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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두환 빈소 박근혜 조화 가짜...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어”

    전두환 빈소 박근혜 조화 가짜...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어”

    박근혜 전 대통령이 24일 오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보냈다고 알려진 화환은 박 전 대통령이 보낸 것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박 전 대통령 측근인 유영하 변호사는 이날 서울신문에 “박 전 대통령이 보내는 조화는 오후 4~5시 사이에 도착할 예정”이라면서 “오전에 도착한 조화는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없고 대통령이 보낸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박 전 대통령은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오전에 보냈던 화환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보낸 화환 옆에 위치했으나 현재는 치워진 상태다. 전씨는 생전 박 전 대통령과 얽히고설킨 인연이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76년 전씨가 당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퍼스트레이디 대행’이었다. 1979년 10·26 사태 직후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씨는 청와대 금고에서 찾은 6억원을 선친을 여윈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한 바 있다. 이 6억원은 2012년 18대 대선 TV토론에서 “당시 은마아파트 30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는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의 지적이 제기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받은 것인데 저는 자식도 없고 아무 가족도 없는 상황에서 다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밝혔다.전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악연’으로 이어졌다.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정통성이 없었던 5공 정부가 민심을 얻기 위해 박정희 정권과의 선 긋기에 나서면서다. 이후 6년간 박 전 대통령은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추도식도 공개적으로 참석하지 못했고 18년간 사실상 은둔의 삶을 살았다. 박 전 대통령은 2004년 8월 당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대표로 선출됐을 때 취임 인사차 연희동 자택으로 전씨를 찾아간 바 있다. 이후 특별한 교류가 없던 두 사람은 2013년 2월 25일 박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해후’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전씨를 겨냥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7월 전씨에 대해 미납 추징금 환수 의지를 강하게 밝혔고, 검찰은 전씨의 연희동 자택을 전격 압수수색하고 수사에 돌입했다. 이후에도 별다른 접촉이 없던 두 사람의 돌고 도는 악연은 전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끝이 나게 됐다.
  • ‘5공 청문회’ 노무현 추궁에 입 닫은 장세동...이번에도 “모른다”

    ‘5공 청문회’ 노무현 추궁에 입 닫은 장세동...이번에도 “모른다”

    ‘5공 2인자’로 불렸던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한 23일 취재진의 모든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장 전 안기부장은 이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전씨 자택에서 나오면서 기자들이 ‘누굴 만났나’, ‘안에서 어떤 말을 나눴나’ 등을 묻자 “그런 거 묻는 거 아니다. 물어봐야 난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그는 “유족들을 안 만났다”면서 ‘안에 누가 계시냐’는 질문엔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5·18 당시 발포 명령이 없었다는 입장인지를 묻는 말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고인 사망에 대한 소회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모든 사람이 느끼는 바대로”라고 했다. 기자들이 따라붙으며 ‘모든 사람이 느끼는 바가 무엇이냐’고 재차 질문했지만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자택을 떠났다. 장 전 안기부장은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으로 12·12군사반란에 가담했으며 대통령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 등을 지냈다.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안기부장에서 물러났으며,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국회 5공 청문회에 출석해 전씨와 관련한 추궁에도 끝까지 입을 닫았다. 당시 청문회는 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후 헌정사상 처음으로 열렸다.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비리특위)가 제5공화국에서 벌어진 비리를 밝히기 위해 연 ‘일해재단 설립배경 및 자금조성 관련 비리조사 청문회’였다. 일해(日海)재단의 시작은 1983년에 일어난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의 유족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했으나 그 후 재단의 목적을 국가 안전보장과 평화통일을 위한 정책 연구 등으로 확대하면서 재단 명칭도 일해재단으로 바뀌었다. 청문회는 재단의 기금 조성과 관련해 권력을 동원한 의혹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일해’는 전씨의 아호다.당시 5공 청문회에서는 초선의원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장 전 안기부장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청문회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정치자금법과 관련해 세부적으로 어떤 법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모른다는 장 전 안기부장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질의한 내용의 일부다. 장: 정치자금법의 일반적인 사항은 알지만 세부적으로 어떤 법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노: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정치자금법에 관한 규정도 모르고 어떤 정치자금이 합법적이고 불법적인지도 모르는 안전기획부장에게 이 나라의 안전을 맡겼습니까? 증인은 그랬다고 생각합니까? 장: 그렇게 개인적인...인신은...하지 마시고 노: 인신공격이 아니고 증인이 오늘 그 답변을 회피하는 것이 매우 불성실한 답변이기 때문에 이렇게 묻는 것이다. 이처럼 장 전 안기부장은 노 전 대통령의 집요한 질문에 ‘기억이 안 난다’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나아가 5공비리의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달라며 전씨의 총알받이를 자처해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 ‘쓰리 허’와 장세동…5공 실세들의 현재는

    ‘쓰리 허’와 장세동…5공 실세들의 현재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5공 실세들의 현재 상황에도 관심이 쏠린다.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씨 등 ‘쓰리(3) 허’ 등이 그 대상이다. 허화평 씨는 ‘5공 설계자’로 불렸다. 허 씨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신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에 속했다. 그는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12·12 군사반란 획책에 가담했다. 허씨는 전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청와대 정무1수석비서관으로 일하며 최측근 거리에서 전씨를 보좌했다. 그러나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당시 전씨의 친인척 공직 사퇴를 건의하면서 전씨와 멀어졌다. 그해 말 청와대를 떠났다. 허씨는 노태우 정권 출범과 함께 국내 복귀한 뒤로 1992년 14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며 정치 행보를 이어갔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지지를 선언하며 민주자유당에 입당했지만, 김 전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 관련자에 대한 사법 처리를 추진하면서 구속됐다. 15대 총선에서 ‘옥중 당선’됐지만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고, 16·17대 총선에서 연달아 낙선하며 정치권과 멀어졌다.허씨는 지난달 26일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하자 유족 측 장례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에서 취재진과 만나 ‘노 전 대통령이 5·18 유족에 사과한 것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그 부분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 아꼈다. ‘5·18 사격 지시’와 관련된 질문에는 “그건 저한테 물어보지 말라.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때 비서실장을 했기 때문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허삼수 씨는 육사 동기인 허화평 씨와 함께 하나회에 가입한 ‘단짝’이자 12·12군사반란 당시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이었다. 당시 대령이던 허 씨는 12·12군사반란 직후 80여 명의 수사본부 병력과 함께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씨 집권 이후 허 씨는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에 임명돼 실권을 휘두르며 실세로 자리매김했으나 허씨와 함께 눈 밖에 난 뒤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국내로 복귀한 허씨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당시 통일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부산 동구에서 맞붙었다. 결과는 허씨의 패배였다. 설욕을 노리던 허씨는 이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 노무현 후보와 재대결을 펼친 끝에 당선됐다. 15대 총선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 뒤 구속됐다. 이후 더는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았다. 허씨는 이후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당시에 유족 측 장례위원에 포함됐지만, 그의 모습은 포착되지 않았다. 기자 출신인 허문도 씨는 1980년 신군부로부터 발탁돼 중앙정보부 비서실장, 문화공보부 차관, 청와대 정무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등 요직을 지냈다. 언론 통폐합을 주도했고, 청와대 정무비서관이던 1981년 5·18민주화운동 1주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국풍 81’을 일으키기도 했다.허삼수·허화평 씨와 달리 전두환 정권에서 끝까지 남았던 허문도 씨는 1989년 5공 비리 관련 국회 청문회에서 언론 통폐합은 잘한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1996년 14대 총선에서 낙선했고, 1998년 경남지사 선거에서도 패배했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자민련 공천을 받았지만, 공천장을 스스로 반납하고 불출마했다. 허문도 씨는 2016년 76세로 별세했다. ‘쓰리 허’ 외에 실세로는 ‘5공 2인자’로 불렸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있다. 장 씨는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으로 12·12군사반란에 가담했으며 대통령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 등을 지내며 ‘전두환 후계자’로까지 거론된 인물이다.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안기부장에서 물러났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5공 청문회에 출석해 전씨와 관련해 끝까지 입을 닫았다. 이후 5공 비리에 연루된 혐의 등으로 수 차례 옥살이를 했다.2002년 16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대선을 하루 앞두고 사퇴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해 정치 무대에 서지 못했다. 장씨는 이후 전씨의 연희동 자택을 꾸준히 찾으며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최근에는 전씨와 별다른 접촉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는 특별한 직함이나 대외활동 없이 지내고 있다.
  • 전두환 전 대통령(1931~2021) 연보

