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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0불갑사의 사금파리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0불갑사의 사금파리

    전남 영광에 있는 불갑사(佛甲寺)는 가을이면 진분홍에 가까운 붉은 꽃이 질펀하게 언덕을 덮는 꽃무릇으로 유명한 절입니다.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에서 백제로 건너와 처음 절을 짓고 포교를 시작한 곳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하지요. 나아가 불갑사 스님들은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가 중국을 단순히 경유했을 뿐 인도 불교를 직접 백제에 전했다고 설명합니다.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백제 침류왕 원년 384년의 일이니 140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런데 불갑사에서 이렇듯 오랜 역사의 흔적을 실제로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완전히 불타 버렸기 때문입니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해 일광당, 만세루 등 아름다운 건물들도 모두 이후 새로 지은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유적은 각진대사 자운탑입니다. 각진대사는 고려 충정왕과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다고 합니다.1355년에 세운 탑으로 전해지는데, 이 해에 입적한 만큼 실제 건립은 좀 더 뒤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그런데 기록이 아닌 유물로 불갑사의 역사를 각진대사 자운탑보다 더욱 끌어올릴 수 있는 흔적이 아직도 적지않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금파리가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 옛날 이 절에서 쓰던 그릇의 깨진 조각들이지요. 불갑사를 찾았을 때는 마침 만세루 아래에서 터를 고르고 있었습니다. 흙더미 틈에서 막사발 조각과 함께 분청사기 사금파리도 쉽게 눈에 띄더군요. 작은 꽃무늬를 촘촘히 찍은 인화문과 이보다 조금 큰 국화문이었습니다. 이런 인화문 분청 조각 몇개를 줍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요. 미술사학자인 강경숙 충북대 교수의 편년에 따르면 인화문 분청사기는 1390년쯤 만들기 시작해 1540년쯤 막을 내렸습니다. 짙은 색깔의 무늬없는 청자 조각도 찾았습니다. 청자는 14세기 후반 이후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각진대사 자운탑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사금파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청자나 분청사기가 흔했다면 당시 사세(寺勢)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이쯤되면 한 때 ‘불지종가(佛之宗家)’라고 불리웠다는 불갑사쪽 기록도 조금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허튼 얘기일 수 없습니다. 물론 아무리 오래된 고려청자 사금파리라도 10세기 이전의 불갑사를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토기나 기와 전문가라면 작은 조각에서도 통일신라, 나아가 백제 시대의 흔적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발뿌리에 차이는 작은 사금파리나 기와조각에도 애정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 불국사 관음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 불국사 관음전

    볼 것 많은 불국사에서 관음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웅전을 돌아가 절의 후미진 곳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작은 전각이 관음전이라면 희미하게라도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의 옛 절은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려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렸다고 하지요. 하지만 나이드신 어르신이라면 오르기가 망설여질 만큼 산처럼 치솟은 불국사의 관음전은 일부러 땅을 돋워 지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하긴, 한국의 ‘4대 관음성지’는 모두 섬이나 바닷가의 산처런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네요.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 석모도 보문사, 남해 금산 보리암, 여수 향일암이 그렇습니다. 관음도량에 부여되는 상징성은 유명한 사찰보다는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더욱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태안 마애삼존불은 특이하게도 가운데 작은 관음보살을 양쪽의 우람한 여래가 보살피고 있습니다. 중국같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백제의 독자적인 신앙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태안 마애삼존불이 있는 백화산에 오르면 이곳이 백제의 관음도량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태안반도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백화산은 해발 284m에 불과한 작은 봉우리입니다. 게다가 군 기지가 있는 정상에는 오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마애삼존불이 있는 곳에서도 북쪽으로는 가로림만, 서쪽으로는 만리포 앞바다, 남쪽으로는 천수만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가 밝힌 대로 백화산(白華山)이라는 이름부터가 ‘화엄경’에서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고 묘사한 ‘작고 흰꽃이 만발한 바닷가 산’이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 곳이 관음도량이라는 사실은 더욱 명료해지지요. 안동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극락전이 아니더라도 매우 아름다운 절입니다. 봉정사와 같은 산 줄기에는 개목사라는 작은 절이 있습니다.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은 한때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불타버려 몇년전 새로 지었다고 하네요. 개목사는 자동차를 타고도 산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합니다. 절에 닿으면 개목사(開目寺)란 이름 그대로 눈이 환히 열립니다. 나아가 시야 가득 펼쳐지는 연봉들은 그야말로 거대한 바다를 이룹니다. 개목사에 왜 관음보살을 모셔야 하는지 깨닫는 순간입니다. 불국사의 건축구조는 통일신라 불교신앙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상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관음전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상징의 일부분이나마 확인할 수 있음은 다보탑이나 석가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dcsuh@seoul.co.kr
  • [산이 좋아 산으로] 전북 무주 덕유산

    [산이 좋아 산으로] 전북 무주 덕유산

    덕유(德裕), 덕이 넉넉하다는 말이다. 넉넉한 덕은 넓은 품으로 산을 빚었다. 덕유산은 그 이름처럼 전북 ‘무진장’이라 불리는 무주, 진안, 장수와 경남의 첩첩산중 거창과 함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덕유산은 남한 산줄기들의 중심에 놓여 탁월한 조망을 보여준다. 특히 남쪽과 동쪽이 좋은데, 그래서인지 향적봉 대피소에는 사시사철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남한제일의 일출뿐 아니라 산정에서 지는 석양도 덕유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덕유산에 올라 산처럼 넉넉한 마음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떤가. 향적봉(1614m)을 정점으로 한 원점회귀 산행은 구천동의 계곡미와 덕유산 최고봉에서 빼어난 조망을 볼 수 있어 가장 인기 있는 코스다. 구천동 계곡은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나제통문부터 시작하지만 산행은 삼공리 매표소에서 시작해야 한다. 구천동 33경 중 절반은 건너뛰게 되는 셈. 그래도 한해를 마무리하는 산행으로는 손색이 없다. 예전 계곡길은 운치 있는 오솔길이었지만 이제는 넓은 비포장도로가 되어버렸다. 길은 인월담·사자암·금포탄 등의 명소를 지나게 된다. 겨울이어서 소와 담은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어우러진 풍경은 심신을 포근하게 정화시킨다. 백련사까지는 6㎞로 1시간 30분이면 닿는다. 백련사는 그 명성에 비해 볼거리가 많은 절은 아니다. 절 입구에 오수자굴로 오르는 등산로가 보이는데 그곳으로 하산하게 된다. 향적봉 가는 길은 대웅전 오른쪽으로 나 있다. 헐벗은 상수리나무들에 연초록 겨우살이가 잔뜩 붙어 겨울을 나는 모습이 보이는 길이다. 백련사계단(白蓮寺戒壇)이라고 씌어있는 우람한 부도를 지나면서는 아이젠이 필요하다. 응달이 많아 길이 얼어 붙었기 때문이다. 이제 2.5㎞를 비지땀 흘리며 올라서면 향적봉에 도착한다. 산행을 계속할 것이라면 중봉에서 오수자굴 쪽으로 내려가자. 중복은 역동적인 덕유 주릉과 무룡산 왼쪽 허공에 친 지리 능선이 장관이다. 여기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백암봉에서 지봉으로 흘러가는 백두대간 능선을 바라보며 하산한다. 뒤돌아보면 주목으로 가득찬 향적봉을 볼 수 있다. 오수자굴까지는 1.4㎞로 40분이 걸린다. 겨울 오수자굴 안은 각양각색의 얼음기둥 전시장이다. 굴 안 낙숫물이 얼어붙으며 얼음종유석을 만들기 때문이다. 오수자굴에서 백련사까지는 호젓한 길이 이어진다. 길은 눈으로 덮여 있고 길섶에는 푸른 산죽들이 도열해 있다. 계곡은 태초의 시간처럼 고요하다. 굴에서 백련사까지는 2.8㎞,50분이 걸린다. # 여행 정보 무주 읍내에 금강식당(063-322-0979)은 어죽이 유명하다. 얼큰하고 비린내가 나지 않아 산행 중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좋다. 구천동과 무주리조트 입구에는 숙박업소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향적봉대피소(063-322-1614)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운치 있다. 산 너머로 지는 석양을 보며 한해를 마무리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단, 보온의류는 꼼꼼히 준비하길. 글 이영준 사진 남영호(월간 MOUNTAIN 기자)
  • 송구영신 소망여행

