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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판문점에 또 선전탑 건립/김일성탑 옆에 30m 높이

    ◎승계 앞둔 김정일 우상화 상징물인듯 최근 판문점 북측지역 기정동 선전촌에 높이 30여m 정도의 대리석 선전탑이 건설돼 김정일 권력승계와 관련된 선전탑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북한은 지난 96년 8월15일부터 「김일성 영생탑」 바로 옆에 또다른 선전탑 건설을 시작,11월26일 공사를 완료했다.그러나 북한은 아직 선전탑에 아무런 선전문구를 내걸지는 않고 있다. 당국은 지금의 김일성영생탑에 「위대한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문구가 있는 것을 고려할때 새로운 선전탑은 김정일을 찬양하는 문구를 내걸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따라서 선전문구를 내거는 등 선전탑의 최종 완성시기는 김정일의 공식 등장 시점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장묘개혁 「한국형 가족묘」로(사설)

    ◎서울시의 묘지난해소안을 지지한다 서울시가 심각한 묘지부족현상을 해소하고 장묘문화를 개선키 위한 아이디어로 「한국형 가족묘」를 개발,내년부터 시민에게 권장·보급키로 했다.전통에 따른 봉분묘를 유지하되 한개의 봉분을 둘러싼 대리석기단에 돌아가며 납골함을 설치,유해 12구를 봉안한다는 것으로 매우 바람직스러운 개선안이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는 묘지난 때문만이 아니라 좁은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서도 장묘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그러나 화장을 꺼리고 매장을 선호하며 특히 풍수지리에 따라 조상의 묘자리를 잘 선택해서 모셔야 후손이 번창한다고 믿는 오랜 장례관습 때문에 묘지제도개선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후에도 3대가 오순도순 이번에 서울시측이 특허까지 얻어 공개한 한국형가족묘는 매장선호의 관습과 화장의 효율적 토지이용을 절충한 것으로 4인가족 기준 3대까지 1기의 묘에 모실 수 있는 현대적 가족묘방안이다.6평규모에 12구를 봉안하는 만큼 땅을 아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서울시는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 묘지를 6백만원에 분양할 예정이어서 1구당 2평 기준 1백60만원인 일반묘지보다 경제적이다. 서울시뿐 아니라 보건복지부도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개정을 추진하고 있다.98년 시행을 목표로 하는 개정안은 묘지면적의 상한을 현재의 3분의 1이하인 3∼6평으로 낮추고 국유지등에 들어선 불법묘의 강제철거근거를 두고 있다. 이처럼 당국이 묘지제도개선에 적극적인 것은 국토의 1%인 3억평(982㎢)이 묘지인데다 매년 여의도면적의 3배인 2백70만평가량에 20만기의 묘가 새로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항공촬영 등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전국의 묘는 1천9백60여만기에 달하며 그 면적 3억평은 서울시면적의 1.5배,전국 모든 공장부지의 3배,총택지면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땅이다.분묘 1기의 평균면적은 13평으로 살아 있는 국민 1인당 주택면적 4.3평의 3배다.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제쳐놓더라도 수도권은 3∼4년,전국적으로 10년내 묘지공급은 한계에 이르게 돼 있다.더욱이 전체 묘의 40%인 8백만기가 무연고묘로 추정되며 임협 등에 돈을내고 묘지관리를 위탁하는 후손이 급속히 늘어가고 있어 장묘제도의 개선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화장·납골당 선호 일반화되야 궁극적 개선방향은 묘지면적을 서구국가처럼 1.5평규모로 줄이고 봉분 대신 대리석판에 고인의 약력을 새겨넣는 평토장을 도입,묘지를 주거지부근 공원으로 만드는 길밖에 없다.매장기간도 단계적으로 50년정도로 줄여가야 한다.또 현재 22%인 화장을 보다 일반화하고 여러 곳에 납골당을 설치해야 한다. 지난 93년 유림의 강력한 반대로 정부의 장례제도개선작업이 무산된 바 있다.그러나 그후 사회지도층의 호화분묘 만들지 않기운동,LG그룹회장의 사후 화장 및 납골당건립,국가 헌납선언,동국대의 대규모 영탑(납골탑)공원조성 추진 등 분위기가 바뀌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천·수백년을 전해내려온 장묘문화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그러나 오랜 관습중 좋은 의미는 살려나가되 국토의 효율적 이용이라는 현실적 요구에도 부합하는 적절한 묘지제도를 찾아 정착시키는 개선작업은 꾸준히 추진되어야만 한다.이번서울시의 한국형 납골식 가족묘방안은 그런 차원에서 현실적이고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된다.
  • 느낌이 있는 가을 인체조각전은 어떨까요

    압구정동 신세대와 잊혀져가는 모성을 그린 조각들이 초가을 감성을 돋운다. 오는 8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열리는 고정수조각전과 11일까지 인데코화랑에서 열리는 김익성조각전은 인물조각을 통해 사회상에 접근해보고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떠올리게 하는 대조적인 분위기의 볼만한 전시. 고정수조각전이 풍요로운 여인의 모습을 부각시켜 아련한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작품전이라면 김익성 조각전은 「신인류 압구정인」과 「이색지대」라는 연작을 통해 물질적 풍요속에 성장한 젊은 세대들의 정신적 결핍을 드러내는 자리다. 미발표 신작 20점 등 모두 40여점을 내놓은 고씨의 작품들은 주로 자연석을 이용한 독특한 질감의 작품을 비롯,화강암·청석·대리석등 석조와 브론즈가 주조를 이룬다.작업에 등장한 여인상은 대부분 건강하고 다부지면서도 여성다운 덕성을 담고 있다. 이에 비해 김익성전은 사회현실에 대한 작가적 관찰과 관심을 조형화해 대중매체와 영상문화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압구정동의 젊은이」들을통해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김씨는 인물표현에 정통 소조방식을 택하면서도 독특한 공간속에 신세대들을 자리매김시켜 압구정동의 젊은 남녀들에게서 흔히 보여지는 조작된 아름다움을 꼬집고 있다. 쇼윈도와 같은 기능의 좌대를 설치,인격과 존재의 존엄성마저 거래될 수밖에 없는 「상실의 시대」를 나타내는가 하면 이집트 조각에서 착안한 두상을 반복적으로 병렬한 작품을 통해 복제된 수많은 「몰개성」을 표상한다.
  • 터키탕 개명(외언내언)

    터키는 많은 관상용 꽃이 원산지이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튤립이다.튤립은 16세기후반 터키에서 유럽으로 건너간후 순식간에 각국으로 번져 17세기초 영국과 네덜란드에선 귀족이나 대상인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이제는 우리들에게도 친숙한 과일이 된 체리 아몬드 무화과 살구의 원산지도 터키이다. 커피와 커피점 역시 터키인들이 전파시킨 멋진 생활 가운데 하나이다.16세기에 오토만 군대가 퇴각하면서 빈 성문 앞에 버리고 간 커피 자루가 서양에 커피문화를 소개한 시초였으며 오늘날 빈의 카페를 세계적 명소로 만든 싹이었다. 서울주재 터키대사가 개명을 요구해 화제가 되고있는 「터키탕」은 사실 터키와 무관하다.영어엔 Turkishbath,즉 터키탕이란 말이 있긴 있다.그러나 그 뜻은 마사지 걸이 등장하는 퇴폐적인 욕탕과는 거리가 멀다.가열된 방에서 건조욕으로 땀을 내고 난후 몸을 씻는 터키식 목욕법을 일컫는 것이 터키탕이다.우리나라로 치면 한증막 같은 것이다. 터키탕은 로마탕이라고도 한다.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이 로마로건너가 성행했기 때문이다.터키의 유서깊은 도시들은 모두가 성채·모스크·광장에 곁들여 욕탕시설을 반드시 구비하고 있다.그 욕탕에선 쿠르나라는 큰 대리석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서로 등을 밀어준다.남녀혼탕이나 마사지걸은 물론 없다. 터키 요리는 다양성·영양가,그리고 세련됨에 있어서 프랑스·중국 요리와 함께 세계 3대요리로 꼽힌다.그런건 소문나지 않고 있지도 않은 퇴폐욕탕이 엉뚱하게 「터키탕」으로 판을 치고 있으니 터키인들로선 참을수 없는 모욕일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인 앵그르의 작품에 「터키탕」이 있다.술탄의 하렘에서 목욕하는 후궁들의 모습이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으로 묘사돼 있는 나체화이다. 그런 후궁들로부터 서비스를 받을수 있다는걸 연상시키기 위해 터키탕이란 이름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터키탕이란 이름은 잘못 붙여진 것이 분명한 만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 「평토장」 묘역 시범 조성/서울시

