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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선자가 넘어야할 두 고개/임춘웅 논설위원(서울논단)

    ○준비된 대통령상 보여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에 당선된지 벌써 두달여가 돼 가고 있다.2주후면 명실상부한 대통령에 취임한다.다른 대통령 당선자의 경우라면 그동안 선거로 지친 피로도 씻을 겸 휴가도 즐겼을 것이고 지금쯤엔 여유있게 앞으로의 국정운영 계획을 가다듬으며 마무리 조각작업이나 하고 있을 때다.그러나 그는 그동안 잠시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김 당선자는 당선이 선포된 그날부터 국정의 상당부분을 나누어 갖고 열심히 일했다.보기에 따라서는 임기가 두달 이상 늘어난 초헌법적인 대통령이 돼버린 셈이다.6·25이래의 국난이라는 IMF사태가 그럴 수 밖에 없는 특수한 여건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그 긴박했던 IMF위기를 한고비 넘기는 능력을 내외에 보여주었고 국민들은 이제 다소나마 안심되는 마음으로 ‘준비된 대통령’의 인사내용과 그가 펼칠 경제개혁,정치개혁 프로그램들이 과연 어떤 것일지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DJ는 실로 비범한 인물이다.그 많은 시련과 한 인간으로 참아내기 어려웠던 고난들,비열하기 이를데 없는 음해와 끝없는 정치적 박해를 끝내 극복하고 결국 정상에 오르는 초인적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다.따져 보면 이나라 역사를 다 뒤져보아도 그만큼 시련이 많았고 그만큼 극적인 승리를 얻어낸 인물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반세기에 가까운 정치생활 동안 그는오직 반독재,민주화 투쟁으로 일관된 정치역정을 살아왔다.그동안 그는 그많은 좌절 속에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고 수많은 정치적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박정희 독재와 싸웠고 유신에 온몸으로 맞섰으며 전두환 군사독재에 투쟁했고 노태우 정권·김영삼 정권으로 이어지는 긴긴 세월을 인내하며 견뎌냈다. 그래서 이나라에 그보다 정치도덕성에서 수월한 인물이 없다.정치적 일관성에서 뿐 아니라 정치적 판단과 추진력에서도 그를 따를 인물이 적어도 이시점에는 보이지 않는다.민주당을 놔두고 신당을 만들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또다시 4기의 도전장을 내놓았을 때도 그가 과연 승리하리라고 믿은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그러나 그는 해냈다.이제 감히 누가 그의 판단에 “NO”라고 말할 수 있으며 누가 그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가. IMF사태도 앞으로 특별한 이변이 없는한 김대중 당선자는 약속한대로 내년말이면 대충은 해결의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그렇게 되면 전 정권이 망쳐 놓은 경제를 다시 살린 이 시대의 영웅으로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시쳇말로 DJ는 요즘 참 잘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모든게 잘돼가고 있는 데에 바로 DJ의 함정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아무도 그앞에서 이의를 달 수 없는 인물,아무도 그와 대적 할 수 없는 인물,그것이 바로 DJ의 함정이다.그러나 이런 가설은 그 앞에서 바른소리,다른 생각을 소신껏 진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라는 전제 아래서 가능하다.DJ 스스로도 중요한 일에 다른 사람의 판단을 기대하거나 다른 사람의 능력을 빌리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오랜 정치생활을 통해 자신보다 정의롭고 자신보다 뛰어난 판단을 하는 사람을 본일이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그의 지시와 판단을 따를 충실한 일꾼들만 있을 수도 있다.이제 DJ에게는 누구의 자문도,누구의 권고도,어떤 석학의 지식도 필요치 않게 될 지도 모른다. ○자신감과 독단의 경계선 DJ는 지금 확신에 차 있다.그것은 자칫하면 그를 독선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국민과의 TV토론에서 그는 IMF사태도 이나라에 민주주의가 정착돼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진단했다.그는 확실히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고 그것을 위해 평생을 싸웠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독자적으로 처리하려는 관성에 빠져 들지도 모른다.아무도 자기만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없는데 누구와 민주주의를 상의할 것인가.김대중 당선자는 이제 그의 앞에 놓인 이런 함정의 위험성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또 60%의 반대자들을 생각해야 한다.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힘을 가진 기득권 세력이다.그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지는 DJ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득권층 반발 차단해야 기득권 세력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제어할 수 있다고믿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렇게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다.때가 아닐때는 죽은듯 숨어 있다가도 삐끗하면 벌떼처럼 일어나는 교활함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김영삼 정권의 실패도 따지고 보면 이들 기득권 세력의 반동에 결국 꺾이고 만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참으로 민주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가고 그런 민주화를 통해 폭넓은 국민의 지지를 받게되어 민주세력이 그를 중심으로 단단히 뭉치지 않으면 그도 언젠가는 벽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그리고 반대세력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력하고 끈질기다는 것을 그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를 놓친 다음일지도 모른다. DJ의 개혁과 DJ정권의 성공 여부도 결국엔 이들 반대세력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전략전술적 대책이 얼마나 단단한 가에 달려있다.
  • 직업전문화/전문가만이 ‘실업파고’ 넘는다(신노사시대:4)

    ◎기업들 상시·개별채용으로 이·전직 활발/임금체계도 철저한 시장가치에 의해 결정 고용조정(정리해고) 등의 입법화로 노동시장에도 대변혁의 회오리 바람이 몰아칠 전망이다.대규모 공채는 상시·소수·개별 채용형태로 점차 바뀌고 활발한 이직과 전직이 자리잡을 전망이다. 이같은 변화는 이제 거스를 수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삼성경제연구소의 공선표 실장(경영학 박사)은 “노사정 합의로 기업의 조직구성,임금 및 승진체계,직무의 개념에 획기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졌다”면서 “그런 변화는 개인과기업 및 국가의 생산성 향상이라는 같은 목적을 향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먼저 기업의 인적 구성의 변화다.정리해고의 합법화로 직원들의 상당부분은 애사심(로열티)을 상실할 전망이다.통상 상위 20%,하위 20%,중간 60%로 짜여진 기업의 인적 구성은 중간계층이 없는 조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상위 20%에 대한 고액연봉의 지급과 하위 80%에 대한 급여 삭감과 같은 이중적 임금체계도 뿌리내릴 것으로 여겨진다.급여가 철저하게 시장가치에 의해정해지는 것이다.생산성에 따라 임시직이나 시간제 근로자들이 정식 직원을 대체할 가능성도 크다. ‘업무’와 ’직장’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도 예상된다.이 회사 저 회사 옮겨다니는 직장인들이 그동안 ‘철새’취급을 받았으나 앞으로는 ‘경쟁력’을 갖춘 개인으로 간주될 것이다.광고업계에서는 이같은 이직이 보편화돼 있으며 이직 때마다 임금이 뛰는 게 보통이다. 해고에 이은 이직을 가능하게 하는 동인은 업무의 표준화와 전문화이며 상시·소수·채용 등 채용방식의 변화다.특정 기업,특정 부서에서 일정기간 근무한 직장인이 다른 기업에서 경력을 인정받을 경우 ‘고용조정’ 조치가 내려저도 언제든지 자리를 뜰 수 있다.여기에는 특정 직종,직급의 직원이 하는 일은 어느 기업도 동등한 것으로 대우해주는 풍토의 조성이 전제돼야 한다.그것은 일의 ‘표준화’이다.기업은 자사 직원들이 ‘시장가치’를 갖고 해고 후에도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이를 위해 단독으로 또는 공동으로 ‘고용유지센터’를 설립,일의 개념정립과 함께 경력평가 등을 맡도록 해야 한다. 업무의 표준화는 ‘전문화’와 함께 진행된다.일본은 채용시 간부나 경영자로의 승진희망자와 비희망자를 따로 뽑는다고 한다.전자의 경우 해고의 위험은 있지만 승진의 혜택이 따르는 반면 후자는 승진은 되지 않지만 특정분야에서 전문기술을 축적,전문가로 양성될 수 있다.일종의 전임자(expert)와 일반직(generalist)의 양분화 현상이다.무게는 전임자의 숫적 증가로 기울 수밖에 없다.개인의 생존과 기업의 고부가가치 확보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한 재벌그룹 인사담당자는 “변화가 대세이긴 하지만 당장 미국식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미국식의 채용문화의 정착에는 아직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다.
  • 긴장한 재계 “대세는 따라야”/총수 재산 헌납…빅딜…기조실 폐쇄

    ◎자율 내세운 독촉에 냉가슴/주총 앞두고 강도 높여 난감/내심은 불만… 실무작업 진행 재계가 새 정부의 정책기조를 따라가느라 숨가쁘다.개혁적인 정책주문에 당혹해 하면서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자 일단 받아들이고 쫓아가는 모습이다. 재계는 총수재산 헌납과 빅딜(사업 맞교환) 등 시장경제원칙과 거리가 있는 정책 기조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데 이어 회장 비서실과 기조실의 조기 해체 방침마저 공론화되자 당혹해 하는 분위기다.특히 ‘정책·실물경험이 없는 서생’으로 평가되는 인사가 청와대 수석후보에 거론되자 새 정부 정책기조의 ‘격변성’을 예견하며 아연 긴장하는 분위기마저 돌고 있다.그렇다고 자율의 이름으로 변혁을 촉구하는 새 목소리에 귀 귀울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벙어리 냉가슴’이다. S그룹 관계자는 “결합재무제표를 도입하고 상호지급보증을 해소해야 할 주체(회장실 등)를 해체하라니 어떻게 하라는 얘긴 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다.D그룹 회장실 관계자는 “연차별 부채비율 감축계획이나 상호지급보증 해소계획은 그동안 개선을 위해 노력해온 만큼 어느정도 가능하지만 주총이 코앞에 닥친 상태에서 회장실이나 기조실을 없애라는 것은 구조조정 작업을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꼬집었다. 재계는 9일 전경련회관에서 이헌재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장을 초청,간담회 형식으로 새 정부의 재벌정책 방향과 수위를 읽었다.이단장은 이날 기조발언에서 기업개혁의 대강을 언급했다.“무엇보다 국제금융시장과 외국인투자가에 투명성과 책임경영의 명확한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외채협상은 우리 경제문제 해결의 실마리일 뿐이다.기업은 회계제도를 국제기준에 부합되게 하고 재무관련 정보를 공개해야 하며 재무구조 개선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같은 취지에 따라 이번 주말까지 구조조정 계획을 내달라고 했다.어디까지나 자율을 내세운 주문이었지만 사실은 촉구였다. 이단장의 기조발언 중심으로 진행된 이날 ‘기조실임원 운영위원회’는 이단장의 일정때문에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참석 임원들은 새 정부 정책기조의 감을잡을 수 있었다.30대 그룹은 구조조정계획 제출에 응하기로 하고 새 정부 재벌정책에 대한 재계 목소리는 별도로 정리해 정부에 제출키로 했다. 이에 따라 각 그룹들도 불만 속에서 실무작업을 진행 중이다.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이 계열사 대표이사를 맡거나 대주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비서실 관계자는 “새 정부가 지주회사 설립에 대해 명확한 입장이 없는 상태에서 비서실을 해체할 경우 결합재무제표 작성 등의 업무를 맡을 조직이 필요하다”면서 “이에 따라 현재 계열사별로 운영 중인 소그룹제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대우그룹은 김우중 회장이 당선자와 만난 뒤 밝힌 대로 이달 중순까지 구조조정안을 예정대로 발표키로 했다.회장실 관계자는 “이날 빅딜과 관련된 언급이 없었던 점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도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핵심부서가 없어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난감해 하면서 “비대위측의 요구를 수용,주주총회때까지 대안을 모색해야 하겠지만 아직 뚜렷한 방법이없다”고 고충을 토로했다.SK그룹은 업종줄이기와 지급보증 해소,부채비율 축소 등의 내용을 담은 구조조정 계획을 14일까지 제출할 방침이다.한 관계자는 “그동안 경영기획실 규모를 절반인 60명 수준으로 줄여온데다 남아있는 기능도 인력관리와 홍보 등이어서 해체시 오히려 비용부담이 늘어난다”며 “구조조정 계획에 기획실해체 문제를 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 국무회의(대한민국 50년:6)

