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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콤한 사이언스]사랑했던 연인, 갑자기 꼴보기 싫어지는 이유는 ‘스트레스’

    [달콤한 사이언스]사랑했던 연인, 갑자기 꼴보기 싫어지는 이유는 ‘스트레스’

    ‘님’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된다는 대중가요 가사가 있다. 일일 드라마까지 아니더라도 타인, 특히 연인이나 부부간 관계에서는 사소한 실수가 커다란 파국을 가져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제까지는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고 죽고 못살 것처럼 굴던 사람들이 갑자기 오래된 원수처럼 싸우고 미워하는 경우를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태도가 돌변하는 이유는 뭘까.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 인간발달·가족과학과 연구팀은 삶에 있어서 다양한 스트레스가 상대방의 장점보다는 부정적 행동에 더 주목하게 만든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심리학 분야 국제학술지 ‘사회심리·성격심리 과학’ 9월 26일자에 실렸다. 연구팀은 79쌍의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10일 동안 매일 밤 잠들기 직전에 짧은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조사에서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과 그에 따른 기분, 스트레스 정도는 물론 집에서 남편 또는 부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답하도록 했다. 연구팀은 설문을 시작하기 전에 부부가 서로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얼마나 정보를 공유하고 대화하는지도 조사했다. 분석 결과, 스트레스가 많은 날이나 일과 중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 날에는 상대방에 대한 평가도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레스가 많은 날은 상대방의 장점보다는 단점이나 실수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도 확인됐다.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상대방의 긍정적 행동도 인식하지만 부주의한 행동이나 부정적 태도를 더 쉽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많은 생활 환경이 오래 지속될 경우 상대방에 대해 부정적 시각이 누적되면서 관계 자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지난 2년 동안 코로나19라는 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상황을 만들어 부부나 연인은 물론 타인을 바라볼 때 부정적인 것에 대해 주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연구팀은 덧붙였다. 한편, 연구팀은 평소 대화를 많이 나누거나 공유하는 부분이 많은 이들은 이 같은 문제가 상대가 아닌 스트레스라는 외부적 요인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도 확인했다. 리사 네프 텍사스 오스틴대 교수(인간생태학)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처럼 사람과의 대인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번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며 “스트레스의 영향을 인식하고 행동이나 말을 주의한다면 관계에 대한 부수적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횡성 ‘클래식컬쳐’ 공연…30일 열린문화마당

    횡성 ‘클래식컬쳐’ 공연…30일 열린문화마당

    강원 횡성문화재단은 오는 30일 오후 7시 횡성열린문화마당에서 개최한다고 29일 밝혔다. 이 공연은 횡성문화재단이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주관 ‘지역문화예술회관 문화가 있는 날 공연산책’ 공모에 선정돼 추진하는 ‘우리동네컬쳐ON’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클래식을 주제로 한 이 공연에서는 ‘피아체볼레H’, ‘SPES’, ‘아델린’이 출연해 팝송, 대중가요 등을 선보인다. 누구나 관람할 수 있고, 관람료는 무료다.
  • 전쟁 후 평화 바라는 심정 묘사… 자유당 무너뜨린 ‘노가바’ 유행… 시대의 아픔 함께하고 치유도 [이호섭의 트로트 숨결]

    전쟁 후 평화 바라는 심정 묘사… 자유당 무너뜨린 ‘노가바’ 유행… 시대의 아픔 함께하고 치유도 [이호섭의 트로트 숨결]

    전쟁과 정치인 혐오 은유적 가사민중의 심리 자극한 ‘신 귀거래사’이승만 독재로 ‘물방아~’ 더 인기작가 의도와는 상관없이 재해석 ‘유정천리’ 개사곡 급속도로 유포폭정에 대한 국민 저항·분노 표현“국민 힘 있으면 가짜 정치인 없어”‘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보련다’ 가수 박재홍이 불러 지금까지도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의 ‘물방아 도는 내력’은 부산에서 설립된 도미도레코드에서 1953년 발표한 노래다. 이 노래가 발표된 1953년은 6·25전쟁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이 잿더미로 변해 버린 때로 너 나 할 것 없이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없는 3무(無) 시대였다. 오랜 전쟁으로 국민들은 지칠 대로 지쳐 하루라도 어서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시절을 되찾고 싶은 심정이 하늘에 닿던 때이기도 하다.‘물방아 도는 내력’의 1절에서는 ‘벼슬과 명예’, 2절에서는 ‘서울’, 3절에서는 ‘사랑과 황금’이 싫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나 벼슬과 황금을 싫어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손끝에 흙 묻히는 시골보다 고대광실 휘황찬란한 서울에서의 삶을 그 누가 싫어하겠는가. 그렇다면 이 노래에서 말하는 ‘벼슬, 명예, 사랑, 황금, 서울’은 무고한 사람들을 전쟁이나 정쟁(政爭)에 희생시키는 특정인과 집단의 이념, 정치적 야욕에 대한 부정적인 은유법이자 일그러진 공간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김일성과 공산당의 만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1952년 7월 국회를 통과한 발췌개헌안 사건으로 불리는 ‘부산정치파동’처럼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소속 정당의 이익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의 작태도 이러한 부정적인 은유에 해당한다. 당시의 정치·사회적 분위기와 반드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침 이때 ‘물방아 도는 내력’이 발표되자 전쟁과 정쟁에 지치고 실망한 사람들은 저마다 초야로 돌아가 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샘솟았던 것이다. 즉 이 노래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과 그 속에서 아귀다툼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혐오로부터 평화로운 마음의 쉼터로 가고 싶었던 당시 민중의 심리를 자극한 ‘신 귀거래사(歸去來辭)’로 받아들여졌던 셈이다. 6·25전쟁 중에 발표된 황금심의 ‘삼다도 소식’ 등도 이와 같이 어서 전쟁 상황을 벗어나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고대하는 마음을 담은 곡이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되고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자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3선 제한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으로 정국은 또 한 번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자유당의 독재에 민심의 이반이 이뤄지며 ‘물방아 도는 내력’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갔다. 작사가 손로원과 작곡가 이재호가 정치적 비판의식을 갖고 이 노래를 창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970년대 학생운동에서 ‘아침 이슬’이 작곡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운동권 가요로 가장 많이 불렸듯이 자유당의 독재 기간에 ‘물방아 도는 내력’이 많이 불렸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대중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대중가요를 시류나 사건과 결부시켜 스스로 재해석해 부르곤 한다. 수용자의 이 같은 행위를 문학에서는 ‘재맥락화’(再脈絡化)라고 부르며,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대중에 의해 의미 내용이 결정된다는 뜻에서 ‘의도의 오류’라고 말한다. ‘물방아 도는 내력’ 1절 가사 중 ‘길쌈을 매고’는 박재홍의 발음으로는 분명한 ‘길쌈’이지만 문맥으로 보면 ‘김을 맨다’는 뜻의 ‘기심을 매고’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1956년 손로원 작사, 박춘석 작곡, 손인호 노래로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발매된 ‘비 나리는 호남선’도 하나의 정치적 사건과의 관계 속에서 유명해진 노래로 기록된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1956년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유세 도중 야당 후보였던 해공 신익희가 호남선 열차에서 갑자기 별세하자 ‘비 나리는 호남선’은 새로운 정치 개혁을 열망하던 민중들에 의해 순식간에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 역시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대중이 이 노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재맥락화했기 때문이다.1959년 반야월 작사, 김부해 작곡, 박재홍 노래로 신세기레코드에서 발매한 ‘유정천리’는 원래 영화 주제가였지만 이 노래 역시 당시의 정치·사회적 영향으로 재맥락화된 가요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빛이 젖어드네’ ‘유정천리’가 발표된 이듬해인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후보였던 조병옥은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1960년 2월 15일 워싱턴 소재의 한 병원에서 돌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로써 선거를 통해 이승만 독재를 종식시키려 했던 대중들은 절망했고, 그 같은 마음을 담아 ‘유정천리’를 개사해 부르면서 개사곡은 전국적으로 급속도로 유포되기 시작했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간다/ 천리만리 타국 땅에 객사 죽음 웬 말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이른바 ‘노가바’,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의 전형이 탄생한 것이다. 개사한 ‘유정천리’의 대대적인 유행이 말해 주듯이 민심은 자유당으로부터 돌아서게 되고, 이에 위기를 느낀 자유당은 3·15 부정 선거를 획책했다. 분노한 대중은 결국 4·19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야를 선언했고 자유당 정권은 마침내 무너졌다. ‘유정천리’의 개사곡이 인기를 얻고 정권 교체까지 이루게 되자 신세기레코드는 이를 박재홍의 노래로 정식 음반으로 제작했지만 ‘유정천리’만 한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를 대중음악평론가 이준희는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혁명 분위기에 편승한 상업 기획이라는 점이 오히려 거부감을 유발했던 것”으로 분석했다.폭정이 국민을 억압할 때 국민들은 그에 걸맞은 노래나 개사를 통해 저항하거나 분노를 공유한다. 위정자는 대한민국의 영토와 국체(國體) 및 정체(政體), 그리고 국민의 생명, 재산, 권리를 지키는 데 복무해야 한다. 비록 고대 그리스 철학자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했지만 정의란 마땅한 것은 행하고, 부당한 것은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권력자는 저마다 “이것이 정의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진정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정의다. “검수완박이 정의다”, “경찰국 설치가 정의다”, “대장동 수사가 정의다”, “검찰공화국 저지가 정의다” 등의 구호들이 과연 국민 개개인을 얼마나 위하고 편하게, 여유롭게 할 것인가. 이 구호들이 진정 국민의 이익에 해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치인 자신들의 이익에 해당하는 것인가. 1950년대나 지금이나 정치인들 스스로는 자기의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오히려 엉뚱하게도 비정치계 쪽에서 그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잘 비춰 주고 있다. KBS ‘2020년 대한민국 어게인’에서 가수 나훈아가 던진 정문일침(頂門一鍼)이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僞政者)는 생길 수 없습니다.” 작곡가·문학박사
  •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서울 강서구에 착한 기업들이 모인다!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서울 강서구에 착한 기업들이 모인다!

