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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제의 옥새3] 조선 찾아온 40대 백인 여성의 정체는

    [황제의 옥새3] 조선 찾아온 40대 백인 여성의 정체는

    올해는 3·1운동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서울신문은 100주년 기획 시리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국인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을 주인공으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들 소설은 일제 병합 직전 조선을 배경으로 베델이 조선 독립을 위해 모험에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에 이어 ‘황제의 옥새’(1914년 출간·원제 The Great Cardinal Seal)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6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제물포항에서 기차(1900년 개통된 경인선)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기차가 남대문정거장(남대문역)에 들어섰다. 한 여성이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문 백인이었다. 이 불안한 곳에 혼자서 여행하려고 오다니. 내 마음 속에서 신사도 정신이 피어 올랐다. 그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플랫폼에서 내려 오지 않고 그녀가 짐꾼, 인력거꾼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살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짐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졌다. 삮꾼들이 이 영국인 여행자에게서 서로 짐을 가져가겠다고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는 듯 했다. 이때 내가 개입했다. 일꾼들을 제지하고 그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이 낯선 동북아시아 한 가운데서 나같은 백인 남자를 만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를 보자 어찌나 반가웠던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껑충 껑충 뛰었다. 나는 통역인 겸 관광 가이드 역할을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걸었다. 약간 기묘한 느낌을 풍기는 한마리 새 같았다. 금발에 간간히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흰색 말에 회색 줄무늬를 넣은 듯 했다. 초췌한 얼굴에 흰색 도료를 바른 것처럼 웃을 때마다 화장이 갈라졌다. 다소 넓게 퍼진 입술에는 간단히 립스틱을 발랐다. 다만 짙게 분칠한 얼굴과 달리 보라색 눈빛만은 젊은이의 그것처럼 밝게 빛났다. 비극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젊음을 잃어 버린 여인 같다고나 할까. 아직 남아있던 젊음의 매력이 눈 속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그녀는 11월에 피어난 마지막 과꽃 같았다. 다가오는 겨울을 앞두고 줄기는 시들었지만 꽃 속 두 개의 보라색 점만큼은 별처럼 반짝였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녀는 남성들이 입는 여행용 코트 같은 플라운스 스커트를 입었고 척탄병(수류탄을 던지는 병사)이 입는 낡은 자켓을 걸쳤다. 그리고 도요새의 날개처럼 거친 재료로 만든 스코틀랜드 모자도 쓰고 있었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영국인 전사들의 그림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그녀는 젊을 때부터 남자에게 한번도 기대본 적이 없거나 자신의 의지를 단 한 번도 굽히지 않은 급진적 여성단체 회원 같았다. 독신으로 살면서 우간다(당시 영국의 식민지) 소요 사태에 헌신하거나 네팔의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을 전파하는 일도 잘 할 듯 싶었다. 사실 이런 일을 하는 영국인 여성들은 자국보다는 극동 지역에서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이 40대의 고상한 영국 여인에게 마차를 함께 타자고 권했다.”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녀는 영국 특유의 높은 톤의 갈라진 어조로 말했다. “서울은 새로온 외국인을 환영하는 방식이 꽤 독특하네요. 삯꾼들이 서로들 내 짐을 가져가려고 하는 걸 보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이제 긴장을 풀라고 말하며 내 손을 뻗었다. 우연히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내 손등에 닿았다. 만약 그녀가 이상한 화장으로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았다면 이 느낌은 나에게 더 큰 떨림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황제의 옥새’는 4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종로 한복판 그 무심한 푯돌… 독립열망·피땀이 서려 있다

