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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오리~ 까오리~” 환호성…K팝에 방콕이 ‘들썩 들썩’

    “까오리~ 까오리~” 환호성…K팝에 방콕이 ‘들썩 들썩’

    “까오리, 까오리!”(한국, 한국!) “까오리, 사와디 캅”(한국, 안녕하세요) 한국방문의해위원회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이 주관하는 ‘한국방문의해 기념 2011 K팝 커버댄스 페스티벌’의 태국 본선이 18일 오후 2~6시(현지시간) 방콕 시나카린 위롯대 예술홀에서 뜨거운 열기 속에서 열렸다. 커버댄스 페스티벌은 K팝의 국제화를 위해 외국의 한류 팬들이 한국 가수의 노래에 맞춰 춤을 따라 추는 이벤트다. 경연에는 예선을 거친 총 18개팀이 참가했다. 행사 시작 1시간 전부터 300여명을 수용하는 예술홀 앞은 줄이 길게 이어져 동남아에서 불고 있는 K팝의 열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미처 들어오지 못한 팬들은 홀의 복도 계단에 빼곡히 앉아 관람을 했다. 이들은 K팝 가수들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연신 몸을 흔들며 흥에 빠졌다. 개그우먼 김신영의 사회로 진행된 커버댄스 페스티벌은 태국 출신인 닉쿤이 소속된 인기그룹 2PM이 소개되자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참가팀들은 2PM은 물론 소녀시대, 빅뱅, 비스트, 카라, 샤이니, 2NE1 등의 댄스와 노래를 저마다 독특한 스타일로 소화해 갈채를 받았다. 관람석에는 서툰 한국어로 쓴 한국 가수 이름과 사진, 하트를 그려 넣은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는 모습도 보였다. ●2PM, 방콕 도심서 깜짝 게릴라콘서트 경연에서는 방콕에서 차로 10시간 넘게 걸리는 치앙마이에서 온 ‘넥스트 스쿨’팀이 우승해 경주에서 열리는 한국 결선에 참가하게 됐다. 팀의 리더인 아따씻 까띠욧(23)은 “한국에서 실력을 겨루게 돼 너무 기분 좋다. 더 열심히 연습해 우승을 하겠다.”고 당찬 소감을 밝혔다. 중학교 때부터 K팝에 빠졌다는 여고생 펫라다 꾸솔쌍(15)도 “닉쿤이 온다고 해서 며칠 전부터 온통 커버댄스 페스티벌만 생각해 왔다. 2PM을 직접 보니 설레고 떨렸다.”며 감격스러워했다. 특히 2PM은 이날 밤 8시쯤 방콕 시청광장에서 게릴라콘서트를 열어 시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렀다. 2PM의 멤버들은 “K팝의 열기를 직접 확인해 보니 정말 열심히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방콕 한·태교류센터 김건홍 팀장은 “3~4년 전 드라마 ‘대장금’을 시작으로 이곳에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면서 “한국인을 지칭하는 ‘까오리’는 최고 인기 단어가 됐다.”고 전했다. ●새달 3일 경주서 최종 결선 ‘K팝 커버댄스 페스티벌’은 지난 6~8월 한국과 일본, 중국, 유럽, 미주 등지에서 참가 신청을 받아 유튜브의 UCC 동영상을 통해 1차 예선을 치렀다. 러시아(모스크바·6일), 브라질(상파울루·7일), 일본(도쿄·11일)과 미국(LA·11일) 본선이 끝났고, 이날 방콕 행사에 이어 19일 유럽 본선인 스페인(마드리드) 행사를 끝으로 지역 본선을 마친다. 한국의 본선은 27일 서울에서 열린다. 한국방문의해 위원회의 한경아 마케팅 본부장은 “커버댄스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콘텐츠이기 때문에 K팝이나 한류를 세계에 전파하는 더없는 좋은 수단”이라면서 “지역 본선을 통과한 우승팀들은 다음 달 3일 경주에서 열리는 최종 결선에 출전한다.”고 밝혔다. 글 사진 방콕(태국) 나우뉴스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 태국 ‘넥스트 스쿨’ K-POP 커버댄스 경주 결선 진출

    태국 ‘넥스트 스쿨’ K-POP 커버댄스 경주 결선 진출

    “까오리, 까오리!”(한국, 한국!) “까오리, 사와디 캅”(한국, 안녕하세요) 한국방문의해위원회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이 주관하는 ‘한국방문의해 기념 2011 K팝 커버댄스 페스티벌’의 태국 본선이 18일 오후 2~6시(현지시간) 방콕 시나카린 위롯대 예술홀에서 뜨거운 열기 속에서 열렸다. 커버댄스 페스티벌은 K팝의 국제화를 위해 외국의 한류 팬들이 한국 가수의 노래에 맞춰 춤을 따라 추는 이벤트다. 예선을 거친 18개팀이 참가한 경연에서 방콕에서 차로 10시간 넘게 걸리는 치앙마이에서 온 ‘넥스트 스쿨’팀이 우승해 10월 3일 경주에서 열리는 한국 결선에 참가하게 됐다. 팀의 리더인 아따씻 까띠욧(23)은 “한국에서 실력을 겨루게 돼 너무 기분 좋다. 더 열심히 연습해 우승을 하겠다.”고 당찬 소감을 밝혔다. ●2PM, 방콕 도심서 깜짝 게릴라콘서트 행사 시작 1시간 전부터 300여명을 수용하는 예술홀 앞은 줄이 길게 이어져 동남아에서 불고 있는 K팝의 열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미처 들어오지 못한 팬들은 홀의 복도 계단에 빼곡히 앉아 관람을 했다. 이들은 K팝 가수들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연신 몸을 흔들며 흥에 빠졌다. 개그우먼 김신영의 사회로 진행된 커버댄스 페스티벌은 태국 출신인 닉쿤이 소속된 인기그룹 2PM이 소개되자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참가팀들은 2PM은 물론 소녀시대, 빅뱅, 비스트, 카라, 샤이니, 2NE1 등의 댄스와 노래를 저마다 독특한 스타일로 소화해 갈채를 받았다. 관람석에는 서툰 한국어로 쓴 한국 가수 이름과 사진, 하트를 그려 넣은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는 모습도 보였다. 중학교 때부터 K팝에 빠졌다는 여고생 펫라다 꾸솔쌍(15)도 “닉쿤이 온다고 해서 며칠 전부터 온통 커버댄스 페스티벌만 생각해 왔다. 2PM을 직접 보니 설레고 떨렸다.”며 감격스러워했다. 특히 2PM은 이날 밤 8시쯤 방콕 시청광장에서 게릴라콘서트를 열어 시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렀다. 2PM의 멤버들은 “K팝의 열기를 직접 확인해 보니 정말 열심히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방콕 한·태교류센터 김건홍 팀장은 “3~4년 전 드라마 ‘대장금’을 시작으로 이곳에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면서 “한국인을 지칭하는 ‘까오리’는 최고 인기 단어가 됐다.”고 전했다. ●새달 3일 경주서 최종 결선 ‘K팝 커버댄스 페스티벌’은 지난 6~8월 한국과 일본, 중국, 유럽, 미주 등지에서 참가 신청을 받아 유튜브의 UCC 동영상을 통해 1차 예선을 치렀다. 러시아(모스크바·6일), 브라질(상파울루·7일), 일본(도쿄·11일)과 미국(LA·11일) 본선이 끝났고, 이날 방콕 행사에 이어 19일 유럽 본선인 스페인(마드리드) 행사를 끝으로 지역 본선을 마친다. 한국의 본선은 27일 서울에서 열린다. 한국방문의해 위원회의 한경아 마케팅 본부장은 “커버댄스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콘텐츠이기 때문에 K팝이나 한류를 세계에 전파하는 더없는 좋은 수단”이라면서 “지역 본선을 통과한 우승팀들은 다음 달 3일 경주에서 열리는 최종 결선에 출전한다.”고 밝혔다. 글 사진 방콕(태국) 나우뉴스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 “K팝 커버댄스, 방콕을 홀렸다”

    “K팝 커버댄스, 방콕을 홀렸다”