    서울 강서구는 오는 16일 마곡문화의 거리 발산역존(발산역 1·9번 출구 앞)에서 ‘2022 사회적경제 박람회’를 개최한다고 15일 밝혔다. 이번 박람회는 지역의 우수한 사회적경제 기업들이 직접 소비자를 만나 제품을 홍보하고,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취지로 열린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등 37개의 사회적경제 기업과 단체들이 생활용품, 의류, 밀키트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인다. 가죽공예, 반려동물 간식 만들기, 프레디저 심리적성검사 등 업체들이 직접 진행하는 다양한 체험 행사도 준비되어 있다. 또한 서울서부 근로자건강센터, 강서50플러스센터 등 유관기관이 참여해 인바디, 혈압검사 등 무료 건강검진과 인생설계 상담, 일자리 상담도 함께 진행한다. 행사장 무대에서는 주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 공연이 마련된다. 정오부터 퓨전 퍼포먼스 그룹 ‘타악동’이 타악기 연주와 함께 멋진 댄스 공연을 펼치고, 싱어송라이터 ‘파인’이 대중가요부터 팝송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인다.오후 6시부터는 스윙재즈 여성보컬 그룹 ‘더 블리스 코리아’와 국내 최고 수준의 색소폰 연주자 대니 정의 공연이 펼쳐진다. 구 관계자는 “우리 지역에는 이윤보다는 사회문제 해결과 공동체의 발전을 추구하는 많은 사회적경제 기업들이 있다”며 “박람회를 통해 이러한 기업들이 다양한 판로를 개척하고 자생력을 갖춘 기업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세한 문의는 강서구 일자리정책과(02-2600-6327)로 하면 된다.
  • 12장 앨범·빅쇼·가요제 ‘가수’ 송해

    12장 앨범·빅쇼·가요제 ‘가수’ 송해

    ‘국민 MC’ 송해는 진행자뿐만 아니라 가수로서도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91세 최고령 음반 발매 기록 생전 12장의 음반을 발표했고 ‘전국노래자랑’에서도 수준급 노래 실력을 뽐냈다. 성악도 출신인 송해는 1967년 가수 김상희, 배호 등과 함께 첫 가요 음반을 발매했는데, ‘노총각 맘보’, ‘피양체네’(평양처녀의 평안도 사투리) 등 두 곡을 직접 불렀다. 1970년대 초에는 특유의 유쾌한 말솜씨가 돋보이는 코미디 음반을 내놓았고 1980년에는 즐겨 부르던 노래를 모은 ‘송해의 가요 산책’ 등 모음집도 여럿 내놨다. 노래와 인연을 이어 오던 그는 2018년 91세의 나이에 ‘딴따라’ 음반을 발매해 국내 ‘최고령 음반 발매 기록을 세웠고, 1년 뒤 싱글 ‘내 고향 갈 때까지’를 내며 기록을 스스로 경신했다. 앞서 2011년에는 첫 단독 공연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쇼’를 열어 국내 최고령 단독 콘서트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아울러 어려운 처지의 가수 지망생을 돕는 ‘송해 가요제’와 주부들을 응원하는 ‘송해 전국 주부 대박 가요제’도 열었다. ●사별한 아들 떠올린 ‘아버지와 딸’ 2016년 송해와 듀엣곡 ‘아버지와 딸’을 함께 취입한 가수 유지나는 이날 “녹음하던 날 선생님은 먼저 떠나보낸 아들을 떠올리고 저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서로 노래를 못 할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렸다”며 “‘전국노래자랑’에서 출연자들이 이 곡을 부르면 2절까지 꼭 방송에 내보내 주실 정도로 애착이 많았다”고 돌이켰다. 이 곡을 계기로 ‘송해의 수양딸’로 각별한 인연을 이어 온 그는 “노래 홍보를 많이 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을 지난해 말부터 유독 자주 하셨는데, 가슴이 너무 아프다”면서 “‘국민 MC’셨던 만큼 하늘나라에서도 한자리하실 것 같다. 그곳에서도 편안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조영남 “윤여정, 내가 바람 피우는 바람에 잘됐다”

    조영남 “윤여정, 내가 바람 피우는 바람에 잘됐다”

    테너 박인수가 서울대 후배 조영남을 타박했다. 지난 5일 방송된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이하 ‘마이웨이’)에는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화합을 이끌어낸 ‘향수’의 테너 박인수가 출연해 서울대 후배인 조영남을 만났다. 조영남은 자신의 화실에서 박인수를 반겼다. 둘은 십년만에 만나는 사이였다. 조영남은 “형이 왕십리 건달 출신이다. 형한테 까불 수가 없었다”며 “이 형이 그런데 나를 정말 예뻐했다. 내가 연습할 때 형 방으로 가고 형이 연습할 게 있으면 내 방으로 왔다”고 전했다. 제작진은 “조영남이 1학년 때부터 까불대지 않았냐”고 물었고 박인수는 “이상한 녀석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형 대접은 잘했다”고 답했다. 조영남은 박인수가 휴학을 오래 해서 둘의 나이 차가 7살이었다는 걸 알고 바로 극존대를 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박인수는 조영남을 천재라고 불렀다. 박인수는 “조영남이 스스럼이 없었다. 선후배 모임에서 노래를 하는데 ‘얘 천재구나’ 느꼈다”고 칭찬했다. 조영남은 “형이 제일 인상 깊었던 게 형하고 여러 명이 함께 순회공연을 했는데 날 소개해줄 때 ‘여러분 얘가 학교 때 천재였어요. 저는 오페라 주인공 못 했는데 조영남은 주인공 했어요’라 했다. ‘얘는 주인공 하고 나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용감하게 말하는 사람은 한국 음악계에 없다. 그때부터 진짜 존경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다 박인수는 플루트를 전공했던 아내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생활을 전담하며 뒷바라지해줬던 이야기를 하며 “벌써 결혼 생활이 57년이 됐다”고 알렸다. 이에 조영남은 “57년을 한 여자와 산 거냐”며 놀랐다. 박인수는 “한 여자 하고 살지, 그럼 두 여자랑 사냐. 너는 무슨 재주냐”라고 타박했다. 조영남은 “나는 13년 사니까”라 말을 흐리며 전 배우자 윤여정을 언급했다. 그런 다음 “저는 (이혼하고) 잘되고 그 여자(윤여정)도 잘됐다. 내가 바람피우는 바람에 잘됐다. 나를 쫓아내고”라 말했다. 이에 박인수는 “네 와이프였으면 잘 안 됐을 것”이라며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그후 박인수는 조영남에게 “음악하고 미술에만 재주 있으면 되지. 얼굴이 잘 나진 않았다.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 게 매력으로 느껴지는 것이다”라며 조영남의 성격을 지적했다.
  • 전우의 시체를♪ 미아리 눈물고개♫… 마디마디 서린 동족상잔의 비극 [이호섭의 트로트 숨결]

    전우의 시체를♪ 미아리 눈물고개♫… 마디마디 서린 동족상잔의 비극 [이호섭의 트로트 숨결]

