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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세월호 그날’ 휴진 했다던 김 원장…‘관리대장’은 달랐다

    [단독]‘세월호 그날’ 휴진 했다던 김 원장…‘관리대장’은 달랐다

    프로포폴 사용 기록 버젓이 남아있어참사 당일 근무했거나 허위작성 가능성식약처, 검찰에 수사 의뢰 ‘최순실(60·구속기소) 성형외과’로 알려진 김영재(56) 성형외과 의원 원장이 세월호 참사 당일인 2014년 4월 16일 병원을 휴진했다고 해명했지만, 이 병원의 ‘향정신성의약품 관리대장’에는 이날 프로포폴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 해명이 맞다면 김 원장은 프로포폴 관리대장을 허위로 작성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해명과 달리 참사 당일 근무를 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혹을 확인한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최근 검찰에 김 원장이 허위 진료기록부를 작성하지 않았는지 수사를 의뢰한 만큼, 검찰이나 향후 특검이 ‘세월호 당일 7시간’과 함께 이번 의혹도 수사를 벌일 전망이다. 서울신문이 23일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부터 입수한 이 병원의 프로포폴 관리대장에는 2014년 4월 16일 프로포폴 20㎖짜리 1병을 사용했고, 남은 5㎖는 폐기했다는 내용과 함께 김 원장의 사인이 비고란에 적혀 있다. 의사가 프로포폴을 환자에게 처방했다면 진료한 의사가 최종적으로 관리대장을 확인해야 한다. 프로포폴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이 병원 의사는 김 원장 한 명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기존의 김 원장 해명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피부 시술을 해 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자 김 원장은 “세월호 참사 당일은 수요일로 정기 휴진이었다”고 밝혔다. 이 병원 관계자 역시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당시 근무했던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수요일은 정기 휴진이 맞다”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이에 대한 근거로 “4월 16일 인천 청라의 베어즈베스트골프장에서 지인 3명과 골프를 쳤다”며 이날 오전 10시 39분에 통과한 인천공항 고속도로 하이패스 기록과 그린피 신용카드 결제 내역(25만 3200원)을 언론에 공개한 바 있다. 이 해명이 맞다면 문제의 대장은 허위로 작성된 셈이다. 관리대장을 보면 곳곳에 급조한 흔적도 나타난다. 서울신문이 입수한 관리대장은 2014년 1월부터 올해 10월 말까지 2년 10개월분이다. 그러나 글씨체가 모두 똑같은 것으로 확인됐다. 필적 전문가인 김미경 대한문서감정원 원장은 “문서가 사본인 만큼 3년간 한 종류의 볼펜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필적만 놓고 보면 한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한 관리대장은 프로포폴을 사용한 당일 기록하는 게 원칙이지만 과도하게 일률적으로 기록돼 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의사)은 “3년간 매일 사용한 관리대장치고 지나치게 깔끔하다”면서 “보건소에 제출하는 폐기량을 꼼꼼하게 기록한 것도 이례적인 대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병원은 프로포폴 관리대장을 폐기했다는 의혹을 받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식약처는 지난 11일 강남구보건소에 이 병원을 조사할 것을 지시했는데 최근 2년치 마약류관리대장 보존 여부, 처방전에 의하지 않은 마약류 투약 여부, 마약류관리대장과 실재고량 일치 여부, 마약류 저장시설 다중잠금장치 설치 여부 등에 그쳤다. 또 조사 결과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도 검찰에 허위 진료기록부를 작성하진 않았는지 수사 의뢰한 상태다. 서울신문은 이날 김 원장의 해명을 듣고자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지만 답변을 주지 않았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영상] 평화로운 집회 속 성숙한 시민의식···응급차 길터주기 ‘모세의 기적’

    [영상] 평화로운 집회 속 성숙한 시민의식···응급차 길터주기 ‘모세의 기적’

    1987년 6월 항쟁 이후 100만명이라는 최대 인파가 모인 지난 12일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은 집회 중에 성숙한 시민 의식을 보였다. 특히 집회 과정에서 발생한 응급환자의 원활한 이송을 위해 길을 터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응급구조협회는 13일 환자를 태운 응급차가 서울 중구 대한문 앞 도로를 지나가는 모습이 담겨있는 동영상(아래 참고)을 하나 공개했다. 영상에는 응급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시민들이 길을 터주는 장면이 찍혀 있다. (출처 : 한국응급구조협회 제공) 협회는 “전날 광화문광장 집회 현장에서 119소방안전복지사업단과 함께 자원봉사를 한 협회의 현장 응급환자 이송 시 일어난 모세의 기적”이라면서 “물론 술에 취해 응급차를 빼라는 등 차를 밀거나 시비를 거는 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의 양해와 이해로 응급이송 5건, 응급처지 9건을 조치 했다”고 시민들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밝혔다. 또 “이 자리를 빌어 함께 수고한 서울소방대원들의 수고에 감사를 드리며, 저희에게 다가와 수고한다며 김밥과 음료와 그리고 빼빼로를 주고가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고 말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전날 집회 과정에서 서울 종로구 내자동 로타리(경복궁역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시민들 중 26명이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고, 다른 시민 29명은 현장에서 응급조치를 받는 등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5%대 지지율도 실력이야, 부모를 탓해”···朴대통령 풍자마당 된 민중총궐기 대회

    “5%대 지지율도 실력이야, 부모를 탓해”···朴대통령 풍자마당 된 민중총궐기 대회

    지난 12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는 ‘국정농단’ 사태의 장본인 최순실(60·구속)씨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풍자로 가득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저마다 ‘내려와 박근혜’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박 대통령의 ‘하야’를 외쳤다. 서울광장에서 열린 이날 대회는 민주노총 조합원 등 단체 구성원뿐만 아니라 가족 단위의 일반 시민들도 많았다.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박 대통령과 최씨의 국정농단이 시국의 주 관심사였던 만큼 이날 대회는 전반적으로 박 대통령을 풍자하는 발언이 두드러졌다. 집회 시작 전 참가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는 순서에서부터 박 대통령에 대한 풍자가 시작됐다. 스트레칭 시범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3억 5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보급한 차은택(47·구속)씨의 ‘늘품체조’ 대신 3500원짜리 ‘하품체조’를 가르쳐주겠다며 스트레칭을 선보였다. 손을 배에 모으고 허리와 고개를 앞으로 깊이 숙이는 동작을 할 때도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검찰이 공손히 인사하는 모습을 본떴다’고 설명하고, 팔을 펴면서는 ‘하야!’라고 외치도록 하기도 했다. 참가자들 중에는 ‘배터리도 5%면 바꾼다’, ‘지지율도 실력이야! 니 부모를 탓해!’라며 박 대통령의 5%대 지지율을 조롱하는 피켓을 들기도 했다. 문화예술계 인사와 학생들도 개성 있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집회에 동참했다. 자신을 ‘문체부 블랙리스트’ 인사로 소개한 임옥상 화백은 서울시청 서울도서관 앞에서 우레탄 폼과 한지로 만든 박 대통령과 최씨의 대형 얼굴 상에 못을 꽂아넣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들 얼굴 상에는 ‘오방낭’, ‘차은택’, ‘고영태’라고 적혀 있었다. 임 화백뿐 아니라 현장에 모인 참석자들도 동참했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는 닭대가리 모양의 탈을 쓴 대학생들과 닭 모가지를 비튼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조형물에는 ‘내가 이러려고…’라고 쓰여있었다. 심지어 대학로에서 도심으로 행진한 대학생들 선두에는 다홍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고 오방색 풍선을 든 채 박 대통령의 가면을 쓴 사람이 서서 대학생들을 이끌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야구 응원가로 많이 쓰이는 ‘아리랑 목동’이나 가수 10㎝의 ‘아메리카노’를 개사한 하야가 등을 부르며 하야를 촉구했다. 이날 집회에는 외국인들도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대부분 한국의 ‘최순실 게이트’를 잘 알고 있었고, 일부는 박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했다. 도요나카시 일본인 노동자·개인 200여명과 함께 한국을 찾은 일본JR 지바 지역 노동자 우루시자키 에이이치(69)씨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최순실 사태를 잘 알고 있다”면서 “박 대통령은 지금 당장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청역과 서울 중구 대한문 앞, 대학로, 광화문광장 등에서는 가족이나 연인 단위로 나온 사람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일부 참가자는 유모차를 끌거나 아기를 품에 안고 나오기도 했고,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참석한 부모도 있었다. 어린이들은 혹시 부모를 잃어버릴까 봐 이름이나 나이, 연락처가 크게 적힌 명찰 목걸이를 맸다. 미아방지용 팔찌를 나눠주는 행사도 있었다. 경찰은 집회 참가자들이 늘어나자 미아보호소를 운영했다.대 한문 앞에는 임시 이동식 화장실이 설치됐다. 집회 주최 측은 “청와대로 향하자”고 외치면서도 개인적인 돌발 행동을 자제하고 자리의 쓰레기를 꼭꼭 치울 것을 당부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민주노총 “12일 청와대 앞까지 행진”… 경찰은 불허 방침

