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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카타콤베(아랍서 지중해까지:18)

    ◎기독교도 숨던 지하무덤… 미로수백㎞/「쿼바디스」의 아피아가도 주변에 산재… 땅굴 곳곳 교인들 수난 흔적 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가게를 구경하다 깜박 카메라를 놓고 나왔는데 두어 블록이나 걷고 있을때 『시뇨레! 시뇨레!』하면서 주인이 쫓아왔다.베네치아에서 만들어와 판다는 세라믹 액세서리들의 그 담백한 아름다움에 잠깐 정신을 놓았었던 것 같다.자리까지 비운 채 여기까지 유실물을 갖다주러 오다니 싶어 얼굴이 붉어진 것은 비단 그 가게주인이 예쁜 아가씨였던 때문만은 아니다.잊은 물건 으레 찾으러 들이닥치겠지 싶어 필자 같았으면 오불관언 그냥 버티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아무 것도 아닌 이런 사소한 일이 실은 한 나라의 민도랄까 문화적 수준을 제풀에 측정케 만들고 절감케 한다.이탈리아 사람들은 너무 친절해서 모르는 것도 아는 척 곧잘 나서기 때문에 골탕을 먹는 수가 있다고도 하지만(하긴 필자도 그 때문에 엉뚱한 길을 헤맨 적이 한번 있기는 하다),이 아가씨의 친절은 여태까지도 쉬이 잊혀지지가 않는다.남의 얼굴에다 제 얼굴 디미는 간판들이나 판을 치는 대도시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미덕이요 소양이다.피곤한 신경으로 거리를 걷다보면 간판들의 그런 번잡스러움 같은 것까지가 그 나라의 수준을 금세 헤아리게 만든다. ○친절한 시민 인상적 소위 앞서간다는 나라들의 그것은 대체로 그저 눈에 뛸 정도의 글씨로 숨듯이 얌전한 반면 후진 나랄수록 그 요란함과 새치기는 극성스럽다.TV나 신문·잡지의 광고 역시 예외일 리가 없다.잠자리에 들기전 하다못해 잠깐이라도 TV를 켜는 새버릇이 이번 여행중에 붙은 것도 순전히 그 탓이었을 것이다.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책광고·상품광고 같은 것이 우리처럼 허풍스럽고 요란한 나라가 또 있을 것 같지 않아 겸연쩍고 창피했다.2등은 쓰레기처럼 잊혀지는 존재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1이어야 한다느니,「정복할 것이냐 당할 것이냐」하는 따위 히틀러의 발악이 무색할 지경의 광고까지 태연히 횡행하는 사회이니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로마 국립공원 뜰은 장식삼아 여기저기 놓인 세계 유명인사들의 대리석 흉상들로도유명한데 관광온 이쪽의 원로 하나가 이승만 대통령의 흉상도 있을지 모른다는 농담을 듣고 열심히 그것을 찾아다녔다는 얘기가 있다.결국 찾지 못하자 귀국해서는 그 얘기를 글로까지 썼다는 것이다.이런 얘기의 우스꽝스러움은 「유명인사」라는 그 개념상의 차질에 있다.독재를 했건 뭘 했건 유명하기만 하면 「문화적 인물」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이 원로는 착각을 한 것이다.인도의 간디수상도 신청을 했다가 거절을 당했는데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일까보냐는 개탄이 나올 법도 하다.이 얘기를 해준 것은 60년대에 이주해서 30여년째 로마에서 살고있는 H씨이다.문청(문청)시절 어울려 다니던 친구로 이번에는 10여년 만의 해후인데 불혹의 연치가 완연한데도 그 유머러스하고 직재적인 사고방식은 여일했다.그 무렵의 친구들이 모르는 새 모두 소원해졌는데도 이 H씨만은 예 그대로 와락 반가운 느낌부터 앞선 것도 그 탓이었을 것이다.끝내 로마에다 뼈를 묻을 작정이냐는 농담에,집과 차와 가재도구를 다 정리해 귀국해봤자 강남에서 몇달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되레 역습이다.자녀들이 장성하자 사위만은 모국청년으로 골라야겠다 싶어 몇 차례나 기회를 만들었으나 돈 타령,땅타령,줄리어드다 하버드다 하고 외국유학 얘기만 나오다 대화가 끊겨 끝내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사돈될 사람들 간에도,당사자들 새에서도 대화가 그 모양으로 단절돼 내심으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데이트 몇번하면 으레 제 소유물로 알고 자질이야 있건 없건 유학물 먹은 일이나 자랑삼으면서 연애 따로,결혼 따로를 당연한 듯이 생각하는 이쪽 젊은이들의 그런 사고방식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근교의 아파트단지 식당에서 제대로 된 한국음식을 모처럼 배불리 먹여주고 그녀가 차로 데겨간 곳은 카타콤베 앞이었다.로마에 와서 뭘 봤느냐는 물음에 실은 아무 것도 보고싶지 않았다는 필자의 동문서답이 마음에 걸려서 였을까.카타콤베는 옛 로마 서민들의 지하무덤이다.왜 아무 것도 보고싶지 않았느냐고 이번에는 그녀도 묻지 않았다.숙소에서 확인한 TV채널만도 20여개가 넘고 인근 지방의 유선방송까지 합하면 천여 채널이 넘는다는 각종 정보홍수에 에워싸여 살다보면 문명이니 문화적인 혜택이니 하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온갖 빤히 눈에 보이는 세계가 되레 지겨워질 나이에 그녀 역시 이르른 것같다.정부 각 기관과 문화관과 대기업의 본사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 로마의 신시가지 에우르 구역을 도중에 거치면서 필자는 과천을 제풀에 연상하고 있었는데,카타콤베들은 그 너머 구아피아가도 인근에 흩어져 있었다. ○10만명 매장된 곳도 로마제국 때 닦여진 길이다.붉은 언덕과 짙은 색깔의 나무들이 갑자기 사방을 에워싸면서 차량마저 끊기다시피해 한적한 시골을 연상시키는 이 가도는 아닌게 아니라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속담을 역으로 연상시켰다.지금은 관광자원이 돼버린 옛 제국의 영화가 하층민들의 무덤까지도 그냥 버려두고 있지 않는 것이다.물론 이 무덤들이 특별히 유명해진 것은 박해를 받던 그 무렵 기독교도들의 지하 은신처요 포교활동의 근거지였다는 까닭이 더 크다.도망을 치던 베드로가 예수의 환영을 만나 저 유명한 대사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읊조리던 데가 아피아가도였고 그때 남은 예수의 발자국모형이 보존된 도미네 쿼 바디스교회가 이 인근에 있다.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쿼 바디스」나 「성의」 같은 것에도 물론 카타콤베가 나온다.지하 2·3층,어떤 것은 5층까지 파내려간 이 부근의 수십기 카타콤베들은 복잡한 미로와도 같아서 혼자서는 들어갈 수가 없고,10만여명이나 매장된 곳도 있으며,그 길이를 합하면 수백㎞에 이른다고 한다. 입구에서는 각국 언어별의 가이드들이 여남은명씩 되는 관광객들의 조를 짜고 있었다.어쩌다 네덜란드어 가이드를 무심코 따라들어가 설명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구태여 그런 것이 필요한 것같지도 않았다.사람 하나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만한 흙벽의 좁다란 통로와 역시 흙으로 된 계단을 몇번이나 꼬부라지며 내려갔는지 알 수가 없다.가이드의 랜턴불빛에 기괴하고 참담한 낙서와 그림들이 홀연히 벽에서 나타나는가 하자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를 샛길들이 곁으로 불쑥불쑥 들이닥치곤 했다. 이런지하에서 길을 잃고 미아가 돼버린다는 제풀의 상상은 기묘한 것이었다.나는 왜 여기 있는가,이번 여행은 뭐땜에 떠나왔는가 하는 따위 상투적인 의문들이 그제야 근거를 찾고 입지를 얻은 듯한 느낌이랄까,갑자기 천지가 막막했다.초기 기독교도들의 그것뿐 아니라 중세의 여러 종교적인 박해에도 이곳은 피난처가 됐던 모양으로 지상으로 올라오는 중간중간의 작은 방들에는 그 수난의 표상들과 기념물들이 흔적이나 조각들로 새겨지거나 놓여 있거나 했다.화살에 목이 꿰인 성 아무개,칼로 순교당한 누구 하는 식의 그런 전시물들 역시 숭엄한 분위기이기는 해도 청량한 느낌은 아니다.로마시내에는 4천여 승려들의 해골을 수백년에 걸쳐 모아놓은 해골사원이라는 으스스한 곳도 있지만,이런데를 특별히 찾는 사람들 역시 일반적인 심성의 그런 관광객들은 아닐 것도 같다. ○중세에도 피난처로 겨우 한시간 남짓이나 머물다 나온 지하에서 로마라는 한 도시의 허상을 통째로 별견한 듯한 느낌이었다고 하면 아마 과장일 것이다.사람사는 세상에는 으레 있게 마련인 그 말할 수 없이 구질구질한 거래와 아귀다툼들이 이를테면 로마라 해서 어떻게 이런 지하세계 같은데로 깨끗이 모두 매몰될 수가 있겠는가.필자가 카타콤베 속에서 저절로 떠올린 로마의 그 허상이란 것도 실은 숙소근처의 가게에서 사흘째 눈독을 들이고 있던 싸구려 골동품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우리 돈으로 2만여원쯤 되는 그 놋쇠물병은 연륜이랄 것도 쓸모도 별로 없어 보이는 얄팍한 물건 같았으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떤 곡선형태라는 그 한가지 점만으로도 어딘가 정답고 신선하게 느껴져 값을 깎자느니 안된다느니 하고 며칠째 줄다리기를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도무지 무뚝뚝해 보이기만 하는 가게의 뚱보주인은 필자가 들를 때마다 『적당하고 좋은 값』이라면서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이쪽 역시 기어이 에누리를 해서 그것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집념에 들떠 있었다는 것도 아니다.구태여 따지기라도 한다면 한계가 빤한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눈곱 정도로나 허용된 소위 그 「자유」라는 명제나 「자유스럽고 싶다」는 감정을 두고 필자도,그도 사실은 줄다리기흉내를 즐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콜로세움(세계의 명소 걸작 건축감상:2)