    송구영신 소망여행

    12월31일 오후 5시40분에 전라남도 소흑산도에서 모습을 감춘 2006년의 해는 새해 1월1일 오전 7시26분 경상북도 독도에서 ‘황금돼지’띠의 첫 해로 떠오른다. 매일같이 뜨고 지는 태양이지만,12월31일과 1월1일에 뜨고 지는 해에는 특별함이 있다. 모두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평상시와는 달리 송구영신(送舊迎新) 여행은 희망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자리. 수평선을 희롱하듯 해돋이-해넘이의 장관을 지켜보며 이루지 못한 소망 등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미련일랑 훌훌 털어 버리고 희망찬 한 해를 설계해 보자. 남해와 동해가 만나서 이루는 절경의 바다, 부산 기장군 해안가에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는 해동용궁사와 땅끝마을 해남을 미리 다녀왔다. 각각 해돋이와 해넘이가 장관인 곳. 이밖에 전국 주요 일출-일몰 명소를 소개한다. 해남 김문·기장 손원천기자 km@seoul.co.kr ■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꼭짓점 부산 기장 해동용궁사 해맞이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을 지나 송정으로 가는 길목에 아담한 언덕길이 하나 있다. 달맞이 고개라고 불리는 이 고갯길은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의 와우산 능선을 열다섯번 돌아 넘는다고 해서 예로부터 15곡도라 불렸다. 달맞이길을 넘어 송정해수욕장∼수산전시관∼해동 용궁사∼기장군 대변항을 잇은 해안관광도로는 드라이브 코스의 백미. 이름만큼 고운 청사포 등 아름다운 풍경을 품은 해안가 마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특히 해동 용궁사는 동해와 남해가 맞닿은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수상법당. 국내 3대 관음성지 중 한 곳이다. 근동에서는 일출명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너른 바다에서 들려오는 해조음과 독경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특이한 문화재는 없지만 늘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처음 창건된 것은 고려 공민왕 때. 당시 이름은 보문사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소실된 것을 1930년 통도사의 운강화상이 중창했고,1974년 정암스님이 지금의 해동용궁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 12지신상과 함께 ‘소원 한 가지는 반드시 이뤄주는 해동 용궁사’란 팻말이 눈에 띄었다.‘운전하는 데는 조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부적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교통안전기원탑’도 서 있다.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고 했으니 이 참에 소원이나 빌어볼까. 교통안전까지 세심하게 기원해주는 절이니 다른 소원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게다. 교통안전기원탑을 지나면 108계단으로 이어진다. 계단 중간쯤 득남불(得男佛)과 학업성취불이 자리잡고 있다. 만지면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득남불의 둥근 배는 아들 바라는 이들의 손을 타 까맣게 윤이 나는 것이 기름칠이라도 해놓은 듯하다. 이름에 걸맞게 책을 보고 있는 학업성취불도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한다. 108계단을 지나면 드디어 해동용궁사의 전경이 막힘 없이 열린다.‘바다도 좋다 하고 청산도 좋다거늘 바다와 청산이 한곳에 뫼단 말가.’라고 했다는 춘원 이광수의 감탄이 가슴에 와 닿는다. 대웅전 앞을 지나 계단을 몇 걸음 올라가면 해수관음대불과 만나게 된다. 꼭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바로 그 불상이다. 바다를 굽어 살피듯 용궁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촛불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경건하기 이를 데 없다. 이뤄야 할 소망이 있으니 더욱 간절해지는 모양이다. 108계단에서 해안가로 빠지는 길목에 약사여래불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이 사찰에서 가장 바쁘신 분 중 하나다. 몸 아픈 이들이 병을 맡기고 가기 때문. 약사여래불을 지나면 동해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뜬다는 일출암이다. 지옥에 빠져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해준다는 지장보살이 이방인을 맞는다. 연말연시만 되면 구름처럼 몰려든 중생들이 밤을 도와 소망을 빈다는 곳. 희망을 품고 왔든 가슴 한편에 남아 있던 미련을 버리려 왔든, 불상 옆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온갖 시름을 거두어 가는 듯하다. 기장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해돋이 명소 ●포항시 호미곶 경북 포항시 영일만에 위치한 호미곶은 우리나라 지도를 호랑이로 표현했을 때 꼬리에 해당하는 곳. 육당 최남선은 조선 10경 중 가장 아름다운 일출 장소로 꼽기도 했다. 청동 조형물인 ‘상생의 손’위로 떠오르는 해가 장관이다. 매년 12월31일 오후부터 새해 첫날까지 해맞이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경주 토함산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는데, 마치 산이 바다에서 밀려오는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내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토함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늘과 바다가 동시에 붉게 물드는 모습이 장관이다. 감포의 문무대왕릉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 이맘 때면 해무가 자주 껴 갈매기떼의 군무와 함께 선경을 이룬다. ●영덕 강구항 남으로 포항시, 북으로는 울진군과 맞닿아 있는 조용한 포구. 선착장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풍광을 맞는 것도 좋지만, 해 뜨는 장소가 일정치 않기 때문에 삼사해상공원에서 보는 것이 수월하다. 강구항과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삼사해상공원은 인공폭포인 천지연 등 볼거리와 놀거리가 많은 곳. ●동해 추암리 TV에 방영되는 애국가 일출 장면이 촬영된 장소. 해안 절벽과 동굴, 칼바위 등의 크고 작은 바위섬이 모여 장관을 이룬다. 추암이란 이곳의 촛대바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동해시와 삼척시 경계에 꽂아놓은 듯 우뚝 솟은 촛대바위 사이로 솟아오르는 해돋이는 동해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특별한 적기 없이 사계절 내내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태백산 천제단 태백산 정상의 천제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 특히 겨울철 설경이 비경을 이루는데, 일출과 어우러지면 선계가 따로 없는 곳이다. 산세가 험한 편은 아니지만, 해돋이를 보려면 야간산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젠 등의 장비는 필수적으로 지참해야 한다. 매년 12월31일에는 태백산 등산로 일대와 해넘이를 황지연못 등에서 해넘이 행사를 가진 다음, 새벽 3시부터 산을 올라 오전 7시에 일출을 감상하는 행사를 벌인다. ●여수 향일암 향일암은 1300여 년 전 신라의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 남해 수평선의 해돋이 모습이 장관이라는 뜻에서 향일암으로 이름지어졌다. 산길은 제법 가파른 편. 중간쯤에 암벽을 타고 오르기도 하고, 암자 근처에선 집채 만한 바위 사이로 난 석문을 통과해야 한다. 해가 뜨면 서서히 암자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동백과 바위로 둘러싸인 절의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 해넘이 명소 ●장화리(인천 강화) 서해안 3대 낙조로 꼽힌다. 동막리에서 장화리로 이어지는 강화도 남단의 해안도로는 드라이브를 즐기며 낙조를 감상하기에 그만. 석모도 남단의 민머루 해수욕장도 주요 포인트 중 하나다.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충남 태안) 대한민국 대표 낙조 포인트. 안면도 중간쯤 자리잡고 있다. 소나무가 자라는 할미바위 너머로 해가 진다. 모래밭도 단단해 백사장을 거닐기에도 좋다. ●솔섬(전북 부안) 전북의 대표적인 곳. 외변산 지역은 전체가 해넘이 감상포인트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쪽으로는 새만금간척지의 방조제 입구부터 남쪽의 모항 해수욕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바닷가에서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다. ●세방(전남 진도) ‘세방낙조’란 명성에 걸맞게 안면도 꽃지해수욕장과 쌍벽을 이룬다.‘세방 해안일주도로’가 일품 코스. 떨어지는 해가 가장 오래도록 머무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순천만 갈대밭(전남 순천) 칠면초보다 더 붉게 탄다는 것이 순천만 노을. 뱃길투어, 갯벌체험, 갈대산책 등을 위해서는 별량면 쪽이 편하지만, 순천만을 한눈에 굽어보려면, 순천만 최고의 낙조 포인트 해룡면 용산에 올라야 한다. ■ 땅끝마을 전남 해남 해넘이 “결국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또다시 떠오를 거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대사로 유명한 말이다. 원저자 마거릿 미첼은 평생동안 이 한 작품만을 남겼고 또 1000쪽이 넘는 방대한 서사시의 마침표라는 점에서 더욱 긴 여운으로 다가온다. 지난 주말 오후, 국토의 땅끝마을에 섰을 때 저 바다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붉은 태양을 보면서 문득 이 영화의 대사가 생각났다. 사랑, 질투, 이별, 전쟁…. 그 영화 속에 나온 인물들, 자신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거부할 수 없이 다가온 소용돌이의 삶 속에 몸을 던졌다가 그렇게들 돌아갔겠지. 그때나 지금이나, 또 그곳이나 이곳이나 하늘 아래 숨쉬는 삶의 땅이기에 희로애락 인간냄새 또한 다를 바 없을 터. 한해가 저무는 12월의 끝자락이다.2006년의 태양이 한해 동안 생겨난 인간사의 온갖 미련과 잡념의 티끌들을 송두리째 안고 바다 속으로 막 자맥질을 하려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2007년의 태양, 황금돼지의 태양을 잉태하기 직전 폭풍전야의 마지막 불끈거림이었다. 토말(土末)에서의 새해맞이 진행형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해남 김문기자 km@seoul.co.kr # 울고 왔다 웃고 가는 곳 설레는 마음을 갖고 땅끝마을까지 가는 길은 조금 멀게 느껴진다. 해남읍에서 버스를 타고 50분은 족히 걸렸다. 경운기를 운전하는 노인, 파란 보리밭에서 김매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평화롭게 다가온다. 운전기사가 “해남의 농토는 강원도에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의 2배가 넘는다.”고 했다. 또 “여기는 울고 왔다, 웃고 가는 고장”이라면서 “해남의 부자들은 대부분 외지사람”이라고 귀띔한다. 잠시 후 ‘대한민국 땅끝마을’이라고 적힌 돌탑이 보인다.‘땅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라는 엄숙함이 앞선다. 누가 국토의 땅끝이라고 했던가. 반도의 맨 앞에서 모진 비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낸 첨병이요, 태곳적부터 한줄기 빛을 오롯하게 밝히며 묵묵히 ‘처음’으로 살아왔을진대 말이다. 땅끝마을 부두만 하더라도 보길도, 진도 등 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을 연결시키는 연락선이 하루에도 수십차례 기적을 울리며 떠나고 들어온다. # 해넘이·해돋이 축제 땅끝마을 부둣가 광장과 전망대에서는 매년 12월31일 해넘이·해맞이 축제가 열린다. 올해가 11회째로 전국 각지에서 수만명이 찾는다. 특히 다도해의 절경과 일출·일몰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지형조건을 지녔다. 이곳에서는 관광객 및 군민이 함께하는 콘서트, 전통놀이마당, 음식문화 잔치, 깜짝 이벤트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아련하고 정이 넘치는 땅끝마을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오는 31일 자정무렵에 벌어지는 촛불의식과 달집태우기는 새해를 맞아 소망을 기원하는 하이라이트. 이어 여명의 북소리가 울려퍼지고 소망의 연날리기에 이어 장보고호에 탑승해 선상에서 해맞이를 하면서 횡간도와 노화도를 돌아보는 행사는 땅끝마을만이 간직한 특별 프로그램이다. 이밖에 송호해수욕장에서 2006년 마지막 해넘이를 보는 재미도 그만이다. 아울러 사구미해수욕장, 조각공원, 달마산 미황사, 자연사해양박물관, 두륜산 대흥사, 우항리 공룡화석지 등과 인접해 있어 가족끼리 가기에도 안성맞춤이다.
  • [산이 좋아 산으로] 전남 영광 불갑산~모악산

    [산이 좋아 산으로] 전남 영광 불갑산~모악산

    영광군 불갑면과 함평군 해보면 경계에 곧게 누운 불갑산(516m)∼모악산(347.8m)은 ‘사회과부도’식 산맥 개념에 의하면 ‘추풍령 부근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나와 전라북도 남동부의 무주·진안을 거쳐 전라남도 함평만까지 뻗었다.’는, 우리나라에서 평균 높이가 가장 낮은 노령산맥에 속한다. 최근에는 호남의 심장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영산강을 주축으로 내장산에서부터 영광∼함평까지 이어진 이 산줄기를 ‘영산기맥’이라 하여 별도로 종주산행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불갑산과 모악산은 서해의 가장 끝쪽에 엎드렸지만 그 핏줄을 가만히 짚어보면 결국 영산기맥을 타고 호남정맥에 닿아, 호남정맥에서 백두대간까지 이어지니, 우리나라 내륙 산줄기 중 백두산의 자식이 아닌 산은 극히 드물다 하겠다. 대륙성기후로 한랭건조하고 겨울이면 폭설로 몸살을 앓는 전남 영광. 법성포 구수한 굴비 냄새에 밀려 걸음은 자꾸 산을 떠나 바다로, 혹은 바다를 등에 지고 산으로만 향한다. 불갑산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은신처가 될 만큼 작은 체구에 비해 수림이 울창한 산이기도 하다.1949년 여름, 트럭 2대 병력이 불갑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끝내고 귀대 길에 함평 양림마을 주민 31명을 무고하게 학살, 위령비를 건립했을 정도. 반면 불갑사(www.bulgapsa.org) 옆 동백골은 천연기념물 제112호 참식나무 자생지이자 북방한계선이 된다. 탁 트인 정상은 ‘연꽃의 열매를 닮았다’ 해서 연실봉이라 불리는데, 그 위에 서면 영광과 함평 일대, 가야 할 모악산 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펼쳐진다. 모악산은 불갑산에서 약 2.5㎞ 떨어진 봉우리로, 연실봉에 비하면 전망도 높이도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은 차라리 자식에게 모든 걸 내어주고 흡족하게 돌아서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후덕하다. 영광의 불갑산이 불갑사 중심으로 다양한 등산로를 선보인다면, 서쪽으로 다소 물러선 모악산은 함평군 용천사와 용문사를 통해 오르는 길이 발달돼 있다. 두 산을 연결하는 산행은 더디 걸어도 5시간쯤 걸리며, 각 산을 하나씩 따로 떼어 하는 산행은 3시간을 넘지 않는다. 불갑사에서 출발해 정상인 연실봉으로 오르는 대중적인 코스는 6개 정도인데, 동백골과 해불암(불갑사 5대 암자 중 하나로 주변 경치가 뛰어나 예부터 호남지역 참선 도량의 4대 성지로 꼽히던 곳)을 거쳐 정상을 오가는 코스가 약 4.5㎞로 1시간30분 걸리고, 수도암에서 도솔봉을 통해 불갑사로 내려서는 코스는 3.5㎞이며 역시 1시간30분 걸린다. 불갑사에서 동백골∼구수재를 찍고 연실봉∼해불암∼불갑사로 내려서는 길은 대략 2시간 잡으면 넉넉하고,4.2㎞의 불갑사∼구수재∼도솔봉∼수도암은 3시간 잡는 것이 여유 있다. 거리를 조금 늘려 불갑사∼구수재∼연실봉∼노루목을 거쳐 불갑사로 돌아오는 길이 6㎞로 3시간 걸리고, 수도암에서 연실봉과 덫고개(덕고개)를 지나 불갑사로 하산하는 길은 6.4㎞로 3시간 걸린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고려한다면 이보다 다소 넉넉히 잡아야 하지만 어디를 거치든 불갑사 원점 회귀 산행은 부담이 적다. # 여행 정보 서해안고속도로 영광IC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영광읍내를 거쳐 함평 방면으로 8㎞ 진행하면 불갑면에 닿는다. 호남고속도로는 정읍IC로 들어선 다음 고창을 거쳐 영광으로 진입할 수 있고, 광주·목포·전주를 통해서도 영광 이동이 가능하다. 서울 기준 4시간이 조금 덜 걸린다. 대중교통의 경우 출발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겠지만 광주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 영광읍내에는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다. 불갑사 경내에선 보물 제830호로 지정된 대웅전 소슬 빗살문의 섬세한 조각과 색감이 제일 도드라진다. 그 외 사천왕상이 지방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돼 있고,1644년 중건된 만세루는 문화재자료 제166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글 사진 황소영(월간 MOUNTAIN 기자)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8) 증산도 성소 대전 태을궁(太乙宮)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8) 증산도 성소 대전 태을궁(太乙宮)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409-1의 유별난 건물, 증산도 교육문화회관. 주변에 특별히 눈에 띄는 건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돌출적인 건물 외양이 색다르다.2002년 12월 들어선 뒤 대전의 명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곳이 민족종교 증산도의 핵심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정면에서 볼 때 왼편 시루(떡을 쪄서 익히는 질그릇) 형태의 태을궁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山´의 형상을 이룬 독특한 건물. 도조(道祖) 강증산(姜甑山·본명 一淳·1871~1909)의 이름자를 고스란히 건물로 형상화했다. 지금은 증산도 신도들의 교육장소로 쓰고 있지만 이른바 ‘후천개벽’이 이루어지는 새 시대에 세상의 모든 일을 도모할 근본 터로 계획해 세운, 증산도의 중심이다. 세미나실과 교육장 6개, 사무동, 숙소동, 증산도 케이블방송국이 ‘山´자를 이루며 독특하게 포진해 있는 건물. 한꺼번에 7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증산도 교육센터이지만 건물 맨 오른쪽엔 서점과 북카페를 차려 일반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 공간은 역시 시루 모양의 태을궁. 밖에서 볼 때도 그렇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위가 넓고 아래는 좁은 원통형 시루 모양이 확연하다.1800석을 갖춘 실내의 조명과 음향, 영상 시스템은 국내 여느 대형 공연장 못지않은 수준. 무대 전면에 도조와 도조의 종통을 이은 태모(太母) 고수부, 태을천 상원군, 국조 단군왕검의 어진을 개사해 모신 신단이 눈길을 끈다. 도조 강증산은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 전북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 시루산 아래 마을에서 태어나 호를 시루 증(甑)자와 산(山)자를 써 증산이라 지었다고 한다. 증산이란 이름엔 출생지 시루산 말고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얽혀 있다. 다름 아닌 1200여년 전 신라 고승 진표율사가 세운 김제 금산사 미륵금상의 철수미좌 사연이다. 진표율사는 목숨을 건 망신참법의 수행을 통해 미륵불을 친견하고 미륵불의 계시에 따라 미륵금상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당시 쇠로 된 밑 없는 시루(철수미좌)를 놓고 그 위에 미륵금상을 조성한 것이 특이하다(지금 미륵금상 아래의 철 시루는 시멘트로 봉쇄된 채 일반인들이 볼 수 없다). 증산도는 그로부터 1100여년 후 고부의 시루산 밑에서 탄생한 강증산이 진표율사와의 인연으로 금산사 미륵금상에 30여 년간 성령(聖靈)으로 있다가 이 땅에 내려온 것으로 여긴다. 증산도의 경전인 도전(道典)에 실려있는 탄생에 관한 내용이지만, 불교계에서 아직까지 미륵금상을 철수미좌에 받쳐 조성한 이유를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다. 김제 금산사 인근 모악산 기슭에는 지금도 증산 사상을 신앙으로 이어오고 있는 군소 종교단체가 40여개나 남아 있다. 강증산은 31세 때인 1901년부터 1909년까지 9년간 ‘천지공사’라는 의식을 통해 남북통일을 포함한 후천세상을 여는 프로그램(증산도에선 도수로 부름)을 짰다고 한다. 태을은 증산도에서 가장 중시하는 주문인 태을주(太乙呪)에 등장하는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의 이름을 딴 것으로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는 진리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총본산의 주 공간에 가장 중요한 태을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강증산이 태어난 시루산 아래 신송마을에는 입구에 ‘강증산성지’라 새겨진 나무 푯말만이 덩그맣게 섰을 뿐 생가를 비롯해 성지라 부를 만한 흔적이 별로 없다. 인근 입암면 접지리 대흥마을은 도조 강증산의 맥을 이어받은 보천교 교단이 형성됐던 곳이다. 당시 이곳엔 본부 건물인 십일전을 비롯해 건물 30여동이 들어섰으며 신도 수가 수백만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일제시기 독립자금 중 많은 부분이 이곳 보천교를 통해 모금되었으며 그 때문에 조만식을 비롯해 많은 우국지사들이 보천교를 출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만식과 한규숙 등은 보천교 신도들이 마련한 30만원을 독립자금으로 만주에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 선승 탄허 스님의 아버지인 김홍규도 보천교 핵심 간부였다. 보천교는 종교집단이었지만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일제는 집요한 와해공작을 벌여 1936년 마침내 보천교를 해체시켰으며 당시 보천교의 본당이었던 십일전 건물은 해체되어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옮겨졌다. 보천교 교단이 있던 대흥마을은 마을 전체가 보천교 신자들로 이루어진 보천교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옛 건물 7채만 남아 있다. 보천교 와해 이후 지금의 안운산 종도사와 안경전 종정이 강증산과 2대 도주 고수부의 종통을 이어 새롭게 이끈 것이 증산도. 증산도는 해방후 한때 신도가 70만명에 달했으나 6·25전쟁으로 교세가 주춤했다가 안운산 종도사와 안경전 종정이 1970년대 다시 문을 열어 지금에 이른다.“내가 후천선경 건설의 푯대를 태전(대전)에 꽂았느니라.”“태전이 새 서울이 된다.”는 도조의 유언을 중시, 대전에 본부를 두었으며 태을궁은 그중에서도 핵심 공간인 셈이다. kimus@seoul.co.kr ■ 전국 250여 도장·신자100만명 둔 증산도는 강증산을 도조(道祖)로 모시며 상생(相生), 보은(報恩), 해원(解寃), 원시반본(原始返本),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핵심 종지(宗旨)로 삼는다. 전국에 250여개의 도장(道場)이 있으며 신자 수는 100여만명으로 추산. 도장은 수행, 교육, 포교 활동의 구심점으로 대전에 본부가 있다. 세계적으로 20개국 50여개 도시에 도장을 갖췄으며 최근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7개 국어로 된 외국어 도전도 펴냈다. 신도들은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에 도장에서 도조와 도조의 종통을 이은 태모 고수부, 천지신명에 정성을 드리는 정기 치성(致誠)을 봉행한다. 평상시에는 집에서 매일 아침·저녁 청수(淸水·정화수)를 올리고 태을주 수행을 한다. 기도는 하늘을 받들고 땅을 어루만지는 형상의 절법인 반천무지(攀天撫地)를 하는데, 인간이 천지의 은혜에 보은하는 것과 함께 인간이 우주의 주인임을 상징한다. 지금 시대는 우주에서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과도기이며 앞으로 올 가을기에 통합과 상생의 새 문명이 열린다는 미래관을 갖고 있다. 다른 종교단체에 비해 대학생 등 젊은 남자들이 신도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대학교수, 의사, 한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도 적지 않다. 후천문명을 열 성직자 양성기관인 증산도대학교를 1984년부터 열고 있으며 전문 성직자를 기르는 성녀전사단 교육과정도 운영한다. 역사와 민족의 뿌리찾기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군부대, 교도소, 마을문고, 학교도서관 등에 ‘상생의 책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천년사찰 ‘도봉사’ 다시 경매시장에

