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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30)

    ◆前한성은행장 韓相龍2,3년전 평소 알고 지내는 고서점에서 일제말기에 출간된‘창남수장(暢楠壽章)’이라는 문집 한 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문집 이름에 ‘수(壽)’자가 들어간 것은 흔히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일제 당시 환갑잔치에 문집까지 낼 정도라면 고관대작이나 후학이 많은 거유(巨儒) 정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문집 역시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첫 장을 넘겨 보니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축하 휘호가 나타나더니 뒤 이어 일본인 육군대장의 글씨와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閔丙奭)의 서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다시 축하시 모음란에는 당대의 명사들이자 유명한 친일파들이 대거 운집해있었다.황족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좌옹 윤치호(尹致昊)·후작 이항구(李恒九·李完用 아들)·중추원 참의 김사연(金思演)·은행가 민규식(閔奎植)등등.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위해 시를 보낼 정도였다면 그의 수준·성향도 짐작이 간다.알고 보니 문집의 주인공은 일제당시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1880∼?)이었다. 한때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던 한상룡은 1880년 규장각 부제학 출신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17세때 관립외국어학교 입학을 계기로 신학문에 눈뜬 그는 미국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으나 외숙 이윤용(李允用)의 주선으로 대신 사립 성성(成城)학교에 입학(1899년)하면서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이듬해 그는 한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장티프스로 학업을중단하고 1901년 귀국하였다.귀국후 그는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이 해 경부철도 기공식에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의영어통역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공직(평식원 총무과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총무 취임을 계기로 금융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이 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당국에 로비를 하여 당시 조선인 합방공로자에게 지급한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흡수,자본금을 300만원으로 10배나 증자하면서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3·1의거 당시 민중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이 무렵 그는 40여년 동안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본 재계의 거두로 군림해온 시부자와(澁澤榮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서는 이토(伊藤博文),경제에서는 시부자와,건설에서는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目賀田種太郞)를 ‘조선에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3대 은인’이라고 하면서,특히 시부자와에 대해서는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공전 절후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그는 시부자와의 좌우명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까지 했다.그가 대부분의 친일파들 처럼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실업계로 진출한 것은 시부자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매국에 가담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를 토대로 발전을 도모한 한성은행은 1923년 그가 두취(頭取,현 은행장)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관동대지진의 여파에 이어 영업부진·경영악화가 계속됐다.이듬해 총독부는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28년 마침내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의 한성은행인가,한성은행의 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한성은행에서 나고,자라고 그로써 거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한성은행을 잃게 되자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식민지 예속자본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한성은행 재직시절 금융계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조선내 각종 기업·회사 설립에 중개자로 참여하였는데 실권은 전혀 가지지 못한채 명목상의 감투만 여럿 쓰고 있었다.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처럼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다고 평가했다.금융계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의 경영권 양도와 뒤이어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되면서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한편 그의 친일이 겉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선 그는 조선에 업적(?)을 남긴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하였다. 첫 사업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의 동상을 제작,1929년 10월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이 해 12월에는 이토(伊藤博文)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기도 했다.33년 2월에는 평소 자신이 숭배해온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12월 장충단에서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또 35년 5월에는 ‘조선개화의 은인이자 일한합병의 공로자’인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총독부 청사내홀 우측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이듬해 2월 소위 ‘2·26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 전조선총독이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39년 4월 그의 동상을 총독부 청사내 홀 좌측에 건립하였다.이밖에도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정무총감 출신의 시모오카(下岡忠治) 등의 동상건립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업적 찬양에 열을 올렸다. 한편 한상룡이 군국주의 일제통치하에서 40여년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한성은행에서 물러난 후 그는 군부관련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조선내 각지를 돌면서 강연·담화 등을 통해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였다. 또 33년 4월 경성국방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설립준비위원 및 감사(34.4),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34.12),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35.4)등을 맡아 활동하였다.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근무기간 37.7.1∼40.7.1)으로 임명돼 군사령부를 방문,조선실업구락부 및 자신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당시 그는 후방 전쟁지원단체인 경기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으로 있으면서 ‘애국금차회’ 창립을 주도,조선여성들에게 전쟁물자로 노리개 금붙이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일제의 인력·물자동원이 거세지자 그는 이 역시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였다. 특히 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라는 글에서 “반도에 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 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며 조선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7년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첫 임명된 이래 해방 때까지 그는 만18년 4개월동안 줄곧 중추원의 참의·고문을 지냈다.해방 1년전인 44년 4월 그는 윤치호·박중양(朴重陽·중추원 참의)·이진호(李軫鎬·총독부학무국장)·이기용(李琦鎔·황족·백작) 등과 함께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는데 마지막까지 일제에 협력한 결과이자 끝까지 일제에 끌려다닌 형상이라고도 할 수있겠다. 그는 한성은행 경영권 양도를 비롯해 일제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의도적 배제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변신과 일관된 친일노선으로 버텨냈다.한마디로 일제하 그의 생존논리는 철저한 예속과 굴종이었다.그를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해방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鄭雲鉉 jwh59@
  • 콜롬비아,지진 피해지역 경제 비상사태

    ┑보고타 AFP DPA 연합┑콜롬비아 군대가 지진 피해지역의 질서를 회복시키고 있는 가운데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대통령은 곧 아르메니아시를 포함한 콜롬비아 지진 피해지역에 경제비상사태를 선포할 계획이라고 언론들이 28일보도했다. 파스트라나 대통령은 29일 국무회의에서 경제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경제비상사태하에서 정부는 의회의 동의없이 예산지출과 관련된 긴급 조치들을 취할 수 있다. 지난 25일 콜롬비아를 강타한 리히터규모 6.0의 대지진으로 지금까지 모두900구의 사체가 발굴됐으며 사망자수는 2000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부상자는 3000여명에 이르며 집을 잃은 이재민은 25만여명으로 추산된다.
  • 외언내언-유언비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악성 유언비어가 최근 영남지역에 떠돌고 있다 한다.그 내용은 ‘전라도에는 실업자가 없고 경상도에만 실업자가 득실거린다’‘빅딜은 경상도 기업을 죽이기 위해 추진됐다’ ‘구미공장(OB맥주)을 뜯어다 광주로 옮기려 하고 있다’ 등 경제상황과 실업률에 관한 것이다. 유언비어의 사전적 풀이는 ‘도무지 근거 없이 널리 퍼진 소문’이다.이에대한 사람들의 관점은 대체로 두가지로 나뉜다.하나는 유언비어를 옛 공산권이나 제3세계 국가에서처럼 권위주의적 정권의 폭압 아래 정상적인 언론이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틈새를 채우는 대안으로 보는 긍정적 태도이다.다른하나는 유언비어를 악의적으로 조작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병리현상으로보는 부정적 태도이다. 유언비어의 영역이 축소돼 학문적 연구작업마저 60년대 이전에 거의 중단된 서구사회와 달리 우리 사회에서 유언비어는 사회학자는 물론 일반인들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정경유착 사례들이나 광주사태 등 유언비어가 사실로 확인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따라서 여론정치의 일부로 유언비어가 조작된다는 부정적 측면은 간과돼 왔다.특별한 목적을 가진 선전가나 정치가들에 의해 여론조작 수단이나 선전 수단으로 역이용된다는 점은 무시된 것이다. 그러나 악의적으로 조작된 유언비어의 폐해도 우리는 뼈아프게 체험했다.‘조센진이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로 인해 6,000명이 넘는 재일한국인들이학살당한 관동대지진 이후 고베지진,옴진리교사건 등 일본에서 큰 사건이 터질때 마다 재일동포들을 위협하는 헛소문이 그것이다.지난 97년 경기 북부의 한 신용금고가 부도설에 휘말려 대규모 인출사태로 곤혹을 치른 것처럼 국제통화기금 사태 이후 기업정보의 탈을 쓴 유언비어로 엉뚱한 피해를 입을까 전전긍긍하는 기업들도 늘어났다. 권위주의적 정권 치하도 아니고 제도권 언론이 제구실을 못하는 때도 아닌지금 영남지역에서 유포되고 있는 유언비어는 괴기스럽다.괴기스러움의 뿌리는 경제난국에 가 닿아있는데 지역감정은 그 극복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오히려 온국민이 힘을 합쳐 사회안정과 경제회생을 위해 나서야할 때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파괴적이며 비생산적인 유언비어는 나라의 근본을 흔들악령이다.마산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이 이 악령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 ‘정신대문제 해결에 써 달라’/日 할머니 500만엔 기탁

    일본의 한 할머니가 정신대문제를 다루는 데 써달라며 거금 500만엔(한화 5,300만원)을 기탁해 화제. 주인공은 일본 고베에 살고 있는 단가시인이자 인권운동가인 미키하라 지카코씨(75). 9일 尹貞玉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에 따르면 미키하라씨는 지난달 방일한 자신에게 “92년 尹대표의 정신대에 관한 오사카 강연을 듣고 기금을 내려고 결심했다”며 돈을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미키하라씨는 95년 한신(阪神)대지진 때 집이 무너져 상당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기금을 냈으며 특히 자신에 관해 일절 밝히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尹씨는 밝혔다.
  • 별똥별 잔치(外言內言)

