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1심 강화의 전제조건/유중원 변호사
얼마전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는 항소심(2심)의 구조를 현행 속심제에서 사후심제로 변경하는 방향으로 하급심 강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하급심의 기능과 역할을 강화해서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궁극적으로 사후심제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1심 단독 재판부의 비율과 관할을 확대하고, 항소심 재판부는 1심 법관보다 많은 법조경력을 가진 동등한 자격의 법관으로 구성하며, 주요 쟁점의 경우 판결문에 소수의견을 기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항소심의 구조가 사후심제로 전환되면 당연히 2심에서는 새로운 소송자료의 제출은 제한되고 원칙적으로 1심에서 제출된 자료만을 기초로 하여 1심판결 내용의 당부만 사후적으로 재심사하게 된다. 그러면 재판의 대전제가 되는 사실관계의 확정이 1심에서 조기에 끝나 3심까지 무리하게 재판이 이어지는 사례가 줄면서 신속한 재판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당사자들은 1심 재판에서 전력투구하게 될 것이다.
오래전부터 법조계에서는 속심제의 폐해가 지적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속심제는 항소심이 필요한 한도에서 독자적인 사실인정을 하고 여기에 법을 적용하여 사건을 재심리한다. 항소심은 그 결과를 가지고 1심 판결과 일치하는가 여부를 조사하는 것이다. 스스로 사실인정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후심제와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우리의 항소심은 그 동안 1심의 재판과정과 재판결과를 송두리째 무시하고 전반적으로 새로 재판을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아무런 제재없이 1심에서 제출할 수 있었던 증거가 항소심에서 뒤늦게 제출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장·입증도 무제한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사건에서도 항소심은 종전의 변론을 재개·속행하므로 역시 무제한으로 새로운 주장·입증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사자나 대리인은 1심을 경시하여 거기에서는 충분한 변론을 다하지 아니함으로써 심리가 항소심에 편중되어 소송이 지연되는 주요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사후심제에서는 실질적으로 1심이 사실관계 확정의 중심이 되고 2심은 법률심 유사한 심급으로 전환될 것이 예상되므로 1심의 중요성이 그만큼 배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1심의 강화와 관련한 비판적인 견해도 만만찮다. 두 번에 걸친 사실관계의 확인절차가 한 번으로 줄어들게 되므로 오판의 가능성이 그 만큼 커질 수 있다는 우려이다. 원래 심급제란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직시하고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 올바른 법적용을 보장하려는 것이므로, 이러한 심급제의 취지가 무시되는 방향으로 사법개혁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상당히 타당한 지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우리의 현행 1심은 비전문화된, 경력이 일천한 법관들이 무거운 업무 부담에 극도로 시달린 나머지 졸속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문제이다. 따라서 현행 체제 하에서는 그 도입에 대하여 매우 신중하여야 할 것이다.
사후심제가 조기에 도입·정착되기 위해서는 법원의 인적·물적 기반을 개혁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특히 법조일원화가 조기에 전면 시행되어야 한다. 법조일원화란 다년간 변호사나 검사를 한 사람 중에서 능력과 인품이 검증된 사람을 뽑아 판사를 시키는 제도라고 보면 틀림 없을 것이다. 법관이란 법률지식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세상 물정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제대로 재판을 할 수 있다.
또한 1심 법관의 전문화를 위한 제도적 정비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므로 법관인사제도의 대단한 혁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법관은 사법관료제와 지역순환근무제의 틀 속에 갇혀 있었으므로 전문화가 제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런 고루한 제도가 타파되어야만 법관 전문화도 가능하고 1심 강화에 따른 사후심제도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이 제도를 조기에 도입하면 혼란만 가중될 것이고, 오히려 재판에 대한 국민이 불신만 증폭되게 될 것이다.
유중원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