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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감 후] 한국 과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유용하 사회정책부 차장

    [마감 후] 한국 과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유용하 사회정책부 차장

    일을 막 시작하려고 할 때 옆에서 감 놔라, 배 놔라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하고 싶던 일도 내팽개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발선에 선 사람에게는 마음에 없더라도 격려와 덕담으로 출발을 독려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종국엔 우스꽝스러운 옷매무새로 비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인 것처럼 일에서도 시작이 중요하다. 시작이 잘못되면 한참 지난 뒤 ‘이 산이 아닌가’라며 머리를 쥐어뜯는 상황을 맞게 된다. ‘축적의 시간’이란 화두로 유명한 이정동 서울대 교수가 과학기술의 창조적 혁신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최초의 질문’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잘못된 문제의식은 예상치 못한 파국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차원에서 이제 막 출발한 새 정부 과학기술 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방정맞게도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을 참을 수 없다. 새 정부는 대선 기간부터 과학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붙어다녔다. 얼마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공개한 새 정부 국정 과제에서도 과학기술 분야는 이전 정부들 정책의 문패만 바꿔 단 수준이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항공우주청 설립’뿐이지만 이마저도 엄밀히 따지면 과학기술 정책이 아닌 지역 발전 공약이다. 우주청 설립이 진정으로 한국 우주과학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모델로 삼고 있는 우주 선진국들처럼 본부는 수도에 설치하고 산하 연구소들을 특성에 맞춰 지역에 배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미국 항공우주청(NASA)도 본부는 워싱턴DC에 두고 20개 산하 연구기관을 각 지역에 설치해 우주과학과 지역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 유럽 우주청은 프랑스 파리, 러시아 연방우주국은 모스크바, 중국 국가항천국은 베이징, 일본 항공우주개발기구는 도쿄에 본부를 두고 있다. 지역 불균형이 문제라면 지방자치단체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야지 새로운 기관을 신설하거나 이전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혁신도시들의 실패 사례에서 배우지 못한 것인가. 과학계도 이런 상황에서 면책될 수 없다. 우주청 설립 논의 과정에서 과학계는 필요성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나 설립 후 운영 방안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자체들의 우주청 유치에 대한 논리나 제공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퇴화하는 기억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과학기자로 활동한 18년 동안 한국 과학계가 과학 발전을 위한 정책 대안을 얼마나 진심으로 고민하고 제안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과학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경제발전 수단이나 정치인들의 허울 좋은 구호로만 활용되는 한국에서 매년 노벨상을 기대하고 과학 선진국을 말하는 모습은 헛웃음만 나게 한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게임 체인저’, ‘추월자’ 마인드를 외치면서 여전히 선진국을 뒤쫓는 ‘추격자’ 마인드가 만연해 있다. 굳이 과학에 관심 있는 척하느니 이참에 존재감 없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해체해 재조직하고, 과학 선진국들처럼 ‘지원하지만 간섭하지 않는’ 방향으로 과학정책을 대전환하는 것은 어떨지 새 정부에 제안하고 싶다.
  • 황량했던 고향 폐교… 10년 만에 고창 으뜸 ‘책 창작공간’ 변신

    황량했던 고향 폐교… 10년 만에 고창 으뜸 ‘책 창작공간’ 변신

    황량했던 폐교가 10년 만에 아이와 작가들이 모이는 창작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고향으로 돌아와 폐교를 문화체험공간 ‘책마을해리’로 만드는 마법을 부린 이대건(51)씨를 만나 책으로 지역을 소생시키는 방법을 들어 보았다. 도서관으로 시작해 책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공간으로 변모한 ‘책마을해리’는 이제 대안학교를 꿈꾸고 있다. 수도권에서 책 편집자로 20년 이상 일했던 이씨는 스스로를 ‘책마을해리’의 해리포터 촌장이라고 소개한다. 그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해리면에 자리잡은 체험학습장 ‘책마을해리’의 주소에다 마법사인 소설 주인공 이름을 덧붙인 것으로 이씨의 편집 감각이 살아 있는 작명이다. 나무집 도서관, 부엉이 도서관이 자리잡은 책마을해리의 운동장에 겨울이면 소담스러운 눈이 쌓이고, 여름이면 푸릇한 풀이 빛난다. 책과 디저트를 파는 카페공간에는 장작불에 군고구마가 익고 삽살개 구름이가 난로 옆에 순하게 앉아 있다. 이씨가 폐교를 10년간 4000여명의 사람이 모여 400여종의 책을 만들어 낸 ‘책마을해리’로 탈바꿈시킨 것은 해리포터의 마법과도 같은 힘이었다. 책마을해리는 이씨의 할아버지가 1936년 세웠던 광승간이학교에서 나성국민학교, 나성분교를 거쳐 2001년 폐교가 된 공간에 자리잡았다. 책 만드는 놀이터, 마을학교로 시작해 시인학교, 만화학교로 확장했으며 2017년부터는 책영화제도 열고 있다. 오로지 책만 읽는 공간인 책감옥,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시, 1500년 역사의 고창한지를 체험하는 공방, 책을 읽으며 쉬어 갈 수 있는 북스테이 등 책과 연결된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확장을 보여 주는 곳이 책마을해리다. 할아버지가 세웠던 학교가 도축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이씨는 폐교를 사들여 2012년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났지만 영원히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지역을 건강하게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책마을해리가 고창의 보물로 자리잡게 된 데는 어르신 마을학교 ‘밭 매다 딴짓거리’가 큰 도움이 됐다. 한글을 읽거나 쓰는 데 서툰 할머니들이 마을학교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우리 곧 죽어. 뭐 하라고 하지 마”라고 하던 80대 할머니들도 청년과 다를 바 없는 성취감에 학교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나이가 들면 감정도 무뎌지는 줄만 알았던 할머니들에게 시샘과 질투, 수줍음은 남아 있었다. 글씨를 배우며 드러나는 실력 차이 때문에 할머니들 사이에서 감정이 상하는 일이 벌어지자 마을학교는 주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으로 바뀌었다. 마을학교를 졸업하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그림 전시회도 책마을해리에서 열리고 있다. ‘인문학 마을, 도서관 도시’가 관청에서 하는 정책이라면 이씨가 하는 일은 책을 매개로 작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키워 가는 것이다. 마을회관 가는 길에 있는 폐교 앞을 지나며 무서워했던 할머니들은 이제 마을을 지켜 줘서 고맙다며 이씨의 손을 잡는다.오로지 책과 마을만을 생각하며 책마을해리를 키워 온 이씨의 ‘마법’은 2019년 사회혁신가들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아쇼카 펠로우’로 선정되며 인정받았다. 아쇼카 펠로우는 1980년 미국에서 사회혁신기업가들에게 상금을 주면서 시작됐고 한국인은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등 15명이 선정됐다. 노벨상 상금보다는 적지만 펠로우가 되면 3년간 평균 1억 5000만원을 맘껏 쓸 수 있다. 책마을해리는 작은 민간단체가 대기업과 함께 크는 사례이기도 하다. 책마을과 차로 10분 떨어진 곳에는 2016년 매일유업에서 문을 연 상하농원이 있다. 농촌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는 ‘6차 산업’의 성공 모델로 꼽히는 상하농원은 대기업에서 만든 농업 체험공간으로 책마을해리와 규모 면에서는 비교되지 않는다. 하지만 책마을해리에서 출판한 그림책과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 등을 상하농원에서 열어 상생하고 있다. 이씨는 “지방에서 가능성을 찾을 때는 사람을 먼저 보고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아마섬은 소멸 위기의 섬에 청년들이 찾아가 기업을 만들고 마을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살린 모델로 유명한 곳이다. 아마섬은 도시에서 ‘바보 젊은이’들을 불러모아 지역을 살려냈다. 이씨 역시 스스로 바보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10년간 고창에서 책마을해리를 일궜다고 자평했다.
  • 신선함 잃은 유럽 문학 대신 세계 울린 탈식민주의 문법

    신선함 잃은 유럽 문학 대신 세계 울린 탈식민주의 문법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탄자니아 출신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3)가 선정되면서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아프리카나 중남미 등 제3세계 탈식민주의 문학에도 관심이 쏠린다. 그동안 서구 문학에 밀려 변방으로 취급받았지만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해 통찰력 있는 작품이 많아 예의주시할 만하다는 평가가 나온다.2018년 대안 노벨상으로 불린 ‘뉴아카데미’ 상을 받은 마리즈 콩데(84) 작가의 에세이 ‘울고 웃는 마음’(1999)이 최근 문학동네에서 나왔다.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과들루프섬 출신인 콩데는 흑인이자 여성, 식민지인으로 유년기에 겪었던 인종·계급·성별 간 격차의 문제를 조명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다. 다음달엔 콩데가 2017년에 낸 장편소설 ‘이반과 이바나의 경이롭고 슬픈 운명’(문학동네)도 독자를 만난다. 과들루프의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성향이 달라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주인공 남매를 통해 작가는 인종차별, 식민지화,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본질을 되묻는다. 앞서 콩데는 소설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2019년 번역·은행나무)에서 17세기 말 마녀로 몰렸던 미국의 흑인 여성 노예 티투바의 삶을 통해 인간적 연대와 공감의 희망을 보여 줬다.은행나무는 최근 나이지리아의 젊은 천재 작가로 주목받는 치고지에 오비오마(35)의 장편소설 ‘어부들’(2015)을 펴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데뷔소설상 등 5개 문학상을 받은 이 책은 출입이 금지된 저주받은 강에서 낚시하던 벤저민과 형제들이 마을 광인의 예언을 듣고 파멸하는 과정을 그렸다. 1990년대 중반 나이지리아의 빈곤과 혼란한 사회상을 담아 사소한 믿음에서 비롯된 균열이 어떻게 거대한 비극으로 점화되는지를 보여 줬다. 2019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오비오마의 또 다른 소설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은행나무)는 사랑에 빠진 젊은이가 연인과 미래를 함께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내용을 다뤘다. 소수자들의 고난 서사를 신적인 존재의 연민 어린 목소리로 들려줬다는 평가를 받았다.구르나에 앞서 아프리카 출신 노벨문학상 후보 1순위로 거론된 케냐의 거장 응구기 와 티옹오(83)의 작품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케냐 근현대사를 다룬 대표작 ‘한 톨의 밀알’(은행나무)은 독립을 앞둔 식민지인들의 복합적 심리를 묘사해 서구인의 제국주의적 사고와 케냐 기득권층의 민중 억압을 꼬집는다. ‘십자가 위의 악마’(창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케냐 사회의 모순을 여성 주인공의 시각에서 풀어냈다. 이 밖에 민음사는 영국 식민지 트리니다드섬에서 인도계 이주민 3세로 태어난 2001년 노벨상 수상자 비디아다르 수라지프라사드 나이폴(1932~2018)의 소설집 ‘자유 국가에서’를 펴냈다. 1971년 부커상 수상작인 이 책은 식민지를 둘러싼 다양한 방랑자들의 굴곡진 삶을 제시하며 정체성을 둘러싼 이방인의 고뇌를 다룬다. 아프리카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석호 카이스트 연구교수는 “제3세계 문학은 식민지 잔재를 소재로 하지만 과거사에 대한 분노와 저항에 그치지 않고 인종, 성차별, 환경문제 등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 21세기에도 유효한 시대정신을 담았다”며 “세계를 주도하던 유럽 문학이 최근 신선함을 보여 주지 못하는 반면 3세계 문학은 지구촌 전체의 관점에서 영향력 있는 문학으로 발돋움하고 있어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왕은철 전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도 “영문학에서도 남아공, 케냐처럼 과거 식민지 출신 작가들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며 “한국처럼 식민통치에 대한 후유증이 남아 있는 국가에선 인종, 종교, 난민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다룬 탈식민주의 문학이 유효한 가치를 갖는다”고 했다.
  • 구르나 노벨상 계기로 주목받는 3세계 문학…탈식민주의 감동 밀려온다

