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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9 종교계 결산] 종교화합 성과없이 발걸음만 분주

    99년 종교계는 유난히 많은 갈등·분규와 사건들로 얼룩져 심한 몸살을 앓았다.기독교계는 각종 비리사건에 연루된 신자들로 인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고 불교계는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종권을 둘러싼 폭력사태와 소송 등으로수난을 겪어야만 했다.또 교계지도자들끼리 자주 만나 종교화합의 행보가 많았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가톨릭과 세계루터교연맹이 500년간 반목 대립해오다 화해하고 정교회와 가톨릭,이슬람과 가톨릭 등 종교간 대화 움직임이활발했던 세계적인 흐름과는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각 종단은 새 천년을 앞두고 자성과 연합에 대한목소리를 높여 종교간 화합과 사회개혁에 앞장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개신교는 무엇보다 숙원인 교회일치에 대한 만족할만한 성과를 보지 못한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대한예수교장로회의 통합과 합동이 공동기도·교환예배 등을 벌였지만 결국 연합이 유보됐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대화노력도 뚜렷한 결실을 보지 못했다. 각종 비리사건에 개신교 신자들이관련된 것은 큰 흠집으로 남았다.옷로비파문 당사자들은 모두 개신교 신자였으며 국회증언도 거짓으로 밝혀져 명예가 크게 손상됐다.대형교회와 개신교계의 문제점이 끊임없이 거론됐고 이에대한 개선방안을 놓고 논쟁과 자성이 이어졌다.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의 MBC 방송국 점거로 인한 방송중단 사태,신앙때문에수술을 거부한 신애양 논란,종말론 추종 신도들의 집단가출도 모두 사회의주목을 끈 사건들이었다.단군상 훼손에 따른 우상숭배 논쟁과 예장통합의 선거부정 시비도 개신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다.그나마 대한성서공회의 1,000만달러 수출탑 수상,대한성공회의 정신지체장애인 근로공동체 우리마을 준공은 훈훈한 뒷 이야기거리였다. 천주교는 지난 한해동안 4개 교구장·부교구장이 새로 부임,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청주 부산 인천 군종교구가 새 교구장을 맞았고 주교회의 의장도정진석 대주교에서 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로 바뀌었다.지난달 한국사목연구소는 ‘한국천주교회사 대희년 심포지엄’을 통해 천주교회의 반민족 행위에 대해 반성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목받았다.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25주년과국가보안법 폐지투쟁,순교자 현양탑 건립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들이었다. 불교계는 장자 종단인 조계종이 지난해에 이어 폭력사태를 재연하며 홍역을 치렀다.고산 총무원장 체제는 각종 발전계획을 발표하며 종단의 위상높이기를 시도했으나 지난해 분규이후 징계자 사면·복권 등 내부갈등을 해결하지못해 중도퇴진했다.서울민사지방법원이 고산 총무원장직 부존재 판결을 내린 뒤 정화개혁회의가 추천한 도견스님을 직무대행으로 지정하면서 싸움이 다시 시작돼 결국 총무원측과 정화개혁회의측은 도심에서 난투극까지 벌였다. 분규는 정대스님의 제30대 총무원장 선출로 사태를 수습해나가고 있는 분위기다.불교서적이 베스트셀러 상위를 휩쓰는 등 불교서적 붐이 일어난 것은종단분규와는 퍽이나 대조적인 현상. 북한과의 교류는 비교적 활발했던 편이다.진각종 성초 통리원장이 종단 대표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 지선 상임추진위원장과 명진 집행위원장이 조선불교도연맹관계자와 지속적인 교류에 합의했다.허문도씨의 독주로 인한 불교텔레비전(btn) 파행운영,조계종 혜암 종정취임,광덕스님과 일타스님 입적,대행스님의 독일 초청법회,태고종 안덕암 종정 취임,천태종 삼광사 30주년 기념법회 등도 특기할만한 것으로 꼽힌다. 이밖에 원불교의 한국불교종단협의회 가입논의가 무산됐고 대순진리회가 여주 본부도장 점거사태로 인해 양분위기에 빠졌으며 유교계도 재단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김성호기자 kimus@
  • 金대통령, 천주교계 인사와 오찬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3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鄭鎭奭)대주교 및 성직자들과 수도자·평신도 등 천주교계 주요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오찬을 함께하며 “지역감정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라면서 “국민에게 많은영향을 끼치는 종교계가 노력하고 도움을 줘야 할 것”이라고 협조를 당부했다.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경제가 호전되고 있으나 중산층과 서민의 고통이 있다”고 지적한 뒤 “서민·중산층이 지식기반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훈련과 평생교육을 통해 개인의 창의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박선숙(朴仙淑)청와대 부대변인이 전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산타클로스의 유래

    크리스마스 이브에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 준다는 산타클로스.그산타클로스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우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산타클로스라는 말은 서기 270년 소아시아 지방 리키아의 파타라시 출신 세인트(聖) 니콜라스에서 비롯됐다.자선심이 많았던 성 니콜라스 대주교(大主敎)는 남몰래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데그의 자선행위에서 지금의 산타클로스 이야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숭배하는 그의 라틴어 이름은 상투스 니콜라우스.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은 그를 ‘산테 클라스’로 불렀는데 이 발음이 그대로 미국어화했고 19세기 크리스마스가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건네주는 할아버지상이 형성됐다. 이와 달리 터키 지중해 연안 미라에 살던 세인트 니콜라스의 선행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세인트 니콜라스는 노예로 팔리게 된 한 소녀를 구한 선행으로 아이들의 수호성도로 불리게 됐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관습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북유럽엔 두마리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탄채 굴뚝 속으로 들어오는 전설이 있고 미국에선 선물을 갖고오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요즘의 산타클로스는 이 두가지 전설이 합해진 것이다.산타의 모습도 늙은 난쟁이,동굴에 사는 거인 등 나라마다 달랐으나 지금처럼 빨간 코트와 긴장화에 흰 수염,발그스레한 볼을 한 모습은 1931년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 해돈 선드블롬이 코카콜라 광고를 위해 그린 그림에서 탄생한 것이다. 김성호기자
  • 천주교 장기기증운동 12년만에 1만명 돌파

    한국 천주교회가 추진중인 장기기증운동의 참가자가 운동 12년만에 1만명을넘어섰다. 이 운동을 관장하고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3일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전년도인 88년부터 시작된 장기기증운동에 참여한 성직자와 신자 일반인 수가 총 1만82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시기별로 보면 성체대회 직전부터 90년까지 3,751명이 등록한 데 이어 91년 337명,92년 840명,93년 554명,94년 644명,95년 429명,96년 423명,97년 266명,98년 1,323명,올해 1,515명이 기증을 약속했다. 이에따라 1,890명의 안구를 적출,1,356명이 각막 이식수술을 받았으며 신장은 89명,간은 32명,심장과 췌장은 각각 1명씩 이식받았다. 가톨릭 주교단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안구 기증을 등록한 것을 비롯해 광주대교구 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전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등이 장기나 시신기증을 등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성체대회를 전후해 활발하던 장기기증이 한때 소강상태를 보이다 최근 늘고 있다“면서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그리스도의참다운 생명나눔을 위해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
  • [지구촌 밀레니엄 준비] 러시아/ 꺼져가는 강대국 불씨 되살리기

