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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협받는 식탁] ‘쓰레기만두’ 시민 반응

    [위협받는 식탁] ‘쓰레기만두’ 시민 반응

    서민들이 즐기는 만두에 이어 라면마저 불량식품 파동에 휩싸이자 시민들은 분통을 터뜨리다 못해 허탈감에 빠졌다.“항상 소비자만 봉이냐.”,“도대체 뭘 먹으라는 거냐.”며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시민단체들은 불매운동도 불사하겠다며 불량식품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맘놓고 먹지도 못하는 사회” 평소 김치라면과 만두를 즐겨먹던 신동석(26·회사원)씨는 “정말 이럴 수는 없다.가끔 속이 안 좋았는데 이게 다 불량 음식들 때문이라는 생각까지 든다.”면서 “처벌 기준도 너무 약하다.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은 정말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격분했다.이정운(27·회사원)씨도 “여태까지 만든 불량 만두를 해당 회사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면서 먹으라고 하고 싶다.”면서 “먹을 것 하나 맘놓고 못 먹는 웃기는 세상”이라고 한탄했다. 일부 분식점에서 만들어 파는 만두에도 이번에 적발된 회사의 중국산 무말랭이가 사용됐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시민들은 더욱 분개했다.한 분식점 주인은 익명을 전제로 “솔직히 남는 장사를 하기 위해 값싼 중국산 무말랭이를 사용하고 있다.”면서 “많은 분식점에서 문제의 회사에서 음식점용으로 파는 무말랭이를 고정 구입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에 대해 홍원기(29·회사원)씨는 “아예 집에서 안전한 재료로 만들어 먹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면서 “불량 재료를 만드는 사람은 모두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티즌 “항의전화·서버 공격” 온라인에서도 네티즌의 분노가 들끓었다.불량 만두를 만든 회사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항의 글이 폭주했다.인터넷 테러에 나서자는 주장도 줄을 이었다.포털사이트 다음 게시판에는 이날 식품의약품안전청 발표 직후 수백건의 글이 올랐다.아이디 ‘sharpguy’라는 네티즌은 “쓰레기를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다.”면서 “유통기한과 상관없이 아예 안 먹을 테니 모조리 해당 회사 직원들에게 한 박스씩 선물로 쥐어 줘라.”고 적었다.‘쏘렝이’라는 네티즌은 “대기업도 만두 재료를 몰랐다고 하는데 냄새라도 한 번 맡아보면 다 아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네이버 게시판에서 ‘vicheo’라는 네티즌은 “일본이 한국 만두의 수입을 금지했다는데 정말 창피하다.”고 적었다. CJ㈜의 계열회사인 제일냉동식품을 비롯한 일부 업체의 게시판에는 항의전화와 서브 공격에 나설 것이라는 네티즌의 글이 속속 올랐다. ●시민단체,“정부 안이한 대처” 시민단체들은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안이한 정부 대처를 비판했다.서울환경연합 오유신 간사 등 회원 10여명은 이날 식약청 앞에서 ‘대기업의 무책임과 식약청의 솜방망이 처벌’에 항의하는 집회를 갖고 “불량 식품을 만든 회사는 최소 3년간 식품제조나 유통을 못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오 간사는 “이번에 적발된 한 업체는 과거 3차례에 걸쳐 64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고 하지만 그 정도로 얼마나 타격을 입겠느냐.”고 반문했다.이들은 오는 23일 은평구의 한 대형 할인매장 앞에서 불량 만두와 불량 라면첨가물을 성토하는 소비자 서명을 받을 예정이다.또 대형 매장이나 백화점 등에서 불매운동도 벌이기로 했다.서울 YMCA시민중계실의 김희경 간사는 “회사 명단만 발표할 게 아니라 어떤 제품에 어떤 원료가 사용됐고,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공개해야 한다.”면서 “불량식품으로 챙긴 기업의 부당 이익을 회수하고 집단소송제를 조속히 도입,피해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조업체보다 유통업체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녹색소비자연대의 조윤미 사무처장은 “제조업체는 영세하고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 소비자는 물건을 살 때 유통업체의 이름을 본다.”면서 “유통업체가 회사의 이름을 내걸고 판매하는 식품인 만큼 안전성을 지도관리하고 문제발생 시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위협받는 식탁] ‘쓰레기만두’ 시민 반응

    서민들이 즐기는 만두에 이어 라면마저 불량식품 파동에 휩싸이자 시민들은 분통을 터뜨리다 못해 허탈감에 빠졌다.“항상 소비자만 봉이냐.”,“도대체 뭘 먹으라는 거냐.”며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시민단체들은 불매운동도 불사하겠다며 불량식품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맘놓고 먹지도 못하는 사회” 평소 김치라면과 만두를 즐겨먹던 신동석(26·회사원)씨는 “정말 이럴 수는 없다.가끔 속이 안 좋았는데 이게 다 불량 음식들 때문이라는 생각까지 든다.”면서 “처벌 기준도 너무 약하다.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은 정말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격분했다.이정운(27·회사원)씨도 “여태까지 만든 불량 만두를 해당 회사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면서 먹으라고 하고 싶다.”면서 “먹을 것 하나 맘놓고 못 먹는 웃기는 세상”이라고 한탄했다. 일부 분식점에서 만들어 파는 만두에도 이번에 적발된 회사의 중국산 무말랭이가 사용됐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시민들은 더욱 분개했다.한 분식점 주인은 익명을 전제로 “솔직히 남는 장사를 하기 위해 값싼 중국산 무말랭이를 사용하고 있다.”면서 “많은 분식점에서 문제의 회사에서 음식점용으로 파는 무말랭이를 고정 구입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에 대해 홍원기(29·회사원)씨는 “아예 집에서 안전한 재료로 만들어 먹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면서 “불량 재료를 만드는 사람은 모두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티즌 “항의전화·서버 공격” 온라인에서도 네티즌의 분노가 들끓었다.불량 만두를 만든 회사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항의 글이 폭주했다.인터넷 테러에 나서자는 주장도 줄을 이었다.포털사이트 다음 게시판에는 이날 식품의약품안전청 발표 직후 수백건의 글이 올랐다.아이디 ‘sharpguy’라는 네티즌은 “쓰레기를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다.”면서 “유통기한과 상관없이 아예 안 먹을 테니 모조리 해당 회사 직원들에게 한 박스씩 선물로 쥐어 줘라.”고 적었다.‘쏘렝이’라는 네티즌은 “대기업도 만두 재료를 몰랐다고 하는데 냄새라도 한 번 맡아보면 다 아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네이버 게시판에서 ‘vicheo’라는 네티즌은 “일본이 한국 만두의 수입을 금지했다는데 정말 창피하다.”고 적었다. CJ㈜의 계열회사인 제일냉동식품을 비롯한 일부 업체의 게시판에는 항의전화와 서브 공격에 나설 것이라는 네티즌의 글이 속속 올랐다. ●시민단체,“정부 안이한 대처” 시민단체들은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안이한 정부 대처를 비판했다.서울환경연합 오유신 간사 등 회원 10여명은 이날 식약청 앞에서 ‘대기업의 무책임과 식약청의 솜방망이 처벌’에 항의하는 집회를 갖고 “불량 식품을 만든 회사는 최소 3년간 식품제조나 유통을 못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오 간사는 “이번에 적발된 한 업체는 과거 3차례에 걸쳐 64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고 하지만 그 정도로 얼마나 타격을 입겠느냐.”고 반문했다.이들은 오는 23일 은평구의 한 대형 할인매장 앞에서 불량 만두와 불량 라면첨가물을 성토하는 소비자 서명을 받을 예정이다.또 대형 매장이나 백화점 등에서 불매운동도 벌이기로 했다.서울 YMCA시민중계실의 김희경 간사는 “회사 명단만 발표할 게 아니라 어떤 제품에 어떤 원료가 사용됐고,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공개해야 한다.”면서 “불량식품으로 챙긴 기업의 부당 이익을 회수하고 집단소송제를 조속히 도입,피해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조업체보다 유통업체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녹색소비자연대의 조윤미 사무처장은 “제조업체는 영세하고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 소비자는 물건을 살 때 유통업체의 이름을 본다.”면서 “유통업체가 회사의 이름을 내걸고 판매하는 식품인 만큼 안전성을 지도관리하고 문제발생 시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김영희 이혼클리닉] 때린 뒤 용서 비는 남편 어떻게 할까요