    ◎고대로마 검투장… 1900년간 “우뚝”/역동성 넘치는 둘레 6백m 원형의 4층/각층마다 80개의 아케이드 구조물 방사상 배열… 아이디어 돋보여 고대 로마제국(BC 8세기∼AD 9세기)의 유적에서 느끼는 간격은 2천여년에 가까운 시간만이 아니다. 본래의 모습에 흠이 가고 용도도 바뀌고,어떤 곳은 폐허로 변해 옛모습을 되살리기 어렵고 당시의 사회상도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다만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통해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커크 더글러스역)와 바라바의 검투 장면은 그 처절함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훈련소를 방문한 로마장군 부부 앞에서 오락대상으로 펼쳐지는 검투장면,검투사의 분노·저항·죽음 등을 통해 검투를 주목적으로 건설된 콜로세움의 기능을 엿볼 수 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는 서기 64년 폭군 네로황제에 의해 로마 대화재의 방화범으로 몰린 기독교도들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는 참혹한 장면을 볼수 있다. 로마제국은 대중오락을 국가가 제공했다.시민들은 잔인하고피투성이가 되는 경기의 관람을 좋아했으며 수천명이 운집한 원형투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검투사 경기는 가장 인기를 끌었다.검투사들은 관중들의 함성속에 생사를 건 경기를 했다.한 검투사가 쓰러지면 그를 살리느냐 또는 심장을 찌르도록 하느냐는 관중들의 특권이었다.투기마당의 모랫바닥이 피로 범벅되어 질척거리면 새로운 모래로 덮고 경기를 계속했다. 콜로세움은 건축가 라비리우스의 설계로 72년 착공,82년 완성됐으며 공사에는 유대인 포로들이 동원되었다.부지는 네로황제의 황금별궁안 연못터로서 폭군의 불타버린 저택지에 시민오락시설을 건설한 극히 정치적 상징을 띤 곳이었다.콜로세움의 북서방향은 포름로마눔(핵심적 정치·기념건물군과 광장)에 연계되어 캐피톨언덕의 로마의 수호신 「주피터 신전」과 공화정의 상징인 「원로원」과 직선축을 이루고 있다. ○라비리우스 설계 콜로세움은 투기마당(84×52m 타원형)을 4개층에 걸친 경사관람석이 타원형으로 둘러싼 구조물(둘레 6백m 높이 48m)이며 관람석 아래층은 통로공간으로 여러원형투기장에서의 경험을 살려 지어졌다. 구조체는 아치와 볼트로 되어 있는데 양외면에 벽돌을 쌓고 속은 로마식 콘크리트(화산재 콘크리트)로 채움으로써 매우 강하고, 겉에는 대리석으로 장식 효과를 살렸다. 콜로세움의 건축적 의의를 보자면 일단 구조적 안전성에 있다.현대와 같은 철근 콘크리트도 없던 당시 7층 높이로 지어 2천년 가까이를 버틸수 있게 한 기술이 놀랍고 건물 또한 아름답다.건물 외벽의 아치는 진·선·미에 해당하는 도리스식(1층),이오니아식(2층),코린트식(3층) 기둥양식을 적용하고 3세기에는 코린트식 장식벽을 4층에 증축함으로써 수평과 수직의 위계이다.또한 타월형평면으로 이룬 공간의 역동성과 축,명확한 통로공간이 특징이다. 외벽의 아치중 2,3층에는 석조인물상이 배치되고,1층은 독립된 출입구 구실을 하도록 했다.북동(장축) 중앙에 황제의 출입문이 있으며 로열박스는 2층에 남서향으로 배치되었다.4층 외벽면 상단에는 목제 마스트를 꽂아 깃발을 달고 차양을 쳐 한껏 축제기분을 내며 뜨거운 태양을 가리도록 한 것이다. 건물중앙의 투기마당은 4.5m의 담장을 둘러쳐 구경에 열중해 흥분하는 관람자들의 안전을 기했다.마당밑의 지하에는 검투사 대기실·맹수우리·무기고·경비대숙소·공연보조물 운반기계창고·지하도로 등이 있었다. ○관람객 안전 고려 콜로세움 완공후 1백일간의 준공축제 동안에만도 많은 검투사와 5천여마리의 맹수가 살육되었다고 한다.또한 한때는 초기 기독교도들의 처형장소로도 활용되었다. 검투경기는 407년에 금지되고 맹수와의 싸움도 523년에 금지됨으로써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서로마제국이 게르만민족에게 망하고(476년)로마가 교황국가에 편입된 이후 1천년동안 이 건물은 방치되었다가 15세기부터 3백년간은 건축 석재 채취에 쓰이는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르네상스 시기 로마에 건설된 유수한 건축물인 베네치아궁을 포함한 3개 궁전,성베드로 대성당 신축 등에 쓰인 석재들이 이곳에서 캐내어진 것이다. 그러나 1749년 교황 베네딕트 14세가 콜로세움을 순교자의 피로 성화된 곳으로 선포함으로써 석재 공급 역할은 끝났으며 1800년부터 부분적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콜로세움 주변의 정리는 1933년 파시스트정부가 행한 유명한 로마도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주변의 고적군을 밀어내고 광장과 도로를 넓힘으로써 오늘의 경관을 확보했다. ○현대에도 모델로 현재 건물의 북동벽면은 온전한 상태이나 나머지 벽면은 멸실되고 2개층만 남아있는 곳도 있다.관람석과 투기마당의 바닥슬라브도 벗겨져서 내부의 아치·볼트가 앙상하게 드러난 채로 있다.1973년 이후 부분적인 복원·수리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콜로세움은 경기와 관람을 위한 건물의 한 전형이 되고 있다. 근대 올림픽 시작 이후 세계적으로 번진 스포츠 스타디움의 건설및 대중문화의 상징으로서의 엘리트스포츠와 이의 기업화에 따라 자재와 기술은 새로워져도 건축 원리는 타원형 콜로세움을 되풀이하고 있다. 콜로세움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건축의 사회적 기능을 보여준다. 제1기 로마제국(4세기까지)에서는 검투사 또는 동물 투기장,제2기 중세(4∼14세기) 혼란기에는 지진피해,방치,또는 요새,제3기 르네상스기(15∼17세기)에는 약탈수난,제4기 근대계몽기(19세기)에는 순교지 지정,제5기 단일세계권(20세기후반 이후)에서는 세계적 역사관광 순례지로서 기능이 바뀌어 가고 있다. 1천여년의 망각과 3백여년의 약탈 수난과 도괴의 위기를 거쳐 근세에 들어와서 그 가치가 다시 부활하고 있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철거 운명에 놓인 우리의 조선총독부 청사(현 중앙박물관)에서 상기하는 아픔은 크다.식민 통치의 부끄러운 역사의 잔재라하여 허물어져야 한다면 남아있는 건축이나 역사 유산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콜로세움은 변덕스레 바뀌는 이념과 가치관 때문에 과거의 건축 유산을 부수고 새로 짓기를 반복하는 낭비와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함을 일깨워준다.
  • 가을의 문턱 실내 꾸미기/값싼 예술용품으로 새 분위기를

    ◎명화 액자·청동조각 등 소품 인기/4만∼5만원으로 고급스런 공간 연출 가을로 접어들며 집안 분위기를 새롭게 꾸며보려는 주부들에게 명화액자와 청동조각품 및 각종 장식소품등 아트용품들이 사랑받고 있다.백화점의 갤러리와 지하상가의 미술코너 등에서 주로 취급하는 아트용품들은 커튼이나 침대시트를 바꾸는 정도의 단순한 변화보다는 나름대로 예술감각을 연출,실내 분위기를 개성 있게 꾸며보고 싶어하는 신세대 주부들과 20대 직장여성들이 주고객. 명화 액자의 경우 유명 외국작가들의 복제품이고 청동조각도 복수 제작된 터라 적은 비용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반응이 아주 좋다. 아트용품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는 품목은 명화 액자.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외 유명화가들의 작품을 복사해 액자화한 명화액자는 그림의 대부분이 미국 등지에서 들여온 수입품이다. 명화 액자중 제일 인기가 있는 작품은 모네의 「해바라기」와 르누아르의 「세여인」처럼 비교적 국내에서 잘 알려진 화가들,즉 고갱 모네 세잔 마티스 피카소 르누아르 등의 그림이며 작품의 크기는 엽서크기의 아주 작은 1호에서 10호 이상까지 다양하다. 가격도 크기에 따라 1만원에서 10여만원까지 다양한데 중간 크기인 4만∼5만원대 작품이 가장 많이 팔린다.명화액자는 액자가 있는 경우 그림만 구입 할 수도 있어 집에 빈 액자가 있는 경우 활용이 가능하다. 한편 청동조각 및 장식소품은 인조대리석이라 불리는 마블소재의 조각품과 브론즈·주석 및 금속공예 작품들이 주종.집안 어느 공간에나 장식해두면 잘 어울리면서 격조를 높여준다. 조각 작품의 경우는 작가가 작품수를 제한하고 고유번호표를 부착,자신의 작품을 무단복제품으로부터 보호한다.따라서 조각작품을 구입할땐 구입전 반드시 고유번호표 부착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한편 조각의 가격은 작품의 숫자를 20∼30개로 제한 생산 할때는 10만∼30만원 선으로 다소 고가이나 대개는 작품의 대중화 차원에서 1백∼2백점 이상씩 생산,3만∼5만원선이다.
  • 진귀한 그림·조각으로 장식/「예술 호텔」 미서 인기

    ◎「리츠칼턴」·「브렉커즈」 등 “만원사례”/“숙소에서 문화공간으로” 인식 대전환/일부업체선 소장 예술품 선전 열올려 호텔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여행지의 최종안식처」가 종래의 호텔개념이라면 이제는 호텔이 「예술품의 소장장소」 또는 하나의 버젓한 「문화예술공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호텔주들은 지금까지 손님들에 대한 종업원의 태도,편안한 침대,호텔이 위치한 자연경관 등을 중요시 여기며 이에 대한 투자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호텔을 중심으로 한 일부 호텔주들은 호텔자체를 예술공간으로 인식하거나 그렇게 꾸미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예술품 전시공간을 늘리는데 열을 올리거나 단순히 「자는 장소」에서 호텔자체를 보여주며 인상을 심어주는 공간으로 가꾸려는 것이다. 일부 호텔에서는 새삼스레 자신들의 호텔이 옛 진귀한 미술품이나 조각품으로 가득차 있다는 광고를 내는 경우도 있다.또 관광객들도 이같은 인식위에 보다 색다는 호텔을 찾아나서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 호텔자체가 예술품이거나 예술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일부 호텔은 예약조차 하기 힘든 실정이다.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대표적인 미국의 호텔은 4곳. 샌프란시스코의 리츠 칼턴호텔은 소장예술품이 많아 어느 것이 가장 인상적인 예술품인지 대답하지 못할 정도다.호텔의 벽마다 18∼19세기 유명화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주로 꽃과 풍경을 주제로한 유화들이다.프랑스 루이 16세때의 청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금박도자기도 소장하고 있고 19세기 초기의 수정촛대가 입구에서부터 눈길을 끈다.손님들은 이같은 진귀한 예술품들을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1909년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3년뒤에 세워진 이 호텔은 그동안 메트로폴리탄보험회사의 본사건물,대학건물로 사용되다 지난 89년 리츠 칼턴사가 인수한 이후「예술호텔」로 각광을 받고 있다. 플로리다주의 팜비치에 있는 브렉커즈호텔도 손꼽히는 「예술호텔」이다.철도왕 헨리 모리슨 플라글러가 처음 지은 호텔로 불에 탄뒤 1925년 재건축되었다.발도프­아스토리아양식으로 유명한 건축가 레오나르도 슐츠가 재건축에 참여했다.입구에서 보면 이탈리아 중세 메디치가의 궁전을 연상케하는 쌍둥이 탑과 우아한 아치양식이 눈길을 끌고 있다.분수도 이탈리아 보볼디정원 것을 그대로 따왔다.실내장식은 고대 로마시대의 귀족생활 것을 본떴고 15세기 플랑드르양식으로 된 태피스트리(실로 수놓은 벽걸이)는 이 호텔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금박 잎사귀로 장식된 천장,곳곳의 프레스코 등 어느것 하나 옛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미국인들은 이 호텔이 옛 것과 현대조형물을 조화시킨 하나의 예술품으로 여기고 있다. 브렉커즈호텔이 이탈리아식이라면 뉴올리언스의 윈저 코트호텔은 영국식의 「예술호텔」이다.호텔입구에 들어서면 현대 최고의 조각가 존 밀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영국의 전설적인 조지왕이 용을 물리치고 있는 작품이다. 호텔안에는 영국의 왕족이 좋아하는 화가 게인즈보로,레이놀즈,카날레토의 작품들로 가득차 있다.다색석판법을 즐긴 빅토리아왕 작품도 있다.윈저성안에서나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버몬트주에 있는 트윈 팜즈는 방이 9개밖에 되지않는 「여인숙」이다.소설가 싱클레어 루이스가 한때 살았던 방에는 전소유주들의 귀한 소장품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데 특히 현대화가 에드 루스차,윌리엄 베그먼,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의 그림들이 손님들을 사로잡는다.이곳 예술품의 대부분은 미국 1백대 고미술소장가중의 한 사람인 서스톤 트윅스미스씨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예술여인숙」 아이디어도 그가 낸 것이다.가정집 같고 프론트데스크도 없다. 조지아주의 콜로웨이 가든,델라웨어주의 호텔 듀폰,뉴욕주의 세인트 레기스호텔 등도 이같은 「예술호텔」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 아테네/파르테논 신전(아랍서 지중해까지:14)

