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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성, 사무치게 그리웠다…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개성, 사무치게 그리웠다…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유년기를 보낸 시골마을, 기억나십니까. 포장도로라고는 달랑 신작로뿐, 대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길은 이내 흙먼지 폴폴 나는 흙길로 바뀌지요. 때에 전 옷차림의 개구쟁이들이 겨울이면 비료포대로 눈썰매타던 마을 고샅길이며, 아버지 읍내 나가시던 둑방길이 그랬습니다. 버스를 타고 돌아 본 고려 500년 도읍지 개성의 풍경이 딱 그 모습이었습니다. 마을 공동우물에서 남바위 비슷한 털모자를 쓴 아낙네가 물을 길어 등지게에 지고 나릅니다. 선죽교 부근의 냇가에서는 시린 손 호호 불어가며 빨래 방망이를 휘두르는 여인네의 모습도 눈에 띕니다. 버스가 마을을 지날 때 제법 용감한 개구쟁이는 언덕 위에서 늠름하게 폼을 잡고 손을 흔드는 반면, 수줍음 많은 녀석은 담장 뒤에 숨어 보일 듯 말 듯 손짓합니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세계가 교차하는 듯한 풍경이었지만, 참 정겨웠습니다. 버스를 함께 탔던 관광객 누구에게서도 잘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상대적 우월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금강산 일대가 처음 개방됐을 때와 비교하면 주민들의 표정도 놀라울 만큼 변했습니다. 버스가 지나는 길목마다 군인들이 지켜서고 있었지만, 주민들이 예전처럼 외면하거나 심지어 등을 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웃고 손을 흔들며 환영의 뜻을 표했습니다. 전혀 인위적인 모습이 아니었지요. 박연폭포, 선죽교 등 고도(古都) 개성의 관광명소를 둘러보는 것도 좋았지만, 주민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좋았습니다. 개성에서의 체류 8시간을 기록했습니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 남짓한 거리지만, 그 사이엔 이념과 체제의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지요.60년 세월을 에둘러 돌아왔기에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훔쳐보는 묘한 즐거움도 각별했고요. 시간대별로 개성관광의 묘미를 소개해봅니다.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흔히 출입국사무소로 알고 있지만, 서로 두 개의 국가로 인정하지 말자는 뜻에서 ‘국’자를 뺐다)에서 개성관광증을 받는 등 수속을 마친 다음 버스에 올라탔다. 5분 정도 달린 버스가 개성표시판을 지날 즈음 전신주 가운데 테두리 색깔이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뀐다. 북한 지역으로 들어섰다는 뜻이다. 버스 행렬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북한군 지프차가 등장하는 것도 이때쯤이다. 경계근무를 서는 앳된 얼굴의 북한군 병사 몇 명을 지나면 곧바로 북측 출입사무소. 간단하게 입국심사를 마치고, 버스에 동승한 북한 안내원 2명과 함께 개성으로 향했다. 개성공업지구를 지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낯익은 남측의 풍경이 이어진다. 공장 건물 사이로 24시간 편의점도 있고, 서울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란색 버스가 출근길의 북한 근로자들을 실어 나른다. 개성공업지구를 지나 15분쯤 경의선 철길과 나란히 달리면 개성의 초입 송남동에 닿는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거란에서 보낸 낙타 50마리를 굶겨 죽였다는 약대다리가 있는 곳이다. 개성 주민들에게는 ‘야다리’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개성에서 경의선 열차가 매일 한차례 와닿는 봉동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야다리를 건너야 한다. 송남동을 지날 무렵, 느닷없이 머리 위로 고가도로가 나타났다. 안내원은 장차 서울과 평양을 연결할 고속도로라고 설명했다. 현재는 개성과 평양을 오가는 데 이용된다. 고기남새, 세거리 사진관, 리발관 등 개성시내 건물에 내걸린 간판들이 마치 1960∼70년대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을 보는 듯하다. 슬그머니 사진을 찍고도 싶었지만, 안내원의 경고대로 ‘피곤한 여행’이 될 듯해 꾹 참고 말았다. 시내는 거의 무채색이 지배하고 있다. 주민들의 옷이며, 건물들이 검고 어두운 색깔 일색이다. 거기에 낮게 깔린 안개까지 더해지며 무채색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간밤에 무척이나 추웠던 듯, 주민들 대부분이 두툼한 옷차림이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동여맨 여인네의 얼굴이 시선을 붙잡았다. 차가운 날씨 탓에 볼에서 귀밑머리에 이르도록 빠알갛게 얼어 있다. 개성에서 박연폭포까지는 40분 남짓 소요된다. 개성시 외곽의 고갯길에 서면 개성을 둘러싸고 있는 송악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만삭이 된 여인이 두 팔 벌려 개성을 보듬고 있는 형상이란다. 그래서 개성 시민들은 송악산을 어머니 산이라 부른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멸망을 재촉하기 위해 고려 왕조에 정기를 불어넣어 주던 송악산의 여신을 임신시켰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개성시내를 벗어나자 처녀의 젖가슴처럼 봉긋한 산자락이 겹겹이 다가섰다. 나긋나긋한 느낌, 박연폭포에 가까워지면서부터 산세가 우람해지기 시작했다. 고봉준령은 아니지만 바위산답게 흰 눈을 이고 선 모습이 당당하다. 길도 제법 험하다. 좌우로 휘어지는 모양새가 설악산 한계령에는 못 미쳐도, 속리산 말티재에는 버금갈 듯하다. 마침내 박연폭포 앞에 섰다. 서경덕,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히는 곳. 북측에선 천연기념물 제388호로 지정해 놓았다.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 38m 높이 암벽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겨울이라 가늘어지긴 했지만, 금강의 구룡폭포와 설악의 대승폭포 등과 더불어 국내 3대폭포를 이룰 만한 자태다. 이쯤에서 관광안내원의 설명을 들어보자. “오래전 박연폭포를 찾은 기생 황진이는 폭포 아래 고모담에 훌쩍 뛰어들어 목욕을 즐깁니다. 목욕을 마친 황진이는 폭포 바로 옆 룡바위에 올라 젖은 머리에 먹물을 묻혀 초서체로 시 한 수를 적습니다.‘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 락구천(疑是銀河落九天)’이란 내용이지요.1957년 이곳을 처음 방문한 김일성 주석께서 그 문장을 ‘날아흘러 곧추 아래로 떨어진 물이 삼천척이나 되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지 의심스럽구나’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안내원은 또 “황진이가 적은 글씨를 곧바로 도공들이 새겨 오늘까지 전해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연폭포의 전경을 감상하기에는 고모담 오른쪽의 범사정이 으뜸이다.‘박연폭포가 안개 위에 떠있는 듯하다’는 뜻의 정자. 범사정에 앉아 쉼을 청한 이옥임(81·하남시)할머니의 눈가에도 옅은 물방울이 괸다.“70년 전 개성에서 소학교 다닐 때 걸어서 소풍왔던 곳이야. 아침나절 개성을 출발하면 저녁 무렵 도착하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구경한 다음 다시 개성으로 돌아갔지.” 범사정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대흥산성 북문이 나온다. 고려때 개성 방위를 위해 천마산과 성거산 등의 봉우리를 따라 쌓은 석성이다. 황진이의 연인 서경덕도 산성 동쪽 성거산에 터를 잡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산성 왼쪽의 박연(朴淵)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박연폭포란 이름의 유래가 된 못이다. 폭포 위쪽에 있다. 박씨 성 가진 사람이 폭포 앞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그 소리에 반한 용녀가 그를 유혹해 결국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고모담(姑母潭)은 아들이 용녀를 따라 죽자 그의 어머니가 몸을 던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대흥산성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관음사에 닿는다.970년 조성된 사찰. 작고 화려한 대웅전의 뒷문 장식에 슬픈 전설이 숨어있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관음사 조성공사에 동원된 조각 신동 운나(당시 11세)는 뒷문 장식물 조각에 열중하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는다. 곧바로 하산하려 했으나, 공사 진행이 늦어질 것을 우려한 공사 관리자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왼손잡이였던 운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도끼로 자신의 왼팔을 자른다. 결국 뒷문 왼쪽은 완성됐지만, 오른쪽은 미완으로 남게된 것. 그는 왼쪽문에 왼팔이 잘린 자신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박연폭포를 출발한 버스는 50분쯤 걸려 개성시내 중심부의 통일관에 도착했다. 앞으로는 개성 시내와 개성 남대문, 뒤로는 자남산과 김일성 동상이 펼쳐져 있다. 낡은 벤츠 승용차 뒷좌석의 흰 드레스 입은 신부, 파란색 복장의 교통보안원, 삼삼오오 걸어가는 주민 등 모두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관광객들을 관찰하고 있다. 시간이 느린 화면처럼 더디게 흐르는 느낌이다. 그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겨우 수m 쯤. 하지만 말을 걸 수도, 더더욱 손을 잡을 수도 없다. 통일관의 자랑은 닭곰탕과 장지단(계란조림), 이면수 조림 등으로 구성된 ‘개성 13첩 반상기’. 쌀밥에 13가지 반찬이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개성지역 토속요리다. 여기에 입에 불이 날 만큼 독한 송학소주가 곁들여진다. 개성시 문화회관 뒤편의 숭양서원은 정몽주와 서경덕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3년 정몽주의 생가터에 지어졌다. 입구 알림판에 따르면 ‘특별한 장식없이 간소하게 지었으나 이 곳 지형조건을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크고 작은 집들을 합리적으로 배치하고 조화시킨 우수한 건축물’이다. 정몽주의 영정과 저잣거리에 버려진 정몽주의 시신을 수습한 친구 우현보, 서경덕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선죽교앞에 섰다.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당한 곳으로 너비 2.54m, 길이 6.67m의 자그마한 돌다리다. 일제 강점기에 만든 인공수로가 물길을 대신하기 이전엔 송악산에서 발원한 로계천이 선죽교 아래를 흐르고 있었다. 선죽교를 지난 로계천은 사천강, 예성강 등과 차례로 만나 서해로 흘러 들어갔다. 원래 선지교(善地橋)라 불리던 것을 정몽주가 흘린 핏자국이 없어지지 않고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가 돋았다고 해서 선죽교(善竹橋)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자세히 보면 다리가 두 개인데, 난간이 있는 멋진 다리가 진짜다. 1780년 이곳에 부임한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선조할아버지의 피가 묻은 곳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다니자 원래 다리에 난간을 만들고 그 옆에 새 다리를 놓았다고 전해진다.‘문제의’ 핏자국은 화강암의 철분이 산화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개성 출신의 명필 한석봉이 썼다는 비석 맞은 편에 두 채의 비각이 서있다. 하나는 변을 당하기 직전 마지막 만난 친구 성여완의 것이고, 또 하나는 피습을 눈치챈 정몽주가 도망치라고 했음에도 끝까지 그와 함께한 하인 김경조의 것이다. 선죽교 건너편에는 표충비가 있다. 거북이 두 마리가 정몽주 충정을 찬양하는 비석을 이고 섰는데, 각 각 조선의 21대,26대 임금이 만들었다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마지막 일정은 고려박물관. 성균관 건물을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성균관은 992년 고려시대 국자감으로 창설됐다가, 이후 성균관으로 개칭한 국내 최초의 대학이다. 서울의 성균관보다 500년을 앞선다. 원래 건물은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17세기 초에 개축했다. 노거수(老巨樹)들의 집합소라고 할 만큼 넓은 뜰에 심어진 1000년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등이 인상적이다. 국보로 지정된 곳인데도 건물 내부를 들고 남이 자유롭다. 성균관 내 4개의 전시관에 고려청자, 금속활자 등 1000여점의 고려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야외 전시장에는 헌화사 7층탑 등 북측의 국보급 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개성을 빠져 나오는 길에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오전에 비해 몇 배는 많은 숫자다. 때는 이미 땅거미지는 시간. 전력이 부족한 마당에 어두컴컴해 진 건물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을 게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보일 듯 말 듯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개성 시내 한 쪽을 가로지르는 경의선 철길 위로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기차가 자주 지나지 않으니 무서워할 것도 없을 터. 어른들도 무시로 지나다닌다. 은행나무도 마주 봐야 열매를 맺는다던가. 등돌리고 있었던 겨레가 금강산과 개성 등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서서히 간극을 좁히려 하고 있다. 그것은 곧 열매를 거둘 날도 머지 않았다는 뜻일 게다. 글·사진 개성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가는 길 :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까지 가는 셔틀버스가 오전 6시 전후 서울 계동, 광화문 등에서 출발한다.5000원. 자가용의 경우 임진각까지 간 다음, 임진각에서 셔틀버스(6시40분∼7시20분 운행)로 출입사무소까지 가면 된다. 예약은 현대아산의 개성관광 홈페이지(www.ikaesong.com)에 링크된 전국의 개성관광대리점에서 할 수 있다. 현대아산 02)3669-3000, 도라산사무소 031)954-3940,950-5195.1일관광 요금은 18만원이다. ▲신분증 : 현지에서의 신분증은 개성관광증이 대신한다. 관광증 발급에는 여권 사진 2장이 필요하다. 관광증을 훼손하면 벌금을 물 수도 있다. 국내 출국 수속을 위해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여권 중 하나는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화폐 : 개성에서는 미국 달러 외 원화나 카드 등을 사용할 수 없다. 출발 전 환전해 가는 것이 좋다. 개성 북측 출입사무소 출구에서도 환전할 수는 있다. ▲휴대 금지 물품 : 필름 카메라는 반입 금지. 디지털 카메라는 허용되지만 초점거리 160㎜ 미만 렌즈, 광학 기준 24배줌 미만일 경우만 가능하다. 남측의 신문·잡지, 휴대전화(배터리 등 관련 용품 포함),MP3와 GPS, 내비게이션, 소형 라디오, 녹음기 역시 반입금지. 해당 물품은 현대 아산측이 보관, 관광 후 돌려준다. ▲국내 반입금지 물품 : 북측에서 구입한 뱀술, 령정술 등 동물을 재료로 만든 주류와 비아그라·우표·불온 서적 등은 들여올 수 없다. ▲남측출입사무소 1층에 설렁탕 등 간단한 아침 식사를 파는 매점이 마련돼 있다.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5)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5)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 한국 최고의 해외포교사 ‘숭산´스님 뒤를 잇다 2004년 입적한 전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은 오랜 기간 해외포교를 통해 숱한 외국인 제자를 낳은 선사이자, 한국 최고의 해외포교사로 꼽힌다.27일 서울 화계사 대적광전서 있을 숭산 스님 3주기 추모제에 참석하는 외국인 제자 스님만도 21개국 170명.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계룡산 자락의 국제선원 무상사를 기자가 찾았을 때도 추모제를 준비하는 스님들의 움직임이 여간 부산한 게 아니었다. 여러 외국인 스님들을 총지휘하느라 바쁜 조실 대봉(大峰·57·미국·속명 로렌스 시컬) 스님을 대면한 것은 한참을 기다린 끝이었다. 바쁜 결에도 단정한 옷차림으로 좌복에 꼿꼿하게 앉은 스님의 감회는 남달라 보였다. 한국의 외국인 스님으론 유일한 숭산 스님 전법(傳法) 제자이자, 숭산의 법맥을 이은 맏형인 때문일까. 전법 제자라 함은 오계와 십계를 받은 제자 중 법사와 지도법사를 거쳐 확실한 공안(화두) 수행을 인정하는 인가를 받은 스님에게만 주는 자격. 숭산 스님 제자 가운데 하버드 출신 현각과 무상사 주지 무심(미국), 그리고 한국 스님 도관 등 세 명이 인가를 받았지만 전법 제자의 반열엔 오르지 못했다. 그러니 숭산의 제자들이 유일한 전법 제자인 대봉 스님에게 깍듯한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동쪽 끝 필라델피아 근교, 인구 5000명의 작은 마을인 엘킨스 파크 태생인 대봉 스님에게 숭산은 방황의 끝을 매듭짓게 한, 그야말로 큰 산이었다. 코네티컷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에게 삶은 어려서부터 퍽이나 풀기 힘겨운 의문의 점철이었다고 한다.“왜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이들이나 예외없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일찌감치부터 범상치 않은 의심에 매달려 살았던 그가 물리학과에서 1년6개월 만에 심리학과로 전과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대학졸업 후 전공을 살려 취직한 병원에서 환자 심리상담 일을 3년쯤 했을까.‘내가 나를 구제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불현듯 회의를 느껴 그만두고 도자기 굽는 일이며 용접 등 닥치는 대로 막일 터를 전전하다가 잠수함 만드는 공장에 몸을 담았다. 끝 모를 방황의 늪에 깊숙이 빠져들었던 것이다. “잠수함 공장의 단순노동을 하면서 뜻밖에 내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으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던 중 막연히 불교의 스승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당시 예일대 옆에 2년여 전 문을 연 뉴헤이븐 선원을 찾았다. 뉴헤이븐 선원은 숭산 스님의 제자인 예일대 교수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선원.“며칠 뒤 숭산 스님의 큰 법문이 있다.”는 말에 밤잠을 설치기를 한참 뒤. 마침내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듣고는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30년 전인 1977년 5월의 일이다. ● 30년전 숭산 스님의 법문 듣고 방황의 길 접어 “어떤 게 미친 것이고 어떤 게 미치지 않은 것인가.” 법문을 듣던 한 청중이 불쑥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끊임없이 의심을 거듭해 왔던 바로 그 화두였다. 숭산 스님의 답은 과연 무엇일까.“네가 많이 집착한다면 많이 미친 것이고, 조금 집착한다면 조금 미친 것이다.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미치지 않은 것이다.” 10여년간 대학 공부와 막노동일을 했지만 터럭만큼도 생각해 보지 못한 답이었다.“모든 사람들이 ‘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모두 미쳐 있다. 헛된 나를 버리고 진실한 ‘참나’를 찾고 싶다면 참선수행을 하라.” 한국불교에 귀의할 마음을 굳혀 잠수함 공장 일을 단박에 그만두었고 한달 뒤 프로비던스 선원으로 출가,30여년째 부처님 제자로 살고 있다.1984년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사미계를 받았고 4년 뒤 스페인 바르셀로나 선원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숭산 스님을 처음 만나 자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정했지만 부모들은 맏아들을 불가(佛家)에 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유대인으로 사업에 크게 성공한 CEO 할아버지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을 줄 알았던 장남이 속세를 떠난다니 부모의 실망이야 오죽했을까. 숭산 스님을 만난 뒤 1년쯤 지난 때였을까. 가족들이 숭산 스님을 집으로 초대해 스님을 떠보느라 온갖 질문공세를 퍼부었다고 한다.“종교를 빙자한 세일즈맨이 아닌가.”“맞다. 대자대비를 파는 세일즈맨이다.” 마침내 숭산 스님의 그릇을 본 가족이 아들의 길을 인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완강하던 부모님이 숭산 스님에게 마음을 연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을의 분위기가 조금 도움이 됐다고나 할까….” 어릴 적의 고향 엘킨스 파크는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독특한 곳이었던 것 같다. 영국계 퀘이커 교도들이 정착해 화합과 평화의 고장으로 일군 펜실베이니아주의 도시답게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남부에서 피신해온 흑인 노예들이며 유대인, 이탈리아인들이 분란 없이 잘 어울려 살았다고 한다. 교회며 성당, 사원들이 모임도 열고 함께 크고 작은 행사도 가졌다고 하니 예사 마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못내 아쉬워하는 부모와 친척들을 뒤로한 채 서울 화계사로 들어온 게 1984년 9월. 당시 숭산 스님은 대봉 스님과 함께 사찰 40여곳을 일일이 돌며 한국 절집들의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국 사찰을 조금 알게 됐을 때 미국 프로비던스에 ‘금강선원’이 문을 열게 됐다. 화계사 생활 한 달 만이었다.‘금강선원’에 마땅한 지도법사가 없어 사실상 주지격인 도감을 맡아 다시 미국으로 가야 했다. 이후 화계사와 미국의 ‘금강선원’을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한국말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한국불교를 택해 자원해서 화계사 국제선원에 들었던 만큼 한국불교에 깊숙이 빠지고 싶었는데…. 그땐 숭산 스님이 야속했지요. 하지만 이것도 길이려니 여기고 매년 동안거는 꼭 한국에 들어와서 났지요.” 한국에서 비구계를 받고 무상사에서 함께 수행 중인 주지 무심 스님이 일찍부터 한국포교에 나섰다면 조실 대봉 스님은 해외 생활에 더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무심 스님은 개띠여서 한 곳에 오래 머물렀지만 나는 호랑이띠를 타고나 이곳저곳을 떠돈다.”며 웃는다. 프랑스 파리선원 주지, 캘리포니아 무문선원 주지, 보스턴 케임브리지선원 주지 등 유럽·미국의 선원에서 초심자들을 지도하다가 한국에 정착한 것은 1993년 9월. 무상사 국제선원을 막 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금은 대웅전이며 선원 같은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그때만 해도 첩첩산중에 잠자리 겸 법당만 달랑 갖춘 조립식 건물 한 채만 서있었다. 부엌도, 화장실도 물론 없었다. 공양(식사)을 하려면 2㎞쯤 떨어진 절 아래 마을 식당까지 내려가야 했다. 대소변 해결할 시설도 마땅히 없어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선원을 짓는다는 기쁨에 참선수행을 빼곤 온통 인부들과 함께 공사에 매달렸다.1999년 가을에야 미국인 명행 스님이 처음 선원으로 들어왔으니 계룡산 자락의 무상사를 6년간이나 홀로 지킨 셈이다. ● “말(言)은 낙엽과도 같아 입 밖에 나면 모두 허무한 것”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되짚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기자를 겨눈다.“너는 누구냐.” 눈앞에 날아든 살에 머뭇거리다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허튼소리로 방패를 삼았다.“아무 것도 아닌데 말은 누가 하는고.” 어차피 거량이 안 될 바에야 일찌감치 입을 닫는 게 상책.‘뻔뻔한 묵언’으로 하늘을 가리자니 기자의 빈 잔을 채우며 말을 잇는다. “말은 떨어지는 낙엽과도 같아 입 밖에 나면 모두 허무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살지요. 수행자들은 말을 안함으로써 힘을 얻고, 속인들은 말을 많이 해야 힘을 쓴다고 하던가요.” 크게 한 방을 맞아 비틀거리다가 “은사 스님(숭산)의 가르침대로 잘 살고 있느냐.”는 허튼소리를 또 한번 뱉고 말았다.“오직 모를 뿐인 마음으로 곧바로 나아갈 따름입니다. 순간순간마다 점검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무상사의 대중들을 이끌며 수행방향을 잡아주고 있는 조실 대봉 스님의 길과 초발심엔 변함이 없어 보였다.“내가 이곳 국제선원 무상사에 있는 것만으로도 외국의 수행자나 한국불교에 귀의할 뜻을 가진 이들에겐 큰 힘이 된다.”는 대봉 스님.“한국불교에서 길을 찾는 눈 푸른 납자들에게 초발심을 잃지 않고 올곧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게 나의 소임”이라며 추모제에 참석할 외국인 스님들의 명단을 챙겼다. 계룡산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종교건축기행34/김성호 서울신문 문화전문기자

