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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사 교수 5명 재임용 탈락/평가제 첫 실시… 6명엔 경고

    육군사관학교(교장 장창규 중장)는 설립 49년만에 처음으로 고수평가제를 실시,연구업적등이 저조한 교수 5명(대령 3명,중령 2명)을 재임용에서 탈락시키고 교수 6명(대령 2명,중령 4명)에 대해 경고조치를 내렸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재임용에서 탈락한 교수 5명은 야전부대 등 다른 부대로 재배치된다. 육사는 앞으로 2년단위로 교수평가를 실시,교수재임용에 반영키로 했다. 해사와 공사는 아직 교수평가제를 고려치 않고 있으나 이번 육사의 교수 탈락조치로 크게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육사가 교수평가제를 도입한 것은 교수들의 신분보장이 철저한 탓에 연구 및 교육활동에 다소 소홀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데 따른 것이다.
  • 전쟁포로(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6)

    ◎미­북한,송환방법 싸고 2년간 첨예 대립/이 대통령,반핵포로 2만여명 전격 석방 1951년 7월 8일 개성회담을 시작으로 2년간 지속된 휴전협상에서 가장 큰 쟁점은 포로문제였다.한국전쟁에서 독특한 양상을 표출한 포로문제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까지 비화됐다.그래서 휴전협상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됐던 이 포로문제는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난항을 거듭했다. 북한은 포로문제를 불리해진 전황정비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또 전쟁 조기 종료를 바란 미국 주축의 유엔은 휴전회담에서 북한측에 끌려다니는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전세가 아군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한국전쟁을 통일의 기회로 여겼던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휴전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특히 포로문제에 있어서 유엔 협상대표들이 북한측의 요구를 수용하자 마침내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 반공포로들을 석방해 버렸다. 그렇다면 한국전에서 포로문제가 복잡하게 꼬였던 이유는 무엇일까.여기에 대한 대답은 유엔군에 생포된 포로의 성분이다.생포된 공산측 포로중에는 북한에 의해 강제 징집된 수많은 남한출신과 함께 장개석의 국부군 출신 중공군이 끼어 있었다.이에따라 휴전회담에서 포로송환문제가 거론되자 이들이 북한과 중공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면서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북·중 송환거부자 급증 미국은 휴전회담이 개막되기 전인 7월에 접어들어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당시 미 육군 심리전감 매클루어 준장은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정전이 될 경우 국부군 출신 포로들을 대만으로 보낼 것을 건의해놓고 있는 상태였다.워싱턴에서는 51년 가을내내 포로문제에 대한 논의가 계속됐다.그러나 자원송환과 강제송환,1대1교환과 전체대 전체 교환,인도주의적인 입장과 제네바협정 준수가 엇갈려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해 10월 판문점에서 협상이 재개됐으나 협상 벽두부터 북한측은 휴전협정 조인즉시 양측의 모든 포로들을 석방하자는 의견을 강력하게 들고 나왔다.그러면서도 북한측이 제시한 포로 숫자도 터무니 없게 축소돼 의혹을 불러일으켰다.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13만2천4백74명(중공군 2만7백명)의 명단을 제출하면서 민간인 수용자로 별도 격리 수용한 3만7천명이 더 있다고 미리 밝혀두었다. 반면 공산측은 한국군 7천1백42명과 유엔군 4천4백17명을 합쳐 고작 1만1천5백59명의 포로숫자를 제시했다.북한측이 한달전 평양방송을 통해 주장한 포로수가 6만5천명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유엔군측은 그 때까지 실종인원을 한국군 8만8천명,미군 1만1천5백명 이상으로 파악해 놓고 있었다. 휴전회담은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한채 51년을 마감했다.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양상이 달라져 양측이 좀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나왔다.19 52년 1월2일 회담에서 유엔군측 대표 R E 리비 미 해군 소장은 자원송환 원칙을 강력히 담은 포로교환을 제안하고 나섰다.공산군측은 이를 즉각 거절했다.이무렵 워싱턴에서는 자원송환의 원칙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종전의 입장을 바꾸었다.반드시 고수해야 한다는 강경론으로 선회했던 것이다. 송환원칙으로 인해 협상이 교착되자 쌍방은 세부적인 사항의 타결을 시도해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이는 듯 했다.3월5일 공산측은 전년도 12월18일 교환된 명단에 입각한 송환을 제의하면서 꼬리를 달았다.전선에서 석방했다는 유엔군측 포로 5만여명의 행방을 유엔군이 묻지 않는다면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는 3만7천명은 불문에 붙이겠다는 것이었다.유엔군측은 이미 명단을 제출한 공산군 포로 13만2천여명에 대한 조사결과 겨우 7만명이 송환을 원한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공산측은 이를 유엔군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맞서 회담은 또 교착상태에 빠졌다.4월28일 유엔군측은 일괄타결안을 제시하고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미 트루먼 대통령은 각각 성명을 내놓았다.유엔군측이 제시한 일괄 타결안에는 공산측이 통고한 송환가능 유엔군 포로 1만2천여명을 인정하고 송환을 희망하는 유엔군 억류 공산군 포로 3만여명과 교환한다는 조건이 포함됐다.당시의 분위기를 볼때 상당히 완화된 이 조건은 공산군측에 실리를 넘겨준 것이었다. ○공산포로,소장 인질로 이같은 분위기속에서 5월7일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장 F T 도드 준장이 공산포로들에 의해 피랍되면서 공산측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도드 준장을 인질로 잡은 공산포로들은 포로수용소측에 ▲독가스 및 세균무기 사용,원자탄 실험중지 ▲불법 부당한 인민군과 중공지원군의 자원송환 즉각 중지 ▲수천명의 포로를 재무장시키려는 강제조사 중지▲포로대표단 구성 승인등을 요구했다.도드준장 후임인 새 포로수용소장 C F 콜슨 준장은 포로들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공산측은 콜슨 준장의 회신내용을 들어 유엔군측이 지금까지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학대하고 세균전까지 서슴지 않은 것으로 선전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유엔군측은 10월8일 마침내 최종안을 제출했으나 공산군측이 거부함으로써 협상은 끝이났다.이후 10월14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포로문제를 다시 다루어 휴전문제가 유엔으로 옮겨갔다.유엔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스위스,스웨덴등 4개국으로 포로송환위원회를 구성해 본국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그리고 모든 포로가 선택의 권리를 갖고 90일의 시한을 넘기고도 결정하지 못한 비송환자들은 휴전회담에서 위임한 정치회담에 이양하자는 인도의 절충안이 채택됐다.그러나 공산군측은 기본적으로 자원송환을 지지하는 유엔결의안을 수락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런 와중에 1953년 1월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행정부가 들어서고 3월에는 소련수상 스탈린의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판문점 연락장교회의를 통해 병상포로교환에 우선 합의했다.이에따라 4월26일 판문점에서 양측의 대표단 전원이 만났으나 회담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미국정부는 5월25일 회담대표자회의를 통해 최종안을 전달했다. 이 최종안은 6월4일 회의에서 약간 수정됐지만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휴전조인후 2개월내에 송환완료하고 잔여포로에 대해서는 그후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갖도록 한다는 내용을 일단 도출해냈다.또 30일이내에 송환거부 포로문제를 정치회담에서 처리하되 합의를 보지못한 해당포로는 민간인 신분으로 변경키로 합의했다.민간인이 된 포로들은 뒷날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의해 한국도 북한도 아닌 제3국으로향하는 운명이 결정되었다. ○첫 석방계획은 실패 그로부터 14일후인 6월18일 자정 남한에 수용됐던 반공포로 2만6천4백24명이 국군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탈출했다.이른바 반공포로 석방으로 불리는 이 한국판 엑서도스는 이승만 대통령이 결정했다.유엔군과 공산군간에 휴전회담이 본격 진행되자 휴전반대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10일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등 군 수뇌들을 불러들였다.이 자리에서 반공포로 석방문제를 검토하고 다음날 정오 이를 시행토록 명령했다.그러나 한국군 병력배치등 준비미흡으로 첫 계획은 실패하고 1주일뒤인 18일 북한행을 거부한 포로들이 미군 경비 수용소를 빠져나와 자유의 품에 안겼던 것이다. ◎미 힉컬슨 작성 문서/미,공산군포로 난동에 시종 곤욕/북·중서 강력 항의… 정전협상 불리/도드 수용소장 피랍사건 상세 기록 미군은 한국전쟁 기간내내 공산군 포로문제로 시달렸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MARA)에서 입수한 문서더미 가운데 국제정치관계철 북한 전쟁포로 관련 시리즈는 이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시리즈는 미 국무성 차관보 힉컬슨이 1952년 2월18일 「한국의 전쟁포로」라는 제목으로 작성해 극동과 간부 엘리손과 존슨에게 발송한 문서로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이 문서시리즈에 따르면 미군측은 공산포로로 인해 지휘체계 상부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등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 문서가 작성된 당일만 해도 한국인 포로를 조사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제62동에 진입한 미군병력과 포로들의 충돌로 미군1명과 포로 77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이밖에 미군 38명,포로 1백40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를 빚었다.공산군측은 이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유엔군측은 「민간인이 관련된 내부사건」으로 일축했지만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유엔군과 미군측은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됐다고 분석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이 시리즈 4월29일자 전문에서 수용소 상황에 대해 기술한 내용도 이같은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장군은 전문을 통해 『이들 수용소는 잘 조직돼 수용자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힐 정도의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다스릴 수가 없다.하지만 위험한 폭동이나 유혈사태등의 모험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기술하는 등 포로문제로 고심한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문서 시리즈는 또 52년 5월7일 도드 거제도 제76포로 수용소장의 납치사건도 기록하고 있다.콜슨장군은 도드의 석방을 위해 포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이 사건으로 5월20일 도드와 콜슨장군이 모두 대령으로 강등하는 과정도 잘 드러내 보였다.
  • 미,보스니아에 전투기 25대 증파/세계 재공습 강력 시사/나토

