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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업대란 대학생들 눈물겨운 ‘구직전쟁’

    ◎전공 포기하고 생산직 마다안해/“입사가 우선” 고졸자 일자리도 감수 사상 유례없는 취업난 시대를 맞아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생들과 취업재수생들은 한없이 ‘눈높이’를 낮추고 있다. 전공을 살리겠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고 생산직도 마다하지 않는다.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대졸 학력을 고졸로 속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해 S여대 수학과를 졸업한 朴모씨(25)는 재학 중 1년간 영국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력도 있으나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수없이 이력서를 들고 뛰어다닌 끝에 지난 7월 서울 강남의 조그만 무역회사 경리자리를 구했다.이전에는 고졸 학력자가 하던 일이다. H대학 취업정보실에서 만난 전기과 4학년 洪모씨(26)는 전자부품 및 산업용 전원 안전장치를 생산하는 중소기업 J전자에 입사하려고 원서를 쓰고 있었다.‘전문연구직’과 ‘생산기술직’을 놓고 고민하다 결국 생산기술직을 선택했다. 취업대란은 대학가의 총학생회장 선거분위기도 바꿔놓았다.후보마다 ‘취업보장’을 공약 1호로 내세우고 있다. 오는 24일 투표를 하는 성균관대 민족해방(NL)계의 한 후보는 “우리 학교의 대주주인 삼성그룹에 신입사원 채용 때 우리 학교 출신들을 50% 이상 뽑도록 요구하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 임대주택사업 새 재테크 ‘각광’/부동산

    ◎시세차익·고정 임대수입 장점/취득세 감면 등 각종 세제혜택/5가구 이상 되면 사업자 등록 금리가 10% 전후로 낮아지고 있고 정부의 부동산정책이 신규 미분양아파트 시장에 집중되고 있어 임대주택사업이 새로운 재테크 방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임대주택 사업은 향후 부동산 시장이 안정을 되찾았을 경우 어느정도 시세차익을 노릴 수 있을 뿐아니라 고정적인 임대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도 임대주택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각종 세제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임대주택 취득시 납부해야 하는 취득세 등록세의 경우 전용면적 18평 이하의 주택은 100% 면제되며 전용면적 25.7평 이하의 신규주택일 경우에는 25% 감면된다. 보유시 과세되는 재산세는 전용면적 18평 이하는 50% 감면되며,전용면적 12평 이하는 100% 감면되며 이는 동일 단지내에서 5가구 임대주택사업시에 적용된다. 종합토지세의 경우에는 전용면적 18평 이하는 0.003% 세율을 적용하며 이역시 동일단지내 5가구 임대주택사업시에 해당된다. 임대소득시 전세보증금은 비과세지만 월세는 과세이며,월세 임대소득은 표준소득률 38%를 적용한다. 양도시 납부해야 하는 양도소득세는 신규주택을 5년임대 후 양도할 때 100%,기존주택을 5년 임대후 양도할 때 50% 각각 감면된다. 기존주택을 10년 임대 후 양도할 경우에는 100% 감면된다. 이러한 세금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거주지 관할 세무서에 임대사업자로 등록하고,임대개시한 날로부터 3개월이내에 주택임대신고서를 제출하면 된다. 공식적으로 임대주택사업을 하려면 임대주택자로 등록해야 하는데 본인 명의로 된 등기부등본이나 매매계약서(분양계약서)등을 합해 5가구 이상이 되면 임대사업자가 될 수 있다. 공동으로 주택을 매입해 임대주택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등록요건이 까다롭다. 공동명의로 된 매매계약서를 작성해야 하고 등기부등본상에도 공동 소유주로 명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임대주택사업의 목적은 최대 수익을 확보하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경기가 침체된 시기에 입대주택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초기투자 비용을 줄여 수익을 최대한확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초기투자 비용을 줄이면 임대료를 낮출 수 있어 다른 임대주택과 비교해 가격면에서 메리트를 확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여유자금이 있거나 앞으로 2∼3년 후 임대사업을 할 투자자라면 가격이 저렴하고 입지가 좋은 신규,미분양 아파트를 분양받아 임대주택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임대주택사업은 주택의 입지가 매우 중요한데 요즘과 같이 경제가 침체인 시기엔 지하철 역세권이나 교통이 편리해야 한다. 교통비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지역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업체나 회사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인근이나 대학가 주변이 사업지로 제격일 것이다. ◎전원주택/장기투자 원하면 지금이 매입 적기/김포·용인 등 도심인근 지역이 유망/가격싸고 도로와 인접한 곳 골라야 IMF이후 전원주택지의 인기는 급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전원주택에 투자하려면 지금이 매입하는 적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원주택지로 유망한 지역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도심에서 가까운 지역을 꼽을 수 있다. 경기도 김포,용인,양평,강화,구리,안성 등이며 이들지역은 서울외곽 순환도로가 개통되는 등 2∼3년 후엔 땅값 상승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IMF이후 땅값이 하락하고 정부에서도 토지거래에 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등 투자메리트가 있기 때문이다. 전원주택지 구입 방법에는 단지형 전원주택지 구입,농가주택개발,준농림지를 구입하는 방법 등이 있다. 단지형 전원주택 구입은 완공된 주택을 매입하거나 필지를 분할한 땅을 매입해 직접 주택을 건축하는 방법이다. 농가주택은 대부분 지목이 대지로 되어 있는 작은 텃밭을 끼고 있어 약간의 개·보수로 전원주택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준농림지 구입은 대지에 비해 땅값이 30∼40%에 불과하며 지목변경이 가능해 전원주택으로 개발하는 방법이다. 전원주택은 일반주택과는 달리 향후 발전성을 보고 투자하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요망된다. 반드시 현장을 방문해야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 不如一見)이다. 자신이 직접 지역을 방문하고 자신이 구입 할 전원주택지가 어디인지 직접 확인해 보아야만 한다. 교통여건이 좋은 곳을 선택한다. 외진 곳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도로와 인접한 곳이 좋으며 각종 근린시설은 자동차로 10분∼20분이내의 거리에 있어야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다. 가격이 저렴한 전원주택지를 구하도록 한다. 아울러 주택의 위치나 방향 등도 잘 살펴 보아야 한다. 만일 자신이 매입하고자 하는 전원주택지가 공동지분일 경우에는 계약된 면적이 분할됐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계약하기 전 토지관련서류를 확인하는 것도 잊어선 안된다. 향후 전원생활을 희망하는 실수요자들에게는 지금부터 고르면 값싸고 살기 좋은 전원주택을 장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상가/IMF이후 투자메리트 크게 감소/황금상권도 매물 홍수… 권리금 추락/서두르지 말고 수익률 꼼꼼히 따져야 상가의 경우는 우리 경제상황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수익성 부동산의 대표주자인 상가는 지금까지 경기침체시기에도 가장 각광받는 부동산 종목이었다. 하지만 IMF이후 경기침체가 예상외로 심각하게 이어지자 상가의 투자 메리트가 현격히 감소한 것이다. 대학가나 종로,명동 등지의 황금상권에서 조차 많게는 50% 정도 상가들이 시장에 나와 있으며,최근에는 권리금 없는 상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최근들어 심화된 내수경기의 침체로 구매력은 바닥을 치고 있어 상가들은 수익성은 커녕 현상유지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며 이러한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요즘과 같이 경제가 불안한 상황에선 내수경기가 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으며,가계에서도 줄어든 수입에 맞게 지출을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형 할인점의 등장으로 일반 상가들은 가격경쟁에서 현격히 처지면서 존립이 위태로운 지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한 상가 투자는 수익성을 얼마만큼 확보할 수 있느냐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투자비 대비 수익성이 높게 나온다는 확실한 결론을 얻었을 때만 투자하는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야 하는데,총투자비 대비 매달 1%의 수익성은 확보되어야 투자처로서 매리트를 갖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수익성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경우라면 파격적인 가격할인이 된 상가를 얻어야만 초기투자비용을 줄일 수 있고 수익성 확보도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울러 주변지역의 상권은 얼마나 형성되어 있는지 유동인구는 얼마나 되고 고정인구는 얼마나 되는지,고객확보는 가능한지 등도 면밀히 살펴야 한다. 상가를 임대하거나 매입해 직접 운영할 경우에는 아무리 많은 수익을 올렸던 상가라 해도 주인이 바뀌고 나면 수익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자신이 얼마나 잘 운영할 수 있는지,어떤 업종을 선택할 것인지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요즘 그나마 수익성을 확보 할 수 있는 상가라면 연건평 1만평 이상의 대형 빌딩의 독점 상가나 1,000가구 이상의 아파트단지내 독점 상가,역세권 주변에 상권이 형성된 상가 등을 들 수 있으며 상가가 밀집되어 있는 빌딩상가의 경우 30∼40% 공실을 보이는 곳이라면 생각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 보아야 할 것이다. 상가에 투자하려는 투자자들은 당장 결론을 얻으려 하기 보다는 기다리는 자세를 가지고 자신의 입에 맞는 떡이 나오기를 기다리는게 낫다.
  • 민주열사 열전:13/前경원대생 宋光永(정직한 역사 되찾기)

    ◎‘학원안정법 음모’ 온몸 항거 분신/학생운동 씨 말리려는 악법 제청 항의 선봉에/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불꽃 확산 시도 “시상에 죽은 내 아들 광영이를 왜 이리도 무서워한당가.제 몸에 불을 지르고 뛰지도 못하는디.왜들 겹겹이 둘러싸고 문상도 못오게끄럼 막는당가.광영이 몸이사 이제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 맴이사 어디 식겠어.어림 반푼 없는 소리제.이 에미 가슴 이리 불붙는디.그 맴이 어찌 식겠어…” 85년 10월 21일 서울기독병원 영안실.아들의 주검을 앞에 놓고 한 어머니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34일 전 학교에서 분신한 경원대 법대생 宋光永의 어머니 이오순 여사(당시 59세·94년 작고)였다.경찰은 한달 이상 1,000여명의 병력을 동원,병원을 두겹 세겹으로 에워싸고 출입자를 통제했다.그러나 그토록 삼엄한 경비와 장례 소동까지 불러온 송광영의 분신은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언론에 단 한줄도 보도안돼 그는 85년 9월 17일 오후 2시30분쯤 경원대 운동장에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했다.그날은 학생총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비로 연기된 상태였다.그러나 그는 시위를 주도하며 몸에 불을 붙였고,뛰어가며 외쳤다.“학원안정법 음모 철회하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나라” 인근 성남병원과 서울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서울기독병원으로 옮겨져 한달 이상 사투를 벌이다 끝내 숨졌다. 그가 온몸이 불에 휩싸인 채 몇번씩 쓰러졌다 일어서며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의 희망이었다.그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의 불꽃을 확산시키려 했다.광주민중항쟁은 5공화국 내내 꺼지지 않는 민주화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군사정권의 강요된 침묵을 깨고 80년 5월 30일 서강대생 김의기가 최초로 광주민주화항쟁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투신했다.그의 투쟁은 노동자 김종태의 이화여대 앞 분신과 또 다른 노동자 홍기일의 전남도청 앞 분신으로 이어졌다. 대학가에서도 5공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시위가 점차 가열됐다.위협을 느낀 군사독재정권은 아예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바로 ‘학원안정법’ 제정 추진이다.골자는 학생의 좌경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위학생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일정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이었다. 독재정권은 비밀리에 법안을 마련해 국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미리 그 내용이 새어나와 한 일간지에 폭로되면서 반대여론이 들끓자 일단 유보됐다.그럼에도 정권은 당시 손제석 문교부장관의 담화문을 통해 ‘학원소요가 계속되면 학원안정법을 연내에 제정하겠다’며 관철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송광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원안정법 음모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분신의 가장 큰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그는 유서인 ‘양심 선언’에서 ‘결코 총칼이나 학원안정법 따위의 악법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싹을 틔웠던 전태일열사를 가장 존경했다.전태일에 대해 “소외된 민중의 대변인,억눌린 사회에서 참된 인간상을 제시해준 인물”이라고 항상 말했다고 한다.어려서부터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온 그는 소외된 삶들의 아픔을 나눌줄 알았고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다.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화시장 재봉보조원 생활,신문팔이,Y셔츠 장사,돗자리 장사 등 닥치는 대로 밑바닥 삶을 이어갔다.재봉보조원 시절엔 청계피복노조에 적극 참여했다.성격이 활달하고 발이 넓었던 그는 동료들을 취직시켜 주는 일로도 바빴다. 그는 81년 형들이 학교를 마치고 자리를 잡고 나서야 대학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거기서도 동료학원생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학원을 10일씩이나 빠지면서 사고차를 찾아내 보상금을 타 가족들에게 전해주고 초상까지 치르게 해줬다.또 학원에서 탄 장학금을 집에 오는 길에 구두닦이 소년에게 줘버린 자신을 호되게 야단치는 어머니에게 “그래도 우리는 집도 있는데”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 가장 존경 송광영은 84년 27살의 나이로 경원대 법학과에 입학한다.법학을 선택한 것은 고시에 합격해 어머니에게 효도하고,법관이 돼 사회의 부정부패와 모순을 개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시반에 들어가면 장학금을 탈 수 있는 것도 한 이유였다.그러나 그해 가을 어용교수 퇴진시위를 주도하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빠지게 된다.‘실존주의철학연구회’ ‘경제문제연구회’ 등의 학습모임을 만들어 이끌었다.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만둘 것을 설득하며 생활비를 끊어버리자 교내에서 구두를 닦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원악법이 통과되면 분신하겠다는 말을 했으나 후배들은 믿지 않았다.그러나 전세금을 빼 학교 등록을 못하던 친구를 등록시키고 분신 열흘 전에는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호적을 정리하러 왔다”고 말하는 등 마지막 삶을 정리해 나갔다.누나 송영숙씨(49)는 “호적을 정리하려고 한 것은 그의 분신으로 형제들이 피해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회고한다. ‘…난자당하고 처절히 유린된 순백의 종이들이 책상 위에서 울고 있다/이렇게 또 하나의 밤이 사라져가는데/여자는 이제서야 피곤한 육신을 벗어제치고 있다/아! 그날 아침은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분신 얼마 전 써놓은 자작시 ‘에필로그 85’이다.송광영열사는 숨지는순간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민주의 종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연보 ▲1958:광주에서 출생 ▲74년:서울 경신중 졸업 ▲75∼76년:청계피복노조 활동 ▲82년: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84년:경원대 법학과 입학 ▲84년:실존주의철학연구회 만듦 ▲85년:경제문제연구회 만듦 ▲85년:9월17일 “학원안정법 음모 철회” 외치며 분신 ▲85년:10월21일 서울기독병원에서 운명 ◎학원안정법 파동/5共 ‘시위학생 선도교육’ 등 골자 立法 기도/야당·재야 “제도적 폭력” 강력 반발 저지시켜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점차 뜨거워지던 85년 여름,미국의 개입 의혹을 추궁하는 반미 시위가 거센 가운데 공안기관 주도로 중요한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한 일간지가 공식 발표를 2주 앞두고 ‘학원안정법’ 음모를 폭로했다.시안 내용은 삼청교육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학원소요 등과 관련,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자들을 형사처벌 대신일정한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대상자 선정은 문교부에 준사법적 성격의 ‘학생선도교육위원회’를 설치해 하도록 했다. 교육을 거부하거나 교육장소를 무단 이탈하는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해 학생들에게 극도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일부 좌경·용공학생들을 격리시켜 학원의 오염과 소요의 본거지화를 막고 선도교육을 통해 건전한 학교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하지만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학원에 대한 제도적 폭력이라고 즉각 반발했다.대다수 국민도 우려를 나타냈다. 반발이 점차 거세지고 여야 관계가 극도로 경색되자 정부는 ‘국민적 공감대가 아직 미흡하다’며 법 제정을 일단 유보했다.그러나 당시 이원홍 문공부,손제석 문교부 장관은 소요가 계속될 경우 언제라도 법안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하지만 학원안정법은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다. ◎분신대책위 김해성씨/“당국 협박속 유가족 설득/분신의 의미 찾고자 최선” 송광영 열사의 가족과 몇몇 민주인사들은 그의 입원 치료와 장례문제로 적지않은 고통을 겪었다.그가 입원하자 문익환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송광영 동지 분신구명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진상규명과 모금활동을 펴나갔다.치료기간중 상태가 좀 호전되기도 했지만 경찰의 철저한 통제속에 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됐다. 대책위 집행위원장이던 김해성 성남주민교회 전도사(38·현재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집 소장)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환자 시늉을 하며 겨우 2차례 송광영을 면회했다. “가족들을 설득해 당국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말고 분신의 진상과 의미를 찾자고 했지요.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그의 가족들은 저희와 뜻과 행동을 같이했습니다” 김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송광영이 입원했던 서울기독병원은 79년 여공들이 독재정권과 독점자본에 저항했던 YH사건의 YH무역 건물이었다.송광영이 역사적 민주투쟁의 산실이었던 그곳에 다시 경찰을 불러모아 영혼을 태웠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송광영이 숨지자 대책위는 장례위원회로 바뀌어 사회장을 준비했다.그러나 경찰은 장례 전날 문목사 및 이해학 목사,김소장 등 대책위 관계자들을 모두 연행한 뒤 가족들에게 간결한 장례를 강요했다.또 일방적으로 시신을 강원도 춘성에 매장하려고 했다.그러나 누나 송영숙씨(49·대한생명 근무)가 스카프로 목을 매고 영구차 바퀴 앞에 눕는 등 가족들이 격렬히 저항했다.영구차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병원을 출발할 수 있었다.그는 횃불을 밝힌 가운데 금촌기독묘소에 안장됐다.
  • 북한영화 방영/李世基 논설위원(外言內言)

