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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일마다 2개층씩 조용하게 깨끗하게…도심빌딩, 사라지다

    10일마다 2개층씩 조용하게 깨끗하게…도심빌딩, 사라지다

    프랑스 파리처럼 오래된 낮은 건물을 자랑으로 여기는 도시도 있지만, 대부분 대도시의 상징은 ‘마천루’로 불리는 도심의 높은 빌딩들이다. 기업이나 개인들은 조금이라도 더 높은 빌딩을 지어 회사나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당연시한다. 하지만 사람이 이뤄낸 모든 것들에는 ‘수명’이 있다.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로 지어진 건물이라도 100년을 보장하기 힘들다. 1900년대 초중반에 지어진 미국과 유럽, 일본의 랜드마크들 역시 이 같은 숙명을 피해갈 수 없다. 물론 한국의 빌딩들 역시 곧 마주하게 될 일들이다. 빌딩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도심의 빌딩들은 대부분 다닥다닥 붙어있다. 오래된 빌딩 하나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이웃 빌딩 거주자들이 불편을 감수할 리는 없다. 최대한 빠른 시간에 조용히, 먼지나 파편 없이 빌딩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빌딩 해체 전문가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한때 건물 내부에 폭탄을 촘촘하게 설치해 단숨에 무너지게 하거나,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에 묶은 2t가량의 쇠뭉치로 건물을 부수는 방식이 인기를 끌었지만 실패위험성이 높고 주변에 주는 피해가 크다는 이유로 요즘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낡고 오래된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도쿄는 리모델링 등 빌딩 재활용이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대의 일본 경제 호황기 때 도쿄에는 둔해 보이고 별 특성이 없는 틀에 박힌 건물들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이 빌딩들 중 상당수는 비싼 땅값에 어울리지 않게 낮은데다, 정보통신(IT) 관련 장치들이 내부에 추가로 설치되면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아졌다. 결국 이런 도쿄의 상황은 빌딩 해체 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됐고, ‘일본산 해체 기술’은 이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있다. 번잡한 도심 속에서 ‘깨끗하고 조용하게 사라지게 하는’ 빌딩 해체기술을 흔히 ‘스텔스 철거 공법’이라고 부른다. 이 공법을 이용하면 어떤 빌딩은 작업 모습을 가린 채 위에서부터 아래로 한층씩 조용히 내려오고, 어떤 빌딩들은 건물 전체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조금씩 주저앉으며 사라져간다. 현재 스텔스 공법을 사용해서 철거되고 있는 대표적인 빌딩이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이다. 독특한 톱니모양으로 정면을 장식한 이 40층 빌딩은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아카사카 호텔의 ‘프린스’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동생인 영친왕을 뜻한다. 아카사카 호텔의 구관은 1930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를 위해 지은 지상 2층, 지하 1층짜리 저택을 1955년 개조한 것이었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세손이었던 이구씨도 여기에서 태어났다. 1983년엔 세계적인 건축가 단게 겐조가 설계한 40층짜리 신관이 옆에 세워졌다. 이구씨는 2005년 7월 이 호텔 신관의 한 객실에서 숨을 거뒀다. 1980년대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들의 결혼식장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2000년대 들어 초특급 호텔들이 생겨나면서 손님이 줄었고, 결국 2011년 문을 닫았다. 호텔을 운영하던 세이부 그룹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구관은 보존하고, 신관 자리에 초고층 쌍둥이 빌딩을 지을 계획이다. 지난가을 철거 작업이 시작됐지만, 호텔은 이달 초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였다. 40층 139m 높이의 건물을 해체하기 위해 건설사 ‘다이세이’는 빌딩 내부에서 빌딩 높이를 줄여나가는 ‘테코랩’이라는 공법을 도입했다. 우선 지붕을 그대로 둔 채로, 위로부터 3층 규모의 밀폐공간을 설치했다. 이어 내부에서는 15개의 이동식 기둥을 내부에 설치해 빌딩 위쪽을 떠받치도록 한 뒤 빌딩의 원래 기둥을 조금씩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2개층씩 줄여나가 빌딩이 자연스럽게 천천히 작아지도록 했다. 꼭대기 3개 층이 멀쩡하게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밖에서는 해체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10일마다 약 2개층이 사라져 이번달 말이면 빌딩 전체가 사라지게 된다. 밀폐공간 덕분에 해체현장에서 나오는 먼지와 오염물질은 기존 공법에 비해 90% 이상 줄었고, 발생하는 소음은 20데시벨(db)이나 작다. 특히 마구잡이로 부수는 것이 아니라 내부를 순서대로 잘라내기 때문에 콘크리트, 금속, 플라스틱, 유리 등을 효율적으로 분리할 수 있어 재활용도 용이하다. 이 시스템을 개발한 다이세이의 히데키 이시하라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무엇보다 큰 장점은 시각적으로 정상적인 상황처럼 느끼게 된다는 것”이라며 “우리는 사람들이 철거 작업이 실제로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고 밝혔다. 다이세이 방식이 위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잘라낸다면, 다른 일본 기업인 ‘카지마’는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해체하는 방식이다. 건물 1층의 강철 기둥을 잘라낸 다음 구조물 전체를 잭으로 들어올린 후 조금씩 내리면서 한 층씩 줄어나가는 식이다. 이 방식은 철거 작업이 모두 지상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오래된 빌딩의 위쪽에 중장비를 설치하거나 작업자들이 필요없다는 장점이 있다. 카지마는 지난 1월 24층짜리 사무실 빌딩인 ‘레조나 마루하’ 빌딩을 성공적으로 해체하면서 이 공법에 대한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건축 전문가들은 무조건적인 철거가 최우선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레조나 마루하 빌딩은 1978년, 아카사카 호텔은 1983년에 준공됐다. 30~40년 된 빌딩은 적절하게 관리되면 그 이상의 시간도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현재 수명이 82년이지만, 대규모 개·보수 작업을 여러 차례 거쳐 아직도 건재하다. 특히 40층 이상의 초고층 빌딩은 해체와 건설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가능한 한 최대한 유지하는 방향이 우선시된다. 실제로 도쿄의 초고층 빌딩 중에서 현재까지 철거된 것은 아카사카 호텔을 비롯해 12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철거 공법이 발달할수록 오래된 빌딩이 설 자리는 좁아질 수 밖에 없다. 뉴욕타임스는 “50년 이상된 빌딩 대부분은 층고가 낮고, 기둥 간격이 좁아 평면 배치가 제한적이며 냉난방 시스템도 비효율적이다”면서 “단열 효과가 좋지 않은 유리로 빌딩 전면을 배치하는 등 개·보수 수준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만큼 결국 적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새로운 빌딩을 짓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인식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박건형 기자 kitsch@seoul.co.kr
  • [위기의 한국사 교육] “학생들 친일청산·민주화 이해 못해 區에서 역사관 관할, 격에 맞지 않아”