    ◎세계는 “중화기 철수” 유엔 요구 거부 【팔레·워싱턴 AP 연합】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전투기들이 31일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에 대한 2일째 작전을 전개,보스니아 상공을 비행하며 새로운 공습 목표물을 추적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방부는 전자전투기들을 추가로 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방부의 한 고위관리는 EC130 전투기 4대 등 25대의 공군 및 해군소속 전투기들이 옛 유고지역에 추가 배치될 준비가 끝나 현지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또한 나토 대변인 짐 미첼 대령은 31일 『우리의 사명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히고 『어떤 지점이든 폭격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여 추가 공습의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팔레(보스니아)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라트코 믈라디치 사령관은 30일 사라예보 주변에서 중화기를 철수시키라는 보스니아주둔 유엔군 사령관의 요청을 거부했다. 믈라디치 사령관은 이날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TV와의 회견에서 『팩시밀리 메시지로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면서 『우리는계속 우리 진지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칸분쟁 협상권/세계,세공에 위임 【베오그라드 DPA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나토의 보복공습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 사태 해결을 위한 미국의 제안을 수락할 용의가 있으며 세르비아에 협상 전권을 위임키로 합의했다고 30일 밝혔다. 라도마르 비코 세르비아 공보장관은 이날 국영TV를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29일 세르비아와 맺은 협정에 의거,세르비아에 협상의 책임을 넘기기로 했다면서 이를 위해 6명으로 구성되는 양국 합동협상대표단을 구성키로 했다고 밝혔다.
  • 한강 인도교 폭파(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3)

    ◎「임진강교 폭파 실패」뒤 서둘러 준비 지시/미 참전으로 예정보다 하루 늦춰 결행 19 50년 6월25일 일요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다음날 26일 월요일에 벌써 수도 서울을 혼란에 몰아넣었다.대한민국 정부와 국회는 26일 밤 각각 긴급 국무회의와 긴급국회를 열어 27일 새벽 수원으로의 천도를 결정할 만큼 전선은 긴박하게 돌아갔다.그리고나서 28일 상오2시30분쯤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해버렸다.한강다리를 폭파한 시간에 T33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 공산군은 아직 수도 서울의 중심부 밖에 있었다. ○개전 다음날 검토 착수 한강 다리 폭파계획은 전쟁 다음날 26일 상오부터 이미 검토되었다.전황이 매우 불리해지면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불러들여 한강다리 폭파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졌다.이는 적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임진강 다리 폭파를 시도했다 실패한 과오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공병감은 공병학교 폭파교관 황원회 이창복 중위에게 폭파준비를 서둘러 지시했다.당초 폭파시각은 27일 하오4시로 결정되었다. 이같은 결정은 육군본부가 시흥으로의 철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이날 하오2시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미군개입 가능성과 극동미군의 전방지휘소(ADCOM)가 한국에 설치될 것이라는 전문이 날아들었다.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이 소식을 미군사고문단(KAMAG)단장대리 W H 라이트로부터 전해들었다.그래서 시흥으로 나앉았던 육군본부를 다시 용산으로 복귀시켰다.이에따라 한강다리는 결국 하루늦게 폭파되었다.이시영 부통령 일행은 폭파직전 한강을 마지막으로 건넜다.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상오2시 특별열차편으로 한강를 건너 대전으로 내려갔다.그런데 이날 한강다리가 폭파되기 30분전에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이 전파를 탔다.그 내용은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원조가 있을 것이니 국민은 총궐기해 반란분자들을 퇴치하자』는 것이었는데,사실은 사전에 준비한 녹음방송이었다.한강다리의 폭파는 결국 수도 서울을 사수하던 국군장병 4만4천명을 낙오병으로 만들었다. ○국군 4만4천명 낙오 북한 공산군이 서울시내 중심부에 들어온 시각이 28일 하오3시쯤이었으니까 다리 폭파를 6∼8시간 정도 늦추어도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뒷날 나왔다.이런 이유로 해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군사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그러나 폭파를 명령한 육국 참모총장 채병덕은 7월27일 하동전선의 180고지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고 전사했다.한강 다리가 끊겨나간 이후 육군 5개 혼성사단이 노량진 본동을 중심으로 모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서울에서 퇴각한 이들 부대는 명목상 사단편제였지 사실은 연대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개전한 시각에 한국의 우방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대통령은 미조리주 인디펜던스 자기 사저에 머물고 있었다.그는 당장 워싱턴으로 돌아오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국무장관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음날 백악관에 도착했다.미국은 국제연합(UN)이 「평화에 대한 침략적 행위」로 규정지어 주기를 바라면서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않는 전략을 취했다.그리고 미국무성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즉각개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무렵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중공)대신대만의 자유중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회원국으로 총회 안보이사회 의석을 차지하도록 결정한데 항의하여 유엔을 보이콧하고 있는 중이었다.소련이 불참한 안보이사회는 즉각적인 전투중지와 38선 이북 원위치로의 철수를 요구하는데 결의했다.이와 더불어 유엔 회원국은 이 결의의 집행을 위해 한국에 원조를 제공하고 북한에 대한 원조 자제를 요청하는 안도 결의안에 포함시켰다. 미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 공산군이 서울 근교에 접근하던 6월27일(워싱턴 시간) 미공군과 해군에 한국정부를 엄호지원하는 명령을 내렸다.이날 유엔 안보이사회는 소련이 여전히 불참한 가운데 「무력침략을 격퇴시키고 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는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다음날 28일 서울은 침략자의 손에 들어갔다.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의 경찰행위를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전 5일째가 되고 서울이 공산권 수중에 완전히 넘어간 다음날인 6월29일에는 맥아더장군이 자신의 전용기 바타안호를타고 동경에서 수원으로 비행해왔다.바타안호가 착륙하는동안 간이 활주로 한쪽 끝을 북한의 소련제 야크기가 공격했다.맥아더는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꼈다.한편 임시수도 대전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적의 항공기로부터 요격을 피하기 위해 계곡을 따라 저공비행으로 수원에 와 닿았다.이들이 서울대 농과대학 캠퍼스에서 만나는 동안에 적의 전투기는 계속 기총소사를 해댔다. ○“미 해군 해안선 봉쇄” 맥아더는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는대로 한국을 지원하겠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약속했다.트루먼은 6월30일 일본에 기지를 둔 미공군이 북한의 군사시설에 대한 폭격을 승인했다.이와함께 한반도의 전 해안선을 해군이 봉쇄하도록 명령하고 맥아더 장군으로 하여금 한국에서 상당한 지상군 지원부대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따라 찰스 스미드 중령이 이끄는 미 지상군 선발대가 일본 사세보를 떠나 부산을 거쳐 7월5일 평택에 도착했다.그러나 이 미군부대는 한국군의 한강 방위선을 무너뜨리고 계속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앞에 속수무책이었다.이런 상황속에 UN안보이사회는 7월7일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는 회원국은 그 군대를 미국이 지명하는 사령관 휘하에 둘 것을 권고했다. 그 다음날 트루먼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주한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에 이른다.개전후 뼈아픈 11일간이 지나가는 동안 유엔과 미국은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그리고 16개국에 이르는 회원국이 한국을 지원하기로 한 결의를 행동으로 옮겼다.특히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의 지상전에 주동적 참전국이 된 것이다. 미국의 참전은 전선 주변에 위험한 그림자를 깔기 시작했다.그 위험은 한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공산군 점령지역의 허리인 인천을 상륙한데 이어 낙동강 전선을 뚫고 북한 깊숙이 들어갔을 때 현실로 다가왔다.1950년 가을이 저문 10월19일 저녁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은 전쟁양상을 또 한번 바꾸어 놓았다. ◎미 「국가정보평가서」/“소,「한국전 중 개입땐 대전 확산」 예측”/“유엔군 내분 조장… 전력약화 기대/필요땐 중에 소 의용군 지원 태세” 1950년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했을때 소련은 한국전쟁의 세계대전 비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그와같은 사태발전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당시 미국은 평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국가정보평가서­11」(NIE­11)에 따르면 소련의 통치자들이 중공의 한국전 개입을 지시 혹은 재가하면서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성을 인지했다고 미국은 평가하고 있었다.NIE­11은 그러나 소련이 중공군 개입과 동시에 세계대전에 돌입할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NIE­11은 또 소련이 세계대전 발발여부와 상관없이 미국과 중공간의 전면전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적고 있다.▲우선 미국과 연합군대를 다른 전장으로 유인해 병력을 소멸시킬 수 있고 ▲미국과 그 동맹국간 알력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의 침공으로 유엔의 단결력을 좌절시킬 수 있다는 것이 소련의 판단으로 추정했다. 이에따라 소련은 중공에 대해 적절한 물자와 기술인력,심지어는 의용군까지 제공해 한국에서의 중공군 작전을 지원할 것으로 판단했다.특히 유엔군의 공중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중국내 거점 방위가 필요하다면 비행기와 대공포를 훈련된 요원도 함께 제공할 것으로 내다보았다.또 중국영토에 대한 미군(유엔)의 대규모 작전이 있을 경우 중·소조약에 근거해 중공에 대한 소련의 공개적 군사지원이 따를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NIE­11은 이어 사태추이를 볼때 중국 공산당의 개입목적은 유엔이 한국에서 발붙일 수 없도록 하는데 있다고 덧붙였다.NIE­11은 미 중앙정보부가 1950년 12월5일 국무성 및 육·해·공군의 정보관계자들을 참여시켜 작성한 1급 비밀문서다.
  • 정전위 수석대표/이석복 소장 지명