    별에 얽힌 일화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지난 82년 태양계의 9개 행성이 집결하는 우주현상이 일어났을때 일부 예언자들은 전염병 창궐, 기상이변, 대지진등 지구 최후의 날로 예상되는 경고와 예언을 남발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당기관지 인민일보가 나서 ‘천체현상과 천재(天災)사이에는 전혀 인과관계가 없다’는 설득전을 벌이기도 했다. 인도에서도 힌두교도들이 아그니(火神)에게 예배하는 의식을 준비하는가 하면 겁에 질린 캘커타 시민들은 교외의 사원으로 몰려들었다고 당시 외신은 전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별은 사람의 탄생과 죽음을 예고하여 동방박사는 동쪽의 별을 보고 예수 강탄(降誕)을 알아냈는가 하면 영웅의 죽음을 ‘큰별이 졌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27세에 요절한 시인 李箱은 일찍이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수 없으며’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일 뿐이라고 쓰고 있다. 실제로 현대인들에게 별은 더이상 낭만이나 신비의 존재는 아니지만 당시의 그로서는 우주는 얼마든지 유영할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을 상상할수 없었을 것이다. 18일 새벽 4시경 사자자리 근처에서 시간당 약 2,000개에서 1만개의 별똥별이 떨어지는 장관이 연출되리라고 한다. 이 별똥별 소나기는 일종의 유성우(流星雨)로 33년마다 지구를 찾아오는 템펠 터틀이라는 혜성때문이라는 것이다. 유성우란 문자 그대로 혜성이 태양과 가까운 지점을 통과할 때 우주공간에 떠돌던 수많은 먼지나 부스러기들이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장렬한 산화로 빛을 내는 현상이다. 지난 66년에는 1초당 40개 이상의 별똥별이 쏟아져 내리면서 ‘하늘이 온통 불붙는 듯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우주개발의 초창기여서 별다른 영향이 없었지만 요즘은 우주공간에 비싼 돈을 들인 위성들이 떠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유성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논의가 분분한 모양이다. 이제 별을 보고 노래하던 때는 지났다. 우주 쓰레기,우주 먼지로 인해 우리는 우주환경을 걱정하는 첨단과학시대에 살고 있다. 우주 저편으로 번져갈 별똥별 쇼는 아마도 이 시대의 새로운 슈퍼 불꽃놀이가 될것이다.
  • 親日의 군상:9/시인 金東煥(정직한 역사 되찾기)

    ◎名詩 남긴 민족 시인 끝내 변절의 길로/“聖戰 나가 죽는것이 충성의 길” 전국 돌며 강연회/‘삼천리’ 등 각종 친일매체에 논설·평론 게재 앞장/1941년 임전대책 협의회 결성 주도… ‘황민화’ 실천/해방후 반민특위에 자수/6·25때 납북후 행방불명/3男 부친 행적 대신 사죄 “아하,無事히 건넜을까/이 한밤에 男便은/豆滿江을 탈없이 건넜을까?//저리 국경 강안을 경비하는/외투 쓴 검은 巡査가/왔다- 갔다-/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소곰실이 密輸出馬車를 띄워놓고/밤새가며 속태이는 젊은 아낙네/물레 젓던 손도 脈이 풀려서/파!하고 붓는 漁油등잔만 바라본다,/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국경의 밤’ 제1부 첫머리에서) 새벽마다/고요히 꿈길을 밟고와서/머리마테 찬물을 솨- 퍼붓고는/그만 가슴을 드듸면서 멀니 사라지는 北靑물장수.//물에 저즌 꿈이/北靑물장수를 부르면/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온 자최도 업시 다시 사라진다.//날마다 아츰마다 기대려지는/北靑물장수.(‘北靑물장수’ 전문)‘시인은 가도 시는 영원한가?’ 낯익은 두 편의 시를 보면서 우리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한 시인을 그리워하게 된다.파인(巴人) 金東煥(1901∼?,창씨명 白山靑樹).바로 그다.흔히 그를 ‘북국(北國)의 시인’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그가 함경북도 경성(鏡城)출신인데다 북방지역의 정서를 담은 시를 여럿 쓴 때문이다. ○한때 민족시인으로 각광 위에 첫번째 소개한 ‘국경의 밤’은 우리 국문학사에서 ‘최초의 장편 서사시’로 평가받고 있다.당시 북방지역 조선인들의 애환을 담은 이 시는 작품 저변에 흐르는 민족적인 색채로도 특별한 평가를 받고 있다.두번째 시 ‘북청(北靑)물장수’는 ‘북청’이란 지명을 유명하게 만들었다.당시 경성(京城·현 서울)에는 물장수를 하면서 아들이나 동생의 학비를 대는 북청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문단생활 초창기 토속적인 정서로 식민지하 조선인들의 삶과 애환을 노래한 ‘민족시인’ 김동환.일제말기 그의 변절은 이래서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김동환의 첫 출발은 신문기자였다.서울 중동중학교를 마치고 1921년 일본 동양(東洋)대학에 입학한 그는 23년 9월1일 도쿄 일대를 강타한 ‘관동(關東)대지진’이 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그는 1924년 고향 경성에서 발행되던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기자로 입사,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이 신문은 일본인이 발행하던 지방신문으로 일문판(日文版)과 조선문판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여기서 조선문판 기자로 있었다. 입사 한 달만에 그는 동아일보로 일자리를 옮겼는데 여기서도 1년을 채우지 못했다.당시 좌익기자들이 주도하던 파업에 참여했다가 결국은 그도 사표를 내고 동아일보를 떠나야만 했다.이후 시대일보·중외일보를 거쳐 27년 5월 조선일보에 자리를 잡았다.그의 5년 남짓한 신문기자 생활은 조선일보에서 막을 내렸다. 그는 신문기자보다는 시인·문필가로 더 유명하다.그의 문단활동은 신문기자 생활보다도 앞선다.24년 5월 梁柱東의 추천으로 ‘금성(金星)’지에 ‘적성(赤星)을 손가락질 하며’를 발표하면서 그는 문단에 데뷔하였다.대표작중의 하나인 ‘북청물장수’는 그가 동아일보 입사 1주일만(24년 10월13일)에 동아일보 지면에 발표한 것이다.첫 시집 ‘국경의 밤’은 이듬해 3월 한성도서(漢城圖書)에서 출간됐다.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그의 시작활동은 40년대 초반까지 계속됐다. 신문기자,시인에 이어 그를 상징하는 또 하나는 잡지 ‘삼천리(三千里)’발행인(사장).‘삼천리’는 1929년 6월에 창간하여 42년 1월까지 통권 152호를 발행한 월간 종합잡지.(42년 5월1일자부터 ‘대동아(大東亞)’로 바뀜) ○中日전쟁 계기 친일 선회 ‘삼천리’ 창간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 한토막이 있다.원래 그는 자본가는 아니었다.그가 이 잡지를 창간한 밑천은 ‘촌지’였다.당시 그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차장)로 총독부를 출입하고 있었다.그해 가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출입기자들에게 300원씩(액수에 대해선 일부 주장이 엇갈림) ‘촌지’를 돌렸는데 당시 쌀 한가마 13원 하던 시절이니 꽤 큰 돈이었다.대부분의 기자들은 ‘공돈’이라며 옷을 사 입거나 유흥비로 날렸으나 그는 이 돈을 ‘사업자금’으로 활용한 셈. 초창기 ‘삼천리’는 우리 국토를 상징하는 제호(題號)만큼이나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잡지였다.당대의 거물 문사·논객들이 단골필자로 참여하여 조선의 역사·문화와 당대의 시대상을 주요 테마로 다루곤 했다.‘삼천리’는 당시 민간신문사들이 발행하던 종합잡지 ‘신동아’‘조광(朝光)’ 등과 어깨를 겨룰만큼 인기있는 잡지였다. 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잡지 발행 이외에도 신문과 다른 잡지 기고를 통해 왕성한 문필활동을 했다.그러나 그에게도 이른바 ‘시국(時局)’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을 분수령으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전개되자 여타 문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 친일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시국은 점점 긴장하여 가고 장기전(長期戰)의 체제는 점점 굳어가고,그리하여 국민총동원의 추(秋) 다다랐도다.우리는 일체의 힘을 합하여,‘전쟁에 이깁시다.국책(國策)의 선(線)에 연(沿)하여 일체의 동작을 합시다’…” ○학병 참가 촉구 詩 발표 38년 5월 ‘삼천리’ 창간 10주년호 ‘편집후기’에서 그는 자신의 향후 친일노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다.같은 호 기명칼럼 ‘시평(時評)’(‘권문세가의 반성을 촉(促)함’)에서 그는 “…이제 제국은 아세아의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대지(對支)응징의 전쟁을 기(起)하고 있다.…자식과 조카(侄)를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군문(軍門)에 보내야할 것”이라며 지원병으로 나갈것을 독려하였다.그가 친일로 전향한 배경에는 ‘삼천리’의 재정난이 한 요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보다는 기득권 유지와 ‘대세순응주의’가 주된 요인이었다고 보여진다. 그의 친일시는 이듬해부터 노골적으로 시작된다.지원병을 찬양한 ‘1천병사(兵士)의 삼(森)’에서는 ‘저마다 폐하의 무궁한 성대(聖代)를 노래부르는 젊은 건아’로,‘고란사에서’라는 시에서는 ‘대화(大和)의 처녀가 사라져 가버린 뜰에 나홀로 서성거리며 어조영(御造營)의 망치소리에 천년 역사를 회상’하며 부여신궁(扶餘神宮) 근로봉사의 감격을 읊었다.(두 편 모두 ‘삼천리’39년12월호) 조선인 학병 동원이 시작되자 그는 ‘매일신보’에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43년 11월6일)이라는 시를 통해 ‘번듯하게 사는 길이란­ 제 목숨 나라에 바쳐,…군국(軍國)에 바칠 때일세 ’라며 ‘성전(聖戰)’에 나서라고 촉구하였다.이 밖에도 그는 각종 친일매체에 다수의 친일논설·평론 등을 남겼다. ○각종 단체서 背族행위 그의 대표적인 친일행적은 그가 주동이 돼 41년 8월25일 ‘임전대책협의회’를 발족시킨 일이다.이 단체는 임전(臨戰)체제하에서 자발적으로 황민화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조선내 친일인사를 총망라하여 구성한 단체로 발족 1개월 후인 9월에는 尹致昊 중심의 친일단체인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와 통합,‘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출발하였다.그는 이 단체의 핵심요원인 상무이사로 활동하였다.이 밖에도 그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대화동맹 위원 등을 지내면서 일제말기 친일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해방후 그는 자신의 친일행각을 뉘우치며 반민특위에 자수하였다.반민재판에서 공민권 정지 5년을선고받은 그는 6·25때 납북됐다.94년 그의 3남 英植(65)은 부친의 전기를 펴내면서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대신 사죄한 바 있다. “문인이 지켜야 할 절개에 두 가지가 있다.…믿던 부류의 사람까지 이(利)에 팔리고 지위에 움직임을 받아서 부끄러운 처신을 취한다면 대중이 그를 버릴 것이요,예술은 그를 타기(唾棄)할 것이다…”.아직 민족혼이 살아 숨쉬던 시절 그가 쓴 이 한 구절이 가슴을 치는 것은 왜일까. ◎金東煥­崔貞熙 ‘사랑의 행로’ ‘같이한 친일’/유부남­미망인의 동거/7년 산뒤 딸 둘 낳아/崔貞熙 일제말 친일 전향 巴人 金東煥과 여류소설가 崔貞熙(90년 작고)의 ‘불륜’은 한국문단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다.두 사람 모두 문인이자 일제말기 친일행적도 똑같이 남겼다. ‘시대일보’ 기자 시절인 1926년 원산(元山) 출신 신여성 申元惠(93년 작고)와 결혼한 파인은 이 사이에서 3남1녀를 두었다. 파인이 崔貞熙를 처음 만난 것은 1931년 초가을.중앙보육학교장 朴熙道(33인중 1인으로 나중에 친일로 변절함)의 취직부탁을 가지고 삼천리사를 찾아 온 崔貞熙를 파인은 당일로 ‘부인(婦人)기자’(여기자)로 채용하였다.당시 崔貞熙는 결혼한 몸이었다.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한 것은 43년초.이무렵 崔貞熙는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다.두 사람은 50년 파인이 납북될 때까지 7년간 동거하면서 두 딸을 낳았다.崔貞熙는 생전에 전 남편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파인의 호적에 올렸다가 申元惠측으로부터 피소된 적도 있다. 34년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사건’으로 9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崔貞熙.그러나 그 역시 결전부인대강연회(41년 12월27일)에 연사로 참여하는 등 일제말기 친일로 전향하였다.대표적 친일작품으로는 소설 ‘장미의 집’(‘대동아’42년 7월호),‘야국초(野菊抄)’(‘국민문학’42년 11월호),수필 ‘동아(東亞)의 새아침’(‘매일신보’42년 2월21일) 등이 있다.
  • 신안산업/철선 생산(한국경제 여기에 길이 있다)

