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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그래도, 벚꽃은 피어야 되구요…영천 은해사(銀海寺)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그래도, 벚꽃은 피어야 되구요…영천 은해사(銀海寺)

    “세상은/ 사흘 못 본 사이의/ 벚꽃” (오시마 료타, 류시화 번역) 봄의 서사가 완성되려면 판타지가 꼭 있어야 한다. 벚꽃은 판타지다. 그러나 올 봄 벚꽃들이 만들어야 할 판타지 스페셜 에디션(?)은 온데간데없다. 팝콘처럼, 강냉이처럼 볼 빨간 봄청춘들의 맘속에서 뻥하니 터졌어야 할 벚꽃들이, 꽃샘추위 호호바람에 엉겁결에 지레 숨을 죽였다. 그래도 오시마 료타(大島蓼太, 1718-1787)의 하이쿠(俳句)처럼 사흘 못 본 사이에 늦게 다가온 벚꽃들이 은빛 바닷물처럼 흐드러지는 곳, 영천에 있는 은해사(銀海寺)로 가 보자. 영천의 은해사(銀海寺)는 말 그대로 사찰의 풍광이 은빛 물결에 뒤덮여 있는 듯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다. 산등성이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것 같다 해서 신라의 진표 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라는 한시마저 남겼으니 은빛 가득한 벚꽃을 둘러보기에 은해사는 제격임에는 분명하다. 사실 경상북도 영천에 위치한 천년고찰 은해사는 전국적인 이름값 떨쳐 방문객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절은 아니다. 하지만 절집 주변과 산내 암자들을 둘러본다면 단단한 내실 한 가득 안고 있는 사찰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은해사는 과거 조선 31본산, 경상북도 5대 본산이었으며 현재도 대한불교조계종 제 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영남 대표 사찰 중의 하나다. 또한 그리도 명성 자자한 원효대사, 일연국사, 설총 등의 뿌리가 가득 담긴 절이기에 예전부터 은해사는 지역민들에게는 영험한 불교 성지중의 하나로 지금까지도 손꼽힌다. 여기에 더해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가 문 위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각, 노전의 일로향각 등 무려 다섯 점이나 그대로 경내에 남아 있기도 한 곳이다. 현재의 은해사는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세를 떨치는 곳으로 연원은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인 해안사로부터 지금의 은해사 역사가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른다. 특히 은해사에는 비구 선방으로 이름 높은 운부암, 기기암과 비구니 선방 백흥암 등이 있어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은해사 경내 오솔길을 오르내리며 수행하는 비구스님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은해사가 선교양종의 총본산답게 공부하는 선승들의 수행지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명망높은 여승(女僧)의 출가터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봄이 오면 대웅전 앞뜰에 은빛 가득한 벚꽃 나무 역시 명실상부한 은해사의 자랑거리 중의 하나여서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상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은해사의 벚꽃은 절집 경내를 환히 밝힐 정도로 흐드러지기 때문에 눈으로만 보던 보통의 가로수목의 벚꽃이 아니라 가지를 늘어뜨린 채 관람객들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벚꽃이기도 하다. <은해사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봄의 초입, 영천에 가 볼만한 일이 있다면. 고즈넉한 사찰을 보길 원하다면 2. 누구와 함께? - 늙으신 부모님과 다정히. 연인들도 함께. 출가를 결심하고자 하는 분이라면 혼자. 3. 가는 방법은?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청통로 951 / 하양버스터미널 앞에서 은해사 行 노선버스 탑승 4. 감탄하는 점은? - 벚꽃의 순수함. 운부암의 고즈넉함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은해사는 사찰 규모에 비해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편. 6. 꼭 봐야할 장소는? - 대웅전, 성보박물관, 운부암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육회 ‘편대장영화식당’, 곰탕 ‘포항할매집’, 군만두 ‘삼송꾼만두’, 해물찜 ‘임가네해물촌’ 8. 홈페이지 주소는? - www.eunhae-sa.org/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사일온천, 보현산천문대, 임고서원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은해사는 생각보다 큰 사찰이다. 차량이 경내로 들어갈 수 있는 데 반드시 산내암자인 운부암을 꼭 들리도록.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현장 플러스] “종교 관계없이 모든 사람 쉴 수 있는 휴양 도량으로 건립”

    [현장 플러스] “종교 관계없이 모든 사람 쉴 수 있는 휴양 도량으로 건립”

    북한산 서암사가 48칸 규모, 5년 계획으로 복원된다. 2004년 토지매입 완료를 시작으로 2007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된 후 15년 만이다. 서암사는 조선 시대 숙종 때 승려 광헌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서 북한산성을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수문(水門)과 대서문 일대의 축성과 관리를 맡았던 곳이다. 그렇다 보니 서암사지는 북한산성 백운동 계곡 옆에 있는 절터로 등산로 입구에 있어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곳이다. 북한산성은 축성사적 의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산성 내부의 행궁, 사찰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서암사는 산성의 준공과 더불어 건립되기 시작했던 11개 사찰 중의 하나로 133칸 규모 창건됐다. 복원사업을 위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결과 서암사지는 1만 1000여평의 절터에 대웅전과 산신각, 세심루와 군기고가 있었다. 또 조선 시대의 수파면 기와편과 청화백자편, 명문기와, 백자편 등이 출토되어 그 가치를 더욱 높여 주었다. 이에 따라 본지는 북한산 서암사 복원에 앞장서온 혜안 스님을 만나 그 과정을 인터뷰했다. 혜안 스님은 “부처님 제자로서 조상의 얼을 되살리고 부처님 도량을 복원할 수 있어 기쁘다”면서 “종교를 떠나 모든 사람이 쉬어 갈 수 있는 휴양 도량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서암사가 조선시대에는 ‘호국 도량’이었다면 21세기에는 ‘힐링 도량’이길 바란다는 것이다. 호국의 보훈 가족이기도 한 혜안 스님. 그가 ‘휴양과 힐링’ 도량으로 추진하는 북한산 서암사의 문화재 복원사업의 성공을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북한산 서암사 복원사업이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첫 삽을 뜨게 됐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그간의 소회를 부탁드립니다. -잘 알다시피 북한산 서암사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6년에 시작됐습니다. 2007년 경기도 문화재심의위원회에서 문화재 지정이 가결된 후 발굴조사를 확대한 결과 1만 1000여평의 터에 대웅전과 산신각, 세심류, 군기고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특히 발굴조사에서 조선조 수파면 기와편과 청화백자편, 명문기와, 백자편 등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부처님 제자로서 부처님 복원사업을 할 수 있게 돼 기쁩니다. 초기에 힘도 들었습니다.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 복원에 긍지를 갖고 참고 인내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선조들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인 데다 부처님 도량을 가꾸게 됐다고 생각하니 그 보람된 기쁨이 크다고 할까요. 그간의 힘들고 어려웠던 것들이 봄눈 녹듯 합니다. →스님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군요. 그렇다면 북한산 서암사지 복원사업에 나선 배경은 무엇인가요. -서암사지는 북한산성 수구문 주변에 위치해 있습니다.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의 구축과 수비를 위해 광헌스님이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 133칸 규모로 창건한 사찰로서 수구문 일대의 산성 구축과 수비를 담당하는 역할을 해오다 갑오개혁 때 승병이 해산되면서 19세기 말에 폐사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서암사는 호국 도량으로 역할을 해 온 사찰입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조상의 얼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요. →그렇다면 북한산 서암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서암사는 북한산에 위치해 있잖습니까. 우선 북한산은 높이가 848m며, 면적은 78.45㎢로 서울특별시에서 39.7㎢, 경기도에서 38.7㎢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북한산은 지정학적인 중요성뿐만 아니라 불교적 시각에서도 신성한 곳으로 인식돼 왔습니다. 이는 북한산 내 문수봉, 보현봉, 원효봉, 의상봉 등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산성 내 건립된 승영사찰들은 중흥사를 수사찰로 삼아 전체적으로 팔도도총섭이 겸하는 승대장 1명과 각사승장 11명, 의승 350명이 주둔했습니다. 의승은 각 도에 있는 승려들 중에서 차출해 2개월씩 복무하도록 했죠. 그러니까, 서암사는 북한산이라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산자락에 위치했습니다. 성지의 명성에 맞게 서암사도 조성된 다수의 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북한산은 특히 조선 시대에 이르러 남한산과 함께 지리적 위치 등의 이유로 수도방위에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의 수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커졌죠. 그래서 문헌에 따르면 숙종 당시 1711년 2월에 이르러 산성 축성과 함께 서암사도 건립되게 됐는데요, 서암사는 처음 133칸 규모로 창건됐으나 이후 107칸으로 규모가 축소되기도 했다고 합니다.→서암사지는 특히 경기도 문화재자료 140호로 등재가 돼 있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2004년도에 땅을 매입했는데요. 서암사는 북한지 등에 수록된 고지도를 통해 볼 때 현재의 위치와 일치해 고증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두 차례에 걸친 문화재 지정에 따른 지표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해 조선 시대의 유물이 출토돼 그 가치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특히 조산된 서암사 절터의 규모는 총 1만 1000여평으로 그 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경기도는 2007년 8월 30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506과 509를 비롯해 총 9필지에 대해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등재를 했습니다. 그동안 문화재 발굴해서 현재 2권의 책이 간행됐고, 3권 발행이 예정돼 있습니다. 사실, 발굴과정에서 재정과 행정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서암사 복원사업을 추진하는데 재정과 행정에서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내용인가요. -문화재 복원사업을 여러 관청에서 관장을 하는 데서 오는 행정절차가 까다롭고 또 복잡했습니다. 이곳저곳으로 불필요한 시간적 낭비가 많아 복원사업이 더디게 진척됐죠. 특히 2009년에는 국정감사까지 진행되기도 했고요. 허가가 지연되면서 그로인한 어려움이 컸습니다. 현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문화재 복원사업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힘써 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앞서 서암사는 과거 133칸으로 대규모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원 규모는 얼마이며, 몇 년간 진행되는가요. -1차 복원은 48칸으로 진행할 계획입니다. 2차 발굴과 3차 발굴도 해야 되는데, 재정이 턱없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향후 5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앞으로 서암사 복원이 완성되면 북한산의 새로운 문화명소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어떤 비전을 갖고 계신가요. -북한산성의 정문은 고양시 대서문인데요. 대서문에서 계곡 탐방로 방향으로 그러니까, 서암사지는 북한산성 백운동 계곡 옆에 있는 절터잖습니까. 특히 서암사는 북한산성 내의 여러 사찰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함으로써 북한산 등산로 입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죠. 나아가 서암사에는 현재에도 큰 바위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르는 이 바위 아래에는 큰 계곡물이 있고, 옛 선인들이 ‘탁족(濯足)’을 즐기던 서암사 넓적바위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암사가 복원되면 많은 사람이 찾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유원지 등 자연휴양림으로서 손색이 없는 곳인 만큼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쉬어 갈 수 있는 도량을 세우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경기도와 고양시를 비롯한 국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요. -문화재 복원사업에는 많은 재원이 소요됩니다. 반명 각 행정기관 등 정부의 문화재국의 재정은 너무 미약합니다. 그렇다 보니 지원되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죠. 그런 만큼 경기도와 고양시는 문화재 발굴과 복원이라는 큰 틀에서 행정을 모아 주시고, 재정을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홍의석 객원기자 hong5960@seoul.co.kr■서암사(西巖寺) 서암사지(西巖寺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옛 절터다. 2007년 8월 13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됐다. 서암사는 조선 숙종 37년(1711년) 때 북한산성 축성 이후 잦은 왜란과 호란에서 큰 활약을 했던 승려들을 활용하기 위해 산성 내에 건립한 11개 사찰 가운데 하나다. 규모는 133칸으로 승려 광헌(廣軒)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고려 문인 민지(閔漬:1248~1326)가 살았던 유지가 그 옆에 있었기 때문에 민지사(閔漬寺)로 불렸다. 수문 일대의 산성 수비 역할을 담당하다가 19세기 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은 전하지 않는다.
  • [이호준의 시간여행] ‘시간의 박물관’ 군산에 가면