    [위기의 한국사 교육] “학생들 친일청산·민주화 이해 못해 區에서 역사관 관할, 격에 맞지 않아”

    “서대문형무소는 친일과 반독재의 살아 있는 현장이죠. 하지만 예전과 달리 친일파 청산과 민주화의 당위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아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입구에서 ‘친일인명사전 학교보내기’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영수(47)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은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방문객 중 관심을 갖고 운동의 취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장년층이어서다. 자신을 86학번이라고 소개한 김 위원은 “시위에 나서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꼈던 우리 세대와 요즘 ‘1020세대’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오는 10월이면 문을 연 지 105주년을 맞는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역사 교육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렀던 이 형무소는 1998년 11월부터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 관람객 수는 57만 9115명, 이 가운데 외국인도 6만 2888명으로 집계됐다. 박경목(42)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주로 부모님과 함께 체험 학습을 하러 온 학생들과 단체 관광객이 많다”면서 “외부 강연을 나가다 보면 10·26이나 5·18은 물론 경술국치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누가 저격했는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휴일인 지난 9일 가족들과 함께 충북 청원군에서 상경했다는 윤종필(45)씨는 “암울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직접 찾았다”면서 “학교에서 역사교육을 등한시하기 때문 아니겠나”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서울시나 문화재청이 아닌 서대문구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관할한다는 점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춰 격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대문형무소는 백범 김구와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독립운동가 9만여명이 투옥된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국가보훈처가 관리하는 천안 독립기념관만큼이나 민족의 아픔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10월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곳은 1923년 5월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고, 1945년 8·15 해방 이후부터 1987년 10월까지 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로 운영됐다. 박 관장은 “개발독재시대 정부의 역사인식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역사 교육을 보완하기 위한 체험장으로서 전국 학교를 대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널리 알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하늘님도 개운하시겠네! 환구단, 일본식 석등 걷어내고 전통방식으로 복원

    하늘님도 개운하시겠네! 환구단, 일본식 석등 걷어내고 전통방식으로 복원

    대한제국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서울 중구는 지난해 10월부터 추진한 사적 제157호 환구단 복원 공사를 마치고 10일부터 개방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헐린 환구단엔 총독부의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지금은 하늘과 땅 신령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 돌북 3개, 석조 정문만 남아 있다. 특히 환구단에 설치됐던 석등은 한국미술사에 등장하지 않은 이질적 형태로 근대 이후 일본의 정원 장식용으로 널리 보급된 일본식 석등과 매우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또 일본식 정원으로 논란을 빚은 잔디 1340㎡를 들어내고 전통 방식에 따라 마당 1462㎡ 전체를 마사토로 포장했다. 배수가 잘 되도록 집수정 7곳과 배수관로 110m도 설치했다. 석등 21개와 가로등, 조형수 7그루를 철거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주변에 흩어졌던 난간석과 지대석도 한데 모았다. 황궁우의 파손된 부분은 전통 돌로 다시 깔았다. 환구단은 오전 9시~오후 9시 연중무휴 무료로 개방된다. 황궁우 내부는 매주 토요일 오후 2~4시 운영하는 중구 문화유산탐방,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볼 수 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문소영의 시시콜콜] 정대세를 ‘종북’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나?

    [문소영의 시시콜콜] 정대세를 ‘종북’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나?

    1950년 전쟁고아 사진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광대뼈가 불쑥 나오고 눈이 위로 쭉 올라간 정대세를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처음 보고 ‘토종 한국인’ 같아 웃었다. ‘못난이 인형’ 같은 그는 요즘 한국의 20대 남자들과 너무 다르게 생기지 않았나! 찾아 보니 정대세는 재일교포 3세. 국적은 한국 국적인데, 2006년 일본 프로축구선수로 뛰었고, 2007년부터 북한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하고 있었다. 이력이 특이했다. 게다가 남아공에서는 명색이 ‘국대’ 스트라이커인데 골대를 향해 축구공 한번 제대로 차 보지 못하는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그때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스코어가 7대0이었던가? 기자는 당시 이렇게 물었다. 정대세는 한국 국적인데 왜 북한 선수로 뛰는 거야? 할아버지는 경북 의성이 고향이고 따라서 정대세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로 한국 국적이다. 다만, 어머니는 ‘조선적’(朝鮮籍)이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조선적? 북조선인민공화국 국적으로 오해하지 마라. 조선적이란 단어에는 한반도의 뼈아픈 100년의 근현대사가 녹아 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이 되자 대한제국은 ‘조선’으로 격하됐고, 일본국적의 조선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내지(內地)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국적의 조선인 정체성은 ‘조선인’이었다. 이쓰키 히로유키의 대하소설 ‘청춘의 문’에 탄광에서 강제노역하는 비참한 조선인들의 삶이 나오듯, 조선인들은 주로 탄광이나 광산, 도시의 공장에서 일했다. 조선인의 본격적인 강제적 일본 이주는 1930년대 태평양전쟁 시기에 이뤄졌는데, 일본의 노동력 부족을 채우는 대체재였다. 조선인구 10명당 한 명꼴로 1945년까지 230만명이 이주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곧바로 재일 조선인들은 국적을 회복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해방된 조국은 건국이 미뤄졌고, 분단됐다. 일본은 1947년 외국인등록제를 실시해 일본 국적이던 재일 조선인들에게 ‘조선적’을 부여했다. ‘조선적’ 탄생의 기원이다. 다시 말해 조선적은 ‘조선의 민족’ 기호, 코드값이자 일본 국적이 아니면서 일본에 사는 조선족, 재일(在日) 조선인 ‘자이니치’ 60만명의 역사다. 한국국적 취득은 1965년에야 한·일 국교 정상화로 가능해졌다. 최근 재일교포 3세인 정대세를 ‘종북’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수원 삼성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느니,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야 한다느니 하는 발언들이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한반도의 역사에 무지한 탓인지 발언들이 용감하다. 자이니치의 존재를 개인의 선택으로 몰아가는 협소함이 답답하다. 증오와 분노에 기초해 왜곡된 눈으로, 역사에 대한 이해도 없이 색깔을 입히려고 손가락질하는 그 모습을 거울로 들여다보라. 무지와 분노에 가득한 당신을 향한 손가락질이다.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조선의 혼’ 사직단 원형 복원, 아직도 예산 타령만