    신혼초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려온 결혼 6년차 여성입니다.남편은 때린 뒤 잘못했다고 싹싹 빕니다.아이들이 어려 아빠의 폭력을 모르고 있어 다행이지만,저는 너무나 무섭습니다.지금까진 정 때문에 살았지만 더는 못 참겠어요.어쩌면 좋을까요? -김송희- 김송희씨.최근 보건복지부가 전국의 부녀상담소 이용자 7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남편으로부터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당한 경우가 61.1%로 나타났다고 합니다.폭력 남편의 74%가 결혼 1년 내에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그 순서를 살펴보면 남편이 술을 마셨을 때가 가장 많고 말대꾸를 할 때,남편 기분에 따라서,남편 외도문제가 제기될 때,성적 욕구에 응하지 않을 때,살림을 못한다,시댁식구에게 잘못 한다,자녀교육을 잘못 한다 등이 이유라고 합니다. 전통적인 아내 역할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권위의식을 유지하려는 통제수단으로 상당수의 남편들이 폭력을 쓰고 있는데 폭력의 정도가 아주 심한 경우가 많아서 우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아주 비열하고도 비인간적인 행위인데도 술 마시고 아내를 폭행하는 것이 마치 남편의 특권인 양 착각을 하고 있는 못난 남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폭력은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며 지속적인 폭력으로 신체적 손상은 물론이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등 정신질환을 앓게 되는데 매 맞는 아내들은 폭력에 대한 불안·초조·공포심으로 심한 무력감에 빠져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폭력 남편들은 아내에게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외출은 물론이고 이웃이나 친지,친구들과의 교류나 사회적 활동을 못하게 하며 항상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자신의 폭력에 대한 책임을 아내가 폭력을 사용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그 원인을 아내 탓으로 돌린다고 합니다. 송희씨.남편은 손찌검을 한 다음날 아침엔 “기억이 없다.미안하다.다시는 때리지 않겠다.사랑 한다.”고 싹싹 빌며 다독여 준다는데 이 같은 행동은 아내를 폭행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행위랍니다.아침에 빌고,그 날 밤 또 때리고….가정폭력은 습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말고 적극적인 대처를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모르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매 맞는 엄마를 보며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만 그 표현을 못할 뿐이지요.폭력가정에서 자란 대부분의 자녀들은 성인이 되면 여자인 경우 남자를 공포와 증오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고,남자인 경우 아버지의 폭력을 싫어하면서도 잠재적으로 닮는다고 해서 폭력은 ‘대물림’이라고들 합니다.“애들 봐서 참고 산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어떤 경우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에 이혼법정에서도 가정폭력을 신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술만 먹으면 아내에게 지나친 가혹행위를 해서 술을 끊고 아내를 폭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봤지만 도저히 자제가 되지 않자 어느 날 산에 올라가 자신의 손을 잘라 버리려고까지 했는데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실컷 울고만 왔다고 하더군요.몇 십년이 지나 이제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그분은 아직도 버릇을 못 고치고 아내를 괴롭히고 있는데 주변으로부터 사람 대접을 못 받아 외톨이 인생을 살고 있고,모진 세월을 참고 견뎌온 아내는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답니다. 송희씨.남편의 폭력이 더욱 심해 질수 있으며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것도 오래가지 않을 겁니다.남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안한 마음 조차 갖지 않게 되고,당신도 지치다 보면 말 꺼내기가 싫게 되어 두 사람은 타인처럼 살거나 마치 원수끼리 한 지붕 아래서 사는 것과 같은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더 늦기 전에 남편이 정신과 치료를 받아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세요.지금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남편은 결국 폐인이 될 수밖에 없고,당신도 후회만 남은 인생을 살게 될 터이니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 [김영희 이혼클리닉] 때린 뒤 용서 비는 남편 어떻게 할까요

    [김영희 이혼클리닉] 때린 뒤 용서 비는 남편 어떻게 할까요

    신혼초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려온 결혼 6년차 여성입니다.남편은 때린 뒤 잘못했다고 싹싹 빕니다.아이들이 어려 아빠의 폭력을 모르고 있어 다행이지만,저는 너무나 무섭습니다.지금까진 정 때문에 살았지만 더는 못 참겠어요.어쩌면 좋을까요? -김송희- 김송희씨.최근 보건복지부가 전국의 부녀상담소 이용자 7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남편으로부터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당한 경우가 61.1%로 나타났다고 합니다.폭력 남편의 74%가 결혼 1년 내에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그 순서를 살펴보면 남편이 술을 마셨을 때가 가장 많고 말대꾸를 할 때,남편 기분에 따라서,남편 외도문제가 제기될 때,성적 욕구에 응하지 않을 때,살림을 못한다,시댁식구에게 잘못 한다,자녀교육을 잘못 한다 등이 이유라고 합니다. 전통적인 아내 역할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권위의식을 유지하려는 통제수단으로 상당수의 남편들이 폭력을 쓰고 있는데 폭력의 정도가 아주 심한 경우가 많아서 우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아주 비열하고도 비인간적인 행위인데도 술 마시고 아내를 폭행하는 것이 마치 남편의 특권인 양 착각을 하고 있는 못난 남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폭력은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며 지속적인 폭력으로 신체적 손상은 물론이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등 정신질환을 앓게 되는데 매 맞는 아내들은 폭력에 대한 불안·초조·공포심으로 심한 무력감에 빠져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폭력 남편들은 아내에게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외출은 물론이고 이웃이나 친지,친구들과의 교류나 사회적 활동을 못하게 하며 항상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자신의 폭력에 대한 책임을 아내가 폭력을 사용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그 원인을 아내 탓으로 돌린다고 합니다. 송희씨.남편은 손찌검을 한 다음날 아침엔 “기억이 없다.미안하다.다시는 때리지 않겠다.사랑 한다.”고 싹싹 빌며 다독여 준다는데 이 같은 행동은 아내를 폭행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행위랍니다.아침에 빌고,그 날 밤 또 때리고….가정폭력은 습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말고 적극적인 대처를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모르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매 맞는 엄마를 보며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만 그 표현을 못할 뿐이지요.폭력가정에서 자란 대부분의 자녀들은 성인이 되면 여자인 경우 남자를 공포와 증오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고,남자인 경우 아버지의 폭력을 싫어하면서도 잠재적으로 닮는다고 해서 폭력은 ‘대물림’이라고들 합니다.“애들 봐서 참고 산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어떤 경우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에 이혼법정에서도 가정폭력을 신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술만 먹으면 아내에게 지나친 가혹행위를 해서 술을 끊고 아내를 폭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봤지만 도저히 자제가 되지 않자 어느 날 산에 올라가 자신의 손을 잘라 버리려고까지 했는데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실컷 울고만 왔다고 하더군요.몇 십년이 지나 이제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그분은 아직도 버릇을 못 고치고 아내를 괴롭히고 있는데 주변으로부터 사람 대접을 못 받아 외톨이 인생을 살고 있고,모진 세월을 참고 견뎌온 아내는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답니다. 송희씨.남편의 폭력이 더욱 심해 질수 있으며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것도 오래가지 않을 겁니다.남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안한 마음 조차 갖지 않게 되고,당신도 지치다 보면 말 꺼내기가 싫게 되어 두 사람은 타인처럼 살거나 마치 원수끼리 한 지붕 아래서 사는 것과 같은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더 늦기 전에 남편이 정신과 치료를 받아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세요.지금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남편은 결국 폐인이 될 수밖에 없고,당신도 후회만 남은 인생을 살게 될 터이니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 [재계 인사이드] SK家 ‘산유국의 꿈’ 대물림