    박시춘 작곡한 ‘전우야 잘 자라’ 서울 수복 맞아 군 사기 북돋아 ‘아내의 노래’ ‘전선야곡’ 등엔 남편·아들 보낸 심정 고스란히 ‘굳세어라 금순아’ ‘단장의…’ 생지옥 같았던 흥남부두 철수 끌려가는 양민들 참상 담아내 호국보훈의 달 6월이 오면 전장의 참상과 상흔을 담은 대중가요 또한 우국충정처럼 되살아난다. 동족 간에 총부리를 겨눈 6·25 전쟁은 불러도 불러도 그 아픔을 지울 수 없는 대중가요 여러 곡을 탄생시켰다. ‘전우야 잘 자라’, ‘님 계신 전선’, ‘아내의 노래’, ‘전선야곡’, ‘단장의 미아리 고개’,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 ‘경상도 아가씨’, ‘향기 실은 군사우편’ 등이 대표적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하면서 1129일간의 민족 대참화가 시작됐다. 북한의 기습 남침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던 남한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7월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 전쟁 발발 이틀 만인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결의했다. 이로써 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의 계산과는 달리 미국 등 16개 유엔 회원국과 북한·중국·소련이 맞붙은 국제전 양상을 띠게 됐다. 9월 15일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독 안에 갇힌 쥐 꼴이 된 북한군에게 9월 23일 김일성은 총후퇴 명령을 하달하게 된다. 때를 같이해 10월 1일에는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개시했다. 서울을 수복할 무렵 일제강점기 최고의 작곡가로 손꼽히는 박시춘은 자원입대 후 군예대(軍藝隊)를 이끌고 전장을 누비며 국군 사기 진작을 위한 위문공연을 하고 있었다.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극작가 겸 작사가 유호는 서울 수복을 맞아 명동에서 박시춘을 만나 술을 마시게 됐다. 이때 박시춘이 “이제 북진 통일이 임박했으니 우리 군인들의 사기를 돋울 노래를 만들자”고 유호에게 제안해 ‘전우야 잘 자라’가 현인의 노래로 탄생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1절은 후퇴를 거듭하며 최후 방어선을 구축한 처절했던 전장 낙동강, 2절은 추풍령, 3절은 한강, 4절은 38선이 주제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우야 잘 자라’는 박시춘이 아는 정훈장교가 가져가 정훈국에서 발표함으로써 전군에 보급됐다. 진격하는 국군 장병들은 북진에 대한 벅찬 감명과 잃어버린 전우에 대한 슬픔에 눈물로 노래를 열창했다. 그러나 이 노래는 1·4 후퇴 즈음에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2절)라는 가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육군본부에 의해 금지됐다가 휴전 이후에야 해금됐다. 풍전등화 같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남성들만 나선 것은 아니다. 이제 갓 신혼 초야를 치른 새 신부는 조국의 부름을 받고 내일이면 전장으로 떠나야 하는 남편을 위해 밤새 꽃수를 놓았다. 이제 가면 살아서 돌아올지 죽어서 돌아올지 모르는 남편이지만, 조국을 지키러 가는 숭고한 길이기에 새 신부는 눈물 대신 웃음으로 남편을 전송했다. ‘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옵기에/ 이 몸은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었소/ 가신 뒤에 님의 뜻은 등불이 되어/ 바람 불고 비 오는 어두운 밤길에도/ 홀로 가는 이 가슴에 즐거움이 넘칩니다’ 심연옥이 부른 ‘아내의 노래’는 전쟁 중이던 1952년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에서 나왔다. 총을 들고 직접 싸우지는 않았지만 여성들도 사랑하는 가족을 힘차게 응원하며 구국의 전선에 함께 섰던 것이다. ‘아내의 노래’는 1948년 K.B.C레코드에서 조영출 작사·손목인 작곡으로 김백희가 부른 ‘안해의 노래’로 먼저 발표했던 것을 유호가 가사를 고쳐 쓴 뒤 1952년에 심연옥의 노래로 발표한 곡이다. 심연옥은 1947년 이난영의 남편인 김해송에게 발탁돼 KPK에 입단한 뒤 ‘한강’, ‘도라지 맘보’, ‘전화통신’ 등의 히트곡을 불렀다. ‘아내의 노래’와 같은 음반에 수록된 신세영의 ‘전선야곡’에는 아들을 전장에 보낸 어머니의 비장한 마음과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의 마음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나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뺏고 뺏기는 고지전에서는 밤낮없이 교전이 일어나 병사들은 총소리에 잠이 들고 폿소리에 잠이 깬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오늘 밤엔 적군의 기습 없이 온 세상이 조용하다. 폭풍전야가 고요한 것처럼 적의 엄습이 가까웠다는 뜻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병사는 단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막사 사이로 떠오른 둥근 달을 본다. 달 속에는 고향의 어머니 얼굴이 들어 있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전선야곡’은 1951년 10월 공교롭게도 녹음하는 날 신세영의 어머니가 별세하는 바람에 목멘 상태로 불러 더 진한 공감과 호응을 얻었다. 1926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한 신세영은 1947년 오리엔트레코드 주최 콩쿠르에서 입상한 뒤 전속 가수가 됐다. 1948년 ‘로맨스 항로’로 데뷔했으며 나훈아의 ‘청춘을 돌려다오’를 작곡하기도 했다.순조로운 북진으로 조국 통일을 눈앞에 둔 1950년 12월 3일. 중공군 약 6개 사단이 미 해병대와 보병부대를 포위하며 전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치닫게 됐다. 치열한 장진호 전투를 고비로 12월 9일 맥아더 사령관이 미 제10군단에 흥남부두를 통해 해상 철수할 것을 명함으로써 군인과 피난민이 뒤엉켜 아비규환의 생지옥과 같았던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된다. 이 참상을 그린 노래가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며 총성은 멎었지만 너무나 많은 상처가 이 땅을 할퀴고 갔다. 작사가 반야월(가수명 진방남)은 전쟁 발발 이튿날 먹을거리를 구한다며 서울 수유리에 가족을 남겨 두고 경북 김천에 있는 처가로 갔다. 인민군에 의해 길이 막혀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다 서울 수복이 이뤄지면서 집으로 돌아온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비보를 들었다. 미아리에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부인은 딸을 데리고 집을 떠났는데, 다섯 살 딸 수라가 아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전쟁 중이라 무덤도 채 만들지 못하고 미아리 고개에 흙을 파서 묻었다는 부인의 말을 듣고 반야월은 슬픔에 몸부림쳤다. 이러한 체험을 담아 이해연의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1956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발표했다.‘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맬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이 노래에는 화약 연기 자욱한 전장의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양민들의 참상이 피눈물로 그려져 있다. 당시 인민군은 군인, 경찰, 공무원, 대지주와 그 가족들을 모조리 끌고 갔다. 포승 대신에 철사로 두 손을 묶고 도망하지 못하도록 맨발로 끌고 가는 천인공노할 참상이 이 가사에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휴전 협정 체결 이후 70년이 흘렀지만 아직 남북은 총부리를 놓지 않고 있다. 북한은 지금도 미사일 실험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월남패망과 보트피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으면 아무도 우리를 지켜 주지 않는다. 반만년 동안 숱한 외침을 받았지만 굳세게 이 땅과 이 나라를 지켜 왔던 호국영령들의 희생에 답하는 일은 세계 질서의 중심축으로서 강하면서도 조화로운 대한민국을 지켜 나가는 일일 것이다. 작곡가·문학박사
  • 역경 속 ‘카페의 여인’ 운명 바꾼 여인 [이호섭의 트로트 숨결]

    역경 속 ‘카페의 여인’ 운명 바꾼 여인 [이호섭의 트로트 숨결]

    아무도 거들떠봐 주지 않는 ‘미운 오리 새끼’ 신세였다가 운명이 바뀌어 일약 ‘백조’로 화려하게 부활한 가요가 적지 않다. 필자가 작곡하고 김병걸이 작사한 ‘찬찬찬’도 그 가운데 하나다.1993년 발표되자마자 삽시간에 열풍을 일으킨 ‘찬찬찬’의 인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 노래가 대중에게 선보이기까지 지나온 역경의 터널을 아는 이는 적다.‘찬찬찬’으로 하루아침에 가요계의 총아가 된 훈남 가수 편승엽은 이 노래를 발표하기 전인 1991년 1집 앨범 ‘서울 민들레’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어디서든지 돌파구를 찾아야 했던 편승엽은 목포 난영가요제에 출전한다. 아쉽게도 난영가요제에서 큰 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편승엽은 이 가요제 심사위원이던 필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 뒤풀이 자리에서 편승엽은 원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가세가 기울어 많은 고생을 했고, 그러면서도 가수로서의 꿈을 접지 않은 내력을 들려준다. 필자는 “언젠가 곡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편승엽 목소리에 홀린 듯 내준 곡 1993년 어느 날, 당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유명 가수에게 주기 위해 필자는 ‘찬찬찬’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저 편승엽이라고 하는데요. 혹시 기억나실까요.” 그러고는 곡이 필요하다고 했다. 편승엽의 목소리에 호감이 있던 필자는 그 즉시 ‘찬찬찬’을 편승엽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 가수에게 곡을 주면 준히트 정도는 떼어 놓은 당상이지만, 신인에게 주면 사장될 확률이 90% 이상이기 때문에 이례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편승엽 1집을 냈던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는 곡이 좋지 않다면서 음반을 내주지 않았다. 그렇게 1년 이상 버려져 ‘찬밥’이 돼 있던 곡을 우연히 인기 가수 김수희가 듣게 된다. 음반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을 들은 김수희는 “무슨 소리예요? 이 노래는 나오면 바로 대박 칠 노랜데. 내가 음반 내 줄게요”라며 1993년 자신의 희 레코드사를 통해 음반을 발표했다. ‘찬찬찬’의 본래 곡명은 ‘카페의 연가’였지만 “가사 속 ‘찬찬찬’이 귀에 쏙 들어오니 제목을 바꾸자”는 김수희의 제안에 문패도 새로 걸었다. ‘차디찬 그라스에 빨간 립스틱/ 음악에 묻혀 굳어버린 밤깊은 카페의 여인/ 가녀린 어깨 위로 슬픔이/ 연기처럼 피어오를 때/ 사랑을 느끼면서 다가선 나를 향해/ 웃음을 던지면서 술잔을 부딪치며/ 찬! 찬! 찬!’ 돌이켜 보면 1970년대는 샹송이나 칸초네, 라틴 뮤직도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돼 사랑받던 시절이었다. 여기에 트로트와 포크송 및 솔(soul)과 그룹사운드 뮤직 등도 골고루 사랑받았다. 가창 가요뿐만 아니라 경음악 분야에서도 폴 모리아(Paul Mauriat) 악단, 만토바니(Mantovani) 악단, 프랑크 푸르셀(Frank Pourcel) 악단 등이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특히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해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던 페루 민요 ‘철새는 날아가고’(El Condor Pasa)는 트로트 리듬으로 편곡돼 한국인의 정서에 매우 친화적으로 스며들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 바뀐 대중가요 그러나 이후 1980년대 초·중반은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트로트 메들리, 1980년대 중·후반은 트로트와 댄스뮤직, 1990년대 초부터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한 힙합 등 특정 장르가 득세했다. 필자는 트로트 장르의 다양한 물결을 만들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첫 시도는 쿠바의 민속 리듬 차차차를 변형한 설운도의 ‘다함께 차차차’(1991)였고, 두 번째가 쿠바의 춤곡 룸바를 채용한 ‘찬찬찬’이었다. 내친김에 미국의 록앤드롤 리듬을 트로트에 접목한 이자연의 ‘찰랑찰랑’(1995)을 발표해 또 한 번의 흥행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 노래가 처음부터 대중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다함께 차차차’ 역시 처음엔 인기곡이 되지 못하다가, 1년이 지난 뒤 갑자기 인기가 불붙어 히트곡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인기를 얻었지만 당시 우리 사회 유행어였던 ‘고개 숙인 남자’들에게 원기와 희망을 북돋워 주면서 시대적 사명을 다한 작품이라 필자는 생각한다.●사람처럼 다양한 노래의 팔자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사람에게 내리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힘들게 하고 힘줄과 뼈를 괴롭게 한다’(天將降大任於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라고 맹자는 말했다. 그만큼 세상을 밝힐 인물은 많은 시련 끝에 나오는 법이다. 세상에는 팔자(八字)라는 것이 있다. 조폐공사에서 막 찍혀 나온 신권 화폐도 어떤 돈은 긴급 구제자금으로 들어가 기업을 살리는 보람을 가지는 반면 어떤 돈은 도박자금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노래도 마찬가지로 발매도 되기 전에 입도선매(立稻先賣)돼 대히트를 기록하는 노래도 있고, ‘찬찬찬’처럼 갖은 설움 끝에 기사회생하는 팔자의 노래도 있다. 이 노래의 히트를 계기로 편승엽은 갑자기 귀한 몸이 됐다. 그러나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때 세 번에 걸친 결혼과 이혼으로 인기를 이어 가지 못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1996년 3집 ‘초대받고 싶은 남자’, 1998년 4집 ‘사랑을 위해’, 2002년 5집 ‘그대와 함께’, 2006년 ‘용서’, 2018년 ‘사내라서’ 등을 꾸준히 발표했지만 ‘찬찬찬’만큼의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지난 2일을 기해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해제됐다. 소상공인들은 지난 2년여간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만 곳이 상당수다. 이 외에도 많은 국민들이 저마다의 직종에서 필설로는 다 못할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실낱같은 희망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쓰러지지 않는다. 이 고통을 당당히 맞서 막아섰으니 맹자의 말처럼 큰일을 할 기회가 곧 나타날지 모른다. 희망을 안고 살면 외면과 설움의 세월을 견딘 ‘찬찬찬’이 말해 주듯 ‘화려한 백조’로 비상할 날도 올 것이기 때문이다. 작곡가·문학박사
  • 걸어요, 벚꽃 날리는 광진 거리를 음악과 함께