    ◎48년 첫각의 단기냐 서기냐 갑론을박/50년대 미 기록 “이승만 독주로 요식행위에 불과”/5·16후 한동안 일요일 빼곤 매일 열어… 시국 반영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기 꼭 열흘전인 1948년 8월5일 중앙청 2층 이시영 부통령실. 이범석 전 민족청년단장을 비롯해 장택상 윤치영 김도연 이인 조봉암 유진오씨 등 당시의 ‘거물’들이 한사람씩 들어섰다.이승만 박사가 7월20일 간접선거에서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뒤 지명한 국무총리와 장관들이었다.신임각료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이대통령이 들어섰다.장관들은 예를 갖춘뒤 회의에 들어갔다.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이대통령이 주재한 사상 첫 국무회의였다. 회의를 하는 동안 이대통령과 각료들은 약간 흥분해 있었다.일제 때의 독립운동,미군정하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초대 11부3처장관 출범 국무회의는 정부가 수립됐다는 감격의 상징이었다.흥분을 삭이고 국무위원들이 다룬 의제는 구미지역에 특사파견문제.신생국가에다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외국의 국가승인을 위한 외교가 절실했던 탓이다.미국과 구라파지역에 특사로는 조병옥 박사와 김활란 여사가 임명됐다.특히 조박사의 임무는 미국의 주한 미군철수계획을 저지하는데 모아졌다.조박사의 노력에도 미국 설득이 여의치 않자 이대통령은 장면 박사를 초대 주미대사로 파견했다. 초대 11부 4처의 장관을 맡은 국무위원들은 각 정파의 분배를 고려한 연립내각으로 이뤄졌다.이대통령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소속은 윤치영 내무·전진한 사회·이청천 무임소장관 뿐이었고 김도연 재무장관은 김성수씨의 한국민주당,임영신 상공은 여성국민당수,김병연 총무처장관은 조선민주당 소속이었다.그외에 장택상 외무장관은 전수도 경찰청장,이인 법무장관은 전검찰청장,민희식 교통장관은 전군정청 운수부장,조봉암 농림 구영숙 보건장관은 무소속이었다.대학별로도 철저한 균분이 이뤄졌다.안호상 문교(서울대교수),유진오 법제처(고려대교수),이순택 기획처(연세대교수),정인보 고시위원장(국학대학장) 등이었다. 연립내각 구성은 국무총리 인준과정에서의 진통때문이다.이대통령은 7월27일 정부 공보 1호로 초당적이고 이북을 대표할 이윤영 조선민주당부위원장을 총리로 임명하는 추천서를 국회에 제출했다.반대세력인 국회의 한국민주당·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은 토의조차 거치지 않고 부결시켜 버렸다.대통령의 직무에 대한 국회의 첫 비토였던 셈이다.한민당은 김성수씨를 국무총리에 임명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이대통령은 이범석 민청단장을 총리로 지명했다.이초대총리는 한민당이 반대했으나 가까스로 인준됐다.국회는 그러나 민희식 유진오씨 등의 신임각료에 대해 친일논쟁을 제기하는 동시에 대통령에게 숙청을 건의해 최초 국무위원들은 첫걸음부터 삐꺽였다. 이대통령은 이런 논란끝에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으며 미군정은 이날 자정을 기해 군정해제를 선포했다.해가 바뀐 49년의 첫국무회의는 1월3일 월요일 하오 3시30분 부통령실에서 열렸다.이대통령은 간단히 개회만 하고 국무총리와 내무장관이 사회봉을 이어받았다.법원조직법·검찰청법·변호사법 등 3건을 심의했고 이총리는 당시 주한 중국대사가 찾아와 한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한다고 통보했음을 알렸다.당시로서는 정부의 체계를 세우고 외국으로부터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국가 승인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미국인들이 남기고 있는 50년대 국무회의에 대한 평가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이대통령의 독주아래 힘 한번 쓰지 못하는 허수아비 회의라는 얘기다.사실 이대통령 때 뿐 아니라 대통령제하의 국무회의는 의례통과일 수 밖에 없었다. ○고 총리 ‘각의 활성화’ 마련 국무회의 의장인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는 경우는 외국순방후의 설명,97년 국제통화기금(IMF) 차관도입 동의안 같은 주요사안을 심의할 때 뿐이다.의사봉은 대부분 부의장인 국무총리 몫이 됐다.전두환 대통령 당시에는 직접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경우도 있었다.서슬 퍼런 전대통령 앞에서 국무위원들은 절절 매야 했다.행여 전대통령이 질문을 하면 법안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장관들은 혼쭐이 났다.결국 국무회의 개최장소는 청와대를 떠나 정부세종로청사 19층으로 되돌아 왔다.국무회의는 헌법(88조,89조)상 국정의최고심의기구이지만 실제 운영은 법령안·조약안을 심의,의결하는데 그친다.법안심의도 이미 차관회의를 거쳐 상정됐기 때문에 토론도 거의 없다.고건 총리가 지난해 3월 부임하자 ‘국무회의 운영 활성화 방안’을 마련한 사실도 국무회의의 무기력함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역대 총리는 이범석 초대에서부터 고건 총리까지 모두 30명.여기다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던 10명의 총리서리까지 합치면 모두 40명이었지만 총리에 따라 국무회의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었다.군·학자·법관·행정관료 등 출신 배경에 따라 국무회의 진행방식도 달라졌다.딱딱한 분위기가 연출됐는가 하면 매끄럽게 회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혼란기때 가치 빛나 국정의 최고심의기구인 국무회의는 혼란기에 더욱 그 가치가 빛났다.4·19의거,5·16혁명,80년 신군부의 등장….합법성을 가지려면 국무회의는 필수불가결한 절차였다.60년 4월19일 상오 9시 중앙청 3층 국무회의실.이대통령과 허정 외무·권승열 법무장관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는 학생데모대 사태가 보고됐다.경비계엄선포·비상계엄선포 등의 안건도 의결됐다.하루만인 4월20일 또다시 국무회의가 열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반영했다.데모사건 피살자의 장례비를 한사람당 50만환씩 지급하기로 하는 안건이 처리됐다. 5·16 혁명이 일어난뒤 국무회의는 며칠동안 열리지 못했다.23일 하오 5시 국무회의에서는 ‘군사혁명에 따른 정치·도의적 책임을 지고 총사퇴할 것’을 의결했다.총리가 배석자를 나가달라고 주문하면 국무위원 총사퇴 결의를 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다.국무회의는 대외관계를 중단하지 않도록하고,성행하던 유언비어 단절을 위해 노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국무회의는 혁명이후 당분간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열려 국정을 다뤘다.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옹/“이 대통령 개별 설득 단기 채택”/“한글전용법 제정 제의했으나 모든 장관 반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문교부장관을 맡아 50년까지 3년간 장관직을 역임한 ‘한뫼’ 안호상옹(96). 안전장관은 대한민국 정부의 기초를 세운 초대내각 11부4처의 국무위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국무회의 운영에 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당시 안전장관이 제안한 제도·법 등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돼 아직도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안장관은 “첫번째 국무회의로 기억하는데 국가 연호에 대한 갑론을박이 치열했어요.갑자을축의 육갑파도 있었고,서기연호를 쓰자는 사람도 있었죠.또 임시정부수립연도부터 쓰자는 이들까지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안전장관은 국무회의가 끝난뒤 이승만 대통령을 따로 찾아가 단기사용을 설득하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하자고 제안했으며 이대통령이 이를 모두 받아들여 다음 국무회의에서 결정됐다.그러나 단기사용은 5·16 이후 서기로 바뀌었다. 또 한문세대가 지배적이었던 그 당시 안전장관이 발의한 한글전용문제도 국무회의의 큰 관심거리였다.이 문제로 회의에서는 장관들간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국무회의에서 내가 한글전용법을 제정하자고 했더니 모든 장관이 반대했어요.특히 나하고 가까운 사이였던 임영신 상공부장관이 공격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서로 ‘무식쟁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죠.침묵만 지키고 있던 이대통령이 안되겠던지 ‘과하니 그만하시오’라면서 중단시켰어요”. 이처럼 하나의 안건을 놓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당시 장관들은 나라를 새로 세운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안전장관은 또 “그때는 가난했던 시절이라 그런지 각료들도 돈이나 권력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초대내각에서 제일 먼저 사임한 민희식 교통부 장관은 철도사고에 책임을 지고 40일만에 물러났으며 전진한 사회부 장관은 공무원노동조합을 금지한데 대해 화를 내고 그만두었다.또 무임소장관이던 이청천씨는 “싹을 보니 틀렸다”는 말만 남기고 각의에서 물러났다.이 모두가 내각 6개월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안전장관은 전했다. □특별취재반 이경형 부국장겸 정치부장 이용원 문화부 차장 김경홍 정치부 차장 최병렬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희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지방자치 강화·규제 완화는 대세/양재호(공직자의 소리)

