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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3 총선 핫클릭] “표심 한번에 사로잡아라”… 여야 로고송 경쟁

    [4·13 총선 핫클릭] “표심 한번에 사로잡아라”… 여야 로고송 경쟁

    여야가 앞다퉈 4·13총선을 겨냥한 ‘로고송’ 띄우기에 나섰다. 대중가요를 활용한 선거용 로고송은 ‘이미지 정치’를 부추긴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각인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잡았다. 새누리당은 예능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의 대표곡 ‘픽미’(pick me)를 전면에 내세웠다. 노래 속 후렴구 ‘픽미’를 여당 후보에 대한 지지와 연결시켰다. 태진아의 ‘잘 살 거야’, 김필·곽진언의 ‘뭐라고’, 장윤정의 ‘올래’, 박강수의 ‘다시 힘을 내어라’, 설운도의 ‘사랑의 트위스트’ 등도 로고송에 포함됐다. 젊은층부터 노령층까지 다양한 유권자의 기호를 고루 반영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더불어민주당은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의 심사위원 겸 작곡가 김형석씨가 만든 ‘더더더’를 앞세웠다. ‘더더더’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가사를 ‘더불어’ 등으로 개사해 후보들이 활용하도록 했다. 이문세의 ‘붉은 노을’, 클럽 음악인 제시 마타도르의 ‘붐바’ 등도 로고송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국민의당은 만화 주제가인 ‘로봇 태권브이’를 로고송으로 확정했다. 당 관계자는 “따라 부르기 쉽고 밝은 분위기”라고 채택 이유를 설명했다. 정의당은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7’ 출신으로 ‘흙수저 밴드’로 통하는 중식이밴드의 ‘여기 사람 있어요’와 ‘아기를 낳고 싶다니’ 등을 로고송으로 채택했다. 이 노래들은 모두 청년들의 서글픈 현실을 담고 있다. 심상정 상임대표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당임을 알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선거 홍보 수단으로 로고송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대선 때부터다. 당시 노태우 후보는 애창곡 ‘베사메무초’ 등을 로고송으로 썼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내세운 DJ DOC의 ‘DOC와 함께 춤을’이 히트하면서 로고송이 보편화됐다. 최근에는 로고송으로 트로트가 대세로 자리잡았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멜로디의 트로트는 중독성이 강한 데다 개사가 쉽고 모든 연령층을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대선과 2012년 대선 때 각각 이명박, 박근혜 후보는 트로트 가수 박현빈의 ‘오빠만 믿어’와 ‘샤방샤방’ 등을 로고송으로 활용했다. 박현빈은 “선거 로고송 1000곡 이상을 녹음했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대중가요로 탄생한 직지

    대중가요로 탄생한 직지

    “서원(청주의 옛 이름) 땅에 이는 바람 흥덕사에 머무르니 직지 꿈속에서 깨어났네 천년 세월 살아 숨 쉬는 세상의 빛 영원하리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가 나왔다. 향토 작곡가 문장대(63)씨는 직지의 가치를 알리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직지 원본이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가요 ‘천년의 혼 직지여’ 싱글앨범을 발매했다고 8일 밝혔다. 작사와 노래는 ‘알랑가 몰라’를 부른 전통가요 가수 이진옥(60)씨가 했다. 문씨는 “조상들의 슬기로운 지혜에 리듬을 붙이면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아 노래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문씨와 이씨는 노래 홍보를 위해 청주 성안길과 1377년 직지를 인쇄한 청주 흥덕사 등에서 콘서트를 가질 계획이다. 이들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앞에서 공연하는 대형 프로젝트도 구상하고 있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직지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 탄생

    직지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 탄생

    “서원(청주 옛 이름)땅에 이는 바람 흥덕사에 머무르니 직지 꿈속에서 깨어났네 천년 세월 살아 숨 쉬는 세상의 빛 영원하리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가 나왔다. 향토 작곡가 문장대(63)씨는 직지의 가치를 알리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직지 원본이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가요 ‘천년의 혼 직지여’ 싱글앨범을 발매했다고 8일 밝혔다. 작사와 노래는 ‘알랑가 몰라’를 부른 전통가요 가수 이진옥(60)씨가 불렀다. 문씨는 “조상들의 슬기로운 지혜에 리듬을 붙이면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아 노래를 만들게 됐다”며 “가볍지 않으면서, 누구나 따라 부르기 좋게 아리랑 선율을 얹었다”고 말했다. 문씨와 이씨는 노래 홍보를 위해 청주 성안길과 1377년 직지를 인쇄한 청주 흥덕사 등에서 콘서트를 가질 계획이다. 이들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앞에서 공연하는 대형 프로젝트도 구상하고 있다. 문씨는 “노래를 통해 오는 9월 청주에서 열리는 직지코리아 성공을 기원하는 등 음악으로 직지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씨는 “조상들의 혼을 담은 가요라 더욱 신중하게 만들었다”며 “출연이 예정된 공중파 방송에서 이 노래를 자주 부르겠다”고 말했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정호승 시인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정호승 시인

    “시인은 평생을 바쳐야 시 한 편이 살아남는다. 시는 당대의 고통을 반영할 뿐 아니라 초월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시로서의 생명은 짧을 수밖에 없다. 초월성은 서정을 통해 나타난다. 1970~80년대라는 겨울을 지나면서도 서정이라는 함박눈조차 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참혹할까 싶었다.” 겨울의 스산함은 사라졌지만, 새봄의 훈풍은 아직 깃들지 않은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앞. 정호승(66) 시인이 성당 앞 계단을 부지런히 내려왔다. 환갑보다는 고희에 더 가까운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맑은 얼굴을 하고서였다. 신자들에게 강연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요즘 ‘주’(시)와 ‘객’(강연)이 바뀐 것 같아 강연을 자제하려고 하는데 워낙 와달라는 요청이 많아 생각처럼 줄지는 않는군요.” 이날도 평생 그의 시를 관통해온 ‘사랑’에 대해 강연을 했다는 그는 성당 앞 카페에서 3시간 동안 시와 인생, 세월과 나눈 사랑 얘기를 들려주었다. -1963년의 어느 봄날. 까까머리 중2 교실에 짝짝짝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에 서 있던 나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친구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호승이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 거야.” 시(詩)라는 걸 난생처음 써봤던 그때, 국어 선생님은 내가 지은 시 ‘자갈밭에서’를 반에서 가장 잘된 작품으로 골라 낭독을 시키셨다. 그게 내가 시와 맺은 인연의 출발점이었다. -내가 다닌 대구 계성중학교는 박목월, 김동리 등 문단의 거목들을 많이 배출한 영남 지역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당시 교사들 중에도 현역 문인들이 꽤 있었는데 국어를 가르쳤던 김진태 선생님도 등단한 수필가셨다. 시 낭송이 있고 얼마 후 담임 선생님이 조회시간에 “교내 백일장에 누가 나가면 좋겠느냐”고 물으셨다. 국어 수업의 기억이 또렷한 반 아이들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나를 지목했다. 솔직히 난 그때 백일장의 뜻도 몰랐다. ‘백일 동안 어딜 좀 다녀오는 건가?’ -학교 운동장 너머 솔숲에서 백일장이 열렸다. ‘불’을 주제로 시나 산문을 쓰라고 했다. 나는 ‘등불’이란 제목으로 시를 썼다. ‘스스로 발광체인 나’로 시작했는데, 발광체는 바로 며칠 전 물상 수업에서 배웠던 단어였다. 덜컥 장원이 됐다. 상으로 학교 매점에서 쓸 수 있는 1000원짜리 종이표를 주었다. 그 맛있던 30원짜리 삼립 단팥빵을 30개나 사고도 돈이 남았다. 친구들에게 크게 한턱을 내고 나니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이런 식으로 하면 공짜 빵을 계속 먹을 수가 있겠구나’ 매월 교내 문예원고 모집 때마다 시를 써 보냈고, 그때마다 상을 받았다. 상금으로 공책도 사고 체육복도 사면서 든 생각. “이걸 평생의 일로 삼을 수도 있겠구나.” -당시 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백일장 장원의 여세를 몰아 ‘석의 심정’이라는 제목의 산문을 보냈더니 우수작으로 뽑혔다. 이후 고교 시절까지 계속 글을 보냈고, 그때마다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박남수, 박목월, 박두진 등 쟁쟁한 시인들이 직접 나의 시에 대해 평을 해 주셨다. 그분들의 평을 보니 가슴이 뛰었다. 그런 식으로 시를 스스로 공부했다. -우리 집안의 뿌리는 대구다. 아버지는 대구농림전문학교를 나와 은행원이 되셨는데, 이 지방 저 지방 전근이 잦으셨다. 내가 6·25 전쟁이 터지기 몇 달 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것도 아버지께서 상업은행 하동지점에 근무하셨기 때문이다. 경기 평택 등지에서 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에 완전히 정착을 했다. 그때 명동 상업은행 본점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서울이 싫다며 고향으로 오셨다. 한참 후에 집안이 쫄딱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오게 됐는데, 만약에 그때 일찌감치 서울에 정착했더라면, 그래서 내가 계성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리고 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해준 ‘가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내가 중3 때 사업을 하겠다며 은행을 나오셨다. 하지만 마음만 앞섰지, 경영에 대한 감이나 수완은 없으셨다. 이를테면 당신이 운전도 못하면서 주변 사람 말을 듣고 택시회사를 차린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1년 만에 퇴직금을 전부 날리고 커다란 빚을 졌다. 난생처음 가난을 맛봤다. 부지런한 어머니 덕에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기마다 학비를 내는 게 벅찰 정도였다. -1967년 고3이 됐다. 대학엔 가고 싶은데, 앞이 안 보였다. 공부라도 잘해야 빚을 내서 대학 등록금 마련할 생각도 해볼 텐데, 내 성적은 딱 반에서 중간 정도였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경희대 문예장학생 제도였다. 경희대가 주최하는 백일장이나 전국고교생문예현상모집에 장원으로 당선되면 장학금을 받고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그해 9월 경희대 백일장에 나갔다. 하지만 나는 장원은커녕, 차상도 차하도 아닌 참방(參榜)에 머물고 말았다. 장려상쯤 되는 건데 그걸로는 문예장학생이 될 수 없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후일에 내 스승이 되신 조병화 선생은 “상위권에 올리자니 문제가 있고, 떨어뜨리자니 아깝다”고 평하셨다. 대구로 내려오는데 기차 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아직 고교생문예현상모집이 남아 있었다. 시 부문을 포기하고 평론 부문으로 종목을 바꿨다. 원고지를 100장 이상을 써야 하는데 시간이 빠듯했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 팔자에 없는 거짓말을 담임 선생님에게 해야 했다. “우리 호승이가 몸이 너무 아파서 1주일간 학교를 쉬어야겠네요.”(나중에 꾀병임을 알게 된 선생님에게 출석부로 머리를 맞아야 했지만…) 집안에 틀어박혀 나의 첫 평론 ‘고교 문예의 성찰: 고교시를 중심으로’를 완성했다. 그게 최우수작이 됐고, 1968년 3월 나는 당당히 경희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입학 장학금의 유효기간은 단 1년이었다. 장학금 규정상 2학년 이후에도 계속 받으려면 신춘문예 등을 통해 등단을 해야만 했다. 친구들이 신나게 놀 때 나는 학업을 유지하기 위해 자취방에서 도서관에서 시를 썼다. 그러나 당선의 문턱에서 계속 미끄러졌다. 한 해 휴학까지 했는데도 등단이 안 됐다. 친구들보다 군 입대를 일찍 했던 것도 등록금이란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군에서도 신춘문예에 계속 투고를 했다. 제대하기 직전인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로 당선이 됐다. “이제는 학비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겠구나.” -사람들에겐 막연한 선입견 같은 게 있다. ‘시인은 가난과 가깝고, 일상을 방기하곤 한다’는 인식이다. 난 그게 싫었다. “시인이라도 열심히 일하면 가난하지 않을 수 있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40대 초반까지 잡지사 기자 생활을 열심히 했다. 물질적인 여유가 있어야 시 창작을 위한 시간도 더 내고 공부도 더 많이 하면서 결과적으로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시인’은 생계 수단으로서의 직업이 안 된다. 아주 잘 팔리는 시집을 1년에 한 권씩 내더라도 생활이 안 된다. 나만 해도 시집 판매량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들 텐데도, 그것만으로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수준까지 벌지 못했다. 그래서 잡지사 생활 때 열심히 저축을 했고 그걸 위해 많은 걸 포기했다. 술도 자제했고, 밥은 회사 식당에서 먹었다. 운전도 못하고, 골프는 채도 한번 잡아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해서 아내와 두 아들을 굶기지는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고, 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76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해 서울에서 50명을 뽑는데 8등을 했다. 뒤늦게나마 내가 공부에 잠재력이 없진 않았구나 생각해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교사는 내 적성이 아니었다. 3년 정도 가르치다 잡지사 기자로 전환했다. ‘주부생활’, ‘샘터’, ‘여성동아’, ‘월간조선’ 등에서 일했다. 직장 생활에 치여 1987년까지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못했다.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가 1982년에 나오긴 했지만 이전에 써 놨던 작품들을 책으로 엮어내기만 한 것이었다. -1991년 월간조선에 사표를 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기자로서 다양한 분야에 대해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소설가에 대한 욕망이 한층 커져 갔다. 이미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위령제’라는 단편소설로 당선된 적도 있었다. 시인으로 등단한 상태여서 우리 아들 이름으로 냈지만. 그때 가진 생각이 “10년 뒤에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에 전념하자”는 것이었다. -서울대 근처의 오피스텔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다. 그런데,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스스로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문장에 물기가 없었다. 변변한 수입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니 생계도 어려워졌다. ‘내 문학적 기질은 소설이 아닌 시’라는 걸 깨닫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잘못하면 시도 못 쓰겠다” 싶은 두려움에 1996년 나는 소설을 떠나보냈다. 소설에 파묻힌 5년 동안 틈틈이 적어놨던 메모를 바탕으로 5개월 동안 시를 썼다. 그렇게 해서 나온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6개월 만에 10만부 이상이 팔렸다. 마음에 편해졌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나는 스스로 미당 서정주 선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미당을 통해 한국 시의 전통적인 문학성과 가락성 등을 배웠다. 군 복무 시절 친구로부터 서정주 시선을 빌렸다. 춘천 시내에 가서 좋은 노트를 산 뒤 시집의 맨 앞표지부터 맨 뒤 판권 기록까지 그대로 베꼈다. 그리고 필사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 필사본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시인은 평생을 바쳐야 시 한 편이 살아남는다. 시는 당대의 고통을 반영할 뿐 아니라 초월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시로서의 생명은 짧을 수밖에 없다. 초월성은 서정(抒情)을 통해 나타난다. 1970~80년대라는 겨울을 지나면서도 서정이라는 함박눈조차 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참혹할까 싶었다. 시대상황의 반영과 서정성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닌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내놓은 작품들이 ‘슬픔이 기쁨에게’, ‘맹인부부가수’,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등이다. 이 시들은 지금도 대중 속에서 살아있다. 20대에 목표로 삼았던 미당과 김수영의 결합이 어느 정도 성공하지 않았나 싶어 다행이라 여긴다. -내 시는 노래 가사로도 많이 쓰였다. 대중가요와 가곡 등 합쳐 60여곡 정도가 노래로 만들어졌다. 가수 안치환씨와는 몇 해 전부터 ‘안치환,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콘서트를 한 달에 한 번꼴로 열고 있다. 가장 처음 노래로 나온 건 이동원씨가 부른 ‘이별노래’다.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그 곡에 가장 애착이 간다. 안치환씨가 불렀던 ‘풍경 달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도 좋아한다. 김광석씨가 불렀던 ‘부치지 않은 편지’, ‘수선화에게’ 등도 기억에 남는다. -‘시는 노력이 아닌 선천적인 감각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에게 시는 철저히 노력의 산물이다. 내가 시를 쓰면서 100번이고 200번이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는 건 그래서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 인간의 삶 등을 접하고 그 이면을 보려면 자신만의 노력이 필요하다. 시라는 산은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다가가야 한다. 내가 시라는 산을 찾아야 산에 있는 나무를 껴안을 수 있고, 산길도 걸을 수 있다. 칠레의 유명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시가 나에게 찾아왔다”고 말했지만 난 단 한번도 그런 경험이 없다. -신의 도움이 있다면 10년 뒤에도 열심히 시를 쓰고 싶다. 지금 가슴 속에 시상(詩想)이 많다. 생의 마지막에 ‘이걸 다 쓰지 못하고 죽어서 아쉽다’는 생각은 안 하고 싶다. ‘전(前) 시장’이나 ‘전 국회의원’은 있어도 ‘전 시인’은 없다. 시인은 언제나 현직이다. 항상 시를 써야 시인이다. 김태균 사회부장 windsea@seoul.co.kr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정호승 시인은 김소월, 서정주 등을 잇는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다. 초·중·고 교과서에 그의 시가 20여편 실려 있고,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글판에도 지금까지 세 편의 시가 걸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대와 현실의 목마른 척박함에 발을 대고 서 있지만 위로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김승희 서강대 교수·문학평론가)자세를 꿋꿋이 유지하면서 김수영의 참여 정신을 서정의 틀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별들은 따뜻하다’ 등의 따뜻한 시로 힘든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의 손길을 건넸다. 대표 시선(詩選)으로는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이 있다. ▲대구 계성중·대륜고 ▲경희대 국문학 학사·석사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1973년) ▲소월시 문학상(1989년) ▲정지용 문학상(2000년) ▲한국가톨릭문학상(2001) ▲상화시인상(2006) ▲공초문학상(2008년)
  • 강동아트센터-아이넷방송 어르신 문화복지 업무협약

