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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녀따라 세월따라

    미녀따라 세월따라

    세월 속에 스타도 여지없이 변했다. 그러나 흘러간 필름을 돌리면 청순하고 풋풋하고 섹시한 미녀스타들은 시간을 뛰어넘은 듯 그 자리에 있다. 선데이서울은 1991년 12월 29일 제1192호에서 ‘미녀따라 세월따라’ 시리즈 2탄으로 장미희, 금보라, 윤미라, 혜은이의 젊디 젊은 모습을 소개했다. 장미희, 21세 때인 1977년 영화 ‘겨울여자’에서 주인공 이화역을 맡으면서 스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당시 겨울여자는 역대 최고인 관객 58만명을 기록, 한국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장미희는 최근 출연했던 TV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엄마는 뿔났다’ 등에 이어 ‘맏이’로 시청자 앞에 설 예정이다. 금보라는 요즘 TV드라마 ‘금나와라 뚝딱’과 CF에 얼굴을 비치고 있지만 ‘52(1961년생)’가 말그대로 단지 숫자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인식시켜줄 만큼 미모를 자랑하고 있다. 금보라는 1980년 영화 ‘물보라’로 데뷔,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 윤미라, 1970년 영화 ‘슬퍼도 떠나지마’를 시작으로 영화 배우로서 이름을 날리다 1982년부터 TV 로 발길을 돌려 ‘솔약국집 아들들’, ‘맛있는 인생’, ‘그대없인 못살아’ 등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 맛깔스런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혜은이는 1970년대 후반 가요계를 휩쓴 최고의 가수다. 1975년 ‘당신은 모르실꺼야’로 가요계에 데뷔한 이래 ‘제3한강교’, ‘감수광’, ‘진짜 진짜 좋아해’ 등 많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인기와 더불어 영화 ‘제3한강교’ 등 3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선데이서울 91년12월29일] ●이 기사에 대한 저작권, 판권 등 지적재산권은 서울신문의 소유입니다. 무단 전재, 복사, 저장, 전송, 개작 등은 관련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 새달 3일 시상 한국방송대상 선정 막후 이야기

    “한곳에 몰아줘도 좋으니 있는 대로만 평가해 주세요. ‘나눠 먹기’란 없습니다.” 지난달 9일 강원 양양군 서면의 산중 호텔 회의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15명의 예심 심사위원들을 향해 한국방송협회 관계자는 “가감 없이 평가해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1989년 다큐멘터리 ‘광주는 말한다’를 연출해 광주민주화운동을 최초로 재조명한 남성우 전 KBS편성본부장(64·언론인권센터 이사장), 몬트리올 영화제 각본상과 대종상 감독상을 수상한 장길수(58) 수원대 교수, 권혁남 전 언론학회장(58·전북대 교수), 김서중 언론정보학회장(53·성공회대 교수), 최장수 휴먼 다큐인 ‘인간시대’를 집필했던 고선희(53) 서울예대 교수 등 문화예술인, 학자, 언론인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3박 4일간 외부와의 접촉이 일절 금지된 채 진행된 합숙 심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이어진 ‘강행군’이었다. ‘저널리즘’ ‘정보공익’ ‘방송예술’ 등 3개 부문으로 나눠 3개 방에 5명씩 들어간 심사위원들은 연일 날 선 토론을 이어 갔다. 심사를 위해 봐야 하는 작품은 나흘간 평균 70여편. 한편에 불과 몇십초짜리 뉴스에서부터 다큐, 시사, 오락, 예능, 장편드라마까지 다양했다. 채점은 심사위원별로 최저 6점에서 최고 10점까지 0.5점 단위로 끊어서 이뤄졌다. 점수를 합산해 2배수로 분야별 작품상 후보를 올리면 7명의 본심 심사위원이 다시 3박 4일간 합숙하며 수상작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심사위원들은 올해 제40회 한국방송대상의 분야별 수상작으로 총 234편 가운데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KBS), 시사보도 프로그램 ‘시사매거진 2580’(MBC),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SBS) 등 31편을 최종 선정했다. 개인 수상자로는 방송인 고 이종환과 코미디언 신보라, 연기자 손현주, 가수 싸이 등 24명이 뽑혔다. 시상식은 다음 달 3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릴 예정이며 대상 수상작은 시상식에서 최종 발표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세계에 임권택 알린 종교 영화의 걸작

    세계에 임권택 알린 종교 영화의 걸작

    출가한 지 6년이나 됐지만 연인을 잊지 못하는 법운 스님은 번뇌를 주체하지 못하고 구도의 길을 걷는다. 우연히 버스에서 만나 함께 생활하게 된 지산 스님은 항상 술에 찌들어 사는 타락한 ‘땡중’처럼 보인다. 실망한 법운은 지산을 떠나지만 두 사람은 어느 절에서 운명처럼 다시 만난다. 달관한 부처처럼 자유분방한 지산의 모습에 법운은 차츰 매력을 느끼게 된다. 만취한 지산이 동사하면서 법운은 지산이 파격적인 기행을 통해 얻으려 했던 구도의 길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EBS는 17일 밤 11시 15분에 영화 ‘만다라’를 방영한다. 임권택 감독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자신의 작품으로 꼽은 영화이자 한국 영화사에서 걸작으로 손꼽히는 종교 영화다. 임 감독은 “내 인생에서 가장 적극성을 보인 영화”라고 회고한 바 있다. 1979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은 김성동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종교지에 단편소설이 당선되며 등단한 김 작가는 조계종단과 마찰을 빚으며 승적을 박탈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임 감독은 “깨달음을 향해 한치의 낭비도 없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두 스님의 모습을 통해 자기 완성을 위해 산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만다라’는 1981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세계 영화계에 임 감독의 이름을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지산과 법운이 설경(雪景)을 걷는 롱숏(long shot)은 공간의 여백을 활용한 명장면으로 꼽힌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암에 걸려 수술을 받자 임 감독이 그의 몸이 낫기를 기다려 촬영을 시작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당시 법운 역을 맡은 안성기가 대종상 남우주연상, 지산 역을 맡은 전무송이 백상예술대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1만 5000원 들인 우리 영화가… 꿈꾸는 것 같아요”

    “1만 5000원 들인 우리 영화가… 꿈꾸는 것 같아요”

    “지금도 실감이 안 나요. 전국에서 50등 안에 들었다고 해 너무 놀랐어요. 선생님과 친구들도 부러워하고(웃음)…꼭 꿈을 꾸는 것 같아요.” 농촌 지역 중학생들이 만든 영화가 대종상 단편영화제 본선에 진출해 관심을 끌고 있다. 영화는 총제작비 1만 5000원과 스마트폰, 은박지 소품 등이 들어간 게 전부다. 나머지는 청소년들의 열정과 끼로 채워졌다. 화제의 작품은 전남 고흥 점암 중앙중학교 2학년 이유리(14)양 등 5명이 만든 단편 영화 ‘알룽푸와’(태양은 항상 당신의 꿈을 비추고 있다는 뜻)다. 우주선 나로호 발사지인 고흥의 청소년들이 이곳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에게 ‘꿈’이란 에너지를 전달한다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이 영화는 오는 18~21일 고흥군에서 열리는 ‘제50회 대종상 단편영화제’ 경쟁부문 본선 무대에서 수상작 선정 여부가 가려진다. 9일 사단법인 대종상 영화제에 따르면 지난달 말 전국 영화인이 출품한 단편영화 200여편을 심사해 본선 진출작 50편을 뽑았으며 여기에 영화 ‘알룽푸와’가 포함됐다. 영화 제작에는 전교생이 23명뿐인 점암중앙중의 2학년생 이유리, 송유진, 박아람, 이현준, 조철훈 등 5명이 참여했다. 이는 지난 2월 고흥교육지원청이 운영한 ‘청소년 단편영화캠프’를 통해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서 청소년들은 에너지가 고갈돼 고흥에 불시착한 외계인을 만나 외계인이 다시 우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주 로켓 발사에 성공한 고흥군의 특색을 살리는 아이디어와 청소년들의 기발한 상상력이 조화를 이룬 시나리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생들은 김영민 작가의 재능 기부로 촬영을 시작한 후 출연, 편집 등의 제작 기술을 총동원했다. 러닝타임은 14분으로 학생들의 연기와 재미, 순수성 등이 돋보인다. 이유리양은 “처음 영화를 찍을 때는 두렵기도 하고 겁도 많이 났는데 시간이 갈수록 재미 있고 용기가 났다”며 “겨울철에 야외 촬영을 하느라 너무 추웠지만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모두 웃으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학교 김을식(55) 교장은 “농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항상 새로운 생각과 창의력을 갖도록 당부하고 있다”며 “학생들이 이번 기회를 계기로 자신들을 더 사랑하는 마음과 자존감을 갖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번에 열리는 제50회 대종상 단편영화제는 유명 가수, 배우들의 축하 공연과 흥행 영화 상영, 전문가와 감독이 함께하는 영화 콘퍼런스, 영화 전문가들의 강의 콘퍼런스, 시상식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글 사진 고흥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5. 영원한 은막의 여인 최은희

