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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제목:인,◎미의대파키스탄F 기자명:한양인 부서명:교열부 【뉴델리◎◎】인도는 15일 미국이 파키스탄에 대한 전투기 인도 금지조치를 해제한다면 인도와 파키스탄간에 군비 증강전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라납 무크헤르지 인도 외무장관은 옵서버지와의 회견에서 『만약 파키스탄에 F­16기가 제공된다면 파키스탄의 공격력은 인도가 군비를 증강해야 할 만큼 강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의 이같은 경고는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총리가 최근 미국 방문 중 미국정부에 F­16기 28대를 포함해 파키스탄이 이미 미국측에 대금을 지불한 군장비에 대해 공급제한 조치를 해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 뒤 나온 것이다.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지난 11일 부토총리와의 회담 후 의회에 해제를 위한 해법을 모색토록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의 파키스탄에 대한 무기인도 금지는 핵무기 개발 혐의가 있는 국가에 무기수출이나 직접적 경제원조를 금지하는 이른바 프레슬러 수정안에 의한 조치이다.
  • 가자·요르단강 서안에 팔,유엔군 파견요청

    【튀니스 AFP 연합】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10일 2건의 팔레스타인 자살폭탄공격으로 이스라엘 군인 6명이 숨지고 53명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유엔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파루크 카두미 PLO 정치부장은 이날 중동평화협상의 중재역을 맡고있는 미국과 러시아에 대해 유엔에 군대파견을 긴급 요청해 줄것을 촉구했다. 그는 이어 유태인 정착민들을 가자지구밖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이스라엘에 촉구했다.
  • 올 고추·파 생산량 6∼8% 과잉 전망/농림수산부 조사

    올해 고추 및 대파의 생산량이 넘칠 전망이다. 농림수산부가 전국의 재배 농가 7천9백40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3월 15일 기준) 결과 고추를 심겠다는 면적은 8만7천1백㏊로 지난 해보다 2%가 줄었으나,수급에 적절한 8만1천㏊보다는 8%(6천1백㏊)가 많았다.예상 생산량은 18만3천t으로 수요량(17만t)보다 7.6%(1만3천t)가 많을 것으로 예측됐다. 대파도 수급에 적정한 면적인 1만3천5백㏊보다 6.7%(9백㏊)가 많은 1만4천4백㏊ 심겠다고 했다.
  • 2차 미·소공위 결렬(새로쓰는 한국현대사:14)

    ◎소,「임시인민위」 북 대표로 즉각 승인/3상회의 결정 휴지화… 남북분단으로 치달아/이승만 도미외교… 단정수립·유엔가입 등 추진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분할점령은 그 자체가 남북 두개의 한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숙명 같은 것이었다.미·소공동위원회도 사실상 허상에 불과했다.1947년의 2차미·소공위는 한반도를 더욱 절망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1946년의 1차공위가 좌우대립을 부추겨 분단의 자두를 제공했다면 2차미·소공위는 남북이 서로 갈라져 영원한 평행선을 달려야 할 지미를 의미했다. ○10월 62차 본회의 끝으로 제2차미·소공위는 1947년10월18일 제62차 본회의를 마지막으로 결렬되었다.자국의 이데올로기 옹호론에 빠져들기 시작한 2차미·소공위는 그해 여름부터 불투명한 조짐을 보였다.소련이 먼저 미군정의 공산당및 좌익계 검거를 비난하고 나서자 미국은 북한에 감금된 주요인사의 석방을 요구했다.그해 8월 평양에 간 미국 수석대표 WC 브라운소장은 고려호텔에 연금된 조만식을 면회한 바 있었다.그리고 10월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이 한차례 더 면회한 이후 조만식을 만났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위 결렬과 함께 한반도정책을 곧바로 바꾸었다.이는 한반도에 이념이 다른 두개의 정권탄생을 예고했다.미국의 정책전환에는 대전이후 소련군이 진주한 동유럽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정권 출현이 자극제로 작용했다.더구나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을 받고 있던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2월9일 임시인민위원회가 공식출범한 상태였다.그리고 광복1주년을 맞아 8월15일에는 대규모 행사를 열어 임시인민위의 존재를 대내외에 과시하고 소련을 찬양했다(별도기사 참고). 미군정은 북한의 재빠른 임시정권성립에 위협을 느꼈다.평양에서 북한 임시위원회가 성립된 1946년2월9일은 제1차 미·소공위 첫모임(1월16일∼2월5일)이 서울에서 막 끝나고 다음 예비회담(3월20일)을 기다리는 시기에 해당한다.마침 남한에서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되었다.당시 미군정의 위기상황은 하지의 2월말 보고서에 잘 나타난다.「소련은 앞으로 탄생할 조선임시정부의 지배권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도록 북한임시인민위원회를 북한의 대표로 받아들이고 남한공산주의자대표를 더 늘리라고 강요하고 있다」(미 대외문서철·1946년) 그렇다고 해서 미군정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통일임시정부수립노력을 일찍 포기한 것은 아니다.19 45년10월 환국한 이승만의 소련과 공산주의 매도발언(미 국무성이 일본 정치고문서리 애치슨에게 보낸 전문·1945년10월)에 제동을 걸면서 「말썽꾼」으로 몰아붙였다.한반도문제는 미·소공위를 통해 소련과의 협조하에 해결하는 것은 물론 그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이승만을 경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특히 단정을 주장한 1946년6월 이승만의 정읍발언에 주목한 미군정은 그해 12월 미국을 방문한 그의 워싱턴행적에 대해서도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다(주한미24군 G­2 주간정보·1946년12월).하지는 1947년7월까지도 이승만을 싫어했다. 이승만의 도미외교의 성과는 당시로서는 판단하기가 일렀다.미국내에서도 대전 직후부터 논의되던 대소외교정책이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화평파와 강경파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내 대소강경파에 가세,미국의 정책을 반소·반공으로 전환시켜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당시 이승만의 대미외교활동을 도운 사람은 임병직이었다.임병직은 뒷날 국무차관보 J R 힐드링이 이승만을 지지한 반면 동아시아국장 H 보튼과 극동국장 J K 빈센트는 반대입장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이승만을 따돌려 미군정은 임시정부수립노력의 하나로 좌우합작위원회에도 기대를 걸었다.1946년8월26일 하지장군은 우익대표 김규식,좌익대표 여운형에게 격려서한을 보낸 데서도 이런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이무렵 공산당의 활동도 만만치 않았다.테러리즘으로 전술을 바꾼 공산당의 활동은 미군정이 8월28일과 29일 청주와 부산지역 공산당비밀회합에서 압수한 1급비밀문서를 통해 드러났다.이들 문서는 공산당원들의 자기희생을 요구하면서 앞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한 정부에서로 다른 정치체제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역사에는 우연이 없다고 한다.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승만이 미국에서 반소·반공노선을 주창하는 정치활동을 펼치던 1947년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었다.이를 직접발표한 트루먼은 「소수파가 독재정치를 강요하는 공산주의와 대항,자유민주주의제도 보전을 위해 싸우는 세계 모든 국민을 원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소련에 대한 미국의 강경정책은 이승만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이승만 같은 대소강경파에게는 아주 유리했을 뿐 아니라 또 그런 반소·반공주의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48년 분단고착 구체화 이승만은 귀국을 서두르면서 자신의 주장이 관철된 것처럼 보이는 발언을 했는데 그 내용은 국내에 곧바로 보도되었다.「미국은 30∼65일이내에 남한에 단독정부수립을 허용하고 UN가입을 지원하는 동시에 서울에 대사격의 고등판무관을 파견할 것이다.미군은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할 때까지 남한에 주둔할 것이다」(서울신문 1995년3월25일자).미국은 국무성 대변인을 통해 남한의 단정수립추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부정했다.그러나 4월초 귀국한 이승만은 자신과 미국무성 차관보 힐드링장군과 협의한 사안임을 다시 환기시켰다. 이에 대해 하지장군은 미 국무성이 그런 양해를 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그리고 5월에 제2차 미·소공위가 열려 한반도의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처럼 보였다.따라서 이승만의 도미외교는 실패한 인상이 짙었다.그러나 일련의 발언이 미·소공위가 결렬되었을 경우를 미리 생각한 대안이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미국은 제2차 미·소공위가 공전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나서 미국은 한반도문제를 국제연합(UN)에 넘겼다.소련외상 N Y 비신스키의 반대발언에도 불구하고 미 국무장관 G C 마셜의 이 제안은 2차미·소공위가 결렬되기 약 한달 전인 9월21일 UN총회 운영위원회를 통과했다.이로 인해 최소한 5년의 신탁통치를 전제로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뒷받침하는 미·소공위야말로 무의미한 만남에 불과했다.그래서 미국 수석대표 W C 브라운의 제의로 제2차 미·소공위는 막을 내렸고 1947년은 순탄치 않게 저물었다. 그러나 민족의 운명을 분수령에 세울 1948년은 복잡한 양상을 띠고 다가왔다.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가는 예정된 수순을 밟는다.남한에서는 유엔 한국위원회가 지켜보는 총선을 거쳐 대한민국시대를 맞는다.그것은 분단고착을 구체화한 두개의 국가였다. ◎「해방1돌 기념식 북조선계획안」 발굴/서울신문 특별취재반 미 국립문서국 통해/스탈린 예찬·기념비건립 추진… 소 예속 드러나 북한 공산주의사회가 오늘날까지도 체제유지를 목적으로 동원하는 대규모 선전선동수단은 이미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발굴한 1946년의 북한문서를 통해 밝혀졌다.이름은 「해방 제1주년 기념식준비에 관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계획안」.6쪽분량의 등사물로 이루어졌다. 이 문서는 남한에 앞서 19 46년2월9일 사실상의 북한정권으로 등장한 임시인민위원회 성립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한 기획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김일성이 발표한 20개 정치강령을 널리 선전,정치사업을 강화하라는 지시는 김일성 중심의 북한정권성격을 일찍부터 드러낸 대목이다.그리고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맞서는 반대파와의 투쟁을 부추긴 내용은 사뭇 선동적이다. 이와 더불어 소련 스탈린대원수에게 인민의 명의로 선물과 축하문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를 소련군과 협의할 것을 지시했다. 또 스탈린을 조선의 친우·해방자·승리자로 예찬하면서 주요도시에 기념비 및 기념관건립을 계획하는 등 소련에 철저하게 예속되었다는 사실도 나타났다.여기에는 붉은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도시의 가로명과 공원·광장이름을 모두 바꾸는 계획안도 포함되었다. 조직사업·선전 및 군중사업으로 나누어 30개항의 기념사업내용을 담은 이 문서는 8월15일에 각 도시와 농촌이 모두 나서 경축 군중집회를 열도록 다그치고 있다.임시위원회 위원장 김일성과 서기장 강양욱 명의로 작성했는데 내로라는 공산주의자 15명이 중앙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위원명단에는 월북문인 이기영과 한설야의 이름도 보인다.
  • 새조개 요리 전문/서산 「오뚜기 횟집」(맛을 찾아)

