 더 할게요. 동네 연탄가게 혹시 보신 적 있으세요? 요즘에는 공장에서 직접 배달을 해 연탄가게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연탄을 살 일도 거의 없을 테구요. 제 친구 가운데 재개발이 예정된 노원구 월계2동의 연탄가게로 간 애들이 있습니다. 가격이 530원 정도에 팔린다니 저보다는 비싸게 팔리는 친구들이죠. 주인 김문국(53)씨가 구멍가게와 연탄가게를 함께 운영한다고 하는데요, 평생을 그곳에서 사셨다고 합니다. 김씨 연탄 창고에는 지금도 1000장 남짓한 연탄이 쌓여있습니다. 많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200장씩 나눠 갖는다고 계산하면 다섯 사람 정도 분량밖에는 되지 않는 양입니다. 제가 호황을 누리던 1960~70년대에는 하루에 수 백 장이 팔리는 것도 예사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주문이 너무 많이 들어오면 오히려 짜증을 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경사가 가파른 동네까지 배달을 나가다 보면 웬만한 공사판 노동일보다도 고됐기 때문이지요. 김씨가 연탄배달 나갈 일이 크게 줄기 시작한 것은 1995년 인근에 주공상계19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일대의 연탄 판매량은 갈수록 급감했고 지금은 단골 빼고는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제가 김씨의 연탄가게에 갔으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봄이 될 때까지 새 주인도 못 만나는 신세가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여하튼 저는 이제 담담히 재가 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모두 따뜻한 겨울 보내십시오. 그래픽 김선영기자 ksy@seoul.co.kr ■ 연탄의 역사 1966년 석유에 밀려 하향기 1990년대 초 폐광시대 맞아 탄광매몰 사건이나 연탄가스 중독사고는 1970~80년대 일간지의 사회면을 장식한 단골메뉴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연탄무료배달 소식 정도만 간간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연탄전성시대는 갔다. 우리나라 연탄공장의 효시는 대한제국 시기에 일본인이 평양에 설치한 공장이다. 광복 후에는 대성산업이 연탄공장의 맹아(萌芽)였고, 삼표·삼천리연탄 등 3대 메이저사가 1960년대를 대표했다. 이후 연탄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1963년 말 전국의 연탄공장 수는 400여개에 달했다. 그러나 업체 간 과열경쟁은 여러 부작용을 낳았고 불과 2년 뒤인 1965년에는 3분의1 수준인 130여개로 공장 수가 줄었다. 정부도 1966년부터는 에너지 정책 중심을 석탄에서 석유로 옮기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석유가 전체 에너지 소비의 37.4%를 차지해 처음으로 석탄을 추월했다. 1973년 석유파동으로 연탄 소비량이 잠시 늘기도 했지만 내리막길을 걷는 연탄의 소비감소 추세를 막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도시가스의 보급으로 연탄의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1990년대 초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폐광시대를 맞았다. 현재 에너지 소비에서 연탄·무연탄이 차지하는 비중은 2.1% 수준이다. 난방보다는 고깃집 등 음식점 연료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서울 구석구석 돌며 만난 사람·풍경 이야기