    지난 9월 SBS에서 방영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 이어 한달여만에 벽초(碧初) 홍명희의 원작소설을 극화한 ‘림꺽정(林巨正)’이 국영방송의 전파를 탔다. 5부작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지난 88년,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1부인 ‘의형제’편과 2부인 ‘결의’편이 제작되었고 작품이 상영되자 당시 평양방송은 ‘봉건 통치배들의 가혹한 수탈과 전횡·학정을 반대하여 일떠선 인물들의 생활상’을 내용으로 한 것임을 소개한 바 있다. 북한 영화의 주제는 당의 과업과 혁명의 지조,경제난 극복,대(對)한·미 모략비방등 북한주민들에 대한 사상·교양사업 강화로 유일사상 체계를 강조하는 점이 특징이다. 1972년에 제작된 ‘꽃파는 처녀’도 일제 강점기를 무대로 농민의 딸인 꽃분이를 내세워 ‘착취와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인민들의 혁명투쟁이 일어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사상통제의 무기로 활용해온 문학작품의 선정성을 ‘직접통제’에서 ‘간접통제’로 바꾸면서 80년대 이후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이어받은 ‘불후의 고전적 혁명영화’들이 탄생되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와 ‘림꺽정’ 등이다. 최근들어 남북관계는 여러 방면에서 협력이 활기를 띠는 듯했다. 그러나 남북간 문화교류는 85년 예술단 교환방문 이후 거의 맥이 끊겼고 지난 봄, 리틀엔젤스예술단 평양방문공연과 지난 6월 민예총(민족예술인총연합회)이 매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민족통일축전’을 열기로 합의한 것이 고작이다. 북한경제에 도움이 되는 금강산 관광사업이 속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북측의 문호개방은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영화 상영은 남북문화교류의 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동안 대학가에서는 ‘북한 바로알기’ 차원에서 4,5편의 영화들이 상영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가 주는 감정과 언어표현,습관과 풍속의 해석은 민족동질성을 이해하는데 더없이 좋은 방법일 것이다. 미국영화가 판을 치고 일본영화가 수입개방된다는 마당에 우리 땅에서 상호이해와 동질성 회복에 도움이 되는 북한영화가 상영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비록 북한은긴 단절 속에서 적으로 대치되어 있었으나 우리는 그 전통문화를 외면할 수 없다는 진한 피가 저변에 흐르기 때문이다. 어두웠던 둘 사이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햇볕이 비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요즘이다.
  • 방송인 서유석­가수 안혜경(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말한다:11)

    ◎현실비판·운동권 노래… 고난의 ‘언더’ 인생/가수·방송인 서유석/유신반대 ‘맷돌’ 공연중단 시련/심의 묶인 금지곡만 10여편/방송에서도 강한 정치풍자/‘윗분’에 밉보여 도중하차 가시밭길 “가는세월 그 누구가/잡을 수가 있나요/흘러가는 시냇물을/막을 수가 있나요/…/이내몸이 흙이돼도/내마음은 영원하리”(가는 세월). 70년대 텁텁한 목소리로 사회성짙은 노래를 부르던 청년문화의 기수 徐酉錫씨(53)의 대표곡이다. 가수와 방송인으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낸 徐씨의 체념한듯 하면서 굽히지 않는 의지가 담겨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徐씨가 부른 노래는 ‘가는 세월’ 말고도 창작곡만 70곡. 1985년 마지막 레코드 ‘뚝잘라 말해’를 발표할 때까지 낸 음반도 11집이나 된다. ‘타박네’‘파란많은 세상’‘세상은 요지경’‘대답은 없어라’ 등 심의에서 묶인 금지곡도 10여곡. 이가운데 녹음을 끝내놓고도 가사내용 때문에 레코드를 수거당했던 ‘마지막 노래’는 2년뒤 다른 가수가 불러 심의를 통과한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다. 교통관련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20년째 맡아 이젠 가수보다 방송인과 교통 전문가로 더 알려진 徐씨. 세월은 흘렀지만 사회성 짙은 ‘운동권 가수’로 찍힌뒤 극적으로 시작한 방송인 생활의 기억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성균관대 졸업무렵 학교앞 카페 ‘카사노바’에서 지배인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통금직전 具鳳書씨가 徐永春씨(86년 작고)등 연예인들과 함께 들러 徐씨의 노래를 청해 듣고 다음날 다시 TBC 쇼프로듀서와 함께 들러 徐씨를 소개했다. 그 다음날 곧바로 쇼쇼쇼에 출연한게 가수 생활의 시작이다. 그러다가 대학시절 핸드볼선수 경력을 살려 한동안 직장 핸드볼선수로 활약하며 안양예술인학교에서 묵고 있던 70년도 봄이었다. 신세계레코드사 작사가가 찾아왔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같이 본뒤 주제가 ‘어타임포어스(A time for us)’를 번안해 레코드를 취입하자고 했다.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옴니버스 레코드 타이틀사진으로 실렸다. 노래가 히트하면서 방송국 프로듀서들이 ‘徐씨 모시기’ 경쟁에 나섰다. 이때는 매일 YWCA강당에서 ‘청개구리모임’을 갖던 시절. ‘청개구리’가 알려지면서 통기타 언더그라운드 계열 가수들이 모인게 바로 ‘맷돌’이다. 매주 수요일 명동 코리아나백화점 강당에서 자작곡 공연을 가졌는데 ‘군사독재반대’‘유신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14회 공연도중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끝이 났다. 그리고 73년 4월 TBC 심야 라디오프로 ‘밤을 잊은 그대에게’ 진행을 맡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가을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이 제2차 한국군 월남파병 압력차 방한했을 때다. 방송도중 UPI 종군기자의 월남전 참전미군의 만행을 기록한 ‘추악한 미국인’을 죽죽 읽어내렸다. 즉각 중앙정보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잡으러 온다”는 말을 듣고 방송국 앞 목욕탕으로 도망,4일간 숨어 지냈다. 그리고 3년간 모든 활동이 철저하게 금지됐다. 그때 당국이 대마초사건을 핑계로 대중가수들을 줄줄이 묶어 들여 빈사상태에 빠진 연예계의 대안을 찾던중 徐씨를 대상으로 삼았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대전까지 내려와서 상경을 권유해 일단 서울로 올라왔다.그리고 당국의 통제를 시험해보기 위해 취입한 노래가 ‘가는 세월’이다. 그때 MBC 라디오에서 ‘정오의 희망곡’ 진행 제의가 들어왔다. 물론 당국의 입김이었다. 같은 방송 라디오프로 ‘안녕하십니까 서유석입니다’와 TV프로 ‘여의도1번지’를 맡아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77년 ‘푸른 신호등’을 맡아 진행한지 1년쯤 됐을 무렵 청와대로부터 진행자 교체지시가 떨어졌다. 프로 시작전 항상 정치판과 사회비리를 강도높게 비판한게 문제였다. 그후 동아방송으로 옮겨 ‘명랑 교차로’를 맡았다가 시사풍자 코너 ‘형님 이래도 됩니까’로 인해 79년 단명으로 끝났다. 81년 ‘푸른 신호등’을 맡았고 이후 지난 15대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때까지 이 프로를 진행했다. 15대 총선이 끝난뒤 지금까지 줄곧 교통방송 ‘출발서울대행진’을 맡고 있다. 교통관련 논문도 2편을 발표하고 (주)다물대표로 교통관련 기기를 2건이나 상품화하는 벤처사업가로 변신했다. “지난 70·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통기타 가수들은 현실과 벗어난 노래를 부르기가 어색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조리 부도덕을 보고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니 당연 제약이 많았고 음악계로서도 퇴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가수 안혜경/반체제로 옥고 아버지에 영향/성악도서 운동권 가수 변신/계엄령 속에서도 민중가요 배포/여성밴드 결성 ‘저항 노래’ 1970년대말부터 지금까지 대학가에서 변함없이 불리는 ‘민주’란 노래가 있다. 운동권 노래의 고전중 하나지만 정작 이 노래를 만든 이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인조 여성 록밴드 ‘마고’를 이끌고 있는 安惠敬씨(41). 이화여대 성악과 재학시절 노래운동에 뛰어든뒤 노동·여성·환경과 관련한 메시지 강한 노래들을 쉼 없이 발표해오고 있는 개성파다. ‘까치길’‘민주’‘황혼’ 등 초기의 노래에서 우리 역사와 사회의 모순들을 담았다면 ‘커피카피 아가씨’‘일이 필요해’에선 여성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켰다. 또 ‘침묵의 봄’‘검은 민들레’ 등은 환경오염을 다룬 것이고 ‘평화공원’‘너희나라를 위해’등은 반전평화의 메시지가 강렬하다. 모두 현실비판과 역사의식이 흠씬 밴 자작곡이다. “70년대 사회 부조리와 부패에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던 아버님의 영향이 컸지요. 반체제적인 발언으로 옥고를 반복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당부는 제삶을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수감중이던 아버지에게 음악대 진학의 꿈을 알렸고 “대중을 위한 진정한 예술인이 돼라”는 아버지의 편지글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성악과에 진학해 현실과 동떨어진 귀족적인 음악에 반발했고 자신이 할 일에 대해 고민하던중 金敏基씨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에 참여한 게 노래운동의 시초. 1학년때 사전 정보누출로 불발에 그친 집회때문에 줄곧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레슨을 받으러 교수 집에 갈때도 항상 검은 색 짚차에 태워져 갈 정도였다. 졸업음악회 대신 혼자 작업한 노래 16곡을 담은 불법테이프를 만들어 선후배 동료들에게 돌렸다. ‘민주’도 여기에 실려 있다. 이 노래들이 자신도 모르게 대학 노래패들을 통해 퍼졌다. 80년도 대학 졸업후 바로 교사생활을시작했지만 노래 만들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TBC 방송국에서 ‘횃불’‘해방가’‘농민의 노래’ 등 민중가요 20곡을 숨죽이며 녹음해 배포했는데 이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청계천 복사가계에서 복사한 테이프 20여개를 돌렸고 임진각에 가서 통일을 생각하며 이 테이프 1개를 던졌다. 온산 여천공단의 오염실태를 고발한 마당극 ‘청산리 벽폐수야’ 금지도 잊지못할 일. 공연윤리위원회에 심의를 냈는데 전면 공연금지 지시가 떨어졌다. 결국 워크샵 형식을 가장해 서울 아현동 애오개소극장에서 4회공연을 어렵게 가졌다. 87년부터는 여성 환경 시민단체와 연계해 대학 교회무대와 소극장 운동을 벌였다. 92년 첫 공식 음반 ‘여성 환경 노래’를 출반했는데 이때도 노래 ‘평화공원에서’가 탈락됐다. 그리고 95년 2집 음반부터는 비교적 편한 음악을 택해 실었다고 한다. 지난해 여성5인조 록밴드 ‘마고’를 조직해 전국을 다니고 있고 지난 91년 결성된 ‘여성문화예술’에도 기획위원을 맡아 문화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솔로로 전국의 공연장을 다니며 공연을 병행한다. 성악과 출신이면서 운동권 가수로 방향을 잡았고 일부러 고전악기를 배웠다는 安씨. 1남1녀의 자녀를 둔 주부 가수지만 남자들만의 영역이란 편견을 깨기 위해 베이스 기타를 배워 그룹 마고에서 베이스를 맡고 있는 고집센 여성이다. 앞으로 계획이 무엇이냐는 질문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원하는 것에 달려들 것”이란 말로 대신했다.
  • 제3의 길/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제3의 길’을 주창하여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는 영국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앤터니 기든스 교수가 11일 한국을 찾았다.영국의 자존심으로까지 불리는 기든스 교수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21세기를 향한 개혁 이념으로 내건 ‘제3의 길’의 이론적 지주다. 기든스 교수의 사상세계의 핵심인 ‘제3의 길’은 한마디로 기존의 좌파이념과 시장경제의 장점을 접목한 새로운 실용주의적 중도 좌파노선을 지향하는 정치이념이다.특히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좌파 이데올로기는 위기에 봉착했고 우파 자본주의 역시 불평등이라는 치명적인 한계를 노출하고 있기 때문에 좌우의 이념을 초월하는 실용주의적 중도 좌파노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든스 교수의 ‘제3의 길’은 21세기를 주도할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독일 총선에서 ‘제3의 길’을 핵심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사민당의 슈뢰더가 승리함으로써 21세기 정치·경제 이데올로기의 대안으로 더욱 무게를 싣고 있다. 탈냉전과 함께 세계적으로 나타난 빈부격차,사회적 차별,개인주의화,각종 범죄 증가,가족파괴,환경오염,민주주의에 대한 근본개혁등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20세기의 실패한 좌우 이데올로기로부터 혁명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앞으로 귀추가 주목된다.최근 우리 대학가에서도 ‘제3의 길’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제3의 길’은 급진적 보수주의와 보수화된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공동체적 동반자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자본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통일국가의 정치이념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다는 주장들이 설득력 있게 나오고 있다. 특히 기든스 교수는 한국방문에서 ‘제3의 길’은 한국처럼 좌우대립을 겪어 온 국가에서는 의미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좌우대립은 물론 지역대립에 시달려온 한국인들에게 이 모든 갈등을 뛰어넘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제3의 길’은 한국에서 지역갈등 해소의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좌우의 구분을 뛰어넘는 명제를 국민에게 제시한 점이 이같은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고 했다.‘제3의 길’이 21세기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을 할지 여부는 예측하기 어렵다.그러나 기든스 교수가 한국을 다녀간 후 ‘제3의 길’의 여진은 오래 남을 것으로 본다.
  • 日 대중문화 개방 태풍은 없다/金 대통령 訪日 앞두고 살펴보면

