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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5기 추락사고 물섞인 기름 주입 원인

    지난 달 14일 경북 문경에서 추락한 공군 F-5F(국산 제공호) 전투기의 추락 원인은 물이 다량 함유된 항공유를 주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25일 공군에 따르면 지난 달 14일 오후 6시37분 경북 예천비행장을 이륙한F-5E 전투기가 이륙한지 3분57초만에 추락한 원인을 조사한 결과 연료탱크의 대부분이 항공유 대신 물로 채워져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 전투기의 내부연료는 사고 전날 정상적인 연료탱크에서 주유됐기 때문에 지상 엔진 테스트과정에서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륙 직후내부엔진 연료를 소모한 뒤 연료탱크에서 물이 뒤섞인 연료가 공급돼 엔진가동이 멈추면서 추락했다는 것이다. 공군은 사고 직후 예천 16전투비행단 기지에서 사고기와 같은 외부연료탱크에서 주입된 전투기 7대를 조사한 결과 항공유 대신 대부분 물로 채워진 사실을 밝혀냈다.이들 전투기 7대는 사고 당일 저녁 비행계획이 없어 사고를면했다. 사고를 낸 16전투비행단은 매일 결로(結露)현상 등으로 발생하는 연료탱크내 수분을 빼주어야 함에도 방치했을 뿐 아니라 주유대와 주유차에 설치된여과기의 수분자동차단장치가 고장이 나 있었으나 확인 점검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매일 실시해야 하는 연료탱크의 수분함량 등 샘플링검사도 하지 않았다. 항공유에 물이 섞이게 된 것은 5년마다 실시하는 정기점검을 위해 지하에 매설된 대형 연료탱크(6번 탱크,5만 배럴)의 연료를 1만 배럴짜리 1,2,3,4번탱크로 옮기는 과정에서 6번 탱크의 바닥에 고인 물이 사고기가 주유한 탱크(3번 탱크)로 옮겨졌기 때문이다.6번 탱크의 바닥에는 2㎜×2㎝ 크기의 금이 두군데 나 있었다.공군은 예천전투비행단의 시설책임자인 40보급창장 김후식 대령과 예천전투비행단장인 김호동(공사 20기) 준장을 보직해임했다.또보급대대장 등 시설관리 실무자 4명을 구속했으며 나머지 관련자는 징계위에 회부할 계획이다. 우득정기자 djwootk@
  • 軍장성 인사 이모저모

    23일 단행된 군장성 정기인사에서는 육사 26기와 28기가 처음으로 군단장과사단장에 진출하고 육사 31기 선두주자 11명이 별을 달았다. 육군 준장진급 대상에는 지난 93년 ‘하나회’ 명단을 공개해 김영삼(金泳三)정부가 군내 사조직을 척결하는데 결정적으로 ‘공’을 세운 백모(육사 31기·청와대 근무) 대령이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백대령이 육사 동기생 가운데서도 선두주자로 별을 달게된 배경과 관련,“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으나 과거의 특정 행위 때문에 불이익이 주어져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면서 “개인의능력이 우선적으로 고려됐다”고 소개했다. 반면 하나회 출신은 진급대상 24∼25명 가운데 김모(육사 31기) 대령만 별을 달게 돼 대조를 이뤘다.국방부 관계자는 “93년부터 하나회 출신들이 진급과 보직에서 불이익을 받은 결과 지금은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면서 “하나회 출신들을 별도로 배려해 줄 계획도 없다”고 말해 하나회 출신들은 앞으로도 진급에서 계속 뒤처질 것임을 시사했다.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국방부의 핵심보직인 정책기획국장에 보임될 것으로 알려진 차영구(車榮九·육사 26기·정치학 박사) 전 국방부 대변인은 지난 6월 서해 교전 당시 남북한 해군간 무력충돌을 ‘부부싸움’에 비유했다가 정치문제화되면서 기구에도 없는 ‘공보보좌관’으로 밀렸으나 4개월여만에 재기했다. 차장군의 재기 배경은 국방부 정책실장 출신인 조성태(趙成台)장관과 박용옥(朴庸玉)차관이 그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는데다,이번 인사로 이상희(李相憙)정책기획국장이 중장 진급과 함께 군단장으로 진출하고 김인종(金仁宗)정책보좌관이 곧 대장 진급과 함께 군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정책라인에 공백이 생기게 된 점도 작용했다는 후문이다.후임 정책보좌관으로 물망에오르는 김모·선모(육사 25기) 중장은 국방부 정책업무에 전혀 경험이 없는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인사에서는 3사 1기(70년 임관) 2명이 처음으로 사단장으로 진출했다.또 육군 준장 진급자 50명 가운데 3사와 학군 출신은 지난해보다 각각 1명많은 12명,2명으로집계됐다.지역별로는 수도권 6명,충청 10명,호남 15명,영남 17명 등으로 고른 분포를 나타냈다. 국방부 정책조정과장인 한민구(육사 31기) 대령은 한말 충청권을 중심으로무장 독립운동을 펼쳤던 한봉수(韓鳳洙) 의병장의 손자이며,최종호(육사 30기)대령은 보병학교장으로 전역한 고 최영규 예비역소장의 아들로 부자가 장군이 됐다. ?오는 27일 대장 진급인사와 함께 실시되는 보직인사에서 현재 육군 중장이 맡고 있는 기무사령관 자리에 사단장을 거친 고참 육군 소장인 육사 26기출신이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지금까지 기무사령관에는 군단장을 거친 육군 중장이 기용됐었다.기무사령관에 소장이 보임되면 지난 93년 문민정부 출범 직후 기무사의 ‘위세’를 꺾기 위해 기무사령관의 직급을 소장으로 하향 조정한 뒤 두번째가 된다.기무사의 ‘실세’인 문모(육사 27기)준장은 이번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사상 처음으로 심사위원들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벙커에 갇혀 심의했다”면서 “진급 확정자 개개인에 대해 만장일치가 이뤄질 때까지 심사위원들 사이에 충분한 토론이 있었다”고 전했다. 우득정기자 djwootk@
  • 합참의장 曺永吉·육참총장 吉亨寶 내정