    전두환 전 대통령(1931~2021) 연보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8시 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다음은 전 전 대통령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 연보. ▲ 1931년 1월 18일 =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출생 ▲ 1951년 = 육군사관학교 11기 입학 ▲ 1955년 = 육군 소위 임관 ▲ 1959년 = 이순자 여사와 결혼(슬하에 3남 1녀 둠) ▲ 1961년 =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쿠데타 지지 시위 주도 ▲ 1963년 =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인사과장 ▲ 1967년 =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 1969년 = 육사 11기 중 첫 대령 진급 ▲ 1970년 = 육군 제9보병사단(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월남전 참전 ▲ 1973년 = 육군 준장 진급 ▲ 1976년 =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 1977년 = 육군 소장 진급 ▲ 1978년 = 육군 제1사단장. 북한 제3땅굴 발견해 ‘5·16 민족상’ 수상 ▲ 1979년 =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태 수사. 수도권 지역 무장병력 6000명 동원 육군본부·국방부·수경사·특전사 등 점거해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하는 등 12·12 군사반란 주도▲ 1980년 =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3김(김영삼·김종필·김대중) 가택 연금 또는 구속. 전국 대학에 휴교령. 국회 봉쇄. 계엄군과 공수특전여단 광주 투입, 5·18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삼청교육대 설치. 육군 대장 진급 뒤 예편. 민주공화당·신민당 등 강제해산. 대통령 간선제 및 7년 단임제 골자로 한 8차 개헌 실행.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 선거 당선. 대통령 취임 ▲ 1981년 = 민주정의당 입당, 초대 총재로 추대.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대통령 취임 ▲ 1982년 = 한국프로야구 창설. 국풍 81 개최 ▲ 1983년 =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 사망 ▲ 1984년 = 홍수 피해 북한에 식량지원 ▲ 1985년 =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으로 첫 이산가족 상봉 성사 ▲ 1986년 = . 3저 호황(원유가격 하락·달러 가치의 하락·국제금리 하락)으로 무역수지 흑자 전환.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 ▲ 1987년 =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발생. 4·13 호헌조치. 이한열 열사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 6월 민주항쟁 전국 확산.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6·29 선언 발표해 직선제 개헌 요구 수용 ▲ 1988년 = 대통령 퇴임. 백담사 첩거. 민주정의당 탈당 ▲ 1989년 = 국회 ‘5공 비리 청문회’ 참석 ▲ 1990년 =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복귀 ▲ 1994년 = 5·18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이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고소▲ 1995년 = 검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 헌법재판소, 불기소 처분 취소. 검찰, ‘12.12 및 5.18특별수사본부’ 설치 후 재수사 개시. 사전구속영장 발부돼 안양교도소에 구속 수감 ▲ 1996년 = 5·18 사건에서의 내란죄·내란목적살인죄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 1심에서 사형과 2259억원 추징금 선고. 항소 후 2심에서 무기징역 감형과 추징금 2205억원 선고 ▲ 1997년 = 대법원 2심 선고 확정. 특별사면 후 석방 ▲ 1999년 =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 ▲ 2003년 = 법원 재산 명시 명령에 ‘예금자산 29만원’ 기재. 검찰, 진돗개 2마리, TV·냉장고·피아노 등 경매 처분 ▲ 2004년 = 이순자씨, 추징금 200억원 대납 ▲ 2006년 = 세무 당국을 상대로 80억원대 증여세 부과 취소소송 제기▲ 2013년 = 대검찰청, 고액 벌과금 집행팀 마련. 서울중앙지검에 전씨 미납 추징금 1672억원 집행을 위한 전담팀 구성. ‘전두환 추징법’(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별법 일부개정안) 국회 통과. 전씨 추징금 환수 시효 2020년 10월까지로 연장 ▲ 2017년 = 회고록 출간. 조비오 신부 유족 등이 사자 명예훼손 혐의 형사고소. 광주지법 전두환 회고록 출판·배포금지 결정. 회고록 5·18 일부 내용 삭제 재출간 ▲ 2018년 = 알츠하이머 진단 사실 공개하며 첫 공판 불출석 ▲ 2019년 = 광주지법 형사재판 3차 공판, 이순자 여사와 함께 출석 ▲ 2020년 11월 30일 = 사자명예훼손 혐의,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유죄판결 ▲ 2021년 8월 9일 = 사자명예훼손 혐의 항소심 재판 출석 ▲ 2021년 11월 23일 사망
  • 유시민, 대선후보 윤석열·이재명에게 추천한 책은

    유시민, 대선후보 윤석열·이재명에게 추천한 책은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거꾸로 읽는 세계사’ 전면 개정판 출간을 맞아 MBC라디오에 출연하면서 공개 활동을 본격화할지 관심이 쏠린다. 유 전 이사장은 오는 13일 오전 7시쯤 방송되는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한다고 MBC라디오가 12일 밝혔다. MBC라디오에 따르면 유 전 이사장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게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이라는 책을 읽어보길 권하며 “사람다운 마음을 가진 검사라면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갖고 일하는지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는 “수모를 견디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며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추천했다. 유 전 이사장은 한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으로 불리며 친노 핵심으로 꼽혔다는 점에서 이재명 캠프에 합류해 선거운동을 도울지 주목된다. 유 전 이사장은 지난달 퇴임하면서 “저는 글과 말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사는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라며 ‘선대위 합류설’에 선을 그은 바 있다.
  • 5·18 발포 명령자 규명, 사죄 않고… 용서받을 기회도 사라졌다

    5·18 발포 명령자 규명, 사죄 않고… 용서받을 기회도 사라졌다

    전두환과 육사 11기… 친구 넘어 군신 관계12·12 쿠데타 때 군권 장악 결정적인 역할회고록 통해 “광주사태 진범은 유언비어”‘비자금 사건’은 정경 유착 표본으로 평가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피로 물든 한국 현대사의 ‘진실’까지 무덤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철권통치를 유지했던 제5공화국의 2인자였으면서도 임종 순간까지도 ‘양심 고백’을 하지 않았다. ●육사에서 전두환과의 운명적 만남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경북 달성군(현재 대구)에서 부친 노병수와 모친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구공업중(대구공고) 항공과에 입학한 뒤 경북중 4학년(학제 개편 이후 경북고 1학년)으로 편입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지원해 군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한 그는 대구공고 1년 선배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둘은 생도 시절 방을 같이 쓰면서 단순한 동기를 넘어서는 관계를 맺었다. 육사 졸업 4년 뒤 육사 동기인 김복동의 동생 김옥숙 여사와 결혼했다. 이후 참모총장 수석보좌관,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 보안사령관 등의 보직을 넘겨받는 등 전 전 대통령의 뒤를 이었고 둘의 인연은 ‘10·26사태’와 ‘12·12쿠데타’로 이어진다. ●12·12 군사반란이 돌발사고? 전두환·노태우 등 육사 11기가 중심이 된 사조직 ‘하나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위 세력으로 성장했다. 하나회는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12·12사태 당시 노 전 대통령은 9사단 병력을 출동시켜 군권 장악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전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친구’에서 ‘군신’(君臣)으로 바뀌게 된다. 12·12군사반란은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등을 ‘김재규 내란 방조죄’라는 죄목으로 체포·연행·구속한 사건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8월 회고록에서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가 일어난 돌발사고였다”고 주장했다.●5·18 발포 명령 누가 했나 신군부는 다음해 5월 17일 비상계엄확대조치를 단행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했다. 이로써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신군부는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뛰어들었다. 1988년 광주 청문회와 1995년 5·18 및 12·12사건 수사 당시 누가 공수부대의 발포를 명령했는지가 초미의 관심이었지만, 규명하지 못했다. 다만 검찰은 당시 계엄군이 자위권 보유를 천명한 사실을 들어 포괄적 책임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물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광주사태의 진범은 유언비어였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 무지막지한 군인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잘라 냈다. 처녀의 젖가슴을 도려냈다’는 유언비어가 사실인 양 퍼져 갔고, 그래서 광주 시민들이 치를 떨면서 무기고를 탈취하고 군과 대항하게 된 것이다. 그게 5·18이다”라고 말했다. ●비자금 투옥과 그 이후 1980년 8월 27일 전 전 대통령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듬해 7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1987년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지만 ‘호헌철폐·독재타도’ 구호 아래 직선제 개헌을 앞세워 들불처럼 일었던 민주화 요구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6월항쟁을 잠재우고자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해 온건 이미지를 구축했고, 양김(김대중·김영삼)의 분열 속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36%를 얻어 1971년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1995년 12월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불거진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기소됐다. 전직 대통령 기소는 이때가 처음이다. 이듬해 12·12와 5·18에 대한 기소까지 더해져 징역 17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직 대통령의 개인 비리 차원을 넘어서 정치권력과 재벌이 합작해 정치와 경제를 밀실에서 주무른 정경유착의 표본으로 평가받는다.
  • ‘치매’ 진단 전두환, 노태우 사망 소식 듣고 ‘눈물만…’[노태우 별세]