    ◎고품질­고기술로 ‘고성장’/직원 21명 ‘초미니기업’… 매출 4년만에 9배로/원자재­환율영향없게 국산 사용.안정된 제조원가 유지/기술력­일서 첨단기술 전수 받아 세계 최고 0.08㎜에 도전/수출력­매출의 절반이상 차지.일에 독점적인 활로 개척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주)신안산업에 전화를 하면 교환원 목소리에 뒤이어 88년 서울올림픽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가 흘러나온다. 金禮式 사장(51)이 이 노래를 93년 창업때부터 회사 로고송처럼 여기는 것은 올림픽때 우리 국민이 보여줬던 저력을 가슴에 새기고 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창업 당시 4억원이었던 신안의 매출액은 지난해 36억원을 넘어서 4년만에 9배나 늘었다.IMF한파에도 아랑곳없이 올 상반기 매출도 25억원을 기록,연말까지 60억원을 무난히 달성할 전망이다.특히 수출이 매출액의 절반을 차지,30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단연 ‘금메달’감이다. IMF사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고속성장을 거듭하는 신안의 비결은 무엇일까. 총 직원 21명의 신안은 철선(鐵線)을 만드는 회사다.말이 철선이지 0.9∼0.28mm 두께가 주종이어서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유연하다.철선은 철골을 묶기도 하고 컴퓨터나 선박에 내장된 케이블을 둘러싸는 피복으로도 쓰인다. t당 30만원대의 원자재를 열처리 가공해 200만원대의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집약형 고부가가치 업종이다.바로 이 대목에서 ‘원자재’와 ‘기술’이 관건임을 알 수 있다. 金사장은 먼저 “가급적 원자재가 국산인 아이템을 고르라”고 충고한다.국산인 경우 환율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아 안정적인 제조원가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IMF이후 수입 원자재 값이 급상승,하루 아침에 부도를 맞은 업체들에게는 뼈져리게 와닿는 말이다. 신안의 경우 세계 최고 품질의 포항제철 원자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때문에 경쟁국인 중국이나 동남아 업체들보다 품질면에서 우위에 있고,환율변동에도 타격을 받지 않는다. 다음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 확보.이 부분은 신안의 성장사 자체가 그대로 대변해준다. 경영학을 전공한 金사장이 철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삼성건설 과장으로 재직하던 88년.당시 공사현장에서 쓰는 철선을 일본에서 비싼 돈에 사오는 것을 본 金사장은 기술도입 자체가 사업성공임을 확신했다.다른 업체들은 일본에서 기술전수를 꺼려 쉽게 포기한 상태였지만 金사장은 개인적으로 발이 닳게 돌아다녔고,결국 일본과 교류가 있던 인천지역 라이온스클럽을 통해 일본의 철선 제조회사 사장을 소개받았다. 극적으로 기술을 전수받은 金사장은 직접 회사를 설립,0.9㎜ 철선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金사장은 일본 정부가 95년 고베 대지진 이후 모든 건물 유리에 미세한 철선을 끼워넣도록 의무화함으로써 수요가 늘어난 점을 간파,이번에는 0.9㎜ 이하 두께의 철선 제조기술 도입을 추진했다. 결국 무료로 기술을 전수해주면 신안제품 전량을 일본업체에 고정적으로 넘기겠다는 ‘기발한’ 제안으로 기술도입에 성공하면서 수출활로 개척과 함께 고속성장을 하게 됐다. 현재 월 1,000t의 생산 능력을 가진 신안은 국내외 주문이 밀려 물건을 못댈 정도다.앞으로도 15년 이상은 이같은 추세가 이어지리라는 전망이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이번에는 세계 최고 수준인 0.08㎜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올림픽은 10년전에 끝났지만 신안의 목에 걸린 금메달은 여간해서 내려올 것 같지 않다.
  • 9월정가 대지진 예고/洪文鐘 의원 탈당 신호… 30여명 잇따를듯

    ◎한나라 과반의석 붕괴 정계개편 가속화 그동안 수면 밑에서 진행됐던 정계개편 움직임이 급류를 타는 조짐이다. ‘9월 지각변동’을 암시하는 징후들이 정치권 곳곳에서 감지된다. 여권의 야당 의원 영입과 무소속 교섭단체 구성으로 가닥이 잡혀간다. 25일 洪文鐘 의원의 한나라당 탈당이 신호탄이다. 洪의원은 “6명의 동료의원들이 조만간 한나라당을 탈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李信範 金忠一 劉容泰 李源馥 金佶煥 宋勳錫 의원 등을 아예 실명으로 거론했다.의견 조율을 마치고 ‘거사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李信範 의원은 공공연하게 “20∼30명 의원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할 것”이라며 분위기를 잡고 있다. 당내 ‘새로운 정치’를 추구했던 희망연대 소속이 적지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도 金大中 대통령의 정계개편 추진 선언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영입 작업을 시작했다. 한나라당 8·31 전당대회를 전후로 10∼15명선의 의원 영입을 자신하는 분위기다. 수도권 및 강원 일부 의원들이 주요 대상이다. 한나라당 탈당 의원을 주축으로 국민신당이 가세하는 예상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 탈당이 곧바로 여권행을 뜻하지는 않는다. 중간 정거장으로서 ‘무소속 교섭단체’나 ‘제4의 교섭단체’결성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한나라당 탈당 추진 의원들은 “정치 쇄신을 위해 제3의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걸고 있다. 내심 섣부른 입당이 배신자로 각인될 수 있다는 우려와 격변기를 맞아 일정 기간의 관망 기간이 필요한 탓이다. 국민신당 해체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총장직을 사퇴한 朴範珍 의원을 비롯,金學元 張乙炳 李龍三 元裕哲 의원 등 5명이 조만간 국민회의에 입당할 것이란 전망이다. 하지만 朴·張 두 의원을 제외하고 무소속 잔류를 선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徐錫宰 韓利憲 의원 등 PK(부산·경남) 출신들은 무소속 잔류로 기울고 있다. 한나라당 탈당 의원들과 무소속 연대에 전격 합의할 가능성도 적지않다. 야권 분열이나 여권 영입 작업이 ‘암초’에 걸리는 상황도 상정할 수 있다. 한나라당이 전당대회 이후 내부 단속과 함께 당체제 정비를 가속화하는 경우다. 여권의 ‘의원 빼가기’를 이유로 강도 높은 대여 투쟁을 전개할 가능성이 높다. 9월 정계개편 정국이 정기국회를 공전으로 몰고갈 개연성도 만만치 않다. 정치권은 정계개편의 ‘뇌관’이 언제나 터질지 숨죽이며 주시하고 있다.
  • 6·4 지방선거­정계개편 전망/野의원 15∼20명 이탈 與大될듯