    최근 일부 정치권에서 서울시와 6대 광역시의 구청장 선거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로 바꿔야 한다는 문제가 논의중이다.지자체가 시행된 이후 주민들과 공직자가 한마음으로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시점에서의 이같은 주장은 과거 관치주의로의 회귀이다. 구청장 선거제가 폐지돼야 마땅하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당함을 지적하고자 한다.우선 임명제로의 회귀는 30년만에 시작된 ‘풀뿌리 민주주의’의 명백한 후퇴이다.1천만명이 넘는 서울의 경우 1인의 민선시장이 시정을 끌어가는 것이 얼마만큼의 효율성이 있는가.관료집단에 의한 획일적인 도시관리로 귀결되고 지역의 주인인 주민이 일궈가는 자치는 실종되고 말 것이다.일본에서도 도쿄도의 특별구(준 자치구) 구청장을 직선제로 한 이후이같은 주장에 근거해 임명제로 했으나 결국 주민 직선제로 다시 돌아와 시행중이다. 95년 민선자치 실시이후 대민 서비스행정이 현격히 강화되고 공직의 탈 권위주의화가 되었으며 주민들도 구 살림살이 주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자치구마다지역발전과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피나는 경쟁을 하고 있으며 이는 자치행정의 효율성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광역자치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간의 갈등으로 업무의 비효율성을 지적하고 있으나 이같은 갈등은 비단 자치구만의 문제가 아니며 이 제도의 시행전에 어느기간동안 예상했던 것이다.무엇보다도 이러한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선결조건이라 하겠다.일본의 경우와 같이 지방자치법에 시·구협의회를 설치해 인사문제 등 문제점들을 협의 조정해 나가면 될 것이다.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지역의 국회의원과 구청장간의 역할분담 문제도 마찬가지다.영역을 명확하게 설정해 국회의원은 국정을 이끌어가고 구청장은 지역의 살림을 각각 맡아 끌어가는 체제를 갖추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일각에서는 제기되는 구청장을 비롯한 자치단체장의 정당공천 배제 문제는 선거가 대표적인 정치행위이고 이미 정당정치 체계를 갖추고 있으므로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소속정당의 영향을 받지않는것은 아니지만 독일의 경우와 같이 정당의 간섭과 통제보다는 지방자치발전을 위해 지원과 협조체계를 갖춰나가면 된다. 결론적으로 앞으로의 정책은 중앙정부보다 지방자치부문이 강화돼야 하고정부에 의한 민간부문에 대한 통제와 규제도 완화돼야 한다.지방자치의 역사가 짧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특정인 특정 정파의 이해나 감정보다는 국리민복의 진실된 입장에서 국가의 틀을 짜고 운영해야 한다.
  • 의원수 감축·정당조직 개편 공감/가닥 잡는 여야 정치구조 개혁

    ◎의원들 속으론 “지금이 적정선”… 진통 예고/정치권 고통분담 대세… 특위구성 논의할듯 정치권의 정치개혁 방안은 국회의원 정수 조정과 선거구제 개편,지방의원 정수 조정,중앙당과 지구당 등 정당조직 개편으로 요약된다.정치권의 거품을 빼고 돈안드는 선거를 위해서는 반드시 손질을 해야할 부분들이다. 여야는 우선 2일 원내총무 접촉을 거쳐 3일까지 지방선거를 한달 가량 늦추는 안을 마련한다는 복안이다.본격적인 개혁을 위해 시간을 확보하자는 취지에서다.여기까지는 여야가 거의 합의를 해놓은 상황이어서 순조롭게 처리될 전망이다. 문제는 다음부터다.여야가 지방의원 정수를 줄인다는 데에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으나 국민회의·자민련은 2분의 1 수준인 반면,한나라당은 이보다 축소 폭이 커 광역의원은 3분의 2,기초의원은 2분의 1 수준이다. 이 과정에서 정당공천과 출마를 노리는 현 지방의원들과 후보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일단 현행 선거구는 그대로 둔다는 방침이어서 정수조정에 대한 반발을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최대 관건이다.정당조직 개편에 대해서는 여야의 생각이 거의 같다.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너나없이 부담을 줄여야 할 판이다.대체적으로 중앙당은 정책 및 당원관리 기능만을 남기고 지구당은 후원회로 운영될 공산이 크다.대신 시·도지부의 위상이 강화될 것으로 여겨진다. 가장 큰 걸림돌은 국회의원 정수 조정과 선거구제 개편이다.여야가 대체로 200∼250명 선을 얘기하고,중·대선구제를 선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15대 국회의원의 임기가 2000년 4월까지 보장되어 있어 현재는 IMF 때문에 공감을 표시할 뿐,개인적으로는 “지금이 적정한 수준 아니냐”는 반응들이다. 여야는 정치권의 고통분담이라는 큰 흐름을 거역할 수 없어 일단 특위를 구성,이 문제도 심도있게 논의는 할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많은 의원들이 내각제 개헌과 맞물려 조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정치권이 지방의원 정수 조정 말고 국회의원 정수와 선거구 조정문제는 큰 원칙만을 약속하고 이번 임시국회를 끝낼 가능성이 높다.
  • 고지/예르진­스타니슬로 공저(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경제는 정부·시장 주도권 싸움터”/“국가통제 고비용·저효율성 노출/최근 20년새 시장원리 위력/대공황·전쟁 등 위기땐 상황 역전”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나라 경제의 모든 것이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정부는 손을 놓아야 하는가.그래도 국가 경제인 만큼 정부의 지휘와 관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학술적인 톤이 강한 이런 질문이 ‘IMF 시대’를 맞아 한국에서도 어느 때보다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한국 및 동남아의 금융위기는 기업과 은행이 수지타산의 경제 및 시장 원칙에 따라 돈을 빌리고 빌려주었다기 보다,정부의 힘을 업거나 정부의 눈치를 짐작해 금융거래를 한 ‘벌’이라는 해석이 강하다.문제의 아시아 국가들은 금융 뿐 아니라 경제 전반에 정부의 관여가 지나쳐 시장 원칙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서방 선진국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일단 아시아 경제는 정경유착의 부패,관의 권위주의적 개입과 같은 문제가 심하다고 치자.그러면 이런 문제점이 없는 국가에서 정부는 경제를 완전히 시장에 방임하고 있는가.한국 사람들이 자주 들을 수 밖에 없게 된 IMF 개혁 프로그램에는 시장원리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그래서 잘못된 관치경제의 폐해가 없는 선진국에선 시장원리라는 거대한 자동기계에 의해 국가경제 전체가 돌아가고 정부는 팔짱만 끼고 있으려니 싶다.그러나 이는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다니엘 예르진과 조셉 스타니슬로가 공동 저술한 ‘고지’는 ‘근대사회를 개조하고 있는 정부 대시장의 전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이들에 따르면 20세기들어 선진국을 포함해 모든 나라에서 시장과 정부는 경제운용의 주도권을 놓고 간단없는 쟁탈전을 벌여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선진국이라 해서 시장원리의 메커니즘이 지휘권을 완전히 차지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물론 20세기 후반부터 시장화가 주도적 추세이긴 하지만 선진국 경제에서 조차 현재와 같은 시장의 대 정부 우위는 최근 20여년 사이의 현상이라고 이들은 말한다.21세기를 앞두고 시장이 국가경제 전체를 잘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에 보다 근접한 것은 사실이나 점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고지’는 러시아 레닌의 말이다.1922년 신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시장 기능을 일부 허용하는 데 대한 반발이 생기자 레닌은 경제의 핵심요소는 국가가 통제한다고 발표하고 이때의 경제 핵심요소를 고지로 표현했다.국가경제를 지휘하기에 유리한 고지를 국가가 장악한다는 것인데 이는 영국 노동당의 정책,인도식 사회주의 경제체제 등을 거쳐 세계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이 용어가 실제 사용되든 되지 않든,이 고지 경제의 목적은 국가경제의 전략적 부문 즉 주요 산업 및 기업에 대해 정부통제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이같은 혼합경제는 흔히 개도국의 전유물로만 여기기 쉬우나 이 책의 저자들은 소유권으로서가 아니라 경제 규제로써 정부가 고지를 통제하고 있는 미국도 ‘규제 자본주의’란 형식으로 혼합경제에 속한다고 말한다. 한때 국가통제의 추세는 거스릴 수 없는 대세로 여겨졌었다.미 대공황 이후의 뉴딜정책 기간과 2차대전 직후가 특히 그러했다.70년대 초반에도 선진국에서 시장 메커니즘을 완전히 질식시키지 않은 가운데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혼합경제는 확장을 계속했다.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임금 및 물가 통제안을 관철시키고자 애썼다.그러나 90년대 이후 정부는 뒤로 물러서고 있다.전세계적인 현상이다.소련과 중국에서 공산주의 경제체제가 실패했을뿐 아니라 서방의 정부들도 통제권과 책임을 벗어던지는 중이다.국가가 떠맡은 일이 너무 방대하고 떠맡을려는 야심 또한 지나쳐,경제의 심판관이 아니라 주장 노릇을 하려는 데서 ‘정부의 실패’가 속출한 것이다. 통제의 비용이 너무 많고 효율성에 대한 환멸이 생겨 정부는 너도나도 민영화에 나서고 있다.정부의 방매가 역사상 최대치에 이른다.옛 소련,동유럽,중국 뿐 아니라 서유럽,아시아,라틴 아메리카,아프리카 그리고 미국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미국은 연방,주,지역 정부들이 전통적인 활동들을 시장에 넘기고 있으며 지난 60년동안 일상생활의 모든 곳에 영향을 끼치던 규제들을 폐기하고 있다.정부가 종언을 고하기 시작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정부가 벌이는 일들,경제에서 책임지고 있는 사항들은 확실하게 줄어드는 중이다.전 세계로 보아 정부는 예전보다 분명히 덜 계획하고,덜 보유하고,규제를 덜한다.대신 시장의 영역과 경계선이 확장일로를 치닫고 있다. 정부가 국가경제를 지휘하기 좋은 고지로부터 물러나는 현상을 저자들은 20세기와 21세기의 구분선이라고 말한다.저자 중 예르진은 이름있는 경제평론가로서 ‘상:석유,돈,그리고 권력’이란 베스트셀러로 퓰리처 상을 받았으며 스타니슬로는 예르진이 소장으로 있는 캠브리지 에너지연구소의 사무국장이다.그러나 저자들은 언뜻 명약관화해 보이는 이같은 정부에 대한 시장의 승리가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못한다.한 세기전에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30,40년 동안 시장경제 위주의 자유방임주의가 풍미했다가 대공황을 당한 후 정부에 고지를 빼앗겼었다. 21세기에 어느 쪽이 더 우세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력은 부족하지만 457쪽에 걸쳐 20세기 시장과 정부간의 주도권 쟁탈 및 후반부의 시장화 추세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고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평이다. 원제:The CommandingHeights.시몬&슈스터 출판사.457쪽. 23.40달러.
  • 빅딜/“전문업종 이외 모두 대상에”/‘모범답안 찾기’숨가쁜 재계

