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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지금이 권력구조 논란 벌일 땐가

    국회가 4당 체제로 재편된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무당적(無黨籍)으로 되면서 때아닌 권력구조 개편 논의가 무성하다.민주당은 노 대통령의 탈당을 대선때 지지층의 신의와 연결짓고 재신임 문제까지 거론할 정도다.여기에는 통합신당을 제외한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 3당이 합의하면 개헌안의 국회 발의와 통과가 가능해져 버린 정치권의 역학관계 변화도 작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권력구조 개편의 필요성만 같을 뿐,방향은 제각각이다.민주당은 대선공약인 책임총리제의 조기 실시를,한나라당 중진들은 내각제 개헌을 거론하고 있다.물론 청와대는 즉각 ‘부적절한 정치공세’로 일축해버렸다.아직 국민적 동의를 얻지못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사실 집권층의 지지세 약화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측면도 없지않아 보인다. 역대정권의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에 대한 국민적 우려가 당정분리와 책임총리제 등으로 구체화됐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그런 점에서 권력분점과 지방분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다고할 수 있다.하지만 이것이 권력구조 개편의 필요충분한 명분은 아니다.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참여정부 출범이후 민생은 ‘나몰라라’ 팽개친 채 신당이다 뭐다 하면서 정쟁으로 소일한 정치권이 이제 와서 권력구조 개편이라니 말이 되는가. 게다가 지금이 권력구조 개편을 논의할 때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당장 이라크 파병문제로 국론이 분열될 위기에 놓여있고,청년실업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또 새해예산안,선거관계법 등 민생·개혁입법은 어떻게 할 작정인가. 지금 개헌논의를 하자는 것은 총선을 겨냥한 정략으로, 국민들에게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술수로 비칠 뿐이다.그렇게 필요하다면 내년 총선때 공약화해 당당하게 국민들의 심판을 받으면 된다.그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이다.
  • “민주화운동 보상 기준 69년이후로 적용 정당”

    민주화운동 보상 시한문제와 관련,국회가 삼선개헌안을 발의한 69년 8월7일 이후로 제한한 것은 정당하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서울고법 특별7부(부장 이영애)는 7일 강모씨가 “현행 특별법은 69년 8월 이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선 보상받을 수 없도록 규정해 평등원칙에 어긋난다.”면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에 대해 낸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사건 심리에서 기각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입법자는 국가의 경제수준,재정능력,시대적 상황 등을 고려해 자유로이 보상범위를 결정할 수 있다.”면서 “특별법이 제한 시기·범위 등을 분명히 밝힌 만큼 근거가 합리적이라 판단된다.”고 밝혔다.이어 법률상 평등이란 모든 차별적 대우를 부정하는 ‘절대적 평등’이 아니라 합리적 근거없는 차별을 없애는 ‘상대적 평등’을 의미하기에 특별법은 평등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농업에 종사하며 신민당원으로 활동하던 강씨는 지난 67년 5월 주민 1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대통령선거 개표가 조작됐다.”고 말해 68년 명예훼손죄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정은주기자 ejung@
  • 鄭 명예선대위장 맡아/민주.통합21 개헌.대선공조 합의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표가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후보의명예선거대책위원장을 맡는 등 양당이 대선공조에 완전 합의했다. 민주당과 통합21은 29일 국회에서 대선공조를 위한 실무협의를 잇따라 갖고 양당이 공동선대위를 구성,노 후보의 대선 승리를 위해 공조해 나가기로 했다.또 정 대표의 제의대로 2004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양당이 함께 추진한다는 데도 합의했다. 이에 따라 연말 대선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와 노·정 연대간의대립구도로 전개되게 됐다. 양당은 이날 저녁 국회에서 열린 선거공조협의회에서 정 대표를 명예 선대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양당 동수의 공동선대위원장 가운데 1명씩을 공동선대위 집행위원장으로 임명하기로 했다. 선대위 산하 각 본부장도 양당이 공동으로 맡기로 했다. 민주당 신계륜(申溪輪)·통합21 조남풍(趙南豊) 단장 등 양측 협상대표단은 협의가 끝난 뒤 합의문을 통해 “양당은 지난 시대의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젊은 대한민국의 변화와 개혁,그리고 국민통합을 주도해 나갈단일후보의 승리를 위해 적극 공조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노 후보와 정 대표는 30일 회동,양당 공조를 바탕으로 대선 승리를 위한 구체적 선거전략과 함께 공동선대위 인선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통합21 김행(金杏) 대변인은 “정 대표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했다.”며 “앞으로 정 대표는 민주당사로 출근,노 후보와 함께 유세에 나서는 등 적극 선거운동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논란이 됐던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과 관련,민주당은 통합21측 요구를 받아들여 2004년 5월 17대 개원국회에서 처리한다는 데 합의했다. 민주당 임채정(林采正) 정책선거본부장은 “분권 개헌은 사실상 대선공약이자 대국민선언”이라며 “개헌안은 분권형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하되 양당의 입장을 적절히 반영할 방침”이라고 말했다.대선공조와 분권개헌에 합의함에 따라 양당은 노 후보가 집권할 경우 국정운영에 있어서 사실상 공동정권형태의 공조를 이뤄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진경호 홍원상기자 jade@
  • 선택2002/盧, 40대·영남표 공략 교두보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표의 대선공조가 본격 발진함에 따라 대선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노 후보로서는 후보단일화로 급상승한 지지세를 대선까지 이어갈 디딤돌을 마련한 셈이다. ◆노·정 공조와 대선 정 대표의 가세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와 노 후보의 대치전선은보다 복잡다기하게 전개될 전망이다.우선 정 대표는 52세의 젊은 연령에 신선하면서 중도적인 이미지,탈(脫) 지역성을 강점으로 한다.이는 노 후보에게 있어서 세대교체론 부각,안정성 강화,탈(脫)호남 등의 ‘선물’을 안겨줄것으로 예상된다.이번 대선을 이회창 대 반(反)이회창,수구세력 대 개혁세력의 대결구도로 몰아가려 하는 대선전략에도 보탬이 될 듯하다.부패정권청산론을 앞세워 호남 대 비호남의 대결구도를 꾀하고 있는 이회창 후보로서는일단 부담인 셈이다. 노·정 공조는 특히 대선 승패의 열쇠를 쥔 40대의 표심과 영남지역 공략에서 일정부분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한나라당 역시 이 점을 가장 경계하고있다.한나라당은 최소한 정 대표 지지표를 200만표 정도로 본다.단일후보 탈락으로 상당수가 이탈하더라도 일정부분 노 후보에게 득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한나라당은 나아가 지역적으로도 정 대표의 연고지인울산뿐 아니라 부산·경남 지역이 일정부분 타격을 입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개헌 합의와 공조 민주당과 통합21의 대선 공조의 핵심고리는 2004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이다.2004년 5월 17대 개원국회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는 내용의 개헌안을 처리한다는 공약을 양당이 공동 정책목표로 내세운 셈이다.이는 과거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한 DJP연합을 연상케 한다.차이는 DJP 내각제 합의가 집권 직후 공동정부 구성이라는 공고한 연대의 틀 속에서 이뤄진 반면 이번 분권 개헌 합의는 공동정부 구성 등을 명문화하지 않는 등 느슨한 연대의 모습을 띠고 있는 점이다.호남과 충청의 연대라는 지역적 연대의 틀과도 무관하다. 다만 노·정간 분권 개헌 합의 역시 정책연대를 넘어 국정의 공동운영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2004년 개헌이라는 정책목표를 제시한 이상 노 후보가 집권할 경우 개헌 이전이라도 이같은 정책목표의 정신을 살려 사실상 공동정부 형태로 국정을 운영하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노·정 역할분담론 일각에선 분권개헌 합의를 들어 노무현 대통령-정몽준 국무총리의 구도를점치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개헌안의 정신을 살려 노 후보가 대통령으로서통일·외교·국방 등 외치(外治)를 맡고,정 대표는 총리지명을 받아 경제와사회부문의 내치(內治)를 담당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그러나 노 후보가 집권해도 정 대표가 총리를 맡게 될지는 불투명하다.지금으로서는 오히려 정 대표 자신이 총리직에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대선 이후 당대 당 통합을 추진,정 대표가 신당의 대표직을 맡기로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그러나 이 역시 가설에 불과할 뿐 현재로선전혀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이 양측 협상단의 주장이다. 진경호기자 jade@
  • 盧·鄭 ‘2004년 개헌’ 합의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은 28일 오는 2004년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개헌안을발의하기로 합의했다. 양당은 ‘분권형 대통령제’란 용어 등 권력구조 개편안에 대해서는 합의를 도출하지 못해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와 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표간 회동과 양당 공동선대위 구성은 이르면 29일에나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임채정(林采正) 정책본부장과 통합21 전성철(全聖喆) 정책위의장은이날 오후 국회 귀빈식당에서 정책공조회의를 가진 뒤 공동 브리핑을 통해“2004년 17대 국회 개원 이후 개헌을 발의,추진한다는 데 양당의 의견이 일치했다.”고 발표했다. 두 사람은 그러나 “분권형 대통령제란 표현에 양당간 이견이 있었으며 구체적인 추진 일정과 방법론에 대해서도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양당은 이같은 입장 차이로 인해 이날 합의문을 채택하지 못했고 29일 다시회의를 열어 최종 조율작업을 벌일 예정이다. 통합21 전 의장은 “민주당측에서 분권형이란 표현이 마치 ‘자리 나눠먹기’처럼 비쳐진다며 주저했다.”고 말했다. 진경호기자 jade@
  • 선택2002/盧·鄭 ‘개헌조율’… 공조 새국면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이 28일 개헌 시기에 원칙적으로 합의함으로써 양당간선거공조 체제에 일단 파란 불이 켜졌다.그러나 구체적인 추진일정과 대선공약화 등 방법론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을 좁히지 못해 공동선대위가 출범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양측 정책조율단은 이날 저녁 국회 귀빈식당에서 협상을 속개,‘2004년 17대 국회 개원 후 개헌안 발의’에는 어느 정도 의견접근을 이뤘으나 개헌 내용이 분권형 대통령제인지 민주당의 종전 개헌안인지는 분명치 않았다.분권형 대통령제 명칭과 개헌의 성격 및 추진일정 등 방법론의 합의도 이뤄내지못했다. 이에 따라 당초 이날로 예정된 노·정 회담은 연기됐다.현재로선 정 대표가 노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맡을 가능성이 있지만 공조의 질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앞서 노 후보는 당사 후보실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일단 정 대표가 제안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논의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즉 “2007년개헌만 고집하지 않겠다.”면서 융통성 있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그러나 노후보는 ‘대선공약화’에 대해선 직답을 피하며 “나는 책임총리형을 분권형으로 보는데 정 대표는 이원집정부제를 생각하고 있다.”며 서로의 시각차를 드러냈다. 정 대표 역시 노 후보의 기자회견이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다.그는 당무회의에서 “개헌시기 등을 빼고 논의만 하겠다는 것은 자칫 말장난이 될 수 있고 수사가 아니냐.”면서 “성실치 못한 태도”라고 불신감을 드러냈다.그는“한 사람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강조,언론이 권력나누기로 폄훼하는데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공동정부나 총리를 원했다면 훨씬 더 쉬운 방법이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통합21 전성철(全聖喆) 정책위의장도 “‘분권형 대통령제’란 용어와 개헌시기를 분명히 하지 않은 ‘수용’은 사실상 수용이 아니다.”라며 “통합21의 핵심 정책이 반영되지 않은 공조야말로 ‘야합’으로 비칠 수 있다.”고말했다.앞으로 당을 살려 차기 총선과 대선에 임하기 위해서는 ‘명분’이필요한 것 같다.통합21 일각에선 노 후보측이 (정 대표의) ‘희생’에 대한예우가 없다며 섭섭해하는 눈치다.동등한 러닝메이트로 대우받지 못한 채 자칫 선거운동에 얼굴마담으로 이용만 당할 수 있다는 경계심의 표현이다. 민주당은 통합21측 요구가 예상보다 거세자 대책회의를 열어 정 대표의 진의를 분석하는 등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다.이재정(李在禎) 유세본부장은 “대선 승리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원칙에 공감하고 있으며,통합21측의 대선공조가 조건부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정 대표의 협조 없이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급등한 지지율을 지키기 어렵다는 위기감도 한몫했다. 민주당의 입장은 ▲2003년 국회의원 중·대선거구제 도입 ▲2004년 총선에서 다수당에 총리지명권 부여,책임총리제 운용 ▲2007년 국민 뜻에 따라 개헌추진 등이다.반면 통합21의 개헌안은 총리가 경제·치안·복지 등 내치(內治)를 책임지며 국회의 불신임 없이는 대통령이 해임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2004년 발의가 골자다. 박정경기자 olive@
  • 盧·鄭 단일화토론 중계/ 鄭“李이길 후보 뽑자” 盧“한때 60%지지 받아”