    ◎한나라 비교적 善防… 分黨論 약화/虛舟系 TK黨 출범땐 準與색채로 6·4 지방선거는 결국 여당쪽에 ‘힘’을 실어줬다.이 힘은 ‘6·25 이래의 최대 국난’으로 표현되는 현 경제위기 상황을 타개해야한다는 국민적 열망의 결집이었다. 여권의 승리가 예고되자 “큰 틀 안에서 정치권의 구조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여권 최고위층은 틈틈이 “정치개혁만이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진행해온 경제개혁의 고삐를 당길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정계의 대지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정계개편의 서막은 ‘의원들의 대이동’이라는 형태로 시작될 전망이다.야권 특히 한나라당 의원들의 대이동은 정치권에 여대야소(與大野小)의 구도가 탄생됨을 의미한다.여대야소로의 재편은 여권의 수도권 압승에 따라 예상외로 빨라질것으로 보인다. 여권의 분석은 서울·경기·강원지역에서 15명∼20명 정도의 야당 의원이 여권으로 말을 갈아탈 것으로 본다.인천·경기지사 선거에서 여권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 지역 상당수의 야권 인사들이 벌써부터 크게 동요했다는 지적이다.경기지역은 야당의원 22명 가운데 10명,인천지역은 야당의원 9명 가운데 5명이 여권과의 물밑 접촉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신당은 오는 7월 재·보궐선거에 앞서 당 해체가 가속화될 것으로 관측된다.여권은 국민회의와의 통합 가능성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한나라당은 소속 의원들이 대거 이탈하면 분당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정계에서는 내다보고 있다.金潤煥 부총재를 정점으로 하는 TK지역 의원들이 떨어져 나와 ‘TK신당’의 길을 모색할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그러나 정권교체 이후 구심점을 잃고 있는 민주계가 국민회의와의 정파별 연합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권의 구상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인상이다.국민회의­자민련­TK신당 3자가 연립해 정립(鼎立)하고 이에 한나라당이 대립하는 구도다.TK신당은 출현 시기가 매우 불투명하다. 신당의 출현 시기는 한나라당 내부상황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한나라당의 내부 갈등이 심화될수록,지도부 개편 요구의 강도가 높을수록 예상보다 빨리 탄생할 것이다.다만 여권은 ‘대연정(大聯政)구상’을 무리하게 태동시키지는 않되 올해안에는 정계개편을 끝내겠다는 의지다. 국민회의는 지방선거의 승리로 趙世衡 총재권한대행의 안정체제가 당분간 구축될 전망이다.‘총재대행’에서 명실상부한 당 2인자로서의 ‘대표’체제가 예상된다.
  • 미즈시마 아사호 와세다大 교수 아사히신문 칼럼(해외논단)

    ◎日 평화활동 확대할때 일본정부는 일·미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의 실행을 위해 관련법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으나 지금 일본이 해야할 일은 군사활동의 확대가 아니라 평화활동의 확대라고 일본 와세다대학의 미즈시마 아사호 교수(헌법학 전공)가 주장했다.그는 군사면이 강조된 일·미 안보조약을 민주주의와 기본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미우호조약’으로 바꾸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아사히신문에 실린 그의 칼럼을 요약한다. 입법작업의 기본원칙은 명확한 법률용어를 사용하여 오해가 없도록 해야하는 것이다.그러나 일본정부가 일·미 방위협력지침의 실행을 위해 국회에 제출한 ‘주변사태 법안’은(해외파병과 무력사용 등을 금지한) 헌법9조와의 저촉문제 이전에 여러가지 법률제정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日·美 방위협력지침의 문제 먼저 법안 제목인 ‘주변사태’의 개념자체가 매우 애매하다.그것은 지리적 개념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태의 규모와 상황 등에 따라 결정되는 개념이라고생각할 수 밖에 없다.일본정부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고 하는데는 특정 지역·해역을 정해 미군과의 협력의 장을 제한하는 표현을 가능한한 피하려고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정부내에는 ‘주변’을 극동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그러나 ‘적’의 범위를 분명히 하지않음르로써 그 애매함이 억지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주변사태 개념이 미국과의 군사협력 범위를 넓히는 공간적 개념뿐만 아니라 어느 의미의 시간적 개념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현재의 자위대법은 유사(有事)사태를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과 그러한 위협이 있을때로 규정하고 일·미 공동작전도 일본과 주일 미군기지에 대한 무력공격이 있을때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나 새로운 법안은 상당히 빠른 단계에서 대응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일본의 평화와 안전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태’의 단계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한신(阪神) 대지진이후 자위대의 출동이 재해파견의 경우 빨라졌다.하지만 전투부대로서의 출동은 법적으로 제한을 받고 있다.그러나 미군에 대한후방지원이라는 간접적인 형태의 경우 출동요건이 완화됐으며 그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 법안은 ‘일본을 방위한다’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위대와 그 관련법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될지 모른다.그것은 실질적으로 일본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전수방위개념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헌법의 전수방위개념 깨져 새 법안은 또 미군과의 협력에 있어서 신속성과 효율성을 우선하고 있다.국회에 대해서는 사후 보고만으로 충분하다고 규정하고 있다.‘군사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가능한한 현장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그러나 국민주권국가에서 그러한 현장판단만을 우선하는 것은 헌법의 제약이 없는 미국과 같은 ‘보통 국가’에서도 허용되지 않는다.헌법상 외국에 대한 무력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일본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군사적 합리성’ 우선의 발상은 무기사용 규정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새 법안 2조는 무기사용 요건을 확대하여 소형무기에 한정하지않고 있다. 선박검사활동과 수색구조활동은 해상자위대의 함정과 헬기가 담당하도록돼 있는 가운데 요건만 갖추면 고성능 기관포와 속사포 등의 사용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그런 의미에서 새 법안은 일본이 자체 영역외에서 무력행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기본권 중시 우호협약 전환 지금 일본의 대외정책에서 요구되는 것은 헌법에 기초한 ‘평화적 합리성’이지 ‘군사적 합리성’은 아니다.이때문에 군사적 역할의 확대를 규정하고 있는 새 법안은 폐기돼야한다.새로운 일·미 방위협력지침도 마찬가지다.군사동맹적 색채가 짙은 일·미 안보조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민주주의와 기본적 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미 우호조약’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그것이 헌법이 규정한 국제협조주의의 진정한 구체화이다.
  • 抗日 민족시인 이상화 전집 발간

    ◎미발표 유고 등 시·산문 80여편 묶어 올해는 항일 민족시인 상화(尙火) 이상화(1901∼1943)가 타계한지 55주년이 되는 해.대구문인협회가 그의 업적을 기려 이상화 전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그루)를 펴냈다. 상화는 1921년 동향의 글벗이던 현진건의 권유로 ‘백조’ 동인이 돼 시작활동을 시작했다.상화의 시는 그가 일본 관동 대지진 현장에서 동족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한 참극을 목격하고 1924년 귀국한 뒤 크게 바뀐다.이전의 도피적이고 소극적이던 시풍이 저항적이고 적극적인 항일시 내지 민중시로 탈바꿈한 것이다.그가 소년시절의 ‘무량(無量)’과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사용하던 낭만취향의 ‘상화(想華)’라는 아호를 혁명지향의 ‘상화(尙火)’로 고쳐 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박영희·김팔봉과 함께 카프 조직에 참여한 상화는 1926년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고발한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다. 상화 시의 특징으로는 육화(肉化)된 항일 문학성과 직정적(直情的)인 서정성, 선명한 상징성,휴머니즘적인 민중성 등을 들수 있다.한 예로 데카당스적인 요소가 짙은 그의 데뷔작 ‘말세의 희탄(희嘆)’과 ‘나의 침실로’에서의 ‘동굴’은 가스통 바슐라르가 지칭한 요나 컴플렉스로서의 아늑한 도피 공간으로서 식민통치하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또 산문시 형식의 ‘금강송가’에서의‘금강’은 민족정기를,붉은 피울음소리를 뜻하는 ‘비음(緋音)’에서의 ‘핏물’은 식민지 백성의 고단한 처지를 상징한다. 이번에 나온 이상화 전집에는 ‘백조’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희탄’에서부터 미발표 유고 ‘만주벌’에 이르기까지 60여편의 시와 20여편의 산문,이상화 연구논문 등이 실렸다.문학평론가인 중앙대 이명재 교수는 상화의 시를‘나의 침실로’와 같은 초기의 감상적인 낭만주의 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중기의 민족·민중적 성향의 항일시,‘곡자사(哭子詞)’와 같은 후기의 민족적 비애를담은 우국시로 나눈다.상화는 그 문학 역정면에서 볼 때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민족문학 본연의 길로 되돌아온 변증법적인 항일 민족문학의 실현자”라는 게 이교수의 설명이다.
  • 요르단 페트라 고대도시(세계 문화유산 순례:64)