    종로 한복판 그 무심한 푯돌… 독립열망·피땀이 서려 있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9회 3·1운동 푯돌을 찾아서’ 편이 지난 22일 종로구 탑골공원과 인사동 일대에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지하철 종각역 4번 출구에 집결한 참가자들은 운동의 진앙지이자 발화지점인 보신각과 서울YMCA, 태화관 터를 거쳐 승동교회~탑골공원~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차례로 걸었다. 이날 여정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터와 이종일 선생 동상 앞에서 마무리했다. 어느 한 곳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독립 성소다. 평소 번잡한 도심에서 무심히 바라봤던 푯돌에 선열들의 독립열망과 피땀이 서려 있음을 느낀 소중한 시간이었다. 평소보다 젊은층의 참여도가 높아서 3·1운동 100주년의 힘을 느끼게 했다. 부부, 모녀, 친구, 동료끼리 서울에서 손쉽게 찾는 3·1운동 성지 순례길이었다. 해설을 맡은 한이수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3·1만세운동의 막전막후를 현장감 있게 들려줬다.우리 민족사 미증유의 거국적 시위인 3·1운동은 식민지 수도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나 전국으로 퍼졌다. 그동안 우리는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영향이라는 거시적 관점에 천착했다. 시위대는 어디로 행진했으며, 시위 참가자는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시위의 양상과 전개는 어땠는지 같은 미시사에는 무심했다. 이 같은 시시콜콜한 지식은 경성이라는 도시의 도시공간과 상관관계가 있다. 대한제국(1897~1910) 시기에 시작돼 일제강점기에 재편된 도시공간의 변화가 3·1운동 시위 동선과 전개 양상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서울이라는 도시에 초점을 맞춘 3·1운동 연구는 빈약했으나 최근 도시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의 새로운 해석과 접근이 가능해진 것이다.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DB)’에 따르면 현재까지 파악된 3·1만세 시위 참여자는 대략 200만명으로 추산된다. 1919년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2000만명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전 인구의 10%가 시위에 참가했다는 계산이다. 전체 시위 발생 건수는 1648건으로 파악됐다. 이 중 경성에서 17건, 경성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에서 332건이 일어났다. 경성과 경기도가 내연기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경성은 시위 발생 건수는 작지만 중요도와 파장 면에서 비중이 컸다.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조사·투옥 등 처벌을 받은 사람(조선총독부가 피고인으로 분류한 기준)은 모두 1만 9054명이었다. 경성에 주소지를 둔 피고인은 모두 1337명으로 인구 1만명당 피고인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시작돼 5월 2일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학계에서는 운동의 전개과정을 3월 1일부터 14일까지는 시발기, 15일부터 28일까지는 전환기로 본다. 절정기는 3월 29일부터 4월 11일까지, 5월 초 이후를 퇴조기로 보았다. 경성 만세시위의 양상도 비슷했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의 보고서와 매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3월 1일 저녁 대한문 앞에 집결한 3000여명의 학생과 시민이 만세를 불렀고 이어 8시쯤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학생 200명, 11시쯤 마포 전차종점에서 1000여명의 시민이 만세를 외쳤다. 고종의 국장일(3월 3일)을 제외한 2일, 5일, 8일, 22일, 23일, 25일 사대문 안과 밖에서 수백명 단위의 산발적 시위가 줄을 이었다.3월 1일 시위대는 탑골공원을 나와 크게 세 갈래로 갈라졌다. 한 갈래는 창덕궁~안국동~광화문~프랑스영사관~미국영사관~서소문~대한문 코스를 따라 행진했다. 또 한 갈래는 종로~남대문정거장~의주로~미국영사관~이화학당~대한문~광화문~서대문으로 향했다. 마지막 한 갈래는 프랑스영사관~소공정~대한문~미국영사관~광화문 등으로 이동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펴낸 ‘경성과 평양의 3·1운동’은 시위 동선을 지리정보시스템(GIS) 기법을 통해 지도상에 복원하고 구현한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 준다.동선을 조사한 결과 사대문 안 경복궁 광화문, 경운궁(덕수궁) 대한문, 정동 프랑스영사관과 미국영사관 앞을 반복해서 지나다녔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 같은 동선은 대한제국 시기에 형성된 경운궁 중심의 도로망을 따라 움직인 결과다. 3·1운동의 전개는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인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아니라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새로운 황궁 경운궁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조선왕조 최후의 왕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왕인 고종이 머물던 곳이고 인산일 운구가 시작된다는 점도 작용했을 터다. 시위대가 특정 장소에 반복적으로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 현재의 사직터널과 율곡로가 없던 시절 양쪽이 막혀 있는 광화문보다 경운궁 대한문 앞은 광화문과 종로, 을지로, 서대문, 서소문을 잇는 사통팔달 간선도로의 출발점이라는 이동상의 이점이 컸다. 두 번째로 동선이 자주 겹친 정동은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된 서구제국의 공관이 몰려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시위의 목적과 지향성을 알려주는 단서다. 세 번째는 사대문 안과 주변을 반복적으로 행진하면서 시위 목적을 알리고 참여를 유도했다는 측면에서 근대적 도시 시위의 특징이 뚜렷하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쥔 고종이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환궁하지 않고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게 경성의 도시공간 개편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경복궁과 경운궁을 연결하는 태평로가 닦였고 경운궁과 원구단을 연결하는 소공로, 정동 공관과의 연결로인 정동길, 도성 서쪽 용산과 마포로 나가는 서소문로 등이 각각 정비됐다. 경운궁을 중심으로 형성된 방사상 도로망이 3·1운동 만세시위의 중요 루트가 됐다. 경운궁은 도심부 교통의 기점이자 종점이 됐다. 대한문 앞 시청 앞 광장은 현대 서울 도심부의 열린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경성시가지 도로정비사업, 즉 경성시구개수를 통해 형성된 도로망을 따라 시위대가 옮겨 다닌 셈이다.시위 참여자의 주거지를 조사해 보니 대부분이 청계천 북쪽 이른바 북촌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조선인의 전통 주거지가 3·1운동의 요람 역할을 했다. 북촌에서 쏟아져 나온 시위대가 일본인 거주지이자 권력의 심장부인 남산 아래 남촌과 용산 쪽으로 쫓아가는 흐름을 보였다. 촛불시위에서 보듯 오늘날 모든 시위대가 청와대를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시 시위대의 최종 목적지는 남산 아래 총독부와 총독관저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시위는 대체로 사대문 안에서 외곽으로 확산됐다. 외곽지역 중에서는 경성에 면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이나 숭인면과 시흥군 영등포면 등 193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울에 편입되기 전의 지역에서 시위가 빈번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도시 시위문화의 원조는 1898년 3월 종로 백목전 앞에서 열린 제1차 만민공동회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고 대중연설이 실시된 게 특징이다. 또 이를 주도한 독립협회는 궁궐 앞에 모여 만세를 하는 시위문화의 정형을 만들었다. 일제 강점 이후 경성시내에서 이뤄진 각종 행사는 국기(일장기)를 들고 만세(천황)봉창과 행진의 순으로 이뤄졌는데 삼일운동도 이를 답습했다. 특별한 행사 없이 독립선언서 낭독과 대한(조선)독립 만세 삼창 그리고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단순한 시위양태였다. 시위의 단순함이 3·1운동을 들불처럼 번지게 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제10회 서울의 영화 2(이용민 감독의 ‘서울의 휴일’) ■일시 및 집결장소:6월 29일(토) 오전 10시 서대문역 5번 출구 앞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열린세상] 대일 화해 제안, 역사의 원칙을 세워라/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열린세상] 대일 화해 제안, 역사의 원칙을 세워라/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우리 정부가 지난 19일 대일 화해 방안을 내놓았다.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일본 기업의 배상 의무를 확인한 지난해 10월의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이 이에 반발하면서 7개월 이상 한일 관계가 기능부전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그 내용은 한일 양국 기업이 자발적으로 출연한 재원에서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함으로써 당사자들이 화해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일본 정부가 이를 수용할 경우 청구권협정에 따른 협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 정부가 역제안을 내놓았다는 점은 일단은 평가할 만하다. 다만 일본 기업이 피해자들과 화해하는 방안에 대해 일본 정부가 그동안 내비쳤던 부정적인 태도를 고려하면 여전히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 역시나 일본 정부는 우리의 제안이 ‘한국의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는 방안이 아니라며 거부했다. 그러면서 제3국에 의한 중재위원회 구성을 재차 요구했다. 우리의 제안이 일본의 입장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의미다. 당분간 팽팽한 긴장은 지속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원칙이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구제가 청구권 문제를 벗어나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 지배로 인한 손해배상의 범주에 속한 문제임을 확인했다. 이는 식민지 지배의 기원을 이루는 협정과 조약들이 애초부터 무효라서 식민지 지배 그 자체가 불법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서 우리 정부가 주장하는 해석이다. 일본은 1910년에 이르는 협정과 조약들이 유효했으나 1948년 한국 정부 수립으로 무효가 됐다는 해석에 서 있다. 대법원 판결은 그 해석의 차이가 더이상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나아가 대법원은 청구권과 경제협력의 대가성 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청구권협정으로 강제동원으로 인한 손해배상 문제를 해결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판결은 양국 정부가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을 일치시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확인할 것을 한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면 1965년 체제의 한계를 궁극적으로 뛰어넘기 위한 외교 노력에 나서야 한다. 이번 우리 정부의 제안이 한일 관계 반전의 계기가 돼 주기를 바라면서도 마음 한켠에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 것은 이번 제안이 1965년 체제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제안은 문제를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구제의 문제에 한정해 일과적 해법을 내놓은 것에 불과하다. 한편 피해자 구제의 방법으로 제시한 재원 마련에 일본 기업이 참가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은 그동안 일본 정부와 관련 기업들이 보여 온 태도로 볼 때 비현실적인 대안이어서 명분 쌓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제기해야 할 문제는 한일 관계의 근본 구조이며, 역사의 원칙을 세우는 일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에는 긴 호흡이 필요하다. 대신 당장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고령의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해서는 실질적이고도 시급한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 정부가 떠안는 문제 또한 역사의 원칙을 세우는 일이다. 다시 한번 대법원 판결의 기본 정신으로 돌아가 보자. 대법원 판결은 대한민국이 1948년에 신생국가로 건국됐다는 단절론을 배제하고 있다. 그 판결을 존중한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하에서 일어난 ‘징용’ 및 ‘징병’ 등 강제동원으로 발생한 국민들의 손해를 배상할 책임의 일부는 대한민국 정부에 귀속된다.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을 천명한 대한민국 임시헌법 1조에 따라 대한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대한민국 정부에 있고, 외국의 강점 상태를 용인해 그 불법행위로 인해 자국민이 생명을 잃고 재산을 보호받지 못한 상태를 시정하지 못한 책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를 한국 정부 주도하에 실시하는 것이야말로 임시정부 수립 100년의 해에 임시정부 수립으로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단절된 적이 없는 우리 법통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 한국 첫 테니스장, 1885년 거문도서 시작

    전남 여수시 삼산면에 있는 거문도가 국내 최초로 테니스가 보급된 곳으로 공인됐다. 대한테니스협회는 23일 “거문도 최초의 테니스 부지에 대한 협회 인증 현판식과 기념 식수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협회에 따르면 1885년 영국군 동양 함대가 거문도에 주둔했을 때 영국군이 우리나라 땅에 만든 테니스장이 국내 최초의 테니스 코트라는 것이다. 테니스협회는 “당시 영국군이 바닷가에 만든 코트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 있다”며 “그 유산이 지금도 이어져 인구 1400명인 섬에 복식 코트가 6면이 있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삼산면사무소 뒷산 중턱에는 테니스 전래지임을 기념하는 해밀턴 코트가 있다. 이는 영국군이 거문도를 ‘포트 해밀턴’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 협회는 “국내 최초의 테니스 경기는 1908년 4월 대한제국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관리들이 서울 미창동 코트에서 연식 정구를 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곽용운 대한테니스협회장은 “우리나라 테니스 뿌리를 찾게 돼 기쁘다”면서 “한국 테니스 발전에도 큰 디딤돌이 되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부산대 박물관,태극기 순회 특별전시회 개최.