    구르나 노벨상 계기로 주목받는 3세계 문학…탈식민주의 감동 밀려온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탄자니아 출신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3)가 선정되면서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아프리카나 중남미 등 제3세계 탈식민주의 문학에도 관심이 쏠린다. 그동안 서구 문학에 밀려 변방으로 취급받았지만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해 통찰력 있는 작품이 많아 예의주시할 만하다는 평가가 나온다.2018년 대안 노벨상으로 불린 ‘뉴아카데미’ 상을 받은 마리즈 콩데(84) 작가의 에세이 ‘울고 웃는 마음’(1999)이 최근 문학동네에서 나왔다.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과들루프섬 출신인 콩데는 흑인이자 여성, 식민지인으로 유년기에 겪었던 인종·계급·성별 간 격차의 문제를 조명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다.다음달엔 콩데가 2017년에 낸 장편소설 ‘이반과 이바나의 경이롭고 슬픈 운명’(문학동네)도 독자를 만난다. 과들루프의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성향이 달라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주인공 남매를 통해 작가는 인종차별, 식민지화,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의 본질을 되묻는다. 앞서 콩데는 소설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2019년 번역·은행나무)에서 17세기 말 마녀로 몰렸던 미국의 흑인 여성 노예 티투바의 삶을 통해 인간적 연대와 공감의 희망을 보여 줬다.은행나무는 최근 나이지리아의 젊은 천재 작가로 주목받는 치고지에 오비오마(35)의 장편소설 ‘어부들’(2015)을 펴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데뷔소설상 등 5개 문학상을 받은 이 책은 출입이 금지된 저주받은 강에서 낚시하던 벤저민과 형제들이 마을 광인의 예언을 듣고 파멸하는 과정을 그렸다. 1990년대 중반 나이지리아의 빈곤과 혼란한 사회상을 담아 사소한 믿음에서 비롯된 균열이 어떻게 거대한 비극으로 점화되는지를 보여 줬다.2019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오비오마의 또 다른 소설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은행나무)는 사랑에 빠진 젊은이가 연인과 미래를 함께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내용을 다뤘다. 소수자들의 고난 서사를 신적인 존재의 연민 어린 목소리로 들려줬다는 평가를 받았다.구르나에 앞서 아프리카 출신 노벨문학상 후보 1순위로 거론된 케냐의 거장 응구기 와 티옹오(83)의 작품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케냐 근현대사를 다룬 대표작 ‘한 톨의 밀알’(은행나무)은 독립을 앞둔 식민지인들의 복합적 심리를 묘사해 서구인의 제국주의적 사고와 케냐 기득권층의 민중 억압을 꼬집는다. ‘십자가 위의 악마’(창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케냐 사회의 모순을 여성 주인공의 시각에서 풀어냈다.이 밖에 민음사는 영국 식민지 트리니다드섬에서 인도계 이주민 3세로 태어난 2001년 노벨상 수상자 비디아다르 수라지프라사드 나이폴(1932~2018)의 소설집 ‘자유 국가에서’를 펴냈다. 1971년 부커상 수상작인 이 책은 식민지를 둘러싼 다양한 방랑자들의 굴곡진 삶을 제시하며 정체성을 둘러싼 이방인의 고뇌를 다룬다.아프리카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석호 카이스트 연구교수는 “제3세계 문학은 식민지 잔재를 소재로 하지만 과거사에 대한 분노와 저항에 그치지 않고 인종, 성차별, 환경문제 등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 21세기에도 유효한 시대정신을 담았다”며 “세계를 주도하던 유럽 문학이 최근 신선함을 보여 주지 못하는 반면 3세계 문학은 지구촌 전체의 관점에서 영향력 있는 문학으로 발돋움하고 있어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왕은철 전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도 “영문학에서도 남아공, 케냐처럼 과거 식민지 출신 작가들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며 “한국처럼 식민통치에 대한 후유증이 남아 있는 국가에선 인종, 종교, 난민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다룬 탈식민주의 문학이 유효한 가치를 갖는다”고 했다.
  • 북한·해외동포 작품까지 포괄… ‘한국문학 세계화’ 최전선에 서다

    북한·해외동포 작품까지 포괄… ‘한국문학 세계화’ 최전선에 서다

    지난 1일 이화여대에서 노벨문학상 120주년 기념으로 한국-스웨덴 노벨상 메모리얼 프로그램이 열렸다. 노벨문학상이 한국문학에 미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온라인 실시간 행사였다. 그 행사에서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잠깐 만났다. 오랫동안 한국 서정시의 빼어난 범례로서 ‘밤에 쓰는 편지’로부터 ‘어린 당나귀 곁에서’까지의 세계를 낮고 투명하고 느릿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시인 김사인’은 어느덧 3년째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일원으로 소개하고 진흥해가는 최전선에 서 있었다. 우리는 며칠 후 번역원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그도 번역원도 잔뜩 움츠려 있을 것만 같았는데, 잔잔한 웃음을 머금으면서 김 원장은 이렇게 말을 건넨다. “늘 해오던 사업 방식에서 보면 위기와 혼란의 한 해였죠. 그러나 우리의 잠재력으로 보면 판세 전환의 기회가 되기도 할 것 같아요.” 번역원의 해외 사업이 상당한 제약을 받으리라는 짐작을 한순간에 역전시키는 반전의 순간이었다.●한국문학의 위기이자 기회 그는 “오늘은 번역원장 자격으로만 만나자”고 했다. 시인으로서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김 원장은 감염병 유행으로 충격과 변화가 컸을 텐데 비교적 비관적이지 않았다. “왜 부심의 세월이 아니었겠어요? 그러나 이러한 매체적 전환의 요청이 올해의 감염병 때문에 온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진행돼오다가 코로나와 결합하면서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가진 정보기술(IT) 수준에서 볼 때 이 사태는 모종의 단절임에도 불구하고 다시없는 기회가 될 것이고, 서구 중심의 근대문학 질서에서 후발 주자인 우리가 민첩하고 효과적으로 기술적 환경을 잘 살린다면 오히려 그 후발성을 극복하는 기회가 될 거라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팬데믹 사태는 우리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문제이니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문학 소통의 모델을 제시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책무가 아니겠는가. 어느새 찬찬한 시선의 ‘시인 김사인’은 구체적이고 먼 시선을 가진 ‘번역원장 김사인’으로 환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올해 국내 도서시장을 보더라도 출판 환경에는 크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소설이나 청소년 분야는 작년보다 매출이 신장되기도 했다. “출판사들은 사람들이 주로 집에 있으니까 문학 쪽 신장을 크게 기대했던 모양이에요. 물론 기대만큼 큰 성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손실은 없었다는 점이 이번 사태를 통한 문학의 미래를 어느 정도 예감하게 해주죠.” 말하자면 집에 있어도 사람들은 이제 책 형태의 문학 쪽으로 돌아오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 스마트폰이나 유튜브 같은 방식이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을 김 원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문학의 존재방식이 많이 변했다”면서 “활자를 매개로 하는 도서 형태와는 다른 형식, 활력을 띠면서도 고전적 가치를 품는 방식을 적극 사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시야를 확장해 비(非)활자 방식까지 포괄하면서 활자와 비활자가 공존하는 세계를 바탕으로 한국문학이 설계되어야 한다는 김 원장의 진단에서 이 사태가 정말 위기이자 기회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문학이란’… 정의를 다시 내리다 임기 동안 번역원의 성과를 묻자 그는 “창작을 하는 한국문학 전공자에게 이 자리를 맡긴 뜻을 늘 헤아렸다”고 했다. 두 가지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나는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 다른 하나는 번역원의 기능과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번역원은 20여년의 역사를 축적하면서 40여개 언어권에 1500여종 도서를 번역해 출간했다. 그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성과를 쌓은 셈이다. 그러나 김 원장은 이제 번역 지원이나 해외 행사 중심에서 벗어나 번역원의 위상을 재설정할 때가 됐다고 말한다. 김 원장이 생각하는 한국문학은 시간적으로는 고대에서 현대, 공간적으로는 남북한은 물론 해외 한인문학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원장이 되어 그는 이러한 구상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상설기구를 문학진흥본부라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기존 방식으로 하면 한국문학은 한반도 남쪽에만 한정되고, 서울과 문단 중심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시공간 문제만 아니라 입양인 출신 작가의 한국어로 쓰이지 않은 작품들도 생각해봐야 한다면서 김 원장은 그것들을 모두 한국문학으로 수렴하려는 아전인수의 태도보다는 그 역사적 실재들에 대한 배려를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아나톨리 김의 문학은 러시아문학이면서 동시에 한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탈북문학, 재북문학도 현실적 어려움이 있지만 마음속에 담아두어야 합니다. 구비문학 유산들에도 마음을 열고요.” 이어서 김 원장은 이제 번역원이 명실상부한 한국문학 외교 전략본부로 나서야 한다고 했다. 지난 시대와 동시대, 활자와 비활자, 한반도의 안팎을 동시에 사유하면서 번역원의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창립 때의 절실한 필요로는 ‘번역원’이 딱 맞지만, 이제 그러한 기능 중심의 이름을 넘어 대안적 명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를 선정해 번역 지원하고 해외에 파견하는 데 멈추지 않고 번역원이 더욱 확장된 역할을 해가기를 우리도 크게 기대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러한 위상을 담은 대안적 이름은 ‘한국문학 국제교류원’ 정도가 되지 않을까?●섬세한 말맛 살릴 번역 역량 육성이 과제 김 원장은 번역 역량의 절대적 부족을 안타까워했다. 한국문학을 섬세하게 살려 다른 언어권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인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분들을 단기속성으로 양성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할 때 아직 차이가 많이 납니다. 번역아카데미를 13년째 하면서 매년 5개 언어권 인력을 20명 정도 2년 과정으로 양성해왔습니다. 올해부터는 일본어, 중국어 2개 언어를 늘리기도 했고요.” 그동안 배출한 인력들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이제 온라인 시스템을 포괄하는 새로운 육성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고 김 원장을 추후 과제를 던진다. “좋은 문학 콘텐츠가 받쳐주지 않으면 모든 것이 소용없어요. 좋은 물건 없이 장사하려면 신용만 떨어지는 격이죠. 번역원이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진땀 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수한 문학 콘텐츠 발굴과 소개도 중요하지만 김 원장은 상대방의 문학적 전통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고 말을 건넨다. “‘너희는 우리 문학을 얼마나 읽는가’ 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도 외국문학 이해를 넓혀야 합니다. 상대방 문학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쌍방향과 호혜성이 매우 중요해요. 우리 것만 소개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김 원장은 최근 나온 러시아문학 선집을 보여주면서 그쪽에서도 한국문학을 번역해 펴내는 상호이해의 사업을 했다고 소개한다. 소수 언어권에 대한 개방적 태도도 중요하다고 몇 번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문학을 ‘가만히 좋아하는’ 시인으로서의 감각과 경험은 그의 이러한 구상과 실천에 행간마다 깃들어 있었다.●‘시인 김사인’의 공익근무 국제사회에서 한국 시에 대한 반응을 묻자 그는 “서구권은 이미 시의 위상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는 분위기를 먼저 말했다. “그래도 스페인어권, 아랍, 러시아 같은 곳은 시적 전통이 살아 있다”면서 “언어권마다 취향이 다르지만 그쪽 독자들이 한국 시를 반기는 듯하다”고 소개했다. 번역 장벽이 소설에 비해 훨씬 높은 서정시를 그네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한국어에 관심을 가진 서양 젊은 세대들에게 한국 시를 활발하게 번역해 소개하는 날이 활짝 열리기를 고대해본다. 마지막 말씀을 부탁하자 김 원장은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고 하면서 자세를 고쳐 세웠다. “세계 무대에서 남북문학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한국문학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알리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미국에서 북한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그쪽 출판사가 자력으로 북한문학 책을 내면서 ‘North Korea’라고 쓰면 우리가 그동안 써온 ‘Korea’는 자동으로 ‘South Korea’가 돼버려요. 명칭에서부터 분단 고착이 되는 거죠. 시급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정말 중요한 의제가 아닐 수 없다. 김 원장은 임기 동안 정작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가끔 메모는 한다”면서도 그는 “다른 시인과 경향들을 관찰해가는 일종의 공익근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김사인 시인을 그리워하는 독자들은 임기 후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한국문학 확장의 최전선에 선 김 원장의 공익근무가 차근차근 현실화하기를 소망해보는 겨울 오후의 시간이었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노벨문학상 작가 잡아라… 단골 후보들 작품 출간 붐