    국방부는 25일 다음달 1일로 임기만료돼 전역하는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황원탁 소장(육사18기)의 후임에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참모장 이석복소장을 지명했다.이소장은 조만간 게리 럭 한미연합사령관의 최종 결정에 따라 수석대표로 확정된다. ◎이석복 신임 유엔측 수석대표/두차례 미유학… 전형적인 덕장 부하들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전형적인 덕장형.66년 소위임관한 이후 줄곧 포병장교로 잔뼈가 굵었다.두차례에 걸쳐 미국 국방대학원에 유학,뛰어난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다.대령시절부터 현재까지 7년여 한미연합사에서 일해 미군들과 교감이 깊다. 사단장 시절 부하들을 관사에 초청,생일잔치를 치러준 것은 아직까지도 화제가 되고 있다.부인 하영애씨(48)와 2남.취미는 바둑. ◇약력 ▲성동고 ▲육사21기 ▲포병 연대장 ▲연합사 작전처장 ▲합참 전략기획차장 ▲사단장 ▲국방부 정훈교육관 ▲한미연합사 부참모장
  • 사라예보 계곡서 장갑차 추락/미 특사 등 4명 사망

    【사라예보 로이터 연합】 미국 평화사절단을 태우고 사라예보로 향하던 장갑차 1대가 19일 산악도로에서 전복,계곡으로 굴러 떨어져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해 미특사 3명과 프랑스 병사 1명 등 4명이 숨졌다고 미관리들이 밝혔다. 사망한 미국인은 로버트 프레이저 특사와 조셉 크루젤 국방부 부장관,국가안보위원회 보좌관인 새뮤얼 넬슨 드루 공군 대령이라고 미대사관은 밝혔다. 사절단 대표였던 리처드 홀브루크 미국무부 차관보와 평화사절단 군사자문위원인 웨스 클라크 중장은 두번째 장갑차에 탑승해 다행히 사고를 면했다.
  • 12·12사태 당시 군관계자 통화 내용 요약

    ◎합수부측 허위보고… 군 수뇌 갈팡질팡/“지금 군단장이 30단에 가 있다며?”­이건영 사령관/“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답변 회피­김성환 참모장/“9사단 30연대 어디로 출동하나”­이건영 사령관/“30연대 출동 안합니다” 거짓 보고­구창회 참모장 12·12사태 당시 하극상을 벌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측을 진압하려는 육군본부측 장성들의 전화통화내용을 당시 보안사가 감청,녹음한 테이프가 17일 처음 공개됐다. 월간조선이 공개한 이 테이프는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테이프에는 이건영 3군사령관을 비롯,윤성민 참모차장·장태완 수방사령관·노재현 국방장관 등 당시 주요관계자들이 모두 등장하고 있다. 이 테이프의 내용은 지금까지 검찰수사등을 통해 이미 밝혀진 것이지만 관계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고 있어 현장감을 전달해주고 있다. 이 테이프는 무력진압을 불사하려는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움직임과 허위보고를 하는 합수부측 장교,갈팡질팡하는 군수뇌부의 모습등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다음은 테이프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3일 새벽 1시 이건영 3군사령관과 윤성민 참모차장의 통화 ▲이=육군본부에서 명령계통이 일률적으로 나와야지 여러 곳에서 나오면 안돼요. ▲윤=저희들이 수경사에 있는데 여기서 할 것입니다. ▲이=알겠어요.장관님이 직접 말하기 전에는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계세요. ◇12월13일 새벽 2시 이건영 3군사령관과 윤성민 참모차장의 통화 ▲윤=지금 1공수에서 와가지고 육군본부,국방부에 갔단 말이지요. ▲이=예. 지금 점령이 된 것 같습니다. ▲윤=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되나. ▲이=글쎄 말입니다. ▲윤=아! 이걸 어떻게 하지,어떻게 되는 건가. ◇이건영 3군 사령관의 질문에 차규헌 수도군단장의 참모장 김성환 준장과의 통화. 김준장은 이사령관의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이=그런데(차규헌) 군단장이 왜 거기 가 있는 가,30단에 ▲김=…. ▲이=지금 군단장이 30단에 가 있다면?. ▲김=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차규헌 군단장의) 부관은 지금 어디서 전화를 받나? ▲김=….▲이=부관이 지금 참모장하고 전화를 통하는게 어디서 통하지? ▲김=확인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이=직접 전화통화하지 않았다?. ▲김=예. ▲이=지금 참모장이 그 상태를 잘 모르는가,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가? ◇13일 새벽 1시50분쯤 이건영 사령관과 노태우 9사단장의 참모장 구창회 대령의 통화. 구 참모장은 거짓보고를 계속하고 있다. ▲이=9사단 30연대가 어디 출동하는 모양인데 어디 출동시키는가. ▲구=연대출동 안합니다. ▲이=어디 출동한다고 그러는데 무슨 소리야. ▲구=연대출동 안합니다. ▲이=지금 9사단 30연대장이 삼송리까지 출동한다고 전화가 왔는데. ▲구=연대 출동안합니다. ◇12일 하오 10시16분쯤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이건영 사령관의 통화. 장사령관은 30단에 모여있던 유학성,차규헌,황영시 중장 등에 대한 무력진압의사를 밝히고 있다. ▲장=「유장군님 남의 부대에 와서 왜 이럽니까」 제가 이상해서 물으니까 「에이,장장군 거 알면서 왜 그래. 이리와」「이리 오기는 어딜 와. 당신 왜 그래요. 왜 남의 부대에 한밤중에 와서 무슨 지랄하고 있어. 쏴 죽인다」 이렇게 했더니 황영시 장군한테 전화를 바꿔요. 황영시 장군이 있다가 「장태완이 너 왜 그래,알만한 사람이. 나하고 통할수 있는 처진데 왜 그래. 너 이리와」「아니 왜 이라십니까,왜 그 우리 좋은 총장님을 어쩌자고 납치해가고 왜 이라요. 정말 그라면 내 죽여」 했더니 「차규헌이도 와있고 나 와 있는데 마 이리와」「무슨. 혼자 다해먹어. 임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13일밤 1시 50분 3군 사령관과 수경사령관의 통화 ▲장=이것들이 공수단… 1공수 병력 1천명 정도가 말입니다. 우리가 한강하고 각 다리를 막아놨더니 저쪽 구파발쪽으로 해가지고 육본과 국방부에 들어갔습니다. 장관님한테 협박을 해가지고 지금 총리 공관에 가신 모양인데요. 전쟁하기 위해서는 수도기계화사단 정도는 있어애 하는데…. (이때 참모차장이 들어와) 나예요. 북괴가 쳐들어 온다면 딱한 일이죠. ◇13일 신원미상의 두 영관급 장교의 잡담 ▲A=합참의장도 바뀔 것 같아.그리고 이번에 이동이 많을 것 같다.육사교장이다뭐다 해가지고 아마 오늘 내일간에 매듭이 지어질 것 같애. ▲B=원로들이 싹 바뀌더군. ▲A=그렇지요.엘리트들로…. ▲B=요샌 월급타먹고 애들하고 편히 사는 게 좋지. ▲A=참 불행한 일이야.정승화 참 그게….그 3군사령관도 그렇고 참 높은 게 좋은 게 아니야.
  • 거평그룹/임원공채 50대1 경쟁률/계열 대한중석 이어 두번째

    ◎2백60여명 지원… 6명 최종 선발/회계사·언론·군출신 등 경력 다채 거평그룹(회장 나승렬)이 2일 중견그룹 진입,경영 인프라 구축을 위해 6명의 신규 임원을 공개 채용해 화제를 낳고 있다. 공채영입 임원(괄호안은 전직)은 ▲대한중석건설 건축총괄 상무 박병화(대동주택 종합건설 상무) ▲관리담당 상무 홍명기(한주개발 관리이사) ▲토목이사 최봉훈(대우부장) ▲거평유통 상임감사 이한규(한국증권거래소 상임감사) ▲관리담당 이사 남기오(해태유업 재무담당 이사) ▲(주)거평 관리담당 이사 김헌구씨(홍성산업 재무담당 이사)등이다. 거평그룹의 임원공채는 지난해 4월 계열사인 대한중석 사장에 양수제씨를 영입한 데 이어 두번째다. 이번 임원공채에는 관리부문 1백명,건설부문 1백10명,유통부문 30명,레저부문 20명 등 모두 2백60여명이 지원,평균 경쟁률이 50대 1이나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원자들은 특히 관심분야나 향후 지원분야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이나 업무추진 계획 등을 담은 「업무추진 계획서」를 논문 형식으로 A4 용지 4∼5장 분량으로 제출했는데,우수한 글이 많아 심사위원들이 애를 먹기도 했다.경쟁률이 센 만큼 특이한 경력자들이 대거 지원했고,「아까운」 인사들의 탈락도 많았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탈락한 지원자 가운데는 서울의 모 언론사 사장 출신인 H씨를 비롯,공인회계사 3명,생산성본부에서 6개월 교육수료 후 받는 경영지도사 자격증 소지자 20여명,대령이상 군출신 10여명 등으로 경력들이 다채로웠다. 기업의 임원 공채는 지난해 2월 대웅제약을 시작으로 보배그룹·연합인슈·청구·데이콤·신세계·동신제약 등에서 실시한 바 있다.
  • “한국전은 가장 기억할만한 전쟁” 새 평가