    ◎아크로폴리스의 가장 웅장한 유적/기원전 5세기 대페르시아 전승기념으로 수호신 아테나 위해 건립 아테네까지 와서 이것마저 보지않고 간다면 말도 안된다는 고정관념 때문일까?그 재미없는 유적탐방으로 결국 하루를 보내고 말았지만,그런 상투적인 강박관념은 그리스로 넘어오기 전부터 염두에 늘어붙어 따라왔던 것이어서 시간을 허비했다는 느낌까지는 차마 들지 않았다.아크로폴리스나 그 신전들은 그만큼 아테네 어디서나 노상 눈에 띄었다.시내 복판에 언덕이 있어서도 그랬지만 어쩌다 현대식 건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을때는 예의 민주주의니 헬레니즘이니 하는 텅빈 관념들이 잊을세라 곧잘 뇌리로 스며들면서 자리를 메우려 한 때문이었을 것이다.그런 관념을 불신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져서 감촉된 것까지도 믿지 못하는 기묘한 버릇이 필자에게는 있다.눈앞에 보이는 그 어떤 세계도 피가 통하지 않으면 결국은 헛것에 불과하다는 소린데,고질인 신경통의 오랜 경험 탓일지도 모른다.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헬레니즘 명성뿐 아크로폴리스의 유적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도리스 양식의 신전.건물둘레 1백60m,46개의 가공대리석 원주,기둥높이 10m,기단은 가로 31m,세로 70m.페르시아 전승기념으로 기원전 447∼432년에 걸쳐 집권자 페리클레스에 의해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지휘로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를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그리스인의 건출술이 어떻고 부조가 어떻고 하면서 그런 상식적인 해설을 늘어놓은 책자와 그 확인만으로는 더구나 아무것도 알수 없다.필자는 급기야 숙소인 카라벨호텔 객실에 딸려있던 터무니없이 넓은 거실까지도 거기 연관을 시켜보았다.아마 가족용이거나 상용회의실 삼아 그런 공간이 덤으로 필요했던 것인지 덕택에 막혔던 숨도 몰아쉬고 거기서 편지도 쓰고 했지만,폴리스라 불리던 고대 도시국가의 소위 그 민주적인 이념이나 제도란 것이 이런 구닥다리 호텔의 공간배정 같은 것과도 무슨 연루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정책이후 발진해서 근대 서구문명의 2대 근간정신이 되었던 헬레니즘이란 것은 또 어떤가.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받고 불교가 발상지인 인도에서 떠나버렸듯이,아테네의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지 않은가.있는 것은 잔해와 상품화한 그 명성뿐,말이 통하지 않는 시민들은 입을 다물고 일행들은 가게만 기웃거리고 있다.결국 전 기항지인 이스탄불에서 겪은 작은 에피소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야 생각의 가닥이 잡혔다. ○조각상과 거리 멀어 그 이전의 로마시대는 제쳐놓고라도 그리스는 15세기부터 19세기 중엽을 넘어설 무렵까지 무려 4백여년 간이나 터기의 식민지였다.우리와 일본의 그것은 약과라고 할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지배과정에서 일어났던 온갖 만행,학살사건의 원한으로만 따진다면 그런 철천지 원수지간이 또 있을 것같지 않아 최근까지 설왕설래하던 영토분쟁까지 떠올리면서 주의를 기울였으나,항로에는 아무 이상의 기미가 없었다.하다못해 그리스인과 터키인이 서로 인상쓰는 모습이라도 보았으면 했던 것은 아니다.그 이스탄불의 중앙통에서 구두를 닦다 바가지를 쓸 뻔했던 일이 엉뚱하게도 아크로폴리스가 발현하고 있는 그런 그리스 정신이란 것과도 연관이 될듯하면서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그 에피소드란 것도 실은 하잘 것 없는 공중도덕에 지나지 않는다. 어리숙해 보였던지 구두를 마무리한 소년은 처음 말했던 요금의 세배쯤을 더 내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그냥 달라고 했으면 동정심이라도 일어났을 것을 『돌라(딸라)!돌라!』하면서 하도 영악스럽게 굴어 이쪽에서도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행인들이 한 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저마다 한마디씩 엄한 어조로 소년을 꾸짖었다.아이는 얼굴을 붉히고 계면쩍어 하면서 비실비실 모습을 감췄다.명동이나 종로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하는 연상이 그제야 필자의 얼굴마저 화끈거리게 했다.이방인 하나가 가령 그런데서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찐드기를 당하고 있는 꼴을 보았다면 급하게 딴데로 눈을 돌려버리고 나는 모른척 그냥 지나쳐가고 말지 않았을까.이 경우 떼를 쓰는 아이는 각박한 현실이고,그것을 꾸짖는 어른은 전통이든가 소양에 등을 대고 있었을 것이다. 동서문화의 요충지라고는 해도 이스탄불의 그 터키행인들이 설마 공자한테서 그런 도덕심을 배운 것같지는 않았다.그들은 4백년 동안이나 지배를 하느라고 하면서도 모르는 새 그리스 전래의 그 시민정신이란 것을 제것으로 삼켜버렸던 게 아니었던가.이 사소한 사건에서 필자가 느낀 감상이나 거기서 끌어낼 수밖에 없었던 교훈의 요지는 그것이었다.물론 자국이나 다른 전통감각 내지 소양같은 것도 그 터키인들은 다분히 혼용해서 함께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옛 조각에서 흔히 보는 그런 균형잡힌 생김새가 아니었다.이마와 미간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코는 대체로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그밖에는 얼굴도 울퉁불퉁 제멋대로이고,더구나 여인들의 표정이나 몸매는 팔등신의 그것과도 거리가 멀었다.그녀들이 보다 이지적이고 강해보이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면 차라리 그런 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인들의 이념과 현실의 차이를 이런데서까지 추출할 생각이 필자에게는 없다.쇳된 기타소리 비슷한 음색을 내고 만돌린을 닮은 전통악기 부주키를구경하려고 파네스피스티미우 대학가를 헤매면서 맞닥뜨린 그곳 젊은이들도 그런 인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유행가나 팝송을 흥얼대며 왁짜하게 거리를 메우면서도 어딘지 근엄하달까 절대로 자신을 방기해버리지는 않는 묘한 구석이나 기색이 학생들의 표정에는 역력했고,대중문학작품들 조차 고풍스런 표지디자인을 한채 일사불란하게 진열된 서점가 풍경 같은 것은 더구나 말할 것도 없다.악기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요르단에서부터 터기·이탈리아·스페인·파리에서까지 한번씩은 기웃거린 그런 가게에서 질좋은 물건이라며 내놓는 기타가 우리 제품이어서 어안이 좀 벙벙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쪽을 중국이나 일본인으로 착각했던 모양으로 코리안이라고 하자 그들은 실소했다.피아노 제작기술이 서방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비교적 싼 것에서부터 몹시 비싼 기타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메이드 인 코리아 사태를 당하자 미상불 우쭐한 기분이 되지말란 법도 없었다.의식을 하고 있는지 무심한지는 몰라도,아테네 사람들이 가령 자국이나 외지에서 그들의 시민정신이라든가 거창하게도 예의 헬레니즘 운운하는 이념이나 그 편린이라도 깨닫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면 아마 이 비슷한 우쭐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도시국가의 몰락이후 헬레니즘은 불가피하게 내셔널리즘 혹은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소극적인 철학으로 삼고 범세계,전인류라는 생각을 적극적인 이상으로 밀어올리면서 동방과 유럽전역으로 퍼져갔다. ○근엄함 잃지 않아 서로 상충하는 이 두 논리의 거듭한 격돌,변천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치는 서구문명의 그 중심적인 양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시내로 들어오는 거리 곳곳에서 보게되는 대형간판의 아름다우나 그로테스크한 그 온갖 상품광고들 역시 터전밖에서 번창했다가 지금은 몰락으로 접어들고 있음이 틀림없는 그런 문명의 잔해거나 그 상징으로 보였다고 하면 좀 과장일까. 밤이 깊자 이 지혜롭고 강인했던 유적도시도 어둠에 잠겼다.어느 옛거리에서 였던가 올리븐지 느티나문지 거창하게 얽힌 가지 한복판에 웅크린 커다란 들고양이 한마리가시야에 들어왔다.동물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눈길을 옮겨가노라니 무성한 잎사귀들 너머,황토빛 야간조명을 받은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이 얼핏 또 보였다. 어딘가 피가 통하는 듯하면서 신전의 윤곽이 비로소 분명해지는 듯한 느낌을 필자가 받은 것도 그때다.
  • 전화기 발달 1백년사 한눈에/한국통신,내일부터 용산전화국서 전시회

    ◎세계 첫 전화기 등 155종 선보여/자석·공전·자동식 사진·실물 전시 19세기 후반 전화기가 처음 발명된 이후 지난 1세기동안 제작된 세계의 전화기 1백55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한국통신은 서울 용산전화국에 마련된 사료전시관에서 20일부터 9월30일까지 「세계 전화기 1백년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전시회에는 1876년 벨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전화기를 비롯,1976년 미국이 전화발명 1백주년을 기념해 만든 전화기 등 11개국의 각종 전화기들이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장은 특별전시실과 제2전시실로 구분,특별전시실에서는 187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전화기 1백년사를 연도별 사진으로 소개하고 자석식·공전식·자동식·공중전화기 코너를 각각 마련해 실물도 함께 전시한다. 자석발전기의 전원을 발생시켜 전화를 거는 자석식전화기 코너에는 벨전화기와 1878년 미국서 처음 실용화된 전화기,대형 벽괘형전화기,에펠탑형전화기 등 34점이 전시된다.또 송수화기를 들면 바로 교환원이 연결되는 공전식전화기는 가위형·촛대형·기름통형 전화기와 지난 62년 국내에서 처음 개발된 체신1호 전화기 등 67점이 전시되고,직접 다이얼을 돌려 통화하는 자동식 전화기는 이탈리아 대리석전화기 등 46점이 선 보인다. 제2전시실에는 전기통신 이전의 통신수단인 마패와 봉화군 징발에 관한 문건,1900년대 초기의 통신지도류 및 전보식지,1930년대 전화번호부 등 최근 새로 발굴된 개인소장 통신사료들이 전시된다.
  • 그라나다/알함브라 궁전(아랍서 지중해까지:11)

