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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방문화재 보험가입액 ‘쥐꼬리’

    잿더미가 된 국보 1호 숭례문의 화재보험 가입액이 고작 1억원이냐는 지적이 일고 있는 가운데 전국에 산재해 있는 국가지정문화재와 시·도에 등록된 지방문화재의 보험 가입액이 턱없이 낮은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손해보험사들이 목재 문화재가 화재 위험이 높다는 이유로 보험 가입을 꺼리면서 아예 보험에 들지 않은 곳도 많아 관리에 큰 허점을 드러냈다. ●보물 범어사 조계문은 고작 300만원 숭례문은 관리 주체인 서울시가 한국지방재정공제회에 최고 9508만 2000원의 화재보험에 가입해 놓았다. 이는 복구비의 200분의1 수준이다. 부산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대웅전(국가지정문화재 434호)은 연간 보험료가 3만 1640원으로 보험 가입액은 2113만 1000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물 1461호인 범어사 조계문은 겨우 300만원 정도다. 지자체 지정문화재도 실정은 비슷하다. 강원도 지정문화재인 원주 상원사 대웅전은 1억원, 속초 신흥사 극락보전은 3억원, 국보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평창 오대산 상원사는 11억원의 화재보험에 가입돼 있다. 부산시 지정문화재 1호인 동래구 동래부동헌 객사의 보험금은 5500만원,6호인 동래향교는 8800만원으로 수억원에서 수백억원이 예상되는 복원비에 턱없이 모자란다. ●국가지정 문화재도 보험 가입 안해 대구시는 2005년 4월 강원도 낙산사 화재가 발생한 이후 시지정 문화재 등의 보험 가입을 추진했으나 보험사측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아예 가입을 하지 못했다. 전남도 목조문화재 303점 가운데 보험에 든 곳은 나주 불회사, 장성 백양사, 화순 만연사, 보성 일월사 등 4곳에 불과하다. 국가지정 문화재인 강릉 오죽헌(보물 165호)과 선교장(중요 민속자료 5호)은 지난해 말 현재 보험 미가입 상태였다. 국보인 8각9층석탑과 지방유형문화재 28번의 적멸보궁을 간직하고 있는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는 지난 2006년까지 보험에 가입했지만 지난해에는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 가치 고려없이 보험료 산정 이처럼 보험액이 턱없이 낮자 일부 사찰은 자체적으로 민영보험에 추가 가입을 하는 실정이다. 부산 범어사측은 “51개 동 가운데 대웅전 2억원, 설법전 1층 4억원, 미륵전 3500만원 등 주요 시설물 7개동에 대해 따로 보험에 들었다.”며 “요사채 등 나머지 건물에 대해서도 가입을 희망했으나 보험사가 받아 주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같은 문제는 보험사측이 문화재적 가치보다 단순히 목재 건축물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물 면적에 따라 보험료를 산정하는 실정이다. 보험사가 목재 문화재는 화재 위험이 높다며 ‘위험 등급’에 포함시켜 보험 최고액을 낮게 정하는 것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범어사 김종길 사무장은 “보험사들이 문화재는 위험한 등급에 속하는 데다 보상금 평가에서도 문제가 많아 가입을 기피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전국종합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사라진 숭례문’에 불교계 화들짝

    ‘사라진 숭례문’에 불교계 화들짝

    ‘국보 1호’ 숭례문 전소를 보고 가장 놀란 것은 아무래도 불교계일 것이다. 불교 사찰들이 국가지정 문화재의 많은 부분을 소유하는 데다 대부분 목조여서 화재가 나면 곧바로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4년 화순 쌍봉사 대웅전(보물 제163호) 화재를 비롯해 2005년 양양 낙산사 화재 등에서 수많은 성보(聖寶)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조계종은 숭례문 화재 바로 다음날인 11일 전국 사찰 화재 예방을 위한 방재시스템 대책을 전격 발표하는가 하면 잇따라 관계자 회의를 갖고 주요사찰 건축물 점검에 들어갔다. 낙산사 화재 이후 종단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방재시스템의 재정비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현 시스템으론 사찰 문화재의 화재 예방과 진압에 큰 무리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사찰 문화재 피해 사례와 실태 조계종 총무원 발표에 따르면 전국 사찰 507곳에서 1847건의 불교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국보·보물을 포함한 지정 문화재의 20%가 이들 사찰 건축물 소유로 되어 있는 등 전체 지정문화재의 35%를 불교계가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국의 사찰에 문화재가 산재해 있지만 낙산사 화재 이전까지만 해도 불교계의 대응은 거의 ‘무방비’였다. 2004년 소방방재청 ‘화재통계연보’에 따르면 매년 사찰에서 발생하는 화재만 50여건. 지난 1984년 쌍봉사 대웅전이 전소된 것을 비롯해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과 원주 구룡사 대웅전 등 사찰 건축물 10여건이 화재로 불탔다.2005년 산불로 낙산사 전역이 소실된 이후에도 화재 3건이 발생해 김제 흥복사 대웅전이 소실되고 고창 문수사 한산전과 요사채, 편액을 잃는 피해를 입었다.(표 참조) 조계종은 낙산사 전역이 불에 탄 사건 이후 뒤늦게 나름대로 방재시스템을 구축해 가동하고 있긴 하다. 권역별 주요사찰 실태조사를 벌여 ‘주요사찰 방재대책 현황조사 보고서’와 ‘중요 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 연구보고서’를 잇따라 펴냈다. 이를 토대로 문화재청으로부터 방재 관련 예산을 확보해 해인사, 무위사, 봉정사, 낙산사 등 4개 사찰에서 방재대책 시스템 구축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방재 시스템의 문제점과 대책 그러나 이같은 조치가 전체 사찰 건축물을 아우르는 종합 방재시스템 구축엔 미흡하다.2007,2008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받은 예산은 각각 15억원과 17억원. 이 돈은 대부분 해인사, 무위사, 봉정사, 낙산사 등 4개 사찰의 방재대책 시스템 구축 시범사업에 쓰고 있는 형편이다. 모든 사찰들에 대한 소화전 설치를 비롯해 수로 확보, 방화수림 조성을 하려면 턱없이 부족하다. 조계종이 2006년 낸 ‘주요사찰 방재대책 현황조사 보고서’만 보더라도 몇몇 주요 사찰을 빼곤 대부분의 사찰은 소화전 몇 개와 소화기만을 갖춘 수준이다. 조계종 총무원과 불교계가 국가예산 증액을 요구하고 있지만 ‘메아리’가 없다. 따라서 지난 11일 조계종이 발표한 사찰방재 종합대책도 예산 확보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 문화재 소방개념에 대한 몰이해와 관련 법규 손질도 시급하다. 사찰 특성에 맞춰 단순 화재진압 차원의 소방설비를 넘는 예방 등 적극적인 보존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제도개선 측면에서 방재대비 매뉴얼에 의한 특수소방설비를 설치하기 위한 법적 근거 확보와 ‘문화재방재대책을 위한 법률’같은 방재대책 법률이 일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조계종 총무원측은 “문화재보호법 중 재난 개념에 맞춘 시설기준 조항 수정과, 광범위한 의미에서 문화재에 해당하는 전통사찰 보존을 위한 법률, 자연공원 및 환경관련 법령 개정을 해당 부처와 협의해 우선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숭례문 방화범 체포이후] “불량 소화기 30대”…전시용防災 여전

    [숭례문 방화범 체포이후] “불량 소화기 30대”…전시용防災 여전

    ‘640년 넘은 국보급 문화재인 극락전에 간이소화기만 두대뿐’ 숭례문이 화염속에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 지난 11일 기자가 찾은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위치한 ‘천년고찰’ 봉정사(鳳停寺). 사찰의 법당과 요사채 등 건물 10여곳의 문화재 방재 시스템은 예상했던 대로 ‘부실’과 ‘전시용’이었다. 두시간여 동안 안동시 관계자와 함께 경내를 돌며 내린 결과다. 이 사찰에는 국내 최고(最古)의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극락전(국보 제15호,1363년 건축)이 있다. 화재가 나면 이 소중한 유산도 숭례문과 똑같은 전철을 밟으면서 앙상한 골격만 남긴 채 잿더미로 변할까…. 숭례문이 화염에 무너져 내린 방송 장면이 수차례 오버랩됐다. 안동시 관계자는 “사찰에 화재 초동 진화용 간이소화기 30여대가 전부라 해도 할 말은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작동 상태 확인을 시작했다. 간이 소화기 대다수는 제작 연도가 4∼5년이 지났고 일부는 충전 상태마저 불량했다. 분말 및 청정용 간이소화기도 비치됐으나 대당 작동 시간이 10초에 불과해 실제 화재 발생시 효과는 알 수 없을 듯했다. 총체적 부실덩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관계자는 “안동지역에 문화유산이 많아 지자체로서는 재정 지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전했다. 예산 요청을 해도 후순위로 밀리고, 화재가 나지 않으면 사족(蛇足)이 된다는 인식도 깊이 깔려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 이런 요구 요건을 말하면 미운털 박힌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의 말에는 밑바닥에 깔린 공직사회의 경직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봉정사는 지난 1999년에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곳’을 구경하기 위해 찾았던 곳이다. 봉정사에는 극락전 말고도 대웅전(보물 55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 제449호) 등 목재 건물이 밀집돼 있다. 경내 곳곳의 옥외소화전과 소화기, 스프링클러 등은 겉보기에 소방시설이 그런 대로 갖춰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점검 결과는 ‘방재용이 아니라 전시용’에 불과했다. 대웅전과 극락전, 만세루 인근 3곳의 옥외 소화전은 소규모 물 탱크에 의존해 수량이 부족했고 수압마저 약했다. 사찰 관리 책임자인 자현 주지 스님은 “옥외소화전으로 불을 끄려면 최소 수백t의 수량을 확보해야 하지만 수t에 불과하고 수압도 떨어진다.”고 쓴소리를 했다. 대웅전 바로 뒤편을 살펴봤다. 산불 접근을 막기 위해 30m 구간에 설치된 10여대의 스프링클러도 비치용에 불과했다. 이마저 비 바람에 노출돼 대부분 녹슬었다. 수 년전에 설치됐지만 손길은 없었던 것 같았다. 자현 스님은 “재정이 열악해 엄두도 못낸다.”고 털어놨다. 이 곳에는 CC(폐쇄회로)TV를 포함한 무인 경비시스템은 전무했다. 화재 발생시 소방서의 도움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구조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17㎞ 떨어진 곳에 풍산소방서가 있지만 현장 출동까지 최소 10∼15분 이상 걸린다. 기관간 협조와 책임 소재도 불명확했다. 국보급 목조 문화재가 많은 봉정사의 방재체계 부재는 우리의 ‘방재 지킴이’ 현실이었다. 안동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사라진 숭례문] 해외 목조문화재 관리 실태

    |도쿄 박홍기특파원·베이징 이지운특파원·파리 이종수특파원|일본의 문화재는 한국처럼 목조인 탓에 화재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일본은 지난 1949년 1월26일 나라현의 호류지(法隆寺)에 불이 나 금당 벽화가 소실된 사건을 계기로 체계적인 문화재 방재체제 마련에 들어갔다.50년 문화재보호법의 제정에 이어 55년 호류지 화재일인 1월26일을 ‘문화재 방재의 날’로 지정, 해마다 사찰·신사 등 문화재를 대상으로 방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국가지정 문화재의 9% 정도가 밀집된 와카야마현 고야산의 방재시스템은 대표적인 첨단설비로 꼽힌다. 중요문화재인 고카와사 대웅전은 외곽에 설치된 ‘물대포’의 보호를 받고 있다. 물론 작은 불씨도 잡아내는 열감지기와 연결, 화재에 대처하고 있다. 특히 불이 나면 6개의 물대포가 사방에서 발사되지만 직접 시설에 겨냥하지 않는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내부에는 소화전이 비치돼 혼자서도 소방 호스와 노즐을 다룰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방화가스 분출 장치도 있다. 다른 건축물에는 촘촘할 정도로 ‘상향식 스프링클러’를 설치, 화재시 건물의 위쪽으로 물이 솟구치도록 했다. 중국의 경우, 대표적 목조 건물인 베이징 자금성 안에는 카페뿐 아니라 국숫집 등 각종 식당이 있다. 그러나 자금성에는 가스 공급이 되지 않는다. 제한된 양의 전기로만 조리가 가능하다. 물론 일반인의 불씨 반입이 금지돼 있고,5시 이후엔 조명을 밝히지도 않는다. 저녁에는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다. 무엇보다 자체 소방대대를 둬 화재에 대비하고 있다. 티베트 라싸에 위치한 대표적 목조 궁전 포탈라궁도 자체 소방대를 운영하고 있다. 근처에 있는 역사 유물 다자오쓰(大昭寺)는 화재 방지를 위해 아예 참배객들이 향불을 절의 밖에서 피우도록 하고 있다. 또 목조 문화재 보호를 위해 규정도 계속 강화하고 있다. 백열등은커녕 60W를 초과하는 조명도 사용 금지다. 향불 등도 반드시 밖에서 지핀 뒤 안으로 가져 오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문화재 화재사건이 가끔 일어나지만 주로 석조 건물인 데다 평상시 재난방지 시스템이 잘 갖춰져 큰 피해 사례는 적다. hkpark@seoul.co.kr
  • [사라진 숭례문] 방재시설 전무…화재 속수무책