    ◎워싱턴 참전기념비 제막식 현장/“자유실현 원동력 됐다” 두 정상 영령추모/양국국가·민요 연주속 태권발레 선보여 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이 27일 하오(한국시간 28일 새벽)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쪽 광장에 새로 조성된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엄숙히 거행됐다.한국과 미국 양국은 이날 김영삼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참전용사및 가족등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전 휴전 42주년을 맞아 참전비를 제막함으로써 반세기에 걸친 혈맹의 우의를 다졌다.특히 이번 제막식을 통해 6·25전쟁을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의 팽창을 처음으로 단호하게 저지해 전후 세계질서를 바꾸어 놓은 사건으로 재조명되게 함으로써 그동안의 「잊혀진 전쟁」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전쟁」으로 새로 태어나게 했다. ○냉전종식에 큰 공헌 ○…김대통령은 제막식 연설에서 『6·25 전쟁의 포성이 멎은지 42주년이 되는 오늘 전쟁의 영웅들을 기리는 성스러운 터전을 마련했다』면서 『이들이 흘린 피와 땀은 전후 세계사를 자유의 실현으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됐다』고 한국전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클린턴대통령은 『한국전은 자유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면서 『한국전은 동서 냉전을 종식하는 데 크나큰 공헌을 했다』고 역시 6·25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두 나라 대통령에 앞서 앨 고어 미국부통령은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을 위해 피를 흘렸다』면서 『전쟁희생자와 참전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하자』고 제의했다. ○…제막식은 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이 기념공원에 나란히 입장해 공원을 시찰하는 것으로 막이 올랐다.김대통령과 클린턴대통령은 참전용사들의 박수 속에 도열한 의장대를 통과해 기념비에 다가가 대기하고 있던 데이비스 미국측 준비위원장으로부터 기념비에 대한 설명을 청취한 뒤 V자형으로 배열된 기념조형물 맨 앞의 병사동상 앞에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두 나라 국가 연주와 기념연설이 끝나고 미공군기가 축하비행을 하는 가운데 데이비스위원장은 『모두 손잡고 이 기념비의 제막을 알리자』면서 기념비 제막을 공식 선포했다.제막 선포에 앞서 미국 여가수가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열창해 개막식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미군악대는 「아리랑」과 「그리운 금강산」등 한국 민요와 가곡을 연주해 분위기를 돋웠고 재미동포 이준구씨가 지도하는 태권도단원 96명이 양국 국기를 손에 들고 애국가와 미국국가에 맞춰 태권발레를 선보였다.태권발레 시범단에는 이씨의 제자인 에스피 전농무장관도 끼어 있어 이채를 띠었다. 한국측에서는 3군 의장대와 전통의상을 입은 육군 취타대 2백50명이 행사에 참가했고 주최측은 단상 뒤편에 대형 점보트론을 설치해 행사장면을 중계했다.주최측은 섭씨 35도에 달하는 무더위속에 고령의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점을 고려해 수만t의 생수와 수십대의 앰뷸런스를 대기시켰는데 참전용사 몇몇은 더위를 먹고 쓰러져 들것에 실려 후송되기도 했다. ○완공에 3년1개월 ○…기념비는 미의회가 지난 86년 미국재향군인회의 요청으로 기념사업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설치할 것을 의결한 것을 계기로 모금한 1천8백만달러의 재원으로 3년1개월간의 공사끝에 완공됐다.기념조형물은 49m의 화강암 석벽과 승리를 상징하는 V자형 대지 위에 행진하는 19명의 병사동상으로 구성됐다. 화강암 벽면에는 참전용사의 얼굴이 부조식으로 새겨졌으며 맞은편 화강암 보도경계석에는 한국전 참전 22개국 이름이 알파벳순으로 조각됐다.19명 병사동상 가운데 맨 앞 병사의 앞면 바닥에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만난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한 전쟁에 참가한 미국의 아들과 딸들을 위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분단상징 38선 표현 병사동상 가운데는 미참전기념비준비위 이사인 윌리엄 웨버씨를 모델로 한 동상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올해 69세인 웨버씨는 강원도 원주에서 낙하하면서 지뢰밭에 떨어져 오른발과 오른손을 잃고도 육군에 계속 근무하다가 지난 80년 대령으로 전역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이날 행사를 단상에서 참관했다. 행진하는 19명의 병사동상은 육군 14명,해병 3명,해군특공대 1명,공군척후병 1명으로 구성됐다.그들의 모습은 화강암 석벽에 유리처럼 비쳐 모두 38명이 행진하는 모습을 연출하고있는데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상징하는 38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행사준비위 관계자가 설명했다. ◎김대통령 제막식 연설/전문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지 42주년이 되는 오늘,우리는 이 전쟁의 영웅들을 기리는 성스러운 터전을 마련했습니다.이 참전 기념비는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우리 자손 만대에 전해줄 것입니다. 나는 한국 국민을 대표하여 한국전 전몰장병을 추모하며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이 뜻깊은 기념비가 제막되기까지 사업을 주관하고 지원해온 미국 정부와 의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데이비스장군을 비롯한 건립위원들과 모금에 참여한 모든 분들,그리고 조형물 제작에 참여하신 예술가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치하드립니다. 45년전 6월 북한 공산군의 기습침략으로 시작된 한국동란은 3만3천여명의 미국 장병들을 비롯하여 9만5천여명에 달하는 유엔군 용사들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한국군과 유엔참전국의 총 사상자수는 무려 50만에 달했습니다. 이 기념비의 바닥에 각인되었듯이 한국동란은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한」 전쟁이었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이들이 흘린 피와 땀은 전후 세계사를 「자유의 실현」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자유세계는 6·25전쟁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처음으로 단호하고 효과적으로 저지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6·25전쟁은 먼 훗날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몰락을 예고한 전쟁이었다고 말하고자 합니다.오늘날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4천4백만의 한국인들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뿌리내린,미국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때 「잊혀진 전쟁」이었던 6·25전쟁이 「가장 기억할 만한 전쟁」으로 바뀐 역사의 진전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낍니다.아시아·태평양시대의 개막과 함께 자유와 평화를 향한 한국과 미국 양국의 유대는 이 흑색 화강석처럼 단단하고,저포토맥강처럼 장구하게 발전할 것입니다.이 기념비에 새겨진 권리를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 전합니다.자유는 희생없이 지켜지지 않는다고.감사합니다.
  • 세계/「안전지대」 비하치 요충 장악/고라주데­제파 함락 이어

    ◎미국방,나토에 “공습재개” 강력 촉구 【자그레브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의 회교도 고립지역인 비하치 지구로 진격하고 있는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가 주변 요충인 스투를리치를 장악한 것으로 보이며 현지 주민 1천2백명이 피란길에 올랐다고 유엔 옵서버들이 20일 밝혔다.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와 협력하고 있는 이들은 19일 국경을 넘어 비하치 지구의 중북부 지역에 탱크와 야포의 지원을 받으며 줄기찬 공격을 가해 왔다. 비하치 지구내에 머물고 있는 유엔 옵서버인 재스퍼 헬소 대령은 전화 통화에서 이들이 지구내로 3㎞가량 진격,5㎞가량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면서 스투를리치는 현재 세르비아계의 수중에 있는 것 같으며 사방에서 난민이 몰려 오고 있다고 말했다. 스투를리치는 크로아티아계가 진격로로 택하고 있는 비하치 지구의 서북부 초입에 위치한 마을로 이들과 회교도가 공방을 계속해온 요처이다. 【워싱턴·사라예보 A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19일 고라주데와 사라예보의 일부 영토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이같은 그의 제안은 세르비아계가 고라주데를 공격할 때에 대비,미국과 동맹국들이 공습재개를 숙고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한편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이날 보스니아 동부 유엔안전지대의 하나인 제파를 함락했다고 주장했으나 보스니아 회교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세르비아계 군사령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제파 회교주민대표들이 라트코 믈라디치장군과 면담한후 항복조건을 수락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사실이면 제파는 6개 유엔안전지대가운데 스레브레니차에 이어 8일만에 다시 세르비아계에 함락되는 두번째 지역이 된다. 성명은 또 양측간 합의에 따라 회교정부군 부상병 30명이 20일 유엔차량을 이용,사라예보로 후송될 것이며 주민들도 원한다면 유엔평화유지군 호위속에 정부군 장악지역인 크라다니로 소개될 것이라고 밝혔다. 【런던 로이터 연합】 미국은 20일 만약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내 잔여 유엔안전지대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경우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가 세르비아계의 군사목표를 공습할 것을촉구했다. 윌리엄 페리 미국방장관은 21일 런던에서 열리는 보스니아 주요 당사국들의 회합에 앞서 세르비아계가 공격을 중지하도록 경고해야하며 만약 공격이 중지되지 않을 경우 레이더와 대공 미사일등을 포함한 세르비아계의 군사목표에 대규모 공습이 가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미 한국전참전비 27일 워싱턴서 제막