    러시아인들은 붉은광장에서 새 천년을 맞는다.이곳에서 2000년 1월1일 러시아의 영광과 찬란한 문화를 상징하는 공연이 막을 올린다.새 천년을 알리는봉화도 타올라 러시아 전역에 퍼져나간다.붉은광장 공연을 시작으로 뉴 밀레니엄을 축하하는 문화축제,학술회의,청소년예술제,미술전람회 등 다양한 행사가 1년 내내 계속될 예정이다. 지난 2세기 동안 문화,국력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던 러시아가 지난 10여년간 과도기를 거치면서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는 초조감이국민들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천년이라는 시간적 분기점을 계기로 격동기의 세월을 보내고 올 12월 국회의원 선거와 2000년 6월 대통령 선거를 통해 성경(聖經)의 표현처럼 ‘새로운 술은 새로운 항아리에’ 담겠다는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20세기가 러시아에 악몽의 시기였다면 21세기는 러시아의 위대함을 회복하는 시기가 돼야 한다는 것이 한결 같은 희망이다. 새로운 천년대를 맞이하는 러시아의 행사 준비는 정부와 종교계 주도로 일사분란하게이뤄지고 있다.‘3번째 천년 및 기독교 2000년 기념 준비 러시아위원회’라는 거창한 조직을 만들어 옐친 대통령이 명예위원장으로 추대됐고 푸틴 총리와 알렉세이 2세 러시아 정교 대주교가 공동위원장으로 직접 주관하고 있을 정도다. 새로운 천년의 행사는 문화·과학·역사·종교로 구분되어 인류의 한 획을그었던 기록을 되새기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먼저 도시 전체가 문화 유적으로 가득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지난 천년간의 문화유산’이라는 주제하에 문화 대축제를 벌이게 된다.이 음악제는 러시아 국민뿐만 아니라 전세계 국민이 즐길 수 있는 국민음악축제로 꾸밀 계획이다. 신년 전야엔 각종 캡슐을 담은 로켓을 우주에 쏘아올려 이 캡슐을 흘러내리면서 ‘베들레헴의 별’을 연출하는 ‘우주쇼’도 계획하고 있다.한때 우주과학을 선도하던 과거의 영광을 새로운 천년에 재현하고 우주과학에 대한 애정을 보이기 위함이다. 러시아인들의 역사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퇴색된 교회 건물,건축물,박물관을 복원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다.지난 2000년동안 인류가 이룩한 문화유산을 새로운 세대에 전해주고자 문화유산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사업도 추진중이다.2000년의 주요 사업에 포함시켰다.러시아의 영광을 되새기기 위하여 ‘역사공원’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11세기이후의 러시아 조상의 원류를 추적,다민족으로 구성된 러시아의 인종을 고찰할 인종전람회는 물론 러시아 과학기술·예술의 면모를 한눈에 볼 수 있는전시회도 2000년의 주요 사업으로 추진중이다. 8년 전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종주국 지위를 스스로 포기,공산주의 실험을종식하면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가치체계를 선택했다.앞으로 국민의 문화적 자존심에 걸맞은 강대국 지위를 회복하려는 어려운 과제를 앞두고 러시아는 ‘인류와 함께하는 2000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인호 駐러시아 대사
  • 700년 전통 英 귀족정치 퇴출 위기

    지난 1천년대 세계 지배의 대명사로 이름을 떨쳐온 대영제국.그 찬란한 영광을 지탱해온 700년 전통의 영국 귀족정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뉴 밀레니엄의 도도한 물결앞에 거센 변혁의 도전을 맞고 있는 영국 귀족정치의 현주소를 점검한다. 영국 상원은 지난 26일밤 수시간에 걸친 격렬한 토의 끝에 상원에서의 ‘세습귀족 권리’를 완전 박탈하는 정부의 개혁법안을 가결했다. 영국 정계에 일대 혁신을 몰고올 이 법안은 이날 상원 본회의에서 221대 81로 최종 승인됐다. 이에따라 그동안 국민의 대표직이 아니면서도 정치에 관여해온 세습귀족들의 특권이 조만간 사라지게 됐다. 영국의 세습귀족들은 21세 이상만 되면 자동으로 상원의원이 돼 상원출석과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97년 ‘개혁정부’를 표방하며 집권한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총리는 ‘상원개혁’을 정치개혁의 핵심으로 삼으며 올초부터 강력한 개혁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먼저 세습귀족 상원의원들의 투표권을 없애는 절차부터 밟았다.따라서 지난 4월31일 상원 본회의장에선 이번과 같은 또 한차례의 마라톤 회의와 격렬한논쟁이 있었다. 이미 노동당 정부가 하원에서 세습의원들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시켜,상원은 이를 마지못해 최종 승인해야 하는 절차였지만 과정은 쉽지 않았다.상원이 결국 세습귀족 의원들의 투표권 박탈을 골자로 하는 ‘상원개혁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일부 의원들이 법안에 대해 법적 소송을 제기하는 등파문과 진통은 컸다. 그리고 지난 26일 마침내 블레어 총리는 자신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상원개혁의 최종목표인 상원내 세습귀족의 축출이라는 결실을 보게 됐다. 이번에 최종 승인된 세습귀족의 상원의원직 자동취득권 박탈은 앞서의 투표권 박탈과 함께 세습귀족들의 정치참여를 완전 봉쇄하는 것으로 수백년 전통의 영국 귀족정치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물론 상원에는 세습귀족 말고도 본인이 나라에 공헌한 것을 인정받아 작위를 받은 종신귀족과 법률귀족,성직귀족 등의 구성원이 있다.그러나 상원 다수를 차지했던 멤버들은 어쨌거나 실제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과는 상관없이귀족출신으로 상원의원까지 물려받은 세습귀족들이었다. 아직 개혁안 통과뒤 상원 구성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결정이나 구성안은 나오지 않은 상태. 하지만 수백명에 이르는 세습귀족들이 오는 11월17일 새로운 상원 회기가열리기전 대부분 퇴출될 전망이어서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다. 노동당 정부 역시 장기간에 걸쳐 계획되고 있는 상원개혁이 완전 완수되기전까지는 세습귀족의 대표로서 92명의 세습귀족 상원의원은 남겨둔다는 절충안에 앞서 동의했다. 그러나 대세는 상원의원도 이후로는 선출 및 임명직으로 구성돼 명실상부국민의 대표기관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 의견이다. 의회 민주주의 요람인 영국이 그동안 ‘전통’이라는 명목하에 국민이 선출하지도 않은 귀족들에게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특권’을 부여해왔던 것은실제 아이러니였음에 틀림없다. ‘개혁의 기수’를 자처하는 블레어 총리가 영국 정치에 있어서 가장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하겠다고 나선 것은 어쩌면 현대 민주정치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는 다소 시기에 늦은 ‘개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경옥기자 ok@ *英상원 어떻게 구성되나 귀족원이라고 불리는 영국 상원은 26명의 성직귀족과 1,277명의 세속귀족(세습과 종신),27명의 법률귀족으로 구성되며 현재 총 의원수는 1,330명이다. 귀족이라고 다 상원의원이 되는 것은 아니며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선 국왕의 소환장이 있어야 한다.하원의원 수가 고정된 것과는 달리 상원의원의 수는 지금까지 증감이 가능했다. 성직귀족은 영국교회의 수장인 여왕이 총리의 제청에 따라 임명하는데 캔터베리 대주교를 비롯해 요크 대주교 및 24명의 주교가 이에 포함된다. 세속귀족(세습 또는 종신)은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각 분야에서 국가에크게 기여한 자를 역시 총리 제청에 따라 임명한다. 세속귀족은 세습귀족(759명)과 종신귀족(518명)으로 나뉘는데 세습귀족은 21세 이상만이 상원의원이 될 수 있었다.상원의원의 임기는 종신직이다.‘철의 여인’으로 잘알려진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지난 92년 6월 남작 작위를 수여받고 상원의원이 되었다.공작,후작,백작,자작은 세습귀족이며 귀족중 최하위 서열인 남작은 비세습 귀족으로 작위가 승계되지 않는다. 법률귀족은 고등법원 판사중 대법관으로 임명된 이들로 종신귀족에 속한다. 한편 상원의 입법상 권한과 기능은 선출직인 하원에 비해 매우 제한적.1949년 의회법에 따르면 상원은 하원을 통과한 법안을 변경할 수 없고 단지 1년만 지연시킬 수 있다. 사법상에 있어서 상원은 원칙적으로 민사사건에 관해서는 영국 전체를,형사사건에 관해서는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영국 전체를 관장하는 최고법원 역할을 한다.재판관으로의 참여는 보통 대법관들인 상원의원(법률귀족)이 한다. 총리가 임명하는 상원의장은 내각의 일원이 되며 당직을 보유하고 직책상으로는 대법원장의 역할도 겸해 통상 법률가가 임명된다.하지만 하원의장과는달리 캐스팅 보트(찬·반 동수인 경우에 의장이 던지는 결정투표)도 행사할수 없고 상원내 토론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한도 없다. 무보수직인 상원의원은 단지 회기중 실비의 교통수당,우표요금,사무용품비,야간수당 등을 지급받는다.그러나상원의장과 상원 부의장격인 위원회 위원장 및 부위원장,법률귀족은 이런 실비수당 대신 연봉을 받는다.특히 상원의장이나 대법관의 연봉수준은 총리나 하원의장보다 높다. 이경옥기자
  • [氣차게 삽시다](17회)세계 유명건물 육각형 많아…