    ◎용미리 시립묘지에 3백여기 98년 보급 봉분 대신 대리석판으로 덮은 「평토장」이 선보인다.외국에서 흔히 보는 무덤 형태로 점유 면적이 적다. 서울시는 9일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용미리 시립묘지 제1묘역 5백평에 평토장을 시범 조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내년 3월까지 부지조성을 마치고 98년부터 신청을 받아 3백30여기를 안치한다. 면적이 1·5평 규모로 사체를 매장한 뒤 고인의 약력 등을 적은 대리석판이나 금속판을 덮는다. 시 관계자는 『봉분이 있는 무덤은 적어도 2·5평을 차지,묘지난을 가중시키고 있다』면서 『묘지난 해소를 위해 평토장을 시범적으로 조성,보급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시는 용미리 인근 국방부 사격장 부지 7만4천평에 대한 반환 협상이 타결되는 대로 이곳에도 평토장 묘역을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평토장 요금은 일반 분묘 사용료 1백50여만원의 절반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문호영 기자〉
  • 「외길 30년」… 조각가 강관욱씨/11년만에 대규모 개인전

    ◎90년 교수직 떠난 전업작가… 전통 기법 고수/폭넓은 작품세계… 천안·광주 등 지방도 순회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의 자양분으로 자라는 자생조각을 하겠다』는 결심아래 외길 30년을 버텨온 조각가 강관욱씨(51)가 11년만의 대규모 개인전을 갖고있다. 서울(예술의 전당,17∼28일)과 충남 천안(아라리오화랑,6월1∼16일),전남 광주(시립미술관,6월20∼30일)에서 순회전을 펼치는 그의 작품주제는 역시 「자생조각전」이다. 이 전시회는 특히 지난90년 전남대 교수직을 떠나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이후 처음 마련한 자리여서 그 치열한 작업정신에 더욱 눈길이 간다. 전업작가로 나선지 6년여.태안의 바닷가 백리포작업장에 묻혀 돌을 파는 그는 한국의 몇 안되는 굵직한 석조각가의 1인이다.화강암과 한국산 대리석을 소재로 인체와 손,바다등을 형상화한 그는 서구조각의 연마기법을 쓰지않고 정과 망치로 일일이 쪼아 마무리하는 한국의 전통 석조각 양식을 취했다. 이번 전시회의 출품작은 34점.『고통의 강에서 허우적대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작은위로가 되고 행복에 지친 안일한 영혼의 고통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는 그의 근작들은 이전보다 스케일이 커지고 작가의식이 강해졌다.주제나 내용도 예술적 범주를 넘어 사회적·인간적·역사적 메시지를 폭넓게 담고 있다. 일제시대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1937년 어느 길고 긴날」은 여체를 만지는 9개의 손으로 역사속의 추악한 범죄를 비유하며 고발한 작품으로 메시지가 강한 대표작이다.〈이헌숙 기자〉
  • 급경사 계단·엉망 표지판·여러번 환승/김포공항 승객 지하철 외면

    ◎유동인구 25만명의 4%만 이용/역∼로비 시설물 불편하게 설계/짐많은 승객 카트사용 등 못해 국제관문인 김포공항과 닿는 지하철5호선이 공항이용객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공항역에서 공항의 로비까지 이어지는 시설물이 불편하게 설계된 데다 출발지에서 공항역까지 지하철을 여러번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다. 17일 김포공항역에 따르면 5호선의 까치산∼방화구간이 지난 3월20일 개통된 이후 김포공항역을 드나드는 이용객은 하루평균 1만2천여명이다.김포공항의 유동인구(상주 3만명 포함)25만여명의 4%에 불과하다. 이용객은 짐이 없는 사람뿐이며,국제선 1·2청사로 이어지는 통로의 이용객은 드물다.외국항공사가 몰려 있는 국제선 1청사의 통로는 이용객이 아예 없다. 국제관문임을 감안해 6백억원이나 들여 역의 기둥과 바닥을 대리석으로 장식하고 인공폭포,만남의 광장,문화공간 등 최고급으로 꾸며놓은 부대시설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당초 김포공항역은 전철의 정시성과 편리성을 감안해 하루평균 4만∼5만명이 이용할 것으로 예상됐다.그래서5호선은 10분 간격으로 하루 왕복 2백14편(수송인원 7만5천여명)이나 운행하고 있다. 제구실을 못하는 첫째 이유는 공항로비까지 연결되는 시설물의 구조적인 결함 때문이다.지하에서 지상으로 연결되는 에스컬레이터의 경사가 급해 2∼3개의 짐이 있는 승객은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카터조차 사용할 수 없다. 특히 국내선 로비로 연결되는 에스컬레이터의 경우 45도에 가까운 급경사에 길이도 길어 자칫 사고의 위험성도 있다. 각종 표지판도 엉망이다.공항로비에서 전철로 연결된 지하통로가 대부분 로비의 끝에 있는데다,그나마 표지판도 잘 보이지 않아 검색대를 통과한 승객이 통로를 찾기 어렵다. 김포공항역까지의 환승역도 너무 많다.1호선을 탈 경우 신도림역에서 갈아탄 뒤 다시 까치산역에서 환승해야 하는 등 두세번을 갈아타야 한다. 김포공항역측은 『올 연말로 예정된 5호선의 2단계인 까치산∼여의도구간이 완공되면 환승역이 줄어들고 시내에서 오는 시간도 단축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그러나 2단계공사가 연내 마무리되기 힘든 데다 밤섬∼마포로 이어지는 해저터널공사 역시 난코스여서 김포공항행 전철은 상당기간 파리를 날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교통전문가들은 일본의 간사이공항 등 선진국의 경우 짐을 여럿 지닌 승객이나 외국인들이 전철을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으며 표지판 등도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이 확실하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 철령의 성주 이씨들(압록강 2천리:24)

