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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주센터 찾은 발, 봉래산에 반한 눈

    우주센터 찾은 발, 봉래산에 반한 눈

    여수 엑스포 개최와 나로호 발사 예정 발표 이후부터 전남 고흥을 찾는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여수와 한 시간 거리인 데다 국립공원 팔영산을 비롯, 거금대교와 청정 해안을 끼고 있어 여름 휴가 장소로도 각광을 받는다. 지난주 1박2일 일정으로 고흥반도를 둘러봤다. 고흥군 직원의 안내로 먼저 나로도 우주 발사기지부터 찾았다. 10월로 예정된 나로호 3차 발사를 앞두고 우주센터는 분주하고 경비가 삼엄했다. 관계자는 이제 이달 중 러시아로부터 1단 로켓이 옮겨지면 나로호 상단부의 모든 부품 이송이 완료된다고 밝혔다. 이미 두 차례 실패를 경험한 터라 벌써부터 긴장감이 고조되는 분위기다. 전남 고흥이란 지명을 떠올리면 우선 멀고 외진 곳이란 생각부터 갖게 된다. 국토 남단에 위치해 접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바다를 끼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고, 유자차와 석류 주산지다. 다른 지역에 비해 소득이 높아 부자들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 환경도 훼손 없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나로도 지구에 자리한 봉래산(410m)은 봉래면 외나로도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만하지만 섬 속의 산답지 않게 웅장하고 위엄이 있다. 탐방코스(6.5㎞)는 다도해의 수려한 경관을 끼고 나 있어 산행 중 아기자기한 묘미를 맛볼 수 있다. 봉래산 일원에는 일제시대 시험림으로 조성된 80년 이상 된 3만여 그루의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산림욕을 즐기기 위해 탐방객들이 즐겨 찾는다. 봉래산 자락에는 자연과 조화된 나로우주센터가 들어서 있다. 국내 희귀 야생화인 복수초 군락지도 있다. 복수초는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로 겨울에 눈속에서 꽃이 피며 행복과 장수를 상징한다. 봉래산은 우주센터를 품에 안은 듯한 산세여서 탐방객들에게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봉래산을 떠나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편입된 팔영산(八影山)을 찾았다. 팔영산은 육지 속의 산으로 8개의 암봉으로 이뤄져 있다. 1봉부터 8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풍광을 보기 위해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다. 중국 위왕이 세수하려던 관수(세수대)에 여덟 개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비쳤는데 이게 바로 팔영산이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원래는 팔전산이라 불렀으며, 위왕의 관수에 팔봉이 비쳤다고 해서 그림자 영(影)자를 붙여 불리게 됐다고 한다. 팔영산 등산 안내도에서 산행코스를 확인하고 능가사의 천왕문 도로를 택해 등반길에 올랐다. 개울을 가로지르는 팔영교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팔영산장이 나온다. 무더운 여름철 하룻밤 휴양하기 안성맞춤일 성싶었다. 등산로는 산장 왼쪽의 절골 코스를 타면서 조금씩 가파르게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고흥분소는 팔영산 지구(점암면·영남면)와 나로도 지구(봉래면·도화면)로 나뉘어 4개 면이 인접해 있다. 팔영산 지구는 자연공원법에 의해 10년마다 공원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는데 지난해 초 도립공원에서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편입·승격됐다. 팔영산은 소백산맥의 끝자락으로 고흥에서 가장 높은 산(608m)이다. 8개의 봉우리(유영봉·성주봉·생황봉·사자봉·오로봉·두류봉·칠성봉·적취봉)가 남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솟아 있다. 새벽녘 정상에서 보는 일출과 함께 맑은 날에는 멀리 일본 대마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팔영산 남동쪽 능선 계곡에는 천연림 속 참나무 자연휴양림이 조성돼 있다. 신령스러운 산자락에 고흥을 대표하는 명찰 능가사도 자리 잡고 있다. 화엄사·송광사·대흥사와 함께 호남 4대 사찰로 꼽힌다. 팔영산에는 이 밖에도 경관이 빼어난 신선대와 선녀봉, 강산폭포, 흔들바위 등이 있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부모님과 피신하여 어머니를 구했다는 유청신 피난굴도 명소로 자리잡았다. 성기리 마을 쪽으로는 편백숲 자연학습장이 조성돼 있고, 능가사 뒤편으로는 팔영산 오토 캠핑장도 있어 동호인과 가족단위 탐방객들이 즐겨 찾는다. 하지만 팔영산을 얕보고 올라갔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깎아지른 암벽을 쇠줄 한 가닥에 지탱해 오르기도 하고, 바위 틈에 박힌 쇠고리와 쇠발판을 의지해 내려가야 하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적대봉~오천제 저수지’ 일원도 명소로 각광받는다. 환경부는 멸종위기종과 육상·습생·해양 생태계가 공존하는 이곳을 지난해 초 생태 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녹동항과 소록도, 그리고 거금도를 연결하는 연륙·연도교가 2009년 3월 소록대교(1160m) 준공에 이어 2011년 12월에 거금대교(2028m, 2층 복합교량)가 개통돼 지역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글 사진 고흥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 양평군, 사유지 무단훼손 후 매수 약속도 ‘모르쇠’

    경기 양평군이 조선 세종 때 대마도 정벌에서 큰 공을 세운 이순몽(1386~1449) 장군 묘를 정비하면서 사유지를 무단 훼손하고, 터무니없는 매수 약속을 했다가 망신만 당했다. 17일 윤모(47)씨에 따르면 윤씨 부친은 1982년 양평군 개군면 공세리 산28의3 일대 임야 1만 6219㎡를 매입했다. 그런데 매도자와의 갈등으로 소유권등기를 완료하기 1년 전인 1986년 이순몽 장군 묘로 밝혀지면서 묘역 전체가 경기도기념물 92호로 지정되고, 윤씨가 상속받은 나머지 임야는 문화재보호구역 반경 300m 이내(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에 편입돼 사실상 개발 및 건축행위가 불가능하게 됐다. 더욱이 양평군은 2002년과 2004년 토지주인 윤씨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묘역을 보수정비한다며 주변에 있던 우량 소나무 50여 그루를 무단 벌목하고 돌 계단까지 만들었다. 윤씨가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항의하자 차일피일 시간을 끌던 양평군은 무단 벌목에 대한 보상을 실시하고 묘역 3000㎡와 진입로를 포함한 3119㎡의 임야를 우선 매입했다. 나머지 1만 3000여㎡는 도비를 지원받는 대로 매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경기도문화재심의위원회에서 문화재보호구역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다른 지역에 선례가 될 수 있다며 여러 차례 반대해 지금까지 매수하지 못하고 있다. 무턱대고 도비 지원을 기정사실로 여긴 탓이다. 이에 대해 윤씨는 “많은 돈을 주고 사들인 토지에 집 한 칸 지을 수 없는 것도 억울한데, 매수도 못 해 주겠다면 이보다 더한 재산권 침해가 자유민주국가에 어디 있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양평군 관계자는 “충분히 동정할 만하지만 (묘 일대 3119㎡를 매입한 것으로 문화재 보호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문화재심의위원회에서 부결시켜 어쩔 수 없다.”고 화살을 돌렸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9) 류성룡과 조헌