    노벨문학상 작가 잡아라… 단골 후보들 작품 출간 붐

    노벨문학상 시즌을 전후한 출판계는 그야말로 전쟁터다. 통상 10월 첫째 주 목요일에 있는 수상 발표를 앞두고 ‘노벨상 마케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은 연초부터 수상 가능성이 점쳐지는 국제적인 작가들에 관한 출간 계획을 10월에 맞춰 잡는다. 해당 작가가 수상하면 판매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며 ‘노벨상 특수’를 누린다.9월부터 출간한 신간 가운데서는 토머스 핀천, 장 폴 뒤부아, 이언 매큐언의 작품이 눈에 띈다.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대표하는 토머스 핀천은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괴짜 은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신작 ‘블리딩 엣지’(창비)는 9·11 테러의 배후를 파헤쳐 나가는 여성 사기 조사관의 활약을 그렸다. 창비에서는 프랑스의 국민 작가 장 폴 뒤부아의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도 선보였다. 지난해 아멜리 노통브를 제치고 프랑스 공쿠르상을 수상한 뒤부아는 ‘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 등으로 국내에서도 팬층이 두껍다. 창비는 그 밖에도 이탈리아계 미국 작가인 돈 드릴로의 ‘침묵’을 오는 20일 미국 출간일에 맞춰 동시 출간할 계획이다.문학동네가 내놓은 이언 매큐언의 열두 번째 장편소설 ‘스위트 투스’도 눈여겨볼 만하다. 매큐언은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 등과 함께 현대 영미문학을 대표한다. 또한 문학동네는 이달 내 인도 출신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의 소설 ‘무어의 마지막 한숨’과 ‘2년 8개월, 스물여덟번의 밤’, 네덜란드 소설가 세스 노터봄의 ‘계속되는 이야기’를 내놓는다.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중국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가’로 불리는 옌롄커의 책 2종(‘레닌의 키스’, ‘침묵과 한숨’)은 지난 8월 말 문학동네와 임프린트인 글항아리에서 동시에 선보인 바 있다.한편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군을 점찍는 영국의 유명 베팅 사이트인 나이서오즈와 래드브룩스의 ‘원픽’은 프랑스령 과들루프 출신의 여성 작가 마리즈 콩데다. 2018년 대안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뉴 아카데미 문학상을 수상하며 유력한 후보군으로 급부상한 콩데의 책은 국내에 지난해 출간된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은행나무)가 전부다. 은행나무는 콩데의 또 다른 대표작 ‘세구’ 출간을 검토하고 있다. 2위에 랭크된 러시아의 여성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책은 을유문화사와 뿌쉬낀하우스, 비채, 들녘 등에서 다수 나와 있다. 3위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는 올해 일본에서 출간된 새 소설집의 국내 판권 계약에 관심이 쏠린다. 전자출판을 꺼리던 하루키가 올해부터는 국내에서도 전자책을 출시, 수상 시 온·오프라인을 결합한 마케팅이 활발할 것으로 보인다. 하루키와 공동 3위를 기록한 캐나다의 여성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작품 다수가 민음사와 임프린트인 황금가지에서 출간돼 있다. 한국의 고은 시인도 공동 7위에 이름을 올렸다. 2020 노벨문학상 마케팅의 최종 승자는 8일 오후 8시(한국시간) 스웨덴 한림원의 발표로 판가름 난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재외국민 투표 제한, 비대면 선거운동… 시험대 오른 ‘K선거’

    재외국민 투표 제한, 비대면 선거운동… 시험대 오른 ‘K선거’

    코로나19와 일상을 함께하는 ‘언택트 시대’가 시민의 참정권을 위협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에서 투표권 행사와 선거운동이 제약을 받고, 편향 정보만 반복 노출하는 유튜브 등에 의지해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대중 집회나 대면 토론회가 움츠러들면서 정치에 직접 참여할 기회도 줄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물론 우리 방역당국도 “코로나19는 1~2년 이상 장기화가 불가피하다”며 장기전에 돌입했다. 언택트가 일상이 된 시민의 정치 참여를 보장할 새로운 방안 마련이 시급한 상태다.●사라진 투표권, 제한된 참정권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속에 치러진 지난 21대 총선은 전 세계에 ‘K선거’의 탄생을 알렸다. 하지만 장기적 시스템 보완의 필요성도 절감하게 했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당장 내년 4월 7일 재보궐선거, 2022년 3월 대통령선거를 어떻게 치를 것인지가 중요한 상황이다. 특히 재외국민 선거가 치러지는 2022년 대선 전에는 반드시 지난 총선 같은 재외국민의 참정권 제한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안을 찾아야만 한다. 지난 총선 때 재외국민 투표를 신청했으나 표를 행사하지 못했던 임소현(33·캐나다 토론토 거주)씨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히 행사해야 할 권리라고 생각했고, 가족과 친구들이 지내는 한국의 더 나은 발전을 투표를 통해서라도 돕고 싶은 마음에 투표하려 했다”며 “처음에는 단축 운영 공지를 받았는데 이후 선거 운영 자체가 아예 취소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2022년 대선 때도 투표를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지난 총선 당시 코로나19 영향으로 55개국 91개 공관의 재외선거사무가 중지됐고 36개 공관에서는 투표 기간을 단축 운영했다. 선거사무 중지로 투표에 참여하지 못한 투표 등록 재외선거인은 전체의 50.7%에 달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사무 중단으로 투표권을 잃은 독일과 캐나다 거주 재외국민 25명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통해 헌법소원심판까지 청구했다. 현재 헌법재판소에서는 사전 심사가 끝나 전원재판부로 넘겨져 심리가 진행 중이다. 변호를 맡은 조영관 변호사는 “기본권 제약에서 특히 참정권 부분은 매우 중요한 권리이기 때문에 손쉽게 제한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헌법소원”이라며 “예외적인 상황에 대비해 투표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앙선관위는 재외국민의 투표 참여 제한에 대한 지적에 공감한다면서도 구체적인 해법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앞으로 코로나19 확산 등 유사한 상황이 재발할 경우를 대비해 재외선거 관련 의견 수렴을 하고 해외 법령과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참고 중”이라며 “제도적·실무적으로 재외국민 참정권을 확대 보장할 수 있도록 우편투표를 포함한 다양한 방안에 대해 검토를 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정당 정치·광장 정치도 시험대 재외선거에서의 투표권 행사뿐 아니라 언택트 시대를 맞은 국내 정치 참여도 시험대에 오른 상황이다. 지난 총선에서 헌정 사상 첫 비대면 선거운동을 강제한 주요 정당들은 선거와 관련해 완전히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전 당원이 동참하는 당대표 선출을 위한 8·29 전당대회를 앞둔 더불어민주당은 정당 사상 최초로 ‘언택트 전당대회’를 치를 계획이다. 1만여명의 인원이 체육관에 모여 후보들의 연설을 듣고 투표하는 기존의 대규모 현장 집회 대신 온라인 생중계 연설과 온라인 투표를 진행한다. 당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환경의 경선이 어느 후보에게 유리할지를 두고도 전망이 엇갈린다. 전당대회뿐 아니라 지역 조직도 단위별로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민주당 장철민(초선·대전 동구) 의원은 “전당대회나 시도당대회, 합동연설회가 가진 정치의 축제적 요소가 사라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장 의원은 “많은 사람이 현장에 함께 모여 무형의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은 현대 민주주의의 얼마 남지 않은 축제”라며 “언택트 시대의 정치적 부흥, 성취감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미래통합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의 고민도 깊다. 지상욱 여의도연구원장은 “언택트 시대를 맞아 정당의 운영도 조직 관리와 소통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새로운 플랫폼 구축, 데이터 수집의 정확도 개선 방안 등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국민의당은 당대표가 주재하는 현안 공부모임 ‘온(ON)국민공부방’을 대면 전문가 토론회 대신 유튜브 생중계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고려해 당원들이 직접 참여하는 행사를 지양하고 비대면 정치 참여를 독려한다는 취지다. 촛불집회로 대표되는 시민 참여형 광장 정치도 시험대에 올랐다. 주말마다 서울 광화문광장을 태극기로 채웠던 일명 ‘태극기 부대’도 언택트 시대를 맞아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 중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후 매주 토요일 광화문광장을 찾았던 A씨는 “광장에 모여 투쟁하고 많은 사람의 뜻을 보여 주던 집회가 중단된 후 소모임이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갈수록 드러나는 시기에 집회가 중단돼 아쉬움이 크다”고 덧붙였다. ●전 세계의 고민… 위협받는 민주주의 코로나 시대의 위축된 시민권은 비단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의 고민거리다. 감염 확산을 막고 방역의 성과를 높이려는 국가의 광범위한 통제가 이뤄지고, 선거의 기능이 축소되기 때문이다. 스웨덴 국제민주주의선거지원기구(IDEA)는 지난달 26일 코로나19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며 전직 대통령·노벨상 수상자 등 세계 지도층 인사 500여명의 서명을 받아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호소’라는 이름의 국제 성명을 냈다. 이들은 성명에서 “책임감 있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억압될 때 그 결과는 치명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명문에는 민주주의 관련 기관 70여곳, 노벨상 수상자 13명, 주요국 전직 대통령 62명 등 500여개 단체 및 개인이 서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 오준 전 주유엔 대사, 통합당의 하태경·태영호 의원, 김세연 전 의원 등이 참여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코로나19로 정부의 역할이 계속 커지는 상황에서 선거 방식의 보완이 하루빨리 이뤄지지 않으면 권력 균형이 깨질 것”이라며 “지난 총선과 같은 K선거를 반복할 수는 없고 비대면 선거 활성화로 우회로를 찾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 “국내 정치뿐 아니라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 전체의 문제”라며 “코로나19는 이미 우리 삶이 됐다. 그럼에도 시민 참여와 민주주의는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진보의 도덕·정신적 파탄이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