    ◎2㎞ 병목 협곡 끝에 펼쳐진 암벽 유적/예수의 아람어 쓰던 BC 100년 아랍왕국 수도/4세기 지진 매몰뒤 1958년 발굴… 웅장미 자랑 페트라는 남부 요르단의 보석으로 불리는 암벽도시이다.그래서 페트라의 의미는 현지어로 바위이다.기원전 100년경 나바티아 아랍인들이 세운 왕국의 수도였다.분홍빛과 노란색,홍옥같은 선홍 빛깔의 암벽을 깎고 갈아서 그 속에 궁전과 신전을 짓고,사람이 사는 집은 물론 무덤까지 만들었다.그리고는 거대한 도시를 이루었다.지상에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요새도시가 되었다.용맹하고 건강한,그러면서도 열정과 로맨스가 있는 남성다운 도시이다.세상에 태어나서 페트라를 보지 않고는 사나이라 말하지 말라는 아랍인들의 자긍심을 다시 한번 읽게 된다. 페트라는 기원전후부터 사막 내륙의 캐러번 대상과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해로 교역의 필수적인 중간 기착지였다.사막 한가운데 유일하게 풍부한 물줄기가 있고,사막 유목민인 베두윈들의 습격을 막아줄 수 있는 바위로 된 성벽이 있었기 때문에 중동 일대 대상들의 안전한 휴식처가 되었다.그 옛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요르단으로 들어가면서 바위를 쳐 물이 나오게 했다는 곳이 바로 페트라이다.유적 주변 마을인 와디무사에는 아직도 모세의 샘이 있고,지금 이 마을의 중요한 식수원이 되고 있다. ○바위산 깎아 궁전·신전 건설 상인들은 예멘에서 향료를 가져다가 지중해 연안도시로 운반했고,직물·곡식·그릇 등과 같은 북부의 산물을 아랍 내륙과 남쪽으로 실어 날랐다.예수의 언어였던 아람어를 사용하던 이 아랍왕국은 하리라트 4세때 전성기를 맞았다.북부 아라비아와 팔레스타인 남부 및 시리아를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했다.국제무역이 가져다 준 풍요의 결과였다.당시 강성하던 로마제국이 이 사막의 보고를 그냥 둘 리 없었다.로마의 끈질긴 공격에 시달리던 나바티아 왕국은 결국 수도 페트라에서 최후의 일전을 맞았다. 도시 입구에는 200m 높이의 거대한 두 개의 바위산이 있고,2∼3m의 좁은 틈새를 통해 도시내부로 향한다.하늘을 깎아지르는 거대한 바위산을 헤집고 무려 2㎞에 달하는그 좁은 협곡을 지나야 비로소 도시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뚫을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 로마 황제 트라얀은 이 난공불락의 요새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강구했다.사막 바깥에서 도시안으로 흐르는 샘물의 물줄기를 막아버린 것이다.물이 없는 페트라는 결국 서기 106년 지친 몸을 로마에게 맡기고 만다.기원전 100년에 시작한 200년의 짧은 역사였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새벽 자동차로 홍해를 향해 남쪽으로 네 시간을 달려온 후,페트라 입구에서 협곡을 따라 도시 안으로 향한다.30층 빌딩 높이의 협곡 양쪽에도 바위를 깎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건축물을 만들어 놓았다.거대한 생활조각의 현장이다.드디어 마지막 협곡의 좁은 틈 사이로 넓은 사막의 광장이 나타난다.또 다른 세계였다.이 공간이 높은 바위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었다.도시는 땅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계곡의 바위 틈속에 있다. 궁전도 신전도,사람들이 사는 집들도,창고와 오락시설,심지어 왕과 귀족들의 무덤까지 모두 계곡의 바위 그 자체이다.그리고 하나하나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정교한 조각 예술품이다.로마시대 유적이라고는 유일하게 땅위에 지어진 8천석 규모의 원형극장이 눈에 띈다. ○카즈네 왕묘 건축물 압권 페트라의 압권은 역시 카즈네라 불리는 왕묘 건축물이다.협곡이 끝나는 지점에서 처음 마주치게 되는 도시광장 맞은 편에 있는 핑크빛 건축물이다.건축물이라기 보다는 200m 높이의 바위산 전체를 하나의 신전으로 조각해 놓은 모습이다.2층으로 조각되어 아래층은 지상에서 걸어 들어갈 수 있게,속을 깊이 파 놓았다.6개의 정교한 기둥이 받치고 있고,2층은 창문과 발코니,돔식 처마에 이르기까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바로코식 석각이 연출된다.그리스 신전의 양식을 많이 닮았다.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는 정교한 건축조각의 미는 카즈네 신전에 못하지만,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엘­다이르 수도원이 있다.가로 60m·높이 45m에 달하는 역시 2층의 바위건물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오르면,화려한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항상 그러하듯이 해지는 쪽에 무덤지대인 네크로폴리스가 있고,궁전과 거주지들이 바위병풍을 따라 아파트촌을 연상시킬 정도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어느 하나 소홀하게 대충 지은 집이 없다. 또다른 한 쪽에는 로마의 아고라에 해당되는 옛 장터가 있고,나바티안의 공중목욕탕,샘터 등이 페트라의 2천년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일몰이 다가오면 황혼에 비친 페트라 전체가 선연한 핑크빛으로 변한다.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그저 환상적인 색조의 향연이라고 할까.햇빛의 방향이 바뀌면서,그 각도에 따라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분위기가 연출된다.붉은색,노란색,분홍색,오렌지색 그리고 그 명암들. 화려했던 난공불락의 도시 페트라도 기원전 4세기경 대지진이라는 재앙의 희생물이 된다.다시 1천500년간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 잊혀진 도시였다.그리고 1812년 스위스 탐험가에 의해 서방세계에 발견된 후,발굴이 시작되어 1958년에야 전체 모습이 다시 인류의 품에 안겼다.페트라가 멸망한 후,그 역할은 시리아의 사막도시 팔미라로 넘어 갔다.페트라도 팔미라도 로마가 사막에 만든 속령인 아라비아주에 편입되어,그리스­로마화라는 새로운 문화적 학습을 시작하게 된다. ◎여행가이드/암만서 자동차 4시간/모텔 등 숙박시설 갖춰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자동차로 4시간 거리에 있다.주변의 사막풍광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다.페트라 시에서 유적지 입구까지 미니버스가 자주 있다. 유적 주변 마을인 와디 무사에 아트와시 호텔(03­33642) 등 조그만 모텔들이있다. 라 베두이나(03­336930)여행사와 한국계 컬처클럽 투어(06­632299)가 페트라 전문 여행사이다.
  • 터키 히에라폴리스(세계 문화유산 순례:60)

    ◎BC 180년 건설된 그리스­로마 도시 유적/페르가몬왕국 창건자 아내 ‘히에라’ 위해 건립/아폴로 신전·원형극장·거대한 묘지군 곳곳에 히에라폴리스는 ‘성스런 도시’라는 의미를 지닌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대 그리스­로마 도시유적이다.멀리서 보면 하얀 솜으로 덮힌 것 같은 신비스런 언덕위의 도시이다.현재 지명은 파묵칼레이다.‘목화성’이란 뜻이다.가까이 다가가면 산화칼슘에 녹아내린 하얀 석회암 고드름이 늘어진 것 같은 기묘한 풍광을 연출한다.1만4천년간 뜨거운 물줄기에 닳고 녹아 만들어 낸 자연의 조화다.히에라폴리스는 바로 이 하얀 목화성 언덕위에 건설된 도시인 것이다. 히에라폴리스라는 이름의 도시를 최초로 건설한 왕은 기원전 180년쯤 페르가몬 왕국의 유메네스 2세였다.유메네스 왕은 전설의 왕국 페르가몬의 창건자 텔레포스 왕의 아내인 히에라를 기념하기 위해 이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히에라폴리스는 바로 이웃의 고대도시 라오디케아와 경쟁관계를 유지하며 급진적인 발전을 거듭했다.그러나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의 마지막 왕 아탈로스 3세가 자신의 왕국을 로마제국에 자진 헌납함으로써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몇차례의 대지진으로 고대도시의 많은 유적지가 파괴되었지만,아직도 2∼3세기 최전성기를 맞았을 때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마치 ‘신전 전시관’ 방불 이 도시의 상징은 신전들이었다.바둑판 모양의 정교한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된 히에라폴리스에는 ‘신전 전시관’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수의 신전이 건립되었다.로마 목욕탕과 원형극장 사이에 아폴로 시전이 남아 있다.아폴로는 이 도시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히에라폴리스의 전성기는 이후 비잔틴 시대까지 계속되었다.그러나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면서 도시의 위상은 새로워졌다.기독교의 대교구가 설치되었다.초대 7대 교회의 하나가 인근 라오디케아에 세워졌다.더욱이 예수의 12제자중 한 사람이었던 사도 빌립이 순교지이기도 하다.원형극장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사도 빌립이 전교하던 장소에 순교 기념관이 있다. 기독교의 중심지 히에라폴리스는 11세기 이후 셀주크와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지는 이슬람 세력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자,그 찬연했던 과거의 영광도 함께 묻히고 말았다.역사의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는 망각되고,유명한 운천수가 뛰어난 자연경관과 어우러지는 하얀 목화성,즉 파묵칼레로만 세상에 알려졌다.온천을 즐기러 몰려든 관광객들은 언덕 위에 즐비한 고대 유적지를 보고 비로소 잊혀졌던 역사의 숨소리를 듣게 된다. 온천 지대의 특성을 가장 잘 이용한 대표적인 도시 유적은 로마 목욕탕이다.열탕,온탕,냉탕,탈의실을 모두 갖춘 전형적인 로마식 목욕탕이다.운동을 위한 부속건물과 황제가 연회를 개최하던 대형 홀이 아직도 남아 풍요로 왔던 당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이 온천수는 밖으로 흘러 파묵칼레의 기묘한 옥외 석회암 온천장을 형성했다.섭씨 35도 정도의 온천수는 특히 피부병에 좋다는 소문이 나 있다.얼굴이 못생긴 처녀가 공주가 된다는 등 여러 종류의 토착 전설을 만들어 냈다.그래서 피부가 거칠고,무한대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젊은 여성들의 필수적인 순례지가 되었다. ○온천 수원 ‘악마의 굴’ 유명 이 도시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보존상태가 좋은 원형극장이 으뜸으로 꼽힌다.2세기 하드리안 황제때에 지은 원형극장은 3세기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시대에 오늘날의 모습으로 개축되었다.관중석은 2단으로 되어 있다.약 1만5천명의 인원을 수용했다는 대규모 극장이다.특히 중앙의 무대주변에는 아폴로 신을 주제로 한 정교한 대리석 조각이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도시 북쪽 끝에는 거대한 묘지군인 네크로폴리스가 자리잡았다.시야에 들어 오는 것만 줄잡아 수천개는 됨직하다. 소아시아 반도에서 가장 큰 묘역이라 한다.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석관형,가옥형,봉분형 등 무덤의 다양한 양식과 크기이다.신분이나 빈부의 차이에 따라 그 규모와 장식이 다를 수 있다.그런 가운데 여러 시대가 중첩되면서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었지만,그것은 오히려 온고지신의 조화로움인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서 멀지 않는 곳에 온천수의 수원으로 알려진 굴 하나가 있다.단순한 굴이라기 보다는 매우 복합적인 문화현상을 지닌 명소다.현지인들이 ‘악마의 굴’로 부르는 굴에서는 연중 유독가스가 품어져 나와 아무도 그 안을 들여다 보지 못했다.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지하의 영계인 ‘하데스’로 통하는 입구라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그래서 입구에 하계의 신인 플루토를 위한 신전을 짓기도 했다.이슬람이 이 땅을 지배하면서부터 신비주의 수도승들이 호흡조절을 통해 이 굴을 들어갔다 나오면서 자신의 영력을 시험해 보이는 일종의 종교적 수련장이 되기도 했다.당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 건립된 성스런 도시,히에라폴리스는 십자군과 셀주크의 공격에도 견뎌왔다.그러나 1334년 대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여행가이드/카펫·포두주 유명… 모텔­호텔 등 숙박시설 완비 히에라폴리스,즉 파물칼레는 이스탄불에서 지중해에 연한 역사도시 이즈미르 비행기로 가서,자동차로 세 시간 거리에 있다.이즈미르에서 데니즐리까지 약 200㎞를 철도로 간 다음 20㎞거리의 파묵칼레까지는 마을버스를 이용해도 된다.수공예품,특히 수직 카펫이유명하고 질 좋은 포도주가 생산된다.투산호텔,파묵칼레 모텔을 비롯한 여러 개의 호텔이 온천지대에서 영업중이다. 원더풀 투어(212­257­2288)와 한국계 윤투리즘(212­257­1361)이 파묵칼레 전문여행사이다.
  • 일 열도 북서쪽 450m 이동