    강동아트센터-아이넷방송 어르신 문화복지 업무협약

    강동아트센터는 22일 아이넷방송과 지역 어르신들의 문화복지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강동아트센터는 공연이 없는 낮에 공연장을 무료로 빌려주고. 아이넷방송은 성인가요 공개방송을 촬영하면서 지역 어르신을 무료 초청하기로 한 것이다. 이해식 강동구청장은 “강동아트센터 공연장의 문턱을 낮추고, 주민들이 다양한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렬 아이넷 대표이사는 “수준 높은 공연 환경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해 대중가요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이명선 기자가 만난 사람] 김국환의‘타타타’ 원제목은 ‘바람이 부는날은’이었다?

    [이명선 기자가 만난 사람] 김국환의‘타타타’ 원제목은 ‘바람이 부는날은’이었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국민가수 김국환의 국민가요 ‘타타타’의 노랫말이다. “그래, 바로 그거야”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 양인자씨가 지었다. 24년전 1992년 전국 레코드가게를 지날 때면‘아하하…!’로 호탕하게 마무리짓는 웃음소리는 자조와 낙관의 인생을 표현하듯 우리네 뇌속에 다가왔던 그 시절 그 노래다. ‘타타타’는 1992년 초 최고 64.9%, 평균 59.5% 시청률의 당대 최고 인기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 삽입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김수현 작가가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 발굴한 노래는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 ‘보이지 않는 사랑’의 신승훈과 함께 김국환을 그해 최고의 가수로 올려놓았다. 또 생뚱맞게도 김국환이란 가수는 ‘은하철도 999’하면 생각나는 만화영화 주제가도 여러곡 불러 어린이들에게도 친근감이 많다. 세월유수라 했던가. 그사이 강산도 두번 넘게 변해 김국환이 이젠 고희를 눈앞에 뒀다. ‘타타타’와 ‘은하철도999’로 기억되는 국민가수 김국환을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19층에서 만나 45년 그의 노래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 무명시절이 꽤 길었다는데?-고교시절 콩쿠르대회에 여러번 나가 상품도 많이 탔다. 어느날 대천극장 무대쇼에 올라가 당시 유행곡인 진송남의 ‘바보처럼 울었다’를 불러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으며 대천일대가 들썩거릴 정도였다. 상경하여 서울 태평로 아카데미 음악감상실에서 4명이 겨루는 노래부르기 대회에서 대천촌놈인 내가 1등을 했다. 그러고나니 서울사람들도 노래솜씨가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MBC DJ 이종환씨를 알게 됐고 이 인연으로 당시 최고악단인 김희갑악단으로 스카우트됐다. 김희갑씨는 다른 이와 달리 학벌보다는 노래실력을 최고로 여겼다. 한때 펄시스터스, 조영남, 김세레나 등이 출연하는 부산해운대관광호텔서 MC를 보며 일하기도 했다. 이곳에 조영남씨가 있었는데 하루는 나에게 “국환아 너 가수하지 마라. 가수의 길이 얼마나 험한지 아냐”라며 극구 가수하는 걸 말린 적도 있다.  ⇒ 최고의 히트곡 ‘타타타’의 원곡제목이 ‘바람이 부는 날은’이었다?- 김희갑악단이라는 최고악단과 궁합이 잘맞아 일하는중에 어느날 주위에서 김악단에서 나오라고 꼬득였다. 근데 악단을 나온 후 일이 뜻대로 잘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김희갑악단과 인연이 돼서 공전의 히트곡 ‘타타타’를 부르게 된다. 애초 받은 곡명은 ‘타타타’가 아닌 ‘바람이 부는날은’이었다. 위일청이란 가수가 처음 이 노래를 어느 단막극에서 “바람이 부는날은” 제목으로 불렀고, 그다음에 조용필이 불렀다. 이후 나한테 기회가 왔는데 이때 ‘타타타’로 노래제목이 바뀌었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땐 어쩜 내가 살아온 인생하고 곡 빼닮았았는지 한번 듣고는 마음에 확 끌렸다. 처음엔 음향장비도 없어 숟가락을 갖고 노래연습을 했다. 2년동안 노래연습만 했는데 녹음하는데 또 2년이 더 걸렸다. 신곡취입하는 데만 모두 4년넘게 걸렸다. 근데 이즈음 저의 아버지가 한 말씀이 “김희갑이 걔는 왜 이렇게 노래취입이 늦냐?”라고 하셨는데 우연찮게도 그러고나서 얼마 안지나 음반이 나오기 전 애석하게도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 ‘타타타’ 노래가 “사랑이 뭐길래” 드라마곡으로 나온 경위는.- 김수현 작가가 어느날 차를 타고 라디오를 듣다가 가수이름은 잘모르겠는데 “옷한벌은 건졌잖소~”라며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기사에게 이 노래음반 좀 사오라고 했다. 근데 기사가 엉뚱하게도 잘못알고는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곡을 사왔다. 그래서 다시 보내 ‘타타타’를 사왔다는 일화가 있다. 이를 ‘사랑이 뭐길래’ 연출가한테 드라마에 넣어달라고 하니까 대중가요라 편파적이고 오해소지가 있을 수 있다며 거절당했다. 근데 김수현 작가가 끈질기게 넣어달라고 요청한 끝에 결국 드라마 삽입곡이 됐다.  ⇒ 김국환은 매니저가 없는 가수라고 하던데.- 근데 내가 처음부터 매니저를 두지 않았던 게 아니다. 이 무렵 불교방송 행사에 출연했던 적이 있다. 불교방송이라 방송담당자에게 출연료를 안받겠다고 사양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출연료를 매니저가 몰래 꿀꺽했다. 매니저를 한달 만에 아웃시키고 그 이후로 매니저를 두지 않았다. 노태우정부 때 주로 난 정부행사를 많이 했다. 어찌보면 난 대중음악계에서 사생아다. 드라마곡으로 한방에 갑자기 떴다고 연예계 한쪽에서는 이를 시기질투했다. 매니저가 없어 업소행사 출연하는 데 다소 불리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나이트클럽 업소에서도 ‘타타타’ 출연 요청이 거의 없었다. 업소가 춤추고 노는 곳인데 “네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나를 알겠느냐”라고 불러대면 가사가 영 안어울린다는 이유였다. 또다른 히트곡 ’우리도 접시를 깨트리자’ 역시 일부 야간업소 측에서 별로 안좋아했던 곳이 있다.  ⇒ 특히 만화영화 주제가를 많이 불렀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인 당시 마상원 MBC악단장이라는 분이 있었다. MBC일요큰잔치 전속악단장으로 서울 전농동에 살 때 마 단장이 추천해서 만화영화주제가를 불렀다. 우연잖게 ‘은하철도999’를 부르게 됐는데 성인가수인 내가 왜 이런 어린이들의 만화영화 주제가를 불렀는지 후회스러워 마 단장에게 내이름 석자를 지워달라고 한 적도 있다. 얼마전 MBC의 ’능력자들‘이란 예능프로에 나갔는데, 알고보니 내가 그때 부른 만화영화 주제가들이 미래소년코난, 축구왕슛돌이 등 무려 30곡이 넘었다. 종종 나이트에서도 은하철도999, 천년여왕 등 만화주제가를 부른다.  ⇒ 기억에 남는 팬들과의 사연이나 추억이 있다면?- 팬들과의 추억은 헤아릴수 없이 많다. 가장 생각나는 게 있다. 국기원 원장을 역임한 이승완씨가 나를 무척 좋아했다. 미국 뉴욕공연갔을 때다. 이승완 형님의 1년후배로 뉴욕에 거주하는 박동근씨라는 분을 같이 만났다. 뉴욕서 태권도 1인자일 정도로 유명한데 이분이 한번은 나를 보더니 ”내가 90년도 미국에서 먹고살기 너무 힘들어 죽고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옷한벌은 건졌잖소~”라고 흘러나오는 김국환의 ‘타타타’노래를 듣고 다시 용기를 얻어 열심히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고 얘기했다. 또 한분은 캐나다에 사는 교민으로 ‘타타타’CD를 갖고 와서 사인해달라고 부탁했다. 남편과 사별후 딸과 함께 사는데 ‘타타타’ 앨범속에 있는 ‘보랏빛욕망’이란 노래를 듣고 유언을 했는데, “내가 죽으면 김국환노래 CD를 묘지에 꼭 넣어달라”고 부탁했단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가수로서 뿌듯하고 가수되기를 참 잘했다는 묘미같은 걸 느낀다.  ⇒ ‘타타타’ 이후 25년이 지난 요즘 근황은?- 요즘은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가 많이 사라지고 별로 없다. 야간업소 문화가 없고 출연료도 비싼 편이라 노래하기가 쉽지 않다. 야간업소 말고 가요무대 등 방송출연과 지방행사, 산사음악회를 주로 다니고 있다. 최근 ‘달래강’이란 노래 신곡 음반을 냈다. “말이나 한번 해보지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그토록 꼭꼭 숨기면 하늘인 들 알 수 있겠니/ 날마다 그리워 흘린 눈물이/ 강이 돼도 말 못한 미련한 사람아/ 바람도 물새도 서러워 울고 간다/ 달래강 애달픈 사랑” 제13집 타이틀곡으로 ‘달래강’ 노래는 경쾌한 트로트풍이다. 미련할 만큼 말못하고 가슴에 담아둔 사랑이야기를 애잔하게 표현한 가사가 인상적이다. 달래강은 충주지역 강이름이다. 물이 달다고 하여 단냇물, 달물, 달강, 달래강이라 한다.  ⇒ 고희를 앞두고 있는데 앞으로 어떤 바람이 있는지.- 가수돼서 최정상에도 올라가봤다. 이제 고희가 다돼가는 나이에 그동안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씩이나마 갚아가며 살아야겠다. 가수가 바람이 뭐 특별한 게 있겠나. 앞으로 꾸준히 신곡발표해서 팬여러분들에게 내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또 지난해 못한 디너쇼도 올해는 꼭 한번 하고 싶다. 낙천적이라 아직은 건강하고 뒷동산에 올라다니는 걸 좋아한다. 산에 다니면서 노래 발성 연습하고 운동도 하고 일석2조다. 요즘 경기불황으로 ‘3포세대’이니 386세대의 무더기 은퇴로 우울한 시절인데 우리 모두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으니 이미 반은 성공한 인생 아닐는지. 25년전 우리네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던 불후의 명곡 ‘타타타’ 노래를 다시한번 불러보며 우리네 인생 별거아니라고 조금이나마 위안을 찾아보면 어떨까. ■ 가수 김국환은충남 대천에서 1948년 목수집안의 4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불렀다. 1969년 21살 때 김희갑악단에서 들어가며 본격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7년 ‘꽃순이를 아시나요’ 노래가 수만장의 앨범이 판매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나긴 무명생활 끝에 1992년 ‘타타타’로 일약 톱스타가수에 올랐다. ‘타타타’ 노래로 1992년 한국방송 대상, 서울가요대상 수상 등 한국가요상을 휩쓸었다. 그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신승훈과 함께 김국환은 그해 최고의 가수왕으로 우뚝섰다. 1997년 문화부장관상, 2008년 장한한국인대상 수상했고, 1982년 만화영화주제가 은하철도999, 미래소년코난, 축구왕슛돌이 등 30여곡을 잇따라 불렀다. 1998년 바람같은사람, ‘접시를 깨트리자’ 등 여러 히트곡이 있으며 최근에는 ‘내인생에 후회는 없지만’ 신곡 ‘달래강’ 등을 출시했다.  ■ 이력1969년 김희갑악단 입단, 1977년 김국환-최미나 옴니버스앨범 ‘꽃순이를 아시나요’ , 1978년 ‘바람꽃’, 1982년 만화영화주제가 ‘은하철도999’, 1991년 ‘타타타’, ‘우리도 접시를 깨트리자’, 1995년 ‘아빠와 함께 뚜비뚜바’, ‘옛사랑’, 1998년 ‘바람같은 사람’, 2002년 ‘숙향아’, 2004년 ‘사랑의 기도’, ‘유리부인’,  2005년 ‘주사위’ ‘어머니’,  2008년 ‘인생은 직진이야’, 2012년 ‘웃어버려’, ‘내인생에 후회는 없지만’, 2015년 11월 ‘달래강’  ■ 수상내역1992년 제3회 서울가요대상 대상, ‘타타타’ 노랫말 대상, KBS가요대상, 1993년 MBC 10대가수상, 대한민국영상음반 대상, 1997년 문화체육부장관표창(선행연예인), 2003년 대통령상, KBS 가요대상, 2005년 제7회 한국예술실연자대상 공로상, 2008년 제7회 장한 한국인상 대상, 2008.12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 홍보대사, 2011.07 제14회 보령머드축제 홍보대사  mslee@seoul.co.kr
  • [열린세상] 나만의 올곧은 ‘논리와 견해’를 가져야/구희진 대신자산운용 대표

    [열린세상] 나만의 올곧은 ‘논리와 견해’를 가져야/구희진 대신자산운용 대표

    연초부터 한국을 비롯해 글로벌 증시가 불안하다. 글로벌 경기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과 함께 원유 등 상품 가격의 변동 위험 등으로 심리적 경기지표들에서도 불안감은 나타나고 있다. 외국인들의 순매도로 국내 주식시장도 여전히 수급이 불안하다. 이처럼 시장의 변동성이 커질 때 장기 침체 전망 등 지나칠 만큼 부정적인 논리로 시장의 공포감이 재생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계부채로 인해 장기적으로 아파트 값이 반값이 될 것”이라거나 “원화 가치가 급락해 환율이 다시 1700원 수준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등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투자자들은 자산 가격이 어느 날 갑자기 반값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현상에서 가끔은 우리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즉 막연한 기대나 불안 심리를 갖기보다는 다양한 예측과 전망에 대한 구체적인 ‘논리와 견해’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후에 대비한 재무설계와 자산관리를 준비할 때 다양한 전망과 예측, 가능성 등을 고민한다. 쉬운 예로 중국 관련 투자를 할 때도 중국 경제 전망에 대해 너무 다양한 주장들이 있어 어느 방향에 맞추어 투자를 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이 필요해졌다. 누군가의 주장과 말만 믿고 의사 결정을 하기에는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의 다양한 주장에 대한 구체적 논리와 견해를 분석하며 공부하고 의사 결정을 하는 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느 대중가요 가사에 “넌 늙어 봤느냐? 난 젊어 봤다”라는 구절이 있다. 젊은 세대에 대한 냉소적인 뉘앙스의 일침이지만, 한편으론 무엇인가 경험했던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묻어나는 구절이다. 경험하지 못해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우리는 항상 불안해하고 걱정한다. 불안하고 걱정되는 미래를 좀 더 현명하게 준비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 모든 삶의 방식에서 나의 논리와 견해를 올곧게 하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예측들이 나오고 있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로봇, 디지털 플랫폼, 정보통신기술(ICT) 혁명 등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전망과 출판물들이 봇물처럼 나오고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 이러한 4차 산업혁명은 벌써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전개될 세상의 변화는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라지고 정확해질 것이다. 모든 것이 데이터로 관리되며 분석되고 그에 따른 대응 전략까지 구축되는 흐름이다. 우리 삶의 형태도 많이 변화할 것으로 본다. 금융시장의 환경도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급격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과거의 전통적인 금융 시스템보다는 핀테크, 클라우드 펀딩, 로보 어드바이저 등 새로운 금융시장 환경이 전개되고 있다. 과거의 변화는 오프라인 금융 거래에서 온라인 서비스로의 변화처럼 서비스 이용의 방법이 바뀌었다면 이제 서비스 방법 이외에도 자본의 조달, 운용, 관리, 투자 등 모든 금융서비스 부문에서 새로운 환경으로 급격히 변화가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데이터를 이용한 최적의 맞춤형 금융 서비스들이 제공될 것이다. 유행처럼 금융상품에 가입하고 남들의 견해에 의존하는 자산관리나 투자보다 자신의 환경과 조건에 맞는 자산관리가 필요한 때가 오고 있다. 이때 미래 예측에 대한 논리와 설득력 있는 견해가 판단 기준이 돼야 할 것이다. 미래는 항상 예측대로만 전개되지도 않는다. 그만큼 정확히 알 수 없기에 궁금하면서도 불안한 것이다. 우리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노후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투자자들은 미래가 기대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다. 이제 이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논리와 견해를 분석하며 준비하자는 것이다.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공부하고 분석하며 우리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 가자.
  •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굿바이 하숙집, 굿바이 내 청춘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굿바이 하숙집, 굿바이 내 청춘