    [명사가 걸어온 길] 5. 영원한 은막의 여인 최은희

    어느 시인이 말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너무나 드라마틱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운명적 단어들로 여자의 일생이 가득 채워졌다. 15살에 집을 나가 배우가 됐고 순탄치 않은 결혼과 이혼, 전쟁의 아픔, 그리고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 납북과 탈출 등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세월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서사시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를 가리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이라고 말한다. 영원한 은막의 스타 최은희(83)씨.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까만 모자에 안경, 목도리가 잘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파란 많은 삶을 살아온 그 세월이 무진할 텐데 수줍게 웃는 모습이 여전히 은막의 소녀처럼 다가온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창밖을 바라본다. 안경 너머의 눈빛,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신 감독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애절하게 서려 있는 듯했다. 중얼거림으로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길고도 모진 세월을 살아왔다. 고생을 모르고 자유와 평화 속에서 살아온 젊은 세대들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시간들이었다”라고 말이다. 최씨는 지난해 12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선정 제2회 아름다운예술인상 시상식에서 공로예술인상을 수상했다. 이 자리에서 영화 ‘은교’로 신인예술인상을 받은 한참 후배 김고은의 손을 잡고 격려해 주는 훈훈한 장면을 연출해 눈길을 끌었다. 요즘에는 어떻게 지낼까. “올겨울에는 날씨가 워낙 추워서 되도록 집에서 쉬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의 삶, 지나온 세월 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됐지요. 요새는 쉬어도 피곤함을 느낍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기능을 너무 많이 혹사시켰나 봐요. 제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나는 참 바보처럼 살았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해 외부활동을 하지 못하고 대신 마음의 정성을 담은 카드 등을 보내는 일로 대신하고 있다. 나들이할 때에는 걷기가 힘들어서 휠체어에 의지한다. 젊었을 때 너무 열정적으로 일을 하다보니 건강을 돌보지 못했고 요즘에는 노후 관리라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단다. 집에는 사촌동생이 함께 있고 가끔 영화감독인 아들 신정균과 영화 이야기를 나눈다. 아들은 1999년 ‘삼양동 정육점’으로 데뷔했으며 ‘스무살’(2001)과 ‘나의 스캔들’(2008) 등을 제작했다. 아들의 영화에 대한 평을 부탁했더니 “열심히 잘하고 있는 것 같다”며 웃는다. 자연스럽게 우리 영화 얘기로 이어졌다. 지난해 ‘영화 관람객 1억명 돌파 시대’와 관련해 그는 “너무 고맙고 흐뭇한 일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잘 만들어 가고 있다”면서 1961년 자신이 출연했던 ‘성춘향’을 떠올렸다. 이 영화는 당시 설 연휴 때 명보극장에서 개봉돼 서울에서만 4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었다. 이로 인해 ‘신상옥-최은희’ 전성시대를 열었다. “지금은 시대도 바뀌었고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 수 있어요. 옛날에는 검열이 심했거든요. 그로 인해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요즘에는 패밀리 영화가 자주 나오는데 좋은 현상이고 고무적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영화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신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 당시를 잠시 떠올린다. 북한을 탈출한 뒤 신 감독은 할리우드에 ‘신프로덕션’을 설립해 ‘쓰리 닌자’를 제작했으며 시사회 때 미국 전역 1500개 극장에 배급이 결정된다. 이는 대단한 사건이었고 신 감독은 할리우드 진출 1호로 기록됐다. 최씨는 2007년 자신의 영화 인생을 담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냈다. 이와 관련, “영국의 한 제작사에서 작년부터 제의가 들어왔고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곧 촬영에 들어간다. 또 최근 미국 드라마 제작사에서 제의가 들어와 국제변호사와 얘기하고 있다”고 말해 해외 진출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영화 발전을 위해 원로 연기자로서의 견해를 밝힌다. “집에 있으면서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입니다. 작가가 대본을 잘 쓴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 때로는 얼굴만 가지고 등장하는 후배 배우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대사 구성을 잘 못하는 경우이지요. 뭐든지 확실한 기초를 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들, 어머니, 딸 역할이 분명해야 하구요.” 드라마를 볼 때마다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반추해보며 영화배우로서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다. 화제를 데뷔 당시로 돌렸다. 어린 시절 활달하지 못한 성격이어서 친구들도 거의 없었다. 일제강점기 말이었다. 방공호에서 만난 친구가 “배우하자”고 느닷없이 제의했다. 그러더니 친구가 방공호에 함께 있는 배우 문정복(탤런트 양택조의 어머니)씨한테 가서 배우시켜 달라고 졸랐다. 당시 문씨는 연극계에서는 유명한 주연배우로 현대적이고 세련된 미인이었다. 이튿날 그는 친구와 함께 종로6가에 있는 극단 ‘아랑’ 사무실에서 문씨를 다시 만났다. 부모한테 허락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친구는 거침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바람에 허드렛일을 시작하면서 단원이 됐다. 나중에 연극협회 회원증을 받아 정식 회원이 됐고 덕분에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게 됐다. 얼마 후 지방 공연 일정이 잡혔다. 첫 행선지는 대전이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문씨가 대본을 건넸다. 얼떨결에 읽었다. 그랬더니 이번 지방공연 때 무대에 한 번 서 보라고 권유했다. 제목은 ‘청춘극장’으로 하녀 역할이었다.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연기자로 데뷔하게 됐다. “지금도 첫 무대의 낯섦과 두려움, 떨림과 환희, 관객들의 숨소리, 뜨거운 눈물과 갈채를 잊지 못합니다. 극단 연구생으로 어렵게 치러냈던 첫 무대에서 이미 연극의 마력에 푹 빠져 버렸습니다. 열심히 했고 운 좋게도 주연을 많이 맡았습니다.” 광복이 되자 새롭게 시작하고픈 마음에 이름을 최경순에서 최은희로 바꿨다. 극단 활동 또한 ‘토월회’와 ‘극예술연구회’ 등으로 넓혀 ‘40년’ ‘맹진사댁 경사’ ‘이순신’ ‘세자매’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영화를 처음 시작한 것은 동양극장에서 연극할 때였다. 토월회에서 함께 일했던 최운봉 선생이 찾아와 시나리오 대본을 주면서 같이 영화를 하자고 권유했던 것.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에서 순박한 어촌 처녀 역할이었다. 이 영화 역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이어 ‘마음의 고향’ ‘밤의 태양’ ‘무영탑’ 등에서 잇따라 주인공역을 맡으면서 영화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다가 목포에서 ‘사나이의 길’을 촬영할 때 6·25전쟁을 맞이한다. 배우들이 우왕좌왕했다. 부산으로 피란을 가거나 월북하는 배우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남편과 집안 식구들이 걱정돼 서울로 왔다. 집에서 지내다가 먹을 것이 없어 시장 보러 가던 중 그를 알아보는 인민군 장교를 만나 어쩔 수 없이 북한 내무성 소속 경비대 합주단원이 됐다. 당시 합주단 사무실은 명동 성당의 수녀들이 숙식하던 곳이었다. 배우 김동원·김승호, 지휘자 임원식, 성악가 등 200여명의 예술인들이 모여 있었다. 포로들처럼 수용돼 사상교육을 매일 받았다. 그러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후퇴할 때 평남 순천 쪽으로 끌려갔다. 평양에 거의 다다랐을 때 목숨 건 탈출을 했고 그 과정에서 국군을 만났다. 최씨는 인민군복에서 국군복으로 갈아입고 정훈공작대원으로 선무활동에 나서게 된다. 전쟁의 와중이라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다 1·4후퇴 때 서울을 거쳐 피란지인 대구에서 극단 ‘신협’ 단원들과 연극을 하게 된다. 이때 출연했던 작품이 ‘마의태자’ ‘춘향전’ ‘맹진사댁 경사’ ‘뇌우’ 등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십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신 감독과 만난 것은 ‘춘향전’ 공연 때였다. 어느날 알고 지내던 배우 황남씨가 영화 출연 교섭을 해왔고 며칠 뒤 중국집에서 신 감독을 처음 만났다. 이후 신 감독은 극단에서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열정을 보였다. 결국 영화를 하자는 구애작전이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1954년 3월 7일 을지로6가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둘은 하루 24시간 그림자처럼 같이 다녔다. 영화 같은 삶이 시작된 것이다. 두 사람이 찍은 첫 작품 ‘꿈’을 비롯해 최씨는 ‘젊은 그들’ ‘무영탑’ ‘지옥화’ ‘춘희’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1976년까지 130여편에 출연했다. 이 가운데 ‘어느 여대생의 고백’으로 대박을 터뜨리며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주최 제1회 국산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후 ‘다정도 병이런가’ ‘동심초’ 등에서도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신 감독과 함께 전성기를 누린다. 우리 영화사의 큰 획을 그은 것도 이때였다. 1978년 최씨는 신 감독과 이혼을 했으며 안양예술학교를 운영하는 일에 전념했다. 어느 날 홍콩 금정영화사의 초청으로 홍콩을 방문했다. 일정을 소화하던 중 북한의 요원들에 의해 납북된다. 이후 5년 동안 연금 상태에서 혼자 지내다가 북한에서 신 감독과 다시 운명적인 재결합을 한다. 그렇게 9년 동안 북한에서 지내면서 모두 1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때 찍은 대표작이 ‘불가사리’ ‘임꺽정’ 등이다. “당시 매주 금요일에 연회가 열렸고 여러 번 참석하면서 김정일 위원장과 여동생 김경희·장성택 부부, 김영남 외교부장 등과도 만났지요. 김정일 생일에도 초대를 받은 적이 있어요. 김정일과 관계된 곳은 공공 건물이든 가정집이든 어디나 영사실이 부설돼 있는 게 특징이었습니다.” 1986년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했다가 탈출에 성공한 최씨 부부는 미국에서 한동안 지내다가 1999년 다시 국내로 돌아왔고 2006년 신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혼자 노년을 보내고 있다. 최씨에게 앞으로 출연기회가 온다면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그동안 정적인 역할이 많았다. 발랄한 연기를 하고 싶다”며 빙그레 웃는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서편제’ 데뷔 20년 오정해