    우리 주변에서 기가 좋은 것들을 살펴보자.영국은 두번째 천년을 마감하면서 의미있는 건축물을 하나 남겨놓게 되는데 이름하여 밀레니엄 돔이다.이는 1999년 12월 31일 자정에 개관된다.돔은 높이 60미터에 기둥이 전혀 없고전세계에 분포되어있는 희귀식물들을 한곳에 모은 현대판 에덴동산으로 연간 1200만 관광객을 유치할 계획이라고 한다.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파리의 에펠탑 실물모형도 여기에 들어간다고 한다.가히 세계의 최대 건축물이 되는 셈이다. 특이한 것은 그 건물 구성이 모두 벌집처럼 정육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에베레스트산 5050미터에 세워진 네팔 국립연구소의 구조본부 건물이 피라미드이고 전세계 120개국에 수출하는 볼보 자동차의 공장과 사무실이 육각이다.전세계의 경제를 주름잡는 미국 뉴욕의 건물이나 지붕들이 거의 육각형이나 미라미드로 구성되어있다.우리에게 컴퓨터로 친숙한 IBM 건물 지붕 역시 피라미드다. 여성들이 선호하는 크리스찬디오르 화장품 케이스가 육각형이다.골프의 최장타 기록보유자인 잭 햄이 개발한 일명 에어 해머에도 육각형 문양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골프채는 정식 경기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왜냐하면 한번 제대로 맞으면 육백만불의 사나이가 때린 것처럼 정신없이 나가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도 육각형 문양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육각형 문양이 좋은 기를 모으고 배출하기 때문이다.이탈리아의 라벤나에 있는 성당의 대주교좌 모자이크,미술관 천장이 육각형이다.교회나 성당을 가보면 육각형 문양이 많이 눈에 띄며 절에 가보아도 서까래끝이 육각형 문양이다.석등을 보아도 사각 육각 팔각형으로 되어있다. 세종대왕의 옥좌의 천장에도 육각형 문양이 있다.알다시피 세종은 조선 5백년사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이는 육각형 문양천장을 통해 옥좌로 우주의 좋은 기를 받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집현전 학사들이 올린 여러 의견들도 깨끗한 기를 받아 결정해준 결과로 볼 수 있다. 거리를 질주하는 차들의 바퀴 휠이 육각형인 것은 대체로 개끗하며 사고율도 적다고 한다.시골의 원두막도 대체로 피라미드다.마루에서 떨어져서 다친 사람은 보았어도 이런 원두막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했다. 벌집이 육각형이라 100퍼센트 부화하고,최장수하는 거북등이 육각형이다.모든 보석 역시 육각형구조라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왜 이런 육각문양이나 육각형 틀이 기에 좋은지는 상세하게 규명되지 않았다.그래서 필생의 과제로 연구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李載奭 한국정신과학학회 이사
  • [제2공화국과 張勉](29)-金대통령 특별회고(下)/사료적 가치