    부산대 박물관은 오는 25일부터 9월 7일까지 ‘태극기가 ????에(바람에)’ 순회 전시전을 연다고 19일 밝혔다. 이번 순회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기획됐다. 전시는 오랜 기간 미국에서 태극기 자료를 수집해 온 재미교포 이병근 씨의 주요 소장품을 중심으로 500여 점이 선보인다. 부산대 박물관은 1883년 태극기를 정식 국기로 채택한 조선시대 이래, 대한제국·일제강점기·해방직후·미군정기·한국전쟁기·한국전쟁이후 근·현대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 해 온 태극기의 변천사를 소개한다. 또 태극기의 의미와 작도법 안내, 임시정부요원과 함께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관람객 포토존, 태극기 도안에 글귀를 남길 수 있는 참여존 등 ‘태극기’를 주제로 한 다채로운 전시 행사를 마련할 예정이다. 전시회는 부산대 박물관이 충북 청주의 한국교원대학 교육박물관과 공동기획했다. 김두철 부산대 박물관장은 “이번 특별순회전은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획된 만큼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열망했던 우리 조상들의 염원을 다시 되새기고 역사의 주인공들을 기리는 소중한 자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부흥 기폭제 ‘춘향전’ 멜로 이끈 ‘자유부인’… 장르의 신세계 열었다

    부흥 기폭제 ‘춘향전’ 멜로 이끈 ‘자유부인’… 장르의 신세계 열었다

    지금까지의 연재를 통해, 1900년대 초입 한국에 처음 영화가 들어온 시점부터 6·25 전쟁이 끝나고 재건을 시작한 1954년 시점까지 약 50년 동안의 영화사를 살펴봤다. 1901년 미국인 여행가 버턴 홈스 일행이 대한제국기 서울의 풍경을 촬영해 왕실에서 상영회를 개최한 것과 1903년 동대문활동사진소에서 표를 사고 입장한 대중 관객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한 것이 한국에 영화가 소개된 가장 앞선 기록이었다. 또한 1919년 단성사에서 조선인 신파극단의 제작으로 연극 무대와 영화가 결합한 연쇄극을 상연한 것은 한국영화 100년의 출발로 기록된다. 이후 일제강점하 조선영화계는 무성영화와 발성영화시기를 개척해 가며 조선인 관객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고, 일제 말기에는 국책선전영화로 명맥을 이어가기도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영화 제작을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의 열정은 1945년 8월 이후 해방 정국과 1950년 6·25 전쟁 시기에도 꾸준히 극영화를 만들고 관객들과 만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는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산업이 급격히 성장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이제부터의 연재는 1955년 이후 한국영화계가 어떻게 국가 정책 그리고 제작 자본과 협상하며 ‘한국’ 영화를 만들어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번 지면은 우선 1950년대 중후반까지의 상황을 알아볼 것이다.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 전후 한국 사람들의 깊은 상처를 위로한 것은 역시 영화였다. 전쟁 중에도 영화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폐허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곧바로 상업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1954년 18편, 1955년 15편을 기록한 한국영화 제작 편수는 1956년 30편, 1957년 37편으로 늘어나더니, 1958년 74편으로 전 해보다 두 배가 증가했고, 1959년에는 111편으로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대에 진입하게 된다. 한국영화산업이 휴전 후 불과 6년 만에 이 정도의 급성장을 이룩한 배경은 역시 인력이었다. 영화에 대한 한국영화인들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했던 것일까. 가장 대중적인 예술에 참가한다는 개인 창작자로서의 욕망, 자본을 투여한 것 이상으로 수익을 내야 하는 상업영화 셈법의 확고한 인식, 또 직업으로서 계속 영화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한국영화를 기다리고 지지하는 관객들의 존재가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 매체는 대중과 만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도한 이승만 정부도 이러한 한국영화의 역할을 인식하고 영화계의 의견을 반영해,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 1959년 ‘국산영화 장려 및 영화오락 순화를 위한 보상특혜실시’라는 과감한 지원책으로 한국영화 진흥을 도모한다.전후 한국영화 부흥의 기폭제가 된 작품은 이규환이 연출하고 배우 조미령과 이민이 주연한 ‘춘향전’(1955)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전 소설 ‘춘향전’은 1923년 한국 최초의 상업영화, 1935년 최초의 발성영화로 만들어지는 등 이후 한국영화산업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영화화되었다(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까지 모두 17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1955년 벽두에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이규환의 ‘춘향전’ 역시 몰려드는 관객들로 대성황을 이뤘고, 2주간 상영에 10만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들며 제작사에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 단 하나의 프린트로 전국 상영을 하던 시절, 서울 상영 이후 지방 각 도시의 상영관에서도 열띤 흥행은 계속되었고, 영화는 2년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관객들과 만났다. 춘향 역의 조미령과 이몽룡 역의 이민이 이 영화 한 편으로 일약 스타가 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새롭게 출발한 한국영화계는 이 영화 덕분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한국영화로는 제작비 회수도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지만, 채산을 맞추는 것을 넘어 큰 수익도 올릴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잘 만든 한국영화라면 언제든 뜨거운 지지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들의 존재를 확인한 것도 영화의 효과였다. ‘춘향전’의 성공은 이후 사극영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1956년에 제작된 30편 중 무려 16편이 사극 혹은 시대극 장르일 정도로 인기를 구가한다.●사극에서 멜로드라마로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의 또 다른 축은 바로 현대극 장르였다. 관객들이 시대극 장르에 싫증을 내기도 전에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가 흥행 전선에 나선 것이다. 이 경향을 주도한 것이 바로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이다. 영화는 대학교수와 교수 부인 각각의 연애를 다뤄 전후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원작은 작가 정비석이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해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소설로, 연재 당시에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며 중공군 50만명과 맞먹는 국가의 적이다”는 격렬한 비난을 받으며 화제가 되었다. 1950년대 중반 한국 사회를 휘몰아치던 계, 댄스, 사치라는 세 가지 바람을 시의성 있게 소설화한 원작이 센세이션을 일으키자, 한형모는 영화로까지 여세를 몰아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한편 영화에 등장한 “뭐든지 최고급품으로 주십시오, 최고급입니까”라는 극 중 백사장(주선태)의 대사는 당시 “최고급”이라는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자유부인’은 195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이자,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되었다. 이듬해 1957년에는 홍성기의 ‘애원의 고백’, ‘실락원의 별’, 김성민의 ‘처와 애인’, 김기영의 ‘여성전선’, ‘황혼열차’, 이용민의 ‘산유화’, 한형모의 ‘순애보’, 유현목의 ‘잃어버린 청춘’ 등의 멜로드라마가 전후 사회의 정서와 시대상을 반영하며, 여성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가주의적 미장센(화면 구도)이 유려한 유현목 감독의 ‘그대와 영원히’(1958), 박종호의 감독 데뷔작이자 배우 김지미의 청초한 매력이 돋보이는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1959), 조긍하 감독의 대표작 ‘육체의 길’(1959)도 빼놓을 수 없다. 1950년대 후반의 멜로드라마 지형은 홍성기·김지미 콤비의 영화가 주도하는 가운데,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작품이 경쟁 구도를 그리며, 한국 대중영화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전자는 ‘별아 내 가슴에’(1958), ‘산 넘어 바다 건너’(1958), ‘별은 창 너머로’(1959), ‘자나깨 나’(1959)가 대표적이고, 후자는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1959) ‘동심초’(1959) ‘자매의 화원’(1959) 등을 들 수 있다. 신상옥 감독이 이 영화들의 성공을 발판으로 ‘신필름’을 설립,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계를 주도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양적 증가 넘어 영화 문화·산업 전반으로 성장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의 성장은 제작편수로 대변되는 양적 증가뿐만 아니라, 영화문화와 산업 전반이 확장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전후 사회적, 개인적 악조건 속에서 ‘미망인’(1955)을 연출한 박남옥은 한국영화사의 첫 번째 여성감독으로 기록되며,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1956)은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특별희극상을 받으며 한국영화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이 되었다. 이 시기 한국영화의 중요한 특징은 다양한 장르가 시도된 점이다. 멜로드라마와 스릴러를 혼합한 ‘운명의 손’(1954)의 한형모는, 악극 요소를 가미한 코미디 ‘청춘쌍곡선’(1956), 탐정영화 ‘마인’(1957), 가요를 극 속으로 녹여낸 멜로드라마 ‘나 혼자만이’(1958) 등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는 야심 찬 행보를 보였다. 노필 감독 역시 극 중 등장인물의 노래 장면이 삽입된 멜로드라마 ‘꿈은 사라지고’(1959), ‘사랑은 흘러가도’(1959) 등을 연출했다. 이 영화들은 미리 녹음한 음악을 촬영현장에서 틀면서 입 모양을 맞추는 ‘플레이백’ 녹음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음악영화들이 시도된 이유는, 뮤지컬 영화를 만들고 싶어도 기재와 기술력이 부족했던 당시 한국영화계가 절충적 제작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화기술에의 도전과 이를 뒷받침한 물적 기반도 검토해 봐야 한다. 해방기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서 도전했던 컬러영화 제작도 다시 시도되었다. ‘선화공주’(1957, 최성관)를 시작으로 ‘사랑의 길’(1958, 장황연), ‘춘향전’(1958, 안종화), ‘콩쥐팥쥐’(1958, 윤봉춘)가 컬러영화로 관객들을 만났다. 한편 홍콩과 합작한 ‘이국정원’(전창근·도광계·와카스기 미쓰오, 1957)은 해외 기술을 빌어 안정적인 컬러 색감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한홍 합작영화로 기록되는 ‘이국정원’은 임화수의 한국연예주식회사와 홍콩 쇼브라더스사가 공동 제작했고, 김화랑 감독의 ‘천지유정’(1957)이 그 뒤를 이었다. 두 영화는 1958년 한국 관객들과 만난다. 2.35:1의 시네마스코프 포맷을 통해 넓고 긴 화면 즉 와이드스크린도 선보였다. 그 첫 번째 작품은 수도영화사 대표 홍찬이 건설한 안양촬영소의 창립작 ‘생명’(이강천, 1958)이다. 영화는 미첼 카메라에 비스타라마 렌즈를 달아 촬영했고, 오프닝 크레디트와 포스터에는 수도영화와 시네마스코프를 합친 ‘수도스코프’라는 명칭을 내세웠다. ●정릉·삼성·안양 등 영화 전문 스튜디오 등장 컬러와 와이드스크린 등 1950년대 후반의 기술 시도는 영화촬영소라는 공간과 연동된 것이었다. 한국영화문화협회의 정릉촬영소, 삼성영화사의 삼성스튜디오,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등 본격적인 스튜디오 세 곳이 등장해 한국영화의 새로운 제작 기반이 되었다. 사실 스튜디오라는 공간은 선진 영화제작 시스템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주먹구구식 수공업적 제작을 벗어나 할리우드식의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한국영화인들의 오랜 꿈이었다. 스튜디오 시대의 첫 주자는 1957년 1월 개소한 정릉촬영소였다. 120평의 촬영장과 100평 규모의 현상소에 미국의 민간원조기구 아시아재단이 기증한 미첼 카메라, 휴스턴 자동현상기 등이 설비되었다. 촬영소를 건립한 한국영화문화협회는 아시아재단으로부터 기증받은 영화기자재를 관리하기 위해 1956년 7월 설립한 단체다. 한편 ‘자유부인’으로 큰 수익을 거둔 삼성영화사는 1957년 7월 군자동에 삼성스튜디오를 만들어 권영순의 ‘오해마세요’(1957), 유현목의 ‘그대와 영원히’, 한형모의 ‘나 혼자만이’(1958)를 제작했다. 규모나 내용에 있어 가장 주목할 곳은, 평화신문사와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이 이승만 정권의 특혜를 받아 1958년 6월 개소한 안양촬영소이다.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본떠 본격적인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했고 자신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안양촬영소는 3만 3500평의 부지에 총건평 1975평으로 9개의 건물이 자리잡은 그야말로 ‘영화공장’이었다. 미첼 카메라 3대, 웨스트렉스 녹음 시설 등 미국의 최신 기재들도 들여왔다.하지만 수도영화사의 홍찬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과 두 번째 작품 ‘낭만열차’(1959)의 흥행 실패로 수십억원의 부채를 졌고, 결국 촬영소는 1959년 10월 부도 처리되며 산업은행의 관리로 넘어갔다. 1966년 9월 박정희 정권의 지원하에 신필름에 인수될 때까지 애물단지로 방치되었던 안양촬영소는 영화산업의 근대화가 산업 내부의 동력 없이 국가의 정책적 지원만으로 완성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1950년대의 다양한 시도와 노력들이 1960년대 한국영화가 중흥기를 맞고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을 들어서는 기반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문현웅의 공정사회] 일제강점기 판사와 사법농단 판사

