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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화우라늄탄용 금속우라늄 개발 은폐”

    국내에서 열화우라늄탄용 금속우라늄이 비밀리에 개발됐고 정부는 이를 은폐해 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전차포용으로 쓰이는 열화우라늄탄은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키지 않아 핵무기로는 분류되지 않지만 국제사회 일각에서 핵 오염과 기형아 출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은 21일 국회에서 환경단체인 ‘녹색연합’과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원자력연구소가 1980년대 중반 미국으로부터 방사선 차폐제 용도로 수입한 열화우라늄을 이용,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신고도 하지 않은 채 5년간 매년 수백㎏ 이상의 열화우라늄탄 탄두용 금속우라늄을 개발했다.”고 주장했다. 조 의원은 “1987년 미국 정보기관에 이같은 사실이 발각돼 개발 우라늄을 대부분 파기했다.”면서 “미국에서 수입하는 모든 핵물질의 용도 변경에 대한 신고를 의무화한 한·미원자력협정에도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과학기술부는 “당시 프로젝트는 IAEA에 대한 사전 신고와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진행된 것”이라면서 “이는 핵무기 개발과는 무관하며 최근의 핵물질 실험과도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과기부는 당시 열화우라늄을 미국으로부터 방사선 차폐용으로 수입하면서 IAEA에 신고했으며 이 열화우라늄을 금속우라늄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IAEA에 사찰면제를 신청해 1987년 사찰면제를 받았다고 해명했다. 또 미국과의 사전협의도 거쳤다고 덧붙였다. 당시 금속우라늄 개발과제 책임자였던 원자력연구소의 국일현 박사는 “당시 프로젝트는 국방과학연구소의 용역을 받아 진행됐으며 산업화할 필요가 없어 미국과의 협의하에 파기된 것”이라며 “우리나라는 국방도 할 수 없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또 다른 참여자인 김창규 박사도 “열화우라늄으로 만들어진 탄두는 열화우라늄에 티타늄을 합쳐 만든 합금으로 마치 화살촉처럼 비중과 밀도가 높아 관통력을 높인 것일 뿐”이라며 환경오염 우려도 없다고 설명했다. ●열화우라늄탄이란 관통력이 뛰어나 탱크나 장갑차 공격용으로 쓰인다. 주한미군도 2개 종류를 보유하고 있다. 우라늄 폐기물로 만든다. 열화우라늄탄이 터질 때마다 방사능이 나오는 탓에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 방사능을 흡입하거나 토양·식수원에 침투한 잔류물에 노출되면 신장 손상, 호흡기 질환, 암, 기형아 출산을 야기한다는 주장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반박이 맞서고 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임시閣議 이라크파병 결의/日자위대 ‘전투’가능성

    |도쿄 황성기특파원| 9일의 일본 각의 결정에 따라 자위대가 사상 처음으로 전장에 파병된다.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은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일동맹과 일본의 국제사회 공헌을 강조하며 파병결정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전후 부흥지원을 위한 비전투병에 의한 비전투지역 파병을 강조하고 있으나 테러 등 사실상 전투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이라크에서 전투·비전투 지역 구분은 어렵다. 전투가 예상되는 파병이라는 점에서 종전의 분쟁지역 사후수습을 위한 ‘자위대 파견’과는 분명히 획을 긋는다.마이니치 신문은 9일 “테러나 게릴라 공격이 다발하는 타국 영토에 중무장 부대를 보내는 자위대 첫 전지(戰地) 파병”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중화기 무장 비전투병이라고는 하지만 육상 자위대는 장갑차,110㎜ 개인용 대(對)전차탄,84㎜ 무반동포 등으로 중무장한다.치안이 안정된 사마와를 비롯한 이라크 남동부 지역에 파병될 계획이나 언제 테러공격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중무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설명이다. 자위대 파병의 근거인 ‘이라크 특별조치법’에 따르면 이들 무기는 정당방위나 긴급피난에 사용하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까지를 정당방위 등으로 간주할 것인가이다. 긴박한 상황에 따라서는 정당방위를 넘어서 헌법9조가 금지하고 있는 무력행사도 불가피하다는 것이 일본 언론들이 제기하는 우려이다. 자위대원이 살해된다든지,적을 살해한다는 가정은 그리 어렵지 않다.2차대전 패전 후 처음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자위대의 유혈활동이 국내외에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는 미지수이다.그러나 야금야금 ‘행동범위’를 넓혀온 자위대의 보폭이 이라크 파병으로 순식간에 커질 것은 분명하다.기본계획은 파병시기를 규정하지 않았다. 연내 육상자위대 파병을 보류하면서 최대한 ‘시간벌기’를 할 것으로 보인다.미국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파병하는 것이 득이지만 국내정치를 감안하면 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사상자가 나올 경우 내년 여름의 참의원 선거에는 악재 중 악재다. ●파병시기는 내년 초 유력 대전차용 84㎜ 무반동포는 분당 4∼5발 발사가 가능하다.110㎜ 개인 대전차탄은 1발을 쏘고 버리는 휴대용으로 파괴력도 무반동포가 크다. 두 가지 중장비는 소총 등의 경고사격으로도 정지하지 않는 차량 등에 사용될 것으로 예상된다.96식 장륜장갑차,경장갑차는 전투상황에서의 인원수송에 사용된다.4∼8륜으로 시속 100㎞의 속도를 낼 수 있다. 기관총 장비가 가능하지만 대전차포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지금까지 캄보디아,르완다 등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 참가했을 때 신변을 지키는 최소한의 권총,소총,기관총이 고작이었던 장비에 비하면 단번에 몇 단계 수준이 뛰어올랐다. 제1야당인 민주당의 간 나오토 대표는 8일 도쿄 시내에서 가진 가두연설을 통해 “자위대 파병은 태평양전쟁과 같은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라면서 파병중단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9일에는 공산·사민 양당이 거리로 나와 파병반대를 외쳤으나 이미 법제화를 마친 파병인 만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marry04@
  • “北, 동·서부 전선에 대전차 방어진지 구축”

    북한이 군사분계선(MDL) 동·서부전선 북측 일부 지역에 대전차 방어용 진지를 다수 구축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16일 “북한군이 지난해 3월 이후 강원도 북측 지역을 중심으로 대전차 방어용 진지를 구축하고 있으며,최근에는 서부전선 일부 지역에서도 같은 작업이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북한군이 ‘공격형 개념’의 전술교리를 채택하고 있는 점에 비춰 MDL 인근에 방어용 군사시설물을 건설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 소식통은 “대전차 방어 진지는 전차와 차량 이동이 쉬운 평지와 도로 지역에 집중되고 있다.”면서 “현재 50여개가 식별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군의 대전차 방어진지는 5m 가량 높이의 사격형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물에 전면과 좌우로 대전차포를 설치할 수 있도록 구멍이 나 있고,완공 후에는 구조물에 토사를 덮어 위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경운기자
  • 러“그로즈니에 경찰 투입”

    [모스크바 베를린 AFP AP 연합] 러시아는 16일 서방의 체첸사태 정치적 해결 압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체첸 수도 그로즈니의 함락이 임박했으며 이에따라 경찰대 투입을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러시아군은 이날 전투기와 포병 부대를 동원,그로즈니에 대대적인 포격을가하는 한편 곳곳에서 체첸군과 시가전을 벌이면서 도심쪽으로 진격을 시도했다. 러시아군의 공습과 포격으로 황폐화된 그로즈니에는 현재 약 2만∼4만명의주민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노약자가 대부분인 이들은 피난할 수단이 없거나 공포에 질려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대전차포와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2,000여명의 체첸군도 곳곳에 잠복한채 도심으로 진입하려는 러시아군을 공격하고 있다.그러나 체첸 파견 최고지휘관인 알렉산더 바라노프 장군은 “러시아 경찰부대가 연방군의 지원을받아 그로즈니를 장악하기 위한 특별 작전을 준비중이며 그로즈니가 곧 해방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구체적인 사항은 밝히지 않았다.
  • 中“주권침해 횡포”…反美 감정 폭발

    [워싱턴 베오그라드 외신종합] 9일 중국내 미국 대사관,영사관 주변 일대는 중국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돌멩이들로 일대 난장판을 이루었다. 나토의 오폭은 수년 전에 입수한 낡은 정보 때문에 빚어졌을지 모른다고미국의 CNN 방송이 9일 보도. CNN 방송은 나토가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과 관련,폭격 목표가 된 건물을 식별하는 정보가 오래 전에 입수된 것이어서 오폭이 일어났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중이라고 전했다. 나토 관리들은 당초 목표물인 유고군 병참본부가 중국대사관 옆에 위치해있어 사고가 일어났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공습을 가한 공군기들이 중국대사관 건물을 유고연방군 병참본부로 믿었다”고 정정. 외교부 왕잉판(王英範) 부부장은 제임스 새서 미국대사를 불러 “미국이주도하는 나토의 중국대사관 폭격은 유엔헌장을 위반한 것”이라면서 “나토의 행위는 중국의 주권에 대한 야만적 위반”이라고 항의.이에 대해 빌 클린턴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진짜 야만적인 행위는 밀로셰비치가 저지른 인종말살 행위”라고 반박. 9일 베이징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수만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들은 “미제 타도”,“나토 해산”,“클린턴 사임”,“중국은 주권 수호를 위해 침묵하지않을 것” 등 구호를 외치며 성조기를 불사르고 유리창과 관용차 등 대사관기물을 파괴. 중국은 지난 7일 밤(현지시간) 늦게 긴급 소집돼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진 안보리 회의에서 다른 이사국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안보리 차원의 구체적인 행동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했으나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미국은 중국에 머물고 있는 미국인들에 대해서도 보복의 위험을 경고하고보안조치에 만전을 기하라고 당부. 미국은 중국측에 신속히 사과하지 않음으로써 반미감정을 더욱 자극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9일 보도.이 신문은 베이징발 보도를 통해 오폭사건이 발생한지 한참이 지난 8일밤(중국시간)까지도 제임스 새서 주중 미국대사가 유감을 표시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지 않아 중국 관계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고 밝혔다. 미국은 유고공습에 맹독성 물질로 알려진 소모성 우랴늄탄(DU)을 사용중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영국 BBC방송이 9일 보도. 미국방부 대변인인 척 왈드소장은 유고공습현황을 설명하는 브리핑 도중“대전차포 탑재기인 A-10기들이 DU탄을 투하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확인.
  • 이­헤즈볼라 보복 포격/이 병사 1명 사망