    [이호준의 시간여행] ‘시간의 박물관’ 군산에 가면

    경주에 가면 신라의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첨성대와 불국사와 안압지에는 신라의 시간이 흐른다. 전북 군산이나 충남 강경에 가면 곳곳에 일제강점기의 시간이 걸려 있다. 이른바 ‘적산가옥’에 깃들어 있는 시간이다. 적산(敵産)의 사전적 뜻은 ‘자기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 또는 적국인의 재산’을 말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남겨 두고 간 집이나 건물을 뜻한다. 적산가옥은 전남 목포나 포항의 구룡포 등에도 많이 남아 있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대도시에서도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중에서도 군산에는 적산가옥이 유난히 많다. 그렇다 보니 군산만큼 ‘시간여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도시도 드물다. ‘시간의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 대표적 수탈 기지였다는 게 결정적 이유다. 일제는 호남평야 등에서 생산되는 쌀을 반출하기 위해 항만 시설을 만들고, 이곳을 통해 1934년 한 해만 해도 무려 870만석을 수탈해 갔다고 한다. 그해 전국의 쌀 생산량은 1630만석에 불과했다. 일본식 절 동국사(東國寺)도 일제의 ‘유물’ 중 하나다. 어? 한국에 이런 절이 있었어? 동국사에 처음 간 사람은 대개 한마디쯤 하게 된다. 일본 어느 사찰에 들어선 것처럼 생경한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지은 절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1913년 일본 조동종 승려 우치다(內田佛觀)라는 이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지었는데, 그때 이름은 금강사였다. 광복 이후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1955년 이름을 동국사로 바꾼 데 이어, 1970년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국사에는 ‘참사문’을 새긴 비(碑)가 있다. 참사문은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글이다. 동국사의 참사문은 일본 조동종 종단이 1992년 공식 발표한 글로, 식민 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내용이다. 그 앞에 서면 ‘종교인들은 이렇게 참회하는데 왜 일본 정부는 사과를 외면할까’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 수밖에 없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도 어두운 역사의 상징 중 하나다. 신흥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유지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이 가옥은 미곡 유통을 하던 히로쓰 게이사부로가 지은 주택이다. 흔히 히로쓰 가옥이라고 부른다. 길이 131m, 높이 4.5m의 반원형 터널인 해망굴은 옛 군산시청 앞 도로인 명치통과 수산업의 중심지였던 해망동을 연결하기 위해 뚫었다. 역시 수탈 물자 반출이 목적이었다. 이 밖에도 조선은행 군산지점,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사택, 군산세관 본관 등이 남아 있다. 부두에 남아 있는 부잔교 역시 일제 수탈의 잔재 중 하나다. 이런 건물들은 대부분 군산항 인근 ‘근대역사탐방로’ 범위 안에 있다. 지도 한 장 들고 한나절쯤 걸어 다니며 찾아보기 알맞은 거리다. 역사는 빛과 그림자의 직조물이다. 일제가 남긴 건축물을 없앨 것이냐, 보존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마침표를 찍지 못했지만, 무조건 지우는 게 능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어두운 역사 역시 이 땅에 각인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교과서’로 후손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내가 적산가옥에 배어 있는 일제의 시간을 만나러 자주 찾아가는 이유다.
  • [포토 다큐&뷰] 신비의 소리 천년의 울림…장인의 손끝 열정의 떨림

    [포토 다큐&뷰] 신비의 소리 천년의 울림…장인의 손끝 열정의 떨림

    지난 2월 강원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세계인의 축제이며 평화잔치인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화려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지구촌에 울려 퍼졌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범종으로 알려진 ‘오대산 상원사 동종(銅鐘)’(통일신라 725년·국보36호)을 표현한 ‘평화의 종’ 소리에 맞춰 개회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을 한 것이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홀로그램 영상으로 구현하며 70억 세계인에게 ‘평화를 향한 염원과 희망’이라는 메시지로 감동을 주었다. 범종(梵鐘)은 사찰의 법구사물(法具四物) 중 하나로 고대부터 현재까지 오랜 기간 만들어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정교한 세부장식과 웅장한 울림소리로 동양 삼국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종 안에 추를 매달고 종 전체를 흔들어 소리를 내는 서양종과 달리 표면에 치는 자리를 만들고 그 부분을 당목(撞木)으로 쳐서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마치 사람이 우는 듯 소리가 죽었다 되살아나기를 1분 넘게 반복하는 ‘맥놀이 현상’은 듣는 이로 하여금 환희심을 일으킨다.●백제 제철단지 진천… 원광식 주철장 평생 바쳐 신라 종소리 재현·7000개 종 제작 예부터 살기 좋은 고을이라 ‘생거진천’(生居鎭川)으로 불리던 충북 진천은 고대 철(鐵) 생산 유적지와 고대 제철로가 발견된 곳으로 일대가 철을 대량 생산, 공급했던 백제의 중요한 제철단지(製鐵團地)의 하나로 판단되고 있다. 원광식(77·국가주요무형문화재 제112호·범종제작성종사 대표) 주철장(鑄鐵匠)은 통일 신라의 종소리를 찾아 평생을 바친 장인이다. 경기 화성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 종 제작을 업으로 살아온 할아버지와 8촌 형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았다. 17살 때, 충남 예산 수덕사가 광복 후 최대 규모의 종 제작 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은 원씨가 범종 제작에 평생을 걸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원씨는 머리를 깎고 수덕사에 들어가 대웅전이 보이는 한구석에 주물공장을 세운 뒤 꼬박 3년을 보낸 끝에 “종소리가 30리를 간다”는 수덕사의 종을 완성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전국적으로 입소문을 타며 범종 제작자로서 명성을 얻어 나갔다. 하지만 옛날 장인들이 만들어낸 신비의 소리를 재현하지 못했던 까닭에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허전했다. 천년의 종소리를 재현해 내겠다는 열망에 빠진 그는 종 제작 비법을 밝혀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절을 방문해 일제가 빼앗아간 신라·고려시대의 종 5개를 실리콘으로 복제해 이 중 1개를 주물기법으로 복원했다.결과는 참담했다. 신라종의 은은한 소리와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서 옛 조상들이 사용했던 ‘밀랍주조’ 기법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기법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을 뿐 조선 중기 이후 맥이 끊겨 국내 어느 문헌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스스로 비법을 찾아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혼자서 종을 만들고 부수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밀랍주조법의 비밀이 종 틀의 주재료인 흙의 성분에 있다는 판단에서 종 틀로 쓸 흙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마침내 신라 수도인 경주 일대를 샅샅이 뒤져 문양을 새기거나 미려한 거푸집을 만들기에 좋은 뻘돌(이암·泥巖)을 발견했다. 7년간의 연구 끝에 흙틀을 재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가 재현해낸 전통밀랍주조기술은 범종의 모형을 정교하게 만든 뒤 이를 곱게 빻은 이암 가루에 전분 등을 섞은 흙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싸고, 안의 밀랍을 녹여낸 자리에 1200도의 쇳물 (동과 주석 합금)을 부어서 만들어내는 작업이다.●“은은한 소리 오래가도록 종 밑 울림통 파 놓아” 외길 인생도 맥놀이 같아 그의 공장인 성종사(聖鐘社)의 작업장은 때마침 주문이 들어온 범종을 만드는 작업으로 분주했다. 거푸집에 쏟아지는 펄펄 끊는 쇳물은 빨갛다 못해 샛노랗게 끓어 올랐다. 쇳물을 운반할 용기가 레일을 타고 용해로에 다가가자, 커다란 쇠갈고리로 들어 올려 시뻘건 쇳물을 들이붓는다. 다시 서서히 공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용기 속의 쇳물이 마지막 거처로 옮겨갈 차례다. 거푸집을 해체하고 열흘가량 마무리 잔손질을 하면 비로소 맑고 긴 여운을 지닌 아늑한 ‘신라의 소리’를 제대로 품은 범종이 태어나는 것이다.원 장인은 “은은한 소리가 오래가도록 종 밑에 울림통을 파 놓은 것이 우리 선조들의 지혜” 라고 말했다. 종 표면의 아름다운 문양도 최적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곳에 자리해야 한다. 그는 “표면의 무늬가 종의 좌우를 비대칭으로 만들어 맥놀이를 극대화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달려온 외길 인생은 범종 소리의 맑고 긴 맥놀이에 사로잡힌 세월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종만도 조계종의 본산인 조계사를 비롯해 오대산 상원사 범종, 광주 민주의 종, 충북 천년대종, 싱가포르 복해선원 종 등 7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절이나 지방자치단체에 걸린 이름값 하는 종들은 모두 그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장 앞마당에는 크고 작은 범종 서너개가 매달려 있다. 원씨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마당에 나와 종을 친다. 그는 “인간은 기껏 백년을 살지만 종은 천년 이상을 간다”며 “지나온 시간은 천년 전 장인의 지혜를 배우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을 이었다. 종을 치는 그의 손끝에서 식을 줄 모르는 장인의 열정이 뿜어져 나왔다. 글 사진 진천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의상대사 창건 高雲寺, 가운루·우화루 지은 최치원 호 따 孤雲寺로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의상대사 창건 高雲寺, 가운루·우화루 지은 최치원 호 따 孤雲寺로