    ‘서울, 북촌에서’(김유경 글, 하지권 사진, 민음인 펴냄)는 경향신문 문화부장을 지낸 김유경씨가 북촌을 비롯해 서울 구석구석을 돌며 만난 사람과 풍경을 촘촘히 엮어놓은 책이다. 중견 사진가 하지권씨 등이 찍은 200여컷의 사진들이 북촌의 향취를 그대로 아로새긴 듯 생생하다. “서울 사람이 갖는 감수성의 맥을 따라 처녑 속 같은 북촌의 문화를 관통하는 여정이었다.”고 저자는 감회를 전한다. 수많은 주민, 문화인, 건축물, 자연의 모습이 옴니버스처럼 펼쳐진다. 가회동과 삼청동 중심의 종로구 일대 한옥은 “북촌 풍경의 백미”로 꼽을 만큼 아름답다. 흔히 북촌 하면 양반 대가들의 동네를 떠올리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집들이 많단다. 철물점 주인, 한옥을 재건축하는 대목장, 서울 토박이인 음악 칼럼니스트 등과의 대화가 한옥 생활의 묘미, 옛것의 가치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도심에서 북악산으로 접어드는 삼청동길은 호젓한 주택가에서 인파가 북적이는 상가로 변신했다. 눈요깃거리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이어 생기와 활력이 넘치지만, 주민들 사이에선 희비의 시선이 엇갈린다. 저자는 북촌이 서울시의 보호 정책 아래 되살아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디자인 한옥’으로 획일화되고 도시계획 명목으로 골목길이 확장되면서 많은 전통가옥들이 잘려나갔다고 말한다. 무심히 지나쳤던 공간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원서동의 언더그라운드 미술학파 ‘인사 미술 공간’, 프랑스인 미셸 빌모트가 설계한 평창동 관경재, 57년째 빈대떡에 막걸리와 소주를 파는 피맛골 열차집, 그리고 종로 보신각과 광화문 네거리 등. 저자는 “의식주만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선 여러 의례, 얼굴 모습과 눈초리, 말씨 하나까지 북촌 특유의 분위기가 감춰진 듯 들어 있었다. 관광객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오래된 서울 사람의 사는 모습이 깊디깊은 문을 지나 섬광처럼 보일 때가 몇 번 있었다.”고 말했다. 600년 고도의 정수, 어제와 오늘이 드러나기도 한다. 가령, 순정효 황후 윤씨의 송현동 친정집은 시대의 흐름을 타며 변해왔다. 일제 강점기엔 일본 식산 은행의 관사 터로 넘어갔다가 해방이 되자 미국 대사관 직원 사택 단지로 쓰이고, 지금은 한 기업이 소유한 빈터로 남아있다. 대부분의 한옥들이 변화를 겪는 가운데,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집안 정도가 한옥 저택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건축가 엄덕문, 서울에서 100년을 산 법학자 고 최태영 박사, 조선 마지막 황후 순정효 황후의 후손 윤흥로씨 같은 산증인들에게서 육성으로 듣는 근현대사 이야기는 역사의 무게와 잔향을 실감하게 한다. 대한제국의 황실 복식 유물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사연, 군사 정권 시절의 이면을 엿보게 하는 삼청각 뒷이야기 등 이 책이 발굴한 사실들도 흥미롭다. 1만 8000원.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건립 적신호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건립 적신호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건립에 빨간불이 켜졌다. 기념관 건립기금 모금이 부진한 데다 대구시 보조금도 지원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2일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대구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기념공원에 지하 1층, 지상 3층, 전체면적 1557㎡로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2007년 계획했다. 기념관에는 전시실, 영상역사실, 역사자료실, 국채보상운동연구소 등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사업비는 국비 20억, 대구시비 20억, 민간부담 26억 8000만원 등이다. 국비보조금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 집행됐다. 하지만 시비는 2년째 집행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올해로 ‘사고이월’됐고, 올해도 집행하지 않으면 불용예산으로 처리된다. 이렇게 되면 집행된 국비는 되돌려줘야 하고, 더 예산 확보가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된다. 또 지난해 5월 시작된 민간부담 모금운동도 실적이 크게 부진하다. 기념사업회는 기업체와 학교 등에 공문을 보내 취지를 설명하고 성금 기탁을 당부했다. 기념사업회 사무실에 모금함을 설치하고 모금을 위한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그동안 모금액은 목표액의 16%인 4억 3000만원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구은행 1억원, 대구시 공무원 3000만원 등 기업·기관의 고액 성금이 대부분이다. 기념사업회는 지난달로 끝난 성금 모금기간을 내년 10월까지 연장했으나 목표액을 달성할지는 불투명하다. 여기에다 기념관 규모 등을 두고도 대구시와 국채보상운동기념회가 견해차를 보이고 있다. 대구시는 공원 내에 건축하는 만큼 녹지공간 잠식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기념관은 지상 규모를 줄이고 지하 공간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채보상공원기념사업회 관계자는 “국채보상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근시안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며 규모 축소를 반대했다. 당초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은 올해 초 착공해 내년에 완공할 예정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국민 성금으로 갚자는 ‘나랏빚 갚기운동’이다. 1907년 1월29일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 대구지사를 운영하던 김광제와 서상돈의 발의로 시작됐다.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기생에서 고종 황제까지 참여했다. 모두 20여만원이 모였으나 1910년 일본에 합병되면서 빼앗겼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문화마당] 그들은 과연 죽어서 살았는가/장유정 극작·연출가

