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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 원내교섭단체 “불안한 첫발”/자민련 국회 「등록」 안팎

    ◎20명 턱걸이… 광역장 1명 출마땐 “무효”/국고보조 큰 차이… 무소속영입 안간힘 통합 자민련이 25일 국회에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했다.이로써 지방선거를 앞두고 일단 민자당,민주당,자민련의 새로운 3당구도가 형성된 셈이다.지난 93년 3월 제3당이던 국민당이 교섭단체자격을 잃은지 2년2개월 만이다. 통합 자민련에 참여한 의원수는 자민련 출신 12명과 신민당 출신 8명이다.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인 20명을 간신히 채웠다.신민당의 임춘원의원과 현경자의원은 참여하지 않았다. 교섭단체로서 자민련의 앞날은 매우 불투명하다.임춘원 의원 등 신민당의 비주류측이 자민련과 신민당의 통합이 무효라는 이의신청을 선관위와 법원에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자민련이 선관위에 내놓은 합당등록이 받아들여질지도 미지수다. 물론 선관위가 등록을 받아주지 않더라도 교섭단체 유지는 가능하다.국회법은 무소속의원이라도 20명만 채우면 교섭단체로 등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단독 교섭단체로서 자민련이받을 수 있는 국고보조금 1백15억원은 통합 전 자민련 30억원,신민당 60억원을 합친 수준으로 줄어든다. 게다가 광역단체장 선거에 한사람이라도 현역의원을 후보로 내면 곧바로 교섭단체가 무너진다.이미 강우혁 의원이 인천시장후보로 확정됐고 구자춘 의원도 경북지사후보로 나설 공산이 크다. 이들이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하면 교섭단체 등록은 곧바로 무효가 된다.교섭단체에 주어지는 국고보조금의 「프리미엄」도 포기해야 한다. 자민련은 이 때문에 무소속의원들을 영입하는데 필사적이다.남편인 박철언 전의원의 입지와 관련해 참여를 망설이고 있는 현경자 의원과 강창희·조순환 의원 등이 대상이다.심지어 통합반대파인 임춘원 의원에게도 내년 총선에서 전국구를 보장하며 입당을 설득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자민련이 원내교섭단체로 확실히 자리잡을 수 있을지는 지방선거 출마자의 의원직 사퇴시한인 다음달 11일까지 기다려 보아야 할 것 같다.
  • “노사 새집행부 구성되면 협상”/조백제 한국통신사장 인터뷰

    ◎고발된 현집행부와는 대화안해/시설 등 보호위해 중징계 불가피 조백제 한국통신사장은 24일 최근의 노사분규와 관련,본사와 기자회견을 갖고 『불법·폭력행동으로 고발된 현 노조집행부와는 절대 대화를 하지 않겠다』며 『이들을 제외한 새 집행부가 구성되면 임금·복지문제에 관해 단체협상에 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사장은 또 25일 정오로 예상되는 전국 전화국별 보고대회에 언급,『우선 대화와 설득을 통해 집회를 갖지 못하도록 하겠지만 노조측이 이를 강행할 경우 복무지시 불이행으로 간주하고 대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노조의 냉각기간 제의및 단체행동 유보에도 불구하고 중징계를 강행하는 배경은. ▲국가의 중추신경인 한국통신의 통신망이 불법적 노조활동의 담보가 되는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통신사업은 파업을 할 수 없음에도 노조측은 올들어 수차례에 걸쳐 파업및 공노대가입을 공언했고 장관실점거등 폭력행위를 일삼아 왔다.국민으로부터 통신시설을 위임받아 관리하고 있는 한국통신 사장으로서 시설과 직원을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중징계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다. ­노조는 고소및 중징계방침을 철회하면 회사측과 다시 협상에 나설 뜻이 있다고 밝혀왔는데. ▲과거의 불법행위및 사규위반행위를 무조건 면책시켜 달라는 것은 내 권한밖의 일이다.노조측은 법외단체인 공노대에 가입하여 연대파업을 계획하는가 하면 올 단체협상안에는 근로자복지와 관련이 없는 의료보험·국민연금제도등 사회개혁에 관한 내용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직원의 근로조건이나 임금등에 관한 협상은 아직 한번도 이뤄지지 못한 상태다.노조원 대부분도 사회개혁안이나 민영화 반대등이 협상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에 공감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집행부와는 절대 협상을 할 수 없다는 뜻인가. ▲불법 폭력행동으로 고소·고발된 현집행부와는 절대 협상할 수 없다.그러나 징계가 진행중인 노조간부 64명을 제외한 이른바 「대행집행부」가 들어설 경우 임금·복지문제등에 대해 성실한 자세로 교섭에 응하겠다. ­노조는 25일 단체행동유보시한이 끝남에 따라 전화국별 보고대회를 가진 뒤 준법투쟁을 다짐하고 있는데. ▲우선 대화와 설득을 통해 집회를 갖지 못하도록 하겠지만 만일 이를 어기고 보고대회를 가질 경우 복무지시불이행으로 간주,대응하겠다.
  • 신민당 통합반대파/별도 임시전대 추진

    신민당의 임춘원 최고위원 등 자민련과의 통합에 반대해 온 인사들로 구성된 「신민당수호대책위」는 24일 김복동 대표의 통합추진에 맞서 독자적인 임시전당대회를 열기로 했다. 「대책위」의 한 관계자는 『이미 전당대회 소집에 필요한 대의원 3분의1 이상의 서명을 확보했다』고 말하고 『26일 소집공고를 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 93년 현대파업 조종/전노협 전국장 구속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는 23일 노동쟁의조정법 위반혐의로 수배중이던 전 전노협쟁의국장 이상현씨(36·노원구 중계동 513)를 붙잡아 구속했다. 이씨는 지난 93년 6월6∼12일사이 현대계열사 노사분규 당시 불법파업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수배를 받아왔다.
  • PLO/반이 전면봉기 경고/아라파트 측근