    민주노총 “12일 청와대 앞까지 행진”… 경찰은 불허 방침

    민주노총이 오는 12일 민중총궐기 집회 직후 10만명의 조합원과 함께 청와대앞까지 행진하겠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법원의 판단에 맡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도 전국 곳곳에서 시국선언과 촛불집회가 이어졌고 빈민, 비정규직, 장애인 등 사회 취약계층도 동참하고 나섰다. 민주노총은 8일 서울지방경찰청에 옥외집회 신고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민중총궐기 집회 직후인 오후 5시부터 조합원 10만명이 서울광장을 출발해 광화문, 경복궁역을 지나 청와대 인근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까지 행진한 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구호를 제창한다는 내용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은 청와대 100m 이내를 집회·시위 금지구역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청와대 외벽에서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교차로까지는 약 200m 떨어져 있어 문제가 없다”며 “경찰이 행진 금지를 내릴 경우 지난 5일 촛불문화제와 마찬가지로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경찰 관계자는 “민주노총의 신고를 검토 중”이라면서 “하지만 해당 지역은 주거지역이며 교통 방해도 우려되는 데다 행진로가 미국대사관 앞을 지나기 때문에 허용하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지난 5일과 마찬가지로 법원의 결정에 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날 권진원, 신대철 등 30여명의 음악인은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중음악, 전통음악, 클래식 등 음악인 2300여명이 연명한 ‘민주공화국 부활을 위한 음악인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빈곤사회연대’도 광화문광장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40명의 참가자 중 20명이 쪽방이나 시설에 사는 빈민이었다. 이들은 “(정권은) 부정 수급자를 색출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복지의 장벽을 공고히 쌓았다”며 “그러나 대통령을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은 복지 예산의 배가 넘는 금액을 사사로이 주물렀다”고 비판했다. 서울시립대 교수 190명은 박 대통령의 하야, 내각 총사퇴, 국회 중심의 과도거국내각 구성, 특별검사제 도입 등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신학생 시국연석회의는 오후 7시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신학생 총연합 시국기도회를 열었다.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에 나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일동’은 청운효자동 주민센터에서, ‘한국장애인 자립생활센터 총연합회’는 국회 앞에서 정권 퇴진과 복지 확충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충북 청주의 성안길과 전북 전주 풍남문광장·장수군 장수성당 등지에서도 촛불집회가 진행됐다. ‘경기 군포 시민단체협의회’와 ‘박근혜 하야, 인천시민 비상행동’은 지역 주민을 상대로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충북 충주여고 역사동아리 회원들은 교내 급식소 옆에 6장짜리 대자보를 붙여 박 대통령 탄핵과 최순실씨 엄정 수사를 촉구했다. 강원 원주의 북원여고 정문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사과말고 퇴진하라”…광화문 촛불집회 행진 시작

    “사과말고 퇴진하라”…광화문 촛불집회 행진 시작

    5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10만명(주최측 추산)에 이르는 시민들이 모여 오후 6시부터 행진을 시작했다. 이 인파로 종로 일대가 가득찼다. 시민들은 ‘사과말고 퇴진하라’, ‘대통령이 몸통이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 우체국 앞을 출발해 행진 중이다. 본래 ‘광화문우체국→종로2가→재동R→안국R→종로1가→교보문고’의 북측코스와 ‘광화문우체국→종로3가→을지로3가→시청→대한문→일민미술관’의 남측코스를 이용해 분산 행진을 계획했지만 이날 주최측은 ‘청계광장→종로→을지로→명동→남대문→시청→광화문’ 코스만 이용키로 결정했다. 시민들은 “우리가 민심이다. 민심을 들어라. 대통령은 내려가라.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박근혜대통령님.”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길을 걷고 있다. 전날 경찰이 교통 혼잡을 이유로 행진 금지 처분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참여연대가 ‘집회금지 통고처분 취소청구소송’과 ‘금지통고집행정지가처분신청’을 냈고, 서울행정법원이 이날 오후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면서 행진이 가능해졌다. 이날 집회는 1부와 거리행진, 2부 촛불집회로 구성된다. 오후 4시부터 5시까지 1부 행사에서는 세월호 유가족 발언과 4·16 합창단 공연 등이 진행됐고 현재는 거리행진이 진행중이다. 경찰은 이날 문화제에 220개 중대 약 2만명의 경력을 배치했다. 청와대 방향 행진은 경찰버스 등을 통해 차단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양측의 대규모 충돌은 아직 없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 오늘 10만명 도심 집회, 경찰은 행진 금지 통보… 충돌 우려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 오늘 10만명 도심 집회, 경찰은 행진 금지 통보… 충돌 우려

    주최측 “효력정지 신청 후 행진 강행할 것” 5일 오후 4시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 문화제에 경찰이 행진 금지 처분을 내리면서 양측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경찰은 교통혼란을 이유로 설명했지만 시민단체들은 행진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충돌이 예상된다. 4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의 2차 대국민 담화 이후 여론이 더 급격히 악화되고, 국정지지율이 5%에 불과하다는 한국갤럽의 조사결과 등에 따라 경찰이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 주말 집회의 행진 일정에 대해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12조에 따라 행진을 금지하기로 했다”며 “시내 주요 도로에서 전 차로를 점거해 행진할 경우 교통불편이 예상된다”고 4일 밝혔다. 집시법 12조에는 주요 도시의 주요 도로에서 열리는 집회의 경우 교통 소통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금지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에 대해 민중총궐기투쟁본부, 백남기투쟁본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4·16연대, 민주주의국민행동 등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주최 측은 “교통 흐름을 이유로 국민들의 의사표현을 막는 것은 부당하다”며 “서울행정법원에 경찰 처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행진을 강행하겠다”고 맞섰다. 이들은 5일 오후 4시 광화문광장에서 박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문화제를 연 뒤 오후 5시부터 ‘광화문우체국·종로2가·안국로터리·종로1가·교보문고’ 및 ‘종로3가·을지로3가·시청·대한문·일민미술관’의 2개 코스로 각각 2만명이 전 차로를 행진할 계획이다. 또 오전 8시부터 백씨의 장례절차가 시작돼 9시에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열고, 광화문광장으로 옮겨 오후 2시부터 ‘영결식’을 갖는다. 전날만 해도 경찰은 집회 참가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인내대응’ 원칙을 세웠다. 집회에 어린이나 청소년 참가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돼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데 초점을 맞출 계획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발표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여론은 더 악화됐고 5만명이 집회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했던 주최 측은 10만명으로 높여 잡았다. 경찰은 문화제가 아닌 집회를 열 경우 미신고 집회 혐의로 주최 측 관계자를 입건해 조사하겠다고 했다. 판례에 따르면 통상 구호, 피켓, 플래카드가 있으면 문화제가 아닌 집회로 판단한다. 지난 주말 열렸던 촛불집회와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면 문화제가 아닌 집회라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한편 이날 문화예술인들이 광화문광장에서 시국선언을 하면서 텐트를 설치하려다 경찰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다. 경찰은 텐트를 치는 것이 공공장소를 점유하는 행위라며 제지했고, 문화예술인들이 이를 거부했다. 경찰은 텐트 15동을 모두 회수했으나 연행된 사람은 없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길섶에서] 모과 예찬/임창용 논설위원

    점심 후 덕수궁에 갔다가 ‘횡재’를 했다. 대한문을 지나 만난 모과나무 두 그루에 샛노란 모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어른 주먹만 한 모과들이 어찌나 많이 달렸는지. 거무튀튀한 나뭇가지와 대비되어 황금빛을 띠는 열매가 보석 같다. 하나, 둘, 셋…. 나무 아래서 고개를 쳐들고 모과를 세어 보다가 목이 아파 결국 포기하고 만다. 두 그루 합치면 수백 개는 족히 될 듯하다. 젊었을 적부터 덕수궁에 많이 갔지만 모과는 처음 만난다. 계절이 맞지 않았을까. 아니면 감성이 부족해 눈에 띄지 않았을까. 모과는 향이 넘치지 않으면서 오래간다. 그리 진하지 않으면서도 멀리 퍼진다. 울퉁불퉁 못생겼지만 정감이 있다. 아내가 가끔 모과차를 낸다. 택배로 구입한 모과를 얇게 저며 재 놓았다가 끓여 준다. 모과의 독특한 신맛이 거북스럽지 않다. 은근하고 그윽한 향이 코끝을 맴돌 때의 느낌은 언제나 반갑다. ‘자주 마셔야지’ 다짐하면서도 잊어버렸다가 아내가 차를 내주면 다시 같은 생각을 한다. 수시로 보지는 못해도 만날 때마다 반가운 오래된 친구 같다고나 할까. 나이들수록 속 깊고 은근한 친구가 그립다. 모과가 다 지기 전에 덕수궁에 한번 더 가봐야겠다. 임창용 논설위원 sdragon@seoul.co.kr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맑은 가을햇살 느끼며 옛 ‘경성 월스트리트’를 걷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맑은 가을햇살 느끼며 옛 ‘경성 월스트리트’를 걷다