    [선택! 역사를 갈랐다] (19) 류성룡과 조헌

    임진왜란을 앞두고 비둘기파였던 류성룡(1542~1607)과 영조 때 영의정에 추증된 매파 조헌(1544~1592)은 원칙주의자로서 서로 갈등했다. 전쟁 후 류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했고,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사한 조헌은 그의 제자 안방준의 기록 ‘은봉야사별록’을 통해 잘 알려졌다. 이 두 개의 문헌이 일본에 전래되면서 류성룡과 조헌에 대한 해석은 제2라운드를 맞이한다. ●임진왜란 직전의 일본의 망상 100년 이상 이어지던 일본의 분열상태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중국 명나라는 물론 인도까지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명나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선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도요토미는 조선과는 싸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자리한 쓰시마(대마도)의 지배자인 소씨(宗氏)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소 요시시게(1532~1589) 등에게 조선 국왕이 직접 자신에게 항복하러 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 국왕이 순순히 항복을 하면 조선과는 전쟁을 하지 않고 조선군을 앞세워 명나라를 칠 것이요, 아니면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쓰시마와 조선의 관계는 도요토미가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만일 반도와 열도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다면, 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는 쓰시마로서는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될 터였다. 그래서 쓰시마 측은 조선 국왕 대신 조선 측의 사절단을 오도록 하겠다고 도요토미에게 아뢴 뒤, 이번에는 조선 조정측에 사절단의 파견을 간청했다. 사절단만 보내주면 두 나라 사이에서 전쟁은 피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비둘기파와 매파의 이견 사절단을 파견해 달라는 쓰시마 측의 요청을 받은 조선 조정의 의견은 갈라졌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거부했지만 쓰시마 측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당시 대제학이던 류성룡은 속히 결론을 내려서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현장에서 동분서주한 실무가였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적대 정책을 펴서는 안 되며, 국내적으로는 전쟁을 대비하고 대외적으로는 능숙한 외교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날의 잘못을 징계해서 뒤의 어려움을 대비한다.”는 뜻을 제목에 담은 ‘징비록’의 첫머리에 성종에게 신숙주(1417~1475)가 남긴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 마소서.”라는 유언을 실은 것이나, ‘징비록’에서 “왜”라는 호칭과 함께 “일본”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한 데에서도 실무가 류성룡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조헌은 쓰시마 측의 사절단 파견 요구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에서는 일본의 상황을 도요토미가 선왕(先王)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조헌은 신하의 신분으로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불의를 저지른 도요토미가 통치하는 일본과는 절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1591년 귀국한 황윤길(1536~?)과 김성일(1538~1593) 등이 가져온 도요토미의 국서 내용에 분개한 조헌은 일본 사신을 참수하고 그 시체를 여러 나라에 보임으로써 불의의 일본을 정벌할 연합군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김상헌(1570~1652)의 ‘청음집’에 적혀 있다. 이처럼 전쟁 발발 목전의 조선 조정에서는 비둘기파와 매파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전쟁의 위기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어떤 나라에서든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조선 군사정보, 일본으로 유출 두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조헌은 전쟁이 일어난 1592년에 고경명·영규 등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참가한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고, 류성룡은 전쟁이 끝난 1598년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하회로 낙향했다. 전쟁을 막고자 한 두 사람은 전쟁 중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비슷하게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그래도 류성룡은 ‘징비록’을 집필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헌보다는 행운이었다. 그 대신, 조헌은 비장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후세에 변호인을 얻을 수 있었다. ‘은봉야사별록’을 쓴 안방준(1573~1654)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하늘이 조헌으로 하여금 살아서는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죽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도록 했다며 슬퍼했다. 실로 조헌을 대신하여 그의 변론문을 썼다고 하겠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징비록’과 ‘은봉야사별록’은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겪은 류성룡과 조헌, 안방준에 대한 귀중한 증언임과 동시에, 전쟁 당시 조선 측의 상황을 생생하게 담은 중요한 군사적 문헌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헌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약탈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 후 검은 커넥션을 통해 일본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두 문헌이 조선국 바깥으로 유출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83년에 작성된 쓰시마의 장서목록에 이 두 문헌이 나란히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유출 시기는 그 이전으로 짐작된다. 유출된 지역은 아마도 왜관으로 생각된다. ●‘징비록’ 17세기 日 지성계에 큰 영향 근세 일본에서 이야기되던 임진왜란 담론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당사자나 그 주변인이 남긴 증언과 문헌에 의거한 것으로, 여기에는 오로지 일본 측 시각만이 담겨 있다. 그러다가 17세기 초기에 중국 명나라에서 제작된 ‘양조평양록’과 같은 문헌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 자신들과 싸웠던 적국의 내정(內政)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명측의 문헌에는 자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하기 이전 단계인 1592년의 전황을 비롯하여 조선 측의 상황이 소략됐고, 조선에 대한 명의 편견 역시 상당했다. 그 결과 일본과 명나라의 문헌을 종합해서 편찬된 ‘조선정벌기’ 등의 문헌에서는, 임진왜란은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전쟁이고 조선은 전쟁의 무대이자 수동적인 역할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기록된다. 역사는 반복돼 1895년 청일전쟁 이후에도 되풀이된다. 17세기 중기 조선의 임진왜란 문헌 몇 점이 일본에 유입된다. 그 가운데 일본 지식인들이 주목한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이었다. ‘징비록’을 통해 명측 문헌에서 보이는 조선 측에 대한 편견 몇 가지가 수정되고, 조선 측에도 전쟁 영웅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일본에 알려졌다. 이순신이 일본에서 ‘영웅’으로 인식된 것도 ‘징비록’의 영향이었다. 비록 임진왜란을 명과의 일대 결전으로 바라보고 싶어 한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을 ‘징비록’ 하나가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징비록’이 근세 일본 사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긴 것 역시 사실이었다. 예컨대, 1695년 교토에서 출간된 일본판 ‘징비록’의 서문을 쓴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1630~1714)은 당시까지 일본에 존재하던 임진왜란의 기록 가운데 ‘징비록’과 ‘조선정벌기’만이 ‘실록’(實錄)이며 다른 것들은 번잡하여 볼 것이 없다고 평하였다. ●日 ‘은봉야사별록’으로 ‘징비록’ 비판 물론 인기를 끌면 반발도 생기는 법. 18세기 후기가 되면서 ‘징비록’을 폄하하는 문헌들이 일본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왜관에서 근무한 경험을 지닌 쓰시마의 학자가 쓴 ‘조선정토시말기’라는 책의 서문에서, 아사카와 도사이(1814~1857)는 류성룡이 “당시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에게 해를 입힌 죄를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거짓을 적어 사람들을 속였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징비록’을 ‘실록’이라고 칭송한 가이바라 엣켄을 비판하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상반된 견해가 이 시기의 일본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사카와는 1849년 일본에서 간행된 ‘은봉야사별록’에도 서문을 실었다. 여기서 그는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 국왕 선조는 음락했고 조정에서는 류성룡·이덕형 등의 간신이 발호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고, 명나라의 도움을 기다려서 간신히 나라를 되살릴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양조평양록’의 기사를 끌어와 류성룡과 ‘징비록’을 비판한다. ‘은봉야사별록’를 간행한 것은 미토학(水戸学)이라 불리는 에도시대 후기의 일본중심적 학파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아사카와처럼 ‘징비록’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은봉야사별록’을 함께 이용함으로써 ‘징비록’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격하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류성룡과 조헌의 대립과 갈등은 ‘징비록’과 ‘은봉야사별록’이라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임진왜란 문헌에 실려 일본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두 사람 중 어느 한 편을 들 필요가 없던 일본 학자들은 두 문헌을 비교하며 냉정한 눈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측 상황을 서술했다. 조선 내부의 갈등이 근세 일본에서 재현되어 저들에게 편리하게 이용된 씁쓸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가와구치 조주(1773?~1834)는 임진왜란 관련 문헌을 종합하여 임진왜란을 연대순으로 편찬한 ‘정한위략’을 간행하였다. 그는 이 문헌의 기본틀을 잡기 위해 ‘징비록’의 서술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이이·조헌과 대립한 류성룡을 비판하는 ‘은봉야사별록’의 구절을 여럿 가져와서 ‘징비록’과 류성룡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류성룡이 간신이었다는 ‘양조평양록’의 글에 대해 ‘은봉야사별록’에서도 류성룡을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는 걸 보니 이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고 적고 있다. 다만, ‘징비록’에서 우국충정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니 류성룡은 처음에는 나라를 그르쳤으나 전쟁이 일어난 뒤에 반성했음을 알겠다고도 적고 있다. 김시덕(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
  • [데스크 시각] 대선 후보자와 국제 통찰력/이기철 국제부 부장급