    [문화마당] 그들은 과연 죽어서 살았는가/장유정 극작·연출가

    뮤지컬 ‘영웅’이 지난주 막을 올렸다. 5년여간의 오랜 제작과정이 곳곳에 묻어나는 보기 드문 수작이었다. 특히 야마카시를 통해 구현한 독립군과 일본군의 추격 신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실험적인 장면으로 무대 위에서도 사실적인 액션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역 거사엔 실제 사이즈의 기차가 등장했는데 영상과 조명 그리고 세트가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그림만으로도 긴장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순국하기 직전 교수대 밑에서 마지막 아리아를 부를 때에는, 밀려오는 감동에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더러 있었다. 창작뮤지컬의 진일보를 보여준 작품이라 할 만했다. 뮤지컬 ‘남한산성’은 어제 막을 내렸다. 오픈한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예매율 1위를 선점했던 이 작품은 김훈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것이었다. 공중에 위태롭게 매달아 놓은 말 모형과 청군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안무 등 남성적이며 파워풀한 무대연출이 돋보였다. 클라이맥스 부분인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장면은 침묵 속에서 이뤄졌다. 위압적인 복장을 한 청군이 인조의 머리를 무대바닥으로 내리치는 순간, 삼전도의 치욕이 되살아나는 듯 극장 전체가 엄숙해졌다. 두 작품은 역사 속에 목숨을 내던진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다. 시종일관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를 고뇌하던 오달제와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안중근을 연기한 두 배우는 훌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과 오달제란 인물 그 자체는 살도 피도 없이 박제된 동상처럼 느껴졌다. 왜일까? 병자호란이나 대한제국은 고등학교 시험에 자주 나왔던 단답형 주관식의 답으로만 기억할 뿐, 깊이 있는 이해는 없다. 당연하다. 국사는 암기과목이니 단어와 그 의미만 제대로 짝짓기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속에 스러져간 인물들은 말 그대로 이름만 남았다. 애국지사들에 대한 예우는 국기에 대한 경례 뒤에 붙는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때 몇초간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체된다. 요새는 그나마도 애국가와 함께 생략된다. 연습실이 약수역 근처라 필자는 요즘 매일같이 전쟁기념관 앞을 지나간다. 평일 낮에도 주말 오전에도 그 곳은 한산하다. 마치 짓다가 만 유령 아파트처럼 뭔지 모를 서늘한 느낌까지 든다. 남산에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고 파주에는 인조왕의 장릉이 있다. 두 장소 역시 썰렁하기는 마찬가지다. 무엇이 그들을 잊게 만든 것일까? 몇 해 전 러시아를 여행하던 중 연극사의 중요 인물 중 한 명인 스타니슬라프스키 기념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방문객이 없었는지 건물 앞에 잡초가 무성했고 전기도 끊어져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먼지 낀 햇살을 의지해 그가 남긴 자료와 사진들을 보는데 왠지 남의 일이 아닌 듯했다. 뮤지컬 ‘영웅’을 보고 온 다음날, 사람 없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둘러보던 중 먼 타국의 연출가 기념관이 기억났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요즘은 목숨 걸고 지킬 명분이나 상황이 별로 없다. 어찌 보면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편안한 세상 덕에 그 가치마저도 사라지는 듯하다. 이렇게 뮤지컬 안에서나 다시 사는 그들, 과연 그들의 바람처럼 죽어서 산 것일까? 식상한 이야기일지는 모르나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안녕도 없었을 것이다. ‘영웅’의 극중 인물 링링이 품고 죽는 제비꽃의 꽃말처럼 ‘나를 잊지 말라’는 그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한 가을이다. 100년 전, 안중근이 이토를 기다리던 하얼빈 역에도 오늘처럼 싸늘한 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안중근의 유해를 생각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장유정 극작·연출가
  • 일제강점기 宮의 굴욕