    “까오리,까오리!”(한국,한국!) “까오리 사와디 캅”(한국, 안녕하세요) 한국방문의 해 위원회가 주최하고 서울신문이 주관하는 ‘한국방문의 해 기념 2011 K팝 커버댄스 페스티벌’ 태국 본선이 18일 오후 2시~6시(현지시간) 방콕 시나카린대 강당에서 열렸다. 커버댄스 페스티벌이란 K팝의 국제화를 위해 외국의 한류 팬들이 한국 가수의 노래에 맞춰 춤을 따라 추는 이벤트다. 총 19개팀이 참가한 이날 경연은 행사 시작 전부터 행사장 강당 앞에 긴 줄이 이어져 동남아에서 불고 있는 K팝의 열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주최측은 강당 바깥에도 대형 스크린을 설치, 입장을 하지 못한 관람객들을 배려했다. 이들은 K팝 가수들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연신 몸을 흔들며 흥을 냈다. 대학 캠퍼스 곳곳에서도 K팝 가사를 따라 부르며 커버댄스를 추는 풍경이 눈에 띄었다. 개그우먼 김신영의 사회로 진행된 행사에서 참가팀들은 2PM은 물론 소녀시대, 빅뱅, 비스트, 카라, 샤이니, 2NE1 등의 커버댄스를 저마다 독특한 스타일로 소화해 갈채를 받았다. 관람석에는 서툰 한국어로 쓴 한국가수 이름과 사진, 태극기를 넣은 플래카드를 들고 참가팀을 응원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날 경연에서는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 본선에 참가할 수있는 2개팀이 뽑혔다. 행사 도중 이곳 태국 출신인 닉쿤이 소속된 인기그룹 2PM이 소개되자 관람석은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닉쿤은 이곳에서 국빈급 대우를 받는다. 중학교때부터 K팝에 푹 빠졌다는 한 여고생(17)은 “닉쿤이 온다고 해서 며칠 전부터 온통 커버댄스 페스티벌만 생각해 왔다.”며 몸을 흔들며 흥겨워 했다. 2PM은 태국에서 수천개의 팬클럽을 보유하고 있고 회원이 2만명 이상인 클럽만도 20여개나 된다. 행사 진행을 총괄한 서울신문 문창호 PD는 “이미 K팝 커버댄스는 전문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대단한 인기”라면서 “입장권을 팬클럽당 5장씩만 줄 수밖에 없었다.”며 아쉬워 했다. 특히 2PM은 이날 밤 8시쯤 방콕 도심에서 게릴라콘서트 열어 지나는 시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렀다. 2PM의 멤버들은 “열기를 보니 정말 열심히 활동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방콕 한·태교류센터 김건홍 팀장은 “3~4년 전 드라마 ‘대장금’을 시작으로 이곳에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면서 “한국인을 지칭하는 ‘까오리’는 최고 인기 단어가 됐다.”고 전했다. 김 팀장은 “한국에 대한 인식이 무척 좋아져 한국산 김은 가장 인기있는 간식”이라고 귀띔했다. ‘K팝 커버댄스 페스티벌’은 지난 6~8월 한국과 일본, 중국, 유럽, 미주 등지에서 참가 신청을 받아 UCC 동영상을 통해 1차 예선을 치렀다. 본선은 러시아(모스크바·6일), 브라질(상파울루·9일), 일본(도쿄·11일)와 미국(LA·11일)에서 진행됐고, 이날 방콕 행사에 이어 19일 유럽 본선인 스페인(마드리드) 행사를 끝으로 지역 본선을 마친다. 한국의 본선은 이달 말 서울에서 열린다. 한국방문의 해 위원회의 한경아 마케팅 본부장은 “이번 행사는 K팝과 같은 한국의 우수 콘텐츠를 활용한 한류 열풍을 세계인과 함께 즐기고 만들어가기 위해 기획됐다.”면서 “각 지역 본선을 통과한 팀들은 다음 달 3일 경주에서 열리는 결선에 출전한다.”고 밝혔다. 방콕(태국) 손진호 특파원 nasturu@seoul.co.kr
  • 中관광객들 “살 게 별로 없네요”

    최근 제주도에 1만명 규모의 중국 단체 관광객이 몰리면서 제주 현지의 소핑 상품에 대한 신규 개발과 투자를 요구하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중국 관광객들은 3박4일간 머물면서 400억원대 싹쓸이 쇼핑을 준비하고 있지만, 현실은 이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3일 처음 입국한 중국 ‘바오젠일용품유한공사’의 직원 ‘인센티브 여행단’은 오는 28일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1만 1200여명이 잇따라 제주를 찾는다. 이들 중국인 여행단은 15일 오전 세계자연유산인 성산일출봉 관광을 마친 뒤 오후부터 본격적인 쇼핑 일정에 들어갔다. 이들은 여행 경비를 모두 회사에서 부담하기 때문에 쇼핑 등 개인 구매력에서 일반 관광객보다 2~3배 높다는 게 제주 여행업계의 분석이다. 단 4일 동안에 400여억원 이상을 뿌릴 것으로 예상된다. 관광지 쇼핑점에 들른 중국인들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고 대장금 촬영지도 꼭 가보고 싶다.”며 이것저것 기념품과 상품을 골랐다. 젊은 남녀 직원이 대부분인 이들은 우선 한국산 화장품을 많이 집어들었다. 거의 대부분 국산 브랜드를 잘 알고 점원에게 구체적인 상품을 지적해 구매했다. 또 인삼제품과 전통차, 기념품 등을 많이 찾았다. 하지만 일부 중국인들은 기념품을 이리저리 만지다가 원산지가 ‘메이드 인 차이나’로 확인되자 실망하는 표정으로 물건을 내려놓았다. 사실 돌하르방 등 제주에서 판매 중인 상당수 기념품이 중국산인 것이다. 중국인들은 또 서울의 동대문 쇼핑몰처럼 의류 전문매장이나 유명 브랜드점을 찾았으나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닌 것을 알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인기 프로 덕 볼까… 상표출원 봇물

    인기 프로 덕 볼까… 상표출원 봇물

    TV 인기 프로그램이 상표로 이어진다는 공식이 또다시 입증됐다. ‘겨울연가’와 ‘대장금’, ‘꽃보다 남자’ 등 드라마에 집중됐던 작명이 ‘나는 가수다(나가수)’와 ‘1박 2일’과 같은 예능프로로 확대되고 있다. 6일 특허청에 따르면 7월말 현재 예능 프로그램 명칭을 딴 상표출원은 316건으로 집계됐다. 이중 77.2%인 244건이 2007년 이후 출원됐다. 출원 건수도 2007년 38건에서 2008년 45건, 2009년 46건, 지난해 49건으로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던 것이 올들어 7월까지 66건으로 급증했다. 프로그램은 ‘나가수’와 ‘나는’의 결합상표가 93건으로 가장 많았고 ‘1박 2일’(68건), ‘해피투게더’(58건), ‘무한도전’(52건) 등의 순이다. 올들어 ‘나가수’의 인기에 힘입어 ‘나는’ 상표 출원이 급증하고 있다. ‘나는 꽃이다’ ‘나는 여자다’ 등 36건이나 된다. ‘1박 2일’은 지난해 29건으로 최고를 기록한 뒤 올해는 12건이 출원됐다. 출원인도 다양하다. 프로그램 제작사와 방송사뿐 아니라 개인이나 중소기업들도 적극 출원했다. TV 인기 프로그램에 대한 상표 출원이 증가한 것은 제작사에서 다른 사람의 상표권 획득을 방지하기 위한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개인과 법인도 잘 알려진 프로그램 명칭을 본 떠, 쉽고 친근한 상표를 개발할 수 있다는 점도 한몫하고 있다. 특허청 서비스표심사과 전승권 심사관은 “예능프로그램 명칭 상표는 호칭과 외관, 특히 저작권 침해 여부를 따진다.”면서 “상표를 사용할 상품이나 서비스업에 대한 전문가 상담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김정일 “이영애 연기 참 잘해”

    김정일 “이영애 연기 참 잘해”

    김정일(왼쪽) 국방위원장이 최근 북한 영화 예술인들에게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보고 연기를 배우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대북단파라디오 ‘열린북한방송’은 지난달 31일 북한 영화연극대학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김 위원장이 “한국의 대장금이나 미국영화 람보를 보지 못하면 영화를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은 또 “대장금의 여자주인공이 연기를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잘한다. 또 람보의 남자 주인공이 정말로 용기 있는 전쟁 용사다.”라면서 “우리 영화 예술인들은 왜 그런 사람이 나오지 못하는가.”라고 질책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소식통은 “김정일이 ‘우리 영화 예술인들도 한국 드라마들을 보면서 배울 수 있도록 비공개로 보여 주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다만 김 위원장은 배우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고 배운 점을 발표하도록 시키면서도 한국에 대한 그 어떤 환상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되며 항상 비판적 견지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김 위원은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차 북한을 방문해 선물한 DVD 목록에 대장금의 주인공인 이영애(오른쪽) 의 출연작이 대거 포함돼 있어 흡족해했고, 사석에서 “잘 만든 것 같다.”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 바 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한국선 찾기 힘든 ‘할랄 음식점’ 현주소