    ‘치매’ 진단 전두환, 노태우 사망 소식 듣고 ‘눈물만…’[노태우 별세]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고를 듣고 침묵 속에 눈물을 지었다고 측근이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이 26일 사망함으로써 60여 년에 걸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운명적인 애증 관계도 끝이 났다. 전 전 대통령 측 관계자는 이날 오후 “노 전 대통령 별세 소식을 접하고 아무 말씀을 하지 않은 채 눈물만 지으셨다고 부인 이순자 여사가 전했다”고 밝혔다. 별도의 애도 메시지를 낼 계획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를 조문할 가능성도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 전 대통령은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육사 동기 전두환과 길고도 질긴 인연…부고 듣고 침묵 속에 ‘눈물’ 두 전직 대통령은 동료로서 출발해 1979년 12·12 쿠데타로 전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최고통치자와 2인자로 자리매김 한 바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고교 때부터 출발한다. 노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의 전신인 대구공업중을 거쳐 1951년 경북고를 졸업했다. 한 살 많은 전 전 대통령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대구에 정착해 같은 해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이후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1952년 육사 제11기(정규 육사 1기) 동기로 입학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위 시절인 1959년 김옥숙 여사와의 결혼 당시 전 전 대통령이 사회를 봐줄 정도로 두 사람은 돈독했다. 노 전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을 시작으로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 전 전 대통령이 거쳐 간 자리를 이어받았다.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에는 자신이 맡고 있던 9사단 병력을 중앙청으로 출동시켜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주도하는 신군부의 권력장악 과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최고통치자와 2인자로 자리매김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에 이어 1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시작해 전 대통령과 내가 국정 최고책임자로 나설 때까지 우리의 관계는 돈독했다.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는데 공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특수한 관계였다”고 적었다.그러나 취임 이후 ‘5공 청산’이라는 거센 바람이 불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요구가 빗발치자 노 전 대통령은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한 곳에 가 있으라고 권고했고, 전 전 대통령 측은 백담사를 택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비자금 사건 등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인 1995년 11월 16일과 같은 해 12월 3일 나란히 구속돼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전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을, 노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의 중형을 각각 선고받은 뒤 같은 해 12월 당시 임기 말이던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은 먼저 검찰 소환에 응해 구속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노태우가 일을 그르쳤어. 그렇게 쉽게 검찰에 가는 것이 아닌데 끝까지 버텼어야지”라면서 강한 불만을 터트린 것으로 전해졌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그들(5공 측 인사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면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라는 것이 나의 철학이었다. 그런 인식 차이로 인해 전임자는 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서 서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어디 가냐고 5분마다 묻더라”…전두환 측 ‘치매’ 주장 한편 지난 8월 광주지법 형사1부(재판장 김재근)는 법정에서 전 전 대통령 항소심을 진행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급격히 노화된 모습이었다. 앞서 전 전 대통령 측은 알츠하이머(치매) 진단을 받았다며 법정 출석을 거부해왔었다. 하지만 골프를 치는 정정한 모습이 목격되면서 논란이 됐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헬기의 광주 도심 사격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 전 전 대통령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 ‘육사 동기’ 노태우·전두환…60년 걸친 애증 관계 [노태우 별세]

    ‘육사 동기’ 노태우·전두환…60년 걸친 애증 관계 [노태우 별세]

    육사 11시 동기생으로 만나쿠데타 뒤 정치적 2인자로‘5공 청산’으로 전두환 불만 노태우 “국민 요구 무시하면 독재”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별세하면서 60여년에 걸친 ‘육사 동기’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운명적인 애증 관계도 끝이 났다. 노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의 전신인 대구공업중을 거쳐 1951년 경북고를 졸업했다. 한 살 많은 전 전 대통령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대구에 정착해 같은 해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두 사람은 이듬해인 1952년 육사 제11기(정규 육사 1기) 동기생으로 만났다. 노 전 대통령은 생도 시절 럭비부에서, 전 전 대통령은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위 시절인 1959년 김옥숙 여사와의 결혼 당시 전 전 대통령이 사회를 봐줄 정도로 두 사람은 돈독했다. ●쿠데타 당시 9사단 병력 동원해 권력장악 도와 노 전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을 시작으로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 전 전 대통령이 거쳐 간 자리를 이어받았다. 12·12 쿠데타 당시에는 자신이 맡고 있던 9사단 병력을 중앙청으로 출동시켜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주도하는 신군부의 권력장악 과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 전 대통령의 권고로 군문을 떠나 정두환 정권에 합류했다. 전 전 대통령의 튼튼한 신임을 바탕으로 정무장관에서 시작해 초대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 위원장, 대한체육회장, 민정당 대표위원, 제12대 국회의원(전국구) 등을 거치며 2인자로서의 터를 닦았다.1987년에는 전 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으며, 직선제 개헌 약속 등을 핵심으로 하는 전격적인 6·29 선언과 ‘보통 사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이른바 ‘3김’을 따돌리고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시작해 전 대통령과 내가 국정 최고책임자로 나설 때까지 우리의 관계는 돈독했다.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는데 공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특수한 관계였다”고 적었다. ●대통령 취임 후 ‘5공 청산’ 거센 바람…관계 삐걱 그러나 취임 이후 ‘5공 청산’이라는 거센 바람이 불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요구가 빗발치자 노 전 대통령은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한 곳에 가 있으라고 권고했고, 전 전 대통령 측은 백담사를 택했다. 전 전 대통령은 백담사로 떠나기 전날인 1988년 11월 22일 밤 노 전 대통령에게 전화로 백담사 은둔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전임자의 신변을 안전하게 해주지 못해 부끄럽다. 잠시 고생스럽더라도 참고 견디면 조속한 시일 내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상으로 회복하겠다”고 달랬다.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비자금 사건 등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인 1995년 11월 16일과 같은 해 12월 3일 나란히 구속돼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전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을, 노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의 중형을 각각 선고받은 뒤 같은 해 12월 당시 임기 말이던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검찰 수사 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은 먼저 검찰 소환에 응해 구속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노태우가 일을 그르쳤어. 그렇게 쉽게 검찰에 가는 것이 아닌데 끝까지 버텼어야지”라면서 강한 불만을 터트린 것으로 알려졌다. 전 전 대통령은 또 “나는 땜쟁이(대구공고) 출신이고 노씨는 명문고(경북고) 출신인데도 나보다 뒤처졌던 현실에 대해 불만이 있었을 수도 있다”면서 “노씨 및 부인 김옥숙씨가 대통령과 영부인이 된 뒤 사람이 확 달라져 버린 것을 보고 친구나 동기에게 후임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그들(5공 측 인사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면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라는 것이 나의 철학이었다. 그런 인식 차이로 인해 전임자는 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서 서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 [노태우 별세] 노태우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