    걸어요, 벚꽃 날리는 광진 거리를 음악과 함께

    ‘봄기운 가득한 거리에서 버스킹 공연 즐기면서 힐링하세요.’ 서울 광진구가 봄꽃 개화 시기에 맞춰 ‘봄꽃맞이 버스킹’ 특별공연을 개최한다고 4일 밝혔다. 지난 1일에는 ‘청춘뜨락에 봄이 왔나봄, MZ세대와 함께하는 봄맞이 힐링공연’이라는 주제로 건대입구역 청춘뜨락 야외공연장에서 공연이 펼쳐졌다. 코로나19로 각종 문화공연이 중단된 이후 처음 열린 버스킹 행사다. 2일에는 아차산 어울림광장에서 ‘음악이 있는 아차산 봄꽃산책’ 특별공연이 열렸다. 재즈 연주자들로 구성된 여성밴드 ‘림’의 오프닝 공연을 시작으로, 3인조 버스킹 혼성밴드 ‘옐로위크’가 자작곡과 대중가요 등을 선사했다. 구는 이번 특별공연을 시작으로 7~8월을 제외하고 10월까지 거리문화공연을 추진할 계획이다. 봄가을 특별공연 외에도 능동로 청년문화예술거리와 아차산 어울림광장 등에서 지역 예술인과 청년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상시 운영된다. 김선갑 광진구청장은 “관내 대학교와 연계한 다채로운 거리공연을 기획해 청년문화예술거리를 활성화하고, 일상 속 문화풍경을 조성해 문화일류 도시를 구현할 것”이라며 “코로나19로 지친 구민들이 봄의 정취를 온전히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안산시민들 “세월호 잊지 않을 것” 합창

    안산시민들 “세월호 잊지 않을 것” 합창

    ‘결코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노래로 전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시민이 모였다. 18일 뒤 세월호 8주기 추모 문화제에서 공연될 합창 뮤지컬 ‘다시, 빛’을 준비하고 있는 천인합창단의 이야기다. 천인합창단은 4·16안산시민연대 등 세월호 참사 8주기 안산지역 준비위원회가 주관하고 시민 400여명의 자발적인 참여로 완성됐다. 지난 24일 오후 7시 경기 안산시 상록구에서 천인합창단의 부분 연습이 진행됐다. 키보드 반주에 맞춰 대중가요인 ‘만남’부터 민중가요인 ‘노래만큼 좋은 세상’ 등에 22명의 목소리가 실려 빈 강당을 가득 채웠다. 연습이 진행되는 2시간 동안 단 5분만 주어진 휴식 시간에도 합창단원들은 유튜브로 노래 영상을 찾아보는 등 연습에 열중했다. ●각자 퇴근 후 모여 2시간 동안 맹연습 각자 생업을 마치고 퇴근 후에 모인 합창단원들은 주머니에서 돋보기 안경을 꺼내 쓰고 악보 위에 지휘자의 말을 메모하는 등 지친 기색 없이 열의를 보였다. 듬성듬성 흰머리가 보이는 50~60대 참가자들은 손으로 무릎 위를 두드리거나 발을 까딱이며 열심히 박자를 맞췄다.최근 일이 몰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참여했다는 자동차 정비공 김승현(59)씨는 “국민 사이에서 세월호 참사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한 가지 마음으로 이번 8주기 공연에 참가하게 됐다”며 “원래 교회를 다니며 성가대를 하는 등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합창이라는 작은 노력으로도 세월호 참사의 현재 상황에 관심을 끌게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잊으라고도 하는데… 기억해 줘 감사” 연습에 참가한 요양보호사 석혜수(61)씨는 “참사가 안산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늘 남 일 같지 않고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며 “부모 입장에서 세월호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노래는 못해도 좋은 마음으로 참가했다”고 했다. 안산에서 인쇄업을 하는 최미자(53)씨는 “제가 단장으로 있는 동호회 ‘울리메합창단’에 8주기 합창 공연에 참여하자고 제안했더니 약 40명의 단원이 뜻을 모아 선뜻 함께해 줬다”며 “여전히 코끝이 찡한데 1년에 한 번씩 추모 행사를 통해 기억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연습이 시작되기 전 단원고 2학년 9반 조은정 학생의 어머니인 유가족 박정화(55)씨가 현장을 찾아 감사의 말을 전했다. 스스로 ‘전투복’이라고 부르는 노란 외투를 입고 찾아온 박씨는 “주변에선 이제 8년이 됐으니 그만 좀 잊으라고 하는데 봄꽃이 필 때마다, 교복 입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딸 생각이 난다”며 “새 정부에서도 진실규명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하는데 세월호를 잊지 않고 오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시민 합창단·전문 배우 함께 공연 예정 천인합창단은 세월호 5주기 추모제가 있던 2019년 1400명의 합창단원이 모여 유가족 앞에서 공연을 했던 데서 비롯됐다. 2년간 온라인 퍼포먼스 챌린지 등 비대면, 비접촉 형식에 맞는 문화제를 기획해 왔지만 올해엔 시민 합창단과 전문 배우가 함께 뮤지컬을 선보일 예정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시민 분향소의 모습과 안산에서 67일간 진행됐던 진상규명 촛불 집회 등의 이야기가 담긴다. 뮤지컬을 기획한 정은진 안산민예총 사무국장은 “세월호를 추모하는 각자의 방식이 ‘안타깝다’ 정도의 소극적인 사람부터 ‘뭐든 해야지’ 하는 적극적인 사람까지 누구나 함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추모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뮤지컬 ‘다시, 빛’은 8주기 하루 전날인 4월 15일 촛불 집회가 있었던 경기 안산기억공원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 정비공, 요양사, 인쇄업자도 모였다···세월호 8주기 앞두고 합창단 만든 안산 시민

    정비공, 요양사, 인쇄업자도 모였다···세월호 8주기 앞두고 합창단 만든 안산 시민

    세월호 8주기 앞두고 시민 추모 행렬안산 시민들 모여 합창 문화제 참여‘기억하자’는 메시지 쉽게 나눌 수 있어“오래 함께해줘서 감사해” 유가족도 방문‘결코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노래로 전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시민이 모였다. 20일 뒤인 세월호 8주기 추모 문화제에서 합창 뮤지컬 ‘다시, 빛’을 준비하고 있는 천인합창단의 이야기다. 천인합창단은 4·16안산시민연대 등 세월호 참사 8주기 안산지역준비위원회가 주관하고 400여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완성됐다. 지난 24일 오후 7시 경기 안산시 상록구에서 천인합창단의 부분 연습이 진행됐다. 키보드 반주에 맞춰 대중가요인 ‘만남’부터 민중가요인 ‘노래만큼 좋은 세상’ 등을 부르는 22명의 목소리가 빈 강당을 가득 채웠다. 연습이 진행되는 2시간 동안 단 5분만 주어진 휴식 시간에도 합창단원들은 유튜브로 노래 영상을 찾아보는 등 연습에 열중했다. 각자 생업을 마치고 모인 합창단원들은 주머니에서 돋보기안경을 꺼내 쓰고 악보 위에 지휘자의 말을 메모하는 등 지친 기색 없이 열의를 보였다. 듬성듬성 흰머리가 보이는 50~60대 참가자들은 손으로 무릎 위를 두드리거나 발을 까딱이며 열심히 박자를 맞췄다.최근 일이 몰려 바쁜 가운데 짬을 내서 참여했다는 자동차 정비공 김승현(59)씨는 “국민 사이에서 세월호 참사가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한 가지 마음으로 이번 8주기 공연에 참가하게 됐다”며 “원래 교회에서 성가대를 하는 등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합창이라는 작은 노력으로도 세월호 참사의 현재 상황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연습에 참여한 요양보호사 석혜수(61)씨는 “참사가 안산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늘 남 일 같지 않았고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며 “부모 입장에서 세월호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노래는 못해도 좋은 마음으로 참가했다”고 설명했다. 안산에서 인쇄업을 하는 최미자(53)씨는 “제가 단장으로 있는 동호회 ‘울리메합창단’에 8주기 합창 공연에 참여하자고 제안했더니 약 40명의 단원이 뜻을 모아 선뜻 함께해 줬다”며 “여전히 코끝이 찡한데 1년에 한 번씩 추모 행사를 통해 기억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연습이 시작되기 전 단원고 2학년 9반 조은정 학생의 어머니인 유가족 박정화(55)씨가 현장을 찾아 감사의 말을 전했다. 스스로 ‘전투복’이라고 부르는 노란 외투를 입고 찾아온 박씨는 “주변에선 이제 8년이 됐으니 그만 좀 잊으라고 하는데 봄꽃이 필 때마다, 교복 입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딸 생각이 난다”며 “새 정부에서도 진실규명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하는데 세월호를 잊지 않고 오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천인합창단은 세월호 5주기 추모제가 있던 2019년 1400명의 합창단이 모여 유가족 앞에서 공연을 했던 데서 비롯됐다. 2년간 온라인 퍼포먼스 챌린지 등 비대면, 비접촉 형식에 맞는 문화제를 기획해 왔지만 올해는 시민 합창단과 전문 배우가 함께 뮤지컬을 선보일 예정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시민 분향소의 모습과 안산에서 67일간 진행됐던 진상규명 촛불 집회 등의 이야기가 담긴다. 뮤지컬을 기획한 정은진 안산민예총 사무국장은 “세월호를 추모하는 각자의 방식이 ‘안타깝다’ 정도의 소극적인 사람부터 ‘뭐든 해야지’ 하는 적극적인 사람까지 누구나 함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추모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뮤지컬 ‘다시, 빛’은 8주기 하루 전날인 오는 4월 15일 촛불 집회가 있었던 안산기억공원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 김치 품은 아프간 할랄 한 상… “우릴 구해 준 한국서 잘살 겁니다”[나를 살리는 밥심]