    ◎대파 끓인물에 살짝 데쳐 먹는맛 일품/1㎏에 4만 5천원… 값비싼게 다소 흠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16의 8 오뚜기횟집(주인 김명호·33)은 원기보강에 좋은 「새조개」요리로 유명하다. 새조개는 수온이 높고 물살이 느린 해역에서 자라는 고급패류로 서산AB지구 조성공사 후 서산 천수만 일대가 최대 생산지로 부상하면서 지난 80년대말에는 이권을 둘러싼 폭력사태까지 불러올 만큼 명성이 자자한 고단백식품이다. 이 집은 인근 해변에서 어민들이 잡은 씨알굵고 신선한 새조개를 직접 사들여 요리를 만들 뿐더러 맛도 뛰어나 손님들이 자주 찾아온다. 새조개는 손으로 비틀어 껍데기를 떼낸 뒤 칼로 베 내장을 긁어내고 깨끗한 갯물에 씻어 손님상에 올려진다. 이어 대파를 썰어 넣어 끓는 물에 살짝 넣었다 꺼내 초고추장이나 겨자를 풀은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맛은 담백하고 쫄깃쫄깃하면서 먹은 뒤 싱그러운 여운이 입안을 감돈다. 특히 새조개를 데친 물에 라면을 끓여 먹으면 시원하고 개운한 맛에 절로 속이 편안해진다. 상에는 또 신선한 굴을 비롯,소라·멍게 등이 곁들여지고 계절별로 멸치젓이나 어리굴젓이 나오는가 하면 달래·냉이 등 봄나물도 보여 입맛을 돋운다. 봄대하는 가을에 잡는 대하와 달리 씨알이 굵은데다 맛이 뛰어나 소금구이 등으로 먹기도 하지만 생새우를 통째로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다 이 집에는 축음기·됫박·저울·가래·놋그릇 등 옛농기구와 가재도구를 전시해 자녀들의 교육에 좋고 밀물썰물에 따라 물에 잠겼다 드러나는 간월암과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풍치를 즐길 수 있는 낭만도 있다. 값은 우럭이나 도미 등 일반 횟감과 달리 깐새조개가 1㎏에 4만5천원,2인분에 3만원 등이고 봄대하는 1마리당 2천∼3천원으로 희귀한 만큼 부담이 적지 않다.(04 55­62­2708)
  • 아프리카 대륙의 비극(해외사설)

    아프리카는 확실히 국제사회가 환멸을 맛본 대륙이다.기근과 대량학살,그리고 인간살육을 방지하기 위한 인도주의적인 간섭은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끝이 없는 일이다.적용된 수단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결정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소말리아 사태에 1만5천명의 유엔군이 투입되는 대대적인 개입이 있었지만 조촐한 결과에 만족해야만 했던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부룬디의 폭력사태 재발이나 지난해 여름 르완다의 대량학살은 국제사회에 또 다른 장애물로 등장했다.최근 부룬디의 다수파는 민족주의자들이 95%를 차지하는 정규군의 보호아래 촉발된 극렬전사들의 폭력과 차별정책을 겪었다. 유엔 안보리나 아프리카기구의 책임자들은 현상황을 종결짓기 위한 구두 권고를 하기에 이르렀다.프랑스의 베르나르 드브레 대외협력장관은 부룬디를 방문해 프랑스의 의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즉 부룬디 문제가 자체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룬디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부룬디는 르완다 사태와는 다르다.집권자와 군부가 유엔의 개입을 바라는 다수 반대파들에 대응하기 위해 나라를 유혈 혼란속에 빠뜨렸다.현정부와 군부는 그들이 그같은 개입에 반대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온건한 요소들을 고무하는 이른바 「최소한의 프로그램」만이 가능한 선택으로 남아 있다.그것은 무장과격주의자들에게 계획을 알려주고 현재 부룬디에 남아 있는 서구인들의 철수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유고내전 같은 드라마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예방외교를 아프리카에서 전개하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본질적인 논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국경분쟁과 소수민족문제를 민간적인 방법으로 관리하게 되면 유럽연합의 여권사무소로 들어온다는 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부족간 분쟁이 중단기적으로는 평화공존에 의해 해결될 수 있을 것같지만,결국 증오심에 차있는 사회를 분리하거나 분류를 해야만 끝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가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 운전시험 대기중 “날벼락”/강풍에 담 붕괴… 10대 깔려 뇌사