    ◎영화·만화·음반 대응력 충분/애니메이션·방송 피해 우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앞둔 각 분야의 현황과 앞으로 국내시장에 미칠 영향을 간략하게 짚어본다. ▷영화◁ 당장 시장이 개방되더라도 우려할만한 정도의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게 대체적 반응. 일본내에서 조차 영화들이 애니메이션만큼 흥행에 성공적이지 못한 형편이기 때문에 초기 얼마간 이상과열 현상이 지나면 계속 히트할 영화는 5편이 채 안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오히려 표절시비를 근절,우리영화 수출 배가의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삼성경제연구소는 일본영화가 유입되면 국내영화시장의 규모는 초기 2∼3년간 2∼3%정도 확대되나 이후에는 일본영화 점유율의 점차 하락 가능성도 내다봤다. ▷애니메이션◁ ‘저패니메이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수준은 가히 세계적이다. 일본내 시장규모는 1,300∼1,500억엔 정도로 자국 영화시장의 70∼80%에 달한다. 반면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규모는 극장용과 비디오,TV를 포함해약 540억원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국내 애니메이션산업의 65%가 하청이고 더욱이 극장용과 비디오용 애니메이션은 경쟁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유입된다고 하더라도 당장 가시적인 피해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문제는 디즈니에 눌려 기를 못펴온 국내 애니메이션업계가 막강한 저패니메이션의 위력앞에 전의를 상실,잠재적인 성장 기회를 영영 놓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출판만화◁ 이미 개방된 것이나 다름없다. 80년대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만화는 90년대 들어서는 계약서에 주인공 학교이름 등 고유명사를 그대로 쓰기로 하고 도입되고 있다. 따라서 개방이 된다하더라도 충격이나 영향이 미미하리란 전망이 우세하다. ▷음반◁ 공식 통계는 없지만 국제음반산업연맹(IFPI)의 발표에 따르면 97년 한국시장 매출량은 3,200억원 수준이다. 이중 국내음반 점유율이 60∼70%에 이른다. 개방후 점유율은 음반 공연 저작권이 동시 개방될 경우 10%,음반만 열 경우 수치는 5%로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음반 관계자들은 음반개방은 장기적 발전을 이룰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그리고 저작권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표절시비가 사라지고 싱글시장의 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다. ▷방송◁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 마지막 개방이 대세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단계적 개방선언후 프로그램 수입은 가장 활발하다. 지난 6월 부산방송이 주니치팀 경기 생중계를,며칠후 SBS는 청소년용 인기만화 ‘슬램덩크’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위성쪽에선 케이블TV,중계유선방송을 통해 600만 가구에 NHK위성방송 프로를 보고있다. 뒷문으로 들어오는게 이 정도라면 앞문이 열렸을때 급속한 증가는 불보듯. 여기에 저작권문제도 큰 걱정. 일본측이 침투를 위해 방관했지만 개방이 되면 프로그램 표절 관련 소송이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관련 법규를 마련하고 질적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또 파급효과를 고려 다큐·스포츠·극영화와 오락 등의 순서로 단계개방을 해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일 문화교류 기본 원칙 ◆종전 ·기본방향:△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 따른 체제 ·방법:△기본적으로 불허 △예외적으로 순수예술·일본색 없는 어린이용 만화·비디오·출판만화 등 허용 ◆국민의 정부 ·기본방향:△2000년,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앞서 성숙된 양국 관계 지향 ·방법:△개방시도 △신중한 접근 △상호주의 원칙 △건전한 문화 △민간차원 교류 ◎정부 입장 어떤가/국민적 합의 토대로 신중 개방/국내문화기반 흔들리지 않게 점진적 허용 일본대중문화의 개방이 초읽기에 들어섰다. 오는 7일 金大中 대통령의 방일 중 개방원칙이 역사상 처음으로 거론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65년 한일국교정상화의 정신을 문화교류의 기본원칙으로 하던 한일시대가 마침내 막을 내리고 한일간 새로운 문화교류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원칙적으로 ‘불허’하되 순수예술과 어린이용 만화영화 등만 ‘예외적으로 인정’해왔다. 따라서 이같은 틀의 변화는 세기의 전환점인 2000년과 2002년 월드컵 축구공동개최를 앞두고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에따라 정부는 일본 대중문화개방과 관련된 기본원칙 접근전략 등을 짜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와 관련한 정부의 대전제는 △개방하되 △일시에 무제한적인 전면개방은 지양(止揚)한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이는 우리 국민의 특수한 정서와 또 관련 산업의 현주소를 감안한 것이다. 이같은 전제 아래 △국민적 합의에 따라 △개방의 정도,분야별 개방단계,순서와 방법,국내 대응방안 등을 면밀하게 검토해 점차적으로 신중하게 개방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합당한 일본의 노력을 상호주의적 입장에서 요구하고 △한국의 대중문화 산업 기반이 붕괴되지 않도록 하며 △건전한 문화의 유입을 유도하며 시장을 교란하는 불공정행위를 제재하고 △민간차원에서 교류를 한다는 기본원칙을 세워놓았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구체적인 개방일정에 대해서는 “국민감정이 있는데 상식선을 벗어나는 일이 있겠느냐”며 “심의,수입추천,허가 등 국내절차를 거치고 파급효과가 적은 분야부터 점진적으로 풀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궁극적으로 일본대중문화를다른 외국문화와 동일하게 취급하려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국내 침투 어디까지/인터넷·책 통해 ‘봇물처럼’ 일본 대중문화가 몰려오고 있다. 일본 대중문화를 소개하는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고 일본어 전용 카페도 크게 늘고 있다. 인터넷과 PC통신을 통한 ‘일본 대중문화 동호회’도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일본영화 시사회를 갖는 등 모임도 활발하다. 일본 관련 서적은 지난 3개월 동안 20여권이나 쏟아져 나왔다. ‘일본음악이 보인다’‘나는 일본문화가 재미있다’‘일본문화의 재미’ 등 일본문화를 소개하는 책들이 주류를 이룬다. 대학로와 신촌 일대 카페에서는 일본영화와 만화영화를 상영하는 소극장이 크게 늘었다. 일본 쇼프로나 드라마를 보여주는 곳도 30곳이 넘는다. 일본어 전용 카페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1곳에 불과했지만 최근 4곳으로 늘었다. 회원제로 운영하면서 일본음악을 들려주거나 일본비디오를 틀어준다. 연세대 고려대 성신여대 등 대학가 가을축제에서는 ‘일본문화 다시보기’ 행사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중구 장충동의 카페 Y문화공간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에 관객이 몰리자 지난달부터 이달까지 두 달 동안 아예 일본영화제 행사로 확대했다. 이화여대 주변에는 반지나 목걸이 등 일제 악세사리만 파는 가게가 등장했다. 국산보다 10배 이상 비싼데도 발디딜 틈없이 북적댄다. 하이텔 등 PC통신에는 일본가수 팬클럽 등 소모임이 최근 몇달 동안 130여개나 새로 생겼고 연합 팬클럽도 결성됐다. 성공회대 金昌南 교수(신문방송학과·문화평론가)는 “일본문화는 이제 개방을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할 정도로 우리사회에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다”면서 “공식개방에 앞서 일본의 저질문화를 걸러낼 수 있는 법적 장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대학가 가을 축제 ‘썰렁’/‘최악’ 취업난 영향 분위기 가라앉아

    ◎학교지원금 줄어 행사도 대폭 축소/도서관만 북적북적 “이런 분위기에서 축제는 무슨 축제입니까” 대학가 가을 축제가 썰렁한 분위기속에 치러지고 있다.학교 예산도 부족한데다 외부의 지원도 거의 없어 행사가 대폭 축소됐다.학생들의 관심도도 크게 떨어졌다.최악의 취업난으로 취업준비생 뿐 아니라 학교 전체의 분위기가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지난 21일부터 27일까지 열린 ‘98 정기 연고전’도 마찬가지다.응원에 참가한 학생수가 예년의 절반으로 줄었다.고려대의 연습 응원전에는 800여명만이 참가했고 연세대는 300명이 채 안됐다.연세대가 개최한 ‘연고제맞이 길놀이’와 ‘개막제’ ‘가을문화제’등의 행사 참가도 저조했다. 이달 말까지 ‘청파문화제’를 여는 숙명여대는 단과대별 행사 외에 총학생회 주최 행사를 모두 없앴다.학교의 공식 지원금도 지난해에 비해 30%이상 줄었다.축제때마다 문을 열던 교내 주점도 사라졌다.스크린 설치에 돈이 많이 드는 영화제는 비디오 상영으로 바꿨다.문과대는 ‘대자보 전시회’만 열었다.대자보 내용도 실업자 문제를 담은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25일 끝난 동국대 ‘백상예술전’에서는 대부분의 단과대가 주점,학술제,문화제 등을 생략하고 체육대회만 열었다.한때 1,000만원에 이르던 학교 지원금이 올해는 300여만원에 불과했다.지난 24일과 25일 각각 끝난 동덕여대 대동제와 성신여대 문화제도 ‘취업박람회’ ‘여성실업대토론회’ 등의 행사가 주종을 이뤘다. 반면 대학 도서관은 빈자리가 없다.고려대 도서관 2,300여석은 학생들로 꽉 차고 있다.朴모양(24·경영학과 2년)은 “재학기간동안 가장 재미있는 행사가 고연전이지만 올해는 참가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공부했다”고 말했다.
  • 듀엣 ‘강촌 사람들’의 송민수·이승준