    “진보의 도덕·정신적 파탄이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다. 위기의 본질은 한국 진보의 도덕적, 정신적 파탄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이른바 386세대로 통칭되는 정치화된 엘리트들이 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지난 뒤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정치계급’이 됐다”면서 “(현 집권 세력이) 민주화 이전으로 회귀해 역사와 대결하는 것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진보 세력을 강력 비판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집권세력, 민주화 이전 회귀… 역사와 대결” 최 교수는 이날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학술회의’ 기조 강연문 ‘한국민주주의의 공고화, 위기, 새 정치질서를 위한 대안’을 통해 이 같은 의견을 내놨다. 진보적 정치학자였던 최 교수는 최근 잇따라 현 정권과 진보세력을 비판하고 있다. 보수·진보가 번갈아 ‘광장 민주주의’를 내걸며 광화문 집회를 벌이는 상황과 관련해 최 교수는 “두 집회의 군중들 사이의 진리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격렬한 정치 갈등의 조건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공정한 사법적 결정이 가능할 수 있을지 실로 의문”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비판도 내놨다. 그는 “조 전 장관의 대담집 ‘진보집권 플랜’을 보면 그의 정치관은 진보 대 보수, 개혁 대 수구, 아(我)와 적(敵) 사이의 치열한 투쟁을 통한 권력 쟁취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치가 친구와 적으로 양분되면 도덕적 판단, 불편부당성, 정의, 공정성 같은 구분은 무의미해지거나 애매해진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 제도·절차·규범 통해 이끌어 가야 민주주의 위기극복 방안에 대해서는 “개혁 세력도 이젠 스스로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촛불시위 이후 진보정부의 성립과 그 운영방식은 진보적 정당보다도 시민사회의 지지와 동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면서 “정부와 시민운동의 결합은 사회 전체를 정치화해 다원주의를 퇴행시킨다”고 했다. 또한 “이젠 운동에 의한 민주화시대가 지나고 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 규범들을 통해 성숙하게 이끌어나가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는 것을 진보세력이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환경 소녀’ 툰베리가 받은 대안노벨상 메달… “총기 녹여 만든 것”

    ‘환경 소녀’ 툰베리가 받은 대안노벨상 메달… “총기 녹여 만든 것”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16)가 4일(현지시간) ‘대안 노벨상’인 바른생활상을 수상했다. ‘환경 소녀’, ‘기후 행동 잔 다르크’로 불리는 툰베리는 수상식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동영상 메시지를 통해 “싸움은 계속한다”고 밝혔다. 툰베리는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로 추천됐지만 받지는 못했다. 올해로 40년째인 바른생활상재단은 이날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툰베리와 중국의 여성인권 변호사 궈젠메이, 서사하라 독립운동가 아미나투 하이다르, 아마존과 야노마미 원주민 보호활동을 펼친 다비 코페나와 등 4명에게 바른생활상을 수여했다고 AFP·dpa통신 등이 보도했다. 수상자들은 각각 100만 크로나(약 1억 3000만원)의 상금과 함께 휴매니엄 메달을 받는다. 바른생활재단은 “중남미에서 불법으로 유통되는 총기를 녹여서 만든 메달”이라고 밝혔다.바른생활상은 해마다 통상 4명에게 주어진다. 재단은 툰베리가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시급한 기후변화 대응 행동을 요구하는 정치적 목소리를 불러일으키는 공로를 세웠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시상자로 나선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의 요한 록스트룀 소장은 “젊은이는 터널 속 빛이며, (중략) 툰베리는 기후 대응 행동의 잔 다르크”라고 툰베리를 소개했다.유엔 기후변화 콘퍼런스에 참석하느라 시상식에 불참한 툰베리 대신 ‘동료’들이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다. 전날 리스본에서 녹화한 영상에서 툰베리는 “싸움이 계속될 것이며, 우리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툰베리는 지난해 8월부터 학교를 결석하고 스웨덴 의사당 밖에서 기후변화 대응 행동을 촉구하는 ‘학교 파업’ 시위를 시작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각국 청소년들은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슬로건 아래 동조 학교 파업 시위를 벌이고 있다. 툰베리는 거의 1년 만에 청소년 환경 운동의 ‘대세’이자 ‘상징’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바른생활상은 노벨상이 권위적이며 강대국의 입장과 정치 문제에 영향을 받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제정돼 ‘대안 노벨상’으로 불린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중구난방 평가로 대학 망치는 나라… 평가제도 통합·혁신해야”

    “중구난방 평가로 대학 망치는 나라… 평가제도 통합·혁신해야”