    ◎스페인 최후의 이슬람궁… 신비 가득/나자리왕조가 13∼14세기 건설… 빼어난 건축술­정교한 세공에 숨막혀 그라나다의 구시가 산타 안나 교회앞에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알함브라?』 그러자 수염이 텁수룩한 신부님이 긴 소매 속에서 나온 창백한 손으로 언덕길을 가리켰다.세월과 사람들의 발걸음에 닦이어 빤질빤질 윤이 나는 언덕길에서 흘러내리는 빛의 물살이 다리를 휘청거리게 했다.어디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알함브라의 신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옛날 집들은 지난날의 비밀을 삼킨 채 그 작은 창문들을 조가비처럼 닫고 있었다.오!벽이 익혀온 시간의 열매들이여. 1층의 연쇄상점들 앞을 지나노라니 캐스터네츠소리가 따다따다 귀를 즐겁게 했고,어둠침침한 어느 상점 안에서는 집시풍의 옷을 입은 여인이 부채로 일으킨 바람을 깊숙이 팬 앞가슴 사이로 밀어넣고 있었다. 휘어진 언덕길 끝에 울창한 삼나무숲 사이로 뚫린 또다른 길이 포개질 듯 기다리고 있었다.서늘한 바람이 계곡속에 숨어 있는 여울물소리를 실어왔다.그 소리가 구르는 듯한 기타 선율로 바뀌면서 알함브라의 슬픈 역사에 젖어들게 했다. ○이사벨여왕에 패퇴 알함브라는 「붉다」는 뜻으로 그라나다 동쪽 언덕에 위치한 무어족의 귀족행정도시의 이름이었다고 한다.13세기에 나자리왕조의 시조인 알 아마르가 자신의 왕궁을 그곳에 지음으로써 그것이 찬란한 알함브라역사의 시초가 되었다.주건물의 대부분은 요세프1세(1353∼1391년)와 그의 아들 모하메드 5세시대에 지어졌고,부분장식들은 레콩키스타(7세기부터 이베리아반도에 유입해온 회교도들이 점거하고 있던 국토를 기독교도들이 되찾기 시작한 운동)의 폭풍에 휘말리면서도 계속되었다.미구에 떠나야 할 것을 예감했기에 왕들은 자신들의 자취로서 아름다움을 그 땅에 영원히 심으려 했다. 이사벨여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최후의 왕 보아부달은 왕궁을 떠나 시에라네바다의 험준한 고갯길에서 궁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편 이 왕궁을 접수한 기독교도들은 그곳을 예배당으로 활용하는 한편 이사벨여왕의 손자인 카를로스5세는 궁전안에 르네상스양식의 또다른 궁전을 건축했다.이를 두고 그라나다 출신의 명상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알함브라궁전은 자신의 내부에 카를로스5세가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경사가 가파라질수록 길은 삼나무숲 깊숙이 파고드는 듯 하더니 갑자기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 곳에 붉은 성벽과 「심판의 문」이 우뚝 솟아 있었다.말발굽모양의 아치에는 코란 5계명을 나타내는 손가락이 조각되어 있었다. 알히베스광장에 쏟아져내리는 햇빛은 눈부시다 못해 얼어붙는 듯 소름이 끼쳤다.짙은 나무그림자에 돌바닥이 검게 패어 있었다.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제 몸보다 더 검은 그림자를 끌고 카를로스5세 궁전 담밑을 따라 모퉁이로 사라졌다. 성채·왕궁·정원·여름별장으로 분리해서 파는 입장권 4장을 샀다.그리고 먼저 궁전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첫관문인 메사르홀로 들어섰다.이곳은 기독교도들이 접수한 뒤 예배당으로 활용되면서 기독교식 건축물로 개조되어 본래의 모습이 많이 파괴되었으나 아랍식 문양이 정교하게 세공된 대들보만으로도 그 빼어난 솜씨에 도취되기에 충분했다. 왼쪽의 아치문을 지나 아리야네스(천인화)중정으로 들어갔다.장방형의 긴 못이 중앙에 있는 안달루시안 아랍식 안뜰.속세와 차단된 묵중하고도 투명한 정적이 감돈다.하늘·도금양나무·뜰을 둘러싼 건물의 아치문과 기둥들이 수조의 조용한 물속에 잠겨 행복하고도 덧없는 꿈에 취해 있다.빛과 그늘까지도 그 행복한 꿈에 녹아들어 있다.무엇이 이 꿈꾸는 물의 성채를 침범할 수 있을까.문은 모두 열려 있으나 들어갈 방법을 알지 못하는 세계. ○중앙엔 사자상 분수 왕의 접견실인 대사의 방과 코마레스탑에서 라이온궁전으로 발길을 옮기노라니 등뒤에서 어떤 문이 닫히는 느낌이었다.마치 누군가 되돌아갈 길을 막아버리는 것 같았다. 촛대처럼 가느다란 1백24개의 대리석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장방형 회랑으로 들어섰다.햇빛이 눈을 시리게 하는 뜰의 중앙에 열두마리의 사자에게 둘러싸인 하얀 대리석 분수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이곳은 오직 왕 한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하렘이었다.건물 2층에는왕의 후궁들이 거처했다. 그 옛날 왕족인 아벤세라헤스가문의 한 남자가 하렘의 여자에게 접근한 것이 발각되어 목이 잘린 뒤 그 목이 방의 중앙 분수대 위에 놓여져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사자의 분수대까지 흘러왔다고 한다. 회랑천장의 정치한 세공으로부터 간신히 눈길을 돌려 자매의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숨이 턱 막히는 현란한 아름다움 속에 깊숙이 갇혀버리는 것 같았다.벽을 따라 천장까지 미끄러져 올라간 눈길 끝에는 신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실 난 이러한 아름다움과의 대면을 두려워해왔다.릴케의 「비가」 중에는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에 불과하므로/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파르탈정원을 뒤로 하고 처녀의 탑 앞에 이르른 나는 더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회랑에 놓여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여기 이 자리에서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으며 생을 마감해도 좋으련만…나에게 있어 알함브라와의 만남은 깊은 상처로 남겨졌다.호텔로 터덜터덜 돌아가 다시 너절한 일상과 마주할 일이 버겁기만 했다. 5월3일,지도조차도 던져버리고 혼자서 호텔을 나섰다.알함브라궁전의 코마레스탑에서 바라본 건너편 산기슭의 하얀 동네를 찾아갈 참이었다.그곳은 아랍인 거주지역으로서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이방인은 길을 잃기가 십상이라고 한다.일을 저질러보려는 내게 그 미로는 너무나 매혹적인 구실이었다. 택시는 나를 산 니콜라광장에 내려놓고 돌아갔다.조약돌이 다닥다닥 박혀 있는 뜰의 돌벤치에 앉아 관광기념품을 팔고 있는 집시아주머니가 캐스터네츠를 치며 다가왔다.그녀에게서 캐스터네츠 치는 법을 10분쯤 배우고 나서 하나를 샀다. 광장에서 건너다 보이는 알함브라궁전의 전경이 슬프도록 아름다웠다.시에라 네바다산의 눈 덮인 흰 능선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궁전을 감싸고 있었다.서양남자가 광장 한켠에서 이젤을 세워놓고 그 전경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축대를 걸터듬고 앉아 알함브라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한시간 남짓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친듯이 미로 헤매 니콜라교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간 곳에 카르멘이라는 정원을 가진 고급저택이 있었다.우체통구멍으로 들여다본 그 집의 파티오엔 핏빛처럼 붉은 칸나꽃이 가득했다. 벽과 벽 사이의 좁은 미로에서 아랍인의 혼이 스며나와 내 손을 잡아끄는 듯했다.이곳의 옛주민들은 레콩키스타로 그라나다가 기독교인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최후까지 저항하여 흰 벽과 돌길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방향을 알 수 없을만큼 미로 깊숙이 들어온 듯했다.혼자뿐인 길 위에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흑단처럼 검은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넘기고 검은 진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의 여성이 저만큼서 걸어오고 있었다.무심히 바라본 그녀가 지난밤 넵튠이라는 극장식 타블라오에서 만난 플라멩코 무희라는 것을 알아본 순간,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여러 무희들 중에서 오직 그녀만이 나를 사로잡았다.그녀의 춤에서는 격정과 비애가 동시에 교차하고 있었다.폭발하듯 솟구치는가 하면 검으로 자르듯 끊어지며 다시 폭발하고… 어느 순간 나는 저 춤속에 빠져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그것이 그라나다에서 경험한 두번째 마음의 죽음이었다. 그녀가 내 앞에까지 걸어왔다. 『잠깐,당신은 무용수지요』 그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저께 당신의 춤을 봤어요.나는 플라멩코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깊이 매혹됐어요.특히 당신의 춤에』 『고맙습니다』 그뿐 우리는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그녀를 붙잡는 대신 나는 다른 미로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얼마쯤 가노라니 마음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몸을 돌이켜 다시 그 장소로 달려가보았으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사방으로 뚫려 있는 미로 가득히 닫혀 있는 문들뿐이었다.미친듯이 미로를 헤매었으나 나는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눈을 가린 채 손을 맡기고 어디론가 따라가던중 갑자기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왜 그랬을까.하지만 여행이 끝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찾고 있다.그녀의 이름은 스텔라다.
  • 현지 한인기업(이탈리아 중소기업 탐방:19)

    ◎“제조업 성공 힘들다”… 무역업 선호/상관습 독특… 품질보다 인간관계 중시/거래트기 “하늘의 별따기” 친분 쌓아야/대부분 섬유·전자 등 수출입업… 이∼한국∼동남아연결 거래 많아 이탈리아에는 3천명 남짓의 한인들이 있다.절반은 성악이나 패션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며 현지에 나간 상사 직원과 가족들이 약 5백명에 이른다.이탈리아에 정착한 교민은 1천명 안팎이다. 이들은 주로 패션과 관련된 분야에서 일하며 상공업이 발달한 밀라노에 많이 산다.유학왔다 눌러 앉은 사람들도 상당수를 차지,비교적 현지인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생활수준도 안정됐다. 그러나 기업을 차려 크게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이탈리아 섬유 제품을 한국에 수출하거나 한국 및 동남아 제품을 소개하는 에이전트들이 대부분이다.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도 생산 체제를 세우는 것보다 무역쪽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다. ○정착교민 1천명 이탈리아에서 기업을 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기업을 유지하고 거래를 트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다.그 곳의 상관습에익숙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생산 효율이나 자금 사정보다 이탈리아 기업들은 경험과 인간관계를 더 중요시 한다.누구나 배울 수 있는 현재의 기술보다 개인의 독창성·창조성·성실성 등에 더 많은 점수를 준다. 밀라노 한인 회장직을 맡고 있는 박상균 대원유러파 사장은 이탈리아에서 장사를 하려면 「심파테티크」란 단어를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마음이 맞아야 거래도 쉽게 한다는 뜻이다. 『가격이 싸다는 말은 안하는 게 낫다.오히려 덤핑이라는 인식만 심어준다.제품의 질이 뛰어나다는 말보다 점심을 함께 하자는 말이 더 먹혀 들어간다』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쌓고 문화적인 유대를 높이면 거래는 저절로 이뤄진다는 것이다.기술도 중요하지만 얼국장사가 더 통한다는 말이다. 박사장은 지난 70년대 말까지 천일사(태광산업이 인수)의 유럽 지사장으로 있다가 지난 81년 밀라노에 전자 부품회사를 세웠다.남들이 한국에 섬유제품을 판매,한 밑천 챙길때 그는 오히려 한국 가전업체의 수출 창구 역할을 했다.당시 이탈리아 전자부문의 기반이약한 것을 감안,전자 부품회사를 세워 현지인들에게 첨단기술을 소개하며 기반을 쌓았다고 한다. 그동안의 신뢰를 바탕으로 지금은 반도체 부품인 콘덴서·다이오드 등 초정밀 제품을 수입,현지 전자업체에 공급한다.생산 시설은 없지만 매출은 6천만∼7천만 달러로 교민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의 하나로 꼽힌다. 대리석을 수출하는 김충렬씨는 현지인들로부터 신용과 능력을 인정받는 몇 안되는 코리안 중 한명이다.서울 공대를 졸업한 뒤 대림산업에 입사,80년대 초까지 유럽지사에서 일했다.지난 83년 베네치아에서 도시설계 및 건축학을 공부하다 이탈리아의 대리석에 매료돼 수출업체를 세웠다.현재 매출은 연간 25억원 정도다. 장인들로부터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는 김사장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전화나 문서로 거래를 하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직접 찾아가 설명해야 관심을 보인다』며 『거래 조건으로 사람 됨됨이를 첫번째로 보고 그 다음에 전문성이나 생산성·독창성·신용도 등을 고려한다』고 말했다. ○문서거래 좋아안해 패션 분야에서 한인 4인방으로 불리는 김남수·박상국·이수길·이종수씨 등은 이탈리아 기업들의 분업 및 전문성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근로자가 1백명도 안되는 기업들이 자기 상표로 세계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경우가 숱하다.오랫동안 축적된 노하우에다 한가지 업종에만 특화하는 한우물 정신 때문이다』 문어발식 확장은 고사하고 정부에 기대는 기업도 없다는 것이다. 세계적 디자이너 베르사체 밑에서 일하는 한기욱씨는 이탈리아 패션의 명성은 개성을 중시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한가지 패션이 인기를 끄는 게 아니라 수십개의 패션이 한꺼번에 선보여 동시에 유행을 이끈다.유행도 개성만큼 천차만별인 셈이다』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는 이탈리아 관계인들은 한국 중소기업이 안고 있는 문제로 전문성과 창의력의 부족,이탈리아 기업에서 볼 수 없는 자금 부족 등을 지적하고 있다.이탈리아 해외무역공사 페데리코 발마스 한국 지사장은 『이탈리아 기업은 시장의 변화에 재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다.다양하게 분출되는 소비자의 욕구를 기업의 개성과 생산의 분업화를 통해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창의성 부족” 그는 『한국 기업이 생산성을 높이 위해서는 동종 업계의 중소기업끼리 뭉쳐 원자재를 공동으로 구입하거나 생산 및 판매를 특화해야 한다』며 『특히 대기업이나 정부의 의존도를 줄여 스스로 기술 개발에 힘쓰고 자기 상표를 개발,독자적인 판매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 나폴리 은행의 보네트 한국지사장은 『한국 중소기업의 취약점은 독자적인 유통망이 없는 점과 경영의 노하우가 축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지금까지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경기가 좋을 때는 이익을 함께 나눴지만 불황이 닥치면 대기업의 방패막이 역할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80년대 들어서 근로자의 임금 상승으로 대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다고 전제,한국 정부는 소비자의 욕구에 발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중소기업을 국제시장의 전위 부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기업과의 관계를 하청업체가 아닌 대등한 거래 업체로 바꾸고 국제시장에서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앞세운 시장 개척자로서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정부 또한 장기 저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한편 대기업과의 공생관계가 원만히 이뤄지도록 감시자의 역할도 맡아야 한다고 밝혔다.
  • 도시마다 다른 산업(이탈리아 중소기업 탐방:18)