    ◎2000년 경도·위도·표고 국제기준 변경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국토지리원은 2000년을 맞아 일본의 위치를 정하는 경도·위도와 표고의 기준을 세계기준으로 바꾸기로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 열도 전체의 세계지도상 위치가 북서쪽으로 450m 이동하고 도쿄를 축으로 시계방향으로 조금 돌아가게 된다고 요미우리신문이 12일 보도했다. 돌아가게 되는 거리는 규슈는 북북동쪽으로 4m,홋카이도는 북동쪽으로 9m정도가 된다. 일본의 지리 기준은 메이지시대인 1887년 정해졌는데 도쿄 아자부다이가 경·위도 원점으로,나가타쵸가 표고원점이다. 경·위도 원점은 천문관측에 따라 동경 139도44분40초,북위 35도39분17초로 정해졌으며 표고원점은 해발 24.4m로 정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 현재의 ‘일본측지계’이지만 인공위성을 이용한 전지구측위시스템(GPS)등에 바탕을 둔 세계공통의 기준(세계측지계)과 경·위도가 11초,표고는 수십㎝의 차가 발생하게 됐다. 차가 발생하게 된 것은 원점 제정당시의 측량기술의 한계와 대지진등의 지각변동으로 일본열도가 움직인 것등이 원인.
  • 미국·프랑스·일본·중국­특파원 현장리포트/21세기준비 지구촌표정

    ◎‘경쟁력 강화만이 살길’ 제도개혁 총력 ◎미국/‘아시아타깃’ 수출진흥정책 적극 지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재선 캠페인 슬로건으로 ‘21세기로의 다리놓기’를 내놓았다. 그러나 의회·주정부의 입김이 강하고 사회 각부문의 자치성·자발성이 존중되는 풍토에서 정부가 21세기를 위한 경쟁력 제고 정책을 일사불란하게 선도할 여지는 그다지 크지 않다.90년대 들어 세계의 주목거리인 미 경제의 경쟁력 회복도 정부와는 상관없이 기업의 자발적 경영혁신 등을 통해 이뤄졌다.클린턴 대통령이 21세기의미국 경쟁력을 위해 대선공약으로 주장했고,올초 국정연설로 재차 다짐했던초·중등 학생들의 학력 전국평가제 역시 주정부의 권한을 침해하는 연방규제 강화라는 반발이 심해 아직 예산법안의 벽을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미 정부의 21세기 경쟁력 고양을 위한 정책개발 및 수립은 상당히 범위가 제한적이고 전문적이게 마련이다.이런 상황에서도 미정부가 표나게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부문은 수출진흥정책.20명의 경제관련 각료 및 연방기관장을 총망라하여 무역진흥조정위원회(TPCC)를 구성한 뒤 해마다 ‘국가수출전략:다음의 아메리카 세기를 향해’라는 보고서를 작성한다.해외시장에 팔리는 상품을 만드는 것은 기업의 몫이되,외국시장의 문턱을최대로 낮춰 이상품이 팔리도록 도와주는 것은 정부의 일이라는 취지다.이는 특히 아시아를 명확한 표적으로 삼고 있다. 한편 백악관의 과학기술정책실은 올해 ‘21세기 틀짜기’라는 과학기술정책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앞서 냉전종식과 함께 중앙정보국(CIA) 등 정보기관의 사명과 의의를 재정립하기 위해 17명의 권위있는 인사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는 지난해 말 ‘21세기를 준비하며:미 정보기관 재검토’란 보고서를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했었다. ◎프랑스/정보화사회 진입 대비 장기계획 발표 기초과학은 물론 고속철도,우주항공,원자력 등 첨단산업에 있어 세계초강대국 미국에도 뒤지지 않는 프랑스가 컴퓨터관련 분야는 한국보다 낙후돼 있다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프랑스인들의유별난 컴퓨터 기피현상에서 비롯된다. 한국은 어릴 때부터 인터넷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야단들이지만 프랑스는창작력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컴퓨터 교육을 금지하는 경우도 적지않다.그런 프랑스가 최근 인식이 바뀌면서 지난 8월에는 정보화사회 진입에 대비한 장기계획을 발표하는 등 부산을 떨고 있다.정보기술 분야에서 다른 선진국들보다 현저히 떨어져 있는 만큼 21세기를 대비한 경쟁력제고에 정보화를 최우선 순위로 삼은 것이다. 우리처럼 주요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중·장기 계획을 세우는 부산을 떨지 않는 프랑스로서는 이례적이다.정부가 정보화의 낙후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다.단적으로 인터넷 시용인구만 봐도 현재 인터넷에 전체가구의 3%인 10만가구 만 가입돼 있는 등 미국의 15%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따라서 리오넬 죠스팽 총리가 직접 나서 인터넷 전환시대를 선포하고 기존의 국내통신정보망인 미니텔과 인터넷 연결시스템을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그리고 정보통신기업들에게는 기술개발을 지원하고 전자상거래와 관련된 안전장치를 마련하기로 계획을 세웠다.또 교육분야에서 또 각급학교에 정보기자재를 보급하고 전문인력을 양성해정보기술의 대중화를 2000년까지는 달성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때까지 전국 7만1천800개의 초·중·고교에 평균 10대의 컴퓨터 및 서버를 설치,온라인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따라서 초중고 전산화 등을 비롯 정보화 관련 예산을 항상 최우선적으로 반영한다는 방침까지 세워놓고 있다. ◎일본/행정·재정·금융·교육 등 6대개혁 추진 일본은 광범위한 개혁으로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다.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랑)정권은 6대 개혁을 추진 중이다.행정개혁,재정개혁,금융체제 개혁,경제구조 개혁,사회보장 개혁,교육개혁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행정·재정 개혁은 청사진이 나오고 있고 금융개혁은 내년 빅뱅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80년대 후반까지 ‘팍스 쟈포니카’를 운운할 만큼 국가의 진로가 탄탄대로 위에 있는 듯 보이던 일본이 21세기를 개혁으로서 맞이하려 하는 것은 국가의 총체적 경쟁력 확보 없이는‘지진국’이 될 수 밖에 없으며,개혁 없이는 경쟁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고령화 시대 도래와 국제적인 대경쟁시대를 맞고 있다는 점,한신대지진·옴진리교 사건으로 인한 안전신화의 붕괴로 사회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데 대해서 국민들의 공감대가 모아지고 있다. 행정개혁은 지난 9월초 정부안을 마련했다.1부21성의 정부를 1부12성으로 축소 재편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오는 2001년부터 실현이 목표로돼 있다. 재정개혁으로는 98년도 일반예산을 올해보다 0.5% 감축키로 하는 등 이미 개혁에 착수했다. 최근 불황의 지속,주식시장의 폭락 사태등을 맞아 재정출동 요구가 거세게 제기되고 있지만 적자 국채의 발행으로 재정 출동을 하게되면 미국이 재정적자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처럼 일본도 재정운영에 문제가 누적될 것을 우려,현 정권은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전후체제는 21세기를 맞아 크게 변모될 것이 확실시된다. ◎중국/2010년 ‘선진국 진입’ 현대화사업 박차 21세기 초강대국을꿈꾸고 있는 중국은 21세기의 청사진 등 국가운영방안을 확정하고 선진국 진입을 위한 현대화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중국공산당과 정부가 95년말 확정한 청사진은 ‘국민경제와 사회발전에 관한 9·5(9차5개년)계획과 2010년까지의 장기목표’.우선 2000년에는 1인당 국민생산액을 80년보다 4배를 증가시키고 2010년까지는 2000년의 생산액의 2배를 증가시켜 선진국으로 진입하겠다는 계획이다. 연간 8%가량의 고속성장을 2000년대 중반까지 계속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고속성장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중국정부가 채택한 방법은 시장경제체제로의 개혁심화와 효율성 제고.주식제도 및 전문 경영제의 확대 등 현대 기업제도의 도입 확대와 적자 누적 국영기업의 파산 실시 등이 그에 속한다.중국정부는 이와함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방만한 정부조직을 통폐합하고 공사화로 개편하려는 작업도 서두르고 있다. 중국 정부가 고려하고 있는 정부기구 개편작업속에는 국가계획위원회와 국가경제무역위원회,국내무역부와 대외무역경제합자부등 유사 기구의 통폐합 등이 들어있다. 기업의 대형화,집단화 등도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채택했다.자동차공업과 화학공업 등이 난립돼 있는 중·소 기업들을 몇개의 거대기업속에 통폐합시켜 대형화해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중국정부는 120개기업을 집단화 기업으로 지정,시험에 들어갔다.중국정부는 1천개의 중점 기업을 양성하고 있다.각 성 등 지방정부의 자율성과 경제특구를 확대하겠다는 것도 시장경제심화에 따른 시장변화의 유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다.
  • 총리 직할관청 늘려 권한 대폭 강화/일 정부 1부12성청 개편