    [문현웅의 공정사회] 일제강점기 판사와 사법농단 판사

    “대한민국헌법은 전문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고, 위와 같은 헌법 규정의 취지는 일본제국주의집단의 강점기 동안 시행된 법령은 적어도 항일독립운동의 이념에 배치되는 부분에 한하여는 정당성을 부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판사의 재판이 일본제국주의집단의 강점기 동안 시행된 법령을 준수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항일독립운동가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것과 같이 항일독립운동의 이념에 배치되는 한 우리 헌법상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김세완 전 대법관(1894~1973)의 후손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조사 대상자 선정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가 원고 패소판결하면서 선고(2010. 12. 24)한 판결문이다. 김 전 대법관 후손들은 위 소송에서 “판사로서 형사 관련 법규에 따라 기소된 사건에 합당한 법을 적용하고 합의된 결론을 토대로 작성된 판결문에 서명날인한 것을 두고 반민특별법 제2조 제15호 소정의 ‘감금·고문·학대 등의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법원은 “판사의 항일독립운동가에 대한 형 선고에 의하여 항일독립운동가는 죽임을 당하거나 일정 기간 교도소에 감금되게 되는데, 사형이나 징역형의 집행은 법집행의 외관을 가지나 앞서 본 바와 같이 일본제국주의집단의 강점기에 항일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한 법은 우리 헌법상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정당성이 없는 법에 따른 사형이나 징역형의 집행은 실질상 살해, 감금과 다를 바가 없고, 그로 인해 항일독립운동가 본인이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이고 항일독립운동에도 타격이 가해짐은 자명하므로 이는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에 대한 감금·고문·학대 등 탄압행위에 해당된다”며 김 전 대법관 유족의 주장을 배척하였다. 그러면서 “대한제국 시절 판사시험에 합격해 판사가 됐으나 경술국치를 지켜본 후 법복을 벗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현행 법관윤리강령은 “법관은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정당한 권리행사를 보장함으로써 자유·평등·정의를 실현하고,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법권을 법과 양심에 따라 엄정하게 행사하여 민주적 기본질서와 법치주의를 확립하여야 한다. 법관은 이런 사명을 위해 사법권의 독립과 법관의 명예를 굳게 지키며 국민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법관은 공정하고 청렴하게 직무를 수행하며, 법관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직업윤리를 갖추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법관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직업윤리의식에 충실하여 법복을 벗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판사가 있었던 반면 오로지 자신의 영달과 안위를 위해 법관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의식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채 항일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데 앞장선 판사도 있었던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이어 사법행정권 남용에 가담하거나 지시를 적극적으로 수행한 법관들의 재판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이들 재판에서 경력 15년 내외의 부장판사들이 ‘윗사람’의 지시를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무력하게 수용해 왔는지 낱낱이 공개되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우리 사회가 법관들에게 높은 수준의 직업윤리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법관들이 정의·공정성·독립성 등에 충실할 것이라고 한 기대는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던 판사와 스스로 법복을 벗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판사가 있었던 것처럼 사법농단이 자행되던 전 정권 시절에도 ‘윗사람’의 부당한 지시를 거절하고 그러한 지시를 폭로하면서 스스로 사직을 한 판사가 있었던 반면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하여 ‘윗사람’의 부당한 지시에 충실해 판사로서 하지 말아야 할 업무를 수행한 판사가 있다. 법관윤리강령에 규정된 직업윤리에 충실했던 판사는 법원을 떠났고 그러한 직업윤리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던 판사는 여전히 법원에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형사재판에서 항일독립운동가에게 실형을 선고했던 판사가 법대에서 여전히 판사 봉을 휘두르는 듯하다.
  • [단독] 일제 아픔 서린 ‘공사관’·한인 애환 함께한 ‘영사관’ 사라진다