    [노태우 별세] 노태우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

     ●육사에서 전두환과 운명적 조우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 4일 경북 달성군(현재 대구)에서 부친 노병수씨와 모친 김태향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가 결혼한지 8년 만에 태어나 귀여움을 한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부친이 일제시대 면서기로 일한 덕에 여유있는 생활을 누렸지만, 노 전 대통령이 7살 되던 해 부친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았다.  대구공업중학교(대구공고) 항공과에 입학한 그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말라리아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투병 생활을 거치며 의사의 꿈을 갖게 되고, 경북중학교 4학년(학제 개편 이후 경북고 1학년)으로 편입한다. 편입한 해에는 중간 정도의 성적을 받았지만 5학년부터는 상위권을 유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6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지원해 군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헌병학교 9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헌병으로 근무한 1년 동안 2등 중사(현재의 상병)까지 진급한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한다. 이곳에서 그는 대구공고 1년 선배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은 생도 시절 방을 같이 쓰면서 단순한 육사 동기를 넘어서는 관계를 맺게 된다. 육사 졸업 4년 뒤 육사 동기인 김복동의 동생 김옥숙과 결혼한다. 월남 파병을 다녀오고 제9공수여단장, 제9보병사단장 등 요직을 거쳤다. 참모총장 수석보좌관,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 보직을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넘겨받는 등 그의 뒤를 따랐다. 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12·12 쿠데타’로 이어진다.   ●12·12 쿠데타와 5·18  노 전 대통령이 속한 육사 11기가 중심이 된 육군의 사조직 ‘하나회’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 세력으로 성장했다. 국가보안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등 수도권 지역에서 세력을 성장하던 하나회는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때 전 전 대통령과 함께 핵심 세력으로 꼽히는 사람이 바로 노 전 대통령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9사단에서 29연대, 30연대를 강제로 출동시키는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1979년 12월 12일,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김재규 내란 방조죄’라는 죄목으로 체포해 청와대를 포위하고 국방부부터 차례대로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9사단장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군부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전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사실상 ‘친구’에서 ‘군신’으로 바뀌게 된다.  두 전직 대통령은 다음해 5월 17일 비상계엄확대조치를 단행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로써 권력을 완전히 장악, 본격적인 정치 무대에 뛰어든다.  ‘12·12 쿠데타’는 노태우 정권까지 정당화 됐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 과거 청산 움직임과 함께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된다. 이후 5·18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법정에 서게 됐다. 1997년 재판부는 “12·12는 명백한 군사반란이며 5·17과 5·18은 내란 또는 내란목적 살인행위였다”고 판결했다.   ●5공화국의 2인자  노 전 대통령은 늘 두번째였다. 정치군인의 길을 걸었던 전 전 대통령에 대한 육사 동기들의 반감을 다스리는 것을 비롯해 전 전 대통령 주변에서 도움을 줬다. 5공화국에서 주요 요직을 맡았지만 전 전 대통령의 2인자일 뿐이었다.  1980년 8월 27일 전 전 대통령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국군 보안사령관직을 1년간 맡다가 이듬해 7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군에서 예편한 직후 외교안보 담당 정무 제2장관에 임명됐고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1982년에는 남북 고위회담 수석대표를 맡았고 이어 초대 체육부장관과 제41대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5공화국의 가장 큰 역점 사업이었던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  1985년에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육사 동기인 권익현의 뒤를 이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을 거쳐 총재를 지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전 전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를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주장하는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1인자가 될 기회를 잡는다.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등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인 ‘6·29선언’을 발표한다. 이에 강성 군부세력과 구별되는 온건 군부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하게 됐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36%의 득표율로 1971년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직선제로 선출된다.   ●6공화국과 북방정책  1988년 2월 출범한 노태우 정부의 앞길은 말 그대로 가시밭길이었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민족자존, 민주화합, 균형발전, 통일번영을 4대 국정기조로 내걸었지만 정권의 탄생 배경과 인적구성으로 볼 때 이러한 정책들을 실천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따랐다. ‘6공화국’이 아닌 ‘5.5공화국’이란 평가도 나왔다.  1988년 4월, 민주화 이후 첫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됐다. 노태우 정부의 순탄찮은 운명을 암시하는 전주곡이었다. 재야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해금을 단행하지만, 평민·민주·공화 야3당이 청문회를 통해 5공화국의 비리를 파헤치면서 핵심인사들에 대한 처벌이 이어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해 11월 과오를 사과하고 백담사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노태우 정부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된 것은 1989년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과 현대중공업 파업 등을 통해 형성된 공안정국을 통해서다. 1990년에는 대통령 선언 형식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동시에 ‘1노 3김’의 분할체제를 청산하는 정계개편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민정·민주·공화 3당은 1990년 1월 22일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합당을 선언한다. 1992년 14대 총선으로 민자·민주·국민의 3당구조가 출현하기까지 의회는 214석의 거대여당이 주도하는 사실상의 일방적 독주체제가 2년 남짓 이어진다.  노태우 정부는 근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절차적 측면의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신장된 시기였다. 5공에 비해 입법·사법부의 자율성이 강화됐고 30년만에 지방자치제가 부활됐다. 노동·시민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국민들의 요구가 활성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3저호황’이란 우호적 대외환경 덕분에 상당한 수준의 경제성장을 달성하기도 했다.  남북관계도 진전이 있었다. 그 시작은 1988년 발표된 7·7선언이었다. 6공화국 대외정책의 핵심인 ‘북방정책’의 기본지침이었던 선언을 바탕으로 중국·소련 등 사회주의권과 관개개선이 이뤄진다. 경제력과 군사·외교적인 측면에서 북한에 대한 우위를 확보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사회주의권 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북한과도 대화창구도 복원,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12월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비자금 투옥과 그 이후  1992년 대선을 통해 김영삼 정부에 성공적으로 정권을 승계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5년 10월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의 폭로로 불거진 비자금 사건으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는다. 10월 27일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한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를 통해 4500억여원의 비자금 조성해 13·14대 총선자금, 부동산 위장 매입, 민정·민자당 지원 등에 사용하고 잔금 1940억원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구속기소된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직 대통령의 개인비리 차원을 넘어서 정치권력과 재벌이 합작해 정치와 경제를 밀실에서 주무른 정경유착의 표본으로 평가받는다. 30대 재벌총수 대부분이 관련돼 재판을 받았고, 노 전 대통령은 ‘포괄적 뇌물죄’가 적용돼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고 1997년말 국민의 정부 출범을 앞두고 사면·복권된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전임자였던 전두환 대통령과 달리 외부활동을 삼간채 자택에 칩거하며 사실상의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10년 넘게 권부의 1·2인자 자리를 지켰던 그로선 치욕적이고 불우한 말년이었다.
  • 전경환씨 어제 사망, 페이퍼컴퍼니로 형의 비자금 운용 의혹 어쩌나

    전경환씨 어제 사망, 페이퍼컴퍼니로 형의 비자금 운용 의혹 어쩌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동생으로 온갖 비리에 연루됐고, 형이 통치 시절 조성한 비자금을 은닉했다는 의심을 받아 온 전경환(79)씨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삼성서울병원에 따르면 평소 뇌경색을 앓아 온 고인은 21일 사망했다. 빈소는 이 병원 장례식장14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24일 오전 8시 30분. 장지도 경기 용인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상세한 사망 경위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군인 출신인 전씨는 1980년 전 전 대통령 취임 후 대통령경호실 보좌관으로 임명됐고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사무총장과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새마을운동본부 공금 76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돼 징역 7년에 벌금 22억원 등을 선고 받고 복역, 1991년 가석방됐다. 2004년 4월에는 아파트 신축공사 자금 1억 달러를 유치해주겠다고 건설업자를 속여 6억원을 받는 등 15억원과 미화 7만 달러를 챙긴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2010년 5월 대법원에서 사기죄로 징역 5년형이 확정됐으나 뇌경색, 다발성 심장판막 질환 등을 앓는다는 이유로 여덟 차례 형집행 정지 처분을 받고 2017년 3월 가석방 출소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가 고인이 남태평양의 휴양지이자 조세도피처인 미국령 사모아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역외법인 명의의 해외 계좌 3개도 개설한 것으로 드러나 전 전 대통령이 통치 시절 조성한 비자금을 거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난 5일 폭로했다. 전씨가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시점은 지난 2001년이다. 어떤 목적으로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고, 이를 통해 어떤 거래를 했는지 조세당국의 철저한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고 매체는 지적했는데 그의 사망으로 어렵지 않을까 우려된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전씨의 해명을 직접 듣기 위해 찾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밝혔다. 자택 주소로 기재된 경기도 하남시의 한 주택에서 친인척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전씨가 요양병원에 있다는 사실만 알며 연락처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매체는 전했는데 마지막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낙연 지지”…DJ·노무현·문재인 정부 장차관 35명 캠프 합류