    김치 품은 아프간 할랄 한 상… “우릴 구해 준 한국서 잘살 겁니다”[나를 살리는 밥심]

    일상에 균열이 생겨도, 예기치 못한 일로 무너져 내려도 먹어야 삽니다. 시간이 지나 눈물 속에 먹던 음식이 ‘솔푸드’로 기억되기를, 살기 위해 억지로 먹은 밥이 일상을 되찾는 먼 훗날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를 막연히 기대하면서 오늘도 우리는 밥심으로 삽니다. 서울신문 사건팀이 밥심의 현장을 찾아 응원합니다. 이번에는 지난해 8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피해 한국으로 온 무함마드 나위드(31)씨와 자마니 타예브(31)씨의 가족 밥상에 함께했습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문화를 지키면서도 한편으론 한국의 문화에 적응하며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온 가족이 바닥에 둘러앉아 식사 지난 12일 경기 남양주에 있는 낡은 5층짜리 아파트. 이곳은 한국에 자리잡은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나위드씨와 그의 아내, 두 아들과 두 딸이 사는 보금자리다. 서툰 한국어로 ‘나위드 집’이라 적힌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자 아프가니스탄 대중가요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올해 5살인 딸은 한국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 ‘반짝반짝 작은별’을 한국어로 불렀고 각각 9살·7살인 두 아들은 여느 한국 아이처럼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수다를 떨었다.주말 오후 1시부터 비대면으로 한국어 강의를 듣는 부부는 조금 일찍 점심을 준비했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음식을 차린 후 가족이 주변에 빙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식문화는 좌식 문화다. 바닥에 카펫과 쿠션을 깔고 그 위에 앉아 음식을 먹는다. 돗자리 가운데에는 아프가니스탄식 볶음밥인 ‘커블리 팔라우’(Kabuli Palaw)가 놓였다. 한국 쌀과는 다른 긴 쌀(안남미)과 소고기 또는 양고기, 채 썬 당근과 건포도 등을 함께 조리해 먹는 요리다. 그 옆에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운 ‘블러니’(Bolani), 시금치 무침과 비슷한 반찬인 ‘사브지’(Sabzi),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한국의 밥처럼 주식으로 먹는 빵이 차려졌다. 집에서 직접 만든 아프가니스탄식 플레인 요거트 ‘머스트’(Mast)와 우유 푸딩과 비슷한 디저트인 ‘프리니’(Feereny)까지 풀코스 요리였다. 나위드씨의 식사 자리에는 김치도 올라왔다. 나위드씨는 “한국 음식 중 야채 위주로 만든 김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위드씨 가족은 다행히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아랍 식재료와 ‘할랄 푸드’(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음식)를 살 수 있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재료를 사서 대부분의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이튿날인 13일 인천 서구에 사는 타예브씨 가족의 식사 자리에서도 현지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사브지와 프리니 대신 미트볼을 넣고 끓인 국인 ‘슈르바’(Shurwa)와 야채를 넣고 끓인 국인 ‘숄라’(Shola)가 눈에 띄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주식인 빵을 머스트나 슈르바에 찍어 먹는다. 커블리 팔라우와 고기 등을 싸서 함께 먹기도 한다. 네 아이를 둔 타예브씨 가족의 식사자리는 전쟁터였다. 부부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7살 큰딸과 한 살 아래인 둘째 딸이 접시에 남긴 음식을 마저 먹었고 이제 겨우 2살인 셋째 딸이 온 입과 옷에 머스트를 묻히자 닦아 주기 바빴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막내아들이 배고파 울자 타예브씨 부인은 식사를 멈추고 아이에게 달려갔다. ●“이사 앞두고 한국어 서툴러 걱정” 나위드씨는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공군기지 한국직업훈련원에서 자동차를, 타예브씨는 영어를 가르쳤다.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면서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한 자들을 잡아들인 탓에 한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아내와 아이들만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타예브씨는 “한국으로 온 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우리집을 수색했다”면서 “어머니 등 남은 가족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나위드씨와 타예브씨 가족은 한국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 나위드씨는 한국의 선진적인 정보기술(IT) 시스템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GPS(위성항법장치)가 잘돼 있어 지도를 보기 편하고 스마트폰이나 대중교통, 은행 현금자동인출기(ATM) 등 시스템이 너무 잘돼 있다”고 극찬했다. 한국 음식에도 점차 적응해 가고 있다. 타예브씨는 “한국 음식은 건강한 방식으로 조리돼서 너무 좋다”고 했다. 타예브씨는 지난달 설날을 맞이해 직장에서 동료와 함께 떡을 나눠 먹기도 했다.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2010~2014년 매년 한국을 방문했던 나위드씨, 2016년 한국에 3주간 연수를 왔던 타예브씨와 달리 가족은 한국이란 나라가 처음이다. 나위드씨의 부인과 생후 10개월인 막내딸은 이달 초 코로나19에 걸렸으나 잘 이겨 냈다. 나위드씨의 두 아들과 타예브씨의 첫 딸은 3월부터 한국 초등학교에 다니는 중이다. 아직 익숙지 않은 한국어는 이들 가족에게 큰 장벽이다. 나위드씨는 “가족이 6명인데 이 인원으로는 택시를 탈 수 없다. 한국 운전면허를 따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면서 “곧 새집을 구해 이사도 해야 하는데 한국어를 잘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타예브씨는 “현재 한국어 강좌를 따로 듣고 있지 않다”면서 “직장 일이 바빠 여수에서 받은 한국어 책을 한 페이지도 펼쳐 보지 못했다”고 우려했다. ●“북적북적했던 대가족은 그리워” 지난해 8월 탈레반을 피해 급히 한국으로 입국할 당시 타예브씨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선 아이를 낳은 여성은 20일간 산후조리를 한다. 그사이 여성의 어머니가 와서 산후조리를 돕는다. 타예브씨는 “아내가 몸을 회복하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만큼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미역국을 먹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야크니’(Yahni)를 먹는다. 돌봐 줄 가족도 마음 편히 회복할 여유도 없지만 야크니만은 고국에서처럼 만들어 먹으며 출산 후 몸을 돌보고 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남겨 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도 싸워야 한다. 나위드씨와 타예브씨 모두 고국에 부모님과 다른 형제가 남아 있다. 부모·형제들과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아프가니스탄인에게 부부와 어린 자녀로만 구성된 핵가족 문화는 외로움을 자아냈다. 나위드씨는 “아프가니스탄은 가족이 많아서 북적였던 점이 좋았다”면서 “지금은 한국에서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아프가니스탄 특별 기여자 6가구와 함께 주말마다 만나며 가족을 대신하고 있다”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온 지 8개월째 된 이들은 한국 정부에 감사를 표했다. 타예브씨는 “옷 두 벌만 들고 아프가니스탄을 급히 떠나 왔다. 우리의 집, 재산 등 모든 걸 잃었다”면서 “아프가니스탄의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 가족을 구해 줘서 한국 정부에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나위드씨는 “미국 정부와 일했던 사람들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미국 땅으로 갔다”면서 “미국으로 간 동료와도 종종 연락하는데 미국보다 한국의 지원이 훨씬 좋아서 자랑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한국에 잘 정착해서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이들의 꿈이다. 타예브씨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햇빛이 드는 집으로 이사하고 아이들을 훌륭히 교육시키고 가족들을 잘 돌보고 싶다”며 한국에서의 목표를 전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위드씨는 언젠가 한국에 음식점을 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족들과 직원이 25명이나 되는 큰 음식점을 운영했었다”면서 “나중에 한국에서도 아프가니스탄 음식점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 ‘한국 생활 7개월차’ 아프간 기여자…팔라우와 김치의 절묘한 조화로 푸짐한 한끼