    ◎목욕탕 굴뚝·가로등도 쓰러져 하루종일 순간 최대풍속 20m의 강풍이 분 10일 서울 등 수도권일대와 충북지역에서는 담벼락이 무너지고 가로등과 목욕탕 굴뚝이 쓰러지는 6건의 사고가 발생,2명이 중태에 빠지고 차량 14대가 부서지는 등 피해가 잇따랐다. 이날 낮12시20분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Y자동차학원에 자동차면허실기시험을 보러온 김민겸군(19·서울 광진구 중곡2동 24의 3)등 3명이 때마침 불어온 강풍에 무너진 학원옆 간이식당의 3m높이 담벼락에 깔려 김군이 뇌사상태에 빠지고 김군의 친구 박정필군(19)등은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또 이날 하오2시30분쯤 올림픽대로 성산대교 남단 5백m 중앙분리대에 세워진 가로등이 강풍으로 쓰러졌다.이 때문에 김포공항쪽에서 양화대교쪽으로 가던 경기 1흐 7555호 프린스승용차(운전자 하명렬·38·교사)가 쓰러진 가로등을 피하려다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등 2건의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이날 하오2시45분쯤 강북강변도로 동호대교에서 한남대교방향 1백m지점에서도 가로등이 넘어져 도로를 가로막는 바람에 30여분동안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또 상오10시50분쯤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악목욕탕 건물 5층 옥상에 세워진 가로·세로 각 1m,높이 13m의 굴뚝이 강풍에 무너지면서 인근 현대파크빌라를 덮쳤다.이 사고로 이 빌라 6가구의 베란다 유리창 10여장이 깨지고 옥상과 벽의 일부가 부서지거나 금이 갔다.
  • 이 마피아단 「죽음의 엔진」/폭력­테러활동 재개

    ◎시칠리아섬 주무대… 2년 침묵 깨/변절자 인척 등 10일새 9명 살해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악명높은 마피아조직 「죽음의 엔진」이 지난 2년간의 침묵을 깨고 활동을 재개했다. 이 조직의 저격수들은 6일 4시간 동안 4명의 반대파를 차례로 사살함으로써 지난 10일간 이들에게 살해된 사람들은 최소한 9명으로 늘어났다. 희생자 3명은 동부 시칠리아 에트나산 인근의 카타니아에 있는 바에서 나오다 총탄 세례를 받았다.경찰은 저격수 4명이 대낮에 3명의 머리와 가슴에 총탄을 퍼부은 뒤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났다고 밝혔다.경찰관계자는 『고전적 마피아식 공격』이라고 말했다. 4번째 희생자인 도메니코 부스체타씨(45)는 이 사건 후 4시간 뒤 살해됐다.그는 10년전 마피아의 실태를 폭로했던 토마소 부스체타씨의 조카로 확인됐다.미국에서 보호받으며 살고 있는 토마소 부스체타는 벌써 아들 2명을 비롯,인척 36명을 잃었다. 마피아는 복수및 경고의 뜻에서 변절자의 인척이나 친구를 살해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실제로 수사관들은 마피아 변절자들의도움으로 일련의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이는 지난 93년 1월 마피아 「두목중의 두목」 살바토레 「토토」 리나가 23년만에 체포된 이후의 일들이다. 그러나 마피아가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는지 모른다.이탈리아 경찰 관계자들은 지난주에 일어난 살해사건의 공통점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팔레르모 검찰차장 로베르토 스카르피나토는 이번 사건과 관련,코사 노스트라가가 리나의 콜레오네시가를 상대로 반격전을 전개했는지 여부를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 본사 「김구 특무대」 해체 성명서 발굴

    ◎항일투쟁하다 광복후 정치라이벌 제거 해방정국에서 테러는 하나의 정치수단으로 악용됐다.애국애족을 외친 숱한 청년단체들이 실제로는 온갖 명분을 내세워 반대파 또는 정치적 라이벌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같은 테러단체의 뿌리는 일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일본인·친일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 테러단체는 해방 이후 좌우 대결에 그대로 이용된다.그러나 테러단체가 비밀결사 조직으로 유지돼온 특성 때문에 이들의 실체를 알려줄만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시피한 실정이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이같은 상황에서 해방 직후 크게 활약한 한 테러단체의 성격·구성들을 분석할만한 자료를 최근 발굴했다. 워싱턴의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 슈트랜드분소에 보관된 「주한미군 군사실 문서」더미에서 찾아낸 이 자료는 「김구특무대」의 성명서이다.「김구특무대」는 광복 직후부터 악명을 떨치다가 45년 11월29일 김구의 지시로 해체하면서 이 성명서만을 남겼다. 「김구특무대」는 성명서에서『민족 천년의 운명을 좀먹으려는 역적의 무리들에게 향하여 단연코 일도양단 할 숙청의 칼을 뽑은 것』이라고 활동목적을 밝혔다.이어 회원숫자를 수백명이라고 내세운 뒤 『회고하면 조국광복 일념에서 중명을 띠고 내지에 파견됐다(중국의 임시정부에서 한반도로 파견됐다는 뜻)』고 해 일제 때 조직됐음을 분명히 했다. 마지막으로 『자주독립의 절대적 명제를 완수하기 위해 질풍신뢰(질풍신뢰)적 숙청과 응징으로 우리 특무대의 빛나는 임무의 막을 내릴 것』이며 『도적 일군의 시산혈하속에서만 피흘린 선배의 원혼은 비로소 고이 잠들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 좌우익 대립 극심(새로쓰는 한국현대사:9)