    국보 1호 숭례문의 붕괴는 화재위험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국내 목조 문화재의 방재관리 허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소방설비 설치 등을 강제하는 세부규정이 없는 현행 문화재보호법으로는 목조문화재들이 사실상 화재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돼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소방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화재에 대처하지 못하는 문화재가 부지기수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숭례문 참사 이전에도 화재로 심각하게 훼손된 문화재들은 이미 많았다. 쌍봉사 대웅전, 낙산사, 수원화성 서장대, 창경궁 문정전 등은 대부분 목재 건축물인 데다 숭례문의 경우처럼 문화재 훼손을 우려해 적극적 진화장치를 해놓지 못했다. 문화재 원형을 보존해야 한다는 원칙에 화재예방 장치 설비가 어려웠고, 그로 인해 방재관리는 오히려 일반건물보다 더 취약했던 셈이다. 그나마 목조문화재 방재 대책 마련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은 지난 2005년 4월 낙산사 동종이 화재에 소실된 이후. 문화재청은 지난해 직원 10명으로 문화재 안전과를 신설해 문화재 재난 방지 등을 전담케 하고 있다.2006년 실시한 중요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 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중요 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 중이다. 문화재청이 예산을 배정하면 시·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사업을 시행하는 구조로, 지난해 총 15억원의 예산을 들여 해인사, 봉정사, 무위사, 낙산사 등 4곳에 수막설비와 경보시설 등을 설치했다. 그러나 목조문화재 방재의 제도적 수준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올해 관련 예산은 18억원. 숭례문도 우선 방재시설 구축대상인 중요 목조문화재 124개에 포함됐으나, 산불 위험이 높고 소장 문화재가 많은 사찰 문화재 등에 밀려 순위가 48번째로 밀려 있었다. 문화재 관계자들은 “전국의 주요 목조문화재들은 관리주체마저 불명확해 유사시 대처능력이 형편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숭례문과 비슷한 구조의 수원 팔달문과 장안문에도 소화전이 도로에 설치돼 있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수원시 화성사업소 관계자는 “목조에 불이 붙으면 건물내부에서 진화해야 하나, 소화전이나 스프링클러를 규정상 설치할 수 없어 진압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1호인 남한산성내 수어장대의 방재시설은 소화기 몇대가 고작. 최근 도립공원 관리주체가 광주시에서 경기도로 이관되면서 책임소재조차 모호해졌다. 지방의 형편은 더 심각하다. 전남도의 경우 목조문화재는 무려 303개동. 여수 진남관, 송광사 국사전, 화엄사 각황전 등 5점이 국보이나, 이들 건물안에는 화재진압 장치가 전무하다. 전등사, 보문사 등 문화재급 지방사찰들의 방재시설도 모두 사찰이 자체 관리하는 데다 간이 소화기만 배치된 수준이다. 서동철 김병철 기자 dcsuh@seoul.co.kr
  • [사라진 숭례문] 소실 심하면 국보지위 박탈

    불에 탄 숭례문이 복원 이후에도 국보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문화재 전문가들은 일단 불에 타지 않아 복원에 사용될 수 있는 부재(部材)가 얼마나 될지가 국보 지위 유지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보물 163호였던 쌍봉사 대웅전과 보물 제476호였던 금산사 대적광전은 1984년과 1986년에 각각 불에 타버린 뒤 복원되었지만 보물에서는 해제되었다. 문화재청 엄승용 문화유산국장은 11일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검토하지는 않았으나 일단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밀 실측도면을 바탕으로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인 만큼 국보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무엇보다 국보와 보물에 직접 일련번호를 붙이는 기존의 문화재 등급·분류체제를 개선하는 방안이 마련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사건이 발생한 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숭례문이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재라서 ‘국보 제1호’로 지정된 것이 아님에도 지나친 상징성이 부여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기존의 ‘국보 제1호 숭례문’을 ‘국보 숭례문(건축문화재 제1호)’으로 지정 방법을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김홍식(문화재위원) 명지대 건축과 교수도 국보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성급하게 결론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뜻을 밝혔다. 남아 있는 부재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를 조사하여 복원에 어느 정도를 사용할 수 있는지가 제대로 밝혀진 뒤에야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그러나 “너무나 많은 부재가 화재로 손실되어 과거에 숭례문이 갖고 있는 가치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면 국보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3) 경북 영천 거조암 오백나한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3) 경북 영천 거조암 오백나한