    서울신문은 서울미래유산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시·문화지평과 함께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매주 토요일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신청을 할 수 있다. 오는 5일 답사는 ‘인권을 생각하며 걷는 남산둘레길’을 주제로 이필용·손안나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중에서 긴급한 보호조치가 필요한 것들은 ‘위기의 미래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다. 관리주체가 없어서 보전이 어렵거나 적극적인 수리·보수가 필요할 경우 미래유산 보존위원회 심의를 거쳐 선정한다. 이 경우 소유자는 적극적인 개방을 통해 시민들과 유산의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최근 문화지평이 답사하는 과정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성우이용원의 이남열 대표이발사는 건물이 노후해 수리가 시급한 실정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건물은 실제로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고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줄줄 샌다고 한다. 또 다른 서울미래유산인 공씨책방의 경우 건물주가 퇴거를 요청하면서 미래유산으로서의 공유가치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이들 모두 위기의 미래유산인 셈이지만 먼저 미래유산 보존위원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서울 남대문부터 광교까지 뻗은 남대문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은행(한국은행)을 비롯해 수많은 은행이 밀집했던 금융 1번지였다. 13회차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은 ‘경성 월스트리트를 가다’를 주제로 지난달 15일 오전 10시부터 세 시간 가까이 진행했다. 이 해설사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에 두고 해설하는 한편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서울미래유산들을 꼼꼼하게 챙겼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하늘이 맑은 데다 도심 한복판 평지를 걷는 편안한 코스라서 다른 때보다 많은 40명 가까운 인원이 답사에 참여했다. 이날 참석한 선현호 아시아나국제특허법률사무소 관리부장이 어린아이 주먹만 한 약식 30여개를 싸와 답사팀 간식으로 나눠주었다. 약식은 선씨의 부인이자 이바지 음식 전문가인 강기숙씨가 아침에 손수 만들어 보낸 것이라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옆 작은 공원에서 답사팀은 모였다. 2008년 2월 10일 설날 연휴에 방화로 완전히 불타 버린 숭례문은 2013년 5월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돼 일반에 공개됐다. 화재 전에는 도로 위에 섬처럼 서 있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공원화되면서 출입이 자유롭다. 문화재 관리의 소중함을 교훈으로 간직한 숭례문에서 이번 답사 여정이 시작됐다. 이 해설사는 “오늘 답사길은 시내 한복판이라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친밀하게 느껴지는 곳”이라며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가로세로 동서남북형 도로와는 다르게 소공로처럼 대각선 도로와 연결되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남대문에서 소월로를 따라 남산 쪽으로 조금 오르면 남산육교 고가차도가 나온다. 1961년 말 만들어진 일반교량으로 오래된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남대문시장 안에는 은호식당이란 노포가 있다. 1932년 ‘은성옥’이란 상호로 문을 연 꼬리곰탕집이다. 한국전쟁 때는 부산 피란처에서도 임시로 문을 열었다가 휴전 후 지금 자리에 건물을 짓고 재개업했다. 현재 4대째인 정용식씨가 운영하고 있고 서소문, 여의도에 직영점이 있다. 같은 지역에서 84년 동안 운영되면서 남창동 일대의 시대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장소라는 이유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남대문시장 전체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414년 정부 임대시전으로 남대문 근처에 가게를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준 게 시장의 시초다. 종로 시전과 동대문 이현과 함께 남대문 칠패는 조선 내내 주요한 시장의 기능을 했다. 1608년(선조 41년)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되면서 지방의 특산물 등을 매매하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1911년 3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내부대신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남대문시장은 정식 근대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해설사가 남대문시장 초입의 선혜청 표지석 앞에서 답사팀을 멈춰 세웠다. 17세기 초 조선시대 대동법 실시에 따라 대동미(米)·대동포(布)·대동전(錢) 출납을 관장한 관청이 있던 자리다. 쬐끔 과장해서 월스트리트는 이미 17세기 조선조부터 시작된 셈이다.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해서 바치게 한 납세제도다. 벼농사가 어려운 산간지방이나 쌀 납부가 어려운 경우에는 베·무명(대동포), 돈(대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선혜청의 의미는 대동법 실시 이후 등장한 공납 대납업자들이 산업자본가로 성장해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는 데 있다. 이렇듯 돈이 흘러가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운송활동도 증대하면서 교환경제가 발달하게 됐다. 서울역이 남대문시장 인근에 위치한 이면에는 아마도 이런 이유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남대문 2층 한옥 상가벽돌 쌓아 올린 한·양 절충식 건물 남대문 지하보도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정확한 준공 시기는 알 수 없고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남대문 4가 대로변에는 생소하게 한옥 기와를 이고 선 2층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바로 남대문로 2층 한옥상가다. 올해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662호로 등록됐다. 1910년대 만들어진 벽돌조 한양(韓洋) 절충식 건물로 전통적인 단층 목조 건축 양식에서 벗어난 벽돌조란 특징을 갖는다. 업무상 중국 출장이 잦은 김유림(40·넥스나인 대표)씨는 “중국 VIP 및 비즈니스 고객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남대문 일대 관광을 매우 좋아하는데 그동안 흔하게 알려진 것만 설명하는 데 그쳤다”며 “이번 답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을 중국인들에게 보다 풍성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 해설사는 답사팀을 북창동 먹자골목을 통과해 플라자호텔 쪽으로 이끌었다. 길 건너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때마침 수문장 교대식이 한창이다. 수문장 교대식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국립극장장을 지낸 허규씨가 병상에서 아이디어를 내 관광 콘텐츠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즉 역사에 이런 수문장 교대식은 없었다. 명동 나석주 열사 동상 나 열사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던진 곳 이 해설사는 “대한문 앞 도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가 근대적 도시 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며 “환구단을 거쳐 소공로를 뚫어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개설했고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도로 역시 구체화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도로의 확장과 직선화가 사회 구성원 간 소통의 부재라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이 해설사는 “도로가 넓어지면 교통은 편리해지지만 사람이나 차가 빠르게 이동하면서 교류가 어려워지게 된다”며 “이는 도로의 발달이 사람보다 자동차에 우선권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도로는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편리하게 걸어가면서 정보를 얻고 교류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야 사람 간 교류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환구단 일대 호텔가일제강점기 경성 대표적 상업지역 눈을 조선호텔 쪽으로 돌리자 사적 157호 환구단이 나타났다. 2007년 수유리 그린파크호텔 재개발 과정에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문이 환구단 정문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이전 복원된 사연을 갖고 있다. 환구단 일대는 지금도 각종 호텔이 빼곡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경성을 찾는 외국인이 묵는 호텔이 많았다.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한 경성의 대표적인 상업지역이었던 셈이다. 백화점과 양판점이 들어서면서 막대한 시장 자금이 돌자 자연스레 금융시설도 들어섰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는 조선은행, 신세계백화점 옆 건물인 SC제일은행에는 조선저축은행, 한국은행 소공별관 자리는 조선상업은행, 롯데 애비뉴엘에는 조선신탁주식회사가 있었다. 그 바로 옆 롯데백화점은 식산은행, 길 건너편에는 제일은행, 외환은행 자리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다. 이 밖에도 시청 을지로별관에는 제국생명, 신한은행 광교빌딩은 한성은행, 광교약국 자리에는 동일은행 등이 있었다. 우리은행 종로지점은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으로, ‘1924년 8월에 문을 열었다’는 동판이 벽에 부착돼 있다. 이렇게 금융회사가 밀집해 있었던 역사로 인해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거리다. 한국은행 앞 사거리부터 을지로입구역까지 남대문로 일대를 아우른다. 한편 소공로는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을 대각선으로 잇는 짧은 도로였지만 모던보이들이 즐겨 찾던 신식 양복점이 즐비했다. 소공로 중간쯤 있는 서울미래유산 해창양복점은 1945년 문을 열었다. 부산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창업주 이용수씨가 소공동으로 이전 운영하다가 1958년 아들 이순신씨에게 가업을 넘겼다. 1995년 재단사로 일하던 한창남씨가 경영에 참여한 이후 2004년 완전히 인수했다. 지금은 일대가 부영그룹에 의해 개발되면서 조선호텔 건너편으로 이전했다. 소공로 해창양복점 거리모던보이들 즐겨 찾던 신식 양복점 을지로입구역에서 명동으로 들어가는 하나은행 옆 골목 초입에는 나석주 열사의 동상이 있다. 이곳은 1926년 12월 나 열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이다. 답사단은 광교 위에서 이번 답사를 정리했다. 고등학생인 두 딸과 함께 참석한 이은순씨는 “오늘 답사를 하면서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 왔지만 자세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새로이 알게 됐다”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따뜻한 사람들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졌다”고 후기를 전했다. 이 해설사는 “이번 답사 지역은 조선후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150여년간의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우리들 기억 속에 내재해 있는 대표적인 곳”이라며 “일제 치하 경성 금융가, 도로 확장이 주는 사람들 사이 소통의 문제를 엮어서 진행해 봤다”고 끝맺음을 했다. 을지로입구에서 답사를 마무리한 팀 일부는 청계천을 따라 을지로4가까지 걸었다. 그곳에 있는 서울미래유산인 춘천막국수집에 들러 막국수와 돼지고기 보쌈을 나눠 먹으며 훈훈하게 답사를 정리했다.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씨줄날줄] 대관정 빼놓은 ‘대한제국의 길’/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대관정 빼놓은 ‘대한제국의 길’/서동철 논설위원