    ◎반탁대회 성공하자 김구 “과도정부 추진”/좌익 찬탁 급선회후 전국 암살·테러 잇따라/반탁운동 격렬… 서울 철시·군정종사원 파업/좌우 4개정당 “임정 세워 국난 수습… 대단결” 추구 모스크바삼상회의가 결정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과 「5년이내 신탁통치」는 이 땅에 남긴 것이 없다.그런 뜻에서 회의 자체가 우리에게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던져주지 못했다.다만 이를 기화로 남북의 각 정치세력은 주도권잡기에 혈안이 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만다.일제 유산 처리는 뒷전으로 밀린채 좌우익 대결구도만이 전면에 떠올랐던 것이다. ○군정청 “가두시위 훌륭”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 결정」이 전해지자 38선 이남지역의 세밑 정국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쪽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중칭(중경)임시정부 세력이었다.중칭임정측은 28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4대국 결정에 대항해 시위와 파업을 벌이라고 백성에게 직접 촉구했다.이날 밤부터 서울시내에는 「반탁」벽보가 곳곳에 나붙고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가두연설을 한 몇몇 인사는 미 헌병에 의해 연행되기 시작했다. 김구는 「신탁통치에 대한 비협조」를 선언하고 나섰다.그는 선언문에서 『한반도는 유엔이 규정한 신탁통치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4대국 신탁통치는 ▲민족자결을 바라는 민족 염원에 어긋나며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이 되풀이 약속한 내용과 다른데다 ▲끝내는 극동 평화를 깨뜨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김구는 이 내용을 4개국 원수들에게 전달하라고 미군정청에 요구했다. 29일에는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의가 열려 중칭임시정부와 청년단체들이 긴밀하게 협조,조직적인 반탁국민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한다.좌파인 조선인민공화국(인공)중앙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당도 이날 「신탁통치 배격」담화를 발표해 반탁 입장을 표명했다. 이날부터 서울거리는 철시했고 미 군정청에 근무하는 한국인들도 총파업을 선언,집단결근하고 따로 반탁 가두시위를 벌였다.이같은 분위기에 놀란 미군정청은 이날 하오8시부터 헌병을 제외한 미군 병사와 민간인의 외출을제한하는 일종의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30일에는 국민총동원위가 「국민행동강령」발표를 통해 「중칭임시정부 절대 수호」와 「외국군정의 철폐」를 호소한다.이날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가 암살된 것도 그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국민총동원위는 곧이어 31일 하오2시 서울시민반탁대회를 열었다.당시 중앙신문(좌익지로 뒤에 찬탁으로 선회,46년 9월 미군정에 의해 폐간됨)은 대회상황을 「수만명의 남녀노소가 구름같이 모여들어 탁치반대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질서정연하게 걸어갔다」고 보도하고 『기미만세(3·1운동)때를 연상케 하는 우리 민족의 항쟁표시』라고 평했다.하오4시30분쯤 끝난 이 대회는 질서정연했고 비폭력적이었다. 미군정청 보고서도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격렬한 모습이었다.그러나 호스로 물을 뿌리는 미군장교나 미국인들에게 이상하리 만큼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폭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시위는 훌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군정청이 추산한 시위 참가자는 5만∼7만5천명이었다. 대회 성공에 고무돼서인지 김구는 46년 1월4일 중칭임시정부를 강화해 과도정권을 수립한다고까지 선언한다.국민총동원위가 주최한 대규모 반탁집회가 1월12일 한차례 더 열린데 이어 학생들의 반탁시위가 줄을 지었다.반탁운동은 전국적 범위의 저항운동으로 전개돼 가고 있었다. ○북은 소 지령따라 찬탁 우익세력이 반탁운동의 주도권을 잡고 민심을 이끌자 남쪽의 조선공산당도 1월3일 서울운동장에서 「탁치반대민족통일촉성시민대회」를 연다.그러나 이 대회는 도중에 찬탁으로 성격이 변질됐다.조선공산당의 태도 급변은 물론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소련군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는 45년 12월28일 박헌영을 평양으로 불러 모스크바 결정을 따르라고 직접 지시한다.5일만에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이 대회를 「모스크바 결정 지지대회」로 둔갑시킨다.이어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도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고 나섰다. 엄밀한 의미에서 당시의 대립은 「반탁」대 「찬탁」이 아니라 「반탁」대 「모스크바 결정 지지」였다.즉 「찬탁」으로 분류된 세력은 「신탁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기 보다 모스크바 결정에 포함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더 비중을 뒀다.어쨌든 조선공산당이 「찬탁(모스크바 결정 지지)」으로 급선회하면서 남쪽의 정국은 아수라장이 됐다.「찬탁은 좌익,반탁은 우익」이란 등식은 모든 가치 평가기준을 압도했다. 좌익이 찬탁으로 돌자 전국에서 테러행위가 잇따랐다.1월12일 서울에서 찬탁 유인물을 돌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회원 3명이 납치됐다.또 전북 전주에서는 2월8일 아침 인민위원회 회원이 죽음을 당했는데 곁에는 「신탁통치를 찬성하거나 우리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반역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경고문이 놓여 있었다. ○좌우 중간파 태동 계기 이 와중에서 정국을 주도하는 좌우익 4개 정당이 뜻을 합쳐 민족단합을 추구하는 움직임을 보여 그나마 한가닥 희망을 던져줬다.한민당·국민당·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의 대표들이 1월7일 회담을 열어 공동성명을 낸 것이다.이 자리에는 중칭임정과 인공측에서도 옵서버로 나왔다.4당은 『자주독립과 민주발전을 원조한다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정신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신탁통치 문제는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에서 해결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이어 『암살과 테러활동은 민족단결을 파괴하며 국가독립을 방해하는 자멸행동』이라고 비난하고 이를 중지할 것을 호소했다.중칭임시정부가 다음날 「4당 합의」를 공식지지하자 민족의 기대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희망은 곧 무산됐다.이승만이 7일 전에 없이 강경한 반탁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한민당과 국민당이 8일 당대표들이 서명한 4당합의를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비록 4당합의는 우익정당들의 번복으로 깨졌지만 이 때 합의한 「선 임시정부 수립,후 신탁통치 해결」원칙은 좌우합작과 통일정부수립을 목표로 한 제3세력,곧 「중간파」를 태동시켰다. 그나마 좌우연합의 기대를 걸게 한 4당합의가 깨진 뒤 좌우익은 각각 자체 기반 확보에 열을 올렸다.이는 2월1일 중칭임정의 「비상정치회의주비회」와 이승만 계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합쳐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비상국민회의는 뒤에 미군정청의 행정자문기관 성격을 띤 「남조선국민대표민주위원」으로 변모한다.이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29개 정당·사회단체들이 이달 15∼16일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를 열어 우파와 맞섰다. ○“반탁” 조만식 연금당해 한편 북쪽에서는 김일성주도 아래 일사불란하게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46년 1월3일 평양에서 대규모 지지결의대회를 여는 등 주민여론을 유도하는 동시에 한쪽에선 반대파들을 어김없이 숙청했다.평남인민정치위원회 조만식의장이 1월5일 열린 긴급회의에서 「신탁통치 반대」발언을 하자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시켰다.반탁을 외치는 시민·학생들에 대한 시베리아 유형이 시작됐다. 모스크바 결정을 실행하기 위한 실무회담인 미소공동위원회 1차회담은 46년 3월20일 덕수궁에서 열렸다.모스크바 결정이 내려지고 미소공동위 개최까지의 석달동안 이땅의 정치세력들은 뭉치지 못했다.민족의 통일·독립을 4대국에 강력히 요구하기는 커녕 사분오열돼 정파 이익찾기에 급급했던 것이다.결국 미소공동위는 결렬되고 남북에 주둔한 미·소군은 단독정부 수립 계획을 구체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 오진우는 누구/항일유격대 출신 혁명 1세대

    ◎세습체제 구축 「절대적 후원자」 25일 새벽 사망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은 북한 군부를 장악해 온 권력서열 2위의 핵심인물이다.그는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원 출신 혁명 1세대로 김정일 후계체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절대적 후원자」였다. 오진우는 1917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어린 시절을 만주 간도에서 보낸 그는 33년부터 김일성을 따라 항일 빨치산 투쟁에 나섰으며 옛 소련 보병학교와 육군대학에서 군사학을 배우기도 했다.6·25전쟁 때는 특수부대인 766유격부대장으로 참전했고 61년 당 중앙위원,6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올랐다.67년 3월에는 김정일이 박금철 등 갑산파를 숙청하는데 돌격대로 나서 대장승진과 함께 인민군 총정치국장으로 영전했다.오는 이때부터 책략가로서 김정일의 반대파 숙청에 앞장서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67년1월 군당 제4기4차 확대회의에서 민족보위상인 김창봉과 대남사업총책 허봉학·총참모장 최광 등 군수뇌부 대숙청을 진두지휘한 뒤 군참모장으로 승진했고 76년5월 인민무력부장 최현을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격상시키면서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다.이후 오는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 권력 구조에서 20년이 넘게 자리를 유지했다.92년 4월에는 원수에,93년 4월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올라 실질적인 3인자 지위에 있던 그는 김일성 사망후 권력서열 2위로 뛰어올랐다.특히 김일성 장례식에 김정일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북한의 권력 승계작업이 그의 전폭적인 지지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과시했다.그러나 그는 지난해 7월 16일 평양 금수산의사당에서 거행된 김일성사망 1백일 중앙추모회에 참석했을 때 한쪽 다리를 저는등 부쩍 건강이 악화된 모습을 보였다.
  • 「한약조제시험」 앞두고 약사들 고민/올 8월이전 첫 시행 예정

    ◎“잘봐야 본전·떨어지면 돌팔이”…/본초학 등 4과목 불합격땐 자격 상실/겉으론 “쉬쉬”… 한의사 초빙 그룹과외도 『시험에 응하기도 뭣하고 안보자니 찜찜하고…』약사들이 고민에 빠졌다. 늦어도 오는 8월 전까지는 시행될 것으로 보이는 약사들의 「한약조제시험」을 앞두고 이에 응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한약조제시험」은 93년 한·약간 일대격전 뒤 결정된 개정약사법에 따라 올해 처음 실시되는 것.시험에 합격하지 않은 약사는 한약을 일체 처방하거나 조제할 수 없다. 시험과목은 본초학·한약조제지침·방제학·감별학등 4가지.시험에 붙으면 쌍화탕이나 갈근탕등 기본적인 항목의 한방처방 1백가지에 대해서는 조제를 할수 있게 된다. 전국의 2만여 개업약사중 그동안 한약을 다루어왔던 약사는 48%선인 9천6백여명. 현재 약사들의 입장은 크게 3가지다.적극적으로 시험을 보자는 준법파,중간에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는 중도파,시험을 전면 거부하자는 반대파 등. 약사회는 나름대로 지난해 4월 개정약사법이 위헌이라며 제기했던 헌법소원의 결과를 지켜보며 행동하자는 자세다.그러나 시험 실시전까지 헌법소원 판결이 날 가능성은 현재로는 별로 없어 보인다. 준법파 약사들은 벌써부터 시험준비에 바쁘다.따로 교재를 사서 공부를 하거나 심지어 몇몇 약사들끼리 모여 한의사를 초빙해 강습을 받기도 한다. 한 약사는 『택시기사들도 막상 운전면허시험에는 1백%합격하기 어렵듯 항상 한약을 다루어왔지만 시험은 부담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파들의 주장도 만만찮다.이들은 「잘해야 본전」이라는 것.한·약파동때 치른 파업으로 이미 이미지가 실추된데다 한약을 지어오던 약사들이 만에 하나 시험에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칫 그동안 「돌팔이」였다는 오명을 몽땅 뒤집어써야 할 판이다. 또 많은 약사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시험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우려 하지않고 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서 B약국을 경영하는 양정자(53·여)씨는 『30년동안 약국을 경영하면서 나름대로 한약을 처방하는데는 자신이 있지만 시험공부를 하면서 다시 한번 지식을 정리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며 시험에 자신감을 보였다. 약사회는 오는 22일 새로운 집행부를 선출한뒤 입장을 다시 정리할 계획이어서 그 결과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옐친,군내 반대세력 제거 박차/러군개편 의도와 방향