    ◎“토지몰수계획으로 아랍인 분개”/팔자치 정권 붕괴도 우려/PLO최대파벌,협상 중단 요구 【예루살렘 로이터 AFP 연합】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의 아랍인 소유 토지에 대한 몰수계획을 계속 추진할 경우 「전면적인」 반이스라엘 봉기(인티파다)가 발생할 것이라고 팔레스타인 고위 관계자가 20일 경고했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의 측근으로 PLO로부터 예루살렘담당 장관으로 임명된 파이잘 후세이니는 이날 이스라엘 라디오 방송,AFP 통신 등과의 회견에서 인티파다가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후세이니는 『우리가 지금은 봉기 발생을 막고 있지만 우리가 통제력을 잃는다면 다른 세력이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면서 『그럴 경우 인티파다가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점령지역뿐 아니라 중동 전역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세이니는 이스라엘이 지난달 예루살렘의 아랍인 소유 토지 1백31에이커를 몰수한데 이어 현재 동예루살렘의 영토 34%를 압류했다고 말하고 『팔레스타인인이나 다른 아랍국가 국민들이 분노해 있으며팔레스타인인 지도부도 실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아라파트 PLO 의장이 이끄는 PLO내 최대 조직인 파타그룹은 아라파트 의장에게 이스라엘측의 아랍 영토 몰수계획과 관련,이스라엘과의 평화 회담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 9개 재야 노동단체 전면수사/대검

    ◎3자개입·업무방해 혐의… 전원 사법처리 대검 공안부(안강민 검사장)는 19일 현대자동차 휴업사태현장에서 공공연하게 파업지지발언을 하거나 대책회의에서 연대파업 등을 주장한 「민주노총준비위」「현대그룹노조총연합」「마산·창원노조연합」등 9개 재야노동단체에 대한 전면수사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검찰은 현대자동차 근로자가 작업거부를 시작한 때를 전후해 울산현지에서 지지행위를 한 이들 단체의 대표를 중심으로 개별적 범죄사실을 캐고 있으며 혐의가 드러나는대로 노동쟁의조정법상의 제3자개입 및 업무방해 등 혐의로 모두 사법처리할 방침이다. 검찰은 「현대그룹노조총연합」이 작업거부 하루전인 16일 울산에서 권용목 「민주노조총연합」공동대표 주재로 「현대자동차 파업지원대책회의」를 열어 『앞으로 「현총련」이 현대자동차의 파업투쟁을 주도하고 「대우그룹노조협의회」등 다른 대형사업장의 연대파업지원도 적극 유도할 것』을 결의했다는 내용의 구체적 혐의를 잡고 있다. 이 자리에는 윤재건 「현총련」공동의장,문성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사무총장,이승필 「마산·창원지역노조연맹」의장,백순환 「대우그룹노조협의회」의장,박재근 「조선업종노조협의회」사무총장,박용선 「대구지역노조연합」대표,문석택 「포항지역노조연합」대표,허영구 「민주노총준비위」집행위원장 등 8개 재야 및 강경노조대표들이 참석했다. 또 홍순영 「서울지하철노조」수석부위원장 등은 17일 하오 현대자동차 정문앞 집회에 참석해 현대자동차파업을 부추기는 지지발언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 일 이번에 공항 폭탄테러/나리타/화장실 벽·천장 대파…인명피해없어

    ◎건전지 등 발견… 경찰,옴교관련 수사 【도쿄 연합】 도쿄 지하철 독가스 테러사건에 대한 수사가 최종국면을 맞고 있는 가운데 13일 하오5시쯤 일본의 관문인 나리타(성전)공항 제2여객터미널 3층 북측 출발로비 남성용 화장실에서 폭발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없는 것으로 전해졌으며 청소용구등 일부가 불탔으나 경찰은 또 하나의 테러 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현장에는 빠찡꼬에서 쓰이는 구슬과 같은 금속알이 주위에 흩어져 있었으며 벽에는 수없이 많은 구멍이 뚫렸고 천장 일부가 부서졌다. 폭발음이 들린 뒤 경비원들이 소화기로 진화작업을 벌였으나 불이 꺼지지 않아 소화전에서 물을 끌어들여 최종 진화작업을 마쳤다. 조사 결과 폭발물은 금속 상자안에 들어 있는 용기에 금속알이 박혀 있어 폭발과 동시에 금속알이 사방으로 튀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현장에서는 또 길이 40㎝ 쇠파이프와 건전지등 시한식 폭발장치가 발견됐다. 사고 당시는 비행기 승객등 공항 이용객들이 비교적 적어 큰 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경찰은 이번 사건이 나리타 공항 확장에 반대하는 과격세력의 게릴라 사건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NHK­TV가 이날 밤 보도했다. 그러나 경찰은 옴진리교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다.
  • 김 대통령/“말로 표현못할 분노 느낀다”/침통했던 대구 발걸음