    ‘조선의 혼’ 사직단 원형 복원, 아직도 예산 타령만

    왕실이 토지와 곡식의 신(神)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단’ 복원 작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적 121호인 사직단은 올 초 문화재청에 의해 땅의 용도가 공원에서 사적지로 뒤늦게 바뀌었으나, 예산 부족을 이유로 원형 회복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조선의 500년 수도인 한양을 상징하는 ‘종묘사직’ 가운데 경복궁 동쪽의 종묘와 종묘제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지만 대칭점에 자리한 경복궁 서쪽의 사직단은 일제시대 이후 명예 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 사직대제는 삼국시대 이후 국가의 명운과 평안을 기원하며 땅과 곡식의 신에게 지낸 제사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자취를 감췄고 사직단은 빈터로만 남았다. 1922년 일제는 종묘사직의 맥을 끊으려고 사직단 일대를 공원으로 지정해 지위를 격하했고 사직단 부속시설도 철거했다. 1932년에는 대지 일부가 교육시설로 잘려 나갔다. 해방 이후에도 잦은 도시계획 사업으로 정문이 두 차례나 옮겨졌고 그 자리에 도서관과 수영장이 신축되는 몸살을 앓았다. 문화재청이 사직단 복원에 뒤늦게 뛰어든 것은 지난해 1월. 관리 주체도 종로구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문화재청 산하 사직단지킴이인 재단법인 예올은 “‘사직대제’가 ‘종묘제례’ ‘석전대제’에 이은 대표 무형문화재인데도 국가나 지자체가 아닌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근근이 명맥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사직대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형식적으로 복원된 이후 매년 9월 셋째 일요일에 거행되고는 있으되 지금까지 악무를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식이 전혀 다른 종묘제례의 노래와 춤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게 예올 측 주장이다. 지금은 사직단의 존재와 의미를 아는 시민도 드물다. 사직단 주변 황폐화도 심각한 문제다. 사직단 사적지 안에는 여전히 파출소, 도서관, 주민센터, 창고 등 여러 공공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 때 경희궁에서 이전해 온 황학정 앞에는 2002년 국궁전수관이 건설돼 지금도 사직단 쪽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그나마 모습을 갖춘 것은 제단과 정문, 담장 정도다. 문화재 관련 단체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일본식 돌담은 정리됐으나 조잡한 일본식 조경도 논란거리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사직단의 역사성 회복은 단순한 복원이 아닌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명 예올 이사장도 “사직단이 주말이면 인왕산 등산객들의 집합 장소쯤으로 변질돼 컨테이너 가건물이 들어서는 등 훼손 상태가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관련 단체들은 “정부의 의지가 없고서는 복원은 앞으로도 요원한 일”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문화재청은 올해부터 복원을 추진한다는 종합계획을 마련했지만 정작 예산은 한푼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경희궁~사직단~경복궁을 잇는 역사로 정비 방안이 제시되고 있으나 이 또한 수백억원의 예산이 필요한 사업이어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평가된다. 사직단 복원 작업은 여전히 시민단체의 몫으로 남은 게 현실이다. 예올은 분기마다 350여명의 회원들과 주변 청소 등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오는 10월에는 사직단 역사성 회복을 위한 대규모 포럼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美로 간 조선 왕실 ‘어보’… 유출 경로는

    美로 간 조선 왕실 ‘어보’… 유출 경로는

    조선 왕실의 의례용 상징물인 ‘어보’(御寶)는 역대 왕과 왕비의 행적 및 공덕을 알 수 있는 인장(印章)으로, 우리나라가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를 추진중인 유물이다. 기록으로 확인된 조선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의 어보는 총 375과(顆), 이 중 국내에 있는 것은 324과(顆)다. 종묘 신실에서 수백 년간 보관돼 오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분실된 것이다. 28일 오후 10시 KBS 1TV에서 방영되는 ‘시사기획 창’의 ‘해외문화재 추적 보고서-미국에서 찾은 國寶(국보)’는 우리 문화재인 어보가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추적한다. 사라진 어보에 관한 단서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의 기록물에서 찾을 수 있다.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을 하는 혜문 스님이 찾아낸 미 국무부 관리 기록물에는 1953년 당시 어보 47개가 ‘미군의 기념품 사냥’으로 일본이나 미국으로 흘러갔다는 내용이 있다. 취재진은 미국 현지 취재를 통해 이 가운데 조선 제18대 현종 임금의 세자책봉 당시 만들어진 ‘현종세자책봉옥인’을 미국 현지의 한 소장가 집에서 최초로 찾아냈다. 미군이 가져간 우리 유물 가운데는 최근 미국 당국에 적발된 ‘호조태환권’ 10냥짜리 원판도 있다. 대한제국 최초의 지폐라 할 수 있는 호조태환권의 원판은 6·25전쟁 당시 라이오넬 헤이즈라는 미군이 덕수궁에서 가져갔다. 이 원판으로 찍힌 지폐 한 장이 1억원이 넘을 정도로 가치 있는 근대 문화유산이다. 또 창덕궁 내 전각 이름인 ‘낙선재’라 적힌 인장과 옥비녀 등 왕실 유품으로 추정되는 물건 100여점도 미국으로 흘러가 경매 낙찰 예상가가 10만 달러에 이른다.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의 ‘헨더슨 컬렉션’에 대해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는 귀국 당시 한국 유물을 많이 가져갔는데, 고려와 조선의 도자기 150여점 등 스스로 발굴하거나 구입한 한국 유물 1000여 점 이상이 포함돼 있다. 박정희의 유신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미국 의회 인권청문회에서 유신정권의 인권 실상을 폭로하면서 한국 정부로부터 견제를 받아왔다. 헨더슨이 죽은 후 그의 유물들은 하버드박물관 등 유수의 박물관에 기증됐고, 일부는 경매로 팔려나갔다. 이 헨더슨 컬렉션과 관련해 취재진은 당시 미국 정부가 민감하게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키신저 당시 국무부 장관과 하비브 당시 주한 미국대사 간 전문을 입수했다. 현재 국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15만여점에 이른다. 이 중 일본에 6만 6000여점, 미국에 4만 2000여점이 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의료혜택 대상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의료혜택 대상 아니었다”