    “이낙연 지지”…DJ·노무현·문재인 정부 장차관 35명 캠프 합류

    더불어민주당 대권 주자인 이낙연 전 대표 캠프는 17일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장·차관을 역임한 고위직 출신 인사 35명이 합류했다고 밝혔다. 17일 이낙연 후보 캠프에 따르면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을 비롯한 민주정부 장·차관 출신 35명은 이날 서울 여의도 캠프 사무실에서 이낙연 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정책자문단을 구성했다. 이날 행사에는 정 전 장관을 비롯해 김형기 전 통일부 차관, 안종운 전 농림부 차관, 서범석 전 교육인적자원부 차관, 강대형 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 김세옥 전 대통령 경호실 실장, 김진우 전 에너지경제연구원 원장, 박기영 청와대 전 정보과학기술 보좌관, 오성환 전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 이승우 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이진순 전 KDI 원장, 한진호 전 국정원 2차장, 이선희 전 방위사업청장이 참석했다. 정 전 장관은 “현재 서남풍이 거세게 불고 있어 역전의 기운이 일고 있다. 중요한 것은 풍향뿐만 아니라 풍속”이라며 “풍속도 빨라지고 있는데, 정치의 세계에서 1일은 일반의 평생과 같기 때문에 20일이면 큰 바람이 가능하다”며 이 후보의 역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들은 앞으로 경제 및 정치·행정 2개 분야의 정책자문단을 구성할 예정이다. 분야별로 4개 분과위를 두고 ▲ 정책공약 및 현안 자문 ▲ 정책 갈등·쟁점 분석과 대안 제시 ▲ 인재 영입 ▲ 분과별 정책간담회 등 역할을 수행할 방침이다. 이낙연 후보는 “민주정부를 이끈 세분을 보면서 민주당의 철학, 지향, 가치를 알았는데, 지금은 시대의 요구를 보면서 국민이 만족할 수 있게 변화해야 한다”며 “이번에 참석하신 분들이 각기 분야에서 큰 스승 역할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한다”고 환영했다.
  • [여기는 남미] 경호원 없이 혼자 돌아다니다 ‘딱 걸린’ 대통령

    [여기는 남미] 경호원 없이 혼자 돌아다니다 ‘딱 걸린’ 대통령

    권위주의적 의전이라면 질색하는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일탈 행동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아르헨티나의 여기자 로사리오 아예르디는 26일(현지시간) 트위터에 1장의 사진을 올렸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계산원이 찍은 셀카인데 사진엔 낯익은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다.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슈트 상의를 벗어 조수석에 얹어 놓은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직접 운전대를 잡고 출근하는 길이었다. 바로 대통령을 알아본 계산원이 기념삿을 부탁하자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포즈를 취했다. 아례르디는 사진을 입수한 경위는 밝히지 않았지만 "톨게이트에 있는데 대통령궁으로 향하는 대통령이 등장함"이라는 짧은 설명을 달았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몰던 자동차는 2019년식 도요타 코롤라로 개인 소유의 승용차였다. 경호원이 뒤따르고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운전하는 자동차엔 동승자가 없었다. 대통령은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톨게이트 계산원은 기념샷에 얼굴이 나오도록 마스크를 살짝 벗었지만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였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관저와 집무실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 대통령집무실이 있는 대통령궁은 연방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자리하고 있지만 관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주(州)의 올리보스란 곳에 위치해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집무실은 서울에, 관저는 경기도에 있는 셈이다. 거리는 약 17km, 자동차로 약 25분 정도 걸린다. 복수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실 관계자에 따르면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종종 직접 자가운전으로 출근하곤 한다. 워낙 의전을 꺼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9년 12월 취임한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취임식 날에도 자가운전을 하고 자택을 나서 행사장으로 이동한 바 있다. 아르헨티나에는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취향이 비슷한 역대 대통령이 유난히 많은 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2003~2007년 재임)은 재임 당시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나 역대급 일탈 전례를 남겼다. 대통령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한때 대통령경호실은 발칵 뒤집혔다.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 후임 대통령을 지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자동차에 탑승할 때면 조수석을 고집한 대통령으로 유명하다. 타고 내릴 때 누군가 자동차 문을 열어주는 의전도 질색해 자신이 직접 문을 열고 닫았다. 사진=아예르디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세종로의 아침] 버마 혹은 미얀마/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버마 혹은 미얀마/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1970~80년대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미얀마보다는 버마라는 이름이 훨씬 익숙할 게 틀림없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버마는 1989년 군사정부에 의해 바뀐 현재 국호 미얀마의 예전 이름이다. 버마 축구는 70년대 초반 공포의 대상이었다. 1971년 서울(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 축구대회’에서 한국과 공동 우승을 차지하더니 이후 두 해 거푸 준결승에서 만난 한국에 똑같이 0-1 패를 안겼다.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에서 연속 3위에 그치자 시상식을 마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2회 대회 준결승 당시 25m짜리 중거리 결승골의 주인공은 마웅 예뉜이다. 이듬해는 마웅 틴윈이 헤딩 결승골을 넣었다. 버마 이름에는 성(姓)이 없다. ‘마웅’(Maung)은 20세 전후 미혼 남자의 이름 앞에 붙이는 일종의 존칭 접두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거나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 ‘우’(U)가 붙는다. 초등학교 시절 따지지도 않고 달달 외던 당시 유엔 3대 사무총장의 이름 우 탄트(우 딴)가 대표적이다. 1983년의 버마는 우리에게는 축구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된다. 10월 9일 버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전 수도 랑군(양곤)에 있는 버마 독립운동의 영웅 아웅 산 묘소를 참배하기 직전 발생한 폭탄 테러 때문이다. 정부 관료 17명이 한자리에서 폭사한 끔찍한 참사였다. 버마는 1988년 아웅 산 수치(이하 수치) 국가고문의 등장으로 다시 주목을 받는다. 병석의 어머니를 보기 위해 영국에서 돌아온 그는 8월 8일 3000여명이 죽어나간 ‘8888 민주항쟁’을 목격한 뒤 50만 군중을 상대로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연설을 통해 버마 민주화운동의 어머니로 떠올랐다. ‘아메이 수’(어머니 수)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부패시키고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 19세기 이후 버마 혹은 미얀마를 관통하는 두 가지 코드는 ‘반외세’와 ‘민주화’다. 버마는 마지막 왕조 멸망 전 1824년을 시작으로 세 차례나 영국과 전쟁을 치렀다. 망국은 피할 수 없었지만 이후 ‘영연방’ 가입은 거부할 정도로 자존심은 옹골찼다. 가시밭길 같은 ‘민주화’ 행보는 우리네와 꼭 닮은꼴이다.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바로 1년 뒤 네 윈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버마는 이후 60년 가까이 군부가 좌지우지했다. 2008년 개정된 헌법에는 의석의 25%를 군부가 지명토록 하는 조항이 명시됐다. 수치 고문의 민족민주연맹(NLD)이 2015년 총선에서 의석을 휩쓸어 1기 문민정부를 출범시키고도 사정은 그대로였던 이유다. 그런데 향후 15년간 단계적 군부 의석 지명 축소를 선언한 NLD는 지난해 11월 총선에서도 83%의 압승으로 이를 실현할 개헌 가능성까지 열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전두환 신군부의 12·12사태와 비견될 만한 이번 쿠데타의 빌미다. 2013년 첫 방한 당시 수치 고문은 국내 언론사에 미얀마 대신 ‘버마’로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미얀마는 영국의 지배 이전의 이름이다. 130여개 소수민족을 아우른다는 좋은 의미를 가졌지마 신군부에 의해 되돌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못마땅했다. 광주의 5·18 항쟁에 버금가는 반군부 시위와 유혈 진압은 이제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를 낼지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다. 현지 매체는 14일 희생자가 100명에 육박한다고 타전했다. 꼭 50년 전 ‘박대통령컵 축구대회’에서처럼 이름이 ‘마웅’으로 시작되는 20세 안팎의 젊은이가 대다수일 것이다. 우리에게 한때 익숙했던 ‘민주주의 나무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지금 버마 혹은 미얀마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다. cbk91065@seoul.co.kr
  • 외인구단 일으킨 원더우먼 캡틴… 편견 향해 ‘이단옆차기’

    외인구단 일으킨 원더우먼 캡틴… 편견 향해 ‘이단옆차기’