    대를 이어 산유국의 꿈을 일군다.SK 최태원 회장이 지난 25일 노무현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의 청와대 회동에서 “최고가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유가를 잡아 국가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지난 20여년간 추진해온 해외유전 개발을 더욱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히자 업계에선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산유국의 꿈’을 넘어 ‘석유수출국의 꿈’에 대한 강력한 의지라고 해석하고 있다. 최 회장의 선친인 고 최종현 회장은 지난 80년 선경그룹(현 SK그룹)이 정유사인 유공(현 SK㈜)을 인수하면서 ‘무자원 산유국 프로젝트’를 내세웠다.유전이 없는 우리나라도 산유국이 될 수 있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이에 대한 회사 안팎의 반응은 썰렁했다.해외유전 개발사업은 성공 가능성은 매우 낮은 반면 투자비용이 막대해 회사에 부담을 준다는 우려에서다. 그러나 산유국이 되지 않고서는 에너지 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최 회장의 뚝심을 아무도 꺾지는 못했다.최 회장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84년 투자한 예멘의 마리브 광구에서 처음으로 상업성이 확인됐으며 87년에는 원유를 선적하게 돼 ‘산유국의 꿈’이 마침내 실현됐다.고 최 회장의 이같은 ‘산유국의 꿈’이 아들인 최태원 회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 회장은 최근 조직개편을 통해 해외유전 개발사업을 전담하는 ‘R&I’부문을 신설하고 최측근인 유정준 전무를 부문장으로 임명했다.R&I 부문은 과거 최종현 회장이 조직한 자원기획실처럼 체계적·조직적으로 해외 에너지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현재 SK는 전세계 24개국 52개 광구에서 국내 연간 소비물량의 49%에 해당하는 3억 3000만배럴의 원유 매장량을 확보한 상태다.올해에만 1857억원의 매출과 862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대하고 있다. 이종락기자 jrlee@
  • [사설] 비정규직 대책 첫 단추는 뀄지만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23만여명 가운데 학교 영양사 등 3만여명을 공무원이나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사무보조원 등 6만 5000여명에 대해 처우를 개선하는 내용의 비정규직 대책을 발표했다.재계는 민간부문에 미칠 영향과 노동시장의 유연화 추세와 어긋난다는 이유로,노동계는 혜택이 일부 직종에 한정되는 등 미흡하다는 이유로 반발하고 있다.하지만 비정규직 확산이 빈부격차 심화,가난의 대물림 등 심각한 사회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대책을 시작으로 비정규직 보호방안은 꾸준히 추진돼야 한다고 본다. 누차 지적했듯이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급속히 확산된 것은 인건비 절감으로 수익구조를 개선하려는 기업과,내몫 챙기기에만 급급했던 정규직 중심의 노조 책임이 크다.하청업체와 비정규직의 희생을 딛고 기업과 정규직 노조는 주머니를 부풀렸던 것이다.따라서 재계와 노동계가 ‘네탓’ 공방으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해선 안 된다.기업은 각종 편법과 불법적인 방식으로 왜곡시킨 비정규직의 고용 형태를 바로잡아야 하고,정규직은 비정규직 차별 해소를 위해 ‘파이’를 나눠 가져야 한다.비정규직이 기업의 수익과 정규직의 고용 보호에 안전판이라는 시각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재계는 이번 비정규직 대책이 올 임단협에서 가이드 라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노동계는 재계의 이러한 우려를 헤아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쟁취하려 하지 말고 단계적으로 접근할 것을 당부한다.특히 비정규직 보호에 따른 기업의 부담이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사설] 경제정책 방향 분명히 하라

    경제정책 방향이 혼란스럽다.총선이 끝난 지 한달이 가깝지만 서로 다른 목소리만 무성할 뿐이다.정책의 큰 줄기를 둘러싸고 힘 겨루기식 대립이 계속되다 보니 기업들은 투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주요 선진국과 우리의 경쟁국들이 14년만에 최고치에 이른 유가,중국발(發) 쇼크,원자재값 폭등세 등 대외적으로 몰아닥친 악재에 맞서 발빠른 대응에 나서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답답하다 못해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하려는 시장 투명성 확보와 불공정한 시장 질서 시정은 선진 경제 진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본다.성장률 등 눈앞의 수치에만 급급한 나머지 과거 정권이 추구했던 불균형 성장이 ‘빈익빈 부익부’ 심화와 가난의 대물림 등 어떤 부작용을 양산했는지를 똑똑히 기억한다.하지만 최근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밑돌면서 성장 잠재력마저 급격히 위축되는 상황에서 성장을 희생하더라도 개혁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구조로 경제·사회 시스템을 개혁하면 된다지만 어디까지나 이상론에 불과하다.정부와 기업,가계 등 경제 3주체가 생산,투자,소비에 자발적으로 나설 때나 가능한 시나리오인 것이다. ‘최선의 분배는 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진리다.세계 각국이 투자 유치를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그럼에도 지금 열린우리당 내부뿐 아니라 정부 내에서도 경제 정책을 시장 친화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느냐,시장 규제쪽으로 끌고 가느냐로 엇갈리고 있다.양측 모두가 국가 경쟁력 강화와 민생 안정을 들먹이고 있지만 향후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라는 성격이 짙다. 우리는 기업의 투자와 소비 심리를 위축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시장 개혁을 추진할 것을 권고한다.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정국에서 복귀하는 순간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 서울 중구 뿌리찾기, 토박이 손으로