    ■모두발언과 단일화 소견 후보단일화 토론회는 모두발언부터 불꽃이 튀었다.먼저 발언한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후보는 자신이 단일화 후보여야 하는 이유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이길 수 있는 후보,호남뿐 아니라 전국의 지지를 골고루 받는 후보이기 때문”이라며 “경제와 국제감각이 있는 후보가 바람직하다.”고 ‘차별화’를 시도했다.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는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그는 “국민경선 후보로 한때 60%의 지지를 받았는데 지금 착잡하고 억울한 생각도 들지만 시련을 거쳐 더 크게 되라는 뜻으로 이해하겠다.”면서 “어려울 때마다 믿고 도와준 국민들이 이번에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단일화’ 문제로 토론주제가 넘어가자 최근의 단일화방식 논란과 관련,서로의 앙금이 드러나기도 했다.먼저 노 후보는 “지난 7월부터 국민경선의 문을 열어놨는데 응하지 않더니 지금 여론조사로 하려니 걱정이 많다.”며 왜 국민경선을 받지 않았는지 물었다. 이에 정 후보는 “국민경선제가 실험이고 취지도 좋았지만 민주당의 모인사가 국민동원 등 문제가 많았다고 말했다.”면서 당원들이 상대를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뽑는 게 국민경선의 참된 취지라고 답했다.그는 또 “노 후보가 국민경선 취지에 가까운 게 여론조사라고 해 수용했다.”고 덧붙였다. 노 후보는 국민경선을 방어하고 싶었지만 “동원이 진짜 있었다고 믿는지 의심스럽다.”고만 언급하고 넘어갔다.대신 그는 여론조사를 자신이 수용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 조사방법에 대해 정 후보측이 여러 문제로 재합의를 요구해 신뢰성이 흔들린다는 우려도 표했다.물론 정 후보는 “여론조사 방식이 신문에 공개돼 객관적,공정한 조사가 불가능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그러면서 자신이 주장한 당원과 국민 반반 여론조사를 접고 전격 국민여론조사를 수용한 점을 내세웠다. 단일화 토론은 자연스레 ‘본선경쟁력’으로 넘어갔다.정 후보는 “역대 대통령이 30∼40%대 지지로 당선된 것은 국가적 불행으로,결선투표제가 있으면 단일화는 필요없다.”며 “노 후보가 사퇴하면 그 표가 자신에게 온다.”고 주장했다.이에 노 후보는 “자체 여론조사 결과는 그렇지 않다.”며 “앞으로 검증이 중요한데 월드컵 이후 분위기만으로 경쟁력을 가릴 수는 없다.”고 맞섰다. 그는 또 “의혹이 없어야 이 후보를 이길 수 있는데 정 후보는 불안하다.”고 말했다.반론도 이어졌다.정 후보는 “한나라당의 의혹 공세를 석 달 동안 받았는데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란 사실을 느끼지 못했느냐.”고 따졌다.급기야 노 후보는 “한나라당이 정몽준 파일을 갖고도 안쓰는 것은 나를 진정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며 “주간지에 폭로된 정 후보의 각종 의혹들을 방어하기 어렵겠다.”고 공격했다. 여기서 두 후보는 ‘너무 나간다.’ 싶었는지 잠시 진정한 후 ‘이회창 후보가 안 되는 이유’로 화제를 바꿨다. 먼저 정 후보는 이 후보가 대통령의 격무를 하기에는 나이가 많고,대북관계 악화로 경제가 타격을 받으며,보복의 정치가 계속된다는 점을 들었다.노 후보는 “정 후보가 이 후보와도 합칠수 있다는 발언을 해서 당황했는데 만나보니 아니어서 다행이었다.”고 약간 비꼰 뒤 “IMF 경제위기에 책임이 있는 한나라당에 줄곧 맞선 사람은 자신”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박정경기자 olive@ ■정치분야 ◆정-노 후보의 발언을 죽 봤습니다.금년 1월에는 DJ(김대중 대통령)의 자산부채를 승계한다고 했다가 6월에는 필요하다면 DJ를 밟고 넘어가겠다고 했습니다.11월에는 탈(脫)DJ 필요없다고 말했어요.YS(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부산시민의 자존심을 팔았다고 했고 지난 대선에는 YS는 식견이 모자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그러다가 YS를 찾아가 YS시계 차고 있다고 (자랑)했는데…. ◆노-부처님이 설복하실 때 만나는 사람마다 다르게 설득합니다.제가 기본적으로 오락가락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하고 비교할 때 제가 야박하게 행동하지는 않고 있습니다.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는 애증이 교차합니다. ◆정-부처님도 상대편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는데 노 후보가 부처님 수준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죠.공자님은 ‘세번 생각하고 행동하라,신중한 사람에게는 한번만 생각하라.’고했는데 특정인에게 정계 은퇴하고 떠나라는 것과 애증교차는 헷갈립니다. ◆노-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친·인척 관리를 하기가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도장 한번 잘 찍으면 친·인척이 수천억 이익을 볼 수 있고,정 후보가 대주주로 있는 회사가 주가조작이 있는데 일을 하기가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노 후보가 생각할 때 제가 대통령하면 재벌이 저한테 돈을 가져오겠습니까.노 후보가 주가조작 사건이 있다고 했는데 상당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이회창 후보가 불쌍한 사람인 이익치를 불러다가 기자회견을 시켰는데 한나라당의 공작입니다.이익치의 주장이 사실이면 제가 후보직을 사퇴하겠습니다.빨리 국정조사를 해야합니다. ◆노-정 후보가 주가조작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진위를 떠나서 국민들이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노 후보는 기업을 경영하지 않아서 의혹을 너무 믿는데,1800억원이 회사에서 빠져나갔다는데 빠져나간 게 아닙니다.도장 하나로 친척에게 수백억원을 줄 수있다고 했는데,이것도 현실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노-비유죠.노동자들이 중요하고 제대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과장해서 말해서 국회의원 대학교수가 없어도 나라가 굴러가지만 노동자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정-노 후보가 총리 지명권을 다수당에 준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책임한 얘기입니다.저는 2004년 4월 국회개원 때 개헌안을 발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노-총리를 다수당에 주는 것은 프랑스에서 하고 있는데 2004년 개헌은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노 후보가 바쁘신 줄 알았는데 주간지를 많이 보시는 것 같습니다.저는 민정당에 공천 신청한 적이 없습니다. 홍원상 오석영기자 wshong@ ■경제·행정수도 이전 ◆노- 법인세 인하를 찬성하십니까. ◆정-예,저는 법인세는 인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홍콩 같은 경우 16%로 단일 세율입니다.그렇게 해서 관청의 자의적 해석을 방지해서 기업들이 로비하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우리는 다단계 세율을 적용하고 있는데,어느세를 적용하느냐에 따라기업이 영향을 받아 (다단계 세율의)의도와 달리 좋지 않습니다.어느 정도 인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특히 중소기업은 이익이 30억원 이하인 기업은 전부 낮춰주고,그 이상은 높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노-우리 법인세가 미국,일본,유럽에 비해 많이 낮다고 보십니까. ◆정-스웨덴 같은 명목세율은 높지만,공제제도가 있어 실질세율은 더 낮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우리나라는 높은 편입니다. ◆노-지난해 한나라당이 법인세 2% 인하안을 냈습니다.계산하면 1조 5000억원 세금이 깎여 세수가 줍니다.그런데 그중 1조 2000억원 이상을 큰 기업이 이익을 보고 나머지 기업은 3000억밖에 이익을 못봅니다.법인세 인하라는 것이 큰 기업에만 이익주는 것이라서 부당합니다. ◆정- 노 후보 말은 일리가 있으나,중소기업 하는 분들을 만나보면,2단계로 돼 있는 법인세 1억원 상한을 올려달라고 하는데,이를 올리고 법인세는 내리는 게 좋습니다. 노 후보는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경제성장률이 7%가 되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꼭 7%를 외치는 이유가 있습니까.