    [데스크 시각] 대선 후보자와 국제 통찰력/이기철 국제부 부장급

    #1.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즉,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흥선대원군이 병인·신미양요 승리 이후 서울 종로 네거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세운 척화비 내용 일부다. 집권 이전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리며 구걸을 서슴지 않는 파락호 생활을 했다. 서민과 생활하며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1863년 둘째 아들이 12살에 왕위에 오르자 그는 조선 최고의 실력자가 됐다. 당쟁의 근거지였던 서원을 철폐했고, 60년 세도정치에 가렸던 왕권의 위엄을 되찾고자 경복궁을 재건하는 등 국내문제 개혁에 치중했다. 긴박했던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권력 기반 약화를 우려해서다. 반면 중국은 1840년, 일본은 1854년 개방했다. 조선은 1860년대 프랑스·미국 등에 의한 통상교섭 즉, 개방 요청이 잇따랐지만 대원군은 빗장을 걸어잠갔다. #2. 원나라의 억압에 100여년간 신음하던 14세기 고려. 12살 때 원나라 연경에서 10년 볼모 생활을 했던 왕전은 1351년 고려로 돌아와 31대 공민왕이 됐다. 몽고 풍속을 없애고, 고려 조정 안팎을 장악했던 기씨 일족을 비롯한 친원세력을 제거했다. 내정을 간섭하던 쌍성총관부를 폐지해 자립 왕조로 다시 태어났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과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되찾았다. 세계를 호령한 원나라지만 남쪽에서 무서운 기세로 일어난 홍건적에 정신이 팔렸다는 공민왕의 국제적 통찰력이 없으면 펼 수 없는 정책들이었다. 홍건적은 얼마 후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지도자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웠다. #3. “일본이 다음해(1592년)에 조선의 땅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하려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조선 조정에 올라왔다. 보고서는 묵살당하고, 이를 보고한 관리는 파직당했다. 왜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보고는 수시로 올라왔다.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는 조선 조정에 몇 차례 전쟁 발발을 경고했다. 전쟁에 휘말리기 싫었던 그는 증거로 소총 2자루도 갖다줬고, 조선의 눈으로 일본의 정세를 보라고 통신사 파견도 요청했다. 통신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보고는 엇갈렸다. 부산포에 살던 일본인들은 모두 철수하면서 전쟁 분위기가 완연했다. 국제정세에서 듣고 싶었던 것만 들었던 선조는 명나라를 향해 피란갔고, 경복궁은 불탔다. 선조가 최강국인 줄 알았던 명나라는 몇년 지나지 않아 지도에서 사라졌고, 조선은 전란으로 쑥대밭이 됐다. 과거 최고 지도자가 국제적 통찰력이나 감각이 없을 때와 있을 때의 우리의 판도가 달라진 대표적 사례들이다. 지금은 실시간으로 국제 소식이 전해지는 개방된 세계여서 국제문제 대처에서는 과거와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불과 9년 전인 2003년 미국이 요청한 이라크 파병을 두고 국론이 첨예하게 갈렸다. 이라크전 소식은 실시간으로 들어왔지만 국가 지도자들은 강 건너 불보듯했다. 지금 다시 그와 유사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국제적 이목이 집중된 이란 핵프로그램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이 겉돌았다는 것이 최근의 외신 보도다. 미국이 이란 핵시설에 대해 군사적 타격에 나서면서 한국에 동참을 요청하면 우리는 나서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란 핵프로그램의 해결방식은 북한 핵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의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에겐 더욱 중요한 문제로 와 닿는다. 또 최근 법 개정을 통해 핵무장의 길을 연 일본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의 말마따나 ‘예의주시’만 하면 될 일인가. 일본이 당장은 아니겠지만 현재의 관료와 정치인이 모두 바뀐 다음에는 핵무장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만은 없다. 중국, 북한에 이어 일본의 핵무장 여지는 동북아의 핵 도미노 우려를 가중시킨다. 6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 나서려는 이들에게서 우리를 옥죌 수도 있는 국제 문제에 대한 말도 듣고 싶다. chuli@seoul.co.kr
  • [열린세상] 국왕의 선물/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열린세상] 국왕의 선물/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2003년도에 일본 교토대학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그 대학 문학부에서 효종이 송시열에게 하사한 ‘주자어류’를 보는 순간, 그 내사본(內賜本)은 국왕이 신하와의 공치(共治)를 약속한 징표라고 생각했다. 이후 나는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조선의 국왕이 사대부나 외국 사신들에게 유형무형의 선물을 증여하면서, 사대부와의 공치를 이루어내고 대외적으로 국가권력의 상징성을 견지해 온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펴보았다. 근대 이전에는 국왕이 국가권력의 상징이자 권력의 실현 통로였다. 현실 공간에서는 왕권이 신권(臣權)보다 미약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신하의 권력은 국왕을 통해 구현되었으므로 국왕의 존재가 없었다면 사대부 정치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조선 500년 동안 국왕과 신하의 관계는 실로 어수(魚水)의 관계여야만 했다. 국왕과 사대부는 조선의 정치구조에서 민중의 삶을 책임지고, 외환에 대처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스스로의 존립 근거를 제시해야 했다. 그들은 서로 견제하기도 하고 때로는 보완하기도 하면서 자신들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 고심했다. 국왕의 선물은 관직이나 마찬가지로 공기(公器)라고 일컬었다. 그것을 어떤 장(場)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은 국왕의 권력 행사로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국왕 이외에 대비, 왕비, 세자도 신민들에게 갖가지 선물을 내렸지만 국왕의 선물이야말로 군신 간의 의리를 강화시켜 주는 보조 장치로서 큰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국왕이 신민들이나 외교 사절에게 내린 선물은 실로 다양했다. 동옷과 초구 같은 의복에서부터 활, 화살, 말, 서적과 문방사보, 약재와 음식물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많았고 그 이유도 갖가지였다. 어떤 물건은 아예 한 해의 증여량을 계산하여 상의원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다. 또한 상규를 벗어난 사면과 같은 것도 선물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국왕이 선물을 내리는 것을 한자로 내사나 하사 혹은 은급이라 했다. 이때에는 대개 선물의 발급주체와 발급관청이 명시된 은사문도 함께 내렸다. 국왕이 선물을 내리면 신하나 백성은 국왕에 대한 충성의 뜻을 표하고, 때에 따라서는 사은의 의식과 함께 사전(謝箋)을 받들어 올렸다. 태조는 동북면에 산재한 조상들의 무덤들을 보살피고 동시에 그 지역의 행정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에게 동옷을 내렸다. 세종은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강역을 확정하기 위해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를 보내면서 자신이 입고 있던 홍단의를 내려주었다. 문종은 부왕의 뜻을 이어 함길도를 안정시키기 위해 상중에 있던 이징옥을 기복시키고 의복을 내려주었다. 또한 태종은 교서관의 홍도연에 궁온을 내려 흥을 돋우어, 이후 국왕이 문한(文翰)의 관서에서 행하는 공연(公?)에 찬조하는 관례를 만들었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최익현에게 돈 3만냥을 선물하고, 양무위원 이기에 대한 징계를 사면하는 한편, 일제의 압력으로 퇴위하여 상왕이 되었을 때는 유길준에게 용양봉저정을 하사하는 등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조선의 국왕은 외교적으로 국가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로 노력하였다. 세종은 명나라에 대해 국격에 맞는 사절을 보내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황화집’을 간행하여 명나라 사신에게 증정했다. 성종은 유구 사신을 칭하는 하카다 출신 일본인에게 조선의 토산품을 내려서 일본, 대마도, 유구와의 외교적 관계를 신중하게 이어나갔다. 그러나 국왕의 권력이 미약하거나 국왕이 혼암하여 선물을 잘못 내린 일도 있었다. 단종은 계해정난 이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신들에게 선물을 증여했고, 광해군은 부질없이 종계변무의 일을 재차 거론한 허균에게 녹비를 내렸다. 국권을 빼앗긴 순종은 의병들을 토적으로 규정하고 일본 거주민들을 위문하는 한편, 일본군 주차사령부에 1000원을 하사하였다. 근대 이전의 왕정을 미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국왕들은 대개 선물도 공기(公器)로서 중시하고 인문주의의 토대 위에서 품격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 사실은 오늘날 행정책임자들에게 하나의 ‘거울’이 될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
  • 최익현선생 유배길 12일 개장