    1742년(영조 18년) 10월 보름, 임진강 우화정(羽化亭)에서 웅연(熊淵)까지 선상(船上) 연회가 벌어졌다. 참석자는 경기도관찰사 홍경보와 연천현감 신유한, 양천현령 정선이었다. 이날은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1037~1101)가 적벽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은 660주년이었다고 한다. 우화정은 경기 연천군 중면 대사리에 있었다. 지금은 임진강댐 상류 북한 땅이다. 청천 신유한이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이라면 겸재 정선은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다. 이 뱃놀이에서 신유한은 ‘의적벽부’(擬赤壁賦)를 지었고 겸재는 배가 우화정에서 떠나는 장면과 웅연에 닿는 모습을 각각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이라는 그림에 담았다. 여기에 창애 홍경보의 서문이 더해진 시화첩을 세 벌 만들어 나누어 가졌으니 유명한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다.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비로 변하는 것이 우화(羽化)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은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을 이르는 도교적 표현이다. 소동파의 ‘훌쩍 세상을 버리고 홀몸이 되어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는 ‘적벽부’ 구절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겸재는 이 구절의 신선 선(仙) 자를 배 선(船) 자로 살짝 비틀어 화제(畵題)로 삼았다. 신유한(1681∼1752)은 집안 배경이 변변치 않은 탓에 늦은 나이까지 지방관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와 문장에서만큼은 일찍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1719년(숙종 45)에는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통신사 제술관은 여간 글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뽑힐 수 없었다. 신유한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는 것도 통신사행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는 1719~1720년 일본을 여행하면서 지리·풍속·제도는 물론 자연환경까지 자세히 적었으니 곧 ‘해유록’(海遊錄)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을 이끈 사명대사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사명대사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자신의 평가를 붙인 ‘분충서난록’(奮忠難錄)을 편찬하기도 했다.●오늘날 고운사 중심은 대웅전… 과거엔 극락전 오늘은 ‘컬링의 고장’으로 떠오른 경북 의성의 고운사(孤雲寺)로 간다. 의성군 동북쪽의 고운사는 안동과 경계를 이루는 등운산(登雲山)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절 이름만으로도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857~?)에 자연스럽게 생각이 미친다. 신유한을 떠올린 것은 그가 평해군수 시절인 1729년(영조 5) 고운사의 사적기를 썼기 때문이다. 그의 사적기는 1918년 오시온이 지은 또 다른 사적기와 함께 이 절의 역사를 구성하는 결정적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고운사는 절의 역사를 이렇게 서술한다. ‘신라 신문왕 원년(681년) 해동 화엄종의 시조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연꽃이 반쯤 피어난 부용반개형상의 천하명당에 자리잡은 이 사찰은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유교·도교에 모두 통달해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如智)·여사(如事) 양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고운을 빌려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님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도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들이다’. 고운사는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흩어진 60곳 남짓한 절들을 관장하고 있다고 한다. 새로 지은 산문을 지나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역시 최근 조성한 대웅전을 비롯한 30개 남짓한 전각이 규모 있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고운사는 ‘사세(寺勢)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칸 건물에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 지금은 교구본사로는 작은 사찰로 전락했다’고 적어 놓았으니 지금보다 훨씬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나 보다. 오늘날 고운사의 중심은 웅장한 대웅전 주변이라 할 수 있지만, 과거의 중심은 극락전이었다. 극락전과 마주 보는 우화루 사이 양옆으로 만덕당과 종무소가 사방에서 마당을 에워싼 일종의 산지중정형 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유행한 형태다. 극락전 영역은 소박하기만 하다.●가운루, 구름 탄 누각 의미… 등운산 계곡 가로질러 종교적 의미에서 절의 중심이 어디든, 고운사의 상징은 우화루와 가운루다. 등운산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가운루는 과거 다리 역할을 했다. 가운루란 구름을 타고 앉은 누각이라는 뜻이다. 곧 신선의 세계다. 고운이라는 최치원의 아호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우화루란 이름에서는 곧바로 홍경보, 신유한, 정선의 임진강 뱃놀이가 떠오른다. 사찰의 강당은 부처가 설법하자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빌려 우화루(雨花樓)라 이름붙이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은 찻집으로 쓰는 고운사 우화루에도 내부에는 우화루(雨花樓)란 편액이 하나 더 붙어 있다. 우화루와 가운루는 이 절이 최치원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음을 과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화루 명칭은 신선·부처님 가르침 동시에 상징 고운사가 신유한에게 사적기를 청한 것도 청천이 유학은 물론 불교와 도교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천은 사적기 서두에 ‘1728년 고운사 스님이 찾아와 청하는 것을 서류에 파묻힐 만큼 바빠 응하지 못했는데, 이듬해 사자(使者) 셋이 고운사 주지의 글을 다시 들고 오니 거절할 수 없었다’는 취지로 고운사의 역사를 정리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사적기는 신유한이 관련 사료를 엄격히 고증해 서술했다기보다는 스님들이 알고 있는 구전(口傳) 자료를 재구성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런데 청천의 사적기에는 ‘의상대사 창건’ 다음에 최치원이 등장하지 않고 곧바로 ‘고려 건국 초 운주화상 중수’로 넘어간다. 최치원의 고운사 중창설(說)과 이후 절 이름 변경설(說)은 신유한이 사적기를 쓰던 시기에는 아직 널리 보편화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명대사가 고운사를 의승군의 전초기지로 썼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사명대사 전문가’인 신유한은 역시 사적기에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운사와 최치원과의 관계로 국한하면 신뢰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보물로 지정된 고운사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은 최치원이 살았던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미술사학계는 보고 있고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도 신라 후기 양식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유한의 사적기에 왜 최치원과의 관계가 서술되지 않았고 오시온의 사적기에는 왜 들어가게 됐는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극락전이 서쪽에 있는 건 서방정토 상징성 살린 것 가운루의 존재에서 보듯 고운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그 동서쪽에 전각이 있는 사찰이었다. 극락전 영역이 서쪽에 자리잡은 것은 주존(主尊)인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서방정토의 상징성을 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계곡 동쪽은 모니전(牟尼殿) 영역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전각이다. 흔히 이런 전각을 대웅전이라 부르지만 절의 큰법당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고자 이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대웅전은 1992년 가운루 상류의 계곡을 메우고 모니전 영역을 해체해 세운 것이다. 모니전 옛 건물은 대웅전 동쪽의 삼층석탑 위로 옮겨 지었으니 지금의 나한전이다. 조촐함에서 닮은 나한전과 삼층석탑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던 것인 양 자연스러운 조화를 보여 준다. 일주문 밖으로는 화엄승가대학원이 보인다. 산내 암자인 운수암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신유한은 운수암기(雲水庵記)도 남겼으니 이래저래 고운사와는 인연이 깊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이응노와 수덕여관을 넘어서 만나는 예산 수덕사(修德寺)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이응노와 수덕여관을 넘어서 만나는 예산 수덕사(修德寺)

    “모두 같은 민족 아닙니까?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동백림에 간 것은 자식의 소식을 듣고, 거기서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간 것입니다...그 아들을 만나게 해 주겠으니 오라고 했을 때, 거절합니까, 만났다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그만둡니까.” 세계적인 추상화의 거장, 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1904~1989) 화백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법정 구속되기 전의 마지막 최후 진술이다. 동백림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으로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들과 교민들이 동베를린에 위치한 북조선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아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음악가 윤이상을 비롯하여 천상병 시인 등이 연루되었고, 결국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가 한 명도 없는 ‘구름같은’ 간첩단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응노는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다. 이후 이응노는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서 삶의 한 부분을 내려 놓는다. 이응노의 삶과 수덕여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충청남도 예산 수덕사로 가 보자. 충청남도 덕숭산(德崇山)에 위치한 수덕사(修德寺)는 충청도의 절답다. 겉으로는 무심한 듯 소란스럽게 이름 내지는 않았으나, 내실은 진즉부터 으뜸인 불교 도량임에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수덕사는 백제계 사찰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유서 깊은 절집일 뿐만 아니라, 맞배지붕 양식으로 이름 알려진 고려시대(1308년)의 대웅전이 세월에 푹 곰삭은 나무 기둥들과 함께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한 때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로 불리어 알려질만큼 훌륭한 비구 스님들을 배출하는 명문 선원인 ‘견성암’도 수덕사에 위치한다. 여기에 더해 현재 수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5대 총림 가운데 하나인 덕숭총림으로 많은 스님들이 강학과 참선정진하는 종합교육도량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충청남도 내포 일대의 36개 말사를 관장하는 제7교구본사이기도 하니 중부 지역에서는 단연 손꼽히는 사찰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수덕사를 더욱더 유명하게 만든 것이 바로 수덕사 일주문 옆에 위치한 수덕 여관이다. 수덕여관은 이응노 화백이 1945년 3월, 일본 패망을 앞두고 징용을 피해 수덕사 인근 비구니가 쓰던 절집을 손수 구입한 곳이다. 이후 이응노 화백의 처(妻) 박귀희 여사(1909~2001)가 이곳을 여관으로 운영하며 프랑스로 떠나버린 남편을 기다리면서 자식을 길러내었다. 지금도 수덕여관 주변에는 이응노 화백이 동백림 사건의 옥고를 치른 후 이곳에 머물면서 손으로 직접 새긴 문자 추상 암각화가 곳곳에 남아 있다. 만물의 흥망성쇠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진 이 암각화는 지금도 50여년 전의 이야기를 생생히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수덕사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충청도 근역에는 단연 으뜸인 사찰이다. 수덕여관의 역사를 함께 2. 누구와 함께? - 나이드신 부모님과 천천히 3. 가는 방법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 79 - 예산버스터미널 → 수덕사 (요금 1,760원/ 1시간 소요) 4. 감탄하는 점은? - 고려시대의 대웅전, 수덕여관 인근의 이응노 화백의 암각화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주말에는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수덕여관 인근의 암각화, 대웅전, 범종루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소머리국밥 ‘한일식당’, 곱창 ‘신창집’, 수제비 ‘대흥식당’, 국수 ‘쌍송국수’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sudeoksa.com/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추사고택, 한용운 생가터, 장영실 과학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수덕사는 가파른 계단이 많은 사찰이어서 천천히 올라가도록. 이응노 화백의 삶을 이해한 뒤 수덕여관을 둘러 본다면 한 예술가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술로 이해할 수 있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현장 행정] 태극기 휘날리던 종로 3·1운동 탐방길 열린다

    [현장 행정] 태극기 휘날리던 종로 3·1운동 탐방길 열린다

    인사동·태화관·북촌 도보 150분 골목길 해설사 양성…도시 홍보 100주년 앞두고 주요 건물 정비 “종로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3·1운동의 주요 거점에서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더욱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김영종 서울 종로구청장은 3·1절을 사흘 앞둔 지난 26일 종로 지역 골목길 해설사 30여명을 대상으로 구가 마련한 교육 세미나에 나와 이같이 당부했다. 구는 3·1운동 1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3·1운동의 주요 거점을 따라 걸으며 선열의 발자취를 반추하는 3·1운동길 탐방 코스를 오는 7월부터 운영하기 위해 2박 3일 간 교육 행사를 진행했다. 코스는 3·1운동 주요 거점이 있는 인사동 골목길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한 보성사 터가 있던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 회화나무 구역, 학생단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승동교회 등이 대표적이다.독립선언서를 처음 배포한 지점인 천도교중앙대교당,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태화관’ 터인 태화빌딩,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 출발지인 탑골공원도 있다. 독립운동가 집터가 있는 북촌 권역, 3·1운동 거사를 논의한 중앙고 숙직실도 빠질 수 없다. 모두 종로구에 있어 해설과 함께 천천히 걸으면 약 2 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종로구는 이미 지역 내에서 각종 골목길 탐방 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실제로 김 구청장은 종로가 역사 도시란 점에 착안해 관련 유적을 꾸준히 보존·복원·개발하면서 관광객에게 지역을 설명해주는 골목 해설사를 서울 지자체 중 처음으로 도입해 양성한 바 있다. 민선 5기 취임 이듬해인 지난 2011년 지역 내 탐방 코스 11개를 만들면서 골목길 해설사 25명을 선발해 교육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26개 코스에서 70명의 해설사가 활동 중이다.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해설 프로그램 이용자 수는 6만 9564명에 달한다. 무료 해설 서비스는 관광 진흥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종로에서는 올해 3·1운동 탐방길뿐 아니라 천주교 순례길 탐방 프로그램도 나올 계획이다. 구는 해설사 교육뿐 아니라 3·1운동 관련 거점 정비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내년 3·1절 100주년 전까지 탑골공원 내부 시설과 인근 도로를 개선하고 공평 도시환경정비구역 공영주차장 부지에 태화관 광장을 신규 조성할 방침이다. 김 구청장은 “일회성 행사를 넘어 연중 탐방코스 운영을 통해 3·1 애국정신을 항상 되새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이보게, 귀티나게 쉬어 보시게