    하숙생이 뭔지를 몰랐다. 유년 시절 나는 ‘하숙생=나그네길’로, 둘이 같은 의미인 줄 알았다. 가수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 때문이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로 시작되는 바로 그 노래다. 그 어린 시절, 나는 하숙생이 뭐 대단한 벼슬자리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다. 최희준 노래만 들리면 ‘목소리가 솜사탕 같다, 인상 좋다, 구수하다’ 등등 동네 어른들이 저마다 칭찬 일색으로 한 말씀씩 하셨기 때문이다. 무색무취한 목소리에다 찐빵같이 펑퍼짐한 특색 없는 얼굴을 달콤한 솜사탕과 비교하다니…,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까지도 찬양 일변도였다. 그뿐만 아니다. 당시 유행하는 대중가요를 따라 부를라치면 눈살을 찌푸리던 아버지도 하숙생을 부를 때만큼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은근히 만족해하시는 것이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유년 시절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수 최희준이 그 시절 보기 드문 대학을 졸업한 이른바 학사 가수, 그것도 이 땅의 모든 부모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는 것에 기인하고 있었다는 것은 철들고서야 알았다. 하숙생, 이 세 글자가 이촌향도, 우골탑의 지방 출신 대학생들에게는 하나의 통과의례쯤 되는 물기 어린 말이다. 요즘 세대에겐 생경하겠지만 하숙이란 말은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는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빤쓰’나 ‘난닝구’를 바꿔 입기는 보통이고, 고향에서 토종꿀이라도 올라오면 하룻밤 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하숙생끼리 둘러앉은 밥상 앞에서 소, 돼지고기를 ‘육군’으로, 계란과 닭고기를 ‘공군’으로, 생선을 ‘해군’으로 불렀던 풍경을 요즘 세대는 알기나 할까. 모두가 곤고했던 시절, ‘육군’ 반찬을 요구하다 하숙집 아줌마에게 쫓겨날까 봐 손발이 닳도록 빌었다던 하숙 친구들의 에피소드는 이제는 빛바랜 전설이 된 지 오래다. 하숙집의 아침은 재래시장의 골목처럼 시끄럽고 혼란스러웠다. 식사 시간에 조금 늦으면 맨밥을 물에 말아 깍두기로 때워야 한다. 늦잠을 잔 아침 식탁에 계란 프라이나 소시지 부침 등은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일단 먹고 다시 잔다’는 원칙은 하숙생들에게는 불문율이다. 국은 대개 콩나물국이고 반찬으로 두부조림, 마늘쫑이 곧잘 등장한다. 닭볶음이나 제육볶음은 누구 생일이 되어야 오르는 최고의 찬이다. 그래도 밥은 무한정 공급되었다. 방구석에 놓여 있는 전기밥통을 열고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쿠쿠도 쿠첸도, 일제 코끼리표(조지루시) 전기밥솥도 없던 시절, 하숙집의 밥은 시간이 지나면 누렇게 변색되고 냄새가 났다. 그러나 스무살 한창 나이, 대개 두 공기는 기본으로 하고 조금 당긴다 싶으면 세 공기도 마다 않던 혈기방장한 젊은 시절이었다. 하숙은 갖은 사연도 많았다. 연전에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 1994’도 예가 된다. ‘하숙집’을 배경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의 서울 생활과 순정을 다뤘다. 지금의 세대에게는 상상도 가지 않겠지만 드라마는 그 옛날 하숙집의 풍경을 비교적 잘 그려냈다. 하숙은 대개 학교 근처에서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슬리퍼를 질질 끌고 김치 냄새 풀풀 풍기며 이쑤시개를 꽂고 도서관에 나타나는 풍경이 낯설지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원칙에도 예외는 있다. 신촌 이화여대 일대 하숙집은 단연 성황이었다. 이 일대 하숙생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같은 집에 하숙하는 이대생을 한번 꼬셔 보려는 음흉한 목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이대 인근 대흥동 하숙집에서 이대생들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여학생 전용 하숙집에 있거나 아니면 다 큰 처녀를 하숙집에 두는 게 걱정됐던 고향의 부모들이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먼 친척집에라도 맡겨 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하숙집에는 사연도 많고 해프닝도 많았다. 덜컥 임신시키는 바람에 하숙집 딸과 결혼한 S대 법대 고시 준비생의 전설은 하숙집에 전해 내려오는 단골 얘깃거리다. 세월은 사람과 함께 간다. 이제 지금의 시대에 그 시절과 같은 하숙집을 찾기는 어렵다. 완연히 사양길이다. 편리하고 혼자만의 공간이 보장되는 원룸이나 오피스텔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하숙은 더이상 그 시절의 낭만을 사유케 하는 그 옛날의 공간이 아니다. 개인주의시대를 반영하는 나만의 공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젊은 날 추억의 장소는 항상 하숙집이고 복고 드라마의 배경은 늘 하숙집 풍경이다. 뿐만 아니다. 하숙집은 그 시절 남학생들에게는 욕망의 보금자리였다. 야한 상상을 하며 여자친구를 방으로 초대하거나 잠깐 동안의 아찔한 포옹을 꿈꾸는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신촌구락부라는 모임이 있다. 인터넷에 쳐 보면 ‘신촌 밤무대를 주름잡는 건달들의 모임’이라는 그럴듯한 설명이 나온다. 언뜻 들으면 무슨 조폭 단체 같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80년대 초입 대학 시절, 신촌 언덕배기 같은 하숙방에서 나뒹굴던 나의 하숙집 친구들의 모임이다. 하기야 친구 부친상에 ‘신촌구락부’ 이름으로 조화를 보냈더니 그동안 괴롭히던 직장 상사가 친구가 ‘조직’의 일원인 줄 알고 놀라 고분고분해졌다는 실제 상황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름만 거창한, 하숙친구 모임일 뿐이다. 그러나 하숙집 친구는 끈끈하다. 이른바 ‘한솥밥 먹은 사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또 한 해가 떠밀려 가고 새해가 밝았다. 신촌구락부란 이름 아래 하숙집 친구들이 새해 저녁으로 오랜만에 모였다.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풍요로운 음식을 마주하며 기성세대가 되어 다시 모였다.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구조조정이란 이름 아래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고민을 토로하고,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 스마트폰 앱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얘기하고,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 많은 화제 중에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그 옛날 하숙집에 관한 추억들이다. 지금보다 많이 불편하고 촌스러웠지만, 지금은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적인 감성들이 하숙을 경험한 이 땅의 중년들에게는 달콤 쌉싸름한 추억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기실 하숙은 갓 스물의 청춘들에게 완전히 독립된 성인이라는 착각을 준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친구들 덕분에 사투리 흉내 내기는 즐거웠고 선배들과 뒹굴거리며 포르노 테이프를 보며 성교육을 받았다. 화끈한 화면에 목이 타면 야쿠르트로 열기를 식히던 시절, “마찌노 아까리가/또떼모 끼레이네 요코하마….” ‘블루 나이트 요코하마’는 하숙집 단합대회 회식 때 단골 레퍼토리였다. 하숙집에서 뒹굴던 젊음들은 이제 시대의 끝자락에 밀려 나 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만 흘러가는 세월을 잡을 수는 없다. 그 시절이 그리운 건, 그 하숙집 골목이 그리운 건, 단지 지금보다 젊은 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거기에 우리들의 금빛으로 빛나는 청춘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년세세화상사(年年歲歲花常似) 세세년년인부동(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피는 꽃은 해마다 같건만은 사람은 해마다 만날 수 없음이여.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 문득 비감해진다. 굿바이 하숙집! 굿바이 내 청춘!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 [커버스토리] 탈북자들이 말하는 ‘대북 확성기’의 위력

    [커버스토리] 탈북자들이 말하는 ‘대북 확성기’의 위력

    “남측 철원군에서 들려오던 대중가요 노사연의 ‘만남’과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두 노래를 지금도 좋아합니다. 조금이라도 크게 들으려고 장교 여러 명이 산에 올라가 귀를 쫑긋 세우기도 했어요. 대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다들 ‘남측(남한)에 가고 싶다’는 생각 많이 하고 있었을 거예요.” 인민군 대위 출신인 김성민(54)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대북 확성기 방송의 ‘애청자’였다. 1999년 탈북한 그는 강원 창도군의 임남댐 건설에 동원된 병사들의 ‘충성심 고취’ 교육을 담당하는 예술선전대에서 복무했다. 김 대표는 8일 “아이로니컬하게도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대학생들에 대한 뉴스 때문에 탈북을 고민했다”고 회상했다. “대학생들이 정부에 대항해 데모를 했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그건 새로운 충격이었습니다. 남측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하는 자유국가임을 깨닫게 된 거죠. 몇 년 후 북한 정권이 정말 싫어졌을 때, 그때 들은 확성기 방송이 떠올랐고 남측행을 결심했어요. 2년간 들은 확성기 방송 내용이 잠재의식 속에 박혔던 거죠.” 1980년대만 해도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고달픈 병사들만 확성기 방송에 관심을 보였다는 게 탈북자들의 대체적인 전언이다. 자기들 체제를 비난하는 남측에 대해 저항감이 상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에 남측의 경제 발전에 대한 내용과 대중가요 방송이 대폭 늘어나자 출신성분이 좋은 장교들도 귀담아듣기 시작했다고 한다. 1998년 탈북한 김용화(63)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은 황해도 해주에서 중위로 복무했다. 그는 “남측에 대해 미제 식민지, 괴뢰군이라고 철저하게 세뇌 교육을 받았는데도 대중가요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졌다”고 말했다. “그 당시 ‘찔레꽃’, ‘울고 넘는 박달재’ 같은 노래를 군인들이 흥얼거리곤 했다”고도 덧붙였다. 그는 “남측 문화가 들어와 있지 않던 그 당시에도 확성기 방송만 듣고 탈북을 시도한 병사들이 있었는데, 이미 남측 문화를 맛본 장마당 세대에게 확성기 방송의 위력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설명했다. 대북 확성기 외에 대북 라디오방송에 영향을 받는 탈북자도 많다. 경기와 황해 접경 지역에서 7년간 군 복무를 하다 2011년 탈북한 윤모(28)씨가 그런 경우다. 그는 “얇은 군복을 입은 채 기껏해야 강냉이밥 한두 번,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버티는데 남측에서는 따뜻한 물과 전기도 맘대로 쓸 수 있고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방송을 듣고 많은 병사가 탈북을 결심했다”고 전했다. “고향이 함경북도인데 어릴 때부터 한국 예능 프로그램 ‘천생연분’과 ‘엑스맨’을 봤습니다. 하지만 방송국 세트일 뿐 실상은 남측 사람들도 헐벗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 대북 라디오방송을 6개월쯤 듣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중가요가 흘러나왔어요. 그런데 사랑을 다룬 노랫말에서 이상하게 탈북에 대한 열망이 생기더군요.” 윤씨는 “대북방송은 북한 병사들에게 마치 ‘금단의 열매’와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힘들고 굶주린 상황에서 환장할 만큼 당기기는 하는데, 자기들 입장에서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될 음식과 같은 것이란 얘기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알쏭달쏭+] 댄스vs수영vs달리기…칼로리 소모에 좋은 운동은?

    [알쏭달쏭+] 댄스vs수영vs달리기…칼로리 소모에 좋은 운동은?