    한국선 찾기 힘든 ‘할랄 음식점’ 현주소

     지난해 10월 경주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한 이슬람 국가 각료들은 상당한 불편을 겪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와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각료들의 의전을 맡았던 김은해 유세여행사 부장은 24일 “경주에 할랄(Halal) 음식점이 한 곳도 없어 각료들의 식사를 위해 부산까지 왕복하느라 고생해야 했다.“고 털어 놓았다. 김 부장은 “이들 나라에서도 한류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드라마 ‘대장금’에 등장하는 신선로, 구절판 등 궁중음식을 맛보고 싶어한다. 그런데 할랄 고기를 조리하는 한식당이 없어서 관광객들이 실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할랄 음식점 적어 무슬림 발길 돌려”  할랄은 아랍어로 ‘허용된’이란 뜻이다. 따라서 할랄 푸드(Halal Food)는 알라의 이름으로 엄격한 절차를 거쳐 도축된 소·염소·닭 등 육류를 비롯, 무슬림이 먹고 쓸 수 있도록 허용된 과일·야채·곡류·어류·어패류 등을 총칭한다. 할랄 고기란 이슬람 율법(꾸란)에 따라 소나 염소, 닭 등을 향해 “디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라고 외친 뒤 단칼에 정맥을 끊어 도축한 고기를 가리킨다. 할랄 푸드의 시장 규모는 6500억달러(약 703조원)로 세계 시장의 20% 수준이다. 네슬레·맥도널드 등이 할랄 제품을 내놓고 있고 한국이슬람교중앙회는 2009년 4월에 국희땅콩샌드, 콘칩, 빼빼로 등을 할랄 과자로 인정했다.  반면 하람 푸드(Haram Food)는 술과 마약처럼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 돼지·개·고양이 고기, 자연사했거나 잔인하게 도살된 짐승의 고기처럼 무슬림에게 금지된 음식을 말한다.  그런데 할랄 음식점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등에 10여곳 있을 뿐, 주요 관광지에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1994년에 관광특구로 지정된 제주도에도 한 곳 뿐이다. 따라서 최근 중동과 동남아시아에서 일고 있는 한류 열풍을 한국 방문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할랄 음식점을 늘리는 일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6일 오후 7시 30분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를 통해 방영되는 ‘TV 쏙 서울신문‘ 취재진이 지난 17일 국내 이슬람의 본산인 한국이슬람교중앙회가 있는 한남동 일대를 돌아봤다. 식료품점에서 만난 파키스탄인 압둘 자발(35)씨는 “할랄 음식을 믿고 살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특히 고기는 구하기 힘들다. 그래서 여기처럼 믿을 수 있는 곳에서만 구입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는 할랄 음식을 인증, 관리하는 곳은 중앙회 한 곳뿐이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30년 넘게 중앙회 1층의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는 알리 킴(70·한국이름 김철)씨는 “우리나라에는 할랄 고기를 가공하는 공장이 없다. 특히 시장에 유통되는 닭은 가짜 할랄 고기여서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 가게에서 도축하는 날엔 선교사가 입회한 가운데 꼼꼼이 검사한다. 때문에 손님들이 믿고 사지만, 혼자서 하기엔 너무 힘들다.”라고 말했다.파키스탄인 칸 무샤라프(38)씨는 “신성한 사원 아래에 있는 정육점 역시 신성한 곳이라 믿는다. 그래서 여기서 구입한다.”고 말했다.  한남동 일대의 할랄 음식점은 태양이 하늘에 있는 동안 금식하는 라마단 기간이라 점심 무렵 텅 비어 있다가 해가 진 뒤에야 손님들로 북적였다. 무이츠(24·말레이시아)씨는 “오늘 첫 끼 식사인데 정말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공연 참가차 들렀다는 파미르(18·터키)씨는 “할랄 고기로 만든 터키 음식이 먹고 싶어 찾았는데 믿고 먹을 수 있어 좋았다.”라고 말했다. ●할랄 등 무슬림 특성에 맞춘 전략 절실  올해는 한국방문의 해이고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한국방문의해 위원회가 설치돼 있지만 지난해 세계 인구 69억명의 23.4%를 차지하는 무슬림 인구 13억명 가운데 한해에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우리나라를 찾는지 통계조차 없다.  문화부는 웹페이지와 책자를 통해 서울의 할랄 음식점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김성은 국제관광과 사무관은 “출입국 때 국가별 인원을 확인하지만, 종교별로 구분하지 않는다. 때문에 정확한 무슬림 관광객 파악이 어렵다.”며 “과거에 한국관광공사에서 할랄 도시락을 판매한 적이 있는데 음식이 식어 판매가 부진했다. 이슬람 관광객들은 그만큼 음식에 민감하다. 따라서 체계적인 연구와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은 비영리기구 (NPO)인 일본할랄협회(Japan Halal Association)에서 할랄 식품 인증을 하고 있다. 2009년 10월부터 교토 대학의 구내식당에서 무슬림 학생에게 할랄 음식을 제공하는 등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가 일고 있다.  성민수PD globalsms@seoul.co.kr  김인규 인턴 미국 인디애나대학 경영학부  
  • 역사드라마는 무죄?

    역사드라마는 무죄?

    동북아역사재단이 22일 오후 3시 서울 미근동 재단 회의실에서 ‘사극 재조명’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연다. PD연합회와 공동 개최라는 점이 색다르다. 역사 드라마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두고 말들이 많은 가운데 양측이 직접 무릎을 맞대고 앉는 셈이다. 재단 측 연구위원들은 물론 ‘주몽’을 연출한 이주환 MBC PD와 ‘대장금’ 등 숱한 히트작을 만들어온 이병훈 PD가 토론자로 참가한다. 이런 취지로 볼 때 주창훈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가 발표하는 주제 ‘역사 드라마의 세 가지 상상력 : 강한 민족에서 탈민족으로’와 토론자로 나서는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의 토론문 ‘사극 전성시대는 역사학의 위기인가, 기회인가’가 눈길을 끈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주요 테마로 제시 주 교수는 주제 발표문을 통해 방송 사극이 ‘기록적 역사서술→개연적 역사서술→상상적 역사서술→허구적 역사서술’ 4단계로 발전해 왔다고 지적했다. ‘조선 왕조 500년’ 같은 초기 역사 드라마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기록 내용에 비교적 충실하려고 했다면, ‘용의 눈물’, ‘태조 왕건’ 같은 개연적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 위에 강력한 남성 영웅의 이미지를 덧대는 방식이었다. 이어 등장한 ‘허준’, ‘여인천하’, ‘대장금’, ‘이산’ 같은 드라마는 상상적 서술의 비중이 더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들은 대개 의사, 후궁, 궁녀처럼 정사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기 어려운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사료의 빈곤함을 고증에 기반한 상상력으로 메워 넣은 것이다. 주 교수가 이 부분을 “강한 민족주의에서 약한 민족주의로” 넘어갔다고 정리한 이유다. 허구적 역사 서술은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대망’, ‘다모’, ‘추노’, ‘짝패’ 같은 드라마는 역사를 배경으로 내세웠을 뿐, 거의 모든 스토리가 창작이다. 상상적 역사 서술이 중인이나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이들 드라마는 아예 기록 자체를 찾기 어려운 노비나 왈짜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들은 우리 민족은 하나라고 하지 않고, 민족 안에도 다양한 이해 관계와 갈등이 있었다고 외친다. 주 교수는 이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민족보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주요 테마로 제시”하기 때문에 “가능태(Variation)로서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역사 드라마의 효용성이 극대화된다.”는 맥락에서다. ●“사실 여부보다 역사관에 더 관심을” 이주환 PD도 비슷한 맥락 위에 있다. 이 PD는 “정보전달과 대리만족의 측면에서 볼 때 역사 드라마는 대리만족을 위한 판타지를 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서 “대신 국적 불명의 오락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역사관에 많은 신경을 쓰는 만큼 역사 드라마에 대한 비판이 특정 부분의 사실 왜곡보다 제작진들의 역사관, 드라마가 표방하는 주제에 집중됐으면 좋겠다.”고 주장한다. 이런 제작진의 조심스러운 입장을 더 크게 치고 나가는 김 교수의 주장도 흥미롭다. 그는 “사실만이 역사라는 것 자체가 근대역사학의 한계”라고 비판한다. 이어 “인간은 현실과 꿈의 두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 사실을 재현하는 역사뿐 아니라 ‘꿈꾸는 역사’를 욕망한다.”면서 “사극을 우리 시대의 ‘꿈꾸는 역사’로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극의 인기란, 결국 역사가들이 사극처럼 꿈꿀 만한 역사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얘기다. 다시 말해 역사학이란 학문 자체가 다양한 상상력을 북돋우기보다는 문헌 해석과 기존 이론의 무비판적 답습에만 매몰됐던 것은 아니냐는 비판이다. ●“판타지 사극 더 발전시켜야” 그래서 김 교수는 한류를 계기로 사극의 변신이 더 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국민을 상대로 한 사극에서는 강한 민족주의가 들어가겠지만, 동아시아나 더 넓은 세계로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인간의 보편성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조정돼야 한다는 조언이다. 아예 ‘판타지 사극’을 더 발전시키자는 제안도 내놓았다. 김 교수는 “소설가, 극작가, PD 모두가 사관인 시대에 역사학이 사느냐 죽느냐는 역사학자들이 이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결론지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이집트 모래바람보다 센 ‘한류바람’

    이집트 모래바람보다 센 ‘한류바람’