    ◎음악의 고향잃은 30代에 포크송 선사/‘리메이크 포크송1,2’ 소문없이 베스트 대열에/쉘부르서 우연히 만나 ‘만년필과 잉크’ 사이로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져있다는 시인이 있었다. 그러나 더 기가 막힌 사연도 있다. 자기도 모르는새 자신들의 음반이 30만장(비공식적으로는 70∼80만장)이나 나간 듀엣 ‘강촌사람들’(송민수,이승준). 직접 연주하고 노래해 94년에 낸 ‘포크 리메이크1,2’(새샘음반)는 소리소문없이 지방 대학가와 고속도로 휴게소 등지에서 날개돋힌듯 팔렸다. “‘통기타의 산실’ 쉘부르에서 솔로로 활동하다 우연히 만나,서로의 음색이 ‘만년필과 잉크’처럼 느껴져 자연스레 합치게 되었죠.” 송씨가 미성에 고음이라면 이씨는 중저음에 부드러움을 자랑한다. 35세 동갑인 두사람은 전통적인 신인가수 등용문인 쉘부르의 ‘아마추어 콘테스트’를 85년,87년 각각 한번만에 통과했다. 최성수,변진섭 등 내로라했던 가수들도 한번에 ‘OK’사인을 못받았다는 데서 둘의 음악성을 가늠할수 있다. “작은 형이 중고 통기타로 포크노래를 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그냥 좋더라구요,군악대에 있을때 사이먼과 가펑클에 매료된게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되었지요.” 이씨의 얼굴이 낯익은 사람은 눈썰미 있는 팬이다. 그는 ‘강은철과 친구들’의 멤버로 활약했다. 기타와 피아노,펑크션(타악기의 일종)등 다양한 악기를 다룬다. ‘습작’ 수준이라는 곡도 30여곡 만들었다. 송씨는 형제들 영향이 컸다. “형들이 재즈나 클래식을 가까이 해서 자연스레 친숙해졌죠. 고교시절 아카펠라 중창단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대학간판보다 현장을 택한 송씨는 광주 다운타운에서 노래하다 큰 물을 찾아 서울로 왔다. ‘쉘부르 사단’에 합류한뒤 87년 MBC신인가요제 금상을 받았다. 그때 은상수상자가 ‘잘 나갔던’ 변진섭이었으니 ‘어느 구름에서 비내릴지 모른다’라는 말을 톡톡히 실감한 셈이다. 이들이 포크 리메이커 음반을 취입한 것은 음악활동의 상품보다는 기념품 삼아서였다. 음악의 고향을 잃은 30대에게 포크라는 쉼터를 선물하자는 데 의기가 투합했다. 서울 명동 쉘부르음악실 정남실지배인(33)은 이들의 전성기를 이렇게 전한다. “둘이 빚은 화음은 대단했습니다. 96년 쉘부르를 떠난뒤에도 찾는 사람이 많았어요.” ‘트윈 폴리오’나 ‘해바라기’ 등 남성듀엣의 계보를 이을만한 실력을 지녔으면서도 이들이 덜 알려진 것은 창작곡이 없다는데서 비롯한다. ‘강촌사람들’은 지금은 휴업중이다. 남의 노래만 부르다보니 공허해졌다. ‘강촌…’의 이름이 달린 노래에 목말랐다. 언젠가 세상에 내놓을 그 음반을 위해 각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눈만봐도 어떤 코드로 나갈지 서로 안다는 이들은 말한다. “언젠가 우리 노래를 낼겁니다”. 다짐도 절묘한 화음이었다.”
  • 대학가 ‘취업 몸살’ 위험 수위

    ◎예비 學士들 학업 팽개치고 구직 혈안/4학년 학교 수업은 아예 관심조차 안보이고 순수학문 강의실 ‘텅텅’… 취업특강은 ‘빽빽’/교수들도 강의보다 제자 취직에 더 신경 사상 최악의 취업난으로 대학생들이 1,2학년 때부터 학업은 팽개치고 취업에 매달리는 등 대학들이 ‘취업 몸살’을 앓고 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은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취업 공부를 하느라 학교 수업에는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저학년들도 취업에 유리한 과목만 골라 수강하는 등 대학 전체가 취업 열풍에 휩쓸리고 있다. 이화여대의 경우 4학년생들이 몰렸던 ‘기독교와 세계’‘국어와 작문’‘외국시의 이해’ 등 과목의 강의실은 거의 텅 비었다.학생들이 취업 준비를 하느라 강의에 빠진 탓이다.金모양(23·중어중문 4년)은 “PC통신 구인란을 검색하거나 기업체를 찾아가는 것이 주된 일과”라면서 “2학기 들어 수업에는 거의 출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숭실대 행정학과 4학년 전공 선택과목인 ‘공기업론’의 수업은 4학년 전원이 결석한 가운데 2∼3년생 몇몇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면에 취업특강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다. 한양대의 경우 기업의 중견 여성간부를 초청해 성공 비결을 듣는 2학점짜리 ‘여성과 직업’ 과목은 올 들어 200석의 강의실이 언제나 만원이다.숭실대 중문과 金鍾聲 교수는 강의시간 가운데 30분을 할애,취업 전문가를 불러 특강을 한다. 성균관대는 PC교육과 재무제표,실무영어 등 취업실무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대외활동이 활발한 교수들의 인맥을 활용하는 취업 지도교수제를 도입할 방침이다. 경희대는 고심 끝에 아예 ‘취업 스쿨’을 개설했다.1주일에 2시간씩 한 학기 8주 동안 수강하면 1학점을 준다.브리핑 방법이나 비서 실무도 강의 내용에 들어있다.요즘은 비서 실무 강의에 남학생들도 몰린다. 국민대는 오는 23일부터 25일까지를 취업주간으로 정해 구직 특강을 계획하고 있다.저학년에게도 수강을 독려하고 있다. 전남대는 ‘IMF 위기에도 취업할 수 있다’는 특강을 마련,외국인 회사,유통회사,벤처기업,중소기업 등의 전문가를 초청,한달에 2차례씩 강의한다.교수들도 강의보다는 학생들의 취업에 더욱 신경을 쓴다.한양대 공대 교수 100여명은 최근 200여개 회사를 돌아다니며 ‘기업 실무에 맞는 수업을 하고 있다’며 학생들을 선발해 달라고 부탁했다.충북대도 이달 말쯤 교수들을 도내 각 기업체에 보내 졸업생 채용을 요청키로 했다. 한편 서울대 등 서울·경기 지역 15개 대학 학생들은 오는 18일 취업대책 연합기구인 전국학생특별위원회를 발족한다.
  • ‘영남위원회’ 15명 구속 기소/金昌鉉 울산 동구청장 포함

    반국가단체 혐의를 받고 있는 ‘영남위원회’ 사건을 수사중인 부산지검 공안부(부장검사 千成寬)는 8일 총책 朴경순씨(40·늘푸른서점 대표)와 金昌鉉 울산 동구청장(35) 등 15명을 국가보안법위반혐의(반국가단체 구성 또는 가입)로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이들이 지난 95년 반제청년동맹을 모태로 영남위원회를 결성한 뒤 북한의 대남공작조직인 한국민족민주주의전선(韓民戰)의 지도이념에 따라 노동계와 대학가 재야단체에 조직원을 침투시켜 남한사회를 공산주의화하기 위한 활동을 해온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영남위원회는 합법적인 정당화를 통한 남한혁명을 위해 울산지역 사업부장인 金昌鉉 울산 동구청장과 조직원 千병태씨(29·前 울산시의원)를 지방선거에 출마시켜 당선시켰으며 現總聯과 현대자동차,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부산노동자회 등에 수십명의 조직원을 침투시켜 노동계 조직장악과 불법파업 배후조종을 시도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들의 변호인단은 “검찰이 실체가 없는 단체를 무리한 수사로 끼워맞추기를 하고있다”며 “재판과정을 통해 이를 밝히겠다”고 말했다.
  • ‘철의 노동자’ 꽃다지(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8)

    ◎노동가요­대중 묶어준 ‘노래패’/노동자들의 애환 서정적 선율에 담아 합법성 인정받으려 공륜과 힘겨운 싸움/첫 앨범 ‘가사변경’ 장벽 뚫고 원안수록 감격/‘희망의 노래’ 보안법위반 시비는 시대착오 노동자 집회나 대학가 시위에선 반드시 노동가요와 민중가요가 불려지게 마련이다.이 노동가요와 민중가요만을 보급해오고 있는 전문 노래패 ‘꽃다지’는 일반인들에겐 조금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다.하지만 웬만한 노동가요와 민중가요치고 이들의 작품이 아닌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꽃다지’는 확고하게 자리잡았다.이처럼 큰 성과 뒤에는 눈물겨운 투쟁이 숨어 있다. 이 단체가 정식 출범한 것은 지난 92년 3월.하지만 그 뿌리는 전국에서 민주노조 결성을 위한 총파업이 거행되던 87년 7월부터 9월까지 현장 문예운동의 첨단에 섰던 두 노래패로 거슬러 올라간다.노동자노래단(노노단)과 대학 노래패 출신들의 모임인 예울림이 그것. 당시만 해도 노동가요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주로 학생들이 부르던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그러나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입에 올려지던 관념적인 이 노래들은 구사대가 몽둥이를 휘두르던 급박한 상황엔 맞지 않았다.노동가요의 대표적 작곡가로 노노단에서 노래운동을 벌이던 金호철씨와 현재 아라리요민요연구회 대표인 金애영씨가 ‘파업가’‘노동조합가’‘민주노조사수가’ 등을 만든 게 이때다. 88년 가을 ‘총파업가’를 실은 비합법 테이프는 만든지 3∼4개월만에 20만개가 팔려나갔다.방송을 타지 않았는데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주문이 쇄도해 매일 밤을 새면서 만들어내야 할 정도였다.이때부터 ‘운동권 노래’는 학생운동,지식인 위주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이후 만들어진 89년의 ‘단결투쟁가’와 91년의 ‘철의 노동자’는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불려지고 있는 레퍼터리다. 그러나 90년 전노협이 결성되고 민자당이 출범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진행되고 노동자집회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이전의 투쟁가와는 달리 생활공간에서 불려질 수 있는 서정적인 노동가요의 필요성이 부각됐다.그래서 노동자노래단과 예울림이 합쳐진 게 바로 ‘꽃다지’다.노노단과 예울림에서 모두 33명이 활동을 시작한다.그러나 이들의 노래가 합법적으로 불려지기에는 상황이 너무 험했다.92년과 93년 사이에 각각 15곡씩이 실린 테이프 1·2집을 내 대학가 사회과학서점이나 노동집회현장에 내다 팔았다.이렇게 구전되던 이들의 노래는 마침내 94년 첫 공식음반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꽃다지’는 이 첫 음반으로 뼈아픈 사연을 겪게 된다.공윤 심의에 15곡을 올렸는데 4곡을 빼곤 모두 반려됐다.가사를 바꿔 내라는 것이었다.15곡은 6개월전부터 2,000여명의 현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선곡한 것들.공륜을 찾아가 항의했다.“풀뿌리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문민정부의 모순이 불거진 것이지요.수십만명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바꾸라는 것은 대중정서를 훼손하는 우스운 짓입니다.심의 싸움은 사실상 음반회사의 몫이지만 그때 분위기상 음반사 입장에서 위험부담을 지지 않으려 했고 어쩔수 없이 우리가 투쟁에 나섰습니다”(꽃다지 대표 李銀珍·33). 재심의가 열렸다.이번엔 ‘단결투쟁가’ 한곡만 빼면 통과시키겠다는 양보를 얻어냈다.‘단결투쟁가’는 그 당시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노래.문화평론가들의 자문을 구해 소견서를 첨부해 제출하며 ‘단결투쟁가’를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맞섰다.마침내 승리를 이끌어 냈다.모든 노래가 실릴 수 있게 됐다.그래서 나온게 94년 5월 노동절에 맞춰 선을 보인 첫 음반이다.‘꽃다지’ 창립 1년만의 일이다. 노래는 흔히 불려졌지만 이들의 무대는 좁았다.첫 음반이 나오기 한 달 전에야 처음 공식적인 무대에 설 수 있었다.민노총이 주최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공연이 그것이다.여러 노래패의 연합공연이긴 하지만 꽃다지로선 의미있는 공연이 아닐 수 없었다.이후 전국의 대학 강당과 소극장,운동장,공원등 가리지 않고 찾아 다녔다.그러던중 96년 대표가 구속되는 위기를 만나게 된다. 대표 李銀珍씨는 연세대 재학시절부터 노래운동에 뛰어든 전문가.90년 전노협 노래책 ‘진짜 노동자’와 92년부터 민맥출판사에 펴낸 노래책 ‘희망의 노래’ 4집의 선곡·감수를 맡았다.그런데 이 ‘희망의 노래’가 국가보안법에 걸려들었다.노래 가사가 북한의 노선과 맞물린다는 이유였다. 96년 2월 장안동 대공분실로 연행돼 갇혔다.이기간 내내 꽃다지 회원들은 매일 낮 12시 탑골공원에서 시위를 벌였고 李씨는 결국 50일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80년대부터 대학가에서 흔히 불려져 음반으로 발표됐던 노래들을 문제삼은 것은 시대착오적인 조치였다고 봅니다.6월 민주화항쟁을 담은 노래마저도 문제시됐는데 그렇다면 6월항쟁도 불법이란 말인가요.합법적으로 나와 유통되던 노래책을 뒤늦게 묶는 조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李銀珍 대표) 지난해 낸 2집 음반과 싱글음반은 모두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했다.지금까지 3집에 걸쳐 음반을 내면서 전국에서 가진 크고 작은 공연만도 1,800여회.방송에서도 이들의 노래는 드문드문 들려진다.전국의 노래패중 가장 많은 가수와 연주자,기획자를 확보한채 활발하게 움직이는 전문 노래패이기도 하다.“이젠 집회나 대학축제때 분위기를 돋우는 도구적인 노래를 벗어나 안방과 일반 모임에서도 불려지는 레퍼터리로 정착해야 합니다.노동가요와 민중가요가 거부감없이 입에 올려질 정도로 노래와 일반인들의 인식이 모두 성숙했습니다.시민들이 스스로 문화의 장르를 찾는 능력이 쌓일때 문화는 성숙해가는 게 아닐까요”(李銀珍 대표) ◎금지된 사연들/대중화된 노래 가사 바꾸라니…/1집 대부분 방송금지 ‘족쇄’/‘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서정성 극치 ‘꽃다지’의 레퍼터리는 급박한 시위현장의 합창이 전부인가.87년 노동자 총파업 속에서 선동적으로 진행되던 노래운동은 90년 노동자 탄압에 밀려 서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한다.물론 지금까지도 불려지고 있는 숱한 노동·민중가요는 노동현장의 열악한 분위기와 통일에의 꿈을 분명히 담고 있다.지난 94년 공윤심의에서 모두 통과한 1집음반의 일부가 방송에서 철퇴를 맞았던 사연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KBS의 경우 1집음반중 ‘단결투쟁가’를 탈락시켰고 MBC는 ‘서울에서 평양까지’를 거부했다.“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 피맺힌 가슴 분노가 되어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우리는 가리라 기필코 가리라 승리의 한길로”(단결투쟁가),“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오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가”(서울에서 평양까지).대중들의 민감한 반응을 의식해야만 하는 방송의 입장에선 당시 분위기상 선뜻 전파에 실을 수 없는 노래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부른 노래중 적지않은 것들이 방송을 탄다.‘바위처럼’‘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전화카드 한장’‘통일이 그리워’가 그것들이다.“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바위처럼),“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전화를 하라고 내손에 꼭 쥐어준 너의 전화카드…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전화카드 한장). 작가와 단체만으로도 탈락했던 과거 심의 잣대라면 ‘꽃다지’의 노래는 무조건 거세돼야만 한다.그러나 서정적인 양식을 갖추고 파급됐던 이들의 노래들은 여과없이 안방에도 들어가고 있다.사람들을 위해 꽃과 잎,씨앗을 모두 바치며 사는 한해살이 풀 꽃다지.결국 한해살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여지는 노래패 ‘꽃다지’에게도 얼마든지 있다고 볼 수 있다. ◎꽃다지의 길 ▲92년 꽃다지 창립.연세대 대강당서 제1회 콘서트. ▲93년 세종대 대양홀,예술극장 한마당서 제2·3회 콘서트. 효창운동장서 전노협주최 전국노동자대회 초청공연. ▲94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서 민예총 주최 ‘다시 서는 봄’ 공연 출연.합법음반 제1집 발매.세종문화회관 대강당서 ‘노래판굿 꽃다지’ 공연 출연.마당세실극장서 제4회 콘서트. ▲95년 소극장 오늘서 제5회 콘서트.창무포스크극장서 제6회 콘서트.연세대 대강당서 민노총 출범 축하공연.마당 세실극장서 제7회 콘서트. ▲96년 두레극장,마당 세실극장서 제8,9회 콘서트. ▲97년 제2집 앨범 발매.마당 세실극장,대학로 라이브1관에서 제10,11회 콘서트.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 발매.북한어린이돕기 거리공연. ▲98년 동숭아트센터서 콘서트
  • 왜곡보도 50건 선정