    ◎「체첸 책임」 빌미 그라초프체제 강화/전투력 향상보다 「충성심 고양」 포석 옐친 대통령이 16일 연두교서에서 체첸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군대개편을 공언함에 따라 러시아군의 대규모 조직 및 인사개편이 뒤따를 전망이다.그러나 이 군개편은 전투력향상을 목표로한 순수한 의도에서라기보다는 옐친대통령­그라초프국방장관 라인을 보다 공고히하기 위해 군내 반대세력을 숙청하는 계기로 이용될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우선 지난주 단행된 국방차관 3명에 대한 예편(러시아의 국방장·차관은 소련건국이래 모두 현역장성),보직해임 예가 이 범주에 든다.그라초프 장관과 불화가 심한 보리스 그로모프 차관이 한직인 외무부의 독립국가연합(CIS) 협력국장으로 전보된데 이어 게오르기 콘드라티예프차관,마트베이 부를라코프차관이 모두 해임된 것. 발레리 미로노프차관도 조만간 다른 한직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콘드라티예프,미로노프 두 차관도 장관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그라초프의 심복으로 분류되는 부를라코프를 「끼워넣은」것.그는 동독주둔 러시아 서부군사령관때 탱크등 각종 화기를 마구 팔아치워 착복한 혐의로 체첸사태 발발직전 여론의 주표적이 됐던 인물이다.반대파만 골라낼 경우의 군내 반발을 감안해 동반퇴임시켰다는 분석들이다. 반면 그라초프의 측근으로 분류된 미하일 칼레슈니코프 참모총장은 상당히 중용될 인물로 분류되고있다.군개혁의 핵심사항중 하나인 총참모부의 국방부로부터의 분리가 실행에 옮겨질 경우 그라초프·옐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인물인 그가 그대로 옮겨앉을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 군개혁계획에서 핵심추진사항중 또하나는 공수부대 「길들이기」.현재 러시아군에서 제일 정예부대중 하나가 바로 이 공수부대인데 그라초프장관에게 잘 순종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들이다.체첸사태 초기 이 정애부대를 투입시키지 않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게 정설이다.체첸침공이 결정된 뒤 예브게니 포드콜진 공수부대 사령관이 소수정예 공정여단을 투입할 경우 4∼7시간이면 큰희생 없이 작전을 끝낼 수 있다고 보고했으나 묵살당한 것으로 알려져있다.결과적으로 작전은 소모전 양상이 돼 엄청난 민간인 희생까지 내게된 것이다.이로 인한 앙금으로 포드콜진장군은 한 모임에서 그라초프와 악수를 거절했다는 설까지 있다.이러한 공수부대의 화력을 대폭 줄여 일반육군사단의 예하부대로 편입시키는 내용이 포함돼있다는 것이다.그나마 전투력을 제대로 갖춘 정애부대 하나가 해체되는 셈이다. 결국 체첸작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라초프 장관의 입지는 더 강화된다는 결론이다.그라초프는 언론,지식인등 이곳 여론에서 가장 인기 없는 인물로 꼽히는 한명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옐친대통령이 계속 그를 버리지 않는 것은 결국 향후 정국방향과 무관치 않을 것이란 분석들이다.그리고 그 방향은 2년여전까지 추진됐던 개혁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 「혁사노」 대학생조직 적발/5명 구속/20여차례 노사분규 개입

    서울경찰청 보안부는 6일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을 목표로 전국적인 노동자 연대투쟁을 기도해온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 구속자 대책위원회」 위원장 이진영(27·연세대 전기 4)군 등 5명을 국가보안법위반(이적단체구성·가입 등) 혐의로 구속하고 서모양(21·여·D대 화학2)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이들의 거점인 서울 D대 학생회관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컴퓨터와 디스켓,유인물 등 46종 4백25점을 증거물로 압수했다. 경찰은 이군 등이 지난해 2월 조직재건을 위해 경찰의 수배를 받고 도피해있던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당」 전 조직국장 김정한씨(28)등과 함께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 구속자 대책위」를 결성한뒤 인천·울산 등 노동현장에 침투,「전국기계 노동자협의회」의 연대파업에 가담하는 등 20여차례에 걸쳐 각종 노사분규에 개입,혁명적 노동자정당 건설을 기도해왔다고 밝혔다.
  • 해방정국의 혼란(새로쓰는 한국현대사:6)