    태권도인들은 이들을 ‘여자 국군 체육부대’라거나 ‘여자 상무팀’이라고 부른다. 이런 별명의 팀을 이끄는 ‘아마조네스 군단’의 ‘원더우먼’이라고 한다. 선수와 코치진 모두 여성이지만 2013년 3월 창단한 태권도팀이 창단 다음달부터 거둔 성적이 빛나기 때문이다. 이들을 이끄는 박은희(42) 경북 성주군청 여자태권도 선수단 감독은 23일 “훈련량이 다른 팀의 두세 배”라고 말했다. 그는 국내 태권도 30개 실업팀 중 유일한 여성 감독이다. 훈련장 한편에는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태권도대회인 국방부 장관기 우승기가 자리하고 있다.●女지도자協, 10년 만에 30명→70명 박 감독은 여성지도자로서의 어려움을 묻자 더 큰 그림에서의 고충을 말했다. “실업팀 감독이지만 예산을 따려고 접촉하는 군청과 군의회, 대회 관계자 등 만나는 사람 대다수가 남성이다. 더 가까이 다가가 진정성 있는 대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자 하지만 식사자리를 포함해 일대일로 만나는 자리를 피하는 게 보인다. 이런 면이 답답하지만 극복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내 태권도 여성 지도자는 실업팀 및 초·중·고·대학의 코치까지 포함해 약 100명이다. 이들 중 여성 지도자로서 어려움을 공유하고 지혜를 모으는 여성태권도지도자협회에 가입된 이는 70여명이다. 박 감독은 자신이 태권도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2011년의 30여명과 비교하면 여성 진출이 많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체육계의 요즘 최대 현안인 스포츠 폭력에 대해 물었다. “나는 선수들과 스킨십을 많이 한다. 손을 잡고 산책하거나 차를 마시면서 눈을 맞춘다. 폭력은 원시적이다. 선수나 코치의 스트레스 관리가 정말 중요하고 원활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대표 상비군이나 청소년 선수를 지도하면서 감성적인 부분을 어떻게 다스려 주는지가 선수의 마음에 많은 영향을 준다.”●“현 체육계 인권교육, 고작 1년에 1시간” 박 감독은 현재의 교육 체계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스포츠에서 폭력 및 성폭력, 선수 인권 문제에 대해 정부든 대한체육회든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만들어 코치와 감독을 대상으로 꾸준히 교육해야 한다. 현재는 1년에 한 시간가량 강당에 300여명을 한꺼번에 앉혀 놓고 강사 한두 명이 강연하는 게 전부다. 현실적으로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만들고 코칭 및 티칭 교육을 강화해 그런 폭력 문제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코치나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빨리 개발됐으면 한다.” 창단 때부터 성적이 놀라웠다. “당시 신생팀 선수 구성에 애로가 컸다. 각 팀에서 방출된 선수, 자퇴한 선수 등을 모아 구성한 말 그대로 ‘외인구단’이었다.” 기량이 부족한 것을 훈련으로 보충해 창단 다음달에 열린 전국대회 단체전 준우승을 거뒀다. “나도 선수들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 이후 해마다 전국대회 단체전과 3인조 지명전 등에서 우승을 도맡았다. 2016년에 이어 지난해 열린 유일한 대회인 경찰청장기 무도대회에서 소속 선수가 우승하면서 경찰 공무원으로 특채됐다. 박 감독은 “격투기 종목은 특성상 부상이 많아 30세가 되면 대개 은퇴할 수밖에 없다. 그 이후 진로 문제에서 (경찰 특채는) 굉장히 의미 있는 성과”라고 자랑했다. ●전국대회 승승장구… “우리 강점은 연습” 이런 성과의 비결에 대해 박 감독은 한마디로 선수들이 흘린 땀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우리 팀은 최고의 기량을 갖춘 선수가 오기에는 처우나 여건이 매우 열악하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은 연습뿐이다. 선수들에게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세상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반대로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게 없다. 다시 한번 해 보자’고 말한다.” 은퇴한 선수들이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이 있다. “박 감독을 만나면 세상에 안 되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행운으로 여겨라.” 박 감독은 훈련량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체계적인 교육법도 개발해 뒀다. 그러면서도 선수들이 타격감을 익히도록 하고자 스스로 스파링 파트너가 돼 머리와 몸통 등을 맞는다. 박 감독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홉 살 때 허약 체질인 남동생을 따라 도장에 갔다가 태권도의 길로 들어섰다. “중학교 시절엔 육상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고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다. 그런데 체육교사의 권유로 태권도 선수생활을 했다. 2000년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과 2002년 아시아선수권대회 동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십자인대, 무릎 등의 부상이 겹쳐 2003년 은퇴했다. “당시엔 태권도가 인생의 전부였다. 대학교 2학년 땐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부도나 가족이 모두 흩어져 살았다. 그때 학교 훈련장으로 건장한 남성 7~8명이 나를 찾아왔다. 빚쟁이에게 쫓기는 게 너무 창피했는데 선배들이 나를 친오빠처럼 보호해 줬다. 뒤늦게 돌아온 코치님이 이를 알고 나에게 ‘러닝머신 10㎞를 뛰라’고 했다. 무섭고 창피했는데 혼자 10㎞를 울면서 뛰었다. 태권도로 성공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런 태권도에서 은퇴하자니 아쉬움이 더 컸다. 은퇴 후 한 5년 정도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거나 훈련하는 꿈을 꿨다.” 이후 태권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다 아프리카 서부 가봉의 대통령 경호실로 2년 파견 나가는 등 5년여가 흐르면서 못다 이룬 꿈에 대한 서운함을 달랠 수 있었다. “올해 목표? 모두 다치지 않고 즐겁게 운동했으면 좋겠다. 2019년처럼 소속 선수 모두 국방부장관기 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경찰청장기 무도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올해 처음으로 예산·선수 늘어 기쁨 두 배 성주군청 태권도팀은 창단 후 9년차인 올해 처음으로 예산이 늘었다. 그래서 선수 한 명을 더 선발해 모두 6명이다. 박 감독은 거의 매일 군청과 군의회에 들어가 의원과 직원에게 태권도와 다른 팀의 동향, 선수의 연봉 문제 등을 이야기한단다. 재정이 열악한 시골 군청에서 실업팀을 운영하는 것만도 감사할 만한 일이라고 한다. 태권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자신의 세계대회 금메달보다 팀 창단 5년 만인 2017년 전국대회 금메달을 서슴없이 꼽는다. 이런 고마움에 박 감독은 성주군을 알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재능기부로 태권도 수업을 진행하고 2019년엔 전국노래자랑에 나가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박 감독은 사실 성주군과 직접적인 연고는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 은광여중고를 거쳐 2002년 2월 경희대를 졸업했다. 성주군청에 실업팀이 생긴다는 선배의 귀띔에 기대 없이 제출했던 지원서가 인연이 됐다. 2018년엔 체육학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몇 단이냐고 묻자 7단이라는 박 감독은 “영화처럼 날고 그런 건 없다. 오랜 기간 꾸준히 수련했다는 징표일 뿐”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트럼프 딸 이방카, 사저 화장실 못 쓰게 해 경호원들 헤매”

    “트럼프 딸 이방카, 사저 화장실 못 쓰게 해 경호원들 헤매”