    아직은 뭐니뭐니 해도 엄마 젖가슴을 가장 그리워할,겨우 일곱살배기가 600년 도읍지의 ‘토박이’라고? 한때 국가발전에 최중심 역할을 했지만 새 도심부의 도약과 함께 날로 쇠약해지는 서울 중구의 토박이들이 지역의 자존심을 걸고 똘똘 뭉친다. 서울 중구 토박이회(회장 김성완·신당5동)는 오는 12월 출범 5돌을 앞두고 주민,특히 청소년들의 고장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지역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중구 뿌리찾기 및 유물 발굴작업 등 다양한 사업을 시행한다고 9일 밝혔다. 토박이회는 중구의 뿌리찾기와 관련된 유적·유물을 발굴하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해 길이 보존토록 할 방침이다.이를 위해 각종 워크숍,세미나를 열고 향토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한다. 또 한문교실 운영,남산 가꾸기·기초질서 지키기 캠페인 등 지역 유지로서 사회선도에 앞장서는 운동도 활발하게 벌일 계획이다. 지난 1999년 발족한 중구 토박이회에는 현재 71명이 가입해 있다.중구 관내에 대물림해 70년 이상 거주하고 있는 주민이 그 대상이다.재미있는 점은 회원 가운데 최연소자가 이제 7세인 반면,가장 오래 중구에 거주한 세대가 무려 209년째를 기록한 것.서영우(1997년생) 회원은 아버지가 “3대째 중구에서 살고 있는데 쌍림동,그것도 1번지라는 자부심을 아들을 통해 새겨놓겠다.”며 지난해 이름을 올렸다. 서씨는 집안 사정으로 잠시 다른 곳에서 살아 회원 자격이 없는데,아들 영우군은 할아버지와 그 기간에도 계속 쌍림동에 살아 가입이 받아들여진 것도 이채롭다. 또 다른 회원 최동원(65·황학동)씨는 조선시대인 1795년 이후 현재의 중구 관내에서 선조들에 이어 거주했다는 사실이 족보 등으로 알려져 최고(最古) 토박이로 인증됐다. 송한수기자˝
  • 표성배 두번째 시집 ‘저 겨울산‘

    “공장과 함께 키가 자랐고/공장과 함께 사랑도 익었다.”(‘공장’)는 노동자 시인 표성배가 두번째 시집 ‘저 겨울산 너머에는’(갈무리 펴냄)을 내놓았다. 그의 시집에는 일하는 사람의 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건강함이 물씬 풍겨난다.무럭무럭 피어나는 뜨거운 김 속에는 일터 사랑과 근심,동료에 대한 애정과 세상의 모순이 포개져 있다.그 목소리는 거칠지 않고 응축된 시적 비유로 잘 다듬어져 있다. 시집 곳곳에 뿌려진 시적 자아는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은 채 ‘2만불 시대’ 운운하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그는 마산에서 살고 창원공단에서 일하는,대물림한 노동자다.그에겐 “평생 막일에/굽은 등이 안쓰러운/아버지”와 “고무신 공장에서/어느 날,고무신처럼 천대받아 쫓겨난/누이”가 있다.시인 자신은 반복된 작업으로 창원대로를 달리면서도 “차소리 대신 기계소리”가 들리고 “자동화 기계에 밀리고 밀려/어느 날/수동 기계처럼/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은/내가 보인다.”(‘창원대로를 달리다 보면’)고 토로한다. 늘어만 가는 작업량과 기계화로 인한 퇴출 위기 등은 시인의 불안함을 가중시킨다.“십년 넘게 다닌 공장이/낯설게” 다가오고 “단단히/뿌리내리지 못한 채/하루하루를 견뎌 내는” 선인장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그래서 노동현장은 ‘겨울산’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산 속에 갇히지 않는다.간혹 “낭떠러지를 만나 고개 떨구고/아슬아슬 얼음판을 걸었지만” 그 ‘겨울산 너머’로 무지개를 본다.(‘잘 왔다 싶다’).“한 점 빛 새벽별 뚝뚝 떼어 짓밟고/저 겨울산을 넘고 싶다.”며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무지개 빛 희망을 못내 버리지 않은/마음뿐이다.”(‘무지개’)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종수기자˝
  • 儒林(8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8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어느덧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능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한양에서부터 능성까지의 거리는 758리. 능성현의 원래 이름은 이릉부리(爾陵夫里).백제의 옛 이름으로는 죽수부리(竹樹夫里),혹은 인부리(仁夫里)라 하였다.훗날 선조 때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죽수서원은 백제 때의 옛 지명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이곳은 예부터 궁벽한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라앉는 배. 머나먼 유배 길에서 줄곧 자신의 지난 행적을 떠올려 보던 조광조에게 마지막으로 떠오른 목소리는 수수께끼의 말을 던지고 사라진 최수성의 할(喝)이었다.옛 선승들이 수행자의 망상이나 삿된 사견(邪見)을 꾸짖어 단숨에 정신을 차리도록 외치는 소리처럼 조광조를 향해 ‘가라앉는 배’라고 외친 최수성의 목소리는 줄곧 조광조의 뇌리를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라앉는 배. 결과적으로 조광조는 최수성의 말대로 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바로 자신이 단행한 정국공신의 개정으로 삭훈된 훈구파들의 반격으로 조광조의 배는 가라앉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조광조는 하늘을 우러러 붉은 해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려 말하였다. ―결과적으로 내 행동은 과격하긴 하였지만 다른 사사로운 마음은 전혀 없지 않았던가.저 하늘의 밝은 해는 거짓 없는 내 충정을 낱낱이 비추고 있지 않은가. 수레는 연주산(連珠山) 밑을 지나고 있었다. 구슬이 연하여 있는 모양이라 하여서 연주산이라 불리는 산 밑에는 영벽정(映碧亭)이란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일찍이 김굉필의 스승이었던 김종직(金宗直)은 이곳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연주산 위에 뜬 달은 소반 같은데 풀과 바람 나무 간 곳 없고 이슬 기운만 가득 차네. 천뭉치의 솜구름 모두 흩어지고 한 덩이 공문서(公文書) 보잘 것 없도다. 시절은 다시 깊은 가을이라 아름답긴 하지만 나그네의 회포를 오늘 밤 누가 달래줄 것인가.” 스승 한훤당의 스승이었던 김종직.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던 조선조의 뛰어난 성리학자.학문적으로는 조광조의 할아버지뻘 되는 김종직이지만 정치적으로도 조광조가 이끄는 신진 사림파의 시조였던 것이다.이로 인해 죽은 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무덤이 파헤쳐져 참시를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고 보면 조광조의 유배는 신진 사림파들이 반드시 겪어야 되는 운명의 대물림인 것인가. 정몽주는 격살 당하였고,그의 제자인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고,또 그의 제자인 한훤당은 유배 중에 사사 당하였고,막내격인 조광조 자신은 가라앉는 배를 타고 이처럼 유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김종직이 지은 시처럼 연주산은 깊은 가을이라 핏물을 뚝뚝 듣는 듯한 만산홍엽으로 물들어 아름답지만 나그네의 깊은 회포는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마침내 유배지인 능성에 도착한 조광조는 그 즉시 그곳 현감에게 인계되었다.현감은 비봉산(飛鳳山) 아래 작은 민가를 구해 놓고 시중을 들 관동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다행인 것은 제자 장잠을 비롯하여 생활에 필요한 일을 도와줄 하인들이 조광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헤어질 무렵 자신을 이곳까지 무사히 호송하고 온 나장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가 11월 26일. 조광조가 한양에서 유배 길을 떠난 것이 11월 17일이었으니,정확히 열흘 만에 최종 목적지인 능성에 도착한 것이다.
  • 儒林(8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어느덧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능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한양에서부터 능성까지의 거리는 758리. 능성현의 원래 이름은 이릉부리(爾陵夫里).백제의 옛 이름으로는 죽수부리(竹樹夫里),혹은 인부리(仁夫里)라 하였다.훗날 선조 때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죽수서원은 백제 때의 옛 지명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이곳은 예부터 궁벽한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라앉는 배. 머나먼 유배 길에서 줄곧 자신의 지난 행적을 떠올려 보던 조광조에게 마지막으로 떠오른 목소리는 수수께끼의 말을 던지고 사라진 최수성의 할(喝)이었다.옛 선승들이 수행자의 망상이나 삿된 사견(邪見)을 꾸짖어 단숨에 정신을 차리도록 외치는 소리처럼 조광조를 향해 ‘가라앉는 배’라고 외친 최수성의 목소리는 줄곧 조광조의 뇌리를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라앉는 배. 결과적으로 조광조는 최수성의 말대로 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바로 자신이 단행한 정국공신의 개정으로 삭훈된 훈구파들의 반격으로 조광조의 배는 가라앉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조광조는 하늘을 우러러 붉은 해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려 말하였다. ―결과적으로 내 행동은 과격하긴 하였지만 다른 사사로운 마음은 전혀 없지 않았던가.저 하늘의 밝은 해는 거짓 없는 내 충정을 낱낱이 비추고 있지 않은가. 수레는 연주산(連珠山) 밑을 지나고 있었다. 구슬이 연하여 있는 모양이라 하여서 연주산이라 불리는 산 밑에는 영벽정(映碧亭)이란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일찍이 김굉필의 스승이었던 김종직(金宗直)은 이곳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연주산 위에 뜬 달은 소반 같은데 풀과 바람 나무 간 곳 없고 이슬 기운만 가득 차네. 천뭉치의 솜구름 모두 흩어지고 한 덩이 공문서(公文書) 보잘 것 없도다. 시절은 다시 깊은 가을이라 아름답긴 하지만 나그네의 회포를 오늘 밤 누가 달래줄 것인가.” 스승 한훤당의 스승이었던 김종직.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던 조선조의 뛰어난 성리학자.학문적으로는 조광조의 할아버지뻘 되는 김종직이지만 정치적으로도 조광조가 이끄는 신진 사림파의 시조였던 것이다.이로 인해 죽은 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무덤이 파헤쳐져 참시를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고 보면 조광조의 유배는 신진 사림파들이 반드시 겪어야 되는 운명의 대물림인 것인가. 정몽주는 격살 당하였고,그의 제자인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고,또 그의 제자인 한훤당은 유배 중에 사사 당하였고,막내격인 조광조 자신은 가라앉는 배를 타고 이처럼 유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김종직이 지은 시처럼 연주산은 깊은 가을이라 핏물을 뚝뚝 듣는 듯한 만산홍엽으로 물들어 아름답지만 나그네의 깊은 회포는 그 누가 달래줄 것인가. 마침내 유배지인 능성에 도착한 조광조는 그 즉시 그곳 현감에게 인계되었다.현감은 비봉산(飛鳳山) 아래 작은 민가를 구해 놓고 시중을 들 관동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다행인 것은 제자 장잠을 비롯하여 생활에 필요한 일을 도와줄 하인들이 조광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헤어질 무렵 자신을 이곳까지 무사히 호송하고 온 나장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가 11월 26일. 조광조가 한양에서 유배 길을 떠난 것이 11월 17일이었으니,정확히 열흘 만에 최종 목적지인 능성에 도착한 것이다.˝
  • [녹색공간] 경제公約 환경空約?/이지누 시인·사진작가