    이보게, 귀티나게 쉬어 보시게

    경남 의령을 찾아갑니다. 재물복을 나눠준다는 솥바위가 목적지입니다. 원래는 홍의장군 곽재우의 무용담이 깃든 전승지였지요. 한데 요즘은 ‘부자 되는 바위’로 더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의령엔 볼거리가 꽤 많습니다. 힘 하나 안 들이고 절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한우산, 기골이 장대한 봉황대 등의 자연 풍경에 옛 향기 그윽한 고택들이 수없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제대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아마 1박2일 일정으로도 모자랄 겁니다.의령을 돌다 보면 인상적인 논두렁을 흔히 보게 된다. 돌로 촘촘하게 두럭을 쌓아 논배미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흙을 쌓아 만든 보통의 논두렁과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다. 농가의 담장이며 논두렁들이 죄다 이런 모습이다. 돌담 두른 시골 마을이 어디 여기뿐일까만, 의령은 유독 그 수가 많다. 낡은 마을들을 보자면 언뜻 발전이 더디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 한데 그보다는 옛것을 완고하게 지켜내고 있다는 게 맞을 듯하다.솥바위부터 찾아간다.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솥바위의 기운을 받고 싶어서다. 얄팍하다거나 미신에 현혹됐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사진 찍어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올려 두면 미구에 솥바위의 기운이 전해질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솥바위는 의령과 함안이 경계를 이룬 남강변에 있다. 한자로는 정암(鼎岩)이라 쓴다. 이름 그대로 솥(鼎)처럼 생긴 바위(岩)다. 바위 절반은 수면 위로 노출됐고, 절반은 수면 아래 잠겼다. 물 아래쪽에도 세 발 달린 솥처럼 세 개의 바위가 떠받치고 있다고 한다. 솥은 예부터 풍요를 뜻했다. 솥바위에도 이와 관련된 옛이야기가 전해 온다. 반경 20리(8㎞) 이내에 부귀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솥의 다리가 뻗은 세 방향에서 큰 부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공교롭게도 솥바위에서 세 방향에 해당되는 의령의 정곡면 중교리에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 함안 군북면 동촌리에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 진주 지수면 승산리에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과 GS그룹 허정구 회장 등의 생가가 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창업주 4명이 솥바위 인근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물론 후대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한데 만든 이야기치고는 퍽 기발하고 정교하다. 이쯤 되면 우연이라 치부하기보다 ‘풍수지리적 기운’에 더 점수를 주고 싶은 심정이다. 솥바위 일대는 예부터 정암진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때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2000여 왜적을 섬멸한 전승지였다. 당시 의병을 이끈 곽재우 장군은 밀려드는 왜적을 맞아 의령 곳곳에 전승지를 남겼다. 솥바위는 그중 하나다.솥바위에서 남강을 따라 8㎞쯤 거슬러 오르면 정곡면 중곡리다. 이 마을에 삼성그룹을 일궈 낸 고 이병철 선대회장의 생가가 있다. 이 회장의 할아버지가 지었다는 생가는 뜻밖에 소박하다. ‘고대광실’일 것이란 선입견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다. 생가는 안채와 바깥채, 그리고 농기구 등을 둔 광채 등으로 구성됐다. 나란히 선 안채와 바깥채의 자태가 단정하다. 어디 한구석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초가집의 소박함과 기와집의 엄정함을 동시에 갖춘 듯하다. 생가 주변으로 ‘역사·문화 부자길’이 조성돼 있다. 거리는 14.5㎞다. 의병 전적지, 탑바위, 성황리 소나무(천연기념물 359호) 등을 돌아본다.호사가들은 의령 9경 가운데 솥바위(5경)와 탑바위(6경), 봉황대(3경)의 코끼리 바위를 따로 묶어 ‘3대 기도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탑바위는 정곡면 호미산의 수직절벽 위에 얹혀 있는 바위다. 얇고 편평한 돌판이 탑처럼 층층이 쌓인 형태다. 높이는 8m 정도다. 탑바위 바로 아래는 비구니 스님들의 기도처인 불양암이다.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른다. 강 너머는 들녘이다. 땅은 깃들어 사는 사람 모두에게 요족한 삶을 안겨 줄 만큼 넓다. 궁류면의 봉황대는 거대한 석벽을 일컫는다. 판석처럼 주름 접힌 바위들의 자태가 우람하다. 바위 아래는 일붕사다. 동굴 속에 지은 대웅전으로 이름난 절집이다.부자 여정의 마지막 코스는 한우산이다. 한자로는 찰 한(寒)에 비 우(雨) 자를 쓴다. ‘차가운 비의 산’이란 뜻이다. 한우산은 정상 언저리까지 도로가 나 있다. 이 덕에 승용차로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도로는 이리저리 굽었다. 그 모양이 색소폰을 닮아 ‘색소폰 도로’라 불리기도 한다. 한우산 정상은 파노라마 전망대다. 지리산 천황봉과 합천 황매산 등 인근의 명산들이 360도로 펼쳐진다. 정상 아래 산사면에 설화원이 있다. 도깨비 전설을 토대로 조성한 짧은 산책로다. 도깨비 등 여러 형태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부자 여정의 마지막 주인공은 설화원 끝자락의 ‘망개떡 나눠 주는 도깨비’다. 망개떡은 의령 특산품으로, 망개나무 잎으로 싼 떡을 일컫는다.부자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도깨비가 들고 있는 망개떡을 만지기만 하면 된다. 역시 믿거나 말거나다. 관광객이 망개떡을 만질 때마다 ‘돈 나와라, 뚝딱!’이라 외쳤으면 좋으련만, 이 도깨비는 싱글싱글 웃기만 할 뿐 당최 방망이 휘두를 생각은 없는 듯하다. 설화원 일대는 철쭉 군락지다. 봄이 되면 산 사면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 터다. 그 장면만 눈에 담아도 부자 소리 들을 만하겠다. 의령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고향이다. 그가 임진왜란 당시 격전을 치렀던 현장들이 의령 곳곳에 널려 있다. 생가는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마을에 들면 ‘현고수’(懸鼓樹)가 객을 맞는다.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이다. 곽재우 장군이 1592년 첫 의병을 일으킬 때 이 나무에 북을 매달고 거병을 알렸다고 한다. 나무의 수령은 ‘고작’ 550년 안팎이지만 담긴 사연이 깊어 천연기념물(493호)로 지정됐다. 현고수 바로 뒤는 곽재우 장군의 생가 터다. 한국전쟁 당시 전파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현재 생가 터에 세워진 건물은 다른 성씨를 가진 이의 소유다. 쇠락한 건물을 보고 있자면 씁쓸한 느낌이 든다. 나라를 구한 영웅의 뒤안길을 보는 듯해서다. 당시 곽재우 장군은 전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한다. 백성을 버리고 줄행랑을 친 임금이 논공행상에서조차 무능했던 셈이다. 의령읍내 끝자락에 있는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과 그를 도운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 이채로운 디자인의 충의각, 500년을 살아낸 모과나무 등 볼거리가 많다. 구름다리도 의령의 명물이다. 세 개의 출렁다리가 중심부로 수렴되는 형태를 하고 있다. 세 발 달린 솥바위를 형상화한 듯하다. 출렁대는 다리 위를 걷다 보면 오금이 저릴 만큼 짜릿하다. 글 사진 의령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역번호 055 →가는 길: 솥바위는 의령 남쪽에 있다. 남해고속도로 군북나들목이 가깝다. 솥바위를 기준으로 시계 방향, 혹은 반대 방향으로 돌아보는 게 수월하다. 한우산 등 의령 서쪽부터 짚어 내려가겠다면 대전통영고속도로 단성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편하다. 한우산은 해넘이나 해돋이 때에 맞춰 찾으면 좋다.→맛집: 의령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가 소바다. 소바는 메밀을 주재료로 만든 면을 일컫는다. 일본식 표현을 차용해 쓰고 있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무한다. 의령 소바는 다소 슴슴하다. 맵짠 여느 경상도 음식과 결이 다르다. 다만 고명으로 얹은 장조림 고기는 짭조름하다. 이 덕에 간이 적당히 균형을 이룬다. 보다 차진 맛을 원한다면 고춧가루 풀고 간장을 한 바퀴 돌리면 된다. 다시식당(573-2514), 화정식당(572-1122), 체인 식당의 본점인 의령소바(572-0885) 등이 알려졌다. 소고기국밥도 의령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꼽힌다. 맛은 평이한 편이다. 중동식당(572-3377)과 마주한 종로식당(573-2785), 수정식당(573-2465) 등이 알려졌다. 주전부리의 최고봉은 망개떡이다. 차진 떡과 달달한 팥소가 기막히게 어울린다. 현지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곽재우 장군의 부인이 전장에 나가는 장령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비롯된 음식이란 점에서 진주비빔밥과 비슷하다. 전통시장 안쪽에 다수의 망개떡집이 있다.
  •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역대급’ 한파가 몰아쳤던 지난주 여성 손님 넷이 한국을 찾았습니다. 우리나라를 찾는 이들이 한둘일까만 이들은 좀 특별했습니다. 올해 처음 시도된 ‘코리안 투어리즘 앰배서더’였으니까요. 우리 식으로는 한국 관광 명예대사쯤 될까요. 이들을 초청한 한국방문위원회 측에선 ‘한국 관광 알리미’라 표현했습니다. 이들은 온라인 세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이른바 ‘인플루언서’들입니다. 4박 5일 일정으로 내한한 알리미들은 2박 3일에 걸쳐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강원 강릉과 평창, 서울 등을 둘러봤습니다. 이들을 따라 강원과 서울 일대를 돌아봤습니다.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한국은 어떤 모습일지, 또 어떤 풍경에 심드렁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지요. 여성들로만 이뤄진 터라 이들이 외국인 관광객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여성 관광객의 시각은 확인할 수 있겠지요.# 강릉_영하 26도_미리 보는 평창 한국관광 알리미들이 강원도를 찾던 날. 평창의 기온이 영하 26도까지 곤두박질쳤다. 우리나라 사람조차 경험해 보지 못한 맹추위다. 한국관광 알리미들이 잘 견딜 수 있을지 우려의 시각이 많았다. 한데 이는 기우였다. 한국을 잘 알고, 잘 대비했던 알리미들은 외려 보기 드문 추위를 한껏 즐겼다. 이번에 한국을 찾은 일행은 모두 4명이다. 미국 중동부 오하이오주에서 온 스타 렌가스와 대만 타이베이 출신의 린완링(지나, 이하 괄호 안은 온라인 활동 이름), 태국 방콕의 파타라라위 바우수완(베스티), 그리고 일본의 미요코 오모모 등이다. 이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온라인인 만큼 KT에서 ‘속도 갑’의 와이파이 공유기를 제공했고, 숙소는 ‘가성비’ 높다고 소문난 롯데호텔 L7강남에 마련됐다.이번 팸투어는 강원 강릉과 평창, 서울을 묶어 돌아보는 2박 3일 일정이다. 강원 지역은 K트래블버스 운행 코스대로 돌았다. K트래블버스는 각 지역의 명소를 1박 2일로 돌아보는 외국인 전용 여행상품이다. 교통과 숙박, 통역까지 포함됐다. 애초 한국방문위에서 운영하다 지금은 각 지방자치단체로 업무가 이관됐다. 코스는 모두 7개다. 서울에서 출발해 강원, 충청, 대구 등을 오간다. 외국인 전용상품이긴 하지만 봄, 가을 여행주간 등엔 한국인 친구들이 동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알리미들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강릉의 올림픽홍보체험관이다. 올림픽 유치 과정의 자료와 경기장 시설 건립 현황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종목별 선수들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입체조형물 전시장과 스키 점프를 실감 나게 관람할 수 있는 4D체험관 등이 마련됐다. 건물들의 건축미도 빼어나다.# 안목해변_파란바다_꺄아 >0< 초당순두부로 점심 요기를 하고 오죽헌에 들러 한국 전통 가옥의 아름다움을 엿본 알리미들은 중앙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앙시장은 강릉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이다. 낡은 시장이지만 뜻밖에 젊은이들의 발걸음도 잦다. 새 명물로 떠오른 아이스크림호떡, 감자옹심이 등의 먹거리를 찾는 이들이다. 이어 방문한 곳은 안목해변. 경포대가 강릉의 ‘고전’이라면 안목은 ‘신세계’쯤 되겠다. 예전엔 썰렁하기 이를 데 없던 곳이었지만 커피를 파는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일약 강릉 관광의 ‘핫 스팟’으로 떠올랐다. 일정을 소화하느라 다소 피곤한 듯했던 알리미들의 표정은 안목해변에 닿자마자 활짝 펴졌다. 미국 중동부 지역에서 온 스타는 그럴 수 있다. 코발트빛 바다를 보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한데 베스티의 반응은 유별났다. 태국에도 우리 못지않게 빼어난 해변이 널려 있는데, 대체 왜? 그는 “바다 빛깔이 태국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태국의 바다는 대체로 연둣빛이다. 이에 견줘 한국의 동쪽 바다는 파란빛이다. 특히 겨울에는 잉크를 풀어놓은 것처럼 짙푸르다. 그는 이 빛깔이 마음에 든 거다. 물론 마음 한켠에는 TV드라마 ‘도깨비’를 촬영하느라 이 해변을 오갔을 배우 공유에 대한 상념이 단단히 자리를 잡았을 터다. 이어 평창으로 향한 이들은 올림픽 설상경기장을 돌아본 뒤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금강교_‘도깨비’다리_공유♥ 평창 여정의 핵심은 월정사다. 겨울철엔 눈 덮인 전나무 숲길이 특히 볼거리다. 전나무 숲길은 일주문에서 금강문까지 이어진다. 채 1㎞가 못 되는 거리에 반듯하게 솟은 전나무가 빽빽하다. ‘천년의 숲’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사실 숲에서 가장 나이 든 나무는 수령 370년 정도다. 대개는 수령 80년 안팎의 젊은 나무들이다. 숲은 오백 살 먹은 전나무 아홉 그루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들의 씨가 퍼져 지금의 숲을 이뤘다는 것이다.숲길의 들머리는 일주문이다. ‘월정대가람’ 현판 아래로 들어서면 전나무들이 빚어낸 수직세상이 펼쳐진다. 숲길은 곧지 않다. ‘S’자 모양으로 휘었다. 숲 가운데 모퉁이엔 성황각도 있다. 토속 신들을 모신 곳이다. 전나무 숲길의 끝자락은 금강교다. 다리는 그리 오랜 내력을 갖지 못했다. 당연히 고색창연한 맛은 없다. 한데 알리미들의 발걸음은 도무지 다리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한파가 살갗을 찢는 듯한데도 말이다. 이유는 스타의 인스타그램을 엿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의 인스타그램엔 배우 공유가 눈 덮인 전나무들을 뒤로하고 멋진 자세로 다리 위를 걷는 사진이 걸려 있다. 그 다리가 바로 금강교였던 거다. 전나무숲에서도 공유와 김고은이 엇갈린 운명을 슬퍼하는 장면이 촬영됐다. 일행들의 발걸음이 유독 이 일대에서 엿가락처럼 늘어졌던 것도 그제야 이해가 된다. 역시 한류 드라마의 힘은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여성들에게까지 속속들이 미쳤던 게다. # S라인 전나무숲_월정사품격 ‘유난히’ 길었던 전나무 숲길의 끝은 월정사다. 절집 건물 대부분이 한국전쟁 이후 다시 세워졌지만 오대산을 병풍처럼 두른 모습에서 깊고 묵직한 품위가 전해져 온다. 월정사는 조선의 왕 세조가 자주 찾은 곳이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죄를 씻어내고 싶었던 게다. 대웅전 앞에 서면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이 객을 맞는다. 팔각의 2층 기단 위에 고려시대의 탑이다. 탑 앞의 맨바닥엔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이 부복해 있다. 무엇인가 간절히 기원하는 모습이다. 불교 신자인 베스티 역시 뭔가 종교적 의례를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촉박한 일정 탓에 총총히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용평면에 들어선 정강원은 전통 음식을 맛보고 조리 체험까지 할 수 있는 곳이다. 외국인들이 특히 자주 찾는다. SBS 드라마 ‘식객’의 촬영지였던 곳으로, 정문 앞 장독대에 늘어선 300여개의 옹기가 눈길을 끈다. 알리미들은 정강원에서 비빔밥 만들기, 기미상궁 등을 체험했다. 글 사진 평창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1862년 화마 입은 대승사, 부석사 무량수전 목각탱 모셔오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1862년 화마 입은 대승사, 부석사 무량수전 목각탱 모셔오다