저와 이회창 후보는 6%가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노-지금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5.2%라는 것은 다 아는 얘기입니다.우선 잠재성장률이 과거에는 높았다가 낮아진 이유가 노동력 부족 때문입니다.우리나라 여성들이 48%만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는데,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 비하면 참 낮습니다.경제활동참가율을 55∼60%로 하면 50만명의 일자리가 생깁니다.갈등이 많아 갈등비용이 많은데,노사 갈등은 제가 (그동안의)경험으로 잘 풀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게다가 정 후보와 다른 것이 내가 재벌 개혁을 주장하는데,이것을 잘 하면 0.3%정도 경제성장률이 더 높아집니다. ◆정-노 후보가 행정수도 충청이전을 말했습니다.국민적 합의 없이 이전 지역을 특정 지역으로 못박았는데,충청 지역에서 이것을 환영하는지,다른 지역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노-수도 이전은 75년쯤 공화당 정부 때 이미 계획이 이뤄졌고,83년도 전두환(全斗煥) 정부 때도 깊이 검토했습니다.다 충청권이라고 했습니다.그곳이 국토 중간이기 때문입니다.매연,환경,교통 등 땅값이 올라 서울에서 국민이 살 수가 없습니다.그리고 지방을 그대로 두면 갈등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모두에게 좋은 것입니다. ◆정- 전두환 전 대통령을 존경 안 한다면서 계승한다니….행정수도 이전은 브라질이나 호주를 보더라도 70년이 걸렸습니다.또 70년 동안에 통일이 될수도 있는데….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시겠습니까. ◆노-브라질과 호주는 성공적이지 않습니다.워싱턴과 오타와는 성공적인 경우입니다.충청권은 공항도 있고 준비가 다 돼 있어 터 닦아 지으면 됩니다. 김상연 김미경기자 carlos@ ■외교·안보·남북관계 ◆정-노 후보는 건국 당시 남북 정부 모두를 분열세력이라며 싸잡아 격하시켰습니다.우리의 분단은 국제 정세에 따라 분단됐습니다.이승만 선생 외 다른 현실적 대안은 있었습니까. ◆노-남북한을 분열정권이라고 한 평가가 남한 정부를 합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 문제입니다.김영삼 정권도 합법적인 정권이지만 역시 분열정권이며 김대중 정권도 합법적 정권이지만 절반의 지지를 받지 못한 분열정권입니다.이제 동서 분열과 남북 분단을 극복하자는 것입니다. ◆정-노 후보의 역사관 정치관이 위험하다고 하는 이유는 남북한을 같이 평가하는 것입니다.학교에서 배운 것은 우리는 좋고,북한은 공산주의 정부라고 배웠습니다.북한의 6·25전쟁도 통일 시도로 봅니까. ◆노-정 후보는 남북간 교류협력 지원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다가 북한 핵문제가 불거지면서 지원중단을 주장했습니다.결국 북핵 문제는 북·미의 관계로만 맡겨지고 남한이 주도적 역할을 못할 때 위험해 지는 것은 아닙니까. ◆정-워싱턴에서 국제정치 박사를 받았고,어떤 분보다 핵 문제를 많이 공부했다고 생각합니다.핵무기는 군사무기보다 정치무기입니다.서울대 전인영 교수는 노 후보와 저를 비교하면서 저의 대북정책이 가장 합리적이며 이는 신축·유연성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노-여러 서울대 교수들이 저도 도와주고 있고,그중엔 국제정치학자들도 많이 계십니다.금강산·개성공단 사업은 제가 하면,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을것 같은데 정 후보가 지원하면 형님 사업 도와주는 것처럼 보여져 오히려 차질을 빚을 것 같은데요. ◆정-금강산·개성공단 사업을 인정해 준 것 고맙습니다.이 사업들이 평가를 받으려면 각각 5년,20년은 걸릴 것입니다.시작한 사람이 다 마무리할 수 없는 일이며,국제 컨소시엄이 있어야 성공합니다. ◆정-노 후보는 ‘대통령이 돼도 미국에 사진찍으러 가진 않겠다.’고 했습니다.대통령 후보로서 미국을 알아보겠다는 생각은 안했는지요. ◆노-대통령이 아니라서 안갔습니다.후보가 일찍 됐더라면 갔다와서 대미 정책을 공부했을 것인데,그 문제를 가지고 문제를 삼는 사람들의 자세를 제가 고분고분 따라가기 싫어서 안갔습니다.되면 가죠 뭐.저는 반미감정도 없습니다. ◆정-말을 다듬었으면 좋겠습니다.‘사진찍으러 가지 않는다.’는 말은 미국 사람이 들으면 당황해할 것입니다.굽신굽신하지 않겠다는 말도 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노- 한국의 지도자들이 그동안 미국에 대해 지켜야할 자세를 지키지 못해 국민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사실만 인정해 주십시오. ◆노-대북 4억달러 지원과 관련,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대통령이 되면 철저하게 밝힐 의향이 있습니까.형제들에게 야박할 것 같은데…. ◆정-야박하게 생각했다면 질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김 대통령 자산과 부채를 다 껴안겠다고 했으면 김 대통령에게 물어보지 왜 나한데 물어봅니까.여당인데,국정조사를 하면 되지 왜 한나라당 주장에 변죽을 맞춥니까. ◆노-공적 자금은 현대가 많이 받았습니다.다(정 후보)집안일이지요.4억달러에 대해선 확실히 조사해야 하고 국민에게 밝혀야 합니다. ◆정-노 후보가 계속 집안일,집안일 하는데 저희 아버님이 현대 창업주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많은 국민들이 현대가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김수정 홍원상기자 crystal@ ■사회문화분야 ◆노-고교 평준화를 해제하면 문제가 많을 것 같은데 입장을 잘 정리하셨는지요. ◆정-많은 전문가들은 “이 문제는 복잡하니까 점수따려면 가만히 계십시오.”라고 말하더군요.정부가 자립형사립학교를 지원하면 공교육의 내실화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노-고교평준화는 폐지하고 자립형 사립고는 인정하시겠다? ◆정-자립형 사립고는 대안으로 검토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노-실제로 고교평준화를 폐지하면 중학교까지 과외열풍이 불게 되며 사교육비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학벌의 세습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수 있는 부작용이 우려됩니다. ◆정-노 후보는 서울대 폐지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하는데요.(이때 노 후보가 “아닙니다.”라고 부인)학벌세습의 위험성은 있다고 봅니다. ◆노-유럽식 사회주의가 아니라 유럽에서 쓰이는 제도라고 했습니다.총액예산제는 지자제에 관해 얘기한 것이고,참조약가제는 너무 비싼 약을 조제못하도록 한 좋은 제도입니다. ◆정-하지만 질이 떨어지는 약을 먹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습니다.총액예산제는 정책으로 제시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총액예산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논리구조에 맞지 않는 것 같은데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정-직장에도 보육시설하면 기업도 돈벌고 국가도 이득이 되는 일임을 국민들에게 알리겠습니다. ◆노-교통사정이 너무 나빠 아이를 데리고 직장에 출근할 수 없어 집근처에 아이를 맡기고 출퇴근하는 현실입니다.사정에 안맞는 공약이죠.또 융자받아 만든 어린이집 대부분이 파산지경에 빠졌는데 또 융자한다니,상황 파악이 됐는지 궁금합니다. ◆정-저 혼자의 생각이 아니라 저를 도와주신 분들의 조언입니다.이런 분들이 섭섭해하실 것입니다. ◆노-정 후보는 교육부를 폐지하면 사회의 변화·발전에 따른 국가의 인적자원 양성은 어떻게 할지 답해주십시오. ◆정-교육부는 평가와 정보제공 기능만 가지고 있고,나머지 기능은 지자체와 각 학교로 주자는 것입니다.이상주 부총리에게 미리 설명 못드린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교육감도 주민 직선에 의해 뽑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노-검증이 충분히 될 수 있도록 질문을 까다롭게 해야 하는데 서로 협력해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토론이 어려웠습니다. 난 조사받을 의혹이 없는 사람입니다.또 (이회창 후보와 정몽준 후보)두 분은 특별한 분인데 나같은 서민 대통령이 나오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박록삼기자 youngtan@
  •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추진