    최근 이집트에서도 한류 바람이 불면서 자연스레 한국어를 배우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심에 카이로 아인샴스대학교 한국어과가 자리잡고 있다. 대학 내 6층 건물 맨 위층에 자리잡은 한국어과 사무실에는 히잡을 쓴 여학생 10여명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한국 드라마와 영화, 가요를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학생들이다. 한국어과를 지원한 것도 그런 관심이 한몫을 했다. 대학 재정이 어려운 탓에 학교 지원 없이 한국 정부와 기업 후원만으로 학과를 운영해야 하지만 학생들의 ‘한국사랑’은 뜨거웠다. 김현주 학과장에 따르면 한국어과는 2005년 9월에 처음 개설됐다. 2009년에는 첫 졸업생을 배출했고 대학원도 문을 열었다. 오세종 교수에 따르면 아인샴스대 한국어과와 함께 한국어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한국대사관 한국어교육원에서 시행하는 한국어 강좌도 1999년 시작 이후 지난해에는 150명 모집에 900명이나 지원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우수한 학생들이 한국어과에 몰리고 일반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하는 데는 한국 대중문화가 빠른 속도로 이집트에 알려진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 드라마를 직접 찾아서 보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게하드 아바스는 “이집트 드라마와 달리 한국 드라마는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지루한 줄 모른다.”면서 “저녁 6시부터 시작해 저녁도 굶고 밤 10시 넘어서까지 한국 드라마를 본 적도 있다.”고 말했다. 누란 무함마드는 한술 더 떠 “이집트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건 시간낭비”라면서 “한국 드라마나 노래를 들으면 한국어 실력도 늘고 문화도 익힐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야 아흐마드는 제일 기억에 남는 드라마가 무엇이냐고 묻자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힘들다.”고 하더니 곧 ‘내 머릿속 지우개’ ‘가을동화’ ‘겨울연가’ ‘대장금’ ‘꽃보다 남자’ 등을 줄줄 꿰었다. 김현주 학과장은 “한국국제협력단 등을 통해 받는 지원이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학과 규모가 커지면서 지원확대가 절실하다.”면서 “컴퓨터나 복사기처럼 노후 장비를 고치고 전문교재를 확충하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밝혔다. 글 사진 카이로 강국진 순회특파원 betulo@seoul.co.kr
  • 말은 안 통해도 ‘효심’은 통해요…‘서울시 효행상’ 받은 中출신 이주여성 왕혜연씨

    말은 안 통해도 ‘효심’은 통해요…‘서울시 효행상’ 받은 中출신 이주여성 왕혜연씨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뒤 5년 동안 밤낮으로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들며 시아주버니의 병원비까지 떠맡은 중국 출신의 결혼이주 여성.’ 억척스러운 맏며느리 모습이 떠오르지만, 6일 오후 서울상공회의소에서 만난 왕혜연(30)씨는 불그스레한 볼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소녀 같았다. 조금 어눌한 한국말에 중국어를 간간이 섞어 가며 이야기를 늘어 놓는 왕씨는 마치 친구와 수다를 떠는 듯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시아버지를 돌보며 꿋꿋이 살아 가는 왕씨는 서울시가 어버이날을 맞아 시상한 효행자 명단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왕씨의 하루는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쁘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상을 차리고 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다음부터 더 바쁘다. 8년째 뇌졸중을 앓고 있는 시아버지의 병수발이 왕씨의 몫이기 때문이다. 몸 오른쪽이 마비돼 거동을 거의 못하는 시아버지를 화장실에 모셔다 드리고, 필요한 물건들을 갖다 드리다 보면 어느새 점심 때가 된다. 친딸이라도 쉽지 않은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 시아버지 점심상을 차리고 나면 석관동 집 근처에 있는 사회복지관으로 향한다. 복지관에 마련된 커피숍은 왕씨의 일터다. 하루 6~7시간 커피숍에서 일하면서 매달 40여만원씩 모아 당뇨병으로 입원한 시아주버니의 병원비에 보탠다. 건강상의 문제로 택시운전 일을 잠시 쉬고 있는 남편 박웅규(44)씨는 아내 왕씨에게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란다. 왕씨는 결혼 전까지 이런 현실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학교 2학년이던 2005년 가을 조선족 교수가 “한국 남자는 다 좋다.”며 박씨를 중국으로 데려와 소개시켜 줬다. 드라마 ‘대장금’을 보며 한국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던 왕씨는 박씨의 선량한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박씨도 때 묻지 않은 왕씨의 미소에 반했다. 그래서 그만 ‘거짓말’을 해 버렸다. “한국에서 혼자 살고, 아버지가 계시긴 하지만 시골에 따로 사십니다.” 왕씨는 이듬해 2월 한국으로 건너와 박씨와 결혼했다. 하지만 왕씨가 한국에서 마주한 것은 몸이 편찮은 시아버지와 아주버니, 비좁은 반지하집이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던 왕씨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러나 왕씨는 돌아서지 않았다. 현실을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그때 전 속았어요.”라면서 남편 박씨의 팔을 꼬집다가 이내 중국어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느님은 공평하세요. 비록 저에게 어려운 살림을 주셨지만, 착한 남편을 주셔서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요.” 한국말을 모른 채 무작정 한국에 오는 바람에 결혼 초기 답답한 장벽도 많았다. 박씨는 행여나 새내기 왕씨가 길이라도 잃을까 봐 8개월 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첫아이를 낳고 나서는 집에만 머물렀다. 첫아이가 5개월쯤 돼서 시민단체 푸른시민연대로 한국어를 배우러 다녔지만, 이내 둘째 아이를 임신해 다시 집에 머물게 됐다.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집에만 있다 보니 우울증을 얻었다. 악몽으로 잠을 설치기도 했다. 하지만 왕씨는 그런 시간도 소중하게 기억한다. “집에서 TV로 드라마를 열심히 보다 보니 한국말이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어 기초를 쌓은 덕에 왕씨는 이내 집 근처 사회복지관에서 어렵지 않게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다. 복지관에서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 일을 배워 어엿한 일자리도 얻었다. 왕씨는 또 성북외국인 근로자센터의 홍보대사로 일하며 이곳을 찾는 이주 여성들을 상담한다. 왕씨는 “주변 이주 여성들을 보면 나보다 힘들게 사는 이들이 많다.”면서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면 한국 여성들이 하는 것을 이주 여성들도 다 할 수 있다. 한국에 왔으니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증조부 고종의 갑옷·투구 6월 日에 반환소송… 반드시 찾아오겠다”

    “증조부 고종의 갑옷·투구 6월 日에 반환소송… 반드시 찾아오겠다”