    ‘죽령 동쪽 100리에 우뚝 솟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 9년(587) 갑자기 4면이 한 장(丈)이나 되는 돌이 하늘에서 산꼭대기로 떨어졌다. 그 돌에는 사방여래(四方如來)가 새겨졌는데,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행차하여 절하고는 바위 곁에 사찰을 창건하도록 했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했는데, 법화경을 외는 비구 망명(亡名)을 주지로 삼아 바위를 깨끗이 쓸고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산 이름은 역덕산(亦德山)이라고도 하고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승려가 죽어 장사 지냈는데 무덤 위에 연꽃이 피어났다’●대승사 곁에는 총지암·윤필암 등 유명 암자 즐비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굴불산(掘佛山)·만불산(萬佛山)’에 나오는 이야기다. 망명(亡名)은 글자 그대로 이름이 잊혀져 알 수 없게 된 승려다. 한 장(丈)이란 한 자(尺)의 열배에 이르는 단위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줄인 법화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이다.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경지에 들어서게 하는 데 근본 목적을 둔다. 사방여래가 새겨진 바위가 떨어졌다는 것은 주변 고을 사람들을 극락정토로 한데 이끌고 가겠다는 부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사불산과 대승사는 경상북도 문경시의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소백산이 서남쪽으로 뻗어 문경새재로 가는 길목에 사불산이 있고 그 기슭에 대승사가 있다. 해발 913m에 이르는 사불산의 오늘날 공식 명칭은 공덕산(功德山)이다. 역덕산이든, 공덕산이든, 사불산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인근 중생에게 두루 미치게 하겠다는 속뜻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사불산 일대는 하나의 불국토(佛國土)다. 공덕산 동쪽 기슭 예천 땅에는 통일신라시대 창건설이 전하는 용문사(龍門寺)가 있다.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머문 적이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은 천하를 평정하면 큰 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했고, 건국 이후 용문사를 중건했다고 한다. 사불산 서쪽의 해발 1103.2m 운달산 아래는 김룡사(金龍寺)가 있다. 대승사 창건 이듬해인 588년(진평왕 10) 운달조사가 세웠다는 설화가 전한다. 사불산은 그 자체로 부처의 땅이다. 대승사 바로 곁에는 새로 지은 총지암(總持庵)을 비롯해 문수암(文殊庵), 관음암(觀音庵), 보현암(普賢庵)이 있다. 윤필암(潤筆庵)과 묘적암(妙寂庵)은 대승사만큼이나 유명세를 떨치는 산내 암자다. 대승사에 가려면 문경시청이 있는 옛 점촌에서 자동차로 30~40분은 달려가야 한다. 오늘날의 대승사는 전각이 빽빽하게 들어선 대찰(大刹)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린 이후 1604년(선조 37)부터 1701년(숙종 27)까지 100년 남짓에 걸쳐 중건한 절집은 6·25전쟁에도 무사했건만, 1956년 대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됐다고 한다. ●1956년 화재… 전각 대부분 1960년대 이후 재건 앞서 고려시대에도 화를 입었다. 진정국사 천책의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에는 ‘갑진년 8월 두 세 명의 도반과 지팡이와 짚신을 챙기고 사불암을 배례하고 대승사를 찾았다. 옛 건물과 회랑에는 오직 한 사람의 늙은 승려가 한 사람의 사미를 데리고 거처하고 있었다.…노승은 ‘내가 이 절에 머리 깎고 들어온 지 이미 60년 남짓인데 그동안 끊임없이 불법을 지닌 고승이 교법을 널리 펴 왔지만 근래 오랑캐 말발굽이 침범해 중단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갑진년은 1244년(고종 31)이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6차례 이어진 몽골의 침입을 가리킨 것이다. ●총지암 석탑 복원땐 삼국시대 창건설 밝혀질 수도 지금 대승사에서 볼 수 있는 전각은 대부분 1960년대 이후 다시 지은 것들이다. 대웅전과 그 앞에 세워진 만세루도 그렇다. 절집은 새것이어도 고찰(古刹)의 흔적은 넘쳐난다. 대웅전 앞에 놓인 한 쌍의 노주석(柱石)이 또한 그렇다. 광명대(光明臺)라고도 불리는 노주석은 야간 법회가 있을 때 주위를 밝히는 역할을 한다. 노주석 기둥에는 1729년(영조 5) 세웠음을 알리는 명문(銘文)이 있다.대웅전의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더욱 특별하다. 후불탱을 그림 대신 조각으로 만들어 모신 것이다. 목각탱(木刻幀)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10개의 나무편을 조합해 아미타정토세계를 표현했다.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조선 후기 집중적으로 조성됐는데 남아 있는 것은 6점뿐이다. 예천 용문사와 상주 남장사 보광전,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서울 경국사, 남원 실상사 약수암 것이 그렇다. 이 목각설법상이 당초에는 영주 부석사의 큰법당인 무량수전에 모셔졌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862년(철종 13) 대화재를 당한 대승사는 새로운 큰법당을 짓고 폐찰 상태로 방치되던 부석사에서 이 목각탱을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후 법등(法燈)이 다시 이어진 부석사에서 강력하게 반환을 요구했다. 결국 대승사는 목각탱을 돌려주지 않는 대신 부석사 조사당(祖師堂)의 수리비용을 대기로 합의한다.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의 영정을 모신 조사당은 고려시대 절집이다. 당시 두 절 사이에 오간 문서 4점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합의서에 해당하는 것이 완의(完議)다. 이 문서들은 1973년 목각아미타설법상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됐다. 하지만 목각설법상이 국보로 승격됨에 따라 지금은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관계문서’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대승사 동쪽 언덕의 총지암 마당에는 석탑의 부재들이 여러 무더기 쌓여 있다. 상당한 규모의 석탑으로 시대도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갈 듯하다. 옛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대승사가 삼국시대 창건설이 전하는 사찰의 이미지를 되찾는 데 적지 않은 몫을 할 수 있을 듯하다.●윤필암에 사면석불 배례할 수 있게 사불전 세워 사면석불은 대승사 뒤편으로 보이는 공덕산 줄기의 정상부에 있다. 하지만 대승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사면석불을 만나려면 산 너머 윤필암으로 가야 한다. 대승사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윤필암과 묘적암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사면석불을 가까이에서 대하고 싶다면 윤필암에서도 20~30분쯤 산을 올라야 한다. 오랜 세월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조각은 희미하다. 윤필암에는 산에 오르지 않고도 사면석불에 배례할 수 있도록 사불전(四佛殿)이 세워졌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처럼 사면석불 쪽을 향해 커다랗게 창을 낸 전각이다. ●마애불 옆 전설 속 미륵암은 흔적 없이 사라져 윤필암에서 묘적암으로 오르는 중간에는 높이 6.1m의 대승사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양촌 권근(1352~1409)은 ‘사불산 미륵암 중창기’에 마애불과 함께 미륵암의 존재를 언급해 놓았다. 마애불 곁의 신라시대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작은 절이 미륵암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지금 암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dcsuh@seoul.co.kr
  • 땅끝… 치유의 길 걷다