    ‘한국 생활 7개월차’ 아프간 기여자…팔라우와 김치의 절묘한 조화로 푸짐한 한끼

    일상에 균열이 생겨도, 예기치 못한 일로 무너져 내려도 먹어야 삽니다. 시간이 지나 눈물 속에 먹던 음식이 ‘솔푸드’로 기억되기를, 살기 위해 억지로 먹은 밥이 일상을 되찾는 먼 훗날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를 막연히 기대하면서 오늘도 우리는 밥심으로 삽니다. 서울신문 사건팀이 밥심의 현장을 찾아 응원합니다. 이번에는 지난해 8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피해 한국으로 온 무함마드 나위드(31)씨와 자마니 타예브(31)씨의 가족의 밥상에 함께 했습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문화를 지키면서도 한편으론 한국의 문화에 적응하며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가족이 빙 둘러앉아 식사…인근 할랄 푸드 가게서 구입 지난 12일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낡은 5층짜리 아파트. 이곳은 한국에 자리 잡은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나위드씨와 그의 아내, 두 아들과 두 딸이 사는 보금자리다. 서툰 한국어로 ‘나위드 집’이라 적힌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자 아프가니스탄 대중가요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올해 5살인 딸은 한국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 ‘반짝반짝 작은별’을 한국어로 불렀고 각각 9살·7살인 두 아들은 여느 한국 아이처럼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수다를 떨었다. 주말 오후 1시부터 비대면으로 한국어 강의를 듣는 부부는 조금 일찍 점심을 준비했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음식을 차린 후 가족이 주변에 빙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식문화는 좌식 문화다. 바닥에 카페트와 쿠션 깔고 그 위에 앉아 음식을 먹는다. 돗자리 가운데에는 아프가니스탄식 볶음밥인 ‘커블리 팔라우(Kabuli Palaw)’가 놓였다. 한국 쌀과는 다른 긴 쌀(안남미)과 소고기 또는 양고기, 채 썬 당근과 건포도 등을 함께 조리해 먹는 요리다. 그 옆에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운 ‘블러니(Bolani)’, 시금치 무침과 비슷한 반찬인 ‘사브지(Sabzi)’, 아프가니스탄인들이 한국의 밥처럼 주식으로 먹는 빵이 차려졌다. 집에서 직접 만든 아프가니스탄식 플레인 요거트 ‘머스트(Mast)’와 우유 푸딩과 비슷한 디저트인 ‘프리니(Feereny)’까지 풀코스 요리였다. 나위드씨의 식사 자리에는 김치도 올라왔다. 나위드씨는 “한국 음식 중 야채 위주로 만든 김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위드씨 가족은 다행히 집에서 차로 15분거리에 아랍 식재료와 ‘할랄 푸드(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음식)’를 살 수 있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재료를 사서 대부분의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이튿날인 13일 인천 서구에 사는 타예브씨 가족의 식사 자리에서도 현지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사브지와 프리니 대신 미트볼을 넣고 끓인 국인 ‘슈르바(Shurwa)’와 야채를 넣고 끓인 국인 ‘숄라(Shola)’가 눈에 띄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주식인 빵을 머스트나 슈르바에 찍어 먹는다. 커블리 팔라우와 고기 등을 싸서 함께 먹기도 한다. 네 아이를 둔 타예브씨 가족의 식사자리는 전쟁터였다. 부부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7살 큰 딸과 한 살 아래인 둘째 딸이 접시에 남긴 음식을 마저 먹었고 이제 겨우 2살인 셋째 딸이 온 입과 옷에 머스트를 묻히자 닦아주기 바빴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막내아들이 배고파 울자 타예브씨 부인은 식사를 멈추고 아이에게 달려갔다. “한국 선진 시스템에 놀라…한국어 익숙하지 않아” 나위드씨는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공군기지 한국직업훈련원에서 자동차를, 타예브씨는 영어를 가르쳤다.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면서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한 자들을 잡아들인 탓에 한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아내와 아이들만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타예브씨는 “한국으로 온 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우리집을 수색했다”면서 “어머니 등 남은 가족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나위드씨와 타예브씨 가족은 한국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 나위드씨는 한국의 선진적인 정보기술(IT) 시스템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GPS(위성항법장치)가 잘 돼 있어 지도를 보기 편하고 스마트폰이나 대중교통, 은행 현금자동인출기(ATM) 등 시스템이 너무 잘 돼있다”고 극찬했다. 한국 음식에도 점차 적응해가고 있다. 타예브씨는 “한국 음식은 건강한 방식으로 조리돼서 너무 좋다”고 했다. 타예브씨는 지난달 설날을 맞이해 직장에서 동료와 함께 떡을 나눠먹기도 했다.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2010~2014년 매년 한국을 방문했던 나위드씨, 2016년 한국에 3주간 연수를 왔던 타예브씨와 달리 가족은 한국이란 나라가 처음이다. 나위드씨의 부인과 생후 10개월인 막내딸은 이달 초 코로나19에 걸렸으나 잘 이겨냈다. 나위드씨의 두 아들과 타예브씨의 첫 딸은 3월부터 한국 초등학교에 다니는 중이다. 아직 익숙지 않은 한국어는 이들 가족에게 큰 장벽이다. 나위드씨는 “가족이 6명인데 이 인원으로는 택시를 탈 수 없다. 한국 운전면허를 따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면서 “곧 새집을 구해 이사도 해야 하는데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타예브씨는 “현재 한국어 강좌를 따로 듣고 있지 않다”면서 “직장 일이 바빠 여수에서 받은 한국어 책을 한 페이지도 펼쳐보지 못 했다”고 우려했다. “북적했던 대가족은 그리워…아프간 음식점 열고 싶다” 지난해 8월 탈레반을 피해 급히 한국으로 입국할 당시 타예브씨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선 아이를 낳은 여성은 20일간 산후조리를 한다. 그 사이 여성의 어머니가 와서 산후조리를 돕는다. 타예브씨는 “아내가 몸을 회복하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만큼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미역국을 먹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야크니(Yahni)’를 먹는다. 돌봐줄 가족도 마음 편히 회복할 여유도 없지만 야크니만은 고국에서처럼 만들어 먹으며 출산 후 몸을 돌보고 있다.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남겨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도 싸워야 한다. 나위드씨와 타예브씨 모두 고국에 부모님과 다른 형제가 남아 있다. 부모·형제들과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아프가니스탄인에게 부부와 어린 자녀로만 구성된 핵가족 문화는 외로움을 자아냈다. 나위드씨는 “아프가니스탄은 가족이 많아서 북적였던 점이 좋았다”면서 “지금은 한국에서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아프가니스탄 특별 기여자 6가구와 함께 주말마다 만나며 가족을 대신하고 있다”고 말하며 미소지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온 지 8개월째 된 이들은 한국 정부에 감사를 표했다. 타예브씨는 “옷 두벌만 들고 아프가니스탄을 급히 떠나왔다. 우리의 집, 재산 등 모든걸 잃었다”면서 “아프가니스탄의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 가족 구해줘서 한국 정부에게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나위드씨는 “미국 정부와 일했던 사람들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미국 땅으로 갔다”면서 “미국으로 간 동료와도 종종 연락하는데 미국보다 한국의 지원이 훨씬 좋아서 자랑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한국에 잘 정착해서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이들의 꿈이다. 타예브씨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햇빛이 드는 집으로 이사하고 아이들을 훌륭히 교육시키고 가족들을 잘 돌보고 싶다”며 한국에서의 목표를 전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위드씨는 언젠가 한국에 음식점을 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족들과 직원이 25명이나 되는 큰 음식점을 운영했었다”면서 “나중에 한국에서도 아프가니스탄 음식점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 첼로의 매력을 흠뻑…27일 유튜버 ‘첼로댁’ 콘서트

    첼로의 매력을 흠뻑…27일 유튜버 ‘첼로댁’ 콘서트

    구독자 13만명에게 첼로의 매력을 소개해온 클래식 유튜버 ‘첼로댁’(첼리스트 조윤경)이 오는 27일 오후 5시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콘서트를 연다. 조윤경이 마련한 이번 콘서트의 타이틀은 ‘첼로댁와 친구들: 시크릿 가든’으로, 총 4개의 무대로 구성했다. 꽃잎이 피어나고 붉게 물들어 바람결에 흩날리고, 다시 사랑으로 피어나는 개념 등 사랑과 삶을 표현한 따뜻한 감성 공연이다.첼리스트 조윤경과 ‘친구들’은 클래식 가곡부터 대중가요, 영화음악까지 다양한 곡을 연주한다. 무대마다 신비로운 베일에 싸인 곡들도 만날 수 있다. 조윤경은 서울대 음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줄리아드 음악원 석사과정과 런던 왕립음악대학원에서 최고 연주자 과정을 마치고 활발한 연주 활동을 해오고 있다. ‘친구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국립합창단 베이스 파트 및 전문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바리톤 정태준, 2003년 창단한 순수 민간 교향악단으로 다양한 연주 활동을 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의 ‘밀레니엄앙상블’이 함께 한다.
  • “안개 낀 시대… 그래도 희망은, 희망 잃지 않는 사람 위해 있는 법”

    “안개 낀 시대… 그래도 희망은, 희망 잃지 않는 사람 위해 있는 법”

    대통령 선거 바람이 거세졌다. 시절이 또 한 굽이를 돌고 있는 것이다. 험악했던 80년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묘한 제목의 시로 이 땅의 뭇 지식인들에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물었던 시인 김광규 선생도 이제 팔십을 넘었다. 정갈하지만 얼핏 차갑고, 그러나 돌아서면 늘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그의 시 한 닢 한 닢에서 사람들은 시대의 바람을 읽어 내곤 했다. 국내 시인으로는 아주 드물게 전 세계 12개 언어로 번역, 소개된 그의 시는 수많은 국내외 교과서에 실리고 그의 시 제목을 딴 영화, TV드라마, 대중가요, 심지어 술집 이름까지 등장하는 등 우리 사회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4·19세대의 영욕을 아파했고, ‘안개의 나라’로 군사 정권하의 암울한 현실을 담아냈다. 스무 살 대학생 때 겪은 4·19혁명으로 세상에 눈뜬 지 62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선생의 눈에는 시대가 또 한 마디를 짓고 있는 지금 무엇이 보이는지 서울 홍제동 자택을 찾아 물었다. -코로나 시국에 어찌 지내시는지요. “살아남는 게 삶의 목표가 돼 버린 기이한 시대입니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지요. 조심스러워 외출도 못 합니다. 정부의 일방적인 강제조치에 따라 슈퍼는 물론 음식점에 갈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로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동네 산책을 합니다. 지금 이 집을 52년째 고쳐 가며 살고 있는데 최근 이 동네가 아파트단지로 재개발된다는 얘기가 나와 걱정이네요. 평생 살아온 터전을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눈엔 지금 무엇이 보입니까. “녹아내리는 빙하, 산과 바다에서 비닐쓰레기를 삼키고 죽어가는 뭇 생명들, 태양계를 떠도는 우주 쓰레기, 그리고 탐욕스럽고 교활한 정치인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지금 시대는 맹목적인 물질 추구의 시대, 이해 충돌로 인한 갈등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전히 안개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셈이지요. 안개는 짙어졌다 엷어졌다 하는 법입니다만 요즘은 자꾸 짙어져만 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래도 언젠가 햇볕이 나면 안개는 걷힙니다.” -이 땅에서 처음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건 이승만 정권에 맞선 1960년 4·19혁명 세대였습니다. 4·19세대의 꿈은 이루어졌습니까. “4·19세대가 어느새 80세 전후의 노년이 됐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주역이었던 4·19세대는 1980년 알려진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나오듯 부끄럽게 퇴역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혁명의 선두에 섰던 당시 젊음들이 20년이 채 안 돼 ‘늪’에 빠지고 부끄러운 기성세대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4·19정신이 상당 부분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정치, 사회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승만 정권부터 현 문재인 정권까지 모두 지켜보셨습니다. “어느 정권이나 공과가 있습니다. 또 이들 정권에 항거한 세대들도 마찬가지이고. 이승만 정권을 끌어내린 4·19세대나 박정희 유신체제에 맞섰던 70년대 민주화 세대, 전두환 군부정권에 맞섰던 지금 586세대 등도 다 공과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민주화 세대만 해도 자기절제를 알고 포용의 중요성도 알았다는 겁니다. 지금의 586세대들과는 다른 점입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처럼 그들은 스스로를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끄러움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자의식인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지금의 기득권 세력을 보면 많이 안타깝습니다. 집권 내내 적폐청산을 외치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만 좇고 있다고 봅니다. ‘촛불혁명’이라는데 촛불은 스스로를 태워 어둠을 밝히는 존재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정권은 촛불로 남들만 태우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수 갚기 정치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화해와 용서를 알던 선배들의 관용을 배우는 게 절실합니다.”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세대와 계층 가릴 것 없이 힘들어합니다. 대선 국면, 정치가 해법이 될까요. “‘정치’는 ‘시’와 가장 먼 분야입니다. 그러나 시인도 정치 현실에 대해서 비판적 안목을 견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요즘은 정치인을 일종의 전문직 같은 개념으로 보는 듯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가는 한 민족과 국가의 정신적 리더이기도 합니다. 한데 대선을 앞둔 우리 정치판은 암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국민을 오로지 투표하는 대상으로만 보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합니다. 갖은 명목으로 현금을 살포하는 불법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서민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가장 기본적인 경제원칙을 허물어뜨리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며 중우정치의 길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흔히 시대정신(Zeitgeist)을 말하곤 합니다. “FAA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이나 자율주행 등이 보여 주듯 지금의 시대정신은 과학기술입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자연 및 인간과 친화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물질적 부의 추구가 인성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자연을 보호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게 이 시대에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꿈을 그린 자, 그 꿈의 주인공이 된다’는 말이 있긴 합니다만 입시 경쟁과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에게 과연 꿈이나 희망이 있을까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전두환 군부정권이 들어선 1979∼1983년, 험악했던 시절에 쓴 작품을 모은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에 ‘희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거기에 ‘희망은 결코 절망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문 정권 말기가 코로나 팬데믹과 맞물려 아무리 견디기 힘들다 해도 그래도 그때 군사독재 시절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희망은 누군가 우리에게 그냥 던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힘들더라도 저마다 가슴속에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 김광규 시인은 1941년 서울 통인동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에서 독일 시문학을 수학한 뒤 서울대 대학원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부산대, 한양대 교수를 역임했다. 1975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한 뒤 1979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시작으로 11권의 시집에 850여편의 시를 담아냈다. 평범한 일상 속 소시민성을 간결하고 명료한 언어로 표현하며 ‘일상시’라는 영역을 만들어 냈다. 김수영 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독일 프리드리히 군돌프 문화상 등 많은 문학상을 받았다. 역시 한양대 교수를 지낸 독문학자 정혜영 교수가 부인이다. 60년을 함께한 정 교수는 김 시인의 작품을 번역한 두 권의 시선집을 독일에서 출판해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고, 한국 현대시를 독일어권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짙은안개의 나라에는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어떤 일이 일어나도안개 때문에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안개 속에 사노라면안개에 익숙해져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보려고 하지 말고들어야 한다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귀는 자꾸 커진다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토끼 같은 사람들이안개의 나라에 산다 ‘안개의 나라’는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 문학과 지성)에 수록돼 있다. 막바지에 다다른 유신독재 시절, 진실은 가려지고 유언비어만이 난무한 가운데 무엇이 참과 거짓이고 앞날은 어떠할지 가늠하기조차 힘든 대중들의 암울한 현실을 담았다. 이 시집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는 와중에 검열에 걸려 다음 해에 겨우 햇빛을 보게 된 뒤 초판 13쇄, 2020년 재판 8쇄를 찍었다. 영어와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 등 12개 언어로 해외에 소개돼 각광을 받았다.
  • 1997년 국가적 외환위기 재앙 속 실직·사업 실패 가장의 아픔 대변, 가족 몰래 방황한 사람들 큰 공감