    【티레·시돈 AFP 연합】 레바논의 친이란계 무장조직인 헤즈볼라 게릴라들이 7일 남부 레바논의 이스라엘군 진지를 공격,이스라엘 병사 1명이 숨졌다고 보안소식통이 전했다. 이스라엘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인근의 헤즈볼라 거점에 70여발 이상의 포격을 가했으며 전폭기를 동원,시돈과 나바티예 등에 대한 위협비행을 했다. 헤즈볼라측은 이날 남부 레바논의 전략요충지인 다브세의 이스라엘 진지에 대해 자동소총과 대전차포,박격포 등을 이용한 공격을 했으며 “많은 사상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다고 주장했다. 이날 충돌은 남부 레바논 북부의 게릴라 거점에 대한 공격과정에서 이스라엘 특공대원 12명이 숨진뒤 이틀만에 다시 발생했다.
  • 「1월의 전쟁영웅」 고 심일육군소령/전쟁기념사업회 선정

    ◎한국전서 북 자주포 「육탄공격」 전쟁기념사업회(회장 이재전)는 12일 한국전에서 북한군의 자주포를 육탄공격으로 격멸,적의 작전기도를 무산시킨 고 심일 육군소령을 1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3년 함남 단천에서 출생한 심소령은 49년 육사(8기)를 졸업하고 춘천지역에서 6사단 7연대 대전차포 중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다 한국전쟁을 맞아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51년 1월 강원 영월지역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28살의 나이로 전사했다. 한편 기념사업회는 이날 상오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심소령의 어머니 조보패여사(89)등 유족과 최종성(육사 8기생회 수석부회장·전 건설부차관)·윤흥정씨(예비역 육군중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을 가졌다.
  • 깊어가는 중·소 불신(모스크바 새 증언:22)

    ◎「중국군 무기지원」 싸고 모·스탈린 반일/스탈린­북경측 잇단 고문단 파견 요청 등 계속 거절·김일성에 전문… 모에 대한 불편한 심기 토조 51년 7월 10일을 기해 개성에서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전쟁은 막바지 소모전 양상을 띠고 전개됐다.미군의 공습이 기세를 수그러뜨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군사고문단 파견과 추가 무기원조를 거듭 요구했다.모택동은 9월20일자로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고문단 파견 외에 무기 추가인도를 거듭 촉구했다.(총참모부 제2총국,전문번호 N24110) 『우리는 현재 새로운 군조직개편안에 따라 구성된 10개 사단의 훈련계획을 세워 51년 8월부터 시행하고 있음.따라서 이전에 스탈린동지께서 약속한 10개 사단용 탄약,장비의 지급계획은 차질없이 이행해 주기 바람.10개 사단 훈련은 52년 3월까지 끝내고 그때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면 이들을 조선에 투입하겠음.특히 포탄,대전차포,탄약등 추가무기를 가능한한 빨리 조선전선으로 보내주기 바람』이와함께 모택동은 필요한 장문의 무기목록을 전문에 첨부했다. ○탄약지원 재차 요구 그러나 스탈린은 이번에도 모의 지원요청을 대부분 거절했다.9월26일 모에게 보낸 답전을 통해 이 크렘린의 주인은 『조선에 파견된 중국의용군 총사령부에 10월 초순까지 5명의 군사고문관을 파견할 용의는 있다.하지만 모택동동지가 요청한 군단위까지 고문단을 파견하는 데는 반대한다』고 밝혔다.(전문번호 N5542.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 그러나 모택동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모는 10월5일 스탈린 앞으로 전문을 보내 고문단건에 대해서는 일단 그의 입장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하지만 추가 무기,탄약지원은 자신이 요구한대로 반드시 이행해 줄 것을 재차 요구했다.(전문번호 N24547) 『대공포,포탄,대전차 수류탄 추가공급이 절실함.또한 60개 사단 무장계획을 연기시키지 말기 바람.당초 이 무장계획은 54년 상반기중 완료하기로 한 것인데 이제와서 54년말까지 하겠다고 미루는 것은 곤란함.51년 6월 고강이 모스크바에서 서명한대로 8년 상환 군사차관으로 지급키로 한 위의 지원무기는 당초 약속대로 인도해주기 바람』 그러나 스탈린은 이 요구에 대해 매우 언짢은 심기를 내보였다.10월 7일 모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스탈린은 그의 요구가 당초 약속에 없는 무리한 것이라고 공박했다.(전문번호 N2332) 『모택동동지앞.10월4일자로 보낸 전문에서 동지는 당초 약속에 없던 차량장비를 군사차관에 포함시키자고 요구했음.…중략…그리고 동지가 제시한 차관 상환방법은 이전에 양국간 합의한 내용과 서로 상반되는 것임.우리의 재정,군사기관들은 이전에 중국과 체결한 협정문안에 명시된 모든 조건들을 수정하는 데 반대함』 모택동은 지지 않고 추가 3개 여단으로 구성되는 1개 대공포사단의 파견과 3개 제트전투기 사단,3개 항공기술대대의 추가파견등을 요청했다.다음은 10월24일 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관련전문.(소련군총참모부 제2총국.전문번호N25187) 『1.현재 적공군기의 주목표는 아군 통신망을 파괴하는 데 있음.로보프장군이 지휘하는 항공부대와 중국공군부대는 공중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소련,중국군의 대공포 부대 또한 통신망 보호에 큰 공헌을 하고 있음.하지만 아군의 전력규모는 보급품수송을 확고히 지켜줄 만큼 충분치 못함.따라서 3개 여단으로 구성되는 1개 소련군 대공포사단을 추가로 조선에 파견해 안수지역의 활주로와 철도보급로 공중방어를 강화해주기 바람. 2.중국동북부에서 전투훈련을 마친 중국비행부대가 조선으로 투입되기 위해 대기중임.이들이 조선에 투입될 경우 중국내 방공수단이 부족해짐.특히 51년 11∼12월 사이 4백63명의 조종사들이 중국항공학교에서 야크­11기 훈련코스를 마칠 예정임. 스탈린동지께서 이전에 명령한 계획에 따라 3개의 미그­9 전투기사단,TU­2 폭격기사단 1개,IL­10 공격사단,LA­11 첩보여단,LA­9전투여단,LI­2수송여단,LI­2수송여단등을 창설키로 결정했음. 현재 우리 공군력 수준으로는 자력으로 위에 열거한 사단,여단 창설 뒤 조종사들의 훈련을 감당할수 없음.따라서 본인은 소련정부에 다음 사항의 원조를 부탁함. (a)중국에 3개 제트기사단과 3개 항공기술대대를 파견해 줄 것.이 항공기술대대는 3개의 중국전투기사단과 6개의 미그­9 항공기술단을 훈련시킬 장비를 갖춤.이들은 북경,상해,광동지역의 대공방어를 강화하는 데 투입됨. (b)2개의 중국 첩보여단과 2개의 LA­11 항공기술단을 훈련시킬 장비를 갖춘 항공기술 대대 1개와 1개 여단(장비 없이)인원을 중국에 보내줄 것』 이 전문에는 이밖에도 크고작은 지원요청이 여럿 들어있었다. ○모태도에 못마땅 거듭되는 지원요청에 스탈린은 매우 못마땅했다.51년 11월 13일 김일성에게 전문을 보내 모택동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전문번호 N102522) 『김일성 동지앞.본인은 오래 전부터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와있음.3개 조선사단의 무기지원요청에 대한 본인의 답이 늦은 것은 이 때문임.모스크바 회담에서 우리는 30개 중국군사단에 무기를 공급키로 합의했음.중국동지들은 이 무기 중에서 3개 사단분을 조선군에 공급키로 돼있음.후에 중국동지들은 30개 사단이 아니라 60개 사단용의 무기공급을 요청해 왔음.따라서 이 무기중 조선군 3개 사단에 무기를 공급할 가능성은 더 커졌음. 만약 중국동지들이 어떤구실을 달아 귀하의 요청을 거절한다면 본인에게 그 사실을 통보해주기 바람』 이 전문을 받은 김일성은 서둘러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스탈린의 심기를 전하고 3개 사단분 무기인도를 요청했다.51년 11월 14일 북한 주둔 소련군사고문단장은 스탈린에게 다음과같이 보고했다.(전문번호N503396sh) 『본인과 가진 개별면담에서 김일성은 중국동지들에게 소련으로부터 받은 무기중 일부를 조선군 3개사단 몫으로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음.오늘 김일성은 3개 사단 몫 무기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는 전문을 모택동에게 보냈음』 이 보고를 접한 후에야 스탈린은 비로소 모택동에게 연락을 취했다.스탈린은 10월24일자로 모택동이 무기,고문단의 추가지원을 요청한 전문에 대해 그때까지 아무 응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다음은 11월 14일 스탈린이 중국 주둔 소련군사고문단장 크라소프스키장군을 경유해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N6618) 『모택동동지앞.귀하가 보낸 10월24일자 전문은 받아보았음.본인이 모스크바에서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답이 늦었음. 1.북조선의 통신망 방어는 공격비행단이 맡아야함.따라서 활주로건설에 박차를 가해줄 것을 강력히 주문함.대공포부대는 주요시설물 방어만 전담할 것.현재 소련군 2개 대공사단도 그렇게 하고있음.이 대공방어망을 강화하기 위해서 중국군은 소련이 제공한 180정의 각종 포,및 각종 대공 자동화기를 조선에 제공할 것.이미 약속한대로 12월중 120정의 대공포(85㎜캘리버)등을 중국에 제공하겠음. 2.소련군 제트전폭기 3개 사단을 조종사와 함께 보내고 3개 항공기술대대를 중국에 보내라는 요청은 들어줄수 없음.미그­9기는 더 이상 지원할수없음.만약 미그­9기 조종사 훈련을 위해 소련 조종사들이 필요하다면 지금 중국에 파견돼 있는 소련전투기 사단내의 교관을 3개월동안 이용할 것.현재 중국군 미그­9조종사 훈련을 위해 중국에 일시 체류중인 이들 소련교관들은 반드시 예정기한내에 본국으로 귀환할수 있도록 조치할 것』 ○모 발언권 크게 강화 매우 엄하고도 딱딱한 내용의 전문이었다.스탈린은 특히 이 전문을 크라소프스키 중국 주둔 소련군사고문단장을 통해 모택동에게 전달함으로써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감추려하지 않았다. 이런 불편한 분위기로 짐작할수 있듯이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모택동의 발언권이 전쟁초기보다 상당히 강화됐음을 알수 있다.스탈린이 발을 빼는 기미를 보이면서 모택동이 전쟁 마무리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밝혀진 사실/모­스탈린 서로 노골적 비난·반박/「중·소 분쟁」 비밀 풀어줄 중요 자료 스탈린은 전쟁을 동의,결정해놓고도 모택동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무기지원을 주저하거나 거절하고 있었다는 점이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그는 소련군 고문단의 파견도 요구대로 들어주지 않았다.이는 모택동으로 하여금 스탈린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키워주었음에 틀림없다.그들은 요구­거절­재요구­재거절 등의 악순환을 반복하는가 하면 아예 은유적 표현속에 감추어진 상대방에 대한 적의까지 읽을 수 있는 상호 반박과 비난의 내용까지 들어있다. 이러한 내용은 한국전쟁은 물론 스탈린과 모택동,소련과 중국의 관계를 연구한 저서들에서도 밝혀진 적이 없는 새로운 사실들이다.모택동과 스탈린은 사실상 또다른 내부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는 한국전쟁은 물론 앞으로 20세기 냉전사 연구에 하나의 중대한 전환을 초래할 것이 틀림없는 사실들이 아닐 수 없다.20세기 세계사에서 풀리지 않는 중요한 비밀중의 하나가 중소분쟁이었고,그중에는 그것의 구체적인 역사적 계기가 언제부터였느냐는 점도 포함돼 있었는데 이번자료는 그 비밀을 풀어줄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회에는 또한 스탈린이 자신의 모택동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김일성에게까지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모택동이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이를 자신에게 이야기하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이는 스탈린의 모택동에 대한 불신과 감정의 정도를 읽을 수 있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그가 사실상 모택동과 김일성을 중간에서 조정하고 있다는 점까지 시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번 자료를 통해 전쟁의 결정과 시작,그리고 초전 승세기 동안어렵게 유지되던 스탈린과 모택동의 관계는 전세 역전과 중국군참전을 계기로 상당히 어려워지기 시작하였고,휴전협상의 시작과 함께 거의 적대적일만큼까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 자료의 공개를 계기로 스탈린­모택동 관계를 비롯한 세계 냉전사는 상당 부분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떠오르는 휴전론(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9)