    민주당 정치개혁특별위원회(위원장 朴相千)는 11일 현행 집중적 대통령제 권력구조를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을 추진하기로 하고,이를 당론 및 대선공약으로 채택할 것을 건의했다. 개헌안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투표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에 한 차례 연임할 수 있도록 하며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선거관리위원장에 대한 임명권과 사면권,긴급명령권,계엄선포권,국무총리지명권,국회해산권,통일·외교·안보에 관한 행정권을 갖는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되,국회의 불신임 결의에 의하지 않고는 대통령이 임의로 해임할 수 없도록 독자성을 보장하고,내정에 관한 행정권과 국회해산 건의권 등을 갖는 실질적인 내각수반으로 격상시켰다. 개헌안은 또 특검제를 상설화하며 감사원을 국회에 귀속시키는 방안을 포함하고 있다.돈 안드는 선거와 소수 세력의 원내 진출 보장을 위해 국회의원선거구를 1개 선거구에서 5명 이상을 선출하는 대선거구제로 전환하고 1인 2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것도 건의했다. 검찰총장,국가정보원장,경찰청장,국세청장,금융감독위원장,공정거래위원장등 6개 기관장을 인사청문회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은 계속 검토키로 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盧-정개특위 개헌론 ‘불협화음’

    민주당 내에서 개헌론을 둘러싼 마찰음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가 ‘연내 개헌 불가’방침을 거듭 밝히면서 개헌문제에 대해 쐐기를 박고 나섰지만,당 공식기구인 정치개혁특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개헌 일정까지 제시할 태세다. 지난 5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연내 개헌 불가 의견을 제시했던 노 후보는 8일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시기적으로 (개헌의) 실현 가능성이 너무 없다.”고 거듭 못박았다. 특히 당내 정치개혁특위는 물론 이인제(李仁濟) 전 고문과 정균환(鄭均桓)총무 등이 제기한 ‘분권적 대통령제 개헌’필요성에 대해서도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문제는 현행 헌법에도 상당히 깊이 마련돼 있다.”면서 시기뿐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노 후보는 개헌논쟁의 소모적 측면을 지적했다.그는 “헌법을 법대로 운영할 생각은 못하고 개헌만 얘기하는데 개헌이 쉽게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아니다.”면서 “끊임없이 논란과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민주당 정치개혁특위(위원장 朴相千)는 이날 헌법개정소위를 열어 분권적 대통령제로의 개헌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19일 공청회를 열기로 했다.독자적인 개헌안을 8월 말까지 마련한다는 계획도 잠정적으로 세웠다. 이는 9월 정기국회에서 개헌문제를 쟁점화하기 위해 늦어도 다음달 말까지 개헌안을 마련,당에 제출함으로써 당론화를 추진할 방침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노 후보는 “일개 기구에서 나오는 것으로,아직 당론으로 채택되지 않은 것”이라면서 “공개적으로 시비하고 싶지 않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그러면서도 “어쨌든 민주당은 노무현 (혼자만의)당이 아니고,모든 주장을 봉쇄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가져서도 안된다.”고 비켜갔다. 하지만 박상천 정개특위 위원장은 사견임을 전제로 “개헌논의를 안 하는 것은 앞으로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대통령이 돼 총리의 권한을 강화해 준다고 하지만 악용될 소지가 많다.”고 말했다.개헌을 둘러싼 민주당의 불협화음이 당분간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춘규기자 taein@
  • 대선열외군 “연내에 개헌”대선후보군 “차기에 논의”’각 정파별 입장