    ◎대책본부·사고현장 방문… 복구상황 점검/병원 찾아 부상자 위로… 자원봉사자 격려 김영삼 대통령은 29일 하오 비행기편으로 대구에 도착한뒤 사고대책본부가 마련된 달서구청으로 직행,이종주시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으면서 시종 침통한 표정이었다. 김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안전을 강조해왔는데도 이렇게 엄청나고 불행한 사고가 발생한데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분을 느낀다』고 말했다.『특히 어린 학생들의 불행을 진실로 가슴아프게 생각한다』며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 대통령은 『이번 사고이후 시민은 물론 군·경·공무원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해 주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중 어두운 표정 ○…김 대통령은 대책본부에서 간단하게 사후대책을 밝힌뒤 『현장으로 빨리 가자』고 수행원들을 채근. 김대통령은 대책본부 상황실을 떠나면서 철야근무를 해온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고생이 많다.수고한다』고 인사. ○…김 대통령은 가스폭발사건으로 처참한 상흔이 남아있는 달서구 상인동 사고현장을찾아 폭발지점,대파된 인근 건물 등을 차례로 시찰. 김 대통령은 최재욱 의원이 『2백80㎏에 달하는 철재강판이 40m 상공으로 솟아올랐다가 떨어졌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 『주변의 집들도 많이 파손됐느냐』고 관심을 표시. 김 대통령은 김수호 대구지하철본부장이 복구 진척상황을 설명하자 『언제까지 완전히 복구되느냐』면서 『참…』이라고 한숨. 김 대통령은 사고현장을 둘러본뒤 주변에서 복구 및 자원봉사활동을 펴고 있는 공사 관계자,적십자사 부녀회 회원들을 격려. 김 대통령은 이어 인근 보강병원을 방문,입원해 있는 부상자들을 위로. 한편 김대통령은 수행한 박성달 행정수석에게 『대구에 남아 복구작업을 지원하라』고 지시.
  • 미 폭탄테러 신속수습 이후/클린턴“위기대처 잘했다”인기 급등

    ◎지지도 1주일새 46%서 54%로/“공화당 독주가 테러 유발”지적도 지난 19일 발생한 오클라호마시티 폭탄테러 사건으로 빌 클린턴 미대통령이 모처럼 자신의 정치력을 회복할 계기를 맞고 있다.사건 직후 취한 일련의 단호한 조치들로 클린턴 대통령은 스스로를 위기대처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로 부각시켰을 뿐 아니라 정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24일 실시된 CNN,USA 투데이,갤럽 여론조사 등에 따르면 응답자의 84%가 오클라호마시티 폭탄테러사건 이후의 클린턴의 위기대처 방식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또 이번 사건에 대한 클린턴 대통령의 대응은 그의 일상적 업무처리에 대한 평가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쳐 클린턴에 대한 지지 비율이 1주일전의 46%에서 54%로 뛰어올랐다. 사건 하루전까지만 해도 클린턴 대통령은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의 위세에 눌려 있었다.그러나 사건발생 이후 재빨리 인명구조와 범죄수사를 위한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껄끄러운 반대파들의 목소리를 제압해 버렸다. 클린턴 대통령은 23일 오클라호마로 날아가 폭탄테러 희생자를 위한 추모행사를 갖고,다시는 삶을 무력화하는 그같은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할 것을 국민앞에 서약했다.클린턴은 또 의회에 대해 테러와 싸우기 위한 새로운 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미연방수사국(FBI) 주도의 반테러조직 결성을 제안했다.클린턴의 이같은 행동은 국민들로부터 큰 반향을 얻고 있다. 버지니아대학의 래리 사바토 교수(정치학)는 『이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통령이 정의를 행하고 말하기를 기대했으며 클린턴 대통령은 그렇게 행동했다』고 말하고 일시적일지는 몰라도 이번 사건으로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높아질 것은 확실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의회내 다수세력인 공화당의 입지는 악화되고 있다.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티모시 맥베이가 우익 민병대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데다 심지어 클린턴행정부에 대한 공화당의 지나친 공격이 이번 연방기구 건물에 대한 폭탄테러를 불렀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 기 자 입 력

    가제목:인,◎미의대파키스탄F 기자명:한양인 부서명:교열부 【뉴델리◎◎】인도는 15일 미국이 파키스탄에 대한 전투기 인도 금지조치를 해제한다면 인도와 파키스탄간에 군비 증강전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라납 무크헤르지 인도 외무장관은 옵서버지와의 회견에서 『만약 파키스탄에 F­16기가 제공된다면 파키스탄의 공격력은 인도가 군비를 증강해야 할 만큼 강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의 이같은 경고는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총리가 최근 미국 방문 중 미국정부에 F­16기 28대를 포함해 파키스탄이 이미 미국측에 대금을 지불한 군장비에 대해 공급제한 조치를 해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 뒤 나온 것이다.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지난 11일 부토총리와의 회담 후 의회에 해제를 위한 해법을 모색토록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의 파키스탄에 대한 무기인도 금지는 핵무기 개발 혐의가 있는 국가에 무기수출이나 직접적 경제원조를 금지하는 이른바 프레슬러 수정안에 의한 조치이다.
  • 가자·요르단강 서안에 팔,유엔군 파견요청

    【튀니스 AFP 연합】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10일 2건의 팔레스타인 자살폭탄공격으로 이스라엘 군인 6명이 숨지고 53명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유엔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파루크 카두미 PLO 정치부장은 이날 중동평화협상의 중재역을 맡고있는 미국과 러시아에 대해 유엔에 군대파견을 긴급 요청해 줄것을 촉구했다. 그는 이어 유태인 정착민들을 가자지구밖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이스라엘에 촉구했다.
  • 올 고추·파 생산량 6∼8% 과잉 전망/농림수산부 조사

    올해 고추 및 대파의 생산량이 넘칠 전망이다. 농림수산부가 전국의 재배 농가 7천9백40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3월 15일 기준) 결과 고추를 심겠다는 면적은 8만7천1백㏊로 지난 해보다 2%가 줄었으나,수급에 적절한 8만1천㏊보다는 8%(6천1백㏊)가 많았다.예상 생산량은 18만3천t으로 수요량(17만t)보다 7.6%(1만3천t)가 많을 것으로 예측됐다. 대파도 수급에 적정한 면적인 1만3천5백㏊보다 6.7%(9백㏊)가 많은 1만4천4백㏊ 심겠다고 했다.
  • 2차 미·소공위 결렬(새로쓰는 한국현대사:14)