    ◎“비엘라는 직물”… 지역 고유산업 특화/비제바노=구두·카메라=대리석 대표적/원자재 염가 공동구입·정보교류 이점/다품종 소량생산체제… 한분야 타격 받아도 국가전체엔 연향 없어 국내에서 구두 상표로 유명한 「비제바노」는 이탈리아 북서부의 도시 이름이다.하얀 대리석으로 불리는 「카라라」는 지중해 연안의 작은 도시이며 유리의 대명사 「무라노」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15㎞ 떨어진 섬의 이름이다. 패션 상표 「밀란」「제노비아」등은 패션의 도시 밀라노와 제노바에서 따 온 말이고 조개 껍데기에 로마인들을 조각한 「카메오」는 로마의 특산물로 이탈리아 관광 기념품 1호로 통한다.피렌체에서 예술과 문학을 모르면 「정복자」 로마 사람들도 업심을 당한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이처럼 제각각의 자랑거리를 갖고 있다.패션·자동차·기계·유리·직물 등 공업 분야일 수도 있고 관광·문화·휴양 등 비공업 부문일 수도 있다.한 두개의 거대 도시가 나라 전체의 경제권을 거머쥔 「기형」이 아니라 지역별로 발육이 골고루 잘된 「초우량아」인 셈이다. ○제각각 자랑거리 북부 경제의 중심지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60㎞ 떨어진 비엘라는 직물로 유명하다.지난 17세기부터 모·면·실크 등 모든 종류의 옷감을 다뤄왔다.세탁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물이 많은 계곡에 공장을 세웠다.가내 수공업으로 운영되다 지난 50년대 들어 근대식 공장으로 성장했다.지금은 크고 작은 업체가 2천개를 헤아린다. 르네상스의 발원지 피렌체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프라토도 직물 도시다.비엘라보다 출발은 앞섰으나 패션의 중심이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옮아가면서 1위 자리를 비엘라에 넘겨줬다.질이 비엘라에 뒤처지나 옛 영화를 회복하기 위해 지금도 1천개가 넘는 업체가 여전히 베틀을 돌리고 있다. 지난 50년 원사·원단 공장을 세워 피렌체 의류 업체에 납품해 온 피키사의 바론첼리 옥타비아노 사장은 『모·면·마 등 원사의 90%는 남아프리카·아르헨티나·중국 등 외국에서 수입하지만 옷감을 짜는 방식은 1백% 전통 기술에 따르고 있다』며 『이 곳은 직물업체만 모여 있는 일종의 직물 공단』이라고 말했다. 밀라노는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 도시다.지아니 베르사체·지안 프랑코 페레·조르조 아르마니·구치·젠니·미소니 등 쟁쟁한 세계적 디자이너들의 부티크가 즐비하다.지난 50년대 파리의 영향권에서 독립,단순하면서도 실험성이 강한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여성 패션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 이탈리아 패션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피렌체는 남성복으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다.다소 보수적 경향이 짙은 지역적 특성 때문이다.그러나 최근 명예 회복에 나서 디자인 전문학교인 「폴리모다」를 세우는 등 「밀라노 잡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메다는 가구도시 밀라노에서 40㎞ 북서쪽에 위치한 메다는 가구 도시다.전통가구업체인 메데아사는 가족 이름을 회사명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도시 이름을 빌렸다.이 곳에는 장인들만 3천명이 넘고 가구업체는 1천개를 웃돈다.7대째 가업을 잇는 업체도 수십개에 달하며 대가 끊기면 다른 업체에서 기술을 가르친다고 한다.기술의 단절은 없다. 지중해 연안의 카라라와 마사는 대리석이 유명한 곳이다.로마군이 원정을 떠날 때 이 곳 돌로 길을 닦았으며 중세때의 천재 미켈란 젤로는 아예 이곳에 눌러 앉아 조각을 했다고 한다.지역명인 카라라가 대리석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2천년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돌을 캐는 석공은 줄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공법을 더하고 첨단 기계로 무장,기술을 한층 발전시켰다.돌을 가공하는 코제마사의 비토리오 멜란더 사장은 『일단 산업이 특화된 지역에서는 다른 분야에 한눈을 팔지 않고 철저히 분업의 원칙을 지킨다』며 『섬유산업의 경기가 나빠지면 직물·패션 도시만 불황을 겪을 뿐 다른 도시는 별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토리노는 시 전체가 자동차 왕국이며 코모는 원단에 색을 넣는 염색업체 일색이다.베네치아 북쪽의 벨루나는 안경업에 종사하는 근로자가 지역 인구의 90%를 차지하며 베네치아는 무라노의 유리를 바탕으로 조명기구를 발달 시켰다.비제바노는 2백년이 넘는 구두 업체가 수백개에 이른다.일본·독일에 이어 세계 3위에 랭크된 공작기계는 바레세와 밀라노를 중심으로 웅지를 틀었고 주방기구·가방 등도 밀라노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집적이익」 효과 지역적 특화로 얻을 수 있는 장점은 크게 두가지.원·부자재의 공동 구입으로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는 점과 업체간 정보 교류로 기술 발전의 시너지(상승)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이른바 「집적이익」이다. 기계업체인 카르나기사의 아드리아노 카르나기 영업담당은 『한 곳에 수백개의 동종 업체가 몰려 있어 기술 전파가 엄청나게 빠르다』며 『새로운 기술이 외국에 전달되는 데 1년이 걸린다면 이 곳에서는 한 달을 못 넘긴다』고 말했다.경기의 좋고 나쁨에 따라 도시마다 부침이 확연히 드러나는 폐단이 있지만 국가산업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편이다. 알베르토 만페라리 섬유연합회 대외담당은 『가내 수공업을 바탕으로 한 지역적 특화가 이탈리아 경제의 원동력』이라고 전제,『이탈리아 기업은 수세기 동안 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규모의 가내 공업에서 출발,독특한 기술을 축적했다』고 말했다.대규모 공장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에 적격이라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 통일교,평양 「보통강호텔」 운영/김부자와 문선명­박보희씨 관계는

    ◎문교주 고향 성지 조성위해 거액 헌금/김일성에 “정일교육 맡겠다” 제의설도 도대체 통일교와 북한 특히 김일성부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김일성죽음 뒤 조문논란의 와중에서 박보희 세계일보사장이 굳이 평양을 방문해야 했을까.북한 보도대로 정말 극진하기 짝이 없는 찬양을 담은 조사까지 바쳤을까.어쨌든 더욱 분명해진 것은 평양과 통일교의 관계가 이제까지 알려진 것 이상으로 깊다는 것이다. ○91년 의형제 결의 먼저 김일성과 통일교 문선명교주의 개인적인 교분이다.문교주는 박보희사장과 함께 91년 북한을 방문했으며 그때 문교주는 김일성과 만났다.박사장이 이번 북경특파원들과의 회견에서 말한 것으로 보아 이 만남에서 상당한 교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일본 시사잡지 주간 문춘은 김일성과 통일교의 관계에 대해 몇가지 흥미있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이 잡지는 김일성이 김정일에 대한 교육을 문교주에게 위탁하는 유언을 했다고 주장했다.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91년 문선명교주가 김일성을 만났을 때의 대화내용을 통일교일본인 간부의 말을 인용하여 소개했다.이때 문교주는 『형님이 되어주십시오』 했고 김일성은 『좋습니다』 했으며 이에 따라 문교주가 『우리는 의형제입니다.형님께 부탁이 있습니다.이제부터는 아드님(김정일)의 교육을 제게 맡겨주십시오』 하자 김일성이 『알았습니다』 했다는 것이다. ○대동강변 9층건물 또 한가지는 경제협력관계다.역시 주간 문춘이 밝힌 바에 따르면 통일교가 이미 93년부터 평양 보통강호텔의 경영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우리 통일원에서는 확인된 바 없다고 하고 있다.주간 문춘은 호텔의 사진은 물론 73년 이 호텔을 짓기 위해 가져갈 자재가 요코하마항에 쌓여 있던 사진까지 보여주고 있다. 이 보통강호텔은 대동강지류인 보통강가에 있으며 9층 건물로 객실이 약 1백70개인 것으로 알려졌다.북한의 호텔은 모두 국영인데 이 호텔만은 통일교멤버가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호텔의 경영권을 국가로부터 사들인 것은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이고 이 회사 회장인 박경윤씨는 「마담 박」이라고도 불리는 재미한인이며 일본 매스컴에 거의 등장한 일이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라고 했다.주간 문춘은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를 통한 통일교의 자본주의적인 경제활동과 투자가 바로 김일성에게 약속한 김정일교육인 셈이라고 보았다. 또한 92년4월15일 김일성 80회생일 행사로 김일성경기장에서 펼쳐진 매스게임 때 스탠드 카드섹션으로 독립운동가 8명의 이름을 나타내면서 맨 마지막으로 「문선명」 석자를 만들어 보였다는 것도 이 잡지가 새로 밝히고 있다.주간 문춘은 이 세 글자를 돈으로 샀다고 했는데 1억엔이상을 헌금하면 리스트에 올리고 애국자로 불러준다는 것이다. ○평북 정주가 생가 이미 91년 문교주의 평양 방문때 김달현 당시 부총리가 느닷없이 1억5천만달러의 헌납을 요청했다는 설이 있었다. 문교주의 고향은 평북 정주다.이곳 문교주생가는 통일교신도들의 성지순례단이 찾는 성지가 되어 있다.92년8월 2백19명의 외국인으로 구성된 순례단이 문교주생가를 방문했다.당시 순례단에 참가한 일본인 도쿠다 요시노리씨가 세계일보에 기고한 방문기에 따르면 생가 앞에 김일성이 북한 최고의 조각가에게 만들게 하여 기증한 높이 1m의 대리석 헌금용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집은 깨끗이 단장돼 있고 진입도로는 새로 개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당한 경협 제공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보아 문교주가 거액의 헌금이나 이에 상당한 경제협력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통일교는 승공을 기치로 내걸고 어느 종교단체보다도 반공에 앞장서 왔다.박보희사장 자신도 남침의 희생자라고 말하고 있다.이런 통일교가 김일성부자와 가까워진 데 대해서 통일교측은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문교주는 91년 평양을 방문한 뒤 북경에서 담화문을 발표,남북간의 『발전적인 대화와 교류를 증진시켜나가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심경에서 북한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그의 방북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정부는 유감을 표명했으며 사법적 처리대상으로 검토했다.그는 미국으로 갔다가 수개월 뒤 이 소동이 가라앉을 즈음 귀국했으며 대검 공안부는 그의 방북이 적법이라고 했다.박보희사장도 지금 바로 귀국하지 않고 형세를 관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충실한 메신저역 통일교교주와 또 그 제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의 북한방문을 장차 남북통일이 될 경우에 대비한 교두보확보,즉 기득권을 따놓자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문교주는 북한방문 때 금강산관광개발,원산항개발,두만강경제특구개발에 합의했으며 약 30억달러의 지원을 하기로 했다고 일본 산케이신문이 당시 보도했었다. 평양과 통일교의 접촉이 긴밀하다는 것은 이제 거의 확실하다.또한 북한이 통일교지도자들을 충실한 메신저나 협력자로 여기고 있는 것도 확실하다.
  • 블루 모스크/이스탄불(아랍서 지중해까지:9)