    민주당 이인제(李仁濟) 의원이 연내 개헌을 주장한데 대해 각 정파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크게 보면 현행 대통령 5년단임제를 고쳐야 한다는데는 대부분의 정파가 견해를 같이한다.그러나 시기나 개헌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연내 개헌론자= 이 의원의 ‘이원집정부제로의 연내 개헌’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은 민주당의 정치개혁특위(위원장 朴相千)와 ‘중도개혁포럼’,자민련 등이다.중도포럼을 이끌고 있는 정균환(鄭均桓) 총무는 5일 CBS라디오에 출연,“레임덕 현상과 친인척 비리,부정부패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권력이 한 곳으로 몰린 제왕적 대통령제 대신 분산적 권력구조가 필요하다.”며 이의원의 개헌 주장에 동조했다. 자민련도 두 손 들어 환영하고 있다.김종필(金鍾泌) 총재는 “이 나라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대해 환영한다.”고 말했다.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이 지론이지만 각 정파가 합의한다면 이원집정부제도 수용할수 있다는 것이 김 총재의 입장이다.김학원(金學元) 총무는 “국회에 ‘권력구조개선위원회’를 설치,각 정당간 토론을 거쳐 연말 대선 이전에 결론을 내자.”고 제의하고 나섰다. ●연내 개헌 불가론=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측과 한나라당,한국미래연합 박근혜(朴槿惠) 대표,무소속 정몽준(鄭夢準) 의원 등은 현실적 이유등을 들어 연내 개헌 불가론 내지 불가능론을 펴고 있다. 노 후보는 “정치적 여건상 연내 개헌은 가능하지 않다.”고 못박았다.나아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지나치게 매달려 추진할 경우 혼란을 줄 수도 있으므로 차분히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인제 의원의 ‘의도’에 의구심을 갖고 있음을 숨기지 않은 셈이다. 한나라당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서청원(徐淸源) 대표는 이날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지금은 개헌을 논의할 시기가 아니며 어느 정권이 집권하든 개헌은 다음 정권의 몫”이라고 말했다. 남경필(南景弼) 대변인도 “민주당 정치발전특위와 중도개혁포럼,이인제 의원 등의 개헌론은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판을 흔들어 보려는 정략적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이인제 의원 등과 함께 정계개편의 핵으로 남아 있는 박근혜 대표의 한국미래연합은 연내 개헌 불가능론을 편다.김기덕 공보특보는 “4년 중임 정·부통령제로의 개헌이 당론이지만,시기적으로 연내 개헌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정몽준 의원 역시 지난 4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연내 개헌 불가능론을 폈다. ●개헌론의 향배= 원내의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반대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재적의원 3분의2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개헌안이 국회에서 처리될 가능성은 없다. 관심은 개헌론이 정계개편의 동인(動因)이라는 점이다.‘중부권신당설’의 중심에 서있는 이인제 의원과 자민련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머지않아 이들의 연대가 표면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 박근혜·정몽준 의원이 가세하느냐이다.보수색 짙은 자민련과의 연대에 부담을 느끼는 이들로서는 일단 IJP(이인제+김종필)연대 등 정국지형의 변화를 살피면서 행보를 결정할 듯하다. 진경호기자 jade@
  • [씨줄날줄] 무당적 국회의장

    “국회는 정파간 대립과 대결의 정쟁으로부터 해방돼 진정한 민의의 대변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8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소속정당을 탈당한 이만섭(李萬燮) 국회의장의 소회이자 각오다.올해로 헌정 54주년이 되는데도 ‘해방’이라느니,‘진정한 민의의 대변자’라느니 하는 말이 새삼 등장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이 의장의 말은 그 동안 국회가 정파의 이해로부터 해방되지도 못했고,민의의 대변자가 되지도 못했다는 얘기에 다름이 아니다. 우리 헌법의 3권분립 권력구조 체제는 행정부와 입법부,사법부가 서로 견제하며 독립적인 위상을 갖는 것이다.그런데 그동안 국회를 보자면 국회의원 공천권을 정당의 총재가 좌지우지했기 때문에 국회의원 배지를 유지하려면 당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이에 따라 국회는 ‘통법부’가되고 의원들은 ‘거수기’의 역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국회의장도 대통령을 배출한 집권당이 사실상 임명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독립적인 권한행사는 불가능했다. 과거 우리는 국회의원들이 새벽에 버스를 타고 전격적으로 국회에 진입(?)해 법안이나 동의안을 단독으로 변칙처리하는 모습을 봤다.박정희 대통령 시절 3선 개헌안은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기습 통과됐다.국회의장이야당의 저지조에 가로막혀 의장실에 갇혀 있는 동안 사회권을 위임받은 국회부의장이 의장석도 아닌 외빈석에 홀연히 나타나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모습도 목격했다.이런 부끄러운 사례는 역설적으로 국회의장의 사회권 권위를 강조하기도 하지만,어떤 방법으로든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꼭두각시 의장’의 한계이기도 했다. 의정사상 처음 시도되는 무당적 국회의장은 국회의 중립성과 운영의 효율성을 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특히 올해는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여서 여야가 첨예한 대립을 펼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정파의 이해를조정하고 생산적인 국회로 이끄는 데 국회의장의 역할이그 어느 때보다 중요할 것이다.물론 국회의장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정당과 국회의원들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공염불이 될 것이다. 법과 제도도 결국은 사람이 운용한다.그런 점에서 우리헌정사상 첫 무당적 국회의장이라는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한 이만섭 국회의장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김경홍 논설위원 honk@
  • 이부영씨, 정·부통령 4년중임제 주장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 부총재는 14일 “조속히 개헌작업에 착수,내년 지방선거와 함께 여야 합의에 의한 개헌안에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부총재는 이날 미국 UC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 주최세미나에 참석,기조발제를 통해 이같이 말하고 “지역주의에 기반한 낡은 정치,정당을 개인의 사유물로 전락시킨 정치지도자들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협력,그리고 완충을 통한 국민통합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고 이 부총재측이 전했다. 또한 이 부총재는 이 자리에서 “정·경유착과 돈 정치에 대한 국민 저항감이 어느때보다 거세지는 등 한국 정치의 근본적 지형이 변화하고 있다”면서 “내년 대선을 계기로 3김 시대는 종언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4년 중임 정·부통령제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한 뒤 “최근 대통령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는 이런 여건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으로,정치개혁의 구체적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이런 절호의 기회를 맞아 정치권이 정파 이익에서 벗어나 국가의 장기발전 전략을 세우고 그 실현을 위해 국가운영의 기본틀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운기자 jj@
  • 신유고연방 大選 이틀 앞으로