    대한제국 독립외교 의지 알린 공사관 1974년 직제에서 없애 사실상 사문화 일본 내 마지막 영사관 1995년 철수 1887년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개국으로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지만 각국 공사와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만약 조금이라도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을 욕보이는 것”이라며 독립외교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영국 런던의 서리 공사였던 이한응 선생은 1905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공사관이 폐쇄되자 유서를 남긴 채 음독으로 순국했다. 그는 본래 ‘3등 참서관’이었지만 상관이 여러 이유로 귀국하자 홀로 남아 대한제국을 위한 외교를 펼쳤다. 그가 순국한 런던 얼스코트의 주영 한국공사관 건물은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대한제국부터 일제의 아픔을 오롯이 받아 낸 공사관과 1960~70년대 재외 한국인의 애환을 함께한 영사관이 법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외교부 관계자는 11일 “공사관, 영사관 제도를 현행 법률에서 삭제하는 대한민국재외공관설치법 개정안을 이날 입법예고했다”고 밝혔다. 공사관, 영사관이라는 용어와 함께 법적 설치 근거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공사관은 1974년 외교부 직제에서 삭제됐고 일본 오키나와 나하에 위치했던 마지막 영사관은 1995년 철수됐다. 이후 신설된 공사관 및 영사관은 없으며 현재 재외공관은 대사관과 총영사관, 분관, 출장소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조직상으로는 사실상 사문화된 제도지만 이들 기관은 외교사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대한제국부터 시작된 공사관은 일본에 대항해 마지막까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외교관들의 얼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대한제국은 1800년대 말 스스로 독립국임을 열강에 인식시키고 독립외교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널리 알리려 미국, 유럽 등 곳곳에 상주 공사를 파견했다. 당시 한국에 있었던 열강의 공사관 제도를 빌려 외교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신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독립의 정당성을 알린 김규식 임시정부 대표 등에게 이어졌다. 주로 일본에 많았던 영사관 역시 1960~70년대 재외 한국인의 애환과 함께했다. 당시 외화벌이를 나섰던 많은 한국인이 영사관을 기억한다. 다만 한국의 국격이 높아지면서 영사관은 대사관과 총영사관으로 승격됐고 영사관이라는 명칭 자체가 일본의 영향으로 생겼기 때문에 자연스레 소멸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단독]일제 아픔 서린 공사관, 한인 애환 함께한 영사관 사라진다

    [단독]일제 아픔 서린 공사관, 한인 애환 함께한 영사관 사라진다

    이상재 선생, 주미공사관에서 독립외교 의지 다져주영공사 이한응 선생, 일제 폐쇄 조치에 음독 순국외교부, 재외공관설치법 개정안 입법예고사문화된 공사관 및 영사관 제도 없애기로 1887년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개국으로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지만 각국 공사와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만약 조금이라도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을 욕보이는 것”이라며 독립외교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영국 런던의 서리 공사였던 이한응 선생은 1905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공사관이 폐쇄되자 유서를 남긴 채 음독으로 순국했다. 그는 본래 ‘3등 참서관’이었지만 상관이 여러 이유로 귀국하자 홀로 남아 대한제국을 위한 외교를 펼쳤다. 그가 순국한 런던 얼스코트의 주영 한국공사관 건물은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대한제국부터 일제의 아픔을 오롯이 받아 낸 공사관과 1960~70년대 재외 한국인의 애환을 함께한 영사관이 법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외교부 관계자는 11일 “공사관, 영사관 제도를 현행 법률에서 삭제하는 대한민국재외공관설치법 개정안을 이날 입법예고했다”고 밝혔다. 공사관, 영사관이라는 용어와 함께 법적 설치 근거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공사관은 1974년 외교부 직제에서 삭제됐고 일본 오키나와 나하에 위치했던 마지막 영사관은 1995년 철수됐다. 이후 신설된 공사관 및 영사관은 없으며 현재 재외공관은 대사관과 총영사관, 분관, 출장소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조직상으로는 사실상 사문화된 제도지만 이들 기관은 외교사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대한제국부터 시작된 공사관은 일본에 대항해 마지막까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외교관들의 얼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대한제국은 1800년대 말 스스로 독립국임을 열강에 인식시키고 독립외교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널리 알리려 미국, 유럽 등 곳곳에 상주 공사를 파견했다. 당시 한국에 있었던 열강의 공사관 제도를 빌려 외교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신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독립의 정당성을 알린 김규식 임시정부 대표 등에게 이어졌다. 주로 일본에 많았던 영사관 역시 1960~70년대 재외 한국인의 애환과 함께했다. 당시 외화벌이를 나섰던 많은 한국인이 영사관을 기억한다. 다만 한국의 국격이 높아지면서 영사관은 대사관과 총영사관으로 승격됐고 영사관이라는 명칭 자체가 일본의 영향으로 생겼기 때문에 자연스레 소멸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금요칼럼] 범인의 속성/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금요칼럼] 범인의 속성/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건강한 국민의 촛불이 이전 정권을 무너트렸다. 얼마나 할 말이 없었으면, 당시 여당 국회의원들조차 탄핵에 찬성했을까. 정권의 핵심부가 범죄자의 소굴이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최소한의 양심은 지킨 셈이다.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 않은 국회의원들과 총리 및 장관들은 사실상 이전 정권의 추악한 범죄행위를 묵인하거나, 이용하거나, 부역한 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개 공범 내지는 부역자라는 얘기다.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기반을 훼손시킨 범인으로서 석고대죄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요즘 돌아가는 일을 보면 가관이다. 인왕산 자락부터 여의도를 돌아 서초동에 이르기까지 공범과 부역자들이 우글거린다. 국가사회의 공익은 안중에도 없고, 당리당략만 앞세워 목소리를 높인다. 기무사는 사실상 사조직화해 툭하면 계엄령을 만지작거린다. 검찰도 자기들 조직의 이익만 우선할 뿐 공익을 위한 개혁에는 오히려 저항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외교의 일선에 선 외교관이 국가의 고급 외교기밀을 정략적으로 누설하는가 하면, 공범들은 감히 “국민의 알권리” 운운하며 맞장구를 친다. 다들 국민과 민생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그것은 공론(空論)으로 그저 허공을 치는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꽹과리 소리를 높이다 보니, 더 큰 꽹과리 ‘태극기부대’와 손잡는가 하면,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비속어를 원내대표라는 자가 공개적으로 내뱉는다. 대표는 대표대로 독재 타령이다. 정치는 실종된 채, 막말과 깽판만 난무한다. 아무런 내실도 갖추지 않은 채 진정한 행동은 없이 목소리만 높이다가 우리는 국가의 크나큰 치욕을 당한 바 있다. 청나라에 굴복한 삼전도항복(1637)이 그 하나요, 총 한 방 제대로 쏴보지도 못하고 일제에 고스란히 망한 조선과 대한제국이 그 둘이다. 17세기에 이미 조선 위정자들의 이런 무책임과 어리석음을 꿰뚫어 본 청 태종은 조선국왕 인조에게 보낸 서신에서 준엄하게 꾸짖었다.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입과 혀로 큰소리만 친다. 정묘년(1627·정묘호란)의 치욕을 씻겠다며 큰소리쳐 놓고, 왜 당당히 나와 싸우지는 않고 성 안에 들어가 부녀자처럼 숨기만 하는가? 우리나라에는 ‘범인(犯人)은 민첩한 행동을 중히 여기고 겸손한 언사를 중히 여긴다’는 속담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의 행동이 언사에 미치지 못하면 치욕으로 여긴다. 어찌 너는 이처럼 망언을 늘어놓으면서도 조금의 거리낌조차 없는가?” 이 세상 거의 모든 범인은 자기가 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지한다. 만약 전혀 깨닫지 못한다면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극악한 연쇄살인범이라도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심리문제가 있을 뿐, 살인 자체가 범죄임은 자각한다고 한다. 그러니 자기가 범인임을 최대한 숨기려 하는 게 범인들의 인지상정이다. 청나라의 속담이 함의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범죄 행동에는 영리하고 민첩함이 중요하지만, 언사로는 주변에서 누가 말을 하라며 부추겨도 끝내 사양하고 최대한 입을 닫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나마 최소한의 상식은 통하는 범인이고, 그래야 범죄행위를 숨길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요즘 이 땅의 범인들은 행동거지는 뭐 하나 취할 만한 게 없고, 언사만 꽹과리 난장판이다. 헛된 말로 선동하면 그것은 속임수와 다름없다. 청 태종의 이어지는 말에 따르면 “추하게 속이고(欺罔), 교활하게 속이고(狡詐), 간사하게 속이고(奸僞), 빈말로 속이며(虛?) 큰소리만 치는” 꼴이다. 일반 범인들도 공유하는 최소한의 상식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까? 공범임이 이미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현재로서는 목소리라도 높일 수밖에 없기 때문인가?
  • ‘스타일난다’ 김소희, 96억 한옥+164억 건물 ‘전액 현찰 매입’