    [김문이 만난사람] ‘서편제’ 데뷔 20년 오정해

    ‘큰 소리꾼이 되어라, 마음의 한을 품어라, 큰 소리꾼이 되어라.’ 20년 전 영화 ‘서편제’는 그렇게 심금을 울렸다. 아버지가 딸을 진정한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해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이다. 앞이 안 보이는 딸은 ‘이제는 소리밖에 할 수 없지요.’라고 애절하게 울부짖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국 영화 최초 100만 관객 돌파라는 신기록을 세우면서 그야말로 영화의 한 ‘신드롬’을 일으켰다. 판소리와 소리꾼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들도 이 영화를 통해 새롭게 이해하게 됐다. 그만큼 사회적 이슈였고 눈부신 영상에 녹아든 여주인공 송화의 목소리에 울고 감동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정서와 한을 토해내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이 영화는 1993년 상하이영화제 최우수감독상(임권택), 최우수 여우주연상(오정해), 제31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감독상, 제14회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남우주연상(김명곤), 제4회 춘사영화예술상 대상·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오정해), 청룡영화제 최다관객상·대상·작품상·촬영상·신인여우상·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오정해(41)씨에게는 요즘 ‘서편제’(아래 사진)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20년 전 미스 춘향 ‘진’으로 뽑히면서 임권택 감독에 의해 ‘서편제’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 얼떨결에 출연했지만 영화가 대박을 터뜨릴 줄 몰랐다. 지금 생각해도 울면서 연기를 했던 기억이 선하다고 말한다. 연기 생활 20년을 맞은 그를 만났다. 지난 13일 오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경기 안양의 한 중국집 2층에서 마주 앉았다. 중국집은 ‘퓨전 중식’ 메뉴로 남편이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남편을 도와 중식당에 가끔 나왔지만 지금은 바빠서 거의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오씨와는 구면이어서 오랜만이라고 인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월이 좀 지났는데도 얼굴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자 “저는 숫자를 잘 몰라요, 나이를 세면 뭐해요.”라며 웃는다. 그는 원래 솔직 털털한 성격이다. 책 읽는 것, 조근조근 대화하는 것도 좋아한다. “지난주 토요일 경기 광주에서 ‘오정해의 소리이야기’(부제,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관객들과 편하게 만났습니다. 그때 그랬지요. 지난 세월을 살아오면서 데뷔 20주년이라는 말을 처음 꺼냈습니다. 전화를 주시지 않았으면 그조차도 잊고 살았을지 몰라요(웃음).” 원래부터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는 “나이든 몇 월 며칠 세는 것이 중요한지 모르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얼마 전 결혼 15주년인 것도 잊었었고 생일도 가끔 ‘까먹는’ 경우가 있단다. 정말 그렇게만 지냈을까. 따지고 보면 세월의 무게, 세월의 힘이란 무시할 수 없다. 최근 철학박사 학위를 땄고 ‘오정해의 소리이야기’라는 새로운 무대도 시작했다. 또 판소리 다섯 마당과 아리랑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자료수집 등 책자 발간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씨와 만나면서 ‘서편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였기 때문이다. 그 영화를 떠올릴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서편제는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른 것 같아요. 자기 안에서 찾는 영화의 장면이 달라요. 화면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요. 제 개인적으로는 영상과 음악이 아주 잘 어울리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가 잘 함축된 음악, 그리고 북을 치는 동호와 회포 푸는 장면 등 제가 불과 22살 때 겪었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는 당시가 더 어른스러웠다며 웃는다. 지금은 아이 낳고 엄마가 되었지만 그때는 뭣도 모르고 자신만만하게 모든 일을 했던 것 같다고 술회한다. 또한 주위에서 많이 이끌어 주었기에 더욱 그랬단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미스 춘향’ 시절로 돌아갔다. 타고난 노래 솜씨를 보이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판소리를 시작했다. 13살 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에서 최연소로 장원을 하면서 명창 김소희(1995년 작고)의 제자가 됐다. 이후 KBS 국악마당에 두 번 출연하면서 한복 연구가 허영(2000년 작고)과 인연을 맺었다. 결국 한복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칭찬에 ‘미스 춘향’ 대회에 나가게 되면서 ‘서편제’를 찍게 됐다. “어디 대회나 무슨 행사에 나갈 때마다 주위에서 제 손을 꼭 잡아 주셨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는 엄청난 행운이었죠. 도움을 많이 받았고 따라서 책임감 또한 컸습니다. 소리꾼 오정해로서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어왔다고나 할까요. 또 ‘서편제’라는 명찰이 붙어 있으니 부담이 없어요. 어떤 무대든, 어떤 장소든 그 명찰로 100% 편하게 다가갈 수 있어요. 관객들의 기대치도 그런 것 같고요.” 그는 지난 20년 세월을 돌아보면서 아이 낳고 딱 한 달 집에서 쉰 것 외에는 거의 매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것 같다고 회고한다. 관객들과 호흡할 수 있는 라이브 무대를 꾸준히 가졌다. 월요일에 한복을 입으면 이튿날에는 드레스를, 또 그다음 날에는 연극 무대복으로, 일주일 동안 매일 옷을 갈아입으며 관객들과 만났다. 그럴 것이 ‘서편제’ 이후 영화, 연극, 뮤지컬, 방송진행, 학생, 선생으로 살아 왔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는 박사학위까지 땄다며 수줍게 웃는다. 내용을 묻자 대단한 일은 아니라면서 부각시키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래도 연기자 중에는 보기 드믄 철학박사가 아니냐고 거듭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원래 저는 다도(茶道)에 취미가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엄마문화가 없잖아요. 교육문제도 그렇고 아이를 학교에만 맡긴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음식, 예절, 꽃, 그릇, 사물에 대한 관심을 갖다 보니 원광대에 계신 교무님을 알게 되면서 원광대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게 됐고 7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그의 논문 제목은 ‘판소리 심청가의 예술성 연구’이다. ‘심청가’를 모성애적 차원에서 새롭게 풀어 써 관심을 끌었다. 인당수 자체가 곧 ‘모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논문을 쓰고 나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많은 자료들을 모았지만 논문에 다 풀어내지 못해 좀 더 연구하면서 책으로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내친김에 심청가에 이어 판소리 다섯 마당까지 접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 있다. ‘아리랑’을 연구하겠단다. “외국 사람들이 ‘아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을 잘 못합니다. 지방마다 다르고 외국 교포사회에서의 아리랑도 다르고 그렇잖아요. 누군가 쉽게 정리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새삼 더 생겼다고나 할까요.” 공부하면서 느꼈던 고충도 털어놓는다. 익산까지 오고 가느라 직접 운전(지프 형식의 SUV 차량)을 하는 것도 그렇고 멀미하는 것, 방송과 무대 출연하는 것, 특강 시간을 쪼개 가며 공부하는 것 등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오늘에 충실하려는 버릇’ 때문에 무사히 공부를 마친 것 같다며 웃는다. “저는 단기 기억상실증처럼 살자는 주의입니다. 오늘에 충실하는 것이지요. 과거는 흘러간 것이고 다가올 미래에 대해 미리 불안해할 필요도 없잖아요. 또 어느 순간 일이 많다고 생각하면 그냥 놔 버려요. 오늘 다 움켜쥘 필요가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놔 버렸던 것이 다시 오거든요. 20년 전에는 책임감으로 살았지만 지금은 놔 버릴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겨울이 되면 길가의 가로수가 나뭇잎조차 내려놓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그는 20년 전에 입었던 옷을 지금도 입는다고 했다. 중간에 ‘돼지’처럼 살찌기도 했지만 지금은 당시에 직접 만들었던 옷을 입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의 집에는 애지중지하는 재봉틀이 있다. 본인의 옷은 물론이고 아들 옷, 조카들 옷까지 손수 만들어 주기도 한다. 시간이 되면 동대문 시장에 가서 원단을 직접 고른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머릿속으로 20년을 다시 정리했다. 소리꾼 오정해는 판소리를 예술적으로 접근하는 일을 시작했고, 또 ‘오정해의 소리이야기’라는 특별한 무대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으며 내년에는 본인이 작사한 노래로 음반을 낸다. 아울러 집착이라는 단어를 버리고 편안하게 ‘오늘주의’로 홀가분하게 살아가고 있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행복한 오정해가 되는 것이며 오늘이 행복해야 미래가 있는 것 아니냐. 철학을 공부하다 보니 대답이 모호해진다.”며 웃는다. 동갑인 남편과는 친구처럼 지낸다. 영화, 독서 등 취미도 비슷하다. 17년 전 뮤지컬 ‘쇼 코미디’에 출연했을 때 동료 배우 최정원씨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슬하에 중학생인 아들이 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판소리 신동 오정해 철학박사 되기까지 197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6살 때 고전무용을 시작했다. 한복을 뒤집어쓰고 사극을 흉내내는 것을 좋아했다. 이후 주위의 권유로 국악과 판소리, 가야금을 배웠다. 13세 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최연소로 장원, 주목을 끌었다. 이때 인간문화재 김소희 선생의 직계 제자가 됐다. 중학교 2학년 방학 때부터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판소리를 공부했다. ‘춘향가’ 이수자인 그는 학창시절부터 국악경연대회나 명창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다. 1992년 미스 춘향 ‘진’으로 선발되면서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 ‘서편제’(1993년)로 데뷔했다.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서울관객 100만명 돌파 등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서편제’로 스타가 된다. 이후 영화 태백산맥(1994년), 축제(1996년), 천년학(2007년) 등에 출연했다. 2008년에는 마당극 ‘학생신위부군’에 출연, 호평을 받았다. 중앙대 국악예술학 석사를 거쳐 최근 원광대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방송 진행, 특강, 연극, 뮤지컬 등에 출연하고 있다.
  • 광해, 대종상의 남자

    광해, 대종상의 남자

    30일 밤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제49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15개 부문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피에타’는 2개, ‘이웃사람’ ‘은교’ ‘도둑들’은 각각 1개의 상을 가져갔다. ‘광해’의 주연배우인 이병헌과 조연 류승룡은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광해’는 이 밖에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시나리오상, 편집상, 인기상, 음악상, 미술상, 의상상 등을 휩쓸었다. 이병헌은 인기상까지 받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광해’의 추창민 감독은 무대에 올라 “상을 많이 받아 기쁘기도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많은 영화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광해’는 ‘도둑들’에 이어 올해 두 번째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작품으로 이병헌의 1인 2역이 돋보였다. 여우주연상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피에타’(감독 김기덕)의 조민수가 차지했다. 김기덕 감독은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여우조연상은 ‘도둑들’의 김해숙이 차지했다. 신인남우상과 신인여우상은 각각 김성균(이웃사람), 김고은(은교)에게 돌아갔다. 이번 시상식에선 투표로 작품을 선정해 온 기존 제도에서 탈피해 최고 10점부터 최하 5점까지 점수화시켜 평가하는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서늘한 눈빛·질펀한 언어가 만든 ‘판타지’