    ◎“전세 불리”… 김일성,중·소 극비 방문/북경 이어 모스크바서도 “휴전유익” 의견 일치/소,대미협상 우위 노력 중 비행사단 투입 요구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는 가운데 모택동은 전선이남으로 불시공격을 가해 적에게 타격을 가한 뒤 신속히 북으로 후퇴하는 식의 게릴라전법을 써보자고 스탈린에게 제의했다.그러나 스탈린은 이 전법이 한두번은 써먹을 수 있으나 위험부담이 커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답했다.『영·미군은 금방 이 작전을 눈치챌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으로 후퇴하기 전 큰 손실을 입게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스탈린은 한번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총공세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스탈린이 51년 5월29일자로 모택동에게 보낸 이 전문내용은 다음과 같다(전문번호 N3282.소련군총참모부 제8총국.대통령문서소 보관). ○“대규모 작전 필요” 이런 전술은 공격작전완료 뒤 주력군이 안전하게 철수하도록 후방방어를 훌륭하게 해줄 전력을 갖추었을 때 가능함.그러나 본인이 아는 한 인민군은 그런 전력을 갖추지못했음.영·미군은 북진하면서 차근차근히 새로운 방어선을 확고히 구축할 것임.이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며 이 또한 바람직한 일이 아님.모동지가 중국공산당이 장개석군대를 상대로 이 전술을 구사했음을 참고로 든 데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음.영·미군은 장개석군대 같은 오합지졸군대가 아님을 명심하기 바람.그들은 모동지가 임의대로 자기들의 병력을 하나하나 궤멸시키도록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만약 평양이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이는 조선인민군의 사기저하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적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규모의 전면작전을 준비해야 할 것임. 6월에 접어들며 전황이 점차 더 인민군에 불리해지고 있는 가운데 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6월4일자로 팽덕회가 모앞으로 보내온 전황보고서였다.특기할 것은 이 보고서에서 팽이 전력의 열세가 점차 뚜렷해져 정면대결의 승산이 희박하다고 보고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힌 점이다(전문번호 N20406). 적은 다량의 포·탱크·항공기를 동원해 공세를 계속하고 있음.반면 아군은 이에 맞설 확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지 못했음.7월말까지 소총·대전차포·대공무기를 추가공급받으면 적극적으로 게릴라투쟁을 전개하겠음.적이 병력을 대규모로 증가시키지 않고 아군이 예측치 못한 작전미스를 범하지 않는다면 전선을 평양이남에서 저지할 수 있음.…중략… 적이 대규모의 병력·항공기·탱크·막강한 포를 보유한데다 사기까지 드높아 현상황에서 적을 차례로 격파하기는 쉽지 않음.따라서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해 전력을 흐트러뜨릴 필요가 있음.적이 전진할 때까지 당분간 기다렸다가 전진하면 후방에 게릴라부대를 투입시키겠음. 그러나 바로 같은 날 팽덕회는 전병력에게 총퇴각명령을 하달했다.이 명령문은 『전선이 너무 확대됐다.수송수단이 부족해 식량·탄약보급조차 힘들다.병력은 지쳤고 이제 남으로 더 진격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제5차 공격작전의 제2단계를 예정보다 앞당겨 종결짓고 병력을 제5차 작전의 제1단계를 시작한 지점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그곳에서 1개월 반 내지 2개월동안 병력을 재정비,강화한 다음 새로운 전투에 대비,훈련을 쌓도록 하겠다』는 비장한 어투를 담고 있다. ○휴전추진 모에 맡겨 팽덕회로부터 이 퇴각명령문을 보고받은 모택동은 이의 사본을 같은 날 즉각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대통령문서소.전문번호 N20412.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 명령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 휴식기간에 중국의용군사령부는 다음 사항을 이행한다.…중략… (2)우리군 내부에 심각히 만연된 우익풍조를 일소함.…중략… (4)항공기·대전차예비병력·대공포부대를 전선에 투입시킬 준비를 갖춤.(5)적의 후방에 게릴라부대 투입,전선을 확장해 적의 전력을 분산시킴.그렇게 해서 향후 아군 주력군이 작전을 펼치는 데 용이하게 함.아군병력은 6∼7일간 진격하고 나면 식량·탄약이 부족해지고 병력은 지치기 시작했음.반대로 적은 미리 대규모 기계화병력을 준비해 아군의 공격작전시 진격과 퇴로를 모두 중도에서 차단했음.우리는 이런 점을 미리 고려치 못했음.도보로 걷는 아군은 차량으로 이동하는 적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음. 이런 이유 때문에 공세작전 수행시에도 1차·2차·3차의 방어선을 만들어야 했음.새로 전선에 투입되는 병력은 훌륭한 장비를 갖춘 적을 상대로 싸운 경험이 없었음.특히 방어전경험은 전무했음.하급지휘관들의 질이 특히 형편없었음.기술적으로 잘 무장된 적을 상대로 용기 하나만으로 맞서 싸울 수는 없음.용기와 합리적인 리더십이 함께 갖추어져야 함.모택동 동지는 소규모전투에서 적을 패배시킴으로써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나아가 대규모패배를 안겨주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주문했음.지금같이 모험적인 공세를 계속하는 적을 상대로 해서는 이같은 전술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 이 명령문은 게릴라식 소규모전투를 통해 적을 괴롭히자는 전술변화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총퇴각결정이었다.이후 중·조선연합군은 적극적 방어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같은 상황악화로 인해 중공·인민군은 마침내 탈출구를 모색하기에 이른다.휴전문제가 북조선·중국 양측에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스탈린도 이를 무시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물론 휴전협상을 모색하면서도 동시에 전력을 강화하고 한치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한 소규모전투를 계속 수행해나갔다.아울러 이들이 내건 휴전협상조건도 매우 비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협상의지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스탈린은 또한 자신이 직접 휴전협상에 나서기를 거부하고 이를 모택동에게 맡겼다.아울러 전쟁이 파장기미를 보이며 스탈린과 모택동 두 사람 사이에는 소련의 군사적 지원과 군사고문단 추가파견문제를 놓고 줄다리기가 벌어졌다.모택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원조요청을 내놓았고 스탈린은 갖은 이유를 달아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고 했다.팽덕회의 철수명령이 떨어진 바로 이튿날인 51년 6월5일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띄웠다(대통령문서소 보관.전문번호 N20448.소련군총참모부 제2총국). ○“최소 8개사 보내라” 필리포프 동지께.조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재정문제,바로 우리국경에서 군사작전을 벌이는 문제,적이 바로 우리 영토 후방에서 상륙작전을 벌이는 등 여러 심각한 문제를 겪었음.조만간 고강 동지를 모스크바로 파견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지의 지시사항을 듣고자 함.현재 김일성 동지가 북경에 와 있음.김일성동지도 고강 동지와 함께 스탈린 동지를 찾아가 이 문제들을 의논하고 싶어함. 이 전문에 이어 김일성은 고강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전쟁중 고위지도자의 동정과 관계되는 일은 모두가 극비였지만 특히 이 당시 김일성이 북경을 방문해 모택동을 만났고 이어서 모스크바로 가 스탈린을 만난 사실은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극비사항이다. 김일성·고강의 방문을 받은 뒤 스탈린은 모택동 앞으로 전문을 보내 방문결과를 통보해주었다(51년 6월13일.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3557). 오늘 본인은 모택동 동무가 보낸 대표단과 조선대표단(김일성과 고강)을 만났음.이 자리에서 3가지 문제가 제기됐음.첫째 휴전문제.현상황에서 휴전은 유익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음.둘째군사고문단문제.군사고문단이 그렇게 필요하다면 보내주겠음.셋째 60개 사단에 필요한 무기공급문제.우리는 이에 반대하지 않음.대표단들이 귀국즉시 동지께 보고할 것이기 때문에 상세한 사항은 이 전문에서 언급치 않겠음. 이와 함께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중국 비행사단 16개중에서 최소 8개 비행사단을 신속히 전선에 투입해줄 것을 요청했다.조만간 시작될 휴전협상에 앞선 일전에 대비하기 위한 전력강화의 일환이었다. ◎새로 발혀진 사실/김,51년 6월초 모·스탈린과 연쇄 대좌/휴전협상 문제 북·중·소 협의사실 판명 우리는 스탈린과 모택동의 전술적 이견이 단순치 않았다는 점을 이번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모택동은 장개석군대와의 내전때와 같은 게릴라전술을 주장하였으나 스탈린은 영미군은 장개석 군대가 아니라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규모의 전면적인 작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⑴전쟁의 결정 ⑵중국군의 참전문제 ⑶전세 역전 후의 북한정부의 구제여부 ⑷참전중국군에 대한 지원문제등한국전쟁과 관련한 결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주 이견을 보여온 스탈린과 모택동이 휴전회담의 개시를 놓고 다시 한번 의견의 차이를 보였음을 의미한다. 자국의 병력으로 싸우기 때문에 모택동은 제한적인 전쟁을 하려했던데 반해 배면에 숨어서 중국군과 북한군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고 있는 스탈린은 대규모의 전쟁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회의 내용에서 밝혀진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전쟁중 김일성의 북경과 모스크바 방문사실이다.전쟁중 김일성이 북경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모택동과 스탈린을 만났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그것이 휴전협상의 개시를 앞둔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전쟁중의 휴전협상의 개시가 이들 공산3국의 깊숙한 논의와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전쟁을 결정할 때와는 달리 김일성은 이번에는 모택동을 먼저 방문하고 그다음에 스탈린을 방문하는 순서를 밟았다.아마도 스탈린의 결정을 수용하여 그대로 전쟁을 수행하기보다는 직접 참전하여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모택동의 견해를 먼저 들어 둘의 의견합치를 본 뒤에 이를 갖고 스탈린의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북한의 전쟁 결정과 진행이 중국 및 소련과의 긴밀한 협의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을 들어 전쟁중 언젠가 김일성이 모택동과 스탈린을 방문하지 않았을까 추론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동안 이를 증명할 자료는 물론 이러한 사실조차 한번도 증명되거나 공개된 적이 없었다.따라서 이번에 공개된 사실은 앞으로 한국전쟁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대한 기여를 할 것이 틀림없다 하겠다.
  • 인천상륙작전 전후(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0)