    은해사 거조암은 경북 영천의 청통면 사무소가 있는 네거리에서 서북쪽으로 난 찻길을 따라 팔공산 자락으로 올라가면 나타납니다. 이름에서는 깊은 산중의 작은 암자 같은 느낌이 물씬하지만 학교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주차장을 만나면 처음 이미지는 간데가 없어지지요. 차에서 내려 영산루 아래로 난 계단을 오르면 바로 절 마당입니다. 거조암을 찾는 사람들은 큰법당인 국보 제14호 영산전에 먼저 눈길을 빼앗기게 됩니다. 수덕사 대웅전에서 감탄했던 맞배지붕의 아름다움에 부석사 무량수전의 안정감이 더해진 듯한 느낌이 드는 데는 다 까닭이 있습니다. 수덕사 대웅전이나 무량수전처럼 고려시대 장인들의 작품이기 때문이지요. 이 건물을 해체보수할 때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지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정면 7칸에 측면 3칸의 영산전은 남아 있는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서도 규모가 가장 크지요. 여느 법당과는 달리 중앙에 하나밖에 없는 문으로 들어서면 갑자기 왁자지껄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법당을 메운 오백나한이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펼쳐지기를 기다리는 듯 제각각의 표정과 몸짓으로 앉아 있습니다. 가운데 불단에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거느린 석가여래가 이 광경을 인자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지요. 곁에는 아난과 가섭을 비롯한 석가의 10대 제자와 16나한의 모습도 보입니다. 석가가 인도의 영축산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하는 광경이 바로 이랬을 것입니다. 당시의 이벤트를 불교에서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이라고 하는데, 영산전은 바로 이 모습을 재현한 법당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영산전에는 부처와 보살을 제외하고 모두 526분의 나한이 모셔져 있습니다. 나한(羅漢) 혹은 아라한(阿羅漢)은 인도어의 아르한(Arhan)을 음역한 말입니다. 석가의 가르침으로 깨달은 이를 가리키지요.‘깨달으면 곧 부처’라는 선불교가 꽃을 피우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나한이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았을 것입니다. 다양한 견해가 있다지만, 오백나한은 부처가 입적한 해 마갈타국의 왕사성 밖에서 부처님의 말씀으로 경전을 만들고자 모인 ‘제1결집’에 참여했던 오백비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한은 다른 불교조각과는 달리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16나한부터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질 때 외모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고 하니 그들보다 법계가 낮은 오백나한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거조암 오백나한상은 영파 성규가 당시의 거조사를 중창한 조선 순조 5년(1804)을 전후하여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노승에서 동자승까지 다양한 세대를 망라하여 나한에 대한 전 시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상상력의 한계를 실험해 본 것은 아닐까 여겨질 만큼 표정과 자세가 모두 다르고 표현이 자유분방한 것도 영·정조시대를 지나면서 나타난 새로운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거조암 오백나한을 원숙한 조각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마치 캐리커처를 그리듯 대상의 특징만을 간결하게 잡아낸 솜씨에서는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느껴집니다. 온몸에 두껍게 발라진 호분칠과 결코 전문가의 솜씨라고 할 수 없는 얼굴의 서툰 채색조차도 영산전을 즐거운 축제의 현장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지요. 여기에 흔히 불상에서 보이는 이상화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어떤 외래 밑그림의 영향도 받지 않은 순수한 한국인의 얼굴을 그대로 형상화했으니 어찌 친근하지 않겠습니까. dcsuh@seoul.co.kr
  • 개성, 사무치게 그리웠다…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개성, 사무치게 그리웠다…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유년기를 보낸 시골마을, 기억나십니까. 포장도로라고는 달랑 신작로뿐, 대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길은 이내 흙먼지 폴폴 나는 흙길로 바뀌지요. 때에 전 옷차림의 개구쟁이들이 겨울이면 비료포대로 눈썰매타던 마을 고샅길이며, 아버지 읍내 나가시던 둑방길이 그랬습니다. 버스를 타고 돌아 본 고려 500년 도읍지 개성의 풍경이 딱 그 모습이었습니다. 마을 공동우물에서 남바위 비슷한 털모자를 쓴 아낙네가 물을 길어 등지게에 지고 나릅니다. 선죽교 부근의 냇가에서는 시린 손 호호 불어가며 빨래 방망이를 휘두르는 여인네의 모습도 눈에 띕니다. 버스가 마을을 지날 때 제법 용감한 개구쟁이는 언덕 위에서 늠름하게 폼을 잡고 손을 흔드는 반면, 수줍음 많은 녀석은 담장 뒤에 숨어 보일 듯 말 듯 손짓합니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세계가 교차하는 듯한 풍경이었지만, 참 정겨웠습니다. 버스를 함께 탔던 관광객 누구에게서도 잘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상대적 우월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금강산 일대가 처음 개방됐을 때와 비교하면 주민들의 표정도 놀라울 만큼 변했습니다. 버스가 지나는 길목마다 군인들이 지켜서고 있었지만, 주민들이 예전처럼 외면하거나 심지어 등을 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웃고 손을 흔들며 환영의 뜻을 표했습니다. 전혀 인위적인 모습이 아니었지요. 박연폭포, 선죽교 등 고도(古都) 개성의 관광명소를 둘러보는 것도 좋았지만, 주민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좋았습니다. 개성에서의 체류 8시간을 기록했습니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 남짓한 거리지만, 그 사이엔 이념과 체제의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지요.60년 세월을 에둘러 돌아왔기에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훔쳐보는 묘한 즐거움도 각별했고요. 시간대별로 개성관광의 묘미를 소개해봅니다.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흔히 출입국사무소로 알고 있지만, 서로 두 개의 국가로 인정하지 말자는 뜻에서 ‘국’자를 뺐다)에서 개성관광증을 받는 등 수속을 마친 다음 버스에 올라탔다. 5분 정도 달린 버스가 개성표시판을 지날 즈음 전신주 가운데 테두리 색깔이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뀐다. 북한 지역으로 들어섰다는 뜻이다. 버스 행렬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북한군 지프차가 등장하는 것도 이때쯤이다. 경계근무를 서는 앳된 얼굴의 북한군 병사 몇 명을 지나면 곧바로 북측 출입사무소. 간단하게 입국심사를 마치고, 버스에 동승한 북한 안내원 2명과 함께 개성으로 향했다. 개성공업지구를 지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낯익은 남측의 풍경이 이어진다. 공장 건물 사이로 24시간 편의점도 있고, 서울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란색 버스가 출근길의 북한 근로자들을 실어 나른다. 개성공업지구를 지나 15분쯤 경의선 철길과 나란히 달리면 개성의 초입 송남동에 닿는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거란에서 보낸 낙타 50마리를 굶겨 죽였다는 약대다리가 있는 곳이다. 개성 주민들에게는 ‘야다리’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개성에서 경의선 열차가 매일 한차례 와닿는 봉동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야다리를 건너야 한다. 송남동을 지날 무렵, 느닷없이 머리 위로 고가도로가 나타났다. 안내원은 장차 서울과 평양을 연결할 고속도로라고 설명했다. 현재는 개성과 평양을 오가는 데 이용된다. 고기남새, 세거리 사진관, 리발관 등 개성시내 건물에 내걸린 간판들이 마치 1960∼70년대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을 보는 듯하다. 슬그머니 사진을 찍고도 싶었지만, 안내원의 경고대로 ‘피곤한 여행’이 될 듯해 꾹 참고 말았다. 시내는 거의 무채색이 지배하고 있다. 주민들의 옷이며, 건물들이 검고 어두운 색깔 일색이다. 거기에 낮게 깔린 안개까지 더해지며 무채색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간밤에 무척이나 추웠던 듯, 주민들 대부분이 두툼한 옷차림이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동여맨 여인네의 얼굴이 시선을 붙잡았다. 차가운 날씨 탓에 볼에서 귀밑머리에 이르도록 빠알갛게 얼어 있다. 개성에서 박연폭포까지는 40분 남짓 소요된다. 개성시 외곽의 고갯길에 서면 개성을 둘러싸고 있는 송악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만삭이 된 여인이 두 팔 벌려 개성을 보듬고 있는 형상이란다. 그래서 개성 시민들은 송악산을 어머니 산이라 부른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멸망을 재촉하기 위해 고려 왕조에 정기를 불어넣어 주던 송악산의 여신을 임신시켰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개성시내를 벗어나자 처녀의 젖가슴처럼 봉긋한 산자락이 겹겹이 다가섰다. 나긋나긋한 느낌, 박연폭포에 가까워지면서부터 산세가 우람해지기 시작했다. 고봉준령은 아니지만 바위산답게 흰 눈을 이고 선 모습이 당당하다. 길도 제법 험하다. 좌우로 휘어지는 모양새가 설악산 한계령에는 못 미쳐도, 속리산 말티재에는 버금갈 듯하다. 마침내 박연폭포 앞에 섰다. 서경덕,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히는 곳. 북측에선 천연기념물 제388호로 지정해 놓았다.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 38m 높이 암벽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겨울이라 가늘어지긴 했지만, 금강의 구룡폭포와 설악의 대승폭포 등과 더불어 국내 3대폭포를 이룰 만한 자태다. 이쯤에서 관광안내원의 설명을 들어보자. “오래전 박연폭포를 찾은 기생 황진이는 폭포 아래 고모담에 훌쩍 뛰어들어 목욕을 즐깁니다. 목욕을 마친 황진이는 폭포 바로 옆 룡바위에 올라 젖은 머리에 먹물을 묻혀 초서체로 시 한 수를 적습니다.‘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 락구천(疑是銀河落九天)’이란 내용이지요.1957년 이곳을 처음 방문한 김일성 주석께서 그 문장을 ‘날아흘러 곧추 아래로 떨어진 물이 삼천척이나 되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지 의심스럽구나’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안내원은 또 “황진이가 적은 글씨를 곧바로 도공들이 새겨 오늘까지 전해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연폭포의 전경을 감상하기에는 고모담 오른쪽의 범사정이 으뜸이다.‘박연폭포가 안개 위에 떠있는 듯하다’는 뜻의 정자. 범사정에 앉아 쉼을 청한 이옥임(81·하남시)할머니의 눈가에도 옅은 물방울이 괸다.“70년 전 개성에서 소학교 다닐 때 걸어서 소풍왔던 곳이야. 아침나절 개성을 출발하면 저녁 무렵 도착하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구경한 다음 다시 개성으로 돌아갔지.” 범사정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대흥산성 북문이 나온다. 고려때 개성 방위를 위해 천마산과 성거산 등의 봉우리를 따라 쌓은 석성이다. 황진이의 연인 서경덕도 산성 동쪽 성거산에 터를 잡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산성 왼쪽의 박연(朴淵)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박연폭포란 이름의 유래가 된 못이다. 폭포 위쪽에 있다. 박씨 성 가진 사람이 폭포 앞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그 소리에 반한 용녀가 그를 유혹해 결국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고모담(姑母潭)은 아들이 용녀를 따라 죽자 그의 어머니가 몸을 던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대흥산성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관음사에 닿는다.970년 조성된 사찰. 작고 화려한 대웅전의 뒷문 장식에 슬픈 전설이 숨어있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관음사 조성공사에 동원된 조각 신동 운나(당시 11세)는 뒷문 장식물 조각에 열중하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는다. 곧바로 하산하려 했으나, 공사 진행이 늦어질 것을 우려한 공사 관리자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왼손잡이였던 운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도끼로 자신의 왼팔을 자른다. 결국 뒷문 왼쪽은 완성됐지만, 오른쪽은 미완으로 남게된 것. 그는 왼쪽문에 왼팔이 잘린 자신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박연폭포를 출발한 버스는 50분쯤 걸려 개성시내 중심부의 통일관에 도착했다. 앞으로는 개성 시내와 개성 남대문, 뒤로는 자남산과 김일성 동상이 펼쳐져 있다. 낡은 벤츠 승용차 뒷좌석의 흰 드레스 입은 신부, 파란색 복장의 교통보안원, 삼삼오오 걸어가는 주민 등 모두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관광객들을 관찰하고 있다. 시간이 느린 화면처럼 더디게 흐르는 느낌이다. 그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겨우 수m 쯤. 하지만 말을 걸 수도, 더더욱 손을 잡을 수도 없다. 통일관의 자랑은 닭곰탕과 장지단(계란조림), 이면수 조림 등으로 구성된 ‘개성 13첩 반상기’. 쌀밥에 13가지 반찬이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개성지역 토속요리다. 여기에 입에 불이 날 만큼 독한 송학소주가 곁들여진다. 개성시 문화회관 뒤편의 숭양서원은 정몽주와 서경덕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3년 정몽주의 생가터에 지어졌다. 입구 알림판에 따르면 ‘특별한 장식없이 간소하게 지었으나 이 곳 지형조건을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크고 작은 집들을 합리적으로 배치하고 조화시킨 우수한 건축물’이다. 정몽주의 영정과 저잣거리에 버려진 정몽주의 시신을 수습한 친구 우현보, 서경덕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선죽교앞에 섰다.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당한 곳으로 너비 2.54m, 길이 6.67m의 자그마한 돌다리다. 일제 강점기에 만든 인공수로가 물길을 대신하기 이전엔 송악산에서 발원한 로계천이 선죽교 아래를 흐르고 있었다. 선죽교를 지난 로계천은 사천강, 예성강 등과 차례로 만나 서해로 흘러 들어갔다. 원래 선지교(善地橋)라 불리던 것을 정몽주가 흘린 핏자국이 없어지지 않고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가 돋았다고 해서 선죽교(善竹橋)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자세히 보면 다리가 두 개인데, 난간이 있는 멋진 다리가 진짜다. 1780년 이곳에 부임한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선조할아버지의 피가 묻은 곳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다니자 원래 다리에 난간을 만들고 그 옆에 새 다리를 놓았다고 전해진다.‘문제의’ 핏자국은 화강암의 철분이 산화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개성 출신의 명필 한석봉이 썼다는 비석 맞은 편에 두 채의 비각이 서있다. 하나는 변을 당하기 직전 마지막 만난 친구 성여완의 것이고, 또 하나는 피습을 눈치챈 정몽주가 도망치라고 했음에도 끝까지 그와 함께한 하인 김경조의 것이다. 선죽교 건너편에는 표충비가 있다. 거북이 두 마리가 정몽주 충정을 찬양하는 비석을 이고 섰는데, 각 각 조선의 21대,26대 임금이 만들었다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마지막 일정은 고려박물관. 성균관 건물을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성균관은 992년 고려시대 국자감으로 창설됐다가, 이후 성균관으로 개칭한 국내 최초의 대학이다. 서울의 성균관보다 500년을 앞선다. 원래 건물은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17세기 초에 개축했다. 노거수(老巨樹)들의 집합소라고 할 만큼 넓은 뜰에 심어진 1000년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등이 인상적이다. 국보로 지정된 곳인데도 건물 내부를 들고 남이 자유롭다. 성균관 내 4개의 전시관에 고려청자, 금속활자 등 1000여점의 고려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야외 전시장에는 헌화사 7층탑 등 북측의 국보급 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개성을 빠져 나오는 길에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오전에 비해 몇 배는 많은 숫자다. 때는 이미 땅거미지는 시간. 전력이 부족한 마당에 어두컴컴해 진 건물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을 게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보일 듯 말 듯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개성 시내 한 쪽을 가로지르는 경의선 철길 위로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기차가 자주 지나지 않으니 무서워할 것도 없을 터. 어른들도 무시로 지나다닌다. 은행나무도 마주 봐야 열매를 맺는다던가. 등돌리고 있었던 겨레가 금강산과 개성 등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서서히 간극을 좁히려 하고 있다. 그것은 곧 열매를 거둘 날도 머지 않았다는 뜻일 게다. 글·사진 개성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가는 길 :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까지 가는 셔틀버스가 오전 6시 전후 서울 계동, 광화문 등에서 출발한다.5000원. 자가용의 경우 임진각까지 간 다음, 임진각에서 셔틀버스(6시40분∼7시20분 운행)로 출입사무소까지 가면 된다. 예약은 현대아산의 개성관광 홈페이지(www.ikaesong.com)에 링크된 전국의 개성관광대리점에서 할 수 있다. 현대아산 02)3669-3000, 도라산사무소 031)954-3940,950-5195.1일관광 요금은 18만원이다. ▲신분증 : 현지에서의 신분증은 개성관광증이 대신한다. 관광증 발급에는 여권 사진 2장이 필요하다. 관광증을 훼손하면 벌금을 물 수도 있다. 국내 출국 수속을 위해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여권 중 하나는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화폐 : 개성에서는 미국 달러 외 원화나 카드 등을 사용할 수 없다. 출발 전 환전해 가는 것이 좋다. 개성 북측 출입사무소 출구에서도 환전할 수는 있다. ▲휴대 금지 물품 : 필름 카메라는 반입 금지. 디지털 카메라는 허용되지만 초점거리 160㎜ 미만 렌즈, 광학 기준 24배줌 미만일 경우만 가능하다. 남측의 신문·잡지, 휴대전화(배터리 등 관련 용품 포함),MP3와 GPS, 내비게이션, 소형 라디오, 녹음기 역시 반입금지. 해당 물품은 현대 아산측이 보관, 관광 후 돌려준다. ▲국내 반입금지 물품 : 북측에서 구입한 뱀술, 령정술 등 동물을 재료로 만든 주류와 비아그라·우표·불온 서적 등은 들여올 수 없다. ▲남측출입사무소 1층에 설렁탕 등 간단한 아침 식사를 파는 매점이 마련돼 있다.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5)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5)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 한국 최고의 해외포교사 ‘숭산´스님 뒤를 잇다 2004년 입적한 전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은 오랜 기간 해외포교를 통해 숱한 외국인 제자를 낳은 선사이자, 한국 최고의 해외포교사로 꼽힌다.27일 서울 화계사 대적광전서 있을 숭산 스님 3주기 추모제에 참석하는 외국인 제자 스님만도 21개국 170명.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계룡산 자락의 국제선원 무상사를 기자가 찾았을 때도 추모제를 준비하는 스님들의 움직임이 여간 부산한 게 아니었다. 여러 외국인 스님들을 총지휘하느라 바쁜 조실 대봉(大峰·57·미국·속명 로렌스 시컬) 스님을 대면한 것은 한참을 기다린 끝이었다. 바쁜 결에도 단정한 옷차림으로 좌복에 꼿꼿하게 앉은 스님의 감회는 남달라 보였다. 한국의 외국인 스님으론 유일한 숭산 스님 전법(傳法) 제자이자, 숭산의 법맥을 이은 맏형인 때문일까. 전법 제자라 함은 오계와 십계를 받은 제자 중 법사와 지도법사를 거쳐 확실한 공안(화두) 수행을 인정하는 인가를 받은 스님에게만 주는 자격. 숭산 스님 제자 가운데 하버드 출신 현각과 무상사 주지 무심(미국), 그리고 한국 스님 도관 등 세 명이 인가를 받았지만 전법 제자의 반열엔 오르지 못했다. 그러니 숭산의 제자들이 유일한 전법 제자인 대봉 스님에게 깍듯한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동쪽 끝 필라델피아 근교, 인구 5000명의 작은 마을인 엘킨스 파크 태생인 대봉 스님에게 숭산은 방황의 끝을 매듭짓게 한, 그야말로 큰 산이었다. 코네티컷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에게 삶은 어려서부터 퍽이나 풀기 힘겨운 의문의 점철이었다고 한다.“왜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이들이나 예외없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일찌감치부터 범상치 않은 의심에 매달려 살았던 그가 물리학과에서 1년6개월 만에 심리학과로 전과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대학졸업 후 전공을 살려 취직한 병원에서 환자 심리상담 일을 3년쯤 했을까.‘내가 나를 구제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불현듯 회의를 느껴 그만두고 도자기 굽는 일이며 용접 등 닥치는 대로 막일 터를 전전하다가 잠수함 만드는 공장에 몸을 담았다. 끝 모를 방황의 늪에 깊숙이 빠져들었던 것이다. “잠수함 공장의 단순노동을 하면서 뜻밖에 내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으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던 중 막연히 불교의 스승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당시 예일대 옆에 2년여 전 문을 연 뉴헤이븐 선원을 찾았다. 뉴헤이븐 선원은 숭산 스님의 제자인 예일대 교수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선원.“며칠 뒤 숭산 스님의 큰 법문이 있다.”는 말에 밤잠을 설치기를 한참 뒤. 마침내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듣고는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30년 전인 1977년 5월의 일이다. ● 30년전 숭산 스님의 법문 듣고 방황의 길 접어 “어떤 게 미친 것이고 어떤 게 미치지 않은 것인가.” 법문을 듣던 한 청중이 불쑥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끊임없이 의심을 거듭해 왔던 바로 그 화두였다. 숭산 스님의 답은 과연 무엇일까.“네가 많이 집착한다면 많이 미친 것이고, 조금 집착한다면 조금 미친 것이다.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미치지 않은 것이다.” 10여년간 대학 공부와 막노동일을 했지만 터럭만큼도 생각해 보지 못한 답이었다.“모든 사람들이 ‘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모두 미쳐 있다. 헛된 나를 버리고 진실한 ‘참나’를 찾고 싶다면 참선수행을 하라.” 한국불교에 귀의할 마음을 굳혀 잠수함 공장 일을 단박에 그만두었고 한달 뒤 프로비던스 선원으로 출가,30여년째 부처님 제자로 살고 있다.1984년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사미계를 받았고 4년 뒤 스페인 바르셀로나 선원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숭산 스님을 처음 만나 자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정했지만 부모들은 맏아들을 불가(佛家)에 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유대인으로 사업에 크게 성공한 CEO 할아버지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을 줄 알았던 장남이 속세를 떠난다니 부모의 실망이야 오죽했을까. 숭산 스님을 만난 뒤 1년쯤 지난 때였을까. 가족들이 숭산 스님을 집으로 초대해 스님을 떠보느라 온갖 질문공세를 퍼부었다고 한다.“종교를 빙자한 세일즈맨이 아닌가.”“맞다. 대자대비를 파는 세일즈맨이다.” 마침내 숭산 스님의 그릇을 본 가족이 아들의 길을 인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완강하던 부모님이 숭산 스님에게 마음을 연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을의 분위기가 조금 도움이 됐다고나 할까….” 어릴 적의 고향 엘킨스 파크는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독특한 곳이었던 것 같다. 영국계 퀘이커 교도들이 정착해 화합과 평화의 고장으로 일군 펜실베이니아주의 도시답게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남부에서 피신해온 흑인 노예들이며 유대인, 이탈리아인들이 분란 없이 잘 어울려 살았다고 한다. 교회며 성당, 사원들이 모임도 열고 함께 크고 작은 행사도 가졌다고 하니 예사 마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못내 아쉬워하는 부모와 친척들을 뒤로한 채 서울 화계사로 들어온 게 1984년 9월. 당시 숭산 스님은 대봉 스님과 함께 사찰 40여곳을 일일이 돌며 한국 절집들의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국 사찰을 조금 알게 됐을 때 미국 프로비던스에 ‘금강선원’이 문을 열게 됐다. 화계사 생활 한 달 만이었다.‘금강선원’에 마땅한 지도법사가 없어 사실상 주지격인 도감을 맡아 다시 미국으로 가야 했다. 이후 화계사와 미국의 ‘금강선원’을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한국말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한국불교를 택해 자원해서 화계사 국제선원에 들었던 만큼 한국불교에 깊숙이 빠지고 싶었는데…. 그땐 숭산 스님이 야속했지요. 하지만 이것도 길이려니 여기고 매년 동안거는 꼭 한국에 들어와서 났지요.” 한국에서 비구계를 받고 무상사에서 함께 수행 중인 주지 무심 스님이 일찍부터 한국포교에 나섰다면 조실 대봉 스님은 해외 생활에 더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무심 스님은 개띠여서 한 곳에 오래 머물렀지만 나는 호랑이띠를 타고나 이곳저곳을 떠돈다.”며 웃는다. 프랑스 파리선원 주지, 캘리포니아 무문선원 주지, 보스턴 케임브리지선원 주지 등 유럽·미국의 선원에서 초심자들을 지도하다가 한국에 정착한 것은 1993년 9월. 무상사 국제선원을 막 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금은 대웅전이며 선원 같은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그때만 해도 첩첩산중에 잠자리 겸 법당만 달랑 갖춘 조립식 건물 한 채만 서있었다. 부엌도, 화장실도 물론 없었다. 공양(식사)을 하려면 2㎞쯤 떨어진 절 아래 마을 식당까지 내려가야 했다. 대소변 해결할 시설도 마땅히 없어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선원을 짓는다는 기쁨에 참선수행을 빼곤 온통 인부들과 함께 공사에 매달렸다.1999년 가을에야 미국인 명행 스님이 처음 선원으로 들어왔으니 계룡산 자락의 무상사를 6년간이나 홀로 지킨 셈이다. ● “말(言)은 낙엽과도 같아 입 밖에 나면 모두 허무한 것”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되짚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기자를 겨눈다.“너는 누구냐.” 눈앞에 날아든 살에 머뭇거리다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허튼소리로 방패를 삼았다.“아무 것도 아닌데 말은 누가 하는고.” 어차피 거량이 안 될 바에야 일찌감치 입을 닫는 게 상책.‘뻔뻔한 묵언’으로 하늘을 가리자니 기자의 빈 잔을 채우며 말을 잇는다. “말은 떨어지는 낙엽과도 같아 입 밖에 나면 모두 허무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살지요. 수행자들은 말을 안함으로써 힘을 얻고, 속인들은 말을 많이 해야 힘을 쓴다고 하던가요.” 크게 한 방을 맞아 비틀거리다가 “은사 스님(숭산)의 가르침대로 잘 살고 있느냐.”는 허튼소리를 또 한번 뱉고 말았다.“오직 모를 뿐인 마음으로 곧바로 나아갈 따름입니다. 순간순간마다 점검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무상사의 대중들을 이끌며 수행방향을 잡아주고 있는 조실 대봉 스님의 길과 초발심엔 변함이 없어 보였다.“내가 이곳 국제선원 무상사에 있는 것만으로도 외국의 수행자나 한국불교에 귀의할 뜻을 가진 이들에겐 큰 힘이 된다.”는 대봉 스님.“한국불교에서 길을 찾는 눈 푸른 납자들에게 초발심을 잃지 않고 올곧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게 나의 소임”이라며 추모제에 참석할 외국인 스님들의 명단을 챙겼다. 계룡산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종교건축기행34/김성호 서울신문 문화전문기자