    일제강점기 宮의 굴욕

    #1. 일제 강점기 일본인 거주지역이었던 남산과 그 주변에는 많은 일본계 사찰이 모여 있었다. 이중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로 일본인 및 친일파 위령제, 태평양전쟁 필승대회 등이 행해진 곳이다. 1932년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이곳으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됐다. 박문사는 경복궁의 선원전과 그 부속건물까지 옮겨와 사찰 건물로 삼았고, 원구단 자리에 있던 석고전까지 해체해 종각으로 사용했다. 흥화문은 1973년 신라호텔에 인수돼 정문으로 활용되다 1988년 경희궁 복원 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2. 풍경궁은 1902년 고종이 평양에 건설한 대한제국의 이궁(離宮)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식민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으로 변모하면서 훼손되거나 철거됐다. 풍경궁의 정문인 황건문은 건축적 아름다움과 우수성으로 이름 높았는데 1925년 경성 조계사의 요청으로 수레 열한 대에 실려 230㎞를 이동해 산문으로 사용됐다. 황건문은 이후 동국대 정문으로 쓰이다 1971년 철거됐다. 남한에 남아 있던 평양 풍경궁의 유일한 건축 유산이 속절없이 사라진 것이다. #3. 경복궁의 도면인 ‘북궐도형’(1907년 제작 추정)에 나타난 경복궁 내 건물 수는 509동이다. 하지만 광복 후 남은 건물 수는 40동에 불과했다. 일제는 조선물산공진회를 준비하던 1914년 근정전 전면에 있는 흥례문과 회랑 등을 제거했다. 이때 방매된 궁궐 전각 중 상다수가 남산동, 필동, 용산에 있는 일본계 사찰과 요정, 일본인 부호의 저택으로 팔려 나갔다. 경성부 서사헌정의 남산장은 건춘문 내의 비현각을, 남산정 화월별장은 수정전 남쪽의 한 전각을 이건한 것이었다. 조선 왕조와 대한 제국기의 주요 궁궐은 지난 100년간 역사의 격랑 속에서 처참히 붕괴되거나 훼손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다. ‘궁궐의 눈물, 백 년의 침묵’(효형출판)은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등 서울의 주요 궁궐과 평양 풍경궁이 일제 강점기에 어떻게 훼철(毁撤)되었는지를 실증적으로 연구·분석한 결과물이다.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등 8명의 전문가가 공동 집필했다. 1부 ‘황권 강화를 위한 근대 조선(대한제국)의 움직임’에선 대한제국과 고종황제가 추진한 조선 변혁의 움직임을 궁궐 건축의 변화상을 중심으로 펼쳐 보인다. 일본, 러시아 등 외세의 영향력 속에서 고종황제는 중국에 대한 사대의 예를 폐기하고, 근대국가로의 진입을 꾀했는데 이러한 시대적 움직임은 경복궁 중건 및 경운궁(덕수궁), 원구단 건설, 궁궐 의례의 변화로 이어졌다. 2부 ‘일제에 의한 조선 궁궐 수난사’에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조선의 궁궐이 어떻게 훼손되어갔는지를 본격적으로 살핀다. 경복궁, 경희궁, 풍경궁의 굴욕과 더불어 창경궁이 벚나무가 심어진 종합 위락시설 ‘창경원’으로 전락한 과정을 추적한다. 3부 ‘조선의 궁에 들어선 근대건축물’은 경운궁, 창경궁, 경복궁 등지에 지어진 근대건축물의 건설 배경과 건축양식, 쓰임에 대해 파악한다. 특히 경복궁이 일제 식민지 경영의 선전장인 박람회장으로 쓰이면서 맞이한 변화상을 건축양식 측면에서 분석하면서 일제의 국력 과시 욕망과 조선인에 대한 상징 조작 행태를 들여다본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데스크 시각] 헌재와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문소영 문화부 차장