    ◎정부의 시나리오는/5대그룹 개혁해야 나머지도 가능/강요않지만 상식선 벗어나면 곤란 재벌간 ‘빅 딜’에 대한 정부의 기본 생각은 하나의 전문업종을 제외한 다른 업종군의 기업들을 모두 거래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구체적인 시나리오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정부가 생각하고 있는 빅 딜의 실체는 어느정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재경원 고위 관계자는 23일 “정부가 빅 딜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전문업종은 재벌들이 상식적인수준에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이 관계자는 최근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 위크지가 제시한 5대그룹의 주력업종을 근거로 들었다.현대는자동차 조선,삼성은 반도체 금융,LG는 석유화학,대우는 자동차,SK는 석유화학과 정보통신 등을 특화해야 할 업종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그는 현대와 대우가 자동차부문에서 LG와 SK가 석유화학부문에서 겹치지만 한 업종에서도 특화될 사업은 얼마든지 많다고 밝혔다.정부 내부에서 생각하는 빅 딜은 일단 5대 그룹에 우선하고 있다.특히 대우가 쌍용자동차를 인수했듯이 자동차분야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본다.이 경우 삼성자동차는 현대로 넘어가지 않겠냐는 전망이 우세하다.기아자동차도 현대나 대우에게 분할 매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현대와 대우의 경우 자동차에서 경합하는 것은 독점의 폐해를 줄일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전략적 제휴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도 있을 수있다고 본다.한 걸음 더 나가 지분을 공동으로 갖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석유화학의 경우 큰 골격은 정유는 SK,비정유 부문은 LG 등에 특화시키는 방안이 점쳐진다.이 경우 5대 그룹 계열사 소속의 정유회사는 SK쪽으로 집중될 수 밖에 없다. 반도체는 삼성으로 특화한다는 것이다.현대전자를 비롯해 LG의 반도체사업분야도 삼성으로 단일화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금융 분야도 삼성쪽에 기울고 있다.그러나 인위적인 합병보다는 주식매각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LG는 전자를 중심으로 정보통신 업종에 주력하고 금융은 떨쳐버릴 것을권유하고 있다.이밖에 중공업이나 기계 등은 5대 재벌이 지분을 파는 방안이 거론된다.정부 관계자는 ”5대 그룹이 업종을 전문화하면 지금처럼 20개 이상의 계열사는 갖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는 빅 딜의 시기를 새 정부 출범 전으로 보고 있다.과거처럼 업종전문화를 발표한 뒤 이런저런 이유로 1∼2년을 끌도록 하지는 않겠다는 복안이다.정부는 5대그룹이 먼저 몸집을 과감히 줄이면 30대,50대 그룹도 뒤따를 것으로 보고 있다.이 과정에서 빅 딜을 포함한 구조조정이 원활해 지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을 강구한다는 방침이다. ◎무엇을 버려야 살까/“대세 따라야”… 대책반 구성 업종선별/사재출연 부담… ‘건성’ 오해살까 고심 재계가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휩싸이면서 숨돌릴 겨를이 없다.김대중 당선자측이 연일 요구수위를 높여가며 사재출연과 그룹간 사업교환(빅 딜)등 혁신방안을 제출토록 촉구하자 묘안을 찾느라 머리를 싸매고있다. 삼성그룹은 김당선자측이 강도높게 요구하는 빅 딜이 대세(대세)라고 보고 실무대책안 마련에나섰다.반도체 전자 금융 자동차 중공업 기계 등 전 업종을 대상으로 빅 딜 대상업종 선정에 착수한 가운데 외부 용역안이 나오는대로 구조조정안을 마련할 계획이다.일찍이 이건희회장이 “삼성이 자동차를인수할 수도,인수될 수도 있다”고 언급한 대로 외부용역 결과와 내부구조조정안을 종합적으로 검토,자동차 부문도 매각이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매각하고 그 반대로 결론이 나면 해외 자본과의 합작을 통해 국내 자동차사를 인수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비서실 관계자는 “빅 딜이 삼성에 부담스러운것만은 아니다”고 말했다.재계에서는 호텔 중장비 조선 부문의 사업이 우선적인 정리대상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구조조정안을 1차로 내놓았던 현대그룹은 내용이 미흡하다는 여론과 김당선자측의 질책이 쏟아지자 후속 대책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하는 모습이다.현대는 삼성과 롯데 등 다른 재벌그룹들이 총수 사재출연을 발표하자 정주영 명예회장 일가의 재산 가운데 출연할 만한 부분이 있는 지를 재검토중이다.그룹 종합기획실 임원은 “빅딜을 포함한구조조정은 시장경제의 원리에 의해 추진해야 하나 2월 말까지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할지 고민”이라며 “그러나 구조조정에 관해 발표하지 않은 플랜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현대는 계열사 정리 방안과 빅딜방안이 확정되는 대로 후속책을 발표할 방침이다. LG는 23일부터 구조조정을 추진할 전담기구인 ‘구조조정 추진본부’(본부장 손기락 부회장)의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LG는 강유식 회장실 부사장 등으로 실무진을 구성해,주력업종의 재분류와 함께 해외 매각,합병 등 이미 발표한 구조조정안의 실천 방안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대우그룹은 24일 김대중 당선자와 김우중 회장간의 단독회동 이후에 구체적인 구조조정 계획을 수립한다는 입장이다.그러나 ‘세계경영’으로 특정지역에 동반진출해 있는 해외수출 중심의 구조상 주고받기식의 빅딜과 관련해 특단의 조치는 나올 가능성이 적다고 밝히고 있다. SK그룹은 현실적으로 새 정부쪽의 요구를 충족시킬 만한 묘안이 없어 고민 중이다.SK그룹은 당선자쪽 요구사항을 무시하기도 어려워 에너지 화학 정보통신 물류유통 금융을 주력업종으로 선정키로 했던 계획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있다.구조조정안 발표계획도 설 이후로 늦춰질 것으로 보인다.
  • 일 공직자 접대만 받아도 구속

    ◎검찰,도로공단 이사 등에 이례적 중형/정경유착 근절 초강수… 사정태풍 예고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검찰이 정경유착의 부정에 초강수를 띄웠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18일 노무라증권에 편리를 봐준 대가로 2년반 동안 2백50만엔(3천여만원 상당)의 ‘접대’를 받아온 일본도로공단의 이사카 다케히코(정판무언) 이사를 전격 구속했다. 대장성 조폐국장 출신으로 대장성과의 관계를 잘 처리해달라는 의미에서 94년 ‘낙하산’을 타고 도로공단에 영입된 이사카 이사는 일본도로공단의 외화채권 발행 주간사 업무를 노무라측에 맡기도록 하고 2년반 동안 십수차례의 골프 및 요정 접대를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다.그는 이밖에도 증권회사 은행 등으로부터 모두 7백만엔 가량의 접대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검찰은 이것이 증수회죄에 해당된다고 보고 노무라증권의 무라스미 나오다카(촌주직효) 전 부사장 등 2명도 구속했다. 노무라증권측은 접대가 뇌물성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또 일본의 금융계 관료계에서는 그 정도의 접대는 ‘상식’에 속한다. 일본 검찰의 전격적인 구속 조치는 이런 상식을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고 선언한 셈이다.현금,주식 등 돈 뿐만이 아니라 소소하다고 생각돼 온 접대도 뇌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일본에선 금전,물품 뿐만 아니라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체’가 뇌물로 될 수 있다는 판례가 성립돼 있으나 수사실무상 접대 행위가 뇌물수수,공여로 입건된 예는 극히 드물다. 일본 검찰은 노무라증권이 연간 1천만엔을 넘는 교제비를 사용해온 점에 비추어 접대를 받아온 것이 도로공단 뿐만은 아니라고 보고 있어 살벌한 수사손길이 확대돼 나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번 수사는 특히 검찰이 금융·증권업계는 물론 일반 재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장성 전·현직 간부가 관련된 구조적 유착관계의 규명이 초점이 되고 있다. 한편 이미 총회꾼에 대한 부정이익 공여 혐의로 전현직 간부가 구속되고 업무정지의 가혹한 처분을 받은 바 있던 노무라증권은 또 다시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르게 됨으로써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됐다. 검찰의 조치에 대해서는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형편을 감안한다면 경제계에 지나친 타격을 가하는 것이라는 불만도 제기되고 있지만,일본에서는 ‘상식’이나 국제기준으로는 통용되지 않는 관행을 척결해야만 일본 경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 한나라 지도체제 신경전 치열