    새해 목표로 다이어트와 운동을 꼽은 사람들에게 솔깃할 만한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영국 브라이튼대학 연구진은 24~38세 성인을 대상으로 수영과 달리기, 발레 등 다양한 종목의 댄스(또는 대중가요에 맞춰 추는 스트리트댄스)와 축구 등 다양한 운동을 동일하게 30분씩 하게 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심박수 및 소모 칼로리, 가속도 등을 측정할 수 있는 장치가 부착된 조끼를 입게 한 뒤 같은 시간동안 움직이게 했다. 이후 실험 참가자들의 몸무게와 나이, 신체등급 정도를 고려해 소모되는 칼로리의 평균치를 분석하고 이들의 심리적 상태를 체크했다. 그 결과 수영을 한 사람의 평균 칼로리 소모량은 249, 달리기를 한 사람은 264, 축구를 한 사람은 258칼로리가 소모된 반면 춤을 춘 사람의 평균 칼로리 소모량은 293에 달했다. 당시 춤을 춘 실험참가자들은 발레와 살사, 스윙댄스와 스트리트댄스 등 다양한 종류의 춤을 췄는데, 스트리트댄스에 참여한 사람들은 3.6㎞ 달리기를 한 학생들과 칼로리 소모량이 비슷했다. 발레는 1.2㎞, 현대무용은 1.6㎞를 달린 것과 운동효과가 유사했다. 또 춤을 춘 참가자들의 심리상태가 다른 운동에 참여한 사람에 비해 매우 긍정적이었으며, 부정적인 감정이었던 사람도 춤을 추고 난 뒤 기분이 개선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를 이끈 닉 스미튼 브라이튼대학 교수는 “우리는 특히 발레의 효과에 매우 놀랐다. 발레는 비교적 가벼운 강도의 움직임과 격렬한 운동과 같은 강도의 움직임을 동시에 수반한다”면서 “춤을 추는 것은 사회적 활동에도 영향을 미쳐 우리 몸의 건강을 지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킨텍스·꽃박람회 대박 행진… K컬처밸리 더해 ‘新관광한류’ 이끌어

    경기 고양시에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전시컨벤션 시설인 킨텍스가 있다. 고양시는 킨텍스 전시관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전시회를 잇따라 유치해 방송 영상콘텐츠산업과 마이스·관광산업을 육성하는 등 국제적인 신한류 관광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지난 8월 여의도 면적의 1.4배에 달하는 킨텍스와 호수공원 주변을 ‘관광특구’로 지정했다. 덕분에 관광객 유치를 위해 각종 규제가 완화되고 관광 여건을 개선할 수 있게 됐다. 이번 관광특구 지정을 계기로 한류월드~호수공원~라페스타~웨스턴돔을 연계한 고양 신한류 관광벨트가 조성된다. 고양시는 50억원의 도비 지원금을 받아 ‘K컬처밸리와 연계한 고양 신한류 문화·관광벨트 구축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문화창조융합벨트인 ‘K컬처밸리’도 진행되는데 2017년까지 약 1조원이 투자된다. 대중가요인 케이팝, 방송영상 콘텐츠인 K필름, 패션·헤어·뷰티 등 K스타일을 특화해 미국의 할리우드와 같은 대한민국 ‘신한류 스트리트’를 만들겠다는 각오다. K컬처밸리가 완공되면 국내외 관광객 증가에 따른 관광수익 창출과 영화·공연·미디어 산업의 건강한 선순환구조 구축이 가능해진다. 이를 통해 앞으로 10년간 25조원의 경제적 효과와 17만명의 고용창출이 예상된다. 대한민국 5대 대표축제로 선정된 고양국제꽃박람회는 사계절 꽃 축제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내년 5월에는 킨텍스에서 ‘국제로터리대회’가 개최된다. 국제로터리는 200개 이상의 국가에서 122만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세계적인 봉사단체다. 일본·대만 등 외국인 참가자 2만명을 포함해 5만명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댄스vs수영vs달리기…칼로리 소모량 가장 많은 것은?

    댄스vs수영vs달리기…칼로리 소모량 가장 많은 것은?

    새해 목표로 다이어트와 운동을 꼽은 사람들에게 솔깃할 만한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영국 브라이튼대학 연구진은 24~38세 성인을 대상으로 수영과 달리기, 발레 등 다양한 종목의 댄스(또는 대중가요에 맞춰 추는 스트리트댄스)와 축구 등 다양한 운동을 동일하게 30분씩 하게 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심박수 및 소모 칼로리, 가속도 등을 측정할 수 있는 장치가 부착된 조끼를 입게 한 뒤 같은 시간동안 움직이게 했다. 이후 실험 참가자들의 몸무게와 나이, 신체등급 정도를 고려해 소모되는 칼로리의 평균치를 분석하고 이들의 심리적 상태를 체크했다. 그 결과 수영을 한 사람의 평균 칼로리 소모량은 249, 달리기를 한 사람은 264, 축구를 한 사람은 258칼로리가 소모된 반면 춤을 춘 사람의 평균 칼로리 소모량은 293에 달했다. 당시 춤을 춘 실험참가자들은 발레와 살사, 스윙댄스와 스트리트댄스 등 다양한 종류의 춤을 췄는데, 스트리트댄스에 참여한 사람들은 3.6㎞ 달리기를 한 학생들과 칼로리 소모량이 비슷했다. 발레는 1.2㎞, 현대무용은 1.6㎞를 달린 것과 운동효과가 유사했다. 또 춤을 춘 참가자들의 심리상태가 다른 운동에 참여한 사람에 비해 매우 긍정적이었으며, 부정적인 감정이었던 사람도 춤을 추고 난 뒤 기분이 개선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를 이끈 닉 스미튼 브라이튼대학 교수는 “우리는 특히 발레의 효과에 매우 놀랐다. 발레는 비교적 가벼운 강도의 움직임과 격렬한 운동과 같은 강도의 움직임을 동시에 수반한다”면서 “춤을 추는 것은 사회적 활동에도 영향을 미쳐 우리 몸의 건강을 지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5) 민중가요와 노찾사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5) 민중가요와 노찾사

    2009년 4월 30일 늦은 밤, 서울 종로구 운현궁 뒤편 주점 ‘낭만’에 애절한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부르는 목소리는 각기 달랐으나 노래는 딱 한 가지로, 대중에게는 낯선 ‘부용산’을 번갈아 가며 부르고 들었다. 모인 사람들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정·관계, 문화계를 움직이던 쟁쟁한 인사들. 딱 한 곡을 두고 삼십여명이 젖 먹던 내공까지 다해 노래를 부르는 해괴한 풍경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비장감마저 흘렀다. 모두가 간절함을 더해 뽑아냈고 구석에서는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일간지가 전한 사연이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모두가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 며칠 전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등등 몇 사람이 ‘부용산’을 흥얼거리다 ‘누가 잘 부르는지 함 겨뤄 보자’고 의기투합한 것이 이날 풍경이었다. 노래는 오랜 세월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고 금지된 사연은 기구하고 애절하다. ‘부용산’은 본디 1947년 목포 항도여중 교사였던 박기동이 24살에 요절해 전남 벌교 부용산에 묻힌 누이를 추모해 지은 시다. 여기에 동료 음악교사 안성현이 곡을 붙였다. 안성현은 일반 대중에게는 낯설다. 그러나 그가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저 유명한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 슬픔을 애절하게 노래했던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자가 알려진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는 6·25 당시 월북했으며 북한 국립교향악단 단장을 역임했다고 전한다. 그런저런 이유로 ‘부용산’의 작곡자는 오랜 세월 미상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노래는 한국전쟁 당시 널리 퍼진다. 특히 전남에서 유행했던 이 노래는 ‘좌익’들에겐 자신들의 군가처럼 받들어지며 애창됐다. 실제로 지리산, 회문산 빨치산들이 달 밝은 밤이면 워낙 애절하게 불러 대는 바람에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잠을 설쳤다고 한다. 애당초 이념과는 무관했던 노래가 금지곡이 된 데는 이처럼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사실 빨치산들도 노래에 이념성을 넣어서 불렀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처지가 고달파서 불렀겠지만 여순 사건 등을 거치면서 노래 ‘부용산’은 당국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 채 80년대 저항가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80년대는 이렇듯 저항노래의 시대였다. 민중가요를 부르면 곧바로 당국에 끌려가던 시절. 그래서 사람들은 뒷골목 술집에서 주위를 살피며 숨죽여 노래를 불렀다. 민중가요는 80년대를 풍미했다. 노래는 역사의 현장에 청춘을 내던진 사람들의 비명에 가까웠다. 노랫말도, 곡조도 구슬프다. 그래서 운동권 노래를 듣게 되면 그 비장미에 온몸을 부르르 떨게 된다. 돌이켜 보면 권위주의 시대, 이른바 당국은 시시때때로 금지곡 명단을 발표하고 이에 맞서 운동권은 끊임없이 미래의 금지곡이 예정된 운동권 가요를 양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당국이 왜색가요를 금지하고 건전가요를 강요한 것과 같은 이치로 운동권은 팝과 대중가요를 부르는 선후배 동료를 부릅뜬 눈으로 경멸하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 대학가와 젊은 넥타이 부대들이 운동권 노래들만 불렀던 것은 아니다. 시작은 대부분 뽕짝이다. 어머니이임의 소오온을 노오코 도라아서얼 때에에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는), 누군가가 뽕짝 한 곡조를 뽑기 시작하면 대개 기본 한 시간은 간다. 노래가 끝날 때쯤이면 다른 노래가 등장하고 이렇게 시작된 노래는 목이 쉴 때까지, 안주로 시켜 놓은 짬뽕 국물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계속됐다. ‘미아리 눈물고개’부터 ‘눈물 젖은 두만강’, ‘울려고 내가 왔나’, ‘가련다 떠나련다’까지 이십대 청춘들이 흘러간 노래들을 뽑고 또 뽑아 댔다. 중국집 교자상이 흠집이 나도록 젓가락을 두드리다 보면 누군가는 꺼이꺼이 울었고 또 누군가는 탁자 위에 고개를 처박고 코를 골았지만 노래는 계속됐다. 허구한 날 불러 대다 보니 가사까지 외워 버린 그 많은 노래는 대개 구슬펐다. 떠나온 고향을 그리거나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는 곡들의 대부분은 대개 부모님 세대에 유행했던 노래들이다. 그러나 뽕짝으로 시작한 과 엠티나 직장의 단합대회에서도 밤이 이슥해지고 헤어질 때쯤이면 운동권 가요가 터져 나왔다. 취한 채 꽥꽥 소리를 지르다가도 마지막에는 당연하다는 듯 모두가 같이 불렀다. 혼자 시작했지만 곧바로 떼창으로 이어지는 게 운동권 노래들의 특징. 노래가 끝나면 한순간 숙연해지고 모두가 비감 어린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특히 김광석과 안치환이 번갈아 부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이 같이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찾사’를 기억해야 한다. 80년대 전설적인 민중가요들이 집대성된 데는 노찾사의 역할이 컸다. 6·29 선언에 따른 민주화 분위기 속에 등장한 87년 ‘노찾사’의 첫 공연은 당시로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사랑 타령이 공통 주제였고 서구 팝에 빠져 있던 그 시절, ‘노찾사’의 묵직하고 음울하면서도 뜨거운 노래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특히 ‘사계’는 당시 지상파 유명 프로그램의 피날레 뮤직으로 등장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여성 보컬과 건반의 경쾌한 연주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여공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표현하고 있다. 이후 거북이(터틀맨)에 의해 힙합 버전으로, 또 클럽하우스 버전으로 흥겹게 불렸다. 랩 가사도 발랄해서 골수 운동권으로부터 욕을 많이 먹기도 했지만 지금의 세대에 저항가요의 서정성을 알린 공은 인정해야겠다. 그러나 무거운 주제의식과 어두운 분위기는 운동권 노래의 한계가 된다. 시종일관 침울하다. 시대의 소외된 것들을 조명하는 민중가요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한계로 보이지만 대중성을 얻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금의 민주화 시대에는 극히 일부에서만 불릴 뿐 아쉽게도 그 위대했던 영광을 점차 잃어 가고 있다. 아득한 시절, 이 땅에 민주화란 말이 익숙하지 않았던 80년대 끝자락, 나는 신촌의 한 여자대학 강당에서 결혼했다. 거리에는 최루탄 냄새가 여전히 매캐하고 강요된 눈물이 멈추지 않던 시절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그날 결혼식의 가장 큰 이변은 축가였다. 초대된 소프라노는 칼날 같은 목소리로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로 시작되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렀고 ‘창살 앞에 네가 묶일 때 살아서 만나리라’로 끝나는 대목에서 하객들은 한순간 숙연해졌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용기가 없거나 모질지 못한 사람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만의 타는 목마름을 표현했고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성숙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냈다. 우울했던 80년대, 그래도 우리는 ‘좋은 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다’(The best is yet to be)는 시 구절을 새기며 살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살아 내었다.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이제 와서 문득 운동권 노래를 듣게 되면 비감해진다. 그리움은 강이 되어 맴돌아 흐르고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꿈도 간데없다. 2015년은 이제 멀리 재를 넘는 석양에 지고 있고 추억은 야윈 겨울 햇빛에 시들어 간다.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l.com
  • 스크린 위 연극, 무대에 선 영화