    24일 치러질 신유고연방의 대통령 선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있다.발칸반도의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질 지 여부가 국제사회의 관심이다.야당의 승리는 유고 독재의 종식을 뜻하는 동시에 화약고인 남동유럽에서의 평화정착 가능성을 의미한다.때문에 서방 선진국들은 야당 후보를 전격 지원하고 있다.유고 군부도 선거결과에 승복할 의사를 밝혀정권교체의 가능성은 한층 높아지고 있다. ◆판세 분석 밀로셰비치의 독재와 11년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낀 유고 국민들 사이에 이번에는 바꿔보자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특히 18개 군소야당 연합인 세르비아민주야당(DOS)의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 후보가 유일하게 부패에 연루되지 않은데다 후보단일화 실패의 책임이 제 1야당인 세르비아쇄신당(SPO)의 부크 드라스코비치 당수에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코스투니차가 급부상하고 있다. 코스투니차는 1차 여론조사에서 43%의 지지를 얻어 21%에 그친 세르비아사회당(DOS)의 밀로셰비치를 여유있게 따돌렸다.2차 조사에서도코스투니차가 밀로셰비치를 52%대 26%로 앞섰다.유고의 진보적인 라디오방송 B92가 실시한 인터넷 설문조사에서는 코스투니차가 무려 77%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1차투표에서의 과반수 이상 승리도 점쳐지고 있다. ◆야권 분열 지난달 초 야권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뒤 대선 레이스에뛰어든 야당의 후보는 3명.미국을 포함해 서방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DOS의 코스투니차,제 1야당인 SPO의 보이슬라브 미하일로비치, 세르비아급진당(SRS)의 토미슬라브 니콜리치 등이다.야권은 반(反) 밀로셰비치 세력의 표가 분산될 것이 예상되자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고있다.DOS에 참여하고 있는 민주대안당은 성명을 통해“어떤 개인이나개별 정당도 국익을 두고 도박을 벌여 국민을 실망시킬 권리가 없다”고 SPO의 야권후보 단일화 불참을 강력히 비난했다. 그러나 SPO는“전체 유권자의 3분의 2가 야당을 지지하고 있다”며 “야당 전체가제 1야당 후보인 미하일로비치를 지지하면 밀로셰비치의 재집권을 충분히 저지할 수가 있다”고 반박했다. ◆서방의 지원과군부의 중립 미국은 지난달 유고에 접한 헝가리에야당 후보 지원을 위한 사무소를 열었다.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밀로셰비치 낙선 지지를 공표했다.미국과 유럽연합(EU)은 유고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선택하면 대(對)유고 제재를 풀고 수백만 달러의 경제지원을 할 것이라고 정권교체를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침묵을 지킨 유고의 군부도 선거결과에 승복할 뜻을 비쳤다. 네보이사 파브코비치 유고군 참모총장은 국영 TV와의 회견에서 “코스투니차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도 군이 그의 승리를 수용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며 “군은 특정 정당을 지지해 본 적이 없으며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지지할 뿐”이라고 강조했다.정권이양의 최대 걸림돌로 간주된 군부가 대선에서의 중립을 표명한 것. ◆우려되는 부정선거 및 테러 재집권이 여의치 않을 경우 밀로셰비치측이 투표조작이나 후보자 납치 및 테러를 자행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극단적으로는 코스투니차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밀로셰비치는 유엔군 관할지역인 코소보에서도선거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코소보에서의 소요 등을 예상하고 이를빌미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부정선거를 치르려는 것.실제 19일 코소보내 세르비아인 거주지인 그라카니카에서 테러음모 용의자 3명이 코소보평화유지군(KFOR)에 체포됐다. ◆유고사태 일지. ●1389년 오스만 튀르크,세르비아로부터 코소보 강점●1946년 구 유고연방 탄생,코소보는 세르비아내 자치주로 편입●1987년 밀로셰비치,세르비아 대통령 취임.코소보 알바니아계 탄압시작●1989년 밀로셰비치,코소보 자치권 강탈.세르비아 대통령 재선●1991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선언.내전 시작●1999년 3월24일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고 공습 시작●〃 6월9일 유고-나토 세르비아군의 코소보 철수 합의문에 서명.알바니아계 귀환시작●2000년 7월6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유고 상·하원 통과● 〃 9월24일 유고 대선강충식기자 chungsik@. *코스투니차 후보…민족주의 성향 '미스터 클린'. 18개 군소야당연합인 세르비아민주야당(DOS)의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56) 후보는 유고 정권교체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법학 교수 출신의 코스투니차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유고의 야당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부패에 연루되지 않은 청렴한 이미지 때문이다.부패한 정부에 식상해 있는 유고 국민으로서는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코스투니차 후보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할 줄 알고 정치적 설득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그는 또 밀로셰비치 대통령과 아직 한번도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현 정부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으며 서방과의 대화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나토의 유고 공습에 대해서는 강도높게 비판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학자풍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코스투니차 후보는 정치적 조직 기반이 미약하고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1944년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난 그는 베오그라드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다.89년 정계에 발을 들여 놓은 그는 92년 세르비아민주당(DSS)설립 이후 줄곧 당수직을 맡아 왔으며90년부터 97년까지는 세르비아공화국 의원직을 보유했다.정치에 입문하기 이전에 법학 및 철학 관련 정기간행물의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강충식기자. *밀로셰비치 현 대통령…국민들 독재 염증-서방 기피. 극단적인 극우주의와 권모술수로 정권을 연장시켜왔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신유고연방 대통령(58)이 이번 대선에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1941년 베오그라드 인근 포자레바츠에서 출생한 그는 전력회사와 은행에 잠시 몸담았다가 39세때 정계에 투신했다.80년 요시프브로즈 티토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주목받기 시작,86년에 세르비아 공산당수가 됐다.그는 코소보가 400여년전 세르비아의 10만대군이 오스만 터키군에 전멸당한 ‘성지(聖地)’임을 강조함으로써 세르비아인의 민족감정에 불을 지폈다.89년 세르비아 대통령이 된 그는 가장 먼저 코소보의 자치권부터 빼앗았다. 92년 유고연방이 해체됐으나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과 크로아티아 내전에 개입,각 지역의 세르비아인에게 무기를 지원하는 등 ‘대 세르비아’ 정책을 꾸준히 실천에 옮겨 그해 실시된 대선에서 재선됐다. 밀로셰비치는 90년대 중반이후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청소를 가속화,무수한 인명을 무차별 학살해 야당의 거센반발을 샀다.결국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공습을 불렀고 본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전범으로 기소된 상태다.지난 7월6일 유고 상·하원에서 대통령 직선제개헌안이 통과됨에 따라 밀로셰비치는 집권연장에 대한 꿈에 부풀었으나 오히려 직선제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 됐다. 강충식기자
  • 밀로셰비치대통령 연임 유고의회 개헌안 통과

    [베오그라드 DPA AFP 연합] 유고슬라비아 상하 양원은 6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임기를 사실상 연장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가결했다. 상원은 이날 대통령 선출 방식을 의회 간접선거에서 국민들의 직접투표로바꾸는 개헌안을 출석의원 27명 전원의 찬성으로,하원은 찬성 96명,반대 9명의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며 현재는중임이 금지돼 있다. 대통령을 국민의 일반투표로 선출할 경우 친 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몬테네그로공화국은 대통령선거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몬테네그로공화국의 인구는 65만명에 불과한 반면 세르비아공화국은 700만명이나된다.
  • 민주화 희생자 10월부터 보상

    정부는 4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경제·교육부총리제 도입을 골자로 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이날 회의에서는 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시행령도 의결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시행령의 확정으로 해당자들에 대한국가 보상은 이르면 오는 10월부터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정부는 다음달 초부터 피해신고를 접수,2개월여간의 심의기간을 거쳐 피해자 보상을 실시할방침이다. 시행령은 ‘국가권력에 항거한 경우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이 학교·언론·노동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사용자나기타의 자에 의해 행해진 폭력 등에 항거한 경우’를 보상 범위로 규정했다. 보상대상은 69년 8월7일(3선 개헌안 발의일) 이후의 피해자로 한정했다. 국무회의는 또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안을 의결,의문사 사건관련 증인·참고인 등이 생명이나 신체에 위협을 받거나 받을 염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진상규명위원회가 관계기관에 신변보호를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 구본영기자
  • 佛 대통령 임기단축안 이르면 9월 국민투표

    [파리 연합] 프랑스는 빠르면 9월24일 대통령 임기 단축을 내용으로하는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것이라고 8일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가 보도했다. 르 피가로는 이날이 어려울 경우 10월1일이나 8일에 국민투표가 실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지난 5일 TV회견에서 대통령 임기를현행 7년에서 5년까지 단축할 것을 공식 제안했다. 프랑스 정부는 7일 전날 헌법위원회의 자문을 거친 뒤 시라크 대통령이 주재한 각료회의에서 엘리자베드 기구 법무장관이 제안하는 형식으로 대통령임기를 2년 줄이는 내용의 개헌안을 공식 채택했다. 이어 의회 차원의 절차가 이달 말까지 진행된다.르 피가로에 따르면 프랑스 하원은 오는 13일과 14일 이 개헌안을 심의한 뒤 20일 표결을 실시하게 된다.
  • 佛, 대통령 임기단축안 공식채택

    프랑스 행정부가 대통령 임기를 현행 7년에서 5년으로 줄이는 내용의 임기단축 개헌안을 7일 공식 채택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주재한 주례 각료회의에서 엘리자베트 기구 법무장관이 제안한 이 개헌안에 따른 헌법 개정절차는 올해말쯤 완료될 전망이다. 프랑스 하원은 오는 14일 이 개헌안을 심의한 뒤 20일 표결절차를 거쳐,29일과 30일 상원에 제출할 계획이다. 기구 법무장관은 “이 개헌안은 매우 중요한 헌법 개정이 될 것임으로 진지한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비록 프랑스 국민들에게 최우선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분명 중요한 개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개헌은 상.하원이 개별적으로 승인한뒤 양원 합동 표결에 부치거나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된다. 시라크 대통령과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모두 오는 9월 또는 10월쯤 열리게될 국민투표를 지지하고 있다. 파리 AFP 연합
  • [의열독립투쟁] (14)김시현 의사