    서울시가 덕수궁을 중심으로 정동과 서울광장 일대 역사 자원을 연결하는 ‘대한제국의 길’을 만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옛 러시아공사관과 영국대사관, 정동교회, 성공회 성당, 환구단을 거치는 2.6㎞ 길이가 될 것이라고 한다. 내년은 고종 황제가 1897년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 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알린 120주년이니 뜻깊은 일이다. 앞서 서울시는 시청사와 성공회 성당, 서울광장과 환구단을 잇는 횡단보도를 차례로 개설했다. 빤히 바라보이지만 자동차 도로로 가로막혀 접근이 쉽지 않았던 것은 물론 심리적 거리마저 벌어졌던 양쪽의 거리가 크게 줄어들었다. 대한제국의 출발을 알린 환구단과 황궁으로 쓰인 덕수궁 사이도 그만큼 가까워졌다. 그런데 ‘대한제국의 길’ 계획도를 보면서 의아한 것이 있었다. 대한문과 서울광장, 환구단을 거쳐 서울시 청사 뒷길로 이어져 역사문화광장에서 마무리되는 ‘대한제국의 중심’ 코스가 그렇다. 아무리 살펴봐도 대한제국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곳이 보이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영빈관이었던 대관정(大觀亭)터가 그렇다.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 바로 앞에 마련한 황실 귀빈의 숙소였다. 1899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친동생인 하인리히 친왕(親王)이 방한했을 때도 머물렀다. 하인리히 친왕이 덕수궁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는 답례로 황태자를 대동하고 대관정을 방문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경운궁, 즉 지금의 덕수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대관정에 아름다운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에 진주한 일본군 임시파견대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쓰는 무단으로 대관정을 점령해 사령부로 썼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이듬해 을사조약을 강제할 때는 특사로 찾아온 이토 히로부미가 머물며 시시각각 경운궁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받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소공로는 대한제국이 경운궁을 중심으로 개설한 방사형 도로의 한 축이다. 현대적 도시 계획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더구나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은 일제가 1913년 헐어 버렸고 부속시설인 황궁우만 남아 있다. 환구단 자리엔 일제가 철도호텔을 지었고 지금은 조선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역사성이 있는 소공로가 ‘대한제국의 길’에서 제외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소공로를 포함해야 하는 이유는 더 있다. 대관정 유구는 부영그룹의 호텔 신축 계획에 따라 불행하게도 같은 자리이기는 하지만 건물 2층에 자리잡게 됐다. 전시관도 만든다지만 옹색한 공간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소공로가 ‘대한제국의 길’의 일부가 되어 대관정 터에 탐방객이 몰려든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다. 호텔 사업자도 대관정 유구 보존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예술로 물든 서울, 거리에서 놀자