    땅끝… 치유의 길 걷다

    이 땅의 끝인 전남 해남. 그 끝자락에 산 하나가 불끈 솟았습니다. 달마산입니다. 산꼭대기에는 공룡의 등줄기를 닮은 수많은 암릉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습니다. 이 모습 덕에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립니다. 산의 높이라야 489m 정도에 불과하지만, 크기에 견줘 장엄하다는 인상을 갖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달마산 아래 달마고도가 최근 새로 조성됐습니다. 산자락 7~8부 능선을 따라가는 트레일입니다. 달마고도는 대체로 유순합니다. 일부 구간을 빼면 푹신한 흙을 밟으며 걷습니다. 그러니 산꼭대기의 암릉을 오르내리는 등산로가 ‘정복의 길’이라면 달마고도는 ‘치유의 길’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남도 금강산’ 달마산, 수많은 암릉들이 촘촘히 박혀 왜 달마산일까. 전해오는 옛이야기를 되짚어가면 불교의 남방도래설에 맥이 닿는다. 오래전 인도 우전국 왕자 금인(人)이 불교를 전하기 위해 땅끝을 찾았다. 사자포구에 내린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달마산이었다. 그는 이를 “1만명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형상”이라며 상찬했다. 현재의 이름은 중국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의 법명에서 따왔다. 미황사 주지인 금강 스님은 “동국여지승람, 미황사 상량문 등에 달마산이 ‘달마대사의 법신이 상주하는 산’이라고 적혀 있다”고 했다. 중국 송나라 때 사자포를 찾은 상인들이 배에 싣고 온 달마대사의 법신을 달마산에 묻었다는 게 이야기의 요지다. 여기서 법신은 육신만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달마대사가 입었던 가사, 썼던 발우, 몸에서 나온 사리 등을 뜻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무엇이 달마산에 깃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트레킹에 앞서 달마고도의 제원부터 살핀다. 전체 길이는 약 18㎞다. 완주하려면 예닐곱 시간은 족히 걸린다. 미황사를 기준으로 절반은 동남쪽, 절반은 서북쪽 산사면을 따라 조성됐다. 미황사 왼쪽으로 도는 구간이 대부분 새 길이고 오른쪽은 천년숲길 등 기존의 길이 군데군데 섞여 있다. 코스는 모두 4개다.달마고도는 건설 장비의 도움 없이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조성됐다. 곡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고, 지게를 져 돌 등의 자재를 날랐다. 매일 40여명의 인부가 동원돼 꼬박 250일 동안 작업을 벌였다. 금강 스님은 이 같은 조성 과정에 대해 “사람이 산에 깃들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정복의 욕망으로 달마산을 찾지 말고, 치유를 위해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니 “티베트 사람들이 수미산 꼬라(탑돌이)를 돌 듯 달마산을 한 바퀴 돌면 그 자체가 수행”일 터다. 달마고도는 좌우로 긴 타원형이다. 적당히 걷다 다른 경로로 돌아올 수 없는 구조다. 한 바퀴를 완주하거나 걸었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방법밖에 없다. 시간에 쫓기는 외지인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불리한 여건이다. 달마산 양쪽의 산사면을 잇는 지선 공사가 끝나면 상황이 다소 나아질 듯하다. 달마고도 4개 코스, 미황사~관음암~노지랑골~도솔암달마고도의 들머리는 미황사다. 창건 연대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오르는 고찰이다. 달마산의 암릉들을 병풍처럼 두르고 섰다. 대웅보전의 단청 빠진 공포와 배흘림의 늙은 기둥이 절집의 만만찮은 내력을 웅변하고 있다. 기둥을 떠받친 주춧돌엔 게와 거북이 새겨져 있다. 경상(불경과 불상)을 싣고 해남 사자포구(땅끝)에 닿은 인도 돌배 설화의 상징물이다. 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돌배가 오던 날, 의조 스님은 꿈을 꾼다. 스스로를 인도의 왕자라 밝힌 금인이 나타나 “소에 경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성상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돌배에서 나온 검은 소는 달마산 어귀에 이르자 한바탕 울음을 운 뒤 쓰러졌다. 그 자리에 들어선 절집이 미황사다. 달마고도 1코스는 미황사 일주문 옆에서 시작된다. 숲길과 임도를 따라 1㎞쯤 가면 거대한 너덜지대가 나온다. 달마산의 기암들이 허물어져 내린 흔적이다. 너덜지대 주변엔 나무가 없다. 사방이 트였다. 자연이 안배한 풍경전망대다. 달마고도를 통틀어 이런 너덜지대가 20여곳이나 된다. 칼날 같은 암봉 사이에 뿌리를 내린 몇 그루 단풍들의 자태도 곱다. 회색 바위를 배경 삼은 덕에 빛깔이 한층 더 도드라진다. 2코스 중간의 관음암터에 이르면 작은 못이 나온다. 온통 바위투성이인 산에서 만나는 연못이 퍽 이채롭다. 달마고도를 설계한 권경익씨는 “달마고도 주변에 절터와 연못이 각각 십여곳에 이른다”며 “이는 달마산의 생명력에 대한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달마산 동남쪽 사면, 그러니까 타원형 코스의 왼쪽 끝자락까지는 완도 쪽 풍경이 펼쳐진다. 반면 달마산 서북쪽 사면으로 돌아서면 진도 일대의 풍경이 눈에 담긴다. 3코스는 노지랑골 사거리부터 편백나무숲을 지나 몰고리재까지 연결된다. 4코스는 몰고리재에서 다시 미황사로 이어진다. 내년 1월부터는 주말마다 트레킹 가이드가 배치된다고 한다. 이들의 해설을 들으며 걷는 재미가 쏠쏠할 듯하다. 이정표는 코스 곳곳에 잘 세워진 편이다. 다만 1코스 중간의 삼거리엔 이정표가 없다. 삼거리에서 왼쪽은 송촌마을, 위쪽은 달마산 등산로다. 잘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달마고도는 가운데 길로 가야 한다. 아울러 이정표의 붉은 화살표는 등산로, 파란 화살표는 진행 방향, 검은 화살표는 하산 방향을 각각 표시한다. 안내도에 적혀 있지 않으니 꼭 기억해 둬야 한다.땅끝마을, 힘차고 아름다운 해돋이 4코스에 도솔암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다. 달마산 암릉 꼭대기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암자다. 달마고도 노선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풍경의 보고인 만큼 빼놓지 말고 돌아보길 권한다. 차로도 도솔암 근처까지 갈 수 있다. 달마고도를 내처 걸은 뒤에 느긋하게 찾아도 좋겠다. 도솔암에 올라서면 땅끝과 다도해가 주르륵 펼쳐진다. 달마산의 장대한 암릉들도 눈에 담을 수 있다. 땅끝마을은 당연히 찾아야 할 해남의 아이콘이다. 땅의 끝에서 맞는 해넘이 풍경도 곱지만, 그보다 해돋이 장면이 더 힘차고 아름답다. 땅끝마을 뒤는 사자봉이다. 정상에 세워진 전망대까지 모노레일을 타고 오를 수 있다. 전망대 주변에 땅끝탑과 산책로 등이 조성돼 있다. 송지면 엄남리 해안에서 땅끝마을을 거쳐 사구리 해안까지 가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중 하나다. 드라이브 코스 주변에 송호해변, 땅끝관광지, 사구미해변, 땅끝조각공원 등 명소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한 곳만 더 덧붙이자. 최근 두륜산 대흥사를 찾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 현직 대통령이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공간이 있어서다. 하지만 해당 선원은 현재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다. 스님들의 동안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내년 1월 중순쯤 동안거가 해제되면 다시 열린다. 글 사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도솔암 주차장은 송지면 마봉리에서 도솔암 이정표를 따라 3㎞ 정도 오르면 나온다. 주차장에서 도솔암까지는 800m 정도. 잰걸음으로 15분 정도 걸린다. 미황사(533-3521) 대웅전이 전면 보수 공사에 들어간다. 시작 시점은 조만간 정해질 예정이다. 해남까지 내려가서 고풍스러운 미황사 대웅전을 못 본다는 건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달마고도를 걸어 볼 계획이라면 서두르는 게 좋겠다. →맛집:해남 읍내 천일식당(536-4001)은 80년을 이어온 떡갈비로 소문난 집이다. 땅끝회관(536-3366) 진일관(532-9932) 등은 한정식으로 이름났다. 이학식당(532-0203)은 삼치회로 입소문 난 집이다. 송촌마을 입구의 매화식당(536-9595)은 소박한 백반집이다. →잘 곳:유선장여관(534-2959)은 고풍스러운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대흥사 들머리에 있다. 땅끝비치(534-1002)는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굿스테이 업소다. 땅끝마을 언덕에 있다.
  • 한국·스리랑카 정상 조계사서 첫 만남

    한국·스리랑카 정상 조계사서 첫 만남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스리랑카 대통령이 수교 40주년을 맞아 28일 국빈 방한했다. 현 정부 들어 외국 정상의 국빈 방한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샵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다.시리세나 대통령은 민항기 편으로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 2박 3일 일정에 돌입했다. 스리랑카 정상이 방한한 것은 2012년에 이어 5년 만이다. 시리세나 대통령은 다섯 번째 방한이다. 시리세나 대통령은 첫 일정으로 조계사를 방문해 먼저 와 있던 문재인 대통령과 만났다. 두 정상은 대웅전을 참배하고,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최근 취임한 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과 환담을 나눴다. 설정 스님과 두 정상은 평화와 행복, 평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고 배석자들이 전했다. 대웅전 앞 사리탑이 1917년 스리랑카에서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환담이 끝난 뒤 시리세나 대통령은 진신사리탑을 친견했다. 인구의 70%가 불교를 믿는 스리랑카는 한국과 1000년 넘게 불교 교류를 이어 왔다. 시리세나 대통령은 29일 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스리랑카에 대한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약정금액을 3억 달러에서 5억 달러로 증액하는 내용의 양해각서 등에도 서명하게 된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서울포토] 조계사 스님들과 마주앉은 한-스리랑카 정상