    “법정 소송을 통해 일본에 있는 증조할아버지(고종)의 투구와 갑옷을 반드시 찾아올 겁니다.” 대한제국의 상징적 적통을 이은 황사손(皇嗣孫·황실의 대를 잇는 후손) 이원(49)씨는 29일 조선왕실의궤 반환 소식이 전해지자 “다음 환수 목표는 왕실의 보물이 돼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총재이기도 한 그는 유행을 좇는 케이블TV 프로듀서(피디) 출신으로 2005년 황사손이 된 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6년째 전통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옛 문화 살리기에 노력해 왔다는 이씨는 “조선왕실의궤가 일본에서 돌아오면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고종의 유품을 돌려받기 위한 소송을 이르면 오는 6월 제기하겠다.”며 의지를 나타냈다. 영국 왕실의 결혼으로 세계가 떠들썩했던 이날 창덕궁이 내려다보이는 종약원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2005년 황사손이 된 뒤 6년간 어떤 일을 하고 지냈나. -제사를 계속 지냈다. 조선왕릉 40기의 제사와 황실의 5대 제향(조경단대제·종묘대제·사직대제·건원릉기신친향례·환구대제)에서 초헌관(제사 지낼 때 첫 잔을 올리는 사람)을 맡았다. 1년에 120여회 정도 된다. 600년 넘게 한 왕조의 후손이 애초 양식을 유지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그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말살된 대한제국 때까지의 문화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문화를 이미지로 복원해 내고 싶다. →그동안 성과가 있었나. -대표적인 것이 2008년 환구대제를 복원한 일이다. 일본이 침략 후 지금의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환구단(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을 없애고 군 장교들이 머무는 철도호텔을 지었다. 일본이 박아 놓은 말뚝을 빼는 것처럼 우선 이 문화를 복원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고증을 거쳐 2008년 제례를 되살렸다. 그러나 원래 터에 건물이 들어선 탓에 환구단 시설을 복원할 수는 없었고, 서울광장에 환구단을 세우려고 했는데 서울시가 긍정적으로 검토하다가도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오해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그렇다. 특히 몇 해 전 언론에 ‘황실문화원’을 설립하겠다고 얘기했는데 반발이 컸다. 문화원 이상의 정치적 세력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 종약원 회원이 500만명이다 보니 마음먹고 뭉치면 (정치 세력을)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울 수 있어 안 한다. 순수한 의미로 문화를 찾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황실의 무능함 탓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이유로 후손들에게 냉소적인 국민도 많다. -대한제국은 대비를 못 해서 망한 나라가 맞다. 그럼 무엇 때문에 망했는지 정확히 역사를 밝혀서 후대가 그 사실을 토대로 50년, 100년을 만들어 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제국 역사는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왜 지금 대한제국의 문화·역사를 복원하고 기억해야 하나. -현재 상황이 나라를 빼앗겼던 100년 전과 닮아서다. 우리는 항상 주변 국가가 부강할 때 침략당했다. 이제 문화로 당할 수 있다. 성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봐라. (대한제국의 역사가) 아픔의 역사이기 때문에 더 기억한다. 왜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는지 다시 펼쳐놓고 알아봐야 한다. →정부도 문화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부족한 점을 느끼나. -그렇다. 예컨대 문화재청은 ‘살아 있는 궁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궁이 되려면 그 안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외국인과 학생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면 얼마나 생생하겠나. “내 할아버지가 나라를 제대로 못 지켜서 아들인 영친왕이 일본에 끌려 가셨다. 그분이 사셨을 때 왕자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얘기를 직접 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내용 등을 담은 ‘낙선재 활용 방안’을 5년 전부터 문화재청과 청와대에 계속 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문화재 위원들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황사손이 들어와서 궁을 활용하느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재산인데…” 하는 논리를 폈다. →피디 경험을 살려도 흥미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자료 속 역사를 드라마로도 직접 제작하고 다큐멘터리로도 만들 것이다. 아주 고급스러운 왕실 문화와 의복, 관습, 혼례, 제례 등 진짜 역사를 담아 만들기 위해 준비해 왔다. 이것을 해외로 수출하면 ‘대장금’처럼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것이다. 대한제국을 들여다보면 이야깃거리가 엄청나게 많다. 지난해 (고종의 고명딸의 삶을 다룬) 소설 ‘덕혜옹주’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왜 대한민국 국민은 여기에 감정이입을 할까. 우리도 자랑스러워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일본에 있던 조선왕실의궤가 국내로 돌아오게 됐는데, 문화재 반환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난해 10월쯤 혜문 스님이 찾아와 놀라운 얘기를 했다. 증조부인 고종의 투구와 갑옷 등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누군가 황실에서 훔쳐 갔거나 도굴당한 물품이 (문화재 수집가인)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넘어갔고 이를 물려받은 오구라의 아들이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얘기였다. 사무라이 문화가 남아 있는 일본이 제후국을 침략해 전리품으로 빼앗는 대표적인 것이 (그 나라 왕의) 투구와 갑옷이다. 그런 의미로 도쿄박물관에 보관된 것이다. 치욕적인 일이다. 나에겐 할아버지 얘기였기에 너무 화가 났다(침묵). 한 개인이나 스님 한분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문화재청이 나서면 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혜문 스님은 문화재청 관계자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다고 하더라. 그러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스님께 물었더니 문화재 반환 운동을 하라면서 “나라가 안 움직이는데 직계손이니까 소송을 해 보라.”고 권했다. 할아버지의 투구와 갑옷을 찾아와서 환구단에 놓고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다. →소송도 할 계획인가. -물론이다. (다음 달로 예상되는) 조선왕실의궤 환수 이후 도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려고 준비 중이다. 애초 3월 중순에 일본에 가 도쿄박물관장을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다. 어려움을 겪는 국민에게 가서 “내 할아버지의 투구와 갑옷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계손이 소송을 한다면 문제화·이슈화될 것 같다. 그 이후 혜문 스님이 본인이 쌓아온 노하우를 토대로 분위기를 일으킨다면 찾아올 수 있을 듯싶다. 일본이 바로 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못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 국민이 어떻게 느낄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조선왕실의궤가 반환된다. -왕실의궤가 돌아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궤 안의 그림을 밖으로 꺼내는 것이다. 자료에서 어떤 가치를 끄집어내 지금 시대에 재현해 내느냐 하는 점을 고민해야 한다. 의궤에는 모든 왕실의 행사가 기록돼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안에 들어 있는 행사는 매우 화려하고 세밀한 문화적 볼거리요, 예술이다. 궁에서 이런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복원해야 한다. 문화재를 가지고 와서 다시 책장이나 박물관에만 넣어 둬서는 안 된다. 글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30일 오전 7시와 오후 7시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의 ‘TV 쏙 서울신문’ 방영 ■ 이원씨는 누구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9남 이충길씨의 맏아들이다. 부모가 말하지 않은 탓에 어린 시절 출생에 대해 모르고 자랐다. 이름도 왕실 이름인 ‘원’ 대신 ‘상협’을 썼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 아버지가 이씨를 데리고 창덕궁 낙선재를 찾아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에게 인사를 시켰고 이 자리에서 집안사에 대해 처음 들었다. 미국 뉴욕기술대(NYIT)에서 방송학을 전공한 뒤 유명 케이블방송사인 HBO에서 프로듀서(피디)로 일하다가 6년 만에 귀국했다. 광고회사인 금강기획에서 5년간 일했고, 케이블 채널인 뷰티TV 설립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케이블 채널인 현대방송 피디와 현대홈쇼핑 본부장 등을 지내며 직장인으로 나름의 꿈을 키워 갔다. 황실의 상징적 적통을 이을 수 있다고 직감한 것은 2002년부터다. 당시 한 출판 기념회에서 삼촌인 이구 황태손을 만났는데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적 감각을 지닌 이씨에게 호감을 보였다고 한다. 이씨는 2005년 7월 후사가 없었던 황태손이 숨을 거두면서 자신을 양자로 들여 법통을 잇도록 부탁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삶은 이때부터 180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이영애 “어? 대장금 김치초상권 동의 안했는데”…손해배상 소송 제기

    이영애 “어? 대장금 김치초상권 동의 안했는데”…손해배상 소송 제기

     배우 이영애측이 김치제조 업체인 ‘일청명가’에서 이영애를 내세운 ’대장금 김치’를 출시한다고 밝힌 것과 관련,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지난 26일 가수 위일청이 대표인 김치업체 ‘일청명가(一淸名家)’는 “대장금과 대장금의 한류스타 이영애를 내세운 김치 ‘애(愛)’가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세계시장에서 출시될 예정”이라고 밝혔었다. 이 업체는 최근 이영애측과 초상권 사용에 관한 계약을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영애 측은 금시초문이란 얘기다. 이영애 소속사는 27일 법무법인 영진을 통해 “이영애는 ‘대장금‘ 이미지와 관련, 이 업체와 일부 품목의 초상권 사용 계약을 했지만 계약 조건에는 반드시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고 제품의 종류, 제목(상표명, 제품명), 규격, 구성에 대해 사전 협의를 거치도록 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김치 출시와 관련해 어떠한 협의도 없었고,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 알았다. 이 보도로 인해 이영애는 그동안 최고 모델 및 배우로 지켜온 이미지에 막대한 타격과 피해를 입게 됐다.”고 설명했다.  소속사는 “이 업체를 상대로 계약 위반을 이유로 계약해제 예정 통보 및 손해배상 청구를 할 것”이라면서 “언론 보도로 인해 투자자 등 선의의 제3자가 ‘이영애 김치 출시‘와 관련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도자료를 배포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대장금 이영애 내세운 김치 출시, 세계시장 공략

    대장금 이영애 내세운 김치 출시, 세계시장 공략

     드라마 ‘대장금’의 이영애를 모델로 한 김치가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과 아시아 시장을 타깃으로 출시된다.  중견가수 위일청이 운영 중인 김치업체 ‘일청명가(一淸名家)’는 26일 “대장금과 대장금의 한류스타 이영애를 내세운 김치 ‘애(愛)’가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세계시장에서 출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업체는 최근 이영애측과 초상권 사용에 관한 계약을 했다.  이 업체가 이영애를 브랜드로 내세운 이유는 “드라마 대장금이 87개국에 방영돼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최고의 한류코드 중의 하나이고, 대장금에서의 궁중 요리사라는 이미지가 한국 전통식품인 김치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치 ‘애(愛)’는 우선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판매되고 이후 아시아와 유럽 등으로 해외수출을 늘려나가기로 했다.  한편 이영애는 최근 쌍둥이 남매를 출산했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문화마당] 외규장각 도서의 대여와 정신의 반환/신동호 시인