    스크린 위 연극, 무대에 선 영화

    연극이 스크린에 걸리고, 영화가 무대에 오른다. 장르로 치면 이웃사촌이라 이러한 전이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양방향 교류가 두드러지고 있다. 대중문화 팬 입장에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개봉해 잔잔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극적인 하룻밤’은 2009년 초연 이후 누적 관객 22만명을 자랑하는 연극이 원작이다. 몸이 먼저 만난 커플이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지난달 개봉한 ‘늙은 자전거’는 2010년 초연한 우리나라 대표 극작가 이만희의 연극이 원작. 괴짜 장돌뱅이 할배와 손자의 우연한 동거를 그렸다. 현실에 있을 법한 다채로운 사랑 이야기를 감성적으로 담은 ‘춘천 거기’(2005년 초연)와 1990년대 인기 대중가요에 스포츠 성장 이야기를 접목시킨 ‘유도소년’(2014년 초연)도 각각 ‘관상’을 연출한 한재림 감독의 우주필름과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의 JK필름에서 영화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극으로 먼저 상연된 인기 웹툰 ‘신과 함께’는 내년 상반기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연극이 스크린으로 옮아가 작품성은 물론, 흥행 대박까지 일군 전례가 수두룩하다. ‘이’(爾)를 원작으로 한 ‘왕의 남자’는 한국 영화 역대 두 번째로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날 보러 와요’를 영화로 만든 ‘살인의 추억’은 봉준호 감독을 일찌감치 거장 반열에 올려 놨다. ‘웰컴 투 동막골’과 ‘약속’도 연극에서 출발한 영화다. 이전에는 연극의 영화 진출이 수동적이었다면 최근에는 능동적인 흐름도 생겨나고 있다. 극단이 영화 제작에 뛰어든 경우가 나온 것. 지난해 ‘해무’에 이어 올해 ‘극적인 하룻밤’의 영화 제작에 참여한 연우무대가 주인공이다. 1977년 창립 이후 창작극의 외길을 걸어온 이 극단은 이미 ‘칠수와 만수’, ‘날 보러 와요’, ‘이’ 등을 통해 한국 영화에 큰 기여를 해 왔다. 유인수 대표는 “‘해무’는 원래 영화를 먼저 생각하다가 무대에 올린 작품”이라며 “최근 개봉한 ‘극적인 하룻밤’ 외에도 우리 극단이 선보였던 창작극 중 서 너개 정도가 영화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의 연극화는 연극의 본산인 대학로의 상업화 경향과 맞물리며 수년째 로맨틱 코미디가 주도하고 있다. 대학로에서 데이트를 하는 커플들을 겨냥해 인기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연극화가 활발하게 진행된 것. 2000년대 이후 인기를 모았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 상당수가 연극으로 상연되고 있다. 올겨울에도 ‘작업의 정석’, ‘연애의 목적’, ‘엽기적인 그녀’ 등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 물론, 사극 ‘광해, 왕이 된 남자’, 멜로 ‘만추’ 등 궤를 달리하는 연극의 영화화가 진행되기도 했다. 최근엔 영화로 익숙한 해외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고 있어 눈길을 끈다. 현재 상연 중인 ‘엘리펀트 송’과 내년 1월 초연되는 ‘렛미인’이다. 실종사건을 둘러싼 두뇌 게임을 담은 ‘엘리펀트 송’은 프랑스 연극이 원작이지만 캐나다 천재 감독 그자비에 돌란이 출연한 영화가 유명하다. 뱀파이어 소녀와 외톨이 소년의 사랑을 다룬 ‘렛미인’은 스웨덴 소설이 원작이지만 2008년, 2010년 만들어진 스웨덴, 미국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2013년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이 초연한 연극을 이번에 그대로 가져왔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열연한 박소담이 주연을 맡았다. 한 연극계 관계자는 “아무래도 제작자 입장에선 관객들에게 익숙해 실패할 확률이 적은 작품을 선택하기 마련”이라면서 “관객들이 지속적으로 연극을 관람하고, 창작자도 키울 수 있는 흐름이 생겨나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音食이라 불러다오… 셰프 만난 ‘꿀맛’ 공연들