    [서울포토] 조계사 스님들과 마주앉은 한-스리랑카 정상

    28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이 국빈 방한한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스리랑카 대통령과 조계사에서 첫 만남을 가지고 있다. 양국 정상은 대웅전을 참배하고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최근 취임한 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을 예방해 환담을 나눴다. 청와대 제공
  • [서울포토] 조계사 방문한 한-스리랑카 정상…설정 스님과 기념촬영

    [서울포토] 조계사 방문한 한-스리랑카 정상…설정 스님과 기념촬영

    28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이 국빈 방한한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스리랑카 대통령과 조계사에서 첫 만남을 가지고 있다. 양국 정상은 대웅전을 참배하고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최근 취임한 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을 예방해 환담을 나눴다. 청와대 제공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김시습이 눌러앉고 싶다던 청평사… 맑은 기운에 근심 사라지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김시습이 눌러앉고 싶다던 청평사… 맑은 기운에 근심 사라지네

    춘천 시내에서 청평사(淸平寺)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시내를 남서쪽에서 동북쪽으로 휘돌아 나가는 46번 국도를 타고 소양6교를 건너고 배후령터널을 지난 다음 간척사거리에서 우회전해 배치를 넘는 자동찻길이 있다. 배후령에는 터널에 생겼다지만, 배치는 옛날 한계령보다 더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것 같다. 이 오봉산길의 막다른 골목이 소양호가 내려다보이는 청평리다.춘천 시내에서 멀지 않은 소양강댐 배터에서 유람선을 타는 방법도 있다. 청평사가 없었다면 소양호 유람선은 무척 심심한 뱃길이었을 것이다. 댐 건설 이전의 46번 국도는 수몰된 소양강길을 따라 양구로 이어졌었다고 한다. 46번 국도는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인천역(驛)에서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을 잇는다. 수수부꾸미와 산채비빔밥, 그리고 소양호 빙어튀김이 유혹하는 사하촌(寺下村)에서 청평사까지는 2㎞ 남짓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관광객이라면 부담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산길에 접어들면 청정한 기운에 몸과 마음이 모두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옛사람들은 이 계곡을 하나의 커다란 정원으로 인식했던 듯하다. 자연의 조화에 군데군데 인공(人工)를 더해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조경사(造景史)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청평사에 애착을 갖는 이유다. 평탄한 오리(五里) 산길을 기분 좋게 걷다 보면,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 아래 여러 단의 석축을 쌓아 조성한 청평사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상당히 복원이 이루어져 제법 규모 있는 절집처럼 보인다. 한때는 221칸에 이르렀다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회전문(廻轉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이념이 낳은 상처 때문이었다.청평사의 초기 역사는 1130년(인종 8년)과 1320년(충숙왕 14) 각각 세워진 청평산 문수원기(文殊院記) 비석과 청평산 문수사 장경비(文殊寺 藏經碑)의 비문이 탑본으로 전해지고 있어 알 수 있다. 문수원기에 따르면 청평사는 영현선사가 973년(광종 24) 백암선원(白巖禪院)으로 창건하고, 이의가 1069년(문종 23) 보현원(普賢院)으로 중창한 데 이어 아들 이자현이 1078년(문종 32) 문수원(文殊院)으로 삼창했다. 이의의 아버지, 곧 이자현의 할아버지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비로 만든 당대 권신(權臣)이었다. 승려가 아닌 이의와 이자현이 중창을 주도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불교국가 고려에서 세도가(勢道家)가 사찰을 세우거나 중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의의 보현원 중창을 집안의 원찰(願刹)은 물론 별서(別墅)를 확보하는 차원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자현의 문수원 삼창 역시 원찰과 별서의 위상을 높이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장경비의 존재는 이전 어느 시기 절 이름이 문수사로 바뀌었음을 알려 준다. 장경비는 원나라 왕후가 보내 준 불서(佛書)를 절에 보관한 내력을 담았다. 청평산이라는 이름은 이자현이 은거하자 도적과 호랑이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청평이란 곡절이 없어 근심이 없는 경지를 가리킨다.이후 청평사로 이름을 고친 것은 조선 명종시대 불교 부흥에 힘쓴 보우(普雨)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청평사지’(淸平寺誌)에도 ‘보우가 1557년 ‘경운산만수성청평선사’(慶雲山萬壽聖淸平禪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회전문에는 이렇게 쓴 현판이 걸려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진도 남아 있다. 하지만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오래전에 ‘청평사’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띠풀 베어 초가 짓고 높은 곳에 살고지고, 이제부터 다시는 이곳 떠나지 않으리’라고 노래했다. 그는 청평산 아래 세향원(細香院)을 짓고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시대가 더 앞서는 여말선초의 문인 원천석(1330~?)의 ‘운곡시사’(耘谷詩史)에도 ‘청평사’라는 시가 실려 있다. 운곡이 춘천 일대를 여행한 때는 1368년이다. 청평사가 이고 있는 산은 오늘날 오봉산(五峰山)이라 부른다. 기기묘묘하게 솟은 봉우리가 다섯 개로 보인다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경운산이라는 옛 이름은 지금 오봉산의 옆 봉우리가 차지하고 있다. 반면 청평산이라는 이름은 간 데가 없다. 이 산은 산림청의 ‘한국의 100대 명산’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청평사의 대표 문화유산은 아무래도 회전문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름이 주는 호기심도 한몫을 한다. 회전문은 금강문이나 천왕문처럼 불법(佛法) 수호자를 봉안하는 전각이라고 한다. 윤장대(輪藏臺)의 존재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학계는 본다. 계곡 장유(1587~1638)의 시에는 ‘진락선옹(眞禪翁) 한번 떠나 돌아올 줄 모르고/ 암자 앞엔 전경대(轉經臺)만 외로이 남았구나’ 하는 대목이 있다. 청평사에 전경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락공(眞公)은 이자현의 시호다. 전경대, 곧 윤장대는 돌릴 수 있게 만든 팔각형 불구(佛具)다. 불경을 넣어 돌릴 때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겼다는 상징성을 부여한다. 예천 용문사에는 회전문과 짝을 이룬 윤장대를 볼 수 있다. 용문사 회전문은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윤장대는 대장전(大藏殿) 내부에 있다.회전문 앞마당에 좌우로 놓여 있는 비석의 받침돌도 눈여겨봐야 한다. 바로 문수원기비와 장경비의 흔적이다. 문수원기비는 김부의와 혜소국사가 앞뒷면 글을 짓고 탄연이 글씨를 썼다. 김부의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우이고, 혜소는 대각국사의 제자다. 탄연은 서거정이 ‘김생 다음간다’고 했던 명필이다. 장경비는 앞뒷면 글은 이제현과 성징이 짓고 이암이 썼다. 이제현은 ‘익제난고’와 ‘역옹패설’로 널리 알려진 고려 후기 문인이다. 성징은 원나라 승려라고 한다. 이암 역시 ‘동국의 조맹부’라는 평가를 받은 명필이다. 문수원기와 장경비는 탄연과 이암의 글씨로 유일하게 남아 있다. 문수원기비는 일제강점기에도 손상되기는 했어도 상당 부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14년 대웅전에 옮긴 비석은 6·25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완전히 조각나고 말았다. 이후 1968년과 1985년 발굴조사에서 비편의 상당 부분이 수습됐다. 청음 김상헌은 청평사를 찾은 1635년 ‘동쪽에 장경비가 있고, 서쪽에 문수원기가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약헌 서종화(1700~1748)는 ‘청평산기’(淸平山記)에서 ‘문수원기’를 언급하면서 ‘서쪽 뜨락에 파손되어 읽을 수 없는 비석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장경비’는 이제 받침돌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문수원기비는 2008년 복원되어 옛 비석 받침돌 바로 곁에 세워졌다. 장경비도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문수원기비 내용은 문헌에도 보이고 남아 있는 탑본이 적지 않음에도 읽지 못하는 글자도 있어 복원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장경비는 앞면의 경우 그런대로 자료가 남아 있지만, 뒷면은 문장을 재구성하기조차 어려운 상태로 알려진다. 그러니 소박하지만 옛 비석의 받침돌이 오히려 역사의 진정성을 보여 주는 청평사의 유산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7일 더 주어져” 수험생들 다시 열공모드…대치동 학원가 ‘일주일 70만원 특강’도

    “7일 더 주어져” 수험생들 다시 열공모드…대치동 학원가 ‘일주일 70만원 특강’도

    “추가 시간 7일이 더 주어졌네요. 연장전(재수) 가기 전에 확실히 승기를 잡겠습니다.”●학부모들 백일기도도 일주일 더 고3 수험생들은 16일 수능 일주일 연기로 인한 혼란한 상황을 추스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너도나도 23일을 목표로 다시 ‘열공모드’에 돌입했다.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에서 만난 수험생 이모(18)군은 “극도의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다소 혼란했지만 오늘보다 23일에 몸 컨디션이 더 좋을 것이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다”면서 “흐름을 이어 가기 위해 평소와 똑같이 아침 7시 30분에 공부하러 나왔다”고 말했다. 조모(18)군은 “수능 연기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시험 하루 전날 밤에 연기를 할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트렸지만, 어차피 수능 연기는 실화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수험생 “생리까지 조절했는데…” 수험생 자녀를 위한 부모님들의 백일기도도 일주일 연장됐다. 이날 종로구 조계사에는 고3 수험생의 부모들이 평소 때와 똑같이 200~300명이 몰렸다. 수능 당일 하기로 돼 있었던 기도는 일주일 뒤로 연기됐다. 대웅전에서 수험생 딸이 수능을 잘 보게 해달라며 기도를 한 탁모(49)씨는 “딸아이가 생리까지 조절해 가며 16일에 몸 상태를 최상으로 다 맞췄는데…”라면서 “저보단 아이가 더 힘들죠”라고 안타까워했다.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는 이날 수험생과 학부모의 수강 문의 전화로 몸살을 앓았다. 대치동의 한 종합학원 상담실장은 “아침부터 전화통에 불이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면서 “기존에 학원을 다니던 학생들에게 자습 환경을 확보했으니 학원으로 오라는 단체 문자를 보냈다”고 말했다. ●버린 수능책 찾아 학원 일대 혼란 일부 학원들은 일주일 특강을 개설하고 발 빠르게 대응했다. 대치동의 한 단과학원은 하루 4시간 수업에 10만원씩 하는 특강을 열었다. 수능 전까지 매일 수업을 들으면 70만원의 수강료를 내야 한다. 5명을 1개 그룹으로 매일 2시간 30분(10만원)씩 문제풀이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는 학원도 생겨났다. 재수생 박모(19)군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원도 이런 수능 연기 사태가 처음 접해 보는 상황이어서 ‘급조된 강의’가 난무하는 것 같다”면서 “남은 일주일 동안 수업을 들어야 할지, 혼자 공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날 수능 연기 소식이 전해지기 전 공부했던 책을 모두 버렸던 수험생들이 자신의 책을 다시 ‘발굴’하기 위한 소동도 벌어졌다. 서울 중구의 한 재수학원 옥상에서는 수강생들이 자신이 버린 수험 서적을 되찾으려고 몰려들어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재수생 이모(19)양은 “다 끝났다는 마음으로 책을 모두 버렸었는데 이렇게 다시 찾으러 오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다시 책을 살 수도 없고, 이미 좋은 책은 다른 학생들이 다 가져가 버려서 볼 책이 없다”고 했다. 김기한 메가스터디 학원사업본부장은 “남은 일주일 동안 얼마나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수능 결과를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혜리 기자 hyerily@seoul.co.kr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깨달음도 덧없어라… 죽은 영혼 달래 주던 야외 법당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깨달음도 덧없어라… 죽은 영혼 달래 주던 야외 법당