    ◎섬세한 상감무늬 천장은 “환상적”/시내 7백여 사원중 으뜸… 첨탑 6개·보조돔 4개에 둘러싸인 중앙돔은 웅장 이스탄불에 있는 모스크는 모두 몇개나 될까. 터키정부의 공식조사에 의하면 7백여개.그날 나를 술타나메트 모스크까지 데려다 준 택시기사는 1천개가 넘는다고 했다.그 중에서 으뜸 가는 모스크,모스크 중의 모스크가 「술타나메트」다.일명 블루 모스크. 열 네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아메드 1세는 신심이 깊은 술탄이었다.그는 유스티아누스 황제때 지은 아야소피아 성당에 버금가는 회교사원을 지어 신에게 헌정하고 싶었다.터를 물색하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마침내 아세궁전 자리가 사원터로 내정되었다.그리고 시인이며 상감세공에도 뛰어난,건축가 마메드 아가에게 이 성업이 맡겨졌다.1609년에 시작된 공사는 8년이 걸려 1617년에야 완성되었다.그때 아메드 1세는 『이제 나는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그리고 나서 얼마후 술탄은 죽었다. 그의 아들 오스만 2세는 부왕의 묘를 사원 가까이 만들어 안장했다. 이른 아침이었다.하늘은 흐리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 모스크 앞 녹지광장은 썰렁했다.그러나 바람의 심술은 봄의 정령이 흐드러지게 깃든 마로니에와 이팝나무들로부터 짙은 향기를 실어왔다. ○아메드 1세가 건립 모스크는 10시에 문을 열지만,광장 주변에는 볼거리들이 풍부했다.왕의 문지기집,학교,키오스크,연립상점들은 사원과 함께 설계된 복합건물이었다.또한 모스크 옆으로도 두 개의 방첨석탑(오벨리스크)이 있는 긴 장방형의 술타나메트 광장이 있었다.이곳은 비잔틴시대에는 십만 관중을 수용하는 전차경주장이었다고 한다.지금은 「독일인의 샘」으로 불리지는 팔각정자에서 황제는 경기를 관전하며 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은 정자 하나에만도 이스탄불을 관통한 격전의 역사가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본래 정자의 양쪽 출입구 네 모퉁이는 조각가 리시포스의 청동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하나는 사자와 함께 있는 전사,헤라클레스,질주하는 말,뱀을 사로잡은 독수리가 그것이었다.그런데 이스탄불이 라틴족에게 점령되었을 때 이 청동조각들은 녹여져서 기념메달로 재생되었고,지금 세워져 있는 네 필의 청동 말은 베니스의 성 마르코 광장에서 옮겨온 것이다° 또한 두 개의 방첨석탑 중 하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집트 원정 기념으로 히에라폴리스로부터 운송해온 것인데,그것을 세우는데만도 32일이 걸렸다고 한다.석탑을 받치고 있는 받침대가 테오도시우스의 치적을 말해주는 양각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반해,위의 돌기둥에 새겨 있는 상형문자는 이집트 왕 투모시스의 통치 30년을 기념하는 글귀이다.「투모시스,오 호루스신의 권세와 그 승인이여」 두 대의 대형버스가 광장과 모스크 사잇길에 와서 멈춰섰다.서양인 관광객들이 길 위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등장은 모스크가 문을 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이제는 모스크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가봐야겠다. 원경으로 보이는 블루 모스크,여섯개의 미나렛과 네 개의 보조 돔에 둘러싸인 중앙 돔의 웅장한 조형미.여섯 개의 첨탑에는 열 여섯 개의 발코니가 있는데,그 숫자는 왕위를 이어온 술탄의 숫자와 같다.돔과 첨탑의 끝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돔 내엔 채색유리창 아메드1세는 신심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스티아누스황제에 의해 만들어진 소피아성당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사원이 세워진 터가 소피아성당과 마주보이는 위치에 있다는 것부터 힘겨룸을 전제하고 있다. 그에 반해 이라크의 모스크에서는 하늘과 신에 대한 칭송과 경외를 면면히 느끼게 된다.그곳 모스크의 특징은 돔의 표면이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고,첨탑의 둥근 이온은 뮤에진이 하루 다섯 번 기도시간을 알릴 때,그늘에서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그곳에선 오직 무슬림만이 모스크에 출입할 수 있다. 블루 모스크 앞엔 이미 입장을 기다리는 관광객의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입장권을 따로 팔지는 않고 신발을 보관해주는 값으로 2천 리라를 받았다. 사원의 내부구조는 의외로 단순했다.천장이 높은 홀에 연분홍 대리석 기둥들이 전부였다.그러나 섬세한 상감무늬가 입혀진 천장은 아름다움의 극치였다.코란의 글귀가 새겨 있는 중앙 돔의 내부와 그 돔을 둘러싼 30개의 작은돔의 내부에는 반달형의 채색 유리창들이 있어 실내에 환상적인 무지개빛을 드리우고 있었다.유리창은 모두 2백60개인데 그 넓은 홀을 밝히기엔 다소 부족한 듯,중앙에 수백 개의 작은 전구를 매단 대형 조명기구가 늘어뜨려져 있었다. 바닥에 깔려있는 수백 장의 양탄자는 그곳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에 닳아 반질반질 했다.그러나 제한구역 너머,신도들이 예배를 보는 곳에 있는 양탄자는 새 것처럼 깨끗했다.마침 시골사람으로 보이는 중년의 터키인 부부가 제한구역 안쪽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앉아 있었다.이라크에서라면 이 모스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그들 뿐 이었으리라. 「이슬람교도가 많은 도시」이스탄불은 이제 자신의 가장 내밀한 성소를 이교도들의 볼거리로 내어주고 있었다. 터키남자 그리고 나타샤. 그를 만난 것은 블루 모스크 옆의 「술탄 팝」이란 음식점에서였다. 『엊그저께 암만에서 이스탄불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당신을 봤어요』 몸에 붙는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 차림의 청년이었다.자동차 키를 만지작 거리며 그가덧붙였다. 『당신은 한국사람이죠?』 『네,당신은?…』 『터키사람이에요.나는 이스탄불에 살아요』 『반가워요.그럼…』 나는 자리를 찾아 앉았고 그 역시 다른 자리에 앉았다.주문한 음식을 먹고 있는 동안 그의 시선이 줄곧 내 옆얼굴을 따갑게 했다.거북함을 잊으려고 나는 친구에게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나서 보니 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음식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보라색 꽃더미가 눈을 부시게 하는가 싶었을 때,나무 아래 앉아 있던 그가 불쑥 일어나서 나에게로 다가왔다. 『아니?…』 『나는 사실 당신 자리로 가서 함께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이스탄불에서 뭘 하세요?』 『나는 테훈이라는 호텔과 양탄자 도매상을 해요.그리고 도쿄에도 레스토랑이 하나 있어요.가끔은 일본 NHK의 프리렌서 일도 보구요』 그는 자기 명함을 나에게 주었다.셀라하틴 하쉐리엔이 그의 이름이었다.그는 내가 원한다면 자기 양탄자 가게를 구경시켜줄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양탄자 가게는 가까운곳에 있었다.천장이 낮고 안이 깊은 실내로 들어서기 전,문득 생각나는 말이 있었다.터키에 가면 이유없이 친절한 남자를 경계하라.하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굴 속으로 들어가야지? 『당신은 이스탄불에 얼마 동안 머물겁니까?』그가 물었다. 『내일 아침 10시 비행기로 떠나요』 『며칠간만 더 연기하세요.그러면 내가 이스탄불을 구석구석 구경시켜 줄 수 있어요.패라 팔레스 호텔 알지요.아가사 크리스티가 「오리엔트특급 살인사건」을 집필했던 방이 그곳에 있는데,나는 그 방의 VIP키도 가지고 있어요.원한다면 당장이라도 그곳에 가볼 수 있어요』 상점을 나올 때 나는 실크킬림(벽걸이)을 하나 사서 손에 들고 있었다.그는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8시에 그가 호텔 로비로 왔다.그는 말쑥한 정장차림이었다. ○「나타샤」들에 당해 나는 그에게 일행들이 남기고 간 쪽지를 보여주면서,그들과 합류하자고 제의했다.그는 이스탄불에서 제일 유명한 레스토랑에 예약을 부탁해 놓았는데 취소가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잠시후 우리는 그의 푸조차를 타고 일행들이 먼저 간 레스토랑으로 갔다.차를 주차시키고 돌아온 그의 손에는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나는 내 생애에서 여자한테 두 번 꽃을 주었어요.한번은 우리 어머니한테,또 한번은 전 애인한테,그리고 지금 세번째 당신한테 꽃을 줍니다』 유부녀라는 사실을 밝히면 너무 잔인한 짓일까.난처했다. 『내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에요.어머니한테 당신 얘기를 했어요.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어요』 나는 잠자코 음식만 먹었다.그가 감정의 수위를 한층 높였다.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요.그러나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겠어요.당신 나이가 스무살이든 오십살이든,결혼을 했든,안했든 상관없어요.나는 당신이 좋아요』 식사를 끝내고 레스토랑에서 나올 때 나는 그만 그가 준 꽃을 놔두고 나왔다.그가 다시 가서 꽃을 가져와 도로 나에게 주었다. 그는 그날 저녁 나에게 모욕을 받은 듯이 화를 내며 돌아서 갔다.하지만 그는 재수가 좋았는지모른다. 요즘 터키에서는 「나타샤」란 노래가 유행하고 있다.나타샤란,터키와 이웃해 있는 나라들로부터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보따리장수의 속칭이라고 한다.그런데 터키남자들이 러시아 나타샤들의 유혹에 빠져 가산을 날려보내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러니,마음이 헤픈 하쉐리엔이여.그대가 나타샤한테 반했더라면,호텔도 양탄자가게도 다 날려버리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 미정부서도 김정일평가 엇갈려/뉴욕타임스 보도 분석

    ◎국무부 관리들/“국정 장악… 책임있는 지도자 부상”/국방부·CIA/“방탕한 인물… 쿠데타로 실각할것” 미국 신문 뉴욕타임스는 17일 김정일에 대한 정보가 워낙 부족하기 때문에 클린턴행정부내에서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고보도하면서 김정일을 만난 사람들의 사례를 전했다. 타임스는 김정일의 사생활을 지극히 문란하게 그리고 있는 신상옥·최은희부부의 얘기와 함께 이와는 반대로 김정일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탈리아기업인의 목격담을 소개했다. 김정일과 만난 이탈리아기업인은 현재 로마에 사는 카를로 바엘리씨(61)로 스캄비 콘 엘에스테로라는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북한에 1억2천만달러상당의 어로장비를 판매하고 그 대금을 대리석과 금으로 받는 계약을 체결한 그는 92년9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의 요트에서 그와 5시간동안 만났다는 것이다. 바엘리씨는 지난주 뉴욕타임스와 가진 전화인터뷰에서 『내가 만나본 김정일의 특징적인 인상은 꾸밈이 없는 순박함이었다』면서 『그는 다재다능하고 유머가 있었으며 누구라도 그를 만나보면 알려진 것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요트선상의 식사메뉴는 생선과 구운 새우,그리고 김정일이 즐긴다는 헤네시 코냑과 프랑스산 포도주였으며 두 사람은 보좌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우정의 축배를 들고 세계문제를 화제로 삼았다. 김정일은 북한사람들이 미국과 협조할 용의를 갖고 있으며 이미 미군 유해송환과 관련해 협조하고 있다고 밝힌 뒤 『멀지않아 서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우리가 미국의 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고 바엘리씨는 전했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김정일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그가 누구이며 그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이고 과연 김일성의 뒤를 이을 수 있을 것인지등에 대해 국무부와 국방부및 중앙정보국(CIA)간에는 물론 심지어 CIA내부에서 조차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무부와 CIA 일부 분석가들은 김정일이 괴짜일지는 모르지만 일정기간 매일매일 국정을 운영해왔고 지금은 분명히 국정을 관장하고 있으며 결국은 책임있는 지도자로 떠오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김정일은 오랜 기간 몸을 숨긴채 기다려왔으며 이제 정면에 나선 이상 새로운 시각으로 그를 봐야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에 반해 국방부와 대부분의 CIA관계자들은 김정일이 김일성과 같이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는 스탈린주의자이면서도 아버지와는 달리 국가적 영웅도 아니고 나이먹은 세대나 대부분의 군부세력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핵문제에 있어서도 양보를 할 수 없을 것이며 정치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카리스마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CIA와 국방부가 작년 12월 작성한 보고서는 김정일을 「정신이상자이며 방탕하고 의심스런 인물」로 묘사하면서 『일단 그가 권력을 잡겠지만 개인적 능력부족과 광범위한 반대세력,지속적인 경제·사회적 빈곤으로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 그리스/약탈문화재 되찾기운동/불에 「밀로의 비너스」 반환 요구