    ◎이한동­“대표 실질 경선” 종래 주장 고수/김윤환­조 총재 단독 출마→재신임 제기 한나라당 지도체제 개편문제가 여전히 내연하고 있다.경선을 통한 새 지도부 구성은 거의 합의된 상태지만,총재 경선을 실질 경선으로 하느냐,재신임 형식의 추대로 하느냐를 놓고 신경전이 치열해지고 있어서다.또 경선을 총재와 부총재단 선거로 이원화할 것인지,아니면 총재단 선거로 일원화할 것인지도 중진들간의 생각이 다르다. 이같은 양론의 중심축에는 이한동 대표와 김윤환 고문이 서 있다.두 사람은 같은 민정계지만 정치스타일은 판이하다.지난해 9월 대표직을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인 것을 비롯,두 사람은 언제나 긴장관계였다는 게 중론이다.이번 지도부 개편문제도 두 사람의 ‘파워 게임’이란 시각이 우세하다.자연히 두사람은 양극에 위치한다. 김고문이 경선을 처음 제기하며 ‘군불’을 지폈고 이에 맞서 이대표는 당의 정비와 단합을 내세워 경선 불가 또는 지방선거후 경선을 주장했다.결국 의원총회를 거치며 경선이 대세를 이루자,이번에는 총재직의실질 경선 문제로 두 사람은 대립하고 있다. 김고문은 합당 약속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조순 총재의 ‘단독출마→재신임 추대’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중진들은 부총재 경선에 출마,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면 된다는 것이다.당사자인 조총재 뿐만 아니라 김덕룡 의원,이기택 전 민주당총재 등도 이 방안을 선호한다.특히 이회창 명예총재도 총재경선 출마를 고려치 않고 있다.그러나 이대표는 ‘제한 경선’이 아니라 실질 경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른바 ‘당운영의 실세화’다.총재 경선에 자신있는 사람은 모두 출마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1위 득표자가 총재가 되고 나머지는 부총재가 되는 경선 일원화 방안이 비용 절감을 위새서도 더 낫다고 판단한다. 이대표는 이번주초 기자간담회를 갖고 자신의 복안을 밝힐 것으로 알려져 주목되고 있다.
  • 제헌헌법 탄생과 훼절의 발자취(대한민국 50년:3)

    ◎48년 7월17일 대통령제·단원제 공포/48년 5·10총선후 헌법­정부조직법 기초위 출범/대통령제­내각제·단원제­양원제 17차례나 격론 반만년 한민족 역사에서 ‘대한민국 50년’이 지니는 가장 값지고 유별난 의미는 그것이 헌정의 역사라는데 있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그 탄생부터 굴절과 훼절로 출발했고 이는 곧 헌정의 비극,나아가 국가와 국민의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48년 5·10총선은 정부수립 작업에 탄력을 붙여놓았다. 그 선거를 통해 개원한 제헌국회는 5월 31일 개원날부터 무엇보다 급한 헌법제정 작업에 착수,초안을 만들어낼 기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을 선출하는 안건을 결의했다. 다음날 기초위원을 선출할 전형위원 10명이 선정됐고 6월 1일에는 서상일을 위원장으로 하는 헌법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헌법학자 유진오 등 전문위원 10명도 위촉됐다. 헌법 초안 작성의 중추역을 맡은 유진오는 양원제,내각책임제,농지개혁,중요 기업의 국영화 등을 골자로 한 안을 내놓았다.이때 미군정 사법부장이던 전문위원 권승렬이 예고없이 독자안을 제출,위원회는 두 안을 각기 원안과 참고안으로 삼아 심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헌법 굴절의 역사는 곧바로 시작됐다. 1차독회 국회 부분에 이르러 한민당계와 조봉암이 양원제 반대론을 폈다. 이어 곧바로 다수위원의 반대로 확산,양원제는 졸지에 단원제로 바뀌었다. ○기초위선 내각제 원안 통과 여기서 유진오의 헌법초안 작업 참여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국회가 공식으로 제헌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회,김성수의 한민당 등 정부수립의 3대 주축세력으로부터 각각 초안작성을 의뢰 받았다. 이때 그는 앞의 중요 골자들을 수용할 것을 요구,3대 세력으로부터 동의를 받아놓은 터였다. 따라서 기초위의 단원제 채택은 의원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묵시적으로 담합한 성격이 강했다. 유진오안이 근본적인 변질의 길로 들어선 것은 6월 16일 제2차 독회때부터다. 국회의장 이승만은 이날 부의장 신익희를 대동,심의장소인 중앙청 회의실에 예고없이 나타났다. 유진오의 내각제 옹호설명을들은 뒤 연설을 시작한 이승만은 자신은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며 반드시 대통령책임제를 해야 한다는 말을 마친뒤 휭하니 나가버렸다.바로 한달전 신익희를 통해 유진오에게 “내각책임제가 되면 대통령은 할 일이 적어지지만 부득이한 일”이라는 견해를 밝혔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내각책임제가 대세였다. 오히려 내각제 반대를 주장하던 허정도 지지쪽으로 돌아설 정도였다. 이승만의 뜻에 관계없이 기초위는 관련조항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잠시 유진오 등을 상대로 회유에 나서봤지만 여의치 않자 며칠뒤 다시 기초위에 찾아와 협박을 가했다. 단순한 반대 표시가 아니라 만일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채택되면 어떤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는 선언이 그것이다. 이 말을 던진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이에 기초위원들은 허정과 유진오,전문위원 윤길중을 이화장에 보내 이승만을 설득하는 등 내각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의 버팀목은 이내 무너져갔다. 한민당이 먼저 굴복했다. 22일 계동 김성수의 집에 모인 백관수 김도연 서상일 조병옥 등이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바꾸는 초안수정 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그 수정안은 이튿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본회의는 17차례나 토론을 벌였지만 대세가 이미 이승만쪽으로 기운데다 핵심 골간이 결정된 터여서 대통령중심제가 우세하게 돌아갔다. 그래서 안건상정 20일만인 7월 12일 내각책임제는 만세삼창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승만은 만장일치로 공화국 헌법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 만장일치라는 이승만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날 표결방법은 기립이었다. 당시 대동청년단 소속의원이던 생존 제헌의원 김인식(현 제헌동지회장)은 “이문원 의원이 의원석 중간쯤에 기립하지 않고 끝까지 앉아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승만은 당시 대통령제를 택할 경우 초대 대통령이 확실시되는 사실상의1 인 권력자였다. 대중적 지지면에서 그와 겨룰수 있는 김구와 김규식은 5·10 총선을 거부,그 연장선상에서 진행되는 어떠한 정치행위에서도 입지가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윤길중은 나중 “제헌당시 한 사람의 고집으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했던 것이 그후 우리 헌정사에서 독재,장기집권,정통성문제 등에 대한 시비가 끊임없이 제기된 원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어떻든 대한민국 헌법은 7월 17일 이승만의 서명 공포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그탄생의 내력은 윤길중의 증언처럼 장차 전개될 헌정사의 불행을 예고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이승만 고집 대통령제로 이를 입증하듯 1952년 7월 7일 제1차 개헌이 이른바 발췌개헌이라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달여 전 총선 참패로 국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의 자유당은 직선제를 시도했다. 그것도 국회제안 개헌안과 행정부제안 개헌안 가운데 일부를 발췌,국회에 공포분위기를조성한뒤 기립표결로 통과시켰다. 1954년 11월 29일의 2차개헌(사사오입 개헌)도 헌정사에 얼룩을 덧칠했다. 자유당은 직선제의 문은 열었지만 대통령 중임제한규정에 부딪치자 이 벽을넘기 위해 다시 개헌을 꾀했다. 국회 투표결과는 의원정수 203명중 가결에 필요한 찬성표가 136명에서 1명 모자라는 135표로 나왔다. 부결이 선포됐지만 자유당은 사사오입이라는 해괴한 계산원리를 끌어들여 가결로 밀어붙였다. ◎증언/“대통령제였지만 내각제 요소 많아”/김인식 제헌동지회장 1948년 7월 제헌헌법의 탄생과정을 지켜본 제헌의원은 현재 5명만이 생존해 있다. 그중 3명은 병석에 누워있어 당시 상황을 기억할수 있는 사람은 김인식 제헌동지회장(85) 등 둘뿐이다. 김회장은 당시 헌법이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책임제로 급변한 상황을 “하룻밤 사이에 역사가 뒤바뀌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본회의에서 헌법초안축조토론을 많이 했지만 대통령제에 대한 토의는 활발하지 않았어요. 모두들 이박사(이승만)가 고집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들 믿었지요.” 김회장은 그러나 제헌헌법은 문제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았으며 의원들의 자부심도 컸다고 전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제였지만 내각제적 요소가 많이 가미돼 권력집중을 막을수 있었어요. 실제로 제헌국회때는장관도 국회에서 불신임 가결만 하면 곧바로 바뀌었고 이승만 대통령도 정기적으로 국회에 나와 국정에 대해 설명하고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을 했습니다. 그런데 2대국회 중간쯤부터 이대통령이 국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헌법도 자기 뜻에 맞춰 갈아치우기 시작하더군요.” 김회장은 우리 헌정사의 불행의 출발이 바로 여기서부터 싹텄다고 지적했다. “평범한 개인도 자기가 지은 집에 대해서는 애착이 가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대통령은 자기가 지은 멀쩡한 집을 자기 손으로 허물었어요. 나라의 장래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겠구나 생각했는데 결국 그 생각이 맞아들어갔어요. 그 뒤에도 마찬가지였고요.” 김회장은 제헌의 주역으로서 헌정사 50년을 통해 얻은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위정자들의 마음가짐입니다. 우리가 정부를 수립하고 헌법을 만들던 그때의 건국정신과 제헌정신만 지켰다면 그런 불행들은 없었을 겁니다. 앞으로도 그렇고요.”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렬 문화부 차장급 김종호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정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외무부가 통상을 맡자면(사설)

    정부조직개편 논의과정에서 통상업무를 외무부로 통합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 가던 ‘외교통상부’안이 15일 발표된 심의위 1차 시안에는 ‘외교통상부’안과 ‘대외경제부’ 신설안의 복수안으로 나타났다. 공청회 등 여론수렴 과정이 남아 있긴 하나 통상외교 교통정리는 이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결단에 맡겨진 셈이다.‘외교통상부’안은 외무부의 강력한 주장도 주장이지만 학계,언론계에서도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마지막 단계에서 북수안이 됐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은 불행히도 외무부에 대한 불신이 각계에 의외로 폭넓게 자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외무부의 부처이기주의와는 달리 외부에서 ‘외교통상부’안을 지지한 것은 ‘작은정부’지향이란 원칙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저변에는 조직이나 인력에 비해 일을 않는 외무부에 일을 보다 많이 맡겨야 한다는 역설적 의도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어떻든 그런 대세 속에서 복수안이 나온 것은 외무부 가지고는 통상업무를 효과적으로 해낼 수 없다는회의론이 막판에 크게 작용했다는 얘기다.외무부로서도 할말은 있겠지만 외무부에 대한 외부의 사시는 뿌리가 깊다.그것은 전적으로 외무부에 책임이 있다. 우리는 통상업무가 외무부로 통합되는 것을 지지한다.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외무부가 먼저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는다.외교관들의 의식에 일대 개혁이 있어야 하고 141개나 되는 방만한 공관 조직도 문제다.전문가에 따라서는 공관수를 반 이하로 줄이고 대신 거점외교 중심체제로 바꿔 외교계에 경쟁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의 명칭도 ‘외교통상부’가 아니라 ‘통상외교부’가 돼야하고 장관은 물론 주요국 대사도 경영마인드를 가진 기업인 출신이나 통상전문가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거야 지도체제 경선으로 가닥/의총서 대세 확인