    28회에 이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회고 증언 가운데 장면(張勉)박사를 만나 가톨릭 영세를 받은 과정 등 5가지 질의에 대한 답변을 싣는다. 장 박사를 만나기 전에도 성당에 나간 것으로 압니다.영세를 받은 과정을들려주십시오. 제 전처의 처가가 가톨릭 집안이기 때문에 자주 성당에 나갔지만 정식으로영세를 받은 것은 1957년이었습니다.그때 저는 유명한 신학자이기도 한 윤형중(尹亨重)신부로부터 교리강독을 받았고 노기남(盧基南)대주교의 방에서 김철규(金哲奎)신부라고,그때 우리 민주당과 매우 가까운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최서면(崔書勉)씨라고,그때 서울교구 사무국장으로 있던 제 친구가 주선했는데 장 박사를 대부로 소개해준 사람도 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장 박사하고 영적으로 대부·대자의 관계가 되었고,그 인연으로 저는 신파의 총수인 장 박사 밑에서 젊은 엘리트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자연히 장 박사 가족하고도 잘 알게 되었는데 특별히 인연이 깊어진 것은 장 박사가 5·16을 겪고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명륜동 자택에 칩거할 때였습니다.과거에 교류가 있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장 박사를 외면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6대 국회의원이던 저는 장 박사를 찾아뵈면서 관계를 유지했고,그 분이 돌아가신 후에도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한번은 장 박사 추도식을 동성고등학교에서 대대적으로 했는데 그것을 제가 전부 주선한 일이있습니다.이런 일들로 해서 장 박사님 가족하고는 더욱 절친하게 되었습니다.제가 1980년 사형 언도를 받아 있을 때 장 박사 사모님께서 제 사형 언도가 풀릴 때까지 매일 그 추운 겨울에 성당에 나가 저를 위해서 기도하셨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경제전문가이기도 합니다.장면정부가 내세운 경제제일주의와 구체적으로 추진한 ‘국토건설사업’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실현가능성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저는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당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중심이 되어서 입안했습니다. 그리고 국토건설단은 사상계를 발간해 지식인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던 장준하(張俊河)씨가 맡아줌으로써 큰 활기를 불어넣게 되었습니다.국토건설단에 젊은 청년들이 정말로 나라를 한번 다시 세운다는 의욕으로 적극적으로참여하는 분위기가 크게 일어났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토건설5개년계획이 얼마나 좋은 안(案)이었나 하는 것은 그후 군사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朴正熙)정권이 추진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토대가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경제제일주의는 장면정권의 양대 모토였는데 여기에 대해서 당시 우리나라 경제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며 예산의 절대적 액수를 원조해주던 미국까지 적극적으로 지지한 바 있습니다.미국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도록합의가 돼 장면총리가 미국을 방문하고자 출발하려는 찰나에 군사쿠데타가일어난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민주당 신파 계열을 지켜온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는다는 표현을 가끔 하십니다.신파의 특성,또는 장점을 설명해 주십시오. 일제시대 관료 출신들이나 은행가들이 해방 후 2대 국회를 중심으로 대거 정계에 등장했습니다.자유당에 의한 사사오입개헌이 일어난 후 이들이 민주국민당과 손을 잡고 민주당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민주당 내에서 민주국민당 계열이 구파를 이루게 되었고 과거의 관료계층이신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과거 관료 대부분은 이승만(李承晩)정권에 협력을 했지만 신파에 참여한 관료 출신들은 양심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자유경제,그리고 남북간의 평화적 교류,이런 것을 생각하는 세력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신파는 구파에 비해 개혁적이었고 민주주의에 대해서도더 철저한 면이 있었습니다.실제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해서 신파는매우 강하게 투쟁했고,이 점에 있어서 구파하고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4·19가 일어날 무렵 구파는 대거 자유당에 입당했고 신파는 자유당정권으로부터더욱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신파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정신을 이어받았고 그리고 시장경제라고 할까,자유경제에 대한 정신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저는 그 후로 일생의 정치생활을 통해서 일관되게 그때 받은 영향을 그대로 견지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5·16쿠데타 발생 후 장 총리는 수녀원으로 도피했고,윤보선(尹潽善)대통령은 쿠데타를 추인했습니다.두 분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장 박사와 윤보선 두 분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몫이지 제가 여기에서 말할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2공화국 당시의 내각책임제를 어떻게 보십니까.제2공화국,그리고 장 박사에 대해 종합적인 평가를 해주십시오. 정국을 책임지고 잘 장악해 안정을 유지해서,그런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총리였던 장 박사에게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그러나 거기에는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장 박사가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괴롭힌 면이 있었습니다.저는 과거에 내각책임제를 열렬히 지지한 바 있지만 5·16을 겪고 나서 내각책임제에 대해 큰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그 이유는,당시 경험으로 정당과 국회의원이 성숙하지 않고서는 내각책임제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5·16 당시 나라가 공산화 직전에 있었다든가,장정권이 지나치게 부패했다는 쿠데타 명분에 대해서 상당 부분 공정한 주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5·16 직전 정국은 아주 안정이 되었고 오히려 매일같이 일어나던 시위도 거의 가라앉은 상태였습니다.정치 역시 안정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패 역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5·16 후에 장정권의 부패를 대대적으로 조사를 해가지고 신문 양면에 걸쳐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채워서 발표를 했지만 재판결과 부패로서 처벌받은 것은 김영선재무장관이 출장 중 중고품 냉장고 하나를 어느 공무원에게서 선물받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나머지는 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처럼 학생들이 피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를 정치인들이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사분오열해서 가뜩이나 약한 정권을 잡고 흔드는 일을 한 데다 언론까지 가세해 결국 장정권이 유지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장면정권의 간부였던 한 사람으로서 그 책임을 통감하지만 역시 정치가 안정되고 정권이 성공하려면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특히 정치인은 스스로가 책임 있는 자세로서 도와줄 것은 도와주고,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그런 건전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시 뼈저리게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증언 통설 뒤집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증언은 현직 대통령이 신문 연재물에 직접 참여했다는 의미말고도 증언 자체가 갖는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김 대통령은 먼저 장 박사와 관계를 맺게 된 계기를 “장 박사가 1956년 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무소속인 제가 장 박사 지지를 선언한 것이 신문에 보도돼서”(28회에 게재)라고 공개했다.이 말은 언뜻 이해하기에 쉽지 않다.김 대통령은 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므로 56년 당시에는 일개 정치 지망생에 불과했다.그런 그가 장 박사를 지지했다고 해서 신문에 보도되기란 어려웠으리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그때 이미 주목받는 논객이었다.55년 9∼10월에만 동아일보에 다섯 차례 ‘시론’을 실었고,당시 지식인 사회를 대변하는 월간지‘사상계’ 55년 10월호에도 장문의 논설을 발표했다.제목은 ‘노총(勞總)분규와 우리의 관심’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 ‘노조는 유해한가’ 등으로모두 노동운동을 주제로 했다.따라서 ‘장면 부통령후보 지지 선언’이 보도될 만한 여건은 충분했던 셈이다. 60년 4월6일 민주당이 주도한 서울 중심가 시위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밝힌 것(28회 게재)도 상당히 소중한 역사적 증언이다.그날 시위의 전개와 이후‘4·19혁명’에 끼친 영향 등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흔히들 제2공화국의 민주당정부를 4월혁명에 ‘무임승차한’정권이라고 하지만 민주당 인사들의 주장은 다르다.민주당이 4월혁명을 일정 부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3·15부정선거’ 당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지만 막상 서울에서는 3월17일 성남고생 400여명이 거리에 나섰을 뿐 학생·시민의집단적인 움직임은 없었다.이처럼 잠복한 민심을 민주당이 촉발했다는 주장이다.그런데도 그 증거로 ‘4·6민주당 시위’를 내세우고 이 시위를 생생하게 되살린 증인은 여태껏 없었다. 김 대통령의 증언을 보면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하는 과정,일단 시위대에 끼자 경무대를 목표로 삼으려고 한 사실들이 명백하게 밝혀진다.학계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해볼 만한 부분이다. 당 대변인이 된 과정(28회 게재)도 그 무렵 김 대통령의 정치적 위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60년 ‘7·29총선’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172석을 차지했다.그야말로 제제다사(濟濟多士)라 할 만큼 인재가 넘치는 상태였는데 김 대통령은 선거에서 떨어지고도 대변인이라는 중책을 맡았다.유망한 청년 정치인에게 거는 민주당 지도부의 기대와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대통령은 장면 박사와 제2공화국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에서 “정치인은스스로 책임 있는 자세로서 도와줄 것은 도와주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건전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시 뼈저리게 느꼈다”고 결론내렸다.지금의정치권에도 적용되는 주문일 것이다. 이용원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26) 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中)