    ◎임란때 출병한 이여송은 성주 이씨 후손/부친 이성량은 요동일대 최고 군수권자/15세손 이영 홍무때 망명,철령에 터잡아/1994년 한국종친회서 소둔촌에 비석 세워 우리는 이여송(?∼1598년)이라는 역사인물을 기억하고 있다.명나라 제독으로 방해어왜총병관이 되어 군사 4만을 이끌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무장이다.그런데 왜 이여송을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려는지 더러 의문을 가질 것이다.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조선의 성씨인 성주이씨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 성주 이씨들은 지금 요령성 철령시소둔촌에 많이 몰려 살고 있다.그리고 해마다 조상의 묘역에서 제사를 올리는데 추모 대상은 이여송과 그의 아버지 이성량(1526∼1615년)등이다.한반도에서 대대로 살아온 성주 이씨의 한 갈래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 온 것은 명나라 연호로 홍무(1368∼1398년)연간이었다.성주 이씨 15대손 이영이 죄를 짓고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철령으로 피신해왔다는 것이다. ○소둔촌 주민 거의 이씨 이영의 망명 이후 제5대손이 이여송의 아버지이성량이다.이성량은 집안이 가난하여 선조들이 세운 군공을 계승하지 못한 채 한 시절을 백면서생으로 살았다.그러다 입신의 기회를 얻어 요동 험산참장이 되었다.또 융경원년(1567년)에는 한 난리를 평정한 공으로 요동부총병의 자리에 올랐다.그 후에 몽골과 여진족을 쳐서 승진을 거듭한 끝에 만력2년(1574년)에는 요동 최고 군사지휘자인 요동총병 지위를 차지했다. 이성량 사후에는 여송,여백,여정,여장,여매등 네 아들이 총병관을 지냈고 다른 네 아들은 참장에 이르렀다.이 가운데 여백과 여매는 임진왜란 때 여송과 함게 조선에 출병하여 전공을 세웠다.그렇듯 이씨 가문이 거머쥔 병권은 대단하여 그들을 모함하는 글발이 황제에게 전해지기도 했다.그들은 실제 도읍의 한 변방을 호령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틀림 없었다. 이씨 가문의 권세가 당시 어떠했는가는 요령성 철령시 소둔촌 이성량의 묘소에서 확인되었다.소둔촌에서 약간 떨어진 산기슭 그의 묘소 입구에는 돌조각 사자상이며 석인상이 두 줄로 가지런히 늘어섰다.규모는 비록 작아도 북경 팔달령에서 정릉으로 가는 사이에 자리한 선도를 연상케 했다.선도처럼 보이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 비석이 있다. 이성량을 기린 대리석 비석은 지난 1994년 한국의 이씨종친회가 세운 것이다.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지위가 오늘날 같이 높지 않았더라면 과연 비석을 세우도록 허락했을까.여기 사는 이씨들도 한국이 보잘것 없는 나라였다면 조상에 대해 별 집착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2백여 가구 1천여명의 주민들 가운데 70∼80%가 이씨라는 이 소둔촌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가 성주 이씨를 자청했다.그러면서 비록 한족으로 살아가지만 한국의 발전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철령현 당시 부현장 자리에 있다가 퇴직한 이유한(67)노인도 성주 이씨라고 했다.그래서 철령 이씨종친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떳떳하게 성주 이씨를 내세울 수 있게 된 오늘의 처지를 고맙게 여겼다. ○누루하치와 사돈지간 『나 자신도 그동안 뿌리를 숨기고 살았습네다.그저 한족으로 행세한 거디요.집안 노인들이 가끔 이성량을 이야기하면서 성주가 본이라고떠들면 핀잔을 줬지 뭡네까.그러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부터는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절로 한국과 성주란 말이 튀어나옵데다.그 전엔 창피스럽던 것이 자랑스러워지더란 말입네다.그래서리 퇴직하고 나서 좌상들과 상의해서 종친회를 꾸몃디요』 소둔촌 이성량의 묘소는 어엿했다.봉분도 제법 커서 이성량이 묻혀있는 무덤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그런데 선뜻 납득할 수 없는 몇가지 의문점이 머리를 스쳤다.이씨들이 조상에 관심을 둔 것도 근간의 일이고 역사적으로 청나라를 일으킨 누루하치가 이성량의 무덤을 파엎었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성량은 살아 생전에 누루하치와 떨쳐버릴 수 없는 악연을 맺었다.이성량이 요동총병관으로 제수되었을 때 누루하치는 15세 소년이었다.그런데 이성량은 자신의 수하장군이었던 누루하치의 할아버지 창안과 아버지 타거를 부하의 밀고로 죽여버렸던 것이다.그 해가만력11년(1583년),누루하치는 21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있었다.천명3년(1618년)반기를 들고 마침내 명나라를 뒤엎은 누루하치는 「7대 원한」을 갚겠노라 선언했다.이성량이 첫째로 꼽힌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씨 가문과 누루하치는 사돈간이었다.이성량의 둘째아들 여백이 바로 누루하치의 조카딸을 첩으로 들였던 것이다.그러나 원한이 사무친 누루하치는 천명4년 철령성을 함락하고 이성량 일가를 붙잡아들였다.당시 해를 당한 이씨들 가운데 역사에 기록된 인물만도 24명에 이른다.누루하치 복수의 그물에 든 사람들은 죽고 더러는 도망쳤다.그래서 산동성 임저지구와 광동성 번우지구,사천성,북경 등지에도 성주 이씨들이 지금 살고있다. ○상당수 요직에도 진출 누루하치는 오늘의 중국 동북지방 쪽을 우선 통일하고 나서 수단을 바꾸었다.성주 이씨들을 등용하기 시작한 것이다.그 결과 강희(1662∼1722년)말년 청나라 왕조에서 7품 이상 벼슬을 한 성주 이씨는 자그마치 1백여명이나 되었다.요동시단의 삼노의 한 사람인 이개는 많은 시를 썼고 「상서」등의 역사책을 편찬했다.그의 저서들은 강희말년에 나온 거서「사고전서」에 수록되었다.그리고 태원지사를 지낸 이청서는 서예에 조예가 깊어 그의 「고보현당법서」네권은 지금도 중국 서법의 모범이 되고 있다. 성주 이씨들은 수 백년이 흐른 지금도 만만치 않은 존재이다.철령지구의 경우 현급 간부 14명,국급 간부 13명,과급 간부 18명이 성주 이씨로 되어있다.이들은 지난 1991년에 성주이씨 종친회를 조직하고 한국의 성주이씨 대종회와 정상적인 교류를 해왔다.그리고 「철령성주이씨보계」,「이성량종족역사기년」,「한국성주이씨중국파굴기」등을 펴냈다. 그래서인지 요령성 북령시에는 중국에서 성주 이씨를 명문으로 일으킨 이성량의 흔적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이성량과 같은 봉건 착취계급의 유산이 문화혁명과 같은 난세를 견디어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정도였다.그 하나가 명나라 신종이 명하여 만력8년(1580년)에 세운 공적비 석방이다.높이 9m,너비 13m의 누각형인데 「진수요동총병겸 태자태보령원백 이성량」이라는 글발 등이 들어있다.그리고 용문을 뛰어넘는 잉어,여의주를 굴리는 용,사슴과 꽃 등을 새겨 석방은 호화롭기 그지 없다.명나라 때 중국대륙 동북방에는 분명히 「이성령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적이기도 했다.
  • 비 새는 해인사 경판고/반영환 논설고문(서울논단)

    국보 52호 해인사 경판고에 누수현상이 생겨 천장의 회칠 일부가 떨어지는 사고가 최근 보도됐다.지붕기와의 교란으로 인한 누수현상으로 밝혀졌다.임시방편이지만 이를 막기위해 절에서는 비닐로 방수막을 씌우기까지 했다고 한다.경판고에는 세계 유일 최대의 불교경판인 고려시대의 8만대장경판이 소장돼 있다.한방울의 물은 물론,사소한 습기조차 배어나서는 안될 최적의 공간이라야만 한다. 경주 석굴암과 더불어 유네스코의 세계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대장경판과 경판고가 아닌가. ○남대문 녹색안전 띠를 문화재관리국은 최근 이탈리아의 세계적 보존과학자 조르주아 크로치박사를 초청,국내 중요문화재의 안전진단을 실시한 일이 있다.국보1호 남대문과 보물1호 동대문도 대상이 되었다.남대문·동대문은 70년대초 지하철1호선 공사때 「진동에 의한 훼손우려」때문에 논란이 많았던 건조물이다.크로치박사의 진단결과는 『현재로서는 보존상문제가 없으나 주변의 극심한 차량통행과 매연때문에 앞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그는 남대문에서는 차량의 근접통행을 막기위해 폭5m 정도의 녹지 안전띠를 설치하도록 건의했다.오늘의 붕괴위험이 아니라 10년·20년뒤에 올 유적의 수명단축을 우려한 지적이었다.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고 할 경주 첨성대가 기울어 경주시는 얼마전 인접 도로를 폐쇄한바 있다.현명하고 적절한 조치였다.1천3백년의 풍상을 겪어온 첨성대가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것이다. ○개발과 문화재의 충돌 유적의 도시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차량의 배기가스에 의한 유적의 훼손을 막기위해 지난 봄 모든 자동차의 도심진입을 금지시켰다.이탈리아 로마에서는 아황산가스 배출을 철저히 규제하고 있다.석조물,특히 대리석 유적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대기오염,산성비등은 문화재의 부식을 급속도로 촉진시킨다.문화재의 보존관리가 그만큼 더 어려워졌음을 뜻한다. 문화재는 민족문화의 유산이며 인류문화의 총체적 자산이다.그러나 전쟁과 개발,무지와 무관심에 의해 문화재는 파괴되고 훼손된다.지난 60∼70년대 우리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은 한심한 정도로 수준이하였다.통영 세병관입구의 돌 벅수(중요민속자료)의 얼굴에 수염과 붉은 입술을 그려 넣었고 한산도 제승당의 오래된 현판은 대통령친필 현판에 밀려났다.서울 석촌동 초기백제시대의 거대한 적석총의 돌을 캐내 서울시가 샛강 둑을 쌓을 정도였으니까. 70∼80년대에는 대대적인 문화재 보수사업이 추진된 반면,개발과의 상충으로 문화재보호에 시련을 겪었다. 국토개발과정에서 적절한 발굴조사없이 유적지가 파괴되고 교란된 사례가 허다하다. 경부고속철도 노선의 경주 도심통과를 둘러싸고 건설교통부와 학계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도 개발과 보존의 대표적 충돌이라 하겠다.이런 충돌은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문화재보존이 언제나 개발에 밀려났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해인사 경판고 누수는 당장 경판에 피해를 주지는 않을지 모른다.그러나 5년이나 10년뒤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이 될 가능성은 있다.최근 문화재보존은 오늘의 붕괴·파손위험이 아니라,내일의 위험을 예방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사실 오랜 세월의 이끼가 묻은 문화재는 허약할대로 허약한 노약자나 어린이와 다름이 없다.그냥 내버려두면 조만간 수명을 다하거나 혹은 수명이 단축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막기위한 예방적 진단과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설마 무슨일이 일어나랴」고 방심하다가 문화재에 치명적 손상을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적극적 보호의지 필요 올해 문화재관리국이 추진하고 있는 국보·보물 보수는 57건 65억원에 불과하다.그동안 보수정화사업이 많이 진행됐다 하더라도 이는 너무 빈약한 예산규모다.문화재는 훼손의 정도가 눈에 띌 정도면 이미 늦은 것이다.지속적이고 과학적인 정밀진단을 통해서 위험의 징후를 사전에 발견하고 적극적인 예방대책을 세워야 한다.
  • 이탈리아서 조각수업 지경수씨(인터뷰)