    [문화마당] 외규장각 도서의 대여와 정신의 반환/신동호 시인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가 창고에 던져졌을 때 조선의 왕운도 기울고 있었다. 단지 외규장각이 불타고 도서가 침탈당한 건 아니다. 그때 ‘홍익인간‘이 불타고 예(禮)가 바다를 건너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 국립도서관 창고는 조선의 예를 담기에 비좁고 어두웠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갈 날을 기다렸을까. 500년을 켜켜이 쌓은 나라의 법도와 조선성리학의 정신은 넓고도 견고했으니 갑갑했으리라. 왕은 의궤를 읽고 또 읽으며 백성을 생각하고 예를 다하여야 했다. 왕이 그 지독한 법도를 따를 때 백성들은 비로소 스스로를 반추할 거울이 생기는 법이다. 잊었으리라. 남대문은 불탔다. 2008년이었다. 나라 전체가 화(火)에 휩싸였다. 예고된 일이었다. 가속이 붙은 물질만능을 제어할 브레이크 장치가 부족했다. 투기와 개발이 미화되었고, 미덕과 가난은 천대받았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약게 살라.’고 가르쳤다. 그저 생활전선에서 싸워야 했던 아버지는 대화를 잃었고 가정교육에 소홀했다.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지도자가 선거에 당선되었다. 부덕이 부덕을 낳았다. 모두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선(善)이 있었지만 행할 기회가 없었다. 양보는 거듭될수록 무능으로 낙인찍혔다. 끼어드는 차량을 향해 욕을 내뱉는 자신을 발견하고도 어느새 무감각했다. 윤리를 반추할 거울이 없었으니 국보1호는 불탔다. 우리 현대사에 화를 도닥였던 시절이 없었던 건 아니다. 민주화에 대한 헌신은 권위주의와 부딪치며 화를 다스렸다. 정치가 행하지 못한 윤리를 재야와 민간, 종교에서 대신했다. 장준하·문익환·김수환 등 지금은 잊혀 가는 이름들, 그들로 인해 도덕이 목숨을 부지했다. 가혹한 희생은 화를 잠재우는 과정이었다. 4·19의 김주열, 청계천의 전태일, 5·18의 광주시민 등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개개인 마음속에 불타던 화가 진화됐다. 예측할 수 없는, 이유 없는, 혹은 잔인한 행동이 도덕과 정의 앞에 무릎 꿇었던 시절이었다. 미덕이 칭송받고 양보와 희생에 예를 다하던 시절이 우리에게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서양이 동양을 배우려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자본주의조차 도덕과 정의, 공익을 끌어들인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전체의 복리를 증진시킨다.’고 말한 애덤 스미스, 그가 윤리학자였다는 것을 새삼 들춰낸다. 그가 주장한 분업과 협업, 공정한 교환과 이윤이 이야기될 때 동양의 도덕과 정의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서양에서 실현되는 듯하다. 우리의 예가 향교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 저 멀리 프랑스에서 울고 있는 의궤와 논어집주(주희가 엮은 논어의 주석들)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인간에 대한, 사회에 대한, 역사에 대한, 아주 작은 일들과 초라해 보이는 것들과 소수인 것들에 대한 예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탈한 외규장각 도서 297권 가운데 1차분 75권이 돌아왔다. 145년 만이다. 정확히 말하면 대여되었다. 여전히 우리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으며, 연구를 위한 대여와 전시도 프랑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도서에 담긴 정신까지 대여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정부는 아직 돌려받아야 할 것이 많다는 이유로 환영 행사를 자제하고 있으나 문화재 환수가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은 단지 국가유물의 소유 이전 문제가 아니다. 조선이 꿈꿔온 예의 나라를 되찾는 일이다. 조선은 끊임없이 기록했고 기록을 통해 후대가 그 이상을 되새기길 원했다. 대장금도, 다모도, 조선명탐정도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만났다. 의궤에 소상히 새겨진 왕실과 국가의 예를 통해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할 것들은 제국주의 침탈로 피폐되었던 세계사의 반성이며 다가올 시대의 공정성이다. 또 개인에게는 선을, 국가는 민간에 신세 졌던 윤리를 비로소 실천할 계기점이다. 이것이 반환받아야 할 우리의 정신이며 오히려 프랑스에 대여해 줘야 할 것이 아닌가.
  • [관광객 1000만달성 릴레이 제언(2)] “한국, 어디까지 가 봤니?” 말할 수 있어야/최영수 롯데면세점 대표이사

    [관광객 1000만달성 릴레이 제언(2)] “한국, 어디까지 가 봤니?” 말할 수 있어야/최영수 롯데면세점 대표이사

    로마를 지금의 세계적인 여행지로 만든 일등공신은 영화 ‘로마의 휴일’이다. 특히, 등진 채 동전을 던지면 다시 로마를 찾게 된다는 ‘트레비 분수’와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입 안에 손을 집어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진실의 입’,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자유를 흠뻑 만끽했던 ‘스페인 광장’은 단숨에 로마 최고의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이 몰리는 탓이다. 순전히 ‘이야기의 힘’만으로 전 세계 관광객을 유인하는 사례들은 이외에도 많다. 높은 명성과는 달리 실제 가보면 보잘것없는 모습에 실망한다고 해서 ‘유럽 3대 썰렁 명소’로도 불리는 벨기에의 ‘오줌 누는 소년상’과 덴마크의 ‘인어공주상’,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이 대표적이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세계에 내세울 만한 한국적 이미지의 문화 상품이 없는 ‘문화의 위기’ 상황이 한국이 당면한 가장 큰 위기”라고 진단한 바 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계인에게 ‘한국’ 하면 연상되는 매력적인 문화 아이템을 가지고 있지 못한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한국에 2000년대부터 해외 여행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급기야 올해는 외래 관광객 수가 10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겨울연가’와 ‘대장금’이라는 두 편의 탁월한 드라마가 불씨가 돼 아시아 전역을 강타한 ‘한류 열풍’ 덕이다. 한류 스타와의 팬 미팅이 결합한 여행 프로그램에 매회 수백명의 외국인이 몰리고, 한류 드라마의 촬영지가 한류 팬의 여행 성지로 부상한 지 오래다. 한류가 식었다고 폄하하기는 아직 이르다. 선배들이 일군 한류의 열기가 식지 않고 제2의 한류로 도약하려면 우리 스스로 한류 열풍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변화에 맞게 관광 문화상품으로 확대 재생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한류의 불꽃을 피워 한국 방문 러시로 이끌어 낸다면 1000만명 외래 관광객 목표가 올해 안에 조기 달성되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이야기가 살아 있는 새로운 한류 관광 콘텐츠를 개발한다는 목표 아래 롯데면세점은 지난 2009년 잠실 롯데월드와 소공동 롯데타운 내에 ‘스타에비뉴’란 복합한류체험공간을 오픈했다. ‘스타에비뉴 롯데월드’는 한류 스타들을 활용한 다양한 멀티미디어 체험거리를 제공하는데, 1만원의 입장료에도 한해 평균 1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특히 ‘위싱스타’의 경우 별 속의 손바닥 모형 위에 손을 올리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관광객마다 소원을 빌려고 긴 줄을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스토리가 담긴 한류 관광문화 상품 개발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21세기는 ‘한류’나 ‘이야기’와 같은 소프트 파워가 지배하는 시대다. ‘미국, 어디까지 가 봤니?’라는 국내 항공사의 광고 카피처럼 ‘한국, 어디까지 가 봤니?’라는 광고 카피가 외국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지혜와 마음을 모으는 것이 외래 관광객 1000만명 시대를 맞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 [열린세상] 중동의 한류열풍과 이슬람포비아/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 교수

    [열린세상] 중동의 한류열풍과 이슬람포비아/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 교수

    이번 중동 출장에서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최고의 대접을 받은 적이 많았다. 한류 열풍 때문이다. 그들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을 좋아한다.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식, 태권도, 축구, 게임, 한국말은 기본이고 한국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대학생들의 숫자도 적지 않다. 이집트의 ‘겨울연가’ 열풍도 대단했지만, 이란에서 방영된 ‘대장금’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6개월 평균 시청률 90%대를 기록했다고 한다. 물론 정확도에서야 오차가 있겠지만 실제로 대장금을 방영하던 날 밤, 테헤란 시내의 풍경을 잊을 수 없다. 거의 모든 식당과 카페, 번화가 가전제품 전시관 앞에는 오로지 대장금을 보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았다. 길거리에는 거의 자동차도 다니지 않았다. 이러한 한류 열풍 때문에 거의 대부분 중동 국가에서 가전, 정보기술(IT), 자동차 부문에서 한국제품이 단연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지독한 한국 사랑이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석유와 천연가스 같은 에너지의 90%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주고, 한국기업이 해외에서 건설·플랜트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약 7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한국상품만 골라 사준다. 월드컵 축구 같은 국제대회에서 한국과 유럽팀이 맞붙으면 그들은 당연히 한국팀을 응원한다. 중동의 많은 아랍인들은 1970~80년대 연인원 100만명이 넘는 한국인 근로자들이 흘린 고귀한 땀방울을 신화처럼 기억한다. 그들에게 한국인은 ‘성실과 근면’의 화신이다. 그 결과 뜨거운 열사의 땅에서 24시간 3교대하면서 일구어 놓은 사막의 고속도로를 한국제 자동차가 달리고, 우리 기업이 건설해 놓은 관공서에서 근무하고, 한국형 아파트에서 한국제 텔레비전 앞에서 가족이 모여 앉아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 사랑을 키워간다. 그때는 가난해서 외화를 벌러 왔던 한국인들이 이제는 자신들보다 훨씬 앞서 있는 현실에 기분 좋아하는 것이다. 자신들을 지배했던 서구의 앞선 발전은 따라가기 싫지만, 고유한 전통과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첨단기술 획득과 경제 발전에 성공한 한국은 적어도 중동사람들에게는 닮고 싶은 진정한 롤 모델이다. 중동에 출장 중일 때, 국내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수쿠크(이슬람 채권)법 논쟁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테러자금과 관련되고 국내 이슬람 포교의 자금줄이 된다는 논리를 지켜보면서 참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수쿠크의 애매한 역기능이 크게 문제되고 부각되어야 할까. 왜 종교가 공공의 영역에 자주 침범하게 될까. 참 생각이 많았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무슬림 숫자는 10만 정도, 전체인구의 0.2% 수준인데도 가까운 미래에 한국이 이슬람 국가가 되리라는 논리의 비약도 수긍하기 힘들다. 그들이 결혼한다 해도 국내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일부다처를 할 수도 없고, 한국에서 살려면 아이를 5~6명씩 낳아 기르기도 현실적으로 힘들 것이다. 서구에서 바라보는 전형적인 이슬람포비아(이슬람 혐오증) 현상으로 보인다. 중동·아랍 사람들은 한국을 좋아해서 코리아 브랜드를 찾고, 한국말과 문화를 배우려 하는데 왜 우리는 그들을 버리고 가려 하는가? 이제는 지나친 편견보다는 우리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친구로 받아들이자. 특히 이슬람을 종교적 문제로만 보면 불편한 이념체계로 보일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일신교는 ‘선과 악’의 구도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 가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존하기가 쉽지 않다. 이슬람의 문제를 종교적으로 풀지 말고 같고 다름의 문제인 문화로 접근하면 어떨까 싶다. 지구촌 미래를 함께 짊어질, 나와 다른 가치·생각을 가진 따뜻한 이웃으로 무슬림들을 바라 볼 수는 없을까? 우리가 온통 색안경을 끼고 이슬람세계를 버리고 간다면, 언제까지 그들이 우리를 기다려주고 사랑해 줄지 장담하기 어렵다. 14억 인구, 57개 국가를 가진 이슬람 세계와 윈윈하는 협력적 동반자로 끌어안아야 비로소 진정한 글로벌화로 가는 길이 아닐까.
  • [문화계 블로그] 한류 중심 ‘일본서 태국으로’