    미륵신앙의 본산이자 동학혁명의 발원지였으며, 강증산의 후천개벽 사상을 낳은 우리나라 민중종교운동의 본거지인 전북 김제 모악산 들머리에는 개신교의 순례성지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전통 윤리를 교회건축에 그대로 살려낸 금산교회가 그것이다. 유교적 전통이 완강하던 1908년 세워진 금산교회는 ‘ㄱ’자형이다. 합각을 이룬 모서리에 있는 강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여성, 오른쪽에는 남성 신자들이 예배를 봤다. 그런가 하면 경남 양산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대웅전의 북쪽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에서는 북쪽 벽에 난 커다란 창으로 금강계단, 즉 부처를 향하여 참배할 수 있다. 김성호 서울신문 문화전문기자가 쓴 ‘종교건축기행34’(W미디어 펴냄)를 펼쳐들면 한국 종교건축이 언제 이렇게 다양한 전통을 만들었을까 새삼 놀라게 된다. 한국 문화의 저변을 형성한 불교의 절집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과 100년이 조금 넘는 건축 역사를 지닌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배공간이 이미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자산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34곳의 사례는 분명히 일깨워 준다. ‘종교건축기행’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호평을 받으며 서울신문에 실린 연재물. 종교건축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정치·사회·종교·문화적 배경으로 시야를 확대한 만큼 한국 종교문화사를 개괄한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초창기 백정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여 ‘백정 교회’로 불린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와 국내 유일의 정사각형 교회인 봉화 척곡교회 등 개신교회 8곳, 천주교도를 처형한 전주 풍남문의 석재를 주춧돌로 쓴 전주 전동성당과 한옥으로 지은 익산 나바위성당 등 천주교회 11곳을 소개했다.‘한국 불교 1번지’인 서울 조계사와 시인 고은이 출가한 절로 일본 에도(江戶)시대 건축양식으로 지은 군산 동국사 등 절집 10곳도 둘러볼 수 있다. 무엇보다 원불교의 발상지인 영광 영산성지와 증산도의 성소인 대전 태을궁, 천도교의 발상지인 경주 용담정, 한국정교회의 요람 성 니콜라스 서울대성당, 한국 이슬람의 핵인 서울 이슬람중앙사원 등 소수 종교 및 종파의 건축물도 자세히 소개한 것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1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어라, 광화문이 사라졌네!’‘그럼, 언제 다시 나타나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세종로에 왔다가 광화문이 없어진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이곳을 지날 때면 저절로 고개를 돌려 깜쪽같이 사라진 광화문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한번쯤 해봤을 터이다. 지난 9월28일자 서울신문에는 훈훈한 기사가 단독보도돼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복원을 총지휘할 도편수 자리를 놓고 벌이던 전통 건축분야의 양대 산맥의 한판 승부에 대한 내용이다. 형님뻘인 전흥수(70) 대목장이 신응수(66) 대목장에게 도편수 자리를 아름답게 양보했다는 것이다. 전 대목장은 추석 연휴 직전에 신 대목장과 만나 “우리끼리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가 아니냐.”면서 물러서겠다는 뜻을 알렸다. 신 대목장은 전 대목장의 어려운 결정에 고마움을 표시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전 대목장은 “그 사람(신 대목장)이라면 광화문 복원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광화문 복원공사의 도편수(목수 우두머리) 자리는 신 대목장이 맡게 됐다. ●18년간 경복궁 복원사업 이끌어 신 대목장은 19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로 지정됐으며 지금까지 18년동안 경복궁 복원사업을 대부분 진두지휘해 왔다. 또한 앞으로 2년동안 광화문 복원까지 맡게 됐으니 천년궁궐 재현의 대역사는 사실상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 경복궁 함화당 복원공사 현장에서 신 대목장을 만났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돌아온 명함이 특이하다. 근정전 사진 위에 ‘성재(誠齋) 申鷹秀’라고 적혀 있었다. 하늘을 나는 매응(鷹)? 의아해 하자 “향나무 숲에서 매가 날아오르는 어머님 태몽 때문에 매응자로 했고 성재는 경복궁 복원사업 초창기때 한 서예가 선생이 집을 정성스레 잘 지으라며 지어준 호”라고 설명했다. 먼저 전 대목장과 만남에 대한 얘기를 슬쩍 꺼냈더니 “그 분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다.(전 대목장은)기능인들이 화합이 잘 안되는데 그러면 되겠느냐고 하셨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광화문 복원공사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산림청과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국유림과 사유림 등에서 적합한 목재를 고르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마 동해안쪽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적송)가 선택될 것 같으며 천년궁궐을 짓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대들보인 경우 소나무 수령이 300∼400년정도 돼야 한다는 그는 “일제때 좋은 나무들이 마구 남벌돼 나무 구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높이 18m, 직경 70㎝이상의 적송을 찾기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또 “올 겨울부터 목수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 나무를 구입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궁궐 복원 공사에는 뭐니뭐니해도 철저한 고증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광화문 복원공사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수 30여명이 투입된다고 밝혔다. 현재 경복궁 복원공사 사업은 모두 5단계 중 4단계를 마친 상태. 이 가운데 광화문 복원사업이 최종단계로 경복궁 재현의 화룡점정인 셈이다. 그가 맡은 경복궁 복원사업으로는 현재 진행 중인 함화당을 비롯해 ‘침전지역’‘동궁지역’‘태원전 권역’‘건청궁’‘근정전’ 등이다. 광화문의 경우 본문 외에 군사방, 수문장청, 영군직소 등이 포함된다.2009년까지 목재만 450만재, 기와 150만장, 비용 1789억원이 투입되며 전각 등 총 93동이 복원되는 대단위 공사다. 신 대목장 개인적으로는 꼬박 20년을 경복궁에서 출퇴근하게 되는데 그 대미를 광화문으로 장식하게 된다. 그는 “문무백관의 조회와 국가의식을 거행했던 근정전은 우리 고건축의 백미”라고 극찬하면서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140년전의 건축기법을 완전히 이해하게 됐고 또한 광화문도 이와 비슷한 건축기법이라고 귀띔했다. 근정전 복원은 2000년부터 3년 10개월 걸렸다. “광화문 복원공사는 예정된 2009년 말 이전에 끝낼 수 있습니다. 목조는 잘 관리만 하면 천년수명이기 때문에 광화문 또한 이제 새로운 천년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는 중졸학력으로 당대 최고의 목수자리까지 올랐다. 올해로 꼭 50년째 목수인생을 맞고 있는 그는 1942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병천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 신강수 한테 망치질을 배우며 일찍 밥벌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먹고 살 수 있는 기술 한가지만 배우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 그러다보니 목수들의 양말 세탁 등 온갖 심부름과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들보용은 소나무 수령 300~400년 돼야 그러던 1960년 명인 이광규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이때 봉원사 요사 및 종각 공사에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스승의 스승 조원재를 만나 남대문 중수 공사에 동참했다. 1965년 군복무를 마친 후에는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진주성 촉성문, 서울 숭인동 청룡사 대웅전, 용인 호암장 신축 공사 등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대목장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5년 수원성 장안문 복원공사 때에는 도편수로 독립하면서 1983년까지 밀양군 무안면 홍제사 법당, 서울 삼청동 총리공간, 서울 필동 한국의 집, 경주 안압지 1∼3건물, 단양 구인사 사천왕문, 부여 삼충사 영당 및 내외삼문, 울산 동축사 대웅전 및 산신각, 유성 현충원 현충문, 부여 무량사 극락전 보수 공사 등을 맡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중졸 학력으로 50년째 목수… 당대 최고 도편수 자리에 1982년 청와대 영빈관인 상춘재를 신축할 때 도편수를 맡았다. 한겨울에 30여명의 목수들과 함께 새벽 여섯시에 청와대로 출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상춘재는 4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와 관련 “아마 가장 빨리 지은 한옥이 아니겠느냐.”고 술회했다. 이 같은 인연이 있어서인지 1989년 청와대 대통령관저의 신축공사까지 맡게 된다. 그는 평소 “좋은 적송을 구하는 사람이 좋은 건축을 하는 것”이라고 늘 주장해왔다.1980년대 초반 강원도의 적송 많은 산 50만 평이 매물로 나오자 주저 없이 사들여 좋은 재료를 현장에 공급하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바탕이 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인 경복궁 보수공사의 도편수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복궁 복원공사가 다 마무리되면 평소의 꿈인 우리나라 전통건축 박물관을 지을 예정이다.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으며 큰아들이 목재소를 운영하면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신 대목장은 우리나라 고건축의 대가인 조원재, 이광규로 이어지는 대목장 계보를 잇고 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1942년 충북 청원 출생 ▲58년 충남 병천중학교 졸업 ▲58∼60년 신강수, 박광석 문하에서 한옥 주택 신축 공사 ▲75∼78년 수원성곽 장안물, 창용문 복원 공사(도편수 신응수) ▲79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신축 공사 ▲82∼83년 청와대 상춘재 신축 공사 ▲88년 경복궁 만춘전 복원 공사 ▲89∼90년 청와대 대통령관저 신축 공사 ▲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74호 대목장 보유자 ▲91∼95년 경복궁 침전지역 복원 공사(강녕전, 교태전, 경성전, 연생전, 웅지당, 연길당, 함원전, 흠경각, 동서행각, 건순각, 양의문, 함흥각 등) ▲96∼98년 경복궁 동궁지역 자선당, 비현각, 회랑 복원 공사 ▲97∼99년 경복궁 자경전, 창덕궁 돈화문 보수 공사, 경복궁 경회루 보수 공사 ▲97∼2001년 경복궁 흥례문 권역 복원 공사(흥례문, 유화문 및 화랑) ▲2000∼04년 창덕궁 규장각 옥당, 약방, 영의사, 검서청, 양지당, 봉모당 복원 공사, 경복궁 근정전 보수공사 ▲04∼현재 경복궁 건청궁(장안당, 곤녕합, 복수당 外 13동) 복원공사 # 수상 만해예술상 수상(99년), 옥관문화훈장(2002년) 등 # 주요 저서 ‘천년 궁궐을 짓는다’‘목수’‘경복궁 근정전’ 등
  • “법식 갖춘 괘불 보셨나요”