    ◎“자유민주주의 수호”/미 국민정신 되새겨/한·미 정상·참전용사 등 참석 성대한 행사/한반도서 숨져간 3만3천여 병사의 넋 기려/부산 피란당시 텐트촌 재현 등 다양한 행사도 27일 제막식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는 워싱턴의 한국전참전비는 단순히 한국전쟁에서 싸우다 숨진 미군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고 지키려 애쓴 미국민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한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매년 수백만 미국민들이 찾아오는 워싱턴 한복판 몰(Mall)공원에 「자유는 공짜로 얻는게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세워진 한국전참전비는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에서 숨져간 3만3천여 영령들의 귀중한 자유수호 의지를 역사 속에 길이 빛나게 할 전승기념비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더욱이 한국전참전비가 워싱턴 한가운데 자리잡게 됨으로써 한국전쟁이 2차대전 후 냉전체제 아래서 최초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간 전쟁으로, 또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보병전쟁으로 미국이 끝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전쟁이라는 미국역사상,미군전사상 새롭게 자리매김되는 의미 또한 갖는다. 이같은 역사적 의미를 뒷받침하듯 오는 27일 김영삼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대통령,그리고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과 참전용사,한국전 참전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성대한 제막식과 이를 전후해 개최되는 각군 주관 행사 등은 이른바 「미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내용들로 돼있다. 또 전장터를 의미하는 삼각형 부분은 삼각형의 긴 꼭지가 원의 중앙에 도달케 돼 있으며 주진입로가 되는 좌측 변에는 한국을 비롯한 유엔참전국들의 국명을 돌판에 새겼고 우측 변에는 화강암 벽면을 길게 설치해 한국전쟁중 미군활동의 전체과정을 부조했다. 미국 참전비건립위원회와 한국전참전기념사업위원회의 주관으로 미육군 공병대가 시공한 이 참전비는 92년6월에 착공,3년1개월만에 완공되는데 총비용은 1천8백만달러가 들었으며 한·미 양국 기업들의 모금과 기념주화 판매 등 수익사업 등으로 충당됐다. 참전비 제막식 관련행사는 다음과 같다. ◆26일=낮 12시몰공원에서의 텐트촌(Tent City) 개장식으로부터 본행사가 시작된다.부산 피난 당시를 연상케 하는 이 텐트촌에는 각국 참전재향군인회,정부유관기관 등 현재 16개 단체가 입주를 신청했다.하오 7시에는 미해병대가 이와지마 기념비에서 미해병대의 황혼(Sunset) 퍼레이드를,미육군은 백악관앞 엘립스광장에서 군악연주회를 갖는다. ◆27일=상오 10시 알링턴 국립묘지의 무명용사묘에서 진혼제를 시작으로 하오 3시에는 양국 대통령이 참석,제막식을 갖는다.하오 8시부터는 불꽃놀이 등 축제가 열리고 같은 시각 미해병대의 이브닝 퍼레이드가 열린다. ◆28일=상오 11시 워싱턴기념탑 아래 광장에서 3만여명의 참전용사와 현역병이 참가하는 대형 열병식이 거행된다.20세기 들어 처음이며 남북전쟁 이후 최초로 행해진다.하오 1시에는 해군기념비에서 진혼제가 열린다. ◆29일=상오 11시 참전용사 귀환 환영 퍼레이드가 시내 중심가에서 펼쳐지며 하오 4시 텐트촌의 철거로 모든 행사를 끝맺는다. ◎“참전비는 전장서 잃은 내몸의반쪽”/참전기념위 사무국장 웨버 예비역대령/“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무한한 긍지”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이 참전비를 세움으로써 한국전쟁의 끝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한국전참전비 공사장에서 만난 윌리엄 웨버 예비역 육군대령(69)은 베트남참전비가 10여년 전에 세워진데 비해 한국전참전비가 이제 세워진 것은 너무 늦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80년 대령으로 예편한 뒤 한국전참전기념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해온 그는 『한국전쟁은 2차대전 이후의 냉전체제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명분있는 전쟁이었다』면서 『피로 지켰던 한국이 오늘날 자유와 민주주의를 잘 지켜나가는 것을 볼 때 참전용사의 한사람으로 무한한 긍지와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전에서 몸의 반을 잃고 한평생을 살아온 내게 이 참전비는 뒤늦게 되찾은 내몸의 반쪽』이라는 개인적 의미 부여도 서슴지않는 웨버 대령은 켄터키 주둔 미 187 공수여단의 팀장인 대위로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적후방 교란 임무를 띠고 8월말 평남 순천에 투하되었다.다음해 2월 중국군과의 원주전투에서 한쪽 팔과 다리,눈을 잃고 본토로 후송될 때까지 7개월간 적진 구석구석을 낙하산을 타고 누볐다.타고난 군인이었던 그는 퇴원 후 정부에서 제의해온 많은 좋은 자리들을 거부하고 군에 남기를 희망,2차대전 때부터 37년간 미육군을 지켜왔다. 그는 또 『한국인들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피흘림에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면서 『자유와 민주를 지킨다는 일념에서 아무 조건없이 낯선 땅 한국을 찾았을 뿐인 만큼 그 관계는 「빚」으로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우정」으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아웅산 수지 석방/미얀마 반정지도자… 연금 6년만에

    【양곤 AP 연합】 미얀마의 반체제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50)가 6년간의 가택연금 만료를 수일 앞두고 10일 연금에서 풀려났다고 공식 소식통들이 밝혔다. 미얀마 정보당국의 부책임자인 키야우 윈 대령이 이날 오후 4시(한국시간 오후 4시30분)대학로 호숫가에 있는 수지 여사의 자택을 방문,당국의 전제조건없는 연금 해제 결정을 통보했다고 한 소식통은 전했다. 이 소식통은 『수지 여사의 요청에 따라 경비요원들이 저택주변에 계속 배치돼 있지만 그녀는 이제 보통 시민』이라면서 수지 여사는 위법행위를 하지 않는 한 다른 국민들처럼 아무 곳이나 갈수 있고 누구든지 만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수지 여사는 민주국민동맹(NLD) 지도자로 지난90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으나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로 알려진 군사정권이 정권이양을 거부한 채 반정부폭동 진압을 위해 국민 수백명을 살해하자 이에 맞서 투쟁해왔다.
  • 올 준장진급 예정자/육군 46명 해군 11명 공군은 8명

    국방부는 8일 각군별 준장 및 영관장교 진급예정인원을 확정,각군에 시달했다. 준장진급예정자는 육군이 46명으로 지난해와 같고 해군은 전년보다 1명 늘어난 11명,공군은 2명 늘어난 8명이다. 대령의 경우 육군은 진급예정인원이 1백50명으로 전년보다 30명이 감소했고 해군은 32명,공군 30명으로 각각 전년보다 14명,18명이 줄어들었다.
  • 「6·25」 45돌… 체험과 감회

    25일은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6·25사변을 일으킨지 45주년이 되는 날.이날에 즈음하여 24일 서울에서는 사변으로 졸업장을 받지 못했던 60대 노인들이 뒤늦은 졸업장을 받는가 하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에서는 어린 국민학생들이 헤엄쳐 강을 건너는등 기념행사들이 펼쳐졌다. ◎대신고 1회동문 29명 명예졸업식/45년만에 받은 고교졸업장/졸업 두달전 6·25터져/학도병 출전… 34명 전사 이날 상오 서울 종로구 행촌동 대신고교 체육관에서는 졸업식을 겨우 두달 앞두고 6·25가 터져 뿔뿔이 헤어졌던 이 학교 제1회 동문 29명이 45년만에 명예졸업장을 받고 눈시울을 붉혔다.50년6월 그때 학제로 중학교 6학년에 다니다 포성소리와 함께 펜을 놓고 학도병으로 달려갔던 노선배들이다. 『그때 마포구 도화동 분교에서 북한군의 남침 다음날인 26일 2교시까지 수업을 받았습니다.갑자기 북한군 비행기가 나타나 운동장과 학교건물에 기총소사를 퍼붓는 바람에 책상 밑에 한참동안 엎드려 있었습니다.그리곤 바로 이별이었죠』 고희를 앞둔동기회장 오세운(67)씨의 회상이다.그때 6학년생은 「갑조」와 「을조」 두학급에 모두 1백20여명.이들 가운데 34명이 전란중 포화 속에 불귀의 넋이 됐고 지금은 40여명만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같은 동기생이지만 이날 학교장으로 졸업식사를 한 이 학교 김한수(62) 교장은 『이제야 1회 졸업생들의 여한을 풀게 됐다』면서 『오래오래 살자』고 흰머리가 성성한 동기생들의 손을 꼭 쥐었다. 회초리를 들고 국어를 가르치던 은사 이경은(73)옹은 『선생님…』하며 고개를 숙인 옛날 제자들과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긴 포옹을 나누었다.이옹은 『거의 반세기가 지나도록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오늘 이 자리에서 짇??장을 벗게된 제자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다 끝내 목이 메고 말았다. ◎덕수국교생 6백명 수영 도하 행사/한강 헤엄치며 피난고통 체험/선조 아픔 몸으로 느껴/위험 극복·모험심 배워 6·25사변의 곤통을 몸소 체험해보려고 용帝하게 나선 어린이들이 북한강의 차가운 물살을 힘차게 갈랐다. 서울 덕수국민학교 어린이를 비롯한 6백25명의 어린이들이 24일 하오 경기도 양평군 대성리 강나루캠프장에서 「6·25 어린이 한강 헤엄쳐 건너기 대회」에 참가,어른들도 어려운 「도하작전」을 성공시켰다.어린이들에게 6·25의 아픔을 되새기고 전쟁의 의미를 일깨우려고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덕수국민교 어린이 4백44명,덕수유치원 어린이 60명,참가를 희망한 다른 25개 학교 어린이 30명,학교교사,자원지도자등이 참가했다. 행사를 주관한 덕수국민교 옮승평(5s) 교장은 『어린이들이 6월의 거칠고 차가운 북한강을 헤엄치면서 민족의 슬픔인 6·25의 고통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어려움과 위험을 피하기보다 맞서 헤쳐나가는 모험심을 陷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심 10m,거리 6백25m를 건너가는 이날 대회는 하오 2시27분 신교장이 울린 징소리로 막을 열었다. 수영을 못하는 어린이는 보조물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허리에 오색풍선만을 매달고 힘차게 헤엄을 쳤다.접영·평영·배영·자유형등 저마다 그동안 갈고닦은 수영솜씨를 마음껏 뽐냈다.해병대와 서초해병전우회 소속스쿠버대원들의 안전감시아래 열린 이날 어린이들의 작전은 1시간만에 무사히 끝났다.물론 단 한뫙의 낙오자도 없었다. 1등은 덕수국민교 6학년 김하림양(12).김양은 『전쟁이 나서 피란할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다리가 끊어져서 헤엄을 쳐 건넜던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이날 50년 서울 탈환 때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았던 해병소대장 박정모(71) 예비역 대령이 서초해병 전우회원으로 참가해 많은 어린이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 김정일의 측근 실세들(북한 특권층 심층 해부:2)