    ◎스탈린,소 군사고문단에 “작전 실책” 추궁/“병력 이동­탱크사용 전술 결정적 과오” 격노/김일성,연합군 「38선 진격」 당황… “소 개입” 요청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지시와 지원하에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50년 9월 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은 평양주재 슈티코프대사와 북한주재 소련군사고문단장 마트비예프장군 앞으로 보내는 지시문 채택을 승인했다.이 지시문은 스탈린이 직접 작성해 서명한 것이었다.여기에서 스탈린은 서울을 비롯,남동부전선에서 전세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중대한 작전변경을 결심했다. ○병력철수 작전 못마땅 스탈린은 작전부진의 주 책임을 소련군사고문단의 실책으로 몰아붙였다.다음은 이날 당 정치국 회의록에 기록된 지시문의 내용.(19 50년 9월7일.당 정치국회의록 N78.조선전쟁문제회의록p.1) 『최근 수일간 전선상황이 심각해졌음(서울과 동남부전선 모두).이는 전선사령부와 군단사령부,병력지휘부 특히 전술분야의 병력구성분야에서의 중대한 실책으로 야기됐음. 소련군사고문단들은 이들 실책에 보다 큰 책임이 있다.우리 고문단들은 4개 사단을 주전선에서 서울외곽으로 철수시키는데 있어 총사령관의 명령을 제때 충실하게 이행치 못했다.결정적인 시기에 이를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그 결과 7일을 허비해 미군이 서울 이남에서 큰 전술적 이득을 획득케 했다.만약 이들 사단의 철수가 제때 이루어졌더라면 서울 이남의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임』 스탈린은 이와함께 탱크사용 전술이 크게 잘못됐다는데 대해 격노했다. 『탱크를 투입할 때는 사전에 박격포공격을 통해 탱크가 진격할 길을 치워야 하는데 최근 이 원칙도 지키지 않고 탱크를 투입했다.이 때문에 우리 탱크들이 쉽게 적에게 파괴됐다』 스탈린은 또 미군의 인천상륙 가능성에 크게 우려하며 군사고문단들이 이에대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슈티코프대사가 미군의 상륙작전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 프라우다신문 기자를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매우 못마땅해하며 『이런 전략경험의 미숙,맹목성이 남부의 병력을 서울지역으로 이동시키는데 의문을 야기시켰다』고 질책했다.이와함께 스탈린은 군사고문단의 바실리예프장군에게 인민군사령부가 병력을 동남부로부터 신속하고 질서있게 이동시켜 서울 동·남·북부에 새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그는 병력이동시 작전수칙 8개항을 직접 지시했다. ○「8개 수칙」 직접지시 『①주력군 철수는 강력한 후방지원하에 시행할 것.경험많은 전투사령관들이 후방지휘를 책임질 것.대전차포부대,탱크가 후방방어를 지원할 것.②후방방어는 지뢰등을 이용한 장애물을 설치,이중삼중의 방어선을 만들 것.주력군 철수에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후방방어는 적극적이고 성공적으로 수행돼야함.③주력사단은 분리이동이 아니라 전체가 이동해야 함.주력군 선두는 포,탱크부대를 앞세워 전투태세를 갖춘상태에서 나아가야 함.④탱크는 반드시 지상군과 함께 투입하되 사전에 포공격을 한 다음 투입할 것.⑤선두부대는 주력군이 도착하기 전 교량,교차로,주요도로 등을 점령해야 함.⑥철수시 정보수집과 부대간 통신유지에 특별히 신경을쓸 것.⑦방어선 구축시기에는 병력의 전선배치를 피할 것.공격작전 개시 전 충분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함.⑧인민군사령부와 병력간 통신시 무선암호를 사용할 것.…중략…이미 지시한 바대로 군사고문단은 단 한명도 포로로 잡히지 않도록 방안을 강구할 것』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전세는 북한측에 더욱더 어렵게 전개됐다.스탈린은 김일성과 북한주재 소련군사고문단의 긴급요청을 받고 마침내 소련공군 부대를 북한에 주둔시키기로 동의했다.즉각 관련부대에 대한 명령이 소련군지도부에 내려졌다. 50년 9월 21일바실리예프스키 원수가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전문번호 N11 72SS)『①평양방어 임무를 맡은 「야크­9」전투비행여단의 전속에 관해 보고함.이 여단의 전속배치를 위해 연해주 보로실료프시 인근에 주둔중인 147비행사단 전력에 의존할 것을 제의함.전투기의 이동배치시 안동­평양지구에서 공중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함.…중략… ②북조선내 비행단 정비인력이 부족함으로 인해 위에 언급한 여단의항공기술대대 1개를 안동 경유 철도를 이용,평양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음.동시에 북조선이 탄약,연료가 부족하다면 이를 평양에 공급할 것임.③북조선이 공군관제기술과 공중경보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장비를 공급해 주어야 함.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 공군기들이 활주로에서 적군기의 기습공격을 당할 우려가 높음.…』 이틀 뒤인9월 23일 바실리예프스키 원수는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소련공군의 한국전 참전을 위한 최종계획을 보고했다. 바실리예프스키 장군은 이 보고서에서 『아군 조종사들이 평양부근에서 1차 교전만 가지면 미군기들에 의해 즉각 정체가 탄로날 것임.왜냐하면 공중전에서 조종사들간 무선교신이 러시아말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임』이라며 이 부분에 각별한 신경을 써줄 것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소련공군기의 참전태세가 완료된 즈음,북한군의 전세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스탈린으로부터 전황파악 임무를 부여받고 전선으로 간 마트베프 장군은 9월27일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전문번호 N60 0262sh) 『서부전선(서울)과 동남전선(부산 방향)의 전황이 인민군에게 매우 불리함.미군은 인민군의 주력을 포위격멸하기 위해 총공세를 펴고 있음.제물포에 상륙작전을 폈고 이곳으로부터 북쪽과 대구 북서방향으로 진격중임. ○김,6개사단 창설 계획 미군은 강력한 공군력의 지원을 엎고 인민군의 후방과 전방지역에 가공할 공습을 가하고 있음.미군은 수원 동쪽과 동남쪽 25∼30㎞까지 진격했음. 9월 25일 19:00,김일성은 서울일원과 북부전선과 동남방향의 제2군에게 최선을 다해 적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음.9월 26일 소련군고문단들이 김일성을 만났음.이 면담에서 김일성은 전시 총사령관과,전쟁상 직을 자신이 모두 맡겠다고 밝혔음.김일성은 특히 남쪽으로부터 동원가능한 최대인력을 데려와 이들로 6개 보병사단을 창설하겠다고 말했음.중국철도가 조선으로 오는 군수품 때문에 크게 붐기기 때문에 이들 6개 사단창설에 필요한 무기,탄약 수송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게 바람직하다고 했음.이 면담에서 우리는 김일성과 다음 사항에 합의했음.①효율적인 병력통제체제 확립.②물자,기술공급,수송,도로이용을 원활하게 할 것.③방어선 구축.북조선군은 운전병이 부족함.김일성이 중국측에 운전요원 1천5백명 보내달라고 요청할 것임.9월 29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슈티코프대사를 만나 전선상황을 브리핑했음. 슈티코프대사가 전한 바에 따르면 김은 다음과 같이 말했음. 마트베프 장군은 9월 30일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를 계속했다.『슈티코프는 김일성의 이같은 요청에 대해 자기는 현재 인민군의 정확한 위치,사정을 알지 못해 충고할 수는 없으나 38도선으로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이 시급하지는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함. 김일성은 본인에게 적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음.본인은 이에 대해 그것은 아직 불투명하지만 38도선의 방어선 구축은 서둘러야 한다고 답했음.김일성은 다시 한번 자력으로 통일을 이룩하고 싶다고 말하며 15개 사단을 창설해 전투를 계속하겠다고 강조했음.김일성은 그러나 만약 적이 38도선 넘어 진격해올 경우 새로운 사단창설은 물론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가 없다고 말했음. ○모에도 공군지원 요청 김일성은 이와 관련,스탈린동지께 서한을 보내 충고를 듣고 싶다고 말했음.본인은 이와 관련,들려줄 충고는 없을 것이라고 답했음.김일성은 이 서한에 공군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했음.최근 모택동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같은 부탁이 포함돼 있었음.본인 판단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매우 초조해 있음.당황하고 비관적이었음. 상황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음.서울이 함락됐음.38도선을 향해 신속히 진격하는 적을 상대로 효과적인 저항을 펼수있는 병력이 없음.정치상황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음』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김일성은 마침내 강경한 어조로 소련군의 직접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새로 밝혀진 사실/스탈린,9월초 “인천상륙작전 대비” 지시/「소 공군 투입계획」 중 공군 참전에 확정 9월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직접 지시문을 채택하였다는 점은 소련이 한국전쟁을 지도부 전체 수준에서 논의하였음을 보여준다.즉 그것은 이미 미국과 소련의 세계전쟁이 되어있었던 것이다.이날의 지시문에서는 작전 부재의 책임을 소련군사고문단에게 직접 묻고있다.서울부근에서 지체한 것도 소련고문단의 책임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심지어 사령부와 예하부대와의 협조 및 통신 연락미비 탱크사용전술에 있어서의 오류 등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한 점까지 직접 지시하고 있다.다른 한가지 새로운 점은 스탈린이 이미 9월초에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서울부근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라고까지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거대한 전쟁을 여러 번 치렀던 스탈린으로서는,특히 2차세계대전을 미국과 함께 치렀던 그로서는 이미 미국의 고전적인 상륙전술을 깊이 인지하고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공산진영은 미국의 인천상륙작전을 사전에 거의 알고도 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세번째로 소련공군의 참전방침이 이미 중국군의 참전 이전인 9월에 결정되었다는 점이다.이 역시 아주 새로운 사실로서 지금까지 소련공군참전결정은 10월에 중국군의 참전교섭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통설의 부정인 것이다.또한 흥미있게도 조종사들에 의한 러시아어무선교신의 위험성을 이미 지적하고있다는 사실이다.이는 실제로 소련공군이 참전한 후 위장을 위해 중국어나 한국어를 사용하였던 점에 비추어 그러한 위장의 계획이 일찍부터 세워졌음을 알게해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 세계,탈취무기 반환/유엔선 공습경고 해제