    WP “임시화장실 설치도 해봤지만 철거…연방예산 1억원으로 이웃집에 휴게실 임대”인근 주민들 “이방카 부부, 왕족인 양 행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장녀인 이방카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사저에 배치된 백악관 비밀경호국 요원들에게 화장실 사용을 못하도록 해 지난 4년 내내 경호원들이 애를 먹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15일 보도했다. WP는 이방카 부부가 사는 워싱턴DC 북서부 부촌인 캘러라마 지역의 주민과 비밀경호국 관계자를 인용해 465㎡(약 141평) 넓이의 사저에 화장실이 6개나 있었지만 경호원들은 단 한 곳도 쓸 수 없었다고 전했다. 캘러라마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마이크 펜스 부통령 등 미국 고위 인사가 몰려 사는 곳으로 정부의 경호원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경호원에게 화장실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WP는 지적했다. 사저 내부의 화장실을 경호원에게 제공하기 곤란하다고 하더라도 통상 차고나 별채를 개조해 화장실이 딸린 휴게실로 개조한다는 것이다. WP는 “캘러라마의 경호원은 암살 위협, 거동 수상자를 걱정해야 하는데, 이방카와 쿠슈너 부부에 배치된 경호원은 다른 걱정거리 하나가 새로 생겼다. 바로 화장실을 찾는 문제였다”라고 꼬집었다. 이방카 부부 사저에 배치된 경호원들이 ‘급한 용무’를 해결하기 위해 근처 다른 집에 요청하거나 사무용 건물로 뛰어들어가기도 했다고 주민들은 전했다. 이런 일이 상부에 보고되자 비밀경호국은 임시 화장실을 길거리에 설치했는데, 이곳에 사는 내로라하는 부자 이웃들이 거리의 임시 화장실이 미관을 해치고 통행에 방해가 된다고 항의해 이마저도 결국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주민 다이앤 브루스는 “경호원들이 불쌍했다”라며 “임시 화장실이 철거되던 날 속으로 ‘경호원들이 이제 화장실에 가려고 차를 타야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랬다”라고 말했다. 임시 화장실이 철거되자 이방카 부부의 경호팀은 오바마 전 대통령의 차고를 경호실로 고친 건물의 화장실을 썼다. 그러나 이들이 화장실을 더럽게 사용하는 바람에 2017년 중반 이조차 ‘사용금지’됐다.이후 이 경호팀은 1.6㎞ 떨어진 펜스 부통령의 집까지 차로 이동해 ‘급한 일’을 해결했고 그럴 시간이 없을 만큼 급박한 상황엔 인근 식당에 부탁했다. 한 경찰관은 WP에 “비밀경호국 요원이 화장실을 찾기 위해 이렇게 극한까지 가야 했다는 것은 난생 처음 듣는다”라고 말했다. 결국 2017년 9월 비밀경호국은 이방카 부부의 사저 건너편에 있는 주택의 지하실을 4년간 임대해 휴게 장소로 썼다. WP는 지난 3년여간 휴게소 임대료만 월 3000달러(약 330만원), 모두 14만 4000달러(약 1억 6000만원)의 연방 예산이 사용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백악관 측은 이방카 부부가 경호팀에게 사저의 화장실을 쓰지 못하도록 한 적이 없고, 지하실을 임대한 것은 비밀경호국의 결정이었다고 해명했다. 비밀경호국 대변인은 WP에 “우리의 경호 업무의 수단, 방법, 자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WP는 또 이방카 부부가 캘러라마에서 ‘좋은 이웃’은 아니었고 그렇지 않아도 트럼프 대통령에 비판적인 계층이 사는 이곳에서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했다는 불만을 샀다고 보도했다. 주민 브루스는 “그 부부는 뭐랄까, ‘우린 왕족이야’라는 태도로 이 지역에 왔다”라고 꼬집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이방카 경호원에 사저 화장실 못 쓰게 해” “멜라니아는 짐 절반 빼”

    “이방카 경호원에 사저 화장실 못 쓰게 해” “멜라니아는 짐 절반 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와 남편 재러드 쿠슈너가 사저에 배치된 백악관 비밀경호국 요원들에게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 지난 4년 내내 경호원들이 사방을 헤매다녔다고 워싱턴 포스트(WP)가 15일 보도했다. 신문은 부부가 사는 워싱턴DC 북서부 부촌인 캘러라마 지역의 주민과 비밀경호국 관계자를 인용해 465㎡(약 141평) 넓이의 사저에 침실 6개, 화장실이 6개나 있었지만 경호원들이 쓸 수 없었다고 전했다. 캘러라마는 백악관에서 3㎞ 떨어진 곳으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마이크 펜스 부통령 등 고위직 인사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경호원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고 배치된 경호원에게 화장실을 쓰지 못하게 하는 일은 보기 드물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사저 내부의 화장실을 제공하기 곤란하면 차고나 별채를 화장실이 딸린 휴게실로 개조해 제공하는 것이 이들 고위직들의 관례였다. WP는 “캘러라마의 경호원은 암살 위협, 거동 수상자를 걱정해야 하지만 이방카와 쿠슈너 부부에 배치된 경호원은 다른 걱정 하나가 새로 생겼는데 바로 화장실 찾는 문제였다”고 보도했다. 이들 경호원은 ‘급한 일’을 해결하려고 근처 다른 집에 요청하거나 사무용 건물로 뛰어 들어가기도 했다고 주민들이 말했다. 이런 일이 상부에 보고되자 비밀경호국은 임시 화장실을 길거리에 설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부자 이웃들은 미관을 해치고 통행에 방해된다고 항의했고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주민 다이앤 브루스는 “경호원들이 불쌍했다”면서 “임시 화장실이 철수되는 날 ‘경호원들이 이제 화장실에 가려고 차를 타야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랬다”라고 말했다. 임시 화장실이 철수되자 이방카 부부의 경호팀은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오바마 전 대통령의 차고를 경호실로 고친 건물의 화장실을 썼다. 그렇지만 이들이 화장실을 깨끗하게 쓰지 못하는 바람에 2017년 중반 사용이 금지됐다. 그 뒤 경호팀은 1.6㎞ 떨어진 펜스 부통령의 집까지 차를 타고 가 급한 일을 해결했고 그럴 시간이 없을 만큼 급박한 상황에는 근처 식당에 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한 경찰관은 WP에 “비밀경호국 요원이 화장실을 찾기 위해 이렇게 극한까지 가야 했다는 것은 난생처음 듣는 얘기”라고 말했다. 결국 2017년 9월 비밀경호국은 이방카 부부의 사저 건너편에 있는 주택의 지하실을 4년 임대해 휴게 장소로 썼다. WP는 지난 3년여 임대료만 월 3000달러(약 330만원), 모두 14만 4000달러(약 1억 6000만원)의 연방 예산이 사용됐다고 전했다. 백악관은 이방카 부부가 경호팀에게 사저의 화장실을 쓰지 못하도록 한 적이 없고 지하실을 임대한 것은 비밀경호국의 결정이었다고 해명했다. 비밀경호국 대변인은 WP에 “우리의 경호 업무의 수단, 방법, 자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WP는 또 이방카 부부가 캘러라마에서 ‘좋은 이웃’은 아니었고 그렇지 않아도 트럼프 대통령에 비판적인 계층이 사는 이곳에서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했다는 불만을 샀다고 보도했다. 주민 브루스는 “그 부부는 뭐랄까, ‘우린 왕족이야’라는 태도로 이 지역에 왔다”고 꼬집었다.한편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 여사가 이미 백악관 짐을 정리하며 떠날 채비를 갖춘 것으로 전해졌다. 멜라니아 여사가 공개적으로 일정을 밝히지 않았지만 남편과 마찬가지로 조 바이든 당선인의 취임식에 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백악관의 한 소식통은 “멜라니아가 침묵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CNN 방송이 14일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대 일부가 워싱턴DC 의사당에 난입해 유혈 폭력 사태를 일으킨 이틀 뒤인 지난 8일 트위터를 통해 바이든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소식통은 측근뿐만 아니라 부인도 트럼프 대통령의 불참 소식을 몰랐을 것이라면서 “트럼프가 상의도 없이 트위터에 글을 올리곤 해, 멜라니아가 나중에야 소식을 접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트윗이 올라오기 전까지는 멜라니아 여사가 취임식 참석 여부에 100%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멜라니아 여사가 질 바이든에게 인수인계는커녕 연락도 하지 않은 상태이며, 백악관에서 나온 뒤 일할 사무실 등을 아직 마련하지 않았다는 전언도 나왔다. 전·현직 대통령과 영부인에 대해 책을 쓴 작가 케이트 앤더슨 브라우어는 “멜라니아 여사처럼 고집이 세고 반항적인 영부인은 없었다”며 “위기의 순간에 국가 통합을 도모해오던 영부인의 전통적인 역할에 관심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불복을 시사하며 백악관을 떠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동안에도 멜라니아 여사는 꾸준히 떠날 준비를 해왔으며, 절반가량 정리를 마쳤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멜라니아가 백악관을 떠나는 데 슬픈 기색이 없다”고 전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김재규 여동생 “오빠는 반역자가 아니다” 외신과 인터뷰