    초대 주미대사로서 큰 공을 세운 장면(張勉)은 1951년 1월28일 귀국해 2월3일 국무총리에 취임한다.이 무렵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국회는 상극이라할 만큼 알력이 심해 장면 총리는 양쪽을 융화·조정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아울러 ‘국민방위군 사건’‘거창 양민학살 사건’ 해결에 앞장섰고,그해 11월에는 파리 제6차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다. 장면이 이승만 아래에서 총리직을 수행하는 동안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그렇지만 정치적 위상은 한층 높아져,이승만을 몰아내고 그를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50년 6월19일 개원한 2대 국회는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됐다.자유당 창당 전이라 공인된 여당이 없었고 친(親)이승만 계열 의원은 대한국민당 24명을 비롯해 57명에 불과했다.반면 야당의원은 27명,무소속은 의원 정수의 60%인 126명에 달했다. 2대 국회는 개원 엿새 만에 6·25를 맞아 사망·납치·행방불명된 의원이 35명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의원 대다수가 이승만의 ‘서울 사수(死守)’ 발언을 믿었다가 큰 곤욕을 치른 데다 이승만의 독재 성향이 이미두드러져 의회에서는 반(反)이승만 기류가 주를 이뤘다. 당시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였고 이승만의 임기는 52년 7월23일까지였다.국회에서 재선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자 이승만은 51년 말두 가지 방안을 추진한다.하나는 여당을 만드는 것이고,또 하나는 대통령직선제로 개헌하는 것이었다. 여당 창당작업은 그러나 두 갈래로 나눠졌다.무소속 의원 중심의 원내자유당과 5개 사회단체를 뼈대로 한 원외자유당이 별도의 정당으로 등록했다.이가운데 원내자유당은 이승만의 뜻과는 달리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은밀히추진하면서 대통령으로 장면을 추대하기로 야당과 합의한다. 당시 원내자유당을 이끈 오위영(吳緯泳)은 회고록에서 “일부 정치인들이이박사의 영구집권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 실정에서 재야의원들은 대부분강력한 야당을 조직해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적인 지도자를 추대하자는 중론이 대두되고 있었다”고 밝혔다. 국회는 이승만정부가 발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52년 1월18일 찬성 19,반대 14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했다.이어 개헌 정족수에 맞춰의원 123명의 서명을 받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4월 이 무렵 장면도 총리를 사임했다. 국회는 6월2일 제2대 대통령을 뽑기로 계획을 세웠다.그 날이 되면 장면은새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내각책임제 개헌도 순조롭게 이루어질 터였다. 하지만 반격이 시작됐다.‘부산정치파동’이 발생한 것이다.이승만이 경남과 전남북에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날인 5월25일 계엄군은 버스로 등원하는의원들을 연행했다.그리고는 경찰이 국회를 포위한 상태에서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켰다.이때 개정한 헌법이 ‘발췌개헌’이다. 부산정치파동후 장면은 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의 고문으로 들어앉아 정치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을 듯이 보였다.그러다 55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이 출범하자 최고위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오위영을 비롯해 김영선(金永善)·홍익표(洪翼杓)·이상철(李相喆) 등 신파의 핵심세력이 52년 그를 대통령으로추대하려던 원내자유당계였다. 장면은 56년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해 이기붕(李起鵬)을 누르고 당선됐다.국민의 투표로 검증받은 권력서열 2위가 된 것이다.더구나 이승만이 81세의 고령이어서 유고시 대통령 자리를 승계하는 부통령이란 위치는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부통령 재직 4년은 장면이 회고록에서 ‘죄없는 죄인’이라고 표현할 만큼 험난한 세월이었다.이승만은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른 그를 견제하느라 상식 밖의 행동을 예사로 했다.가령 56년 8월15일 열린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은 내외 귀빈을 전부 소개하면서 정작 그 자리의 공동 주인공인 장면을 무시했다.남산 국회의사당 기공식에서는 다른 초청객의 자리는 준비하고도 부통령 좌석은 마련하지 않아 장면이 그냥 돌아갈 정도였다. 이 시기 장면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그에대한 암살 기도와 외국 원수와의 만남을 방해한 사례다. 부통령 취임 한달여 만인 9월29일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면은 김상붕(金相鵬)이 쏜 총에왼손을 맞았다.이 저격사건의 배후는 김종원(金宗元)치안국장이라는 추측이 강하게 나돌았지만 훗날 장면정부 아래서 속개된 재판에서도 관련자는 김상붕,그에게 총을 준비해 준 이덕신(李德信·성동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준 최훈(崔勳) 등 세 사람으로 한정됐다.장면은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파헤치는 대신이들을 감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고 딘 디엠 베트남대통령이 공식 방한한 날은 57년 9월18일이었다.디엠의맏형은 가톨릭 사이공교구 대주교였고 본인도 독실한 신자였다.게다가 장면과는 미국에서 만나 돈독한 우정을 쌓은 사이였다. 디엠은 장면을 만나려고 했으나 이승만정권은 그의 방한 사실조차 장면에게 알리지 않았다.디엠은 개인적으로 노기남(盧基南)대주교에게 전화해 일요일 첫 미사때 명동성당에 들르겠다며 장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장면과 디엠은 결국 주교관 2층 노대주교 방에서 몰래 만나 우정을 재확인할수 있었다. 외국원수에 대한 의전마저도 무시할 정도로 장면을 철저히 배제한 이승만의 폭거는 4월혁명으로 쫓겨날 때까지 계속됐다. 장면이 순화동 부통령 공관에서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하던 그 무렵을 이철승(李哲承)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지만 민주 염원의 상징으로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회상하면서 “장박사가 사실은 남달리 외유내강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장면은 총리·부통령을 거치면서 국가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했다. 그런 까닭에 4월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물러나자 민심은 당연히 장면에게로쏠리게 됐다. 이용원기자 ywyi@**前비서관 李聖模·李泓烈씨가 본 장면 장면(張勉)에게는 10여년 동안 그림자처럼 수행한 비서관이 두 사람 있다. 이제는 70대가 된 이성모(李聖模·72)씨와 이홍렬(李泓烈·77·미국 거주)씨가 그들이다. 이들은 장면이 주미대사로 활동한 50년대 초부터 66년 타계하기까지 때로는 함께,때로는 엇갈리며 그의 곁을 지켰다.이들이야말로 가족이나 정계의 동료보다도 장면의 모든 것을 더 가깝게,더 오랫동안 지켜본 증인들이다.그들이 밝힌,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몇 토막을 소개한다. 이성모씨는 1951년 초 피난지 부산에서 장총리를 만난다.경찰관으로 경호업무를 맡은 그는 인품에 감화해 곧 경찰복을 벗고 비서로 들어간다.그가 직접 본 부산 피난 시절 장면과 어머니 사이의 에피소드다. “장총리는 꼭 집에서 점심을 들었다.하루는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왔다가 모친(黃누시아)이 등 찢어진 삼베옷을 입은 것을 보고 흉하니 갈아입으라고 말씀드렸다.그랬더니 모친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네가 이 나라 총리 맞는가. 지금 피난민이 곳곳에 우글거리는데 잘먹고 편히 있는 내 걱정할 땐가.’장총리는 무릎을 꿇고 한 시간이나 빌었다.모친 지시대로 범일동 고아원에 가아이들을 돌본 다음에야 용서받았다.장총리 부모도 매우 훌륭한 인격자였고,그는 부모 말씀에 절대 복종했다.” 이홍렬씨는 50년 4월 로스앤젤레스총영사관 부영사 때 장면 주미대사를 알게 된다.51년 총리로 내정된 장면의 부름으로 함께 귀국해 총리실 파견근무를 했고 그 인연으로 비서관이 된다. “장총리를 10여년 모셨는데 화내는 모습을 딱 한번보았다.60년 12월이었다.청와대로 전화하라고 해서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의 비서실장인 이재항(李載沆)씨를 바꿔주었다.장총리가 통화를 몇분 하더니 화난 표정에 목소리가높아졌다.대통령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이재항씨가 자꾸 핑계를 대며 안바꿔주는 모양이었다.전화를 끊은 장총리는 ‘아주 고약한 사람이로군’하고혼잣말을 했다.그것이 그분이 할 줄 아는 가장 험한 욕이었다.” 이홍렬씨는 장면이 돈 문제에도 담백했다고 밝혔다. “51년 총리 시절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가게돼 있었다.떠나기 열흘 전쯤 한국은행 총재가 나를 불렀다.‘외교활동을 하려면 가외비용이 많이 들 것’이라면서 돈가방을 주었다.얼핏 봐도 100달러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일단 거절하고 돌아와 말했더니 ‘잘했다’는 한마디뿐 더는 말이 없었다.돈을 챙기는 데는 관심이 전혀 없어 쿠데타후 명륜동자택으로 돌아가서는 생활비가 없을 정도였다.” 이성모·이홍렬 두 비서관은 군사정권 아래서 고된 삶을 살았다.이성모씨는 장면 집안일을 돌보는한편 정치에도 뛰어들었다.민주당 재건에 참여,섭외부장·조사부장을 역임했고 경북 영주·봉화 지구당위원장으로서 6·7대 총선에 출마하지만 거듭 실패했다.이후 사업을 하면서 장면 추모모임인 ‘운석회’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이홍렬씨도 5·16쿠데타후 장면을 곁에서 모시다가 그의 타계후 정치에는일절 발을 끊고 생활인으로 돌아갔다.지난 88년 도미해 로스앤젤레스에 자리잡은 그는 본지에 ‘제2공화국과 장면’ 연재가 시작되자 일부러 두 차례 귀국해 증언하고 자료를 제공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용
  • 천주교 순교자 현양탑 축성식