    예술로 물든 서울, 거리에서 놀자

    서울 대표 축제인 하이서울페스티벌이 ‘서울거리예술축제’라는 새 이름으로 가을 문턱에 찾아온다. 올해는 무대를 서울 곳곳의 마을 단위로 넓혔다.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은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5일간 서울 전역에서 서울거리예술축제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서커스와 퍼레이드, 설치형 퍼포먼스 등 9개국 공연팀이 마련한 거리공연 47편을 126회 공연한다. 올해 이름을 바꿔 거리축제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한 이번 행사는 도심 광장뿐 아니라 성북구 길음뉴타운과 마포구 망원시장, 도봉구 플랫폼창동61 등 마을 곳곳으로 찾아간다. 김종석 축제 예술감독은 “28~29일에는 마을에서 먼저 공연하고 이후 도심에서 공연을 이어 갈 것”이라면서 “시민들의 일상에 축제와 예술이 찾아가는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30일 도심 공연의 개막작은 프랑스 극단 카라보스의 설치형 퍼포먼스인 ‘흐르는 불, 일렁이는 밤’이다. 청계천 400m 구간 물 위에 설치한 불 화분 1700여개가 음악에 맞춰 화려한 불꽃 정원을 연출한다. 폐막일인 다음달 2일에는 세종대로에서 온종일 놀며 퍼레이드를 하고 공연을 즐기는 ‘끝.장.대.로’ 프로그램이 열린다. 왕복11차로인 대로를 시민 1000여명이 차지해 각종 축제를 벌인다. 춤추고 노래하는 퍼레이드 ‘움직이는 대로’와 서커스를 해보는 ‘노는 대로’, 이동형 거리극 등을 벌이는 ‘그대로’ 등으로 채워진다. 이날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광화문사거리와 대한문 앞 세종대로 500m 구간의 차량 통행이 제한된다. 폐막작 ‘길&Passage’는 우리나라와 프랑스 예술단체의 공동작품으로 청계광장에서 서울광장으로 이동하며 삶과 죽음의 여정을 불꽃을 통해 형상화한다. 또, 한국과 호주 예술단체가 2년 동안 준비한 ‘시간의 변이’가 축제 기간 중 처음 공개된다. 서울 근대화 역사를 담은 서울역을 재조명한 작품이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문화재단 축제추진단(전화 02-3290-7090)이나 서울거리예술축제 홈페이지(www.festivalseoul.or.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아들아, ‘땀맘’ 먹지말고 죽으라!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아들아, ‘땀맘’ 먹지말고 죽으라!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땀맘 먹지말고 죽으라.” 죽음을 앞둔 아들의 수의(壽衣)를 마름질하는 어미의 마음을 어찌 필설(筆舌)로 나타낼 수 있으랴! 아들 응칠(應七·안중근의 아명)의 사형소식을 접한 조마리아 여사(1862~1927)는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의 구설(口說)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전했다. '땀맘'을 먹지 말고 죽는 길이 어미가 원하는 길임을. 참으로 모진 어미다. 구설 내용은 당시 만주일일신문 1910년 2월 13일자 기사로 보도되었고, 지금까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1909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 조선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저격한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는 어머니가 보낸 수의를 입고 그렇게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독립은 힘들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 히로히토(1901~1989)의 항복 선언을 통해 광복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이미 만주벌판 불던 칼바람이란 칼바람은 다 맞아오던 조선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외세에 의한 해방이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노릇이었다.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또 다른 힘겨움을 예고하였기 때문에 일본천황의 항복선언은 두 눈이 얼얼해질 정도로 기뻤지만, 시간은 매웠다. 아쉬웠다. 우리 힘으로도 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이런 가슴 시린 조국 독립의 기억을 전시한 곳이 있다. 바로 천안의 독립기념관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대한문(大漢門 ) 앞뜰 가득 울려 퍼지던 3.1 운동의 눈물소리부터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맞추고 외쳤던 안중근 의사의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대한! 만세!)’ 외침을 들을 수 있다. 또한 눈보라 폭염 헤치며 항일독립운동의 한길을 걸어온 선대들이 건국절 운운하는 이들에게 내려치는 준엄한 꾸짖음에 정신이 번쩍 들 수 있다. ● 한반도의 얼을 담다! “말로만 듣다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왔는데, 정말 좋습니다. 모든 전시물들도 훌륭하고, 특히 우리 아이들에게는 귀한 체험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독립기념관을 가족과 함께 방문한 이무일(45·한의사)씨는 연신 전시물들을 보고 감탄을 쏟아냈다. 실제로 천안 목천읍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은 세계의 어느 독립기념관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구성면이나 전시물의 수준, 규모 등 이 정도면 과히 한 국가의 독립을 기념할 만한 자격은 될 듯 하다. 독립기념관의 건립 계획 시초는 1982년이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을 계기로 하여 1982년 8월 28일 독립기념관 건립 결정이 발표되었다. 이후 각계 대표 55명으로 구성된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져 전국 각지에서 모인 성금 500억을 기반으로 건립되었다. 원래 1986년 8월 15일 개관 예정이었으나 개관 11일 전에 전기화재가 발생하여 우여곡절 끝에 다음해인 1987년 8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입구에는 민족의 비상을 표현한 '겨레의 탑'이 있어 하늘로 날아 오르는 민족의 기상을 표현하였다. 독립기념관 본관은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만들었는데 동양 최대 규모의 기와집으로 맞배지붕으로 모양을 마무리 하여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다. 본관에 들어서면 시계방향으로 제 1전시관에서 제 7전시관과 입체영상관이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전시관은 그 자체로도 규모가 있고 전시물들도 알차서 실제 모든 전시관을 다 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 제 1전시관에서 제 7전시관까지 감동으로 우선 제 1 전시관의 경우 ‘겨레의 뿌리’라는 전시관명에 걸맞게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거북선까지 모형을 위주로 실감나는 전시물을 배치하였다. 제 2 전시관은 186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주로 일제 침탈시기의 기록을 전시하였다. 이 곳에서 을사늑약 전문과 형무소 체험을 할 수 있다. 제 3 전시관은 구한말 국권회복 운동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유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제 4 전시관의 경우 일제강점기 우리 겨레 최대 독립운동인 3.1 운동을 다루고 있다. 제 5 전시관은 일제강점기 시절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제 6 전시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제 7전시관은 일제 침탈 시기 각지에서 일어났던 독립 운동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이 외에 입체 영상관에서는 민족 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여러 영상물들이 제공되어 관람객들에게 또 다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독립기념관은 다양한 특별전시들이 마련되어 있어 매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도 늘 색다른 전시공간을 제공하여 우리 겨레의 얼을 느끼게 한다. 또한 6.4m에 달하는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어 과거 선조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전시관 이외에도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야외 캠핑장으로 인기가 있다. 특히 단풍나무길이 조성되어 조선총독부부재전시공원에서 통일염원의 동산 입구까지 약 4㎞에 걸쳐 아늑한 산책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미니열차. 어린이방, 해설사 관람 안내 등 가족 단위 관람객들에게는 최적의 휴식 공간 및 문화 공간을 내어주고 있다. <독립기념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10문답입니다.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독립기념관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하는 무언가 무거운 주제의식에 버거워할 필요는 없다. 정말 볼만하고 가 볼만한 곳이다. 추천한다. 2. 이 공간을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님이라면 필수 방문 코스. 혹은 연세 지긋하신 분들은 언제나 눈물짓는 전시물 하나는 발견한다. 3. 시설환경은 어떠한가? -바로 이 지점이다. 한 마디로 훌륭하다. 특히 여름철 캠핑장은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추천 1순위!! 4. 관람시간은 많이 걸리나? -가볍게 오후 반 나절 대강 보려고 한다면 기념관을 나설 때 아쉬움이 가득할 것이다. 제 1 전시관하나가 작은 박물관 규모라고 생각하면 된다.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5. 독립기념관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하는 공간은? -전시관들만 보지 말고 주변에 잘 정리된 숲길이다. 원래 독립기념관 주변은 풍광이 수려한 곳이어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산책을 꼭 해보길 바란다. 6. 홈페이지 주소 및 도움되는 사이트 주소는? -독립기념관 http://www.i815.or.kr/kr/ 7. 입장료와 기타 관광지정보는? -고맙게도 무료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공휴일 정상개관). 주차료는 소형 2000원, 대형 3000원. 8. 주변에 가 볼만한 다른 공간도 있을까? -독립기념관만으로도 충분하다. 주변에 상록리조트와 남산 중앙시장 등이 볼 만하다. 9. 이곳에서 꼭 추천하고픈 체험은? -전시물들이 워낙 방대해서 독립기념관만큼은 꼭 해설투어를 들어야 한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예약할 수 있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기타정보 -독립기념관은 말 그대로 민족의 얼과 혼이 있는 곳이다. 이 곳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껴보는 것도 여행의 진정한 맛이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나는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덕수궁의 밤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나는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덕수궁의 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1922년 9월 <백조 3호>지에 발표된,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설움을 토해내던 홍사용 시인의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마지막 시구이다. 눈물의 왕이었다. 고종(高宗)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1919년 1월 21일 식혜를 마시고 승하했다. 조선의 제 26대 임금으로, 대한제국(1897~1910)의 초대황제로, 결국은 일본 제국의 이태왕(李太王)으로 조각 구름같은 삶을 정동(貞洞)의 하늘에서 놓았다. 이렇듯 대한제국의 절멸, 고종의 독살(毒殺)설, 3.1운동의 실패로 만들어진 공포와 비애의 감정, 그 시원(始原)이 ‘덕수궁’이다. 비가 내렸다. 엊그제 폭염을 하루 만에 추억으로 만들어 버린 비였다. 덕수궁이 앉아 있는 정동에도 낮 동안 가을 내음, 비가 내렸다. 덕수궁은 비가 어울린다. 덕수궁은 다른 궁과는 달리 눈물겹다. 목이 한껏 메어오는 공간이다. 서글픈 집이다. 누구든 이 궁에서는 주인 자리 한번 제대로 잡지 못한 이야기만 한가득 만들었다. 굳이 지금에서야 벼르고 벼른 듯 덕혜옹주의 삶을, 고종황제의 삶을, 역사적 진위를 확인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이문세가 노래하듯 이제는 그 때의 모든 것들이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서 이 모든 것들의 덕수궁의 아픔, 그 시간만으로도 늘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궐로서의 덕수궁만을 우리는 살펴보자. ● 정릉동 행궁(行宮)이 경운궁(慶運宮)으로 덕수궁은 시청 광장 옆,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사적 제124호이며 면적은 6만 3069㎡에 이르는 서울 도심 속에 위치한 궁궐이기도 하다. 덕수궁은 시민들에게는 늘상 지하철 1호선이나 2호선 시청역에서 내리면 바로 만나게 되는 생활 속의 공간이자, 가을길 은행나무 잎 가득 덮인 돌담길로 연인들을 유혹하는 옛날 궁궐이기도 하다. 대개의 사람들은 덕수궁을 20세기 역사의 언저리에 등장하는 근대의 궁궐로 인식한다. 그러나 애당초 덕수궁은 궁궐이 아니라 세조(世祖)의 큰 손자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그러다 조선의 역사 한가운데로 급작스레 등장한 시기가 임진왜란 때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의주로 피난을 갔던 선조(宣祖)가 한양으로 돌아와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을 시어소(時御所)로 명하여 거처하는 행궁으로 삼는다. 비로소 왕이 거주하는 궁궐이 되었다. 이후 1608년 선조가 승하한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고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붙여주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명명한 경운궁에서, 자기를 쫓아낸 인조가 임금이 된다. 인조는 경운궁에 거처하지 않고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경운궁은 다시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져 한적한 별궁으로 변한다. ●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에서 덕수궁으로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 경운궁으로 옮겨오게 되자 본격적으로 근대 궁궐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9월 17일에는 소공동(小公洞)에 위치한 환구단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드디어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된다. 그러나 1904년에서 화재가 일어나 궁궐의 상당 부분이 소실이 되고 급하게 선원전(璿源殿)·함녕전(咸寧殿)·보문각(普文閣)·사성당(思成堂) 등이 축조, 복원되었지만 제대로 보수되지는 못한다. 1907년 7월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純宗)이 즉위하면서 이제껏 불렀던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부르게 된다. 이는 고종의 궁호(宮號)가 '덕수'이기 때문에 지금의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순종은 즉위 후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고, 이후 1910년에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바뀌게 되자 덕수궁은 일제 총독부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1913년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벚나무 500그루가 경성일보 사장 ‘요시노’에 의해 덕수궁 곳곳에 심어졌으며, 1914년에는 대한제국의 원년을 선포했던 환구단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선다. 이후 일제는 193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덕수궁의 색깔을 지우기 위해 많은 공사들을 시행한다. 우선은 1933년에 덕수궁의 주요 전각인 함녕전, 덕홍전, 중화전, 석조전을 제외한 나머지 전각을 철거하거나 그 규모를 축소하고, 공원으로 개조하여 일반에 공개한다. 석조전은 일본근대미술품을 전시하는 ‘덕수궁미술관’으로 개관하고 급기야 1935년 5월에는 돈덕전이 있던 자리에 동물원을 신설해서 옛 궁궐로서의 품격을 완전히 격하시킨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거쳐 1955년 6월, 석조전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1963년 1월 18일에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어 다시 우리 역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본격적인 수많은 복원 공사를 거쳐 현재 석조전이 대한제국역사관 개관, 운영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다시 자리 잡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덕수궁에 대한 여행 10문답>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10문답입니다.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인가? -당연하다. 서울 4대 궁궐로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을 들 수 있는 데, 이 중 가장 근대적인 면모를 갖춘 궁궐이다. 특히 석조전, 석어당, 정관헌 등은 기존의 옛 궁궐에서 찾기 힘든 근대 역사 유적으로서 가치가 있다. 한 마디로 궁궐로서의 위엄보다는 생활공간으로서의 친근함이 묻어나는 공간이다. 2. 이 공간을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은? -이제 갓 사랑을 시작한 연인이라면 누구든지. 특히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의 경우 10월과 11월에는 누구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고즈넉함을 제공한다. 3. 덕수궁 야경이 그렇게 유명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1964년 4월 15일에 덕수궁 야간공개가 시작된 이래 야경투어의 정석이다. 특히 종로의 높은 빌딩과 네온사인들이 결코 부담스럽지 않은 밤풍경을 제공한다. 4.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면 연인들은 진짜 헤어지나? -과거 가정법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지금은 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역시 덕수궁 돌담길을 유명하게끔 만든 재미있는 이야기다. 5. 덕수궁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하는 건축물은? -물론 최근에 복원된 건축물들도 많지만, 근대 건축물로서의 원형이 보존된 곳이 많다. 덕수궁 미술관으로 불리는 석조전, 새로 지어진 석어당, 고종황제가 커피를 즐겨 드시던 정관헌, 덕혜옹주를 위해 유치원을 만들어 주었던 준명당 등이 있다. 6. 홈페이지 주소 및 도움되는 사이트 주소는? -문화재청 덕수궁 http://www.deoksugung.go.kr/ 7. 입장료와 기타 관광지정보는? -25세 이상 개인1000원, 단체 800원이다. 만 24세 이하, 65세 이상은 무료이다. 단, 미술관은 덕수궁의 관람권을 구입하고 난 뒤, 미술관에서 별도의 관람권을 구입해야 한다. 8. 주변에 가 볼만한 다른 공간도 있을까? -정동 주변은 근대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우선,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난 뒤 성공회 서울 주교좌성당, 예전 대법원과 가정법원자리였던 서울 시립 미술관,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러시아 공사관, 세실극장, 김수근의 경항신문 사옥 등등 덕수궁 돌담길은 다른 볼거리도 무궁무진한 진정한 서울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다. 9. 이곳에서 꼭 추천하고픈 체험은? -당연히 덕수궁 대한문에서의 수문장 교대 의식이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3회 이루어지는데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30분에 의식이 있다. 좀 더 자세한 사항은 02-120(다산콜센터)로 문의하면 된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기타정보 -모든 궁궐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역사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덕수궁은 더더욱 그러하다. 비운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우리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귀한 체험이 될 수 있다. 반드시 문화재해설을 듣는 것을 강추!!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조선의 중심 ‘종로 뒷골목’… 계단 없어 휠체어 답사도 OK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조선의 중심 ‘종로 뒷골목’… 계단 없어 휠체어 답사도 OK