    언론개혁시민연대는 한국 언론의 대표적인 왜곡 보도사례 50건을 선정,2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전시실에서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새달 2일까지 계속되는 전시회는 독재권력을 정당화하거나 용공조작·인권유린 등에 앞장섰던 허위 왜곡기사들의 실체를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언개련이 선정한 허위 왜곡보도 사례 50건을 소개한다. □왜곡보도 50건 내용 ▲권력의 정당화­민주화 외면 ­자유당 4사 5입 개헌 정당화(서울 56년 3월) ­이승만 우상 숭배(서울 56년 3월) ­박정희 군부쿠데타 지지(경향,조선 61년 5월) ­10월 유신 지지(조선,중앙,서울,한국 72년 10월18일) ­부마사태 왜곡(경향,서울,중앙,한국 80년 10월) ­전두환의 권력 장악 정당화(서울 80년 4월) ­광주민주화 운동 포고로 매도(조선 80년 5월) ­전두환 미화­‘인간 전두환’(81년 8월) ­4·13 호헌 조치 옹호 ­김대중 친서설(연합 89년 7월) ▲냉전이데올로기 강화와 용공조작 ­이승복군 허위보도(조선 68년 12월) ­경향신문 기자 6명 용공혐의 구속(80년 5월)­김근태 용공조작 사건(경향,중앙 85년 10월) ­‘대학가의 음영’ 시리즈(경향 85년 10월) ­건국대 사태(86년 10월) ­평화의 댐(86년 10월) ­문익환 목사 기자회견(조선 89년 5월) ­북한 핵실험 보도(92년 6월) ­김평일 망명설 보도(94년 8월) ­성혜림 망명 사건(96년 2월) ­북한 공군 이철수 대위 귀순 사건 컬러 조작(96년 5월) ­북한정치범 수용소 보도(97년 7월) ­이석현 의원 명함 파문(97년 8월) ▲민중생존권 외면 인권 유린 ­광주대단지 사건(71년) ­함평고구마 피해보상 요구(76년) ­삼청교육대 왜곡(80년 8월) ­YH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79년 8월) ­권인숙양 성폭행 왜곡(86년 8월) ­노동자 대투쟁(87년) ­김기설 유서대필 논쟁(91년 7월) ­여의도 농민시위(94년 6월) ▲선정주의에 의한 오보 ­김구,이승만 동석 사진 조작 ­중공군 인해전술 사진 ­압록강변 병사 사진 ­일본군 독립군 작두 처형 사진 ­호랑이 출몰 사진(동아 80년 1월) ­김일성 주석 사망설(조선 86년 11월) ­사노맹 백태웅씨 옥중 결혼(중앙 92년 6월) ­서해 훼리호 백두운 선장 생존(한겨레 등 93년 10월) ­육영수 여사 파격 의혹(국민 90년 5월) ­뉴스위크 이대생 ‘돈의 노예들’ 사진보도(91년 11월) ▲언론사의 이기주의에 의한 왜곡 ­신문제작 거부 사태에 대한 견해(조선 75년 3월) ­동아투위에 대한 왜곡(동아 75년 3월) ­류근일 칼럼 ‘정주영 변수’(92년 7월) ­선거유세장 인파 조작(제주신문 92년 6월) ­지역민방 케이블TV 경영 수지 과장(95년 5월) ­중앙일보 대선 편파보도(97년 12월) ­월 펀슨 세계은행 총재 발언(97년 9월) ­재경원 발표(97년 11월) ­한국경제 위기 아니다(97년 4월)
  • 보직교수 2급 공무원 대우 ‘특호봉제’ 폐지/국립대도 구조조정

    ◎행정지원인력도 2년간 20% 감원 전국 51개 국립대(교대 및 전문대 포함) 보직교수들에게 적용돼왔던 특호봉제도가 폐지되고 부(副)처장과 부실장 직급이 없어진다. 또 국립대의 조직과 인원이 20% 가량씩 감축된다. 교육부는 26일 국립대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국립대학 1단계 구조조정안’을 확정,발표했다.이 방안은 오는 10월 국립학교설치령,서울대학교설치령,공무원보수규정 등 관계 법령을 개정한 뒤 내년부터 시행된다. 우선 현재 국립대 처장·실장·단과대학장 등 보직교수들에게 적용되는 특호봉제가 폐지되는 대신 보직에 상응하는 직책수당이 지급된다.5공 때 도입된 특호봉제는 보직교수들에게 교수 호봉이 아닌 공무원 2급 이상에 해당하는 급여를 주는 것으로 보직을 그만둔 뒤에도 계속 적용될 뿐만 아니라 퇴직금이나 연금 산정에도 영향을 미쳐 특혜 시비와 함께 예산낭비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보직체제에 있어서도 현재 서울대 등 19개교에 설치된 부처장이나 부실장제가 전면 폐지된다.대신 서울대 공대 등 신입생 정원이 1,000명을 넘는 8개대의 대규모 단과대에는 부학장제가 신설된다. 또 조직도 석·박사과정을 포함,입학정원이 9,000명을 넘는 서울대의 경우 현행 6개 처·실·국을 통폐합, 교무연구처와 학생교육처,사무국,기획처 등 4개로 줄이고 다른 대학들도 입학생 규모에 따라 3개 또는 그 이하로 줄어든다.과(課)단위 하부조직도 서울대는 22개에서 16개,경북대·부산대 등은 14개에서 12개,전북대·강원대 등은 14∼15개에서 11∼12개로 각각 감축된다. 이에 따라 51개 국립대의 처·실·국은 86개에서 68개로,과(담당관)는 426개에서 340개로 줄어들게 된다. 다만 과 단위 하부조직의 경우 대학별로 설치가능한 총수만 규정하고 명칭이나 사무분장 등은 대학이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했다. 행정지원 인력은 직원 1인당 학생수(36.6명)를 사립대 수준(44명)으로 조정하는 차원에서 내년부터 2년간 정원의 19.8%에 해당하는 1,603명을 줄이기로 했다.감축인원은 위생원이나 방호원 등 기능직이 대부분이며,청소·방호업무는 용역으로 대체된다.한편 교육부는 대학간 빅딜이나 연구·대학원중심 대학 선정,국립대 특별회계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2차 구조조정안도 조만간 확정,발표할 예정이다. ◎‘특호봉제’란/5공때 당근책으로 도입/금전 이득 커 특혜논란 특호봉제란 국립대(전문대 포함)의 평교수가 총장이나 처장,실장 등 보직을 맡을 경우 받는 호봉을 말한다.학생운동이 심했던 5공때 보직을 맡지 않으려는 교수들을 끌어 당기기 위한 일종의 ‘당근책’으로 도입됐다. 대학은 특1급에서 특4급까지 4등급이고,전문대는 특3·4급 뿐이다.특1호봉이 최고 호봉으로,공무원보수규정에 따르면 225만1,000원을 받는다.물론 연구비나 수당 등은 제외된 액수다.그러나 대학과 전문대는 보수체계도 다를 뿐만아니라 액수도 차이가 난다.일반 호봉도 대학은 33호봉까지이고,전문대는 35호봉까지다.같은 호봉이라도 대학교수가 전문대교수보다 조금 더 받는다.예컨대 특4호봉의 경우 대학교수 봉급은 183만8,400원이나,전문대 교수는 176만3,200원으로 이보다 7만원 가량 더적다. 대학 총장(한국예술종합학교장 포함)은 특1호봉,부총장은 특2호봉,대학원장·단과대학장·처장·기획연구실장·부속병원장 등은 특3호봉이 적용된다. 또 전문대 학장은 특3호봉이다. 이처럼 보직을 맡을 경우의 금전적 이득은 상당하다.물론 명예도 따른다.이런 이유로 대학가에서는 서로 보직을 맡으려는 경쟁이 치열하다.더욱이 총장직선제가 된 후 총장이 자파 교수들에게 1년씩 돌아가 면서 보직을 맡겨 이득을 취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자연히 특혜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교육부가 이번에 특호봉제를 폐지키로 한 것도 이런 문제점을 감안한 때문이다.
  • 민주열사 열전:3/崔鍾吉 서울 법대 교수(정직한 역사 되찾기)