    천주교 서울대교구(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는 26일 오후 4시 서울 서소문공원에서 순교자 현양탑 축성식을 갖는다.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지는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1866년 병인박해때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를 한 곳으로 44위 성인을 탄생시킨 국내 최대의 천주교 성지이다. 조광호 신부(가톨릭 조형연구소 소장)가 설계한 이 기념탑은 15m 높이의 주탑과 좌우 13m의 화강암 탑으로 이루어졌으며 죽음의 상징인 ‘칼’과 생명을 상징하는 ‘물’을 대비시키고 있다.(02)771-7600. 박찬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25)장면과 가톨릭…정치고비마다 후원자로

    장면(張勉)을 정치가로서 해부하건,인간적으로 이해하건 그 출발점은 같은자리에 있다.곧 가톨릭 신앙이다.장면의 정치는 출발부터 마감까지 신앙의테두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장면을 정치의 길로 ‘내몬’사람은 노기남(盧基南)대주교다.한국인으로서처음 서울교구장이 되고 주교자리에 오른 그는 해방 당시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노주교는 대한민국 출범을 앞두고 정계에도 가톨릭을 대변하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가 염두에 둔 인물이 장면이었다. 장면은 노주교보다 나이는 겨우 3살 많았지만 소신학교에서 직접 그를 가르쳤다.게다가 인품·덕망이 뛰어나 노주교를 비롯한 제자들에게서 진정한 스승으로서 대우 받았다.그런 한편으로 신자인 장면에게 노주교는 순명(順命)의 대상이었다. 제헌의회 선거를 앞두고 노주교에게 정계진출을 권유받은 장면은 처음에 펄쩍 뛰며 거부한다.교육자로 남겠다고 했다.그러나 거듭되는 강권에 못이겨출마한다.선거전이 시작되자 노주교가 진두지휘를 했고 가톨릭이 운영하는경향신문·경향잡지가 총동원돼 선거운동을 벌였다. 제헌의원이 된 장면은 첫번째 주요 임무인 ‘유엔에서의 한국 승인’을 받아낼 때도 가톨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당시 국내에는 친한파인 패트릭번 신부가 교황사절(바티칸이 국교를 맺기 전에 파견한 대사)로 있었다. 장면이 출국인사차 번 신부를 찾아가자 그는 파리주재 교황대사와 유럽·중남미의 가톨릭국가 대표들에게 보내는 소개장 10여장을 건네주었다.이 소개장은 파리에서 큰 효력을 발휘한다.한국을 몰라 냉담하던 이들이 소개장을받고나서는 앞장서서 다른 나라 대표들을 인사시켜줄 정도로 적극 협력했다. 장면은 훗날에도 주위사람들에게 이때 일을 자주 이야기하며 고마워했다. 한편 이승만(李承晩)은 나름대로 장면과 노주교의 관계를 이용했다.이승만은 장면에게 유엔대표단장·주미대사·총리 등 중책을 맡길 때마다 노주교를불러들여 상의하는 형식을 취해,장면으로 하여금 거절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았다.이러한 삼각관계는 장면이 52년 4월 총리를 그만둘 때까지 계속된다. 장면이 제헌의원-주미대사-총리-부통령을 단계적으로 밟아 결국 제2공화국정부를 맡은 정치가로 성장한 바탕은 물론 그 자신의 능력과 성실함이다.그러나 가톨릭 세력의 끊임없는 지원이 큰 보탬이 된 것도 사실이다. 장면 자신의 정치형태 또한 신앙인의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장면내각에서 총리 공보비서관이었던 송원영(宋元英)은 “종교인으로서 성실의 원칙을정치에 적용하려 했으며 소위 정치적인 권도(權道)나 거짓말을 이용하는 일을 거의 생리적으로 배척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장면의 정치활동도 가톨릭의 테두리 안에서 끝났다.5·16쿠데타가 일어나자그는 수녀원으로 도피,쿠데타가 기정사실로 굳어진 뒤에야 그곳에서 나왔다. 수녀원에 있던 55시간동안 장면은 누구보다도 고뇌했을 것이다. 세월이 어느정도 흐른 어느날 민주당 신파의 장경순(張慶淳)전의원이 수녀원에서 지낸 시간에 관해 조심스레 물었다.장면은 “정치인과 종교인이라는 갈림길에서 정말 고민했다.결국 종교 쪽으로 결정했다.정치를 택했다면 (쿠데타군과 진압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서울시민의 희생이 컸을 것이다.권력을빼앗겼다거나 무능한 정치인이었다는 낙인은 감내하기로 했다”고 말했다고한다. 이용원기자
  • 가톨릭-그리스정교 천년만의 화해