    교육부·대교협·언론사 등 대학평가 난립 통제 목적 의심… 살생부 말까지 떠돌아 고압적 묻지마 평가에 대학 자율성 위축 모든 평가 하나로 묶어 5년에 한 번 실시 공통·선택지표 이원화… 줄 세우기 안 돼 비리·투명성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아야대학평가에 대한 불만이 차고 넘친다. 너무 많은데다 효과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교육부의 대학기본역량진단, 대교협의 대학기관평가인증, 언론사의 종합평가는 물론 대학원 평가, 의대 평가, 한의대 평가, 간호학과 평가, 공학인증평가, 도서관 평가 등 수없이 많다. 돌이켜보니 상지대 업무를 보면서 1년간 여섯 차례 평가를 받았다. 평가담당 총장도 아닌데 총장 업무가 평가로 시작해서 평가로 끝났다. 주객전도에 본말전도의 상황이다. 대학평가는 이명박 정부에서 본격화되고 박근혜 정부에서 확대되어 지금에 이르렀고, 어쩌다 보니 평가천국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는데 대학평가에 대한 정부의 의도를 좋게 받아들이는 시각이 거의 없는 유감스러운 상황이다. 대학을 통제할 목적으로 평가를 강행한다는 의견도 있다. 언론에 살생부라는 말까지 떠돈다. 대학평가 10년이 되었지만, 평가 덕분에 대학이 발전했다는 소리도 없다. 대학에서 직접 업무를 하는 나로서도 이하동문이다. 평가의 위력이 크다 보니 평가야담류의 괴소문이 떠돌기도 한다. 이사장이나 총장의 힘이 강한 대학일수록 평가를 잘 받는다, 교육부 관료나 정치인 출신의 총장이 오면 유리하다, 대학의 평가준비팀이 몇 달씩 고급호텔에서 합숙한다, 평가점수가 투자액수에 비례한다 등등. 대학 평가가 군대 내무검열도 아닌데 호텔에서 합숙하면 통과하고 그렇지 않으면 점수가 낮아지는 식이라면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대학평가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평가가 꼭 필요한 부분이 있을 것이고 평가의 순기능도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과 같은 고압적인 묻지 마 평가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혁신하자는 것이다. 이유와 목적이 불분명한데다 평가를 통해서 기대할 것이 없는 낭비성 국가행정이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대학평가에 쏟아부은 막대한 시간과 인력과 재정을 합산하면 4대강 사업 다음으로 국력을 낭비한 전시행정이었다는 혹평이 있는데, 이에 대해 교육부가 항변할 수 있을까? 조금만 들여다보면 평가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평가의 역효과가 막대하다. 예산과 인력을 낭비한 전시행정에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 과정에서 대학의 자율성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학문적 분위기는 질식한다. 고의적으로 했다면 대학을 통제하기 위한 정략적인 제도이고, 모르고 했다면 무면허 의사가 집도한 꼴이다. 어느 쪽이든 지금까지의 대학평가는 나쁜 정책이고 실패한 정책이다. 백 번 양보해서, 정부가 대학을 괴롭혀서라도 대학이 좋아진다면 감내할 일이다. 그러나 몇 가지 알려진 공식처럼 큰 대학과 서울 소재 대학에 유리하고, 이사장과 총장의 입김이 센 대학과 낙하산 총장이 있는 대학에 유리하고, 평가 준비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대학에 유리하다면 이미 실패한 정책이다. 사학비리를 저지르고도 좋은 점수를 받고 대학을 비정상으로 운영하는데도 뒤탈이 없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나쁜 정책이다. 도둑놈이 밤낮없이 일했다고 도둑 잡는 경찰관 대신 훈장받는 격이다. 그래서 정부 출범 초기에 기왕의 대학평가를 중단하고 평가제도를 개선하자는 요구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평가제도를 혁신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 당연히 정부를 향한 대학가의 원성이 높아졌다. 교육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기울인 관심의 절반만 기울였더라면 상황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늦지 않았고 지금도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교육부에 세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첫째 중구난방 난립하는 평가를 하나로 모을 것을 제안한다. 평가체제를 정비해서 5년에 한 번 정도 실효성 있게 평가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해서 전국 350여 대학들이 예산과 인력과 시간을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평가에 들어가는 인적, 물적 비용만 절감해도 대학이 발전할 것이다. 둘째 평가지표를 다시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대학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대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평가지표를 설정해야 한다. 지난 10년간의 평가를 되돌아볼 때 하나마나한 평가나 변별력이 없는 형식적인 평가는 대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사학비리와 운영의 투명성을 가장 중요한 평가지표로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대학의 운영이나 발전에서 사학비리보다 해악이 되는 요소는 없다. 더구나 비리의 정도가 매우 심하여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되거나 개선 의지가 없는 경우에는 아예 평가에서 제외하고 별도로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제안을 종합하면 대안적인 평가모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대학을 평가하는 목적이 대학의 정상적인 운영과 발전에 있고, 이렇게 하려면 교육비리가 없는 청정교육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므로 이사회가 족벌체제로 구성되어 있는지, 구성원들의 정당한 참여가 허용되는지, 이사장과 총장이 전횡과 독단을 저지르지 않는지, 사학비리와 분규가 발생하고 있는지를 평가에 반영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대학 간 다양한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평가지표를 설계하면 된다. 국제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과 직업교육에 최적화된 대학이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을 필요는 없다. 평가지표를 공통지표와 선택지표로 이원화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공통지표는 모든 대학을 대상으로 대학의 기본 자질을 평가하는 일종의 기본역량평가로 한다. 기본역량평가는 학부 중심으로 하고 기준에 미달하면 개선 요구, 각종 지원의 제한, 정원 감축, 모집 정지 등 필요한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한다. 이 평가는 모든 대학에 공통으로 적용하며 강제성을 갖는다. 선택지표는 대학 간 차이가 나는 특성화, 연구중심, 교육혁신, 사회협력, 국제화 등의 영역을 대상으로 선택적으로 평가하되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근거로 삼는다.이렇게 하면 대학기본역량진단과 대학기관평가인증이 통합되는 효과가 있는데다 평가의 실효성이 강제성과 재정지원 두 측면에서 모두 강화되므로 평가의 기대효과가 분명해질 것이다. 또한 국립대학과 사립대학, 서울 소재 대학과 지방대학, 일반대학과 종립대학, 발전 방향이 다른 대학을 동일선상에서 획일적으로 비교하는 문제점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 평가 외적인 문제지만, 차제에 평가보고서 작성 자체를 없애야 한다. 평가보고서는 대학을 괴롭히고 재정과 인력의 낭비를 부추기는 주범이다. 공시자료 등 객관적인 자료가 있는데도 무리하게 평가보고서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 부족하면 지표만 요구하면 된다. 교수와 직원들이 호텔방에서 뻔한 자료를 가지고 도표와 디자인 등 불필요한 작업에 몰두하는 것은 관료적 형식주의의 극치다. 객관적 지표가 아니라 형식에 포함된 주관적 판단으로 대학을 평가하는 꼴이다. 평가 대상을 선정하고 평가 결과를 발표하고 그 결과를 적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사학비리나 분규, 기타 다른 사정으로 정상적으로 평가받을 상황이 아닌 것으로 판단될 경우에는 대학의 요청을 받거나 직권으로 평가에서 제외한 후에 별도의 조치를 취한다. 평가 결과는 공통지표에 의한 평가와 선택지표에 의한 평가로 구분하여 발표하되 어떤 경우에도 줄세우기식 발표를 지양한다. 공통지표는 인증과 비인증으로 구분하고 비인증의 경우에는 비인증 상황에 따라 수준별로 차등화된 조치를 취한다. 선택지표는 인증 여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수준별 등급을 제시한다. 즉 특성화, 연구중심, 교육혁신 등 선택 대상이 각각 어느 등급에 해당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렇게 평가한 후에 공통지표에서 인증된 대학과 선택지표에서 대상별로 높은 등급을 받은 대학을 중심으로 차등적인 재정지원이 이루어질 것이고 평가에서 제외된 대학, 공통지표 비인증 대학, 선택지표에서 낮은 등급을 받은 대학은 재정지원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니 재정의 합리적 배분과 더불어 대학발전을 촉진하는 효과를 거들 수 있게 될 것이다. 대학교육의 환경이 급속도로 악화되는데 한 달이 멀다 하지 않고 허구한 날 평가만 요구하면 교육과 연구는 언제 하고 인성교육과 진로교육과 취업지도는 언제 하나? 하물며 국제적 수준의 연구나 노벨상에 도전하는 연구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평가를 위한 평가로 말미암아 비효율과 낭비가 더는 지속되지 않도록 즉시 평가 방식을 바꾸어야 하고 차제에 대학을 위한 평가, 대학의 눈높이에 맞는 평가, 대학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평가, 대학의 발전을 촉진하고 지원하는 평가로 전환해야 한다. 늦었지만, 정부에서도 이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교육부의 신속한 결단이 필요하다. 상지대 총장
  • [열린세상] 대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

    [열린세상] 대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

    서울 부동산 가격의 급등세가 심상찮다. 2018년 8월 전국 주택 가격(KB 기준)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단 1.8% 상승하는 데 그쳤지만, 서울 아파트 가격은 같은 기간 8.8% 상승했다.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 일각에서는 두 가지 정책 대안이 제시되는 듯하다. 하나는 수도권에 소재한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추가적으로 보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린벨트를 해제해 서울에 인접한 지역에 대규모 공공택지를 조성하자는 안이다. 물론 이 두 대안 모두 꽤 일리가 있다.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보내면 서울이나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의 지방 이동을 촉진하고 국토의 균형 발전을 도모할 수 있으며, 그린벨트를 해제함으로써 서울 및 수도권에 주택을 넉넉하게 공급할 수 있다. 이상의 두 대안 중 어떤 것이 더 나을까? 필자는 두 번째 안에 더 끌린다. 왜냐하면 지방 분산 정책이 오히려 국가 경제 전체에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리경제학자 엔리코 모레티는 사람과 기업들이 집값이 비싼 도시로 몰려드는 이유를 지식의 전파에서 찾는다. 즉 첨단기술 산업은 이용 가능한 숙련 인력, 전문적인 공급 업체들 그리고 지식의 흐름을 지원할 만큼 충분히 대규모인 혁신 중심지에 자리 잡음으로써 “더 창의적이고 더 생산적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비싼 토지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도시 인근에 설비를 늘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도 이런 부분에서 마찬가지다. 전기전자산업은 수출에서 35.4%를 차지하는 핵심적인 산업이다. 가전과 핸드폰 등 수많은 설비가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해외로 이전했지만, 핵심 설비는 여전히 한국에 남아 있다. 핵심 설비가 한국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클러스터의 존재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클러스터, 다시 말해 특정 지역에 자리잡은 산업과 학교 그리고 연구소의 거대한 덩어리가 생산성 향상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인접한 학교에서 공동 연구가 진행되며, 학생들은 첨단 산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이 무엇인지 배우고 습득하기에 기업들은 필요한 인재를 쉽게 구할 수 있다. 반면 수도권 소재 공공기관의 대규모 지방 이전 조치는 이미 존재하던 클러스터를 해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필자는 지방으로 이전한 모 공공기관 출신이기에 지방 이전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조금은 알고 있다. 서울에 있었으면 다른 회사를 방문하러 가는 길에 지인을 만나 정보를 교환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정확한 것인지 점검하는 게 손쉬웠다. 더 나아가 부부가 맞벌이하는 경우에도 따로 떨어져 살 이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 최고의 허브로 부각되는 인천공항이 인접해 있어서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해 정보를 취득하기도 손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이 모든 것이 꽤 어려운 일이 됐다. 일각에서는 ‘화상회의’라는 좋은 시스템을 왜 활용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오랜 시간에 걸쳐 개인적인 접촉을 하며 정보를 공유하는 데 익숙해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미국의 벨연구소를 관찰했던 경영학자 앨릭스 펀들랜드는 “탁월한 성취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이어 가며,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말해 혁신은 사무실의 복도에서 상시적으로 이뤄지는 잡담에서 이뤄지며, 노벨상 수상자들은 이 잡담을 주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서울 부동산 가격의 안정은 매우 중요한 정책 목표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혁신산업의 발전이 중요하며, 특히 엔리코 모레티가 지적했듯 “대도시 지역 한 곳에서 첨단 기술 일자리가 한 개 늘어날 때마다 장기적으로 다섯 개의 추가적인 일자리가 첨단 기술 분야 밖에서 창출된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혁신산업을 육성하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서울 인근에 저렴하게 임대주택을 공급하고, 미세먼지를 줄일 다양한 대안도 실행할 수 있지 않겠는가.
  • [송혜민 기자의 월드 why] 유전자 변형 슈퍼돼지 옥자, 당신의 식탁에 오른다면?

    [송혜민 기자의 월드 why] 유전자 변형 슈퍼돼지 옥자, 당신의 식탁에 오른다면?