    ◎“유신 사죄” 외친 참지식인/법학자답게 ‘정의의 저울’로 독재에 항거/반공주의자… 간첩혐의 조사받다 의문사 崔鍾吉은 서울대 법대 교수였다.그는 70년대초 유신독재를 공공연하게 비판했다.그러던 어느날 그의 비판의 소리가 사라졌다.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 속에 죽었기 때문이었다.공작정치를 자행하던 중앙정보부는 그를 간첩이라고 발표했다.독재권력에 의해 그는 간첩으로 왜곡됐다.그러나 죽은 사람은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수사중이었던 중앙정보부는 73년 10월25일 “구속수사를 받던 崔鍾吉 교수가 간첩혐의를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화장실 창문을 통해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崔교수가 사망한지 6일 뒤의 발표였다. 그러나 당시 유가족은 물론 崔교수를 아는 사람중 중앙정보부 발표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대부분 고문으로 죽자 자살로 위장했을 것이라고 믿었다.가족들은 검시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장례마저도 소리없이 비밀리에 치러야 했다.그의 죽음은 張俊河 선생의 죽음과 더불어 유신시대 최대 의문사 사건이다.그의 의문사는 독재권력의 인권유린과 민주화 탄압 및 공작정치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사건 1년여 뒤인 74년 12월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崔교수가 전기고문 도중 조작 실수로 심장파열을 일으켜 사망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강력히 제기했다.“그러한 의혹은 당시 모 신문사 기자가 취재도중 입수해 사제단에 알려온 정보를 바탕으로 제기됐다”고 사건 당시 정보부 직원이었던 P씨가 전한다.P씨는 사제단에 있던 한 신부의 고등학교 1년 선배다.그는 “앞서 열린 1주기 추도식때도 崔교수 죽음의 의혹이 제기됐었으며 몇개 신문의 초판에 실렸던 관련 기사가 밤사이 누락됐었다”고 전했다. 사제단은 88년 10월6일 서울지검 김두희 검사장 앞으로 崔교수 사인 진상규명을 위한 고발장을 제출했다.사제단은 “崔교수 사인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간첩 누명이 씌워졌다”고 주장하고 당시 사건 관련자로 이후락 정보부장 등 22명을 고발했다.崔교수 죽음의 의혹이 사건발생 15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민의 관심사로 등장했다.고발은 사건 당시 정보부 감찰실 직원으로 있던 崔교수 동생 종선씨(미국 거주)가 비밀리에 작성했던 수기가 바탕이 됐다.그는 사건 후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친구가 있던 세브란스 정신병동에 약 1주일간 입원하며 수기를 썼다. 그러나 수사는 겉돌았고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일인 10월18일 “崔교수가 타살됐다는 증거도,자살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유족들과 사제단의 자료,88년 검찰 발표 등을 종합하면 당시 정보부 발표는 의혹 투성이다.먼저 정보부는 “崔교수는 퀼른대학 유학중 중학동창생인 이재원·노봉유(미체포)에게 포섭돼 평양에 가서 간첩교육을 받은 사실이 밝혀져…”라고 발표했다.그러나 유족들은 “주범이 체포되지 않은 상태에서 포섭된 사람이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사고이후 시체를 현장에 두지 않고 급히 국립수사연구소로 옮긴 점,가족이나 변호인·의사의 검시 참여를 불허한 점,한장 뿐인 사체사진이 투신 자살(뒷머리가 깨지고,양쪽 손발이 부러졌다는 정보부 발표)을 전혀 입증하지 못한 점 등도 정보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게 했다.떨어진 지점이라는 곳도 종선씨가 그날 새벽 몰래 가본 결과 핏자국이나 이를 씻어낸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崔교수가 뛰어내렸다는 화장실 구조도 투신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지적됐다.162㎝의 작고 뚱뚱한 그가 수사관들을 6m 거리에 둔 채 잠긴 창문을 열고 150㎝ 높이의 창문턱을 잡고 올라 투신한다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이것은 정보부 감찰실에 근무하면서 건물구조를 잘 아는 동생 종선씨가 제기하는 최대 의혹이다. 이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는 이미 10년전에 지났다.그러나 진상규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정부나 국회의 적극적인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국민들은 당시 관련자들이 참회의 ‘양심선언’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다.종선씨는 수기에서 “그들도 언젠가 증언대에 서면 진실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착한 형제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진실규명에 대한 희망을 나타냈다. ◎외아들 光濬씨/“역사의 진실에 공소시효는 없다” 崔鍾吉 교수의 외아들인 光濬씨(34·부산대 법대 조교수)는 최근 독일에 다녀왔다.학술회의 때문에 갔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데 있었다.부친 행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그러나 이번에도 새로운 것은 얻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부친 모교인 퀼른대 출신인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 죽음의 내막을 알게 됐고,그 이후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자라면서 아버지의 억울한 사정을 알게 되면서 답답함만 더해 갔습니다. 자상한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왜 간첩누명까지 써야 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독일 유학시절 부친의 은사였던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 등 아버지가 만났던 교수 동료들을 만나 부친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보려 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시절 만났던 코헨,박스터,라이샤워 교수들에게도 전화나 편지로 도움을 청했다.“그들은 한결같이 부친의 결백을 믿었으며 억울한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고 光濬씨는전한다.특히 세계적인 민법학자 케겔 교수는 75년 독일 슈피겔지에서 崔교수 관련 기사를 읽고 당시 법무장관에게 의혹을 조사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光濬씨의 어린시절은 아픈 기억으로 가득하다.“1주기 추도식 때였어요.당시 명동성당에서 갖기로 했는데 정보부에서 막아 어머님이 저와 동생을 끌고 감시의 눈을 피해 사람이 많은 시장거리 등을 몇차례씩 통과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때문에 여러번 이사를 해야 했다. 학교를 옮겨 조금만 있다보면 자신을 보는 친구나 선생님들의 눈치가 이상하게 느껴지곤 했다고.그는 결국 고등학교만 마치고 유학길을 택해야 했다. 사건 이후 미망인 백경자씨(62·의사)는 “오로지 남편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 왔다”고 했다.그녀는 당시 열살,여덟살이던 光濬·希晶 남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이사다니기를 반복해야 했고 ‘자랑스런 아버지’였다는 점을 심어주어야 했다.덕분에 光濬씨는 아버지 뒤를 이어 민법학자가 됐다.希晶씨(32)는 성신여대를 나와 출가해 미국에 살고 있다. ◎왜? 촉망받던 그가 죽음을 당했나/권력핵심부 거침없는 비판/독재정권의 ‘눈엣 가시’ 崔鍾吉 교수는 촉망받던 젊은 학자이자 의식있는 지식인이었다.그는 모교인 독일 퀼른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남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그러나 “모국에서 배움의 의지에 불타는 법대생들 앞에 서는 것이 내 소망이요 소명”이라고 뿌리치며 귀국했다고 가족과 당시 동료교수들은 전한다. 하버드 대학의 코헨,라이샤워,박스터 교수 등은 崔교수에 대해 ‘그는 애국자였으며,위대한 학자요,우리들의 친구”였다고 말했다고 한다.코헨 교수는 후일 미국의 한 신문에 ‘우울한 한국(Gloomy Korea)’이란 기고를 통해 崔교수 죽음을 애도하고 한국 공작정치를 비판했다고 아들 광준씨가 전한다. 간첩혐의에 대해서 가족들은 “본인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코웃음을 칠 것”이라고 했다.아들 光焌씨는 “아버님은 학도병 출신입니다.학도병시절 한국전쟁 전선에 투입되기 전 일본에서 몇개월간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한국말을 쓰며접근하는 사람을 매우 조심했다고 당시 친구분들에게서 들었어요.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고 해요.아버님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崔교수를 비극의 죽음으로 몰고간 시대적 상황은 무엇일까.사건 2달여전인 73년 8월8일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적으로 도덕적인 치명상을 입고 있었다.아울러 조용하던 대학가에서 반 유신시위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서울법대에서도 연이어 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교내에 진입해 시위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연행해 갔다.이에 대해 崔교수는 교수회의에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학생들을 구타하고 고문하는 무도한 행위에 대해 정의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모른 체하면 안된다”“서울대 총장은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와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정보부는 결국 수사중이던 간첩사건(崔교수 출두전 간첩사건은 거의 수사가 종결돼 있었다고 사제단은 판단)에 崔교수를 엮어 반유신투쟁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던 것 같다.동생 종선씨는 88년“공공연하게 정권을 비판하는 형님을 손보려고 했으나 뜻하지 않게 조사도중 사망하자 사인을 은폐하기 위해 어거지로 간첩혐의를 씌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崔鍾吉 열사 연보 ▲1931년 충남 공주에서 4남1녀중 차남으로 출생 ▲1950년 인천 제물포고 졸업 ▲1951년 학도병 입대 통역병 근무 ▲1957년 서울 법대 대학원 졸업 ▲1962년 독일 퀼른대학 법학박사 ▲1964년 서울대 법대 전임강사 ▲1970년 2년간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연수 ▲1972년 서울대 법대 교수 ▲1973년 11월16일 중앙정보부(남산)에 출두 ▲1973년 11월19일 새벽 1시30분 사망
  • 심각한 대졸 취업문제(사설)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실업사태 속에 지난해 하반기와 올 상반기 대학 신규졸업자의 취업률이 68년이후 최악인 50.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IMF 한파로 실업자가 200만명에 육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이라고 취업이 제대로 될리가 없겠지만 대학 신규졸업자의 취업이 이처럼 어렵다는 것은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에게 청운의 꿈 대신 실망과 깊은 좌절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대학가에서는 치열한 취업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본격적인 취업시즌인 올 하반기에는 지난해보다 취업이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기 때문이다.일반 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마다 많은 대졸 신입사원을 뽑던 은행과 공기업 등이 퇴출이나 통폐합,구조조정으로 신입사원을 거의 뽑지 않는데다 대기업들마저 신규채용을 대폭 줄일 계획이다.취업설명회마다 대졸예정자들이 넘쳐나고 어쩌다 채용공고나 의뢰라도 있으면 너무 많은 지원자가 몰려 공고마저 은밀하게 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바늘구멍같이 좁은 취업문을 뚫기위해 전공은 팽개쳐둔채 취업시험공부에만 매달리는가 하면 아예 취업을 포기하고 고용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졸업을 미루기 위해 휴학을 하거나 군에 입대하는 학생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취업을 위한 ‘재수’‘3수’생들도 수두룩하다.대학이 ‘취업학원’처럼 변하고 있으며 학문적 기초를 다진 건전한 전문인을 양성하는 대학교육의 본질마저 위협받고 있는 걱정스러운 실정이다. 전반적인 실업대책의 마련과 함께 새로 대학을 졸업하는 취업희망자들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본다.많은 투자를 하여 기른 젊은이들에게 최소한의 사회참여 기회를 주는 것은 사회 전체의 책임이며 기성세대의 의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더구나 신규 대졸자들은 침체된 우리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한 새로운 수혈이자 원동력이며 내일에 대한 희망이다.보수의 다과(多寡)는 문제가 아니다.오늘의 경제가 어렵다고 하여,있는 사람을 정리하는 것보다는 신입사원을 뽑지 않는 것이 손쉽다고 하여 내일에 대한 인력 투자를 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성장잠재력은 크게 훼손될것이다. 경제사정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어려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 신규 대졸자의 취업은 늘려야 한다.생각만 있으면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인턴사원을 늘리거나 연봉계약제를 확대하는 것도 검토해봄직 하다.대졸자들도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정부와 기업의 특별한 배려를 당부한다.
  • ‘솔아 푸르른 솔아’노찾사(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7)