    ◎첫 고국전서 대작 「숲」 4천만원에 판매/“나무모양 대리석 촉탑 2백개로 구성” 대리석조각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어렵게 공부하며 작업하고 있는 가난한 젊은 조각가가 최근 고국에서 첫 개인전을 갖고 뜻밖에 4천여만원 상당의 대작을 판매,미술계의 화제가 되고있다. 주인공은 현재 카라라 국립아카데미에 재학중인 지경수씨(33). 대리석조각으로선 그 규모를 상상하기 힘든 대작 「숲」이 한 애호가의 눈을 사로잡아 그 자리에서 팔렸고 작품은 용인에 있는 태영골프장에서 웅자를 드러내게 된다. 작품 「숲」은 가로·세로 12㎝ 굵기에 높이가 1m20㎝부터 2m까지의 대리석 촉탑 2백개가 모인것. 정갈하게 다듬은 밑둥우리위에 나무가지 형상으로 깎아지른 집합체. 카라라 국립아카데미의 지도교수는 현지에서 그의 작업을 보고 『네 작업에 관해선 모든 정의가 내려졌다.더이상 할 말이 없다』고 극찬을 한 작품이다. 지난 88년 홍익대 조소학과를 졸업한후 예술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카라라 유학길에 올랐으나 대학에 입학할 돈이 없어 처음 2년간은 돈벌이를 찾아 헤맸다. 93년에 겨우 국립아카데미에 입학은 했으나 힘들기는 마찬가지.『돈이 없으면 비참한 기분도 들지만 작업을 하기는 훨씬 나아요.잡생각없이 작품만 하면 최고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지난해 현지에서 비로소 첫 개인전을 가진데 이어 올 9월중순 첫 고국전을 펼친 그는 서울에서의 첫 발표를 위해 고민끝에 탄생시킨 작품이 바로 「숲」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카라라로 온 아내가 올해초 아기를 갖자 솔직히 제마음은 더 막막해졌습니다. 우리 아기가 태어나면 우유를 넉넉히 살 수 있어야겠다는 희망아래 작업에 묻혔는데 제 가족의 꿈을 고국에서 풀어준 것 같습니다』 이번 갤러리메이에서의 개인전(9월 15∼25일)에는 카라라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일반적 형태인 섬세하고 서정적이고 아기자기한 「나무」연작을 선보였고,엉뚱한 형태의 대작 「숲」은 전시장의 여건상 70여덩어리만 전시장 구석에 세워놓았다. 『카라라로 돌아가면 「숲」의 작업을 계속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3백50덩어리를 만들었는데 1천덩어리를 채울겁니다. 이 작품은 숫자와 위치에 관계없이 자리를 꾸밀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씨는 앞으로 2년정도 더 카라라에서 대리석과 씨름한후 고국에 돌아올 계획이다.
  • 석재 폐수방류 3명 수배

    폐수를 무단방류하거나 무허가 폐기물처리장을 만들어 불법매립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서울 남부경찰서는 22일 석재를 가공하면서 생긴 폐수를 무단방류한 유병훈씨(47·서울 강서구 화곡5동 925) 등 석재 가공업자 3명에 대해 수질환경보전법 위반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섰다. 유씨는 지난 94년 9월 서울 금천구 독산1동에 「대우석재」라는 2백평 규모 공장을 차린뒤 수냉식 재단기와 연마기 등을 갖춰 놓고 화강암·대리석 등 석재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하루 평균 4백1t의 폐수를 안양천에 흘려 버린 혐의를 받고 있다. 서울 마포경찰서도 이날 자연녹지에 무허가 폐기물 처리장을 차려놓고 콘크리트와 철근 등 폐건축자재를 불법으로 매립한 강기윤(40·폐기물수집업·서울 양천구 신월동)씨등 2명을 폐기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긴급구속했다. 강씨는 지난 8월5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529 1천5백여평 규모의 녹지대에 「나루터 개발」이라는 폐기물 수집상을 차린뒤 공사현장에서 나온 폐자재를 2.5t 트럭 1대당 5만원씩 받고 매립하는 등 지금까지 8백여t을 불법 매립해 4천5백여만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있다.
  • 유형의 수도 이르쿠츠크(시베리아 대탐방:34)

    ◎왕정반란 「12월 당원」들의 마지막 안식처/유형 온 주모자가 살았던 주택을 박물관으로/앙카라 강변엔 17세기 「시베리아 정복탑」 우뚝 이르쿠츠크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물은 앙가라강변에 세워진 시베리아 정복탑이다.총독청사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오벨리스크다.동진하던 러시아 정복자들은 17세기말 이곳에 이르러 가쁜 숨을 내쉬고는 잠시 정복의 발길을 멈추었다.그리고는 이곳에 높이 10여m의 대형 정복탑을 세워 그동안의 공적을 자축했다.정복의 상징인 대형 쌍독수리 문양 아래 모라비요프·아무르스키·스페란스키 등 정복자들의 이름이 쓰여져있고 「시베리아 정복자들에게 영광있기를」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철도 개통… 도시 부흥 이르쿠츠크는 1686년 정식 도시가 된 뒤 성장을 거듭,1764년에는 이르쿠츠크 구베르니(주)의 수도가 됐다.그러나 도시발전의 진짜 전기는 1898년 시베리아철도가 이곳을 통과하면서 찾아왔다.따라서 3년 뒤면 동시베리아 철도가 개통된지 1백주년이 된다.당시 이곳은 주도 였기 때문에 동시베리아의 철도업무를 이곳에서 관장했다.관공서 거리였던 칼 마르크스거리에는 당시 이르쿠츠크·부리야티·치타주의 철도를 총괄하는 동시베리아 철도청이 있었다.4층짜리 대형 대리석건물인데 혁명 전 세워진 건물원형에다 혁명 뒤 소비에트식 건물장식을 곳곳에 덧붙이고 역시 혁명성이 강한 대리석 조각까지 건물상단 곳곳에 만들어 붙여서 연대불명의 이상한 건물이 돼버렸다.시베리아 곳곳에 이런 식으로 옛건물에 사회주의 장식을 덧붙여 건물의 원형을 훼손시킨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르쿠츠크는 혁명 전 러시아 유형의 수도였다.특히 1825년 왕정에 반대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던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 주모자들 대다수가 이곳으로 유형 와 생을 마쳤다.사회주의 시절 볼셰비키들은 이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혁명의 시작이라고 추앙했다.그래서 이곳은 혁명의 성지 같은 곳이 됐다.당시 데카브리스트들이 유형 와 거처했던 집을 개조해 박물관으로 만들고 성역화해 놓은 이들의 무덤이 곳곳에 있다. ○교회에 구경꾼들 몰려 제르진스키거리에있는 「돔 무제 데카브리스트」는 1826년부터 30여년간 12월당 혁명주모자들 수명이 유형생활을 했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민 대표적인 명소다.12월당 혁명은 1825년 알렉산더 1세가 후사 없이 죽고 그의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뒤를 이어 즉위할 즈음에 일어났다.당시 군대내에 왕정폐지를 주장하던 비밀결사조직인 12월당원 5백여명이 「새 차르즉위 반대,공화정 수립 지지」를 내걸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나드광장에서 무력저항을 시작한 것이다.25년 12월14일 하오3시 직후였다.물론 이 저항은 왕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분쇄됐고 이후 주모자 5명은 처형되고 나머지 주모자급 1백28명이 모두 시베리아로 유형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이들은 중죄인으로 유형지에서도 모두 죽을 때까지 카타르가(쇠족쇄)를 차고 살아야했다.박물관 자료에는 당시 12월당원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북 소사이어티」와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남 소사이어티」등으로 나뉘어 이미 광범위한 비밀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박물관,그들의 무덤이 있는 교회입구에는 반드시 늘어서서 여행객들을 맞는 불청객들이 있다.바로 구걸꾼들.입구의 좌우로 10여명씩 늘어서서 연신 성호를 그으면서 자비를 구하는 데 도저히 그냥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이들을 위해 잔돈을 준비하는 것도 신경써야 할 일이다. 이르쿠츠크는 폴란드인들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도시다.제정 러시아시절부터 러시아에 이주해온 폴란드인의 정신적 수도 같은 곳이고 폴란드인들의 대성당이 이곳에 있다.시베리아 폴란드인들도 유형 와 정착한 사람들이다.나폴레옹시대가 지난 1861년 당시 바르샤바가 있는 동폴란드는 러시아영토였다.1861년부터 63년까지 폴란드인들은 거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그러나 이 독립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1만여명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왔다.이들의 주유형지가 바로 이르쿠츠크였고 그들의 친척·후손들이 지금도 이 일대에 모여살게 된 것이다. 주청사 바로옆 「폴란드혁명거리」에 위치한 폴란드성당인 「성모 무염시태(무염시태)성당」도 1884년 이들이 세운 것이다.소련시절 교회가 폐쇄된 채 국유화돼 시립 파이프오르간 연주장 등으로 쓰이다 지난해말 건물 일부가 폴란드신도들에게 되돌려졌다.폴란드에서 파견돼온 베르다벳다라는 젊은 수녀는 현재 이르쿠츠크 오블라스치(주)에 약 3천여명의 폴란드인이 사는 데 매주 3백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해 미사를 올린다고 했다.이곳 뿐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크라스노야르스크·옴스크 등 시베리아 여러 곳에 폴란드성당이 있는 데 하나 같이 교회건물 반환문제를 놓고 러시아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다. ○폴란드 혁명거리로 모스크바에도 많은 폴란드인이 살고 폴란드 성당이 2곳 있는 데 이들은 시베리아 폴란드인들과는 또 다른 이주배경을 갖고 있다.우크라이나·벨로루시 등 서부러시아는 과거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다.당시 그곳에 살던 폴란드인 다수가 모스크바로 옮겨가 살았다.특히 폴란드인들은 교육열이 높아 모스크바의 각종 대학·인스티튜트(단과대학)등에서 공부했다.소련시절에는 모스크바 거주 폴란드인수가 10만명을 넘었다.모스크바의 가톨릭교회도 소련시절 국유화됐는 데 최근 반환을 요구하는 폴란드인들과 시정부가 맞붙어 유혈충돌까지 벌어졌다.모스크바 폴란드성당건물은 외양만 교회이지 시정부에서 건설회사 사무실로 사용해 내부는 완전히 일반 사무실처럼 바뀌어 있다.러시아전역이 마찬가지지만 국유화된 교회는 이렇게 사무실로,창고로,때로는 감옥으로도 바뀌어 철저히 파괴됐다.모스크바의 폴란드성당은 몇개월 전 건물일부가 반환돼 폴란드인들과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외국인 가톨릭신자들이 그곳에서 미사를 본다. 이르쿠츠크의 폴란드성당 멀지 않은 곳에는 주청사건물을 비롯한 정부청사들이 들어서있다.시베리아의 각 도시들이 마찬가지지만 주도에는 주청사·지방의회·지방선거위원회 등과 함께 연방대통령 대리인의 집무실이 나란히 들어서 있는 게 흥미롭다.93년말 새헌법 채택으로 지방정부의 자치권을 대폭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들로 임명하는 지방관을 보내 주정부의 일을 감독·감시토록 하는 것이다.그래서 주민이 선거로 뽑은 주지사·시장과 이 대통령 대리인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
  • 불 베르사유 궁전(세계의 명소/걸작건축감상:22)