    최익현선생 유배길 12일 개장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1833~1907) 선생의 선비정신과 애국정신을 기리는 ‘면암 유배길’이 열린다. 제주관광공사와 제주대 스토리텔링연구개발센터는 12일 오전 10시 제주웰컴센터에서 이 행사를 연다고 9일 밝혔다.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회관에서 출발해 방선문계곡까지 이르는 5㎞ 구간의 면암 유배길은 최 선생의 발자취와 항일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 길에는 제주의 대표적 유학자 이기온 선생과 최 선생의 만남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문연사, 한·일강제 합방 이후 선생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은 유생들이 비밀 모임을 조직해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내용을 새겼다는 조설대 등이 있다. 면암 유배길은 오라 올레길과 연결돼 한천을 따라 숲길과 명소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열림행사에 참가하는 관광객 등에게는 제주 유배길 안내책자인 ‘제주 유배길에서 나를 찾다’와 기념품 등이 제공된다. 최 선생은 1873년 당시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와 1년 4개월 동안 머물렀다. 1906년에는 의병운동을 벌이다 일제에 의해 대마도로 압송됐으며, 단식 끝에 1907년 75세의 일기로 옥사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통영 충렬사 앞 여황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통영 충렬사 앞 여황로

    길은,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삶 사이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대처로 떠나는 자식의 발걸음이 잠시 떨리며 머뭇거렸음을, 옷고름 사이로 떨어진 어미의 눈물방울이 짭짜름했음을 동구밖 길은 아주 오래 기억했다. 동네 사이마다 아로새겨진 길이 2014년부터 우리네 삶의 새로운 주소로 본격 쓰인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 잠시 낯설더라도 이내 편안해질 것임을 믿는다. 동네를 감아 도는 길에는 감칠맛 나면서도 예쁜 이름이 오롯이 붙어 있다. 서울신문은 매주 그 길의 결마다 숨겨진 기억을 더듬어보고, 지금 여기에 남겨진 의미를 되새겨본다. 1930년대 중반 그 봄,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으면 통영 앞바다가 훤히 펼쳐졌을 게다. 여황산자락 아래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이어진 집들을 지난 눈 속에는 쉴 새 없이 고깃배가 오갔고, 부푼 꿈을 안고 오는 이, 또 다른 꿈을 이고 타향으로 떠나는 이가 엇갈리는 낡은 선창이 비쳤을 테다. 하지만 사랑을 잃은 사내에게는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도 오롯이 아름답기 어려웠으리라. 한참 나중에 호사가들이 통영을 일컬어 ‘한국의 베니스’ 운운하며 아름다운 풍광을 칭송했지만, 스물넷 평안도 출신의 청년시인 백석(1912~1995)에게는 실연의 상처가 훨씬 컸을 수밖에 없었다. 백석은 사랑을 위해 멀리 남쪽 바다까지 헛걸음을 반복해야 했다. 한 번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다른 두 번은 사랑을 기억하며 가슴 먹먹함을 달래기 위해 찾았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사랑이 돌아올 리는 없는 법. 통영을 다녀왔던 길은 그의 작품 속 중요한 지역의 하나로 자리매김시키는 것으로 갈무리됐다. ●삼도수군통제영 복판 여황산 끼고 돌아 백석의 발길로부터 80년 가까이 흐른 5월에 통영을 찾았다. 그가 시 ‘통영1’에서 묘사한 것처럼 통영 여황로에는 마침 ‘김 냄새 나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차들은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고, 타관의 학생들을 실은 수학여행 버스들은 줄을 지어 여황로 길을 지나고 있었다. 여황로는 174m의 야트막한 여황산(艅山)에서 비롯된 이름의 길이다. ‘여황’은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임금이 아끼던 화려한 배로, 훌륭한 군세를 갖춘 큰 전선을 상징했다. 통영항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산세를 펼치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복판에 자리잡은 산이니 딱 걸맞은 이름이다. 도로명 새주소를 만들기 전까지 통영 사람들은 그저 산복도로라고만 불렀으나 이름을 붙인다고 했을 때 여황로라는 이름을 다는 것에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통영시 북쪽 여황산 아래쪽으로 4113m 이어지며 문화동, 북신동, 명정동 등을 감싸고 돈다. 통영은 현대문화예술의 보물창고와도 같다. 특히 여황로 하면 일단 백석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여황로 251번 충렬사 앞에는 백석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통영2’라는 시다. 편의상 ‘통영1’, ‘통영2’라고 했지만 발표 당시 원래 제목은 모두 ‘통영’이었다. ‘통영2’는 그가 통영에 대해 쓴 시편 중 가장 길고 유려하며 음율을 잘 살렸다. 그는 ‘통영2’에서 이곳을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또 ‘난()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에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라고 노래했다. 사랑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여황로 길가에 앉아 한껏 달떠서 혼자 히죽거리는 백석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곧 깨지고 말 단꿈이었지만. 여기에 원체 아름다운 통영의 풍광까지 한눈에 들어왔으니 시인의 시심이 절로 우러났을 것임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백석 시비 앞 명정샘 박경리가 소설에 써 ‘난’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백석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다. 막 문청을 벗고 등단해 시인이 된 그는 한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통영 출신의 이화고녀 졸업반이던 박경련을 만나고, 첫눈에 반해 사귄다. ‘난’이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그는 박경련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통영을 찾았지만 걸음이 엇갈려 만남이 어긋나게 됐다. 난의 집이 충렬사 근처인 명정동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 사이 그의 직장(조선일보) 동료이자 친구였던 이가 난과 결혼을 해 버리고 말았다. 사랑과 친구를 함께 잃은 아픔 탓이었을까. 그는 그해 조선일보를 그만뒀다. 그리고 기생 자야(子夜·본명 김영한·역시 백석이 붙여준 애칭이다)를 만나 불 같은 사랑을 나눴고, 고향집 부모님의 성화에 다른 여인과 혼례를 치렀지만 다시 자야에게 돌아갔다. 1940년 자야마저도 떠나 고향땅인 신의주, 정주로 갔다. 그가 통영에 대해 직접 남긴 작품은 ‘통영 1, 2’ 외에 ‘남행시초2-통영’ 등 모두 세 편이다. 특히 ‘남행시초2-통영’ 시편 마지막에는 난의 외사촌 오빠인 ‘서병직씨에게’라고 적었다. 그를 통해 통영 장터며 선창 등을 둘러봤음을 알게 해준다. 백석이 들여다본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골 명정샘은 지금도 여황로 시비 앞에 있었다. 충렬사 문화해설사인 옥복주(47)씨는 “일(日)정과 월(月)정 두 개의 샘이 있어 명정(日+月=明井)이 됐다.”면서 “1670년 만든 이후 몇 년 전까지 330년 넘도록 식수로 썼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은 여전히 맑지만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통영2’ 중)을 찾을 수는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명정골은 통영이 고향인 박경리(1926~2008)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문장 속에도 그 흔적을 흩뿌려 놓았다. 박경리는 명정골에 대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고 했다. 박경리의 생가는 여황로 충렬사 주차장 맞은편 바로 곁의 좁은 골목길인 ‘토영 이야길’을 따라가면 있다. 새주소로는 충렬1길 76-38이다. 하지만 현재 다른 이가 살고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표지판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남편과 사별한 시조시인 이영도(1916~1976)에게 2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무려 5000통의 연서를 보냈던 유부남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사연이 남겨진 곳도 그리 멀지 않다. 유치환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보이는/ 우체국 창문 앞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복’ 중)고 노래했던 통영중앙우체국(세병로 5)은 여황로에서 서문로를 따라 7~8분 남짓 내려오다가 세병로(청마거리) 오른쪽으로 접어든 뒤 3~4분쯤 걸어가면 있으니 그리 멀지 않다. ●지긋한 뱃사람도 시 한 구절 읊어 이른 아침 여황로 어귀에서 만난, 통영에서 나고 자랐다는 늙수그레한 중년의 김모(58)씨는 “그 사람들이야 먹고살만 하니까 그림도 그리고, 소설도 썼겠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뭐….”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유치환, 이영도의 ‘아름다운 불륜’이며, 시인 김춘수, 화가 김용주,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박경리 등 통영 출신 예술가의 이름들을 줄줄이 들먹였다. 흔히 돈을 잘 버는 동네에서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들 하는데, 통영이라면 ‘중늙은이 뱃사람도 시 한 구절, 소설 한 토막쯤 읊조린다.’는 말이 좋이 쓰일 법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후딱 오른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통영시내 쪽으로는 강구안길이며, 여황산이 보이고, 다도해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한산도, 매물도, 그리고 멀리 대마도까지 한눈에 푹 안긴다.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과분할 만큼의 통영이다. 이곳의 길 위에서 시집 한 권, 소설 한 권 옆구리에 끼고 그 옛 기억과 향취까지 가져간다면 더욱 어울릴 법하다. 글 사진 통영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역사의 보고 통영의 길들 동피랑·서문까꾸막… 토박이말 길이름 천국 통영은 바다의 왜적들과의 싸움, 그리고 평화에 대한 바람으로 다져진 곳이다. 통영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 뚜벅뚜벅 들어감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4년(선조 37)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 세운 뒤 ‘통영’이라는 지명이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통제영의 약칭에서 따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인 충렬사와 통제영의 일종의 객사 역할을 했던 세병관(洗兵館·세병로 27), 그리고 북포루(北樓) 등은 통영 출신 학생들의 단골 소풍 장소이고, 다른 지역 학생들에게는 수학여행 필수 방문지다. 길 이름 역시 이러한 역사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세병로, 충렬로 등은 물론이고 통제영을 굳게 지키던 문들도 이름을 남겼다. 동문로(東門路)와 서문로(西門路)는 모두 옛 통영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였던 동문과 서문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두 문 모두 고갯마루의 정상쯤에 위치해 있었으니, 통영 토박이들의 말로 ‘동문까꾸막’(동문고개), ‘서문까꾸막’(서문고개)이라고 불렀던 길들이다. 북신로(北新路) 역시 통영성 북문 바깥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길이라는 뜻이다. 또한 세병로와 여황로 사이를 잇는 갈림길인 운주길은 옛 통제영의 관아였던 운주당(運籌堂)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남해안대로에서 갈래져 나온 원문마을길은 통제영 입구였던 원문성(轅門城)에서 따온 마을 이름을 달았다. 이 밖에 통영을 찾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동피랑길은 정겨운 마을 벽화로 유명하다. ‘피랑’은 벼랑을 일컫는 통영 말이다. 통영시의 동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배기로 통영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을 자랑한다. 통영성과 동포루(東樓)의 유적이 있다. 이는 서피랑길 역시 마찬가지. 서쪽 벼랑 즈음에 있으며 통영성과 서포루의 유적이 복원 과정에 있다. 통영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지방시대] 부산 광안리의 변신/김형균 부산시 창조도시본부장