    “법식 갖춘 괘불 보셨나요”

    괘불(掛佛)이란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고자 절의 큰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그림을 말한다. 보통 높이가 10m가 넘는 크기여서 다루기가 쉽지 않은데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따른 훼손 위험도 적지 않아 걸기를 꺼리는 분위기이다. 따라서 요즘에는 박물관이 아닌 법당 앞뜰에 법식을 제대로 갖추어 걸린 괘불의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땅끝마을이 가까운 전남 해남의 미황사가 해마다 한 차례씩 여는 괘불재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미황사 괘불재는 해남지역 주민들이 정성들여 농사지은 것을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다음해 풍년을 비는 자리지만, 전통문화 애호가들에게는 괘불의 본래 쓰임새를 확인할 수 있는 드문 기회이기도 하다. 보물 제1342호로 지정된 미황사 괘불은 조선 영조 3년(1727년)에 그려진 것으로 밝은 녹두색과 분홍색·황토색이 조화를 이루어 은은하면서도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높이 1170㎝에 너비가 486㎝에 이르는 대작이다. 지역축제로 발돋움한 미황사의 ‘괘불재 그리고 작은음악회’는 올해로 여덟번째. 올해는 오는 27일 열린다. 절 아랫마을 사람 20명이 오후 1시부터 대웅전에 있는 괘불을 앞마당으로 옮기면, 만물공양(萬物供養)과 하늘·땅·사람에게 소원을 비는 통천(通天), 법문, 축하공연에 이어 2시50분 괘불을 큰법당으로 다시 모신다. 두레상 한솥밥 나누기는 오후 3시, 작은음악회는 오후 6시에 펼쳐진다. 미황사에서는 이날 밤 템플스테이도 가능하다.(061)533-3521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고창 선운사에 꽃무릇 만개하니…

    고창 선운사에 꽃무릇 만개하니…

    한 줄기에서 태어났지만, 잎은 꽃을 못 보고, 꽃 또한 잎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움에 절여져 핏빛처럼 붉은 꽃, 바로 ‘꽃무릇’입니다. 한 수도승을 향한 사랑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어느 여인의 한이 맺혀진 꽃이란 전설이 전해 오지요. 그래선가 봅니다.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지 않더군요. 첫번째 찾았을 때는 꽃대조차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화사한 자태 보겠다고 서울에서 전북 고창으로, 전남 영광으로 그 먼거리를 달려간 방문객을 어찌나 야멸차게 거부하던지요. 공연히 마음만 달떴습니다. 한 번 돌아선 여인의 마음이 쉽사리 풀어지지 않는 게지요. 글 사진 고창·영광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꽃무릇 여행 1번지 여름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이맘때면 전북 고창의 선운사 골짜기에는 꽃잔치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가을을 여는 꽃무릇의 향연이다. 대체로 백로무렵 피기 시작해 9월 중순경 절정을 이루지만, 유난히 늦여름 비가 많았던 올해는 개화시기가 늦어져 한가위 무렵부터 절정을 이루기 시작했다.10월 초까지는 아리따운 꽃무릇의 자태를 볼 수 있을 것이란 게 선운사 관광안내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두번째 찾은 선운사 들머리에 꽃무릇이 만개해 있다. 늘씬한 미녀의 각선미를 연상케 하는 연초록 꽃대 위로 왕관처럼 붉은 꽃술이 펼쳐져 있는 모습. 반가운 마음 한편으로 도로 양옆의 철제 가드레일 밑에 고개를 꺾고 있는 모양새에서 애처로움도 느껴진다. 아름답고도 꾀까다로운 이 꽃은 적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은밀한 환경에서 피어 있어야 할 터. 꽃무릇 축제를 찾은 관람객들을 위해 식재했다고는 하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제 있을 곳이 아닌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자니, 노류장화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관광객들의 눈수발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처량하다. 꽃무릇을 흔히 상사화(想思花)라고도 부른다.9∼10월쯤 잎이 없는 꽃대에서 꽃이 나오고, 꽃과 꽃대가 모두 사라진 11월쯤 땅바닥에서 개난초 비슷하게 생긴 잎이 펴 겨울을 난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 채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것이 상사화로 불리게 된 연유. 하지만 개화시기나 꽃잎의 색깔 등에서 상사화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꽃무릇은 유독 절집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쓰임새가 요긴하기 때문이다.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함유돼 있어서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할 때 찧어서 바르면 좀처럼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독기 품은 여인네처럼 비늘줄기에 품은 유독물질을 제거한 다음 얻은 녹말로 한지를 붙이면, 강력한 살균력 때문에 역시 좀이 스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선운사 들머리에서 절집 담벼락까지 약 200m 구간은 평지형 계곡의 꽃무릇 군락이 장관. 계곡물에 투영된 나무와 꽃무릇의 붉은 색감이 가을 분위기를 돋운다. 선운사 맞은편 동운암으로 향하는 산책로 주변 산자락은 마치 불이 붙은 듯하다. 동운암 못 미쳐 왼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뜻밖에 넓은 차밭과 만날 수 있다. 꽃무릇은 물론 물봉선, 들국화 등 들꽃들이 차밭 고랑 사이에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솔제 휴게소 왼쪽길과 진흥굴 지나 소리재와 포갠바위로 향하는 계곡 등의 꽃무릇 무리도 볼 만하다. 길이 넓고 평탄해 가족과 함께하는 트레킹 길로 마춤하다. 선운사 관광안내소 063)560-2712. #불갑사와 용천사도 가볼 만 전남 영광군의 불갑사도 선운사 못지않은 꽃무릇 군락지. 여느 절집과 달리 부처의 옆모습이 보이는 특이한 구조의 대웅전이 유명한 곳이다. 최고의 감상 포인트는 대웅전 뒤편 저수지 주변. 조석으로 사진작가들이 줄을 잇는 곳이다. 저수지와 잇닿은 산비탈을 가득 채운 꽃무릇이 장관을 이룬다. 사찰 토담벽이나 저수지의 잔잔한 물, 혹은 무게감있는 나무들을 배경삼아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저수지 주변의 호젓한 오솔길은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 그만이다. 함평 용천사는 불갑사에서 차로 15분 거리.100여 종의 야생화와 꽃무릇이 어우러진 꽃무릇공원이 조성돼 있다. 용천사를 휘돌아간 꽃무릇 군락이 이 일대를 별유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사찰 위 푸른 왕대나무 밭 아래에 붉은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풍경이 압권. 어렵사리 피어나 잠깐만에 지고 마는 꽃무릇이 남도의 가을을 붉게 붉게 물들여 가고 있다. 영광군청 문화관광과 (061)350-5752, 함평군청 문화관광과 320-3364. #가는 길 선운사:서해안고속도로→선운산 나들목→좌회전→22번국도 선운사 방향. 불갑사:서해안고속도로→영광 나들목, 호남고속도로→정읍 나들목→고창→영광→불갑사. 용천사:서해안고속도로 영광나들목→23번 국도 함평방향→백운리 삼거리→좌회전→838번 지방도→5㎞→용천사. #이곳도 가보세요 ▲학원농장-초봄에는 청보리밭이었던 들판이 가을이면 메밀꽃밭으로 변한다. 규모면에서 국내 으뜸.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www.borinara.co.kr,(063)564-9897. ▲광백사 천일염전-전남 영광군 백수읍 하사리와 염산면 일대에 광활하게 펼쳐진 천일염전지대. 전국의 천일염 생산량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다. 전남 신안군에 이어 두 번째 규모.
  • 봉은사 ‘木삼세불 좌상’ 시문화재 지정