    유럽에 첫 나들이를 가는 여행자들은 우선 파리에 대한 기대감에 젖게된다.그러나 파리에 첫 발을 딛게 되는 순간 「프랑스 혁명」의 대상이었던 화려한 왕궁문화의 흔적은 눈에 보이지 않고,낮게 펼쳐진 소박하고 아담한 가로의 표정을 접하고는 왠지 실망감 마저 느끼게 된다. 파리는 「로망스」라는 그들의 노랫말처럼,『파리라는 말이 「로맨스」를 뜻하고,파리는 그어떤 사람의 것도 아니지만,갖기를 원하면 언제나 당신의 것이 될수 있는』 서정적 모습이다.물론 파리가 「도시화」나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이렇듯 본연의 모습을 지켜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파리의 건축법은 매우 까다롭기로 소문이 난지 오래다.모든 공간은 문화재 차원에서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집 안팎을 뜯어 고치는 행위는 그들에게 파리의 역사와 문화에 도전하는 무모함으로 받아 들여질 것이다.그러나 파리 여행코스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베르사유 궁전 관광」에 나서보면 파리에서 느낀 정서적 분위기와는 완전히 딴판의 무대,즉 사치의 극을달리는 귀족문화의 현장에 들어서게 된다. ○왕권의 상징적 건물로 베르사유 궁전은 1623년 루이13세의 계획으로 시작되어 2백년간에 걸쳐 증·개축 되었다.처음에는 파리 서남쪽으로 약 20㎞ 떨어진 곳에 「사냥」을 위한 별궁의 형식으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그후 귀족계급이 몰락할 때까지 지속된 왕권의 상징적인 과업이었다. 관광버스가 루브르 박물관 옆의 발착장을 출발하면 베르사유 궁전의 역사에 대한 안내방송이 시작된다.재미있는 것은 프랑스인 그들이 타도한 귀족문화의 상징을 세계인을 상대로 판매(?)하는 어색함에 대한 그들다운 변명의 방식이다.만약 자신들의 『우리의 선조는 이렇게 혹세무민을 하였던 것입니다』라고 하면 누워서 침뱉는 일이 될 것이고,『이렇게 훌륭한 건물을 짓고 잘 살았습니다』하면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 될 터이니 그들도 나름대로 요리조리 궁리를 했음에 틀림없다.안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프랑스인들은 이들 귀족의 사치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이제와서 보면 이들 귀족은 베르사유궁전이라는 명작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줌으로써 막대한 관광수입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그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은 결국 당시의 국민 세금으로 후대를 위해 저축을 한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라는 절묘한 넋두리가 일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베르사유 궁전은 사냥용 별장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신축 당시에는 아주 평범한 작은 별장이었다.그러나 이후 확장을 거듭해서 지금은 전체 면적이 1백50만평에 이르고 있다.수렵광으로 알려진 루이13세는 6개 정도의 방이 있는 이 작은 궁전에 소동물원을 만들었다.이곳에서는 초기에 좀처럼 구경할 수 없었던 타조나 펠리컨등 진기한 조류가 사육되었는데,점차로 동물의 종류도 다양해져서 낙타나 코끼리도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한다.절대권력과 파탄적 귀족문화 공간의 초기 모습이 「진기한 동물원」이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화려한 분위기에 매료 루이 14세에 이르러 베르사유는 당대 최대의 궁전이자 귀족들의 공동주택으로 변모한다.당시의 상황에서 귀족들은 매일 아침 자신의 집을 출발하여수십리 떨어진 베르사유의 제왕에게 충성을 서약한다는 것이 큰 고역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요즈음 말로 「눈도장」찍는 고달픈 일과를 겪고 있던 것이다.그들은 궁전의 규모를 키워가면서 객실수를 대폭 늘려잡아 자신들의 거처를 확보하는 묘책을 택했다.이때부터 베르사유는 「귀족 아파트」가 되었고 밤낮으로 연회가 열렸으며,이른바 「귀족의 반항」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시초까지 가장 사치스러운 축제공간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베르사유는 지탄받아야 할 타락의 상징임에 틀림없다.그러나 궁전 건축에 동원된 당시의 건축술에는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예술성과 정교함이 가득하다.목욕탕에는 18세기 당시에 이미 보일러를 이용해서 가동되는 독립된 급탕설비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벽화 이외의 건축재료는 천연석을 정교하게 조합하여 사용함으로써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퇴색되지 않은 선명한 색상을 간직하고 있다.특히 대리석과 유리가 조화된 실내는 낮에는 자연채광을 구석까지 고루 반사시켜 주며,밤이되면 샹들리에 빛을 받아 보석같은 분위기를 연출해준다. 혁명후 베르사유는 무용지물이 되었다.그러나 결코 「폐허」로 변하지는 않았다.혁명가들은 부패한 절대권력의 상징인 이 건물을 파괴하지 않고 고스란히 보전하는데에 동의했다.그들은 단지 일부의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를테면 백합꽃이나 왕관등을 없애버리는 것으로 만족했다.가구나 장식품은 경매에 부쳐졌다. 빈집이 된 궁전은 19세기에 들어서 루이 필립왕에 의해 프랑스역사박물관으로 변모되었다.그리고 이곳에 프랑스 건국에서 근대까지에 이르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수천점의 벽화와 조각으로 전시하였다.전시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칸막이 벽을 변경하고,전시품을 제작하는데만 4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로코코시대」전기 이뤄 베르사유를 떠난 귀족들은 각자 자기집으로 돌아갔다.이들은 베르사유의 화려함에 대한 향수를 달래며 그동안 방치했던 자신들의 집을 단장하기 시작했다.곳곳에서 주택의 설계와 증·개축,인테리어공사가 활발해졌다.베르사유 궁전의 장식적 분위기에 집착한 이러한 경향은 건축사적으로 「로코코」시대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지켜보면서 후련함과 아쉬움이 교차한다.물론 총독부 건물과 베르사유 궁전은 타락한 선조의 유산이 아니라 침략자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하지만 역시 우리 땅에서 우리의 피땀으로 시공된 우수한 건축물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우리 것을 찾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단순 해체로만 만족하지 말고 해체과정을 기술 발전의 계기로 삼기위한 지혜와 노력이 더욱 가치있는 것이 아닐까.아울러 우리의 궁전 건축 유산을 보전하기 위해서 입장을 제한하는 방식의 「보호」그 자체 보다는 당시의 기술적·예술적 지혜를 현대에 널리 활용할 수 있는 발전적인 개방의 장으로 관리해나가기 위한 발상의 전환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 묘지문화도 예술/불서 묘비조각 이색전