    영화 ‘옥자’에 등장하는 돼지 ‘옥자’는 유전자 변형을 통해 태어난 슈퍼돼지다. 옥자가 영화에서 가지는 함축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옥자가 실험실에서 갖은 실험에 이용된 동물이라는 것, 또 하나는 (미래의) 유전자변형식품이라는 것이다.동물 실험과 유전자변형식품은 현대 인류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인 동시에 오랜 시간 지속된 논란의 대상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이는 옥자가 단순히 영화에 등장하는 귀엽고 거대한 상상 속 돼지가 아닐 수 있으며,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실험대에 오르며 인간의 차세대 먹거리가 될 준비를 하는 실제 돼지들의 대명사임을 의미한다. ●인간의 장기 대신 만들어 주는 돼지들 현대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동물 실험은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신약을 투여하거나 의료기기를 시험하는 위험한 임상실험을 대체해 줄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그 중 가장 각광받는 실험동물은 다름 아닌 돼지다. 성장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유사한 장기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옥자와 마찬가지로 유전자 변형 기술을 통해 탄생한 무균 돼지나 면역력을 낮춰 암이나 당뇨에 걸리게 한 뒤 치료약을 개발하는 데 쓰이는 질환 모델 돼지 등은 생명공학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재료’로 사용된다. 장기이식 분야에도 돼지의 역할은 독보적이다. 과거에는 전자기기 방식의 인공 장기를 주로 이용했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공 장기는 점차 생체화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진은 돼지의 자궁에서 당뇨병 환자에게 필요한 췌장을 만들어내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돼지 배아에서 췌장을 만드는 유전자 부위를 잘라낸 뒤 여기에 인간의 줄기세포를 주입하고 돼지의 자궁에 착상시켜 인간의 췌장을 ‘키우는’ 것이다. 특히 과학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것은 미니돼지다. 멧돼지나 식용 돼지 중 크기가 작은 돼지 종자를 개량한 것으로, 형질이 고정돼 있어 실험에 적합하다고 알려져 있다. 기존에 실험용으로 많이 쓰이던 쥐 등 설치류와 달리 수명이 더 긴 데다 일반 돼지보다 몸집이 작아 실험하기 쉽다는 것이 장점이다. 돼지에서 만들고 사람에게 이식하는 이러한 이종(異種) 간 장기 이식은 사람 사이의 이식보다 더욱 극심한 면역 거부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돼지의 유전자를 조작해 면역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제거한 뒤 ‘안전하게 만들어진’ 돼지를 인공 장기 ‘제작’에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무병장수를 위해 실험용으로 태어나 실험용으로 죽는, 혹은 실험실 밖에서 태어났으나 실험실 안에서 여러 차례 유전자 변형 과정을 겪어야 하는 돼지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GMO 연어 허가됐지만 시판 미뤄져 영화 ‘옥자’에서 유전자 변형 식품을 제조·판매하는 기업의 대표인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턴 분)는 옥자를 “예쁜데 맛도 끝내주는” 돼지라고 소개한다. 소비자에게 옥자가 유전자를 변형시킨 ‘슈퍼돼지’라는 것을 숨긴 것과 관련해서는 “유전자변형식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피해망상이 너무 커서”라고 해명하기도 한다. 옥자와 같은 유전자 변형 생물체는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로 불린다. GMO 동물 1호는 연어다. 2015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유전자 변형을 통해 성장 속도가 2배 빠른 GMO 연어의 식용을 허가했다. 돼지고기 사랑으로 유명한 한국과 중국에서는 이미 옥자와 닮은 ‘근육 슈퍼돼지’를 만들어 냈다. 국내 연구진과 중국 연변대 공동 연구진이 개발한 이 돼지는 근육 성장을 억제하는 유전자가 변형되면서 근육량이 20% 많아지고 지방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또 일반 돼지보다 빨리 성장하고 영양분도 더 풍부하다. 현재 시판되는 유전자 변형 돼지는 아직 없다. GMO 연어의 경우 미국과 캐나다에서 시판 허가가 났지만, 환경단체와 소비자단체의 반발이 거세고 이를 의식한 유통업체가 판매를 주저하거나 거절하면서 대중화에 제동이 걸린 상태다. 전 세계 소비자들은 이미 다양한 경로로 콩을 포함한 50여종의 유전자 변형식물을 먹고 있지만, 유전자 변형 돼지를 포함한 동물 고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거부감이 심하다. 설사 영화에서처럼 맛이 매우 좋다고 해도 ‘피해 망상’을 떨치고 고기를 입에 넣는 일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변형 돼지가 인체에 유해한지, 무해한지를 두고 치열한 공방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노벨상 과학자들은 GMO식품 지지 성명 지난해 6월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 107명은 유전자 변형 식품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지금까지 유전자 변형 생물체의 소비가 인간이나 동물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는 한 번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일각에서는 유전자 변형 작물 등의 장기간 섭취가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팽팽하게 맞섰다. ‘옥자’를 먹는다는 것은 곧 동물실험에 이용된 유전자 변형 돼지를 먹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닭에게서도, 소에게서도 분명 또 다른 옥자가, 더 많은 옥자가 만들어질 수 있다. 아무리 맛이 ´끝내준다´ 할지라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 옥자를 먹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huimin0217@seoul.co.kr
  • [송혜민의 월드why] 당신은 ‘옥자’를 먹을 수 있나요?

    [송혜민의 월드why] 당신은 ‘옥자’를 먹을 수 있나요?

    영화 ‘옥자’에 등장하는 돼지 ‘옥자’는 유전자 변형을 통해 태어난 슈퍼돼지다. 옥자가 영화에서 가지는 함축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옥자가 실험실에서 갖은 실험에 이용된 동물이라는 것, 또 하나는 (미래의) 유전자변형식품이라는 것이다. 동물 실험과 유전자변형식품은 현대 인류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인 동시에 오랜 시간 지속된 논란의 대상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이는 옥자가 단순히 영화에 등장하는 귀엽고 거대한 상상 속 돼지가 아닐 수 있으며,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실험대에 오르며 인간의 차세대 먹거리가 될 준비를 하는 실제 돼지들의 대명사임을 의미한다.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실험대 오르는 돼지들 현대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동물실험은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신약을 투여하거나 의료기기를 시험하는 위험한 임상실험을 대체해 줄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왔다. 그 중 가장 각광받는 실험동물은 다름 아닌 돼지다. 성장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유사한 장기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옥자와 마찬가지로 유전자 변형 기술을 통해 탄생한 무균 돼지나 면역력을 낮춰 암이나 당뇨에 걸리게 한 뒤 치료약을 개발하는데 쓰이는 질환모델 돼지 등은 생명공학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재료’로 사용된다. 장기이식 분야에도 돼지의 역할은 독보적이다. 과거에는 전자기기 방식의 인공 장기를 주로 이용했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공 장기는 점차 생체화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진은 돼지의 자궁에서 당뇨병 환자에게 필요한 췌장을 만들어내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돼지 배아에서 췌장을 만드는 유전자 부위를 잘라낸 뒤, 여기에 인간의 줄기세포를 주입하고 돼지의 자궁에 착상시켜 인간의 췌장을 ‘키우는’ 것이다. 특히 과학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것은 미니돼지다. 멧돼지나 식용 돼지 중 크기가 작은 돼지 종자를 개량한 것으로, 형질이 고정돼 있어 실험에 적합하다고 알려져 있다. 기존에 실험용으로 많이 쓰이던 쥐 등 설치류와 달리 수명이 더 긴데다 일반 돼지보다 몸집이 작아 실험하기 쉽다는 것이 장점이다. 돼지에서 만들고 사람에게 이식하는 이러한 이종(異種)간 장기 이식은 사람 사이의 이식보다 더욱 극심한 면역 거부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돼지의 유전자를 조작해 면역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제거한 뒤 ‘안전하게 만들어진’ 돼지를 인공 장기 ‘제작’에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무병장수를 위해 실험용으로 태어나 실험용으로 죽는, 혹은 실험실 밖에서 태어났으나 실험실 안에서 여러 차례 유전자 변형 과정을 겪어야 하는 돼지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유전자변형 돼지로 만든 소시지, 인체에 무해할까 영화 ‘옥자’에서 유전자 변형 식품을 제조·판매하는 기업의 대표인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분)는 옥자를 “예쁜데 맛도 끝내주는” 돼지라고 소개한다. 소비자에게 옥자가 유전자를 변형시킨 ‘슈퍼돼지’라는 것을 숨긴 것과 관련해서는 “유전자변형식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피해망상이 너무 커서”라고 해명하기도 한다. 옥자와 같은 유전자 변형 생물체는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로 불린다. GMO 동물 1호는 연어다. 2015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유전자 변형을 통해 성장속도가 2배 빠른 GMO 연어의 식용을 허가했다. 돼지고기 사랑으로 유명한 한국과 중국에서는 이미 옥자와 닮은 ‘근육 슈퍼돼지’를 만들어냈다. 국내 연구진과 중국 연변대 공동 연구진이 개발한 이 돼지는 근육 성장을 억제하는 유전자가 변형되면서 근육량이 20% 많아지고 지방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또 일반 돼지보다 빨리 성장하고 영양분도 더 풍부하다. 현재 시판되는 유전자 변형 돼지는 아직 없다. GMO 연어의 경우, 미국과 캐나다에서 시판 허가가 났지만, 환경단체와 소비자단체의 반발이 거세고 이를 의식한 유통업체가 판매를 주저하거나 거절하면서 대중화에 제동이 걸린 상태다. 전 세계 소비자들은 이미 다양한 경로로 콩을 포함한 50여 종의 유전자 변형식물을 먹고 있지만, 유전자 변형 돼지를 포함한 동물 고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거부감이 심하다. 설사 영화에서처럼 맛이 매우 좋다고 해도 ‘피해 망상’을 떨치고 고기를 입에 넣는 일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변형 돼지가 인체에 유해한지, 무해한지를 두고 치열한 공방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 107명은 유전자 변형 식품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지금까지 유전자 변형 생물체의 소비가 인간이나 동물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는 한 번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일각에서는 유전자 변형 작물 등의 장기간 섭취가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팽팽하게 맞섰다. ‘옥자’를 먹는다는 것은 곧 동물실험에 이용된 유전자 변형 돼지를 먹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닭에게서도, 소에게서도 분명 또 다른 옥자가, 더 많은 옥자가 만들어질 수 있다. 아무리 맛이 '끝내준다' 할지라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 옥자를 먹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수요 에세이] 고전으로부터의 인성교육/전호환 부산대 총장