    [지방시대] 부산 광안리의 변신/김형균 부산시 창조도시본부장

    광안대교로 유명한 광안리는 한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서민 취향의 부산 도심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물론 지금도 여름 해수욕철이면 피서객이 하루에 수십만명씩 모여들지만 명성은 예전만 못한 느낌이다. 30~40년 전 광안리는 서민들이 만만하게 이용하던 해수욕장 분위기였고, 해운대는 왠지 관광객과 상류층이 즐겨 찾던 해수욕장 같은 분위기였던 기억이 있다. 그후 광안리는 침체일로를 거듭해 오다가 광안대교가 개통된 최근 10여년간 급속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해수욕장 기능보다도 일상적인 청춘의 문화거리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7.6㎞가 넘는 광안대교의 야경 불빛은 단순한 관광자원을 넘어 뭔가 모를 아련함을 불러일으키는 해안형 경관자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바다 건너 대마도에서도 볼 수 있다는 광안대교 불빛이 근처 상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를 넘어 이미 광안대교 야경은 전국적 명성을 구가하고 있다. 특히 이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매년 10월에 열리는 세계불꽃축제는 하루 저녁에 100여만명이 몰려 안전사고를 우려할 정도로 집객력이 높은 행사로 정착했다. 이러한 광안리에 최근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의 시도가 우리의 눈길을 끌고 있다. 우선 상권 분포에 있어서 횟집과 카페 위주의 단조로운 상권 구성이 다양해지고 있다. 젊은 마니아층을 상대로 문화예술과 디자인을 표방하는 의미 있는 상가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상권의 종다양성은 그 지역발전의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일 만하다. 또한 젊은 청년문화 기획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 모여서 지역잡지를 자발적으로 만들어 지역 내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일이다. 아직은 3호에 불과하지만 꽤 내실 있게 만들어 5000여부를 배포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모이고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들도 구상되고 있다. 얼마 전에 시도한 야외 디스크자키 페스티벌에 2000여명의 남녀 노소가 모여 맘껏 음악에 몸을 맡기고 즐긴 바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지역이 창조적으로 재생되기 위해서는 문화적 공간의 등장, 창조적 인재의 집결, 창조적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 창조적 비즈니스의 활성화 등의 요소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전 세계적 창조 도시들에서 확산되고 있는 창조 지역 만들기의 추세는 바로 이러한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선순환적으로 작동하는가 하는 것이 주요 관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삭막하던 광안리 해변가가 문화적 공간의 다양한 등장, 젊은 청년문화를 만끽하려는 잠재적 창조 인재의 집결, 지역잡지 발간을 통한 지역단위 의사소통의 시도, 이에 따른 창조적 사업 기회의 점진적 확산 등 창조적 공간으로 변신하려는 잠재적 역량이 축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역량들이 어떻게 유의미하게 네트워크로 엮이느냐 하는 것이다. 다양한 창조적 잠재 자원도 그 상태로는 말 그대로 잠재적 자원일 뿐이다. 얼마만큼 타이밍 맞게, 공간적으로 문화생태적 의미를 지니면서 네트워킹이 되느냐는 이 지역 창조주체들의 꾸준한 노력에 달려 있다. 이 지역의 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주민, 자치단체, 창조적 문화기획자 등 창조주체들의 의미 있는 참여와 노력을 통해 광안리 해변이 창조 지역으로 아름답게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 日구로다, 이번에는 “대마도가 한국땅이냐?” 공격