    [데스크 시각] 헌재와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문소영 문화부 차장

    이완용,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그에 대해 4~5년간 생각이 많았다. 미술관 갤러리를 다니면서 이완용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더 많았다. 가까이는 올 초 상업화랑에서 근대 서화전이 몇 차례 열려 이완용의 글씨가 등장하면 꼼꼼히 살펴보게 됐다.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서당대유가서후’에서 “무릇 글씨는 그 사람을 닮는다. 옛적에 글씨를 논하는 사람들은 작가의 평생도 아울러 논하였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완용의 유려하고 맺히는 데 없는 글씨체와 항일독립운동의 군자금을 댔다는 김진우의 단정하고 깐깐한 글씨체, 거칠 것 없이 호방한 안중근의 글씨체를 비교해 보기도 했다. 이완용을 생각할 때 문득 머릿속으로 더듬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완용은 외교권을 헌납한 을사늑약과, 국권을 고스란히 갖다바친 경술국치를 체결했을 때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스스로의 자각이 과연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완용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자 예술인, 고위 공무원,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일본·중국 등에서 들어오는 최신 저서를 직접 읽었을 것이고, 국제 정세에 대한 고급 정보도 이런저런 통로를 통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꾼 조국의 운명이, 사실은 풍전등화라고 직감했을 것이다. 그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 나라를 일신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은 물론 서양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로 서양과 대등하게 올라선 일본과 손을 잡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그의 불행은 일본이 1945년에 그렇게 빨리 패권을 잃어버릴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2009년 11월에 광화문에서 안중근 의사의 얼굴이나, 약지를 단지한 그의 손바닥 도장 대신 이완용의 얼굴이나 글씨를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가정과 상상도 해본다. 정치인이자 고위 공무원인 이완용의 오판을 1905년, 1910년에 막아줄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행정부의 잘못된 결정을 평가해 뒤집을 수 있는, 이를테면 의회라든지, 법적으로 효력을 다투는 사법부 말이다. 그랬더라면 이완용의 판단은 국회나 사법부를 통해 바로잡힐 수 있지 않았을까. 이완용의 처지에서 100여년 전에 절차로서의 민주주의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도 없었던 것이 안타까울 수 있겠다. 요즘 헌법재판소(헌재)를 자주 생각해본다. 헌재는 최근 미디어법과 관련해 국회 본회의에서 대리투표 등 위법행위가 있었지만, 미디어법의 국회 통과는 유효하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하다.’라는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 방식에 대해 배우고 자라온 상식선에서 볼 때 의외의 판결이다. 대리시험을 봤지만, 합격은 유효하다, 도둑질은 위법이지만 장물취득은 유효하다, 커닝해도 좋은 성적은 유효하다, 간통을 했지만 기존 결혼은 유효하다는 식의 인터넷 유머가 나돌아다니는 까닭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헌재는 1987년 학생·직장인 등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호헌철폐, 직선쟁취’를 외치고, 꽃 같은 목숨을 여럿 잃어가며 만든 제6공화국 헌법으로 탄생한 기구이다. 그간 사법부가 워낙 행정부(검찰)의 시녀처럼 굴었던 탓에 사법부를 불신하며, 헌법정신을 지켜보자고 대법원 위에 옥상옥으로 만들어졌다. 헌재는 집권당의 통치행위를 옹호하고 국민의 법 감정과 법질서를 교란하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라고 만들어진 기구가 아니다. 이번 미디어법 결정을 볼 때 절차로서의 민주주의를 수호하지 못하는 헌재가 존재할 이유를 통 모르겠다. 헌재는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나 수단이 없었던 이완용처럼 핑계도 없으면서 말이다. 문소영 문화부 차장 symun@seoul.co.kr
  • 영친왕 입던 옷 등 333점 중요민속자료 지정 예고

    영친왕 입던 옷 등 333점 중요민속자료 지정 예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1897~1970년)이 입었던 옷이 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2일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英親王 一家 服飾 및 裝身具類)’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유물은 궁중의 의례 복식과 평상복, 또 이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장식품을 포함해 총 333점에 이른다. 영친왕이 직접 착용했던 곤룡포와 옥대, 탕건, 익선관(翼善冠) 등을 비롯해 영친왕비와 왕세손이 착용한 의복·장신구도 모두 포함됐다. 이와 더불어 ‘변수 묘 출토 유물(邊脩 墓 出土 遺物)’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됐다. 15세기 변수(1447~1524년)의 묘에서 출토된 묘지(墓誌), 명기(明器) 등 다양한 부장품은 당시 상·장례 풍습 연구 및 생활상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다. 한편 문화재청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3호 ‘나주 박경중 가옥’을 중요민속자료 ‘나주 남파고택(州 南派古宅)’으로 승격 지정 예고했다. ‘나주 남파고택’은 조선시대 후기(1884년)에 남파 박재규(1857~1931년)가 건립하고 1910년대와 1930년대 개축한 건물로 남도 지방 상류주택의 구조가 잘 나타나 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우리 문화유산 자긍심 찾는 전시회 될 것”

    “우리 문화유산 자긍심 찾는 전시회 될 것”

    유네스코 등재 기념 특별전 ‘세계유산과 조선왕릉의 신비’가 28일 서울 태평로 서울갤러리에서 서울신문사와 한마음실천연대 주최로 성대하게 개막했다. 이날 개막식에는 이동화 서울신문사 사장을 비롯해 어윤대 국가브랜드위원장, 정병국 한나라당 의원, 강병규 행정안전부 차관, 이건무 문화재청장, 이원희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홍윤식 한마음실천연대 이사장, 박헌춘 한마음실천연대 명예이사장, 대한제국 마지막 황손 이석씨 등 각계 인사 100여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동화 서울신문사 사장은 개회사에서 “이번 전시회는 조선왕릉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해 세계 문화유산과 우리 문화유산을 비교해 보는 뜻깊은 전시회”라면서 “이를 계기로 국민들이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자부심을 갖게 되고, 아울러 국가 브랜드를 높이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축사를 통해 “이번 특별전은 문화재청의 세계유산 교육·홍보사업과도 일맥상통하는 주요한 전시”라면서 “국민들에게 조선왕릉을 비롯한 우리 세계유산의 진정한 가치를 보다 정확하게 알림으로써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고, 대외적으로는 문화선진국으로서의 이미지를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재청, 행정안전부,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는 이번 특별전에서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5개 대륙의 특징을 드러내는 세계 문화유산 사진 작품 108점이 제1전시실에 전시된다. 조선왕릉 이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 문화유산의 대형 사진 작품 8점은 제2전시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이 사진들은 일본 출신 사진 작가 도미 요시오가 30여년에 걸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을 쫓아다니며 찍은 작품 가운데 엄선된 것이다. 도미 요시오는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제3전시실에서는 태조 건원릉을 60분의1 크기로 똑같이 재현한 모형 1점과 조선왕릉의 여러 형태를 설명하기 위한 모형 3점,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제공한 조선왕릉 40기의 사진, 종묘대제 및 순종 국장의 슬라이드 쇼를 만날 수 있다. 특별전은 12월31일까지 열린다. 관람료 성인 7000원. 청소년 5000원. (02)3676-7845.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23일 ‘독도사랑 티셔츠 입는날’