    천년사찰 ‘도봉사’ 다시 경매시장에

    지난 5월 경매시장에 등장해 관심을 끌었던 천년역사의 지방문화재 ‘도봉사(道峰寺)’가 다시 경매에 나왔다.4일 경매정보제공업체 지지옥션에 따르면 서울 도봉구 도봉동 소재 도봉사가 이달 18일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경매에 부쳐진다. 도봉사는 지난 5월 24억 3000만원에 경매에 등장했으나 채권자가 경매 연기신청을 하고 일부 건물이 경매에서 제외됨에 따라 새로운 감정평가를 거쳐 7개월 만에 다시 등장했다. 이번에 경매에 부쳐지는 물건은 대웅전, 극락정사 등 지상물과 토지 2250평이 대상으로 감정가는 15억 8440만 3960원이다. 현재 소유자는 문모(48)씨로 돼 있고, 이모씨 등 2명의 채권자가 근저당권 행사를 위해 경매를 신청했다. 도봉사는 고려 4대 임금 광종에 의해 국사로 임명된 혜거 스님이 창건했으며 8대 임금 현종이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된 뒤 국사를 돌봤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후 도봉사는 전쟁과 종교분쟁,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수난을 겪다가 1961년 벽암 스님에 의해 복원됐다. 현재 도봉사에는 혜거 스님이 모셔온 유형문화재 151호 석가여래철불좌성이 대웅전에 있다. 석가여래철불좌상은 경매에서 제외된다. 지지옥션 강은 팀장은 “문화유적지는 개발제한, 군사시설보호구역 등 이용에 제한이 따라 일반인이 응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1월에는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흥선대원군 별장인 ‘석파정’이 3회차 경매에서 63억 1000만원에 낙찰됐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김성호전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7) 금강산 신계사

    [김성호전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7) 금강산 신계사

    금강산 자락인 강원도 고성군 신북면 창대리에 고즈넉이 앉은 신계사(神溪寺). 갈려진 반도의 북녘에 있어 일반인들의 접근이 수월치 않지만 예로부터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혀왔던 명찰이다. 정어리 어장으로 유명한 장전에서 출발해 만 가지의 다양한 형상을 가졌다고 하는 만물상으로 가는 길 한편에 자리잡아 금강산 관광객들은 누구나 한 번쯤 들러보고 싶어하는 곳. 바로 앞쪽 기봉, 왼쪽의 응암, 오른쪽의 문필봉, 뒤쪽의 관음봉에 둘러싸여 천혜의 경관으로도 이름높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1500년 고찰이지만 6·25전쟁 중 무차별 폭격을 당해 삼층석탑과 당우 만이 덩그맣게 남아 있던 것을 남북 불교계가 손을 맞잡고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 11채를 복원해 놓았다. 신계사 창건과 관련된 기록은 일제기에 편찬된 ‘유점사본말사지’의 ‘신계사지’와 1825년 남경 지환 스님이 지은 ‘금강산신계사사적’에 전한다. 이 사료들대로라면 신라 법흥왕 5년(519년) 보운 스님이 창건했으며 신라왕실의 통일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신(新)자를 따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창건 이후 김유신은 진덕여왕 7년(679년) 왕실의 기도를 올린 기념으로 사찰을 중건했고 통일 후인 679년에는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과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왕실에 청을 올려 대웅전을 보수한 것으로 전한다. 고려기 국사까지 지낸 대표적 화엄사상가 탄문 스님이 보수했으며 서경천도론을 편 묘청에 의해 중창됐고 조선시대엔 나운(1709∼1782년), 대은(1780∼1841년) 스님 등이 주석하며 숱한 후학들을 배출했다고 한다.18세기 말 무렵엔 30여동의 전각들이 들어설 만큼 흥성했으나 일제기를 거치면서 유점사 말사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6·25전란을 맞아 모든 전각이 소실됐다. 관음봉·문수봉·집선봉·세존봉 등에 둘러싸인 금강산은 전통적으로 화엄경의 법기보살이 머물며 중생을 제도하는 곳으로 알려진 불교계의 성지다. 이곳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인 신계사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은 2000년. 남측 불교계와 북측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이 사찰 복원을 협의했으나 지지부진하다가 금강산관광이 활성화되면서 본격적인 사찰 되살리기가 시작됐다. 목재며 기와 같은 자재를 일일이 남측에서 날라다 써야 하는 만큼 공사 진행은 무척 더뎠다. 복원공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분단 세월의 켜만큼이나 달라진 남북의 전통건축 양식과 사고방식이었다. 현장에서 공사를 총지휘한 도감, 제정 스님은 “초창기만 해도 남북의 인부며 전문가들이 한 끼 밥을 같이 먹기에도 힘들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전각에 들일 단청 하나를 놓고도 의견 차가 많아 몇주일씩 토의를 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되살아난 것은 대웅보전과 만세루, 산신각, 극락전, 나한전, 어실각, 칠성각, 종각, 축성전, 요사채 등 건물 11개 동. 요사채 한 동을 마저 짓고 주변정리를 끝내면 복원공사도 모두 마무리된다. 건물은 복원됐지만 원래의 전각 단청이며 주 불상들은 아직 갖춰지지 못한 상태. 일주문이며 천왕문도 보이지 않는다. 대웅전과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모든 전각들이 일렬로 선 채 사찰 문을 대신하는 만세루를 내려다본다. 이 가운데 주 건물인 대웅전은 1887년 김규복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복원한 사진이 ‘조선고적도보’에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얹었는데 남한 사찰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장엄하다. 뒷 외벽에 부처님 설법도와 전법도, 앞 벽에 부처님 칠불을 미장처리하지 않은 건식공법으로 붙였는데 남북 합작의 첫 단청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웅전 서쪽 끝의 어실각은 조선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사당. 사찰에 사당이라니. 조선조 숭유억불 체제 아래 그나마 왕실의 사당을 모신 탓에 신계사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인근 표훈사의 본 건물 형태를 그대로 살려 초석과 기단석, 댓돌 등을 온전히 살려냈는데 모래, 황토, 석회를 다진 삼화토(三華土)가 생생하다. 문은 조선조 사당의 전형적인 형태인 삼문(三門) 형태를 띠고 있다. 어실각 바로 옆에 들어앉은 나한각도 특이한 전각.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외견상 한 건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한전과 조사전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불교적인 시각으로 볼때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부분. 어실각을 둘 만큼 중요한 사찰이었지만 조선 후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찰의 위상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나한각과 나란히 앉은 극락전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봉안했으며 바로 옆 축성전은 지옥의 모든 중생들을 구제한 뒤 현신하겠다는 원을 세운 지장보살을 모신 곳. 임시로 불상을 봉안했지만 전국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모금에 나서 내년 부처님 오신 날 원래의 모습대로 불상을 봉안할 예정이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은 현재 신계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유구. 기단에 팔부중과 비천이 부조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고려 초쯤 생긴 것으로 금강산 3대석탑 중 하나로 꼽힌다. 빛처럼, 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법을 중생에게 가장 빨리 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범종각도 대웅전 앞에 엄연히 자리잡았다. 삼층석탑의 옥개석이며 기둥돌, 대웅전 기단석 등 범종각 옆에 가지런히 놓여진 발굴 유물들도 눈길을 끈다. “신계사는 많은 유물들이 있었으나…야수적 폭력으로 모두 불타 버리고 터만 남았다.-국보유적 제95호 신계사터” 북측이 신계사 터에 세운 표지석 명문이다. 남과 북의 불교계가 사찰 복원의 원(願)을 세우기 한참 전 새겨진 명문이지만 남북 불교계가 합동 작업을 벌여 복원해놓은 신계사의 명문답게 새로 고쳐써야 할 것 같다. kimus@seoul.co.kr ■ 창건설화 들어보니 신계사의 명칭이 언제부터 ‘神溪’로 굳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창건 당시 원래의 이름은 ‘新溪’였다고 한다. 많은 사찰이 창건이나 이름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듯이 신계사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예로부터 신계사 앞 개울에는 알을 낳기 위한 연어 떼가 몰렸다고 한다. 당연히 연어를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바로 앞에서 살생(殺生)이 다반사로 일어나는데 절집에서 그냥 놔둘리 없었음은 빤한 일.“부처님의 도량은 가장 청정한 법계인데 어찌 물고기가 있어 냄새가 진동을 하는가” 신계사 창건주인 보운 조사가 결국 주문으로 방편을 써 고기 떼를 푸른 바다(동해)로 몰아내었고 그 바다까지 계곡물이 이르러도 고기 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운 조사가 용왕에게 연어 떼가 이곳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요청했는데 신통하게도 그때부터 이곳에서 연어 떼를 볼 수 없었으며 그 이후로 절의 이름을 ‘신기한 계곡’이란 뜻의 신계(神溪)사로 고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설화가 다 그렇듯이 그저 재미있게 각색된 이야기쯤으로 돌릴 수 있지만 설화와 관련된 유물이 남아 있어 흥미를 더한다. 2003년 11월 신계사 대웅보전 발굴 조사 때 수습된 평기와가 그것. 기와의 등에 물고기가 새겨졌는데 물고기 문양이 들어 있는 기와 유물로는 국내에서 처음 발굴된 것이라고 한다.
  • “남북 불교계 문화교류 꽃 피웠다”

    “남북 불교계 문화교류 꽃 피웠다”