    [수요 에세이] 고전으로부터의 인성교육/전호환 부산대 총장

    2014년 책임과 인간성을 저버린 세월호 선장에 대한 여론의 질타가 빗발쳤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는 세계 최초로 ‘인성교육진흥법’이 제정됐다. 이 법안에 따라 학교에는 인성교육의 의무가 부여됐고, 인성에 바탕을 둔 교육과정을 운영해야 한다. 인성(人性)은 인간성이고 품성이다. 이를 아우르는 말이 바로 인문(人文)이다. 인성의 의미가 이러하다면 특정 교과목을 배우듯 교실에서 이뤄지는 주입식 교육만으로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20세기 초반, 미국의 대학교육에서도 인성이 화두가 되었다. 1929년 당시만 해도 평범한 대학이었던 시카고대학에 불과 29세의 젊은 로버트 허친스가 총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학생이 졸업 때까지 위대한 고전(古典) 100권을 읽도록 의무화하는 교육혁신을 단행했다.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는 이를 미국 최고의 교육이라 극찬했다. 우리는 허친스 총장이 학생들에게 고전을 읽게 한 근본적인 이유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53년 출판한 저서 ‘이상적 대학’(The University of Utopia)을 통해 당시 미국 대학이 직면한 교육 위기의 주요 원인을 산업화, 전문화, 철학의 다양성에 따른 소통의 부재, 그리고 사회적·정치적 순응주의 등 4가지로 진단했다. 또한 그는 대학교육의 진정한 목표와 대학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성찰했다. 그가 진단한 당시 미국 대학의 위기가 오늘날 우리 한국 대학이 직면한 위기와 고스란히 닮아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통해 산업화를 이룩한 나라의 경제적 국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나 사회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는 예술과 사상이 없는 문명, 혹은 예술과 사상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문명은 잡동사니 꾸러미에 불과하다고 했다. 오직 교육을 통한 도덕적·지적·심미적·정신적 성장이 민주주의 사회의 진정한 힘을 길러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허친스 총장은 당시 미국 대학들이 사회적 수요에 맞춰 설립한 운전학과, 미용학과 같은 지나친 전문화 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짚어냈다. 또한 교수들의 지적 영역의 전문화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예를 들어 1860~1864년 미국사 전공교수는 1865~1870년의 미국사 강의를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런 문제의 대안으로 그는 자유교양교육을 주장했다. 교육의 지나친 전문화는 건강한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나 의무를 이해할 수 있는 인격체를 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의 한계로 지적되는 통섭적 관점의 결여도 허친스 총장은 이미 지적하고 있다. 다양한 전문화 영역들이 그 본연의 지식과 철학적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각 영역들 사이의 소통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가 제안한 것은 토론을 통한 교육이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명은, ‘토론이 폭력을 대신하는 문명이며, 합의가 행동에 기초가 되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허친스 총장이 지적한 대학교육 위기의 마지막 요소인 사회적·정치적 순응주의는 재정 때문이라고 했다. 재정을 좇아가는 대학 교육은 독립된 사고와 비판을 할 수 있는 인재들을 배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서 너무도 공감되는 부분이다. 허친스 총장은 당시 미국 대학의 위기를 인성교육의 부재라고 진단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시카코 플랜’을 통한 고전 교육 강화를 제시했다. 그 결과 시카고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을 배출한 명문 대학이 되었다. 그는 졸업생들이 노벨상을 받게 하고자 고전을 읽힌 게 아니었다. 미국의 160여개 대학으로 확대되어 시행하고 있는 이러한 인성교육이 우리나라에 필요하지 않은가. 대학의 존재 이유는 지식의 축적과 전수이고, 대학을 지탱하는 핵심 원리는 공익이다. 인공지능 기술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지속성장을 위한 기반은 대학 교육이 담당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필요한 기술 개발도 중요하지만 먼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국가 정책도 필요하다. 위기의 대학에 인문학 교육 강화가 필요하고 국가 재정을 더 많이 투입해야 하는 이유다.
  • 박원순-스티글리츠 뉴욕 대담 “한국 미국 경제적 불평등 해소 시급”

    박원순-스티글리츠 뉴욕 대담 “한국 미국 경제적 불평등 해소 시급”

    북미 순방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은 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식당에서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를 만나 ‘불평등’ 문제 해결방안 등을 주제로 의견을 나눴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정보비대칭 이론’으로 2011년 노벨상을 받은 진보적 경제학자로 저서 ‘불평등의 대가’ 등에서 시장 실패를 정부가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두 사람은 미국과 한국 모두 경기침체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하고, 저소득층과 청년에 피해가 집중되고 있다며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이 시급하다는 데 공감했다. 박 시장이 먼저 “‘불평등의 대가’를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다”며 “한국의 불평등도 심각한 수준이다”라며 “내년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1대 99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티글리츠 교수에게 “한국 경제학자들과 만나 이 문제에 관해 토론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박 시장은 ”한국은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성장 동력이 줄어들어 젊은이들이 절망에 빠져 있다“며 ”고속성장에서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전환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시장은 “복지와 일자리를 위해서는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며 스티글리츠 교수가 저서 등에서 강조한 세제개혁의 중요성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박 시장의 서울 초청에 “아주 좋다”고 말한 뒤 2009∼2015년 사이 불평등이 더 심해졌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그는 ”2009∼2012년 3년간 91%의 경제성장 성과가 상위 1%에 모두 돌아갔다”며 “풀타임(full-time)으로 일하는데 저소득으로 전락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며 “최저임금을 높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도 60년 동안 최저임금 변화가 없었다“면서 ”연방정부가 어떤 정책도 내놓지 않았지만, 뉴욕,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등 지방정부가 최저임금을 올리려고 노력하고 있어 변화가 일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탄소세를 도입하는 방법으로 세금제도를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뉴욕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잡킬러(차두원·김서현 지음, 한스미디어 펴냄) 인공 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미래에 대한 충격적인 전망과 대안을 담아냈다. 284쪽. 1만 5000원.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스포츠 속 수학지식 100(존 배로 지음, 박유진 옮김, 동아엠앤비 펴냄)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 속에 숨어 있는 재미있는 수학 이야기를 케임브리지대 수리과학 교수인 저자가 알기 쉽게 들려준다. 368쪽. 1만 6000원. 지정학에 관한 모든 것(파스칼 보니파스 지음, 정상필 옮김, 레디셋고 펴냄) 세계 정세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지정학, 즉 국가의 권력과 공간의 이동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오늘날의 국제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서. 396쪽. 2만 2000원. 글쓰는 삶을 위한 일년(수전 티베르기앵 지음, 김성훈 옮김, 책세상 펴냄) 나이 50에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저자가 전하는 작가적 삶을 향한 글쓰기의 모든 것을 담았다. 348쪽. 1만 5000원. 버나드 쇼-지성의 연대기(헤스케드 피어슨 지음, 김지연 옮김, 뗀데데로 펴냄) 노벨상과 오스카상을 거머쥔 작가인 버나드 쇼의 놀라운 면면을 살필 수 있는 입체적이고도 생생한 전기. 708쪽. 2만 5000원. 산딸기 크림봉봉(에밀리 젠킨스 글·소피 블래콜 그림, 길상효 옮김, 씨드북 펴냄) 서양의 전통적인 디저트인 ‘크림봉봉’을 통해 살펴본 달콤한 역사 이야기. 지난해 뉴욕타임스가 올해의 그림책으로 선정했다. 48쪽. 1만 3000원.
  • 한국 노벨상 ‘0’인 이유는… 네이처 일침

    한국 노벨상 ‘0’인 이유는… 네이처 일침

    “21대0!” 지난해 10월 노벨상 수상자 발표 직후 장탄식과 함께 스코어 하나가 불쑥 터져 나왔다. 이 득점표는 역대 일본·한국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숫자를 의미한다. 한국이 ‘0’이다. 당시에도 다양한 분석과 대안이 나왔지만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가 또다시 한국의 연구·개발(R&D) 투자 현황을 분석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이유를 상세히 다뤘다. 2일 네이처는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는 세계 최고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노벨상 수상자를 내지 못하는 것은 기초연구에 대한 장기적 투자에 인색하고, 연구실 문화가 경직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2014년 기준 총 R&D 예산을 보면 한국은 민간과 정부 연구기관을 합쳐 723억 달러(약 85조 8201억원)에 달한다. 미국은 4569억 달러(약 542조 3403억원), 중국 3687억 달러(약 437조 6469억원), 일본 3630억 달러(약 430조 8810억원)로, 한국은 여전히 다른 경쟁국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 GDP 대비 R&D 예산을 따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같은 시점을 기준으로 4.29%에 달해 그동안 1위를 고수했던 이스라엘(4.11%)을 앞질렀다.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 등은 2~3%에 불과하다. 네이처는 이 부분에 집중하며, 한국이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을 5% 수준까지 확대하는 계획도 소개했다. 그러나 노벨상과 거리가 먼 것은 기초과학 분야에 수십 년 동안 장기적으로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데 한국은 과학 분야 투자의 역사가 길지 않고 멀리 내다 보는 투자문화도 정착되지 않은 탓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연구자의 말을 빌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려면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분야에 대해 집중 투자를 하는 것이 필요한데 지나치게 단기적 성과에 집착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연구계의 문화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서는 연구실 내에서 활발한 토론이 이뤄져야 하는데 한국은 유교권 문화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조용’하다. 전반적으로 밤늦게까지 어울려 술자리를 하는 문화가 연구계에서도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이것이 여학생들이 연구 활동을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성적 장벽’(gender gap)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돈 갚아라” 믿었던 그라민 은행이 집을 부쉈다