    ◎파리 역사도서관서 새달 17일까지 열려/쇼팽 등 유명인사 정신세계 깃들여/신고전·낭만주의 조각양식 한눈에 「묘지문화도 예술이다.」프랑스 파리에서 이런 기치아래 장례예술이라는 이색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전시회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납량물이 아니라 예술차원에서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시회에 가면 페르 라셰즈·몽마르트·몽파르나스 등 파리시내에 흩어진 묘지를 다 둘러보지 않아도 프랑스 묘지 조각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파리9구 말레르거리 22번지 파리시 역사도서관에서 오는 9월17일까지 열리는 전시회 정식명칭은 「대리석의 기억」.살아있는 사람들이 고인에 대한 기억을 초상화나 사진이 아닌 대리석으로 된 묘비로 더욱 영속화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듯하다. 프랑스 현대미술을 이해하려면 파리의 묘지는 꼭 한번 들러야 하는 곳으로 꼽힌다.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조각양식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묘지의 비석들이다.이른바 「노천 박물관」인 셈이다. 묘지라는 이유만으로 음침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지만 파리의 묘지는 비교적 깨끗하게 단장돼 있어 그런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자신이 좋아하는 유명인사의 묘를 찾아 그의 정신세계를 음미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곳이다. 아니면 마로니에 잎이 질 때쯤 묘지의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우수를 감상하는 로맨티스트들이 자주 들른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됐고 우아한 묘지로 꼽히는 페르 라셰즈에는 극작가 몰리에르,샹송의 대가 에디트 피아프,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등이 묻혀 있다.또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비극배우 사라 베를하르트,영화배우 이브 몽탕 등의 묘지앞에 서면 그의 작품세계가 또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쇼팽의 친구이자 조각가인 오귀스트 클레징거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예술로 승화,「울고 있는 음악」이라는 조각을 남겼다.이밖에 「울고 있는 여인상」「영광스러운 군인」「자비로운 천사」 등의 조각들도 있다. 18 99년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로메가 조각한 「사자의 비」는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로 꼽힌다. 몽파르나스 묘지에는 소설 「비계덩어리」의 기 드 모파상,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보들레르 등의 묘비가 있다.몽마르트 묘지에서는 독일 시인 하이네,러시아 무용가 니진스키 등과 만날 수 있다. 로댕미술관장 앙트안느 르 노르망 로맹씨는 『조각은 망각과 싸워 이기는 방법의 하나이자 고인을 다시 살리려는 노력』이라고 밝히고 있다.로맹씨는 『고인과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을 중개하는 곳이 바로 묘지』라며 『고인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하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가 묘지조각을 본격적으로 보호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초부터.특히 당시의 조각가 데이비드 당제르는 묘지비석으로 조각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그러나 이제 프랑스에는 비싼 대리석으로 된 묘지를 세우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 경복궁 점거 70년만에 사라지는 일본총독부

    ◎중앙돔 첨탑부터 헌다/광복 50주년 맞는 오는 「8·15」기념행사/석조건물 내년까지 모두 해체/첨탑 다이아톱으로 둘로 절단/9월 독립기념관에 옮겨 보관 일본 식민지 통치의 상징인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오는 8월 15일 중앙돔 첨탑 철거를 시작으로 해체되기 시작한다. 문화체육부는 29일 제50주년 광복절인 오는 8월 15일 상오 9시,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조선총독부의 중앙 돔 첨탑을 철거,건물의 해체작업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이날 철거식에서 주돈식 문체부장관이 건물의 해체를 조상에 알리는 고유문을 낭독한뒤 첨탑을 제거하게 되며 제거된 첨탑은 박물관 광장에 보관했다가 오는 9월중 독립기념관으로 이관 보존된다고 문체부는 설명했다.첨탑 철거행사는 50주년 광복절 기념행사의 하나로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된다. 첨탑 철거는 현대건설 계열사인 철거전문회사인 산천개발이 시공을 맡는다. 산천개발은 첨탑 철거를 시작으로 현 박물관이 조선왕궁역사박물관으로 이전한 후인 내년 상반기부터 건물에 대한 본격적인 철거작업을 벌여 내년말까지는 완전 철거할 예정이다. 산천개발의 해체방법에 따르면 전체 돔을 두 부분으로 절단해 대형크레인으로 지상으로 끌어내린다는 것. 직경 3·5m,높이 8·5m의 첨탑은 전체 구조가 철근 콘크리트와 동합금으로 돼 있어 총무게가 35t에 이른다.이 가운데 해체되는 부분은 최상층부 10·5t과 중하단부 15t등 모두 25·5t.산천개발은 첨탑이 설치된 지점의 높이가 지상 35m나 되어 첨탑무게를 고려해 2개 부분으로 절단한후 안전하게 따로따로 철거할 방침이다. 절단에 쓰이는 다이아몬드 줄톱은 직경 1㎝의 강선에 다이아몬드 가루를 입힌 기계로 산천개발은 이를 모터에 연결,고속회전시켜 첨탑을 두동강낸다. 그 후 본관 석조 건물은 압쇄식으로 6개월에 걸쳐 철거된다. 철거에 앞서 8월 1일부터 5일까지 건물위에 절단 기계인 다이아몬드 줄톱을 설치하며 5일부터 10일까지 시운전을 거쳐 10∼14일중 실제 절단작업을 벌인다.광복절인 8월 15일 상오 기념식장에서는 이 절단된 돔을 들어내 역사적인 종말을 알리는 셈이다.구 조선총독부건물은 일제가 1926년 건립한 석조건물로 계획대로 작업이 진행되면 오는 96년말 70년만에 지상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된다. 문체부는 이 건물을 철거하기 전 완벽한 실측을 실시하고 기존 모습과 해체과정을 영상물등 다양한 기록으로 남길 계획이다.또 건물의 이오니아식 원주,중앙홀 대리석,2층계단등 보존가치가 있는 10여개 부분의 자재는 용산부지에 오는 2010년까지 건립될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전시·교육자원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 우랄산맥을 넘어(시베리아 대탐방:22)

    ◎유럽·아시아의 분수령… 정상엔 경계비 우뚝/모스크바 떠난지 30여시간만에 첫 기착/140만 인구 에카테린부르크에 여장 풀어/2차대전뒤 군수공장 대거 이전… 산업 중심지로 우랄의 역사는 곧 옛날 러시아 정복자들의 침략사다.침략은 15세기에 시작돼 16세기에 마무리됐다.철길 대신 카마강의 물길을 따라 동진해온 러시아 정복자들은 페름주와 스베르들로프주의 경계지대인 우랄 산자락까지 와서 그곳에서 산맥을 넘었다.그리고 우랄북쪽에서부터 도시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도시는 카마강변의 솔리캄스크.「카마강의 소금채취장」이란 뜻을 가진 마을이다.우랄산맥을 넘어 에카테린부르그 북쪽에 베르하투라가 두번째로 건설됐다.「투라강 상류의 마을」이란 뜻.정복자들은 이후 투라강을 따라 동남진하며 70∼80여개의 도시를 건설해나갔다.피터대제는 메탈 매장량이 많은 이곳에 작은 금속공장을 계속 만들었다.튜멘주의 수도 튜멘은 투라강이 시베리아철도와 교차하는 지리적 요건 덕분에 융성한 대표적 도시가 됐다. ○피터대제 부인 이름 따 도시건설은 두 갈래 방향에서 추진됐다.하나는 메탈공장 건설이고 다른 하나는 상업중심지를 만드는 것이었다.1720년대에만 17개의 새 공장이 우랄에 건설됐다.스베르들로프스크주의 두번째 도시 니즈니타길도 이때 건설됐고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페르보우랄스크도 이때 세워졌다.그러다가 드디어 1723년 모든 우랄공장의 총괄본부로 에카테린부르그가 건설됐다.정숙한 피터대제의 부인 에카테리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에카테린부르그로 진입하기 전 만나게 되는 명물은 페르보우랄스크의 유럽·아시아 분수령에 서 있는 대리석 경계비. 우랄의 산정역 베르시나역을 지난 뒤 5㎞,모스크바에서 1천7백77㎞ 떨어진 지점에 이 오벨리스크는 서 있다.철로에서 불과 10여m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높이 7∼8m의 수수한 돌조각물 상단에 「아시아·유럽」이라고 쓰인 선명한 글씨가 두 대륙의 경계를 알린다.승객들은 차창가에 몰려 이 역사적 기념물을 카메라에 담느라 법석이다. 러시아인들도 이 산정 경계를 우리와 똑같이 「바다라즈젤(분수령)」로 부른다.산정에서 물이 한쪽은 유럽으로 다른 한쪽은 아시아로 흘러들어가는 말뜻 그대로 분수령인 것이다.추사바야강은 왼편 유럽으로 흘러들어가고 타길·네바·살바·투라강 등은 아시아로 흘러들어간다. 페르보우랄스크에는 유난히 금속튜브공장이 밀집돼 있는데 1920년대 우랄에서 첫번째 튜브생산품이 이곳에서 나오자 이를 기념해 「페르보우랄스크(우랄에서 첫번째)」라고 부른 것이 그대로 도시이름이 됐다. ○금속튜브 공장들 밀집 이곳에서 50㎞를 더 나아가 마침내 스베르들로프주의 수도 에카테린부르그역에 도착했다.모스크바를 출발한지 꼭 29시간30분만에 처음으로 짐을 꾸려 기차에서 내렸다.이웃들이 모두 복도로 몰려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91년 도시이름을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에카테린부르그로 바꾸면서 주이름은 그대로 두어 다소 혼란을 일으킨다.이름을 바꾼 이유는 스베르들로프가 볼세비키의 이름을 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혁명 뒤 볼셰비키들의 총애를 받아 번창한 전형적 사회주의 행정·산업중심지이다.현재 인구가 1백40여만명에 이르는 우랄의 비공식 수도이다.1723년 이셰치강변의 작은 메탈공장으로 도시가 출범한 이래 우랄지역 각종 광산들의 관리소가 이곳에 들어섰다.그러나 혁명 전까지 우랄의 행정·지리적 수도는 페름이었고 이곳은 단순한 산업도시 기능만 했다.이를 볼세비키들이 혁명 뒤 모든 행정·문화중심을 이곳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그것은 옛 전통을 끊고 프롤레타리아의 새 전통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이곳은 반혁명부대인 체코백군의 본거지가 됐던 곳이다.혁명 뒤 23년 이곳을 우랄의 행정수도로 정하면서 볼셰비키들은 그 이듬해 도시이름을 스베르들로프로 바꾸었다.그 뒤 극장·박물관·대학·과학아카데미·연구소 등이 줄이어 들어서기 시작했다.2차 대전중 모스크바,레닌그라드 등 유럽쪽에 있던 군수공장들이 대거 이곳으로 피난와 본격적 산업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소비예트 시절 시베리아에는 크게 두가지 타입의 도시가 존재했다.하나는 오랜 학문·예술전통을 가진 도시들로서 페름·옴스크·톰스크 등이 바로그들이다.이들은 혁명 뒤 볼세비키정권에 의해 무대 뒷전으로 밀려나 과거의 명성을 잃게 된다.다른 하나는 새로 각광받은 노동자 도시들이다.에카테린부르그·노보시비르스크·이바노바 등이 단적인 예이다.오랜 정치·문화·학문전통을 억누르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전통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거역할 수 없는 판도의 역전이었다. ○옐친이 태어난 곳 지금 크렘린의 안방을 차지한 사람들은 「스베르들로프 마피아」들이다.옐친 대통령을 비롯해 일본의 옴진리교로부터 뒷돈을 받고 이들을 러시아로 진출시켜주었다는 로보프 안보위서기와 부르불리스 장관 등이 그 멤버들.이외에 15∼20명의 이곳 출신 인사가 현재 옐친 주위에서 일을 하고 있다.옐친 대통령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동쪽으로 1백㎞ 떨어진 스탈리차에서 출생해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에카테린부르그시당 제1서기,주당 제1서기를 거친 다음 고르바초프가 불러올려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에카테린부르그는 예부터 돈많은 광산주들이 많았던 탓에 대부호의 저택들이 유난히많이 남아 있다.또 전형적인 우랄 통나무집들도 곳곳에 보존돼 있다.이들 전통가옥들이 스탈린시대 때 건설된 웅장한 대리석 건물들과 조화를 이뤄 매우 아름다운 도시풍경을 만들고 있다.전형적인 우랄 통나무집은 보통 2층인데 1층은 반지하로 만들어 시멘트,돌 등으로 아주 견고하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겨울에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지반이 흔들리는데 대비하기 위함이다.거기다 창문주위에 갖가지 문양을 새긴 나무장식을 해놓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우랄사람들은 이 창문장식을 「날리치니키(얼굴)」라고 부른다.집의 얼굴이라는 뜻. 쨍쨍 내리쬐는 5월의 햇살 속에 거리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굵은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갔다.우리가 「여우비」라고 부르는 이 자연현상을 우랄사람들은 「버섯비」라고 불렀다.이 비가 지난 뒤면 숲의 버섯이 쑥쑥 자라기 때문이다.
  • 자살한 북경 전 부시장 왕보삼/백40억짜리 저택 건립/홍콩지 폭로