    봉은사 ‘木삼세불 좌상’ 시문화재 지정

    서울시는 26일 ‘봉은사 목(木) 삼세불 좌상’을 비롯해 봉은사가 소장하고 있는 불상 및 탱화 15점과 ‘자치통감 사정전 훈의(資治通鑑 思政殿 訓義)’ 등 고문헌 2건을 ‘서울시 유형문화재 및 유형문화재 자료’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또 조성 기록이 남아 있는 문화재 가운데 최고(最古)의 목불상인 ‘수국사 목(木) 아미타불 좌상’과 ‘초간본(初刊本) 용비어천가’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도록 문화재청에 신청했다.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 대웅전에 모셔진 ‘봉은사 목 삼세불 좌상’은 좌우로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갖추고 있다.1651년에 만들어졌다가 화재로 훼손돼 1689년쯤 보수됐다. 시 관계자는 “‘봉은사 목 삼세불 좌상’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삼세불로는 드물게 조성 기록이 남아 있다.”면서 “조성 당시의 원형이 온전히 남아 있다는 점도 고려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자치통감 사정전 훈의’는 조선 세종 때 학자들이 중국 북송(北宋)의 사학자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의 주석을 편집한 중국통사다. ‘수국사 목 아미타불 좌상’은 13세기 초에 제작된 불상으로 당시의 불교 조각사와 서지학(書誌學) 수준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 1447년에 간행된 ‘초간본 용비어천가’는 세종 때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악장문학이다. ‘봉은사 목 삼세불 좌상’ 등 17건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서울시문화재는 모두 335건으로 늘어났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이주노동자 첫 합동 수계법회

    이주노동자 첫 합동 수계법회

    한국에 들어와 살고있는 외국인 노동자 500명이 한꺼번에 계를 받는 대규모 수계(受戒)식이 열린다. 조계종 총무원이 이주노동자불교협의회와 함께 다음달 7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마련하는 ‘이주노동자 수계법회 및 문화마당’행사. 조계사 창건주간을 맞아 스리랑카, 네팔, 몽골,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 불교권 국가에서 이주해온 노동자 500여명에게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직접 계를 주는 자리로 조계종단 최초의 외국인 합동 수계식인 셈이다. 이번 수계식은 그동안 몇몇 조계종 사찰에서 진행해온 이주 노동자 지원활동을 토대로 마련됐다. 조계사는 부설 이주노동자지원센터를 통해 이들에 대해 무료진료와 법률 상담을 진행해 왔다. 안산 보림선원도 산재 환자와 구직 노동자 지원을 돕고 있다. 수계식 참가자도 대부분 이같은 사찰의 지원활동에 참여했던 이주 노동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사찰들의 이주노동자 지원은 지난 2월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를 계기로 지관 스님이 본말사 주지연수를 다니면서 사찰마다 이주노동자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한 데 따른 것. 조계사 이주노동자지원센터며 안산 보림선원도 모두 그때 이후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조계사에는 몽골불자회와 네팔불자회가 생겼고 다음달 경기도 양주에는 스리랑카 스님이 운영을 맡는 이주노동자지원센터 부설 쉼터도 문을 열 예정이다. 화계사는 다음달 28일 산재 사망자 등 이주노동자 합동 천도재를 지낸다. 조계종 총무원과 조계사는 “그동안 불교권 국가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신행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다.”며 “이번 행사는 종단 차원에서 각 사찰의 이주 노동자 지원 활동을 결집해 신행터와 소통공간을 마련해주는 한편 이들의 출신국 드라마 상영이나 한글교실 운영 같은 활동을 체계적으로 해나가기 위한 첫자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수계법회가 끝난 뒤 조계사 일원에서는 다양한 문화마당이 펼쳐진다. 극락전과 대웅전 주변에서 수계자들의 화합마당이 열리며 수계자들에 대한 무료법률 상담 및 미용 서비스도 진행된다. 조계사 백송 주변에선 한국 전통놀이 및 불교관련 용품 만들기 체험행사가 있고 대웅전앞 특설무대에서 타악공연 야단법석과 동남아전통공연 등으로 꾸며진 공연마당도 펼쳐진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무심 스님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무심 스님

    “모든 것을 내려놓게나.” 몸과 마음을 비우라는 전 화계사 조실 숭산(2004년 입적) 스님의 ‘방하착(放下着)’ 한마디에 미련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한국불교에 귀의한 무상사 주지 무심(無心·49·본명 조슈아 헨리 레아)스님. 미국 보스턴대 화학과를 졸업한 이 미국의 과학도를 한국 땅의 ‘눈 푸른 납자(衲子)’로 변신시킨 건 무엇일까. 이 푸른 눈의 과학도에게 많은 길 중에서도 하필이면 한국불교를 택해 한국 승가에 몸담게 한 것은 불법(佛法)인가, 아니면 거역 못할 인연인가. 언제 어디서건 “나는 전생에 한국사람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무심 스님.1984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아 한국생활을 한 지 23년째를 맞은 그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무상사(無上寺·충남 계룡시 두마면 향한리 산 51의9)는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과 함께 한국의 선(禪)불교를 만방에 전파하는 양대 수행도량. 계룡산 국사봉 아래 국제선원과 대웅전, 요사채의 한옥식 건물 세 채를 갖춰 망집을 버리고 ‘참 나’(眞我)를 찾기 위해 물 건너 산 넘어 찾아드는 외국인 스님들을 맞아주는 이색지대이다. 지금은 미국, 말레이시아, 폴란드, 체코, 리투아니아, 홍콩의 스님과 행자 10명이 편하게 살고 있지만 안거 때면 참선 정진하는 20여명의 외국인 납자들로 선풍이 시퍼렇다. 이 무상사에서 4년째 외국인 수행자들을 이끄는 주지 겸 지도법사 무심 스님은 ‘아주 무서운 선생님’이다. 평소엔 웃음 많은 넉넉한 친구이지만 흐트러진 수행승들에겐 어김없이 불호령를 내리는 ‘계룡산 호랑이’인 것이다. ●보스턴대 출신 미국의 과학도 ‘불교 입문´ 무상사(無上寺).‘부처님 앞에선 위도 없고 아래도 없이 모든 게 평등하다.’는 대웅전의 ‘무상사’편액을 바라보는 스님의 각오는 날마다 새롭다. 대학시절 명상과 요가에 빠져 있던 그에게 숭산 스님과의 만남은 세상의 미명을 밝히는 큰 길로 불쑥 다가왔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힌두교 수행자를 따라 간 토굴에 불상이며 십자가며 힌두신이며 여러 종교 상징들이 있었는데 유독 불상에 눈길이 가더란다.“불교를 알고 싶다.”는 말에 돌아온 “불교를 배우려 들지 말고 살아 있는 부처님을 찾아보라.”는 힌두교 수행자의 말에 호기심만 더 쌓일 뿐이었다. 케임브리지 선원을 찾아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듣고도 의심이 풀리지 않아 귀찮을 만큼 끈질기게 수행법을 묻던중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수행이다.”는 말에 눈앞이 밝아졌다. 스님 말마따나 “수행기술이나 방편을 알려줄줄 알았는데 의외의 내려놓으라는 ‘방하착’ 한마디에 눈 귀가 열린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식품회사에 1년반을 다니면서도 ‘방하착’이 내내 머리에 휘돌아 결국 숭산 스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행자가 됐다. ●수덕사 등 한국의 유명 선원에서 안거 34차례 화계사에 온 게 1984년 4월 말이다. 수덕사, 정혜사, 신원사를 비롯해 전국의 이름난 선원에서 안거에 든 것만 해도 34차례. 숭산 스님의 법문에 감화돼 머리를 깎고 한국으로 출가한 50여명의 외국인 스님 가운데 가장 먼저 조계종 비구계를 받은 인물이다.‘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원을 받아들인 범어사 스님들이 머리를 깎아주었다.‘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로 유명한 현각 스님의 사형이기도 하다. 부산 흥법사 주지 심산 스님과 대구 관음사 회주 우학 스님은 당시 부산 범어사에서 함께 비구계를 받은 한국인 도반들이다. “나를 버리려 했던 내가 무거운 짐을 진 껍데기가 돼있음을 알곤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남의 생각과 손에만 이끌려 살고 있는 나였지요.” 2001년 화계사 국제선원장 시절이었다. 후배들 눈치도 보이고 해서 “내 손으로 뭔가 하겠다.”는 뜻을 숭산 스님에게 간곡히 알린 뒤 부산으로 내려가 무작정 시작한게 남산국제선원이다. 한국의 외국인 스님 가운데 가장 먼저 일선포교에 나선 것이다. 한국인 신도들을 직접 대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범어사 밑의 포교당으로 쓰이던 상가 건물의 방 하나를 빌려 ‘남산국제선원’ 간판을 붙이고 나니 신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엿하게 선원의 모양새를 갖춰갈 무렵 무상사의 주지 스님이 사정이 생겨 고국인 폴란드로 돌아가는 바람에 무상사로 옮겨와야 했다. “당시 신도들의 열성과 신심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어요. 무상사에 와서도 신도들의 요청으로 매주 두번씩 부산에 내려가 법문이며 수행지도를 해야 했지요.” 이후 비구니 스님이 선원을 맡아 어렵게 꾸려갔지만 결국 문을 닫아야 했던 사연은 잊을 수 없는 아픔이다. 무상사에 와선 대웅전도 번듯하게 세워놓았고 지금은 건물들에 단청을 입히느라 바쁘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단청 불사에 매달려 손님 맞으랴 건물 손질하랴, 한참 만에야 스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처님의 상호를 떠올리게 하는 둥근 얼굴이다. 유난히 푸른 눈만 아니라면 걷는 폼새나 말하는 투며 영락없는 한국사람이다. “이런저런 불사들을 모두 도맡아 하자니 돈도 있어야 하고 사람도 있어야 하고 여간 어려운게 아니에요. 종단 지원 없이 모든 것을 다하려니 더 힘들어요.” 종각도 세워야 하고 숭산 스님 부도탑도 모셔야 하고…. 이런저런 욕심(?)을 주섬주섬 늘어놓는다. “이젠 사판승이 다 되었다.”며 겸연쩍어하는 스님의 말끝을 잡았다.“한국불교에서 무엇을 얻었느냐.”는 물음에 한참의 침묵 끝에 날 선(?) 말을 돌려준다.“한국불교에서 무엇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무엇을 갚고 살아야할지를 고민 중입니다.” 한국의 불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수행전통을 오롯이 갖춘 채 염불과 불경 공부를 겸하는 통(通)불교의 성격을 갖지만 한국의 스님들은 이 ‘귀중한 보물’을 잘 모르고 사는 게 안타깝단다. 한 절집에서 이렇게 큰 일들이 어그러지지 않고 순탄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게 신기하다고 한다. 다그쳐 물었다. 발심(發心) 출가의 화두, 즉 ‘얼마나 내려놓았느냐.’는 미련한 질문에 서슴없는 답이 나왔다.“말에 집착함은 곧 허상에 쫓기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려놓으라는 숭산 스님의 방하착도 길을 제대로 찾으라는 방편에 다름 아니지요. 끊임없이 묻고 의심하고 노력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무상사에선 남녀구별 없이 한방에서 함께 참선 ‘분별없는 말은 오해를 낳고 큰 화로 이어진다.’는 평범한 경계가 무상사에선 혹독한 묵언수행의 전통으로 서 있다.“묵언수행은 참회의 방편이 아니라 나를 찾는 수행의 큰 길”이라는 무심 스님의 지론을 따르는 무상사의 외국인 스님들은 보름, 수개월, 심지어는 수년간 묵언수행을 계속한다. 수행을 깨는 납자들은 가차없이 쫓겨난다. 구별과 차별 없는 ‘무상(無上)’의 큰 뜻은 수행공간에서 독특하게 살아 있다. 다른 한국의 선방들이라면 비구, 비구니, 남자신도, 여신도들이 각각 다른 방에서 참선에 들지만 이곳 무상사에선 한 방에서 모두가 함께 한다. 역시 무심 스님의 수행방식이다. 포교는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무심 스님. 얼마전 아프간 피랍사건을 의식한 듯 불쑥 말을 꺼낸다.“한국인이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교나 기독교 포교를 하는 것과 내가 한국에 와서 불교 포교를 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인도에서 중국으로 간 달마대사도 처음엔 그곳 불교계에서 박대당했다는 비유와 함께 “나도 한국인들에게 무시와 질시를 숱하게 받았지만 지금 이렇게 한국인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느냐.”며 웃는다. “한국에 언제까지 살겠느냐.”고 물었다. 답은 생각대로였다.“불법을 위해 사는 사람이 어디에 살고 어디에서 죽는 게 무슨 상관이냐.”면서 한국과 인연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가 살 수도 있지만 아직 이곳에서 할 일이 많다고 넘긴다. 유대인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불가에 귀의하지 않았으면 나도 역사 교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무심 스님.“깨끗한 물이나 오염된 물이나 모두 허물없이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어머니의 가슴과도 같은 넓은 도량의 한국불교를 택하는 눈 푸른 사람들에게 맑은 정신을 갖도록 하는 게 내 소임”이라며 기자를 배웅했다. ‘내려놓으라.’는 방편과 함께 받은, 스님의 ‘이 뭐꼬.’ 화두풀이는 계속되고 있었다. 계룡산 무상사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무심(無心) 스님은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출생 ●1979년 보스턴대 화학과 재학중 숭산 스님 만나 발심 ●1980년 보스턴대 졸업 ●1984년 한국 입국, 화계사에서 법명 ‘무심´ 받음 ●1986년 범어사에서 비구계 수지 ●1985∼1989년 수덕사, 신원사 등에서 안거 ●1997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지도법사 자격 받고 공안지도 ●1999년 화계사 국제선원 수석지도법사 ●2002년 부산 남산국제선원 개원 ●2003년∼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및 지도법사
  • 남해와 만나는 또다른 방법-망운산(望雲山)