    ◎핵심 20여명 당·군부 포진/거의 혁명2세대… 충성경쟁 치열/비서진­강상훈·이명제·이제강 주축 집무실 근무/친인척­매제 장성택·당숙 박기서 등 지근서 보좌/작전부장 오극열·대남비서 김용순·공업비서 한성용 등 영향력 막강 북한통치의 특성상 김정일은 철저하게 인치에 의존하고 있다.때문에 김정일주변과 요직엔 그의 신임과 총애를 받는 핵심 실세들이 포진하고 있다. 김의 측근은 그가 누구를 얼마나 신임하고 중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며 대외적으로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김의 신임이 없으면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현재 정치국원이며 부주석들인 이종옥·박성철등은 예우차원에서 권력서열이 3,4위에 올라 있으나 실제 권력에 있어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보다도 못하다.권력서열이 북한 권력층의 변동과 위계를 파악하는데 참고자료는 될지언정 그 서열이 곧 실세서열은 아닌 것이다. 김정일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실세들은 20여명으로,지근거리에서 그와 같이 생활하며 그를 보좌하는 비서진,친인척그룹,당및 군부에 배치돼영향력을 행사하는 실행그룹 등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이들은 김이 행사참석이나 현지지도에 나설때 수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비서진은 현재 「1강3이」로 구성돼있다.이들은 비록 급수가 실행그룹보다는 낮아도 영향력은 이들보다 더 크다.권력이 김의 집무실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이 가운데 김정일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무시로 그에게 건의와 조언을 할 수 있는 최측근은 노동당 조직부의 김정일집무실 담당 부부장인 강상춘이다.집무실의 안살림과 김정일의 면담·행사일정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로 나이는 김보다 위인 55세 정도.누구도 그를 통하지 않으면 김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1백72㎝의 키에 다부진 인상의 그는 또 김이 술을 마시고 싶어할 때 분위기에 맞게 참석인원을 선정·동원하고 장소를 결정하며 기쁨조와 음식등을 준비하는 내밀한 일도 관장한다.그가 이러한 핵심요직에 발탁된 것은 호위사령부의 행사부 부부장(대령급)으로 있으면서 김정일과 오랫동안 같이 다니는 과정에서 김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김정일 집무실에 권총을 차고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강밖에 없다. 강과 함께 김정일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은 선전과 조직업무를 보좌하고 있는 이명제와 이제강.두 사람 모두 60대 초반으로 노동당 조직부 김정일집무실담당 부부장으로 있다.이명제는 조선기록영화촬영소에서 촬영기사로 근무하면서 김일성부자의 현지지도활동을 자주 수행하다 김정일과 가까워지기 시작,김이 조직부부장으로 있을 때 조직부로 옮겨 80년대 중반부터 집무실에서 근무해오고 있다.이제강도 김이 조직부 부장으로 있을 때 과장으로 있다가 김의 신임을 받아 조직업무라는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 이들 세사람이 집무실에 근무하면서 김정일을 보좌하고 있다면 현재 스위스 대사인 이철은 외국에서 김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다.그는 김과 김일성대학 동기동창으로 외교부소속 유엔옵서버대표로 있다가 집무실요원으로 발탁됐다.현재 김정일이가 체제붕괴등에 대비,스위스은행등에 예치해놓은 비자금 규모는 20억∼30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동당쪽에는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이 전진배치 돼있다.북한에선 모든 국가기관과 군부및 사회단체를 당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은 당에 그가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사람들을 심어놓고 있다.이중 핵심인물이 바로 친인척그룹의 대표주자 장성택이다.김의 분신으로 불리는 장은 김의 누이동생인 김경희(당 경공업부장)의 남편으로 현재 조직부 제1부부장으로 있으면서 당을 관리하고 있다.군쪽에서는 당숙인 박기서(대장)가 요직인 탱크지도국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실행그룹으로는 당쪽엔 간부담당비서인 김국태를 비롯,작전부장 오극렬,김정일의 비자금을 조성하는 39호실 1부부장 임상준,중공업비서 한성용,대남담당비서 김용순,선전담당비서 김기남,조직부부부장 조순백,군수담당비서 전병호,조직부 무력담당부부장 김용현등이 있다.이 가운데 조순백은 국가보위부장을 겸직하면서 김정일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는 사람들을 검거하는등 체제유지의 중책을 맡고 있다.군부에 포진된 실세는 인민무력부 부부장인 차수 김광진,공군사령관 조명록,해군사령관 김일철,인민무력부 작전국장 김명국대장,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선전담당부국장 박재경상장등이다. 강성산총리는 단지 예우차원에서 서열 2위에 올라있을 뿐 이렇다할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게다가 사위(강명도씨)의 귀순과 건강상의 문제(당뇨병)외에 경제난타개 실패등이 겹쳐 곧 경질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김의 숙부인 김영주 역시 서열이 5위에 올라있으나 부주석 대우나 받으면서 치료나 받고있지 실권은 없으며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호위사령부에서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정일의 측근실세들은 김이 공식적으로 권력승계를 하는 시점을 전후해 당정군의 핵심요직을 차지하거나 주요 포스트에 전진배치될 것으로 전망된다.강성산의 후임으론 한성용과 전병호가 유력시 되고 있다.또 공석중인 인민무력부장엔 오극렬이,총참모장에는 김광진,인민무력부 총정치국장엔 김용현이 기용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현재 김정일의 측근실세들은 매제인 장성택을 빼고는 모두 김보다 연상이며 대부분 혁명 2세대들이다.김정일은 이들과 술자리에서자주 어울리고 있으며 대화할 때는 친근감을 주기 위해 반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측근 사이에선 김의 총애를 더 많이 받기 위해 눈에 안보이는 충성경쟁이 치열하다.실세들은 또 성격이 급하고 괴퍅한 김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먹고있다.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김의 눈밖에 나면 하루 아침에 별볼일 없는 신세로 전락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항상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 강성산 총리의 하루(북한 특권층 심층 해부:1)