    ◎욕실 수도꼭지 1개값 1백만원 넘어/방은 대리석·고급 수입원목으로 치장 왕보삼 전북경부시장이 자신을 위해 건설한 1백40억원짜리 초호화저택이 북경 서북부의 유명한 명승지 향산언덕에 위치하고 있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가 8일 천연색사진과 함께 폭로했다. 이 초호화저택 현관을 경비하고 있는 경비원은 『왕보삼이 이 호화저택에 인민폐 1억4천만위안 또는 그 이상을 사용했다』고 밝히고 『방들에는 대리석과 외국에서 수입한 고급나무가 깔려 있고 목욕탕 수도꼭지들은 하나에 1만위안(약 1백만원) 이상씩 들었다』고 말했다. 포스트는 이 호화저택 현관 앞에는 둘레 27m에 이르는 풀이 있고 풀중간에 대형분수가 있으며 그 뒤에 값비싼 4개의 백색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호화저택이 서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비원들은 이 호화저택 내부에는 정자가 들어선 다른 건물과 정원도 있다고 밝혔다. 이 지역 주민은 이 호화저택 건설용 토지는 지방정부가 무료로 주었고 건설자금은 왕보삼이 댔으며 건설이 93년에 시작돼 왕이 지난 4월 권총자살하면서 완공직전 중단됐다고 밝혔다. 북경시정부 소식통들은 왕이 정부와 즐기는 것을 질투한 그의 부인이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에 고발하면서 파멸의 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시정부 소식통은 왕은 북경전시대(TV)의 여자 뉴스 캐스터와 놀아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사업을 하도록 인민폐 4천만위안(한화 약40억)을 주었으며 이를 알게 된 부인이 분노를 느껴 그의 유죄를 입증할 많은 자료를 가지고 당기율검사위원회를 찾아갔다고 말했다.
  • 코트디부아르 「평화의 성당」(세계의 명소/걸작건축 감상:19)

    ◎3년만에 건립한 세계최대 성전/콘크리트 기둥·대리석을 조립식으로 축조/“영혼없는 건축”… 집권자의 과대망상적 산물/높이 170m 총33만 8천여명 동시 미사참여 가능 명지대학교 최재필 지금은 작고한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라는 제목이 붙은 일련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에 대해 새삼 경탄을 하게 된다.김환기화백의 그림은 그저 조그만 네모와 그 속의 점들이 커다란 화폭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다.이 그림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이거 뭐 이래? 애들 장난같잖아』하는 반응을 보일는지 모른다.아무런 뜻도 없는(다시 말해서 의미있는 형태가 아닌)그저 조그만 무늬의 반복은 시정 아낙네의 치마폭에 인쇄된 무늬와 무엇이 다를까 하고 느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김화백이 네모 하나하나,점 하나하나를 캔버스에 그리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자.김화백은 노년이 되어 마지막으로 그 큰 캔버스에 네모 하나,점 하나를 찍으며 그간 그의 일생에서 스쳐지나갔던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만나서 좋았던 사람.이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젊었을 시절 신세를 졌던 사람.김화백은 네모 하나 점 하나를 그려가며 이들과의 추억을 되살리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리라.밤이 새도록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작업을 하던 어느 날 새벽 그 넓은 캔버스에 이제는 더 채워넣을 공간이 남지 않았음을 발견했을 때,그는 그가 그동안 보냈던 삶의 전부가 이 한장의 캔버스에 녹아들어 있음을 확인하며 탈진한 그의 육체를 뛰어넘는 초월의 경지를 느꼈으리라. ○규모 웅장… 감동은 없어 바로 이런 것이 예술품의 가치가 된다.이러한 가치는 비단 미술품에 그치지 않는다.건축도 마찬가지다.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건축물도 이것이 땅 위에 굳건히 서게 되기까지 들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것에 용해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유럽에는 대성당이 많다.로마 바티칸시의 성베드로 성당,파리의 노트르담사원,런던의 성바오로 성당 등.이들 성당 앞에 서면 그 웅대한 규모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석구석에까지 정열을 쏟아 만들어 놓은 세심한 장식 디자인에 우리는 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신을 향한 인간의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이들 건물을 짓는데 수백년이 걸렸다.중세의 장인들은 대를 이어가며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는 말이다.이들중 대부분은 살아있는 동안 완성된 건물을 보지도 못했다.그렇지만 이들은 벽돌 한장한장을 쌓아가며 스테인드글라스 한조각 한조각을 맞추어 나가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또 그것이 아름다웠든 그렇지 못했든지를 막론하고 그것을 신에게 바친다는 태도를 견지했을 것이며 자신이 마치지 못한 작업은 그의 아들에게,그의 후배들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그래서 수백년이 흐르면 비로소 그토록 아름답고 장엄한 성당이 완성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이보다는 인내심이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바로 5년전,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 단 3년만의 공사 끝에 건립되었다.더구나 이 성당은 본고장 유럽에 있지도 않다.「평화의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이름지어진 이 건물은 서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아이보리코스트)라는 나라의 야무스크로시에 세워진 것이다. 성당 중앙부의 돔은 지름이 90m에 이르며,꼭대기의 높이는 지상에서부터 1백70m니 우리나라 63빌딩보다 약간 낮은 정도다.그러나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 몇개가 이 돔 안에 들어갈 수 있다.성당 내부 제단의 캐노피(차양)높이만도 9층 높이가 되며,10층 건물의 높이를 가진 창문을 장식하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총면적은 2만3천평에 이른다.그뿐이랴.이 성당에는 좌석이 7천석이 있고,추가로 1만1천명이 서서 미사를 드릴 수 있다.게다가 대리석이 깔린 옥외광장은 3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니 모두 총합 33만8천명이 동시에 미사에 참여할 수가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코트디부아르의 행정수도로 근래 새로이 개발된 야무스크로시의 총인구가 3만명을 넘지 못하고,그중에서도 카톨릭 신자는 4천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렇듯 비현실적이다 못해 과대망상적으로 큰 성당을 지은 사람은 다름아닌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인 펠릭스 우페이 바냐다.참고로그는 코트디부아르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때부터 이제껏 35년간 대통령을 해오고 있다. ○63빌딩보다 약간 낮아 우페이 바냐 대통령이 어린시절,그의 고향 야무스크로에는 성당이 없었기 때문에 영세를 받기 위해서 수십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그로부터 80년이 지난 오늘 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을 그의 고향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자신의 고향에 아름다운 성당을 갖고자 하는 개인적인 염원 자체야 높이 사 줄만 하지만,이러한 염원이 과대망상적인 사고로 귀결지어진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이 평화의 성모 마리아 성당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3년만에 뚝딱 지어졌다.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피에르 카브렐리라는 건축가는 다음과 같이 회상을 하고 있다.처음 우페이 바냐 대통령에게 불려간 자리에서 대통령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원대한 꿈을 이야기했다.나는 요즈음 누가 이런 고전양식의 성당을 지으려고 할까하고 나 자신에게 반문해 보았다.그리고는 이 성당을 언제까지 완공해야 할는지 물어보았다.대통령은 바티칸의 교황이 4년만에 한번씩 아프리카를 방문하는데 그가 작년에 왔다고 말하면서 그렇다면 이제 다음번 방문까지 몇년이 남았는지를 나보고 계산해 보라고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대의 성당은 3년만에 지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현대의 기술이 없었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돌 하나하나를 깎고 기둥을 하나씩 만들어 지은 중세의 성당과는 달리 이 성당은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부재(공상에서 미리 만든 콘크리트 기둥이나 벽체 등)를 현장에서 대형 크레인을 써서 조립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다보니 김환기화백의 네모와 점에 녹아든 영혼,또는 중세 장인들의 수공예작품에 밴 종교적 열정을 여기에서는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현 대통령의 업적” 과시 어느 후진국 장기 집권자의 개인적 욕구에서 시작되어 과대망상적으로 지어진,그러나 영혼이 없는 건축,이것이 이 세계최대 성당의 현주소다.우페이 바냐 대통령의 나이는 현재 90세가 넘었다.그가 대통령직에서 어떤 연유로든지 물러난 후에도 이 성당이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지닐지 우리는 예측할 수가 없다.후진국의 장기 집권자나 식민통치자들은 거개가 다 자신의 통치기간 중에 개인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대형 구조물을 한 두개쯤은 지어놓게 마련이고,이들이 권력을 잃은 후에도 대부분의 이러한 건축물은 오래지 않아 장대한 기념식과 함께 허물어지거나,요행히 그렇지 않더라도 그 모습이 쇄락해지게 마련인 것을 우리는 멀고 가까운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올 8월이면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게 된다.5공 시절 세워진 천안의 독립기념관의 그토록 장엄한 모습이 요즈음 그리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쓸쓸한 퇴기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는 소식도 들려온다.국민의 성금(?)으로 시작된 평화의 댐 공사는 그래도 중간에 무산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34년만에 처음으로 인구 1천만의 국제도시 서울에 민선시장이 선출되었다.포부도 크고 개인적인 신념도 가지고 있겠지만 세계최대의 무엇을 서울에 들여놓고자 무작정 밀어붙이는 일만은 삼갔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 지하 구조작업에 1백명 동참(「삼풍」참사/자원봉사자)