    “23일은 모두 독도사랑 티셔츠를 입읍시다.” 대구지역 인사 33명으로 구성된 ‘독도사랑 범국민운동본부’는 25일 독도의 날을 앞두고 독도 사랑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23일을 ‘독도사랑 티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날’로 정했다고 21일 밝혔다. 독도의 날은 독도를 울릉도의 관제에 편입하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가 제정된 1900년 10월25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됐다. 흰색의 이 티셔츠에는 ‘대한민국의 아침은 독도에서 시작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독도사랑 범국민운동본부가 지난해에도 펼친 독도 티셔츠 입기 운동에 모두 5만여명이 참여했다.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독자의 소리] 우편이란 일본 잔재를 우리말로/광주시 서구 화정4동 장세영

    우정사업본부에서는 1905년부터 사용하고 있는 ‘집배원’이란 명칭을 21세기 지식정보화사회에 걸맞게 참신한 이름으로 바꾸기로 하고 국민을 대상으로 새 명칭을 공모한다고 한다. 대조선국과 대한제국의 우표를 수집하는 사람으로서 대환영이다. 이번 행사에서 1905년부터 사용하고 있는 ‘우편(郵便)’이라는 일본의 잔재도 원래의 우리말로 바꾸든지, 아니면 새로운 명칭으로 바꿔주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대조선국(大朝鮮國)이 1884년 11월18일 우정을 처음으로 실시할 때는 우정(郵征)이라 했고, 1895년 재개할 때는 우체(郵遞)라 하였다. 1953∼1955년에는 우정(郵政)이라 하였다. 1949년 우편(郵便)이라는 말을 일부 우리 것으로 바꾸어 우편국을 우체국(郵遞局)으로, 우편함을 우체통(郵遞筒)으로 바꿨다. 모든 것을 바꿨으면 좋았을 것인데 일부만 바꾼 것이 아쉽다. 현재 ‘우정사업본부’도 되찾은 이름이다. 광주시 서구 화정4동 장세영
  • [발언대] 집배원 새이름으로 자긍심 높이길/김준성 직업평론가·연세대 교직원

    [발언대] 집배원 새이름으로 자긍심 높이길/김준성 직업평론가·연세대 교직원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이미지로 투영되는 브랜드를 입고 싶은 존재가 인간인지도 모른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한국민족에게는 더욱 브랜드명이 지닌 의미가 크게 다가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브랜드는 이름으로부터 온다. 상품명이든 회사명이든, 자기 직업 이름이든 말이다. 시장에서 브랜드 이름은 위력이 대단하다. 손가방에서는 루이뷔통 브랜드, 자동차에서는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 신약에서는 화이자 회사의 브랜드를 갖고 싶어한다. 어느 해인가.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들은 적극적으로 나선다. 자기 직업의 자긍심과 소명감을 담으면서도 의사라는 전문직명에 못지않은 이미지로 투영되기를 원해 간호원이라는 이름을 간호사로 바꿔 부르게 하기 위해서 맹렬히 노력한다. 마침내 간호원이라는 직업명은 간호사로 변한다. 우리나라에서 근대 우편제도는 조선 말기이던 1884년에 처음 도입된다. 화가 장승업이 화사라는 직업명으로 불리면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직업의 종류가 많지 않던 19세기 말의 조선에서는 젊은이들이 내심 갖고 싶어하던 직업으로 출발한다. 이 직업인이 집배원이라는 공식 직업 명칭을 갖게 된 것은 바로 1905년 일본 세력이 대한제국 조정을 상당히 장악한 이후의 일이다. 그로부터 100년 넘게 이 직업 명칭은 사용된다. 소포, 짐, 소식, 편지들을 담고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이들 집배원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직업이 되었다. 지난달 21일부터 오는 20일까지 공모를 거쳐서 다수의 집배원이 동의하는 새 직업명칭을 갖게 될 모양이다. 잘만 하면 자기 직업에서의 자긍심을 갖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배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길과 바닷가길을 누비며 오직 땀과 이타(利他)정신으로 일하는 직업이다. 새 이름 공모가 좋은 열매로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새 브랜드명이 집배원들의 소명의식을 더욱 높이는 데 기여한다면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이 아니겠는가. 김준성 직업평론가·연세대 교직원
  • 좌측통행 아니죠… 우측통행 맞아요