    서늘한 눈빛·질펀한 언어가 만든 ‘판타지’

    ‘우리의 연극은 지금 여기 인간다운 삶의 진실을 담는다.’(국립극단 연극 선언문) ‘넙이’ 역을 맡은 3년차 배우 임성미(27)씨에게 “왜 연극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오른손 검지로 연습장 정문을 묵묵히 가리킨다. 식사 뒤 정담을 나누던 ‘아낙들’역의 여성 연기자들 표정이 갑자기 굳어진다. 아낙들 중 최고참인 10년차 진문영(36)씨는 “경제적 어려움은 과정일 뿐 (인생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국립극단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1년에 120만원 벌기 힘들어, 가족 부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연극을 그만둔 후배를 떠올리며 던진 질문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하게 가라앉았다. 아낙들을 선동하는 무당 ‘검네’ 역의 이용이(54)씨는 “(내가)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보다 1000배는 힘들었다.”고 힘줘 말했다. 공연을 하고 싶어도 대관해줄 극장이 없어 무대를 밟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연극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어 (후배들에게) 그만두라 해도 쉽게 그만두지 못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35년차 연기자다. 남편은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은 고 김일우씨, 오빠는 영화배우 이대근(69)씨다. 딸도 대학 졸업 뒤 연극무대에 투신, 무대에 올리는 불화(佛?)를 그리고 있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아들은 군 복무 중이다. ‘연극가족’인 셈이다. 지난 6일 밤 서울 용산구 서계동의 연습장은 연극 ‘꽃이다’에 출연한 배우들로 북적였다. 서늘한 눈빛 연기로 섬세함을 표현한 ‘수로’ 역의 여배우 서영화(44)씨와 동아연극상을 받은 ‘득오’ 역의 이승훈(43)씨, ‘순정공’ 역의 김정호(41)씨 등 출연진 모두 이름 석자만 대도 알 만한 베테랑들이다. 서씨는 올해 영화 ‘더 먼 곳’의 주연을 맡아 영화와 연극판을 오가고 있다. 질투 어린 표정으로 극 중 바닷가 처녀 ‘아리’를 쳐다볼 때는 전율이 느껴진다. 요란스럽고 희한하고 예리한 팜파탈의 연기를 신비롭도록 조용히 해냈다. 수로의 시샘을 받는 ‘아리’ 역의 이서림(36)씨는 “(나는) 삼국유사에는 없는 창작된 인물”이라며 “뒷부분에 배역이 더 있는 만큼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극단 풍경의 대표인 연출가 박정희씨는 이 같은 선 굵은 연기자들의 조화에 초점을 뒀다. 박씨는 “배우들과 개념을 공유하며 한 번씩 끊어 가니 힘들지 않더라.”며 활짝 웃어 보였지만, 이미 한 달을 넘긴 고된 연습과정이 그대로 얼굴에 배어 있었다. ‘꽃이다’는 국립극단의 삼국유사 프로젝트의 두 번째 이야기. 타고난 미모 때문에 강릉 앞바다 용왕에게 납치됐다가 풀려난 수로부인 설화에 서스펜스와 판타지를 결합해 몽환적 정치극으로 각색했다. 용왕의 수로부인 납치가 조작됐다는,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 극을 이끈다. 군부대 이전 부지를 넘겨받아 지은 허름한 연습장. 조명도 없이 이어지는 리허설이었지만 연기자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온다, 온다, 온다 살길 따라 온다. 서러운 사내들 이내 품에 돌아온다~.”는 아낙들의 노랫가락에 실려 시작된 연극은 신라시대 최고 미인이라는 수로가 남편 순정공을 따라 강릉에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마을 사람들은 성벽 공사를 위해 징발한 2000명의 장정을 내놓으라며 농성을 벌이고, 이렇게 이어지는 백성과 권력자의 대결은 운율에 담긴 대사와 독특한 리듬감을 타고 전해진다. 연습장 뒤켠에 내걸린 흰색 천에는 한글과 한문으로 번갈아 ‘꽃’(花)자가 적혀 있다. 배우들은 그 앞에서 “세상 수컷들 오금을 저리게 하거라.”, “용용 죽겠지의 용?” 등의 언어유희를 펼친다. 이번 무대에 오르기 위해 배우들은 10대1의 오디션을 통과했다. 무사와 별동대 등의 역을 맡은 남자 연기자들은 검도 등의 특기 경력까지 감안됐다. 이렇듯 꼼꼼한 준비 덕분에 난장 속 카타르시스라는 극적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했지만 배우들은 아직도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못하고 있다. 이미 무대에 올려져 공연 중인 첫 번째 이야기 ‘꿈’과 곧바로 비교되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매일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8시간씩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다. 오후 6시 잠시 틈을 낸 선후배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주섬주섬 챙겨 온 도시락과 반찬을 꺼내 놓고 저녁 식사를 했다.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연습. 땀 냄새가 진동했다. “20세기의 역사는 삼국유사가 구약성서에 졌다. 지금부터 주몽이 모세를 능가하는 판타지가 나와야 한다.”던 고 백남준 선생의 뜻에 따라 국립극단은 올해 ‘삼국유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꽃이다’는 서울 용산구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오는 22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공연된다. 1만~3만원. 1688-5966.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부고] ‘빨간마후라’ 배우 윤인자씨

    [부고] ‘빨간마후라’ 배우 윤인자씨

    원로배우 윤인자씨가 지난 20일 오후 6시쯤 노환으로 별세했다. 89세. 고인은 1954년 한형모 감독의 영화 ‘운명의 손’으로 데뷔한 후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 김수용 감독의 ‘춘향’,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에 출연했다. 강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를 주로 연기한 고인은 ‘한국 최초’란 수식어가 많이 붙는 영화인으로 꼽힌다. 데뷔작 ‘운명의 손’에서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배우 이향과 키스신을 선보였고, 1957년 ‘전후파’에서는 최초로 누드신을 찍기도 했다. ‘빨간 마후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1965)을 받았고, 대종상 심사위원 특별상(1989), 백상예술대상 특별상(1989), 여성영화인축제 공로상(2005) 등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한국영상자료원 주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빈소는 서울 수유동 대한병원, 발인은 22일 오전 9시. (02)992-4444.
  • 국악, 정오에 즐겨볼까

    국악, 정오에 즐겨볼까

    비교적 여유로운 시간인 오전에 다소 저렴한 가격으로 관객을 찾아가는 ‘마티네 콘서트’(정오나 주간에 하는 공연)가 국악에도 있다. 올해는 더욱 알찬 프로그램으로 무장해 관객을 기다린다. ●‘다담’ 28일 올 첫 공연… 문정희 시인 초대손님으로 국립국악원이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오전 11시에 서울 서초동 국악원 우면당에서 여는 ‘오전의 국악콘서트 다담(茶談)’은 오는 28일 올해 첫 공연을 올린다. 올해도 방송인 유열이 사회자로 나서, 전통 국악곡을 듣고 각 분야 명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또 민요와 정가 등 전통 성악곡을 배우고 국악기를 알아보는 순서로 진행된다. 첫 공연에는 여류시인 문정희씨가 초대손님으로 등장해 ‘시와 사랑’을 주제로 이야기한다.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시 세계로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등을 수상한 문정희씨는 이 자리에서 그의 43년 시 인생을 풀어낼 예정. 이어 왕실의 번영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기 위해 왕비나 왕이 직접 춤을 춘다는 내용을 담은 20세기 초반 창작무용 ‘태평무’를 보고, 봄을 알리는 경기민요 ‘노들강변’을 배우는 시간을 갖는다. 국악기 집중 소개 코너에서는 해금 연주자 윤주희가 새 앨범 ‘소우주’의 수록곡을 연주한다.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 전통 한방차와 맛깔스런 다식을 즐길 수 있다. 국악원 예약당 2층에 ‘유아누리’를 운영하고 있어 아이를 맡기고 관람할 수도 있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에게 국악 체험 경험도 제공한다. 전석 1만원. (02)580-3300. ●‘정오의 음악회’ 5월까지 오정해씨가 사회자로 국악 마티네 콘서트의 원조격인 국립극장의 ‘정오의 음악회’는 매월 셋째주 화요일 오전 11시에 열린다. 2009년에 시작된 ‘정오의 음악회’는 예술성 높은 음악에 쉬운 해설을 덧붙여 우리 음악에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올해는 국립극장 전속단체인 국립국악관현악단,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전통·창작 국악관현악 작품뿐만 아니라 국악으로 편곡한 클래식, 창작 판소리, 무용 등을 풍성하게 꾸몄다. 4월 17일과 5월 15일 공연에는 영화 ‘서편제’, ‘천년학’ 등에 출연한 방송인 오정해씨가 사회자로 나선다. 1시간 정도 진행되는 공연이 끝나면 로비에서 콩떡과 음료를 나눠준다. 10회 공연과 국립극장 안에 있는 식당의 할인메뉴를 연계한 연간 패키지도 마련했다. 전석 1만원(식음료비 포함). (02)2280-4115∼6. ●고급 런치 콘서트 ‘자미’ 새단장 고급스러운 국악공연이라면 세종문화회관이 운영하는 삼청각의 런치 콘서트 ‘자미’(滋味)가 있다. 2010년부터 시작한 ‘자미’는 점심식사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국악 공연을 함께 즐기는 시간. 올해는 영화 ‘타짜’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등에서 음악감독을 맡은 작곡가 장영규씨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하고, 청룡영화제와 대종상영화제에서 미술상을 받은 이형주가 무대를, 미디어 아트 작가 뮌이 영상을 맡아 새롭게 단장했다. 상반기는 6월 27일까지, 하반기는 9월3일부터 12월 31일까지 운영한다. 시간은 매주 월·화·수 낮 12시. 5만~7만원(한정식 포함). (02)765-3700.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조성하 “난 아직 갈길 먼 신인”