    김재규 여동생 “오빠는 반역자가 아니다” 외신과 인터뷰

    AFP 인터뷰서 “김재규, 대통령 되려고 하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한 뒤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이 집행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여동생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내란 혐의를 부정했다.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인 김정숙씨는 3일 보도된 AFP통신 인터뷰에서 “사람을 죽였다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하다”면서도 “그러나 오빠는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고 대통령을 죽인 것이 아니며, 국가에 반역을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재규 전 부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로서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오른 뒤 명실상부한 2인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 도중 박 전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했다. 이른바 ‘10·26 사태’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합동수사본부는 이 사건을 “대통령이 되겠다는 ‘과대망상증 환자’ 김재규가 벌인 내란 목적의 살인”으로 결론지었다. 김재규 전 부장은 1980년 1월 육군 고등계엄 군법회의에서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형은 4개월 뒤 서울구치소에서 집행됐다. 당시 김재규 전 부장은 계엄 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고 주장했다.김정숙씨를 비롯한 유족들은 “김재규에게 내란 혐의를 씌운 재판, 가족에게 통보 없이 단행된 사형 집행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최근 재심을 청구한 바 있다. 김정숙씨는 “유일한 면회가 형 집행 전날 이뤄졌다. 그러나 누구도 다음날 형이 집행될 줄 누구도 몰랐다”면서 “오빠는 자신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처형됐다”고 말했다. AFP통신은 인터뷰와 함께 “유신헌법을 만들어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중임·연임 제한 규정까지 철폐한 박정희 대통령은 과거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권위주의적 통치로 경멸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세월호 의인” 청와대 앞 37일째 단식 농성…왜?

    “세월호 의인” 청와대 앞 37일째 단식 농성…왜?

    “대통령 직속 특별수사단 설치 요구한다” 세월호 참사 원인 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위해 ‘대통령 직속 특별수사단’(이하 특수단) 설치를 요구하며 ‘세월호 의인’ 김성묵씨(44)가 단식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해결에 직접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10일부터 37일째 청와대 앞에서 단식 농성 중인 김씨는 세월호 사고 당시 아이들 30여명을 구조한 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인물이다. 김씨와 함께 하는 시민들, 양기환 문화다양성 포럼 대표, 김세균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등 시민사회 원로·인사 34명도 김씨에 힘을 보탰다. 이들은 철저하고 신속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원한다. 세월호 참사가 정부의 무책임으로 발생한 만큼 정확한 원인을 찾기 위해 박근혜 정부 청와대, 국가안보실, 경호실, 국정원, 안전행정부, 각 군(軍) 등을 대상으로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부 주요 기관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지시로 구성되는 특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김씨는 문 대통령이 결단할 때까지 단식농성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그는 “모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진상규명에 나설 것을 요구한다. 아이들에게, 희생자들에게 할 수 있는 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뿐”이라고 말했다. 현재 세월호 조사를 진행 중인 사회적사건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를 두고는 비판적 견해도 전했다. 2017년 제정된 사회적 참사 특별법에 따라 이해 12월 출범한 사참위는 다음 달 10일을 끝으로 2년의 활동을 마무리 한다. 사참위는 민간조사위원회란 한계로 인해 정부기관에 대한 조사는 물론, 관련자 처벌을 하기 힘들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사참위의 활동기간을 연장하려는 국회의 입법 움직임에도 반대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시간이 없다” 호소…2021년 4월15일 공소시효 종료 세월호 참사는 지난 2014년 4월16일 진도인근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발생했다. 5개월 후인 2021년 4월15일이면 관련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7년)가 모두 종료된다. 적극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처벌은커녕 조사기회도 놓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현재 이들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정부기관들에 직권남용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공무집행방해, 공용서류 등의 무효, 무용물의 파괴, 위증, 증거인멸 등과 친족간의 특혜, 허위공무서작성죄, 업무상과실치사상죄 등의 혐의를 주장하고 있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친문 구애’ 경쟁에 빠진 민주 전대… 당 외연 확대 걸림돌 되나

    ‘친문 구애’ 경쟁에 빠진 민주 전대… 당 외연 확대 걸림돌 되나

    8·29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가 결승점을 향해 가는 가운데 선거 과정에서 노출된 과도한 ‘친문(친문재인) 구애 경쟁’이 전대 이후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진성 권리당원을 향한 일부 과한 경쟁이 당원 아닌 일반 국민들에게는 이질감을 키워 당의 외연 확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란 분석이다. 전대 마지막 주를 맞아 당대표 및 최고위원 후보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여론전을 통해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인 권리당원 등을 겨냥한 표심 잡기에 나섰다. 특히 전례 없는 온라인 전대를 치르며, 국민적 관심사나 정책 대결보다는 한층 더 ‘센 발언’을 통해 선명성을 부각하려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와 연일 날을 세우며 공방을 벌이고 있는 이원욱 최고위원 후보는 25일 페이스북에 “진 교수 당신은 누구의 차지철을 꿈꾸는가”라며 진 교수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경호실장에 빗댔다. 합리적 중도로 분류되던 이 후보는 전대 기간 동안 윤석열 검찰총장을 겨냥해 “개가 주인을 무는 꼴”이라고 비난하는 등 원색적 표현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온건파로 분류되는 노웅래 후보 역시 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해 “뻔뻔한 통합당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며 야당과 각을 세우는가 하면, 신동근·한병도 후보 등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인연을 부각하며 ‘친문 인증’에 나섰다. 후보들이 친문 표심에 집중하는 것은 이들이 전체 선거인단의 40%를 차지하는 권리당원의 주축이라는 판단에서다. 투표 결과 반영 비율은 대의원이 45%로 더 높지만, 대의원은 대부분 지역위원회를 중심으로 결집된 ‘조직표’라 고정표에 가깝다. 반면 매달 당비를 내면서 활동하는 권리당원은 자발적 의사결정에 의해 표를 행사하기에 선거운동과 여론에 따라 움직일 여지가 상대적으로 크다. 특히 전체 80만 가운데 20만 정도로 추산되는 온라인 당원들은 친문 성향의 민주당 열성 지지층으로 분류된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대거 유입된 온라인 당원들은 핵심 친문으로 인터넷 여론을 주도하는 세력”이라며 “이번 전대에서는 결국 온라인 당원을 누가 잡느냐가 관건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2018년 전당대회에서 초선이었던 박주민 의원이 깜짝 1위로 최고위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권리당원 투표에서 다른 후보들을 압도하면서다. 이번에 당대표에 도전한 박 후보가 ‘권리당원의 참여와 권리 확대’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핵심 지지층에 경도된 경쟁으로 전당대회가 국민은 소외된 ‘관심·논쟁·비전 없는 3무(無)’ 양상으로 흘러가면서 이번 전대로 구성되는 차기 지도부에 대한 우려까지 제기된다. 김대진 조원씨앤아이(C&I) 대표는 “거대 여당을 이끌어야 하는 새 지도부로서 야당과 협치하고 국민적 기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 주지 못했다”며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전대”라고 평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진중권 다시 저격한 이원욱 “진교수, 당신은 누구의 차지철을 꿈꾸는가”

    진중권 다시 저격한 이원욱 “진교수, 당신은 누구의 차지철을 꿈꾸는가”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에 출마한 이원욱 의원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논쟁이 점입가경이다. 이 의원은 진 교수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에 비교하며 몰아세웠다. 이 의원은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진 교수 당신은 누구의 차지철을 꿈꾸는가”라는 글을 통해 진 교수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 의원은 집회의 자유와 관련한 진 교수의 논리가 보수언론의 의견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비판했다. 진 교수는 지난 전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원욱 의원의 박형순 금지법은 정부에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기간 동안에는 마음에들지 않는 집회를 임의적으로 금지시킬 수 있도록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내용”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이 의원은 “집회의 자유는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인 권리이지만,국가의 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그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판결한 대법원 판례와 “집행정지는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을 때에는 허용되지 아니한다”고 명시한 행정소송법 23조 제3항 등을 언급하며 진 전 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진 교수, 당신이 그렇게 귀중히 생각하는 헌법적 권리가 왜 ‘광화문 집회’에만 유독 머무는 것인지, 당신이야말로 김종인과 안철수의 차지철을 꿈꾸는 것인지”라며 “리걸 마인드 운운하기 전에 당신의 과잉 행동이야말로 우리의 일상을 파괴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일침했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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