    [문화계 블로그] 한류 중심 ‘일본서 태국으로’

    태국이 한류의 새로운 본산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류의 원조였던 일본이 대지진 여파로 주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부터 태국은 공연 시설이 잘 갖춰지고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해 해외 팝스타들의 쇼케이스나 콘서트가 자주 개최됐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중심이면서 대표적인 관광국가인 태국은 일본, 타이완, 싱가포르 등 아시아 한류 팬들이 모이는 데 편리하다. 싱가포르 못지않은 경제력을 갖춘 태국은 한국의 가요나 드라마, 공연을 가장 빠르게 소비하고 인접 아시아 국가로 파급시키는 힘도 크다. 여기에는 다민족 국가로서 자국의 음악보다 해외 음악에 개방적인 문화도 한몫했다. 일본의 한류가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촉발된 것처럼 태국 내 한류는 2005년 KBS 드라마 ‘풀하우스’와 2006년 MBC 드라마 ‘대장금’ 등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급속하게 확산됐다. 현재도 ‘개인의 취향’ 등 일주일에 7~8편의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드라마의 인기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가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2006년 비가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태국에서 대형 콘서트를 열면서 K-팝이 본격적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다. 태국에서 한국 가수들의 인기는 국내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태국 출신의 닉쿤이 속한 2PM을 비롯해 슈퍼주니어와 JYJ, 포미닛, 빅뱅,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등 국내 아이돌 그룹이 현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3일 태국 방콕 시내의 한 대형 쇼핑몰에는 K-팝 가수들의 앨범 코너가 따로 한쪽에 진열돼 있었다. 그 앞에서는 대형 TV를 통해 KBS ‘뮤직뱅크’ 등 이들이 출연한 국내 가요 프로그램을 편집해 보여 주면서 홍보를 하고 있었다. 편의점과 마트에서는 장근석, 2PM 등이 광고 모델로 등장한 과자류도 대거 눈길을 끌었다. 지난달 12일 태국 방콕 라자망갈라 국립경기장에서는 동방신기, 소녀시대, 원더걸스, 2AM, 씨엔블루, 비스트, 포미닛 등 국내 아이돌 그룹이 대거 참여한 MBC 한류 콘서트가 열려 성황을 이뤘다. JYJ도 2~3일 방콕 임팩트 아레나에서 이틀간 2만여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이러다 보니 한류 공연을 유치하기 위한 태국 프로모터들의 경쟁이 치열하고, 유명 기업들의 후원도 잇따르고 있다. 반면 4월 도쿄돔에서 열릴 예정이던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등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의 합동 공연은 잠정 연기됐다. 현재 K-팝은 태국의 10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상류층 자녀들이 아이돌 그룹 팬클럽 회장직을 맡는 등 명문가 엘리트들이 한류의 소비층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일에는 태국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의 딸인 마프랑(17)이 JYJ의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의 음악뿐만 아니라 음식과 화장품 등 상품 소비에도 적극적이다. 이제 우리가 보다 새로운 시각에서 태국을 봐야 하는 이유다. 글 사진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열린세상] 인터넷 시대의 한국 대중음악/이영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열린세상] 인터넷 시대의 한국 대중음악/이영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한류가 전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대장금과 겨울연가를 중심으로 한국의 드라마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더니, 이제는 한국의 대중음악이 동남아시아·일본·중국을 넘어 미국·캐나다·남미·유럽·중동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최근 블룸버그는 한국의 파워는 삼성, 현대와 같은 제조업 기업들이 아닌 소녀시대, 슈퍼주니어와 같은 대중음악 그룹이라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인기가 전세계으로 얼마나 높은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한국 대중음악 뮤직비디오 클릭 수가 9억회에 이르고 클릭의 분포도 아시아를 넘어 미주, 유럽, 남미, 중동 등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그뿐인가 인터넷 상에는 좋아하는 한국 대중음악을 흉내내어 노래하고 춤추는 전세계 네티즌의 사용자 제작 동영상(UCC)이 연일 넘쳐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한국 대중음악 관련 소식들이 실시간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는가? 출발점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음악시장의 변화이다. 과거 테이프, CD, TV, 라디오를 통해 대중음악을 즐기던 시대에는 국가 간의 경계로 음악시장이 나누어져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은 음악시장들을 글로벌 음악시장이라는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시키고 있다. 이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세계 어떤 나라의 음악이라도 인터넷을 통해 쉽게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인터넷으로 인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인터넷 접속 속도가 빨라지고 유튜브라는 연결 허브가 생기면서 단지 음악을 듣는 것을 넘어 시각적으로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헤드폰을 끼고 눈을 감고 음악에 심취하던 과거와 달리,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귀와 눈으로 음악을 즐기고 있다. 이러한 인터넷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음악 자체로는 수익을 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아주 쉽게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음악을 즐길 수 있고, 음악 포털에 지불하는 수수료 때문에 음악 자체를 인터넷 상에서 판매함으로써 얻게 되는 수익은 매우 작아졌다. 이제는 음악 자체의 판매가 아닌 광고, 공연, 초상권 등과 같은 음악과 연계된 별도 비즈니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글로벌 음악시장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우리나라가 매우 잘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작동하였다. 첫째로, 우리나라에는 인터넷망이 매우 잘 구축되어 있다. 정부가 대규모 투자를 통해 망을 구축하였고,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인터넷 사용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여 인터넷 사용이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둘째로, 우리나라 음악산업이 인터넷 시대 훨씬 이전부터 매우 경쟁적인 구조였다는 점이다. 일부 부작용을 가지고 있지만 매주 순위 경쟁을 펼치는 경쟁적인 음악시장에서 전문 기업들이 생겨나고 가수를 양성하고 곡을 만들고 홍보하고 음악과 연계된 별도 비즈니스들을 벌이고 있다. 셋째로, 글로벌시장에서 통할 수 있도록 국제적인 요소를 담은 상품을 내놓았다는 점이다. 귀에 거슬리는 경우도 있지만 가사 중 일부를 영어로 하고 각 지역시장에 맞추어 일어와 중국어로 노래를 만든 것은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제품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전혀 대적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국제화 요소가 제품 초기단계에서 빠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흥’이라는 우리나라의 전통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이나 ‘정’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전자에는 ‘흥’이라는 요소가 담겨 있다. 인터넷의 발달, 경쟁적인 산업구조, 글로벌 상품 개발, 흥이라는 유전자가 결합하여 우리나라 대중음악은 글로벌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성공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이제는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나라 대중음악 산업의 성공이 우리나라의 발전과 번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 [김문이 만난사람] 서울서 ‘대장장이 45년’ 류상준·상남 형제