    미륵신앙의 본산이자 동학혁명의 발원지였으며, 강증산의 후천개벽 사상을 낳은 우리나라 민중종교운동의 본거지인 전북 김제 모악산 들머리에는 개신교의 순례성지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전통 윤리를 교회건축에 그대로 살려낸 금산교회가 그것이다. 유교적 전통이 완강하던 1908년 세워진 금산교회는 ‘ㄱ’자형이다. 합각을 이룬 모서리에 있는 강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여성, 오른쪽에는 남성 신자들이 예배를 봤다. 그런가 하면 경남 양산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대웅전의 북쪽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에서는 북쪽 벽에 난 커다란 창으로 금강계단, 즉 부처를 향하여 참배할 수 있다. 김성호 서울신문 문화전문기자가 쓴 ‘종교건축기행34’(W미디어 펴냄)를 펼쳐들면 한국 종교건축이 언제 이렇게 다양한 전통을 만들었을까 새삼 놀라게 된다. 한국 문화의 저변을 형성한 불교의 절집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과 100년이 조금 넘는 건축 역사를 지닌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배공간이 이미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자산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34곳의 사례는 분명히 일깨워 준다. ‘종교건축기행’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호평을 받으며 서울신문에 실린 연재물. 종교건축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정치·사회·종교·문화적 배경으로 시야를 확대한 만큼 한국 종교문화사를 개괄한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초창기 백정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여 ‘백정 교회’로 불린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와 국내 유일의 정사각형 교회인 봉화 척곡교회 등 개신교회 8곳, 천주교도를 처형한 전주 풍남문의 석재를 주춧돌로 쓴 전주 전동성당과 한옥으로 지은 익산 나바위성당 등 천주교회 11곳을 소개했다.‘한국 불교 1번지’인 서울 조계사와 시인 고은이 출가한 절로 일본 에도(江戶)시대 건축양식으로 지은 군산 동국사 등 절집 10곳도 둘러볼 수 있다. 무엇보다 원불교의 발상지인 영광 영산성지와 증산도의 성소인 대전 태을궁, 천도교의 발상지인 경주 용담정, 한국정교회의 요람 성 니콜라스 서울대성당, 한국 이슬람의 핵인 서울 이슬람중앙사원 등 소수 종교 및 종파의 건축물도 자세히 소개한 것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1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어라, 광화문이 사라졌네!’‘그럼, 언제 다시 나타나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세종로에 왔다가 광화문이 없어진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이곳을 지날 때면 저절로 고개를 돌려 깜쪽같이 사라진 광화문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한번쯤 해봤을 터이다. 지난 9월28일자 서울신문에는 훈훈한 기사가 단독보도돼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복원을 총지휘할 도편수 자리를 놓고 벌이던 전통 건축분야의 양대 산맥의 한판 승부에 대한 내용이다. 형님뻘인 전흥수(70) 대목장이 신응수(66) 대목장에게 도편수 자리를 아름답게 양보했다는 것이다. 전 대목장은 추석 연휴 직전에 신 대목장과 만나 “우리끼리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가 아니냐.”면서 물러서겠다는 뜻을 알렸다. 신 대목장은 전 대목장의 어려운 결정에 고마움을 표시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전 대목장은 “그 사람(신 대목장)이라면 광화문 복원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광화문 복원공사의 도편수(목수 우두머리) 자리는 신 대목장이 맡게 됐다. ●18년간 경복궁 복원사업 이끌어 신 대목장은 19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로 지정됐으며 지금까지 18년동안 경복궁 복원사업을 대부분 진두지휘해 왔다. 또한 앞으로 2년동안 광화문 복원까지 맡게 됐으니 천년궁궐 재현의 대역사는 사실상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 경복궁 함화당 복원공사 현장에서 신 대목장을 만났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돌아온 명함이 특이하다. 근정전 사진 위에 ‘성재(誠齋) 申鷹秀’라고 적혀 있었다. 하늘을 나는 매응(鷹)? 의아해 하자 “향나무 숲에서 매가 날아오르는 어머님 태몽 때문에 매응자로 했고 성재는 경복궁 복원사업 초창기때 한 서예가 선생이 집을 정성스레 잘 지으라며 지어준 호”라고 설명했다. 먼저 전 대목장과 만남에 대한 얘기를 슬쩍 꺼냈더니 “그 분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다.(전 대목장은)기능인들이 화합이 잘 안되는데 그러면 되겠느냐고 하셨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광화문 복원공사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산림청과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국유림과 사유림 등에서 적합한 목재를 고르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마 동해안쪽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적송)가 선택될 것 같으며 천년궁궐을 짓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대들보인 경우 소나무 수령이 300∼400년정도 돼야 한다는 그는 “일제때 좋은 나무들이 마구 남벌돼 나무 구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높이 18m, 직경 70㎝이상의 적송을 찾기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또 “올 겨울부터 목수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 나무를 구입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궁궐 복원 공사에는 뭐니뭐니해도 철저한 고증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광화문 복원공사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수 30여명이 투입된다고 밝혔다. 현재 경복궁 복원공사 사업은 모두 5단계 중 4단계를 마친 상태. 이 가운데 광화문 복원사업이 최종단계로 경복궁 재현의 화룡점정인 셈이다. 그가 맡은 경복궁 복원사업으로는 현재 진행 중인 함화당을 비롯해 ‘침전지역’‘동궁지역’‘태원전 권역’‘건청궁’‘근정전’ 등이다. 광화문의 경우 본문 외에 군사방, 수문장청, 영군직소 등이 포함된다.2009년까지 목재만 450만재, 기와 150만장, 비용 1789억원이 투입되며 전각 등 총 93동이 복원되는 대단위 공사다. 신 대목장 개인적으로는 꼬박 20년을 경복궁에서 출퇴근하게 되는데 그 대미를 광화문으로 장식하게 된다. 그는 “문무백관의 조회와 국가의식을 거행했던 근정전은 우리 고건축의 백미”라고 극찬하면서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140년전의 건축기법을 완전히 이해하게 됐고 또한 광화문도 이와 비슷한 건축기법이라고 귀띔했다. 근정전 복원은 2000년부터 3년 10개월 걸렸다. “광화문 복원공사는 예정된 2009년 말 이전에 끝낼 수 있습니다. 목조는 잘 관리만 하면 천년수명이기 때문에 광화문 또한 이제 새로운 천년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는 중졸학력으로 당대 최고의 목수자리까지 올랐다. 올해로 꼭 50년째 목수인생을 맞고 있는 그는 1942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병천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 신강수 한테 망치질을 배우며 일찍 밥벌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먹고 살 수 있는 기술 한가지만 배우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 그러다보니 목수들의 양말 세탁 등 온갖 심부름과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들보용은 소나무 수령 300~400년 돼야 그러던 1960년 명인 이광규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이때 봉원사 요사 및 종각 공사에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스승의 스승 조원재를 만나 남대문 중수 공사에 동참했다. 1965년 군복무를 마친 후에는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진주성 촉성문, 서울 숭인동 청룡사 대웅전, 용인 호암장 신축 공사 등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대목장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5년 수원성 장안문 복원공사 때에는 도편수로 독립하면서 1983년까지 밀양군 무안면 홍제사 법당, 서울 삼청동 총리공간, 서울 필동 한국의 집, 경주 안압지 1∼3건물, 단양 구인사 사천왕문, 부여 삼충사 영당 및 내외삼문, 울산 동축사 대웅전 및 산신각, 유성 현충원 현충문, 부여 무량사 극락전 보수 공사 등을 맡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중졸 학력으로 50년째 목수… 당대 최고 도편수 자리에 1982년 청와대 영빈관인 상춘재를 신축할 때 도편수를 맡았다. 한겨울에 30여명의 목수들과 함께 새벽 여섯시에 청와대로 출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상춘재는 4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와 관련 “아마 가장 빨리 지은 한옥이 아니겠느냐.”고 술회했다. 이 같은 인연이 있어서인지 1989년 청와대 대통령관저의 신축공사까지 맡게 된다. 그는 평소 “좋은 적송을 구하는 사람이 좋은 건축을 하는 것”이라고 늘 주장해왔다.1980년대 초반 강원도의 적송 많은 산 50만 평이 매물로 나오자 주저 없이 사들여 좋은 재료를 현장에 공급하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바탕이 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인 경복궁 보수공사의 도편수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복궁 복원공사가 다 마무리되면 평소의 꿈인 우리나라 전통건축 박물관을 지을 예정이다.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으며 큰아들이 목재소를 운영하면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신 대목장은 우리나라 고건축의 대가인 조원재, 이광규로 이어지는 대목장 계보를 잇고 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1942년 충북 청원 출생 ▲58년 충남 병천중학교 졸업 ▲58∼60년 신강수, 박광석 문하에서 한옥 주택 신축 공사 ▲75∼78년 수원성곽 장안물, 창용문 복원 공사(도편수 신응수) ▲79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신축 공사 ▲82∼83년 청와대 상춘재 신축 공사 ▲88년 경복궁 만춘전 복원 공사 ▲89∼90년 청와대 대통령관저 신축 공사 ▲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74호 대목장 보유자 ▲91∼95년 경복궁 침전지역 복원 공사(강녕전, 교태전, 경성전, 연생전, 웅지당, 연길당, 함원전, 흠경각, 동서행각, 건순각, 양의문, 함흥각 등) ▲96∼98년 경복궁 동궁지역 자선당, 비현각, 회랑 복원 공사 ▲97∼99년 경복궁 자경전, 창덕궁 돈화문 보수 공사, 경복궁 경회루 보수 공사 ▲97∼2001년 경복궁 흥례문 권역 복원 공사(흥례문, 유화문 및 화랑) ▲2000∼04년 창덕궁 규장각 옥당, 약방, 영의사, 검서청, 양지당, 봉모당 복원 공사, 경복궁 근정전 보수공사 ▲04∼현재 경복궁 건청궁(장안당, 곤녕합, 복수당 外 13동) 복원공사 # 수상 만해예술상 수상(99년), 옥관문화훈장(2002년) 등 # 주요 저서 ‘천년 궁궐을 짓는다’‘목수’‘경복궁 근정전’ 등
  • “법식 갖춘 괘불 보셨나요”