    ‘스타일난다’ 김소희, 96억 한옥+164억 건물 ‘전액 현찰 매입’

    ‘스타일난다’ 김소희 전 대표가 최근 서울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고급 한옥을 매입했다. 김소희 전 대표는 지난 9일 서울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한옥 고택을 최근 96억 6800만 원에 매입했다. 대출을 끼지 않고 전액 현찰을 주고 본인 명의로 사들였다. 김 전 대표는 최근 남편, 아들과 이곳에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김 전 대표가 매입한 한옥은 서울시가 지난 2007년 문화재자료로 지정했으며, 대한제국 시기의 관료이자 금융업에 종사했던 재력가가 1906년 건립, 1929년까지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지난 2017년 초 서울 성북구청이 해당 가옥을 압류했으며, 2018년 11월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임의경매개시가 결정된 바 있다. 경매개시는 올해 2월 취하됐다. 해당 한옥은 문화재자료이지만 개인 소유이기 때문에 소유자가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다. 앞서 김 전 대표는 지난 1월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5층짜리 건물을 164억 원에 매입한 사실이 알려지며 부동산계의 ‘큰 손’으로 떠올랐다. 해당 건물 역시 대출을 끼지 않고 전액 현찰을 주고 본인 명의로 사들였다. 한편, 김소희 전 대표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속옷 쇼핑몰을 시작으로 창업에 발을 들였다. 이후 2006년 국내 최대 여성 의류 및 화장품 온라인 쇼핑몰 ‘스타일난다’를 창업해 승승장구 하던 중 지난해 5월 지분 100%를 세계적인 화장품 전문 기업 로레알그룹에 약 6000억 원을 받고 매각하며 화제를 모았다. 사진 = 서울신문DB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1년… 韓 역사 배움터로 활용 고민해야”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1년… 韓 역사 배움터로 활용 고민해야”

    지건길(76)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20일(현지시간) “22일이 미국 워싱턴DC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에 다시 태극기가 걸린 지 꼭 1년 되는 날”이라면서 “공사관을 통해 ‘우리 역사를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하는 활용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경주 천마총 발굴 등 역사적 유물 발굴과 보존에 평생을 바쳐온 지 이사장은 워싱턴을 방문, 이날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물 발굴과 해외 문화재 환수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것이 활용이라고 강조했다. 지 이사장은 “개관 1년 동안 8200여명의 관람객이 대한제국공사관을 찾는 등 좋은 성과를 냈다”면서도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미국인 등에게 대한제국공사관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각종 방법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 한국문화원과 연계해 케이팝 콘서트나 K푸드 행사, 역사 미니어처 전시 등 한류를 통한 이벤트를 예로 들었다. 그는 “단순히 역사 전시물로는 미국인의 이목을 끌 수 없다”면서 “크고 작은 다양한 이벤트로 대한제국공사관을 한류의 상징이자 한국 역사의 배움터로 만들겠다”고 했다.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은 조선 국왕 고종이 왕실자금으로 1891년 12월 2만 5000달러에 구입했다. 하지만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뒤 폐쇄됐고, 1910년 한일 합병 직후 일제가 단돈 5달러에 강제 매입해 미국인에게 10달러에 팔았다. 2012년 10월 문화재청이 이를 350만 달러(약 41억원)에 다시 사들였고, 6년여 고증·복원 작업 끝에 2018년 5월 22일 재개관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더킹 영원의 군주’ 김고은, 이민호와 호흡 “제2의 ‘도깨비’”[공식]

    ‘더킹 영원의 군주’ 김고은, 이민호와 호흡 “제2의 ‘도깨비’”[공식]

    김은숙 작가의 차기작 ‘더킹 영원의 군주’에서 이민호와 호흡을 맞출 또 다른 주인공은 배우 김고은으로 확정됐다. 제작사 화앤담픽쳐스는 김고은이 ‘더 킹 : 영원의 군주’에서 대한민국 형사 정태을과 대한제국에서 범죄자로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루나로 1인 2역에 도전한다고 20일 밝혔다. 화앤담은 “형사와 범죄자라는 극단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영화를 통해 보여줬던 캐릭터 소화력이나 ‘도깨비’에서 보여줬던 소녀에서 연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연기했던 김고은의 폭넓은 연기력이라면 정태을과 루나의 1인 2역을 훌륭하게 잘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캐스팅 이유를 밝혔다. ‘더 킹 : 영원의 군주’는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다루지 않았던 ‘평행세계’를 배경으로 악마의 속삭임에 맞서 차원의 문(門)을 닫으려는 이과(理科)형 대한제국 황제 이곤과 누군가의 삶, 사람, 사랑을 지키려는 문과(文科)형 대한민국 형사 정태을이 두 세계를 넘나드는 공조를 하면서 벌어지는 때론 설레고, 때론 시린, 차원이 다른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다. 이곤 역에는 이민호가 출연을 확정했다. ‘더 킹 : 영원의 군주’는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올 하반기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며, 2020년 상반기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박승원 광명시장, 광복회 어르신들과 상해 임시정부 동행방문

    박승원 광명시장, 광복회 어르신들과 상해 임시정부 동행방문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리는 동안 박승원 경기 광명시장은 상해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았다. 박 시장은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5·18기념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저는 상해에 왔다”며, “광복회 회원 어르신 19분을 모시고 상해 임시정부 사무실과 윤봉길 의사가 계신 홍구 공원, 광복군 3지대 훈련장 등을 보러 왔다”고 글을 올렸다. 이어 그는 “광복회원들이 독립운동을 하셨던 선친들을 생각하시며 모두가 가슴 뭉쿨해 하신다”며, “역사는 거울이며 바른 역사를 배우는 우리의 노력은 더 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5·18의 역사도, 독립운동의 역사도 극우세력은 자꾸 부정하려 한다”며, “살아있는 우리가 바른 역사를 계속 써 내려가야 한다. 민중의 역사, 국민의 역사를 함께 써내려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박 시장은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에서 국민의 나라 대한민국을 수립한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모두 잘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자”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는 ‘오월 광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주제로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 5·18 유공자와 유족·시민·학생 등 5000여명이 참석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 만든 이오 밍 페이 102세 나이로 사망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 만든 이오 밍 페이 102세 나이로 사망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앞 유리 피라미드의 설계자로 알려진 건축가 이오 밍 페이(I.M.페이)가 세상을 떠났다. 102세. 뉴욕타임스(NYT)는 16일(현지시간)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페이가 숨을 거뒀다고 그의 아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그는 돌과 콘크리트, 유리, 강철 등을 이용해 추상적인 형태의 건축을 즐겨 만드는 모더니즘 건축의 마지막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1917년 4월 중국 광저우에서 유명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페이는 1935년 미국으로 건너가 MIT와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하버드대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1948년 뉴욕의 부동산업자 윌리엄 제켄도르프에게 고용돼 빌딩 설계의 감리를 맡았다. 1954년 미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이듬해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1960년대 들어 뉴욕 킵스 베이 플라자(1963), 필라델피아 소사이어티 힐 타워(1964), 뉴욕 실버 타워(1967) 등의 설계를 맡으며 1983년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를 비롯해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 동관, 클리블랜드 로큰롤 명예의 전당, 홍콩 중국은행 타워 등은 지역의 랜드마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페이는 건축에 있어 “시간의 시험에 맞서는 것”을 가장 중요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NYT는 그가 남긴 빌딩은 어느 것도 “촌스럽다”거나 “전통적이다”는 평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생전 그는 대한제국 황실과도 인연을 맺을 것으로 전해진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아들 이구는 195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후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이구는 이곳에서 독일계 미국인인 줄리아 리를 만나 결혼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사진들] 루브르 피라미드 설계한 이오 밍 페이 타계, 대한제국과도 인연