    ◎중진들 “부총재만 경선”… 조 총재 “수용”/이 대표는 지방선거 이후 전면 경선 주장 한나라당이 오는 3월 전당대회에서 경선을 통해 새 지도부를 구성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14일 의원총회에서 현 지도부 퇴진과 경선 실시 주장이 봇물처럼 터져 경선 실시쪽으로 가닥을 잡은 느낌이다.특히 조순 총재가 15일 “총재도 경선할 수 있다”고 입장을 전환, 경선 실시는 점차 탄력을 받고 있다. 당지도부는 다음주초 의총을 다시 열어 이 문제를 매듭지을 방침이나 경선에 완전 합의하기 까지에는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우선 현 체제 유지나 5월 지방선거후 경선을 실시하자는 견해도 비록 소수지만 존재하고 있다.무엇보다 이한동 대표가 지방선거후 경선입장을 고수하고 있다.이대표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의원들의 충정을 이해하지만 경선을 포함한 지도체제 개편문제는 이성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이대표는 조직책 정비 등 경선실시에 따른 현실적 어려움도 제기한다.따라서 현 체제로 지방선거에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윤환 고문과 김덕룡 의원,이기택 전 민주당총재 등 비주류 중진들은 경선에 찬성이다.야당식의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도부 경선이 ‘필요충분조건’이란 얘기다.다만 이번 전당대회에선 복수의 부총재만 경선하고 총재는 그대로 두자는 입장이다.이른바 제한 경선이다.총재 경선 수용의사를 밝힌 조총재도 “합당약속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고 밝혀 총재경선 단독출마를 염두에 둔 것으로 읽혀진다. 하지만 이대표측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이왕 경선을 한다면 총재를 포함한 전면 경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반쪽 경선으론 경선의 참뜻을 살릴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물론 이대표도 “당론에 따르겠다”고 밝히고 있다.바로 이점은 경선 시기와 폭을 정할 의총에서 경선문제가 표결처리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 ‘고졸 대통령’ 해리 트루먼(미국의 대통령 문화:8)

    ◎냉전속 국제질서 이끈 위대한 지도자/전후 서유럽 부흥위해 ‘마샬 플랜’ 강력 추진/일에 원폭 투하·맥아더 해임 등 결단력 돋보여/한국에선 “한반도 분단 책임자” 시선 곱지 않아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그는 보통사람이 위대해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습니다.그리고 대통령도 일반 시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1972년 12월26일 88세를 일기로 서거한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만의 조사(조사) 마지막 부분을 컬럼니스트 메리 맥그로리는 이렇게 끝 맺었다. 원폭투하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고 2차대전후 극렬한 대립을 보인 민주진영과 공산진영 양극의 한 정점에서 냉전의 국제질서를 강력하게 이끌었던 트루만 대통령은 민주주의 수호와 대통력직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결단력을 보여준 지도자란 평가를 받고있다.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서민적인 ‘보통사람’대통령으로 꼽힌다. 45년 4월12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4선 취임 80여일만에 숙환으로 급서,당시 부통령으로서 트루만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됐을 때 미 언론들 대부분은 루즈벨트의 큰 자리를 트루만이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우려했다.왜냐하면 트루만은 당초 민주당내 부통령 지명과정에서 최적의 인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좌파 헨리 월리스와 보수파 제임스 번즈의 각축 중에 중도파로 있다 어부지리로 부통령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두차례의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2차대전중 수십억달러의 국방예산낭비 조사를 위한 소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을 당시 차분하고 공정한 업무처리로 인정받았던 그는 3차투표까지 간 부통령 지명전에서 막판에 루즈벨트로부터 제의를 받았을 때 정중히 사양했으나 거듭된 간곡한 부탁에 가까스로 응했다. 국민들이 우려를 나타낸 또 한가지 이유는 그가 20세기 미대통령 가운데 유일한 ‘고졸대통령’이라는 점이었다.과거 무학 대통령들의 입지전적인 스토리들이 있기는 했으나 20세기들어서는 직전의 루즈벨트가 하버드 출신인 것을 비롯,스탠퍼드 출신의 후버,프린스턴의 윌슨,예일의 태프트 등과 같이 최고의 학력이 대통령의 필수조건처럼 돼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으로서의 트루만은 어떤 명문대학 출신 못지 않은 업무수행능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차대전 이후 새로운 전후질서 형성과정에서 미국을 부동의 지도국 위치에 올려놓았고 국내적인 안정도 가져와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 따르면 조사 각분야에서 상위를 기록,41명중 종합 7위로 나타났다. 2차대전 막바지 대통령직에 오른 그에게는 전쟁의 마무리가 가장 큰 임무였다.독일은 5월초 무조건 항복을 했으나 일본이 문제였다.45년 2월 맥아더 장군의 마닐라점령을 계기로 연합군이 승기는 잡았으나 일본군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본토상륙이 불가피한 시점이었다.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100만명의 인명손실이 예상되고 있었다.따라서 때마침 실험에 성공한 원자탄이 자연스레 그 대안으로 부상했으며 트루만은 그해 8월6일과 9일 두차례에 걸쳐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라는 가장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더우기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 야욕에 맞서 그는 외교안보적으로는 공산세력의 침투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수호했다는 평가를 받는 ‘트루만독트린’을,경제적으로는 전후 피폐해진 서부유럽국가들의 부흥을 위한 대대적 경제원조인 ‘마샬플랜’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같은 그의 강공은 소련의 베를린봉쇄를 가져왔고,유엔 설립을 위한 대서양헌장 채택,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탄생 등 냉전체제의 골격을 완성시켰다.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장법을 제정해 국방부와 CIA를 창설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취임초기 물가상승과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한 사회불안이 높아져 46년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여소야대 정국이 초래됐다.48년 마샬플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미국내 반대세력이 늘어갔으며 또한 민주당내 분열이 심화돼 언론들 대부분은 그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토마스 듀이 후보가 당선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그러나 트루만은 유명한 3만마일 역전유세를 통해 유권자에 직접 호소,재선할 수 있었다. 재선후 트루만은 농민보조금 제공,의무적 건강보험 실시 등 새로운 사회개혁정책을 시도했다.이 정책은 “모든 집단과 모든 개인은 정부로부터 공정한 대우(Fair Deal)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그의 연설에서 ‘페어 딜’정책으로 명명됐다.그러나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의회내 보수파들에 의해 대부분 묵살돼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당시 연합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가 중국군대의 개입을 저지하고자 만주에 원폭투하를 요청하면서 트루만과 공공연히 맞섰는데,이에 그는 맥아더 사령관을 전격 해임해 대통령직 권위에 대한 도전에 단호히 대처했다.한국쪽에서 볼 때에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있는 당사자라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던 맥아더의 해임은 여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결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미국민들에게 남아 있는 트루만은 정치적 업적보다도 그의 인간됨이다.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소읍을 둘러싸고 청년농부 트루만과 후에 퍼스트레디가 된 읍내 소녀 엘리자베스 월리스(베스라는 애칭으로 불렀음)와의 사랑이야기는 ‘아메리칸 러브스토리’로 남아 있다.그가 그녀에게평생을 쓴 1천600통의 사랑의 편지는 지금도 젊은이들의 연애편지로 읽히고 있다. 그는 52년 퇴임후 20년 동안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보여준 보통사람으로서의 삶 때문에 후세에 더욱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고 있다.고향집으로 돌아온 그는 1마일쯤 떨어진 트루만도서관의 사무실로 매일 걸어서 출근했으며 강의와 회고록 집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특히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동네사람들,옛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여생을 보내던 그가 가장 불편해 했던 것은 63년 케네디 암살 이후 통과된 전직대통령 경호법에 의해 경호팀이 집부근에 상주하면서 활동에 제약을 받게된 일일 정도로 그는 완벽하게 보통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디펜던스의 그의 사저 일대는 역사공원으로 지정돼 있으며 인근의 언덕위에 높게 자리잡은 트루만도서관과 함께 보통사람 대통령의 체취를 느끼려는 관광객과 학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랜드 스웰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 자료담당관/퇴임후 평범한 삶 후세에 귀감/한국 좋아해 고려청자 현관에 보관/어머니에 배운 피아노 연주 수준급 【인디펜던스(미 미주리주)=나윤도 특파원】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옆의 소읍인 인디펜던스시 북부의 언덕위에 넓게 위치한 트루만도서관은 냉전 초기의 역사에 관한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이 도서관의 랜드 스웰 자료담당관은 “트루만대통령은 많은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트루만 대통령이 높은 인기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린 지도자로서 결단력과 대통령직을 마친 후 평범한 이웃으로 다시 돌아온 점이다.대통령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 그 집에서 살다 죽은 예는 흔치 않다. ­대통령 퇴임후의 생활은 어땠는가. ▲인디펜던스 읍내 노스 델라웨어 스트리트 219번지 자택은 원래 트루만의 부인 베스 트루만의 집으로 1919년 결혼후 줄곧 이 집에서 살아왔다.그는 퇴임후 강연과 저술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59년 입법 후에야 전직대통령에 대한 연금이 지급됐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도서관의 특별한 활동은. ▲95년부터 그의 ‘50주년 행사’를 계속해오고 있다.지난해는 트루만독트린 50주년 세미나및 전시회를 가졌고 올해는 이스라엘 건국 50주년,99년에는 NATO 50주년,2000년에는 한국전쟁 50주년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한국인들은 트루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그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나. ▲공산주의 저지의 최후 보루로 인식했기 때문에 남침 즉시 유엔 결의를 기다릴 것 없이 미군의 참전을 명했다.다만 한국전쟁때 마샬플랜에 더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개인적으로 한국을 좋아했다.46년 한국 교육계대표 장이욱 박사로부터 선사받은 고려청자가 현관에 보관돼 있는데 의 위치는 그가 잡은 것이다. ­그의 피아노를 잘 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 수준급에 달해 45년 포츠담회담때 처칠과 스탈린 앞에서 연주했고 케네디 취임식때도 연주했다.트루만이 백악관 당시 즐겨 치던 피아노가 닉슨 대통령의 기증으로 전시관에 진열돼 있다.
  • 한국­국제채권단 외채상환협상 전망