    “법식 갖춘 괘불 보셨나요”

    괘불(掛佛)이란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고자 절의 큰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그림을 말한다. 보통 높이가 10m가 넘는 크기여서 다루기가 쉽지 않은데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따른 훼손 위험도 적지 않아 걸기를 꺼리는 분위기이다. 따라서 요즘에는 박물관이 아닌 법당 앞뜰에 법식을 제대로 갖추어 걸린 괘불의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땅끝마을이 가까운 전남 해남의 미황사가 해마다 한 차례씩 여는 괘불재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미황사 괘불재는 해남지역 주민들이 정성들여 농사지은 것을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다음해 풍년을 비는 자리지만, 전통문화 애호가들에게는 괘불의 본래 쓰임새를 확인할 수 있는 드문 기회이기도 하다. 보물 제1342호로 지정된 미황사 괘불은 조선 영조 3년(1727년)에 그려진 것으로 밝은 녹두색과 분홍색·황토색이 조화를 이루어 은은하면서도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높이 1170㎝에 너비가 486㎝에 이르는 대작이다. 지역축제로 발돋움한 미황사의 ‘괘불재 그리고 작은음악회’는 올해로 여덟번째. 올해는 오는 27일 열린다. 절 아랫마을 사람 20명이 오후 1시부터 대웅전에 있는 괘불을 앞마당으로 옮기면, 만물공양(萬物供養)과 하늘·땅·사람에게 소원을 비는 통천(通天), 법문, 축하공연에 이어 2시50분 괘불을 큰법당으로 다시 모신다. 두레상 한솥밥 나누기는 오후 3시, 작은음악회는 오후 6시에 펼쳐진다. 미황사에서는 이날 밤 템플스테이도 가능하다.(061)533-3521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고창 선운사에 꽃무릇 만개하니…

    고창 선운사에 꽃무릇 만개하니…

    한 줄기에서 태어났지만, 잎은 꽃을 못 보고, 꽃 또한 잎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움에 절여져 핏빛처럼 붉은 꽃, 바로 ‘꽃무릇’입니다. 한 수도승을 향한 사랑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어느 여인의 한이 맺혀진 꽃이란 전설이 전해 오지요. 그래선가 봅니다.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지 않더군요. 첫번째 찾았을 때는 꽃대조차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화사한 자태 보겠다고 서울에서 전북 고창으로, 전남 영광으로 그 먼거리를 달려간 방문객을 어찌나 야멸차게 거부하던지요. 공연히 마음만 달떴습니다. 한 번 돌아선 여인의 마음이 쉽사리 풀어지지 않는 게지요. 글 사진 고창·영광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꽃무릇 여행 1번지 여름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이맘때면 전북 고창의 선운사 골짜기에는 꽃잔치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가을을 여는 꽃무릇의 향연이다. 대체로 백로무렵 피기 시작해 9월 중순경 절정을 이루지만, 유난히 늦여름 비가 많았던 올해는 개화시기가 늦어져 한가위 무렵부터 절정을 이루기 시작했다.10월 초까지는 아리따운 꽃무릇의 자태를 볼 수 있을 것이란 게 선운사 관광안내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두번째 찾은 선운사 들머리에 꽃무릇이 만개해 있다. 늘씬한 미녀의 각선미를 연상케 하는 연초록 꽃대 위로 왕관처럼 붉은 꽃술이 펼쳐져 있는 모습. 반가운 마음 한편으로 도로 양옆의 철제 가드레일 밑에 고개를 꺾고 있는 모양새에서 애처로움도 느껴진다. 아름답고도 꾀까다로운 이 꽃은 적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은밀한 환경에서 피어 있어야 할 터. 꽃무릇 축제를 찾은 관람객들을 위해 식재했다고는 하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제 있을 곳이 아닌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자니, 노류장화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관광객들의 눈수발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처량하다. 꽃무릇을 흔히 상사화(想思花)라고도 부른다.9∼10월쯤 잎이 없는 꽃대에서 꽃이 나오고, 꽃과 꽃대가 모두 사라진 11월쯤 땅바닥에서 개난초 비슷하게 생긴 잎이 펴 겨울을 난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 채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것이 상사화로 불리게 된 연유. 하지만 개화시기나 꽃잎의 색깔 등에서 상사화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꽃무릇은 유독 절집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쓰임새가 요긴하기 때문이다.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함유돼 있어서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할 때 찧어서 바르면 좀처럼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독기 품은 여인네처럼 비늘줄기에 품은 유독물질을 제거한 다음 얻은 녹말로 한지를 붙이면, 강력한 살균력 때문에 역시 좀이 스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선운사 들머리에서 절집 담벼락까지 약 200m 구간은 평지형 계곡의 꽃무릇 군락이 장관. 계곡물에 투영된 나무와 꽃무릇의 붉은 색감이 가을 분위기를 돋운다. 선운사 맞은편 동운암으로 향하는 산책로 주변 산자락은 마치 불이 붙은 듯하다. 동운암 못 미쳐 왼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뜻밖에 넓은 차밭과 만날 수 있다. 꽃무릇은 물론 물봉선, 들국화 등 들꽃들이 차밭 고랑 사이에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솔제 휴게소 왼쪽길과 진흥굴 지나 소리재와 포갠바위로 향하는 계곡 등의 꽃무릇 무리도 볼 만하다. 길이 넓고 평탄해 가족과 함께하는 트레킹 길로 마춤하다. 선운사 관광안내소 063)560-2712. #불갑사와 용천사도 가볼 만 전남 영광군의 불갑사도 선운사 못지않은 꽃무릇 군락지. 여느 절집과 달리 부처의 옆모습이 보이는 특이한 구조의 대웅전이 유명한 곳이다. 최고의 감상 포인트는 대웅전 뒤편 저수지 주변. 조석으로 사진작가들이 줄을 잇는 곳이다. 저수지와 잇닿은 산비탈을 가득 채운 꽃무릇이 장관을 이룬다. 사찰 토담벽이나 저수지의 잔잔한 물, 혹은 무게감있는 나무들을 배경삼아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저수지 주변의 호젓한 오솔길은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 그만이다. 함평 용천사는 불갑사에서 차로 15분 거리.100여 종의 야생화와 꽃무릇이 어우러진 꽃무릇공원이 조성돼 있다. 용천사를 휘돌아간 꽃무릇 군락이 이 일대를 별유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사찰 위 푸른 왕대나무 밭 아래에 붉은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풍경이 압권. 어렵사리 피어나 잠깐만에 지고 마는 꽃무릇이 남도의 가을을 붉게 붉게 물들여 가고 있다. 영광군청 문화관광과 (061)350-5752, 함평군청 문화관광과 320-3364. #가는 길 선운사:서해안고속도로→선운산 나들목→좌회전→22번국도 선운사 방향. 불갑사:서해안고속도로→영광 나들목, 호남고속도로→정읍 나들목→고창→영광→불갑사. 용천사:서해안고속도로 영광나들목→23번 국도 함평방향→백운리 삼거리→좌회전→838번 지방도→5㎞→용천사. #이곳도 가보세요 ▲학원농장-초봄에는 청보리밭이었던 들판이 가을이면 메밀꽃밭으로 변한다. 규모면에서 국내 으뜸.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www.borinara.co.kr,(063)564-9897. ▲광백사 천일염전-전남 영광군 백수읍 하사리와 염산면 일대에 광활하게 펼쳐진 천일염전지대. 전국의 천일염 생산량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다. 전남 신안군에 이어 두 번째 규모.
  • 봉은사 ‘木삼세불 좌상’ 시문화재 지정