    “남북의 불교계가 현장에서 머리를 맞대고 문화·학술 교류의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지난 2004년부터 남한 조계종과 북한 조선불교도련맹(조불련)의 합동 공사 끝에 대웅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복원된 신라고찰 신계사(519년 창건) 복원공사의 현장 총지휘를 맡아온 도감, 제정(44)스님.19일 신계사에서 열린 남북 불교계 합동 낙성식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은 소감을 피력했다. 6·25전쟁 중 불타 없어진 신계사는 대웅전을 비롯해 안세루, 요사채, 산신각, 극락전, 나한전, 칠성각, 어실각, 축성전, 삼층석탑 등 11개동의 옛 모습을 되찾았으며 요사채 한 동 추가복원과 주변 시설이 정리되는 내년 말 복원공사가 마무리된다. 그는 “발굴, 단청을 비롯해 지금까지 복원공사에 동원된 연인원만 해도 남북을 합쳐 1만명이 넘었다.”면서 “특히 북한에선 전통건축의 맥과 연구작업이 거의 끊기다시피해 단청의 색감 하나를 결정하는데도 남북의 전문가가 며칠씩 실랑이를 벌였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목재 등 남한에서 가져오는 자재 조달에 1주일씩 걸리는 탓에 공사 진행이 원활치 못하고 기와가 휙휙 날아갈 만큼 바람이 강해 견디기 힘들었다는 고충도 털어놨다. 발굴현장의 성과를 함께 정리해 공동보고서를 내는가 하면 남북 통일 건축용어집 발간도 고려 중이다. 신계사 복원공사는 북측에서도 중시하는 큰 사업이라고 스님은 귀띔했다. “북측은 신계사를 비롯해 유점사, 표훈사, 장안사 등 금강산 4대 사찰과 국청사, 현화사 같은 개성 지역의 큰 사찰들을 복원·보수할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문화혁명 당시 사찰들을 모두 파괴했던 중국과는 사뭇 다릅니다. 남북이 함께 할 일이 많은 셈이지요.” 금강산 신계사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종교건축 이야기] (16)‘천불천탑’의 야외 법당 화순 운주사

    [종교건축 이야기] (16)‘천불천탑’의 야외 법당 화순 운주사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인 운주사(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0·사적 312호)는 말 그대로 ‘신비의 땅’이다. 무등산 자락인 영귀산 아래 대초리·용강리 일대 길 옆이며 산자락에 수많은 불상과 불탑이 늘어서 있어 ‘천불천탑’사찰로 불리는 명소. 창건 시기나 가람과 관련된 정확한 기록들이 남아있지 않아 숱한 설화들이 전해지며 지금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횡행하고 있다. 번듯한 전각은커녕 사찰에선 반드시 갖춰야 할 천왕문·사천왕상조차 없는 파격의 절집. 전통의 양식에선 한참 비켜 선 채 불탑·불상의 야외전시장쯤으로 비쳐지지만 사찰 곳곳에 서린 민중의 소박한 염원이며 도공들의 애틋한 정성 때문에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사찰의 이름대로라면 ‘구름이 머물다 가는 절’. 먼 옛날부터 運舟,運柱,雲柱,雲住 등 다양하게 불려왔지만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전남대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雲住寺’라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확인되면서 ‘구름이 머물다 가는 절’이란 ‘雲住寺’가 일반화됐다. 여러 이름만큼 누가 어떤 이유로 세웠는지에 얽힌 이야기도 가지가지다. 인근 마을에 중국설화에 전하는 선녀 마고할미의 이름을 딴 폭포와 손가락자국, 지팡이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고할머니 전설’, 신라 고승 운주화상이 신령스러운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창건했다는 이야기, 미래불 미륵의 혁명사상을 믿는 천민과 노비들이 모여 세웠다는 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선국사 창건설이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한반도를 배의 형국으로 보고 동쪽엔 산이 많지만 서쪽엔 산이 없어 나라의 운세가 일본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기 위해 배의 명치 부분인 운주사를 조성해 균형을 잡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한낱 ‘설’일 뿐 역사적 근거가 없다. 중종25년(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홍언필 편찬) ‘능성현조’의 “사찰 좌우 산등성이에 천불천탑과 석조 불감이 있는 운주사가 있다.”는 기록과 전남대박물관이 발굴한 암막새 기와와 ‘옴마니반메훔-밀교사원’이라 새겨진 수막새기와 등에 ‘운주사´란 이름이 등장한다. 이것 말고도 ‘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 사찰지 ‘범우고’,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에도 이름이 들어있지만 모두 “천불천탑이 있다.”“폐사되었다.”는 정도의 단순한 내용이 고작이다. 학계에선 불상과 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대체로 11세기에 창건,12세기에 천불천탑이 조성됐고 13세기에 백제탑 등 다른 석탑이 추가 제작됐으며 정유재란 때 폐사된 것으로 본다.1942년까지 사찰 안팎에 석불 213기와 석탑 30기가 있었으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석불 70기와 석탑 12기가 전부. 하지만 최근까지도 곳곳에서 불상과 불탑의 조각과 흔적들이 발굴되고 있는 만큼 실제로 천불천탑이 있었을 것이란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평지와 야산 측면의 암벽 위아래에 무리지어 서있는 석불들은 대부분 큰 돌의 앞면만 조각한 평판상인데 기법이 아주 치졸하다. 정통적인 양식에선 한참 동떨어진 채 한결같이 못생겼다. 불상의 이목구비 생김새나 비례, 조형미가 엉성해 부처의 위엄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할머니 부처, 아빠엄마 부처, 아들딸 부처, 아기부처처럼 친숙한 우리 이웃들의 애환과, 구원을 바라는 민중의 표정을 사실적으로 다듬어내려 애쓴 석공들의 토속적인 심성엔 깊은 정이 절로 느껴진다. 고은 시인은 그래서인지 “지지리도 못나 말 한마디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56억 7000만년 후에 올 후천개벽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죽어버린 운주 천탑”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운주사는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한 통한의 땅”으로 그려진다. 다른 고찰들에서 보이는 번듯한 전각도 찾아볼 수 없다. 도선국사가 사찰을 지을 당시 공사를 총지휘했다고 전해지는 공사바위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대웅전이며 지장전, 산신각, 일주문은 모두 1990년대 이후 만들어진 것. 허술한 가람과는 달리 사찰 중심의 석조불감(보물 797호)과 원형다층석탑(보물 798호), 일주문 안쪽의 구층석탑(보물 796호)은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석조불감은 판석으로 만든 감실 안에 두 개의 불상을 꽉 차게 봉안한 게 인상적이다. 불상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은 형식인데 사찰 한가운데 본존을 모신 것으로 보아 바로 이곳이 야외법당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석조불감 바로 북편의 원형다층석탑도 이색적이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을 모두 원반형으로 꾸민 이 석탑은 6층이 남아있지만 전통적으로 홀수 탑을 세웠던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7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층석탑은 운주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탑. 큰 자연석 기단 위에 9층을 올렸는데 탑신의 각 면에 새긴 마름모꼴이나 그 안의 꽃문양은 이곳에서만 보여지는 특이한 것이다. kimus@seoul.co.kr ■ 무게 250t 자연석에 새긴 세계유일의 석조 ‘부부와불’ 운주사의 석불·석탑들을 만드는 데 썼던 응회암 채석장이 있는 서쪽 야산 정상엔 세계 유일의 거대한 돌(石) 와불이 있다. 신도들이 탑돌이하듯 이 와불 주위를 도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을 만큼 운주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유적이다. 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형태의 일반적인 열반상과는 달리 앉은 모습의 비로자나불(길이 12.7m, 무게 150t 추정)과 선 모습의 석가모니불 입상(길이 10.26m, 무게 100t 추정)이 자연석에 나란히 조각된 형태. 두 불상이 나란히 누웠다 해서 ‘부부와불’로 통한다. 도선국사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천불 천탑을 하루 낮밤에 세운 뒤 맨 마지막에 두 부처를 세우려 했으나 공사 말미에 일을 싫어한 동자승이 일부러 “꼬끼오” 닭소리를 내자 석공들이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가버려 와불로 남게 됐다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와불 바로 아래엔 그 동자승이 벌을 받아 시위불(머슴미륵)로 변했다는 석불입상이 서있어 전설에 흥미를 더한다. 와불과 관련해 오래 전부터 “와불이 일어나는 날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말이 떠돌았으며 일제강점기에 이 속설을 믿은 일본인들이 불상을 훼손했다는,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도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석불의 북쪽 다리 부분이 남향의 머리 부분에 비해 5도가량 경사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상·입상 다리 부분과 좌상·입상 사이에 떼어내려 했던 흔적처럼 보이는 틈도 있다. 결국 산 꼭대기에 있던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긴 했지만 떼어내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보여진다. 전문가들은 “일으켜 세울 수 없는 돌부처를 암반에 조각했을 리 없고,250t은 충분히 됨 직한 거대한 석불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 작정으로 암반에 조각했는 지를 고려할 때 설계 잘못으로 인한 공사중단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 늦가을 산사에서 보낸 편지

    늦가을 산사에서 보낸 편지

    남쪽 지리산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다.9월 말부터 반도 허리의 설악산에서 시작한 단풍의 오색 물결이 백두대간의 봉우리를 징검다리 삼아 지리산까지 내려섰다. 성삼재와 정령치 등 높은 고갯마루를 건넌 단풍은 골 깊고 물 맑은 계곡까지 찾아왔다. 알다시피 지리산의 수많은 계곡에는 천년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다. 오색의 파스텔 톤으로 색칠한 산사의 가을을 보고 있노라면 속세의 때에 찌든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깊은 계곡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산사의 모습에 눈이 시원해지고, 댕그렁 댕그렁 청아하게 울려대는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 가슴까지 맑게 흐르는 옥수(玉水) 한 모금에 마음의 때가 씻겨나간다. 자, 깊어가는 이 가을에 모든 것을 잠시 멈추고 지리산의 산사로 훌쩍 떠나보자. 그리고 보고픈 사람에게 편지 한 장을 써보자.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형,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아마 형에게 대학 2학년 때 편지를 써보고 첨이네. 가끔 메일이나 전화로 이야기하다 이렇게 펜을 드니 좀 어색하다. 참, 형이 그렇게 칭찬하던 가을 지리산에 다녀왔어. 생각나? 최루탄 가스로 매콤한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야, 가을 지리산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이야기 하지마.”라고 크게 외쳤던 것 말이야. 그래서 지리산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단풍도 보고 천년이 넘는 사찰을 돌아보았지. 너무 좋았어…. # 어머니의 가슴 같은 실상사 지리산 서쪽의 뱀사골 끝자락에 연꽃 모양의 산세가 둘러싸고 있고, 그 연꽃의 밥 즉 ‘연밥’에 해당되는 소중한 자리에 실상사(實相寺)가 위치해 있어. 한국 선문의 발상지인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져. 우리나라 선문의 효시인 ‘구산선문’이 이곳 ‘실상산문’에서 출발한 우리나라 선풍(禪風)의 발상지이기도 해. 형, 근데 참 재미난 사찰이야. 이렇게 유서 깊고 오래된 절이 울창한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 한가운데 있어. 일주문도 없고 잘 꾸며져 돌담에 마치 오래된 한옥같은 느낌이라 마음이 너무 편안해져. 천왕문을 지나자 사찰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아담한 목조 건물이 몇 개, 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에 외갓집에 온 듯 너무 마음이 푸근해져.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여럿 있고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어.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보물33호), 수철화상능가 보월탑비(보물34호), 석등(보물35호), 부도(보물36호), 삼층쌍탑(보물37호) 등 보물이 즐비해. 무심히 바라보면 사방이 터져있는 들판 한가운데에 멋쩍은 듯 엉거주춤 서 있어 볼품없지만 마음을 열고 다가서면 수 많은 국보와 보물뿐 아니라 지친 우리 마음을 감싸주는 어머니 가슴 같은 곳이야. # 불타버린 뱀사골과 피아골 정말 지리산의 날씨는 ‘여인의 마음’과 같다고 한 말이 실감나더라. 가을 햇살이 아름답던 날씨가 갑자기 흐리더니 비가 오기 시작하더라고. 그래서 더 좋았어. 부슬부슬 비 내리는 사찰의 처마 밑에 잠시 걸터앉아 한적한 경내에 울려 퍼지는 풍경의 아름다운 소리, 그 여운이 가슴 속에서 잔잔히 울려…. 차를 몰고 861번 도로로 노고단을 향해 가는 길은 정말 예술이야. 구불구불 위험하긴 하지만 지리산 봉우리를 타고 넘는 하얀 구름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어. 근데 좀 아쉽게도 올해는 가을 가뭄이 심해서인지 단풍이 좀 별로야. 노고단쪽은 이미 단풍이 들었는데 예년보다 덜하고 7부 능선 아래는 아직 단풍이 내려오지 않았더라고. 아마 형이 이 편지를 받는 주말쯤이 절정에 달할 것 같아. 수려한 단풍으로 유명한 남원 뱀사골로 들어서니 형의 이야기가 허풍이 아님이 실감나더라. 계곡 들머리의 수려한 바위들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와. 또 맑고 깨끗한 소·담을 물들인 붉은 물결에 지리산의 속살을 느꼈어. 이무기가 용이 됐다는 ‘탁용소’,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았다는 ‘뱀소’, 소금장수가 물에 빠져 이름이 붙은 ‘간장소’, 정진스님이 산신제를 올렸다는 ‘제승대’ 등 이번 주에 가려면 꼭 뱀사골로 가, 알았지? 참, 4일 뱀사골에서 단풍제례가 열려 볼거리를 더한대. 구름 낀 노고단을 넘어 구례 피아골로 향했어. 피아골은 예년에 비해 단풍이 좀 늦데. 아마 11월 초·중순이 절정일 것 같대. 그래서 연곡사에 들렀어. # 가을 길의 저 끝에 19번 국도에서 빠져 양편으로 황홀한 모습의 단풍나무 길을 달렸어. 아직 절정을 맞지 않았지만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길가에 진하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서로의 모습을 뽐내는 여인의 자태처럼 농염한 모습이야. 연곡사는 신라 진흥왕 6년(545년)에 연기대사가 창건한 고찰인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어. 그 후 수 차례 증건과 소실을 되풀이하다 지금은 작은 법당이 초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야. 연곡사에 가면 꼭 보아야 할 두가지가 고려시대에 만든 ‘동부도’와 ‘북부도’란 석탑이야. 자세하게 봐. 그 단단한 재질인 화강암을 한땀 한땀 정으로 쪼아서 그린 운룡과 사자, 사천왕 등 그림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야. 아마 로마에 있는 라오콘 상이나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그 이상이야. # 반달곰이 살고 있는 천년 고찰 형, 지리산 반달곰이 살고 있는 문수사라고 들어봤어? 나도 신기해서 안내판을 보고 핸들을 꺾어 들어갔어. 세상에 굽이굽이 험한 산길을 한 30분을 달렸나.1단을 놓고도 힘겹게 오른 산의 끝자락에 문수사가 있더라. 무려 해발 700m야. 지리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런 사찰이야. 백제 성왕 25년(547년) 연기조사께서 창건했고 원효, 의상 대사를 비롯해 윤필, 서산, 소요, 부유, 사명대사 등 우리나라의 고승들이 수행 정진한 제일의 문수도량이래. 임진왜란 때 일부가 파괴됐고 6·25때 전소되었다가 1980년대에 새로 지어졌대. 3층 법당 대웅전(목탑)이 멋져. 또 문수사에 정말 반달곰이 있어. 비록 철창에 갇혀있지만 시커먼 곰의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진 하얀 V자가 예쁘더라. 원래 4마리였는데 두 마리는 방사를 하고 이젠 두 마리만 남았대. 이밖에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지은 화엄사, 녹차의 시배지로 유명한 쌍계사, 작고 아담한 천은사 등도 가을에 꼭 한번 들러보면 좋은 절이야. 어때, 형. 지리산에 가본 지 오래지. 아이들과 형수님 손잡고 이번 주에 지리산의 고즈넉한 산사에 꼭 한번 다녀와. 마음이 넉넉해질 거야. # 단풍 구경도 식후경이래 참, 내가 맛있는 식당 몇 개 소개할게. 남원은 추어탕이 유명한 거 알지. 광한루옆 옛 육남시장터 천변에 있는 새집(063-625-2443)과 부산집(063-632-7823)이 유명해.6000~7000원선이야. 가족들과 좀 근사한데서 먹고 싶으면 남원 시내 청월장(063-633-7533)의 한정식 한번 먹어봐. 도미회, 대하, 육회, 삼합과 각종 나물 등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나와.1인분에 3만원인데 아이들이 어리니까 형수랑 2인분이면 충분히 먹을 거야. 또 뱀사골에는 그때 그 식당(063-625-3329)을 비롯해 산채백반집이 많아.15∼16가지나 되는 산나물이 푸짐해.7000원이야. 구례쪽에서는 화엄사 가는 길의 그 옛날 산채식당(061-782-4439)과 지리산식당(061-782-4054)이 유명해. 고기가 생각나면 이시돌(061-782-4015)의 한방 갈비도 강력추천해. 담백한 육질과 깔끔한 밑반찬에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
  • [산이 좋아 산으로] 충남 예산 덕숭산