    내년 7월 우측보행 전면실시를 앞두고 1일부터 지하철, 철도, 공항 등 대중교통시설과 공공기관에서 우측보행을 시범적으로 실시한다. 시범실시 대상은 476개 철도역·15개 공항·627개 지하철역으로, 에스컬레이터와 무빙워크 등의 시설을 9월 말까지 우측보행에 적합하도록 개선했다. 국토해양부는 이들 시설에 화살표 등 안내표지를 설치하고, 안내도우미를 배치시켜 우측보행 실시에 따른 혼란을 줄일 방침이다. 그러나 동대문운동장·충무로·왕십리역 등 유동인구가 많은 일부 지하철역은 에스컬레이터 교체 등 근본적인 시설개선이 필요해 당분간 좌측보행을 유지할 수 밖에 없어서 시민들의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또 시범실시 대상이 아닌 민간시설과 연결되는 일부 지하철역도 우측보행과 좌측보행이 혼재돼 혼란을 겪을 수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백화점, 영화관 등 대형시설에는 우측보행을 실시해달라는 협조를 요청한 상태다. 시범실시 기간 동안 민간시설도 모두 우측보행에 맞게 시설을 개선하거나 교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시설개선이 필요한 지하철역도 내년 7월 전면시행 전까지 시설을 보완하기로 했다. 우리나라는 1905년 대한제국 시절 보행자·차량 우측통행 원칙을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좌측통행으로 바뀐 뒤, 차량만 우측통행으로 하고 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박물관을 모든 지적 네트워크 허브로”

    “박물관을 모든 지적 네트워크 허브로”

    “박물관은 더이상 옛것들의 집합체만이 아닙니다. 미래의 비전과 역사를 창조해 가는 지적 네트워크의 허브 역할을 맡아가고 있습니다.”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이어령 위원장은 박물관의 역사적 의의와 기능에 대해 단호히 규정했다. 23일 낮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재단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 위원장은 100주년을 맞이하여 박물관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구했다. 꼬박 100년 전인 1909년 11월1일 사실상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은 창경궁의 제실박물관을 일반인에 개방한다는 대결단을 내렸다. ‘여민해락(與民偕·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다)’의 기치를 내걸고 궁궐을 공개한 것이다. 바야흐로 구중심처 궁궐이 장막을 걷어내는 순간이었다. ●1909년 순종이 창경궁 제실박물관 첫 공개 100년이 흘러 2009년 9월29일~11월8일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물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열고 그 ‘여민해락’의 정신을 고스란히 구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600여개에 이르는 전체 박물관, 미술관의 힘을 모아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국민과 함께 즐기는 소통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 지적(知的) 그랜드 디자인의 한가운데 이 위원장이 있다. 이 위원장이 밝힌 박물관 100주년의 의의는 대단하다. 그는 “학교, 의료 등 다른 분야도 100주년을 맞는 곳이 많지만 박물관만큼은 대한제국시기,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시기 등 국체의 곡절 속에서도 단절됨 없이 이어온 역사”라면서 “단순한 시간의 문제가 아닌, 일관되게 내려왔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둘 수 있다.”고 말했다. ●9월29일~11월8일 중앙박물관서 특별전 그가 특히 강조했던 것은 박물관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동양과 서양, 옛것과 오늘날, 생활분야와 전문분야, 자연과 인간 등 대립항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 바로 오늘의 박물관이며, 모든 지적 네트워크를 한데 묶는 핵심이자 허브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가 만들고 있는 박물관이라는 지적이다. 이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역사적 인식과 민족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해 가는 역사적 알츠하이머에 걸린 듯하다.”면서 “박물관은 잃어버렸던 과거와 자기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는 이미 용산 뮤지엄 콤플렉스 조성을 위한 국제학술대회를 지난 5월에 개최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고려실 등을 새로 만들어 민족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폭넓은 인식의 변화를 꾀한 바 있다. 또한 매달 네번째 토요일을 ‘박물관 가는 날’로 정해 다양한 행사를 통해 고리타분한 박물관이 아닌, 즐거운 박물관의 이미지를 심어오고 있다. ●11월1일 100주년 기념식 등 행사 다채 또한 오는 11월1일, 창경궁 제실 박물관이 일반인에게 열렸던 날 100주년 기념식을 갖는 것을 시작으로 100주년 상징물로서 청자기와로 만든 정자의 제막식, 고조선실 개막, 21세기 박물관에 대한 국제포럼 등 다양한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글로벌 시대]애니깽 단상/조환복 주 멕시코대사