    오는 22일은 ‘지구의 날’이다.구태여 무슨 날을 만들어 그것을 생각하고 섬기는 것이 뭣하기도 하지만 그나마 이처럼 날이라도 정해 놓았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언제 생각을 모아 볼까 싶기도 하다.봄이 무르익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고마움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절에 꽃과 나무뿐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지구를 생각 해 보는 것 또한 보람된 일이지 싶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만간차원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망가지거나 사라져가는 지구의 모습을 지켜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어쩌면 그 일은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나 정부 관계자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민간 차원에서는 환경의 소중함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 일깨우는 일은 할 수 있을지언정 법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적어도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환경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사람들의 급격한 인식 전환이다.우리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경제를 위한 개발을 앞세워 모든 것을 깡그리 없애버리고 마는 우를 범할 기회는 없다.개발이란 이미 그 곳에 있는 환경조건과 더불어 가는 것이지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탄핵 정국에 이은 총선이 끝나고 구태의연한 면면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얼굴들이 국회에 많이 들어 간 것 같다.그들이 내세우는 공약은 한결같이 지역구를 개발하여 살기 좋게 만든다는 것이다.경제논리가 최우선인 것이다.내가 사는 곳을 살기 좋도록 편하게 만든다는 데 마다할 까닭은 없다.그러나 한 박자 쉬면서 생각해 보면 개발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있는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새로운 것을 우뚝 세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진정한 개발이란 이미 그곳에 있는 자연조건들과의 적절한 조화를 꾀하는 것 아니던가. 17대 국회에 입성하는 의원들에게 보다 강력하게 바라는 것은 자연환경에 대한 개발과 보전의 함수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그에 맞게 정책을 입안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살기 좋은 나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모든 정책이 그렇겠지만 특히 환경과 관련된 정책들은 먼저 내다보고 미리 준비하여 먼 미래를 보아야 할 것이다.이미 망가져버린 자연은 되돌릴 수 없을 뿐더러 그들 앞에서 또 우리들의 후세들에게 우리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지 않겠는가.자연환경이라는 것은 우리 당대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물림으로 물려야 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그처럼 익숙하기에 오히려 소홀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정책을 입안하며 입법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1972년 유엔의 ‘인간 환경 선언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들은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이제 우리는 세계 속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한층 더 사려 깊은 주의를 거듭하면서 행동해야만 한다.무지,무관심이면 우리들은 우리의 생명과 복지가 의존하는 지구상의 환경에 대해 중대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해독을 끼치게 된다.반대로 충분한 지식과 현명한 행동으로 대응한다면 우리들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인류의 필요와 희망에 알맞은 환경 속에서 보다 나은 생활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나은 경제생활을 보장 받기 위해 공장 열 곳을 세우는 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다.그러나 보다 나은 삶의 질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그 공장을 어디에 어떻게 세우느냐는 것이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17대 국회가 환경에 대한 보다 큰 관심과 현명한 선택을 가지기를 기대해 본다. 이지누 시인작가˝
  • [종하랑 선영이의 배낭메고 60개국](12) 네팔 카트만두