    ◎내각관방·내각부·총무성 관장… 위기 대응력 높여/“대장성 분할” 목소리 불구 재정·금융·조세권 부여 전후 부흥을 이끌어온 일본 관료체제가 대대적인 변화를 맞게 됐다. 일본 총리 직속의 행정개혁회의(회장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21일까지 4일동안에 걸친 집중심의를 거쳐 일본 중앙관료체제를 현행 1부·21성청(부처)에서 1부·12성청으로 개편키로 하는 행정개혁안을 마련했다. 이번 개혁안의 특징은 우선 총리의 권한이 대폭 강화됐다는 점이다.한신대지진과 페루 일본대사관 점거사태등을 겪으면서 총리의 리더십 강화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된 데 따른 것이다. 총리부와 내각 관방으로 이뤄진 총리 직할 관청이 내각관방 내각부 총무성으로 확대 재편된다.내각관방은 대외정책과 안전보장정책,예산편성,거시경제정책의 기본지침을 책정하며 위기관리 정보분야도 담당한다.기본지침들은 지금까지 해당 부처가 관할해 온 것이다. 내각부도 경제재정자문회의 사무국과 종합과학기술회의 사무국,재해방지 업무등을 관장한다.총무성은 공무원 인사와 행정감찰 권한을 보유하게 되며 금융감독청,공정거래위원회를 산하에 두게 된다.지금까지 일본 총리는 정치적으로는 내각의 리더지만 법적으로는 내각 구성원의 ‘한명’이었다.앞으로는 각 부처에 대한 지휘권이 상당히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로는 행정개혁론이 대두될 때부터 제기돼 온 재정·금융 분리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행정개혁론의 눈동자는 대장성의 분할이었다.대장성은 전후 일본 경제의 부흥을 이끌어낸 ‘관청 중의 관청’이었다.그러나 거품불황에 접어들면서 대장성 방식으로는 21세기를 맞아 더이상 ‘일본호’의 진전이 어렵다는 여론이 강력하게 대두됐었다.재정·금융·조세등 3권을 쥐고 흔들면서 안이하고 무책임한 판단으로 경제를 그르치고 있다는 지적들이었다.그러나 하시모토 총리는 21일 회의에서 재정과 금융을 분리하지 않기로 결론을 유도했다. 대장성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또 일본은행법의 개정으로 금융 독자성이 어느 정도 떨어져 나갔고 금융감독청이 설치돼 개별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권이 분리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그러나 대장성이 다시 공룡으로 둥장하지 않을까 라는 우려는 불식되지 않고 있다. 이번 개혁안에서는 늘 논란이 빚어져 온 정보 통신 분야는 통산성으로 귀속되게 됨으로써 우정성(정보통신부에 해당)은 3개 분야로 해체되는 비운을 맞게 됐다. 행정개혁의 원점은 행정부처의 개편과 함께 행정부처의 경량화·효율화였다.이번 개혁안에는 대대적인 성청의 합병이 제시됐다.공무원 수의 감축·예산 절감 방안등은 제시되지 않았다.이제부터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공무원 수 감축 등을 먼저 내걸면 반발을 사기 쉽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여하튼 일본 관료체제는 이번 개혁을 계기로 전후 체제의 껍질을 벗고 21세기형 관료체제로 탈바꿈하는 대전환의 길목으로 들어서게 됐다.
  • 공원녹지는 지진 안전지대/이춘희 서울시 녹지보호계장(발언대)

    도시환경을 보호하는 공원녹지는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생태계를 보존할 뿐만 아니라 시가지 확산방지 등 다양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이런 기능말고도 지진이 날 때는 피난 장소가 될 수도 있다. 지진이 잦은 일본의 예를 보자.1923년 관동대지진이 났을때 공원으로 피난간 도쿄시민은 거의가 피해를 입지 않았다.이때부터 공원녹지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그 뒤 일본은 1931년까지 27개였던 도쿄의 공원을 55개로 크게 늘렸다. 지난 92년부터 우리나라에도 지진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지질학자들은 우리나라도 지진의 절대 안전지역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이제는 지진에 대비해서라도 공원녹지를 보다 많이 확보해야 할 것이다. 자연공원,기간공원,특수공원 등 공원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만들어야 한다.이름이 생소한 기간공원은 규모와 기능에 따라 2천500㎡ 의 어린이공원,2만㎡의 근린공원,40만㎡의 체육공원,30만㎡의 종합공원 등으로 나눠 건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도심에는 광장공원,역사공원 등을 만들고 교외에는 동·식물공원,풍치공원,자연공원,레크리에이션공원 등을 녹지대로 연결시켜 배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공원과 공원,쇼핑센터,역앞의 광장,학교 등을 서로 연결시키는 가칭 녹도를 만들어야 한다.녹도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벤치 등 휴식시설을 마련하면 이 길은 시민들의 쾌적한 산책로가 될 것이며 또한 지진 등 재난이 일어났을때 피난길로도 쓸 수 있다.
  • 일본인의 의심증/강석진 도쿄 특파원(오늘의 눈)

    일본 고베시에서 5월24일 초등학교 6년생이 실종된 뒤 토막살인된 사건이 일본사회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주고 있다.날로 범죄가 흉포화되고 있는 우리로서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들이 많으리라.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또 하나 지적할 일이 있다는 것도 착잡한 일이다. 사건 발생후 2주쯤 지난 6월7일 민방인 TBS는 시사프로그램인 ‘더 브로드캐스터(The Broadcaster)」에서 느닷없이 범인이 한국인임을 시사하는 내용을 방영,물의를 빚었다.범인이 범행 후 고베신문사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국적이 없으며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불려 본 적이 없다’고 말한 부분을 들어 한 출연자는 “범인은 일본에서 차별을 받은 사람일 것”이라면서 재일동포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또 다른 참가자도 이를 받아 “일본인 전체에 대한 행위로 느껴진다』면서 『일본의 확실치 못한 전후처리” 운운하는 발언으로 동의의 뜻을 표명하는 등 범인을 일방적으로 재일동포로 몰아갔다. 다른 민방과 잡지에서는 편지에 쓰인 한자가 중국에서 쓰는 한자와 비슷하다면서 중국계가 아닐까 의심하는 내용을 내보내 재일 외국인들에게 상당한 고통과 자괴감,분노를 안겨 주었다. 범인의 이름은 아직 공표되지 않고 있다.그가 어느 나라 국적이든 이번 사건은 좁게는 일본 교육현장,나아가 일본 사회에서 씨가 뿌려지고 싹이 트고 악의 열매가 열린 일이 아닌가.범인 검거 후 일본 매스컴에서 외국인임을 시사해온데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는 내용의 기사를 보이지 않는다.범인 검거후 일본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사건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자녀들이 받을 충격 때문이다.재일외국인들은 사건의 경과와 누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자녀들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멀리는 관동대지진 당시 죄없는 조선인을 살륙하고 가까이는 고베지진 때 재일동포를 절도범으로 의심하거나 옴진리교 사건 때에는 이리저리 한국과 관련지어 보려고 당치도 않은 시도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달 중순 오키나와를 방문했을때 한 오키나와인은 『야마토인(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털이 적다고 차별하면서 우리는 털이많다고 차별했다』고 말해 쓰게 웃은 적이 있지만 이번 사건에서도 걸핏하면 외국인을 의심하고 차별하는 일본인들의 버릇이 여전함을 확인한 것은 우울한 일이었다.
  • 엽기적 살인범은 차별받은 사람일것/일 방송 재일한인 지목해 파문