    [산이 좋아 산으로] 충남 예산 덕숭산

    ‘산이 절을 만들고, 절이 산을 만든다’ 했던가. 그리 높거나 깊지도 않고 산세가 빼어난 것도 아닌 너무도 평범한 모습의 충남 예산의 덕숭산(495m). 이름 또한 낯설지만 천년고찰 수덕사를 품에 안고 있기에 찾는 이의 발길이 사철 끊이지 않는 곳이다. 덕숭산 찾아가는 길은 험한 산을 넘지도 않고 넓고 깊은 강을 건너지도 않는다. 온천으로 유명한 덕산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가로지르는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그 곳에 덕숭산이 있다. 산행은 수덕사에서 시작한다. 주차장을 지나 5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일주문. 왼편 초가로 된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이 살던 곳이다. 이 화백이 직접 써서 걸어놓은 현판과 뜰 앞 바위에 새긴 암각화를 볼 수 있다. 금강문, 사천왕문, 황하정루를 차례로 지나 대웅전 앞마당에 선다.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1308)때 건립된 것으로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묵직해 보인다. 국보라는 감투의 무게를 빼더라도 빛바랜 색깔, 기둥의 터진 자국 등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들이 시선을 빼앗는다. 계단을 밟으며 호젓한 오솔길을 10여분 오르니 초가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만공스님(1883∼1946)이 참선을 위해 거처하던 소림초당이다. 위로는 만공스님이 세웠다는 7.5m의 거대한 미륵불입상이 있다. 옆쪽 향운각 마당에 서면 여태 지나온 숲들이 수덕사 전경과 함께 내려다 보인다. 만공탑 왼편 길을 따라 100m 정도 올라가면 스님들의 참선도량인 정혜사가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정혜사 앞마당은 덕숭산 제일의 조망터. 용봉산과 수암산이 보이고 저 멀리 해미읍내가 손에 잡힐 듯 한 눈에 들어온다. 정혜사 기와지붕 뒤로 정상부 능선이 가깝게 다가서 있어 정상 바로 아래인 듯하지만 실제로 이곳은 덕숭산 7∼8부 능선이다.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바위와 흙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등산로. 정혜사를 출발한 지 10여분, 능선 갈림길에 이른다. 오른쪽 길을 따라 5분 정도 더 오르면 정상. 북쪽 45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우람하게 솟은 가야산(677m)의 모습과 그 오른편으로 예당평야가 끝없이 펼쳐진다. 하산은 왔던 길을 되짚어 수덕사로 내려서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른 길을 원한다면 정상에서 동남쪽인 용봉산 방향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내려설 수도 있다. 전월사라는 자그마한 암자를 거쳐 정혜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거리는 조금 멀지만 바위가 별로 없고 폭신한 흙길이라 걷기에 부담 없어 좋다. 정혜사에 이르러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게 싫다면 견성암을 거쳐 황하정루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른다. 시멘트포장길이라 산길의 맛은 없지만 중턱에서 수덕사를 조망할 수 있다. 총 산행 거리는 4.8㎞, 약 2시간 정도 걸린다. # 여행정보 수덕사 입구에는 산채정식을 잘 하는 음식점이 많다. 재료가 비슷하고 별다른 양념을 첨가하지 않아 어느 음식점이나 맛이 비슷하다. 옛집(041-337-6101)은 이곳에서 영업한 지 30년이 넘은 음식점.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며느리가 운영한다. 더덕구이, 조기, 송이버섯, 도토리묵 등 푸짐한 반찬과 우렁된장찌개가 일품이다. 산채비빔밥 7000원. 글 김도훈(월간 MOUNTAIN 기자) www.emountain.co.kr
  • 충남 공주 영평사 구절초 축제

    충남 공주 영평사 구절초 축제

    산과 들이 붉고 화려하게 물들어 가는 계절, 가을. 소박하고도 청초한 모습으로 피어나 가을바람에 가녀린 몸을 맡긴 채 하늘거리는 꽃이 있다. 쑥부쟁이, 개미취 등과 뭉뚱그려 들국화로 일컬어지는 구절초다. 퇴락해 가는 계절의 끝자락에 피어나 보는 이의 눈을 아리게 하는 대표적인 가을꽃. 고 박용래(1925∼1980) 시인이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이라고 노래했듯, 낮고 해맑은 모습이 여간 정겹지 않다. 어느 시인은 또 “비탈진 들녘 언덕에 니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 틈에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텅빈 들의 색시여….”라며 칭송하기도 했다. 구절초 축제가 한창인 충남 공주시 영평사를 다녀왔다. 붉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가을산 한자락을 하얀색으로 명징하게 빛내고 있었다. 글 사진 공주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그랬듯, 영평사와 장군산 기슭이 온통 구절초로 둘러싸여 있다. 진입로에서 시작된 구절초 군락은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과 요사채 뒤편 산비탈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때아닌 횡재를 만난 벌과 나비들이 부산을 떨어댄다. 영평사 주변 1만여평을 하얗게 수놓은 구절초 군락은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고, 영평사 주지 환성 스님이 구절초의 청초한 모습에 반해 10여년전부터 공들여 가꿔온 것이다. “13년전 만행을 하던 때에 구절초를 보았는데 청초한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꽃말이 ‘어머니의 사랑’이었어요. 수행자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며 순화시켜 주는 꽃이지요. 저 혼자 보기 아까워 축제를 열었는데 오시는 분들마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행복해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꽃을 완상하며 무슨 의학적 효험을 따질까마는, 딸을 출가시킨 우리네 친정 어머니들은 예전부터 9월이 되면 갓 피어난 구절초를 사랑과 정성으로 채집해 그늘에 말려 두었다가 시집간 딸이 해산을 하고 친정에 오면 달여 먹이곤 했다. 그런 까닭에 구절초에는 선모초(仙母草), 신선이 어머니들에게 준 약초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했다. 일년 중 양기가 가장 충만하다는 중양절, 음력 구월구일에 채취해 달여 먹으면 특히 부인병에 좋다고도 한다. 요사채 뒤편에서 미래의 추억거리를 열심히 만들고 있던 안명석(43·대전)씨는 “탐스럽지는 않아도 멀리서 보면 소박하고 평화로운 모습에 절로 마음이 평안해지네요.”라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안씨는 또 “막연히 가을이면 피는 꽃이려니, 뭔가 청순하지만 서러운 느낌을 간직한 꽃이려니 짐작만 했어요. 그런데 유심히 살펴 보니 닮고 싶을만큼 소박하고 청초한 꽃이네요.”라며 애틋한 여심(女心)을 내비치기도 했다. 구절초를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 깔깔거리며 웃는 어린아이와 닮았음을 느끼게 된다. 노오란 암술을 둘러싼 채 활짝 벌어진 이십여개의 꽃술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그대로다. 구절초밭을 서성이다 보면 어디선가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쏟아지는 듯하다. 그 아이가 자라 여고생이 되고, 어느새 성숙한 여인이 되어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에 ‘머리핀’ 대신 꽂았을 때, 소박한 구절초는 그 어느 꽃보다 화려한 꽃이 된다. # 먹을거리, 볼거리 풍성 영평사에 가면 반드시 맛봐야 할 것이 국수와 백련잎 찹쌀밥. 점심무렵이면 무료로 제공되는 국수를 먹으려는 관람객들이 줄을 잇는다. 사찰음식이 그렇듯, 일체의 조미료를 쓰지 않고 죽염수 등으로만 간을 맞춰 정갈한 맛을 낸다.2∼3년된 된장이 익어가는 장독대를 소반삼고, 청량한 공기를 반찬삼아 먹는데, 노인이건 장성한 청년이건 한그릇을 게눈 감추듯 비워낼 만큼 일품이다. 백련잎에 싸서 쪄낸 찹쌀밥을 이곳에선 연선식이라고 부른다. 반찬이라고는 달랑 고추장아찌 하나. 가격은 5천원을 받는다. 그럼 맛은 어떨까? 백련잎 위에 찹쌀밥과 고추장아찌를 얹어 한쌈을 만든 다음, 입안 가득 넣어 보시라. 화려한 맛에만 길들여져 있던 미각에 새로운 충격이 더해진다. 티베트 승려들이 모래로 재현한 만다라 시연회, 산사에서 열리는 음악회 등은 눈을 즐겁게 한다. 아울러 청소년들이 세시풍속을 재현하는 중양절 잔치, 구절초 사진전시회 등이 볼거리를 더해주기도 한다. 구절초 축제는 오는 22일까지 계속된다.(041)857-1854.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간고속도로→정안 나들목→논산·공주 방향→조치원·종촌방향→은용리→영평사 ●중부고속도로→서청주 나들목→대전·공주방면 508번 지방도→연기군 조치원읍→36번국도 공주방향→산학리→영평사
  • 단풍에 취하고 음악에 취해볼까

    단풍에 취하고 음악에 취해볼까

    단풍이 물든 관악산에서 음악회가 열린다. 과천시는 토요일인 오는 28일 관악산 연주암 대웅전 앞마당에서 ‘산상음악회’을 개최한다고 16일 밝혔다. 김범수 전 SBS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되는 음악회에는 일렉쿠키, 김지연, 박학기, 첼로, 풍경 등 5명의 인기가수와 한뫼 과천시국악예술단, 연주암 합창단 등이 출연하여 자연과 음악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무대를 선사할 예정이다. 시는 올 가을 가뭄으로 단풍이 예년에 비해 곱지 않은 편이어서 주민들에게 대신 음악을 선사하고자 이같은 행사를 마련했다. 낮 12시30분부터 70여분간 진행된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종교건축 이야기] (13) ‘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 팔상전(捌相殿)