    【사라예보·워싱턴 로이터 AP AFP 연합】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보복공습이후 유엔무기보관소에서 탈취한 무기 5점중 4점을 유엔에 반환했다고 유엔대변인이 6일 밝혔다. 유엔은 이에 따라 6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외곽에 있는 세르비아계 진지들에 대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공습경고를 해제했다. 로브 애닌크소령은 세르비아계가 사라예보근교 일리드자무기보관소에서 탈취한 T55전차 1대,장갑차 2대,대전차포 1문을 5일밤 유엔에 반환했다고 말했다. 세르비아계 연락장교는 탈취무기 5점중 나머지 20㎜중박격포 1문은 6일 추가로 되돌려주겠다고 밝혔다. 한편 미국방부관리들은 6일 세르비아계가 사라예보외곽 안전지대를 또다시 침범할 경우 나토전투기들이 추가공습을 감행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6·25 그때와 오늘의 남북한 경제·군사력 비교

    ◎남 GNP 북의 16배… 수출은 80배 6·25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44년.전차와 야포등 고성능 화력을 앞세우고 38선을 돌파,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앞에 우리국군은 무기력 할 수 밖에 없었다.가까스로 낙동강교두보를 형성한뒤 유엔군과 함께 북진을 계속,잃었던 땅을 회복하고 휴전을 맞았지만 44년이 흐른 지금도 통한의 6월25일을 잊을 수 없다.50년6월과 94년6월.44년 전후 남북한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국방부와 한국은행,민족통일연구원등의 자문을 중심으로 비교해본다. ◎군사력/현 한국군 독자 군사력 북의 71% 수준/해군함정수 남 251척·북 460척/1994년/군인수 남 65만·북 1백3만명/1950년/북한,병력 2배·장비 3배 앞서 6·25당시를 보면 북한이 남한에 비해 병력은 약 2배,장비는 약 3배가량 많아 전력이 훨씬 강했다. 개전초기 북한의 총병력수는 19만8천여명으로 이중 18만명이 육군 10개 사단으로 편성돼 있었다. 장비도 박격포 1천7백여문을 비롯,남한에는 없던 전차 54대,자주포 1백76문,고사포 36문을 갖고 있어 각종 화력이 모두 3천3백37대에 이르렀다. 북한 보유 포들은 대부분 1백20㎜이상의 대구경이었다. 반면 남한은 총병력 10만5천여명으로 육군이 8개 사단 9만4천여명이었으며 장비는 장갑차 27대를 비롯,박격포·곡사포·대전차포등 3종의 포 1천1백91문이 전부였다.이 포들은 그나마 최대구경이 1백5㎜로 북한의 화력에 비해 크게 뒤졌다. 당시 북한군은 양적 측면뿐아니라 군사훈련등 질에서도 남한을 크게 앞서고 있었다. 북한군은 3명중 1명꼴로 중국내전등에서 실전경험을 쌓았으며 육군은 8개 사단중 7개 사단이 사단급 연습을 끝마쳐 놓고 있어 전투력이 최고수준이었다. 장비와 보급품도 당시로서는 최신인 47∼50년식 소련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남한은 고급장교중 문관이 상당수를 차지하는등 대부분 장교들이 전투경험이 없었다. 육군의 경우 공비토벌작전을 펼치느라 소규모로 흩어져 있어 겨우 4개 사단만이 대대급 훈련을 끝냈으며 나머지 4개 사단은 중대훈련이 고작이었다. 장비등도 미군이 2차대전중 사용하던 중고품이나 일본제 소총등이 주종이었으며 보급품 비축량은2일분에 불과했다. 주한미군도 치안유지에 적절한 수준으로 전면전을 치르기에는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남한과 미국측은 이처럼 현저하게 열세인 전력으로 전쟁초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뒤 20여년쯤 70년대초반.남한은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고속경제성장가도를 달리면서 비로소 군사력건설을 위한 율곡사업을 시작,지난 20여년 약 21조원을 투자했으나 주한미군을 제외한 한국군 독자군사능력은 북한의 71%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다. 94년도 북한의 병력은 1백3만명으로 정규사단이 53개,후방침투등 특수전을 위한 여단이 99개등이며 전차는 3천8백대,1백70㎜자주포등 야포는 무려 1만3백문에 이르고 있다. 해군도 전투함이 4백34척이고 잠수함도 26척이나 된다.공군은 전술항공기가 8백50대로 지원기·헬기를 포함하면 1천3백30대에 이른다. 이같은 북한의 군사능력은 6·25당시에 비해 병력은 5.2배가 늘어났으며 전차는 15.7배,각종 포는 3.4배,함정은 25.7배,항공기는 7.7배 늘어난 셈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병력이 65만5천명으로 육군사단은 50개,여단이 21개이며 전차는 1천8백대,장갑차 1천9백대,야포 4천5백문이다. 함정은 전투함 1백90척을 비롯해 잠수함 1척등 2백51척이며 항공기는 전술기 5백90대와 헬기 6백대등 1천3백10대다. 한국의 군사력은 6·25당시에 비해 병력은 6·2배,야포는 3.8배,항공기는 29.8배가 늘어난 것으로 특히 공군전력이 강화됐다. 이처럼 남북한의 군사력이 엄청나게 확대됨에 따라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반도는 거의 초토화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경제력/무역량 남 1천6백억불로 북의 63배/철도길이 남 1.3배… 44년간 같아/1955년/북한 발전시설용량 남의 8배/1993년/자동차생산량 남이 2백5배 ▷국민총생산(GNP)◁ 93년 한국의 GNP는 3천2백87억달러로 북한(2백5억달러)보다 16배에 이른다.53년에는 남한 13억5천달러,북한 4억4천만달러로 3배의 차이가 났다가 60년대 말까지 그 격차가 좁혀졌다.그러나 남한에서 본격적인 경제발전 정책이 추진되면서 70년 2배,80년 4.5배,90년 10배 등 격차는 더 벌어졌다.이제는 북한이 도저히 따라올수 없게 된 것이다. 1인당 GNP는 더 큰 변화를 보였다.74년을 분기점으로 남저북고가 남고북저로 역전됐다.53년에는 남한이 다소 앞섰지만 그뒤부터는 역전돼 60년에는 남한이 94달러로 북한의 1백37달러의 70% 수준이었다.그러나 74년 남한이 5백35달러로 북한(4백61달러)을 앞지르기 시작해 93년에는 남한 7천4백66달러,북한 9백4달러로 8배가 넘었다. ▷대외무역◁ 60년대 중반까지 수출·입을 합한 무역 규모는 남북한이 비슷했다.그러나 남한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지난 73년 5배의 차이에서 20년이 지난 93년에는 1천6백60억달러 대 26억4천만달러로 남한이 북한의 63배나 됐다.수출은 80.6배,수입은 51.7배이다. ▷광공업◁ 70년대 초까지는 북한이 중공업 분야에서 우위를 지켰다.전쟁 직후 남한이 경공업 중심의 성장정책을 편 반면 북한은 군수산업과 연관된 중공업을 우선시 했기 때문이다.지난 55년 북한의 발전시설 용량은 80만8천㎾로 남한(10만㎾)의 8배였다.총 발전량도 남한의 4배 가까이 됐다.60년의 제강능력도 66만t 대 5만t으로 북한이 앞섰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남한이 중화학 부문에 투자를 늘리면서 상황은 역전됐다.우선 지난 해 남한의 발전시설용량은 2천7백65만㎾로 북한(7백14만㎾)의 4배이다.총 발전량도 남한이 북한의 6배나 된다.제강능력은 남한이 3천3백25만t으로 북한의 1백86만t을 18배나 앞질렀다. 93년 남한의 자동차 생산량은 2백5만대인 반면 북한은 1만대 수준에 그쳤다.선박 건조량도 남한이 북한의 66배나 됐다.화학비료 생산량은 60년대 중반까지는 비슷했지만 지금은 남한이 4백11만t으로 북한보다 3배가 많다.풍부한 지하자원으로 철광석 생산량은 북한이 4백76만t으로 남한의 21만t 보다 여전히 많다. ▷식량생산◁ 쌀 생산량은 다른 부문보다 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지난 65년 남한이 3백50만t,북한 1백25만t으로 2.8배의 격차를 보였다.지난 해에는 4백75만t 대 1백31만t으로 남한이 3.6배 많았다. 전체 경지면적은 65년에는 남한이 2백55만6천㏊로 북한(1백99만㏊)보다 넓었지만 90년에는 북한이 2백14만1천㏊로남한(2백1만9천㏊)을 앞질렀다. ▷수송수단◁ 도로 총 연장은 남한이 55년 2만6천6백㎞에서 93년 6만1천2백95㎞로 2배 이상 늘었다.북한은 1만7천6백82㎞에서 2만3천㎞로 늘었다.철도 총 연장은 50년대부터 줄곧 남한이 북한보다 1.3배 정도가 많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 하