    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 황상익(61) 교수가 최근 펴낸 ‘근대 의료의 풍경’(푸른역사 펴냄)은 본문만 842쪽이다. ‘목침용 책’이라 할 만한 두께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시작되는 조선의 근대 의료 진행상황을 이 책을 통해 완전정복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지적 호기심은 다른 데서 나온다. 자료가 부족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의료뿐 아니라 개항기의 모습을 어떻게 채워나갈까이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만난 황 교수는 이 책을 집필한 의도에 대해 “한국에 근대의학이 도입되는 과정을 지난 20여년 연구한 결과를 집대성한 것”이라며 “이 책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1910~45년), 해방 이후의 의료까지 130여년을 정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1977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생리학 연구를 하다가 1994년 관심사가 의료사(醫療史)로 바뀌면서 소속도 의사학교실로 변경했다. 황 교수는 “한 사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의 발전은 사람의 몸에 투영될 수밖에 없고, 건강의 변화를 통해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면서 “일제 식민지시대와 관련해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낙성대연구소’ 중심의 경제학자와 그렇지 않았다는 허태열 충남대 교수의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 논란의 진위를 밝히는데, 몸의 역사, 보건의료의 역사가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근대적 변화를 조선사람의 몸을 통해 읽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질병의 발생과 치료, 극복과정에서 나타나는 수명의 변화 등을 통해서다. 그는 “흔히 일제식민지가 시작되는 1910년 이전에는 조선의료에 큰 변화가 없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일제강점기인 36년 동안 생활의 개선, 의료의 발전, 수명의 연장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근대의료사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당시의 자료를 보자. 1909년 펴낸 ‘한국위생 일반’과 1928년 출판한 ‘일본제국 통계전서’ 자료에 나온 인구 10만 명당 환자 및 사망자를 보정해서 계산해보면 당혹스러운 결과가 나온다. 인구 10만명 당 전염병 환자는 재한 일본인 1001명, 재일 일본인 181명, 한국인 23명으로 나온다. 전염병 사망자는 재한 일본인 270명, 재일 일본인 49명, 한국인 7명이다. 명확한 사실은 같은 일본인이라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일본에 거주하는 경우에 비해 환자와 사망자가 5배 이상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환자와 사망자 수는 왜 그리 적을까. 게다가 이런 경향은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된다. 한국인은 ‘19세기 전염병의 챔피언’ 호열자(虎列刺: 호랑이가 살점을 찍어내는 것과 같이 고통스럽다는 의미로 콜레라의 일본식 음역어)나, 장티푸스, 두창(천연두), 발진티푸스 등에 천하무적이었다는 의미인가? 이보다는 한국인들이 전염병 신고가 매우 낮고 조사에 극히 비협조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479~481쪽). 황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의학·보건상의 혜택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나 그 혜택을 조선인들이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과 큰 차이가 있다”면서 “근대적 의사는 늘어났지만, 의료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의 한의사를 ‘의생’으로 격하시키고 새로운 한의사의 진입을 억제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의료 소외는 심각했고, 보건은 악화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도립의원들을 세우고 시설을 개선했지만, 조선인들은 거의 이용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 전염병 환자와 사망자 수가 극히 낮은 진짜 이유는 근대적 의료혜택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연두를 극복하기 위한 선구자들로 지석영과 그의 동료들이 있었고 국가에서는 우두의사를 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 학당에서 의사 양성이란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02년에는 지석영의 건의로 1899년에 세운 의학교에서 19명의 근대식 의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1899년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대한제국 근대적 의사(서양식 의사) 1호인 김익남도 탄생했다. 근대적 의학발전을 정부와 선각자들이 주도하고, 민중이 참여했던 것이다. 황 교수는 “근대를 규정할 만한 충분한 연구가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근대화 식민지론이나 근대화 맹아론을 주장하는 양자 모두 문제다. 그 당시에 선각자들을 찬미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대 역할에 맞게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중원의 적통을 누가 이었느냐를 두고 서울대 의과대학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다투는 과정, 최초의 종두술 시술자가 정약용이냐 지석영이냐, 또는 이완용이 1909년 피습당할 당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었느냐와 같은 흥미로운 설명은 이 책에 관심을 기울여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배설 선생은 세계에 일제 야욕을 가장 신랄하게 고발한 분”

    “배설 선생은 세계에 일제 야욕을 가장 신랄하게 고발한 분”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대한의 동포를 구하라.”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를 창간해 항일 언론투쟁에 앞장섰던 영국인 배설(베델·1872~1909) 선생 서거 104주년 추모식이 서울 마포구 양화진 성지공원에서 1일 열렸다. 이곳은 배설 선생과 함께 외국인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 장소다. 배설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 추모식에는 이철휘 서울신문사 사장,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처장, 스콧 와이트먼 주한영국대사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사장은 추모사를 통해 “언론인 배설 선생은 영국인이었지만 어느 애국지사 못지않게 우리 민족을 사랑했고 인류애를 실천했던 분”이라면서 “대한제국 말기 민족정론지 대한매일신보 창간을 통해 일제의 침략 야욕과 만행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세계 만방에 알렸다”고 소개했다. 와이트먼 대사는 “올해는 한국과 영국의 국교 수립 130주년이 되는 해”라면서 “배설 선생은 한국과 영국의 관계를 크게 증진시킨 인물”이라고 말했다. 국방부 군악대의 추모연주로 시작된 행사는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임이조 전 서울시무용단 단장은 추모춤 ‘거룩한 님이시여’를 공연했고 대한독립군가선양회는 ‘배설 송가(頌歌)’를 불러 그를 기렸다. 배설 선생의 본명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로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나 32세 때인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에 왔다. 같은 해 6월 민족지도자 박은식, 양기탁, 신채호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를 창간했다. 항일투쟁의 대변자 역할을 하던 배설 선생은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그에게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김재원 배설선생기념사업회장은 “후손들에게 배설 선생의 뜻을 전할 수 있도록 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주미대한제국 공관 1891년 아닌 1889년 개설”

    “주미대한제국 공관 1891년 아닌 1889년 개설”