    루마니아 방문 이틀째인 로마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왼쪽)가 8일 테오치스트 그리스 정교 총대주교와 함께 부카레스트 정교회에서 코소보 사태의 종식을 기원하는 공동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새천년을 앞두고 가톨릭과정교간의 화해를 위해 공동 미사를 집전한 두 사람은 나토와 유고 양쪽에 코소보 사태의 책임이 있음을 강조,갈등을 종식하라고 호소했다. [부쿠레슈티 AFP 연합]
  • 엘리자베스 英여왕 방문 계기로 알아본 110년 교회사

    19일부터 22일까지 방한하는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대성당을 찾는다.엘리자베스여왕과 남편 필립공은 방한기간동안 대성당에 들러 대한성공회 서울관구장 정철범 대주교를 비롯한 교회지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성당안에 있는 영국군 참전기념비에도 참배할 계획이다.그러나방한일정상 미사에는 참석하기 어려울 것으로 알려졌다.1889년 영국 도움으로 설립된 대한성공회가 영국여왕 내외와 같은 최고의 귀빈을 맞는 것은 110년 한국선교사상 처음.지난 1992년에는 한국을 방문한 찰스 영국 왕세자내외가 성공회 대성당에 들른 적이 있다. 성공회(聖公會)는 16세기에 영국에서 시작됐다고 해서 흔히 영국 국교회(The Anglican Church)라고 부른다.영국왕 헨리 8세가 이혼문제를 둘러싸고 교황청과 갈등을 빚으면서 설립된 성공회는 1534년 수장령(首長令)과 1559년의 신교(信敎) 통일령에 의해 영국의 국교로 자리잡았다. 루터교나 장로교와 같이 과감한 개혁을 추구한 대륙의 개신교와 달리 성공회는 초대 교회의 전통을 비교적 지키는편.교황의 교도권을 부정하는 면에서는 개신교지만 사도들의 성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가톨릭과 가깝다.가톨릭이나 정교회처럼 주교-사제-부제의 삼품 성직을 두고 있으나 가톨릭과는달리 결혼을 할 수도 있다.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영국과 국교가 열린지 7년만인 1889년이다.켄터베리 대주교 벤슨(E.W.Benson)이 해군 군종신부 고요한(C.J.Corfe)을 보내면서 선교가 시작됐으며 이어 1891년 선교본부 ‘부활의 집’과 한국최초의 성당인 낙동성당을 건립했다. 1915년 최초로 한국인 사제 김희준(金熙俊)신부를 배출했으며 1965년에는이천환(李天煥)주교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주교 서품을 받았다.대한성공회는 1993년 서울교구가 독립관구로 승격된 후 김성수(金成洙)대주교에 이어 정철범(丁哲範)대주교가 관구장을 맡고 있다. 신부 150명,신도 6만5,000명,성당 수 100개로 교세는 크지 않으나 개신교내 교회일치및 가톨릭과의 화해에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50년대 이후부터 산업선교와 학원선교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십자형 붉은 기와건물로잘 알려진 대한성공회 대성당(서울시 유형문화재 35호)은 1926년에 건립됐으나 완공이 안된 상태로 사용해오다 뒤늦게 외국에서 설계도가 발견됨에 따라 재공사를 벌여 70년만인 지난 96년에 축성식을거행했다. 현재 성공회 대성당 옆에 위치한 세실극장은 1941년 일제에 의해 추방된 구세실(C.Cooper)주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 북녘땅서 분단후 첫 대규모 기도회

    민족의 명산 금강산에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개신교인들의 기도회가 열렸다.23일 오후 1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주관하고 대한매일이 후원한 한국기독교인 금강산 방문에서 개신교 목사와 신도 100여명은 구룡폭포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외금강 관폭정에서 합동기도회를 열고 “통일을 앞당길 수있는 힘과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다. 개신교 목사들이 평양 봉수교회나 칠골교회에서 예배를 올리고 지난해 개신교 대표단이 금강산 상팔담에서 기도회를 가진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대규모의 개신교인이 북녘땅에서 기도회를 개최한 것은 분단이후 처음이다.이에 앞서 22일 오후 5시 30분 동해항에서 봉래호편으로 출항한 400명의 기독교인금강산 방문단은 오후 8시 이유식 기독교 대한감리회 감독회장의 인도로 개회 예배를 올린데 이어 ‘평화통일 음악회-양희은의 그리운 금강산’을 감상했다. 방문단은 출항 이튿날인 23일 구룡폭포 코스로 올라 정철범 KNCC 회장(대한성공회 대주교),김동완총무,백도웅 부총무,박형규 원로목사,박용길장로(문익환 목사 미망인)등 개신교 각교단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산상기도회를갖고 하산했다. 또 이날 오후 8시에는 ‘교회는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아래 시사평론가 정범구박사의 사회로 선상 토론회를 열고 분단현실에 대한기독교인의 책임과 통일을 위한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방문단은 24일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만물상 코스를 등산한 후 온정리 공연장에서 서커스단인 평양 모란봉교예단의 시범공연을 관람했다.이날 공연은 문익환 목사의 미망인인 박용길 장로를 환영하기 위해 북한측이 특별히 마련한 것으로 세계 최고의 수준이란 평판에 걸맞게 널뛰기,줄타기,공중그네묘기 등 곡예솜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공연직전 단원들은 박용길장로에게뛰어가 부둥켜안고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방문단은 25일 오전 7시 30분 귀환했다. 김동완총무는 “개신교인이 단체로 북녘땅을 밟고 기도를 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면서 “금강산 뱃길이 단순히 돈있는 사람들의 관광코스로 변질되지 말고 민족통일을 위한 수련 프로그램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鄭鎭奭대주교 장학금 5억 쾌척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鄭鎭奭대주교(사진)가 음성 꽃동네에 의해 설립돼 다음달 2일 개교하는 충북 청원군 현도사회복지대(총장 吳雄鎭신부)에 장학금5억원을 내놓아 화제다. 鄭대주교는 9일 오후 음성 꽃동네 사랑의 연수원에서 열린 吳신부의 총장취임식에 참석,기탁금을 전달했다. 이 장학금은 鄭대주교가 지난 61년 사제서품을 받은 이후 신도들이 “생활비에 보태쓰라”며 한푼 두푼 내놓은 돈 등을 40여년 동안 근검절약하며 모은 전재산이다.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는 데다 바지 한 벌을 20여년간이나 입는가 하면 밤중에도 전깃불 대신 촛불을 켜고 책을 보는 등 그의 청빈함과 절약정신은 정평이 나있다. 현도사회복지대는 鄭대주교가 기탁한 장학금으로‘정진석 장학재단’을 설립,매년 40∼50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계획이다.이 대학은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이들의 보금자리인 꽃동네를 운영해온吳신부가 전문봉사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교법인이다. 吳신부는“대주교께서는 청주교구장 재임 시절부터 꽃동네 일을전폭적으로지원해 주시기도 했다”며“대주교님의 뜻을 받들어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대학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 기독교계 남북화해 길연다 금강산서 평화통일 기도회