    [사진들] 루브르 피라미드 설계한 이오 밍 페이 타계, 대한제국과도 인연

    프랑스 파리의 자랑인 루브르 박물관 앞 유리 피라미드를 설계한 중국 출신 건축가 이오 밍 페이(貝聿銘)가 10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미국 일간 USA투데이는 16일(현지시간)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가운데 한 명인 고인이 간밤에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뉴욕 타임스(NYT)에 건축 비평을 기고하는 폴 골드버거가 고인 아들 리 청 페이에게 문의했고, 리 청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확인했다고 고인의 회사 공보 담당이 USA투데이에게 밝혔다. 영면한 장소와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제국 황실과의 인연이 눈길을 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아들 이구 씨가 195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후 페이의 회사에 취직한 것이다. 이구 씨가 배우자인 독일계 미국인인 줄리아 리를 만나 결혼한 것도 페이의 회사에서였다. 대학 동문들은 이구 씨와 페이를 헷갈려 했고 이구 씨가 대한제국 황손이라고 말했을 때 농담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줄리아도 페이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페이는 이구 씨가 정말로 황손이란 사실을 확인하고 정말 깜짝 놀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본명보다 이니셜이 들어간 ‘I M 페이’로 더 잘 알려진 그는 1917년 중국 광저우에서 유명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1935년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와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하버드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 정부의 연구자로 활동했다. 1948년 뉴욕 부동산업자 윌리엄 제켄도르프에게 고용돼 빌딩 설계의 감리를 맡았다. 1955년 자신의 회사를 차린 페이는 1960년대 들어 뉴욕 킵스 베이 플라자, 필라델피아 소사이어티 힐 타워, 뉴욕 실버 타워 등의 설계를 맡으며 이름을 드날렸다. 1983년에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도 받았다. 심사 평은 “가장 아름다운 내부 공간과 외부 형태를 금세기에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설계한 대표적인 건축물이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와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 동관, 클리블랜드 로큰롤 명예의 전당, 홍콩 중국은행 타워, 미국 댈러스 시청, 일본 미호 뮤지엄 등이다. 말년에도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카타르 도하의 이슬람 뮤지엄을 설계했는데 그는 특히 이슬람 건축 양식을 매우 좋아했고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모더니즘 최후의 건축가‘로 불리는 페이는 자신이 설계한 박물관, 호텔, 학교 등에서 ‘빛에 대한 경외’를 바탕으로 정밀한 기하학적 구조와 추상미를 보여줬다고 로이터 통신은 평가했다. 그는 생전에 “건축은 실용적인 예술이라고 믿는다. 예술이 되려면 필요성에 근거해 지어져야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미국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는 중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기금을 만들어 일인당 10만 달러씩 나눠주고 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멕시코 한국의 날… ‘애니깽 망국의 한’ 달래다

    멕시코 한국의 날… ‘애니깽 망국의 한’ 달래다

    대한제국 시절 1033명 이주 고된 노동 을사늑약 후 정착… 독립운동 등 후원 임정 100년 맞아 제정·기념행사 개최“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이국땅에서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으로 통곡의 세월을 보냈던 선조의 한을 이제야 풀어 주는 것 같아 기쁩니다.”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은 지난 2~4일(현지시간)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있는 캄페체시와 메리다시에서 현지 정부와 함께 ‘한국의 날’ 제정식과 기념행사를 개최하자 한인 후손들이 이 같은 감회를 전했다고 5일 밝혔다. 대사관은 지난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의 날 제정을 추진했으며 두 도시는 조례를 통해 한인이 멕시코에 처음 도착한 5월 4일을 한국의 날로 지정했다. 이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5년 1033명의 한인이 노동이민으로 유카탄반도에 최초로 정착한 이후 114년 만이다. 당시 멕시코에는 선박용 밧줄의 원료를 채취하는 ‘에네켄’(선인장 용설란의 일종) 재배가 성행했는데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전근대적 고용 관계가 남아 있는 데다 더운 날씨 탓에 인력난에 시달렸다. 일본과 중국에서의 인력 수급이 중단되자 국제 이민 브로커는 한인에게 눈을 돌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 “하루 노동 시간 9시간에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허위 광고를 게재했다. 1000여명의 한인이 제물포항에서 멕시코로 향하는 영국 선박 일포드 호에 몸을 실었다. 1905년 5월 4일 멕시코 서부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하게 된 한인 노동자들은 광고 문구와는 달리 뙤약볕 아래 온종일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다. 한인 노동자들이 에네켄을 ‘애니깽’이라 부르자 현지인들은 한인에게도 같은 이름을 붙여줬다. 우리가 멕시코 노동 이민자들을 애니깽이라 부르는 이유다. 4년 후 계약 기간이 끝났지만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 없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조국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결국 귀향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들은 대한인국민회 지부를 결성하고 독립운동 후원과 민족의식 고취에 나서며 한민족의 정신을 이어 나갔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지난 2일 엘리세오 페르난데스 캄페체 시장은 한국의 날 지정 법안을 통과시키고 한국의 날 발효를 선포했다. 이튿날 메리다시에서는 한국의 날 제정 기념 리셉션에 이어 전야제 행사로 페온 콘트라레 주립극장에서 아리랑 공연이 열렸다. 4일에는 메리다시 제물포 거리에서 한국의 날 기념식이 거행된 후 한인 이민자를 위한 헌화식이 개최됐다. 김상일 주멕시코 대사는 “한국의 날은 양국의 영원한 우정을 상징하며 양국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역사문화 표석 특별전 ‘3·1운동과 임시정부의 표석 이야기’, 오는 26일까지

    역사문화 표석 특별전 ‘3·1운동과 임시정부의 표석 이야기’, 오는 26일까지

    전국역사지도사모임은 독립운동과 연관 있는 표석 이야기를 주제로 한 ‘역사문화 표석 특별전-3·1운동과 임시정부의 표석 이야기’(포스터)를 오는 26일까지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연다고 3일 밝혔다. 전국역사지도사모임이 주최·주관하고 서울도서관·유씨북스가 후원하는 이번 특별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 교양서적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전국역사지도사모임 지음, 유씨북스 펴냄)의 출간과 함께 열리는 행사다.‘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는 3·1운동에서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흐름과, 그 길을 걸은 사람들의 현장 기록을 엮은 책이다. 3·1 독립운동의 만세 시위 현장, 무장 의거 현장,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공간, 독립운동 단체들의 공간, 일제 침탈의 현장 등 표석 54개와 테마별 표석 답사지도 8장을 실었다. 또한 만세 시위자, 무장투쟁가, 계몽운동가, 여성 운동가, 대한외국인 등 혁명 현장 기록 사진 179장과 주석 537개를 수록했다. 전국역사지도사모임 관계자는 “이번 특별전은 서울시 안에 있는 표석 중 3·1운동과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는 표석·표석이 있는 장소를 알려준다”며 “그 표석 이야기를 통해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제 식민지하에서 불꽃처럼 일어난 독립운동의 역사 및 독립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비즈 biz@seoul.co.kr
  • [말빛 발견] 말의 변화/이경우 어문부장

    ‘3·1운동 100주년’의 ‘주년’은 뜻 하나를 떼어내고 있고, ‘고종 100주기’의 ‘주기’는 ‘주년’이 떼어낸 뜻을 가져가고 있다. ‘주기’에는 ‘슬픔’이란 사회적 의미가 더해졌다. 말을 ‘바르게’ 쓰자는 쪽에선 마음에 안 들어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저만치 가서 아랑곳하지 않는다. ‘주년’과 ‘주기’는 다른 말이지만, 뜻을 같이하는 부분이 생겼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인용하면 ‘주년’은 “일 년을 단위로 돌아오는 돌을 세는 단위”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이 1년마다 돌아오는 해를 나타낸다.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여서 ‘3·1운동 100주년’이다. 대한제국의 고종이 사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고종 서거 100주년’이기도 하다. ‘주년’은 이렇게 좋고 나쁘고를 구별하지 않고 쓰였다. 그렇지만 슬픈 일에는 ‘주년’을 조금씩 꺼렸다. 대체어는 가까이 있던 ‘주기’였다. ‘주기’는 “사람이 죽은 뒤 그 날짜가 해마다 돌아오는 횟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주기’는 제삿날을 가리킨다. 슬픔이 있다. ‘세월호 참사 1주년…5주년’으로는 슬픔을 담기 어려웠다. ‘세월호 참사 1주기…5주기’, ‘세월호 1주기…5주기’라야 했다. ‘주기’는 아프고 슬픈 일에 쓰는 말이 됐다. wlee@seoul.co.kr
  • 달랑 205원 50전에 낙찰돼 사라진 돈의문…그 애환과 마주하다