    ◎단기외채 보증­국채 규모 최대 쟁점/한국­“외환사정 호전” 중·장기채 전환 적극 모색/채권단­250억불 규모 채권발행 선호… 압력 거셀듯 【뉴욕〓이건영 특파원】 한국측과 국제채권은행단과의 외환협상이 막바지 고비에 다달았다.한국측의 협상사절단이 15일께 뉴욕을 방문, 채권은행단과의 본격 협의에 들어가면 최종 매듭이 지어질 전망이다.이번 외환협상은 선진 7개국(G­7)의 80억달러 대한 조기지원과도 맞물려 있어 한국측으로서도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내야 할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현안인 단기외채를 어떻게 상환하는냐가 협의의 초점이다. 한국측은 정부가 지급보증하는 단기외채의 규모를 최대한 늘리는 방향으로 단기외채의 중·장기화를 꾀할 방침이다.한국측은 이 방안을 국채발행을 통한 단기외채 전환과 비교해 볼 때 결국은 정부가 지급을 책임지는 것이지만 채권은행단과의 대출선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은 국채발행이 어쩔 수 없는 대세로 굳어져 가고 있는 현실속에서도 가능한 정부가 지급보증하는 단기외채를 늘리는 쪽으로 협상력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측은 한때 비상경제대책위를 중심으로 단기부채의 중압감을 덜기 위해 국채발행을 통한 단기외채 일거 전환에 비중을 뒀으나 외환사정이 호전될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정부 지급보증 확대로 입장을 정리했다. 채권은행단은 국채발행을 전제로 하면서도 다소 차이가 있는 두가지의 입장이다.J.P.모건은행,시티뱅크,체이스맨해튼 은행이 제안한 첫번째 안은 2백50억달러의 채권발행이다.1백50억달러는 중장기 채권발행에,1백억달러는 외환보유고 확대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금융자문 역할을 하는 골드먼삭스,살로몬 스미스 바니사가 추진하는 두번째 안은 50억달러의 신디케이트론(협조융자)을 요구하고 별도로 90억~1백억달러의 채권을 발행하되 단기부채 전환목적에 사용하지 않고, 부채상환 연장은 채권은행의 자율에 맡긴다는 것이다.한국측은 금리부담이 덜한 두번째 안을 선호하고 있다. 대부분의 채권은행단은 국채발행을 할 경우 대출금 100달러당 12달러를 따로 비축해야 하는국제금융 관례도 따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여러모로 이득이 많은 첫번째 안에 기울어 있다.한국의 외환협상력이 주목되고 있지만 뉴욕 월가에서도 한국측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결과는 첫번째 안에 근접하게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인도네시아의 외환위기가 한국의 입지를 더욱 좁혀 놓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번 협상과정에서의 최대쟁점은 한국정부의 지급보증을 받는 단기외채 및 국채발행의 규모가 될 것이 확실하다.
  • 국호·상징물 제정(대한민국 50년:2)

    ◎48년 7월1일 제헌국회서 ‘대한민국’ 확정/제헌국회 헌법기조위원회/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논의/이승만 의장 ‘대한민국’ 상요 대세로 1948년 7월1일 제21차 회의가 열린 제헌국회 본회의장.의원들은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초안을 놓고 2차 독회에 들어갔다.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신익희 부의장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항목부터 축조심의에 들어갔다.이승만 의장(독촉)이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국호개정이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국호는 차차 국정이 정돈되어 가지고 거게에 민간의 의사를 들어가지고… 그러니까 국호문제에 있어서는 다시 문제 일으키시지를 말기를 또 부탁하는 것입니다”(국회 속기록) 이에 대해 최운교 의원(무소속)이 헌법기초위에서 심의한 국호가 몇가지며 그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반대에 부딪쳤다.이어 1조를 원안대로 통과시키자는 동의를 재청·삼청까지 얻어냈다.이때 조봉암 의원(무소속)이 제동을 걸었다.조의원은 “우리민족이 다 그렇게 만족치 않을 것이니 다음에 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그는 1차 독회에서도 “대한민국이란 말은 역사적 합리성으로 보거나 체제로 보거나 형식적 법통으로 보거나 천만부당하다”며 반대했었다. ○찬성 163·반대 2로 통과 이승만 의장이 다시 발언에 나서 고칠 필요가 있으면 다음에 하고,일단 원안대로 통과시키자고 무마했다.의회는 거수표결에 들어가 제1조를 재석 188명에 찬성 163명,반대 2명으로 통과시켰다.한민족의 새 역사를 열어 나갈 신생국의 이름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확정됐다.1948년 8월15일 정부가 출범하기에 앞서 한달 보름전 일이다. 새나라 출발에는 국호 제정이 선결과제지만 이승만의 모두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나라이름을 짓는 데는 많은 진통이 따랐다.국호가 갖는 상징성이 지대한데다,당시 좌우가 갈리고 정당·사회단체가 난립한 상태에서 각기 주장하는 바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미군정 때 장차 수립할 우리 민족의 국가 이름으로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좌우대결이 치열해지면서는 남한지역과 우파는 대한민국을,북한지역과 좌파는 조선을 지지하는 ‘남대한·북조선,우대한·좌조선’으로 굳어져 갔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대한제국 때 처음 쓰였다.1897년 고종이 중국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국임을 강조하느라 황제를 칭하면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1919년 상해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따라서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당연한 우리나라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를 부인하는 세력들이 해방후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예컨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대한’이라는 국호를 부정했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한 각 정치세력에게서 임시정부 수립대강에 관한 답신서를 받았다.이에 따르면 한민당이 결성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와 신익희 주축의 입법의원은 ‘대한민국’을,좌우합작위원회가 주도한 시국대책협의회는 ‘고려인민공화국’을 주장했다.민주주의민족전선은 건준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에 집착했고,건준을 부정하는 북조선노동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국호를 규정했다.각 정치집단은 국호제정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다툼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다. 제헌국회가 구성된 뒤 헌법기초 위에서 논의한 국호로는 ‘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등이 있었다.이때도 일부에서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국호를 제정하자고 주장했다.그런데 5월31일 열린 국회 개원식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사용함에 따라 이 이름은 제헌의원들간에 대세로 자리잡았다. 국호에 관한 찬반 논의는,이승만 행정부가 1950년 1월16일 국무원 고시 제7호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을 법률로 제정하자 자연 소멸됐다.“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또는 한국)으로 하고,북한 괴뢰정권과의 확연한 구별을 위해 조선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45년 12월 첫 태극기 게양 국호외에 국가의 상징인 국기·국가도 제정과정에서 많은 논의를 거쳤다.태극기는 대한제국이 정식 인정해 상해임정이 이어받은 국기였다.태극기는 1945년 12월24일 처음으로 미군정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성조기와 함께 게양됐다.당시 조선성냥회사 사장인 신창균이 하지 장군의 보좌관에게 부탁해 성사시킨 것이다.미군정은 이듬해 1월14일 군정청 광장에서 태극기 게양식을 가짐으로써 국기임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무렵 만담가 신불출은 공연에서 태극기가 국기로서 적당하지 않다고 비아냥거렸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이처럼 좌파세력을 포함한 일부에서 거부하긴 했지만 민심은 태극기 사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다만 그 도안이 다양한 데 문제가 있었다.독립문에 새긴 것,구왕실 소장품,미군정 문교부에서 공포한 도안,우리국기보양회가 제안한 모양 등 여러가지 태극기가 뒤섞여 사용됐던 것이다.현재의 태극기는 1949년 10월15일 문교부고시 제2호로 공포됐다. 그리고 애국가 가사는 1910년쯤 거의 완성됐으며 안익태가 곡을 붙인 현재 애국가는 1946년 5월 ‘임시 중등음악 교본’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그러나 제헌국회에서는 “국가는 적당한 시기에 남과 북 전체 민족의 의사로서 제정하자”며 논의를 유보했다.따라서 애국가는 사회관행상 국가로서 불릴뿐 아직도 법적으로는 공인받지 못한 상태이다. ◎“성조기와 함께 미군정청에 태극기 게양하자”/45년 하지 장군보좌관에 요구 성사 시킨 신창균옹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지 석달여만인 1945년 12월24일 미군정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과연 독립을 이룰 것인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던 그때 이는 국민에게 크나큰 위안을 준 ‘사건’이었다. 그같은 선물을 국민에게 전한 신창균옹(90)은 1940년부터 마카오에서 임시정부의 연락책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45년 4월 귀국한 그는 미군이 진주하자 9월 중순 하지 장군의 보좌관인 윌리엄스 중령을 찾아갔다.중령의 아버지는 선교사로 입국해 공주 영명고교 교장을 지냈고,그 때문에 중령은 한국땅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다.신옹은 윌리엄스 교장에게 세례를 받은 인연으로 동갑내기인 중령과 친하게 지냈다. 중령을 만난 신옹은 “미군정청에 성조기가 휘날리는데 이곳은 조선땅 아닌가.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도 함께 게양하자”고 요구했다.중령은 그의 말에 찬성하면서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니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12월 중순 신옹이 군정청의 연락을 받고 가보니 중령은 이미 귀국했고 후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태극기를 게양하기로 결정했으니 태극기를 빨리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한국사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태극기는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당당하게 국기로서 대우받게 됐다. 신옹은 이후 조선성냥공장의 사장으로 새나라 경제부흥에 힘쓰는 한편 임정 요인들이 귀국해 만든 한국독립당에서 연락부장 등을 맡으며 활약했다.1948년 김구가 남북협상차 평양을 방문할 때 수행하기도 했다.이후 일관되게 진보정치운동을 벌였으며 현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남측본부 의장을 맡고 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문화부 차장) 최병렬(문화부 차장급) 김종면(문화부 기자) 박정현(정치부 기자) 서정아(정치부 기자) 강선임(DB부 기자)
  • 미 “대이란 문화 교류 확대 검토”