    살아 생전 24년을 감옥살이한 투사가 있다.36세에 독립운동에 발을 디딘 후,광복에 이르기까지 26년간 일곱 차례나 일제 경찰에 붙잡혀 16년을 감옥에서 보냈고,광복 이후 20년동안 8년을 또 투옥된 것이다. 독립운동에 첫 발을디딘 후,47년의 절반을 넘는 24년을 감옥에서 보낸 인물이 있으니,그가 바로김시현(金始顯)의사다. 김 의사는 188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김 의사를 기억하는 안동 사람들은 먼저 그의 혀짧은 연설을 알아듣느라 애쓴 이야기를 떠올리는데,이는 김의사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깨물며 투쟁한 데서 비롯된 일이다. 처음 김 의사의 호는 학우(鶴右)였는데 검사가 “도대체무엇을 구하려는가? 차라리 하구(何求)가 좋겠다”고 빈정대 그렇게 바꾸어썼다고 한다.29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거쳐 법학과를 만학으로 다니다가 1917년 귀국한 김 의사는 경북 상주에서 3·1의거 와중에일경에 체포된 후 본격적인 항일역정에 접어들었다. 이 사건 직후 상하이로망명했다가 지린(吉林)으로 가서 의열단에 참여해 자금과 단원모집을 위해국내로 침투하였다.이로부터 그의 국내 침투와 피체,망명은 쉼없이 반복되었다. 거사를 벌이고, 체포되고, 출옥하면 곧바로 망명하여 다시 의거를 일으키는 연속된 행위를 해방을 맞는 날까지 마치 시계바늘 돌듯 계속한 것이다. 1920년 9월경 의열단의 제1차 국내폭탄반입에 가담했다가 대구에서 체포된그는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출옥하자마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이 회의장에서 김 의사는 평생의 동지요,부부가 될신여성 권애라(權愛羅·73년 작고·건국훈장 애국장)를 만났다. 그의 본부인이 고향의 집을 지키고 있었지만(본부인은 1930년 사망) 상하이로 돌아온 뒤14살 연하의 권애라와 결혼했다. 1897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한 권애라는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다니면서 3·1의거에 참가,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그후 이화학당을 졸업한 권애라는 상하이 애국부인회에서 활약하는 등끊임없이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다가 신징(新京)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1923년 2월 독립운동사상 최대 대규모의 무기밀반입 거사가 있었다.의열단이 국내에 아지트를 만든 뒤 대규모 투쟁을 벌이기 위해 많은 양의 폭탄과무기를 국내로 수송한 공작이었다.1923년 2월초 김 의사는 중국 톈진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다량의 폭탄과 무기 및 ‘조선혁명선언’,‘조선관공리에게’라는 선전문서를 인수했다.“동포들에게 설날 떡을 선물한다”고 표현한 그는 평소 포섭해둔 황옥(黃鈺) 경부(警部)를 동반,안동현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한 뒤 밀고자가 생겨 관련자들이 속속 체포되었고 김 의사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1930년대 김 의사의 활동은 군사간부학교 학생모집과 배신자 처단,투옥생활의 연속이었다.1929년 출옥후 곧바로 지린으로 망명한 김 의사는 그곳에서 독립군양성소 설립을 추진하다가 중국관헌에게 체포돼 3개월 동안 고초를 겪고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1932년 의열단지도부와 재결합하였다. 마침 의열단은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초급장교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는 베이징지역에서 학생모집 활동을 하는 한편 노을룡(盧乙龍)과 함께 한삭평(韓朔平)이라는 배신자를 처단하러 나섰다.이 의거로 체포된 그는 살인미수혐의로 1935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9년 9월 출옥후 이듬해 4월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40년대에도 그는 역시 항일투쟁과 옥중생활로 보냈다.1941년에 국내와 베이징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일본영사관 구치감에서 약 1년간 미결수로 생활했다.경성헌병대로 이감됐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또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하였고,항일민족전선군을 조직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그러다가1944년 베이징헌병대에 다시 체포당한 그는 1년간 수감생활을 보내다가 1945년 서울로 이송되었고,해방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50년 5·10선거에서 민의원에 당선(안동 갑구)되어 정치활동을 펴면서 혁명가로서 그의 면모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새롭게 타올랐다.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그러나 1952년 1월 절대 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민족자결단·백골단 등 폭력조직과 관제 데모대를 동원,연일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7월에 국회의원을 연금시키고 테러를 벌이면서 이미 부결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끝내 통과시켰다.이승만의 이러한 행위가 전개되는 와중에 김 의사는 동지 유시태(柳時泰)와 함께 이승만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 거사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4·19혁명으로 석방되었으나 1966년에 서거,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김 의사는 ‘3년 이상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자는 포상받을 수 없다’는규정 때문에 독립유공 공적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김 의사는 아내 권애라를 평생토록 ‘동지’라고 불렀다.마지막 가는 길에도 그는 아내에게 “권 동지,미안하오.내가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남은 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주오”라는 말을 남겼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 *김시현 의사 후손근황과 기념사업 김시현 의사는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김 의사의 부친은 구한말의병활동을 하였으며, 둘째 동생 정현(禎顯·건국훈장 애족장)씨는 중국에서독립운동을 하다가 관동군에게 처형돼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다. 김 의사는 항일동지이자부인인 권애라 여사 사이에서 일점 혈육을 남겼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살고 있는 김 의사의 외아들 봉년(峯年·77)씨는 1922년 중국에서 태어났다.중국 옌지(延吉)에서 농업학교를,옌안(延安)에서 항일정치군사학교를 졸업한 봉년씨는 해방후 고향에서 면의원을 역임하였으며,대한중석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지금은 은퇴했다.2남2녀.장남 우일(宇鎰·40),차남 홍일(弘鎰)씨는 모두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편 김 의사는 경북 예천 선영에 묘소가 마련돼 있을 뿐 뚜렷한 독립운동공적에도 불구하고 서훈은 물론 추모단체나 기념물 하나 없다. 이는 김 의사가 1954년 1월 이승만 전대통령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된 탓이다. 봉년씨는 “부친의 이승만 전대통령 암살미수사건 관련부분은 당국으로부터 특별사면을받은 만큼 원인무효가 됐다고 본다”며 “그동안 보훈처·청와대 등에 진정해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어 현재 서울 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해놓은상태”라고 밝혔다. 봉년씨는 또 “1923년 봄 의열단원들이 일제통치기관 폭파,일본인 요인처단을 목적으로 폭탄을 밀반입하다 적발된, 소위 ‘황옥 경부사건’은 주모자가부친이므로 ‘김시현의사사건’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문명자 회고록] 비화 3공의 실세들(3)성판