    ◎혹한속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 돌파/평양서 재편성… 「인해전술」과 싸우며 남하/51년 7월 대대장으로… 금성·금화서 공방전/저격능선 「고지쟁탈」 전투중 미 유학 명령 1950년 10월28일 하오 6시45분.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벌써 어둠이 깔렸다. 제7연대 제1중대는 5대의 트럭에 분승,주둔지인 압록강변을 떠나 초산읍으로 철수했다. 다음날인 29일 새벽 5시쯤 제1대대 수색대를 태운 군용차 한 대가 초산읍에서 다시 남쪽을 향하여 떠났다. 제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북한공산군의 출몰이 염려되는 구용동 남쪽 고개를 수색·점령·확보하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다. 그날 아침 6시30분쯤 제7연대 제1대대는 군용트럭을 타고 초산읍을 출발,남쪽으로 내려가 고장에서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이때 중공군은 고장 남쪽에 있는 풍장 일대에서 아군이 남하하는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이들 중공군을 일제히 공격,돌파작전을 개시했다. 우리 공군 전폭기들이 중공군 진지를 강타하면서 제7연대의 돌파작전을 근접지원해주었다. 중공군은 남으로 좀 밀려나는 듯했으나 그들의 두꺼운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달이 없는 어두운 밤이 됐다. 지형은 폭이 50∼1백50m 가량 되는 좁은 계곡이 길게 남북으로 놓여 있고 계곡 양쪽의 산줄기들은 가파르고 높았다. 이날 밤 12시 정각,중공군은 야간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야간전투는 혀를 찰 만큼 아주 능숙했다. 얼마 안가서 제7연대의 전방부대가 무너지고,전방에서 흩어진 연대병력은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달아나고 있었다. 후방으로 멀리 떨어져서 재편성을 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방에서는 이미 다른 중공군 부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숨 돌릴 새없이 달려들었다. 재차 흩어져서 다시 더 먼 후방으로 달려가 보아도 그곳에서도 전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 제7연대는 중공군 제40군예하 1개 사단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중공군은 우선 병력면에서도 우리 제7연대의 약 3배나 됐다. 군용트럭 수백 대와 사단포병 야포 6문,대전차포,기타보급품을 버린 채 제7연대는 낭림산맥의 지맥인 유령산맥 깊은 산중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들어갔다. 중공군은 이 분산병력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악착같이 우리 부대를 추격하며 남쪽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중공군과의 싸움에 들어가기 전 필자의 지휘하에 있던 병력은 제1중대원 약 1백60명,배속된 중기관총반원 약 10명,귀순 동화된 북한공산군 포로 남녀 약 25명,간호학생 2명,한국청년단원 약 10명 등 모두 2백명이 넘었으며 이 중 여자 등 비무장인원을 제외한 전투가능 인원은 약 1백85명 정도였다. 필자는 이 전투가능병력 중에서 약 60명을 잃은 채 잔여인원을 이끌고 유령산맥으로 들어갔다. 높은 산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곳은 벌써 깊은 겨울이어서 뜯어 먹을 풀조차 없었다. 중공군을 만나면 싸우기도 하고 피해 달아나기도 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포위망을 계속해서 뚫어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중공군뿐이고 아군은 도대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중공군과 만나 교전이 이루어질때마다 아군의 병력은 자꾸 줄어만 들었다.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는 데서 우리 제7연대의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당시 제7연대에는 8명의 영관급 장교가 있었는데 이 중 6명의 손실이 있었다.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제1대대 부대대장 조현묵 소령,연대정보주임 김재강 소령 등 4명은 포로가 됐고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은 전사했으며 연대작전주임 조윤재 소령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포위망을 뚫고 용케도 살아나온 사람은 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김용배 중령은 그후 전사했다. 더욱이 장병들의 손실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내가 덕천지방 동쪽 송정리에서 대동강을 건너 남중리의 적군과 최후의 교전을 갖고 포위망을 뚫은 뒤 제6사단 사령부에 도착,사단장 장도영 준장에게 신고를 한 것은 그해 11월9일 오후 3시경이었다. 나는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와 사단장에게 첫번째로 신고식을 갖는 장교가 된 것이다. 군악이 울려 퍼졌다. 군인 20명을 3렬 횡대로 하여 세워놓고 마지막에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2명을 세웠다. 중대장인 나는 3렬횡대의 6보 앞 중앙에 섰다. 나는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신고했다. 『경례! 바로! 제7연대 제1중대장,이대용 대위는 적포위망을 돌파하고 사병 20명,민간인 간호학생 2명을 지휘하여 1950년 11월9일 사단사령부에 도착했기에 이에 삼가 신고합니다. 경례! 바로!』 사단장의 위로와 격려사가 있었다. 군예대 여자 가수가 나의 목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어주었다. 사단사령부에서 할당해주는 민중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박태숙·정정훈양에게 하사관 1명을 딸려 서울로 떠나 보냈다. 깨끗이 보호하고 온 처녀들이 도중에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든든한 하사관을 경호원으로 배정,서울까지 가게 한 것이다. 11월22일까지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김용배 중령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고 후방에서 신병들과 육군종합학교 출신 신임 소위들이 보충돼 제7연대는 11월25일 재편성을 했다. 병력숫자로는 제7연대가 제대로 모습을 갖춘 셈이었다. 재편성이 끝나기가 바쁘게 제7연대는 덕천 남쪽 북창으로 이동하여 중공군과 대결하게 됐다. 북창과 가창 사이에 있는 미럭고개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으나 신병들인 아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견뎌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공군의 진격은 계속되었고 우리 제7연대는 평양 상원 서흥 시변리 삭녕 전곡을 거쳐 다시 38선에 배치되었다. 북한공산군이 남침한 1950년도 저물어 갔다. 그해 12월31일 밤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린 제7연대 제1중대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 북방 창동에 배치되었다. 해를 넘겨 1951년 1월6일 경기도 광주를 거쳐 백암리로 가는 도중에 나는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대대장 대리로 제1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영하의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듯이 불어댔다. 1·4후퇴라고 일컬어지는 설상의 피란민대열이 남으로 남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도 각종 보급품들이 달리고 장티푸스까지 만연하자 지칠 대로 지친 모양이다. 중공군은 양지리 북쪽에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제7연대는 그동안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엔 대단한 적군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도 별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불패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그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약 2개월간 제1대대를 지휘하고 나서 대대장이 새로 부임함에 따라 부대대장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용문산지구 전투,춘천지구 전투,구만리지구 전투,풍산리지구 전투,백암리지구 전투를 끝으로 나는 그해 7월9일 제7연대를 떠나 제2사단 제32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10월27일에는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금화지구 파조봉­이실골 전투,금성지구 전투를 하면서 제32연대 제3대대는 금성 바로 앞산인 424고지까지 1개 소대를 진출시켰다. 여기서 중공군과 매일같이 폭격전과 수색전으로 투덕거리며 한겨울을 보냈다. 미군과 교대하고 금화 쪽으로 빠져나왔다. 제32연대는 제3대대는 금화 동북방에 있는 저격능선에 배치됐고 한국군에도 임시계급제도가 도입되어 일선 보병대대장들에게는 1952년 3월부터 모두 육군중령 계급이 부여됐다. 저격능선은 지형상 항상 긴장상태에서 적과 공방임무를 수행해야 했달. 그러던 중 나는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2년여의 전진을 씻고 부산항에서 미국행 군용수송선을 탄 것이 1952년 9월2일이다. 이때의 군복은 카키색 군복이고 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6·25가 일어났을 때,내가 춘천도서관으로 가던 때의 군복도 카키색 군복,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카키색 군복으로 맞이한 나의 6·25는 카키색 군복으로 막을 내렸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중