    [종교건축 이야기] (13) ‘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 팔상전(捌相殿)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주지 도공 스님). 신라 진흥왕조인 553년 의신 스님이 창건했고 혜공왕조인 776년 진표 율사가 중창한 ‘호서제일가람’이다. 정유재란때 불타 없어졌지만 사명대사와 벽암대사에 의해 1624년에 복원된 사찰.‘법이 머문다.’란 뜻의 법주(法住)는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에 유학했던 창건주 의신 스님이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와서 후학을 양성할 절터를 찾기위해 머물렀다는 연기설화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시대에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법상종 종찰의 면모를 유지해 왔으며 지금은 국내 대표적인 미륵도량이자 화엄사찰이기도 하다. 산내암자 11개, 말사 80개를 거느린 주요 본사답게 이런저런 사연이 많지만 아무래도 법주사의 핵심은 국내 유일의 목조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이다. 흔히 사찰의 탑이라면 화강석으로 만든 석탑을 떠올릴 만큼 나무로 세운 목탑은 생소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원시불교 이래 탑전은 목조의 전통을 유지해 왔으며 ‘삼국유사’ 등에도 탑의 시원이 목조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전한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도 목탑이 세워진 사실이 만복사지 탑지에서 밝혀졌고 조선시대까지 전해져왔음이 각종 유적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법주사 팔상전으로, 이 팔상전은 현재 목조 탑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1984년까지만 해도 전남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목조탑의 쌍벽을 이뤘으나 아쉽게도 소실됐다. 법주사 경내의 중심에 선 팔상전은 사방에 계단이 설치된 석조 기단위에 5층으로 올린 5층 목탑이지만 내부는 가운데 벽을 중심으로 한 통간 건물로 되어 있다. 정사각형 모양의 사찰 전각 기단은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특히 동서남북에 배치된 계단은 구도자에게만 허락된 수행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한다. 기단에 올라서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팔상도가 모셔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벽면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했고 불상 앞에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전체 5층 가운데 1·2층은 5칸,3·4층은 3칸,5층은 1칸으로 구성한 것도 특이하다. 팔상전이란 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인 팔상도를 모신 전각. 쌍계사. 통도사. 운흥사. 선암사. 범어사 등의 팔상전에서도 이같은 팔상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사찰의 팔상전에 모셔진 팔상도가 불단을 향해 평면적으로 나열되어 한꺼번에 전체를 볼 수 있지만 법주사 팔상전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한가운데 조성된 네 벽을 돌아가면서 각 벽면에 두 폭씩을 배치했기 때문에 한 곳에서 전체를 다 볼 수가 없다. 팔상도의 8폭을 전부 보기 위해선 팔상전 안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팔상도를 따라 돌다보면 결국 가운데 벽 심초석(心礎石)에 봉안된 불사리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탑돌이를 하게 되는 셈이다.(지난 1968년 팔상전을 해체수리할 때 심주(心柱) 밑에서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어 이곳이 불사리를 봉안한 장소임이 확인되었다. 목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법주사 팔상전이 처음이다.) 팔상도를 따라 탑돌이를 한 뒤 문을 나서서 지붕을 올려다보면 2층 처마 아래 모서리에 새겨진 난쟁이 모습의 인물과 용 형상이 눈길을 끈다. 이 가운데 연꽃 봉오리 위에 쪼그려 앉아 두 팔과 머리로 추녀를 받친 모습의 난쟁이상이 흥미롭다. 왕방울 눈에 나선형 눈썹과 짙은 수염을 갖고 있는데 부처님을 공양하고 불전을 수호하는 불교 외호신 중 하나라고 한다. 법주사 팔상전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불사리를 봉안한 탑에 더해 예배 공간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탑의 내부를 예배공간으로 썼던 기록은 삼국유사 권5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조의 “동입내원탑중이은(童入內院塔中而隱)”이라는 구절에 처음 나타나는데 “동자가 탑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내용이다. 학계에서는 사람이 탑 안으로 숨어든다는 것은 탑 내부에 큰 공간이 있었음을 의미하며 법주사 팔상전이 바로 동자가 숨어들었다는 그 탑 형식의 목탑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팔상전은 지난 1968년 해체 보수공사 이후 내부 통풍이 안되고 벽면에 습기가 심하게 차오르는 등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법주사 주지 도공 스님은 “미륵신앙과 화엄사상을 함께 담은 법주사의 중심건물인 팔상전은 불사리 봉안처로서의 탑 성격과 예배장소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유일한 탑전인데 예산과 보존 처리의 어려움 때문에 훼손되어 가는 문화재를 그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kimus@seoul.co.kr 사진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 법주사의 명물들 법주사 경내 곳곳에는 크고 작은 명물들이 들어서 있다. 팔상전을 비롯해 석련지, 쌍사자석등이 국보로 지정됐고 보물도 12점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국보·보물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과 사천왕상, 석련지, 대웅보전, 금동미륵대불은 신도와 관람객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문화재들이다. 우선 일주문을 지나 팔상전과 대웅보전을 가기 위해 통과하는 천왕문의 사천왕상은 국내 사찰중 가장 큰 규모. 천왕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조선 후기 맞배지붕 건물인데 중앙 통로 양쪽 2칸에 높이 5.7m, 둘레 1.8m 크기의 사천왕상을 2구씩 배치해 천왕문을 통과하는 이들의 시선을 제압한다. 사리각 옆 암벽에 조각된 전체 높이 6.18m 크기의 마애여래의상도 독특한 불상. 둥근 얼굴과 감은 듯 뜬 눈에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인 추상이 인상적이다. 연꽃 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싼 연봉이 불상을 둘러싸고 발 아래엔 반쯤만 조각된 연화문상석이 놓여 있다. 석련지는 원래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의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 신라 성덕왕조때 화강석으로 조성됐는데 8각 지대석 위에 3단의 굄을 만들고 다시 굄돌을 올려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무량수의 감로천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신라 진흥왕때 창건된 대웅보전 안의 불상 3구는 국내 사찰 법당에 봉안된 소조불 좌상중 가장 큰 것. 중앙에 비로자나불, 좌측에 노사나불(아미타불), 우측에 석가모니불을 모셨는데 각각 마음, 덕, 육신을 뜻한다고 한다. 최근 개금불사를 마치고 점안식을 가졌다. 팔상전 왼편, 미래 미륵부처님의 현존을 의미하는 금동미륵대불은 국내 최대의 규모.8m 높이의 기단 위에 25m높이로 조성됐는데 소요된 청동만도 160t이나 된다고 한다.
  • [종교건축 이야기] (12)현대건축으로 부활한 강릉 초당성당

    [종교건축 이야기] (12)현대건축으로 부활한 강릉 초당성당

    경포대 건너편, 동해바다와 경계를 이룬 초당마을에 오똑하니 자리잡은 초당성당(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137, 주임 정귀철 신부)은 언뜻 보기엔 성당이 아니다. 오히려 미술전시관이나 공연장에 가깝다. 그 흔한 고딕이나 로마네스크 양식 등 전통 교회 건축의 모습이란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잘 지어진 이 문화공간 인상의 성당엔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오롯이 담겼다. 물고기 모양의 성당 전체 외관도 그렇거니와 각 건물이며 공간 하나하나에 숨은 신앙적 의미를 찾아나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성직자와 건축가의 의기투합이 빚어낸 파격적인 신앙터. 현대적인 공간이 창출하는 묘한 분위기에 더해 성직자와 신자들의 도타운 교감도 남다른 독특한 성당이다. ●사제 집무실 등 5개 부속건물은 ‘다섯조각 빵´ 상징 초당성당은 지금의 아름다운 모양과 달리 원래 빈한한 교회로 시작했다.1996년 옥천동성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설정됐지만 당시만 해도 자체 건물 없이 지금의 성당에서 2.5㎞ 떨어진 중앙신용협동조합 3층 예식장 공간을 빌려 썼다. 사제관도 초당초등학교 주택을 전세내 사용했다고 한다. 그 이듬해 춘천교구장에 착좌한 장익 주교가 교구의 상징 본당으로 세우겠다는 뜻으로 성당 기공식을 가졌으나 IMF 사태의 여파로 무려 5년만인 2002년 4월에 가서야 완공, 헌당식을 가질 수 있었다. 성당 건축에 든 비용은 37억. 강원도내 각 본당들이 십시일반 갹출해 비용을 마련했고 주임 신부와 수녀·수도자, 신자들이 전국 각지를 돌며 오징어 등 건어물을 팔아 건축비를 보탰다. 하지만 지금 초당성당의 위상은 재정·신자 수 등 교세로 볼 때 춘천교구 55개 본당중 13위를 지키고 있다. 전체 신자 1000명 가운데 주일 미사에 500여명이 꼬박꼬박 참석한다고 하니 미사 참석률이 무려 50%나 되는 셈이다. 한국 천주교 전체의 미사 참석률이 33% 정도이고 보면 전국 최고의 수준이다. 장익 주교와 손바닥을 맞춘 주인공은 건축문화 대표인 설계자 김영섭(시몬)씨. 땅과 대지를 중시하는 조형관을 갖고 있는 건축가로 성당의 뜻, 쓸모, 아름다움 등 삼박자를 강조한 장익 주교의 주문에 응한 것이 바로 ‘오병이어 기적’의 구현이다. 우선 원형을 띤 성당 본당과 그 앞마당은 ‘두 마리 물고기’이며 여기에 달린 사무실과 사제 집무실, 회합실, 유아실 등 5개의 부속 건물이 ‘다섯 조각 빵’으로 상징된다. 표고 차가 7m나 될 만큼 경사지인데다 물고기 형상으로 길쭉했던 땅은 원래 성당부지론 적합하지 않았으나 결국 특유의 감각으로 일궈낸 역작인 셈이다. 성당 외관은 ‘한 방울의 보혈(Precious blood)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상징을 가진 물방울 모양 평면을 따라 둥글게 에워싼 원형. 성당 앞 쪽엔 12사도를 상징하는 흰 기둥 12개가 도열한 원형 마당이 있다. 원형 마당을 둘러싼 열주 숫자 12에는 예수 부활의 증인인 12사도를 본받아 복음을 전파한다는 공동체의 염원이 담겼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는 신자들은 성당 외벽과 내부 공간 사이의 양쪽 경사진 통로를 따라 걸어올라야 한다. 이른바 순례길이다. 마치 사찰에 들어갈 때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차례로 지나야 대웅전에 다다르게 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는, 어두운 순례길을 따라 잠시 걷다 보면 마침내 부활을 상징하는 밝은 공간에 멈추게 된다. 성당 외관도 그렇지만 흰색의 원형 벽면으로 둘러진 내부 공간은 놀랄 만큼 파격적이다. 군더더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 깨끗하다. 성당에서 흔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전혀 쓰지 않았지만 제단 뒤 천장에서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연출한 자연광이 분위기를 고요하고 아늑하게 이끈다. 여기에 부활과 생명을 상징하는 흰색으로 마감된 바닥과 천장이 정결한 분위기를 한껏 더해준다. 성당 안쪽 내벽은 거친 콘크리트면을 그대로 살려 가공의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다. 거푸집을 떼어내고 벽 표면에 압력을 가해 골재 재질과 분포에 따라 요철을 만들었는데 마치 정으로 자연스럽게 다듬은 느낌이다. 이와는 달리 큼직큼직한 타일을 깨뜨려 이어 붙인 외벽은 한 개의 작품에 다름아니다. 중심공간인 제대 뒤쪽에 세워진 십자가에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린 일반적인 예수 고상(苦像)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부활해 하늘로 오르는 앳된 소년의 얼굴을 한 예수가 있을 뿐이다. 신자들이 바라보면서 죽음 뒤의 부활을 가슴에 담도록 한 연출이다. 성당 옆 도로 건너편 솔밭 언덕에 세워진 목조 사제관과 수녀원은 원래 있던 소나무들을 전혀 훼손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게 영락없이 전원주택의 모습이다. 원래 성당 부지 안에 있었지만 도시계획에 따라 성당과 분리되었는데 향후 성당 쪽으로 옮겨진다고 한다. ●관광객·건축학도 즐겨찾는 명물로 요즘은 ‘예쁜 현대식 성당’이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의 신자와 일반인들의 발길이 쉼 없이 이어지고 있다. 관광객은 물론 건축학도들도 즐겨찾는 명물이 되었다. 강릉에 여행왔던 예비 신랑신부가 우연히 성당에 들렀다가 이미 예약해놓은 혼배미사 장소를 이곳으로 바꾸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외형에 걸맞은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만드는 게 꿈이자 역할”이라는 정귀철 주임신부. 그는 신앙공간에 머물지 않는 대중사목에 열심이다.“성당 같지 않은 건물에서 어떻게 기도를 하냐.”며 발길을 돌렸던 신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는가 하면 항상 성당 앞에 천막을 쳐놓고 신자들과의 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kimus@seoul.co.kr ■ 오병이어란 신약성서 ‘마태복음’14장 14∼21절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 이야기. 예수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사건으로 ‘마가복음’(6:35∼44),‘누가복음’(9:12∼17),‘요한복음’(6:5∼14) 등에도 나타난다. “AD 29년 예수가 갈릴리호의 빈들에 있을 때 많은 무리가 찾아왔는데 이들 중 병든 자를 고쳐주었다. 저녁 때가 되어 먹을 것이 없어 고민할 때 한 어린아이가 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축사하였다. 그리고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어 큰 무리로 먹게 하였는데,5000명(여자와 어린이는 뺀 숫자)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았다.” 이 기적은 예수가 ‘생명의 떡’이 되었으며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고 예수가 신적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기독교계에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인간에 대한 예수의 사랑을 증거하는 기적이자 장차 임할 천국잔치를 예표(豫表)하는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외에도 복음서에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등 35회에 이르는 예수의 기적이 기록되고 있다. 특히 ‘마태복음’15장에는 떡 7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4000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와 비슷한 기적이 등장한다.
  • [주말탐방] 한옥의 재발견