    서울시는 2014년 근현대 서울의 추억과 발자취가 담긴 유·무형 자산을 발굴·관리하는 ‘미래유산 보전 종합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이맘때 ‘미래유산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조례’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시민들과 미래유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시는 미래유산 발굴보존 사업이 가능한 한 민간 주도로 진행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번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역시 서울신문, 문화지평과 함께 시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오는 9월 3일 장충단비, 국립극장, 장충체육관, 한양성곽, 족발 골목 등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가는 ‘장충단 성곽길’ 프로그램을 예약할 수 있다. 지난 7월 9일 오전 10시 보신각 앞에 한 무리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빨간색 손수건을 하나씩 목에 두르거나 손목에 묶고 2회차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출발을 기다리는 이들이었다. 이번 역사탐방로는 보신각부터 동대문까지다. 일직선으로 뻗은 대로가 아니라 잘 다녀 보지 않은 뒤안길이다. 보신각 길 건너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에서 인사동을 거쳐 종로 뒷골목을 헤집는 코스다. 답사로는 발밑으로는 광화문역에서 동대문역으로 달리는 지하철 5호선과 거의 겹친다. 단 한 번도 대로로 나가지 않고 동대문까지 뒤안길만 누비는 오리지널 골목 답사다. 서울 종로 뒤안길 답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뒷골목에 숨어 있는 수많은 근현대 역사 이야기와 미래유산을 만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답사로 전체가 평지로 이뤄져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도 무리 없이 동행할 수 있는 ‘무장애 답사로’란 점이다. 이 답사로는 이날 해설을 맡은 박광규(55)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개척한 코스다. 박 해설사는 “큰길에는 큰 역사가 존재하고 뒷골목에는 소소한 것만 있을 것이란 선입견을 날려 버리는 대단히 의미 있는 뒤안길”이라며 “특히 계단이 단 한 층도 없는 완벽한 무장애 코스로 장애인과 함께 역사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답사길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답사팀 안전은 손안나 해설사가 맡았다. 이날 답사에도 어김없이 이경윤 나눔마켓 대표가 가장 먼저 나왔다. 장애인 콜택시를 타려고 일찍 서둘러야 해서 두 시간 전에 도착했다. 어릴 적 소달구지에 깔린 사고 때문에 전신마비로 이동장애를 가진 이 대표는 노원구 하계동 미성아파트 지하상가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수많은 답사 활동을 했을 것이다. 이날은 무장애 코스라서 그런지 그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 이 대표는 “이 코스를 두 번째 가 볼 기회를 얻어서 행복하다”며 “길 끝 창신동 골목길 ‘장가네 보리밥집’에서 쓱쓱 비벼 먹는 비빔밥이 일품이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눔마켓은 책을 기증받아 온·오프라인을 통해 염가로 파는 책방”이라며 “기증은 책 종류와 수량에 관계없이 어떤 책이든 가능하다”고 깨알 같은 광고를 빼놓지 않았다. 박 해설사의 해설이 시작되자 모두 시선을 모으고 귀를 쫑긋 세웠다. “보신각 안 잔디밭에는 서울미래유산인 ‘지하철 수준점’이 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을 건설하려고 기준을 잡은 것인데요. 앞으로 놓일 모든 지하철의 높이를 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박 해설사가 손으로 지하철 수준점을 가리켰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사방 25㎝ 정사각형 표지석 한가운데 직경 7㎝, 길이 12㎝ 놋쇠 못이 박힌 수준점은 높이가 20㎝밖에 되지 않아 한여름에는 잔디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보신각이 보물 제2호로 지정된 문화재인 이유로 무작정 들어가 가까이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박 해설사가 이해를 돕고자 아이패드를 꺼내 근접해서 찍은 사진을 보여 주자 그때야 시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답사에 나온 배현철(40·두루EDS 대표)씨는 “보신각 앞에서 숱하게 약속도 하고 그 앞을 지나쳤지만, 이 안에 지하철 수준점이란 게 설치돼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고 했다. 지하철 수준점은 1970년 5월 도심 교통난을 해소할 대책을 마련하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당시 양택식 서울시장이 지하철을 도입하면서 같은 해 10월 설정한 일종의 기준이다. 우리나라 해발 기준점(수준원점)은 어디일까. 인천 앞바다를 기준으로, 수준원점 시설물은 인하대 교정 안에 있다. 박 해설사의 해설을 토씨 하나 놓칠세라 꼼꼼하게 받아 적는 답사객이 있다. 1회차 때 대한문 앞에서 출발하는 답사단 무리를 보고 2회차 때 무작정(?) 참가한 김청길(74)씨다. 김씨는 파워블로거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문화와 답사 관련 포스트를 2200여개나 올렸단다. 김씨는 “일전에 대한문 앞에 갔다가 역사 탐방단이 출발하는 걸 보고 다음번 참석을 다짐했다”면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앞으로 계속 나올 예정”이라고 예고했다. ‘무임 승차’를 공언한 것이다. 보신각에서 길을 건너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 쪽으로 인사동 랜드마크 중 하나인 ‘동헌필방’이 보인다. 창업자 이동하씨가 1966년부터 반세기 동안 한자리에서 운영하고 있다. 원래 남계양행이라는 양판점이었다. 건물 자체가 1930년대 지어진 등록문화재감이다. 그런데 동헌필방만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동헌필방 앞에는 1926년 지어진 건물이 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일제강점기 민간 3대 신문 중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의 사옥이었다. 박 해설사는 “동아일보와 함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신문”으로 “여운형이 사장이었는데 정간을 당한 후 그 다음해 폐간됐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는 자유당 중앙당사, 1970년부터는 농협중앙회 사옥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NH농협 종로지점이다. 건립 당시 모습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돼 건축사적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 서울 근대건축물과 미래유산이다. 이들 건물은 자칫 옛 도시계획에 의해 멸실될 위기에 있었으나 상위법을 바꿔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래서 종묘에서부터 직선이던 골목이 이들 건물을 피해 종로 쪽으로 살짝 굽었다. 여기서 시민 한 분이 추가로 무임 승차성 답사에 나섰다. 종로 뒷골목은 서울미래유산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이미 지나온 열차집, 동헌필방, NH농협 종로지점 이외도 이문설농탕, 구하산방, 서울중심점, 허리우드극장, 낙원악기상가, 낙원떡집, 유진식당, 피맛골 등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건물과 랜드마크가 즐비하다. 마치 ‘미래유산 종합선물세트’ 같다. 부모와 참가한 백은솔(9)·은채(7) 자매는 이문설농탕 벽면에 붙어 있는 서울미래유산 동판 앞에서 현수막을 들고 인증 사진을 찍었다. 자매는 “답사가 약간 힘들지만 견딜 만해요”라며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이라 어린이들에게는 다소 버거울 수 있었는데, 이들 자매는 양볼이 발갛게 달아 올랐지만, 군소리 한마디 없이 동대문까지 완주했다. 이인선(52)씨는 “과거의 길을 오늘 걸으며 미래를 생각해 본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체험”이라고 말했다. 앞서 가던 박 해설사가 태화빌딩 앞에 멈춰 섰다.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인 명월관 별관 태화관 자리다. 태화관 전엔 매국노 이완용이 살았고, 매국 친일파들이 을사늑약, 경술국치 등을 모의했던 장소다. 1919년에는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자리다. 그 직후 총감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수를 한 탓에 3·1 운동은 구심점을 잃고 실패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태화관 건물은 매국과 독립, 진정성과 모호성이 뒤섞인 역사의 아이러니를 품은 장소다. 태화빌딩 옆 건물인 하나로빌딩에도 깜짝 놀랄 만한 미래유산이 숨어 있었다. ‘서울 중심점 표지석’이다. 1층 로비 한쪽에 사방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채 보존돼 있는 표지석에는 ‘1층 로비에 있는 네모꼴 화강석은 서울의 한복판 중심지점을 표시한 지표석으로 대한제국 건양원년(1896)에 세워진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윤정배(48)씨는 “지금껏 서울 중심점이 남산에만 있는 줄만 알았는데 종로에, 그것도 빌딩 1층 로비라니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답사자 중에 누군가 “지난 1회차 답사 때 들렀던 도로원표가 서울 중심인 줄 알았다”며 거들었다. 박 해설사는 “이 중심석은 조선시대 서울이 확장되기 전 당시 기준점이고, 지금 사용하는 중심점은 2008년 최첨단 GPS 측량을 해 지정한 곳으로 남산정상 N타워 인근에 있다”고 설명했다. 답사단은 어느덧 익선동 한옥마을로 접어들었다. 100년 전인 1920년 당시만 해도 생소했을 법한, 도시형 한옥집단지구로 형성된 한옥촌이다. 지금은 카페와 술집, 레스토랑 등이 들어선 서울의 명소다. 익선동 골목 끝은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고, 고기 누린내로 진동하는 갈매기살 구이집이 즐비하다. 고깃집 담벼락에는 ‘조루증을 치료하고 회춘시켜 준다’는 한약방 광고지가 세월의 때를 묻힌 채 붙어 있다. 익선동 골목에는 과거가 현재와 공존하고 있다. 종묘 앞을 지나면서 남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멀리 세운상가가 보인다. 1960년대 획기적 도시개발의 표본이자 근대 건축 1세대 김수근의 작품이다.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가서 실패한 도시계획의 표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섭씨 33도 한증막 같은 날씨 속에 강행군한 답사팀은 어느덧 서울미래유산인 한국기독교회관을 지나 동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국기독교회관은 1969년 준공돼 1974년 민청학련사건 인사 석방 운동 전개, 1978년 동일방직 노조원 생존권 보장 농성, 1980년 5월 서강대생 김의기 투신 자살 등 민주화 운동 성지로 손꼽히고 있다. 종로꽃시장에서 길이 좁고 복잡해 답사팀은 두 패로 갈렸지만 다시 만났다. 박 해설사는 한양도성박물관 앞에서 동대문을 바라보면서 폭염 속 2시간 30분 동안의 답사를 폭염만큼 뜨거운 박수로 마무리했다. “점심은 장가네 보리밥집 가요.”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김중업 건축혼·민주화 꽃핀 세실… 근현대 미래유산 보물창고 ‘정동’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김중업 건축혼·민주화 꽃핀 세실… 근현대 미래유산 보물창고 ‘정동’