    조성하 “난 아직 갈길 먼 신인”

    지난 2010년, 스크린과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얼굴을 꼽자면 그를 빼놓기란 어렵다. 영화 ‘황해’의 김태원 사장,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의 정조, ‘욕망의 불꽃’의 김영준까지. 뻔한 임금이고, 재벌이고, 사장인데 그의 몸을 빌리면 전혀 다른 캐릭터가 나온다. 이쯤에서 감이 올 터. 배우 조성하(46)의 얘기다. ‘꽃중년’, ‘꿀성대’란 간지러운 별명으로 대중에게 다가왔지만 ‘운 때’만 맞으면 언제든 뜰 만한 배우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었다. ‘명품조연’, ‘신스틸러’ 같은 수식어로 설명되던 그가 처음 공동주연을 꿰찼다. 변영주 감독의 8년 만의 복귀작으로 관심을 모은 영화 ‘화차’(8일 개봉)에서 이선균, 김민희와 함께 출연한 것. 지난달 28일 오전 10시 서울 신문로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 ‘황해’ 사장·‘성균관’ 정조… 색깔 있는 연기 일본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화차’는 미스터리의 외양을 띠었다. 결혼 한 달을 앞두고 부모님 댁에 인사를 가던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약혼녀가 사라진다. 당황한 문호는 전직 형사인 사촌형 종근과 사라진 약혼녀의 흔적을 쫓는다. 하지만 문호가 알던 선영는 모두 가짜다. 그동안 폼나는 역할을 도맡던 그가 이번에는 뇌물을 받아 잘린 전직 강력계 형사로 나선다. 노숙자에 가까운 몰골로 살던 그는 사냥감을 찾은 뒤론 냉철한 형사의 안테나를 바짝 세운다. 이선균과 김민희는 딱 예상했던 만큼의 연기력을 보여줬다. 반면 조성하는 여태껏 맡았던 스펙트럼을 넘나들며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전북 전주에서 ‘500만불의 사나이’를 밤샘 촬영하고 새벽에 압구정동 미용실을 들러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탓인지 피곤해 보였다. 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고자 기자가 가벼운 ‘잽’을 던져봤다. 우아한 역할만 맡다가 꾀죄죄한 전직 강력계 형사를 맡은 소감을 물었다. “서울예대 다닐 때 밤새 술 먹고 남산 언저리에서 노숙하고 했는데, 그때 모습인 것 같다. ‘이 배우가 이런 역도 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다.” 연극판에 오랫동안 몸담다가 관심을 받은 배우 중 상당수는 불필요한 ‘날’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영화 홍보를 위한 프로모션에서 망가지는 건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조성하는 좀 다르다. 영화 홍보를 위해 TV 예능에 출연해 “나는 울산의 원빈”이라고 밝혀 실시간 검색순위 1위에 오르는가 하면 “‘화차’가 300만을 돌파하면 셔플댄스를 추겠다.”고 라디오에서 공약을 내걸기도 했다. 동갑내기인 변 감독과는 처음부터 호흡이 맞았던 모양. 여장부 스타일의 변 감독의 첫인상을 물었다. “(변 감독을 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느낌을 갖지 않겠나. 굳이 나한테 물어 보는 이유는 무언가.”라고 눙을 치더니 “옛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편안했다.”고 말했다. 그가 배우가 된 건 딱히 끼가 많아서는 아니다. 평범했던 소년은 서라벌고에 입학했다. 학기 초에 ‘서클’(동아리) 선배들의 호객 행위가 한참이던 시절. “다른 곳은 일주일에 미팅 두 번이 공약이었는데, 연극반은 유일하게 네 번 이상을 해준다는 거다.” 미팅에 혹해 들어선 배우의 길이지만, 그의 DNA에는 연기 유전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동랑예술제라고 전국 고교 연극반 경연대회가 있었다. 1학년때 신명순 작가의 ‘전하’란 작품에서 간신 역할을 했는데 우수연기상을 받았다. 그때 어렴풋이 이 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생애 첫 주연 ‘화차’의 강력계 형사 서울예대를 졸업하고서 롯데월드에 몸담았다. 당시만 해도 롯데월드에 무용과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인재들이 몰렸던 때다. 심은하와 이진우 등도 롯데월드 퍼레이드 단원 출신. 10개월쯤 흐르고서 뮤지컬 팀에 들어갔고, 1990년 뮤지컬 ‘캐츠’로 전업 배우로 데뷔했다. 하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꼴. 3~4년을 버텼지만, 고개를 내둘렀다. “10~20년을 생각하며 무슨 일을 할지 고민했는데 뮤지컬은 아니었다. 제대로 연기를 공부하자고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1993년 극단 전설에 들어갔다. 영화감독 김지운과 연극배우 김지숙, 이남희 등이 속했던 이 극단에 몸을 담고 대학로에서 내공을 쌓았다. 서울예대 85학번 동기인 표인봉, 권용운, 정은표, 배동성 등이 먼저 방송을 통해 이름을 알렸지만, 그는 가난한 연극쟁이로 10여년을 버텨냈다. 이후 한 계단씩 느리지만,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큰딸이 태어난 서른셋 무렵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관두려고도 했다. 그런데 집사람이 ‘당신을 믿고 살아왔는데 (그만두면) 꿈도 희망도 사라진다’며 말리더라. 그동안 너무 이기적으로 살았다. 승부수를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1년에 단 한 편이라도 좋은 감독들을 만나면 경력으로 쌓일 거라고 봤다.” 40대 중반에서야 뒤늦게 떴지만, 최근 2년 동안 여의도와 충무로를 종횡무진한 그다. 그런데도 “아직은 신인이다. 갈 길이 멀다.”고 했다. 그는 “농담처럼 지인들에게 말했다. 지난해 대종상에서도 신인상을 노렸는데 조연상을 덜컥 받았다.”며 웃었다. # “날 페르소나로 삼을 감독 만나면 행복할 것” 인터뷰를 시작할 무렵 겸손한 콘셉트를 가져가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얘기를 할수록 천성이란 걸 알게 됐다. 그렇다면 지난 연말 이후 시나리오가 수북이 쌓일 만큼 러브콜이 집중되는 배우의 고민은 무얼까. 그는 “고민이라기보다는 바람이다. 운 좋게 꾸역꾸역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좋은 작품과 감독을 만나고 싶다. 송강호나 김윤석, 류승범씨를 보면 그를 페르소나로 생각하는 감독들이 있다. 좋은 감독과 예술적인 파트너가 된다는 것만큼 배우에게 복이 있겠나. 나를 페르소나로 삼을 감독을 만난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글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사진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 장근석 “이젠 국내서도 대박내고파”

    장근석 “이젠 국내서도 대박내고파”

    배우 장근석(24)을 처음 만난 것은 2007년 9월 한 인터뷰 자리에서였다. 인터뷰 장소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제 막 스물을 넘긴 그가 ‘쓸만 한’ 대답을 내놓을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친 뒤, 그런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는 청산유수처럼 자신의 생각을 술술 풀어냈다. 10일 개봉한 영화 ‘너는 펫’의 주연배우로 4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솔직하고 영리했다. 스스로 아시아의 프린스(‘아프’)라고 부를 정도의 자신감과 여유까지 더해졌다. →영화 홍보, 드라마 촬영, 일본 도쿄돔 공연 준비 등 살인적인 스케줄로 링거까지 맞았다고 들었다. -지금은 괜찮다. 이런 바쁜 스케줄도 결국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내 꿈은 ‘아프’를 넘어 ‘월프’(월드 프린스)가 되는 것이니까. 지난달 부산영화제에서 만난 로건 레먼(미국 할리우드의 차세대 스타)이 할리우드 진출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의 전화번호를 잃어버려서 안타까울 따름이다(웃음). →요즘 차세대 한류스타로 각광받고 있긴 하지만 스스로를 정말 ‘아프’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직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먼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것은 긍정적인 마인드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너는 펫’에서 연기한 귀엽고 매력적인 연하남 강인호는 지금의 장근석 이미지를 극대화한 역할인데. -2년 전에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하고 싶다고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아직 청년의 이미지일 때 깨방정을 떨 수 있는 그런 캐릭터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아픔이 없고 우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인물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좀 느슨한 역할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긴 한데, 시쳇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한 장면도 가끔 나온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는 입가에 계속 웃음이 유지될 수 있도록 깨알 같은 재미를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설탕을 두 스푼 넣어서 단맛이 나는 커피를 만들려고 했는데, 영화를 본 뒤 세 스푼이었다면 목표 달성은 했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극의 개연성을 높이면서 애드리브 맛도 살리려고 했다. →‘남성연대’라는 단체에서 영화가 남성을 개로 규정해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위배했다며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런 생각 안 할 것이다. 인호는 펫(애완동물)이 아니라 결국은 남자로 끝난다. →최근 대종상영화제에서 김하늘의 여우주연상 수상 때 함께 무대에 올라가 논란이 됐는데.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계산을 심하게 하지 않는 편이다. 하늘 누나 무대에 올라간 것도 순전히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주인공보다 더 튀었다고 수군대는 얘기도 있었나 보던데) 끝나고 하늘 누나도 고마워했다. 매 순간 나 자신에게 솔직하려고 한다. →그 솔직함 때문에 대중의 오해를 사기도 하지 않나. -그래서 얼마 전엔 잠시 트위터를 끊은 적도 있다. 요즘은 트위터에 글을 올리면 미디어의 관심으로 뜻이 와전되기도 하고, 친했던 사람들과 멀어지는 것이 좀 부담스럽다. →스스로 생각하는 장근석은. -많은 분들이 독단적이고 까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붙임성 있고 능글맞기도 하다. 남자 선배들에게는 예의 바르고 애교도 부린다. →인기 드라마 ‘미남이시네요’(2009) 이후 불과 2년 만에 일본에서 한류스타로 입지를 굳혔다. -‘미남이시네요’의 전작이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이었다. 예상 밖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 것이 아닐까. 그 이전부터 일본 진출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1년의 반은 일본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에 한국에서의 기회를 놓칠까 봐 새로운 도전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가수로서의 활약도 대단한데. -외국에서 유학할 때부터 일본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멘즈 논노’라는 잡지에 기무라 다쿠야가 가수로 소개됐는데, 그가 어느 날 드라마에 나와서 연기도 하더라. 그런데 쇼 프로 MC도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만능 엔터테이너를 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대박 작품을 만드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에 가수 활동을 할 생각은 없다. →스스로도 인정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대표작이 없다. 한국과 일본의 인기 온도 차이가 커 혼란을 느낀 적은 없나. -혼란은 없고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숙제다. ‘너는 펫’도 그렇고, 지금 촬영 중인 윤석호 감독의 드라마 ‘사랑비’를 선택한 것도 내 대표작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솔직히 스물네 살의 연기자에게 들어올 수 있는 배역이 제한적이지 않나. 나는 이제 스타트 라인에 섰다고 생각한다. →일본 내 인기가 ‘욘사마’ 배용준을 넘어섰다는 평가도 있던데. -배용준 선배는 역사적으로 양국의 친분을 도모하고 사회적인 현상을 만든 분이다. 나는 아직 닭이 되기 위한 병아리에 불과하다. 남자 배우로서 누아르 영화를 꿈꾸지만 아직 남자가 덜 된 것 같다는 장근석은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때 너무 빨리 남자가 되려고 했다가 마초처럼 비쳐져 비난의 화살을 맞은 적도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이처럼 장근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정확한 배우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위험한 발언을 꽤 많이 한 것 같다.”며 애교 섞인 웃음을 짓는 장근석. 그가 아시아의 여심(女心)을 흔드는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갔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NATE 검색어로 본 e세상 톡톡] 드디어… 카다피 철권통치 끝, 드디어… 박해일 남우주연상