    日구로다, 이번에는 “대마도가 한국땅이냐?” 공격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언론인인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 특파원이 난데없이 대마도를 앞세워 한국의 독립기념관을 비난해 빈축을 사고 있다. 구로다 특파원은 자사 신문에 연재하는 ‘서울에서 여보세요’라는 외신칼럼 10일자에서 ‘대마도는 이미 한국 영토?’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한국 어린이들의 학습의 장’이라면서 “넓은 부지에 많은 전시관이 있고,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와 탄압에 대한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가 전시돼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일본 수학 여행단도 잘 다녀가는 곳으로 일본어 팸플릿도 제작돼 있는데, 서두에 독일인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아우슈비츠는 독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써놓아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나치 독일의 유대인 말살 만행과 같은 것처럼 이미지화했다.”고 사실상 불만을 드러냈다. 이어 그는 최근 한국에 사는 일본인이 말도 안되는 일이 있다고 해서 팸플릿을 자세히 살펴보니 지도에 대마도를 한국 땅으로 표기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그는 “이렇게 해놓은 것을 보면 기념관의 전시 수준까지 의심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독립기념관 측은 일본어 안내책자에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도가 실려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각 나라와 제주도, 독도, 대마도 등을 표기한 것이지 그것이 어느 나라 땅인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마치 한국이 일부러 사실을 왜곡하려고 한 것처럼 자사 국민들에게 전하는 것은 두 나라 모두에 결코 도움되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1) 데이트 강간을 위한 ‘악마의 술잔’ 한모금에 블랙아웃…24시간내 검사 못하면 미제사건 2) 죽음의 性도착증 ‘자기 색정사’ 혼절직전의 성적 쾌감 탐닉…‘질식에 중독되다’ 3) 친구와 함께 차안에서 아내에 몹쓸짓 한 남편 …사고로 위장한 최악의 선택 4) 살해당한 아내의 눈속에 담긴 죽음의 비밀… 흔해서 더 잔인한 위장 살인의 실체는 5) 강간 후 살해된 여성, 그리고 부검의 반전 죽을 때까지 여성이고 싶었던 여성의 사연 6) 천안 母女살인범, 현장에서 대변만 보지 않았더라도… ‘미세증거물’ 속에 숨은 사건의 진상 7) 정자가 수상한 정액…씨없는 발바리’ 과학수사 얕봤다가 정관수술까지 한 연쇄 성폭행범 8) 변태성욕 30대 살인마의 아주 특별한 핏자국 혈흔속 性염색체의 오묘한 비밀 9) “그날 조폭은 왜 하필 남진의 허벅지를 찔렀나?”… 칼잡이는 당신의 ‘치명적 급소’를 노린다 10) 소변 참으며 물 마시던 20대女, 갑자기 몸을 뒤틀며…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의 물’ 11) 자살한 40대 노래방 여주인, 살인범은 알고 있었다 생활반응이 알려준 사건의 진실 12) 불탄 시신의 마지막 호흡이 범인을 지목하다 화재사망 속 숨어있는 타살흔적 증거는 13) 車 운전석에서 질식해 숨진 그녀의 주먹쥔 양팔 14) 백골로 발견된 미모의 20대女, 성형수술만 안 했어도… 가련한 여성의 한 풀어준 그것 15) 무참히 살해된 20대女…6년만에 살인범 잡고보니… 274만개의 눈이 잡은 연쇄살인범의 정체 16) 이태원 옷집 주인 살인사건…20대 여성이 지목한 범인은? 찢어진 장부의 증언 17) 물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흰손…토막살인범 잡고보니 바다에서 건진 시신 신원찾기 18) 헤어드라이어로 조강지처 살해한 50대의 계략… 몸에 남은 ‘전류반’은 못 숨겼네 19) 자살이라 보기엔 너무 폭력적인 죽음…왜? 가해자·피해자는 하나였다 20) 아파트 침대 밑 女 시신 2구…잔인한 ‘진실게임’ 결과는? 누명 벗겨준 거짓말 탐지기 21) 자다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젊은 남자들…누구의 저주인가? 청장년 급사증후군의 비밀 22) 70% 부패한 시신 유일한 증거는 ‘어금니’ 억울한 죽음 단서 된 치아 23) 살인현장에 남은 별무늬 운동화 자국의 비밀 60대 노인의 치밀한 트릭 24) 택시 안에서 숨진 20대 직장女 살인범은 과연… 돈 버리고 납치한 이상한 택시 강도 25) 그녀가 남긴 담배꽁초 감식결과 놀라운 사실이 살인 현장에 남은 립스틱의 반전 26) 목졸리고 훼손된 60대 시신… 그것은 범인의 속임수였다 ‘파란 옷’ 입었던 살인마 27) 40대 여인 유일 목격자 경비 최면 걸자 법최면이 일러준 범인의 얼굴 28) 소리없이 사라진 30대 새댁, 알고보니 들짐승이… 부러진 다리뼈가 범인을 지목하다 29) 살인자가 남기고 간 화장품 향기, 그것은 ‘트릭’이었다 강릉 40대女 살인사건의 전말 30) 동거女 잔혹하게 살해한 30대, 시신이 물속에서 떠오르자… 살인후 물속으로 던진 사건 그후 31) 최악의 女연쇄살인범 김선자, 5명 독살과 비참한 최후 청산염으로 가족, 친구 무차별 살해 32) 살해된 20대女의 수표에 ‘검은 악마’의 정체가 담기다 완전범죄를 꿈꾸던 엽기 살인마 33) 억울한 10대 소녀의 죽음…두줄 상처의 비밀 추락에 의한 자살? 몸을 통해 타살 증언하다
  • 사천~제주 소형항공기 운항 ‘승객 부족’… 한달만에 중단

    사천공항 활성화의 버팀목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사천~제주 간 소형항공기 운항이 이용 승객 부족으로 한 달여 만에 중단됐다. 경남 사천시와 한국공항공사 사천지사는 17일 소형항공사인 코리아익스프레스에어(KEA)가 지난 10월 11일 시작했던 사천~제주 간 소형항공기 운항을 이달부터 중단했다고 밝혔다. KEA는 한 달씩 운항 허가를 연장하는 부정기 노선 운항 허가를 받아 매주 3차례 왕복 운항했다. 그러나 운항 결과 지난달 11일에만 이용승객이 18명으로 정원을 채운 뒤 두 번째 운항편이었던 13일에는 2명, 15일에는 이용 승객이 아예 없었다. KEA와 한국공항공사 사천지사 등은 대신 사천~대마도 노선과 사천~김포노선에 대한 소형기 운항 타당성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천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전남 진도 ‘사계절 낚시천국’

    전남 진도가 ‘사계절 낚시천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연간 10만명이 찾고 있어 “낚시가 진도경제를 견인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진도가 최근 낚시꾼으로 북적이는 이유는 이곳이 우리나라에 몇 남지 않은 황금어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도해 국립해상국립공원에 있는 조도면 맹골도, 장죽도, 관사도, 청등도, 대마도 등 곳곳에 포인트가 산재해 있다. 다른 지역처럼 포인트를 선점하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잠을 설칠 필요 없이 말 그대로 ‘황제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어족자원 고갈로 대물은커녕 제대로 된 입질 한 번 받기 어려운 낚시인들도 진도에 오면 반 나절 만에 쿨러를 가득 채우는 ‘폭발 조황’에 놀라기 일쑤다. 특히 천혜의 황금어장인 조도 일대는 사면이 바다인 진도에서 손꼽히는 낚시터다. 또 고군면 회동, 벌포, 의신면 접도, 임회면 헌복동 등 진도 전체가 천혜의 바다 낚시터로 일단 나가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다. 목포해경 진도파출소에 따르면 지난 1~9월 낚시꾼 1만 4000명이 찾았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은 물론 강원도에서까지 찾았다. 또 진도군은 광주·전남권 일원에서 방문하는 생활 낚시인을 포함하면 1년에 10만여명이 진도를 찾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곳에서는 오는 20일에는 진도군 낚시연합회장배 전국대회가 열린다. 진도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조선의 사대교린 현대 한국에 유용”

    “조선의 사대교린 현대 한국에 유용”