    외교관으로 두 번째 미국에 간(1888년 11월) 이완용 참무관은 1889년 4월(양력 5월 8일) 미국 워싱턴DC 로간서클의 공사관 건물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한 뒤 이하영 서리전권공사와 이채연 서기관, 고종의 어의였던 호레이스 앨런 참찬관과 건물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개국 사백구십팔년 사월초구월’ ‘대됴션쥬미국대사관’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기록된 그 사진은 누렇게 빛바랜 채 연세대박물관에 ‘재미국화성돈조선공사관지도’(在美國華盛頓朝鮮公使館之圖)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이 지난해 매입한 주미대한제국 공사관의 개설시점을 1891년 12월 1일이라고 밝혔던 터라, 그 사진은 ‘의문의 사진’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의문이 풀렸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이하 재단)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가 소장한 문헌을 발굴한 결과 이 공사관의 개설시점이 당초 알려진 것보다 2년 10개월 앞선 1889년 2월 13일이었다고 25일 밝혔다. 1889년 2월 15일 당시 미 국무장관 T F 베이어드는 이하영 공사에게 보낸 공문서에서 “오늘 이후 이곳 수도(워싱턴DC)의 조선(Corea)공사관 공식주소를 ‘1500 13th street N,W’로 정하겠습니다. 지난 (2월)13일자 공문에 대해 (인정하고) 통지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재단은 또한 이하영, 이완용의 여권 출입국 자료 조사 등을 통해 의문의 사진이 ‘2차 공사관’으로 이사한 지 석 달 뒤에 촬영됐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2차 공사관은 제24대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부인 프랜시스 클리블랜드를 초청해 성대한 연회를 열기도 해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재단은 또 1881년 1월 19일 최초로 개설된 조선의 1차 공사관 ‘피서옥’(皮瑞屋)의 위치도 밝혀냈다. 조선 정부가 임대해 입주한 피서옥은 앨런의 지인이었던 피셔가 소유했던 건물로 ‘앨런일기’와 ‘박정양 전집’ 권4에도 적혀 있다. 2차 공사관에서 남서쪽으로 두 블록가량 떨어진 지점에 위치로 ‘1513 O street, Washington D.C.’다. 지금은 헐리고 고급아파트가 들어섰다고 재단은 설명했다. 박정양은 조선 최초의 주미전권공사로 1887년 8월에 임명됐고, 미국에는 그 다음 해 1월 1일 상륙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대한문 수난사/함혜리 논설위원

    1897년 10월 12일 새로 지어진 환구단 안은 향 냄새로 가득찼다. 이날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출범을 하늘에 고하는 첫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했다. 광무(光武)라는 연호도 쓰기 시작했다. 과거의 왕들은 천자의 나라 중국에서만 하늘에 직접 제를 올릴 수 있다며 제천의식을 삼갔지만 고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지어 제를 지냄으로써 자주독립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인 환구단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제천의식이 거행됐다.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환구단으로 향할 때 고종은 정남쪽에 있는 정문 인화문이 아닌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주로 통했다. 민가가 밀집하고 외국공관이 많이 들어서 있던 인화문 쪽에 비해 대안문 쪽의 도로가 빨리 정비되면서 사람들도 대안문을 주 출입구로 사용하게 됐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된 전각들을 중건하면서 대안문을 수리한 뒤 고종은 1906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정문으로 삼도록 했다. 대한문의 영광은 여기까지다. 원래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에 위치했던 대한문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야 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 일제는 조선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병탄 이듬해 조선총독부는 환구단 건물을 철거하고 총독부 건물에서 소공로까지 대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1914년 황토현(광화문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환구단을 관통하는 태평정통이 개설되면서 대한문은 원래 위치에서 서쪽으로 옮겨졌다. 1926년 조선총독부는 덕수궁 땅 일부를 매각하면서 덕수궁 해체와 함께 대한문을 그 위치에서 다시 30칸 뒤로 물러나도록 했다. 1961년 서울시는 태평로 도로폭을 6m 확장했는데 이때 대한문도 6m 뒤로 물러나야 했다. 철책이던 덕수궁 돌담길이 복원되고 차도가 생기면서 대한문이 도로 한가운데 덩그맣게 남아 차량 통행을 방해하는 신세가 되자 결국 서울시는 1970년 12월 대한문을 22m 뒤로 옳겼다. 현재 위치한 곳이다. 1년 넘게 천막농성이 벌어지던 대한문 옆에서 엊그제 쌍용자동차 범국민대책위원회와 민주노총 등이 참여한 ‘희망지킴이’가 캠핑시위를 벌였다. 서울 중구청이 농성천막을 철거하고 화단을 설치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에 고궁의 고즈넉함은 꿈도 꿀 수 없다. 끝나지 않는 대한문의 시련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착잡하고 울적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방청객도 재판 소통하는 ‘전자법정’

    법관들 앞에 두꺼운 사건기록 대신 얇은 노트북이 자리 잡았다. 증거목록 확인을 위해 바쁘게 서류를 넘기던 모습도 사라졌다. 전자 시스템으로 접수된 증거자료들이 컴퓨터 화면에 나타났다. 변화한 시대상에 맞춰 사법부의 재판 과정도 달라지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10일 ‘전자 법정’의 모습을 일반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지난 1월 전자소송 시스템이 도입된 후 처음이다. 행정재판에 대한 이해와 친밀감을 높이고자 실시된 ‘열린 법정’(open court) 행사에서다. 공개재판을 맡은 행정3부(부장 심준보)는 이날 전자 소송장비로 3건의 사건을 심리했다. 소송 대리인들은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통해 변론을 진행했다. 증거 조사도 컴퓨터를 통해 이뤄졌다. 서류상으로 증거기록을 검토할 경우 재판부만 확인할 수 있는 반면 전자 법정에서는 모든 방청객이 내용을 지켜보게 돼 재판 과정의 투명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날 재판에서는 학교법인 숙명학원이 한국자산관리공사를 상대로 낸 변상금 부과처분 취소 청구소송 외 군인사망 보상금 청구 소송, 입찰참가 자격제한 처분 취소 청구소송 등 3건에 대한 심리가 진행됐다. 숙명학원은 1938년 대한제국 황실 소유 토지를 학교부지 용도로만 쓴다는 조건으로 무상 사용허가를 받고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 토지의 관리권을 위임받은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숙명학원이 토지를 무단 점용했다는 이유로 변상금 73억여원을 부과했고 숙명학원은 이에 반발, 소송을 제기했다. 숙명학원의 토지 무상 사용권한 여부를 놓고 양측은 숙대 캠퍼스 항공사진, 재무부 장관의 공문, 관련 판결문 등의 증거를 입체적으로 제시하며 공방을 펼쳤다. 이날 행사에는 시민사법모니터단, 법학 전공 교수와 학생, 지역 주민 등 100여명이 참여했다. 재판이 끝난 후에는 판사 집무실 공개와 질의응답 등 소통의 장이 마련됐다. 경기대 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인 김민우(18)씨는 “평소 재판 과정이 당사자들끼리만 진행돼 폐쇄적이라 생각했는데 전자 시스템을 통해 방청객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며 “향후 재판 절차가 점차 간소화되고 편리해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문성호 공보판사는 “전자소송이 도입된 후 실제로도 이렇게 전자 시스템을 이용해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DB를 열다] 1970년 금혼식에서 이방자 여사와 아들 이구씨 부부