    충남 서산 개심사(開心寺)는 아름다운 것으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절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절집이 일으키는 상승작용이 이런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개심사는 이른바 산지중정형(山地中庭型) 사찰이다. 산 중턱 경사지에 큰법당을 비롯한 4개의 절집이 정사각형 마당을 감싸고 있다. 조선 후기를 특징짓는 가람 배치라 할 수 있다.개심사 사적기(事蹟記)에는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가 창건하고 개원사(開元寺)라 했다’고 적혀 있다. 진덕여왕 5년은 651년이고, 의자왕 14년은 654년이다. 게다가 불교사에 이름을 남긴 혜감국사(1249~1319)는 고려시대 고승(高僧)이다. 사적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창건 시기는 미궁에 빠져든다. 사적기는 양면 괘지에 만년필로 썼으니 근년에 옮겨 적고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고려 국가기관이 보수할 만큼 가치 있던 사찰 그런데 2004년 개심사 대웅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腹藏)에서 ‘1280년(고려 충렬왕 6년) 승재색(僧齋色)이 보수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발견됐다. 승재색은 불경 간행과 같은 불사(佛事)를 위해 특별히 설립된 국가기관이었다. 복장이란 불상의 내부에 모신 불경 같은 상징물을 이른다. 보수에 나서야 할 정도였다면 불상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국가기관이 보수에 나섰다는 것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개심사지만 그저 한적한 시골 사찰이 아니었음을 알려 준다.사적기는 이어 1350년(충정왕 2년) 처능대사가 대웅전과 기타 전당(殿堂) 그리고 요사(寮舍) 일체를 중건하고 개심사로 개칭했음을 알리고 있다. 이 내용은 그런대로 믿을 만하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큰법당인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오층짜리 석탑은 백제시대 석탑의 전형이지만, 개심사 것에서 백제 특유의 미감(美感)은 느껴지지 않는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처능대사가 이 석탑도 세운 것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처능대사의 중창이란 몽골의 침입이나 왜구의 발호로 훼손되거나 폐허화했던 절의 면모를 일신한 불사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1231년(고종 18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몽골 침입기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타는 등 많은 사찰이 피해를 입었다.●고려 처능대사 개원사→개심사 개칭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세력을 키운 왜구가 한반도 전체를 위협했는데, 충청도 서해안 지역은 그 피해가 더욱 심각했다. 같은 서산의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좌상 역시 이 시기 왜구가 약탈해 일본에 가져간 것으로 부석사 측은 보고 있다. 일본 쓰시마의 한 절에서 도둑이 훔쳐 다시 들여온 부석사 관세음좌상은 지금 그 소유권을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개심사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 1475년(조선 성종 6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김서형이 훈련을 한다며 군졸을 징발해 사냥을 하다 산불을 내는 바람에 금산(禁山)의 소나무는 물론 개심사까지 태운 것이다. 지금의 대웅전과 심검당은 이 때문에 다시 지은 것이다. 요사채인 심검당은 1962년 해체 수리 과정에서 1477년 세 번째로 중창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개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구부러진 나무를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 기둥으로 삼은 것으로 유명한 심검당의 부엌은 후대에 이어 붙인 것이라고 한다. 스님의 생활공간에 이어 예배공간인 대웅전은 1484년 지었다. 지금 개심사는 중생의 극락왕생 소원을 들어주는 정토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누각이 안양루(安養樓)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것도 그렇다. 안양이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절의 큰법당은 보통 극락전이나 무량수전이라고 이름 짓는다. 그런데 개심사 큰법당은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곡절이 있을 듯싶다. 개심사 들머리의 돌계단을 기분 좋게 오르다 조금 숨이 찰 때쯤 오른쪽으로 안양루가 나타난다. 그 바깥에는 큰 글씨의 전서체로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해강 김규진(1868~1933)의 글씨라고 한다. 큼직큼직하면서 모나지 않은 해강의 글씨는 개심사의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린다. 충청남도 서쪽에 남북으로 자리잡은 산줄기가 가야산이다. 이 산 서쪽에는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불과 보원사 터, 산 동쪽에는 가야사 터가 있다. 둘 다 역사가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큰 절이었다. 개심사는 가야산의 서남쪽 기슭에 해당한다. 개심사가 이고 있는 산봉우리는 별도로 상왕산이라고도 한다. 코끼리는 부처를 상징한다. 부처는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에서 멀지 않은 시사가야에서 1000명의 비구에게 설법을 했다. 시사가야가 가야산이다. 가야산은 상두산(象頭山)이라고도 부른다. 상두산은 상왕산과 같은 뜻이다. 그러니 가야산이 곧 상왕산이다. 이런 상징성을 부여한 산에 지은 절이니 초창 시절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양란 거치면서 정토사찰로 성격 변화한 듯 그런데 서산 지역에 외적의 침입이 이어지면서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중생의 신앙 형태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깨달음보다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극락왕생과 남겨진 가족을 위로하는 기능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이것이 개심사가 정토사찰로 성격을 바꾼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 큰법당의 이름은 대웅전을 유지해 상왕산의 상징성도 이어 갈 수 있었다. 개심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정토사찰의 성격을 더욱 강화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사적기에는 1613년(광해군 5년) 대웅전 이후 각 전각과 요사를 중수하고 시왕전(十王殿)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왕전은 명부전의 다른 이름이다. 1941년 대웅전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묵서명에는 1644년(인조 22년) 중창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1889년 작성된 개심사 중창 수리기에는 명부전을 1646년(인조 24년) 신축했다고 적혀 있다. 연도가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양란(兩亂)이 중수의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안양루와 무량수각을 새로 지어 중정형 구조를 완성한 것도 이때일 것이다. 중정형 사찰에서 마당이 갖는 의미는 크다. 많은 신도가 참여한 가운데 법회를 열 수 있는 야외 법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야외 법회에 내걸 대형 불화(佛畵)도 필요해졌다. 괘불(掛佛)이다. 괘불은 우리나라에만 있다. 학계는 이 걸개그림의 발생을 임진왜란·병자호란과 직접 연결 짓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어 좁은 법당에서는 고혼(孤魂)을 위로하는 법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넓은 마당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걸맞은 크기의 탱화도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개심사에 있는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은 1772년(영조 48년)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영산회괘불탱 이전에도 이 절에는 당연히 다른 괘불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대웅보전 앞에는 깨져서 쓰지 못하는 옛 괘불대가 남아 있다. 동남쪽에 외따로 지어진 명부전 역시 양난의 비극이 낳은 법당일 것이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의 권능을 빌어 죽은 이의 넋이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가진 전각이다. 개심사가 가진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이런 사연도 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광주시, 수어장대 등 道문화재 주변 역사문화환경 건축 규제 완화

    광주시, 수어장대 등 道문화재 주변 역사문화환경 건축 규제 완화

    경기 광주지역 문화재 주변의 건축규제가 완화된다. 광주시는 경기도 문화재위원회가 지난 달 심의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수어장대 등 관내 문화재 18개소에 대한 건축행위 허용기준을 조정, 확정·고시했다고 8일 밝혔다. 이번 심의는 경기도 지정 문화재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내 건축행위 등에 관한 허용기준을 조정하기 위해 개최됐으며 허용기준 조정으로 규제가 완화됐다. 건축규제 완화 대상 문화재는 수어장대, 숭열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망월사지, 지수당, 장경사 대웅전, 개원사지 등 남한산성 내 문화재를 비롯해 유정리 석불좌상, 맹사성 선생 묘, 최항 선생 묘, 허난설헌 묘, 신흠 묘역과 신도비, 의안대군 방석 묘, 추곡리 백련암부도, 곤지암 바위 등 18개소이다. 이에 따라 18개소 문화재 주변 반경 300m 이내에서 건축물을 신·증축할 때 허용기준 이내에 속한 건축물의 경우 시와 협의해 즉시처리가 가능해졌으며 높이규제도 완화된다. 시 관계자는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내 건축행위 등에 관한 허용기준 재조정안은 개별 문화재 유형과 현지여건 등의 변화를 적극 고려해 조화로운 역사문화환경 조성에 일조할 것”이라며 “기존의 허용 기준안에 비해 규제사항이 대폭 완화돼 사유 재산권 보호는 물론 복잡한 인허가 절차가 해소되고 건축과정에서 주민편의가 증대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간절한 수능 기도

    간절한 수능 기도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열흘 앞둔 6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에서 수험생 가족을 둔 불자가 수험생의 사진과 염주를 두고 합장하고 있다. 2018학년도 수능은 오는 16일 치러지고 점수는 다음달 6일 발표된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불교를 불교답게 만들어 국민 신뢰 회복”

    “불교를 불교답게 만들어 국민 신뢰 회복”

    “대탕평 정책으로 대화합 이룰 것” 대통령 서면축사·1만여명 참석 조계종 제35대 총무원장 설정 스님의 취임 법회가 1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일원에서 신도와 종교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조계사 대웅전과 인근 우정국로 특설무대에서 진행된 법회는 반야심경 봉독과 종정 진제 스님 법어, 설정 스님 취임사, 정·관계 인사들의 축사로 진행됐다.설정 스님은 취임사를 통해 “수행 가풍과 승풍을 진작해 불교를 불교답게 만들고 종단의 사회적 역량을 강화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노력할 것”이라며 “바쁜 일정을 핑계로 출가 수행자 본분을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선거 과정에서 반대 기류가 적지 않았던 점을 의식한 듯 “지난 선거 과정에서 저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모든 것이 제 부덕과 불찰”이라며 “대화합을 이루기 위해 선거 문화를 개선하고 대탕평 정책을 펼쳐 종도들이 환희작약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서면으로 보낸 축사에서 “불교는 우리 민족과 희로애락을 같이해 왔고, 국민은 불교에서 지혜와 위안을 얻었다”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올바름을 실천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 뭇 생명과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자비행의 불교 정신은 나라다운 나라로 가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설정 스님은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의 선맥을 이어받아 평생을 수행에 전념하신 선승”이라며 “총무원장 스님께서 쌓아 오신 높고 두터운 경륜이 한국 불교계가 더욱 화합하고 융성하는 토대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날 종교계에서는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를 비롯해 원불교 한은숙 교정원장, 천도교 이정희 교령, 한국이슬람중앙회 이주화 이맘, 한국민족종교협의회 박우균 회장 등이 참석했다. 김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직을 시작하시며 서로 다른 종교인들의 우정 어린 대화의 필요성을 재천명하셨다”며 “우리 사회와 민족을 위해 모든 종교인이 협력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설정 스님께서 큰 역할을 하시길 기대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설정 스님은 수덕사에서 혜원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1994~1998년 제11대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을 맡았다. 2009년 덕숭총림 수덕사 제4대 방장으로 추대됐으며 지난달 12일 선거인단 319명 가운데 234표를 얻어 임기 4년의 총무원장에 당선됐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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