    금강산에서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기독교인들의 예배가 열린다. 개신교 8개교단 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회장 丁哲範 성공회대주교)는 다음달 22일부터 25일까지 3박4일간 금강산 방문길에 나선다고 밝혔다. KNCC가 주최하고 대한매일·스포츠 서울,현대상선이 후원하는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기독교단체 금강산 방문’에서는 선상 예배와 토론회,초청 강연,세미나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다. 800명 규모로 이뤄질 금강산 방문단은 현대 봉래호 선상에서 통일을 위한기도회를 시작으로 금강산 예배 등 평화통일을 위한 기독교인의 사명을 다짐한다. 특히 행사의 수익금은 조선기독교도연맹을 통해 북한동포를 돕기 위한 헌금으로 쓰여지게 된다.또 방북기간 중 기독교계가 마련한 생필품과 식량 등 ‘사랑의 선물’도 전달할 계획이다. KNCC는 방북 기간 중 남북한 기독교인들의 공동 기도회가 열릴 수 있도록우리 정부와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에 제의했다. KNCC 총무인 金東完목사(57)는 “과거 분단의 아픔을 겪었던 독일의 경우기독교단체의 교류가 통일의 시발점이 됐다”면서 “대북선교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지는 이번 행사는 남북교류와 화해,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행사에 참가하는 상도성결교회 黃大植목사(70)는 “북한땅에서 이뤄지는 첫 예배인 만큼 기대가 크다”면서 “남북한 공동기도회가 성사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참가할 기독교인 및 일반인들은 다음달 6일(토)까지 KNCC (02)763-7323과신일관광 (02)775-3333으로 신청하면 된다. 한편 KNCC는 지난해 대북식량지원에 이어 올해도 ‘1,000원 헌금운동’‘평화의 쌀 모으기 운동’ 등을 펼친다.또 ‘21세기 통일을 다짐하는 나의 삶’ 등의 캠페인과 통일을 다짐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에 들어간다.오는 4월22일 콘라드 라이저 세계교회협의회(WCC) 총무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북한 기독교 대표단의 서울 방문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趙炫奭hyun68@
  • 종교 지도자 신년 메시지 발표

    각 종교지도자들이 신년 메시지와 법어를 발표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丁哲範 회장(성공회 대주교)은 “1999년은 제 3 천년대를 목전에 두고 새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와 갱신을 준비해야하는 해 ”라며 “우리민족 최대의 과제인 경제위기와 분단 극복을 위해 교회가 나눔 운동에 앞장서고 용서와 화합으로 하나되는 본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교 천태종 金道勇 종정은 “善惡간의 온갖 행위는 모두 한마음에서 나오 는 것”이라며 “각자 善의 씨앗을 심고 참된 자아발견과 윤리생활을 할 때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먹구름은 걷힐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 진각종 覺海 총인은 “우리 사회가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 은 눈앞의 허상에 집착하여 미연(未然)에 복(福) 심고 미맹(未萌)에 화(禍) 끊는 물질 해탈의 이치를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참회와 용서와 나 눔과 화합으로 모두가 함께 사는 만다라 세상을 만들자”고 당부했다. 증산도 安雲山 종도사는 “국민 모두가 해원상생의 道心으로 굳게 뭉쳐 지 난 세월 누적된 부조리를 청산하면 IMF체제는 우리 민족에게 오히려 큰 축복 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의 黃善祚 회장은 “도덕과 윤리,가정의 붕 괴는 심각한 도전”이라고 말하고 “새해를 맞아 인류역사를 총체적으로 정 리하고 새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불교 태고종 安德岩 종정은 “나만 생각하는 욕심을 버리고 이웃을 생 각하는 이타(利他)정신을 발휘해 오늘의 경제난을 이겨내자”고 말했다. 원불교 李廣淨종법사는 “이기심이 인류사회를 어둡게 하고 있다”면서 “ 자연과 법률과 도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 복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자” 고 강조했다. ?겠塗? parkchan@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성당·교회 일제 자정미사·예배

    ◎“어려운 이웃에 화해의 손길 내밀어야”/성탄 축하 메시지 발표 성탄절을 하루앞둔 24일 개신교와 천주교는 성탄예배와 음악회,사회복지시설 방문 등 다채로운 행사를 펼쳤다. 천주교는 전국 성당에서 일제히 자정미사를 올렸다.서울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鄭鎭奭 대주교는 성탄축하 메시지를 통해 “어려운 시기에 방황과 좌절과 체념으로 살아가는 우리 이웃을 외면한 데 대해 그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한다”면서 “실직자들과 그 가족,노숙자들,그리고 북한 동포,중국의 조선족 및 해외동포,외국인 노동자 등에게 우리는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金壽煥 추기경은 대구의 국제재활원을 방문해 성탄 전야미사를 집전했다. 서울 중구 장충동 경동교회는 이날 오후 성가경연대회와 성탄음악회를 가진 뒤 자정예배를 올렸다.대한성공회도 서울 중구 정동 주교좌성당에서 성탄축하의 밤 행사를 가졌다. 구세군은 이날 자정 서울 중구 명동 상업은행 앞에서 자선냄비 종료를 알리는 마감예배를 올렸으며,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순복음교회는오후 6시30분 인터넷방송 개국 및 성탄축하 예배를 가졌다.
  • 예수탄생 기쁨 이웃과 함께/천주교·각 개신교단 다채로운 성탄행사

    기독교 최대의 경축일인 성탄절(25일)을 맞아 개신교와 천주교는 성탄예배와 음악회,사회복지시설 위문등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IMF 한파로 아직도 고통받는 이웃이 많은 만큼 축제적 분위기보다는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불우이웃과 기쁨을 나누는 내실있는 행사로 꾸밀 계획이다. 천주교는 25일 0시 전국의 성당에서 일제히 성탄 전야 자정미사를 올리며 25일 낮에도 계속해서 미사를 갖는다. 서울대교구는 정진석 대주교가 25일 0시와 정오 두 차례에 걸쳐 명동성당에서 성탄미사를 집전하며 각 교구장들도 교구별로 주교좌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다. 개신교계는 각 교회별로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와 공연,불우이웃 위문행사 등으로 성탄을 맞는다. 서울 중구 저동의 영락교회(예장 통합)는 22일 산하 복지시설인 보린원과 애니아의 집에서 성탄예배를 올렸다. 대한성공회는 서울 중구 정동 주교좌성당에서 25일 0시와 오전 7시·11시에 미사를 올리며 자정미사와 11시의 대미사는 정철범 대주교가 집전한다. 구세군은25일 0시 서울 중구 명동 상업은행앞에서 자선냄비 종료를 알리는 마감예배를 갖고 25일 오전 11시를 전후해 교회별로 성탄예배를 올린다.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24일 오후 6시30분 인터넷방송 개국및 성탄 축하예배를 갖는데 이어 25일 오전 7시부터 두 시간 간격으로 7차례의 성탄예배를 올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김동완 총무는 24일 오전 1시 서울 성북구 정릉4동 철거지역을 방문해 ‘실직자와 함께 하는 성탄예배’를 인도하고 25일 오전 11시 서울청량리 쌍굴다리에서 열리는 다일공동체의 ‘거리에서 드리는 성탄 대축일예배’에도 참석해 축도를 드릴 계획이다.
  • 가톨릭대 총장 崔承龍 신부

    가톨릭학원(이사장 鄭鎭奭 대주교)은 18일 내년 2월28일 임기가 끝나는 가톨릭대 姜禹一 총장 후임에 崔承龍 신부(61)를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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