    [김문이 만난사람] 서울서 ‘대장장이 45년’ 류상준·상남 형제

    단조(鍛造)의 예술이다. 아무리 딱딱한 쇳덩이라도 필요한 생활 도구로 척척 만들어 내니 말이다. 역사를 거슬러 천년의 기술도 뚝딱 재현해 낸다. 인기 TV드라마 ‘서동요’ ‘대장금’ ‘주몽’ ‘태왕사신기’ 등에서 봤던 소품 도구도 그러한 단조의 예술로 빚어냈다. 하여 어떤 시인은 신화창조의 영웅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류상준(58)·상남(55)형제. 요즘 같은 ‘현대문명’이란 이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45년째 대장장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형제끼리 아름다운 동행의 길을 걷고 있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대장장이로 열심히 땀을 흘리며 집도 사고, 자식들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행복하게 산다. 이쯤 되면 실업난이라는 이유로, ‘눈높이’라는 핑계로 탱자탱자 노는 이들에겐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수색역 바로 옆 ‘형제 대장간’. 10평밖에 안 되는 공간이다. 두 형제는 뜨거운 화덕 앞에서 쉴 새 없이 메질을 하며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두들기고 다지고, 벌겋게 달궈진 고철덩이들은 형제의 손기술에 의해 새로운 모양으로 태어났다. 낯선 손님이 왔음에도 “잠깐만 기다리쇼.”라는 말만 던지고는 바삐 일만 한다. 그렇게 20여분.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인터뷰에 응했다.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장간 안에는 낫, 도끼, 지렛대, 이북호미, 경기호미, 낙지호미, 굴 까는 조새 등 생활 주변에서 사용되는 각종 도구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앉을 의자 하나 놓을 공간도 없어 서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인기척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형제에게 뭣부터 물어볼까 찬찬히 생각하다가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인사했다. 형 상준씨가 “천직인데요, 뭘.”이라면서 피식 웃는다. 천직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들린다. 말 그대로 타고난 직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보람을 느끼고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겠다. 다음 궁금증이 ‘얼마나 벌까’였다. 이번에는 동생 상남씨가 “신문에 쓸 건 아니겠지요.”라면서 “(한달) 천만원 정도 벌어요.”라고 답한다. 이어 “나는 월급을 받고 형은 사장님이다.”라면서 웃는다. 또 생긴 궁금증, 과연 자녀분들은? 형 상준씨는 “우리는 딸만 둘인데 지금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생 상남씨는 “우리집 아들은 대학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하고 얼마 전에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일화 하나. 상남씨의 아들이 취직면접 때였다. 면접관이 아버지 직업을 묻자 아들은 “수색에서 형님과 함께 대장장이로 일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면접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사는 집안이구나’라고 느꼈던지 다음 질문을 안 하고 그냥 통과시키더라는 것. 형 상준씨도 한마디 거든다. “우리집 딸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버지가 대장장이라고 자랑을 해 학교 어린이들이 단체로 대장간 체험을 하러 오기도 했지요.” 잠시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 미안해진다. 그래서 얼른 화제를 바꿨다. 훌륭하게 살아온 대장장이의 내력을 얘기해 달라고 했다. 형 상준씨가 말한다. 서울 모래내(남가좌동)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네 대장간을 보면서 신기함에 빠졌다. 쓸모없는 쇳덩어리들이 생활 도구, 농기구 등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졌다. “저는 원래 공부에 취미가 영 없었어요. 공부가 싫더라고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한테 ‘중학교 진학을 안 하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어떤 부모도 그런 자식을 좋아할 리 없지요. 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렇다면 기술을 배우라. 밥은 안 굶을 것이다’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동네 대장간으로 달려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때 대장장이는 전국적으로 소문난 박용신(4년전 작고) 스승님이었지요. 풀무질부터 차근차근 배웠습니다.” 1966년 당시 대장간에서 받은 첫 봉급은 1000원이었다. 그때 호미 한 자루 가격이 50원. 일당으로 따지면 비록 호미 한 자루 값만도 못했지만 그는 군소리 없이 열심히 일을 했다. 자고 일어나면 쇠망치를 잡는 단순한 일이었으나 천직으로 여기고 열심히 대장장이의 길을 닦았다. 또한 당시 아버지는 편자 박는 일을 했는데 틈틈이 시간나는 대로 아버지한테 그 일을 배우기도 했다. 성격이 워낙 꼼꼼해 물건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런 점이 스승한테 인정을 받으면서 10년동안 모래내에서 대장장이 기술을 익힌 뒤 1976년 서울 암사동으로 가서 대장간을 차렸다. 그의 정성스러운 솜씨로 젊은 나이에 단골손님들도 많이 생겼다. 6년 뒤인 1982년, 상준씨는 다시 모래내에서 대장간을 차렸고 1997년 수색으로 옮기면서 동생이 함께 하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 이르자 동생 상남씨가 얘기한다. “형님은 일찍 대장장이 일을 시작했고 저는 원래 장사를 했어요. 떡집, 야채장사, 치킨집,옷장사 등 안 해 본 게 거의 없어요. 그러다가 거덜나서 길거리에 나앉을 정도가 됐지요. 친구집에서 전전하기도 했고…. 그런 저를 보고 형님이 대장장이 일을 같이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흔쾌히 받아들였지요. 같이 한 지 15년 됐는데 그 사이에 빚도 갚고 집고 사고 자식들 대학 보내고 다 했습니다.” 그는 또 “형님도 월세 살다가 6년전에 집을 장만했고 외환위기(IMF) 당시 은행에서 빌린 3000만원도 열심히 일해서 다 갚았다.”면서 “대장일을 하다 보니 땀 흘린 만큼 돈도 벌고 보람도 느낀다.”고 말했다. “원래 1년만 해야지 하고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오게 됐다. 이제는 천직으로 여긴다.”고 털어놓았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형제는 주로 농기구를 제작했다. 지금은 공사장이나 건축을 위한 도구를 만든다. 얼마 전에는 북한의 개성공단 건설에 필요한 도구를 2000여개나 주문받아 납품했다. 최근에는 방송국에서 자주 찾아온다. 역사드라마에 사용할 소품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 쇄도한다. 역사속의 병장기는 물론이고 드라마 ‘식객’에서 사용된 ‘서울식 전통 칼’도 제작해 화제가 됐다. 이래저래 형 상준씨는 TV에도 여러번 출연했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쇳덩이로 예쁜 장미꽃을 만들었고 EBS 특집 ‘극한직업’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했다. 최근에는 금나라 병장기를 재현하고 있다. 칼과 창, 방패 등 금나라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 대학교수의 부탁을 받아 만들고 있다. 이렇게 전국에서 주문 오는 경우가 많다. 한번은 외국인 교수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 “영국에서 매년 대장장이 국제대회를 여는데 한번 참가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인간문화재급에 해당하는 명장 신청을 하라는 연락이 왔지만 형 상준씨는 “초등학교밖에 안 나와 글도 잘 모르니 싫다.”면서 뿌리쳤다. 가끔 칼을 잘 만드는 명장도 찾아와 한수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형 상준씨한테 지나온 대장장이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스승이 만든 물건을 가지고 와서 수리해 달라고 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희 스승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홀로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애들도 다 잘 커 주고 그러니 걱정이 없어요. 지금 생각해도 직업을 잘 택한 것 같아요.” 그는 똑같는 김장 김치라도 써는 칼의 종류에 따라 맛이 다르듯 정성을 쏟는 만큼 물건의 질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다. “전통 대장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서울에만 해도 현재 10개 미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제품도 많이 들어오고…. 특히 대장장이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요. 몇년 후면 아마 서울에서 대장간이 사라지고 말걸요.” 형제의 꿈은 무엇일까. 동생 상남씨가 말한다. “그동안 만든 작품들이 많습니다. 고구려 시대의 병장기라든가, 삼국시대의 농기구 등 역사 속의 우리 것을 재현하는 전시관을 만들 생각입니다. 또한 대장간 체험장을 만들어 아이들이 견학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60대 후반에는 꼭 성사시킬 것입니다.” 형제는 뜨거운 화덕 앞에서 다시 망치를 들고 뜨겁게 달궈진 쇳덩이를 두들긴다.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온 45년 세월만큼이나 단단해진 그들의 인생이 아름다워 보인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류상준·상남 형제는 “국내 첫 鍛造 예술전시관 만들겁니다” 형 상준씨는 1954년 서울 모래내(남가좌동)에서 8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1966년 수색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모래내 대장간에서 스승 박용신(4년전 작고)씨한테 대장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10년동안 모래내에서 기술을 익힌 뒤 1977년 서울 암사동으로 옮겨 대장간을 열었다. 지금의 수색역 근처에서 대장간을 차린 것은 1997년. 이때부터 동생과 함께 ‘형제 대장간’을 시작했다. 그의 딸 둘은 중앙대와 추계예술대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있다. 동생 상남씨는 1957년 모래내에서 태어나 수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장사꾼으로 나섰다. 떡집, 치킨집, 옷장사, 야채장사를 하다가 망해 15년 전부터 형과 함께 대장장이 일에 동참했다. 상남씨의 아들은 대학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하고 현재 KCC그룹에 다니고 있다. 형제의 꿈은 국내 최초 단조예술 전시관을 만드는 것이다.
  • ‘日진출’ 한효주, 이영애 잇는 한류스타 되나

    ‘日진출’ 한효주, 이영애 잇는 한류스타 되나

    배우 한효주가 이영애를 잇는 차세대 한류스타로 발돋움할까. 지난해 MBC연기대상에서 역대 최연소 대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낸 한효주가 지난해 종영한 퓨전 사극 ‘동이’를 통해 본격적인 일본 진출에 나선다. 한효주는 다음달 10일 ‘동이’의 일본 홍보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출국한다. 2박 3일 일정인 이번 프로모션은 ‘동이’의 여주인공인 한효주 단독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대장금’의 이영애 이후 일본에서 여자배우가 단독 프로모션을 갖는 건 한효주가 처음이다. 한효주는 출연한 ‘찬란한 유산’이 지난해 3월 일본의 후지TV를 통해 최근 10년 내 동시간 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인기리에 방송돼 이미 차세대 한류스타로서의 가능성을 엿보인 바 있다. 한효주가 ‘찬란한 유산’의 프로모션 차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후지TV 고위관계자는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며 신가아루(품위있는) 여배우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한편 ‘동이’는 일본에서 오는 4월 10일부터 매주 일요일 저녁 9시 NHK위성 ‘BS 프리미엄’을 통해 방영된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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