    [NATE 검색어로 본 e세상 톡톡] 드디어… 카다피 철권통치 끝, 드디어… 박해일 남우주연상

    10월 셋째주 네티즌들의 가장 큰 관심을 끈 현안은 무엇일까. 민중 봉기에 뒤이은 내전으로 도피 중이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전 국가원수가 20일 고향 시르테에서 최후를 맞이한 가운데 ‘카다피 사망’이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이로써 42년간의 카다피 철권통치가 종식됐으며 8개월여에 걸친 내전도 사실상 끝났다. 한때 카다피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던 둘째 아들 사이프 알이슬람은 생포됐으며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낸 넷째 아들 무타심은 사망했다. 2위는 지난 17일 개최된 ‘제48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각각 남녀 주연배우상을 받은 박해일(‘최종병기 활’)과 김하늘(‘블라인드’)이 차지했다. 이날 박해일은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사랑하는 아이 엄마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소감을 전했으며, 김하늘은 “많은 분들께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삼성과 구글이 19일 공개한 스마트폰 ‘갤럭시 넥서스’도 상위권(3위)에 올랐다. 갤럭시 넥서스는 새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인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를 사용했다. 사용자 얼굴을 인식해 스마트폰 잠금을 해제할 수 있는 ‘페이스 언룩’ 기능과 2㎜ 더 얇아진 두께, 향상된 무선인터넷 속도, 1.2㎓ CPU 등 애플보다 앞선 사양으로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4위에는 ‘건국대 성폭행 사건’이 올랐다. 지난 6월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에 이어 이번에는 건국대 재학생 2명이 20대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성폭행 피해자라고 밝힌 한 여성이 학교 게시판 등을 통해 피해 사실과 상대 남성들의 신상을 모두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피해 여성은 가해자 2명 중 상대적으로 죄가 경미한 1명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으나 다른 1명의 고소까지 함께 취하된 사실을 뒤늦게 알고 성폭행 사실을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5위에는 ‘황우석 코요테 복제’가 올랐다. 황우석 박사 연구팀은 17일 국제자원보존연맹(IUCN) 멸종위기등급 주의단계 동물로 지정된 개과 동물 코요테를 이종 간 체세포 핵 이식 기법을 이용, 세계 최초로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코요테가 멸종위기 동물이 아니라는 주장 등이 나오면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뒤이어 6위는 ‘기부천사 교과서’가 차지했다. 최근 정부와 한나라당은 기부 문화 활성화를 위해 교과서에 나눔 실천 사례를 수록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가수 김장훈 이야기 등을 넣겠다는 구상이다. 7위에는 19일 벌어진 수원 삼성과 알사드(카타르)의 축구 경기가 올랐다. AFC 챔피언스리그 사상 최악의 난투극으로 기록된 이날 경기는 수원팀 선수가 부상당한 선수들을 보고 쳐낸 공을 알사드 선수가 골로 연결시키면서 순식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8위는 정규앨범 3집을 들고 1년 만에 국내 무대에 복귀한 걸그룹 소녀시대가, 9위는 21일 오후 1시쯤 경남 함안군 박모씨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세탁 중이던 LG전자의 드럼세탁기(2009년식)가 폭발해 박씨가 전신 50%의 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 가운데 ‘LG드럼 세탁기 폭발’이 차지했다. 10위에는 일본 우익단체가 벌인 ‘김태희 퇴출 시위’가 올랐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문채원 “제가 한복이랑 잘 어울리나봐요”

    문채원 “제가 한복이랑 잘 어울리나봐요”

    올해 안방극장과 스크린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문채원(25). 그녀의 2011년은 누구보다 극적이다. 초반 연기력 논란이 불거졌던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공남’)는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종영했고, 첫 주연을 맡은 영화 ‘최종병기 활’로는 대종상 신인여우상까지 거머쥐었다. 지난 18일 서울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문채원은 불과 몇 달 사이에 일어난 변화에 상당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미소만큼은 밝고 환했다. “대종상 시상식장에서 제 자리에 붙어 있는 ‘영화배우 문채원’이라고 적힌 종이를 한참동안 바라봤어요. 제가 좋아서 시작한 영화를 훌륭한 선배, 감독님과 함께한 것만으로도 기쁜데, 생애 처음 참석한 영화제에서 신인상까지 받으니 정말 뜻깊고 영광스러웠죠. 팬 여러분의 사랑을 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상기된 표정에서 신인 배우의 풋풋함이 묻어났다. 문채원을 이야기할 때 TV 사극과의 묘한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사극 ‘바람의 화원’에서 정향 역으로 이름을 알린 그녀는 역시 퓨전사극 ‘공남’을 통해 주연급 연기자로 입지를 다졌다. 스크린 첫 주연작인 ‘최종병기 활’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제 얼굴이 둥그스름해서 한복이랑 잘 어울리나 봐요(웃음). 말이 좀 느린 편이라 사극의 멜로 호흡이 더 잘 맞기도 하고요. 남장 여자를 사랑하는 기생 정향이나 활을 쏘는 영화 속 여주인공 등 기존의 사극과는 다른 캐릭터여서 다양한 면을 보여드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공남’에서 연기한 세령도 새롭게 창조해 낸 부분이 많은 역할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공남’은 역사적 사실(계유정난)과 드라마적 허구(수양대군의 딸과 수양에게 살해당한 김종서의 아들이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가 적절히 섞여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저는 드라마는 글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공남’은 대본이 정말 탄탄했어요. 잘못하면 이야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는데, 작가님들이 끝까지 흥미롭게 멜로와 역사를 잘 혼합해서 쓰셨고, 감독님의 연출력도 인기에 한몫했습니다.” 지금은 이처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극 초반 문채원은 역할에 맞지 않는 어색한 대사 처리 등으로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다. “세령이라는 인물이 영민하고 호기심 많고 남의 눈치를 안 보는 성격이라 캐릭터가 주목받길 바랐는데, 오히려 튀어 보이고 말았어요. 사극은 대사든 표정이든 감정을 눌러서 가는 맛이 있는 것인데 계산을 잘못했던 거죠. 아차 싶었어요.” 영화 개봉은 ‘공남’보다 뒤에 이뤄졌지만 ‘활’ 촬영을 먼저 끝낸 뒤 드라마에 복귀했던 터라 당혹감은 더 컸다. 무엇보다 함께 연기하는 선후배들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문채원은 “그때 (한)효주와 (문)근영, (손)예진 언니가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며 애정어린 조언을 해준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초반에 연기 톤을 높게 잡은 탓에 4회 때 무척 힘들었습니다. 극 전개가 빨라져 바로 사랑의 안타까움을 표현해야 하는데 잘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다시 고민해 보니 세상 물정을 모르다가 사랑을 알게 된 세령의 변화의 폭이 좀 커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물을 상황 자체로만 받아들이고 연기의 톤을 바꿨죠.” ‘공남’ 연출자인 김정민 감독이 학교 성적도 평균 점수를 조금씩 올리듯이 연기 실력도 꾸준히 올려야 한다며 다독여준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런데 드라마를 알리기 위해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또 한번 ‘태도’ 논란에 휩싸였다. 방송 태도가 불성실하다는 지적을 받은 것.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제 안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어요. 한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도 내 마음같이 되지 않는데, 대중에게 호감받는 일은 진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랑을 받았다면, 거기에 따라오는 것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초등학교 때 무용을 하다가 수술을 받고 미술학도로 꿈을 바꿨다는 문채원은 어릴 적부터 ‘토마토’나 ‘미스터 Q’ 등에 빠져 살던 드라마광이었다고 했다. 미술대(추계예대 서양화과)에 입학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은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김종학프로덕션에 들어가 배우로서의 첫발을 뗐다. “연기자가 된다고 하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어요. 미술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제 성격이 연예인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셨거든요. 사실 제가 배우로서 끼가 많거나 외향적이지도 않고 겁이 많은 편이에요. 물론 엄마는 제 든든한 지원군이셨죠.” 겉보기와는 달리 여성스러운 옷을 싫어하고, 집에서도 아들처럼 무뚝뚝한 딸이라는 문채원. 그래도 “드라마 ‘괜찮아, 아빠딸’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선물이었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올해 많은 주목을 받은 만큼 그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장르나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건강하게 즐거움을 드리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이제는 모험이나 도전이라는 말로 실수가 용납되는 단계는 지난 것 같아요. 나중에 제가 준비가 되면 영화 ‘라비앙 로즈’의 여주인공 마리옹 코티아르 같은 연기를 한번 해보고 싶어요. 영화 제목을 제 팬카페 이름으로 할 만큼 그 배우의 연기에 큰 감명을 받았거든요(웃음).”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남우주연상 박해일·여우주연상 김하늘