    [글로벌 시대]애니깽 단상/조환복 주 멕시코대사

    지난달 멕시코 동남부에 위치한 유카탄 반도 메리다시에 한국 명예영사관을 설립했다. 메리다는 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이 마야 문명 유적지를 보려고 다녀가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곳은 1905년 대한제국시절 1033명의 한국인이 일본 이민알선회사에 속아 이주 아닌 이주를 한 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에는 이들의 삶이 영화 ‘애니깽’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국에서 용설란으로 불리는 애니깽은 멕시코 특유의 술 테킬라와 밧줄 등을 만드는 원료로 쓰인다. 이들은 애니깽 농장서 노예와 같은 중노동을 했다. 이들이 도착한 5월은 일년 중 날씨가 가장 견디기 힘든 철이다. 섭씨 40도가 훨씬 넘는 기온에 기후마저 건조해 햇볕 아래 오래 있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이다. 멕시코의 기후, 근로조건 등이 한국보다 월등히 좋을 것으로 기대하며 그 먼 길을 마다않고 찾은 이들이 메리다에 도착해 느꼈을 실망과 허탈감, 분노를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이들은 4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한결같이 귀국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얼마 안 돼 한국이 주권을 잃게 되자 돌아갈 조국조차 없어져 버렸다. 한국 강제병합에 앞서 일본 관리가 찾아오자 이들은 어떠한 보호도 일본에 요구할 것이 없으며 다시 찾아오면 죽일 것이라며 쫓아냈단다. 메리다 시내 중심에 ‘제물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당시 어느 한국인 노동자가 일만 끝나면 술집에 와서 “제물포, 제물포”라 외치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술집 주인이 연유를 묻자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나왔던 지역이 제물포라며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을 그리워했단다. 이 말에 깊은 인상을 받은 주인이 술집이름을 제물포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고 기억하지도 않는 이역만리에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한글학교를 세우고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숭무학교라는 군사학교를 세워 조국 광복활동에 참여할 군인을 양성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했다. 그 어려운 환경에서 모금한 독립자금이 당시 돈으로 수천달러에 달했다니 이들의 조국애에 그저 가슴이 저민다. 이들은 그 후 멕시코 전국 각지로 흩어져 일부는 판초 빌라가 활약한 멕시코 혁명에 참가하고 일부는 쿠바로 건너가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의 성공에도 일조한다. 이들 초기 이민자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2005년 한인이주 100주년을 맞아 메리다 시내에 한인이주 기념탑이 세워졌다. 메리다에는 상당수의 한인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3~4세대지만 5세대, 심지어 6세대까지 있다. 이들은 자신이 한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금도 메리다 시내에 있는 한인이주 박물관에는 하루 몇 명 오지 않는 방문객에게 이곳의 한인 이주역사를 설명해 주기 위해 한인 후손 청년 한 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선 또 다른 한인 후손 한 사람이 짧은 한국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현지인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또 다른 한인 후손은 메리다 인근 ‘존카우이츠’라는 조그만 시의 시장이 되었다. 선대가 채찍을 맞으며 중노동을 했던 그 지역에서 후손이 최고 행정책임자가 된 것이다. 멕시코내 최고의 마야 유적지이자 최대 방문객이 다녀가는 ‘치첸이사’ 관리소장도 한인 후손이다. 유카탄주와 인접한 킨타나루주에는 한인 후손이 주대법원장을 하고 있다. 한인 후손들이 각계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한인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 메리다 대한민국 명예영사관 개관식에 유카탄 주지사, 메리다 시장 등 각계 주요인사가 참가했다.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예영사관 경내에서 한인 후손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느끼지 못한 감회를 느꼈다. 조환복 주 멕시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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