    남해와 만나는 또다른 방법-망운산(望雲山)

    ‘보물섬’ 경남 남해의 산들은 어디를 올라도 파란 남해와 만날 수 있다. 다랑논과 멀리 앵강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설흘산, 다도해의 일출이 더없이 아름다운 금산 등이 그 중 손꼽히는 명산이다. 이제 남해의 명산 목록에 망운산을 추가해야 할 듯하다. 깨끗한 풍모와 드넓은 기상으로 다도해를 보듬으며 우뚝 선 망운산은 최근에 와서야 외지인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발 786m로 남해에선 최고 높이의 산이다. 금산, 설흘산 등이 남해를 찾는 외지 손님들의 산이라면, 망운산은 남해군민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산이다.360도 어느 방향에서든 푸른 다도해와 만날 수 있는 말 그대로 풍경의 ‘보물산’이다. 글 사진 남해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산중에 핀 연꽃 ‘화방사´ 망운산 오르는 길은 남해읍 공설운동장 인근에서 시작하는 코스와 서상면 예계마을 코스, 고현면 대곡마을 화방사 코스 등 다섯개 가까이 된다. 이번 산행은 망운산 중턱의 절집 화방사(花芳寺)를 들머리 삼았다. 그리 가파르지 않아 오르기 수월할 뿐 아니라, 산행 내내 다도해는 물론, 닥나무 군락지나 망운암 등 많은 볼거리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소요시간은 왕복 3시간 남짓. 절 아래 약수터에서 맑은 물로 목을 축인 다음, 돌다리와 몇 개의 나무 계단을 오르면 곧바로 화방사 일주문과 만난다. 청아한 독경소리가 들려오는 돌계단 저편에 화방사가 연꽃 같은 자태로 앉아 있다. 호구산 용문사, 금산 보리암 등과 함께 남해 3대 사찰이라 일컬어지는 곳.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망운산 남쪽에 연죽사를 건립한 것이 화방사의 시작이라 전해진다.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소실된 것을 인조 15년(1637) 서산대사의 제자 계원과 영철 두 선사가 현 위치에 ‘연화형국’이란 뜻의 화방사로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뭍의 대가람과 비교할 만한 규모는 아니지만, 대웅전 좌우에 시립한 응진전과 명부전, 강당 역할을 담당하는 채진루 등이 짜임새있게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단아한 자태의 절집이 왜 진작 사람들의 이름에 오르내리지 않았을까. 큰 사람 밑에서 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어도 큰 나무 아래서는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없다던가. 남해의 명찰 금산 보리암의 명성에 가려진 탓일 게다. 깊은 차향 우러나는 다원과 반야교를 차례로 지나면 햇빛 한 점 볼 수 없는 숲길이 이어진다. 깊은 정적 사이로 간간이 들려오는 산새들의 지저귐과 계곡물 소리가 반갑다. 망운암 못미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산닥나무 자생지는 잊지 말고 들러야 할 곳. 철쭉보호지역 아래 약수터에서 길이 양갈래로 나뉘어진다. 약수터 뒤로 난 길보다 오른쪽 임도를 따라 걷는 편이 다소 수월하다. #일망무제가 동행하는 산길 정상을 향해 임도를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바다 건너 멀리 하동 화력발전소와 광양제철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은 어떨까. 임도를 버리고 동네 앞산처럼 야트막한 산자락을 타고 올랐다. 평탄한 정상 능선길을 따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한려수도의 절경이 펼쳐졌다. 일망무제. 산의 기운을 빨아들인 구름이 하늘로 솟구치는 가운데, 우람한 내륙의 산봉우리들은 바다를 향해 줄달음치고, 점점이 떠 있는 섬들 너머로 사천과 고성, 광양, 여수 등 바다에 기댄 도시들의 자태가 두 눈 가득 들어온다. 정상표지석에서 KBS송신소 아랫길로 300m쯤 더 가면 망운산 전망대 겸 산불감시초소다. 억새가 거센 바람에 몸을 누이는 전망대 앞 공터에서 하늘 향해 두 팔 뻗고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시라.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가는 길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남해고속도로 순천 방향 진교나들목에서 내려 남해대교를 지나야 한다. 국도 19호선을 타고 남해읍으로 향하다 고현면 이어마을 앞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3㎞ 남짓 더 가면 화방사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5분 정도 더 가면 화방사 주차장. 다소 돌아가더라도 드라이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다면 사천에서 창선·삼천포대교를 지나 국도 3호선을 따라 달리다 창선교와 1024번 도로, 이동면 등을 차례로 지나는 길을 고려하시라.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남해공용터미널(055-864-7101)에서 대곡행 버스(1000원)가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화방사로 가기 위해서는 대곡에서 하차한다. #이곳도 가보세요 승용차로 망운산을 찾았다면 해안관광도로를 따라 사촌 해수욕장과 가천 다랭이 마을, 상주 해수욕장을 거쳐 창선·삼천포대교까지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도 좋다. 미조 상록수림, 물건방조어부림, 원시어업 죽방렴 등 많은 볼거리가 동행하는 코스다. 상동면 지족1리 죽방렴 옆에서는 바다낚시가 잘 된다. 어촌계에서 만든 좌대나 어선 위에서 6시간 낚시를 즐기는데 미끼 포함 2만4000원.010-4842-5511.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6) 장성 갈재~정읍 태인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6) 장성 갈재~정읍 태인

    해남 땅끝 마을에서 한양 남대문에 이르는 호남대로는 980리 길이다. 조선시대 9대로 가운데 제7로가 바로 이 호남대로이다. 옛 선조들은 해남에서 보름 동안 걸어 한양에 당도했다. 하루 평균 65리(26㎞) 정도를 쉬지 않고 걸어야 했다. 영남대로는 960리 길이지만 지세가 험준해 속도가 떨어진다. 이에 비해 호남대로는 20리 더 멀지만 평야지대가 많아 비교적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곳이 많다. 옛길은 국도 1호선과 겹치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남에서 북을 향한다. 도시가 형성되고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기도 했지만 부분적으로 남은 옛길은 정다운 옛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노령산맥 토박이들은 장성 갈재라 불러 노령산맥은 전라도를 남북으로 가른다. 토박이들은 노령산맥 대신 장성 갈재라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해남을 떠난 길손이 닷새쯤 걸으면 장성 갈재를 넘어 전라북도 땅에 이른다. 갈재는 해발 276m밖에 되지 않지만 많은 전설이 내려오는 제법 험한 고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노령보 고개길이 사나워 전에는 도적이 떼를 지어 있으면서 백주에도 살육과 약탈을 하여 통하지 않았는데 중종 15년에 보를 설치해 방수(防守)하다가 뒤에 폐지했다.’고 적고 있다. 장성 갈재에서 내려다 보면 남으로 전남 장성군이, 북으로는 동학의 고장 전북 정읍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멀리 펼쳐진 호남평야의 끝자락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옛길은 호남고속도로,1번국도, 호남선철도 등과 함께 갈재를 넘는다. 고속도로와 철도는 터널을 통해 전남·북을 소통시키지만 1번 국도는 고속도로 서편으로 꼬불꼬불 힘겹게 고개를 넘는다. 옛길은 호남고속도로의 동편으로 갈재를 넘고 있다. 서편보다 지형은 험준하지만 지름길이기 때문에 많은 이가 자연스럽게 이 길을 선택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통행이 거의 없는 옛길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숲이 우거진 곳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어렵사리 갈재를 넘으면 마을 앞 커다란 당산나무가 길손을 반긴다. 전북에서 처음 만나는 자연 부락인 정읍시 입암면 군령마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힘든 고갯길을 넘은 길손들이 쉬어가던 주막과 역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험준한 노령산맥에는 산적과 도둑이 많아 도방소도 설치됐었지만 이 역시 흔적조차 찾아 볼수 없다. 하지만 갈재에서 희미해졌던 옛길은 이곳에서 다시 모양을 되찾는다.1번 국도와 호남고속도로를 왼편에 끼고 옛길은 정읍시내를 향한다. 입암 저수지를 지나 고개를 내려가면 현재 입암면사무소 자리인 천원역 터에 이른다. 역은 없어진 지 오래이고 우물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그러나 옛길은 그런대로 형체를 잃지 않고 입암초등학교 옆을 지나는 골목길로 남아있다. ●보천교 총본부 있던 대흥리에 전국 부자들 모여 옛길은 ‘보천교’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진 입암면 대흥리에서 1번 국도와 잠시 겹치게 된다. 대흥리는 보천교(普天敎)의 교주 차경석(車京石·1880∼1936)이 교단의 총 본부를 만든 곳이다. 차경석은 이곳에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산을 헌납하면 정도에 따라 사후에 벼슬을 얻을 수 있다고 해 전국에서 부자들이 몰려들었다. 함경도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자가 거액의 재산과 식솔을 거느리고 이곳에 몰려왔다. 애초 입암면 대흥리는 농가 십여호로 이루어진 가난한 촌락이었으나 교세가 확장하면서 700여가구에 이르렀다. 교전인 십일전(十一殿)은 부지가 1만여평, 건평 350평, 높이가 99척이나 되는 웅장한 건물로 경내에는 3개의 탑이 있고 4대 문루가 있었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교세를 확장해 한때 교도가 600만명에 이르렀다. 이 마을 전호남(64)씨는 “보천교가 흥할 때 대흥리는 서울이 될뻔 했던 곳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이제 모두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교단의 내분과 화재로 내리막 길을 걷게 됐지만 이곳에 남았던 건물을 뜯어다가 서울 조계종 대웅전을 지은 것만 봐도 보촌교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선비들이 급제하려면 반드시 건넜던 과교 대흥마을을 거쳐간 옛길은 1번 국도에서 오른쪽으로 벗어나 정읍시 시기동을 향한다. 늦더위에 오곡이 여물어가는 들판을 가로 질러 정읍시내 초입인 과교천을 넘는다. 과교는 이곳을 건너야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오를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과거 보러 한양 가는 선비들은 반드시 거쳐가는 명소였다. 옛 모습의 과교는 찾을 길이 없고 현재는 정읍시내를 거쳐 태인과 전주시로 가는 차량들이 끊임 없이 오가는 2차선 시멘트 다리로 바뀌어져 있다. 과교를 넘어 정읍시내로 들어서면서부터 옛길은 찾기 힘들어진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 표기된 옛길은 도시 발달과 함께 사라졌다. ●최치원이 군수·이순신이 현감 역임했던 ‘태인´ 정읍시 북면을 지난 옛길은 농공단지를 지나 태인면에 이른다. 태인은 예전에는 1만가구가 넘는 큰 고을이었지만 지금은 여느 농촌 도시와 같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예부터 태인 주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전라도를 대표하는 문향(文鄕)으로 꼽히는 고을이기 때문이다. 정극인이 말년을 보내며 상춘곡을 지은 곳이고 전라도를 대표하는 무성서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도 이곳이다.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무성서원만은 남겨두었다. 최치원은 이곳 군수를 지냈고 이순신은 현감을 역임했다.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본적지 역시 태인이다. 이곳에는 1421년(세종3년)에 창건됐던 향교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옛 태인면사무소 옆에는 최치원이 세웠다는 피향정이 세월의 흐름을 꿋꿋이 견디며 온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태인초등학교 입구 옆에 복원된 동헌도 태인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신정일 우리땅걷기본부 대표 “걸어야 사유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고가 시작되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게 됩니다.” 사단법인 우리땅걷기운동본부 신정일(53) 대표는 “걷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나를 만나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옛길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오랜 유산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는 옛길이 더 이상 파괴되거나 잊히지 않도록 이를 복원하고 관광자원화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오늘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옛길에 대한 관심이 없지만 이는 곧 우리의 과거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장성 갈재를 넘는 옛길이 거의 사라진 것을 보고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문경새재처럼 옛길을 하루 빨라 복원해야 합니다.” 신씨는 수많은 사연이 얽혀 있는 갈재야말로 호남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정부와 자치단체가 새로운 도로를 개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옛길을 복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효과적이고 중요한 사업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옛길 복원과 함께 이곳에 얽힌 전설과 역사를 문화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면 어떤 관광개발사업보다 지역을 널리 알리고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동원이나 객사가 있던 곳이 면사무소나 학교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드물지요. 옛 선조들의 영혼이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실지 걱정이 앞섭니다.” 그는 옛길과 지역 문화를 재조명하는 작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밝혔다. 우리 땅 방방곡곡을 발로 뛰면서 기록하고 역사를 되짚어 내는 그는 “길위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한다.“명성 높던 고을들이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해져 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신씨는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지도 한장만 가지고도 옛길을 답사 할 수 있도록 폐허가 된 곳은 복원하고 남아있는 길은 보존하며 기록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2) 봉선사 큰법당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2) 봉선사 큰법당