    [DB를 열다] 1970년 금혼식에서 이방자 여사와 아들 이구씨 부부

    영친왕(1897~1970) 이은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며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경술국치로 왕세자로 지위가 격하된 영친왕은 열두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족의 딸인 이방자(1901~1989) 여사와 결혼하고 일본 육사를 졸업, 계급이 육군 중장에 이르렀다. 광복 후 일본에서 평민으로 생활하다 1963년 중병을 앓는 몸으로 귀국해 바로 병실에 입원해야 했다. 사진은 1970년 4월 28일 결혼 50주년을 맞은 이방자(서 있는 세 사람 중 가운데) 여사가 아들 이구(1931~2005·이 여사 왼쪽)씨 부부와 함께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이다. 입원 중이라 보이지 않는 영친왕은 이날 자신이 없는 가운데 금혼식을 치른 지 나흘 만에 세상을 떴다. 영친왕의 아들 이구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건축과를 졸업하고 8년 연상의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사진 오른쪽)을 만나 결혼했다. 귀국 후 모친과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며 이구는 대학에 출강하는 등 사회활동을 했다. 그러나 멀록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어 종친회로부터 압력을 받다 결국 1982년 이혼했다. 이혼 후에도 종친회와 갈등을 빚다 결국 일본으로 다시 건너간 그는 무당 아리타 가누코와 동거하기도 했다. 2005년 7월 16일 이구는 장기 투숙 중이던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객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호텔은 이구가 태어난 자리였다고 한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국사편찬위, 15억 투입 고종의 역사 다시 쓴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태진)는 대한제국 비운의 황제 고종과 순종 시대 역사를 아우르는 ‘신편 고종시대사’(가칭)를 편찬한다. 국편이 1960년대에 펴낸 ‘고종시대사’를 대폭 보완해 펴내는 것으로 오는 2017년까지 5년간 연간 3억원, 15억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특히 누락된 사료와 새로운 자료를 보완하고 읽기 쉬운 현대어로 풀어쓰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위해 오는 22일까지 ‘신편 고종시대사’ 편찬 사업을 위한 연구용역을 공모한다. ‘신편 고종시대사’ 편찬 작업은 조선왕조실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 사이에 비어 있던 역사 기록의 공백을 메운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백지’ 관보/정기홍 논설위원

    1960년대 대학가에 ‘관보 대학생’이란 말이 등장했었다. 대학들이 정원을 초과해 신입생을 뽑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교부가 “관보에 정원 내 학생 명단을 싣겠다”고 밝히자 이를 빗대 유행했던 용어이다. 이른바 ‘학사등록제’인 셈이다. 이후 문교부는 전국 대학의 재적생 현황 파악에 나섰고, 청강생 등 잉여 학생은 무려 3만여명이나 됐다고 한다. 교육 행정의 난맥상으로 인해 대학생 명단까지 관보에 실렸다니 먼 옛날의 이야기다. 관보(官報)는 말 그대로 정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이다. 법령 개정과 부처 의결사항, 인사, 공고가 여기에 실린다. 내용이 난해하지만 그 시대의 정치와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첫 관보로는 조선 태조(1392년) 때 예문춘추관에서 발행한 ‘조보’(朝報)를 친다. 이후 1894년(고종 31년) ‘대한제국관보’란 제호로 발행되다가 정부수립 해인 1948년부터 ‘대한민국관보’라는 이름으로 맥을 잇고 있다. 관보는 왕조시대 길거리에 써 붙였던 방(榜)과도 궤를 같이한다. 세종실록에는 ‘대소 인원들이 그해(1429년)의 수교(受敎)한 것을 알지 못하여 범법한 자가 자못 많으니 금령조목(禁令條目)을 줄여 줄 친 게시판을 만들어 광화문 밖 등의 장소에 걸어 알려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60여년을 이어온 근대식 ‘종이 관보’가 좀체 보기 힘들어졌다. 지난 2000년 10월 전자관보시대를 열면서 병행해 발행되다가 지금은 딱 11부만 인쇄된다. 국가기록원 3부 외에 국회도서관, 법제처, 헌법재판소 등 8군데에 1부씩만 들어간다. 청와대에서도 종이 관보를 못 보는 정도이니 귀하디귀한 몸이다. 관보에 관한 뒷얘기는 더러 전해진다. 정부는 일반인이 알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민감한 사안은 관보에만 슬쩍 넣고 숨기려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 부지런하고 눈치 빠른 기자들은 기자실에 비치된 관보에서 특종을 낚아채기도 했다. 숨기려는 의도만큼 사회적인 파장은 컸다. 관보는 요즘에도 논란의 중심에 선다. 최근 청와대에서 비서관급 인사를 관보에만 싣겠다고 하자 ‘관보 인사’란 비아냥을 듣고 있다. 최근 암으로 사망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병석에서 서명한 관보가 공개되자 그의 건강 상태를 놓고 설왕설래하기도 했다. 지난달 25일 새 정부 출범 이후 지난 6일까지 관보에 실린 법안과 조약이 단 1건도 없다고 한다. 지난해 하루 평균 법률 2건, 대통령령 3건이 실렸던 데 비하면 너무 초라하다. 정부조직법개정안 처리가 늦어지면서 나타난 부작용으로, 정치권은 눈꼴사나운 정쟁을 그만 접고 마비된 국정을 빨리 살려야 하겠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뚜벅뚜벅 대구 ‘구국의 길’ 한바퀴

    대구시내 곳곳에 흩어진 구국의 흔적이 관광코스로 만들어진다. 대구시는 동인동 국채보상기념공원과 박근혜 대통령 생가, 2·28민주운동기념회관 등을 잇는 관광투어를 개발한다고 6일 밝혔다. 주제는 ‘나라사랑’, 명칭은 ‘구국의 길’(가칭)로 정했다. 코스는 중구 삼성상회 터(인교동)~국채보상운동 발상지(옛 광무사·서야동)~박근혜 대통령 생가터(삼덕동)~2·28민주운동기념회관(남산동)~국채보상운동기념관(동인동)을 잇는 3.5㎞ 구간이다. 시는 코스마다 차별화된 스토리를 입히고 안내표지판 등을 세워 내년 초부터 관광코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또 대구 중구가 운영하고 있는 ‘골목투어’ 프로그램과도 연계할 방침이다. 대구 도심을 돌아보는 골목투어는 지난해 6만여명이 참가할 정도를 인기를 끌고 있으며 5개 코스로 구성돼 있다. 삼성상회는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1938년 창업했으며 청과물·건어물·국수 등을 판매하며 기업을 일궜다. 옛 출판사였던 광문사는 대한제국 때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당시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이 지역 유지들에게 “담배를 끊어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갖자”고 제의하면서 범국민운동으로 승화됐다. 지난달 28일 준공한 2·28민주운동기념회관은 고교생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해 시위한 사건을 보여주는 전시관이다.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도 포함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혼집이자 한국전쟁 중 박근혜 대통령이 출생(1952년)한 곳이다. 시 관계자는 ”대구가 가진 소중한 자산들이 코스에 포함됐다”면서 “이곳에 얽힌 다양한 근·현대사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소개해 교육관광자원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 100여년 전 ‘역사적 원본’ 인터넷서 생생히 만난다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 100여년 전 ‘역사적 원본’ 인터넷서 생생히 만난다