    달랑 205원 50전에 낙찰돼 사라진 돈의문…그 애환과 마주하다

    대한민국 근현대 100년의 기억 보관소, 서울미래유산 현장을 찾아가는 ‘2019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가 2일 올해로 네 번째 시즌을 시작한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는 지난달 27일 제1회 돈의문 안과 밖을 시작으로 오는 12월 21일까지 모두 35회에 걸쳐 매주 말 서울 곳곳을 샅샅이 누빌 예정이다. 올해는 지역별 유형유산 탐방 횟수를 줄이고 문학과 영화, 대중가요 등 서울의 내밀한 과거를 품은 무형유산의 비중을 넓힌 게 특징이다. 시와 소설은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정비석의 ‘자유부인’,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 박완서의 ‘나목’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체취가 묻은 작품 현장으로 떠난다. 이만희의 ‘귀로’, 유현목의 ‘수학여행’ 등의 영화와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같은 대중가요도 탐방의 대상이다.분야별 전문성을 갖춘 서울도시문화지도사 출신 베테랑 해설자 18명이 돌아가면서 해설을 맡는다. 답사는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여 동안 진행된다. 7월 27일부터 8월 24일까지 5회는 무더위를 피해 야간 투어를 한다. 국내 도보답사 프로그램 중 최초로 도입한 오디오가이드 시스템을 이용, 품격 있는 탐방 환경을 제공한다. 참가 신청은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kr)의 참여하기 코너에서 답사 신청을 하면 된다. 매주 월요일 40명을 선착순 무료로 모집한다. 참가자가 투고한 견문기는 서울신문 매주 목요일자에 게재한 뒤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한다.2019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회 ‘돈의문의 안과 밖’이 지난달 27일 광화문과 순화동 일대에서 산뜻하게 돛을 올렸다. 새로 지은 새문안교회 앞에서 모인 참가자 40여명은 구세군회관 생명의 말씀사~경희궁~돈의문박물관마을~4·19혁명기념도서관~임시정부 서울 연통부지~소덕문 터~평안교회로 이어지는 코스를 두 시간여 동안 탐방했다.우리가 보통 서대문이라고 부르는 문의 원래 이름은 돈의문(敦義門)이다. 돈의문은 애환이 많은 문이다. 4개의 대문 중 가장 늦게 지어졌고, 제일 먼저 헐렸으며, 유일하게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했다. 서대문구에는 서대문이 없다. 돈의문은 중구에 속하기 때문이다. 돈의문의 비극은 풍수학자 최양선이 경복궁 좌우 팔에 해당하는 창의문과 돈의문의 사람 통행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태종이 받아들여 문을 폐쇄하면서 비롯됐다. 대신에 지금의 사직터널 부근에 새로 지은 문이 서전문(西箭門)이다. 세종 때 도성을 고쳐 쌓으면서 서전문을 막고 경교(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앞에 세 번째 문을 설치했다. 돈의문이 가장 늦게 지어진 까닭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문이라면서 신문(新門)이라고 적고, 새문이라고 읽었다. 지명에 ‘새문안길’이나 ‘신문로’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가끔 ‘막힐 색(塞)’ 자를 써서 ‘색문’ 또는 ‘새문’이라는 기록도 나온다. 조선 개국공신 이숙번의 집이 돈의문 앞에 있어서 번잡함을 막으려고 문을 폐쇄했다는 야사에서 나왔다. 성문을 막은 집이라는 ‘색문가’(塞門家)라는 표현이 색문 또는 새문이라는 속칭으로 변했다는 얘기다. 1614년 이수광이 쓴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에 보면 “팔문(八門)의 정남은 숭례라 하며 속칭 남대문이라 부르고, 정북은 숙청이라 부르고, 정동은 흥인이라 하며 속칭 동대문이라 부르고, 정서는 돈의라 하며 속칭으로 신문(新門)이라 부르고, 동북은 혜화라 하며 속칭은 동소문이라 부르고, 서북은 창의라 하고, 동남은 광희라 하며 속칭으로 남소문이라 하고, 서남은 소덕이라 하며 속칭 서소문이라 부른다. 또 수구문이 있어 이 양문(소덕문과 광희문)으로 장사 지낼 사람이 나간다”고 썼다. 그렇다면 서대문이라는 명칭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발간된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기사에도 이 일대를 지칭할 때 새문의 안쪽은 ‘새문 안’, 새문의 바깥은 ‘새문 밖’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미뤄 일제강점기 이후 서대문이라는 명칭이 정착됐다고 볼 수 있다. 1928년 마쓰다코가 지은 ‘조선만록’(조선총독부 간)에 “돈의문을 조선인은 신문, 내지인은 서대문이라 부른다”고 설명한 대목이 유력한 근거다. 돈의문은 왜 사라졌을까. 1915년 3월 7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낙찰된 새문 목재만 205원, 입찰자 10명 가운데 경성 염덕기가 205원 50전에 낙찰…”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경매에 부쳐진 돈의문은 나무 값만 받고 헐렸다. 명목상 이유는 성곽도시 서울의 간선도로망 정비를 통해 공간 구조 재편을 꾀한 경성시구개수(京城市區改修) 공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1915년 9월에 열릴 예정인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 개최를 성공시키고,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를 신축해 식민통치를 굳히려는 속셈이었다. 경성시구개수 공사의 29개 노선 중 15번째 노선이 경희궁~서대문~독립문 노선이었다. 서울 서부 외곽의 주요 간선인 독립문에서 도심을 연결하는 전찻길을 넓히고 직선화할 목적이었다. 당시 서대문경찰서장이 ‘서대문의 존치를 바라는 조선인들의 여론’을 보고했지만 총독부는 철거를 강행했다. 문을 그대로 두고 도로를 내는 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였다. 돈의문과 문을 에워싼 성곽은 1915년 6월 시야에서 사라졌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각각 입성한 개선문이라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돈의문은 중국 사신이 드나들었다는 괘씸죄 탓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었는지도 모를 일이다.돈의문 밖은 1876년 조선과 일본 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개항장인 인천 제물포에서 양화진을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제일 관문으로 부각됐다. 1882년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이후 입국한 서양인 대부분이 이 길을 택했다. 돈의문에서 지척인 정동에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들어선 것도 편리한 교통 때문이다. 1899년 정동과 이어지는 서대문정거장~청량리 간 전차가 놓였고, 서대문정거장 옆에 서양식 스테이션 호텔(정거장호텔)이 들어서 외국인 선교사와 외교관, 상인들이 새문 밖으로 몰려들었다. 1900년 한강철교가 놓인 뒤에는 서대문정거장에 서울 최초의 기차역이 들어서면서 서울을 찾는 외국인은 정동과 새문안에 집결하다시피 했다. 새문 안은 서울의 기점이자 종점이었고, 새문 밖 경기감영 앞은 도성 밖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돈의문 안팎은 중국 가는 의주로에 이어 두 번째 황금시대를 맞았다.돈의문은 살아나지 못했다. 2009년 서울시는 2013년 완공을 목표로 복원 계획을 발표했지만 원형 복원의 어려움과 예산 문제에 부딪혔다. 종로~신촌~마포 간 교통 흐름을 해결하고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려면 지하차도를 건설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당시 지하차도 건설 비용은 1300억원 정도였지만 공사 기간에 우회도로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복원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돈의문 대신 돈의문박물관마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독립운동가의 집, 돈의문구락부 같은 16개 동의 전시관과 한지공예 등 9개 동의 체험관, 드라마갤러리 등 9개 동의 마을창작소가 시민들을 맞는다. 서울미래유산관도 있다. 옛 새문안 동네에 있던 집 63채 중 40채를 활용했다. 1년 내내 전시와 공연, 마켓이 열리는 참여형 공간이다. 구릉과 골목, 계단이 공생하는 이 마을은 돈의문도, 서대문도 아닌 새문안 마을이다. 마치 흘러간 시간의 섬처럼 갖가지 추억을 간직한 채 인왕산과 안산의 품에 깃들여 있다. 돈의문이 존재하지 않는 덕분에 돈의문 안과 밖은 구분이 사라졌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선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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