    절 구경에 이력이 쌓여가면 불상이나 석탑에서 대강의 조성 시기를 읽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미술사학자들이 양식(樣式)이라고 부르는, 나름대로의 시대정신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상이나 석탑, 탱화가 예배의 대상을 넘어 미술품으로 대접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불교미술은 장인의 창작품이라기보다는 그 시대 신앙의 양상이 조형적, 혹은 회화적으로 번안된 것입니다. 미술사학자들이 작품에서 드러난 실마리를 풀어내어 조성 당시 신앙생활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요즘도 절은 끊임없이 세워지고, 그만큼의 불상과 석탑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훗날 미술사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원만하게 조성되었다고 칭송받는 불상도 오늘날 신앙생활의 양상을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광릉 숲 속에 있는 봉선사의 한글 이름 ‘큰법당’은 20세기 한국불교의 시대정신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려 했던 드문 노력의 하나로 보고 싶습니다. 조선 세조(1417∼1468)의 무덤 광릉(光陵)의 수호 사찰인 봉선사는 예종 원년(1469)에 세워졌다고 김수온의 ‘봉선사기(1469)’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 89칸의 적지 않은 규모였는데 건축 과정에서 부실공사라는 지적을 받아 허물고 다시 지었을 만큼 정성을 들였다고 하지요. 큰법당은 한국전쟁으로 삼성각(三聖閣)말고는 봉선사의 전각이 모두 부서진 뒤 1970년 운허(1892∼1980)가 초창 당시 대웅전을 복원하면서 새로 붙인 이름입니다. 운허는 평양 대성중학교 출신으로 중국 봉천에 동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쓴 데 이어 한족신보 사장으로 독립운동에 몸담았다고 하지요. 그는 산문(山門)에 들어선 뒤 불교경전을 파고들었는데, 광복 이후에는 봉선사에 머물며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데 힘썼습니다. 봉선사의 중심 전각을 큰법당이라고 이름지은 것도 불경을 우리말로 풀어내는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불경 번역은 세조가 1461년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법화경언해(1463년)’ 등 9종의 경전을 한글로 옮긴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봉선사와 불교의 한글화 작업은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큰법당은 편액뿐 아니라 기둥글(柱聯)도 한글로 되어 있습니다.‘온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큰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부처님 공덕 다 말못하고(刹塵心念可數知 大海中水可飮盡 虛空可量風可繫 無能盡說佛功德)’라는 선시(禪詩)이지요. 순수한 한글로 최대한 풀어쓰고, 의미전달을 위해서는 의역(意譯)까지도 서슴지 않았다는 운허 번역의 특징이 짤막한 기둥글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큰법당은 그러나 우리 불교계에 과제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법당의 이름은 공간의 성격까지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대웅전과 극락전, 대적광전 등은 각각 석가모니부처와 아미타부처, 비로자나부처로 주체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큰법당은 어떤 예배가 이루어지는 공간인지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새로운 성격 부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법당을 장엄하는 장인들도 옛것을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요. dcsuh@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35·끝)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35·끝)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한국 천주교는 이 땅의 사람들이 스스로 일으킨 ‘자생 신앙’이란 자부심을 갖는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생신앙 한국천주교의 태동지가 바로 천진암(天眞菴·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산500)이다.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이면서 불교와 유교를 빼고 설명할 수 없는, 유불천(儒佛天)의 합류지 천진암. 이 천주교 발상지에서는 지금 천주교 선조들의 정신을 오롯이 되살려내기 위한 독특한 성역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지난 1984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한국 순교성인 103위의 시성(諡聖·천주교에서 성인품을 인정하는 공식적인 절차)식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런 강론을 남겼다.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베이징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하며…(중략)…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세계인의 관심을 모은 시성식장에서 로마 가톨릭의 최고 수장인 교황이 한국 천주교의 자생신앙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그런데 교황이 강론 첫머리에 세세하게 강조한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란 누구일까. 바로 천진암에 모여 천주교를 공부했던 이벽(1754~1785)·이승훈(1756~1801)·권일신(1742~1791)·권철신(1736~1801)·정약종(1760~1801), 그러니까 천주교계에서 말하는 이른바 ‘5인의 성조(聖祖)’이다. 천진이란 산제사나 당산제, 산신제 등을 지낼 때 모셨던 단군의 영정(影幀).195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선 이 천진을 모시고 제를 지내던 천진각이나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집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 사료들을 들여다보면 천진암은 원래 천진당이 있던 자리였다. 불교의 천진암(天眞庵)이 들어섰다가 폐찰이 되었고 한때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였으며 나중에는 대궐의 음식 장만하는 일을 관장하던 사옹원의 관리를 받기도 했다.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 요사체는 반이나 무너져 빈 터가 되었네.”(1779년경 정약용)/“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1797년 홍경모의 ‘남한지’)/“젊은 선비들과 함께 이벽 성조께서 강학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폐찰이었다.”(1850년 다블뤼 주교) 이벽을 중심으로 이른바 5인의 ‘성조’들이 모여 공부할 무렵의 천진암은 거의 허물어져 가는 초라한 폐찰이었다. 당시 일반 집과 서당, 사찰에서 생소한 천주교 책을 읽고 토론하기란 아주 어려웠을 터. 이들은 남들의 눈을 피해 외딴 곳을 물색, 바로 천진암을 공부방으로 삼았던 것이다.1779년 이곳에서 강학회를 결성한 뒤 약 5년간 천주교리 연구와 강의, 공동신앙생활을 하며 천주교회를 창립했다. 교회라야 이 5명과 이들의 뜻에 동참한 정약전,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그리고 그 가족들이 전부. 대부분 당대의 명망 높은 남인(南人)계열 집안의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천진암을 자주 찾아 천진암에 얽힌 시를 90여 편이나 남긴 정약용이 대부분의 시에서 천진암의 ‘암’자를 ‘庵’이 아닌, 남인 학자들의 호 돌림자 ‘菴’으로 썼던 것일까. ‘5인의 성조’와 동지들은 학문을 연마하던 강학회를 종교신앙의 수련회로 발전시켰고 신·구약 성경 내용을 서사시 형태로 집약한 ‘성교요지’며 ‘천주공경가’를 지어 부르며 허술하나마 교회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쟁쟁한 유가의 10∼20대 선비들이 불교 암자에서 천주학을 공부하고 실천했으니 묘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함께 공부했던 강학자 이승훈을 베이징으로 보내 영세받도록 했으며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은 귀국후 이벽에게 영세를 주었다. 천진암은 이렇듯 중요한 한국천주교의 성지이지만 1980년 전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한국의 천주교회가 교회사 정리를 하면서 외국 선교사들의 문헌에만 의존했던 탓에 이 선교사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천진암이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것이다. 그러던 참에 천주교 수원교구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변기영 몬시뇰이 1975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1981년 ‘한국천주교발상지천진암성역화위원회’를 구성, 이곳에 한국천주교 200년 기념 ‘천진암대성당’을 세우기 위한 큰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이벽을 포함한 ‘5인의 성조’는 모두 박해를 받아 모진 매질 끝에 옥사하거나 참수당해 순교했다.‘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터를 지나 산길을 오르면 왼편에 ‘한국천주교 창립 성현 5인묘역’이라 쓴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천주교를 창립한 성조 5인의 유해를 옮겨 이장한 곳이다. 반대쪽엔 그 가족묘역이 조성되었다. 묘역 초입에 ‘한국천주교발상지천진암터’라 쓴 비석을 올려다보며 산길을 오르면 ‘강학회터’라 새긴 표석이 눈에 든다. 천주교리를 공부하고 교회활동을 처음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 덩그맣게 표석 하나만 남았지만 젊은 선비, 아니 천주교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혈기를 나누던 현장에선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5인의 묘를 봉안한 곳이 바로 옛 천진암 터. 가운데 ‘세자 요한 광암 이벽’이라 새긴 이벽의 묘를 중심으로 왼쪽에 정약종·이승훈, 오른쪽에 권철신·권일신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훨씬 전 앞서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연구하고 교회로 발전시키다가 순교한 한국천주교의 선구들. 목숨을 던져 신앙을 창시하고 지키다 희생한 선조들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채 옛 신앙 터만 소리없이 지키고 있다. kimus@seoul.co.kr ■천진암대성당 어떻게 짓나 천진암성역화 작업의 핵심은 아무래도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이름 그대로 한국 천주교 발상지에 100년에 걸쳐 기념 성당을 우뚝 세워 놓겠다는 것이다. 천진암의 성격에 맞춰 지붕은 사찰 대웅전의 처마형태를 갖춘 기와 지붕, 외벽은 유교 서원의 골격, 내부는 천주교 성당 양식을 택해 그야말로 ‘유불천’의 조화를 이룬다. 99만㎡ 넓이의 성지에 대성당을 중심으로 조성되는 광장이 16만 5000㎡, 성당 터만 해도 2만 6000㎡(좌석수 3만석). 성당의 높이는 기단∼2층 50m에 지붕부분 35m를 포함하면 전체 85m. 길이도 동서와 남북의 길이가 각각 195m에 달한다. 성당 넓이는 1층 2만 6800㎡,2층 1만 8600㎡. 기둥만 해도 42개가 세워진다. 벽과 기둥, 기단에는 사방 1m 크기의 한국산 화강암 10만개가 쓰이며 모든 돌에는 돌값을 봉헌한 사람의 이름과 봉헌번호, 봉헌연도가 새겨진다. 제대는 중앙 제대를 포함해 1,2층에 걸쳐 모두 55개. 지금은 지반 등 성당 터닦이 공사만 마쳐 휑한 모습. 성당 터 맨 위쪽에 1994년 축성식때 마련한 86t짜리 중앙 제대석이 놓였고 그 앞에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강복문을 직접 써 안치한 대성당 머릿돌(초석)이 있다. 5년 내에 철골·지붕공사를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그때부터는 미사도 진행할 수 있다. 임시 성당격인 성모경당을 대성당 터 위에 지어 놓았으며 대성당 완공 때까지 이곳에서 미사를 진행한다. 외벽과 장식까지 포함해 20여년 안엔 모든 공사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게 변기영 몬시뇰의 귀띔이다. 예상 공사비는 골조공사 500억원, 조적공사 500억원 등 총 1000억원.100년간 연평균 10억원이 들어가는 대규모 공사다.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34) 부안 능가산 내소사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34) 부안 능가산 내소사