    ◎강성산 총리 사위 강명도씨의 증언/특미로 지은 아침밥먹고 벤츠로 출근/하루 양담배 3갑… 람보 등 미 영화 즐겨/공관 6m 높이 담장위에 3겹 철조망/당뇨병 10년 앓아 매일밤 인슐린 주사/김정일과 관계 껄끄러운듯 비공식 연회 참가 안해 북한 권부의 요인과 특권층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또 특권계층인 혁명 2세대들은 어디까지 진출해 있으며 김정일의 측근실세들은 누구인가.서울신문 통일안보연구소는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북한 상층부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귀순자 강명도(36)씨와 최근 사흘간에 걸쳐 인터뷰를 가졌다.북한 권력서열 2위인 강성산 총리의 사위로 지난해 5월 귀순한 강씨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북한 특권층을 해부하는 시리즈를 6회에 걸쳐 연재한다.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재동에 있는 노동당 정치국원공관단지는 경관이 그림처럼 아름답다.해발 2백m 가량되는 봉화산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상오 6시30분쯤 잠자리에서 일어난 강성산총리는 잠옷차림으로 집안 뜰을 산책한다.20분남짓 공관주변을 돈 그는상오5시면 어김없이 배달되는 노동신문을 읽는다.이어 세면을 하고 7시20분쯤 아침식사를 든다.식탁엔 하얀 쌀밥과 쇠고기무국·김치·생선구이등의 찬이 오른다.당뇨로 고생하고 있는 그는 소식을 하는 편인데 밥은 16분도 특미로 지은 것.총리에게 공급되는 쌀은 껍질을 너무 깎아내 희고 길쭉하며 찹쌀처럼 진기가 있다.일반주민이 식량난으로 옥수수죽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전형적인 경제 테크노크라트로 두번째 총리를 역임하고 있는 그는 8시쯤 부관인 박영춘대좌(대령)가 대령한 벤츠 380을 타고 정무원청사로 출근한다.총리 차량번호는 2166666.차량번호 앞부분의 216은 김정일의 생일(2월16일)에서 따온 것으로 김의 전용차나 최측근의 차에만 부여하는 특수번호다.차안에는 카폰이 설치돼 있다.현재 그에겐 380외에 3대의 벤츠가 더 있다.가족용으로 230 한대가 있고 구형인 300과 94년에 김정일이 선물한 신형 500이 있다. ○부인과 연애결혼 정치국원공관단지의 하나인 서재동단지엔 현재 정치국원인 강총리 외에 같은 정치국원으로 부주석인 박성철·이종옥,인민군총참모장 최광 등 6명이 살고 있다.강의 부인인 전인숙은 정치국원공관단지의 반장일을 맡고 있다.나이는 강과 동갑으로 체코유학을 같이했고 연애결혼을 해 둘 사이는 좋은 편이다.강은 업무와 관련,집무실에선 부하에게 고함을 치면서 질책하는 일이 많으나 집에선 큰소리 한번 내는 법이 없을 정도로 가정적이다. 총리공관은 건평이 3백평을 넘는 석조 2층건물로 주위엔 2.5m 높이의 울타리가 쳐져 있다.또 널따란 공관단지는 꼭대기가 3겹철조망으로 된 높이 6m의 시멘트담으로 외부와 철저히 차단돼 있다.모통이마다 호위사령부에서 파견된 보초가 서 있고 정문에선 호위총국 소속 장교 2명이 출입을 통제한다. 공관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난방은 중앙난방이며 취사는 LP가스로 한다.1층엔 방 5개에 화장실 2곳,식당,욕실,전실,널찍한 응접실등이 있으며 김정일과 직접 연결되는 전화와 정무원에서 설치한 2대의 전화가 있다.2층엔 총리침실·서재·응접실·욕실·화장실등이있으며 2층에도 전화가 2대 놓여있다.식당엔 용량 4백50ℓ짜리 일제 냉장고 2대와 대형 가스오븐레인지가 있고 응접실에는 대형 TV와 VTR가 있다. 약 20분쯤 걸려 정무원에 도착하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기(비서실장격)가 맨먼저 집무실에서 하루일정과 처리해야 할 문건을 보고한다.강총리의 복장은 넥타이를 맨 양복차림이 많은 편으로,이들 양복은 김정일이 선물한 외국복지로 만든 것이다.총리집무실은 2층에 있으며 집무실 옆방에는 서기·부관·기술서기(여비서)가 근무한다.또 그 옆방엔 정치국원만 돌보는 봉화진료소 소속의 의사와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다. ○밤늦은 귀가 잦아 상오중에는 주로 문건을 검토하거나 업무지시를 하며 점심은 호위사령부 소속의 식료차에서 제공되는 식사를 든다.전임자인 연형묵은 부총리나 부장(장관)들과 함께 점심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강성산은 어울리기를 싫어해 대부분 혼자 한다. 하오에는 경제난타개를 위한 각종 회의주재와 계획검토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바쁘거나 밀린 일이 없으면 이따금 6시쯤 퇴근,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도 한다.저녁식사는 강냉이에 단콩등을 섞어만든 죽을 별미로 즐겨 든다.집에 일찍 돌아올 때는 외손자인 명인(4·사위 강명도 아들)을 제일 먼저 찾는다.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는 아들 영일(29)과는 시간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아 접촉할 기회가 적은 편이다. 그는 식량난등 경제문제가 잘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경우가 더 많다.그의 일과중 밤에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당뇨치료를 위해 인슐린주사를 맞는 일이다.그는 10여년간 주사를 맞아왔기 때문에 봉화진료소에서 나온 간호사가 주사놓을 곳을 찾는데 애를 먹는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집에 와서도 줄담배를 피운다.담배는 북한산은 거의 손에 대지 않고 양담배인 로스만이나 던힐등을 즐기며 하루에 3갑정도 태운다.비디오도 자주 보는 편이다.공관엔 비디오가 2대 있는데 그가 즐겨보는 것은 사위가 외국출장때 구해온 로키·람보등 미국영화가 대부분이다. 성격이 꼬장꼬장한 그는 외국에서 대표단이 올경우엔 연회에 참석하지만 김정일이 개별적으로 주최하는 주연엔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본인이 술과 기쁨조등 여자가 끼는 연회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성격상 김정일이나 그의 측근과 잘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김이 아예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강은 현재 북한 권력서열면에선 김정일 다음으로 높은 편이지만 실세가 아닌데다 아버지인 김일성이 총리로 재임명한 탓에 김정일과의 관계는 껄끄러운 편이다.게다가 지병으로 심신은 고달프고 경제문제마저 잘 풀리지 않는데다 사위귀순까지 겹쳐 요즈음은 총리자리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을 것이며 신상에 어떤 변화가 올지 몰라 불안하고 초조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 러,「신속대응군」 창설 거부 시사/「지위」 등에 의문점 많아

    ◎인테르팍스 통신/유엔안보리승인때 반대할 듯/유럽주둔 미군 실전훈련 【모스크바 AF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 주둔 유엔평화유지군 보호를 위해 파견할 신속대응군 창설을 위한 유엔안보리 계획에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할 지 모른다고 인테르팍스 통신이 5일 보도했다. 이 통신은 익명을 요구한 러시아 정부 고위관료의 말을 인용,러시아는 NATO 주도의 신속대응군 파견 제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많은 의문점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신속대응군의 지위에 대해 아직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NATO의 결정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러시아는 유엔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프랑스,독일이 참여하는 NATO의 신속대응군 창설은 유엔안보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본 로이터 연합】 유럽주둔 미군 1천9백명이 4일 보스니아주둔 유엔군의 비상배치상황에 대비하는 10일간의 실전훈련을 개시했다. 유럽주둔 미 제5군은 이날 헬리콥터지원을 포함한 실전사격훈련과 재급유,재무장훈련등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이번 훈련을 지휘하고 있는 리처드 브리지스 미육군대령은 『우리는 보스니아로부터의 긴급출동명령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브리지스 대령은 『우리는 아직 현지 배치명령이나 비상대기명령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보스니아에서의 가능한 비상임무에 대비하는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자연살리기 한마음으로”/서울신문사/환경감시 단체장 초청 간담회

    ◎7개 유공단체 시상 맑고 깨끗한 환경을 가꾸어 나가기 위해 「깨끗한 산하지키기 운동」을 펼쳐온 서울신문사는 5일 제23회 세계환경의 날을 맞아 상오 11시부터 2시간동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전국의 환경감시단체장 2백여명을 초청,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환경감시위원으로 활동해온 대한전몰군경 미망인회 등 일반가입단체와 육군 56사단장 강용부 소장 등 군부대 관계자들을 비롯해 손주환 서울신문사 사장,김인환 환경부 차관,박정태 한국도로공사사장,오경의 한국마사회회장,탤런트 박규채씨 등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서 예절바른 담배문화운동 중앙회와 사단법인 한배달이 내무부장관상과 환경부장관상을 받았고 깨끗한 산하지키기운동에 적극 참여해온 박정태 한국도로공사 사장과 오경의 한국마사회 회장,국방부 환경보전과장 양임석 대령,한국담배인삼공사 조원화 경기본부장 등 4명이 손사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한국조류보호협회,전남 요트협회,공군본부,서울 남대문중학교,보은여성 온누리 산악회 등5개단체는 서울신문사장상을 수상했다. 손주환 서울신문사장은 인사말에서 『산업화의 그늘속에 파괴된 자연을 되살리는데 우리모두 하나가 돼야한다』고 지적하고 『환경보전운동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와 가족·이웃·후손을 위한 운동이라는 인식을 새로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군당국의 적반하장/박재범 정치부 기자(오늘의 눈)

    23일 상오 국방부 기자실에서는 최근 주한미군이 잇따라 저지른 사고와 관련,이례적으로 주한미군측의 입장발표가 있었다. 주한미군 대변인 설리번 대령은 냉랭한 표정으로 미리 준비한 2쪽짜리 영문발표문을 30여분에 걸쳐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고 주한미군의 한 관계자가 곧바로 이를 통역했다. 주한미군측의 이날 입장발표는 전날 이양호 국방부장관이 주한미군의 시민폭행사고에 대해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에게 항의성 서한을 보낸 뒤라 한층 관심이 집중됐다. 주한미군측은 우선 『지난주말 일어난 지하철 여승객폭행사고 등에 대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이번 사건 등에 대한 한국언론의 보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주한미군측은 이어 『현시점에서 보면 지하철사건은 「술취한 미군의 행패」가 아니고 「정당한 희생자(Properly…Victims)」로 묘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주한미군의 논거는 『관련 한국인이 상당한 치료를 요한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으며 『지하철에서 성폭행은 없었고 오히려 주한미군이 한국인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는 논리가 이어졌다. 주한미군의 주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우리는 주한미군이 관련되면 사소한 사건이라도 부정적인 견해로 사건을 확대시키려는 그룹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이런 불공정하고 악의에 찬 견해에는 참을 수 없다(Cannot be distracted)』고 말했다. 주한미군측은 끝으로 『(우리가)여기에 주둔하는 것은 한국과 미국국민의 평화 때문이며 (우리는)한국이 원하고 미국이 필요로 하는 한 계속 주둔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한미군측의 입장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기자실은 미묘한 분위기에 빠져들었으며 이 분위기는 발표가 끝난 뒤에도 한참 계속됐다. 그것은 지하철 여승객성폭행사건에 대한 주한미군의 주장이 사실인가 아니면 억지인가 하는 진실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우리는 절대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무오류성」을 떳떳이 내보이는 미군 특유의 그 오만함에 질린 탓이었다.주한미군의 입장발표가 계속되는 동안 국방부 이웃 주한미군사령부 앞길에서는 한국경찰이 시위에 대비,검문을 강화하고 있었다.
  • 크렘린의 남침 결단(모스크바 새증언:4)