    ◎온동권 노래 대중속으로/직접 녹음 테이프 30종 인기 노동현장 등 공연 1,000회/84년 첫음반 창고로 직행 아픔 심의 굴레 벗고 10년만에 해방/사회적이고 진지한 메시지 상업성에 밀려 설자리 잃어 ‘운동권 가수들’‘운동권가요의 대명사’‘민중가요의 기수’….이쯤 거론하면 어렵지 않게 떠오르는 노래패가 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지난 70∼80년대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아슬아슬한 수위의 노래들을 노래방으로까지 끌어들여온 주인공들이다. 이젠 일반인들에게도 생소하지 않은 노래패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겪고 있는 갈등은 예사롭지가 않다. 험한 시절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노래운동을 벌여 왔지만 지금 설 땅이 여의치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노래패가 서로 다른 노래운동을 펼치고 있는 요즘 ‘노찾사’의 자리는 어디쯤 될까. 84년 첫 음반을 내고 현장공연을 통해 운동권 노래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인 ‘노찾사’. 지금까지 모두 6집의 음반을 냈지만 이 음반들은 ‘노찾사’가 부르고 일반인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진 노래들의 극히 일부분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노찾사’의 많은 노래들은 왜 아직도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입을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을까. 지난 94년 12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노찾사’ 10주년 기념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공연된 노래들은 대학가와 시위·노동현장에서 불려졌고 불려지던 레퍼터리들. 단원들의 가슴은 마구 뛰고있었다. 걸어왔던 길이 험난하기만 했던 까닭에 감흥이 예사롭지가 않았던 것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흔히 ‘노찾사’로 더 잘 알려진 이들은 사실상 70년대말 대학가 노래패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서울대와 연세대,고려대의 노래패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새벽’이 그것. 70년대 후반 급박한 사회현실 속에서 노래로 시대상황을 풀어내던 노래모임이었다. 이들이 대학을 나와 합법적인 활동을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직접 부르고 녹음한 테이프를 통해 운동권 노래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불법이었다. 84년 ‘새벽’의 몇몇 구성원이 현실과 협상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노찾사’다. 84년 처음 낸 합법음반의 이름이 그대로 노래패 이름이 된 것이다. ‘새벽’에서 독립해 노찾사를 만들어낸 창단 멤버는 金昌南·金濟燮·文昇鉉·韓東憲·金甫成씨 등 10여명. ‘대중 속에서 활동’을 내걸고 열린 마당을 택했다.“‘새벽’이후 만들어 유통된 불법 테이프가 20여종이 넘습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재야 인사들의 활동비용중 많은 부분이 이 노래 테이프 판매 수익금으로 충당됐었지요. 이 노래들이 자연스럽게 ‘노찾사’의 입과 연주를 통해 대중에게 친숙하게 됐다고 보면 됩니다. 노래방에서까지 인기곡이 될 정도였으니까요”(金昌南 성공회대 교수) 합법적인 공간을 택했지만 공연윤리위원회의 벽을 넘기란 쉽지가 않았다. 84년 첫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1’부터 제동이 걸렸다. 적지 않은 노래들이 심의에서 탈락되거나 수정을 거쳐 통과됐다. 그러나 음반이 나온지 불과 1달도 못돼 창고에 쌓이고 말았다. 물론 공연무대도 허용되지 않았다. 음반이 나온지 3년만인 87년 10월에야 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첫 공식공연을 가질 수 있었다. 감격적인 무대였다. 이 때부터 전국 어디든지 사람이 있는 곳이면 마다않고 찾아갔다. 89년 9곡이 실린 2집을 냈다. 이 때도 적지않은 곡들이 빠지거나 수정돼야 했다. 6·29선언을 이끌어낸 민주화의 분위기에서 80만장이 팔려나가는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었다. 창고에 쌓여있던 1집이 다시 팔리기 시작했다. 노래들이 입에서 입을 통해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퍼져나갔다. 이들이 주로 이용한 공연무대는 소극장을 중심으로 종교·노동단체들이 제공한 소규모 공간. 중앙무대와 대공연장에 서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94년 세종문화회관의 10주년 기념공연은 그야말로 어렵게 가진 자리였다. 노래운동의 상징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87년부터 공연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마침내 공연을 성사시켰지만 정보과 형사들로부터 “가만두지 않겠다”“두고보라”는 등 협박과 압력이 끊이지 않아 현실의 벽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실감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이에 앞서 열린 92년 문예회관 공연도 마찬가지. 어렵게 허가가 났지만 공연 직전까지도 관계자들이 공연을 저지하려는 공세를 펴 가슴을 졸이며 공연해야 했다. 94년에 가서야 ‘노찾사’는 자유롭게 된다. 첫 음반을 낸지 10년만이었다. 그동안 실리지 못했던 노래들이 이 해 발매된 4집 앨범에 대부분 담길 수 있었다. 91년 낸 3집 앨범에서만도 노동현장의 분위기를 담은 노래 ‘그리운 이름’ 중 ‘해방’이 ‘어머니’란 단어로 바뀌었고,녹음까지 마친 ‘백두에서 한라,한라에서 백두’가 결국 음반에서 빠졌던 것을 볼때 커다단 변화였다. 87년부터 지금까지 가진 공연은 1,000여회. ‘노찾사’를 거쳐간 安致環 權眞媛 金光石(96년 사망)씨 등은 유명가수가 됐다. 이제는 운동권 노래 집단이라는 평은 듣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대중들에게 운동권이란 말이 어색하게 들려질 정도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에선 이들의 노래를 듣기가 쉽지 않다. 금지가 그 이유는 아니다. 지난 88년부터 노찾사에서 활동하고 있는 孫防日씨(31)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맡았던주체들이 주변화되고 있다고나 할까요. 80년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노래운동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치중해온 사회적이고 진지한 음악이 상업성에 밀려 설자리를 잃고 있지만 노래패 본래의 의미를 살려 이 노래들을 다시 살려낼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사연들/방송 타는 노래 3∼4곡 불과/노래방에서도 불려지지만 댄스에 채이고 트로트에 밀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어머님의 눈물이/가슴속에 사무쳐우는/갈라진 이 세상에/민중의 넋이 주인되는/참세상 자유 위하여/시퍼렇게 쑥물 들어도/강물 저어가리라…”(솔아,푸르른 솔아) 흔히 불려지는 이 노래가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레퍼터리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노찾사’ 출신의 가수 安致環씨가 연세대 재학시절 총학생회장 선거지원 유세용으로 만들어 불려지기 시작해 6·29 민주화 열풍을 타고 일반인들에게 친숙해진 노래다. 이처럼 대학가와 노동계 시위현장에서 불려지다 대중의 노래가 된 ‘노찾사’ 노래는 적지 않다. 그러나방송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는 ‘솔아…’‘광야에서’‘사계’ 등 3∼4곡 정도다. ‘노찾사’가 꾸준히 의식있는 노래 보급에 앞장서 왔지만 다른 노래패들에 비해 오히려 입지가 좁아졌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찾사’ 보다 훨씬 늦은 92년말 생겨나 노동가요를 현장공연을 통해 보급시키고 있는 ‘꽃다지’만 하더라도 노동계에서 자리를 굳혔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공연장,특히 공공시설에서 무대를 가질 때마다 경찰의 감시를 감내해야만 했던 제약을 딛고 노래운동을 벌여왔던 ‘노찾사’의 입장에선 안타까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솔아 푸르른 솔아’‘광야에서’‘사계’ 같은 노래들은 노래방에서도 인기곡 순위에서 빠지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인기를 끌고 있는 노래들은 이들 몇 곡뿐이다. 지난 70∼80년대 삭막한 정치·사회 현실에서 그나마 돌파구를 제시하며 갈증을 해소해 주었던 노래들이 이제와선 청소년 위주의 댄스뮤직과 나이든 세대들의 트로트에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현실의 순화로 퇴락했다고나 할까. 불법 테이프가 불티나게 팔리고 유행가 개사곡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시절 이노래들이 지지를 얻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노찾사의 길 ▲84년 노래패 ‘새벽’에서 ‘노찾사’ 모임 독립.‘노래를 찾는 사람들1’ 발매. ▲87년 기독교100주년기념관서 첫 공연. ▲88년 예술극장 미리내서 제1회 민족극한마당 특별초청공연. ▲89년 두번째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2’ 발매. 연세대 100주년기념관서 한돌·정태춘·노찾사 합동공연. ▲91년 3집 발간. ▲92년 ‘끝나지 않은 노래’ 지방 6개도시 초청순회공연. ▲94년 4집 발간. 10주년 기념음반 ‘떠남과 만남을 위한 하모니’ 발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서 10주년 기념공연. ▲97년 미발표곡과 히트곡 모음집 ‘노래를 찾는 사람들­모음하나’ 발매.
  • ‘독도는 우리땅’ 정광태(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6)

    ◎“홀로섬” 사랑이 韓·日 외교에 희생/꼬마부터 노인까지 불러 국민가요 대접/日 교과서 파동에 감정악화 우려 판금/문공부차관에 간청… 넉달만에 ‘복권’ “울릉도 동남쪽/뱃길따라 이백리/외로운 섬하나/새들의 고향/그 누가 아무리/자기네 땅이라 우겨도/독도는 우리 땅”(독도는 우리 땅) 지난 80년대 초반,어눌한 말투와 친근한 인상으로 ‘독도는 우리땅’을 불러 유명세를 탔던 가수 鄭光泰(43)씨. 개그 노래를 처음 소개하며 연예인 생활을 시작해 ‘독도는 우리땅’으로 일약 스타가 됐던 인물이다. 노래명이 전국의 음식점 간판에 즐비하게 등장할 정도로 폭 넓게 불려지던 노래 덕분에 인기의 맛을 톡톡히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에 얽힌 끈에 매여 살고 있다. 동네 꼬마부터 칠순 노인까지 부담없이 따라부르던 국민가요가 한 순간 금지곡으로 묶인 충격 탓에 적지않은 좌절을 느껴야만 했다. 1983년 7월말.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3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받아 “좋은 노래를 불러 감사한다”는 뜻의 감사패를 받고 한창 들떠 있을 때였다. 방송에서도 앞다투어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내보냈고 鄭씨도 방송 출연 섭외를 감당못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독도 가수’ 鄭光泰는 그 날도 어김없이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 나타났다. 지난해 1월 ‘독도는 우리 땅’ 레코드 취입후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져 있었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방송에 깊숙이 빠져살 만큼 방송국 일은 그야말로 신바람 그자체였다. 녹화에 앞서 담당PD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막 들어가려던 순간 사무실 입구 게시판을 보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창 인기절정이던 노래 ‘독도는 우리땅’이 금지곡 명단 맨 꼭대기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때만 해도 금지곡으로 묶이고 나면 어디 한 군데 하소연할 곳도 없던 시절. 방송에서 일단 금지곡 지정이 되면 항의조차 할 수 없이 그냥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가사에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더군요. 누구나 부담없이 입에 올리던 노래를 갑자기 부를 수 없게 될 때정작 그 노래를 불렀던 가수가 느끼는 좌절감이란…” 그 길로 방송국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10년전 연예인이 되고 싶어 명동의 한 카페에서 시작한 자신의 연예계 생활도 그것으로 끝이 나는 줄 알았다. 鄭씨가 ‘독도는 우리 땅’과 맺어지게 된 것은 10년전인 73년 고교졸업후 명지대 입학전 명동 르시랑스 카페를 찾은데서부터 시작된다. 음악 평론가 李白天씨가 운영하던 이 카페는 가수 宋昌植 어니언스 李秀滿 蔡恩玉씨 등이 고정적으로 출연해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던 곳. 아마추어 무대가 매일 마련됐는데 여기서 토크송 ‘한심이’를 불렀다. 李章熙씨의 노래 ‘겨울 이야기’를 우스꽝스런 가사로 바꿔 부른 노래였는데 李白天씨의 눈에 띄어 주1회씩 사회자로 무대에 서게 됐다. 이후 방송가에 알려지게 돼 최초의 개그프로인 TBC ‘살짜기 웃어예’에 토크송과 개그를 선보였고 78년 새로 만들어진 KBS 개그프로 ‘유머1번지’에서 본격적인 개그맨으로 인기를 누리게 된다. 당시 林河龍 張斗碩 金正植과 함께 포졸 옷을 입고 KBS 朴仁浩 프로듀서가곡을 쓰고 직접 만든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불렀던 것. 방송에서 인기를 끌자 대성음반 徐喜德 사장이 레코드 취입을 의뢰해 왔다. 코미디 프로에 함께 출연했던 林씨 등 4명이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다가 徐씨가 늦는 바람에 鄭씨 혼자 기다려 결국 鄭씨만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르게 됐다. 레코드가 나오면서 이 노래는 계속 상승세를 타 전국에서 불려졌고 鄭씨는 83년 KBS TV ‘젊음의 행진’ 프로에서 독무대를 맡기까지 됐다.. 鄭씨가 금지사유를 알게 된 것은 해금이 되고 한참이 지난 뒤였다. 비록 83년 7월말부터 그해 11월말까지 4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금지의 삶이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에 사연을 알고난뒤 허탈감까지 느껴야만 했다. 82년 일본 열도와 한국의 정계·학계를 발칵 뒤집은 일본 중고교 교과서 파동이 그 발단이었다. 84년부터 새로 사용될 교과서에서 한·일 과거사 왜곡이 문제되자 83년 6월,문제발생 1년만에 왜곡 내용을 고친다면서 한국에 시정내용을 알려와 양국간에 긴장감이 돌았다. 국내에서도 이 개선시안을 놓고 첨예한 의견대립이 일었다. 이와 맞물려 83년 8월29일 제12차 한·일 정기각료회담,9월6일 한·일 의원연맹 제11차 합동총회가 예정돼 있어 당국에서 반일감정이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 시점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 금지곡이 되자마자 鄭씨는 자연스럽게 방송에서 퇴출당했고 그 때부터 방송국 주변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독도는 우리 땅’이 다시 불려지게 된 것은 83년 11월말쯤이었다. 느닷없이 방송국 간부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許文道 당시 문공부차관이 만나보고 싶어한다는 귀띔이었다. 용기를 내서 문공부로 許차관을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許차관이 “평소 독도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격려했고 鄭씨가 ‘독도는 우리 땅’을 다시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로부터 1주일뒤 각 방송매체에선 ‘독도는 우리땅’이 다시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독도는 우리땅’은 그렇게 부활했다. 그해 연말 KBS 방송대상에서 신인가수상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는 역시 KBS 가사대상에서동상을 탔다. 96년 鄭씨는 또 한번 ‘독도는 우리 땅’과 연을 맺게 된다. 이번에는 독도 분쟁이 첨예하게 불거졌다. 1960년부터 6년동안 친구가 운영하던 샌프란시스코 한인방송인 ‘한미라디오’ 진행을 맡고 있었을 때였다. 국내 선후배와 레코드사들이 귀국해 노래를 불러달라는 주문을 해왔다. 방송을 중단하기가 힘들었지만 서둘러 돌아왔다. DJ DOC과 함께 옛 ‘독도는 우리 땅’ 리메이크곡을 취입했다. 반응은 별로 신통치가 않았지만 83년 금지곡 사건 때의 악몽이 어느정도 씻어진 것 같아 마음은 편했다. ◎사연들/“독도의 가치 희석” 주장도/‘대마도는 일본 땅’은 잘못/“바꿔 불러라” 항의 받기도 개그 가수 鄭光泰씨가 털어놓는 독도관련 사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뒤부터 스타가 된뒤 독도 명예군수 위촉, 느닷없는 금지곡 판정으로 인한 실망, 해금후 신인상 수상, 미국생활중 귀국 등 연쇄적으로 겪은 일들이 극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무엇보다 ‘국민가요’로까지 인식되며 애창되던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이 금지곡으로 전락한 것이나 문공부장관이 금지곡 가수를 직접 만나 해금을 약속한 것이 아이러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 크게 유행하자 이 노래에 대한 평도 갖가지였다. 팬 레터가 답지하더니 가사를 문제삼은 편지·전화공세가 이어졌다. 광복회와 향토사학자들의 항의도 빗발쳤다.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인데 왜 노래를 불러 독도의 가치를 희석시키냐”“역사적으로 볼 때 대마도도 우리 땅인데 왜 일본 땅이라고 하느냐” 등 강도높은 항변이 쏟아졌다. 어느 향토사학자는 서울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관련자료를 제시하며 鄭씨를 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鄭씨는 96년 귀국해 리메이크한 노래에서 “하와이는 미국 땅,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 땅”으로 바꿔 불렀다.(원래 가사는 “…/대마도는 일본 땅/…”)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현실비판적으로 불려진 ‘독도는 우리 땅’ 개사곡도 적지 않아 이 개사곡들 때문에 금지곡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 노래들은 대부분 일본의 교과서 파동으로인한 반일감정과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열악한 노동조건 등을 꼬집은 것들. “…일제 패망 이후 임자없는 땅이라고 공짜로 삼키면 정말 곤란해…한반도는 우리 땅”“꼴뚜기가 뛰면은 망둥이도 뛴다고 군국주의 역사왜곡 패망지름길 미국신경 쓰다보니 일본신경 못쓰네 조선사람 조심해”“대한민국 노동자 부지런한 노동자 조출에 잔업에 특근에 철야 장시간 노동에 기아임금 받으며 선진조국 좋아하네…”. 모두 당시 사회상과 정치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길 ▲55년 서울 출생. ▲74년 서라벌고 졸업. 명지대 무역학과 입학. 명동 르시랑스 카페에서 토크송으로 주목받기 시작. TBC TV ‘살짜기 웃어예’ 출현. ▲78년 KBS TV ‘유머1번지’ 출현. ▲82년 대성음반서‘웃기는 노래와 웃기지 않는 노래’(독도는 우리 땅 수록) 취입. ▲83년 ‘독도는 우리 땅’ 금지곡 지정·해금. KBS 신인가수상 수상. ▲84년 KBS 가사대상 동상 수상. ▲88년 무용가 김일현씨와 결혼. ▲90년 한미라디오 방송 진행맡아 도미. ▲96년 귀국.‘독도는 우리 땅’리메이크. ▲현재 댄스그룹 ‘벅’ 매니저로 활동.
  • 병무비리 수사/崔弘運 논설위원(外言內言)