    한반도 서쪽 끝 국립공원 변산반도의 능가산 자락에 소담한 연꽃 형상으로 앉은 내소사(전북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국립공원 안에 들어있어 철을 가리지 않고 신도며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지만 항상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손을 맞는 정갈한 고찰이다. 언제 어디에서건 평상심을 허물지 않는 법랍 높은 선지식(善知識)을 닮았다고나 할까.‘맑고 때 묻지 않은 사찰’을 들 때 빠지지 않는 도량,‘스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절집’의 명성만큼 내소사는 숱한 사연과 스님 이야기를 감추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승경전 능가경을 설했다는 ‘능가산’.‘능히 모든 마장(魔障)을 끊고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 담긴 불가의 마음속 성지이자 길지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내소사의 주봉인 관음봉이 능가산이라 불리면서 이 내소사는 ‘능가산 내소사’로 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1300년 고찰 내소사(來蘇寺)에 ‘내생(다음 세상)에 반드시 소생(蘇生)하라’는 창건주의 절절한 원이 서렸음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사찰이 처음 섰을 때의 이름은 내소사가 아닌 소래사(蘇來寺)였다고 한다.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惠丘)라는 스님이 대소래사와 소소래사 등 두 개의 절을 세웠는데 대소래사는 불 타 없어지고 지금의 소소래사만 남았다는 것이다. 원 이름인 소래사는 고려시대 정지상의 ‘제변산소래사’를 비롯한 시문들과 조선 중종25년(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확히 등장한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소래사와 내소사란 표현이 혼용되지만 조선 숙종 26년(1700년) 조성된 ‘영산회 괘불’에 ‘내소사’란 이름이 처음 나오고 이후 ‘해동지도’‘변산내소사사자암중건기’등 18∼19세기 문헌엔 모두 내소사로 기록되어 있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것을 놓고 세간에서는 “이곳 석포리에 상륙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절에 찾아와 큰 시주를 한 뒤 이를 기념해 이름을 바꿔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며 손사래를 친다. 이곳은 당시 나당 연합군에 맞서 싸운 백제의 마지막 저항지였던 만큼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절에 시주한 소정방의 이름 ‘소’자 에 절의 개명을 연결한 것이 맹랑해 보이지만 실제로 ‘부안군지’에는 이 이야기가 오래도록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사대주의에 빠진 학자들이 이야기를 허투로 꾸며 군지에 올린 사실이 나중에 확인됐고 부안군과 사찰측이 그 기록을 삭제키로 합의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전한다. 사찰의 이름이 바뀐 연유는 아직도 명확치 않다. 하지만 소래사면 어떻고 내소사면 또 어떠한가.“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과 일이 소생되기를 바란다.”는 큰 뜻에 차이가 없을 바에야…. 아무튼 학계에서는 ‘부안지’를 비롯한 여러 사료에 전하는 “경오년에 변산에 큰 불이 나 사찰과 임야가 모두 불탔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1810년경 대소래사가 화재로 없어진 것으로 본다. 남은 소소래사는 1633년 청민(靑旻)이 중건했고,1902년 관해(觀海)가 수축한 뒤 만허(萬虛)가 보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600m에 걸친 전나무숲을 관통해 천왕문에 서면 기둥의 예사롭지 않은 주련이 눈에 든다. ‘鐸鳴鐘落又竹(탁명종락우죽비) 鳳飛銀山鐵城外(봉비은산철성외) 若人問我喜消息(약인문아희소식) 會僧堂裡滿鉢供(회승당리만발공)’/목탁소리 종소리 죽비소리 어울리니, 은빛 산속에 봉황새가 날아드네. 누가 내게 무슨 기쁜 일 있나 묻는다면, 당우(堂宇)에서 스님들께 발우가득 공양 올린다고 하리. 내소사에 주석하며 호남지역에 선풍을 크게 일으킨 해안(海眼·1901∼1974) 대종사가 득도하면서 남긴 오도송. 얼핏보면 산 속에서 수행하며 부처님께 예불하고 공양 올리는 기쁨의 평범한 표현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저 스스로를 범부(凡夫)라 부르며 평생 수행에 몰두했던 선지식의 ‘칼날 같은 사자후’라는 주지스님의 귀띔에 주련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소문났던 해안 스님은 내소사에서 만허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해 호남 선(禪)불교의 여명을 밝힌 인물. 평생 수행과 정진으로 일관해 ‘호남지역의 대도인(大道人)’으로 추앙받았는데 늘상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절은 전쟁을 하는 곳이야.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막다른 골목에서 생명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란 말이야.” 환갑을 맞던 해에는 스스로 자신의 장례를 치르며 “다시 태어났다는 각오로 새롭게 수행자로 거듭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일주문 왼쪽으로 난 비탈길을 오르면 내소사를 중창시킨 해안 스님을 비롯한 고승들을 모신 부도전이 있다. 해안 스님의 부도앞 비석엔 ‘해안범부지비’라 쓰여져 있다. 뒷면에 탄허 스님이 쓴 비문 ‘生死於是 是無生死(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는 생사가 없다)’에 눈길이 쏠린다. 해안 스님 입적후 제자들이 오대산의 탄허 스님을 찾아가 어렵게 부탁해 받은 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내소사의 사격과 선풍이 변치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왕문 앞에는 ‘할아버지 당산목’이라 불리는 수령 700년의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일주문 앞에도 비슷한 나이의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할머니 당산목’이라 이름붙인 점이 흥미롭다. 과거엔 음력 정월 대보름 전날밤 이 느티나무 앞에 제수를 차려 내소사 스님이 주관해 절안에서 재를 모신 뒤 내소사 입구 느티나무에서 마을사람들과 합동으로 동제를 지내곤 했단다. 토속신앙과 불교가 융화된 독특한 당산제로 다른 지방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1914년 실상사(實相寺) 터에서 옮겨왔다는 봉래루 누각을 지나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아상(我相)을 버리고 나 자신을 낮춘다.’는 바로 그 하심(下心)으로 몸을 옮기면 이내 대웅전으로 치닫는다. 계단을 올라 허리를 펴면 맞은 편 정면에 단청이 모두 지워진 알몸의 소박한 대웅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kimus@seou.co.kr ■미완의 대웅전이 된 까닭은 내소사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ㅁ’자 가람배치의 정점인 대웅보전(보물 291호)이다.1633년 만들어져 지금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조선중기의 대표작격 전각. 전각의 단청은 모두 벗겨졌지만 “남길 것도 가져갈 것도 없는 무소유의 경지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이렇듯 이름난 전각이지만 누가 어떻게 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대신 숱한 설화들만 전한다. 설화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대웅보전은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大虎)선사가 지었고, 관세음보살상 등의 벽화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푸른 새가 그린 것으로 통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대웅전 건립공사를 맡은 화공이 단청을 하는 동안 절대 안을 들여다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여러 날이 지나도 기척이 없어 궁금해진 이 절의 사미승이 문틈으로 엿보니 푸른 새 한 마리가 붓을 문 채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새가 마무리를 안 하고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미완의 대웅전으로 남게 됐다.”설화의 내용대로 대웅보전의 동쪽 도리중 하나는 바닥 색칠만 한 채 단청을 넣지 못했다. 천장의 공포 한 군데에도 목침 크기만 한 빈 공간이 있는데 법당을 지을 때 동자승이 재목을 감추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의장(意匠)과 기법도 독창적이다. 아주 복잡한 구조의 다포식 구조이지만 못을 쓴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순전히 나무로만 깎고 짜맞춘 솜씨가 그야말로 구도의 경지 그 자체이다. 법당 안 벽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상 등의 탱화도 모두 일품. 특히 삼존불을 모신 후불벽의 ‘백의관음보살 좌상’은 남아있는 백의관음보살중 가장 큰 것. 백색 옷으로 전신을 감싼 채 바위에 앉은 모습인데 총 6칸 흙벽에 단숨에 그려나간 신심이 엿보인다. 대웅전 전면의 8짝 봉합창문을 장엄(莊嚴)하고 있는 꽃 문살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연꽃, 국화, 모란 등 여러 꽃무늬를 조각한 꽃문살인데 마치 꽃잎이 살아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답고 정교하다. “부처님집 방안은 용봉도 날고 아름다운 음악이 있고 온갖 꽃비가 내리는구나.” 조계종 문화부장을 지낸 혜자 스님이 자신의 책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산사’에 남긴 글이다.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6) 양산 통도사 괘불탱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6) 양산 통도사 괘불탱

    우리 문화에서 ‘스케일’이 아쉬웠다면 괘불탱(掛佛幀)은 충분히 위안을 주고도 남습니다. 괘불 또는 괘불탱은 ‘거는 불화’라는 뜻으로 야외 의식에 쓰이는 대형 불화를 말합니다. 경북 영천의 은해사 괘불탱이 높이 15m에 너비 6.07m로 가장 크지요. 충북 보은 법주사와 경남 하동 쌍계사 것도 13m가 넘습니다. 괘불탱은 모두 100여점이 남아 있습니다.1622년 전남 나주 죽림사 괘불탱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입니다. 높이 4m에 너비가 2.4m 정도니 큰법당의 후불탱보다는 조금 큰 수준이지요. 처음에는 야외 의식에서도 법당의 불화를 들고 나와 사용하다가 규모도 커지자 아예 별도로 야외용 불화를 만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괘불탱은 이렇듯 17세기 초반부터 본격 조성되는데, 불행하게도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불교는 죽은 이의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천도재(薦度齋)로 국민들의 상처 입은 정서를 치유하는 역할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인구의 3분의1이 줄어들었으니 온 나라가 초상집인 상황에서 천도재가 열리면 글자 그대로 넓은 마당에 단을 세우고 자리를 만드는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이룰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군중이 멀리서도 볼 수 있으려면 불화는 커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요즘 절에서 괘불탱이 내걸린 모습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큰법당의 뒤편에 모셔진 채 여간해서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연히 찾은 절에서 괘불탱을 만났다면 큰 행운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통도사성보박물관이 괘불탱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특별히 마련해 놓은 것은 다행스럽습니다. 중앙박물관은 지금 경남 양산 통도사의 석가여래괘불탱을 ‘꽃을 든 부처’라는 이름으로 전시하고 있지요.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면서 연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이라는 제자만 그 의미를 알고 미소지었다는 ‘염화미소’의 순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통도사에는 1649년에 만든 괘불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766년 12월8일 부처가 진리를 깨달은 날을 기념하는 성도재(成道齋)를 지내려 대웅전 마당에 괘불탱을 내다 걸었는데, 그만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닥치는 바람에 찢어졌다고 하지요. 그러자 27세의 젊은 승려 태활(兌活)이 중심이 되어 후원자를 모으고 법주사 괘불탱을 그린 두훈(薰) 등의 화승을 초빙해 1767년 9월 새로운 괘불탱을 완성하게 되지요. 태활은 괘불탱이 완성될 즈음 통도사 큰스님인 희유(希有)에게 글을 부탁했는데, 희유는 노고를 치하하는 말 대신 “석가모니불의 참되고 참된 모습을 어찌 형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되묻습니다. 깨달음을 어떻게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또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어떻게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느냐는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 것이었지요. 태활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석가모니불의 참된 모습에는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일단 수긍합니다. 그는 “그렇지만 그림자를 통해서 부처의 참된 모습을 찾는 그 흔적을 적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자기 생각을 펼치지요. 괘불탱 전문가인 정명희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통도사의 괘불을 다시 만든 기록(通度寺改成掛佛記)’에 담겨있는 희유와 태활의 이런 문답이 ‘예수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가.’라는 기독교 미술의 오랜 논쟁과 일맥상통하는 고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괘불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에서 비롯됐다지만, 사회가 조금씩 안정되어 통도사 괘불탱이 완성된 영조 43년에 이르면 이처럼 종교와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크기’로 문화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크기로 압도하는 괘불탱이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dcsuh@seoul.co.kr
  • 李 민심잡기 朴 당심잡기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경선 후보는 4일 울산과 부산을 차례로 방문하며 영남권 민심잡기에 나섰다. 박근혜 후보는 당 행사인 ‘국회의원 및 당원협의회운영위원장 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새벽 항공기로 경북 지역에 도착한 이 후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양산 통도사. 주호영 비서실장 등 수행 의원들과 함께 대웅전 등 곳곳을 둘러본 뒤 주지 정우 스님과 차담을 나눴다. 정우 스님은 “용수철이 탄력받으면 오히려 벌떡 서지만, 큰 무게로 누르면 못 일어난다. 웬만하면 (검증 공세에) 대응하지 마시라.”고 조언했다. 스님은 또 “불교에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는 말이 있는데 ‘깨치기 전에 어려움이 더 많아진다.’는 뜻”이라며 이 후보를 위로했다. 이 후보는 “세상사 이런 것 저런 것 다 겪으면 도가 트인다.”고 답했다. 통도사에 이어 울산 선대위 발대식에 참석한 이 후보는 “60년대 20대 때 고향인 포항보다 울산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이 후보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기업이 매년 노조 파업으로 울산 시민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고 있다”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시위를 비판했다. 4차 정책토론회가 끝난 뒤 대구, 경주, 인천, 청주에서 당심잡기에 나섰던 박 후보는 이날 당 연석회의에 참가하는 것으로 공식 일정을 갈음했다. 박 후보는 인사말을 통해 “한나라당 지지율이 추락해 파란 유니폼을 입고 거리에 나서지 못하던 때도 있었지만 천막당사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국민의 마음을 얻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국민의 마음을 얻는 길은 어떤 정치공학이나 요령이 아니라 정직임을 가르쳐준 시간이었다.”라며 경선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국회의원들과 당협위원장 300여명 앞에서 당을 구한 대표 시절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한편 이날 현대건설 사장 출신인 심옥진 한국플랜트정보기술협회장과 이 협회 임원단이 박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종교플러스] 12일 통도사 정우스님 진산식

    조계종 통도사는 최근 제27대 주지에 임명된 정우(구룡사 주지) 스님의 진산식(취임식)을 12일 오전 10시30분 통도사 대웅전에서 거행한다. 오전 10시부터는 통도사 적멸보궁에서 헌다례(獻茶禮)가 열린다.(055)382-7182.
  • [종교건축 이야기] (30) 500년만에 복원된 개성 영통사