    ◎소,「임시인민위」 북 대표로 즉각 승인/3상회의 결정 휴지화… 남북분단으로 치달아/이승만 도미외교… 단정수립·유엔가입 등 추진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분할점령은 그 자체가 남북 두개의 한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숙명 같은 것이었다.미·소공동위원회도 사실상 허상에 불과했다.1947년의 2차미·소공위는 한반도를 더욱 절망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1946년의 1차공위가 좌우대립을 부추겨 분단의 자두를 제공했다면 2차미·소공위는 남북이 서로 갈라져 영원한 평행선을 달려야 할 지미를 의미했다. ○10월 62차 본회의 끝으로 제2차미·소공위는 1947년10월18일 제62차 본회의를 마지막으로 결렬되었다.자국의 이데올로기 옹호론에 빠져들기 시작한 2차미·소공위는 그해 여름부터 불투명한 조짐을 보였다.소련이 먼저 미군정의 공산당및 좌익계 검거를 비난하고 나서자 미국은 북한에 감금된 주요인사의 석방을 요구했다.그해 8월 평양에 간 미국 수석대표 WC 브라운소장은 고려호텔에 연금된 조만식을 면회한 바 있었다.그리고 10월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이 한차례 더 면회한 이후 조만식을 만났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위 결렬과 함께 한반도정책을 곧바로 바꾸었다.이는 한반도에 이념이 다른 두개의 정권탄생을 예고했다.미국의 정책전환에는 대전이후 소련군이 진주한 동유럽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정권 출현이 자극제로 작용했다.더구나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을 받고 있던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2월9일 임시인민위원회가 공식출범한 상태였다.그리고 광복1주년을 맞아 8월15일에는 대규모 행사를 열어 임시인민위의 존재를 대내외에 과시하고 소련을 찬양했다(별도기사 참고). 미군정은 북한의 재빠른 임시정권성립에 위협을 느꼈다.평양에서 북한 임시위원회가 성립된 1946년2월9일은 제1차 미·소공위 첫모임(1월16일∼2월5일)이 서울에서 막 끝나고 다음 예비회담(3월20일)을 기다리는 시기에 해당한다.마침 남한에서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되었다.당시 미군정의 위기상황은 하지의 2월말 보고서에 잘 나타난다.「소련은 앞으로 탄생할 조선임시정부의 지배권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도록 북한임시인민위원회를 북한의 대표로 받아들이고 남한공산주의자대표를 더 늘리라고 강요하고 있다」(미 대외문서철·1946년) 그렇다고 해서 미군정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통일임시정부수립노력을 일찍 포기한 것은 아니다.19 45년10월 환국한 이승만의 소련과 공산주의 매도발언(미 국무성이 일본 정치고문서리 애치슨에게 보낸 전문·1945년10월)에 제동을 걸면서 「말썽꾼」으로 몰아붙였다.한반도문제는 미·소공위를 통해 소련과의 협조하에 해결하는 것은 물론 그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이승만을 경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특히 단정을 주장한 1946년6월 이승만의 정읍발언에 주목한 미군정은 그해 12월 미국을 방문한 그의 워싱턴행적에 대해서도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다(주한미24군 G­2 주간정보·1946년12월).하지는 1947년7월까지도 이승만을 싫어했다. 이승만의 도미외교의 성과는 당시로서는 판단하기가 일렀다.미국내에서도 대전 직후부터 논의되던 대소외교정책이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화평파와 강경파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내 대소강경파에 가세,미국의 정책을 반소·반공으로 전환시켜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당시 이승만의 대미외교활동을 도운 사람은 임병직이었다.임병직은 뒷날 국무차관보 J R 힐드링이 이승만을 지지한 반면 동아시아국장 H 보튼과 극동국장 J K 빈센트는 반대입장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이승만을 따돌려 미군정은 임시정부수립노력의 하나로 좌우합작위원회에도 기대를 걸었다.1946년8월26일 하지장군은 우익대표 김규식,좌익대표 여운형에게 격려서한을 보낸 데서도 이런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이무렵 공산당의 활동도 만만치 않았다.테러리즘으로 전술을 바꾼 공산당의 활동은 미군정이 8월28일과 29일 청주와 부산지역 공산당비밀회합에서 압수한 1급비밀문서를 통해 드러났다.이들 문서는 공산당원들의 자기희생을 요구하면서 앞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한 정부에서로 다른 정치체제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역사에는 우연이 없다고 한다.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승만이 미국에서 반소·반공노선을 주창하는 정치활동을 펼치던 1947년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었다.이를 직접발표한 트루먼은 「소수파가 독재정치를 강요하는 공산주의와 대항,자유민주주의제도 보전을 위해 싸우는 세계 모든 국민을 원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소련에 대한 미국의 강경정책은 이승만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이승만 같은 대소강경파에게는 아주 유리했을 뿐 아니라 또 그런 반소·반공주의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48년 분단고착 구체화 이승만은 귀국을 서두르면서 자신의 주장이 관철된 것처럼 보이는 발언을 했는데 그 내용은 국내에 곧바로 보도되었다.「미국은 30∼65일이내에 남한에 단독정부수립을 허용하고 UN가입을 지원하는 동시에 서울에 대사격의 고등판무관을 파견할 것이다.미군은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할 때까지 남한에 주둔할 것이다」(서울신문 1995년3월25일자).미국은 국무성 대변인을 통해 남한의 단정수립추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부정했다.그러나 4월초 귀국한 이승만은 자신과 미국무성 차관보 힐드링장군과 협의한 사안임을 다시 환기시켰다. 이에 대해 하지장군은 미 국무성이 그런 양해를 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그리고 5월에 제2차 미·소공위가 열려 한반도의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처럼 보였다.따라서 이승만의 도미외교는 실패한 인상이 짙었다.그러나 일련의 발언이 미·소공위가 결렬되었을 경우를 미리 생각한 대안이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미국은 제2차 미·소공위가 공전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나서 미국은 한반도문제를 국제연합(UN)에 넘겼다.소련외상 N Y 비신스키의 반대발언에도 불구하고 미 국무장관 G C 마셜의 이 제안은 2차미·소공위가 결렬되기 약 한달 전인 9월21일 UN총회 운영위원회를 통과했다.이로 인해 최소한 5년의 신탁통치를 전제로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뒷받침하는 미·소공위야말로 무의미한 만남에 불과했다.그래서 미국 수석대표 W C 브라운의 제의로 제2차 미·소공위는 막을 내렸고 1947년은 순탄치 않게 저물었다. 그러나 민족의 운명을 분수령에 세울 1948년은 복잡한 양상을 띠고 다가왔다.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가는 예정된 수순을 밟는다.남한에서는 유엔 한국위원회가 지켜보는 총선을 거쳐 대한민국시대를 맞는다.그것은 분단고착을 구체화한 두개의 국가였다. ◎「해방1돌 기념식 북조선계획안」 발굴/서울신문 특별취재반 미 국립문서국 통해/스탈린 예찬·기념비건립 추진… 소 예속 드러나 북한 공산주의사회가 오늘날까지도 체제유지를 목적으로 동원하는 대규모 선전선동수단은 이미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발굴한 1946년의 북한문서를 통해 밝혀졌다.이름은 「해방 제1주년 기념식준비에 관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계획안」.6쪽분량의 등사물로 이루어졌다. 이 문서는 남한에 앞서 19 46년2월9일 사실상의 북한정권으로 등장한 임시인민위원회 성립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한 기획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김일성이 발표한 20개 정치강령을 널리 선전,정치사업을 강화하라는 지시는 김일성 중심의 북한정권성격을 일찍부터 드러낸 대목이다.그리고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맞서는 반대파와의 투쟁을 부추긴 내용은 사뭇 선동적이다. 이와 더불어 소련 스탈린대원수에게 인민의 명의로 선물과 축하문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를 소련군과 협의할 것을 지시했다. 또 스탈린을 조선의 친우·해방자·승리자로 예찬하면서 주요도시에 기념비 및 기념관건립을 계획하는 등 소련에 철저하게 예속되었다는 사실도 나타났다.여기에는 붉은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도시의 가로명과 공원·광장이름을 모두 바꾸는 계획안도 포함되었다. 조직사업·선전 및 군중사업으로 나누어 30개항의 기념사업내용을 담은 이 문서는 8월15일에 각 도시와 농촌이 모두 나서 경축 군중집회를 열도록 다그치고 있다.임시위원회 위원장 김일성과 서기장 강양욱 명의로 작성했는데 내로라는 공산주의자 15명이 중앙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위원명단에는 월북문인 이기영과 한설야의 이름도 보인다.
  • 아프리카 대륙의 비극(해외사설)