    “사대(事大)라는 관계성 인식의 틀이 명(明)의 영향력이 강했던 조선시대에도, 그리고 미국의 영향력이 강했던 한국의 현대에도 모두 유용할 수 있는 학문적 틀임을 시사해준다.” 조선의 대외정책은 흔히 사대교린(事大交隣)으로 요약된다. 중국을 큰 나라로 섬기는 사대, 여진과 왜 등 나머지 주변국과는 평화적으로 교류하는 교린을 합친 말이다. 쉽게 말해 너무 강한 중국에는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리되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고, 우리만도 못한 주변 약소국들에는 중국과 달리 인정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이는 오랑캐 청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며 북벌 운운하던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혹시, 이런 틀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장서 수용해 기적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새마을운동을 후진국에 전수하는 한국의 현재 상황이 더 많이 반영된 것은 아닌가. 이런 도발적인 문제제기는 오는 4~5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에서 열리는 ‘전국역사학대회-국경을 넘어서 이주와 이산의 역사’에서 발표되는 정다함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사대와 교린과 소중화라는 틀의 트랜스내셔널한 맥락’)에 담긴 내용이다. 사실 사대는 곤혹스러운 부분이다. 조선은 애초부터 독립심이라곤 없었다는 일제의 침략논리에 맞서야 했던 한국으로서는 그 이전 중국에 머리를 조아렸다는 부분을 어떻게든 희석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나온 논리가 맹목적으로 굽힌 게 아니라, 비유하자면 미국식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이었다는 해석이다. 사대와 사대주의를 구분한 뒤 사대의 참뜻은 “조선이 능동적으로 펼친 이른바 현실적, 실용적 외교정책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역시 극복이 아니다. 어쨌든 ‘중화의 우수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능동적인 면을 강조하려 했지만, 결론은 “외래의 중화 문명을 보편으로 본질화한 뒤 그 보편문명이 조선에서 오히려 더 잘 실현됐다.”는 논리로 치닫게 된다. 이는 “제국주의적 논리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논리를 내면화하면서 중화중심주의의 문명론적 편견과 그 위계질서 속에 결국 수렴될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이는 다시 ‘교린’으로 이어진다. 사대의 수치는 우리보다 못한 이들을 상대로 풀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당하면 수치지만, 내가 하면 자비다. 정 교수는 이 같은 맥락에서 15세기 조선이 여진과 대마도 정벌에 힘썼다는 점과, 교린이라는 표현이 16세기 중반 이후에야 나온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교린’은 일정 정도의 군사적 행동 뒤 다독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이 벌인 전쟁에 대한 과소평가”인데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을 가해자로 비판하고, 늘 조선이 피해자였음을 강조”하는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결국 “명을 제외한, 자신과 경쟁하는 나머지 이웃들을 상대적 야만으로 규정지음으로써 소중화로 자리매김하려는 조선의 입장”과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서 일본과 2인자 자리를 놓고 서로 경쟁해야하는 대한민국의 입장”의 교집합 부분이 바로 사대교린이었다는 게 정 교수의 주장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다지 크게 바뀌지 않았을른지 모른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경남 사천~ 제주노선 KEA 소형기 첫 운항

    한국항공공사 사천지사와 코리아익스프레스에어(KEA)는 12일 경남 사천공항과 제주공항을 오가는 노선에 KEA 소속 소형항공기가 지난 11일 취항식을 한 뒤 운항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KEA 항공사는 이 비행기를 사천~제주 간 부정기 노선 운항허가를 받아 다음달 10일까지 한시적으로 운항한다. 승객이 많으면 계속 운항 허가를 신청할 계획이다. 부정기 노선의 운항 허가는 한 달씩 연장된다. 이 비행기는 18인승 소형 항공기로 매주 화·목·토요일 3차례 왕복 운항한다. 사천공항에서 화·목요일은 오전 10시에, 토요일엔 오전 9시에 출발한다. 제주공항에서는 화·목요일은 낮 12시에, 토요일은 오전 11시에 출발한다. 비행시간은 1시간 10분이 소요될 예정이다. 항공요금은 편도 9만 9000원으로 매주 금·일요일 한 차례씩 운항하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요금보다 1만 2000원가량 비싸다. KEA는 2005년 4월 한서우주항공사로 출발해 현재 소형항공기 2대와 헬기 등 모두 5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김해~대마도(주7회), 김포~대마도(주1회) 노선에 운항되고 있다. 경남도와 한국항공공사 등은 이번 소형항공기 운항이 이용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천공항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경남도는 이를 위해 적자 항공노선에 대한 재정지원 조례 제정을 추진, 오는 20일 본회의에서 처리할 예정이다. 창원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14개 섬 유배객의 궤적

    중국 당대 선승 임제의 언행을 담은 임제록에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 등장한다. 언제 어디 있든지 내가 주인이고, 그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이라는 이 일갈은 불교에서 개개인의 주체적인 삶을 강조하는 말로 회자된다. 삶에서 끊임없이 부닥치게 되는 시련과 고통을 꿋꿋한 마음가짐으로 이기고 넘어서자는 경계. 이젠 일반인도 자주 새기는 경구 중 하나이다. ‘험한 곳일수록 나를 챙겨 진여(眞如)를 보라’는 이 교훈은 피할 수 없는 극단의 고통 속에서 더 빛이 난다. 유배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들과, 유배지를 새로운 삶의 반전 기회로 삼은 사람들의 대비는 그 마음가짐의 편차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이종묵·안대회 지음, 북스코프 펴냄)는 그 수처작주의 마음가짐을 유배지에 연결한 책으로 눈길을 끈다. ‘절망의 섬에 새긴 유배객들의 삶과 예술’이란 부제를 붙였듯이 거제도, 교동도, 진도, 제주도, 흑산도, 남해도를 비롯한 14개의 유배 섬에 서린 유배객들의 궤적을 생생하게 들춰낸다. 유배라 함은 주로 권력싸움의 패배에서 맞게 되는 죽음과도 같은 격리의 극형이다. 삼국사기에 기록이 전할 만큼 이 땅에서도 그 유배는 오랜 역사를 갖는다. 정쟁의 회오리가 거셌던 조선시대엔 유배자도 늘어나 15∼16세기 무렵엔 벼슬아치 4명 가운데 1명꼴로 유배를 당했다는 조사결과가 전한다. 형벌의 정도도 가혹해져 처음엔 유배자를 한양과 가까운 곳으로 보냈다가 점차 살기조차 힘든 절해고도의 궁벽한 곳으로 격리시켜 갔다. 제목의 위리안치 역시 유배객이 머무는 집의 지붕 높이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쳐 그 안에 유배객을 유폐시킨 형벌이다. 책은 그 위리안치에 감금당한 유배자의 삶의 차이를 들춰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권력 다툼의 와중에 신하들에게 쫓겨난 두 왕 연산군과 광해군이 한탄하며 살다가 숨을 거둔 교동도는 절망과 한의 유배지다. 정쟁의 피바람속에 이건명이 두 아들과 함께 최후를 맞았던 나로도, 일제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적국 땅으로 유배돼 최후를 맞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 최익현의 대마도 역시 비운과 한의 섬. 그런가 하면 유배기간 ‘현산어보’를 남긴 정약전의 흑산도며 70세의 나이에 유배돼 ‘백령도지’를 낳은 이대기의 백령도, 유배문학의 대표작이라는 ‘사씨남정기’를 남긴 김만중의 남해는 기회와 진여 찾기의 땅으로 부각된다. 유배객이 아니었다면 이름조차 생소했을 절해고도. 그곳에서 각기 다르게 살아냈던 이들의 흔적이 그저 가벼운 이야기 거리만은 아닌 듯싶다. 1만 8000원.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洪대표 “울릉도 방문 日의원 입국 막아야”

    洪대표 “울릉도 방문 日의원 입국 막아야”

    한나라당 홍준표(얼굴) 대표는 다음 달 1일로 예정된 일본 자민당 의원들의 울릉도 방문 계획과 관련, “이들의 입국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 대표는 22일 한 방송 대담프로에 나와 “대한민국 헌법은 영토를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있다.”면서 “일본 극우 의원들이 한국에 오는 목적이 한국의 헌법질서를 부정하자는 것인 만큼 국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이들을 입국시켜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홍 대표는 그러면서 “만일 한국인이 대마도를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일본으로 간다면 일본은 이들을 받겠느냐.”면서 “한국의 헌법을 부정하고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러 오는 의원은 출입국관리법상 거절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홍 대표 발언에 앞서 이재오 특임장관은 지난 21일 “일본 의원들의 울릉도 방문을 저지하기 위해 입국 전날인 31일부터 다음 날까지 독도에서 해경 경비대원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보초를 설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낚시 천국’ 제주 추자도 낚시금지 논란