    봉은사 ‘木삼세불 좌상’ 시문화재 지정

    서울시는 26일 ‘봉은사 목(木) 삼세불 좌상’을 비롯해 봉은사가 소장하고 있는 불상 및 탱화 15점과 ‘자치통감 사정전 훈의(資治通鑑 思政殿 訓義)’ 등 고문헌 2건을 ‘서울시 유형문화재 및 유형문화재 자료’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또 조성 기록이 남아 있는 문화재 가운데 최고(最古)의 목불상인 ‘수국사 목(木) 아미타불 좌상’과 ‘초간본(初刊本) 용비어천가’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도록 문화재청에 신청했다.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 대웅전에 모셔진 ‘봉은사 목 삼세불 좌상’은 좌우로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갖추고 있다.1651년에 만들어졌다가 화재로 훼손돼 1689년쯤 보수됐다. 시 관계자는 “‘봉은사 목 삼세불 좌상’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삼세불로는 드물게 조성 기록이 남아 있다.”면서 “조성 당시의 원형이 온전히 남아 있다는 점도 고려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자치통감 사정전 훈의’는 조선 세종 때 학자들이 중국 북송(北宋)의 사학자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의 주석을 편집한 중국통사다. ‘수국사 목 아미타불 좌상’은 13세기 초에 제작된 불상으로 당시의 불교 조각사와 서지학(書誌學) 수준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 1447년에 간행된 ‘초간본 용비어천가’는 세종 때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악장문학이다. ‘봉은사 목 삼세불 좌상’ 등 17건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서울시문화재는 모두 335건으로 늘어났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이주노동자 첫 합동 수계법회

    이주노동자 첫 합동 수계법회

    한국에 들어와 살고있는 외국인 노동자 500명이 한꺼번에 계를 받는 대규모 수계(受戒)식이 열린다. 조계종 총무원이 이주노동자불교협의회와 함께 다음달 7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마련하는 ‘이주노동자 수계법회 및 문화마당’행사. 조계사 창건주간을 맞아 스리랑카, 네팔, 몽골,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 불교권 국가에서 이주해온 노동자 500여명에게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직접 계를 주는 자리로 조계종단 최초의 외국인 합동 수계식인 셈이다. 이번 수계식은 그동안 몇몇 조계종 사찰에서 진행해온 이주 노동자 지원활동을 토대로 마련됐다. 조계사는 부설 이주노동자지원센터를 통해 이들에 대해 무료진료와 법률 상담을 진행해 왔다. 안산 보림선원도 산재 환자와 구직 노동자 지원을 돕고 있다. 수계식 참가자도 대부분 이같은 사찰의 지원활동에 참여했던 이주 노동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사찰들의 이주노동자 지원은 지난 2월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를 계기로 지관 스님이 본말사 주지연수를 다니면서 사찰마다 이주노동자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한 데 따른 것. 조계사 이주노동자지원센터며 안산 보림선원도 모두 그때 이후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조계사에는 몽골불자회와 네팔불자회가 생겼고 다음달 경기도 양주에는 스리랑카 스님이 운영을 맡는 이주노동자지원센터 부설 쉼터도 문을 열 예정이다. 화계사는 다음달 28일 산재 사망자 등 이주노동자 합동 천도재를 지낸다. 조계종 총무원과 조계사는 “그동안 불교권 국가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신행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다.”며 “이번 행사는 종단 차원에서 각 사찰의 이주 노동자 지원 활동을 결집해 신행터와 소통공간을 마련해주는 한편 이들의 출신국 드라마 상영이나 한글교실 운영 같은 활동을 체계적으로 해나가기 위한 첫자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수계법회가 끝난 뒤 조계사 일원에서는 다양한 문화마당이 펼쳐진다. 극락전과 대웅전 주변에서 수계자들의 화합마당이 열리며 수계자들에 대한 무료법률 상담 및 미용 서비스도 진행된다. 조계사 백송 주변에선 한국 전통놀이 및 불교관련 용품 만들기 체험행사가 있고 대웅전앞 특설무대에서 타악공연 야단법석과 동남아전통공연 등으로 꾸며진 공연마당도 펼쳐진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무심 스님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무심 스님

    “모든 것을 내려놓게나.” 몸과 마음을 비우라는 전 화계사 조실 숭산(2004년 입적) 스님의 ‘방하착(放下着)’ 한마디에 미련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한국불교에 귀의한 무상사 주지 무심(無心·49·본명 조슈아 헨리 레아)스님. 미국 보스턴대 화학과를 졸업한 이 미국의 과학도를 한국 땅의 ‘눈 푸른 납자(衲子)’로 변신시킨 건 무엇일까. 이 푸른 눈의 과학도에게 많은 길 중에서도 하필이면 한국불교를 택해 한국 승가에 몸담게 한 것은 불법(佛法)인가, 아니면 거역 못할 인연인가. 언제 어디서건 “나는 전생에 한국사람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무심 스님.1984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아 한국생활을 한 지 23년째를 맞은 그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무상사(無上寺·충남 계룡시 두마면 향한리 산 51의9)는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과 함께 한국의 선(禪)불교를 만방에 전파하는 양대 수행도량. 계룡산 국사봉 아래 국제선원과 대웅전, 요사채의 한옥식 건물 세 채를 갖춰 망집을 버리고 ‘참 나’(眞我)를 찾기 위해 물 건너 산 넘어 찾아드는 외국인 스님들을 맞아주는 이색지대이다. 지금은 미국, 말레이시아, 폴란드, 체코, 리투아니아, 홍콩의 스님과 행자 10명이 편하게 살고 있지만 안거 때면 참선 정진하는 20여명의 외국인 납자들로 선풍이 시퍼렇다. 이 무상사에서 4년째 외국인 수행자들을 이끄는 주지 겸 지도법사 무심 스님은 ‘아주 무서운 선생님’이다. 평소엔 웃음 많은 넉넉한 친구이지만 흐트러진 수행승들에겐 어김없이 불호령를 내리는 ‘계룡산 호랑이’인 것이다. ●보스턴대 출신 미국의 과학도 ‘불교 입문´ 무상사(無上寺).‘부처님 앞에선 위도 없고 아래도 없이 모든 게 평등하다.’는 대웅전의 ‘무상사’편액을 바라보는 스님의 각오는 날마다 새롭다. 대학시절 명상과 요가에 빠져 있던 그에게 숭산 스님과의 만남은 세상의 미명을 밝히는 큰 길로 불쑥 다가왔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힌두교 수행자를 따라 간 토굴에 불상이며 십자가며 힌두신이며 여러 종교 상징들이 있었는데 유독 불상에 눈길이 가더란다.“불교를 알고 싶다.”는 말에 돌아온 “불교를 배우려 들지 말고 살아 있는 부처님을 찾아보라.”는 힌두교 수행자의 말에 호기심만 더 쌓일 뿐이었다. 케임브리지 선원을 찾아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듣고도 의심이 풀리지 않아 귀찮을 만큼 끈질기게 수행법을 묻던중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수행이다.”는 말에 눈앞이 밝아졌다. 스님 말마따나 “수행기술이나 방편을 알려줄줄 알았는데 의외의 내려놓으라는 ‘방하착’ 한마디에 눈 귀가 열린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식품회사에 1년반을 다니면서도 ‘방하착’이 내내 머리에 휘돌아 결국 숭산 스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행자가 됐다. ●수덕사 등 한국의 유명 선원에서 안거 34차례 화계사에 온 게 1984년 4월 말이다. 수덕사, 정혜사, 신원사를 비롯해 전국의 이름난 선원에서 안거에 든 것만 해도 34차례. 숭산 스님의 법문에 감화돼 머리를 깎고 한국으로 출가한 50여명의 외국인 스님 가운데 가장 먼저 조계종 비구계를 받은 인물이다.‘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원을 받아들인 범어사 스님들이 머리를 깎아주었다.‘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로 유명한 현각 스님의 사형이기도 하다. 부산 흥법사 주지 심산 스님과 대구 관음사 회주 우학 스님은 당시 부산 범어사에서 함께 비구계를 받은 한국인 도반들이다. “나를 버리려 했던 내가 무거운 짐을 진 껍데기가 돼있음을 알곤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남의 생각과 손에만 이끌려 살고 있는 나였지요.” 2001년 화계사 국제선원장 시절이었다. 후배들 눈치도 보이고 해서 “내 손으로 뭔가 하겠다.”는 뜻을 숭산 스님에게 간곡히 알린 뒤 부산으로 내려가 무작정 시작한게 남산국제선원이다. 한국의 외국인 스님 가운데 가장 먼저 일선포교에 나선 것이다. 한국인 신도들을 직접 대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범어사 밑의 포교당으로 쓰이던 상가 건물의 방 하나를 빌려 ‘남산국제선원’ 간판을 붙이고 나니 신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엿하게 선원의 모양새를 갖춰갈 무렵 무상사의 주지 스님이 사정이 생겨 고국인 폴란드로 돌아가는 바람에 무상사로 옮겨와야 했다. “당시 신도들의 열성과 신심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어요. 무상사에 와서도 신도들의 요청으로 매주 두번씩 부산에 내려가 법문이며 수행지도를 해야 했지요.” 이후 비구니 스님이 선원을 맡아 어렵게 꾸려갔지만 결국 문을 닫아야 했던 사연은 잊을 수 없는 아픔이다. 무상사에 와선 대웅전도 번듯하게 세워놓았고 지금은 건물들에 단청을 입히느라 바쁘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단청 불사에 매달려 손님 맞으랴 건물 손질하랴, 한참 만에야 스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처님의 상호를 떠올리게 하는 둥근 얼굴이다. 유난히 푸른 눈만 아니라면 걷는 폼새나 말하는 투며 영락없는 한국사람이다. “이런저런 불사들을 모두 도맡아 하자니 돈도 있어야 하고 사람도 있어야 하고 여간 어려운게 아니에요. 종단 지원 없이 모든 것을 다하려니 더 힘들어요.” 종각도 세워야 하고 숭산 스님 부도탑도 모셔야 하고…. 이런저런 욕심(?)을 주섬주섬 늘어놓는다. “이젠 사판승이 다 되었다.”며 겸연쩍어하는 스님의 말끝을 잡았다.“한국불교에서 무엇을 얻었느냐.”는 물음에 한참의 침묵 끝에 날 선(?) 말을 돌려준다.“한국불교에서 무엇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무엇을 갚고 살아야할지를 고민 중입니다.” 한국의 불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수행전통을 오롯이 갖춘 채 염불과 불경 공부를 겸하는 통(通)불교의 성격을 갖지만 한국의 스님들은 이 ‘귀중한 보물’을 잘 모르고 사는 게 안타깝단다. 한 절집에서 이렇게 큰 일들이 어그러지지 않고 순탄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게 신기하다고 한다. 다그쳐 물었다. 발심(發心) 출가의 화두, 즉 ‘얼마나 내려놓았느냐.’는 미련한 질문에 서슴없는 답이 나왔다.“말에 집착함은 곧 허상에 쫓기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려놓으라는 숭산 스님의 방하착도 길을 제대로 찾으라는 방편에 다름 아니지요. 끊임없이 묻고 의심하고 노력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무상사에선 남녀구별 없이 한방에서 함께 참선 ‘분별없는 말은 오해를 낳고 큰 화로 이어진다.’는 평범한 경계가 무상사에선 혹독한 묵언수행의 전통으로 서 있다.“묵언수행은 참회의 방편이 아니라 나를 찾는 수행의 큰 길”이라는 무심 스님의 지론을 따르는 무상사의 외국인 스님들은 보름, 수개월, 심지어는 수년간 묵언수행을 계속한다. 수행을 깨는 납자들은 가차없이 쫓겨난다. 구별과 차별 없는 ‘무상(無上)’의 큰 뜻은 수행공간에서 독특하게 살아 있다. 다른 한국의 선방들이라면 비구, 비구니, 남자신도, 여신도들이 각각 다른 방에서 참선에 들지만 이곳 무상사에선 한 방에서 모두가 함께 한다. 역시 무심 스님의 수행방식이다. 포교는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무심 스님. 얼마전 아프간 피랍사건을 의식한 듯 불쑥 말을 꺼낸다.“한국인이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교나 기독교 포교를 하는 것과 내가 한국에 와서 불교 포교를 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인도에서 중국으로 간 달마대사도 처음엔 그곳 불교계에서 박대당했다는 비유와 함께 “나도 한국인들에게 무시와 질시를 숱하게 받았지만 지금 이렇게 한국인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느냐.”며 웃는다. “한국에 언제까지 살겠느냐.”고 물었다. 답은 생각대로였다.“불법을 위해 사는 사람이 어디에 살고 어디에서 죽는 게 무슨 상관이냐.”면서 한국과 인연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가 살 수도 있지만 아직 이곳에서 할 일이 많다고 넘긴다. 유대인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불가에 귀의하지 않았으면 나도 역사 교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무심 스님.“깨끗한 물이나 오염된 물이나 모두 허물없이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어머니의 가슴과도 같은 넓은 도량의 한국불교를 택하는 눈 푸른 사람들에게 맑은 정신을 갖도록 하는 게 내 소임”이라며 기자를 배웅했다. ‘내려놓으라.’는 방편과 함께 받은, 스님의 ‘이 뭐꼬.’ 화두풀이는 계속되고 있었다. 계룡산 무상사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무심(無心) 스님은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출생 ●1979년 보스턴대 화학과 재학중 숭산 스님 만나 발심 ●1980년 보스턴대 졸업 ●1984년 한국 입국, 화계사에서 법명 ‘무심´ 받음 ●1986년 범어사에서 비구계 수지 ●1985∼1989년 수덕사, 신원사 등에서 안거 ●1997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지도법사 자격 받고 공안지도 ●1999년 화계사 국제선원 수석지도법사 ●2002년 부산 남산국제선원 개원 ●2003년∼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및 지도법사
  • 남해와 만나는 또다른 방법-망운산(望雲山)