    아프리카는 확실히 국제사회가 환멸을 맛본 대륙이다.기근과 대량학살,그리고 인간살육을 방지하기 위한 인도주의적인 간섭은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끝이 없는 일이다.적용된 수단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결정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소말리아 사태에 1만5천명의 유엔군이 투입되는 대대적인 개입이 있었지만 조촐한 결과에 만족해야만 했던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부룬디의 폭력사태 재발이나 지난해 여름 르완다의 대량학살은 국제사회에 또 다른 장애물로 등장했다.최근 부룬디의 다수파는 민족주의자들이 95%를 차지하는 정규군의 보호아래 촉발된 극렬전사들의 폭력과 차별정책을 겪었다. 유엔 안보리나 아프리카기구의 책임자들은 현상황을 종결짓기 위한 구두 권고를 하기에 이르렀다.프랑스의 베르나르 드브레 대외협력장관은 부룬디를 방문해 프랑스의 의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즉 부룬디 문제가 자체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룬디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부룬디는 르완다 사태와는 다르다.집권자와 군부가 유엔의 개입을 바라는 다수 반대파들에 대응하기 위해 나라를 유혈 혼란속에 빠뜨렸다.현정부와 군부는 그들이 그같은 개입에 반대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온건한 요소들을 고무하는 이른바 「최소한의 프로그램」만이 가능한 선택으로 남아 있다.그것은 무장과격주의자들에게 계획을 알려주고 현재 부룬디에 남아 있는 서구인들의 철수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유고내전 같은 드라마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예방외교를 아프리카에서 전개하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본질적인 논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국경분쟁과 소수민족문제를 민간적인 방법으로 관리하게 되면 유럽연합의 여권사무소로 들어온다는 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부족간 분쟁이 중단기적으로는 평화공존에 의해 해결될 수 있을 것같지만,결국 증오심에 차있는 사회를 분리하거나 분류를 해야만 끝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가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 새조개 요리 전문/서산 「오뚜기 횟집」(맛을 찾아)