    유전면제(有錢免除),무전현역(無錢現役)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대학가에는 오래 전부터 병역면제는 신(神)의 아들,카투사 입영은 장군의 아들,방위병은 사람의 아들,현역은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말도 유행하고 있다. 이번 병무비리수사 결과를 보면서 이런 유행어들이 터무니 없는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전 지방국세청장,의대 교수,한의사,은행 지점장,대기업 이사,고교 교사,정당 지구당 위원장,공기업 간부,중소기업 대표,구의원 등 하나같이 사회지도층 인사들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누구보다 먼저 달려나가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이 바로 내 아들만 편하고 안전하게 키우겠다는 생각으로 수천만원씩이나 뿌린 ‘그릇된 자식사랑’의 장본인들이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검찰이 공개한 명단을 보면 이들 지도층 인사뿐 아니라 중산층과 포장마차 주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각 계층이 골고루 포함돼 있다. 이는 이번 사건의 주범 元龍洙 준위가 지난 96년 12월부터 지난 2월까지 봐준 438명을 조사한 결과지만 그가 지난 10년 동안 돈을 받고 부당하게 처리한 사람은 3,000∼4,000명선에 이를 것이라고 검찰은 추산하고 있다. 또 元 준위를 통하지 않고 병역의무를 멋대로 우롱한 사람들의 신분과 수는 범인(凡人)들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이러고도 나라가 이만큼이나마 지탱하는 것을 보면 주어진 일을 묵묵히 성실히 수행하는 더 많은 애국자들이 있나 보다. 병역은 국민의 기본의무다. 하루,한시간이 아까운 젊은 시절,군복무 2년 반은 허송세월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이것만은 지켜야 하고 그래서 그 의무를 신성하다고 까지 표현하지 않는가. 이번 수사대상에 오른 사람 가운데 뇌물을 준 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무혐의 처리된 사람도 199명이나 된다. 이들은 과연 깨끗한 사람들인 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3선 의원으로 정당 부총재까지 지낸 사람이 있는 가 하면 현직 부장판사와 지방신문 전무도 포함돼 있다. 또 같은 사안을 두고 어떤 사람의 구속영장은 발부되고 어떤 이의 영장은 기각됐다. 이에 대해서도 형평을 잃은 처사라는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는실정이다. 기왕에 칼을 빼 들었으면 끝까지 매끄럽게 처리했어야지 뒷맛이 개운치 않다. 매사 완벽하게 매듭짓지 못하는 잘못을 이번에도 되풀이한 것 같다. 신성한 병역의무를 부당한 방법으로 기피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 ‘행복의 나라’ 한대수(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5)

    ◎“물좀 주소 물좀 주소 목마르오/시대의 갈증 노래했는데…”/68년부터 명동·대학가 활동/통기타·청바지 문화 선도/2집 앨범 “체제전복” 낙인찍혀/75년 渡美… 음악활동 계속/지난달 일시 귀국 에세이 출간/“개인무대 갖는게 작은 소망” 1975년 한 해를 마감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인 12월 어느날 김포공항 대합실.긴 머리에 청바지 차림의 한 청년이 초췌한 모습으로 뉴욕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한국 가요계에 파문을 일으키며 청년문화를 주도하던 가수 韓大洙(50)였다.미국 유학후 숨가쁘게 살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갔다.자신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땅의 분위기가 한스럽기만 했다.채 피어나기도 전에 꺾여진 꽃처럼 자신의 음악을 가슴에 묻은 채 한대수는 그렇게 훌쩍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짧은 활동기간에 비해 뚜렷한 인상을 남긴 이색적인 경력의 싱어 송라이터.통기타와 자유의 청년문화를 생겨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당시 트로트와 사랑타령 일색이던 대중가요를 뿌리째 뒤흔들며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던 가수 韓大洙.그는 왜 한국을 떠나야만 했을까.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굴곡이 많은 개인적인 삶을 살았던 그였다.핵 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실종으로 7살때부터 줄곧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10살때 미국으로 이주해 3년간 미국생활을 한뒤 돌아와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쳤다.17세때 미국에 사는 아버지의 소재가 확인돼 다시 미국으로 옮겨 고교를 다녔지만 적응하지 못한채 방황의 10대를 보냈다.韓씨의 재능은 이때 발견된다.상담교사의 도움으로 시와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나중에 국내에서 히트했던 ‘행복의 나라’‘그날까지’‘옥의 슬픔’같은 노래들이 모두 이때 쓴 것이다.고교졸업후 뉴햄프셔 대학 축산과에 진학했으나 적성이 맞지않아 중퇴,뉴욕 사진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귀국한 게 1968년 초.이때 한국의 가요사는 다시 쓰이게 된다.당시 국내 가요계는 트로트가 지배하던 시기.국내에선 처음으로 싱어 송라이터로 데뷔한뒤 발로뛰는 음악인의 생활로 접어든다.서울 무교동의 ‘세시봉’과 명동의 ‘오비스캐빈’에서 청바지,가죽장화 차림에 통기타 하나들고 포크록을 소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이듬해인 69년 이렇다할 공연무대에 서기엔 아직 무명가수였던만큼 대학가를 돌기 시작했다. 총학생회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공연을 의뢰해 축제기간중 이화여대와 서울대,서강대,부산대 강당공연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이때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게 됐다.그리고 그해 겨울 그 유명한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그때만해도 드라마센터는 고상한 장르의 유명인들에게만 공연이 허용되던 곳.무명의 대중가수가 무대에 오른 것 자체가 화제거리였다.평소 韓씨의 음악에 매료된 팬들이 어렵게 마련한 데뷔 콘서트였다. 벼르고 별렀던 무대였던 만큼 혼신을 다한 공연이었다.이틀 공연 모두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대성공이었다. 74년 군에서 제대하고 나니 유명해져 있었다.자신이 곡을 쓰고 金敏基가 부른 ‘바람과 나’,楊姬銀이 부른 ‘행복의 나라’가 인기곡으로 불려지고 있었다.신세계레코드사에서 앨범제작 의뢰가 들어왔다.그래서 만든 첫 앨범이 ‘멀고 먼 길’이다.너무나도 반가운 제의라 하루만에 녹음을 모두 마쳤다.‘물좀 주소’‘행복의 나라’‘바람과 나’등 수록곡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그리고 1년도 채 안돼 시련이 닥쳐왔던 것이다. 75년 가을 두번째 앨범을 만들었다.코리아헤럴드 기자로 재직중일 때였다. 기자로 일하면서 오후엔 남모르게 레코드 취입을 하느라 코피를 쏟기가 일쑤였다.마침내 레코드가 나왔다.이제 자신의 음악을 인정받는 뿌듯함에 마냥 들떠 있었다.기쁨은 채 2주가 못돼 좌절로 바뀌었다.당시 문공부에서 레코드 수거령이 떨어졌다.체제전복적 음악이란 낙인이 찍혔다.첫 앨범 ‘멀고 먼 길’도 함께 묶였다. “‘물좀 주소’등 히트곡들이 대학생들 사이에 번져가면서 정치·사회상 황에 맞물려 당국의 곱지않은 시선을 받았던게 사실입니다.당국이 ‘물좀 주소’에선 물고문을 연상했던 것 같아요.두번째 앨범은 표지가 문제였지요.녹슬은 철조망에 고무신이 걸려있는 모습인데 한국적 정서와 민중을 상징한 것이지요.죄수(철조망)가 흰 고무신을 신으니 박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었지요” 동양방송과 기독교방송 음악프로 출연도 막혔다.어쩔 수 없이 명륜동 자취방에서 직접 노래하고 녹음한 테이프를 만들어 매장에 내다 팔았다.테이프는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이 테이프는 첫 앨범 취입 전부터 하나 둘씩 만들었던 것으로 이렇게 만든 테이프만도 100여개가 넘는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감시망이 좁혀지면서 테이프 제작도 할 수 없게 됐고 더이상 설 땅이 없어졌다.마침내 미국행을 결심했다.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면서 시·사진·음악활동을 계속했다.89년 ‘무한대’,90년 ‘기억상실’,91년 ‘천사들의 담화’ 등 레코드도 세 집을 냈다.종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자신의 삶을 담은 노래들이다.지난해 가을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록그룹 10개가 참가한 록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80년 일시 귀국해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약식 공연을 가진지 17년만의 무대였다.그리고 지난달 잠시 귀국해 자전적 에세이집을 냈다.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기록이다. 75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는 韓씨는 이렇게말한다.“그 시대 정책 자체에 반감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어느 나라나 국가정책과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정신은 엇갈리기 쉽지요.당시 정부의 목적의식을 흐리는 활동이 제재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문화예술인들이 심한 갈증을 느끼는건 당연했구요. 오랫동안 나를 못봐온 팬들을 위해 개인무대를 갖고 싶습니다” ◎사연들/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철조망 유신압제 상징 이유/‘고무신’·‘첫 앨범 잇따라 판금/‘행복의나라’ 희망 메시지 가득한데 68년 귀국후 세시봉과 오비스캐빈에서 시작된 韓大洙의 국내 음악활동은 불과 7년만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귀국전 미국 생활에서 반문화운동(카운터 컬쳐 무브먼트) 경향의 포크록에 심취했던 만큼 국내에서의 활동도 자연스럽게 자유와 젊음으로 대변되는 이 음악으로 시작됐다.미국 고교시절 답답한 생활을 노래에 담은 노래들이 70년대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금지곡이 된 것은 우연의 일치다.대학가를 돌면서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고 금지문화의 한 주역이 된 것도 사실상 노래말의 상징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좀주소’와 ‘행복의 나라로’는 그의 대표적인 노래.“물좀 주소 물 좀 주소/목마르요 물좀 주소/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놀리면서 밖에 보내네/아 가겠소 난 가겠소/저 언덕위로 넘어 가겠소/여행도중에 그 님 만나 본다면/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물좀 주소).“장막을 걷어라/나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창문을 열어라/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가벼운 풀밭 위로/나를 걷게 해주세/봄과 새들의 소리/듣고싶고 울고 웃고 싶소/내마음을 만져줘/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행복의 나라로) 유신정권의 압제 아래서 자연스럽게 현실 비유적인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었고 대학가에선 더욱 인기가 좋았다.물은 갈증을 해결하는 그 무엇이며 행복의 나라는 답답한 상황으로부터의 탈출과 희망의 의지가 역력한 상징임에 틀림없다.특히 金敏基 楊姬銀 등 사회성짙은 노래를 주로 불렀던 이들에 의해 불려지면서 자연스럽게 화살이겨냥됐고 마침내 철조망과 흰 고무신을 표지 사진으로 쓴 ‘고무신’ 앨범으로 피할 수 없는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자유의 길’‘병든 고아’‘술 취한 여자’‘물좀 주소’ 등 노래마다 일일이 검열을 당했고 레코딩까지 허락됐던 앨범 몰수는 韓씨를 떠나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의 길 ▲48년 부산출생. ▲64년 부산 경남고교 입학. ▲65년 미국 롱아일랜드 고교로 전학. ▲66년 뉴햄프셔 대학 수의학과 입학. ▲67년 뉴욕 사진학교에서 사진 전공. ▲68년 귀국.작사·작곡가·가수로 데뷔. ▲69년 드라마센터 공연. ▲70년 군입대. ▲74년 첫 앨범 ‘멀고 먼 길’ 발표. ▲75년 두번째 앨범 ‘고무신’ 발표,금지.미국으로 돌아감. ▲89년 ‘무한대’ 발표. ▲90년 ‘기억상실’ 발표. ▲91년 ‘천사들의 담화’ 발표. ▲98년 현재 뉴욕에서 사진작가및 창작활동중.자전적 에세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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