    “Horn Please(제발 경적을 울려주세요)” 카트만두 시내의 대형 차들 뒤에는 이 문구가 꼭 적혀 있다.이곳에서는 뒤차가 존재의 표시로 경적을 울려주는 게 예의다. 여기저기서 빵빵거리며 절대 속도를 늦추지 않는 차들과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매연을 내뿜는 오토릭샤들,유유히 큰 길을 오가는 소들까지 카트만두 시내의 도로는 혼돈 그 자체이다.몇 안 되는 신호등마저 제구실을 못하는 도로에서 조화롭게 어울려 걸어다니는 네팔 사람들의 ‘내공’이 놀라울 뿐이다.우리는 카트만두에 도착한 다음날 거리에 나왔다가 거의 30분간 이쪽 길에서 저쪽 길로 건너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무조건 큰 차가 우선이다.크고 좋은 차와 부딪히면 수리비를 어마어마하게 물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일단 접촉사고가 나면 잘잘못을 따지기 앞서 무조건 도망가기 바쁘다. 아직까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신분제 카스트의 영향이라고 한다.어제는 힌두사원에 가기 위해 택시에 탔는데 운전기사가 우리에게 “당신의 카스트가 뭐요?” 하고 묻는다.우리는 그런 신분계급이 따로 없고 모두가 공평하다고 했더니 그럼 직업을 어떻게 정하느냐고 반문한다. 네팔은 인도문화권에 속해있고 모든 문화나 역사가 인도의 영향을 받아왔다.카스트 제도는 인도보다 더 엄격하게 남아있고 힌두교가 국교로 되어 있으며 음식은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먹는다.식육점이나 신발 꿰메는 직업을 가진 카스트의 최하층 계급인 ‘까미’는 교육의 기회가 거의 없고 직업도 계속해서 대물림하게 되어있다.일반인들은 까미가 손 댄 음식이나 물건은 절대 만지지 않는다. 이 슬픈 현실 속에서도 하층민들은 상층계급에 대해 시기하거나 그들이 누리는 부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자신들도 이번 생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선하게 살면 다음 생에서는 바훈(최고의 카스트)으로 태어날 수 있고 이생에서의 바훈도 지난 생에서 열심히 산 사람들이라 믿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참 흥미로운 종교이다.모든 존재하는 사물과 행위에 신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일상의 모든 행위에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해질녘 가게에서 주인이 불을 켜고 손가락으로 머리와 가슴을 왔다갔다 찍어누르는 기도를 하기에 무슨 기도를 하는지 물었더니 ‘불을 켜게 해 준 신에 대한 감사기도’라고 한다.다신교라고 해서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강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만 살면 평생 선하게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네팔에는 살아있는 신도 있다.‘꾸마리’라고 하는 여신인데 보통 6살 정도에 여신으로 뽑혀서 초경이 있을 때까지 꾸마리 사원 안에 살게 된다고 한다.네팔 사람들은 사원에 들어가서 꾸마리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외국인들은 하루에 10분 정도 창으로 얼굴을 보여줄 때만 볼 수 있다.꾸마리는 일년에 한번 외출하는데,네팔의 가장 큰 축제인 ‘인드라 잣드라’(비를 내려주는 신에게 감사하는 축제)때이다. 네팔은 다양한 신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또 축제의 나라이기도 하다.일년 열두달 다양한 신들을 축복하는 크고 작은 축제들이 끊이지 않고 사람들을 열광시킨다.마호이스트들의 번다(파업)도 축제 때는 피해서 날을 잡는다고 한다.수많은 축제 중에 가장 재미있어 보이는 축제는 10월의 보름 축제가 끝난 후 바로 열리는 띠알축제로,럭치미(부를 가져다 주는 여신)를 축복하기 위해 온 집안의 불을 밤새 켜놓는 축제이다.이날 카트만두의 야경은 정말 환상 그 자체라고 한다.부자일수록 경쟁적으로 불을 밝히기 때문에 불빛 구경 다니는 사람들과 노래를 불러주고 사탕을 받는 어린이들로 시내는 밤새 잠들지 않고 불야성을 이룬다고 하니 그 축제만큼은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우아한 안나푸르나·야성의 에베레스트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히말라야를 본 사람과 히말라야를 보지 못한 사람’.히말라야 트레킹을 무사히 마치고 내려온 사람들이 즐겨쓰는 말이다.우리도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내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안나푸르나 등반을 위해 카트만두에서 7시간을 달려 히말라야 트레킹 지점인 포카라로 왔다. 네팔에 오는 여행자들의 대부분은 에베레스트나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위해 비싼 비자발급과 등반 허가증 발급 비용을 지불한다.시간이나 여건상 트레킹이 어려운 사람들은 한시간에 100달러를 주고 경비행기에 올라 구름 위에서 8,000m급 만년설로 화려하게 수놓인 고봉들의 파노라마를 감상하기도 한다. 에베레스트나 안나푸르나의 베이스캠프(일반인들이 오를 수 있는 가장 고지점)까지 오르려면 하산기간을 합해서 8∼9일짜리 트레킹부터 30일짜리 트레킹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지도 한장 들고 혼자 등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은 네팔 현지 가이드나 포터를 고용하여 함께 올라간다.동양인들은 포터를 많이 고용하는데 하루 5달러를 지불하면 30kg짜리 짐을 대신 들고 올라간다. 각종 장비에 등산화까지 정식으로 갖춰 신고 야심차게 도전하는 사람들과는 대비되는 모습의 포터들은 발가락 두개 끼우는 슬리퍼 하나 신고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거의 날다시피 해서 올라간다.어떨 때는 2∼3시간 미리 롯지(산 중간에 있는 산장)에 도착해서 올라오지 않는 손님을 데리러 다시 산을 내려올 때도 있다. 우리나라 산처럼 등산로가 험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평탄한 길이 많은데도 사람들이 유난히 힘겨워 하는 건 고산증 때문이다.고산병이 와도 올라간 게 억울해서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다가 큰 변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아기자기하게 꽃이며 나무들이 우거진 여성적 매력을 지닌 안나푸르나에 비해 거친 남성적 매력을 지닌 에베레스트는 등반 전문가들이 더 강한 매력을 느끼는 곳이지만 더 높고 험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조심해야 한다. ●알림 신세대 커플 박종화·이선영 부부의 배낭여행기는 필자의 사정으로 이번 네팔편에서 끝을 맺습니다.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기고] ‘친일 규명법’ 왜 머뭇거리나/박유철 전 독립기념관 관장