    ◎낙동강서 대반격… 두달 뒤 압록강 진격/“남북통일 축원” 강물 담은 수통 이 대통령에/국경 도착 이틀 만에 “중공군 침입”… 후퇴 명령 1950년 6월28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불과 4일 만에 수도 서울은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공산군은 빠른 속도로 남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무방비상태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서부전선의 아군 방어선을 조정하기 위해 중부전선의 제6사단을 남으로 철수시키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은 계속해서 하달되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제7연대 제1중대는 홍천의 삼마치고개,원주의 신림고개에서 남진하는 북한 공산군을 맞아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의 장갑차 5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저들의 뛰어난 화력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7월4일에는 전국과 멀리 떨어진 충주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피란민들의 행렬은 홍수를 이루며 지나갔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렇게 탄식했다. 『군인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우리 연대 작전과에 있던 여자 타자수가 조금 전에 이 앞을 지나갔어.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어 정말 피란민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 그의 얼굴 표정은 군인의 국가에 대한 책임,국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충주농업학교 교실에서 하룻밤을 지낸 나는 7월5일 아침 일찍이 제1대대 제1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음성으로 이동했다. 기름고개를 향하여 북쪽으로 전진하던 중 마침 북쪽에서 내려오던 북한 공산군과 조우하게 됐다. 전투가 시작됐다. 아군의 사기는 그런대로 중천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기름고개를 넘어서자 적군이 줄지어 다가왔다. 우리 부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적 대부대를 깨끗이 섬멸하고 계속 전진했다. 이때 나는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몸 아홉군데에 총알이 박혔다. 중상중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났나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헐렁한 팬츠 하나만 걸친 채 담요에 둘둘 싸여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워낙 부상이 심해 결국 부산에 있는 제5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4층에 있는 중환자실에 눕혀졌다. 대소변도 받아내는 형편이었다. 의정부가 고향이라는 간호장교 최 소위가 이를 맡아 해냈다. 입원 3일 만에 군의관 이경룡 대위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됐다. 내 몸에 박힌 직사 포탄조각을 여러 개 빼냈다. 수술 후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때마다 간호장교 최 소위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이팅게일의 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다 해도 최 소위의 헌신은 참으로 감사했다. 먼훗날 그녀가 수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까닭없이 그리고 한없이 가슴에 와닿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가 제5육군병원을 떠난 것은 입원한 지 달포가 더 지난 8월24일이었다. 다시 나는 제7연대 제1대대 후방지휘소로 갔다. 8월26일 저녁 제6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박격포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신령역 부근에도 적의 박격포탄이 무수히 떨어졌다. 북한 공산당이 낙동강 교두보의 일각을 뚫고 화산 일대를 점령한 뒤 퍼붓는 포탄들이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7연대 제1대대를 연대에서 빼내 사단직할로 하여 화산의 적을 공격케 했다. 이때 나는 제7연대 제1중대장으로 복귀하여 화산지구 탈환임무를 맡았다. 제1중대장으로 복귀해보니 내가 병원에 있었던 50여 일 동안에 중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부상을 당할 때 함께 적군과 싸웠던 소대장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1소대장 한도선 중위는 내가 제1중대를 떠나자 나의 후임이 되어 중대를 지휘했으나 문경새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임으로 제2소대장 강구석 중위가 중대장이 되었으나 그는 곧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빠져나갔고 다시 그 후임으로 제3소대장 손종구 소위는 낙동강전투에서 가슴에 적탄을 맞고 후송 도중 숨을 거뒀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제1중대에 장교가 한 명도 없어서 중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가 중대장대행이 되어 부대를 지휘,전투를 했으나 또한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제1중대장에 부임한 도진환소위는 내가 중대장으로 복귀하면서 제1소대장이 되었으나 며칠 후 화산전투에서 전사했다. 2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중에 제7연대 제1중대는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하고 1명의 중대장이 중상을 입는 손실을 가져왔다. 세계 전쟁 역사상 불과 2개월 동안에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한 예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1개 중대에서 중대장들의 소모가 이렇게 격심했으나 사병들의 소모는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이는 또 한국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기간은 1950년 6월부터 그해 9월 중순까지의 기간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전사자 통계숫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산 옛 성터 일대에서 숨박히는 격전 끝에 우리는 북진을 시작했다. 문경 원주 홍천 춘천 화천 김화 평강 복계 세포 회양 원산 양덕 성천 순천 개천 희천 회목동 고장 초산을 거쳐 압록강변 신도장마을에 우리 제1중대를 선두로 제7연대 제1대대가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26일 하오 2시15분이었다. 만주에 연결된 뗏목다리 위에는 수백 명의 피란민들이 가득히 차 있었다. 이미 만주로 건너간 수백 명은 줄지어 중국 마을 통천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초산읍에 본부를 두고 재편을 시도하던 북한 공산군 제8사단은 사단장 오백룡 지휘하에 주로 위원읍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모두 만주땅을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했다.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지시로 나는 남북통일을 축원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떴다. 그리고 제1대대에 배속되어 있는 57㎜ 대전차포 철갑탄으로 만주와 연결되어 있는 뗏목다리를 끊어버렸다. 강물에 군화를 적시고 손도 씻다가 하오 4시경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 제1중대를 제외하고 제1대대 전병력은 약 10리 서남쪽에 있는 초산읍으로 내려갔다. 나는 이장원 소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를 신도장분주소(경찰지서) 일대에 배치하여 위원읍으로 통하는 자동차도로를 차단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뗏목다리를 화력으로 엄호케 했다. 김덕출 소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는 제1소대 좌일선에 연결하여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기슭에 길게 배치하고 박상호 상사가 지휘하는 제3소대는 제2소대에 연결되어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 기슭에 배치했다. 중대 선임장교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서근석 소위의 화기소대 본부와 제1중대 본부는 제2소대지역내에 위치시켰다. 결국 제7연대 제1중대는 강건너 중국대륙을 바라보며 약 1천6백m에 달하는 거리에 늘어서서 국경 경비임무에 들어갔다. 1910년 8월29일. 격변하는 세계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나라 안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권력싸움에 눈이 멀던 우리 조상들. 병들고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왜놈들에게 나라를 뺏기고 국경 경비의 권리를 그들에게 넘겨준 35년간,그 후 남북한 화합을 못 하고 이념의 갈등을 겪으면서 국토가 양단되어 5년,통틀어 40년의 세월을 한을 안은 채 고통 속에서 지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통의 족쇄가 풀리는 첫날이다. 남북을 통일한 배달의 남아들이 압록강 국경선에서 타국땅을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가슴은 감격에 벅찰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국경선에서 또 하룻밤을 자고 나니10월28일이 되었다. 이날 하오 5시경 초산읍에 있는 제1대대 본부로부터 제1중대에 다음과 같은 청천벽력과 같은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온정일대에서 제2연대가 중국군에게 패하여 후퇴중에 있다. 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제1대대는 연대의 일부로서 온정으로 남하한다. 제1중대는 10월28일 하오 7시 초산읍에 집결하라』
  • 첫 대규모 지상전… 포성 높은 걸프