    ◎파르테논신전 조각은 영과 “12년 실랑이”/작고 메르쿠리가 선도… 최우선 정책으로 「신화의 나라」 그리스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국의 문화유물을 되찾기 위한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과거 어느나라 못지않게 외침을 많이 받았던 그리스는 특히 나폴레옹이 점령전쟁을 수행하면서 루브르 박물관을 채우기 위해 문화재를 휩쓸어가는 바람에 가장 혹심한 피해를 당했다.미술사가들은 이같은 그리스의 문화적 피해를 일컬어 『그리스는 2천년동안 빼앗겨왔다』고 표현한다. 이런 만큼 문화적 자부심이 남다른 그리스는 강대국에 빼앗긴 자신들의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작업을 이제 최우선의 문화정책으로 삼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1백70여년전에 프랑스에 팔려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있는 「밀로의 비너스상」을 되돌려줄 것을 프랑스에 최근 정식요청했다. 고대 그리스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비너스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상」은 1820년 당시 오스만 터키 제국의 땅이었던 에게해의 밀로스섬의 아프로디테 신전 근처에서밭을 갈던 한 농부가 발견했다.때마침 이 섬에 정박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이를 사들여 루이 18세에게 헌납했으며 현재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동안 비공식적인 경로로만 회수를 모색해온 그리스측은 80년대초부터 시작된 문화재 반환운동이 최근들어 다시 활기를 띠자 이번에 프랑스에 대해 반환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스 정부는 또 이 반환요청과 함께 한 조각가에게 밀로의 비너스상의 모조품을 만들도록 의뢰,이를 진품이 되돌아올 때까지 처음 발견됐던 밀로스섬에 세워둘 계획도 마련했다.밀로의 비너스상 회수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 정부가 이처럼 문화재 되찾기 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 데는 지난 3월 타계한 문화부장관 멜리나 메르쿠리의 공이 컸다.1960년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여배우이기도 한 메르쿠리는 1981년 그리스 최초의 여성각료가 된 뒤부터 평생을 바쳐 해외의 그리스 문화재를 되돌려 받기 위한 문화투쟁을 전개했다. 메르쿠리는 82년 영국을 상대로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장식인 「엘진 마블」을 돌려받기 위한 국제적 차원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이 유물은 2천5백년전에 세워진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벽과 기둥 및 지붕 부분에 있던 정교한 대리석 조각품이다.1806년 터키 주재 영국대사이자 고고학자인 엘진경이 파르테논 신전에서 떼어내 영국으로 가져감으로써 「엘진 마블」이란 이름이 붙었다.이 역시 그리스가 터키 지배 아래 있을 때의 일이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이 「엘진 마블」의 반환요구에 대해 영국은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다.메르쿠리의 국제적 여론을 업고 벌인 노력이 영국내에서 조차 호응을 얻어 오래지 않아 이 예술품은 반환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밀로의 비너스상 반환요청 역시 그리스의 정신을 되찾으려는 메르쿠리의 노력을 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밀로의 비너스를 되찾으려는 그리스의 노력이 어떤 결실을 거두느냐 하는 것은 문화재 피탈로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게도 커다란 관심사다.
  • 30m지하 대형 유리관에 보존/김일성 시신처리 어떻게 할까

    ◎작년부터 부패방지 보존실공사 착수/일반공개땐 승강장치이용 지상으로/모택동기념관 본떠 시신 영구보존 김일성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될까. 북한당국은 아직 김주석의 시신처리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지 않았으나 미라상태로 영구 보존된 레닌·스탈린이나 모택동등 사회주의지도자들의 사례를 뒤따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판단은 북한이 「민족의 태양」으로 추앙한 김일성의 사망에 대비해 이미 지난해부터 대형유리관과 지하보존실및 김일성기념관 건립에 필요한 유리와 목재·특수강판등 각종 자재를 준비하고 공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는 사실에서 뒷받침 되고 있다. 북한소식통은 이와관련,『북한이 김일성사후 특수유리관을 일본에 주문했다는 정보가 있다』면서 『북한은 김일성시신을 유리관에 담아 북한인민들로 하여금 추모토록 하려는 것같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김주석의 시신은 가로·세로가 각각 10m나 되는 대형유리관에 안치돼 지하30m의 깊이에 보존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하 보존실의 경우대형유리관을 사방벽면과 각각 5∼6m가량 떼어놓아 특수시설을 설치하는등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대형유리관은 평상시에는 지하보존실에 안치했다가 일반에 공개될 때만 자동승강장치 등을 이용,지상으로 끌어올린뒤 조문이 끝나면 원위치로 내려가게 될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지난2월 중국 북경의 소식통들은 북한이 지난해10월 지하보존실을 만들기 위해 건설전문가와 호위총국요원등 8명을 극비리에 북경에 파견,모택동중국주석의 유리관제작에 직접 참여했던 중국기술자 5명으로부터 기술자문을 받았다고 전한 바있다. 이들 소식통들은 북한이 홍콩의 건설건자재회사와 시설공사에 필요한 자재구매협상을 벌여 1차로 30만달러어치를 사기로 계약했으며 이미 지난해 신용장을 개설한 상태라고 전했으나 건축자재가 실제 북한으로 반입됐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지난 91년부터 김일성이 사망할 경우에 대비,시신을 방부처리한뒤 밀폐된 유리관에 담아 지하 깊은 곳에 안치했다가 필요할 경우 일반에 공개할 계획을 세워놓고 준비를 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방송들은 『8일부터 17일까지를 애도기간으로 설정하고 11일부터 16일까지 조문객을 맞이 한다』고 보도하고 있으므로 김주석의 시신공개 여부는 일반 조문객을 받는 11일쯤 판가름날 것으로 보이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김일성주석의 업적을 후대에까지 기리기 위해 김의 시신을 영구보존할 기념관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의 모택동기념관을 본떠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기념관건립과 관련,이 기념관에 안치될 김의 대형유리관의 방수·방부처리등 영구보존책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지난 1976년 9월9일 모택동이 사망하자 중국공산당 정치국원들이 모의 시신처리를 놓고 레닌처럼 모의 시신을 미라로 보존하자는 의견과 모의 생전 희망대로 화장을 하자는 의견으로 갈라지는 바람에 이들 정치국원들의 의견이 타협될 때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끈 탓에 모의 시신을 보존하는데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던 것과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기념관건립부지는 평양 만경대인근의 김일성생가나 평양 주체사상탑등 김의 사상과 업적을 알리는 데에 어울리는 장소이면서도 북한인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 유력할 것이라는 게 북한관련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김일성기념관의 건립규모는 모택동이나 레닌등의 묘역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가 될지 짐작이 가능하다. 북경시내 천안문 남쪽끝에 위치한 모택동 영묘는 가로·세로 각각 1백5m에 대리석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높이 33m의 건물로 마치 그리스신전을 방불켸 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주석은 이들 보다도 재임기간이 긴 지난 49년동안 북한지역의 절대통치자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때 기념관의 규모가 일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모스크바외국인 “교외서 살자”/집값폭등·교통난·소음공해 피해 탈출

    개방화 바람을 타고 모스크바로 몰려들었던 외국석유회사등 외국인기업 간부들의 모스크바 탈출 러시가 한창이다. 이같은 「탈출러시」는 만성적인 교통체층과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소음공해 및 매연,그리고 최근에 급증한 범죄때문으로 풀이된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원인은 모스크바시내의 부동산값 폭등이다.모스크바 시내에서 서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이 원하는 아파트를 구하려면 월 5천달러 이상은 줘야하고 그나마 공급물량이 달려 계속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가족과 함께 체류중인 외국회사 중역들이 가장 선호하는 모스크바 교외주택지로는 자녀들이 놀 수 있는 「뒤뜰」과 「안전성」이 보장된 다차. 다차는 구소련 정권하에서 고급관리나 공산당 당원의 별장지였으나 소련붕괴이후 거의 버려져 있다가 최근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벌여 고급주택단지로 탈바꿈한 것이다.이곳에는 정원,테니스 코트,러시아식 목욕탕(반야스)및 다른 편의시설은 물론 철저한 탐지기등 보안장치와 함께 심지어 24시간 경비원체제가 갖추어져 있다. 대표적인 주택단지로는 페레델키노,주코프카 등이 있다.페레델키노는 노벨상 수상작가인 파스테르나크가 살던 곳. 이밖에 모스크바 시내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메세르스키에도 주택지가 들어설 예정으로 있다.이 주택지는 한술 더떠 미제 대리석 벽난로,워터젯 욕실,전자 개폐식 차고및 세탁실등의 설비가 갖추어질 계획이다. 충분한 공간과 시설을 갖춘 다차는 월세만 7천∼1만4천달러정도로 비싸 「아모코」「텍사코」「코노코」와 같은 석유메이저들의 간부등 고소득층들의 집단촌락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사는 외국인들은 전원생활의 장점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지만 문제도 있다.아직까지 대부분의 길이 비포장도로이고 상점이나 식당조차 없어 물건하나라도 사려면 40분 이상 비포장도로를 달려나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 “이 파시스트 위상 복원”

    ◎극우파 5명 입각이어 “이상기류”/50년만에 트레비글리오시 결정 2차대전후 이탈리아에서 모두 철거됐던 파시스트 입상(입상)가운데 하나가 복원돼 전시된다. 이번 결정은 사회당이 지배하고 있는 이탈리아 북부의 트레비글리오시 자체가 결정한 것으로 최근 신파시스트 소속 5명의 장관이 전후 처음으로 입각,파시즘부활의 우려를 부른 이탈리아 정국과 관련해 눈길을 끌고 있다. 문제의 입상은 무장한 파시스트군 8명이 나란히 포즈를 취한 형태의 대리석으로 만든 석조상으로 철거되기전 위치해 있던 이 시의 한 빌딩에 다시 세워질 예정이다. 「8명의 파시스트용사」가운데 한 형상은 특히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무척 닮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전시될 경우 온건·중도노선의 많은 정치인과 시민들의 반발도 예상되고 있다. 이와 관련,이탈리아 북부 트레비글리오시장은 『이번 복원결정은 수개월전에 내려진 것』이라고 밝히고 『시는 이 상의 예술적 가치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문제의 입상은 2차대전직후 철거돼 지금까지 트레비글리오시 회관의 한 창고에 보관중이었는데 일류 대리석조각 전문가들에 의해 복원될 예정이다. 전후 처음으로 신파시스트 계열의 장관을 내각에 진출시켜 서방세계에 놀라움을 안겨줬던 베를루스코니총리는 최근 유럽국가들의 각종 회의때마다 서방세계의 「충격」을 달래느라 애를 먹고 있다. 다음주 이탈리아 방문을 앞둔 클린턴 미대통령은 29일 이탈리아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이탈리아에 파시스트계열의 장관이 출현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극우주의로 가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고 『상황은 많이 변해 있으므로 나는 현 베를루스코니정부가 잘 해나갈 것으로 믿고 현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 승용차 금지령(외언내언)