    [주말탐방] 한옥의 재발견

    최근 한 TV 광고에 흥미로운 문구가 등장했다.‘집이란 무엇일까’. 기실 우리네는 점심 한 끼도 허투로 먹지 않는다. 옷 한 벌 고르는 데 백화점에서 한나절을 허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집에 대한 고민은 인색하다. 우연과 필연의 교집합으로 세상에 나와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겪다 저 너머 세상으로 떠나는 순간까지 우리를 둘러싸는 게 바로 집이다. 집은 삶과 죽음의 공간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네 집에서 ‘5000년 역사’의 흔적을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공간에는 정작 뿌리가 없다. 한옥에 관심을 갖는 요즘 분위기도 너무나 서구풍 일색인 데 대한 반작용은 아닐까. 민족을 앞세운 얄팍한 상업주의나 편협한 국수주의가 아니다. 우리의 삶의 원형(原型)을 재현하는 작업이다. 한옥의 재발견,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숙제이다. “어이 김씨, 좀 더 세게 내리쳐 봐라. 그래가꼬 수백년 동안 지붕 하중을 견디겠나?” 지난 25일 오후 충남 부여군 합정리 백제역사재현단지 건축 현장.10여명의 목공 기능인들이 400여평 넓이의 금당의 기둥에 매달려 있다.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으려 하늘을 가린 함석 지붕 아래로 들어서니 뜨거운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오랜만에 내리쬐는 햇살에 함석이 한껏 달궈진 탓이다. 인부들의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한다. 큰 비로 열흘남짓이나 공을 친 터라 쉴 틈이 없다. 서너명이 한꺼번에 달라붙어 지붕의 하중을 땅으로 분산하는 포부재를 떡매로 연방 내리친다. 공사를 총지휘하는 최기영(63) 대목장(大木匠)의 목소리가 건물 안을 쩌렁쩌렁 울린다. 단추를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언뜻 내비치는 검게 그을린 어깨 근육. 경복궁 중건 이래 최대 한옥 건축현장이라는 백제역사재현단지에 매달리면서 얻은 ‘훈장’이다. 이들의 손길로 한옥의 숨결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한옥의 원형 백제 한옥 재현 공사가 시작된 것은 2001년. 충남도가 3771억원을 들여 2010년 완공을 목표로 조성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100만평 정도.83만평의 백제역사재현촌과 17만평의 연구교육촌으로 나뉜다. 역사재현촌은 ▲백제건국 초기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개국촌 ▲왕궁 ▲전통민속촌 ▲풍속종교촌으로 이뤄진다. 이곳에 들어설 한옥은 모두 166동. 사용되는 나무는 18t 트럭 500대 분량으로 160억원어치다. 강원도 산도 있지만 주로 러시아와 캐나다에서 들여왔다. 기와 82만 2000장, 화강석 8400t, 흙 500t도 들어간다.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기능촌 5층 목탑’. 바닥면적은 16평에 불과하지만 높이는 38m에 이른다.12층 아파트와 맞먹는다. 세심하고 빼어난 건축기술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곳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이환중(62·충남 홍성군 형산리)씨는 “5년째 더위와 삭풍과 싸우며 일하고 있지만 후손에게 천년 넘게 남을 집을 내 손으로 짓는다는 것은 목수로서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밝게 웃었다. 재현단지가 주목을 받는 것은 단지 규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삼았던 서기 600년대 한옥을 되살렸다는 의의가 더 크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건축물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나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모두 12∼13세기 것. 국내에서는 백제 건축 양식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에 따라 충남도는 중국 뤄양, 일본 교토 등 백제와 활발하게 교류한 지역을 중심으로 20여차례의 답사를 거쳐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백제 한옥 양식을 복원할 수 있었다. 최 대목장은 “백제 한옥은 처마의 길이가 짧고 집을 한 덩어리로 받쳐주는 들보인 하앙이 강조되면서 조선 한옥보다 좀 더 고급스럽고 근엄한 것이 특징”이라면서 “우리 시대의 한옥 양식을 만드는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될 것”이라고 자부했다. ●반영구적, 친환경적 한옥 한옥이 단순히 전통시대의 유물만은 아니다.‘전통의 재발견’이라는 최근 추세에 따라 한옥은 새로운 주거의 형태로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다. 얼마 전 임기를 마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서울 가회동 북촌 한옥마을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소식도 별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한옥식으로 내부를 개조한 아파트도 적지 않다. 향교나 사찰에 가면 조선 시대 한옥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아파트는 30년만 지나도 곳곳에 금이 가고 물이 새기 일쑤다. 한옥의 내구연한은 150년이다. 제대로 짓고 틈틈이 수리하면 500년 이상 간다. 한옥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주 재료인 소나무와 회벽은 건조하면 습기를 내뿜고, 축축하면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인다. 외부와의 공기 소통도 원활하다. 요즘 유행하는 아토피성 피부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친환경적’이라는 면에서 지상의 어떤 건축물도 따라갈 수 없다. 전용면적이라는 개념 없이 100평이면 100평 다 건물로 쓸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하지만 한옥이 보편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돈’ 문제다. 한옥의 평당 건축비는 1000만원 이상. 아파트의 서너배나 된다. 서민들로서는 엄두도 내기 힘들다. 땅값이 비싼 도시에서 마당까지 갖춘 한옥을 지으려면 10억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다. 자재의 표준화로 건축비를 상당히 낮출 수 있다. 도시민들도 아파트를 리모델링해 한옥의 풍취를 일상에서 누릴 수 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건축학과 장헌덕 교수는 “기술과 자재를 표준화하고 비교적 저렴한 목재를 사용하면 평당 건축비가 700만원 선으로 떨어질 수 있다.”면서 “서구식 건축물에 흙벽을 치거나 한지를 바르는 등의 리모델링도 현대 한옥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부여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재현공사 규모는 ▲면적 100만평 (개국촌·왕궁·전통민속촌·풍속종교촌) ▲공사비 3771억원 ▲완공시기 2010년 ▲동 166동 ▲나무 18t ▲트럭 500대분160억원 ▲기와 82만 2000여장 ▲화강석 8400t ▲흙 500t ▲기타건축물 (기능촌5층목탑) 바닥면적 16평·높이 38m 12층아파트 규모 ■ 최기영씨가 말하는 대목장이란 대목장은 설계, 치목, 건설, 감리 등 나무로 집을 짓는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사람이다. 문짝, 난간 등 작은 목공일을 하는 소목장과 구분된다. 조선시대에 대목장의 지위는 상당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위계 질서 속에서도 세종 때 남대문 재건 사업을 총괄한 대목장은 중인 신분으로 정5품의 벼슬에 올랐을 정도다.1982년부터는 대목장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해 놓고 있다. 현재 최기영, 신응수, 전흥수씨가 일가를 이룬 대목장으로 꼽힌다. 대목은 철저하게 도제식으로 계승된다. 따라서 나름의 기문(技門)이 형성돼 있다. 신 대목장은 구한말 경복궁 중건 때 활약했던 도편수 최원식을 시조로 1960년대 초 남대문 중수 작업의 도편수인 조원제-이광규로 이어지는 기문을 계승했다. 최 대목장은 일제 말 수덕사 대웅전 해체 복원을 지휘한 도편수 김덕기-김중희의 맥을 이었다. 문화재청은 실력있는 목수를 양성하기 위해 문화재수리기능자를 자격시험으로 관리한다. 석공과 화공, 와공, 미장공 등 18개 직종이 있다.2006년 1월 현재 문화재수리기능자는 모두 3766명으로, 목수는 683명이다. 비슷한 직종은 문화재수리기술자를 꼽을 수 있다. 기능자가 특정 분야의 실무를 맡는다면 기술자는 공사 현장 전반을 관리하고 기능자를 지도·감독한다. 모두 933명이 있다. 기능자와 기술자 자격시험은 매년 한 차례 치러진다. 기능자는 필기와 실기, 기술자는 필기와 면접 등으로 이뤄져 있다. 기능자는 실무 경력 5년 이상이면 응시가 가능하다. 현장에서 뛰는 만큼 실기 평가가 훨씬 중요하다. 문화재 관련 자격증을 따고 싶은데, 옛날 방식대로 현장경력을 쌓는 것이 어렵다면 한국전통문화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현실적이다. 기술자는 한국문화재기술자협회가 해마다 강좌를 연다. 부여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21세기 감수성 깃든 한옥 짓고파” 충남 부여 백제역사재현촌 옆에 자리잡은 한국전통문화학교는 전통문화 교육의 산실이다. 지난 2000년 ‘우리 문화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교육 기관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4년제 국립대학으로 문을 열었다. 문화재관리학 등 6개 전공이 개설돼 있다. 서효원, 홍경화씨는 이제 졸업을 앞둔 스물네살 동갑내기로 나란히 전통건축학과 4학년이다. 서씨는 전통건축학과 1회, 홍씨는 2회 입학생이다. 이들이 한옥 건축을 진로로 잡은 것은 ‘고(古)건축이 비전이 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3년 넘게 우리 옛집을 만나면서 ‘한옥 다시살리기’의 주역으로 거듭났다. 전통건축학과의 교과 과정은 일반 건축과보다 범위가 넓다. 기본적인 서구 건축과 더불어 나무를 다루는 치목과 복원 설계 등 한옥 건축에 대한 이론과 실기를 가르친다. 설계 중심인 서구 건축과는 달리 실제 집을 짓는 기술도 배운다. 홍씨는 “한옥은 안과 밖, 마루와 정원 등을 구분하지 않아 전체가 하나의 생물”이라면서 “차가운 콘크리트가 아닌 따뜻한 나무와 흙의 질감은 어떤 화려한 서구 건축물도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무늬만 한옥’인 최근의 열풍에는 단호하다. 홍씨는 “사람과 자연이 함께 숨쉴 수 있는 공간이 한옥”이라면서 “독립기념관이나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보듯 기와만 올렸다고 한옥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서씨는 “우리 옛 건축이 명맥을 이었다면 서구 건축의 르 코르뷔지에 같은 거장을 낳았을 것이고, 우리도 지금보다 훨씬 현대적인 한옥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면서 “한옥이라는 틀 안에 삶의 편리함과 21세기의 감수성이 함께 녹아든 ‘대한민국식 한옥’의 모범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면서 밝게 웃었다. 부여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9) ‘화엄의 세계 압축판’ 영주 부석사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9) ‘화엄의 세계 압축판’ 영주 부석사