    서울신문의 모태로 100여년 전 최대의 항일 민족정론지였던 대한매일신보(등록문화재 제509호·1904년 7월 18일 창간) 원본이 디지털 공간에 옮겨졌다. 언제든 인터넷에 접속해 일제에 맞섰던 민족의 목소리와 정치·사회·문화 등 대한제국 시절 우리나라의 모습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서울대는 그동안 소장해 온 대한매일신보의 디지털 작업을 완료했다고 24일 밝혔다. 서울대가 소장한 방대한 고(古)신문 원본 가운데 디지털 복원 작업이 이뤄진 것은 대한매일신보가 처음이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은 지난해 9월 한국언론진흥재단, 국립고궁박물관과 함께 고신문 데이터베이스(DB) 구축을 위한 공동협력 협약을 체결하고 이번 작업을 추진해 왔다. 서울대가 원문을 제공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예산을 댔다. 이번에 복원된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8월 11일자부터 1910년 8월 28일자까지 1461일분(호외 4호, 부록 13호 포함)으로 총 5838면에 이른다. 통상 신문은 전체 크기에 비해 종이의 두께가 얇고 질이 낮아 다른 고문서에 비해 복원이 훨씬 까다롭다. 서울대가 소장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 역시 바싹 마른 낙엽처럼 잘못 손댔다가는 그대로 바스러질 만큼 열화가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였다. 모두 5개월 이상 걸린 이번 작업에서 서울대 전문복원팀은 6000장에 육박하는 원본을 상하지 않도록 한장 한장 떼어 분리하는 데만 여러 달을 보냈다. 이렇게 분리된 신문은 전문 복원 업체의 사진 촬영과 이미지 보정 작업을 거쳐 이미지로 가공됐다. 이미지 상태로 복원됐지만 문자인식 기술을 통해 인터넷에서 본문 자체에 대한 직접 검색이 가능하다. 홍순영 서울대도서관 학술연구지원팀장은 “대한매일신보는 100년이 넘는 자료라 종이의 질이나 잉크의 상태가 취약해 고도의 예민함이 요구됐다”면서 “마이크로필름에 신문을 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자료 접근성이 떨어지고 검색도 쉽지 않아 자료가 더 취약해지기 전에 디지털화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서울대는 디지털 복원과 별도로 상태가 극히 안 좋은 신문에 대해서는 물리적 수리를 거쳐 온·습도가 최적 상태로 유지되도록 오동나무 상자에 담아 고문헌 자료실에 영구 보관하기로 했다. 디지털 복원된 대한매일신보는 서울대도서관 홈페이지(library.snu.ac.kr), 한국언론진흥재단 홈페이지(www.kinds.or.kr) 등에서 원문 보기 및 기사 검색이 가능하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이원, 황사손으로서 도쿄 조선왕실 문화재 열람

    이원, 황사손으로서 도쿄 조선왕실 문화재 열람

    조선 왕실의 황사손(황실의 적통을 이으려 들인 양자)인 이원(50) 조선왕실문화원 이사장이 5일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왕조 문화재를 열람했다. 이 이사장은 박물관 소장품들이 조선 왕실 소유물일 가능성이 높다며 유출 경위를 확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도쿄국립박물관은 이날 동양관 수장고에 넣어 뒀던 익선관(翼善冠·왕이나 세자가 평상복으로 정무를 볼 때 쓰던 관)과 투구, 갑옷 등 9점을 처음으로 외부인에게 공개했다. 그동안 박물관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일본인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다. 익선관과 투구, 갑옷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남선합동전기회사를 운영한 일본인 사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1870~1964)가 1910~1950년대 한반도에서 수집한 1000여점의 문화재로 이뤄진 ‘오구라 컬렉션’에 포함된 것들이다. 오구라의 아들이 1982년에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익선관 등에 특히 관심이 쏠린 것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문화재 전문가 이소령씨가 오구라가 1964년 숨지기 직전에 작성한 ‘오구라 컬렉션 목록’을 입수하면서부터다. 이 책에는 익선관 등 3점 옆에 ‘이태왕(李太王·고종) 소용품(所用品)’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화재 제자리찾기’(대표 혜문 스님) 등이 이를 근거로 문화재 입수 경위 등을 따져 묻자 도쿄국립박물관은 지난해 4월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물품”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후 대한제국 황실의 적통을 잇는 이씨가 열람을 신청하자 마지못해 사진 공개 금지 등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 이날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 이사장은 한 시간가량의 열람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투구와 갑옷이 조선 왕실, 정확히는 1897년 성립한 대한제국 이후에 만들어진 황실 소유물이라고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투구 뒷면에 장식된 8개의 이화(李花·자두나무꽃) 금장문양이다. 그는 “대한제국이 이화를 황실의 문양으로 제정한 바 있는데, 투구의 장식이 이화 문양임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보통 드라마 등에 등장하는 익선관은 검은색인 데 반해 박물관이 소장한 익선관은 보라색이고 통풍이 잘 되도록 안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확인했다. 하지만 익선관과 투구 등이 고종의 물건으로 확인된다고 해서 바로 한국에 반환되는 것은 아니다. 이 물건이 오구라 컬렉션에 포함된 경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물품이 일본 측에 기증 등의 형식으로 넘어갔다는 기록이 없는 만큼 강탈되거나 불법적으로 유출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도쿄 이종락 특파원 jrlee@seoul.co.kr
  • 불법 반출된 대한제국 지폐 원판 美서 소유자 체포… 韓에 반환될까