    3·1절 85돌을 맞은 지금 우리가 가장 부끄러워할 일은,과거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라기보다 광복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 잘못된 과거사에 책임을 물은 일도,물을 수도 없다는 점이다.당시 일제에 빌붙었던 당사자들에 대한 처벌은 고사하고,그들 스스로가 반성도 사죄도 없고,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오만과 뻔뻔스러움을 대물림까지 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우리나라 꼴이 이 모양이니 잘못된 한·일 관계의 과거사야 들춰내 무엇하겠는가.친일파가 득세하는 세태에서 과거사가 청산될 리 없다.이 과거사를 정리하지 않고 어찌 이 나라에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겠는가.과거사를 반드시 정리하고 청산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과거의 채권·채무 관계를 정리하지 않고 어찌 새로운 거래가 이루어지겠는가. 일본이 툭하면 제기하는 식민지 시혜론과 신사참배,교과서 왜곡 등의 행위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한·일 관계와 비슷한 독·불 관계를 보면 독일의 적극적인 사죄와 반성으로 과거사를 깨끗하게 청산해 어느때보다 원만한 관계가 정립되었다.프랑스는 종전 60년이 가까운 지금도 나치 부역행위를 가차없이 처벌한다.부역행위를 숨기고 경찰국장과 장관까지 지낸 자가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끌려나와 10년 징역형을 받은 기사를 보았다.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프랑스 사회가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역사에 대해 경외심을 요구하는 프랑스의 사회적 환경이다.역사에 대해 경외심이 없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한다.나치 부역자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오늘날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프랑스에서는 진정한 과거 청산이 있었기에 그 바탕 위에 국가의 진로를 바르게 설정하고,건전하고 정의가 살아 있는 국가로 국제사회에서 떳떳하게 행세하고 있지 않는가. 16대 국회에서 과거청산 관련 4대 법안의 발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역사의 진보를 확인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비록 불법 정치자금 수사에 묻혀 일반은 물론 언론에서조차 큰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이 법안이야말로 엄청난 역사의 변화요,사회환경의 변화였다.그런데 이 4대 법안 중 친일관련법과 6·25 전쟁 휴전 이전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이른바 6·25 통합 특별법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이로써 제16대 국회는 불법 정치자금 수수란 수치보다 더 부끄러운 모습을 민족과 역사 앞에 노출한 것이다. 더구나 친일규명 관련법은 국회 법사위에서 당초 법안에 수정을 거듭하여 친일행위의 죄상을 규명하고 단죄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있으나마나 한 법으로 변질되고 말았다.그것조차 본회의 상정이 보류된다니 민족정기와 사회정의가 통째로 사라지는 느낌이다.그런다고 친일행위를 한 그들의 과거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결국 이를 계속 감춰 국민을 기만하고 역사를 경시하는 행위는 그 자신들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친일행위자들은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대한 심판을 면했을는지 모르나 용서받을 기회까지 잃은 셈이다.우리는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또 한번 꺾이게 되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화합은 철저한 과거 청산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항일했던 사람,친일했던 사람,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던 사람들 사이에 맺혀 있는 갈등,…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안목으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지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밝힌 것은 전적으로 옳다.국회의원들은 역사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그래야 16대 국회도 살고 우리 민족도 자존심을 찾게 될 것이다. 박유철 전 독립기념관 관장˝
  • 서울탱고-광화문 연가

    이문세의 ‘광화문연가’ 첫사랑의 추억을 다시 꺼내는 것만큼 가슴시린 일은 없다.‘사랑은 시한부’라는 사실을 모른 채 초보 연인들은 엇갈림만 반복하다가 결국 사랑을 과거형으로 만든다.철없는 감정싸움이나 머뭇거림이 평생 잊지 못할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을 게다.그저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걷는 연인은 깨진다.’는 악담이 둘 사이를 갈라 놓았다며 탓할 뿐이다. 그렇지만 악명높은 정동길도 연인들을 내쫓진 못한다.흑백사진의 향취를 물씬 풍기는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을 유혹하는 데이트 코스다.퇴락한 왕조의 고궁을 끼고 도는 호젓한 분위기는 사귐을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그만이다.‘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다정히 걸어가던 연인들….’ 또 하나의 ‘광화문 연가’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5월의 향기가 그리워지면 ‘얼굴없는 가수’의 원조격인 이문세는 1988년 발표한 5집 음반에 광화문 연가를 수록했다.작곡·작사는 3집부터 함께 작업해온 이영훈씨가 맡았다.70년대 올드팝을 곱씹는 386세대에게 TV출연을 거부하던 가수 이문세는 살아있는 전설이다.PD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내던 이씨는 자신의 노래에 대해 곧잘 이렇게 말한다. “제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기 때문에 이제는 제 노래가 아니에요.개인적으로는 어쿠스틱 기타만으로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옛사랑’을 좋아하는데,광화문 연가는 비슷한 분위기라서 즐겨 부르죠.” 5집에서 광화문 연가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시를 위한 시’나 ‘붉은 노을’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등의 비중이 크고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하지만 잊혀질듯 잊혀지지 않는 광화문 연가를 첫사랑의 추억으로 아련하게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다.‘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서울고와 경기여고,이화여고 등이 모여 있던 광화문 일대는 까까머리 교복세대들에게는 첫사랑의 무대다.빽빽한 통학버스에서 피어나는 그들의 이야기는 광화문 주위를 몰래 맴돌며 다져간다.고딕풍의 붉은 벽돌건물인 정동제일교회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공회성당은 뒤배경으로 등장한다.대법원이 시립미술관으로 바뀌고 주택가 깊숙한 자리에 성곡미술관이 들어섰지만 주머니가 가벼웠던 학창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다.이제 근사한 레스토랑도 곳곳에 생겨 광화문 예찬을 늘어 놓자면 수도 없이 많다.하지만 옛 사랑도,옛 배움터도 사라진 지 오래다. ●다시 만들어진 또 다른 느낌의 연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광화문 연가’를 검색하면 가수 이수영의 사진이 떠오른다.음반시장의 불황에도 불구,15만장을 훌쩍 넘긴 5.5집 덕분에 그는 광화문 연가의 대물림을 성공적으로 마쳤다.현해탄을 건너기 전,흘러간 가요를 모아 만든 앨범은 30∼40대의 향수를 자극해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곡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전달해 팬들에게는 새로운 곡으로 다가설 거예요.80년대의 감성으로 이문세씨가 불렀다면 저는 지금의 제 감성을 새로 불어넣었지요. 광화문 연가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서 솔직히 제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죠.하지만 순수함이 느껴지는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어요.” 예전부터 이문세의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그 시절의 추억을 향유하지 않지만 광화문 연가를 한번 불러보고 싶었다.리메이크곡으로 5.5집을 기획할 때,20대인 그와 30대인 프로듀서 그리고 40대인 음반기획사 사장 모두 광화문 연가를 골랐다.당시 30∼40대들은 젊은 날의 추억을 강하게 느끼는구나 생각했고,자주 들은 노래라서 흔쾌히 결정했다. “요즘 노래는 직설적이에요.예전에는 같은 것을 표현하더라도 시적이고 서정적이었죠.신세대의 사랑법과는 달라서 직접 겨냥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의 애틋함과 순수함은 다가서겠죠.” 침울하고 쓸쓸한 것이 요즘 시대와 잘 어울려서 타이틀 곡으로 광화문 연가를 뽑았단다.겨울과 눈이 들어가는 영상도 잘 맞아떨어졌다. 이유종기자 bell@˝
  • MBC PD수첩 '가난 대물림’ 고발