    1997년 국가적 외환위기 재앙 속 실직·사업 실패 가장의 아픔 대변, 가족 몰래 방황한 사람들 큰 공감

    ‘무시로’ 등 4개의 노래 거친 뒤에조항조 리메이크곡 불러 ‘대폭발’20년 무명가수 생활 떨치고 비상드라마 주제가로 인기가수 반열 전국 등산로·오락실 메운 가장들‘절창’ 들으며 속울음 삼키며 위안아픔 딛고 재기할 힘 얻는 데 한몫4년여의 ‘IMF 참혹한 어둠’ 극복흔히 한 시대를 풍미할 불세출의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자질과 노력 외에도 때를 잘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대중가요에도 얼핏 보기에는 거저 뜬 노래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오랜 시간 담금질을 거치다 때를 만나 희대의 명곡으로 화려하게 등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대중가요의 운명을 여러 각도에서 이야기해 주는 노래가 바로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다. ●1994년 박우철 노래 큰 반향 못 일으켜 이 노래의 제목은 맨 처음엔 ‘무시로’에서 ‘미워도 미워 말아요’로, 또 ‘바람불이’를 거쳐 ‘길어야 백년인데’로 바뀌다가 마지막으로 ‘남자라는 이유로’라는 이름을 달고서야 빛을 봤다. ‘이미 와버린 이별인데 슬퍼도 울지 말아요’로 시작되는 나훈아의 그 유명한 ‘무시로’가 실은 ‘남자라는 이유로’에 맨 처음 붙었던 가사다. 원래 임종수의 곡에 나훈아가 가사를 썼던 ‘무시로’는 나훈아가 그대로 발표하지 않고 스스로 곡을 다시 붙여 노래함으로써 대히트를 쳤다. 이후 김순곤이 원래의 ‘무시로’ 곡에 가사를 붙였고 ‘남자라는 이유로’가 된 것이다. ‘남자라는 이유로’는 ‘천리먼길’로 유명한 박우철이 1994년 먼저 불렀지만, 이때는 크게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조항조가 리메이크한 1997년에 대폭발을 일으켰다. 누구나 알다시피 1997년은 ‘IMF 사태’로 불리는 외환위기로 국가적인 재앙이 휘몰아쳤던 해다. 그해 한국은 국가 부도 상황에 내몰렸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나자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구제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상응한 회생 프로그램에 따라 기업 및 경제 주체의 전방위적인 체질 개선과 구조 조정이 단행됐다.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하고, 부동산 매각에 따른 기업 사냥이 횡행했으며, 부도·명예퇴직·조기퇴직 등 대량 실업 사태가 일어났다. 이 무렵 서울의 북한산·청계산·관악산은 물론 전국의 산에는 양복을 입은 넥타이 부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가장들은 해고됐다거나 직장이 없어졌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충격을 받을 가족들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가장들은 아침이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내가 싸 주는 도시락을 챙겨 들고 출근을 했다. 그러나 집을 나서는 순간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전국의 등산로, 또 오락실은 직장을 잃은 수많은 가장들로 붐볐다. 트로트는 아니지만 IMF 사태 이듬해 발표된 한스밴드의 ‘오락실’에도 이런 상황이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바로 이 무렵 조항조는 박우철이 불렀던 ‘남자라는 이유로’를 리메이크해 세상에 내놓았다.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말 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나 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당신 앞에 멍하니 서 있네/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 내어/소리 내어 울어 볼 날이/남자라는 이유로 묻어 두고 지낸/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직장을 잃고 사회에서도 단절되고 가족들 모르게 혼자만 아픔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희망과 절연된 상태로 방황하고 있던 이 가장들에게 조항조의 절창은 바로 자신의 주제가로 들렸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실직을 당해 사랑하는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게 되면 그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시절 가장들은 ‘남자는 일생에 세 번만 우는 것’이라는 전통적 규율 아래에서 가족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눈물을 보일 수 없었고, 이 곡을 들으면서 속울음을 삼키며 위안을 얻었다. 4년여에 걸친 IMF의 기나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 수많은 실직 가장들과 사업 실패의 아픔을 겪던 사람들을 껴안고 함께 운 곡이 바로 ‘남자라는 이유로’였다. 박우철이 부른 ‘남자라는 이유로’ 역시 가슴에 뭉클한 감동을 안겨 주는 최고의 노래였지만,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만큼 큰 반향을 얻지 못했던 것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항조는 이 곡을 만나 일약 스타로 부상했다. 조항조는 원래 미 8군 무대 등에서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해 오다 1978년 그룹 ‘서기 1999년’의 리드보컬로 데뷔했다. 1983~1986년엔 그룹 ‘코리아 환타지’의 리드보컬로 활동했고, 1987년엔 미국으로 건너가 ‘뉴 웨이브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오랜 기간 음악 활동을 해 왔지만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노래 잘하는 미래의 비기’로 묻혀 있던 그는 ‘남자라는 이유로’를 만나 비로소 20년 가까운 무명 생활을 떨치고 화려하게 비상했다. 조항조는 2013년 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의 주제가 ‘사랑 찾아 인생 찾아’로도 큰 인기를 얻으며 인기 가수의 반열을 확고히 했다.●IMF 때 남자들 마음 헤아려 사랑받아 조항조는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도 “제가 운이 좋았던 것 같다. IMF가 오면서 남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노래라고 사랑받았다”고 곡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에 “길거리에서 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고 회상한 그는 “그래서 더 열심히 부르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사상 초유의 IMF 위기에 우리 국민들은 조국을 구하기 위한 금 모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1907년 일제가 반강제적으로 제공한 차관 1300만원을 갚기 위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국가적 위기를 구하기 위해 금붙이를 들고나와 언론사마다 장사진을 치고 있는 우리 국민의 모습은 전 세계에 중계됐다. 그리고 3년 8개월 만에 IMF로부터 빌린 긴급 자금을 모두 상환함으로써 국가 부도 사태를 벗어났다. IMF의 참혹한 어둠 아래서 해고와 실직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데 ‘남자라는 이유로’도 한몫을 했을 터다. 실로 절망의 심연 속에서 핀 꽃이자 수많은 가장들을 치유해 준 희대의 명약이었던 것이다. 작곡가·문학박사
  • 책으로 보는 광화문 앞길 600년 역사… 서울역사편찬원 ‘광화문 앞길 이야기’ 발간