    音食이라 불러다오… 셰프 만난 ‘꿀맛’ 공연들

    도대체 ‘쿡테인먼트’(Cook+Entertainment)는 어디까지 갈까. ‘먹방’(먹는 방송)을 뛰어넘는 ‘쿡방’(요리 방송) 프로그램으로 안방극장을 평정한 셰프들이 공연 무대로 자신들의 주방을 넓히고 있다. 셰프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강연식 토크 콘서트가 다수 열리기도 했으나 이제는 음악과 컬래버레이션을 이룬 공연까지 서서히 흐름을 이루고 있는 모양새다. ●24~25일 서울 더케이호텔서울 ‘에드워드 권 디너쇼’ 셰프가 엔터테이너로 나선 디너쇼가 우선 눈에 띈다. 호텔에서 콘서트를 보며 우아하게 요리까지 즐기는 디너쇼는 그간 가수들의 전유물이었다. 오는 24~25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더케이호텔서울에서 열리는 ‘에드워드 권 셰프 갈라 디너쇼’는 다르다. 해외 유명 호텔 수석총괄주방장 출신인 에드워드 권은 국내에서 스타 셰프 시대의 물꼬를 튼 인물. 가수의 디너쇼가 음악 중심이었다면 셰프의 디너쇼는 요리 중심이다. 호텔 주방에서 에드워드 권이 직접 요리하는 모습이 관객들에게 일부분 생중계된다. 또 식사 중에는 직접 무대에 올라 식재료와 조리법을 설명하는 등 관객과 소통하며 풍미를 보탠다. 식사 뒤에는 프로젝트 남성 듀오 옴므, JK김동욱, 홍경민, 알렉스가 40~50대에게 익숙한 대중가요를 열창하는 공연이 이어진다. 공연계 관계자는 “국내에선 역사가 20년 정도 된 가수 중심의 디너쇼는 형식이 고착화된 측면이 크다”며 “해외에서는 셰프가 엔터테이너인 갈라쇼가 많은데 요즘 국내 흐름을 볼 때 디너쇼의 새로운 흐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1일 장사익 등 출동 재야콘서트에서는 요리 퍼포먼스 세종문화회관은 오는 31일 장사익, 김건모, 바다, 윤형렬 등이 출동하는 재야콘서트의 한 부분을 요리 퍼포먼스로 꾸민다. 한 해를 정리하는 무대에 올해 절정을 이뤘던 쿡방을 올려보자는 취지에서다. ‘난타’와 ‘점프’를 연출했던 최철기 사단이 요리 소재의 논버벌 비트박스 뮤지컬 ‘비밥’을 15분가량 선보인다. 인기 셰프 중 한 명인 레이먼 킴이 음식을 만드는 영상물이 공연 비트에 맞춰 곁들여진다. 공연 끝 무렵에는 레이먼 킴이 완성된 요리를 직접 무대에 들고 나오고, 관객들에게 시식 기회를 제공한다. ●이한철, 12일 박준우 셰프와 ‘간식시간’ 콘서트 싱어송라이터 이한철은 오는 12일 동작구 대방동 복합문화공간 우나앤쿠에서 ‘올리브 쇼’ 등에 출연하고 있는 프리랜서 기자 출신 박준우 셰프와 함께 ‘간식시간’ 콘서트를 연다. 어린 시절의 가장 달콤한 시간을 주제로 꾸리는 이 무대에서 이한철은 추억의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부르고 박준우는 생크림과 과일 등으로 어른들을 위한 디저트(간식)를 만들어 관객들과 함께 나눈다. 한식 쪽도 예외는 아니다. 국립국악원은 정기공연 토요정담 등을 통해 전통 음식 전문가와 국악의 컬래버레이션 무대를 꾸준히 마련하고 있다. 요리 오디션 프로그램 ‘한식대첩’의 심사위원인 요리연구가 심영순, 궁중음식 연구가 한복려, 한과 명장 김규흔 등이 나와 국악 공연 틈틈이 전통 요리 비법을 관객들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국립국악원 관계자는 “국악 공연만으로는 어렵다거나 지루하다는 의견이 있어 요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요리를 접목시켰다”고 설명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요리가 여성의 의무가 아닌 남성도 할 수 있는 즐거움이나 놀이로 인식되는 셀프 힐링 트렌드와 맞물려 요리사들이 일종의 셀러브리티가 됐다”며 “쿡방을 통해 스타가 된 요리사들이 다른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분위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스타 요리사와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 피로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면서 “그만큼 트렌드 소비 속도가 빨라져 정리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대한민국 국회의원 최초 美 카네기홀 공연 김장실 의원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대한민국 국회의원 최초 美 카네기홀 공연 김장실 의원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지난 3일(현지시간) 전 세계 예술가들이 ‘꿈의 무대’로 꼽는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 구슬픈 한국의 대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객석을 가득 메운 60~70대 한국 동포들은 가슴에 맺힌 한을 쏟아내듯 펑펑 울었다. 카네기홀을 ‘눈물바다’로 만든 사람은 바로 김장실 새누리당 의원이다. 전문 아티스트가 아닌 공연자가 120년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카네기홀에서 ‘솔드 아웃’(SOLD OUT·매진) 스티커를 받으며 ‘대박’을 터트린 것 자체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지난 20일 김 의원과 만나 공연 기획 단계부터 성황리에 마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 중간중간 부르는 김 의원의 노래와 이야기가 함께 버무려져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했다. 김 의원은 “노래는 귀를 열게 하고 노래에 담긴 의미는 가슴을 적신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오래전부터 공직사회와 정계에서 대중가요로 시대를 말하는 노래꾼이자 이야기꾼으로 유명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섰는데. -국내 대중 가수 중 패티김, 조용필 등 최정상 가수들만 무대에 섰다. 전문적인 성악 훈련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가 선 것은 처음이다. 전 세계 국회의원 중에 누가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을 할 수 있겠나. 기록을 찾아봐야겠지만 없을 것 같다. →발상 자체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성사됐나. -우연히 부산의 한 방송국에 출연해 ‘부산과 대중가요’를 주제로 얘기하다가 노래를 했다. 성악을 전공한 방송 진행자가 ‘대중가요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에 대해 해박하고 노래가 직업 가수 뺨친다’며 그 자리에서 뉴욕에 있는 공연 기획자인 박준식 제이삭(JSAC) 대표이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게 지난 7월이었다. 이어 8월 초 한국을 방문한 박 대표와 식사를 같이 하다가 그 자리에서 노래를 3곡 불렀고 박 대표가 이에 만족해 공연이 성사됐다. 한국인의 가슴을 촉촉히 적셨던 히트 가요를 선곡해서 그 노래가 가지는 시대정신이 무엇이고, 당시에 일어났던 정치적 사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얘기했다. 거기에 노래를 만든 가수와 작사가, 작곡가, 음반 제작자와 팬들 사이에 있었던 뒷얘기를 통해 연예사적 재미를 더했다. 재미없는 노래에 재미있는 ‘당의정’을 입혀 관객들 입에 솔솔 녹도록 했다. →(인터뷰 도중 때마침 박 대표가 ‘매진’ 딱지가 붙은 공연 포스터를 들고 오자) 박 대표가 직접 공연 기획 과정을 말씀해 달라. -(박 대표) 제이삭은 뉴욕에 있는 공연 기획사다. 처음에는 카네기홀 공연이 연 2회도 힘들었는데 7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연 26회로 늘었다. 현재 국립무용단, 국립오페라단, KBS 교향악단 등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단의 해외 공연은 대부분 저희가 맡고 있다. 사실 처음에는 김 의원과의 미팅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제가 가장 반대했다. 카네기홀은 1년 전에 미리 대관 신청을 받는데 특히 올해는 개관 125주년이어서 대관 검열이 아주 까다로웠다. 그래서 김 의원을 만나기 전에 어떻게 거절할지부터 고민했다. 식사 자리에서 김 의원이 대뜸 노래의 스토리를 얘기하며 직접 3곡을 불렀다. 주변에 사람들도 많았는데 대놓고 열창을 했다. 특히 ‘동백아가씨’에 대한 사연을 들었는데 음악과 내용의 연결고리가 너무 좋았다. 광복 70주년이기도 해서 ‘이거다’ 싶었다. 미국 이민자 중에는 이산가족이 많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왔는데 영주권도 없고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된 한국인이 몇십만명 된다. 이들은 한국에서 부모님이 위독하거나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아도 못간다. 그렇게 이산가족이 된 사람들이 많다. 또 2~3세대 자녀들은 1세대들과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를 알 길이 없다. →카네기홀 측의 승인을 어떻게 받았나. -(박 대표)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도 한국 최고의 공연장이라고 까다로운데 드보르자크, 차이콥스키 같은 음악가들이 초연을 한 125년 역사의 카네기홀이니 얼마나 뻣뻣하겠나. 게다가 아티스트도 아니고 강연을 하겠다고 하는데…. 카네기홀 측에서 ‘이 사람 아티스트냐’고 물어봐서 ‘아티스트는 아닌데 노래를 잘한다’고 했더니 ‘안 된다’고 했다. 카네기홀 측도 공연이 망해 명예가 실추될까 봐 주시한다. 전문 아티스트 기록이 없으면 무대에 서기 어렵다. 그래서 그냥 대중가요가 아니라 ‘강연과 콘서트’로 콘셉트를 잡았다. 일제시대부터 해방이 되고 전쟁을 거쳐 다시 휴전이 된 모든 과정을 영문으로 번역해 기안을 올렸고 결국 승인받았다. →어떻게 매진이 됐나. -(박 대표) 공연 열흘 전 첫 언론 보도가 나갔는데 사무실 업무가 마비됐다. 이민 1세대, 1.5세대 등의 문의 전화가 쏟아졌다. 우리가 외국계 회사인 줄 알고 ‘아이 니드 코리안 토크쇼 티켓’(I need Korean Talk Show ticket·한국인 토크쇼 티켓이 필요합니다)이라며 간절한 목소리로 안 되는 영어를 더듬더듬 써 가며 전화를 걸어왔다. 돈을 받아선 안 되겠다 싶어서 40달러의 티켓 비용을 무료로 전환했다. 카네기홀 측에서는 공연 일주일 전에 홍보 포스터가 다 나갔는데 어떻게 무료로 하느냐며 반대했다. 우리가 완강하게 밀어붙이자 카네기홀 측에서 ‘공연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냐’고 묻더라. 그래서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너무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제가 카네기홀에서만 170회 공연을 기획했는데, 매진된 건 처음이다. 아티스트들은 각성해야 한다. 하하. →관객들 반응은 어땠나. -공연 초반부에 관객들이 점잖게 앉아 있길래 다 같이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카네기홀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한국인이 막걸리 마시며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젓가락을) 두들기는 60~70년대 정감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공연 내용은 어땠나. -해방 이후 70년을 10년 단위로 끊어서 보면 그 시대에 발생한 정치·사회적 사건에 시대정신이 드러난다. 1940년대는 아무래도 해방의 기쁨보다 더 큰 게 없다. 