    ◎송진우,「건준」 맞서 「국민대회준비위」결성/여운형 내세운 우익의 「합작」노선 반대/“「임정」지지”표방… 고하 피살로 좌익 타격/하지, “「인공」은 소련과 밀접한 관계… 활동 중지”명령 1945년 해방정국은 아주 혼란스럽게 저물어갔다.당시 사회상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미 국무성이 J R 하지 중장에게 파견한 정치고문 H M 베닝호프의 보고서일 것이다.미군이 진주한 이후 9월15일에 작성한 이 보고서는 「조금만 불똥이 튀어도 폭발할 화약통,그것이 남한의 상황」이라고 기술했다. 그의 말대로 남한은 과연 화약통이었을까.어쨌든 1945년이 세밑에 다가선 12월30일 상오6시 송진우를 저격한 서울 원서동 76의 총성을 시발로 정치테러가 잇따랐다.뒷날 여운형·장덕수·김구로 이어진 암살사건은 해방정국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송진우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자 이에 맞섰다.그래서 건준이 인공을 선포한 다음날인 9월7일 우익지도자 3백80명과 함께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아직 중국 중칭(중경)에서 돌아오지 못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지지하고,국민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었다.송진우의 죽음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다만 건국대회준비위원회는 9월16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해방정국의 판도를 선점한 인공의 실체를 먼저 딛고 넘어가는 것이 당시 사회상을 돌아보는 수순이 될 것이다.인공이 병아리라면 달걀 격이기도 한 건준은 194508월15일 발족되었다.여운형은 8월14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으로부터 일본 패전소식을 들은데 이어 다음날 15일 아침에는 정무총감 엔도(원등륭작)의 방문을 받는다.행정권을 이양할 테니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이다.이를 수락한 여운형은 그날밤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이와 더불어 5개의 부서를 두고 2천여명의 청년·학생으로 건국치안대도 조직되었다. 건준에 송진우·장덕수등은 불참했으나 안재홍·김병로·이인등 우익및 중간노선의 인물과 박헌영계열의 좌익세력,정백 중심의 장안파 공산당계열이 들어왔다.말하자면 좌우합작성격을 띤 건준은 지방조직도 확대,8월말까지 1백45개의 지부조직이 이루어질 정도였다.그러나 건준은 건국에 실패하고 말았다.좌익계열이 재빨리 조직을 확대,건준을 장악하고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전인 9월20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한 것이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이후 9월12일 하지장군이 시공관에서 정치인들과의 대화를 모색할 때 33개 정당대표가 등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이렇듯 복잡다단한 정치상황은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가 9월15일 미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나타난다.그는 9월말에 가서 이들 정당을 두 집단으로 분류했는데,민주적 보수집단과 급진 또는 공산주의가 그것이다.특히 미군정은 급진주의 주요세력으로 인민공화국을 주목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을 도전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이는 공식명칭에 국가를 상징하는 「국」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유일한 정부를 표방했기 때문이다.더구나 인공은 1946년3월1일 총선거 실시를 골자로 하는 특별조치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였다.이에 대해 군정장관 아놀드는 10월10일 한국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군정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라고 못박고 『군정은 다른 형태의 모든 정부를 통제할 권한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인공은 이에 맞서 11월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서도 공화국명칭을 여전히 사용했다.하지는 맥아더에게 보낸 보고서(미 외교문서시리즈 제6·1945년)에서 「인공은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지지세력이고 소련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했다.그리고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닌 상당수의 좌익세력이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인공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 옳겠다고 판단한 하지는 맥아더에게 이 대목에 대한 평가도 구했다. 맥아더로부터 「어떠한 결졍을 내려도 지지할 것」이라는 회신이 돌아왔다.하지는 마침내 인공에 대한 활동중지명령을 내린다.이에따라 주한미군 방첩대(CIC)는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간판을 떼어버렸다.이렇듯 인공은 미군정 아래서 좌익세력규합 이외에 다른 의미를 거두지 못한 채 사실상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인공중앙인민위간판이 내려지기 얼마 전에 귀국했다.이승만은 10월16일,김구는 11월23일에 각각 돌아왔다.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귀환문제,특히 이승만문제는 워싱턴·토쿄(맥아더사령부)·서울(미군정) 사이에 사전조율되었다(미 육군작전국문서 한국편 1945년10월).하지는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이승만·김구·김규식의 귀환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미 국무성은 중국 중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망명지로부터 귀환이 허가되었음을 통보하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자격 귀환임을 강조했다.여기에는 이승만도 포함되었다.미 국무성은 귀환자들에게 「38도선 이남지역에 머무는 동안 군정당국의 법과 규칙을 준수한다」는 서약서를 받도록 하는 조치도 잊지 않았다.이승만은 귀국 2주만에 반소(반소)논쟁을 벌였다.이에 국무성은 서약을 유의토록 환기시키면서 곧 소련과 가질 교섭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반응을 즉각 보였다. 국제간에 이해가 엇갈린 정치전략은 변화무상한 것인가.철저한 반공주의자에다 항일운동가라는 점을 들어 서둘러 귀국시킨 미국이 이승만에게첫 제동을 건 것이다.김구 역시 이승만과 같은 이유로 여의도 군용비행장을 거쳐 조국땅을 밟았으나 그다음 12월2일 군산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은 고국의 산하조차 바라보지 못하는 미군 장갑차에 실려 서울에 왔다.이승만과 김구의 환국은 다른 정치판도의 변화를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이승만의 존재는 하지로 하여금 각양각색의 정치단체통합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겨주었다.당시 이승만의 명성은 대단해서 모든 정당이 거의 다 의장직 수락을 제의해올 정도였으니까….이승만은 귀국한 지 1주일도 안되는 10월23일까지 50여개 단체대표를 만났다.그 결과는 독립촉성중앙회 결성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인공과 공산주의자들이 등을 돌려 좌우익 골은 더욱 깊어갔다. 한편 38도선 이북 소련군 점령지역 평양에서는 9월3일 국내파 공산주의 중심인물의 하나인 현준혁이 암살되는 것으로 정치투쟁조짐을 드러내고 있었다.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원장 조만식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그의 죽음은 한반도 해방정국의 암살1호로 기록된다. 이에 앞서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의 명령에 의해 10월8∼10일 평양에서 북조선 5도대회가 열린데 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10월13일)되었다.그리고 김일성이 모습을 드러낸 평양시민대회(10월14일)가 열렸고,들러리정당 조선민주당이 창당되는등 소련의 의도대로 착착 돌아갔다. 역사에는 결코 가정이 없다고 한다.하지만 이런 명제를 무시하고 남북한의 많은 세력이 구심점을 갖추었거나 연합전선을 폈더라면 외세에 의한 분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해방정국은 건국의 옷을 입기는커녕 첫단추부터 잘못 끼우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뒤 「첫 정치희생자」는 현준혁/「사회장사진」국내 첫 발굴/「송진우 저격」 3개월여전 평양서 적위대에 피살/「9월3일 암살」 묘비서 확인… 「소관련」시사 논문도 우리는 해방정국에서 암살1호하면 45년 12월30일에 숨진 송진우를 흔히 떠올린다.그러나 사실상의 첫 희생자가 이보다 3개월이나 앞서 9월3일 평양에서 소련 민정당국과 결탁한 반대파에 암살된 공산주의자 현준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흔치않다. 그는 1906년 평남 개천의 소지주 집안출신으로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서 교수를 지낸 인물.8·15해방을 서울에서 맞아 장안파공산당의 평안남도 책임자로 임명됐다.그달 18일 평양에 도착한 직후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적위대를 조직했다.소련군이 진주한 무렵 다른 공산주의 세력을 압도하고 8월27일 조직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될 정도였다.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의 공산주의 세력은 소련파·화요파·적색노조파등이 복잡하게 얽힌 형국.소련에 대해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하던 그는 소군정과 관계가 좋지 못했고 이를 빌미로 반현준혁파들은 그를 반소분자나 부르주아로 몰아세웠다. 그가 심하게 마찰을 빚었던 상대는 평양 보안서장을 거쳐 평양시 적위대장에 임명된 송창겸과 일제때 포목조합 이사장을 지낸 장시우등 소련파.김일성 영입 계획을 추진하던 소련 민정당국은 결국 송창겸과 장시우등 친소적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현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9월3일하오1시 소련 민정사령부서 회의를 마치고 소련제 스리쿼터를 타고 돌아가다 적위대 복장의 괴한에게 총을 맞고 숨졌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일본 도쿄대 와다 하루키(화전춘수)교수는 자신의 논문 「소련의 대북한 정책」에서 「암살범이 누구이든 현준혁의 죽음은 소련측으로는 좋은 일이었던 것 같다」고 기술했다. 현준혁의 암살날짜가 지금까지는 9월28일로 알려졌으나 최근 하와이대 서대숙교수가 평양에서 촬영한 묘비 기록을 통해 9월3일로 확인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소련당국이 의도적으로 현준혁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러준 당시의 사진도 긴급 입수했다. 이날 암살에 대한 또 다른 설은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거목인 조만식 휘하의 반공주의자들의 거사란 주장도 있다.그러나 현준혁은 당시 조만식을 신뢰하는 사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는 반론이다.
  • 장바구니 물가 1주새 7% “폭등”/서울 YMCA/8개시장 조사

    ◎설 앞두고 생선·과일 등 제수용품이 상승 주도 설을 앞두고 제수용품인 육류 수산물 과일류를 중심으로 장바구니 물가가 1주일사이에 7%나 상승,그동안 안정세를 유지하던 소비자 물가를 뒤흔들고 있다. 이는 서울YMCA 시민중계실 물가모니터 위원회가 지난 20일과 26일 2회에 걸쳐 서울 남대문시장 등 8개 주요 재래시장 및 슈퍼마켓을 방문해 실시한 주소비재 58개 품목 가격변동 조사에 따른 것으로 역시 물가상승폭이 컸던 지난해 2월과 비교할 때도 5.46%나 상승했다. 품목별로는 조기 25㎝짜리가 지난 20일에는 마리당 1만4천5백원선이었으나 일주일새 1만6천1백66원으로 올라 11.5%의 상승률을 기록했으며 작년에 비해서는 무려 1백6.4%나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동태도 40㎝짜리 1마리에 1천5백25원에서 2천4백58원으로 1주새 61.2%가 올랐고 고등어도 30㎝짜리 1마리에 1천4백원에서 1천6백80원으로 16.6%가 오르는 등 생선류의 상승세가 두드러졌다. 야채류와 양념류도 마찬가지로 크게 올랐다.마늘이 4백g(깐 것)에 2천원에서 3천17원으로 일주일사이50.9%의 폭등세를 보인 것을 비롯,양파가 상품 4㎏에 3천6백90원에서 5천40원으로 36.6%,파는 대파 1단에 8백20원에서 9백22원으로 12.4%가 올라 전반적인 상승세를 드러냈다. 과일류에서는 귤이 조생종 1㎏에 1천1백80원에서 2천원으로 69.4%,배는 신고 5백g짜리 1개에 1천4백16원에서 1천8백72원으로 32.2%,사과도 부사 3백50g짜리 1개에 8백40원에서 8백94원으로 6.4%가 올라 상승폭이 컸다.반면 쌀 등 곡류의 가격은 비교적 안정세를 드러냈으며 기초공산품도 커피값이 지난주보다 10% 오른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안정세를 보였다.
  • 이슬람교 상륙 거점… 에이티갈시원 웅장(서역문화기행:8)