    ◎스탈린­모택동 비밀회동… “북 남침 지원키로”/김일성,중 공산화에 고무… “개전”고집/스탈린,“전쟁나면 북 지원”전문 보내/소,북 3개 정예사단 창설·「무기구입 차관」제공 약속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최초로 남침허용을 요청한 49년 3월부터 이듬해 1월 만찬장사건이 일어나기까지 10개월여 동안 적어도 표면적으로 스탈린은 전쟁 개시를 원치 않았다.49년 9월 툰킨 대사대리가 김일성의 옹진반도 점령계획을 보고한 것을 시발로 평양의 소련대사관과 모스크바 사이에 오간 전문들은 김일성이 남침 개시를 요청하고 스탈린이 이를 말리는 식으로 계속됐다.49년 10월30일부터 수일간 스탈린과 슈티코프대사간에 오간 전문들을 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기도를 막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읽을 수 있다. ○“전쟁기도 못 마땅” 스탈린은 9월24일 당정치국결정을 통해 김일성에게 남침불가를 통보한 바 있다.그러나 슈티코프 대사는 그후에도 김일성이 옹진반도점령,해방구건설 등에 미련을 못버린다는 사실을 계속 보고했다.이 일을 두고 스탈린은슈티코프 대사를 크게 질책하기에 이른다.『10월30일.슈티코프 대사에게 엄중경고함.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조선에 대해 국지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긴 대사의 행동은 적절치 못함.그런 도발은 우리의 이익에 매우 위험하고 적으로 하여금 대규모 전쟁을 시작할 빌미를 주는 것임.대사의 행동은 전적으로 무책임한 것임』 크게 놀란 슈티코프 대사는 이튿날 곧바로 해명전문을 스탈린 앞으로 띄웠다.『본인은 북조선 내무성에 파견된 우리 고문관 보두아긴 대령을 통해 북조선이 38도선을 침범치 못하도록 엄중 감시하라고 지시했음.본인은 북조선당국에게 남조선을 무력침공하라는 충고를 결코 한 바 없음』 스탈린은 이 해명에도 불구하고 11월20일 당중앙위 명의로 재차 경고전문을 슈티코프에게 보냈다.『귀하가 제출한 해명은 전적으로 불만족스러움.이는 바로 모스크바가 내리는 지시사항을 귀하가 이행치 않는다는 증거임.38도선에서 어떤 긴장도 발생시켜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대신 귀하는 이 문제를 놓고 토의를 벌였음』 호된 질책을 당한슈티코프 대사는 이후 김일성의 남침계획 관련 보고를 중단했다.대신 남한의 북침기도에 관한 보고만 수차 스탈린 앞으로 더 보냈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이러한 초기 입장을 바꿔 김일성의 남침의사에 동조하게된 것은 언제,무슨 계기가 발단이 된 것일까.그것은 바로 중국내전에서 모택동이 승리한 것이다.중국공산당의 승리로 가장 크게 고무된 사람은 바로 김일성이었다.김일성이 만찬장사건을 일으킨 것도 사실은 모택동의 승리에서 얻은 용기의 일단을 보인 것이었다.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을 해방시켰으니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김일성은 생각했던 것이다.더구나 모택동은 중국내전만 끝나면 북조선을 도울 수 있다는 언질을 여러차례 김에게 했었다.1950년 1월30일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답신이 스탈린으로부터 떨어졌다.모스크바에서 면담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소 차관 전용 허용 이날 스탈린은 전쟁불가를 고수하던 종전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다음의 전문을 슈티코프 대사 앞으로 보냈다.『…김일성 동지의 불편한 심기를 이해함.그러나 그가 지금남조선과 관련해 도모하려는 중대사는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도 이해해야 함.무엇보다 큰 위험부담이 없는 쪽으로 일을 꾸며야 함.그가 이 문제와 관련,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면 나는 항상 그를 만나 이야기할 준비가 돼있음.이런 나의 입장을 김일성에게 전달하고 이 문제에 대해 내가 그를 도울 준비가 돼있다는 점을 강조할 것』 김일성과 스탈린 사이에 구체적인 남침계획이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이 전문이 되는 셈이다.그러나 마치 면담허락의 조건인 양 스탈린은 이 전문에서 매년 최소한 2만5천t의 납을 소련에 공급해달라고 요구하며 『김일성이 이 요구를 거절하지 말 것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슈티코프 대사는 전문을 접수한 바로 그날 김일성을 만났다.이날 면담내용은 이튿날 스탈린 앞으로 보낸 보고전문에 상세히 기록됐다.『50년 1월31일.각하의 지시에 다라 김일성 동지를 만났음.김일성은 내가 전달한 내용을 매우 만족스럽게 받아들였음.동지께서 그를 만나겠다고 한 사실과 이 문제(남조선 해방문제)와 관련,그를 지원해 주겠다고 한 사실에 그는 매우 큰 감명을 받았음.김은 스탈린동지의 진의를 한번 더 확인하고 싶어 스탈린동지께서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 자기를 만나자고 한 게 분명하냐고 재차 물었음.본인은 이 전문내용으로 판단할 때 그렇다고 확인해주었음.김은 자기는 언제든지 스탈린동지를 만날 준비가 돼있다고 덧붙였음』 이와함께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소련이 요청한 납을 10∼15일 이내에 약속대로 보내겠다고 밝혔다. 이같은 전문을 보낼 바로 그 시점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은 모택동과 만나고 있었다.김일성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때 스탈린 모택동 두사람은 북한의 남침시 지원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그렇게도 전쟁을 애원했던 사람은 김일성이었지만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함과 함께 북한의 남침문제에 대해서 스탈린 모택동 두사람이 이니셔티브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2월2일 스탈린은 슈티코프 대사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다음 사항을 김일성 동지에게 주지시킬 것.그가 나에게 의논하고자 하는 문제는 현시점에서 완벽한 보안이 유지돼야 함.북조선의 다른 지도자들은 물론 중국지도자들도 알아서는 안됨.이는 적에게 비밀을 유지하기 위함임.…중략…지금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는 모택동 동지와의 회담에서 우리는 북조선의 군사력과 방어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이를 도울 필요성과 방안에 대해 논의했음』 이틀 뒤 김일성이 먼저 슈티코프 대사를 만나자고 요청했다.그리고는 즉각 다음의 문제들을 제기했다.(대통령문서소보관.슈티코프 대사가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50년 2월4일.김일성은 전군을 10개 사단으로 증강시키기 위해 추가 지상군사단을 편성하고 싶다며 본인의 의견을 물었음.본인은 이것이 매우 중대한 문제라고 답하고 우선 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이 있느냐고 물었음.아울러 이에 대해 조언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답했음.김일성은 소련정부가 51년도 분으로 주기로 한 차관을 50년도에 쓸 수 있도록 자기가 직접 스탈린 동지에게 요청토록 해달라고 했음.그는 이 차관으로 3개 지상군사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고 싶어했음.본인은 이 요청을 본국정부에 보고하겠다고 답했음』 스탈린은 2월9일자 전문을 통해 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다고 답했다.그는 이 3개사단을 엘리트장교,현대식 장비를 갖춘 정예부대로 만들라는 별도주문까지 덧붙여 보냈다.다음은 전문내용.『김일성을 만나 3개사단 창설을 추진하라고 이를 것.이 사단들은 경험있는 장교들과 훈련 잘된 사병,현대무기를 갖춘 정예부대로 만들어야한다는 점을 그에게 유념시킬 것.51년도분으로 책정된 차관을 50년도로 전용시켜 3개사단 창설에 필요한 무기구입에 쓰도록 승인한다는 것도 알릴 것』 ○「무력남침」못 박자 바로 이튿날 슈티코프 대사는 김일성을 만나 이 사실을 통보하고 곧바로 같은날 스탈린에게 그 결과를 보고했다.슈티코프 대사는 『김일성이 이 사실을 듣고 매우 기뻐했으며 원조에 대해 스탈린 동지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몇번이나 되풀이 했다』고 보고했다.이후 김일성은 모스크바 방문준비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방문절차와 관련,모스크바와 평양간 수차례 전문이 오갔다.3월20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만나 방문날짜를 4월초로 잡고 박헌영을 대동하고 싶다고 말했다.아울러 이번 방문을 1946년도와 마찬가지로 비공식(비밀) 방문으로 하고 싶다고 주문했다.방문준비는 모두 마쳤으며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다음의 사항을 논의하고 싶다며 회담의제를 내놓았다. 김일성이 제의한 이 의제는 3월21일자 슈티코프 대사가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①남북조선 통일 방안과 방법에 관해 ②북조선의 경제발전에 관해 ③가능하다면 당사업에 관해. 3월23일 슈티코프 대사는 이 의제를 더 상세히 정리해 다시 모스크바로 보냈다.①통일방안 ②경제문제 ③중·조선관계 ④아시아공산당,노동당의 협력문제 등으로 세분한 이 전문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이 ①항의 통일문제이다.그런데 3월1일자 보고전문에서 「남북조선통일 방안과 방법」으로 기술됐던 이 항목이 이틀 뒤의 이 전문에서 『남북조선 통일 방안과 방법.의도는 군사적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는 데 있음』이라는 쪽으로 바뀌어졌다.통일방안을 아예 「무력남침」으로 못박자고 김일성이 요청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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