    ◎TV 보고 달려와 하루 20시간 강행군/부녀회·의료팀 포함 2천명이 구슬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에서 온몸을 던져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의 24시간은 짧기만 하다. 기능공,광부,식사를 제공하는 아주머니,승려,은행원,의료팀 등 남녀노소와 직업 구분없이 「죽음의 현장」에 뛰어든 2천여명의 자원봉사자들. 지난달 29일 사고 당일부터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그런데도 별로 지친 기색을 내 보이지 않는다.붕괴현장 이웃 도로변이나 잔디밭에서 신문지 및 스티로폴을 깔고 새우잠을 자는 등 열악한 여건하에서도 이웃사랑의 희생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경찰·소방대원·군인등 정규복구팀들은 차량 등 일정한 숙소에서 교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어 이들 자원봉사자에 비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자원봉사자 가운데 활약이 가장 돋보이는 사람들은 지하현장에서 구조작업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1백여명.언제 또 다시 붕괴사고가 있을 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정규 구조대원 못지 않은 활약을 하고 있다. 수천t 무게의 콘크리트 더미와 매캐한 유독가스 냄새도 이들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어렴풋하게 인기척만 들려도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생사」부터 확인했다. 상가집에 들렀다 기능공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혁재(39·성남시 중원구 은행 2동)씨.지난달 30일 저녁 한종찬(41·대리석시공기술자)씨등 다른 자원봉사자 3명과 함께 119구조대원들도 붕괴위험이 도사려 몸을 사렸던 백화점 B동 지하 3층에서 목숨을 무릅쓰고 생존자 수색작업을 벌였다. 멀리 대구에서 서울에 출장왔다가 사고 현장으로 달려온 이창원(27·개인사업·대구시 북구 산격 3동)씨는 1일 하오 8시쯤 A동 지하 3층에 갇혀있던 24명을 구조하다가 왼쪽 발목을 삐어 치료를 받기도 했다. 발목 부상을 입고서도 밤새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구조작업을 벌인 이씨는 2일 상오 10시쯤 『좀 쉬는게 좋겠다』는 의료진의 권유를 뿌리치고 간단한 치료를 받은 뒤 다시 매몰현장으로 들어갔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들도 젊은이에 뒤질세라 피땀을 함께 흘렸다. 서울 성북구 길음 3동 강선오(69·도봉구 길음3동)씨등 60대 할아버지 4명은 30일 새벽 2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한번도 쉬지않고 철근절단작업을 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절단공으로 35년 동안 일해왔다는 강할아버지는 그러나 작업 도중 무릎을 다쳐 구조작업에 더 이상 동참할 수 없게 되자 땅을 치며 안타까워 했다. 비극의 현장에서는 대만의 명상단체인 「수마하이」국제협회직원 2명이 붕괴소식을 듣고 30일 입국해 사고현장에서 장갑과 양말·우산등을 나줘주며 국경을 초월한 봉사활동을 벌여 눈길을 끌었다.
  • 현대 추상조각 선구자 브랑쿠지 회고전 파리서 성황

    ◎불 퐁피두센터·미 필라델피아 미술관 공동기획/75년 독 전시회이후 20년만에 “해외나들이”/출세작 「입맞춤」 등 유작 300여점 한자리에 현대 추상조각의 선구자 콘스탄틴 브랑쿠지(18 76∼19 57)의 회고전이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퐁피두센터와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공동기획으로 지난4월14일부터 시작된 이 전시회에는 하루 평균 5천여명의 관람객이 쇄도하고 있다.미술사적 중요성에 비해 작가 생전 대중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루마니아 태생인 브랑쿠지는 28세에 프랑스로 건너가 로댕미술관에서 한달간 작품수업을 쌓았으나 「큰 나무밑에선 아무 것도 자랄 수가 없다」는 명언을 남기고 떠났다.이후 독창적인 조형기법을 창출해내 양감보다는 기하학적인 모양을 강조했다.인간 본래의 심성에 파고드는 단순하면서도 추상적인 형태를 추구했으며 19 60년대 미니멀리즘과 앙상한 뼈대만 남기는 것을 특징으로하는 현대조각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브랑쿠지는 돌·나무·플라스틱 등 손상되기쉬운 재료를 즐겨 사용하고 작품형태도 위태로운 구성을 주로 택한만큼 전시회 개최가 극히 드물었다.이번 전시회도 지난 75년 독일전시회 이후 20년만에 열리는 것이다. 「브랑쿠지 재평가」를 주제로 그의 사후 프랑스에서 처음 마련된 이 회고전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의 유작중 조각 1백점,드로잉 38점,사진 55점등 모두 3백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주제별·제작 연도별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브랑쿠지가 파리 생활을 시작할 무렵의 황금조각 「기도하는 사람」과 출세작이랄 수 있는 「입맞춤」,형태상의 단순성을 강조한 「잠자는 뮤즈」등 그의 대표작들이 망라됐고 그를 현대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만들어준 기하학적 형태의 추상조각 「공간의 새」등 대리석 새시리즈조각 대부분이 나와 있다.또한 루마니아 전통건물의 지붕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끝없는 기둥」이나 아프리카 토속조각의 영향이 엿보이는 「낯선 식물」「왕중왕」등 목조건물도 눈에 띈다.브랑쿠지가 숨을 거두며 퐁피두센터에 기증했던 작품들과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비롯한 미국의 5개미술관,루마니아 미술관등의 소장품들이다. 퐁피두센터측은 대부분 깨지거나 파손되기 쉬운 브랑쿠지 작품들을 진동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작품마다 콘크리트 바닥을 만들어 전시할 뿐만 아니라 동시 입장객수를 6백명이하로 제한할 정도로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브랑쿠지 회고전은 오는 8월21일 퐁피두센터에서의 전시일정이 끝나고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으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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