    ◎동서문물 교류 실크로드의 중심지/중국 서쪽끝 도시 카시갈/녹색돔의 전도사 호오쟈가족묘… 궁전 방불/중국최초의 석굴시원 삼선동도 시외곽에… 생불벽화 유명 호탄에서 중국 최서단 도시로서 이슬람교의 중심지인 카시갈까지 5백9㎞는 필자에게 신선한 체험을 안겨주었다. 그밤이 팔월 한가위 어스름 저녁,고물딱지 장거리버스에 올랐다.승객은 온통 위구르족.꼬박 밤을 새우면서 열두시간을 달렸다.차창의 깨진 창틈으로 몰아치는 고춧바람에 기침이 나도록 맵디매운 담배연기,그리고 양고기 노릿내,그것들이 시간마다 코란의 독경소리와 범벅이 되어 눈과 귀를 찌르는데 창밖의 몽롱한 달빛에 스쳐가는 부연 모래빛,가도 가도 불빛 없는 바다에 뜬 느낌이었다. 카시갈은 옛날 소륵국의 도읍지.우전이나 마찬가지로 한나라 때는 36국의 하나요,당나라 때는 안서사진의 하나였다.「한서」,서역전의 기록대로라면 장안에서 9천3백50리(4천6백75㎞)지점,벌써 2천년전의 호구가 1천5백호에 인구 8천6백여명,거기다 시열,그러니까 오늘의 바자,곧 장을 말하는데 카스갈의 바자는 아직도 전중국을 대표하고 있다.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그들의 국토방위를 위한 최서단 요새로 생각했었다.후한 때의 명장 반초(33∼103)가 파미르고원을 넘어 쳐들어온 쿠샨왕조(대월씨국)를 대파하고 그의 부하인 감영을 무역의 사절로 로마에 파견한 것도 여기였었다.인도의 불교가 동점한 최초의 거점도 여기요,중동의 이슬람교가 상륙한 최초의 거점 또한 이곳이었다. ○로마로 넘어가는 관문 그도 그럴것이 카시갈은 알타이산맥으로부터 시작한 타림분지가 솟아오르면서 파미르고원으로 달려가는 바로 해발 1,294m의 낮은 고원지대라는 지리적 특색을 살린 곳이다.거기서 파미르고원을 넘으면 곧장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이란·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기스탄 등의 관문으로 통한다.그러니까 로마로 넘어가는 실크로드의 중국측 마지막 역참인 것이다. 중국에서 실크로드의 의의를 동서의 교통과 무역외로 서역의 침입을 막고 중원을 지키겠다는 국방에 두지만 그에 못지않은 의의는 예술에 있다.예술의 가시적인 성취는 무엇보다 석굴이다. 석굴은 사실상 「석굴사」 혹은 「석굴암자」의 약칭이다.그것은 벼랑이나 석굴속에 설시한 불교사원으로 초기불교가 「이진수행」을 제창함에 비추어 석굴은 적지였었다.석굴은 속세의 잡음이 들리지 않는데다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한 이점 탓에 불교의 고사와 원리를 벽화로,석가를 비롯한 보살·미륵을 조각하기에 좋았었다. 기원 3세기전부터 인도에서 성행했던 석굴 개착은 그로부터 대략 5세기 뒤인 동한말,그러니까 기원 200년 전후해서 중국에 출현했으니 그 최초의 석굴이요,최서단의 석굴이 카시갈에 있다.바로 「삼선동」. 삼선동은 위구르말로 「투쿠자우지라」.그 이름 그대로라면 세사람의 신선이 사는 동굴이지만 실상은 세개의 석굴을 말했다.카시갈에서 북쪽으로 18㎞지점,차크마크(흡극마극)강을 따라 황막한 사막을 달리다 문득 그 강둑에 멈추었다.대절한 택시기사는 남쪽 벼랑을 가리킨다.파미르고원에서 흘러내리는 설수의 강인데 강폭은 1백50m를 넘을 만큼 넓었다.필자 혼자서 차크마크를 건너서 조금전 택시기사가 가리키는 곳까지 족히 20여분을 헐레벌떡 뛰었다. 삼선동은 하상으로부터 15m쯤 벼랑,그 12m쯤 높이에 1m 남짓의 간격으로 나란히 뚫린 세개의 석굴이어서 필자는 지붕위에 매단 비둘기집 상자를 보는 느낌이었다.중간석굴이 약간 컸지만 대체로 높이 2m 남짓에 너비 2m쯤.거기서 벼랑끝도 3m 남짓 보였다. 그속에 한말 불교미술이 아직도 남았다니 나그네의 속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옛날 인수봉 타던 가락으로 적갈색 그 벼랑을 올랐지만 겨우 4m 높이서 쩔쩔매고 말았다.그 나머지 수직의 암벽은 어쩔 수 없었다.미리 알았더라면 조립식 사다리를 준비하거나 아예 벼랑의 상단에서 자일을 묶고 낙하할 것을. ○전래 불교미술의 원형 자료에 따르면 석굴은 굴마다 전후 2실로 나뉘었다고.서굴과 중간굴은 텅텅 비어 있고 오직 동쪽 석굴만이 진귀한 미술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특히 70여개의 불상이 사방을 벽화로 메운데다 조정(물풀을 그린 천장)에는 연꽃이 그려졌다고.그중에도 미술사적·불교사적 초점의 벽화는 그 벽화중의 좌불한 컷으로 ,그 좌불은 방격무늬의 가사를 입고 거기에 녹색·남색·홍색 등 세가지 색깔이 어울린 채색의 구성이라고 했다.그것은 인도불교가 중국 전래당시 불교미술의 초기적인 원형을 보인 것이다.무엇보다 쿠츠의 키질천불동이나 돈황의 막고굴보다 연대가 앞선데다 간다라의 영향조차 보이지 않는 점에서 주의를 받아왔었다. 삼선동 그 석굴에 발을 디디지 못한 채 돌아서는 필자는 청나라 시인 철보(1752∼1825)가 카스갈의 지방관으로 귀양살이하던 1810년 무렵에 쓴 「유삼선동」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칠십이동천,무지용탁석. 내찬소륵서,착공의암벽. 응고적선인,도명둔공적. 산황운불서,석쇄사여격. 위제고백인,욕상심전탕. 선인불가견,선동차친력. 적환여적선,탑연경수적.」 (세상엔 72동천의 선계가 있다지만,중 하나 설 곳 없네. 카시갈 서쪽으로 숨어,석굴을 파고 암벽에 기댔네. 신선이 여기로 귀양와서,명예를 피한 채 적막세계로 숨은 거지. 산이 거칠어 구름조차 깃들지 못하고,돌이 부서져 모래는 여울처럼 흐르네. 백길되는 아스라한 사다리에,발을 딛자 후들거리는 마음. 신선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고,사람은 여기 삼선굴에 올랐네. 귀양살이 이 사람도 속세의 신선처럼,우두커니 다시 누굴 따를까?) 근 2백년이 지났건만 차크마크강은 예대로 황량했다.예전의 사다리마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매일 다섯차례씩 예불 카시갈에서 불교의 유적이 삼선동에 상징적으로 남았다면 이슬람교의 유적은 카시갈이 이슬람교의 중심지답게 웅장하고 찬란하다.우선 이슬람의 예배당으로 4백50여년의 역사에 1만7천㎡의 면적을 지닌 맘모스의 에이티갈(애제□이)사원이 있고,이슬람의 일개 무덤으로 아바호오쟈(아파곽가)같은 궁전식 능묘가 그것이다. 카시갈시의 해방북로에 있는 에이티갈사원은 중국 최대의 청진사다.아랍어와 이란어의 복합사인 「에이티갈」은 곧 예배당을 뜻하는데 1426년 당시 카시갈의 통치자였던 사크서즈 미잘의 후예가 세운 것이다. 그 사원은 넓은 땅에 돔과 첨탑을 배합한 예배당·독경당·문루·연못 등의 장엄한 외형이 나그네의 시선을 끌지만 사원의 광장으로부터 중정·본전까지 사원 전역에매일 새벽부터 드리는 다섯차례의 예배,더구나 매주 금요일 하오에 드리는 주말예배의 성황은 열렬하다.신도 모두가 깔개를 깔고 이맘(예배의 인도자)이 암송하는 코란에 따라 무겁게 화창하는 군중의 소리는 파도되어 출렁이고,다시 신도들이 대지에 이마를 조아리며 무엇인가 외치는 장면은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카시갈시 동북쪽 5㎞지점의 하오한(호한)촌에 있는 호오쟈의 무덤은 우리의 상식과 너무 달랐다.작은 개울을 건너 낮은 언덕을 올라 고목 서너그루 아래로 말굽형의 아치를 들어서면 왼쪽으론 줄줄이 높은 기둥의 예배당이요,바른편에는 기다란 담안으로 마치 궁전을 방불케 초록빛 타일의 돔이 우뚝 솟아 있다. 궁궐의 문을 열 듯 대문을 열자 그 안에는 침침한 광선에 무거운 침묵이 덤벼오면서 울긋불긋 현란함을 느꼈다.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것들은 야외의 봉분이 아닌 옥내의 설단식 무덤이었는데 강렬한 채색의 주단이 그 관을 덮고 있는 모습은 마치 1인용 텐트를 치고 있는 야영장을 방불케 했다. 3백50여년전 이슬람교 전도사였던 호오쟈로부터 5대에 걸친 그의 가족 72명의 집단 묘지였다.그 안에는 청나라 건륭황제의 부름으로 궁궐에 갔다가 황제의 구애를 거절하고 자살하였다는 호오쟈의 딸 향비의 묘도 있다.비록 전설이지만.
  • 도쿄지진 엄습땐/일 방재국 가상시나리오/사망자8만∼13만명 달할듯