    5·16직후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63년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직에 있던이후락(李厚洛)을 나는 공식석상에서 몇차례 만난 적이 있다.그런데 이후락에 대해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사람은 정일권 후임으로 63년부터 주미대사로 일했던 김정렬(金貞烈·전총리)이었다.그는 은퇴후 서울에서만났을 때 이런 말까지 했다. “문 기자,이후락이 같이 교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 없을 거요.이후락과 김형욱이란 악당 손에 박 정권은 결국 몰락하고 말거야.3선개헌때 우리 공화당 의원들이 그 두사람 손에 어떻게 끌려갔는지 아시오? 깜깜한 어둠속에 앞 사람 허리띠를 붙잡고 소경처럼 질질 끌려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끌려간 곳이 제3별관(현 대한매일 주차장 자리)이야.가보니 촛불 몇개 켜놓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이효상 국회의장이 시간을 끈다고 장경순(張坰淳·당시 국회부의장)이가 이 의장 손에서 의사봉을 확 뺏더니 “왜 이렇게지체해요? 이건 이렇게 때리는 겁니다”하면서 땅땅 때리는데,개헌안 통과시키는데 1분도 안 걸렸어요.모두가 화적단같은 사람들이야.문 기자,내가 죽은 후에 언젠가 이것만은 역사에 밝혀주시오” “대사님,그러게 5·16 나고 나서 공화당 사전조직 의혹이다 뭐다 해서 모두들 들고 일어나 공화당 해체하라고까지 하는 판국에 무엇 때문에 공화당에 참여하셨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5·16이 났을 때 내무부장관(4.19 당시 법무부장관)으로 있던 홍진기(洪璡基·전 중앙일보 회장·작고)가 발포책임자의한 사람으로 잡혀들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었거든.그런데 홍진기 하고 나하고는 일제 때부터 절친한 사이로 자유당때 각료도 같이 했고 해서 인간적으로 몰라라 할 수 없는 관계였어요.그런 판에 하루는 박 의장(박정희)이 나를 부르더니 ‘공화당 의장을 좀 맡으라’고 하더구만.그래서 나도 ‘부탁이 하나 있다.공화당에 갈테니 홍진기 좀 풀어달라’고 했지.나는 결국홍진기 살리려고 공화당에 간거야” 김정렬은 이후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이후락이는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에 대위로 시작한 사람이오.그보다 나이도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말이오.해방직후 귀국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은 모두들 군사영어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를 수료하면 일본군 시절의 계급을 참작해서 국군 장교로 임관시켰거든.그런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거야.하도 우기니까 미군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사실상 그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측과 거래가 있었겠지만…” 공화당 정책위원장 박준규(朴浚圭·현 국회의장)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5·16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 나가더구만” 이때 이후락이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CIA의 뒷받침 때문이었다.민주당 정권에서 장면(張勉)의 비서를 지낸 선우종원(鮮于宗源·변호사)은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당 정권때 이후락이가 중앙정보부의 전신이라 할 ‘정보조사국’을만들었다.당초 정보조사국 책임자로 이후락이가 추천됐을 때 여러 사람이 안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후락이가 맡게 된 것을 보니 CIA 한국지부에서 그를민 것 같았다” 사실 이후락은 5·16 이후 CIA가 박정희 주변에 깊숙이 박아놓은 첩자였다고 할 수 있다.그는 최고회의 공보실장 시절부터 최고회의 정보를 미군측에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미국으로서는 창군 초기부터 내내 미국 정보기관의 끄나풀이었던 이후락을 좌익전력을 가진 박정희 옆에 붙여 놓았으니까 박정희에 대해 자신만만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박정희가 일방적으로 감시만 당했던 것은 아니었다.박정희는 박정희대로 이후락 같은 미국의 끄나풀을 자기 곁에 둠으로써 오히려 그를 자신이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방편으로 써먹었던 것이다. 63년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이후락의 이른바 ‘떡고물’ 정치가본격화됐다.그것은 비단 국내에서만이 아니었다.이후락은 자신의 아들·딸·사위 등을 모두 미국에 보내놓고 미국에서조차 축재에 열을 올렸다.사위등은LA 현지에 은행을 설립해 주주로 참여했고 교포방송인 LA방송국을 설립하기도 했다.이같은 재력을 기반으로 그의 사위는 LA한인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는 또 LA의 부자동네인 윌셔 브루버드에 당시 돈으로 3,000만 달러를 주고 빌딩을 사들여 이것을 한국교포들에게 세를 놓았다.당시 교포들 사이에“이 빌딩은 실은 이후락 것이다”하는 소문이 나 현지의 민주화운동 그룹들이 “이후락의 부정부패와 해외 재산도피의 산 증거인 문제의 건물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훗날 코리아게이트 조사과정에서 FBI가 조사에 들어갔을 때 그는 빌딩을 매각한 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70년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이후락은 그 해 12월 정보 무경험자인 사위를 중정 국제담당 2국장으로 앉히고 둘째아들도 자신의 비서로 임명해 72년 남북회담 당시 모두 북한까지 자신을 수행토록 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알림] 문명자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연재물 제목을 문명자회고록 발췌 ‘비화,3공의 실세들’로 바꿉니다.이는 본지가 문씨의 회고록 중 일부를뽑아 정리,게재하기 때문입니다.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29)김지하 담시 五賊(상)

    1970년 3월17일,한강 강변로에서 묘령의 한 여인이 피살 당했다.정인숙이라고 밝혀진 이 여인의 죽음은 한국 정치사상 매우 드문 스캔들로 5·16 군부집권층을 괴롭혔다.대학가에서는 5월 축제 때 유행가 ‘눈물의 씨앗’ 가사를 바꾼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000의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영원히 우리만이 알았을 것을/죽고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승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풍자노래가 즐겨 불렸다. 이 사건에 대하여 당시 신민당 김상현 의원(현 국민회의)은 국회에서 정여인이 장관급 보증의 회수여권을 소지하게 된 경위,그녀가 접촉했다는 26명의 고관 명단,외화 소지 경위 등에 대한 규명을 요구했다.(이상 김삼웅 ‘한국 필화사’ 참고) 세상은 흉흉할 때였다.대통령 3선 개헌안을 1969년 9월14일 새벽 2시27분국회사상 최단시간인 단 6분만에 통과시킨 뒤인데다 33명의 목숨을 앗아간와우아파트 붕괴사건(1970년 4월8일)까지 있었던 터라 야당으로서는 호기였다. 이해 6월1일자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제40호는 정당사상 처음으로 1면 전면에다 시를 한 편 실었다.바로 김지하의 ‘오적’이었다.이에 그치지않고 ‘민주전선’은 2∼3면에다 예의 정인숙 사건 관련 및 ‘현대판 아방궁 도둑촌’문제 등에 대한 국회발언 초록까지 게재했다.바로 이튿날인 6월2일 새벽 1시50분 경 관계당국은 신민당사 수색과기관지 10만700부를 압수당했고,‘민주전선’ 출판국장은 연행 구속 되었다.세칭 ‘오적’사건은 이렇게터졌다. 이때 김지하 시인은 어디 있었을까. 김 시인은 이미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나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었다.어찌된 연고인가 하면 ‘오적’이 실렸던 ‘사상계’ 1970년 5월호는 통상 4월 중순이면 나오는데,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널리 애독되어 5,000부가 매진되었고,이 시의 통쾌함이 국회회에서까지 거론되자 관계기관은 얼른 시인을 연행해 갔다.당국은 발행인 부완혁과 잡지를 더 이상 시판않겠다는 조건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으며,김 시인도 일단 석방되었다. 그의 석방을 가장 반긴 것은‘사상계’ 편집책임자 김승균(현 남북 민간교류 협의회 이사장)이었다.문제가 되면 편집 책임자가 함께 구속될 것은 뻔했기에 김승균 편집장은 얼른 김 시인을 현 세종문화회관 뒷골목 어느 여관으로 피신케 했다가 곧 서울대 병원에 입원시켰던 것이다.김 시인의 보호자로병원에 등록해 두고 자주 오갔던 김승균은 어느날 텅 빈 병실만 보게 되었고,드디어 그와 발행인 부완혁도 연행,‘오적’은 법정에 서게 되었다.수사 당국은 시인과 발행인 및 편집책임자를 입건한다는 수사의 형평을 맞추고자 당시 신민당 유진산(기관지 발행인)총재도 조사하여 ‘오적’사건은 다섯 고난자를 만들었다는 농담도 나왔다. 군부독재 시기 최대의 저항시인으로 필화문학의 상징이된 김지하 시인이 ‘오적’을 쓰게된 배경은 그 자신의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겠지”(솔 출판사 전집 자료편)란 함축적인 의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군부독재에 의한 개발정책은 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시켜 ‘동빙고동 도둑촌’이란 술어는 이미 유행하고 있었다.1970년 3월 ‘사상계’ 편집책임을 맡게된 김승균은 당시 진보적인 문인들과 밀접한 사이로 4월호에다 ‘4·19혁명과 한국문학’이란 특집 좌담(참석자 구중서·김윤식·김현)을 마련하여 리얼리즘논쟁을 유발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4·19직후인 재학시절에 민족통일 전국 학생연맹 연락조직위원장직을맡았던 운동권 출신이라 진작부터 김지하 시인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김승균 편집장은 김 시인에게 즉각 오적촌에 대한 장시를 청탁했고,이 천재시인은 불과 며칠만에 담시(譚詩) ‘오적’을 써왔다.단숨에 읽고난 편집장은 너무 기쁜 한편 행여 잡지사 내에서 게재 반대 의견이 나올 걸 염려해 슬그머니 부완혁 발행인 책상에다 올려두고 “아직 못 읽어 봤는데 먼저 보시고 말씀 해 주십시오”라고 시침을 뗐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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