    서울신문이 지난달 2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전 서울시, 답사 단체인 ‘문화지평’ 등과 함께하는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시작했다. 근대 외교 중심가인 정동 일대 답사를 시작으로 올해 말 마포구 염리동 소금길까지 총 20회에 걸쳐 진행된다. 미래유산이란 현재는 문화재가 아니지만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을 말한다. 서울미래유산탐방 홈페이지(http://seouldaily.webmaker21.kr)에서 오는 27일 서대문 영천시장과 서소문역사공원, 서울역고가 등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가는 ‘만초전과 그 주변’ 프로그램을 예약할 수 있다. “자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이필용(47)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본격적인 답사 시작을 알렸다. 지난달 2일 오전 10시 서울시청 인근 대한문 앞에서 모인 서울미래유산 탐방 답사단 30여명은 이 해설사를 따라 발걸음을 세실극장으로 옮겼다. 장마 기간이었는데도 이날만 반짝 날씨가 화창했다. 이날 전상봉(30) 서울미래유산해설사는 안전을 책임졌다. 김중업 역작 ‘세실극장’ 답사단이 처음 마주한 세실극장(중구 세종대로19길 16)은 1976년에 건립된 소극장으로 대학로가 만들어지기 전 1970~80년대 연극의 메카였다. 건축가 김중업의 1970년대 작품 가운데 하나로 보존 가치가 높아서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세실극장을 설계한 김중업은 김수근과 함께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로 삼일빌딩, 프랑스대사관, 드라마센터 등을 남겼다. 세실이란 이름은 일제강점기 대한성공회 4대 주교였던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에서 따왔다. 세실극장의 지하에 있는 세실 레스토랑은 1980년대 민주화의 성지였다. 이 해설사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인사들이 주로 이곳에서 만나 운동 방향을 논의했다”며 “한국 현대사를 흔든 각종 시국 선언과 기자회견 장소로 애용됐다”고 설명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민주 인사들이 덜 불안해하면서 세실 레스토랑을 애용한 이유는 이곳이 성공회성당과 연결된 덕분이다. 명동성당과 같이 해외에 본부를 둔 종교 시설은 군사정권이 발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세실극장은 당시 320석 규모로 개관했다. 세실극장에서 영국대사관으로 오르다 우측으로 접어들면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후문이 나온다. 매주 토요일이면 성당 안내 자원봉사를 하는 김선동(사무엘)씨가 반갑게 일행을 맞았다. 김씨는 “1922년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지만, 자금 사정 등으로 1926년 미완성인 채 70여년을 사용하다가 1993년 영국도서관에서 도면이 발견되면서 1996년 현재 모습으로 완공했다”며 “서울에서 보기 드문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면서도 한국적 정서의 처마장식, 기와지붕 등을 적용한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소개했다. 처마 품은 성공회 대성당 대성당은 1978년 12월 18일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돼 보존 가치를 인정받았다. 대성당 뒤편에 있는 전통적인 한옥 양식 건물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 해설사는 “이 건물은 양이재(養怡齋)라고 하는데 과거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 내에 건립돼 왕족과 귀족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1920년 성공회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사들여 지금 자리로 옮겼다. 양이재 앞에는 표지석 하나가 단단하게 박혀 있다. ‘6월 민주항쟁 진원지’를 나타내는 이 표지석에는 ‘유월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라고 적혀 있다. 한혜경 가톨릭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이날 “종교란 개인의 구원을 넘어 전 인류의 안녕과 해방을 모토로 해야 한다는 평소 신념에서 바라봤을 때 대성당이 민주화운동의 진원지가 됐다는 사실이 매우 의미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대성당을 가로막고 섰던 국세청 남대문별관 건물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건물은 1937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체신청(우체국) 청사로 지었다.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였던 귀비 엄씨 사당(덕안궁터)이 있던 자리다. 서울시는 담벼락 한쪽만 남기고 철거한 옥인아파트처럼 기둥이나 벽면 일부만 기념물로 남긴 채 없애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대성당이 시청 앞 큰길에서도 훤히 보이게 된다. ‘ 근대사 굴곡’ 서울시의회 대성당 정문으로 빠져나온 답사단은 서울시의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근대사의 굴곡을 담은 경성부(京城府·일제시대 서울의 이름) 부립 부민관이던 곳이다. 일제가 다목적 회관으로 지은 건물로 일제 말기에는 전쟁을 독려하는 정치 집회 장소로 이용기도 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애국청년 조만기, 류만수, 강윤국 등이 친일파 박준금 일당 연설 도중 폭파한 자리’라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친일과 반일의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곳이다. 광복 후에는 미군이 사령부로 사용했고 한국전쟁 중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에는 입법의 중심 국회의사당으로 변모했다. 한때는 미래유산인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는 시의회 의사당과 사무처, 기자실 등이 들어서 있다. 답사단은 도로원표에 다다랐다. 영문으로는 ‘The zero milestone’다. ‘0’에서부터 뭔가를 시작한다는 의미다. 도로원표란 전국 시·군 간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서울시 도로원표는 1914년 설치 당시 광화문 광장 중앙에 위치했다. 그러던 것이 1937년 교보빌딩 앞 칭경기념비전(고종 어극 40년 기념비) 안으로 옮겨 왔다. 도로원표는 2013년 지정된 미래유산이다. 구세군 중앙회관을 지나면 왼쪽으로 작은 골목이 하나 있다. 이곳을 조금 오르면 간판도 없는 한옥 두부 요리집이 있고 그 옆으로 굳게 닫힌 철문이 보인다. 다름 아닌 영국대사관으로 연결되는 덕수궁 돌담길 구간이다. 영국대사관 부지와 맞닿아 1884년부터 통행이 금지됐던 곳이다. 이 길을 복원하기 위해 시의회는 최근 적지 않은 예산안까지 통과시켰다. 이 철문이 열리면 대성당 후문, 세실극장 앞과 연결된다. 영국대사관이 길을 열어 줄지는 아직 미지수다. 영국대사관 건물은 1890년에 지어진 것으로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하비브하우스라는 별칭을 가진 미 대사관저를 지나 미래유산인 정동극장을 거쳐 답사단은 중명전에 이르렀다. 덕수궁 대화재로 인해 고종 황제가 머물렀던 중명전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을사늑약이 이뤄졌다. 중명전 뒤쪽 언덕 위에는 고종이 세자와 함께 건양 1년(1896년) 2월 11일 파천한 러시아공사관이 보인다. 이른바 ‘아관파천’한 고종은 1년 뒤인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고종이 머물던 중명전 고종과 정동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 많은 생활을 했다. 그래서 시의회는 고종의 흔적을 되살려 이번 답사로와 거의 일치하는 2.5㎞ 코스의 ‘대한제국의 길’을 조성할 계획이다. 정동 일대에는 서울미래유산이 대거 몰려 있는 문화 역사의 보고(寶庫)이자 근대 열강들의 외교 각축장이었다. 러시아공사관 맞은편에 있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 한국관구는 과거 외교관 구락부로 사용된 기록이 있다. 구한말 이 지역에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었다. 독일공사관은 서울시청 서소문 별관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고, 프랑스공사관은 창덕여중 운동장 한쪽에 비석으로 덩그러니 남아 있다. 정동길을 따라 강북삼성병원 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왼편으로 미래유산인 중화기독교 한성교회를 만날 수 있다. 1958년 세워진 이 교회는 국내 화교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열강 외교 각축장 ‘정동’ 답사단은 마지막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을 들렀다. 이 해설사는 “이곳은 일제시대엔 경성재판소, 해방 후에는 대법원 청사로 쓰이다가 대법 청사가 서초동으로 이전한 후 2002년부터 시민을 위한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설명을 마지막으로 첫 서울미래유산 탐방 답사를 마무리했다. “늘 서울 하면 강남과 강북으로 대변되는 풍요와 빈곤, 성공과 실패, 경쟁과 낙오의 이미지로만 각인돼 왔을 뿐 정작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역사성이나 문화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무심하거나 간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사는 이 도시를 제대로 알고 이해함으로써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재단되는 도시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토대 위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어우러지는 살아 숨쉬는 도시로서의 인식을 공유하게 된다면 장차 서울에 대한 철학적 접근도 가능해질 것이다. 앞으로 진행될 서울의 미래유산 탐방 프로젝트가 더더욱 기대가 되는 이유다.” 한혜경 교수의 이런 답사 후기는 남은 19회차를 제대로 잘 달려가라는 채찍 같았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대안문 나서는 고종 어가 행렬 사진 공개

    대안문 나서는 고종 어가 행렬 사진 공개

    고종의 어가 행렬이 경운궁 대안문(지금의 대한문)을 나서는 사진이 1일 공개됐다. 이 사진은 미국인 새디가 촬영한 것으로 1904년 선교사 아서 웰번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아서 웰번의 손녀인 프리실라 웰번 에비 여사는 이 사진을 소장하다가 최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을 약속했다. 사진의 정확한 촬영 날짜는 알 수 없으나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후 환구단으로 제를 지내기 위해 나서는 모습으로 추정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제공
  • 언덕 밑 정동길엔 역사가 숨어 있었네