식민 지배가 30년이 넘었고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한다고 하니 독립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방이 됐다. 얼마나 기뻤겠나. 해방을 기뻐하는 노래가 막 쏟아져 나왔다. ‘사대문을 열어라’ ‘울어라 은방울’ 같은 노래들이다. 가장 상징적인 노래는 ‘귀국선’이다. 일본에 동포 230만명이 살고 있었고 중국에 200만, 기타 수십만명이 외국에 살고 있었는데 귀국선은 귀환 동포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는 주요한 통로였다. 그 배를 타고 돌아오는 이들에게 좋은 나라를 만들어서 다시는 빼앗기지 말고 잘 살아 보자는 욕구가 있었다. 그런 욕구가 가사에 잘 표현돼 있다. →1950년대에는 어떤 노래가 상징적인가. -한국전쟁보다 더 1950년대를 특정 짓는 사건은 없다. 중공군이 내려왔을 때 유엔군과 국군은 6중, 7중으로 포위당해 독 안에 든 쥐처럼 죽을 지경으로 집중 타격을 받았다. 한국 지형은 동고서저형이어서 육로 철수가 어려웠다. 그래서 흥남부두에서 해상 철수를 했다. 자유를 잠시 맛본 이북 사람 수십만명이 ‘우리도 데려가 달라’고 했다. 대규모 수송선을 수백척 동원해서 무기를 버리고 군인 10만명, 민간인 9만 8000명을 태우고 내려왔다. 그때 많이들 헤어졌다. 부산에 홀몸으로 내려온 여성분에게서 피란 중 가족과 헤어진 구구절절한 사연를 들었다. 손잡고 같이 타자 했는데 서로 타려고 밀치고 당기다가 밀려서 아이 손, 마누라 손 놓고 ‘어디 갔노, 어디 갔노’ 찾다가 어디 가 버렸는지 몰라 펑펑 울고…. 그 감정을 잘 표현한 노래가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다. 또 부산에서 울다가 죽을 순 없으니까 국제시장에서 장사하고 구두도 닦으며 살았다. 오며 가며 눈이 맞았던 경상도 처녀하고 정을 주고 살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헤어졌던 부모, 형제, 처자식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 서울로 떠났다. 그러면 경상도 처녀가 가지 말라며 붙들고 늘어진다. 서울 가면 헤어진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싶은데, 차창 밖으로 보니까 정들었던 경상도 아가씨가 울고 있고…. 그런 사나이의 복잡한 심경을 잘 표현한 노래가 남인수가 부른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이승만 정부가 사사오입, 발췌개헌을 하면서 계속 권위주의 정부로 치달았다. 이승만 대통령을 이길 수 있는 후보로 신익희 선생이 나섰는데 1956년 5월 5일 오후 5시 5분 서울역에서 출발한 호남선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정권 교체의 꿈이 사라지고 허망한 상태가 됐다. 그때 손인호 선생의 ‘비 내리는 호남선’ 노래에 대한 유언비어가 돌았다. 신 선생 부인이 너무 억울해 그 노래를 작사를 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었다. 그런 풍문이 노래 판매를 촉진시켰다. →1960년대의 대표곡은 무엇인가. -경제 개발로 산업화가 본격화돼 촌에서 빈둥빈둥 놀던 사람들이 도시로 와서 출세를 많이 했다. 출세를 사회학에서는 ‘사회적 계층 상승’이라고 한다. 돈을 많이 벌거나 고시에 합격하거나 좋은 집안과 혼인을 맺는 것, 3가지가 전통적인 출세 방식이다. 조선시대 500년간 쌓여 왔던 계층 구조가 일제시대 때 반쯤 파괴됐고 한국전쟁으로 계층구조가 거의 다 파괴됐다. 특히 1960년대에는 남자가 출세를 하면서 그렇지 못한 여인과 간격이 많이 벌어졌다. 출세한 남자는 도시의 좋은 집안에서 얼른 낚아채 가 버린다. 그러면 시골 보리밭에서 사랑을 나누고 백년가약을 맺었던 여인과는 멀어진다. 이런 식의 이별이 워낙 많았다. 1960년대 초·중반의 영화와 소설, 대중가요, 라디오 드라마의 60~70%가 서울로 간 남자는 출세해서 예쁜 집 규수를 얻고 시골에서 사랑했던 여인은 버림받고 그 여인은 사회적 장벽으로 인한 거리감 때문에 남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상황을 다뤘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남진의 ‘가슴 아프게’,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의 전형적인 도식이다. 1964년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와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동백아가씨’가 엄청나게 히트를 했다. 왜색조라며 노래가 나온 지 1년도 안 돼 방송금지가요가 됐는데도 20만장이 팔렸다. 3년 뒤인 1968년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음반 제작 금지를 당했는데도 200만장이 팔렸다. 음반을 낸 지구레코드사 고 임정수 사장의 얘기다. 한국 가요 사상 가장 히트한 노래가 동백아가씨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김장실 의원은 김 의원은 국내 문화·체육계의 대부 격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과 정치특보 등을 지냈다. 문화관광부 예술국장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사무국장에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차관까지 역임했다. 이후 예술의 전당 사장에 임명돼 문화 공연계의 발전에 기여했다. 현재 대한장애인농구협회장을 맡고 있으며 2014년 인천세계휠체어농구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김 의원은 내년 총선에서 부산 출마를 준비 중이다.
  •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늦가을 칠갑산 곳곳에 콩 볶는 소리… 추억에 취해볼까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늦가을 칠갑산 곳곳에 콩 볶는 소리… 추억에 취해볼까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1980년대 빅히트한 대중가요 ‘칠갑산’, 그곳에서 콩 축제가 열린다. 가사처럼 칠갑산 주변은 여전히 콩 주산지고, 산허리의 천장호 등 청양군 곳곳에 호미 들고 수건을 두른 ‘콩밭 매는 아낙네’ 상이 여럿 있다. 두 번째 맞는 축제지만 청양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 맞아떨어져 벌써 성공 조짐이 보인다. 신설하는 축제마다 대박을 터뜨리는 충남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 칠갑산 기슭 알프스마을이 개최하는 것도 이런 예상을 확신케 한다. 알프스마을은 오는 13~15일 제2회 칠갑산 콩축제를 연다. 콩 수확기에 맞춘 전통 농촌 마을의 축제다. 10일 찾은 알프스마을은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운동장만 한 행사장에서 여러 주민이 힘을 합쳐 천막을 치고, 탁자 등을 놓느라 분주했다. 조리기구와 맷돌을 설치하고, 축제 때 판매할 곡식을 옮기는 모습도 보였다. 축제가 열리면 주차장에서 이양기 기차가 방문객을 맞는다. 손님을 태울 수 있도록 모내기 장비를 개조했다. 농촌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행사장까지는 1㎞, 늦가을 칠갑산을 감상할 수 있어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다. 행사장에는 무르익은 검갈색의 콩포기 무더기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다. 방문객이 도리깨질로 콩을 타작하도록 한 것이다. 키로 타작한 콩을 까부를 수도 있다. 행사장 한쪽에 장작 모닥불을 피워 놓는다. 쌀쌀한 날씨에 굳은 몸을 녹이고 콩을 구워 먹을 수 있다. 밤과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좋다. 콩알 새총으로 조롱박 과녁을 맞히고, ‘펑’ 소리와 함께 치솟는 연기 속에 콩이 튀겨지는 장면도 볼 수 있어 유년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이끈다. 메주 만드는 체험 행사도 열린다. 삶은 콩을 내리쳐 메주를 만들어 볼 수 있도록 절구를 비치했다. 손으로 메주 모양을 빚는 작업은 어린이들에게 인기다. 물에 불린 콩을 맷돌로 갈아 두부를 만드는 체험 프로그램도 있다. 올해는 콩 강정 제조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볶은 콩에 물엿을 부어 만드는 작업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이곳에 오면 콩을 원료로 하는 각종 요리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서리태와 종콩(메주콩) 등 50여종을 선보이는 콩 전시회도 열린다. 대표 건강식품인 콩을 소재로 한 축제로 손색이 없다. 칠갑산 주변에서 기른 청정 콩도 살 수 있다. 청양산 콩으로 만든 청국장, 된장, 고추장과 조 등 청양산 잡곡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노승복 알프스마을 기획팀장은 “중간 상인이 없는 직거래여서 시중가보다 20~50% 값싸게 청정 농산물을 판매한다”면서 “무엇보다 품질이 뛰어나고 믿을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볼거리도 적지 않다. ‘칠갑산’을 부른 가수 주병선이 축제 2일째인 14일 공연을 벌인다. 이 축제 홍보대사로서 손님도 직접 맞는다. 갖가지 장기를 가진 향토 예능인들이 각설이타령 등 공연을 펼치고 노래공연도 해 흥을 돋운다. 제기차기, 널뛰기, 그네, 공기놀이, 윷놀이 등 전통 놀이마당도 마련돼 있다. 외줄을 타고 행사장을 가로지르면서 칠갑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짚트랙은 스릴이 있다. 모든 행사가 가족 단위로 즐기기에 제격이다. 마을 주변에 천장호 출렁다리, 칠갑산 천문대, 장곡사 등 관광지도 꽤 있어 늦가을 여행지로도 그만이다. 콩 축제장에는 1인당 5000원짜리 쿠폰을 사야 입장할 수 있지만 사실상 무료다. 이 쿠폰으로 콩 등을 구입하거나 행사장에서 판매하는 청국장과 두부김치 등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어서다. 부담이 전혀 없는 입장료다. 청양은 충남 생산량의 11%를 차지하는 콩 주산지다. 2951개 농가가 713㏊에서 모두 1064t을 수확한다. 21억원어치다. 청양은 인구 3만명을 갓 넘길 정도로 충남의 오지고, 농산물 중에서도 더 촌스러운(?) 콩은 이 지역을 상징한다. 군도 콩에 정성을 쏟는다. 2005년 900여㏊에 이르던 콩 재배가 갈수록 줄자 2013년 콩 클러스터 사업에 착수했다. 100억원을 들여 콩 재배기반을 다지고, 체험·관광화로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것이다. 여전히 칠갑산 자락의 정산면과 대치면이 중심이다. 천장리 등 이곳 7개 마을 콩 경작자들은 ‘칠갑산 콩 발전협의회’를 구성해 이 사업을 이끌고 있다. 콩 축제도 알프스마을이 열지만 축제에서 쓰이는 콩 등은 협의회에서 지원한다. 황준환(53) 알프스마을 운영위원장은 “이곳 농민들이 직접 기른 최고의 콩만 내놓기로 하고 축제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신수명 청양군 주무관은 “콩밭 매는 아낙네는 할머니로, 호미는 기계로 많이 바뀌었지만 콩 주산지는 여전히 칠갑산”이라면서 “콩 축제가 콩의 체험·관광화와 소비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청양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김욱동 창문을 열며] 낯 뜨거운 서울시의 새 브랜드