    백두대간이 내달리다 경상북도와 충청북도를 가르는 태백산에서 꺾어내린 봉황산 중턱에 마치 잘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들어앉은 부석사(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중국에서 유학한 의상 대사가 신라통일기인 676년 화엄종을 들여와 ‘해동 화엄종 수사찰(海東 華嚴宗 首寺刹)’로 세운 한국의 화엄종찰이다.‘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이자 ‘나라에서 가장 예쁘며 웅장한 절집’으로 통하는 1300년 고찰.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로 사격이 떨어졌지만 한국불교의 ‘처음’으로 평가받는 화엄과 한국불교의 요체인 선(禪)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화엄세계의 결정판이다. 중국에서 지엄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화엄(華嚴)을 깨친 뒤 돌아온 의상 대사가 화엄종지를 펼 곳을 찾아다니다가 낙점한 곳이 바로 부석사.“신라 문무왕 16년(676) 왕명에 의해 의상 대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들어있어 창건주와 창건연대가 명확한, 몇 안되는 고찰중 하나다.9세기 이후부터 크고 작은 가람들이 들어섰고 고승대덕들을 숱하게 배출했지만 고려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해 소실된 것을 1376년 원응 스님이 중창에 나서 많은 건물을 다시 세웠다.“이름 없는 꽃을 포함한 수많은 종류의 꽃으로 법계(法界)를 아름답게 장식한다.”는 화엄. 부석사는 이 화엄정신을 오롯이 담아낸 유일무이의 걸작인 것이다. ‘태백산 부석사’현판이 걸린 절의 첫 문, 일주문을 들어선 뒤 천왕문∼범종루∼안양루∼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극락정토로 이르는 찰나의 점철이다. 천왕문 바로 앞 왼편엔 절에서 불사며 행사가 있을 때 깃발을 세우던 당간 지주가 보란 듯이 버티고 섰다.“한국 사찰의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세련된 명작”으로 평가받는 그 유산이다. 여기서부터 무량수전까지 108계단으로 구성된 아홉 개의 석축은 극락에 이르는 화엄의 구품정토(九品淨土),‘구품 만다라’를 상징한다. 하·중·상품은 각각 3개의 또 다른 품계로 구성되어 있어 계단을 오를 때마다 고통의 사바 세계를 하나씩 떨쳐내고 마침내 최상품인 극락, 그 유명한 배흘림기둥의 무량수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가파른 산기슭, 자로 잰 듯한 구품층계로 나뉘어진 석단 위에서 차례로 자태를 뽐낸다. 범종루와 안양루는 각각 별개의 건물이면서, 무량수전으로 오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서 몸은 숙이되 얼굴은 치켜들어야만 지날 수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돌계단을 딛고 누각의 바닥을 쳐다보며 걷다 보면 구품의 정점인 무량수전이 마침내 저 높이서 모습을 드러내보인다. 무량수전에 이르기 전 바로 전 품인 안양루. 난간 아래쪽의 편액은 ‘안양문’, 위층의 것엔 ‘안양루’라고 쓰여 있듯 누각과 문의 이중역할을 하는 독특한 건축이다. 극락의 다른 이름인 안양(安養). 여기서 내려보면 소백산맥의 봉우리와 줄기가 파도치듯 꿈틀거리며 첩첩이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풍경이 일품이다. 여기에 서서 “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처럼 헤엄친다. 인간 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을 볼까나.”라는 시를 남긴 김삿갓의 심경이 절실히 읽힌다. ‘화엄 구품정토’ 부석사의 절정은 아무래도 고려 말 세워진 무량수전이다. 안양루의 마지막 계단을 딛고 올라서면 사뿐히 고개를 내쳐든 추녀와 아래 중간 부분이 불룩한 ‘배흘림기둥’이 눈에 쏙 들어온다. 배흘림이란 멀리서 볼 때 착시현상을 고쳐잡기 위해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일부러 굵게 만든 수법. 여기에 중앙을 향해 다소 기울도록 기둥을 만들어 가람이 뉘어보이는 현상을 막기 위한 ‘안쏠림’과 ‘귀올림’같은 목조 건축방식은 후대에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축 중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는 미명을 남겼다.“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故)최순우 선생이 기록한 무량수전 평이다. 바로 화엄인 것이다. 그런데 무량수전 안에는 석가여래가 없다. 대신 고려시대에 봉안된 소조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이 법당 서편을 지키고 있다. 흙을 빚어 만든 불상치곤 균형미가 아주 빼어나다.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가지고 서방극락을 주재한다는 아미타불. 그래서 앉은 방향도 남향이 아닌, 동쪽의 사바세계 쪽이다. 화엄사찰이라면 당연히 화엄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셨어야 할 텐데 정토의 아미타불을 모신 이유는 무엇일까? “화엄과 정토의 융합을 통해 철학적 사유와 실천을 삶 속에서 하나로 정착시켜 진리를 인식 밖에서 보게 한 의상 스님의 요체”라는 게 학계와 불교계의 일치된 생각이다. 그 대신 석가모니불을 상징하는 3층석탑이 무량수전 동쪽에, 석등이 앞 마당에 각각 놓여있다. 불상이 안치된 조선시대의 수미단 안쪽에는 신라 형식의 사각형 불대좌가 있다. 불상의 앞쪽에는 전통적으로 불단과 법당 바닥을 장식했던 녹유전(綠釉塼)이 깔려 있었지만 후대에 전부 마룻바닥으로 교체되었다. 이 녹유전은 일제가 모두 가져갔고 지금 부석사 유물전시관에 석 점, 국립중앙박물관에 한 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의상 대사가 화엄의 정신과 세계를 조형으로 압축해 놓은 부석사. 이 부석사의 가람과 공간 하나하나에는 모두 철학과 원칙이 배어 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이 가람을 놓고 끊임없이 연구를 지속해 왔는데 그중 하나가 안양루∼무량수전을 이루는 맥과 그것에서 30도 비켜서 한 축을 이루는 천왕문∼범종각의 이중적 가람배치다. 천왕문∼범종각 축의 끝에는 무량수전과는 별개의 대웅전이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 그곳에는 주초의 흔적뿐만 아니라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결국 의상 대사는 한 사찰 안에 두 절을 세우고 화합과 융화를 일굼으로써 화엄의 큰 뜻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닐까? kimus@seoul.co.kr ■ 의상대사와 선묘 부석사에는 창건주 의상 대사와 중국 여인 선묘 낭자에 얽힌 유명한 설화가 전해진다. 선묘는 국비 유학생으로 당나라에 머물던 의상 대사를 흠모해 의상 대사가 공부를 마치고 배편으로 신라에 돌아올 때 용으로 변해 무사히 험한 풍랑을 헤쳐 나오도록 도왔고, 부석사를 창건할 때도 큰 도움을 주었다는 인물. 용으로 변해 의상을 보호하며 신라까지 날아온 선묘는 의상 대사가 절을 지을 때 이 지역에 있던 500명의 도적 무리가 절 창건을 방해하자 커다란 바위를 들어올려 물리쳤다고 한다. 무량수전 왼편 뒤쪽에는 당시 선묘가 들어올려 도적 무리를 제어했다는,‘浮石(부석)’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절의 이름을 부석사로 정한 것도 이같은 사연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부석사와 관련된 의상대사와 선묘의 이야기는 설화로 회자되지만 삼국사기 등 사료에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무량수전 뒤편, 의상대사의 상과 일대기를 담은 벽화를 봉안한 조사당 오른쪽 벽면에 선묘 상이 걸려 있다. 1916년 일제가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할 때 무량수전 기단부 아래에서 기다랗고 꾸불꾸불하게 이어진 용 모양의 돌덩이가 발견되어 이 설화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음이 입증되기도 했다. 당시 무량수전에 봉안된 소조 아미타여래좌상 바로 아래에 용의 머리 부분이 있었고 꼬리 부분은 무량수전 앞의 석등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이후 이 돌덩이가 바로 설화와 사료의 내용을 따라 의도적으로 만든 석룡(石龍)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용의 허리 부분이 이어지지 않고 중간이 끊겨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의 기를 끊기 위해 저질렀거나, 혹은 일제강점기에 잘라내어 가운데 부분을 가져갔다는 등의 추측이 무성하다. 아무튼 선묘 용의 꼬리 부분이 묻혔다는 석등을 100번 돌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소문을 따라 석등 둘레를 도는 신도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 남북전통공예품 ‘서울 상봉’

    지난해 10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북관대첩비가 3월 북한으로 인도되고, 국립중앙박물관이 ‘북한문화재 특별전’을 개최하는 등 남북 문화재 교류가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남북 정상급 예술가들이 만든 공예작품 450여점이 한 자리에 전시되는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공예문화진흥원이 북한 대외전람총국과 함께 다음달 4일부터 8월16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하는 ‘2006 남북공예교류전-하나됨을 위하여’가 그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남북이 자랑하는 최고 예술가 160여명의 작품 450여점을 선보인다. 남한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박찬수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서울시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의 ‘방아다리노리개’,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구혜자의 ‘노의’ 등 99명의 작품 250여점을 선보인다.북한은 계관인 우치선의 ‘쌍학장식청자꽃병’과 인민예술가 김청희의 대형 수예작품 ‘파도’, 평양 단청연구실의 양천사 대웅전 대들보 단청작품 등 최고 예술가 60여명의 공예작품 200여점을 공개한다. 전시기간 중인 다음달 10∼13일에는 남북한 학자와 공예작가 30여명이 금강산에 모여 남북한 공예의 발전 방향을 주제로 세미나를 갖는다. 공예문화진흥원 권오인 원장은 “남북공예교류전은 내년에는 평양에서 열기로 합의했으며, 유엔 본부로부터 초청받아 내년 8∼9월 ‘화합’을 주제로 유엔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02)733-9042.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7) 불상없는 ‘寂滅宮’ 효시 통도사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7) 불상없는 ‘寂滅宮’ 효시 통도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신라 진골 출신 김무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출가해 당나라에 유학한 뒤 선덕여왕의 요청에 따라 귀국한 자장 율사가 계율의 근본도량을 삼겠다는 원을 세워 건립한 1300년 역사의 신라고찰이다. 자장 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어 삼보사찰 중 하나인 불보사찰로 통하는 사찰. 선원, 율원, 강원의 삼원을 갖춘 사찰에만 격이 주어지는 국내 5대 총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신라 최대의 거찰 황룡사와는 형제사찰로 여겨졌을 만큼 사세가 컸던 도량. 다른 사찰의 가람 배치와는 크게 다른 파격에 더해 다양한 전각과 불상으로 인해 불교는 물론 한국건축 양식의 총집합처로 여겨지는 독특한 사찰이다. 해발 1050m 영축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봉우리들이 한군데로 모아지는 금강계단은 통도사의 핵. 통도사의 근본정신이 집결된 곳이자 한국불교 최상의 성지이기도 하다. 산문을 들어선 뒤 조금 걷다가 일주문과 천왕문, 불이문을 차례로 지나다 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범상치 않은 전각들. 신라기에 세워진 대부분의 사찰이 남북 일직선상에 금당과 탑이 놓여진데 비해 통도사는 전각들이 남북 축을 유지하면서 동서로 길게 배열된 파격을 보여준다. 냇물을 끼고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 등 3개의 권역으로 나뉘어 늘어선 크고 작은 건물만도 50여개. 상로전에는 금강계단과 대웅전이, 불이문부터 세존비각까지의 공간인 중로전에는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이,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의 영역인 하로전에는 영산전 극락보전 약사전 만세루가 들어서 있다. 각 구역의 전각들이 하나의 중심축에 일열로 배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 사이의 공간 크기와 모양이 보기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게 독특하다. 이 가운데 금강계단과 대웅전 대광명전 영산전만 창건 초기에 건립되었고 나머지 것들은 대부분 고려 이후 세워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통도사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삼국유사’등의 기록을 볼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던 자장 율사가 귀국한 643년부터 선덕여왕 재위 말년인 646년 사이로 추정되며 지금은 646년이란 게 거의 정설로 되어 있다. 통도사란 사명이 붙은 것에도 여러 설이 통한다. 첫째는 출가한 모든 스님들이 이곳의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고 득도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 또 하나는 통도사가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님이 설법하던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것이다. 자장 율사는 중국에서 부처님 정골(頂骨)과 손가락뼈, 치아사리 등 사리 100과, 부처님이 입었던 금란가사, 대장경 400권을 갖고 돌아왔는데 이 가운데 정골과 손가락뼈, 치아사리, 금란가사, 대장경이 통도사에 봉안되었다. 나머지 사리는 경주 황룡사탑과 울산 태화사탑에 나누어 봉안한 것으로 전해진다(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 통도사는 불상 없이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는 ‘적멸궁’의 원조이자 모든 사찰의 근본도량이었던 셈이다. 그 때문에 통도사에는 범상치 않은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난 1956년 한밤중에 대웅전에서 화엄산림법회가 열릴 때 갑자기 금강계단 사리탑에서 빛줄기가 뻗어올라 대낮같이 밝아져 양산 주민들이 통도사에 화재가 발생했다며 놀랐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새벽 예불시간에 맞춰 일어나지 못한 스님들이 종종 금강계단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와 종소리를 듣곤 놀라서 깨어나기도 한단다. 이런 통도사의 핵심이자 요체는 단연 금강계단과 대웅전. 이 가운데서도 금강계단은 부처님 사리가 봉안된 통도사의 적멸궁이다. 창건 때부터 사리를 친견하려는 참배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고려 왕실과 사신들은 물론 몽골 황실에서도 참배했다고 한다. 고려말∼조선시대엔 사리를 약탈하려는 왜구들을 피해 스님들이 개성 송림사, 서울 흥천사, 금강산 등지로 옮겨다니며 사리를 구했다.“몸과 마음이 부정한 사람이 사내에 들어오면 고약한 냄새가 나 곧 사람이 광란하여 땅에 쓰러져 미치게 된다.”“금강계단 위로는 일체 날짐승이 날지 않고 그 위에 오줌과 똥을 누지 않는다.”는 ‘통도사 사적기’의 사리 부분 기록도 흥미롭다. 창건 때의 모습은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의 “2층으로, 위층 가운데에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계단은 2중 사각기단 위에 종 모양의 부도(浮屠)가 놓인 석조로 계단 사방에는 고려∼조선시대에 새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불좌상(佛坐像)과 천인상, 신장상 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금강계단 남쪽에 맞닿아 있는 정면 3칸, 측면 5칸의 대웅전은 금강계단과 함께 축조된 통도사의 중심건물. 대웅전 바로 뒤편 금강계단에 부처님 사리를 모신 때문에 커다란 불단만 있을 뿐 불상이 없는 게 특징이다. 불단 북쪽 벽에 큰 창을 내어 금강계단을 향해 참배하도록 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64년(인조22년) 중건했는데 건물 4면에 각기 다른 편액이 걸린 게 독특하다.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 남쪽은 ‘금강계단’, 북쪽은 ‘적멸보궁’이라 쓰여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바라보이는 대웅전의 서쪽 벽은 측면이지만 마치 정면처럼 보이듯 모든 방향에서 볼 때 정면으로 느껴지며 지붕도 팔작지붕의 복합형인 정(丁)자형을 띠고 있다. 통도사 성보박물관 신용철 학예연구실장은 “통도사 대웅전의 정(丁)자 건축은 여주 영릉 등 왕릉 사당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형태로 보통의 왕릉 사당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다.”면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신성한 공간의 의미에 더해 두 개의 건물이 한 건축안에 혼재된 유일한 사찰 건물로 목조건축의 백미”라고 평가했다. kimus@seoul.co.kr ■ 자장율사와 구룡지 통도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장 율사와 구룡지(九龍池)에 얽힌 이야기이다.‘삼국유사’‘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등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가 창건되기 전 이곳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여기에는 아홉 마리의 큰 용이 살고 있었는데 자장 율사가 용들을 제압해 그 곳에 세운 가람이 통도사라고 한다.“자장 율사의 항복을 받은 아홉 마리의 용 가운데 다섯은 오룡동(五龍洞), 셋은 삼동곡(三洞谷)으로 가고 한 마리가 이곳에 남아 절을 수호할 서원을 세우자 자장 율사가 그 용을 머무르게 한 뒤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는 게 바로 지금 대웅전 서편의 구룡지. 구룡지는 불과 4∼5평 남짓한 크기에 수심도 한 길이 채 안 되는 타원형의 작은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수량이 전혀 줄어들지 않아 통도사 스님들 사이에서는 ‘구룡신지(九龍神池)’라고 불리기도 한다. 민간에 전하는 다양한 전설에서도 구룡지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자장 스님이 중국 종남산 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할 때 승려로 현신한 문수보살이 부처님 진신사리와 불경, 가사 등을 주면서 “그대의 나라 남쪽 영축산 기슭에 나쁜 용이 거처하는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재앙을 면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귀국한 자장 스님이 선덕여왕과 함께 영축산 연못을 찾아 나쁜 용들을 위해 설법한 뒤 못을 메우고 그 위에 금강계단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자장 율사와 구룡지의 관계를 다르게 해석한다. 자장 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할 당시 양산 지방에는 경주의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집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자장 율사가 백성들을 괴롭히는 연못의 나쁜 용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통도사 금강계단을 설치했다는 설화는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양산 지방의 정치집단을 제압하기 위해 통도사를 세웠다는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불교와 중앙왕권이 제휴했다는 풀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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