    언덕 밑 정동길엔 역사가 숨어 있었네

    경운궁 선원전 터 등 근현대 자취 찾아 시민 30여명·해설자 등 3시간 열기 본지·市 주관… 12월까지 20회 진행 “경운궁(덕수궁) 선원전 터는 고종 사후 강제로 민간에 매각돼 그동안 절 포교원, 어학원, 학교로 흔적을 잃고 전전했습니다. 지금은 미국 대사관저 부지로 남아 문화재청이 복원 공사를 추진 중인데, 지표조사로도 옛 흔적을 찾기 어려운 지경이니 안타깝기 짝이 없지요” 장마 속 햇볕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 지난 2일 서울 정동 덕수초등학교 맞은편, 30여명의 시민이 이필용 문화재 해설사의 설명에 잠시 숙연해졌다. 자물쇠 채워진 철문 너머, 잡초만 무성한 서울 한복판 공터를 보고 있자니 열강 앞에 가냘펐던 근대 개화기 조선의 신세가 140여년의 세월을 뚫고 새삼 다가왔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함께 설명을 듣던 이현정(43)씨는 “서울 토박이로 자랐고, 매일 버스를 타고 스쳐 지나다녔지만, 이런 곳에 숨어 있는 역사가 있는 줄 미처 몰랐다”고 말했다. 길상사, 문익환 가옥, 삼청각, 서울광장 등 역사와 이야기를 담은 근현대 서울미래유산이 372곳이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서울신문과 서울시가 마련한 ‘서울 미래유산 역사탐방’ 첫날 행사는 궂은 날씨에도 근현대 서울의 자취를 더듬으려는 시민들로 열기가 후끈했다. 이날 코스는 근대 외교의 중심가였던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작해 성공회성당, 영국대사관, 경운궁 골목, 미 대사관저, 경운궁 중명전으로 이어진 답사는 러시아공사관, 정동극장, 한성교회를 돌아 배재학당, 서울시립미술관까지 이어졌다. 서울 중구 정동은 일제와 서구 열강의 다툼 속에 주권을 잃고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외교사의 비운이 담긴 뒤안길이었다. 정부 차원의 사적지 복원이 뒤늦게 시도되고 있지만, 미국·영국·러시아 대사관저에 가로막힌 신세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해설사는 “옛 모습만 똑같이 재현하는 건 ‘미니어처 복원’에 지나지 않는다”며 “당시 유물과 시대상·정신이 오롯이 반영돼야 현재를 사는 시민들의 삶과 연결되는 진정한 복원”이라고 강조했다. 3시간 탐방을 마친 뒤 직장인 전수정(여·35)씨는 “그동안 서울의 건축행정은 부수고 새로 짓는 게 전부처럼 느꼈다”면서 “덕수궁 돌담, 창의여중 안 도성 흔적처럼 우리 곁의 역사를 우리가 나서서 보존해야 할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정동 일대에서 학교에 다녔다는 50대 부부는 “학창 시절을 떠올리는 시간여행도 되고, 잊혔던 역사도 되새겨보고 한마디로 골목의 발견”이라며 흡족해했다. 미래유산 탐방은 오는 12월 3일 ‘염리동 소금길’까지 20회 진행된다. 신청은 서울미래유산탐방 홈페이지(http://seouldaily.webmaker21.kr)로 하면 된다. 글 사진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서울 문화유산, 우리와 함께하면 꿀잼”

    “서울 문화유산, 우리와 함께하면 꿀잼”

    29일 서울신청사 지하 1층 시민청에 멋진 모자를 쓴 사람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정동극장과 길상사, 문익환 가옥, 삼청각, 서울광장 등의 서울의 역사와 문화, 그곳의 숨은 이야기를 서로 자연스레 주고받는다. 우리의 근대사와 지역 이야기, 건물과 각종 거리가 가진 역사적 의미 등을 꿴 베테랑들로, 다음달 2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전에 ‘서울 미래유산투어’를 책임지는 해설사들이다. 이필용(47·서울KYC 도성 길라잡이) 해설사는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이야기하고 도시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미래유산은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라면서 “투어 참가자들이 서울을 더 공감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박광규(55·궁궐 길라잡이) 해설사는 “미래문화유산 지정은 훼손·멸실 가능성이 큰 서울시 문화유산을 보전하고자 도입됐다”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꼭 지켜줘야 할 미래유산을 해설하게 되어 매우 영광이고 기쁘다”고 소감을 말했다. 전상봉(51·서울시민연대 대표) 해설사는 “서울의 미래유산을 찾아 떠난 탐방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해 보는 긴 여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안나(47·문화유산교육전문가) 해설사는 “문화적 보전 가치가 있는 미래유산이 서울의 자산으로 남아 있는 한 해설사들은 늘 존재한다”고 말했다. 새달 7일 오전 10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출발하는 ‘서울 미래유산 투어’는 매주 토요일 서울미래유산과 근현대 유적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이다. 참가비는 무료이고 신청은 서울미래유산 사이트(http://seouldaily.webmaker21.kr)에서 하면 된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8년 만에 재개된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

    8년 만에 재개된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

    2008년 화재로 중단된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 행사가 8년 만에 재개된 가운데 덕수궁 대한문에서 근무하는 수문군과 교대하는 의식이 23일 서울 숭례문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서울에 숨은 미래유산 거닐어요

    서울에 숨은 미래유산 거닐어요

    30명씩 무료로… 새달 2일부터 시작 ‘서울 미래유산이 뭐~예요.’ 무심코 서울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만나는 ‘정동극장’. ‘뭐 잘 지었네, 전통 공연을 하는 곳이네’하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정동극장에는 우리 공연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원래 ‘원각사’를 복원한다는 생각으로 새로 지은 극장이다. 원각사는 1909년 궁내부 대신 이용익이 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에 지은 로마식 원형극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국립극장이다. 1914년 화재로 없어질 때까지 서울시민이 울고 웃던 곳이다. 정동극장뿐 아니다. 길상사, 문익환 가옥, 삼청각, 서울광장 등 서울에는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서울미래유산 370여곳이 있다. 다음 달 2일부터 서울시내 미래유산 탐험에 서울시와 서울신문, 문화운동단체인 문화지평이 나선다. 서울시민을 위해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진행하는 ‘서울 미래유산 역사탐방’의 비용은 무료고 추억은 서비스다.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가정이나 서울의 역사를 알고 싶은 학생, 시간은 있는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연인에게 ‘딱’이다. 고홍석 서울시 문화본부장은 “미래유산들은 서울 곳곳에 숨어 있지만, 그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면서 “서울 곳곳에 녹아있는 역사와 이야기를 찾아보는 새로운 탐방 프로그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는 7월 2일 1회차에선 대한문을 시작으로 서울시의회, 성공회성당, 영국대사관, 정동극장, 한성교회 등 근대 외교의 중심인 정동 일대를 둘러본다. 2회차인 다음달 9일 종로 뒤안길 코스에서는 보신각에서 출발해 구하산방, 하나로, 낙원떡집, 허리우드극장, 낙원악기상가, 피맛골 등을 둘러보며 이 건물을 직접 만날 수 있다. 오는 12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출발해 3시간정도 진행될 탐방에는 베테랑 해설사의 재미나고 유익한 설명도 함께 한다. 매회 30명씩 선착순이며 비용은 무료다. 신청은 서울미래유산탐방 홈페이지(http://seouldaily.webmaker21.kr)에서 하면 된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경우 일정이 취소될 수 있다.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는 “우리가 스치듯 지나간 서울의 미래유산에 숨긴 역사적 의미와 사연을 알아 가는 좋은 시간이 될 것”이라면서 “선착순 30명이기 때문에 빨리 신청하는 것이 좋다”고 귀띔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현장 블로그] 올해도 어울리지 못한 ‘무지개 깃발’

    성소수자를 의미하는 여섯 색깔 무지개 깃발이 지난 11일 서울시청 일대를 뒤덮었습니다.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 성소수자들의 축제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것입니다. 경찰은 약 1만 1000명이 참가한 것으로 봤습니다. 2000년 50명의 참가자가 대학로에 모였던 것이 퀴어문화축제의 시초였던 것을 감안하면 16년 만에 참가자 수가 220배 늘었습니다.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성소수자들의 꿈이 현실에 가까워졌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당당하게 내보이겠다는 의미에서 다소 노출이 있는 의상도 여전히 등장했지만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대의 목소리도 여전했습니다. 이날 퀴어축제가 열린 서울광장 건너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개신교 신자와 보수단체 회원 등 1만 2000명(경찰 추산)이 ‘동성애 퀴어축제 반대 국민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다행히 물리적 충돌은 없었지만 양측의 적대감은 분명 높았습니다. 경찰도 긴장한 모습으로 양측을 가로지르는 세종대로 곳곳에 배치돼 경계를 했습니다. 이날 만난 성소수자들은 무지개 깃발의 의미를 알아 달라고 했습니다. 각각의 색을 흐리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무지개로서 어우러지듯 다름을 인정받으면서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는 바람이 투영됐다고 합니다. 무지개 깃발은 197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성애자 퍼레이드에서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당시 화가였던 길버트 베이커가 동성애자들의 의뢰를 받아 8색 깃발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대량 생산을 시작했는데 분홍색 염료가 없어 7색 무지개가 됐습니다. 1979년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가 저격당한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하비 밀크 추모 퍼레이드에서 양쪽 편으로 세 가지 색씩 나눠 달기로 결정하면서 보라색과 비슷한 남색도 제외됐습니다. 무지개 깃발을 보면서 최근 불거진 여성 혐오, 정신질환자 혐오 등 사회의 많은 혐오증이 떠올랐습니다. 사회적 담론이 좀 더 진행돼야겠지만 ‘다름’이 차별이 아닌 어울림의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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