    [김욱동 창문을 열며] 낯 뜨거운 서울시의 새 브랜드

    교통이 혼잡한 곳에는 으레 교통 신호판이 있어 보행자와 차량, 차량과 차량의 혼란을 막는다. 가령 건널목에서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차량이나 보행자는 멈춰 서고 파란불이 들어오면 다시 가던 길을 간다. 만약 이런 신호 체계가 없다면 도시는 차량과 보행자가 서로 뒤얽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언어에서는 이런 신호 체계를 ‘문법’이라고 부른다. 문법이란 특정한 언어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이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요 규칙이다. 만약 구성원이 언어적 약속이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마치 교통 신호를 위반한 것처럼 의사 소통에서 여러 가지 혼란이 야기된다. 최근 서울시에서 새로 만들어 낸 ‘I. SEOUL. U’라는 영문 구호를 보면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든다. 지난 13년 동안 사용해 오던 공식 도시 브랜드 ‘하이 서울’(Hi Seoul)을 버리고 그 대신 채택한 것이 바로 ‘아이 서울 유’다. 굳이 번역하자면 ‘나는 너를 서울한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SEOUL’이라는 고유명사를 동사로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안성맞춤’처럼 고유명사를 보통명사로 사용하는 경우는 더러 있어도 동사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경우도 ‘맞춤’이라는 낱말과 함께 사용해야 제대로 의미가 통한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시의 새 브랜드가 발표되자 여기저기서 ‘나는 너를 부산한다’느니 ‘나는 너를 인천한다’느니 하는 패러디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물론 영어 ‘I’와 ‘SEOUL’ 다음에 마침표가 찍혀 있어 SEOUL을 동사로 보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브랜드의 제작자는 “I 옆의 붉은 점은 열정을, U 옆의 푸른 점은 여유를 상징한다”며 서로 대비되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서울을 사이에 두고 공존하는 것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표어나 광고 문안에서는 낱말과 낱말 사이에 마침표나 쉼표를 찍어 의미를 강조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영어 구호보다는 덜하지만 영문 구호 밑에 적혀 있는 ‘나와 너의 서울’이라는 구호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영어 같은 서양어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어에서도 1인칭과 2인칭 대명사를 함께 사용할 때는 ‘나’보다는 ‘너’를 먼저 사용하는 것이 언어적 관습이다. 영어에서는 ‘you and me’라고 하고, 일본어에서도 ‘기미토보쿠’(君と僕)라고 한다. “나 혼자 걸어가면 쓸쓸한 길도 / 둘이서 걸어가면 외롭지 않아” 남진이 불러 히트한 대중가요의 제목도 바로 ‘나와 너’가 아닌 ‘너와 나’다. 그러므로 ‘나와 너의 서울’보다는 ‘너와 나의 서울’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일찍이 미국의 뉴욕 주는 ‘나는 뉴욕을 사랑한다’는 구호로 이미지 개선은 물론 경제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얻었다. 도시 브랜드의 원조라고 할 이 슬로건은 ‘사랑한다’는 동사 대신에 하트 모양의 아이콘을 사용해 시각적으로 의미를 더욱 부각시켰다. 1970년대 중반 뉴욕 주 무역부는 관광 활성화를 위해 이 광고 캠페인을 처음 사용했다. 그런데 짤막한 이 도시 브랜드 덕분에 1년 뒤 뉴욕시의 관광 수입이 무려 1억 4000만 달러로 늘어났다. 비용 대비 네 배의 이익을 올린 셈이다. 우리도 문법에 맞지도 않고 누가 봐도 어색한 새 브랜드 대신에 차라리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 시내 곳곳에 걸려 있는 영문 간판이나 유적 안내문 때문에 낯이 뜨거운데 서울시의 이 새로운 브랜드까지 나와 더욱 민망해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 만약 서울시가 여론을 무시한 채 이 새 브랜드 사용을 강행한다면 서울의 이미지는 아마 한순간에 추락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위신 또한 크게 실추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왕 서울시 브랜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만약 내가 서울시 구호를 만든다면 ‘SEOULFULLY YOURS’라고 할 것이다. 영어 Seoul은 영혼을 뜻하는 영어 Soul과 발음이 같은 동음이의어다. ‘SEOULFULLY YOURS’와 ‘SOULFULLY YOURS’는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발음에서는 그야말로 영혼의 동반자처럼 일치한다. 천년 고도 서울과 영혼을 함께한다는 구호보다 더 좋은 브랜드가 어디 있겠는가.
  • [주말 하이라이트]

    ■낯선 동화(KBS2 토요일 밤 11시 50분) 철없는 동화삽화가 아빠를 대신해 어린 동생을 돌보며 사는 실질적 소년가장인 13살 수봉이가 동화와는 다른 고단한 현실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 수봉에게는 동화 속 모든 결말인 ‘한 가족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정말 동화 속만의 이야기일 뿐이다. 수봉이는 중학생이 될 때 다시 돌아오겠다는 엄마의 말을 믿고 불철주야 아르바이트에 힘쓰는 애어른이다. 빼앗긴 동화 속 캐릭터의 저작권을 되찾겠다는 희망 하나로 생계는 내팽개친 아빠에게 혀를 끌끌 차지만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꿈인지조차 잘 알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아이인데…. ■주먹 쥐고 소림사(SBS 토요일 오후 6시 25분) 남자 멤버들은 소림사 사형과 2인 1조로 팀을 이뤄 봉술 연습에 돌입한 가운데 다른 멤버들보다 습득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육중완팀은 난관에 부딪힌다. 하지만 곧 최선을 다해 가르친 담당 사형의 도움으로 만년 ‘구멍’ 육중완이 봉술의 달인으로 다시 태어나며 노력의 결실을 맺는다. ■한국 음악 기행(EBS1 일요일 오후 4시 45분) 백제시대 대중가요부터 오늘날 끊임없이 리메이크되는 1980년대 노래까지 천 년을 관통하는 우리 음악의 다양성과 고유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천 년 전 노래지만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노래. 해금연주자 꽃별과 함께 2부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 여인의 사랑 이야기’로 함께 떠나본다.
  • [생각나눔] 내년 정년퇴임 ‘59세 신입’… ‘1년짜리 공무원’ 괜찮은가요?

    [생각나눔] 내년 정년퇴임 ‘59세 신입’… ‘1년짜리 공무원’ 괜찮은가요?

    올해 1월 서울시 A구청에는 한국 나이 60세, 만 나이 59세인 9급 신입 공무원이 들어왔다. 이 신입 공무원은 내년 상반기에 퇴직한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대중가요가 유행이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용기를 북돋우는 광고도 인기를 끌지만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무원 조직에서 임용 1년 만에 퇴직하는 노령 신입 공무원의 존재는 서울시 공무원 사회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서울시에는 정년이 10년도 남지 않은 50대 7~9급 신입 공무원이 크게 늘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로 공무원시험 나이 제한을 폐지한 2009년부터 해마다 임용했다. 2009년 3명, 2010년 7명, 2011년 1명, 2012년 2명, 2013명 8명 등 10명 미만이었다. 그러다 2014년에 28명으로 급증했다. 50대 이상 신입 공무원의 비율은 지난해 1.4%로 2009년 이후 가장 높다. 40대 신입 공무원 비율도 7.2%로 높아졌다. 장년층 신입 공무원이 늘면서 10~30대 신입 비율은 2012년 98.2%에서 지난해 91.4%로 6.8% 포인트 하락했다. 노령 신입 공무원이 ‘뜨거운 감자’가 된 이유는 임용된 뒤 공무원 조직에 적응하지 못해 2개월 만에 사임하는 등의 사례 탓이다. 지난해 1월 B구청에 9급 공무원으로 들어왔던 이모(56)씨는 10개월 만에 사직했다. 구는 전직 학원 강사였던 이씨를 배려해 업무 난도가 높지 않은 민원 부서에 배치했다. 하지만 동료 공무원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던 이씨는 2개월간 간병 휴직을 했고 이후 사직서를 냈다. 긍정적인 사례도 있다. 올해 말 정년인 9급 행정직 공무원 권호진(59)씨는 외국계 화재보험사에서 최고경영자(CEO)로 일한 경험을 살려 일자리 창출과 관련한 업무에 자원했다. 동료 직원은 “성남시 동주민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공직을 철저히 준비했다”면서 “현장에서 확인하는 부지런한 자세가 여느 젊은 공무원 못지않다”고 말했다. 김희갑 시 인사기획팀장은 “50대 신입 공무원은 오히려 열정이 높다”며 “민간의 경험과 지혜를 공무원 시스템으로 융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장·노년층 신입 공무원의 등장은 1차 베이비부머(1955~63년생)의 은퇴 시기와도 맞물려 있다. 금융업계, 광고업계에서 일하던 전문직이나 대기업 간부 출신들이 제2의 인생을 공무원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한 구청 인사 담당자는 “자영업을 해도 퇴직금만 날릴 뿐이고 국민연금 개시 시점이 만 60세 이상인 탓에 수입을 확보하려는 중·장년층 퇴직자들의 공무원 유입이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무원 육성의 직간접적인 비용이다. 정윤택 전 광진구 부구청장은 “헌법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존중하고 또 공무원 조직의 폐쇄성을 깨기 위해 필요하다”며 “다만 공무원에 임용되면 ‘시보’라고 해서 서울시인재개발원에서 1개월간의 연수를 포함해 공무원의 자세 등을 익히기 위해 6개월간 수습 공무원으로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 공무원 일부는 “공무원으로 임용된 뒤 최소 3~5년 이상 근무하고서 퇴직할 수 있어야 시민이나 정부가 ‘본전’이 될 것”이라며 “연금은 없더라도 신입 공무원이 1~2년만 일하고 그만둔다면 그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큰 것 아니냐”고 밝혔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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