    남우주연상 박해일·여우주연상 김하늘

    영화배우 박해일(34)과 김하늘(33)이 제48회 대종상에서 각각 남녀 주연상의 영예를 안았다. 17일 오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박해일은 ‘최종병기 활’로, 김하늘은 ‘블라인드’로 각각 남녀 주연상의 영광을 안았다. 한국 전쟁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장훈 감독의 ‘고지전’은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기획상과 촬영상·조명상을 휩쓸어 4관왕에 올랐다.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불러 모은 ‘최종병기 활’은 남우주연상은 물론 신인여우상(문채원)과 음향기술상, 영상기술상 등 4관왕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감독상은 ‘써니’의 강형철 감독이 받았다. ‘써니’는 편집상까지 받아 2관왕에 올랐다. 신인 감독상은 올해의 발견이라는 찬사를 받은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이 받았다. 남녀 조연상은 영화 ‘황해’에서 열연한 조성하와 ‘로맨틱 헤븐’의 아역배우 심은경에게 돌아갔다. 지난해 남우주연상 수상자 원빈은 인기상을 받았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부고] 영화음악 작곡가 이철혁씨

    이철혁(본명 이경수) 한국영화음악작곡가협회 회장이 8일 오전 5시 25분 별세했다. 77세. 전남 영암 출생인 고인은 1971년 영화 ‘아름다운 팔도강산’을 시작으로 ‘푸른교실’(1976), ‘감자’(1987), ‘싸울아비’(2001) 등 40년간 400여편에 이르는 영화음악 작업을 했다. 1992년에는 317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해 기네스북 예술장르 부문 영화음악 편에 ‘최다 작곡 기록 보유자’로 등재됐다. 대중가요도 많이 남겼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편곡한 것을 비롯해 최정자의 ‘처녀농군’, 김상희의 ‘빗속의 연가’, 패티김의 ‘추억 속에 혼자 걸었네’, 정훈희의 ‘풀꽃반지’ 등을 작곡했다. 유족은 부인 김희자씨와 2남 1녀. 차남 태규씨는 2004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로 대종상영화제 음향상을 받았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305실. 발인은 10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 양평군 팔당공원묘지. (02)923-4442.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총체극 ‘자스민 광주’ 英 에든버러 축제에

    총체극 ‘자스민 광주’ 英 에든버러 축제에

    5·18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자스민 광주’가 8월 13~19일 세계적인 축제인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무대에 오른다. 다음 달 2일 광주에서 열리는 ‘페스티벌 오! 광주-브랜드 공연 축제’의 개막작이기도 하다. 항쟁 과정을 다룬 5·18 기록물이 올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해 마련된 창작물이다. 5·18 때 희생당한 망자(亡者)가 이승을 떠돌다 남도 씻김굿을 통해 한(恨)과 상처를 치유하고 저승으로 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튀니지 등 중동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영령들도 위로한다. 시나위 음악과 타악, 진혼 퍼포먼스, 무용, 영상이 한데 어우러진 총체극이다. 총연출을 맡은 손재오 감독은 2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1980년 5월 당시 군부의 총칼에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의 영혼을 무대로 불러 음악으로 위로하고 산 자(관객)와 만나게 하는 작품”이라면서 “5월 광주의 정신은 공동체 정신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화해하고 소통하는 상생의 이념을 갖고 있는 게 ‘자스민 광주’의 특징”이라고 소개했다. 음악감독을 맡은 원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최근 TV를 통해 자스민 혁명을 접하고 마치 우리의 80년대 기록물을 보는 것 같아 멍해졌다.”고 참여하게 된 계기를 털어놓았다. 영화 ‘황진이’ 등으로 대종상(영화음악상)을 네 번이나 거머쥔 원 교수는 ‘자스민 광주’를 위해 치욕과 분노의 감정을 담은 합창곡 ‘초혼 시나위 1’ ‘난발’, 용서와 치유의 의지를 담은 ‘초혼 시나위 2’ 등 세 곡을 작곡했다. 올 하반기 서울 공연도 추진된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저자와 차 한 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펴낸 소설가 이세기

    [저자와 차 한 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펴낸 소설가 이세기

    많은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1919년 발표된 최초의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김도산 감독)부터 2007년 영화 ‘추격자’(감독·각본 나홍진)까지 다양한 의미로 한국영화사를 장식한 그 많은 영화들을 책 한 권에 소개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마로니에북스 펴냄)은 영화인들조차 엄두를 못 냈던 일을 깔끔하게 해냈다. 한 세기를 관통하는 한국영화 대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난 2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저자 이세기씨를 만났다. 어떻게 1001편을 선정했는지부터 물었다. “4년 전 집필이 결정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그동안 만들어진 한국영화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검색 결과 2002년 말까지 만들어진 영화가 6402편, 여기에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제작된 영화 360여편을 더해서 약 6800편, 그 중에서 1001편을 골라야 한다는 답이 나왔지요.” ●1919년 첫 영화부터 2007년作까지 어떤 기준에 의해 어떻게 선정할 것인가가 다음 숙제였다. 나름대로 기준을 정했다. 우선 해마다 국내에서 열리는 영화제 수상작 위주로 목록을 짰다.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영화’나 영화진흥공사의 ‘좋은 영화’ 선정 작품, 대종상·청룡상·백상예술대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작을 연도별로 모았다. 여기에 각종 해외 영화제 수상작과 영화사전에 나와 있는 감독과 배우의 데뷔작 및 대표작을 추가하고 평론가들의 저서에서 비중 있게 거론된 작품들을 보탰다. 그것도 모자라 영화에 관심 있는 문화예술인 100명을 선정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영화’ ‘일반적으로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영화’를 물었다. 선정작업과 자료조사에만 2년 가까이 소요됐다. ●국내외 수상작·원로 추천작 등 기준 이씨는 “개인의 취향에 치우칠 수 있다는 우려를 배제하기 위해서 최대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선정했다.”면서 “결과적으로 책에 소개된 영화들은 문화예술계 원로들이 추천한 영화인 셈”이라고 말했다. 원고지 분량만 1만 1000장. 언론인 출신의 소설가인 이씨가 지금까지 쓴 글 중에서 가장 길다. 영상자료원에서 보지 못했던 옛날 영화들을 틈틈이 봐 가면서 바깥 출입도 되도록 삼가고 2년 가까이 정말 공을 들였다고 했다. 원고를 마무리하고 나니까 이 정도면 대하소설도 너끈히 쓰겠다는 자신감까지 생기더란다. ●“바깥출입도 자제… 알기 쉽게 썼어요” “글은 지극히 ‘객관적이고 평이하게’ 쓰려고 했습니다. 본격적인 비평은 평론가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신문의 영화리뷰를 근거로 저의 안목과 지식의 범위 안에서 영화를 소개하는 수준으로 썼습니다.” 개인적으로 김기영, 신상옥, 이만희, 유현목 감독의 흑백 작품을 좋아한다는 그는 “문학인으로 예술 다방면에 관심이 있지만 영화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대중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나와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라며 “이번 책이 한국영화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두시간 십분’으로 당선돼 등단한 저자는 서울신문 논설위원으로 1999년까지 재직했으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 세종문화회관 운영위원, 한국영상자료원 이사,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차범석 연극재단 이사와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예심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창작집 ‘바람과 놀며’ ‘그 다음은 침묵’과 김옥길 평전 ‘자유와 날개’, 한국 명인 100인을 소개한 ‘빛을 가꾸는 에피큐리언’, 강선영 평전 ‘여유와 금도의 춤’ 등이 있다. 함혜리 문화에디터 lotus@seoul.co.kr
  • [부고] ‘춘희’ ‘삼포가는 길’ 등 집필 시나리오 작가 유동훈

    한국영화인협회·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이사장을 지낸 원로 시나리오 작가 유동훈씨가 30일 지병인 혈액암으로 타계했다. 70세. 전북 고창 출신으로 서라벌예술대학을 수료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영화 ‘춘희’ ‘삼포가는 길’ ‘마지막 포옹’ 등 70여편이 있다. 대종상 각본상(1974년)과 대한민국 방송대상 극본상(1975년), 서울시문화상(1998년) 등을 받았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현주씨와 두 아들 청운(자영업), 경운(우리은행 과장)씨가 있다. 빈소는 강남 서울 성모병원 23호실, 발인은 1일 오전 6시. (02)2258-5975.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영화계 장학사업 선도 원로배우 신영균