    ◎대파 끓인물에 살짝 데쳐 먹는맛 일품/1㎏에 4만 5천원… 값비싼게 다소 흠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16의 8 오뚜기횟집(주인 김명호·33)은 원기보강에 좋은 「새조개」요리로 유명하다. 새조개는 수온이 높고 물살이 느린 해역에서 자라는 고급패류로 서산AB지구 조성공사 후 서산 천수만 일대가 최대 생산지로 부상하면서 지난 80년대말에는 이권을 둘러싼 폭력사태까지 불러올 만큼 명성이 자자한 고단백식품이다. 이 집은 인근 해변에서 어민들이 잡은 씨알굵고 신선한 새조개를 직접 사들여 요리를 만들 뿐더러 맛도 뛰어나 손님들이 자주 찾아온다. 새조개는 손으로 비틀어 껍데기를 떼낸 뒤 칼로 베 내장을 긁어내고 깨끗한 갯물에 씻어 손님상에 올려진다. 이어 대파를 썰어 넣어 끓는 물에 살짝 넣었다 꺼내 초고추장이나 겨자를 풀은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맛은 담백하고 쫄깃쫄깃하면서 먹은 뒤 싱그러운 여운이 입안을 감돈다. 특히 새조개를 데친 물에 라면을 끓여 먹으면 시원하고 개운한 맛에 절로 속이 편안해진다. 상에는 또 신선한 굴을 비롯,소라·멍게 등이 곁들여지고 계절별로 멸치젓이나 어리굴젓이 나오는가 하면 달래·냉이 등 봄나물도 보여 입맛을 돋운다. 봄대하는 가을에 잡는 대하와 달리 씨알이 굵은데다 맛이 뛰어나 소금구이 등으로 먹기도 하지만 생새우를 통째로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다 이 집에는 축음기·됫박·저울·가래·놋그릇 등 옛농기구와 가재도구를 전시해 자녀들의 교육에 좋고 밀물썰물에 따라 물에 잠겼다 드러나는 간월암과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풍치를 즐길 수 있는 낭만도 있다. 값은 우럭이나 도미 등 일반 횟감과 달리 깐새조개가 1㎏에 4만5천원,2인분에 3만원 등이고 봄대하는 1마리당 2천∼3천원으로 희귀한 만큼 부담이 적지 않다.(04 55­62­2708)
  • 운전시험 대기중 “날벼락”/강풍에 담 붕괴… 10대 깔려 뇌사

    ◎목욕탕 굴뚝·가로등도 쓰러져 하루종일 순간 최대풍속 20m의 강풍이 분 10일 서울 등 수도권일대와 충북지역에서는 담벼락이 무너지고 가로등과 목욕탕 굴뚝이 쓰러지는 6건의 사고가 발생,2명이 중태에 빠지고 차량 14대가 부서지는 등 피해가 잇따랐다. 이날 낮12시20분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Y자동차학원에 자동차면허실기시험을 보러온 김민겸군(19·서울 광진구 중곡2동 24의 3)등 3명이 때마침 불어온 강풍에 무너진 학원옆 간이식당의 3m높이 담벼락에 깔려 김군이 뇌사상태에 빠지고 김군의 친구 박정필군(19)등은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또 이날 하오2시30분쯤 올림픽대로 성산대교 남단 5백m 중앙분리대에 세워진 가로등이 강풍으로 쓰러졌다.이 때문에 김포공항쪽에서 양화대교쪽으로 가던 경기 1흐 7555호 프린스승용차(운전자 하명렬·38·교사)가 쓰러진 가로등을 피하려다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등 2건의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이날 하오2시45분쯤 강북강변도로 동호대교에서 한남대교방향 1백m지점에서도 가로등이 넘어져 도로를 가로막는 바람에 30여분동안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또 상오10시50분쯤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악목욕탕 건물 5층 옥상에 세워진 가로·세로 각 1m,높이 13m의 굴뚝이 강풍에 무너지면서 인근 현대파크빌라를 덮쳤다.이 사고로 이 빌라 6가구의 베란다 유리창 10여장이 깨지고 옥상과 벽의 일부가 부서지거나 금이 갔다.
  • 이 마피아단 「죽음의 엔진」/폭력­테러활동 재개

    ◎시칠리아섬 주무대… 2년 침묵 깨/변절자 인척 등 10일새 9명 살해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악명높은 마피아조직 「죽음의 엔진」이 지난 2년간의 침묵을 깨고 활동을 재개했다. 이 조직의 저격수들은 6일 4시간 동안 4명의 반대파를 차례로 사살함으로써 지난 10일간 이들에게 살해된 사람들은 최소한 9명으로 늘어났다. 희생자 3명은 동부 시칠리아 에트나산 인근의 카타니아에 있는 바에서 나오다 총탄 세례를 받았다.경찰은 저격수 4명이 대낮에 3명의 머리와 가슴에 총탄을 퍼부은 뒤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났다고 밝혔다.경찰관계자는 『고전적 마피아식 공격』이라고 말했다. 4번째 희생자인 도메니코 부스체타씨(45)는 이 사건 후 4시간 뒤 살해됐다.그는 10년전 마피아의 실태를 폭로했던 토마소 부스체타씨의 조카로 확인됐다.미국에서 보호받으며 살고 있는 토마소 부스체타는 벌써 아들 2명을 비롯,인척 36명을 잃었다. 마피아는 복수및 경고의 뜻에서 변절자의 인척이나 친구를 살해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실제로 수사관들은 마피아 변절자들의도움으로 일련의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이는 지난 93년 1월 마피아 「두목중의 두목」 살바토레 「토토」 리나가 23년만에 체포된 이후의 일들이다. 그러나 마피아가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는지 모른다.이탈리아 경찰 관계자들은 지난주에 일어난 살해사건의 공통점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팔레르모 검찰차장 로베르토 스카르피나토는 이번 사건과 관련,코사 노스트라가가 리나의 콜레오네시가를 상대로 반격전을 전개했는지 여부를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 본사 「김구 특무대」 해체 성명서 발굴