    ◎건물 34만채 대파… 전력 33% 공급중단 일본 간사이지역을 강타한 지진은 일본이 지진의 나라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지난해 동북부지역과 홋카이도를 두들기더니 이번에는 간사이지역을 휩쓸었다.「일본열도 전체가 지진활동기에 들어갔다」는 도쿄대 아베교수의 진단이 아니더라도 도쿄는 마치 포위된 듯한 양상이다.14만여명이 사망한 관동대지진의 기억도 있다. 「도쿄에 17일 발생한 것과 같은 규모의 지진이 일어난다면」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더이상 기나라 사람의 걱정이 아니다.과학기술청 방재과학기술연구소 지진예지연구센터 오카다소장은 「오늘의 지진은 내일의 도쿄의 모습을 말한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도쿄에 진도7.2의 직하형 지진이 나면 인근 지바현·가나가와현 전역과 사이타마·야마나시·시즈오카현 일부분에 걸쳐 큰 타격이 가해지게 된다.도쿄에는 1천1백87만명,지바 5백67만명,가나가와 8백10만명,사이타마 6백56만명,야마나시 86만명,시즈오카 3백7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일본 국토청 방재국이 88년 조사한 바에따르면 사망자는 8만∼13만명,목조건물은 34만여채가 대파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도쿄지역만 9천4백명이상의 사망자가 예상되고 중층이하의 건축물은 3만3천채가 대파되고 10만5천채가 반파될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지난 81년 법개정으로 철근사용 등 내진설계를 강화했지만 법개정이전에 지어진 낡은 건물들은 위험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진동에 따라 지반이 액상화될 것으로 우려되는 아다치,에도가와,오타구 등은 커다란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1차 건물 등의 붕괴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다음에는 수도·전기·가스등 「라이프라인」의 붕괴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 도쿄지역의 강진은 상수도 8%,도시가스 87%,전력 33%의 공급을 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지진에서 제일 취약한 것으로 나타난 것은 교량.도쿄도는 도내 1천2백여개에 이르는 교량의 안전성에 대해 재검토를 시작할 계획이다.그밖에 고속도로와 신칸센의 내진대책의 전반적인 재검토도 시급히 요청되고 있는 실정이다.또 화재도 5백건이상이발생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 불안감을 씻을 수 없게 하고 있다.
  • 양수기·송수호스 총점검/농림수산부/관정 3백38곳 관리상태로

    농림수산부는 18일 극심한 겨울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작물별 영농대책을 마련했다. 벼농사의 경우 모를 내는 시기를 지역에 따라 신축적으로 조정하기로 했다. 예컨대 전남의 경우 광주호 등 4대 저수지에서 논에 물을 대는 시기를 예년의 5월10일에서 5월25일로 늦춘다. 용수가 모자라 모내기를 하기 어려운 지역에는 마른 논에 볍씨를 직접 뿌리는 건답직파를 적극 유도한다. 가뭄이 계속돼 최악의 상태를 맞게되면 작물 및 지역별로 종자를 미리 확보,벼 대신 다른 작물을 심는 대파계획을 세운다. 월동작물인 보리와 마늘 및 파의 경우 밭에 이동식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고 퇴비와 짚 및 비닐을 덮어 수분의 증발을 막도록 한다. 무와 배추등의 관수시설이 있는 지역에 우선 심도록 한다. 과실류는 생육이 본격화되는 4월부터 과일고르기 및 눈따기 등을 대대적으로 펼쳐 수분이 불필요하게 소모되지 않도록 한다. 농림수산부는 이와 함께 오는 23일부터 다음달말까지 양수기 2만6천대와 송수호스 4천㎞및 관정 3백38개를 점검키로 했다.
  • 크렘린/「장막통치」 부활 조짐/안보위 5인 전권… 구소정치국 연상

    ◎경호실장·1부총리 핵심… 정책좌우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크렘린에 과거 소련시절 몇몇 지도자들의 뜻대로 국가를 통치하던 소위 「장막통치」의 악습이 되살아나고 있다.이는 체첸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데 언론과 옐친대통령 반대파 일각에서는 소련시절 국가권력의 핵을 이루었던 당정치국의 부활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새로운 「당정치국」으로 불리며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기구는 14인 정원의 국가안보위원회.옐친대통령,슈메이코 상원의장,이반 립킨 하원의장,체르노미르딘총리,올레그 로보프 안보위총서기 등 5인이 정위원으로서 모든 사안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나머지 8인의 후보위원에는 내무,국방,외무,방첩,대외정보,비상기획부 등 보안부서 책임자들이 모두 망라돼있다.구성면에서도 15명의 정·후보위원으로 짜였던 옛당정치국을 연상케 한다.이들은 체첸침공 이래 거의 하루 건너 회의를 열며 작전에 관련되는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보위원회가 정책결정의 공식기구라면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옐친대통령의 속마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2명의 인물이 따로 있다.바로 알렉산더 코르자코프 대통령경호실장과 올레그 소스코베츠 제1부총리.앞의 인물은 대통령의 주말 테니스 파트너,뒤의 인물은 고향친구로 체첸침공을 입안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끌어온 핵심인물이다.이 막후 2인과 막전의 안보위원회를 지배하는 공통되는 분위기는 한마디로 강경보수 일색.2인이 각색하고 안보위가 이를 공식화하는 식이다. 흥미있는 것은 옐친대통령이 지난주 비교적 온건성향의 슈메이코상원의장,립킨하원의장등을 안보위 정위원으로 임명한 일이다.체첸침공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강경파들이 여론의 집중표적이 되던 시점이었다.이들 두고 한때 옐친이 온건파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그라초프국방장관등 강경파측근들이 경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등의 성급한 진단이 나오기도 했다.그러나 전쟁결과에 공동책임을 지고 또한 의회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들을 끌어들였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국가중대사가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절차가아니라 소규모 서클에 의해 장막뒤에서 결정되는 시스템은 분명 바람직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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