    ◎거센반발에 “정중사죄… 12일 정정방송” 일본 고베에서 지난달 일어난 엽기적인 초등학생 살인사건이 일본 열도를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는 가운데,일본의 민영방송인 TBS가 아직 체포되지 않은 범인이 재일동포임을 시사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해 물의를 빚고 있다. TBS는 지난 7일 시사보도 프로그램인 「더 브로드 캐스터」에서 이 사건을 다루면서 고정 해설자인 시마 노부히코가 범인이 재일동포인듯 시사했다. 초등학생의 목을 잘라 학교 교문앞에 갖다 놓은 충격적 사건을 저지른 범인은 범행후 지방신문사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국적이 없으며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다」고 말한 부분을 들어 시마는 『범인은 일본에서 차별을 받은 사람일 것』이라면서 재일동포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이 발언에 대해 게스트로 참가한 수필가 다마무라 도요오도 『일본인 전체에 대한 행위로 느껴진다』면서 『일본의 확실치 못한 전후처리』운운하며 시마의 발언에 동의의 뜻을 표명하는 등 범인을 일방적으로 재일동포로 몰아갔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 재일동포 사회의 반발이 거세지자 프로그램 제작 책임자인 TBS 제작국 제작부의 스즈키 다쓰오는 『한국민과 재일한국인에게 심려를 끼친데 대해 정중히 반성 사죄하며 오는 12일 프로그램을 통해 정정방송을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일본에서는 지난 23년 관동대지진,95년 고베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 등 사회불안을 일으키는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유없이 한국인을 가해자로 지목해 살해하거나 악성 루머를 퍼뜨리는 일이 반복돼 왔다.
  • 「서유기」의 무대 연운항(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9)

    ◎“손오공의 출생지” 화과산 곳곳에 전설이…/삼원궁경내 현장법사의 기념관 우뚝/칠십이동 괴석원에 「저팔계」도 의젓이/지장암·숙성촌에 아직도 신라고승·무역상 체취가… 중국 4대 기서의 하나로 「서유기」의 발상지요,그 주연인 당승 삼장법사와 돌원숭이 손오공의 출생지인가하면 청대의 「홍루몽」과 「유림외사」의 혼성 아류소설로 보여지는 또 하나의 명작 「경화연(경화연)」의 산실은 바로 강소성 북단 항구인 연운항이다. 그곳은 명작의 무대요 산실일 뿐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위도상 부산과 목포에서 줄곧 서쪽으로 황해를 건너면 닿는 곳.일찍이 당나라때는 신라 사람들이 무역하던 해상의 거점이요,신라의 고승들이 도를 닦느라 부락을 이룬 곳이다. 중국문학사상 가장 성공한 신마소설로서 오승은(1504∼1582)의 「서유기」는 시작부터 황당무계했다.화과산 산상에 있던 한덩이 신선 바위.그 바위가 열리면서 알이 나오더니 석란은 바람속에서 돌원숭이로 변하고 돌원숭이는 수렴동 동굴속에서 동천복지를 발견,거기다 뭇 원숭이를 거느리고 깃들이다가 그들로부터 「미후왕」으로 추대되고,그 뒤 천궁과 지부에서 난동을 피우다가 삼장법사를 도와 팔십일난을 극복,끝내 서천인 인도로 가서 불경을 얻어오기까지 위기를 배제하고 요마들을 소탕하는 용감하고 슬기있는 손오공의 영웅신화인 것이다. 그 돌원숭이 영웅인 손오공과 당승 삼장법사의 출생지인 화과산이 바로 오늘날 연운항시 동쪽 15㎞지점의 운대산이라서 거짓말같은 사실에 누구나 얼얼할 수 밖에 없다. 「서유기」그 첫회를 펼치면 12만9천600년을 1원으로 하는 천지의 역수로부터 망망묘묘한 혼돈의 세계를 말하면서 영기를 통한 원숭이가 태어난 화과산을 묘사했다. 「동승신주,해외일국토,명왈오래국.국근대해,해중유일명산,환위화과산.차내십주지조맥,삼도지래용,자개청탁이입,홍판후이성,진개호산!」 (동승신주의 바다 저쪽에 또 하나의 국토가 있나니 이름하여 「오래국」.오래국은 넓은 바다를 끼고 바다 한복판에 산이 솟았나니 이름하여 「화과산」.이 산은 십주의 할아버지요,3도의 기원으로 천지가개벽되어 청탁이 갈라진 뒤의 정말 명산이었다)고. 물론 중국에는 여러곳에 「화과산」이 있다.1982년 10월,연운항시에서 전 중국의 「서유기」전공학자들이 모여 제1회 「서유기」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현지 답사와 많은 문물의 고증을 통해 연운항시외에 있는 화과산이야말로 「서유기」의 발상지임을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서유기」의 저자인 오승은의 고향­회안에서 불과 130㎞요,외가가 연운항인데다 오승은이 두번이나 화과산을 올랐다는 방증 외로도 「서유기」에 묘사된 화과산이 사실과 근접했고,「서유기」의 스토리가 연운항 일대에서 수백년 전래했던 전설과도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필자는 서둘러 화과산으로 차를 몰았다.불과 20분에 작은 어촌을 방불케하는 화과산향에 이르렀다.거기서 동쪽으로 운대산의 주봉인 화과산(해발 625m)까지는 갈수록 비탈이었다.그 산구 왼편에는 대촌댐,댐옆으로 그 유명한 아육왕탑.그것은 40.6m의 높이에 9층8각탑,북송 천성1년(1023)무렵에 고대 인도의 아육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뒤 열네차례의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탑.강소 북부지역에서 가장 오래고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산구에는 높이 12m,가로 28m의 아치형 산문,거기에는 원숭이를 비롯,사자·호랑이·돼지·곰등 백쌍의 동물이 형형색색의 조각으로 섰으니 과연 손오공의 고향임을 실감케 했다. 산문을 지나 선인교를 넘고 다시 남천문.한참을 오르자 사로탑,그 옆에 해발 580m의 청풍정에 운대산 그 복부를 굽어보는 삼원궁이 있다.삼원궁은 화과산의 가슴이다.당승 3형제를 기린다는 그 절에는 현장법사의 기념관이 있고 「서유기」의 유적이 모두 삼원궁을 중심으로 분포되었다. 거기서 동북으로 오르면 높은 벼랑에 동굴,그 동굴밖에 드리운 물줄기,이름하여 「수렴동」이라 일컫지만 물은 마른채 「고산유수」라는 각자가 선명했고,그 각자가 쓰여진 명·가정23년(1544)은 「서유기」의 저작시기보다 몇십년 빨랐다.수렴동에서 북으로 오르면 옥황각,내려가면 후원,그 아래로 칠십이동에 괴석원,물론 팔계석도 그 곁에 있다.그 괴석의 숲속을 거닐다 보면 「서유기」의 교과서를 읽는 양 흥미진진했다.어떤 것은 「서유기」의 등장인물에 유사했고 어떤 것은 억지 춘향인데,400여년전 여기 어디쯤 「서유기」를 구상하며 거닐었을 오승은의 발자국이 찍혔으리라. 그렇게 오르내리다가 문득 만난 것이 문자 그대로 바다를 바라본다는 정각­조해정에 이르렀을때,멀리 굽어보아도 바다는 보이지 않고 괴석들만 어수선했다.옳지! 이 화과산이 300년전엔 강소 유일의 해도에 솟은 산이었지.1668년의 대지진때 운대산 해안선이 북으로 14㎞나 이륙된데다 토사에 메운채 1700년대부터 벽해가 상전 되었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그때는 이 산이 출렁이는 황해속에 우뚝 솟았고 사슴과 여우가 뛰놀면서 기화요초와 송백·지란을 품에 안았겠지.뿐만 아니라 이 산의 서쪽 골짜기 지장암과 숙성촌에는 신라의 중들과 신라의 선원들이 도를 닦고 부락을 형성했던 곳이다.하긴 조선 성종때 우리나라 최세진이 엮은 중국어교재인 「박통사언해」속에는 벌써 「서유기」를 소개한 바 있으니 해주(연운항의 옛 이름)는 여러모로 한·중 교류의 거점이었다. 화과산을서둘러 하산한 뒤,필자는 다시 남쪽으로 20㎞지점인 판포까지 단숨에 달렸다.「경화연」의 산실을 찾아서. 당나라 여황이었던 무칙천의 황제 찬탈과 붕괴과정을 겉으로 과거에 낙방한 당오란 사람이 해외 40여개국을 나들이한 견문과 당규신 등 백명의 재녀들이 여권을 신장하는 고사를 안으로 쓴 재자소설로 윤리성·애정성·사회성·무협성·철학성·풍자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소설의 저자 이여진(1763∼1830)이 스무살무렵 그의 고향인 북경을 떠나 이곳 포구에 와서 그의 불우했던 벼슬살이의 체험을 살려 20년에 걸쳐 완성했는데 1818년에 출판,중국은 물론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그 산실이 여운항시 판포진 동대가에 재현되었는데 지금은 비옥한 농촌이지만 당시는 소금을 만들던 염장.역시 상전벽해를 느끼게 했다. 그런데 「경화연」속의 「군자국」이 예의지국으로 그려졌는데 그 군자국의 모델이 신라라는 설이 있어 우리 입맛을 다시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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