    【워싱턴 UPI AFP 연합】 미국 정부는 이란과 문화적 교류를 확대하는 가능성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미국 정부 관리들이 8일 밝혔다. 이 관리들은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이 전날 미국 CNN 방송과의 회견에서 이란과 미국간 학술,예술,언론 교류를 확대할 것을 제의한데 대해 환영의 뜻을 표명하고 이미 제한적이나마 그같은 교류가 시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리들은 그러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은 하타미 대통령이 정부간 공식대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데 대해 실망감을 나타냈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제임스 루빈 미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 정부는 하타미 대통령의 민간 교류 및 대화 확대 제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나 양국간 이해를 증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양국 정부간 대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루빈 대변인은 양국 정부간 직접 대화를 통해 이란의 국제테러 지원,대량살상무기 개발,중동평화 반대세력 지원 등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하타미 이란 대통령 CNN 회견 의미

    ◎이란­미 적대관계 청산 신호탄/인적 교류 통해 국제사회 고립 탈피/미서도 “테러 지원 포기땐 수용” 시각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이 8일 미국의 CNN방송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제의하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그의 연설은 20년동안 적대관계를 유지해온 미국­이란 관계가 개선될 조짐을 나타나내는 의미있는 신호로 해석된다. 하타미 대통령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이란과의 불신의 벽을 무너뜨릴 틈새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특히 적대관계의 청산을 위한 첫 단계로 교수·작가·예술인·언론인·관광객의 교류를 제의, 관계개선방안을 구체화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하타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테헤란에서 열린 회교회의기구(OIC)회의에서도 “위대한 미국 국민들과의 대화를 희망한다”고 말했다.그러나 그는 매우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다.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도 미국정부와의 공식적인 회담이 아니라 미국 국민들과의 비공식 접촉을 제의했다.그의 이러한 계산된 제의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보수파의 반발을 극소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이란의 보수파는 지난 79년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린 ‘호메이니의 회교혁명’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반대하고 있다.종교지도자이며 국가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도 “서방이 줄 수 있는 것은 도덕의 문란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개선 여부에 관한 최후 결정권을 가진 하메네이도 이번 하타미 대통령의 CNN방송 녹화를 막지 않았다.보수파인 나테크­누리 국회의장도 하타미 대통령의 연설을 지지하고 나섰다.보수파의 이러한 변화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음을 시사한다. 온건파 지도자인 하타미 대통령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배경은 ▲미국의 경제제재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제를 회복하고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탈피하며 ▲테러지원 국가라는 나쁜 국가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서도 세계전략차원에서 이란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미국은효율적인 중동정책과 국제 테러 및 대량살상무기 확산의 방지를 위해 이란의 도움이 필요하다.그러나 양국간의 관계개선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과제가 남아 있다.이란은 미국의 이란 고립화정책의 철폐를 주장하고 미국은 중동평화와 국제테러방지 등을 위한 이란의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미국의 제임스 루빈 국무부대변인도 “양국의 관계개선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
  • 선두다툼 치열… 박빙의 승부 예상/D­1:3당의 판세분석

    ◎부동층 최종선택이 대세 좌우/수도권·영남·충청서 최대접전/이인제의 PK득표율 큰변수 여론조사기관들은 막판 승부의 변수로 부동표의 이탈여부를 가름할 투표율과 유력후보 부재인 영남표의 향배,그리고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의 득표력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총론 구분은 같으나 투표율의 수치 등 각론에서는 여전히 판이하다. ▷총론◁ 각 조사기관이 최근 부재자투표가 끝난뒤 내놓은 후보별 지지도 분석치가 모두 다르다.각 당의 정략이 얽혀 더욱 뒤범벅이 된 상태이지만,천양지차다.대략 1,2위의 차이가 20만표 정도 차이가 날 것으로 보는게 지배적 관측이다. 각종 여론조사기관이 세후보 TV합동토론회가 끝난뒤 조사한 대선후보 ‘빅3’의 판세도 일정치 않다.여전히 둘쑥날쑥이다.그러나 흐름은 분명해 보인다.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대부분 오차범위 안에서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그 뒤를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맹추격중인 형세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론조사기관 관계자는 이날 “역시 TV토론은 이인제 후보에게 유리한 것 같다”며 지지도를 완만하게 곡선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전한다.그러나 막판 대역전 드라마를 펼치기에는 ‘다소 버거워보인다’는게 이 관계자의 전언이다. 따라서 이회창,김대중 후보의 1위 다툼이 치열하다는게 대체적인 분석이다.전문가들은 1위가 41∼44%를 득표할 것으로 보고 있다.부동층속에 ‘숨어있는 표’가 어디로 가느냐가 승부처라는 지적이다.부동표를 움직일 요인으로는 향후 1∼2일간의 경제동향 및 영남지역 일부 유권자들의 ‘사표심리’를 꼽고 있다. 이 때문에 자칫 개표가 전체유권자의 2∼5% 가량 진행될 때까지 당선 유력후보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다.부동층의 향배가 예측불허의 상황이기 때문이다.리서치 앤 리서치(R&R) 등은 부동표의 대부분이 기권표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전망이고,현대리서치 등은 ‘숨어있는 표’의 성향에 대해 제각각의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층이 과반이 넘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80% 수준에 머무는 김대중 후보의 호남지역 지지도를 예로 들면서 김후보 지지표도 상당수 달할 것으로 보는 분석도 있다. 이렇게 볼 때 투표율도 변수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는 관측이다.일부 조사기관은 김대중 후보 지지표의 견고성과 이회창 후보 지지층으로 분류되고 있는 50대의 강한 투표성향으로 별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2∼30대의 기권율은 김후보와 이인제 후보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아무튼 투표일이 ‘D-1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1,2위 후보의 판세를 명확히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묘한 표밭상황이다. ▷후보 접전지역◁ 대선 레이스가 결승점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세후보진영은 일부 지역에서 최후의 각축전을 전개하고 있다.서울을 포함한 수도권과 부산·경남권 및 충청권 등이 막판의 주전선이다. 나무가 아닌 숲으로서의 이들 지역표밭의 특징은 크게 두 부류다.우선 여론조사상 순수 부동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수도권과 충청권이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특정 두 후보간에 기세싸움이 치열한 곳이다.이회창·이인제 후보간 대세 장악을위한 막판 힘겨루기가 진행중인 부산·경남권이 여기에 해당한다. 주요 여론조사기관의 조사결과와 각후보진영의 표밭 흐름은 이렇게 요약된다.김대중 후보는 호남권에 절대우위를,서울·경기·충남에서 비교우위를 지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이회창 후보는 대구·경북,부산·경남,강원에서 앞서면서,충청권과 수도권에서 강보합세라는 주장이다.이인제 후보는 경기도와 충청,부산·경남에서 선전하고 있다. 이 판세분석을 종합해도 세 후보간 격전지는 수도권·충청권이다.한나라당과 국민신당간의 강세가 중첩되는 두당간 접전지는 부산·경남권이다. 때문에 이회창·김대중 두 후보측은 수도권에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선거일을 이를 앞둔 16일 나란히 서울거리유세로 부동표 몰이에 나섰다. 부산·경남권 대세를 놓고 한나라당과 국민신당간 사활을 건 선전전도 한창이다.한나라당측이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는 이른바 ‘사표방지론’을 확산시키자 국민신당측이 반대논리를 담은 긴급당보 배포로 차단작전에 나선 것이 대표적사례다.
  • 수도권·영남에 당력 총집결/D­2:3당 판세분석·전략

    ◎한나라당­영남·안정희구세 몰표 장담/국민회의­수도권 화력 집중 대세몰이/국민신당­TK·PK공략 대역전극 노려 한나라당과 국민회의,국민신당은 불과 이틀남은 15대 대통령선거운동 기간동안 고정지지표를 다지는 한편,20%로 추산되는 부동표를 잡기위해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과 영남권에 당력을 쏟아부을 예정이다.한나라당은 ‘안정론’을,국민회의는 ‘준비된 경제대통령’을 내세우고 있으며,국민신당은 젊은 유권자의 투표율을 높이는 방안을 고심중이다. ▷한나라당◁ ‘안정이냐,혼란이냐’는 양자선택을 내세워 막판에 유권자들의 안정희구 심리를 잡겠다는 복안이다.지역적으로는 총 유권자의 26%를 차지하는 영남권을 전략지역으로 집중 공략,대구 경북지역에선 70% 이상을 자신하고 있고 경남지역은 현재 50%의지지를 받고 있지만 투표일까지 60%까지는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IMF관리체제이후 급격히 늘어난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전국의 부동표가 이회창 후보에게 ‘쏠림 현상’을 나타내고 있어 박빙의 김대중 후보와 1백만표이상의 우세를 보일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계층적으로는 중산층의 투표율을 높이는데 신경쓰고 있다.그런 차원에서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구호도 끝까지 반복할 예정이다. 한나라당은 전국의 당 조직을 총동원,상대후보 진영의 막판 흑색선전이나 금품살포 등 부정선거행위를 24시간 감시하는 한편,구전홍보단을 중심으로 김대중 후보의 건강문제와 이인제 후보의 당선불가능론을 집중 홍보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회의◁ 그동안 모아놓은 고정표 사수와 갈곳을 찾는 부동표 흡수에 승부수를 던졌다.지역적으로는 수도권에 화력을 집중,막판 대세몰이에 나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할 수 잇을 것으로 보고있다.특히 각종 여론조사에서 계속 우세를 유지하고 있어 투표율을 80%로 잡을때 1천만에서 1천50만표를 득표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우선 DJT 3두체제를 본격적으로 가동,김대중 후보는 수도권을,김종필 선대회의장은 충청권,박태준 총재는 취약지구인 영남권을 분할 공략할 계획이다. 김후보는 이회창 후보의 경제파탄 책임론을 집중 거론하는 한편,여권의 막판 건강시비와 북풍에 따른 색깔공방을 철저하게 봉쇄할 계획이다. ▷국민신당◁ 영남권 공략에 유난히 공을 들이는 이인제 후보는 15일 부산·경남에 이어 16일 대구·경북을 돌 계획이다.영남에서 대역전의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이다.15일 특별기자회견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조속한 사면을 단행토록 하겠다”고 밝힌 것도 TK표심잡기의 하나로 풀이된다. 국민신당은 부산은 절대적 우위,충청 강원 경기·인천 경남은 경합,대구·경북과 서울은 열세이지만 3차 TV토론회 이후 20%선의 부동층이 이후보쪽으로 움직이면서 경합과 열세지역에서 역전 또는 반전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이에 따라 이회창 후보를 근접한 차이로 뒤쫓고 있다고 보고 막판 표쏠림에 기대를 걸고 있다.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 유세를 선거운동 마지막날인 17일로 잡아 놓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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