    불법 반출된 대한제국 지폐 원판 美서 소유자 체포… 韓에 반환될까

    한국전쟁 당시 불법 반출된 대한제국 ‘호조태환권’ 원판을 경매로 낙찰받았던 재미 한인이 이달 초 미국에서 체포된 것으로 15일(현지시간) 확인됐다.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미국 사법당국은 고미술 수집가인 재미교포 윤모(54)씨를 장물취득 혐의 등으로 뉴욕에서 체포했다. 윤씨는 2010년 5월 미시간주의 경매장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 지폐로 평가되는 대한제국 호조(현재의 재무부격)태환권 10냥권 인쇄용 원판을 3만 5000달러(약 3700만원)에 낙찰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호조태환권은 1893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경제근대화를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하면서 구 화폐를 회수하기 위해 발행한 일종의 교환표로, 시중에 유통되지는 않았다. 50냥, 20냥, 10냥, 5냥 등 모두 4종류가 제작됐으며 현재 50냥권 원판만 한국은행에 보관돼 있고 나머지 20냥과 5냥권은 행방불명이다. 윤씨가 낙찰받은 호조태환권은 덕수궁에 보관 중이었으나 1951년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이 미국으로 몰래 갔고 갔으며 그의 딸이 경매에 내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미대사관은 2010년 당시 미 국무부 직원 셰리 할러데이로부터 경매 제보를 받고 경매회사와 윤씨 등에게 경매를 중단하고 문화재를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경매는 강행됐고 원판은 윤씨에게 넘어갔다. 당시 윤씨는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화폐 전문가들에게 사진을 통해 감정을 의뢰한 결과 진품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미대사관 관계자는 “미국 정부에서 한국 문화재 반환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한국의 관계 당국과 긴밀히 공조하고 있다”면서 “원판의 소유권에 대한 법리 공방이 벌어질 수 있어 언제 회수될지는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이 원판은 가로 15.875㎝, 세로 9.525㎝, 무게 0.56㎏의 동판 재질로 제작돼 있으며,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한파속 ‘창작의 꿈’ 펼치는 얼음조각 달인들

    한파속 ‘창작의 꿈’ 펼치는 얼음조각 달인들

    “한겨울에 야외에서 얼음을 깎는 작업이 굉장히 추울 거라 생각하죠. 하지만 조각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 보면 추운 줄도 몰라요.” 얼음 조각가 김광성(38)씨의 말이다. 4일 오후 8시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로 방영되는 ‘TV 쏙 서울신문’은 대구 비슬산자연휴양림을 찾아 맹추위 속에 얼음과 씨름하고 있는 얼음 조각의 달인들을 만났다. 얼음 위에 올라가 조각을 하기 때문에 신발에 아이젠을 착용하는 것은 필수다. 얼음 조각가 하석구(38)씨는 “위험한 장비로 작업하기 때문에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며 “전기톱에 잘린 얼음 조각이 얼굴을 때리고 피부까지 상하게 하지만 이런 고된 과정을 거쳐 조각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환희를 느낀다”고 말했다. 높이 2m 정도인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4~5시간 정도 쉬지 않고 작업해야 한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얼음 조각가는 80여명 정도다. 각종 축하연에 얼음 조각이 빠질 수 없는 장식물로 인식되면서 점차 늘고 있는 추세지만 야외에서 ‘창작의 꿈’을 펼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조각가는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밖에 ‘TV 쏙 서울신문’은 3일 경기 여주군 일대와 서울에서 열린 ‘한·아세안 청년 네트워크’를 찾아갔다. 한·아세안센터 주최로 열린 이번 행사에는 한국을 비롯해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 각국의 학생 70여명이 모였다. 세종대왕릉과 명성황후 생가를 방문하고 인삼과 김치 체험장에서 직접 음식을 맛보는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문화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장면들을 담았다. 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유일한 혈흔 형태 전문가 서영일(38) 연구사도 만났다. 범죄 현장에 떨어진 핏자국은 살인 등 유혈 범죄 수사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경우가 많다. 혈흔의 모양이나 크기, 방향에는 범행 도구와 용의자의 움직임 등 다양한 정보가 들어 있다. 서 연구사는 “공판 중심주의 사법제도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혈흔의 형태는 기소 내용의 설득력을 높이고 진술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유품을 최초로 공개한 국립고궁박물관을 찾아가 덕혜옹주의 복식과 장신구, 혼수품 등 귀중한 기록물을 영상으로 담았다. 그 밖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나타난 목소리를 통해 한 주일간의 뉴스 흐름을 짚어보는 ‘톡톡 SNS’에서는 새해 예산안 및 ‘택시법’ 통과 등과 관련한 다양한 의견을 전한다. 박홍규 PD gophk@seoul.co.kr
  • [씨줄날줄] 오적(五賊)/함혜리 논설위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을 강압해 조약 아닌 조약을 체결했다.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와 이사청을 설치해 내정간섭을 공식화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다. 간지로 을사년에 이뤄진 이 조약을 일제는 을사보호조약이라고 했고, 우리는 체결 과정의 강압성을 비판하는 뜻에서 을사늑약이라고도 부른다. 이 조약에 서명한 5명의 대신을 ‘을사오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이라고 한다. 나라를 넘기고 그 공로로 일본의 귀족작위를 받고 호의호식했으니, 도적질을 해도 한탕 크게 한 이들이다. 오적의 의미를 사회화시킨 이는 시인 김지하다. 그는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오적이라는 300여행의 담시(譚詩) 를 발표하고 서울 장안 한복판에 모여 사는 다섯 도둑의 부패상을 걸쭉하게 고발했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천하에 흉포한 오적으로 꼽았다. 이들 오적과 포도대장은 어느 맑게 갠 날 아침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아 급살한다. 첨예한 정치적 사건들과 이에 얽힌 사람들을 희화화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이 시로 인해 김지하와 사상계 발행인이 구속됐고, 사상계는 휴간 뒤 폐간됐다. 대선 결과를 놓고 다양한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새누리당이 선전해서 이겼다기보다 야권인사 스스로 문제 되는 언행으로 표를 깎아먹어서 졌다는 ‘민주당 5적설’이다. 여러 버전이 있는데,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는 게 목적이라고 공언하며 1, 2차 TV토론을 주도한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를 비롯해 노인 비하 발언의 정동영 고문, 신천지 연루설을 퍼뜨린 시사평론가 김용민, 종북 논란에 불을 붙인 소설가 공지영, 여성의 가슴을 드러낸 사진으로 투표 독려메시지를 보낸 한광원 전 의원 등 5인이 주로 꼽히고 있다. 이 밖에도 연예인, 진보 교수, 재야 인사 가운데 필요 이상의 거친 언사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인사들이 ‘낙선의 1등 공신’으로 질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투표장에 간 노인들과 투표장에 가지 않은 20대까지 싸잡아 비난을 받는다. 민주통합당 손학규 고문은 “대선 패배는 전체 야권과 진보적 정치세력 전체의 대오각성과 성찰을 준엄히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민주당 측 인사들은 패배의 책임을 남에게서 찾기 전에 결과적으로 자신이 ‘오적’이 아니었는지 자문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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