    책으로 보는 광화문 앞길 600년 역사… 서울역사편찬원 ‘광화문 앞길 이야기’ 발간

    서울역사편찬원이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 앞길이 600년간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핀 ‘광화문 앞길 이야기’를 발간했다고 24일 밝혔다. 이 책은 광화문 일대 변천사를 조선시대·근대·현대로 시기를 나눠 살펴본다. 문학·영화·지도·대중가요·그림 등에 나타난 광화문 앞길의 변화상을 다룬 글도 실었다. 조선 왕조는 한양 천도 이듬해인 1395년 경복궁을 건립한 뒤 광화문 앞쪽에 의정부와 육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이 있는 ‘관청거리’를 조성했다. 일제강점기 이 일대는 ‘광화문통’으로 불리다 광복 직후에는 세종로로 명칭이 바뀌었다. 1970년 정부종합청사(현 정부서울청사)가 건립되고, 그 맞은편에는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 대사관으로 사용되는 쌍둥이 빌딩도 세워졌다. 1970년대 후반부터 현대빌딩과 교보빌딩 등 민간 상업시설이 들어서면서 고층의 민·관 건물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서울시는 작년 말부터 더 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향유할 수 있도록 광화문광장을 넓히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이 책이 광화문 일대가 시민들과 더욱 친숙한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책은 서울시청 시민청 지하 1층 ‘서울책방’에서 구매할 수 있으며,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hitory.seoul.go.kr)에서 1월부터 전자책으로도 볼 수 있다.
  • 박기열 서울시의원, 2021년 한류문화대상 의정부문 수상

    박기열 서울시의원, 2021년 한류문화대상 의정부문 수상

    서울시의회 도시안전건설위원회에서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박기열 의원(더불어민주당, 동작3)은 20일 목동 대한민국예술인센터에서 한류닷컴이 주최한 ‘2021년 한류문화대상 시상식’에서 의정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한류문화대상을 수상한 박 의원은 10대 전반기 부의장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외국기관과의 교류 공로를 인정받았다. 박 의원은 “과거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선진 문물을 모방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방탄소년단 해외 공연에 발 디딜 틈 없이 외국 팬들이 열광하고 있고, 오징어게임 영상은 세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세계 문화를 선도하고 있어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예전과 달라진 것을 많이 느끼고 있으며, 의정 활동에 있어서도 해외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적극적으로 대한민국을 널리 알리도록 노력하겠다”고 수상 소감을 말했다. 2021 대한민국 한류문화대상 시상식은 의정부문, 언론부문, 대중가요부문, 연기자부문, 예능인부문, 대중문화부문 등으로 분류하여 매년 분야별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 [씨줄날줄] 투잡 예비군/김성수 논설위원

    [씨줄날줄] 투잡 예비군/김성수 논설위원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1922년 발표된 소월(素月)의 시를 가사로 붙인 대중가요 ‘개여울’은 작곡가 이희목씨가 만들어 가수 김정희씨가 1965년에 처음 불렀다. 이후 1972년 정미조씨가 리메이크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월남한 작곡가 이희목씨는 군가도 많이 만들었는데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로 시작하는 ‘향토예비군가’도 그의 작품이다. 1968년 4월 1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면서 만든 노래다. 예비군은 그해 1월 21일 북한 최정예특수부대인 124부대 소속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가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 계기가 돼서 만들어졌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잠시 운영했던 호국군이 예비군으로 변신한 것이다. 우리나라 예비군은 현재 275만명이다. 숫자는 적지 않지만 전투력을 발휘하기에는 미흡하다는 게 공통된 지적이다. 올해 예비군 예산은 2346억원으로 전체 국방예산 52조 8000억원의 0.4%에 불과하다. 그렇다 보니 예비군부대는 심지어 2차 세계대전 때의 견인포 등 70년 이상 된 낡은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병역자원이 줄면서 예비군도 2030년대 말 이후엔 대폭 감소가 불가피하다. 2040년엔 94만 4000명으로 지금보다 무려 170만명 이상이 줄어들 전망이다. 우리나라 예비군은 전 세계 예비군 보유 국가 중에서 교육·훈련 일수도 가장 적다고 한다. 한국의 예비군 동원훈련은 연간 2박3일인데 대만은 30일, 미국은 38일, 북한은 40일이고, 이스라엘은 무려 55일에 이른다. 인원도 줄어드는데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짧고 형식적인 예비군훈련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나라도 내년부터 전역 군인이 최장 6개월간 예비군으로 일하며 하루 일당 15만원을 받는 이른바 ‘투잡 예비군’ 제도를 본격 시행한다. 미국처럼 예비군이 평소엔 생업에 종사하다 일정 기간 국방의 의무를 하는 방식이다. 2014년부터 시행 중인 비상근 예비군 제도를 세분화한 제도다. 장단기로 나눠 단기 예비군은 한 해 15일간 소집해 평일엔 일당 10만원을, 휴일엔 15만원을 준다. 장기 예비군은 연간 180일을 근무하며 일당 15만원이 주어진다. 하지만 4대 보험도 없고 1년의 절반을 훈련하면 다른 직업은 겸하기 어려워 지원자가 많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인구절벽 시대에 군복무 기간을 계속 줄이면서 나온 궁여지책인 셈이다. ‘예비군 정예화’를 위해선 여성의 군복무, 모병제 전환, 직업군인에 대한 적절한 보상 등이 더 논의돼야 할 것 같다.
  • 1년에 100회 ‘찾아가는 음악회’… 해경과 국민을 잇다

    1년에 100회 ‘찾아가는 음악회’… 해경과 국민을 잇다

    바다를 무대로 하는 해양경찰이 국민들과 만나는 공간에는 항상 해경 소속 관현악단이 있다. 멋진 음악과 노래로 해경을 알리고 국민과 해경을 이어 주는 관현악단을 이끄는 15년차 공무원 배지원(42) 경위를 만나 관현악단 이모저모를 들어 봤다. -해경 관현악단을 소개해 달라. “1986년 10월에 창단했으니 벌써 35년 역사를 갖게 됐다. 처음엔 30인조였는데 2006년에는 60인조까지 커졌다가 국방부 전환복무 폐지 논의로 의경 감축이 시작되면서 지금은 36명 규모로 유지되고 있다. 나를 제외한 35명이 의경이다. 단원들은 모두 음악 전공자들이고,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와 서울대 음대는 물론 외국 유학파까지 수준도 매우 높다. 실기와 면접을 합산해 1년에 20여명 선발하는데 평균 경쟁률이 5.5대1쯤 된다. 관현악단 소속이 되면 해경청에서 숙식하면서 20개월 동안 음악을 할 수 있으니 음악도들에겐 매우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해경 공무원이 된 계기는.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계속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음악공부를 위해 네덜란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말 우연한 기회에 해양경찰청과 인연이 닿게 됐다. 당시 해양경찰청 의경으로 복무하던 대학 후배에게 ‘바이올린 직원 특채를 하는데 적당한 사람 소개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적당한 사람을 찾던 중 어머니께서 ‘네가 직접 지원해 보라’고 권하셨다. 어머니 권유 때문에 시험을 봤고 운 좋게 합격했다. 그때가 2006년이었으니까 해경에 몸담은 지 15년이 됐다.” -순수음악 전공과 해경 관현악단은 얼핏 이질적인 느낌이다. “사실 순수예술을 전공하다가 해경 관현악단에 와 보니 일반인들 눈높이에 맞는 대중적 공연을 많이 하게 됐다. 초기엔 갈등이 없지 않았다. 유학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공연을 계속할수록 시민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뜻깊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14년 2월에는 전임 단장이 다른 보직을 맡게 되면서 단장으로 일하게 됐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 외부활동을 전혀 못 하다가 그해 11월 첫 외부공연을 했다. 부담이 컸지만 음악을 통해 조금이나마 국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공연을 계속하면서 더 큰 책임감도 느꼈다.”-외부공연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1년에 많게는 100회가량 외부공연을 했다. 연습하는 날보다 공연하는 날이 더 많을 정도였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평소에 연습해서 언제든 공연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외국 공연도 연평균 두 차례 정도 했다. 2년에 한 번씩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한러 해경합동훈련 공연이 대표적이다. 훈련을 마치는 날 교민을 초청해 함상 견학과 초청음악회를 하는데 공연 마무리로 항상 아리랑을 연주한다. 매년 국제항로표지협회 행사가 부산에서 열리는데 거기서도 공연했다.”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다면. “2008년 5월 인천에 있는 한 보육원에서 공연을 했다. 1시간 동안 동요와 대중가요를 연주했다. 연주를 마치고 철수하는데 여섯 살 아이가 우리 차에 타려고 하더라. 그 아이가 내 손을 잡고 놓아 주질 않더라. ‘또 언제 연주하러 올 거예요’라고 묻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2019년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교육부가 주관하는 교육기부박람회가 열렸을 때 영종초등학교 금산분교 학생 30여명과 합동 개막 연주를 했는데 국민들과 함께 공연하고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코로나19 이후 외부공연이 쉽지 않았겠다. “지난해부터 외부공연을 못 해서 안타까웠다. 다행히 지난 10월 22일 인천 송도에 있는 겐트대학 벨기에문화축제 초청공연을 한 게 코로나19 이후 첫 외부공연이었다. 당시 ‘쇼미더머니’ 우승자 출신 단원인 비와이(BewhY)가 해경 제복을 입고 관현악단과 함께 랩 공연을 했다. 당시 반응이 정말 엄청났다. 지난 11월 5일부터 매주 금요일 본청 로비에서 오전 11시 50분부터 낮 12시 40분까지 마티네 콘서트(프랑스어로 낮에 하는 공연이라는 뜻)를 시작했다. 19일에는 수능을 끝낸 수험생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차원에서 인천 송도에 있는 국제캠핑장에서 공연을 했다.” -앞으로 의경 채용이 사라질 텐데 관현악단 구성은 어떻게 할 계획인가. “의경 업무를 직원이 하지 않는 이상 지금 같은 악단 구성이 힘든 게 사실이다. 20명 규모라도 유지해야 빅밴드 형태가 가능한데 그러려면 해경 차원에서 직원으로 채용해야 한다. 현재 내부 논의 중이다.” -해경 관현악단이 중요한 이유는 뭐라고 보나. “해양안전 문화를 확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구명조끼 캠페인, 생존수영 등 교육은 많이 하는데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해경을 알리는 건 사실 부족하다. 그 빈자리를 연주를 통해 채워 문화로 다가갈 수 있다. 국제협력의 중요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도 있다. 해양경찰은 외국에 갈 때 한 나라가 움직인다고 표현한다. 국격을 보여 주는 게 해경 함정인데, 관현악단 공연을 통해 국격을 높이고 해양 협력을 증진하는 역할을 한다. 군 의장대가 군의 수준을 과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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