    [김문이 만난사람] 영화계 장학사업 선도 원로배우 신영균

    노래 하나 감상해본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의 ‘빨간 마후라’다. 얼핏 짧고 단순한 노래 같지만 대한민국 공군 출신들에게는 영원히 가슴 속에 남아 추억의 되새김질을 하게 하는 노래다. 또한 40~50대 이상의 남성들에게는 영화를 통해 익숙하게 다가오는 노래이기도 하다. 1964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빨간 마후라’는 공군 전투기가 하늘을 나는 장면과 시원한 활주로, 빨간 머플러가 컬러 필름으로 표현돼 관객을 압도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서울 충무로 명보극장에서만 25만 관객을 기록했다. 특히 이 영화는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됐으며 주연으로 나온 신영균(83)씨는 당시 제11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한류 스타가 누구냐고 했을 때 영화계에선 신씨를 거론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런 추억을 담은 ‘빨간 마후라’는 대구 달성군 유가면 양리에 위치한 고 유치곤 장군의 호국기념관에 노래비로 세워져 이곳을 찾는 많은 관람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원로 영화배우 신씨가 2010년 10월 출연한 재산으로 출범한 재단법인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사장 안성기)이 현판식과 함께 영화인 자녀 19명에게 2011년도 상반기 장학증서와 장학금을 전달했다. ●영화인 자녀 19명에게 첫 장학금 전달 영화인 총연합회 회원단체와 영화인회의 등 8개 영화 관련 단체로부터 추천받은 영화인 자녀 이동규(서원대 유아교육학과 1학년), 임원룡(서울대 경영학부 4학년)군 등 대학생 10명과 홍민호(경복고 3학년), 정원(동두천외국어고 1학년)군 등 고교생 9명에게 총 4000여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이들 장학생 중에는 영화배우 허기호(허장강씨의 장남)씨의 아들 허진우(안양대학교 공연예술학과 1학년)군도 포함됐다. 이 자리에서 신씨는 명보시네마테크 운영, 신영균연기예술상 제정과 함께 영화 인재 발굴 사업으로 청소년 영화제 ‘필름 게이트’와 방학 시즌 어린이 영화 체험 교실인 ‘꿈나무 필름 아트 캠프’ 등을 추진할 계획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올 연말에는 제1회 신영균영화연기대상 수상자가 처음으로 나올 예정이다. 이처럼 ‘빨간 마후라’와 ‘5인의 해병’ 등으로 일찍부터 원조 한류스타의 명성을 얻은 신씨는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500억원을 사회에 헌납하는 등 국내 영화 발전을 위해 새로운 열정과 의욕을 보이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명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신씨를 만났다. 때마침 김두호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도 함께 있어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며 인터뷰가 진행됐다. 검은색 양복에다 빨간 넥타이 차림이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40대로 보인다.”고 인사를 하자 “에구 뭘, 마음이 젊어서 그런가.”라며 파안대소했다. 그래서 건강 얘기부터 먼저 나왔다. “운동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가끔 골프 라운딩도 하고 헬스클럽에는 일주일에 두어번 정도 나가지요. 나이 먹어서는 근육 운동을 자주 해야 돼요. 골격이 튼튼해지니까.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합니다.” ●294편 영화 거의 다 기억… 팔순의 나이 무색 신씨는 웃음이 호탕하다. 생각을 젊게 하고 행동 또한 그러하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다. 기억력 또한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1960년 조긍하 감독의 ‘과부’로 데뷔한 이후 1978년 ‘화조’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출연한 294편의 영화를 거의 줄줄 꿰고 있었다. ‘빨간 마후라’에 출연한 동료 배우 최무룡씨를 비롯해 ‘5인의 해병’에 등장하는 황해·곽규석·박노식씨 등에 대한 추억도 또렷하게 떠올린다. 이들 중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아 우리나라 영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회가 특별하다. 신씨는 알다시피 지난해 10월 자신의 사재 대부분을 털어 장학사업에 쓰겠다고 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 후 후회는 한번도 없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장학사업)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인들의 작업 환경이 아직도 열악합니다. 특히 그들 중에는 재능 있는 자녀가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격려와 보탬이 된다면 그것처럼 보람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대를 잇는 훌륭한 연기자들을 잠시 떠올린다. 1955년 ‘피아골’로 데뷔한 고 이예춘씨의 아들 이덕화와 손녀 이지현, 고 김승호씨의 아들 김희라와 손자 김기주, 오발탄의 명배우 고 김진규씨의 아들 김성준, 고 황해씨의 아들 전영록, 고 독고성씨의 아들 독고영재와 손자 독고준, 고 박노식씨의 아들 박준규 등. ●치과의사 하면서도 연기에 대한 꿈 간직 신씨 자신도 가난과 배고픔을 몸소 겪었기에 연기에 자질이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청춘극단’에서 2년 동안 연기를 하다가 생활의 비참함을 벗어나고자 좀 더 안정적인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서울대 치과대학에 진학했다. 해군 대위로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58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개업했으나 도저히 끼를 못 버려 2년 뒤 황순원 원작 ‘과부’로 연기자의 길을 걸었다. “처음에 연극을 했는데 생활이 영 말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직업적으로 전망이 좋다는 치과의사가 되고자 했지요. 하지만 연기에 대한 꿈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데뷔작 ‘과부’에서 처음 주연으로 발탁될 당시를 회고한 그는 “배역도 좋고 작품도 좋았는데 머리를 잘라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며 “많이 고민했지만 순전히 연기에 대한 욕심 하나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이후 신씨는 다양한 스타일의 캐릭터를 소화하면서 스타의 길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빨간 마후라’ ‘5인의 해병’ 같은 군사물은 물론이고 ‘연산군’에서는 폭군,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는 멜로물의 주인공,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서는 종교인으로 등장하며 타고난 끼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 18년 동안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니 그의 열정과 끼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렇다면 한참 인기 가도를 달릴 때 왜 배우를 그만두게 됐을까. “당시 군사정권이었죠. 검열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권총을 쏘는 장면도 ‘왜 이 각도에서 총을 쏴야 하느냐’ 등의 이유로 가위질을 많이 당했지요. 그러다 보니 영화에 대한 매력도 없어지고 편수도 줄고, 관객 또한 마찬가지로 흥미를 잃게 됩니다.” ●군사정권시절 검열 심해 배우 생활 그만둬 배우를 그만둔 이후에는 제주도에서 영화박물관 건립에 열정을 쏟는다. 그가 제주도와 인연이 된 것은 영화 ‘마적’(신상옥 감독)이었다. 이 영화는 1967년 제주도에서 촬영됐는데 당시 신씨는 드넓은 초원에서 영화박물관을 생각하게 됐다. 결국 오랜 노력 끝에 1999년 제주 남원읍에 ‘신영영화박물관’을 건립했다. 이때부터 신씨가 부자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부를 일궜을까. “제 인생의 특징을 말한다면 실패를 안 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려고 무리하게 욕심을 내지도 않았고 또 무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인격적으로는 겸손하자고 늘 생각했어요.” 신씨는 배우 시절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늘 불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1960년대 친구와 함께 서울 금호동에 동시 상영을 하는 ‘금호극장’을 지었다. 영화는 많으나 극장이 턱없이 모자라는 현실에서 발동이 걸렸던 것. 이후 명보극장 바로 옆에 있는 명보제과를 인수했다. 이때 부인 김선희 여사가 팔을 걷어붙여 직접 빵을 굽고 장사도 하면서 사업을 키워 나갔다.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와 태극당, 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던 1977년 8월 명보극장을 인수하게 된다. 이후 ‘지옥의 묵시록’과 ‘빠삐용’ 등의 외국 영화와 ‘내가 버린 여자’(이문웅 감독), ‘속 별들의 고향’(하길종 감독), ‘미워도 다시 한번’(변장호 감독) 등의 한국 영화가 잇달아 대박을 터뜨렸다. 그가 지난해 기부 대상을 ‘명보극장’으로 정한 것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극장 소유는 영화인들의 꿈이었고 이제는 그 꿈을 후배들에게 돌려주려는 생각에서였다. 무엇이든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면 언젠가 꿈이 이뤄진다는 철학도 포함됐다. 신씨는 지금도 꿈을 꾼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노인과 바다’ 같은 영화에 출연해 멋진 연기로 영화배우로서 마무리를 잘하고 싶단다. 이를 위한 구상이 현재 기획 단계에 있다고 귀띔했다. 그의 취미는 나무 심기다. 신영영화박물관 옆에 많은 나무들을 심었단다. 서른두살에 영화 나무를 처음 심은 이후 지금도 꾸준히 나무를 심고 있다고 했다. 팔순 나이에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에서 또 한번 영원히 자라는 나무를 심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신영균은 치과의사 → 배우 → 국회의원… ‘빨간 마후라’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 1928년 황해도 평산의 산 속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교육열에 의해 일찍 서울로 월남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우연히 교회 연극을 통해 연기를 접한 뒤 줄곧 배우를 꿈꿨다. 한성고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청춘극단’에 들어갔다. 하지만 극단 배우로 생계 유지가 힘들자 다시 공부를 시작해 서울대 치의학과에 합격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해 활동했고 졸업 후 치과의사로 일하다 1960년 32살의 나이에 영화 ‘과부’로 데뷔했다. 이어 1961년 ‘마부’로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고, 1962년에는 ‘연산군’으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차지하며 데뷔 2년 만에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출연작 중 단연 압권은 ‘빨간 마후라’(1964)이다. 이 영화로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원조 한류스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 1970년대, 유신정권 아래 영화에 대한 사전 검열이 심해지면서 영화계가 침체됐고 1978년 ‘화조’를 끝으로 배우 활동을 접었다. 이후 명보극장을 중심으로 영화사업에 뛰어들었고 15, 1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9년 제주도에 영화박물관을 지었으며 지난해에는 사재 500억원을 선뜻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난 18일에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현판식을 가지면서 장학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주요 대표작으로는 열녀문(1963), 쌀(1963), 달기(1964), 시장(1966), 천하장사 임꺽정(1968), 대원군(1968), 미워도 다시 한번(1968) 등이 있으며 18년 동안 모두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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