    “돈 갚아라” 믿었던 그라민 은행이 집을 부쉈다

    가난을 팝니다/라미아 카림 지음/박소현 옮김/오월의봄/384쪽/1만 7000원 “마이크로크레디트는 여성이 억압적인 사회적·경제적 조건에 맞서 싸워야 하는 사회에서 해방의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 보였다.” 2006년 노벨위원회가 방글라데시의 무함마드 유누스와 그가 창설한 그라민 은행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면서 남긴 말이다. 1976년 치타공대 경제학과 유누스 교수가 빈민 42명에게 개인적으로 27달러를 빌려주면서 시작된 그라민 은행은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성지(聖地)’로 숭앙된다. 빈곤층, 저소득층 대상의 소액 대출을 뜻하는 마이크로크레디트(지금은 마이크로파이낸스)는 빈곤 문제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혁명적 대안’으로까지 평가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한국에서도 사회적 기업, 사회적 경제, 착한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과 실천 운동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이 처음 시작된 마을의 사람들은 유누스를 자신들의 상황을 팔아 노벨상을 받은 ‘사채업자 유누스’라 부르며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출신의 미국 오리건대 교수가 치밀한 현지 조사를 통해 세상에 내놓은 ‘가난을 팝니다’는 지금 지구촌에서 ‘혁명적 대안’으로 들불처럼 번지는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실상을 폭로해 눈에 띈다. 그라민 은행이 빈곤층에 담보 없이 돈을 빌려줘 농방, 가게 운영을 통해 곤궁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는 평가와는 달리 빈민을 상대로 자본주의의 이윤을 확대하고 가난의 악순환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한다. “숙모, 오늘 그라민 은행에서 돈 받은 거 알고 있습니다. 사업할 돈이 필요한 조카에게 돈을 내놓는 게 숙모의 도리가 아닙니까.”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금을 받아 집으로 가던 노파가 저자에게 전한 조카의 협박이다. 돈을 내놓지 않는다면 다른 가족들이 돈을 내놓을 때까지 압박할 게 뻔하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신입회원을 받는 그라민 은행 사무실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출금을 주기 전에 먼저 돈을 회수할 수 있는지 확인합니다. 그라민 은행은 자선기관이 아니라 기업이에요.” 일반적인 찬사와는 너무 다른 현실이다. 괴리의 모순은 ‘대출금 회수율 98%’에서 정점을 이룬다. ‘인구의 36%가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나라에서 어떻게 대출금 회수율이 98%나 될까.’ 저자가 파헤친 비밀은 충격적이다. “대출 담당자들은 이 회수율을 유지하라는 상부의 압박을 받고, 채무자들은 빚 상환을 위해 다른 기관에서 또 다른 대출을 받기도 했다. 은행은 친족 관계로 연결된 공동체를 악용하기도 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예를 자극하고 수치심을 이용해 연대해 빚을 갚게 만든다. 갚지 못하면 집을 부수기도 한다.” 이것 말고도 책에는 놀라운 사실이 수두룩하다. 대출을 받는 건 여성이지만 실제 사용자는 대부분 남성이었다. 농촌 여성은 남성이 자본에 접근하는 도구로 구성될 뿐 자본의 소유자가 아닌 셈이다. 은행이 여성에게 대출금 책임을 지운 건 여성의 지위의 취약성 때문이지 사업가적 능력 때문이 아닌 것이다. 수치심을 이용한 이윤 중심의 정책이 가족과 공동체 연대 개념에 깊은 균열을 만들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라민 은행을 비롯한 마이크로크레디트 기관들은 대출 말고도 다른 금융상품이나 연금, 교육 대출, 건강보험 등으로 영역을 확장해 가는 추세다. 비정부기구(NGO)들이 허약한 국가를 대신해 빈민을 위한 필수 서비스 제공자이자 중산층에 일자리를 주는 고용주로 변신해 ‘그림자 국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라민 은행과 조직화된 NGO들은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대출에 상품을 끼워 팔거나 양계업자로 만들거나 대출자 공동체에서 NGO 정책을 강변하게 하는 등 수혜자층에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킨다고 한다. 저자는 방글라데시에서 이런 모순과 파행에 대한 연구와 지적이 일고 있지만 서구 등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지 못한 채 ‘혁명적 대안’이란 찬사에 묻혀 버리기 일쑤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결국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물결에 희생된 방글라데시 국민들이 집단행동을 위한 시민집단을 조직화해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가의 풀·흙… 그 안에 ‘신약의 미래’ 있다

    길가의 풀·흙… 그 안에 ‘신약의 미래’ 있다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은 윌리엄 캠벨 미국 드루대 명예교수와 오무라 사토시 일본 기타사토대 명예교수, 중국 투유유 중의과학연구원 교수 등 3명에게 돌아갔다. 캠벨 교수와 오무라 교수는 토양에서 상피병이나 사상충증 등 기생충으로 인한 질병을 막을 수 있는 물질을 추출하고, 투 교수는 개똥쑥이라는 식물에서 학질모기가 옮기는 말라리아 치료제인 ‘아르테미시닌’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수상자들은 흙과 식물 등 자연에서 추출한 물질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질병 치료제를 발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천연물 신약 개발을 비롯해 천연물을 이용한 바이오산업은 이미 선진국 등에서는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다. 천연물 바이오산업에서 가장 부가가치가 높고 관심이 집중되는 분야는 천연물 신약이다. 천연물 신약은 육상이나 바다 동식물에 포함돼 있는 물질 중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활성을 가진 물질을 추출해 만든 의약품을 말한다. 기존의 신약 개발은 치료 대상을 설정하고 치료 효과가 있는 물질을 찾아 생물체 최적화와 동물실험, 3차에 걸친 임상시험을 거쳐 신약으로 승인을 받고 제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 기간이 짧으면 10년, 길게는 15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천연물 소재 바이오신약은 전통의학을 통해 임상적 효능과 안전성이 어느 정도 입증됐기 때문에 최종 제품으로 나오는 데 시간을 절반 가까이 줄일 수 있어 화합물 합성 신약의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천연물 신약처럼 임상경험과 경험적 관찰을 해석해 효능과 안전성이 입증된 추출물이나 활성성분을 대상으로 현대 과학기법으로 효능과 작용 메커니즘을 다시 밝힌 뒤 임상연구를 거쳐 제품으로 개발하는 과정을 ‘역(逆)약리학’(reverse pharmacology)이라고 한다. 천연물을 이용한 신약 개발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곳은 중국이나 인도 등 전통의학이 발달한 곳들이다. 인도의 경우 전통 의약시스템인 ‘아유르베다’를 바탕으로 16개 국립 연구소와 병원, 제약사들이 참여한 범국가적 프로젝트를 통해 골관절염, 간염, 당뇨 관련 치료제 개발을 위한 ‘약초 약물개발’(HDD)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아유르베다는 1500가지 약초와 1만개 이상의 처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인도의 전통의학 시스템이다. 인도 정부는 HDD 프로젝트를 통해 골관절염 및 류머티즘성 관절염 치료제, 당뇨 치료제, 건선 치료제 등을 찾아 상용화 전단계인 임상 3상 시험을 진행 중에 있다. 생명공학 전문가들은 “세계적으로도 합성 약품의 부작용이 많아지면서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오랜 시간 일종의 임상검증을 받은 천연물 소재에서 질병의 예방 치료 효능을 발견하려는 연구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존의 제약 연구방식은 한 개의 화합물이 하나의 목표물과 작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천연물은 수많은 화합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천연물이 인체에 들어올 경우 다양한 종류의 단백질 및 유전체와 작용한다. 천연물을 이용한 신약 개발이 부진했던 이유는 천연물이 갖고 있는 어떤 성분이 어떻게 효과가 있는지 밝혀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연물을 이용한 신약 개발은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시스템 생물학’과 만나면서 좀 더 쉬워지고 있다. 시스템 생물학은 물리학, 화학, 수학, 네트워크 이론 등을 활용해 생체분자의 대사, 조절, 신호 등 기능적 해석을 해 세포모형을 만든 다음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약효를 확인하거나 세포의 변화를 관찰하는 학문이다. 천연물 신약 개발과정에서 시스템 생물학을 이용하면 ▲특정 질병과 연관 관계에 대한 정보를 좀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고 ▲특정 질병과 관련된 정보가 밝혀져 있지 않은 새로운 단백질 성분과 약품의 상호관계를 도출해 낼 수 있으며 ▲좀 더 효과적이고 안전한 치료제 개발이 가능해진다. 이번에 노벨상을 받은 투유유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중의과학연구원과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 한국한의학연구원도 시스템 생물학과 바이오 이미징 등 최신 과학을 접목시켜 천연물을 이용해 당뇨합병증, 인지장애, 노화, 갱년기, 항암 등 노인성·난치성 질환 대응 신약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의학연구원 관계자는 “동의보감 같은 한의학 고문헌에 나와 있는 천연물 등 한약재를 현대 과학으로 분석해 새로운 개념의 치료제 개발 및 예방을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라며 “천연물 소재를 이용해 혈전성 질환, 성장호르몬 분비 촉진 물질, 당뇨합병증 예방 물질, 비만 치료 및 예방 물질 등을 개발해 국내 바이오기업에 기술이전을 하기도 했다 ”고 설명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겉도는 해외 석학 초빙 (하)해법과 대안] 외국은 인재 초빙 어떻게

    “천인계획을 바탕으로 한 985공정으로 전 세계 우수 인재를 중국으로 흡수하라.” 2000년대 들면서 중국은 해외 인재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천인계획’은 1000여명의 해외 석학과 우수 연구자를 초빙한다는 중국 정부의 인재 유치계획이고 ‘985공정’은 세계 일류대학 육성 프로그램이다. 해외 우수 인재들을 흡수해 미국을 뛰어넘는 인재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중국의 야심이 숨어 있는 정책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연합(EU), 중국, 일본 등 전 세계 국가들은 해외 우수 인력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특히 중국은 정부 주도로 파격적인 재정 지원과 보상을 통해 전략 분야 우수 인재를 끌어들이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2008년에 시작된 천인계획은 2018년까지 40~50개의 거점 연구센터를 만들어 1000명의 해외 고급 인력을 유치하고 해외에서 체류 중인 중국인 유학생을 불러들여 중국이 취약한 첨단 과학기술 분야나 금융 분야 수준을 높이겠다는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천인계획과 함께 ‘111계획’도 있다. 해외 우수 인력 1000명을 유치해 세계 일류 수준의 대학 100개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각 대학마다 1명 이상은 반드시 노벨상 수상자 등 해외 석학인 ‘학술대사’를 초빙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해외 인재들에게는 수당은 물론 국제여비, 거주비용, 의료비용 등을 지급하며 연구 관련 비용도 전액 제공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국방 분야 연구 수준을 높이기 위해 전 세계 우수 과학기술 분야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테마섹 리서치 펠로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연구자들에게 6년 동안 최대 100만 달러의 연구보조금과 높은 생활 거주 여건을 제공해 장기 체류를 유도하고 있다. 중국 이외에 미국이나 EU 등은 해외 석학이나 유명 연구자를 유치하기도 하지만 박사 학위를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포스트 닥터(post-doc) 연구자 등 성장 잠재력이 큰 신진 학자들을 유치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특히 선진국들은 자국의 연구 및 생활환경의 편의성을 최대한 활용해 인재를 끌어들이고 있다. 한국외대 기상사업단 김병수 박사는 “선진국들은 연구 수준이 이미 정점에 달한 석학들을 유치하기보다는 발전 잠재력이 큰 신진 학자들을 유치해 자국의 성장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며 “선진국을 쫓아가야 하는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선도형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발전 잠재력이 큰 연구자들이 모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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