    런던의 스모그 사건은 1878년부터 시작한다.환경재난이라할 만한 대사건만도 62년까지 10회나 된다.최대사건이 52년.12월10일부터 1주일간 아황산가스안개가 지속되자 이로부터 3주사이에 질식과 호흡곤란으로만 4천여명이 사망했다.그후 만성폐질환으로 죽은 사람이 또 8천여명이다. 1987년 2월 멕시코시티 하늘을 날던 수천마리의 새가 떨어져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새 사체를 조사한 결과 심장,폐,간등에서 다량의 납,카드뮴,수은등이 검출됐다.이사건은 호흡으로 죽는것만이 아니라 누적과 농축을 거쳐서도 죽는다는 것을 확인해줬다.멕시코시티는 89년부터 외교관차량을 제외한 전차량의 5부제운행을 실시하고있다.2천만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두통,불면증,무기력,구토증세를 겪고있고 심한사람은 확각과 환청증세에까지 다다른다. 25일 그리스정부는 수도 아테네 일원에 승용차 운행금지 긴급조치령을 발동했다.금주 들어 60여명의 시민이 대기오염에 의해 호홉기 및 심장질환으로 입원하는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아마도 이것이 제3의 최대사건이 될지도 모른다.아테네 역사유적들은 이미 매연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었다.매연에 의한 부식으로 코와 귀가 없는 고전 대리석흉상들이 현재 한둘이 아니다. 대리석은 쉽게 부식된다해도 그 도가 지나친다.그리스 산성부식전문가 스콜리키디스는 「지난 2천4백년에 걸쳐 부식된 정도보다 최근20년사이에 부식된 정도가 더 크다」고 단정한다. 자동차매연이 주범인 도시대기오염은 기온 연평균 1도증가,먼지10배증가,일사량 총량20%감소 자외선30%감소,풍속30%감소,안개빈도 겨울100% 여름30%증가를 가져온다.이 결과가 모여 갑자기 불상사를 만들어낸다.남의 일이 아니다.다음차례가 중국 센양이거나 한국 서울일 가능성도 있다.지금 서울은 매연분진에 있어 세계수위그룹에 끼여 있다.
  • 2천년 전통의 대리석업(이탈리아 중소기업 탐방:5)

    ◎대부분 가업… 돌을 나무처럼 다룬다/기계화 돼도 가공은 일일이 손으로/수입원석 써도 정교함은 추종 불허/카라라지역 장인들,돌의 색깔·생김새만으로 특성 파악 이탈리아 중서부 토스카나주,지중해 연안 카라라 지역의 아푸아네산맥.미켈란젤로가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내리며 대리석을 깎던 곳이다.수많은 조각가가 그 뒤를 따랐고 지금은 깎아지른 듯한 하얀 절벽에서 석공들이 천혜의 대리석을 캐며 대를 잇고 있다. 등록된 광산만 1백7개,석공은 1천2백여명이며 연간 1백38만t의 대리석을 생산,전세계에 판다.매장량이 30년 이상 채굴가능한 봉우리만 수십개이다. 해발 4백80m의 판티 스크리티 동굴은 1백년전 한 석공이 대리석 광맥을 발견,산을 파들어간 것이 갱구처럼 굴로 커진 곳이다.굴의 길이가 1㎞를 넘고 막다른 곳은 해발 7백m.산을 뚫고 들어가 한 복판에다 높이 1백m,너비 2백m의 인공 광장을 만들었다.대리석의 황제로 불리는 그 유명한 「화이트 카라라」가 나오는 곳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대리석의 명성이 풍부한 자원에서 나오는 것만은아니다.더 좋은 돌을 구하기 위해 수세기동안 석산을 파들어간 장인 정신이 오늘날 이탈리아 대리석을 키운 것이다.대리석을 자르는 「갱서」와 「불도저」가 망치와 정을 대신했지만 깎고 자르고 다듬는 기술은 천년전과 다름이 없다.오히려 석공들의 손을 거치면서 기술은 한층 나아졌다. ○등록된 광산 1백곳 카라라에서 지중해를 따라 남쪽으로 7㎞떨어진 마사의 코제마사.대리석과 화강암을 가공해 일본,영국,사우디 아라비아,중국 등 전세계에 수출한다.지난 80년 설립,14년만에 매출이 연간 2천만달러를 넘었다.카라라의 대리석을 쓰기도 하지만 터키,이스라엘,포르투갈,남아공 등에서 대부분의 원석을 사온다.자원의 혜택은 별로 받고 있지 않는 셈이다. 돌을 사서 10㎝간격으로 자르고 흠이 난 부분을 메운 뒤 표면을 깨끗이 다듬는다.이어 고객이 원하는 크기대로 또 자르고 칠을 해 광을 낸다.우리나라의 화강암 가공 공정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기계도 같고 일하는 근로자 수도 비슷하다.그런데도 가공된 대리석의 색깔,표면,무늬 등은 비교가 안된다.가격도 몇 곱절 비싸다. 이 회사 프랑코 주스티 사장은 『달리 비결이 없다.예부터 전해지는 기술대로 자르고 닦고 칠했을 뿐이다.다른 게 있다면 돌의 색깔과 생김새만 봐도 어느 곳에 사용해야 제 특성을 살릴 수 있는지 금방 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손으로 하든 기계로 하든 돌을 알고 가공을 하느냐가 핵심이라는 얘기이다. 몇 해전 이런 일이 있었다.한국의 유명 대리석 업체가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원석으로 수입해 가공했다.그런데 돌 자르는 톱인 「갱서」만 대면 「쩍」소리를 내며 대리석이 산산 조각이 났다.이탈리아에선 나무를 깎듯 정밀하게 잘라지는 것을 확인한 터라 불량품이라고 클레임을 제기했다. 이탈리아 기술자가 급파돼 확인한 결과 「갱서」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정이 났다.화강암은 대리석보다 5배 이상 단단해 특수 강철 「갱서」를 사용하는데 화강암용 「갱서」로 대리석을 잘라 산산조각이 났던 것이다.닭잡는데 소잡는 칼을 쓴 격으로 돌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다는 얘기다. 이탈리아에서 10년 이상 대리석을 수출해온 교민김충렬씨는 『한국의 석재업체들은 돌의 특성은 생각지 않고 무조건 비싼 돌만 찾는다』며 『좋은 돌보다 적합한 돌을 쓰는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코제마의 기술 책임자인 기세페 밀라니씨는 『이 곳에선 돌을 안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을 만큼 돌을 잘 안다.게다가 2천년 이상 축적된 장인들의 기술도 있다.이 것을 고스란히 공장에 옮겼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선대의 장구 그대로 마사에서 남쪽으로 15㎞떨어진 피에트라산타시.이곳에선 3대 이상 석재를 가공한 업체가 흔하다.10대째 가업을 잇는 업체도 있다.선대가 쓰던 장구도 그대로이고 같은 제품만 반복해 만든다.정밀기계도 아닌데 1㎜의 오차도 없다.돌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이 곳 사람들은 말한다. 카라라의 마지막 장인인 콘트리 디노씨(83)는 아직도 「마르텔도(망치)」와 「스칼페다(정)」를 고집한다.아들인 프랑코씨가 사용하는 기계보다 더디긴 하지만 기계가 못내는 문양을 옛것 그대로 그려낸다.12살때인 지난 23년부터 70여년간 묘비에 문양을 새겨온 디노씨는 『기계를 반대하는 것은아니다.새 것도 좋은 점이 있다.단지 아들에게 전통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해 망치를 든다』고 한다. 마사,카라라 지역의 대리석 공장은 1천2백62개.관련 종사자는 8천9백명으로 한회사의 평균 근로자는 8명꼴이다.2∼3명의 가내 수공업체도 6백여개나 된다.마사의 북쪽 포르테 다이 마르미(돌의 강함이란 뜻)에서 대리석을 가공하는 디 안젤로씨는 『대리석 가공업체가 점차 대규모,기계화되고 있다.그러나 가공 과정은 일일이 손으로 한다.손과 대리석 사이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계가 끼어든 것』이라고 말했다. 북서부 베네토주에서 유일하게 대리석 가공기술이 발달한 베로나시에서 20년 이상 원석을 가공,수출해온 델리로씨는 이렇게 말한다.『대리석은 수만년에 걸쳐 형성된다.종류만 3백가지가 넘고 지역마다 색깔과 특성이 다르다.2∼3년 돌을 연구해선 색깔과 돌의 이름도 구분하지 못한다.이탈리아는 이미 2천년전부터 대리석으로 길을 내고 집을 지었다.나무 문화권인 한국,중국,일본과는 다르다.기울어도 무너지지 않는 피사의 탑이 이탈리아 대리석의 현주소이다』
  • 협정서 2백쪽… 2천5백명 내빈/자치조인 표정

    ◎크리스토퍼 “비전·용기 보여줬다” ○…아라파트 의장은 카이로 근교 국제회의센터에서 수십개국의 외무장관등 약 2천5백명의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된 조인식에서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화려한 대리석 장식의 책상위에 놓인 약 2백쪽 분량의 협정서에 먼저 서명했다. 아라파트 의장은 3권의 검정색 책자와 부속 서류철로 된 협정서에 미리 준비된펜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이 늘 휴대하고 다니는 펜으로 일일이 서명한 후 곁에있던라빈 총리와 악수를 나눴으며 이어라빈 총리가 뒤따라 서명했다. ○…이날 조인식은 아라파트 의장이 전체 협정서중 부속 지도 1장에 대해 서명을 거부하고 라빈 총리도 뒤따라 이 지도에 서명하지 않아 한때 막후 의견 조정을 위해조인식이 잠시 중단되는 소동을 빚었다. PLO측 수석 협상대표인 나빌 샤스는 그러나 아라파트 의장이 결국 이 지도에 서명을 했다고 밝혔다. 아라파트 의장은 그러나 이 지도에 서명하면서 별도의 단서를 병기했으며 라빈총리는 보좌관을 불러 아라파트 의장이 아랍어로 써넣은 단서를해석하게 한 후 지도에 서명했다. 샤스 대표는 『지도에 문제가 있었다』면서 『아라파트 의장은 지도에 대한 보장이없는 것을 발견하고 크리스토퍼 장관이 보장을 약속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조인식은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 아라파트 의장,라빈 총리등 주요 인사들이 식장을 가득 채운 내빈들의 기립 박수 속에 중앙 단상에 입장한 후 무바라크대통령의 축사로 시작됐으며 이어 협정 조인 순서로 이어졌다. 조인식을 주재한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 협정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의『혁명적 변화』를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크리스토퍼 장관은 이날의 팔레스타인 자치이행협정 조인이 『비전과 지도력,용기를 보였주었으며 적과의 평화가 가능함을 입증했다』고 찬양했다. 크리스토퍼 장관은 특히 협정 조인을 위해 지난 수개월간 계속된 협상에서 무바라크 대통령이 시종일관 굳건히 협정의 실현을 추진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요른단강 서암,가지지구의 이스라엘 정착민 12만명과 동예루살렘에 거주하는 15만명의 이스라엘인들의 처리문제는 지난해 9월 체결된 팔레스타인자치협정에서 과도기 3년째에 논의키로 돼 있어 이번자치이행협정 조인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 「…부산항에」(외언내언)

    유명한 시인에게 시비가 있듯이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들에겐 노래비가 세워진다.대중가요는 대중의 기쁨과 슬픔을 대변하면서 한 시대의 국민정서,또는 사회상까지를 표현하고 있다.일제때는 나라잃은 국민들의 슬픔과 한을 담은 애절한 노래들이 많이 불려졌었다.지금도 진한 애수가 묻어나는 「타향살이」「황성옛터」「나그네설움」등이 다 그런류의 노래들이다. 노래비로는 유달산 중턱에 세워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그 효시일듯.69년의 일이다.「낙화유수」등 숱한 히트곡을 남긴 남인수의 노래비는 87년송추에,고복수의 「타향살이」노래비는 91년 울산에 세워졌다.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은 92년 그의 고향인 경북 성주에 건립되었다. 이들의 노래비는 주인공의 작고후에 세워진 것이 공통점.그런데 우리시대의 슈퍼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가수 조용필의 노래비가 부산 해운대에 세워진다고 한다.새겨질 노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형제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우리국민은 말할것도 없고 일본에서도 대히트를 했던 그의 대표곡이다.지금은 연변에 사는 우리동포들도 이 노래를 부르며 고향생각에 눈물짓는다고 한다.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처음 부른것은 72년.그러나 발표직후에는 반응이 별로 신통치 않았다.그러다 75년 일본 조총연사람들의 모국방문이 허용되면서부터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없는 내형제여』란 노랫말이 기폭제가 되면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한맺힌 이별과 만남의 절규가 이 노래를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부산의 향토연구민간단체인 「부산을 가꾸는 모임」은 대리석과 청동으로 된 이 노래비를 5월7일 제막할 예정이다.『부산을 소개하는 대표적 노래로 이 지역의 애틋한 정서가 듬뿍 배어있어 영원히 기억될 노래』라는 것이 건립자들의 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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