    제주시가 갯바위 낚시꾼들의 사고 예방을 위해 ‘낚시 천국’ 추자도에서의 낚시행위를 일부 금지하자 낚시인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11일 제주시에 따르면 국내 돔낚시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추자도의 절명여와 대관탈 등에서 낚시꾼들의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3월에는 절명여에서 낚시를 하던 3명이 실종돼 2명이 일본 쓰시마섬(대마도) 인근 해상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등 높은 파도에 갯바위에서 낚시꾼들이 고립되는 등 안전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이에 따라 시는 해양경찰 등 관계기관의 의견을 수렴해 지난 3일부터 절명여와 대관탈에서 낚시어선 영업을 제한했다. 그러자 낚시인들이 제주시청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코미디언 이용식씨는 지난 9일 “케이블TV 낚시프로그램에 출연해 제주도가 바다낚시 천국이라고 수없이 홍보했다.”면서 “그러나 이번 낚시금지 소식은 바다낚시 붐을 일으켜 많은 낚시관광객들이 제주를 방문하도록 하겠다는 제주도의 약속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대마도行 뱃길 스톱

    오는 4월부터 부산과 일본 쓰시마(대마도)를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6개월여간 임시 휴항에 들어갈 예정이어서 관광객의 불편이 예상된다.국내 유일의 쓰시마 운항 여객선사인 대아고속해운은 새달 1일부터 오는 9월 27일까지 6개월가량 여객선 운항을 중단하는 ‘휴항신청서’를 국토해양부에 제출했다고 22일 밝혔다. 대아고속해운 측은 지난 11일 일본 대지진 이후 승객이 거의 없어 부득이 휴항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운항이 중단되면 국내에서 쓰시마로의 직항로는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김포공항에서 쓰시마로 주 3~4회 소형 비행기가 운항되지만 18인승에 불과해 여객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쓰시마로 여행을 떠나려는 관광객이나 중·고등학교 수학여행객들의 불편은 물론 국내와 쓰시마의 교류에도 큰 차질이 예상된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초교 200여곳 올해 신입생 ‘0’

    초교 200여곳 올해 신입생 ‘0’

    전남 진도군 조도면 대마도의 조도초등학교 대마분교. 수업을 받는 학생은 3학년 김다솜(9)양과 6학년 김푸른하늘(12)양 단 둘뿐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10여명의 학생들이 교실을 채웠다. 신입생을 받지 못한 게 벌써 3년째다. 내년이면 1명만 남는다. 채병성(38) 교사는 “1~2년 뒤 취학연령에 도달하는 아이가 1명 있다.”면서 “이 학생이 들어오면 전교생 2명이 유지되지만 학년 차이가 커 복식수업을 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저출산 등으로 취학아동이 점차 줄어들면서 도서지역과 농·산촌의 상당수 학교가 문 닫을 위기를 맞고 있다. 20일 전국 시·도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200여개 초등학교가 신입생을 받지 못했다. 섬마을이 많은 전남지역이 특히 심하다. 초·중·고교 학생수는 2009년 28만여명에서 2010년 27만 600여명, 2011년 26만 500여명 등으로 해마다 1만여명씩 줄고 있다. 고령화와 저출산, 이농에 따른 취학아동 감소 탓이다. 신입생이 아예 없는 학교도 여수 초도초교 등 47곳에 이른다. 지난해 10개교에 비하면 5배 가까이 늘어났다. 초등학교의 신입생 단절은 중학교로 이어진다. 2학년 3명, 3학년 1명에 불과한 여수화양중 낭도분교는 중학교로는 유일하게 올해 신입생이 끊겼다. 전국 농어촌의 사정도 비슷하다. 강원은 지난해보다 13개교가 늘어난 39개교가 신입생을 받지 못했으며, 경남과 전북도 분교를 포함해 각각 18개교와 8개교에서 신입생 없이 새 학기를 맞았다. 경북은 27개 학교에 신입생이 입학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은 지난해보다 1개교가 늘어난 6개 학교가 신입생을 채우지 못했고, 섬지역인 인천 옹진군은 2개 분교에서 새내기를 받지 못했다. 통폐합과 폐교도 속출하고 있다. 전남도교육청은 지난해 해남군 군곡초와 영광서초 등 본교 3곳과 분교 10곳을 통폐합했다. 경남도교육청은 올해 초·중·고교 986곳의 8.6%인 115곳의 소규모 공·사립학교 통폐합을 추진한다. 경북도교육청 역시 학생수 감소로 정상적인 교육과정 운영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132개교(초등학교 80·중학교 48·고등학교 4개)를 대상으로 통폐합을 추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도교육청 관계자는 “권역별 학교 재배치, 장학기금 확충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면서 “정주 여건을 개선해 젊은 층이 많이 거주하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 대안”이라고 지적했다. 전국종합·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日 네티즌 “한국인도 대마도로 본적지 옮겨라” 독도 설전

     일본 네티즌들이 “일본인 69명이 본적지를 독도로 옮겼다.”는 국내 언론보도와 관련, 찬반에 대해 설전 중이라고 스포츠서울이 보도했다. 22일은 일본 시네마현이 지정한 ‘다케시마의 날’이다.  지난 21일 국내 언론들은 “일본은 독도가 시마네현 오키섬에 속한다고 우기고 있으며, 69명의 일본인이 독도로 본적지를 옮긴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이는 2005년의 25명에 비해 배 이상 증가한 수치”라고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대부분의 일본 네티즌은 “일본인이 일본 영토로 본적을 옮겼을뿐 뭐가 문제야?” “타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 범죄자들에게 불법 점거되고 있을 뿐” “독도는 왜곡된 역사로 만들어낸 망상의 섬”이란 반응을 쏟아냈다. 또 “69명은 대단하군요. 입만 애국자라고 떠드는 사람은 본받아야 한다” “독도가 아니라 타케시마에 본적을 옮겼다고 써라.”란 표현을 써가며 ‘독도 본적지 변경’에 대한 주장을 내세웠다. 독도에는 주소가 없어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본적 등록 신청이 가능하다란 논리를 편다.  반면 “한국인도 본적을 대마도로 옮겨라.” “일본은 과거를 반성하고 독도영유권 주장도 그만둬야 합니다.” “독도 본적수가 일본인 69명, 한국인 1000명. 분명한 한국 영토다.”란 주장들도 만만찮게 올라와 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최윤덕 장상 생가 복원”

    일본 대마도를 정벌하고 무인으로는 유일하게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정렬공(貞烈公) 최윤덕(崔潤德) 장상(將相·장군+재상)의 생가가 복원된다. 경남 창원시는 7일 창원의 역사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 창원이 낳은 역사적 인물인 최 장상의 동상을 지난해 11월 건립한 데 이어 최 장상의 생가를 복원한다고 밝혔다. 시는 최 장상의 생가 터로 알려진 의창구 북면 내곡리 1096 등 3필지 2840㎡에 50억원을 들여 생가와 정승샘, 진입로와 주차장 등의 부대시설을 건립할 계획이다. 창원시가 복원을 추진하는 생가 터는 지방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돼 있다. 시는 오는 6월 최 장상의 생가복원을 위한 타당성 조사 및 기본계획수립 용역을 거쳐 내년에 부지를 매입한 뒤 2013년부터 생가 복원 공사를 할 방침이다. 앞서 시는 지난해 11월 시청 옆 창원광장 중앙로 입구에 길이 7.8m, 높이 6.5m, 무게 6t(청동) 규모로 최 장상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상을 건립했다. 최 장상은 1376년(고려 우왕 2년) 창원시 북면 내곡리에서 태어나 19세(태조 3년·1394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한 뒤 1419년(세종 원년) 삼군도절제사가 돼 출병 15일 만에 대마도를 정벌했다. 압록강유역 4군을 개척하는 등 우리나라 영토를 확장하는 데 앞장선 공을 인정받아 무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창원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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