    남해와 만나는 또다른 방법-망운산(望雲山)

    ‘보물섬’ 경남 남해의 산들은 어디를 올라도 파란 남해와 만날 수 있다. 다랑논과 멀리 앵강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설흘산, 다도해의 일출이 더없이 아름다운 금산 등이 그 중 손꼽히는 명산이다. 이제 남해의 명산 목록에 망운산을 추가해야 할 듯하다. 깨끗한 풍모와 드넓은 기상으로 다도해를 보듬으며 우뚝 선 망운산은 최근에 와서야 외지인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발 786m로 남해에선 최고 높이의 산이다. 금산, 설흘산 등이 남해를 찾는 외지 손님들의 산이라면, 망운산은 남해군민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산이다.360도 어느 방향에서든 푸른 다도해와 만날 수 있는 말 그대로 풍경의 ‘보물산’이다. 글 사진 남해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산중에 핀 연꽃 ‘화방사´ 망운산 오르는 길은 남해읍 공설운동장 인근에서 시작하는 코스와 서상면 예계마을 코스, 고현면 대곡마을 화방사 코스 등 다섯개 가까이 된다. 이번 산행은 망운산 중턱의 절집 화방사(花芳寺)를 들머리 삼았다. 그리 가파르지 않아 오르기 수월할 뿐 아니라, 산행 내내 다도해는 물론, 닥나무 군락지나 망운암 등 많은 볼거리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소요시간은 왕복 3시간 남짓. 절 아래 약수터에서 맑은 물로 목을 축인 다음, 돌다리와 몇 개의 나무 계단을 오르면 곧바로 화방사 일주문과 만난다. 청아한 독경소리가 들려오는 돌계단 저편에 화방사가 연꽃 같은 자태로 앉아 있다. 호구산 용문사, 금산 보리암 등과 함께 남해 3대 사찰이라 일컬어지는 곳.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망운산 남쪽에 연죽사를 건립한 것이 화방사의 시작이라 전해진다.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소실된 것을 인조 15년(1637) 서산대사의 제자 계원과 영철 두 선사가 현 위치에 ‘연화형국’이란 뜻의 화방사로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뭍의 대가람과 비교할 만한 규모는 아니지만, 대웅전 좌우에 시립한 응진전과 명부전, 강당 역할을 담당하는 채진루 등이 짜임새있게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단아한 자태의 절집이 왜 진작 사람들의 이름에 오르내리지 않았을까. 큰 사람 밑에서 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어도 큰 나무 아래서는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없다던가. 남해의 명찰 금산 보리암의 명성에 가려진 탓일 게다. 깊은 차향 우러나는 다원과 반야교를 차례로 지나면 햇빛 한 점 볼 수 없는 숲길이 이어진다. 깊은 정적 사이로 간간이 들려오는 산새들의 지저귐과 계곡물 소리가 반갑다. 망운암 못미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산닥나무 자생지는 잊지 말고 들러야 할 곳. 철쭉보호지역 아래 약수터에서 길이 양갈래로 나뉘어진다. 약수터 뒤로 난 길보다 오른쪽 임도를 따라 걷는 편이 다소 수월하다. #일망무제가 동행하는 산길 정상을 향해 임도를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바다 건너 멀리 하동 화력발전소와 광양제철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은 어떨까. 임도를 버리고 동네 앞산처럼 야트막한 산자락을 타고 올랐다. 평탄한 정상 능선길을 따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한려수도의 절경이 펼쳐졌다. 일망무제. 산의 기운을 빨아들인 구름이 하늘로 솟구치는 가운데, 우람한 내륙의 산봉우리들은 바다를 향해 줄달음치고, 점점이 떠 있는 섬들 너머로 사천과 고성, 광양, 여수 등 바다에 기댄 도시들의 자태가 두 눈 가득 들어온다. 정상표지석에서 KBS송신소 아랫길로 300m쯤 더 가면 망운산 전망대 겸 산불감시초소다. 억새가 거센 바람에 몸을 누이는 전망대 앞 공터에서 하늘 향해 두 팔 뻗고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시라.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가는 길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남해고속도로 순천 방향 진교나들목에서 내려 남해대교를 지나야 한다. 국도 19호선을 타고 남해읍으로 향하다 고현면 이어마을 앞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3㎞ 남짓 더 가면 화방사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5분 정도 더 가면 화방사 주차장. 다소 돌아가더라도 드라이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다면 사천에서 창선·삼천포대교를 지나 국도 3호선을 따라 달리다 창선교와 1024번 도로, 이동면 등을 차례로 지나는 길을 고려하시라.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남해공용터미널(055-864-7101)에서 대곡행 버스(1000원)가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화방사로 가기 위해서는 대곡에서 하차한다. #이곳도 가보세요 승용차로 망운산을 찾았다면 해안관광도로를 따라 사촌 해수욕장과 가천 다랭이 마을, 상주 해수욕장을 거쳐 창선·삼천포대교까지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도 좋다. 미조 상록수림, 물건방조어부림, 원시어업 죽방렴 등 많은 볼거리가 동행하는 코스다. 상동면 지족1리 죽방렴 옆에서는 바다낚시가 잘 된다. 어촌계에서 만든 좌대나 어선 위에서 6시간 낚시를 즐기는데 미끼 포함 2만4000원.010-4842-5511.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6) 장성 갈재~정읍 태인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6) 장성 갈재~정읍 태인

    해남 땅끝 마을에서 한양 남대문에 이르는 호남대로는 980리 길이다. 조선시대 9대로 가운데 제7로가 바로 이 호남대로이다. 옛 선조들은 해남에서 보름 동안 걸어 한양에 당도했다. 하루 평균 65리(26㎞) 정도를 쉬지 않고 걸어야 했다. 영남대로는 960리 길이지만 지세가 험준해 속도가 떨어진다. 이에 비해 호남대로는 20리 더 멀지만 평야지대가 많아 비교적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곳이 많다. 옛길은 국도 1호선과 겹치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남에서 북을 향한다. 도시가 형성되고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기도 했지만 부분적으로 남은 옛길은 정다운 옛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노령산맥 토박이들은 장성 갈재라 불러 노령산맥은 전라도를 남북으로 가른다. 토박이들은 노령산맥 대신 장성 갈재라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해남을 떠난 길손이 닷새쯤 걸으면 장성 갈재를 넘어 전라북도 땅에 이른다. 갈재는 해발 276m밖에 되지 않지만 많은 전설이 내려오는 제법 험한 고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노령보 고개길이 사나워 전에는 도적이 떼를 지어 있으면서 백주에도 살육과 약탈을 하여 통하지 않았는데 중종 15년에 보를 설치해 방수(防守)하다가 뒤에 폐지했다.’고 적고 있다. 장성 갈재에서 내려다 보면 남으로 전남 장성군이, 북으로는 동학의 고장 전북 정읍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멀리 펼쳐진 호남평야의 끝자락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옛길은 호남고속도로,1번국도, 호남선철도 등과 함께 갈재를 넘는다. 고속도로와 철도는 터널을 통해 전남·북을 소통시키지만 1번 국도는 고속도로 서편으로 꼬불꼬불 힘겹게 고개를 넘는다. 옛길은 호남고속도로의 동편으로 갈재를 넘고 있다. 서편보다 지형은 험준하지만 지름길이기 때문에 많은 이가 자연스럽게 이 길을 선택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통행이 거의 없는 옛길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숲이 우거진 곳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어렵사리 갈재를 넘으면 마을 앞 커다란 당산나무가 길손을 반긴다. 전북에서 처음 만나는 자연 부락인 정읍시 입암면 군령마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힘든 고갯길을 넘은 길손들이 쉬어가던 주막과 역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험준한 노령산맥에는 산적과 도둑이 많아 도방소도 설치됐었지만 이 역시 흔적조차 찾아 볼수 없다. 하지만 갈재에서 희미해졌던 옛길은 이곳에서 다시 모양을 되찾는다.1번 국도와 호남고속도로를 왼편에 끼고 옛길은 정읍시내를 향한다. 입암 저수지를 지나 고개를 내려가면 현재 입암면사무소 자리인 천원역 터에 이른다. 역은 없어진 지 오래이고 우물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그러나 옛길은 그런대로 형체를 잃지 않고 입암초등학교 옆을 지나는 골목길로 남아있다. ●보천교 총본부 있던 대흥리에 전국 부자들 모여 옛길은 ‘보천교’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진 입암면 대흥리에서 1번 국도와 잠시 겹치게 된다. 대흥리는 보천교(普天敎)의 교주 차경석(車京石·1880∼1936)이 교단의 총 본부를 만든 곳이다. 차경석은 이곳에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산을 헌납하면 정도에 따라 사후에 벼슬을 얻을 수 있다고 해 전국에서 부자들이 몰려들었다. 함경도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자가 거액의 재산과 식솔을 거느리고 이곳에 몰려왔다. 애초 입암면 대흥리는 농가 십여호로 이루어진 가난한 촌락이었으나 교세가 확장하면서 700여가구에 이르렀다. 교전인 십일전(十一殿)은 부지가 1만여평, 건평 350평, 높이가 99척이나 되는 웅장한 건물로 경내에는 3개의 탑이 있고 4대 문루가 있었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교세를 확장해 한때 교도가 600만명에 이르렀다. 이 마을 전호남(64)씨는 “보천교가 흥할 때 대흥리는 서울이 될뻔 했던 곳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이제 모두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교단의 내분과 화재로 내리막 길을 걷게 됐지만 이곳에 남았던 건물을 뜯어다가 서울 조계종 대웅전을 지은 것만 봐도 보촌교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선비들이 급제하려면 반드시 건넜던 과교 대흥마을을 거쳐간 옛길은 1번 국도에서 오른쪽으로 벗어나 정읍시 시기동을 향한다. 늦더위에 오곡이 여물어가는 들판을 가로 질러 정읍시내 초입인 과교천을 넘는다. 과교는 이곳을 건너야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오를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과거 보러 한양 가는 선비들은 반드시 거쳐가는 명소였다. 옛 모습의 과교는 찾을 길이 없고 현재는 정읍시내를 거쳐 태인과 전주시로 가는 차량들이 끊임 없이 오가는 2차선 시멘트 다리로 바뀌어져 있다. 과교를 넘어 정읍시내로 들어서면서부터 옛길은 찾기 힘들어진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 표기된 옛길은 도시 발달과 함께 사라졌다. ●최치원이 군수·이순신이 현감 역임했던 ‘태인´ 정읍시 북면을 지난 옛길은 농공단지를 지나 태인면에 이른다. 태인은 예전에는 1만가구가 넘는 큰 고을이었지만 지금은 여느 농촌 도시와 같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예부터 태인 주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전라도를 대표하는 문향(文鄕)으로 꼽히는 고을이기 때문이다. 정극인이 말년을 보내며 상춘곡을 지은 곳이고 전라도를 대표하는 무성서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도 이곳이다.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무성서원만은 남겨두었다. 최치원은 이곳 군수를 지냈고 이순신은 현감을 역임했다.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본적지 역시 태인이다. 이곳에는 1421년(세종3년)에 창건됐던 향교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옛 태인면사무소 옆에는 최치원이 세웠다는 피향정이 세월의 흐름을 꿋꿋이 견디며 온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태인초등학교 입구 옆에 복원된 동헌도 태인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신정일 우리땅걷기본부 대표 “걸어야 사유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고가 시작되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게 됩니다.” 사단법인 우리땅걷기운동본부 신정일(53) 대표는 “걷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나를 만나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옛길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오랜 유산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는 옛길이 더 이상 파괴되거나 잊히지 않도록 이를 복원하고 관광자원화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오늘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옛길에 대한 관심이 없지만 이는 곧 우리의 과거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장성 갈재를 넘는 옛길이 거의 사라진 것을 보고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문경새재처럼 옛길을 하루 빨라 복원해야 합니다.” 신씨는 수많은 사연이 얽혀 있는 갈재야말로 호남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정부와 자치단체가 새로운 도로를 개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옛길을 복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효과적이고 중요한 사업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옛길 복원과 함께 이곳에 얽힌 전설과 역사를 문화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면 어떤 관광개발사업보다 지역을 널리 알리고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동원이나 객사가 있던 곳이 면사무소나 학교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드물지요. 옛 선조들의 영혼이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실지 걱정이 앞섭니다.” 그는 옛길과 지역 문화를 재조명하는 작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밝혔다. 우리 땅 방방곡곡을 발로 뛰면서 기록하고 역사를 되짚어 내는 그는 “길위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한다.“명성 높던 고을들이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해져 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신씨는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지도 한장만 가지고도 옛길을 답사 할 수 있도록 폐허가 된 곳은 복원하고 남아있는 길은 보존하며 기록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2) 봉선사 큰법당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2) 봉선사 큰법당