    [종교건축 이야기] (30) 500년만에 복원된 개성 영통사

    남과 북이 공동으로 복원 불사에 나서 2005년 10월 원래의 모습을 되살려 놓은 고려 사찰 개성 영통사(개성시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왕씨의 발상지이자, 대각국사 의천이 출가해 35년간 주석하며 한국 천태종을 개창한 유서깊은 고찰이다. 고려 현종 18년(1027년)에 창건되어 고려 왕실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받아 융성했으나 16세기쯤 소실되어 이름만 전하던 사찰. 천태종 개창자인 대각국사 비와 당간지주, 그리고 세 개의 탑만 덩그맣게 남아있던 것을 남북이 힘을 모아 29개의 전각을 원 모습대로 세워놓았다.500여년간 불교계에선 그저 ‘꿈의 성지’로 남아있었던 폐사 영통사. 하지만 이젠 웅장한 제 모습을 어엿하게 되찾아 일반 신도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 중기의 기록들에 따르면 고려시대 불교가 한창 성할 무렵 개성 성내에는 300여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절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것 만도 100개가 넘는다고 한다. 태조 왕건 자신도 고려를 세운 뒤 궁궐 주변과 송악산 기슭에 25개의 절을 지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 가운데 갓을 쓴 5개의 산 봉우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오관산(五冠山) 아래, 영통사가 자리잡은 영통골은 예로부터 절경과 길지로 이름 높았다. ‘큰 골짜기’란 뜻의 마하갑으로 통했던 영통골에서 왕건의 할아버지가 출생했다. 승려가 된 증조 할아버지도 이곳에 작은 절을 짓고 살았는데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 절을 중창해 이름을 숭복원이라 고쳐지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 왕실은 숭복원을 왕의 원당으로 삼아 왕건의 아버지인 세조 왕륭과 태조 왕건, 문종, 인종, 명종 등 역대 왕의 초상을 모셔놓고 정기적으로 참배했다. 지금 영통사란 이름의 사찰은 고려 현종기인 1027년 그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왕실 사찰의 위상에 더해 영통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1세기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면서부터. 대각국사 의천은 이곳에서 35년간 주석하며 불교학설을 강의해 남북한을 통틀어 빼놓을 수 없는 명찰로 키웠다. 1530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영통사의 온전한 모습이 등장하고 있지만 1671년 김창협의 ‘송도유람기’에 적힌 “영통사의 주요건물이 불 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6세기 중반 절이 소실됐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북한이 고려왕조에 눈을 돌리기 시작할 무렵인 1997년부터 북한 조선사회과학원과 일본 다이쇼(大正) 대학이 공동으로 발굴 작업을 벌였다. 이후 남한의 천태종이 50억원 상당의 기와 46만장, 단청 재료, 묘목 등을 제공해 1만 8000여평 부지에 고려양식의 원 사찰을 고스란히 되살려놓은 것이다. 형태는 옛 고려 사찰 그대로이지만 북한군이 상주하며 올려세운 전각들은 한결같이 콘크리트 건물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절 앞에 서면 예사롭지 않은 대찰이었음을 금세 알 수 있다. 주차장에 바로 붙여 조성한 큰 마당 서편에 선 높이 4.7m, 두 돌기둥 사이 폭 72㎝의 거대한 당간지주가 당시 영통사의 사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남한 사찰에선 흔한 일주문은 보이지 않는다. 일주문 격인 남문을 통해 절 안에 들면 거대한 회랑으로 나뉜 3개의 구역에 각각 들어앉은 전각들이 웅장하게 다가온다. 서편 끝의 종루와 동편 모서리의 경루가 회랑으로 연결된 정문인 중문에 들어서면 양 옆의 삼층석탑, 가운데에 오층석탑을 거느린 보광원이 우뚝선 채 내려다보고 있다. 전통사찰의 대웅전격 전각으로 영통사에선 중심 건물.2층 구조의 지붕 아래 닫집을 만들어 그 아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을 모셨다. 보광원 뒤편에는 중각원과 숭복원이 차례로 앉았다. 중각원은 대각국사와 제자들이 공부를 하던 곳.‘고려사’에는 이곳에서 50여차례의 대규모 강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숭복원은 태조 왕건의 원당으로 썼던 곳으로 나중에 사찰을 찾는 왕의 숙소로도 사용되어 행궁이라 불린다. 회랑으로 사방을 막은 것을 볼 때 당시에도 사찰의 다른 공간과 경계를 철저히 했음을 알 수 있다. 관세음보살을 봉안한 보조원 구역을 들어가려면 동문을 통해야 한다. 동문 앞에는 그 유명한 대각국사비가 우뚝 섰다. 거북 받침과 바닥돌을 1개의 통돌로 만들었는데 비 높이가 4.32m나 된다. 앞면엔 어린 시절부터 천태종을 개창하기까지의 대각국사 행적을 새겼고 뒷면에는 대각국사 제자 영근화상이 해서체로 쓴 묘실과 비명 내력인 사적기와 문도들의 이름이며 직명을 적은 제자 혜소의 글이 들어 있다. 보조원 뒤편에는 영통사와 관련있는 역대 고려 왕들의 초상을 모신 영영원이 서 있다. 사찰 뒤편 산 중턱엔 대각국사의 화상을 모신 경선원이 사찰을 내려다보고 있다. 대각국사는 이 곳에서 서쪽으로 4㎞ 떨어진 총지사에서 열반했는데 대각국사의 유언을 따른 제자들이 영통사에 잠시 법구를 안장했다가 다비한 다음 사리탑인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경선원 바로 앞에는 그 때 세운 부도가 그대로 서 있다. ‘송도제일루(松都第一樓)’라 쓰인 종루에서 회랑을 통해 동쪽 끝 경루에 올라서면 옛 시인이 쓴 시구가 눈에 든다. ‘오관산하고총림(五冠山下古叢林) 풍만누대녹수음(風滿樓臺綠樹陰) 경절진훤상한적(境絶塵喧常閒寂)’ ‘오관산 아래 총림이 섰으니/바람 가득한 누대에 푸른 나무 숲이 우거졌구나/빼어난 절경에 티끌마저 사라지니 이 얼마나 한가롭고 고요한가’ 남북이 합동 공사를 진행하면서 서로 다른 입장 차로 인해 수차례나 중단될 뻔했던 영통사 복원. 처음부터 수월치 않았지만 마침내 500년 염원을 풀어낸 큰 불사를 예견한 듯해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kimus@seoul.co.kr ■ 대각국사 의천은 영통사는 고려 왕조의 위상을 다시 세우기 위한 북한의 정책에 따라 500년 만에 복원되었지만 천태종찰을 되찾기 위한 남북한 불교계의 원력으로 되살아났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말할 나위 없이 그 가운데에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있다. 대각국사 의천은 태조 왕건의 4세손인 고려 11대 문종왕의 넷째 아들로 만월대 왕궁에서 태어난 인물. 여러 왕자들을 불러모은 문종이 당시 왕들도 자식을 승려로 만들었던 세태를 따라 “누가 승려가 되겠느냐.”고 물었는데 의천이 서슴없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영통사로 출가했다고 한다. 10살 때 출가해 2년 뒤 승가에서 수여하는 높은 칭호인 ‘우세승통’에 올랐고 송나라의 이름난 사찰을 돌며 선지식인들과 만나 불교를 익혔다. 송나라에서 가져온 불경·경서 1000권 등을 모아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 이 곳에서 1000여종 4769권에 달하는 불경을 출판한 게 ‘고려속장경’이다. 고려속장경은 원의 침략으로 1232년 불탔다. 의천은 어머니와 선종이 죽은 뒤 남쪽으로 유람해 합천 해인사에 은거하던 중 의천의 셋째 형인 숙종의 부름을 받아 흥왕사 주지로 있다가 개성 총지사에서 입적했다. 의천이 세운 천태종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전파되었으며 의천은 입적후 대각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대각국사비는 17대 왕 인종의 지시에 따라 세워진 것이다.
  • [책꽂이]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이용재 지음, 멘토프레스 펴냄) 환기미술관, 미당 고택, 박수근미술관, 명성황후생가, 김옥길기념관, 이상 고택, 의재미술관 등을 통해 시대와 역사를 들려주는 대중교양서. 건축평론가인 저자는 김수근 김중업 이희태 등 한국 건축 1세대 건축가를 비롯해 2세대인 김원 김홍식 우규승 김인철 방철린 조성룡,3세대인 승효상 김개천 이종호 김억중 등의 작품세계를 살핀다. 또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노이슈타트 등 외국 건축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야사, 설계에 얽힌 뒷이야기 등을 소개한다.‘H형강’‘코르텐강’‘필로티’ 등 건축용어들도 쉽게 풀이했다.1만 5000원.●위대한 버림(이준엽 엮음, 빨간우체통 펴냄)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성도(八相成道)에 따라 8명의 스님이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사상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엮었다. 중앙승가대 총장인 종법 스님, 전 동국역경원장 월운 스님, 능인선원 주지 지광 스님 등이 부처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부터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에 이르기까지 팔상성도를 차례로 설명한다.1만 1000원.●욕망하는 몸(루돌프 셴다 지음, 박계수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중세 사람들은 처녀의 피나 순결한 아이들의 피는 나병에 특효가 있다고 믿었다.11세기 이후 널리 퍼진 전설에 따르면 아멜리우스라는 사람은 나병에 걸린 친구인 아미쿠스를 낫게 하기 위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였다고 한다. 중세 독일의 시인 하르트만 폰 아우에의 작품 ‘가련한 하인리히’를 보면 순결한 시골처녀가 나병을 앓는 기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제공하려 하는 장면도 나온다. 머리에 얽힌 사연으로는 참수형이 유럽에서 18세기 말까지 공개적인 의식으로 거행됐으며 민속 축제와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도 소개한다.2만 8000원.●신나고 탑나고 절나고(장영훈 지음, 담디 펴냄) 풍수미학을 전공한 저자가 들려주는 우리나라 주요 사찰의 풍수이야기. 저자에 따르면 신라시대 왕들은 ‘왕이 곧 부처’(王卽佛)라는 명목으로 절을 지어 통치수단으로 활용했으며, 불국사가 궁궐을 닮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사찰들은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을 통과해야 높은 곳에 위치한 커다란 대웅전에 이를 수 있도록 설계됐다. 반면 당나라에서 입국한 스님들을 중심으로 “내가 곧 부처”라며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이 유행하자 일주문과 대웅전을 가깝고 나란히 배치한 절들이 지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찰이 바로 실상사다.1만 5000원.●앤디 워홀의 철학(앤디 워홀 지음, 김정신 옮김, 미메시스 펴냄) 스스로 “녹음기와 결혼했다.”고 말한 앤디 워홀은 평생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고 대화를 녹음했다. 이 책은 워홀이 그런 녹음기의 기록을 몇 가지 테마로 나눠 정리한 것.8살 때부터 백반증을 앓아 살갗이 하얘지고 딸기코였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와 체념, 섹스와 마약에 대한 탐닉, 가난한 이민자 가족 출신인 그가 돈에 대해 가졌던 집착 등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1만 5000원.●디테일-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다니엘 아라스 지음, 이윤영 옮김, 숲 펴냄) 시각예술의 이미지 속에 묻혀 있는 창의적인 사유의 광맥을 캐낸 미술교양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권위자인 저자는 미술작품과의 온전한 소통을 위해서는 ‘아는 만큼 보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저마다 독창성이 살아 있는 개별 미술작품에 지식과 정보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작용하기 쉽기 때문이다.3만원.●대한민국 정책지식 생태계(김선빈 등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펴냄) 정책지식이란 정부가 국정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지식을 가리키는 말. 나아가 정책지식 생태계라고 하면 이런 정책지식을 만들어내는 주체, 지식의 이용자인 정부의 중요 의사결정자, 언론기관이나 시민단체 등 의사결정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기관들이 상호작용하는 관계와 시스템을 지칭한다. 이 책은 새로운 국가발전 모델을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건강한 정책지식 생태계’의 조성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2만 8000원.●벌(모리스 메테를링크 지음, 김현영 옮김, 이너북 펴냄) 희곡 ‘파랑새’로 유명한 벨기에의 노벨문학상 작가의 대표적인 자연관찰 에세이.20년간 양봉을 하면서 얻은 경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꿀벌들의 세계를 한편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다. 저자는 벌들이 유모, 시녀, 건축가, 석수, 채집가 등 인간사회와 비슷한 분업활동을 통해 놀라운 문명사회를 이어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8800원.
  • 24일은 부처님 오신 날-한국의 불상

    24일은 부처님 오신 날-한국의 불상

    소수림왕 2년(372년)에 중국 전진(前秦)의 순도(順道) 스님이 고구려에 불법을 전한 것이 불교 전래의 시초라고 전해진다. 이후 불교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왔다. 우리 국토 어디를 가더라도 불교문화의 유적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이 불상(佛像)이다. 절에 가면 크고 작은 전각(殿閣)이 있고 그 안에는 여러 모습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또한 불상은 전국 어느 박물관에 가더라도 쉽게 마주친다. 본래 불교는 신(神)을 믿는 여타 종교와는 달리 인간 스스로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최고의 불격(佛格)을 이루고자 하는 종교다. 초기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만든다는 것이 종교적으로 금기시됐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사후에 자신의 형상을 숭배하지 말고 오직 교법과 계율을 따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어쩌면 불상은 전혀 필요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는 교리가 어렵고 난해하므로 부처의 모습과 흔적을 가까이 보고 직접적인 교화를 받고자 했던 것 같다. 석가모니 사후 초기에는 그의 뼈와 사리 등이 신앙의 구심점이 됐고 그것을 모시는 곳이 바로 탑(塔)이다. 그러나 부처님 사리는 한정돼 있었고 불교가 전파되면서 사리를 대신할 새로운 신앙의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점차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불상은 불교 신앙의 주된 예배 대상으로 여겨지게 됐다. 절이 지어지면 낙성식을 하듯이 불상이 조각된 후에는 점안식을 한다. ‘점안(點眼)’은 불상의 눈을 그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나무 등 천연물에 부처의 영험과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비로소 신앙의 대상인 ‘불상’이 된다는 것이다. 불교미술은 일반적인 미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염원이 담겨 있다. 불상 역시 그러한 요소를 반영하게 된다. 불상이 우리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불상의 재료로는 돌, 나무, 천, 종이, 옥, 금속 등이 쓰이는데 그중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석불(石佛)이다. 이 땅에는 유난히 돌이 많다. 우리 선조들은 돌을 다루는 솜씨가 빼어났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불상을 만드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석불은 숭고한 부처의 모습이면서도 온화한 인간의 미소를 띠어 평안함을 준다. 대웅전(大雄殿) 등 사찰의 전각 안에 모셔진 금동불(金銅佛)은 석불만큼이나 친숙한 불상이다. 불상은 삼국시대 이래 각 시대에 따라 감각과 의식 그리고 제작 기술을 달리했다. 그러한 정신적인 배경과 아울러 때로는 희대의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백제의 미소라고 칭송하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나 신라 문화의 꽃인 ‘석굴암의 석불’ 등 뛰어난 작품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 불상 조각의 영광은 일찍이 불교가 번성했던 고대에 있었다. 삼국시대 불상의 걸작은 우연도 기적도 아니다. 당시 사람들의 정성과 믿음이 응결돼 자연스레 표출됐기 때문에 예술적으로 탁월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불상 조각의 전통은 시대에 따라 기복을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불상에는 불교의 교리와 신앙내용이 상징적으로 표현돼 있다. 하지만 불상은 불교적인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숨결과 정서가 담겨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백제 불상의 티 없이 맑은 미소를 통해 선조들의 착한 심성과 지혜를 느낄 수 있다. 경주 남산 돌부처의 미간에 서려 있는 슬기로움은 오늘을 살고 있는 후손들이 바라보는 희망이다. 불상은 바로 과거의 진실이며 살아 있는 생명체다. 살아 있는 진실의 덩어리 앞에서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본다. 사진 글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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