    ◎항일투쟁하다 광복후 정치라이벌 제거 해방정국에서 테러는 하나의 정치수단으로 악용됐다.애국애족을 외친 숱한 청년단체들이 실제로는 온갖 명분을 내세워 반대파 또는 정치적 라이벌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같은 테러단체의 뿌리는 일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일본인·친일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 테러단체는 해방 이후 좌우 대결에 그대로 이용된다.그러나 테러단체가 비밀결사 조직으로 유지돼온 특성 때문에 이들의 실체를 알려줄만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시피한 실정이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이같은 상황에서 해방 직후 크게 활약한 한 테러단체의 성격·구성들을 분석할만한 자료를 최근 발굴했다. 워싱턴의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 슈트랜드분소에 보관된 「주한미군 군사실 문서」더미에서 찾아낸 이 자료는 「김구특무대」의 성명서이다.「김구특무대」는 광복 직후부터 악명을 떨치다가 45년 11월29일 김구의 지시로 해체하면서 이 성명서만을 남겼다. 「김구특무대」는 성명서에서『민족 천년의 운명을 좀먹으려는 역적의 무리들에게 향하여 단연코 일도양단 할 숙청의 칼을 뽑은 것』이라고 활동목적을 밝혔다.이어 회원숫자를 수백명이라고 내세운 뒤 『회고하면 조국광복 일념에서 중명을 띠고 내지에 파견됐다(중국의 임시정부에서 한반도로 파견됐다는 뜻)』고 해 일제 때 조직됐음을 분명히 했다. 마지막으로 『자주독립의 절대적 명제를 완수하기 위해 질풍신뢰(질풍신뢰)적 숙청과 응징으로 우리 특무대의 빛나는 임무의 막을 내릴 것』이며 『도적 일군의 시산혈하속에서만 피흘린 선배의 원혼은 비로소 고이 잠들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 좌우익 대립 극심(새로쓰는 한국현대사:9)