    ‘대한민국 부촌 1번지’인 서울 강남 한복판에 판자촌이 있고,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대대로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10일 오후 11시5분에 방송되는 MBC ‘PD수첩’은 우리나라 최고 부자들이 모여 사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바로 앞에 있는 판자촌을 심층 취재,빈곤의 고착화·세습화 현상을 고발한다. 한 평에 수천만원씩 하는 아파트가 줄지어 늘어선 곳.우리나라 외제차의 50%가 굴러 다니고 소위 ‘돈 많고 빽있는’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런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밤에도 불이 켜지지 않는 동네가 있다.강남구 포이동 266번지 자활근로대 마을.70년대 말∼80년대 초 거리부랑아와 극빈층을 자활시키고 근로의욕을 고취하겠다며 정부가 반강제적으로 조성했다. 주민들은 양재천 너머로 마주보고 있는 타워팰리스 등 부자 아파트 단지의 재활용품을 수거하며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주민 가운데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은 단 한 사람에 불과하고,30대 이상의 주민 대부분이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거나 초등학교만 졸업했다.20대 이하의 젊은 층도 대부분 중졸·고졸의 학력이다.주민 75%가 빚에 쪼들리고 있으며,10명 중 4명은 직업이 없다. 아이들은 사교육의 전시장인 강남에서 과외는커녕 학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한 여중생은 “학원이 달나라만큼 가고 싶다.”고 말한다.촌지를 줄 돈이 없어 선생님에게 이유 없는 구박을 받고,거지마을을 구경한다며 같은 반 남학생이 뒤쫓아오는 바람에 동네 어귀를 한참 배회한 뒤에야 집에 돌아와야 했던 여중생,박물관을 가지 못해 견학 숙제를 할 수 없는 초등학생의 모습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제작진은 “최고 부자동네 한복판에서 부모의 가난이 고스란히 자식에게 대물림 되는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부조리를 짚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영표기자 tomcat@˝
  • [씨줄날줄] 빌 게이츠 유산

    ‘지구의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소수의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 간디는 물질적 풍요가 넘쳐나고 있는 현대에도 많은 민중을 빈곤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부의 편중 문제를 이렇게 표현했다.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원리 자체의 효율성과 함께 그의 모순을 메워 주는 민주주의적 장치들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세계 최고의 부호 빌 게이츠의 유산 상속 발언은 이런 장치를 재삼 되돌아 보게 만든다. 빌 게이츠는 한 인터뷰에서 세 자녀에게 1000만달러만 물려주고 나머지 재산은 자선사업에 쓰겠다는 뜻을 밝혔다.1000만달러는 그의 전 재산 460억 달러의 0.02%에 불과하다.그는 이미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기부한 상태.그는 “아이들의 인생과 잠재력은 출생과 무관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자기 자녀에 대해 자수성가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과 세상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기회 균등의 환경을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다.그는“재산을 모은 이들은 불평등 해소를 위해 이를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을 발견하길 바란다.”며 구체적으로 교육을 통한 사회 불평등 해소에 자신의 재산을 투입할 뜻을 분명히 했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 빌 게이츠 1세는 일찍이 상속세 폐지 반대운동을 통해 부의 사회환원 정신을 알린 바 있다.그는 “아들에게 큰돈을 물려줬다면 오늘의 빌 게이츠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운동에 앞장섰다.이제 아들 빌 게이츠는 부의 사회환원과 함께 어린이를 위한 교육 기회 확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부의 세습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핵심적 장치인 사회환원과 교육기회 확대를 모두 실천해 보이고 있는 셈이다. 서울대학교 연구팀이 내놓은 서울대 입학생 학부모의 소득 및 교육 정도 분석자료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교육을 통한 부의 대물림 현상 해소에 머리를 맞대야 할 시점인데도 어떻게 된 건지 돌아가는 논의는 소외 계층의 배제 논리에 가깝다.빌 게이츠의 유산 발언을 보면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되는 또 다른 이유이다.함께 사는 철학을 갖춘성숙한 자본주의는 우리 사회에는 시기상조인 것일까. 신연숙 논설위원
  • ‘가출소녀 代母’ 경찰의 별 됐다/김인옥 방배서장 첫 女경무관에

    “아버지의 원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풀어드린 것 같습니다.” 아침 6시50분 집에서 출발,7시20분 경찰서 도착.아침은 우유 한잔으로 때우고 점심은 구내 식당에서 간단하게 해결한다.퇴근은 아무리 빨라도 밤 11시.이 고된 생활을 32년 동안 계속해왔다. 그러나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9일 경무관으로 승진한 김인옥(사진·52) 서울 방배경찰서장의 얼굴에는 고단한 기색은 간데 없고 새로운 기대와 열정만이 넘쳐 흘렀다. ▶관련기사 9면 ●부친 영향으로 경찰 입문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김 경무관의 선친은 1950년대 지리산 공비토벌대장을 지낸 김호연(79년 작고)씨.지난 72년 부산 동아대 1학년에 다니던 중 경찰에 투신,여자경찰 공채1기로 순경이 됐다.김 경무관은 “평생 경찰에 투신한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법과 질서를 지키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그는 또 “어렸을 때 앞집에 살던 형사가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고,주위 사람이 모두 무서워하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외로 아버지는 딸의 선택에 반대했다.스스로 나선 공비 토벌 중 두차례나 총상을 입고 죽을 고비를 넘긴 데다,박봉의 고달픈 생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선친은 결국 딸의 뜻을 받아들였다.김 경무관은 “이왕 경찰을 할거면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한우물만 파라고 하셨다.”고 회상했다.이후 32년을 경찰관이라는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경찰조직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편견을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처음 서울 용산서에서 경찰 생활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여자가 정복을 입고 교통단속을 하면 운전자들이 ‘동물원 원숭이 보듯’ 쳐다봤다.”고 말했다.그는 “선친의 말을 잊지 않고 노력한 결과 경감으로 경찰 생활을 마친 선친보다 훨씬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게 됐다.”면서 “선친도 만족해 하실 것”이라며 기뻐했다. ●미혼의 최초 여성 경무관 김 경무관이 일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무섭다.”고 말한다.평생 배필을 찾는 일도 잊을 정도다.그는 “선을 두번 보긴 했는데 신통치도 않고 일이 바빠서 신경을 못 썼다.”면서 “‘경찰’과 결혼했고,‘경찰’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일요일 등산이 유일한 취미인 김 경무관은 관악산,청계산 등 관내의 산만 찾는다.등산 전후에 경찰서에 들러 별일 없는지 꼭 확인한다. 하지만 김 경무관이 ‘악바리’만은 아니다.그는 가출 소녀의 대모로 불린다.순경때 서울역 주변의 윤락여성을 상담하면서 어려운 처지의 여성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고,경찰 생활 중 18년을 여성·청소년 분야에서 일했다.그는 “90년대 중반 경찰청 여성청소년계장으로 있을 때 신촌,강남역 등 서울지역 번화가는 가지 않은 곳이 없다.”고 밝혔다.방배서장으로 와서도 저녁이면 어김없이 방배동 카페골목과 사당동 먹자골목을 다니며 탈선 청소년이 있는지 살핀다. ●“퇴직하면 양로원,고아원 운영” 탈선 청소년의 선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는 “지난 96년 서울 미아리 사창가에서 10대 여학생 둘을 빼냈는데 부모들이 ‘이미 내 자식이 아니다.’라며 발길을 돌릴 때는 아찔했다.”고 돌이켰다.관내 독거 노인을방문하는 것도 김 서장의 주요 일과.2001년 서울경찰청 방범과장 시절에는 의경들과 함께 집 없는 노인들을 위한 복지 시설인 용산 ‘사랑의 집’을 한 달에 두차례씩 찾았다. 김 서장은 퇴직 이후 양로원과 고아원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김 서장은 2000년부터 서울 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에 다니고 있다.올 7월 졸업과 동시에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갖게 된다.그는 “함께 의지하고 봉사하면서 말년을 보내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김 서장은 경찰업무에 여성만의 장점을 살리라고 후배 여경들에게 당부했다. 글 김효섭·사진 강성남기자 new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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