    ◎이라크,카프지서 미 여군 1명 생포/이라크탱크 투항 가장,한밤 기습포격/“카프지는 진흙구덩이” 탈환작전 애로/“이라크병사 12만9천명 북부 산악지역으로 피신” ○여군 1명은 행방불명 ○…바그다드 방송은 31일 이라크군이 사우디아라비아 국경도시 카프지에서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한 다수의 미 여군을 포로로 잡았다고 보도. 영국의 BBC 방송이 수신한 이 방송은 『다수의 미 여군이 카프지 전투에서 다른 미군 및 다국적군과 함께 생포됐으며 이들은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미군 당국도 수송부대 소속의 여군 1명이 카프지에서 이라크군에게 잡혔다고 말했는데 미국은 여군의 실전 참전을 법률로 금하고 있다. 패트 스티븐스 4세 미 육군준장은 이날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가진 브리핑을 통해 기자들에게 수송부대 소속의 또다른 여군과 1명의 미군이 카프지에서 행방불명됐다고 밝혔다. ○저항 안받고 쉽게 진격 ○…31일 다국적군에게 섬멸당한 카프지침공 이라크군은 걸프전 개전 후 처음으로 29일 밤 2개 대대의 병력과 80대의 탱크 및 장갑차를 이동,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국경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었는데 이들은 국경선을 넘을 때 투항을 가장해 T­55 탱크포탑을 뒤로 한 채 접근했었다고. 현지발 기사에 따르면 이라크의 장갑차량들은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진입한 뒤 자정무렵부터 포화를 퍼붓기 시작했으며 미 해병대는 이에 맞서 공중폭격과 아랍연합군 및 카타르군의 작전참가를 요청했다는 것. ○“후세인이 계획 수립” ○…이라크관영 라디오 방송은 30일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국경도시 카프지에 대한 이라크군의 공격계획을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직접 세웠다고 보도. 니코시아에서 청취된 이라크 라디오 방송은 이날 이라크지상군 2개 부대가 사우디내 광범한 전선에 걸쳐 개전 이래 첫 주요 지상전인 이번 지상공격을 개시했다고 밝히고 『사담 후세인의 부대들은 부패하고 반역적인 침략자들을 쓸어버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라크는 31일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도시 카프지를 일단 점령함에 따라 걸프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으며다국적군에 치명타를 가했다고 주장했다. 이라크는 집권 바트당의 기관지 알 타우라지를 통해 이같이 주장하고 카프지를 30시간 이상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은 이라크가 미국으로부터 걸프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걸프전 주도권 장악” ○…바그다드 라디오는 거의 중단없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음악과 함께 카프지 전투에서 미 해병이 12명이나 사살됐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방송하는 한편 이라크의 공격을 다국적군이 막지 못했다는 외국 언론의 보도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관영 알 줌후리야지도 카프지 점령을 계기로 이라크가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주장하고 병사들에게 진군을 촉구했다. ○카타르군 눈부신 활약 ○…29일 밤 이라크군의 기습으로 사우디국경 유전도시 카프지시를 빼앗겼던 다국적군은 30일 늦은 밤부터 이 지역 탈환을 노린 재역습을 시도했으나 완강히 저항하는 이라크군의 수류탄과 반격포 공격으로 고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미 해병대위는 『포탄이 어디로부터 날아오는지 종잡을 수조차없었다』고 격전상황을 증언. 천신만고끝에 시내진입에 성공한 다국적군은 30㎜ 대포와 7.62㎜ 기관총을 장착한 소련제 탱크와 경장갑차 등으로 무장한 이라크군의 역공을 받았으나 사우디군이 뜻밖에 선전,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고. 또 24대의 프랑스제 AMX탱크와 토대전차탱크미사일과 대포 등을 탑재한 경장갑차량 20여대를 앞세운 카타르도 눈부신 활약으로 다국적군의 공격을 부축했다는 것. 이 전투결과 이라크군은 샘(SAM) 미사일 발사장치에서부터 대전차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기를 갖고 전투를 벌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국적군이 공격과 후퇴때 적잖은 애를 먹은 이유는 카프지시 주위가 「사브카스」라 불리는 낮고 평평한 습지인데다 최근 며칠동안 내린 비로 진흙구덩이로 변해 탱크와 중무장 장비들이 번번이 빠지는 바람에 빠져나오기 힘들었던 때문이라고. ○…걸프전쟁 발발이후 12만9천여명의 이라크군 병사들이 병영을 탈출,이라크북부 쿠루디스탄 지역으로 피신해왔다고 반후세인 세력인 쿠르드족애국연합의 대변인 아메드 바르마니가 31일 밝혔다. 바르마니 대변인은 15만여명의 민간인들로 바그다드나 그밖의 지역에서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산악지역 쿠르디스탄으로 피신해왔다고 말했다. ○“지상전땐 화학전 사용” ○…톰 킹 영국 국방장관은 31일 자신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이 다국적 지상군에 대해 화학무기 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킹장관은 이날 영국 BBC 라디오에 의해 방송된 미국 TV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은 사담이 화학무기에 의존한다 하더라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다국적군은 화학공격에 대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걸프전 31일 상황/D+14/레바논군,아랍게릴라 3명 사살/유엔선 오염조사단 곧 걸프 파견 ▷상오9시◁ 유엔은 걸프해역의 원유 유출과 해상오염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조사단 파견한다고 발표. ▷상오11시35분◁ 국제통화기금은 이집트에 경제지원준비 통보. ▷낮12시20분◁ 영국이 걸프전과 관련,일본에 더 많은 지원을 요청했다고 일본 외무성 대변인 발표. ▷하오4시10분◁ 사우디군은 국경지역 카프지시에서이라크군 격퇴 위해 전투 중이라고 서방 군 소식통 밝힘. ▷하오4시25분◁ 미군,개전 이후 최초로 이라크 포로 36명 사우디에 넘김. ▷하오6시10분◁ 걸프 기름유출이 호르무즈해협에서 차단되지 않는다면 벵골만까지 흘러갈 것이라고 일 해양학자 주장. ▷하오6시25분◁ 이스라엘의 후원을 받는 레바논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경 근처에서 아랍게릴라 3명을 사살했으며 수십발의 카튜사 로켓포가 레바논 남부에 떨어졌다고 이스라엘 군 발표.
  • 지상군 10만·전함 60척 한국전이래 최대 규모

    ◎페만 다국적군 전력 점검/“다중 공격” 미 신형미사일 첫 배치/아랍연합군은 사막전 취약 미군을 보완/탱크의존 이라크,제공권 약해 타격 클 듯 세계 각국의 육·해·공군이 페르시아만으로 속속 몰려들고 있다. 유사시 최대 25만 병력까지 현지파견이 가능하다고 공언한 미국은 15일 페르시아만에 파견된 미군을 총지휘할 중부사령부를 플로리다주 맥딜공군기지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이동시키는등 전투태세를 끝내놓고 있다. 이번 각국의 파병규모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2차대전이나 한국전 또는 월남전이후 최대규모가 될 게 틀림없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14일째인 16일 현재 페르시아만에 집결한 전투력은 5개국의 아랍연합군을 포함,총 14개국 소속의 지상군 10만여명,각종 전투기 2백여대,항공모함 5척 등 60여척의 전함이다. 육군보유 항공기나 항공모함 적재분까지 합치면 항공기수는 6백여대에 이른다. 이중 미군은 항공모함 4척등 전함 40여척,전투기 1백80여대,지상군 4만5천명 등 전체 다국적군 전투력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지난해 파나마 침공당시 1만2천명의 현지주둔 병력에 1만명 정도가 추가투입돼 삽시간에 작전을 성공리에 끝냈고 지난 50년 한국전쟁 발발당시 초기에 투입된 미 군사력은 전투기 1백여대,순양함 2척,구축함 12척,지상군 주둔병력 1만2천여명 수준이었다. 월남전 당시에도 항공모함 2척이 교대로 상륙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에 페르시아만에 집결된 군사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외형적인 단순비교로는 실제 파괴력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5인치 함포가 고작이었던 6·25나 월남전 당시에 비해 초현대화된 전투기및 미사일등의 파괴력은 가히 가공할 만한 것이다. 우선 제공권 장악여부의 관건이 되는 공군력을 보면 스텔스기는 이라크의 레이더를 피해 목표에 접근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 화학무기생산공장및 저장소,핵병기 연구시설 등 현대식 대공미사일로 보호되는 주요 시설물을 어렵지 않게 무너뜨릴 수 있다. A­10 근접지원기는 6개의 발사구를 가진 30㎜ 대전차포를 장착,그야말로 전차킬러로서 5천6백여대의 이라크탱크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B­52폭격기의 대형폭단은 떨어진 곳마다 직경 15m 크기의 반구형 구덩이를 만들어낼 정도로 파괴력이 강력하다. 5대의 AWACS기(조기경보기)는 이라크의 군사력이동을 손바닥에 놓고 보듯이 포착할 수가 있어 공중전에 결정적인 우위를 제공한다. 인디펜던스호(아라비아해) 아이젠아워호(홍해) 사라토가호(동지중해) 케네디호(지중해) 등 4척의 항공모함에도 각각 60대씩의 전투기가 적재돼 있다. 특히 전함 위스콘신호에는 토마호크 크루즈미사일이 장착돼 있어 주목받고 있다. 명중률이 높아 주요전략시설 폭파에 적합한 것으로 이번에 최초로 실전 배치됐다. 지상군도 파나마침공에 투입된 82공정사단 101공정사단 24기계화보병사단 등 최정예부대이다. 낙하산부대인 82공정대는 대전차 토미사일 20기씩을 갖추고 있고 101공정사단은 AH­64 아파치헬리콥터 36대와 AH­1 코브라 대전차 헬리콥터 36대를 보유하고 있다. 24기계화보병사단은 탱크 1백74대와 1백55㎜ 자주포,다연발 로켓시스템 등을 갖추고 있다. 사정거리 95㎞로 동시에 여러목표물을 파괴할 수 있는 패트리어트 지대공미사일이 처음으로 실전 배치됐고 중거리 호크미사일,스팅어대공미사일 등도 갖추고 있다. 이집트 시리아 모로코 등 아랍연합군으로 파견된 지상군은 사막전에 익숙치 않은 미 지상군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다국적군의 최신예전력에 비해 모두 합해 5백여대의 항공기와 5천6백여대의 탱크에 의존하고 있는 이라크군이 열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공중전에는 경험이 별로 없어 당장 제공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라크의 주력무기인 탱크는 위력을 발휘하기가 힘든 실정이다.〈김주혁기자〉 □페르시아만 집결 다국적군〈파병준비분 포함〉 ●미국 해군:항공모함 4척,항공기 2백50대,순양함,프리깃함,소해정 등 전함 40여척(약 3만명) 지상군:101공정사단,24보병기계화사단,82공정대,해병 제4·7기동여단 등(6만명) 공군:F­15,F­16전투기 각 48대,F­111폭격기 14대,A­10대 전차공격기 72대,B­52폭격기,조기경보기,공중급유기 등 다수 ●영국 해군:구축함 1척,프리깃함 2척,소해정3척(1천명) 공군:토네이도전투기,재규어 각 12대,해양순찰기 3대 ●프랑스 해군:항공모함 1척,순양함,보급함 등 4척(2천6백명) ●호주 해군:프리깃함 2척 ●캐나다 해군:순양함 2척(8백명) ●네덜란드 해군:프리깃함 2척 ●벨기에 해군:소해정 1척,초계정 2척 ●서독 해군:소해정 5척 ●소련 해군:구축함 2척 ●아랍연합 지상군 이집트:3만명 시리아:2개 사단 모로코:5천명 파키스탄:5천명 방글라데시:5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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