    ◎반탁대회 성공하자 김구 “과도정부 추진”/좌익 찬탁 급선회후 전국 암살·테러 잇따라/반탁운동 격렬… 서울 철시·군정종사원 파업/좌우 4개정당 “임정 세워 국난 수습… 대단결” 추구 모스크바삼상회의가 결정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과 「5년이내 신탁통치」는 이 땅에 남긴 것이 없다.그런 뜻에서 회의 자체가 우리에게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던져주지 못했다.다만 이를 기화로 남북의 각 정치세력은 주도권잡기에 혈안이 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만다.일제 유산 처리는 뒷전으로 밀린채 좌우익 대결구도만이 전면에 떠올랐던 것이다. ○군정청 “가두시위 훌륭”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 결정」이 전해지자 38선 이남지역의 세밑 정국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쪽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중칭(중경)임시정부 세력이었다.중칭임정측은 28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4대국 결정에 대항해 시위와 파업을 벌이라고 백성에게 직접 촉구했다.이날 밤부터 서울시내에는 「반탁」벽보가 곳곳에 나붙고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가두연설을 한 몇몇 인사는 미 헌병에 의해 연행되기 시작했다. 김구는 「신탁통치에 대한 비협조」를 선언하고 나섰다.그는 선언문에서 『한반도는 유엔이 규정한 신탁통치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4대국 신탁통치는 ▲민족자결을 바라는 민족 염원에 어긋나며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이 되풀이 약속한 내용과 다른데다 ▲끝내는 극동 평화를 깨뜨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김구는 이 내용을 4개국 원수들에게 전달하라고 미군정청에 요구했다. 29일에는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의가 열려 중칭임시정부와 청년단체들이 긴밀하게 협조,조직적인 반탁국민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한다.좌파인 조선인민공화국(인공)중앙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당도 이날 「신탁통치 배격」담화를 발표해 반탁 입장을 표명했다. 이날부터 서울거리는 철시했고 미 군정청에 근무하는 한국인들도 총파업을 선언,집단결근하고 따로 반탁 가두시위를 벌였다.이같은 분위기에 놀란 미군정청은 이날 하오8시부터 헌병을 제외한 미군 병사와 민간인의 외출을제한하는 일종의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30일에는 국민총동원위가 「국민행동강령」발표를 통해 「중칭임시정부 절대 수호」와 「외국군정의 철폐」를 호소한다.이날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가 암살된 것도 그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국민총동원위는 곧이어 31일 하오2시 서울시민반탁대회를 열었다.당시 중앙신문(좌익지로 뒤에 찬탁으로 선회,46년 9월 미군정에 의해 폐간됨)은 대회상황을 「수만명의 남녀노소가 구름같이 모여들어 탁치반대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질서정연하게 걸어갔다」고 보도하고 『기미만세(3·1운동)때를 연상케 하는 우리 민족의 항쟁표시』라고 평했다.하오4시30분쯤 끝난 이 대회는 질서정연했고 비폭력적이었다. 미군정청 보고서도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격렬한 모습이었다.그러나 호스로 물을 뿌리는 미군장교나 미국인들에게 이상하리 만큼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폭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시위는 훌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군정청이 추산한 시위 참가자는 5만∼7만5천명이었다. 대회 성공에 고무돼서인지 김구는 46년 1월4일 중칭임시정부를 강화해 과도정권을 수립한다고까지 선언한다.국민총동원위가 주최한 대규모 반탁집회가 1월12일 한차례 더 열린데 이어 학생들의 반탁시위가 줄을 지었다.반탁운동은 전국적 범위의 저항운동으로 전개돼 가고 있었다. ○북은 소 지령따라 찬탁 우익세력이 반탁운동의 주도권을 잡고 민심을 이끌자 남쪽의 조선공산당도 1월3일 서울운동장에서 「탁치반대민족통일촉성시민대회」를 연다.그러나 이 대회는 도중에 찬탁으로 성격이 변질됐다.조선공산당의 태도 급변은 물론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소련군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는 45년 12월28일 박헌영을 평양으로 불러 모스크바 결정을 따르라고 직접 지시한다.5일만에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이 대회를 「모스크바 결정 지지대회」로 둔갑시킨다.이어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도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고 나섰다. 엄밀한 의미에서 당시의 대립은 「반탁」대 「찬탁」이 아니라 「반탁」대 「모스크바 결정 지지」였다.즉 「찬탁」으로 분류된 세력은 「신탁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기 보다 모스크바 결정에 포함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더 비중을 뒀다.어쨌든 조선공산당이 「찬탁(모스크바 결정 지지)」으로 급선회하면서 남쪽의 정국은 아수라장이 됐다.「찬탁은 좌익,반탁은 우익」이란 등식은 모든 가치 평가기준을 압도했다. 좌익이 찬탁으로 돌자 전국에서 테러행위가 잇따랐다.1월12일 서울에서 찬탁 유인물을 돌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회원 3명이 납치됐다.또 전북 전주에서는 2월8일 아침 인민위원회 회원이 죽음을 당했는데 곁에는 「신탁통치를 찬성하거나 우리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반역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경고문이 놓여 있었다. ○좌우 중간파 태동 계기 이 와중에서 정국을 주도하는 좌우익 4개 정당이 뜻을 합쳐 민족단합을 추구하는 움직임을 보여 그나마 한가닥 희망을 던져줬다.한민당·국민당·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의 대표들이 1월7일 회담을 열어 공동성명을 낸 것이다.이 자리에는 중칭임정과 인공측에서도 옵서버로 나왔다.4당은 『자주독립과 민주발전을 원조한다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정신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신탁통치 문제는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에서 해결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이어 『암살과 테러활동은 민족단결을 파괴하며 국가독립을 방해하는 자멸행동』이라고 비난하고 이를 중지할 것을 호소했다.중칭임시정부가 다음날 「4당 합의」를 공식지지하자 민족의 기대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희망은 곧 무산됐다.이승만이 7일 전에 없이 강경한 반탁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한민당과 국민당이 8일 당대표들이 서명한 4당합의를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비록 4당합의는 우익정당들의 번복으로 깨졌지만 이 때 합의한 「선 임시정부 수립,후 신탁통치 해결」원칙은 좌우합작과 통일정부수립을 목표로 한 제3세력,곧 「중간파」를 태동시켰다. 그나마 좌우연합의 기대를 걸게 한 4당합의가 깨진 뒤 좌우익은 각각 자체 기반 확보에 열을 올렸다.이는 2월1일 중칭임정의 「비상정치회의주비회」와 이승만 계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합쳐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비상국민회의는 뒤에 미군정청의 행정자문기관 성격을 띤 「남조선국민대표민주위원」으로 변모한다.이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29개 정당·사회단체들이 이달 15∼16일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를 열어 우파와 맞섰다. ○“반탁” 조만식 연금당해 한편 북쪽에서는 김일성주도 아래 일사불란하게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46년 1월3일 평양에서 대규모 지지결의대회를 여는 등 주민여론을 유도하는 동시에 한쪽에선 반대파들을 어김없이 숙청했다.평남인민정치위원회 조만식의장이 1월5일 열린 긴급회의에서 「신탁통치 반대」발언을 하자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시켰다.반탁을 외치는 시민·학생들에 대한 시베리아 유형이 시작됐다. 모스크바 결정을 실행하기 위한 실무회담인 미소공동위원회 1차회담은 46년 3월20일 덕수궁에서 열렸다.모스크바 결정이 내려지고 미소공동위 개최까지의 석달동안 이땅의 정치세력들은 뭉치지 못했다.민족의 통일·독립을 4대국에 강력히 요구하기는 커녕 사분오열돼 정파 이익찾기에 급급했던 것이다.결국 미소공동위는 결렬되고 남북에 주둔한 미·소군은 단독정부 수립 계획을 구체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 오진우는 누구/항일유격대 출신 혁명 1세대

    ◎세습체제 구축 「절대적 후원자」 25일 새벽 사망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은 북한 군부를 장악해 온 권력서열 2위의 핵심인물이다.그는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원 출신 혁명 1세대로 김정일 후계체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절대적 후원자」였다. 오진우는 1917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어린 시절을 만주 간도에서 보낸 그는 33년부터 김일성을 따라 항일 빨치산 투쟁에 나섰으며 옛 소련 보병학교와 육군대학에서 군사학을 배우기도 했다.6·25전쟁 때는 특수부대인 766유격부대장으로 참전했고 61년 당 중앙위원,6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올랐다.67년 3월에는 김정일이 박금철 등 갑산파를 숙청하는데 돌격대로 나서 대장승진과 함께 인민군 총정치국장으로 영전했다.오는 이때부터 책략가로서 김정일의 반대파 숙청에 앞장서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67년1월 군당 제4기4차 확대회의에서 민족보위상인 김창봉과 대남사업총책 허봉학·총참모장 최광 등 군수뇌부 대숙청을 진두지휘한 뒤 군참모장으로 승진했고 76년5월 인민무력부장 최현을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격상시키면서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다.이후 오는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 권력 구조에서 20년이 넘게 자리를 유지했다.92년 4월에는 원수에,93년 4월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올라 실질적인 3인자 지위에 있던 그는 김일성 사망후 권력서열 2위로 뛰어올랐다.특히 김일성 장례식에 김정일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북한의 권력 승계작업이 그의 전폭적인 지지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과시했다.그러나 그는 지난해 7월 16일 평양 금수산의사당에서 거행된 김일성사망 1백일 중앙추모회에 참석했을 때 한쪽 다리를 저는등 부쩍 건강이 악화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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