    절 구경에 이력이 쌓여가면 불상이나 석탑에서 대강의 조성 시기를 읽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미술사학자들이 양식(樣式)이라고 부르는, 나름대로의 시대정신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상이나 석탑, 탱화가 예배의 대상을 넘어 미술품으로 대접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불교미술은 장인의 창작품이라기보다는 그 시대 신앙의 양상이 조형적, 혹은 회화적으로 번안된 것입니다. 미술사학자들이 작품에서 드러난 실마리를 풀어내어 조성 당시 신앙생활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요즘도 절은 끊임없이 세워지고, 그만큼의 불상과 석탑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훗날 미술사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원만하게 조성되었다고 칭송받는 불상도 오늘날 신앙생활의 양상을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광릉 숲 속에 있는 봉선사의 한글 이름 ‘큰법당’은 20세기 한국불교의 시대정신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려 했던 드문 노력의 하나로 보고 싶습니다. 조선 세조(1417∼1468)의 무덤 광릉(光陵)의 수호 사찰인 봉선사는 예종 원년(1469)에 세워졌다고 김수온의 ‘봉선사기(1469)’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 89칸의 적지 않은 규모였는데 건축 과정에서 부실공사라는 지적을 받아 허물고 다시 지었을 만큼 정성을 들였다고 하지요. 큰법당은 한국전쟁으로 삼성각(三聖閣)말고는 봉선사의 전각이 모두 부서진 뒤 1970년 운허(1892∼1980)가 초창 당시 대웅전을 복원하면서 새로 붙인 이름입니다. 운허는 평양 대성중학교 출신으로 중국 봉천에 동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쓴 데 이어 한족신보 사장으로 독립운동에 몸담았다고 하지요. 그는 산문(山門)에 들어선 뒤 불교경전을 파고들었는데, 광복 이후에는 봉선사에 머물며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데 힘썼습니다. 봉선사의 중심 전각을 큰법당이라고 이름지은 것도 불경을 우리말로 풀어내는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불경 번역은 세조가 1461년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법화경언해(1463년)’ 등 9종의 경전을 한글로 옮긴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봉선사와 불교의 한글화 작업은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큰법당은 편액뿐 아니라 기둥글(柱聯)도 한글로 되어 있습니다.‘온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큰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부처님 공덕 다 말못하고(刹塵心念可數知 大海中水可飮盡 虛空可量風可繫 無能盡說佛功德)’라는 선시(禪詩)이지요. 순수한 한글로 최대한 풀어쓰고, 의미전달을 위해서는 의역(意譯)까지도 서슴지 않았다는 운허 번역의 특징이 짤막한 기둥글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큰법당은 그러나 우리 불교계에 과제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법당의 이름은 공간의 성격까지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대웅전과 극락전, 대적광전 등은 각각 석가모니부처와 아미타부처, 비로자나부처로 주체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큰법당은 어떤 예배가 이루어지는 공간인지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새로운 성격 부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법당을 장엄하는 장인들도 옛것을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요. dcsuh@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35·끝)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35·끝)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한국 천주교는 이 땅의 사람들이 스스로 일으킨 ‘자생 신앙’이란 자부심을 갖는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생신앙 한국천주교의 태동지가 바로 천진암(天眞菴·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산500)이다.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이면서 불교와 유교를 빼고 설명할 수 없는, 유불천(儒佛天)의 합류지 천진암. 이 천주교 발상지에서는 지금 천주교 선조들의 정신을 오롯이 되살려내기 위한 독특한 성역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지난 1984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한국 순교성인 103위의 시성(諡聖·천주교에서 성인품을 인정하는 공식적인 절차)식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런 강론을 남겼다.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베이징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하며…(중략)…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세계인의 관심을 모은 시성식장에서 로마 가톨릭의 최고 수장인 교황이 한국 천주교의 자생신앙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그런데 교황이 강론 첫머리에 세세하게 강조한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란 누구일까. 바로 천진암에 모여 천주교를 공부했던 이벽(1754~1785)·이승훈(1756~1801)·권일신(1742~1791)·권철신(1736~1801)·정약종(1760~1801), 그러니까 천주교계에서 말하는 이른바 ‘5인의 성조(聖祖)’이다. 천진이란 산제사나 당산제, 산신제 등을 지낼 때 모셨던 단군의 영정(影幀).195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선 이 천진을 모시고 제를 지내던 천진각이나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집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 사료들을 들여다보면 천진암은 원래 천진당이 있던 자리였다. 불교의 천진암(天眞庵)이 들어섰다가 폐찰이 되었고 한때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였으며 나중에는 대궐의 음식 장만하는 일을 관장하던 사옹원의 관리를 받기도 했다.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 요사체는 반이나 무너져 빈 터가 되었네.”(1779년경 정약용)/“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1797년 홍경모의 ‘남한지’)/“젊은 선비들과 함께 이벽 성조께서 강학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폐찰이었다.”(1850년 다블뤼 주교) 이벽을 중심으로 이른바 5인의 ‘성조’들이 모여 공부할 무렵의 천진암은 거의 허물어져 가는 초라한 폐찰이었다. 당시 일반 집과 서당, 사찰에서 생소한 천주교 책을 읽고 토론하기란 아주 어려웠을 터. 이들은 남들의 눈을 피해 외딴 곳을 물색, 바로 천진암을 공부방으로 삼았던 것이다.1779년 이곳에서 강학회를 결성한 뒤 약 5년간 천주교리 연구와 강의, 공동신앙생활을 하며 천주교회를 창립했다. 교회라야 이 5명과 이들의 뜻에 동참한 정약전,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그리고 그 가족들이 전부. 대부분 당대의 명망 높은 남인(南人)계열 집안의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천진암을 자주 찾아 천진암에 얽힌 시를 90여 편이나 남긴 정약용이 대부분의 시에서 천진암의 ‘암’자를 ‘庵’이 아닌, 남인 학자들의 호 돌림자 ‘菴’으로 썼던 것일까. ‘5인의 성조’와 동지들은 학문을 연마하던 강학회를 종교신앙의 수련회로 발전시켰고 신·구약 성경 내용을 서사시 형태로 집약한 ‘성교요지’며 ‘천주공경가’를 지어 부르며 허술하나마 교회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쟁쟁한 유가의 10∼20대 선비들이 불교 암자에서 천주학을 공부하고 실천했으니 묘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함께 공부했던 강학자 이승훈을 베이징으로 보내 영세받도록 했으며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은 귀국후 이벽에게 영세를 주었다. 천진암은 이렇듯 중요한 한국천주교의 성지이지만 1980년 전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한국의 천주교회가 교회사 정리를 하면서 외국 선교사들의 문헌에만 의존했던 탓에 이 선교사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천진암이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것이다. 그러던 참에 천주교 수원교구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변기영 몬시뇰이 1975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1981년 ‘한국천주교발상지천진암성역화위원회’를 구성, 이곳에 한국천주교 200년 기념 ‘천진암대성당’을 세우기 위한 큰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이벽을 포함한 ‘5인의 성조’는 모두 박해를 받아 모진 매질 끝에 옥사하거나 참수당해 순교했다.‘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터를 지나 산길을 오르면 왼편에 ‘한국천주교 창립 성현 5인묘역’이라 쓴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천주교를 창립한 성조 5인의 유해를 옮겨 이장한 곳이다. 반대쪽엔 그 가족묘역이 조성되었다. 묘역 초입에 ‘한국천주교발상지천진암터’라 쓴 비석을 올려다보며 산길을 오르면 ‘강학회터’라 새긴 표석이 눈에 든다. 천주교리를 공부하고 교회활동을 처음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 덩그맣게 표석 하나만 남았지만 젊은 선비, 아니 천주교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혈기를 나누던 현장에선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5인의 묘를 봉안한 곳이 바로 옛 천진암 터. 가운데 ‘세자 요한 광암 이벽’이라 새긴 이벽의 묘를 중심으로 왼쪽에 정약종·이승훈, 오른쪽에 권철신·권일신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훨씬 전 앞서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연구하고 교회로 발전시키다가 순교한 한국천주교의 선구들. 목숨을 던져 신앙을 창시하고 지키다 희생한 선조들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채 옛 신앙 터만 소리없이 지키고 있다. kimus@seoul.co.kr ■천진암대성당 어떻게 짓나 천진암성역화 작업의 핵심은 아무래도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이름 그대로 한국 천주교 발상지에 100년에 걸쳐 기념 성당을 우뚝 세워 놓겠다는 것이다. 천진암의 성격에 맞춰 지붕은 사찰 대웅전의 처마형태를 갖춘 기와 지붕, 외벽은 유교 서원의 골격, 내부는 천주교 성당 양식을 택해 그야말로 ‘유불천’의 조화를 이룬다. 99만㎡ 넓이의 성지에 대성당을 중심으로 조성되는 광장이 16만 5000㎡, 성당 터만 해도 2만 6000㎡(좌석수 3만석). 성당의 높이는 기단∼2층 50m에 지붕부분 35m를 포함하면 전체 85m. 길이도 동서와 남북의 길이가 각각 195m에 달한다. 성당 넓이는 1층 2만 6800㎡,2층 1만 8600㎡. 기둥만 해도 42개가 세워진다. 벽과 기둥, 기단에는 사방 1m 크기의 한국산 화강암 10만개가 쓰이며 모든 돌에는 돌값을 봉헌한 사람의 이름과 봉헌번호, 봉헌연도가 새겨진다. 제대는 중앙 제대를 포함해 1,2층에 걸쳐 모두 55개. 지금은 지반 등 성당 터닦이 공사만 마쳐 휑한 모습. 성당 터 맨 위쪽에 1994년 축성식때 마련한 86t짜리 중앙 제대석이 놓였고 그 앞에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강복문을 직접 써 안치한 대성당 머릿돌(초석)이 있다. 5년 내에 철골·지붕공사를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그때부터는 미사도 진행할 수 있다. 임시 성당격인 성모경당을 대성당 터 위에 지어 놓았으며 대성당 완공 때까지 이곳에서 미사를 진행한다. 외벽과 장식까지 포함해 20여년 안엔 모든 공사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게 변기영 몬시뇰의 귀띔이다. 예상 공사비는 골조공사 500억원, 조적공사 500억원 등 총 1000억원.100년간 연평균 10억원이 들어가는 대규모 공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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