    정부는 오는 27일 단행되는 대장급 인사에서 합참의장에 조영길(曺永吉·갑종 172기)2군사령관을,육군참모총장에 길형보(吉亨寶·육사 22기)3군사령관을 내정한 것으로 24일 알려졌다. 이남신(李南信·육사 23기)국군기무사령관과 김인종(金仁鍾·육사 24기)국방부 정책보좌관은 대장 진급과 함께 3군사령관과 2군사령관에 보임될 것으로 전해졌다.강신육(姜信六·육사 24기)육군참모차장은 대장 진급과 함께 1군사령관에 기용될 것으로 알려졌다.기무사령관에는 김필수(육사 26기·합참작전기획부장)소장이 내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국방부는 이에 앞서 23일 정수성(鄭壽星·갑종 202기·보병학교장)소장을중장 진급과 동시에 군단장에 보임하는 등 군단장급 4명 외에 96명을 준장과소장에 진급시키는 장군 정기인사를 단행했다. 정기인사에서 육군 50명,해군 11명(해병대 1명 포함),공군 12명 등 73명이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했으며,육군 15명,해군 5명(해병대 1명 포함),공군 3명이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했다. 육군에서는 정 보병학교장 외에 신일순(申日淳·육사 26기)교육사령부 교육훈련부장,황규식(黃圭軾·육사 26기)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이상희(李相憙·육사 26기)국방부 정책기획국장이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군단장에보임됐다.또 류우식(柳雨植·육사 28기·육본 군수참모본부 기획처장)준장등 9명이 소장 진급과 동시에 사단장으로 진출했으며,신택균(申澤均·육사 26기·공병학교장)준장 등 6명은 소장 진급과 함께 임기제인 전문직위에 보임됐다. 국방부 관계자는 “군의 과학화와 전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발탁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면서 “학연·지연·혈연은 물론 일체의 청탁도 배격하고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고 말했다. 우득정기자 djwootk@
  • [21세기 여성시대](4)군인

    지난 97년 개봉됐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지 아이 제인(G.I.Jane)’은 오락물에 불과하다는 일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금녀(禁女)지대인 해군특수부대(SEAL)조차 이제는 벽을 허물어야 할 때가 왔음을 보여줬다.1차대전때 여성 군입대가 공식화되고 2차대전때 병과(兵科)확대가 이뤄진 이후 불과 50여년만에 여성의 군(軍)진출은 비약적인 속도로 이뤄져왔다.여성은 사병에서부터 장관까지,단순 사무직에서 전투기조종사에 이르는 거의 모든 병과에 진출,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이같은 개방화 속도로 미뤄볼때 21세기여군의 역할증대는 거역할수 없는 추세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사상 첫 여성 학과장직을 맡았던 실라 위드넬 박사는미 역사상 최초의 공군장관을 역임한 인물.그녀는 93년 30년간 몸담았던 강단을 떠나 현역군인만 38만명인 공군을 거느리고 군현대화,조달부문 개혁 등탁월한 업적을 쌓았다.97년 퇴임,강단으로 돌아간후 지금까지도 이름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예비역 해군소장인 로버트 해자드는 미군내 최고위 계급 여성으로 알려져있다.작전,훈련,인사 등 다양한 경험이 그녀를 해군 인사참모부장까지 이끌어갔다.이들은 현재 미군내 여성의 지위와 여군의 미래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역사상 여성의 군대 진출은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도 기원전 1300년전 중국상왕조 우딩(武丁)의 푸하오 왕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그러나 정식 여군으로 복무하게 된것은 1차대전때부터.그 전까지 여성은 남자로 변장한 다음에야 군인이 될 수가 있었다.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던오를레앙의 처녀영웅 잔 다르크도 ‘남자’로서 프랑스 군대를 지휘했지 여군은 아니었다. 여성이 정식으로 군에 입대할 수 있었던 것은 1차대전때.물론 간호와 사무에 한정됐으나 대우는 ‘최고’였다.1차대전말 미 여군 간호장병만 총3만4,000명에 달했다.여군 병과확대가 이뤄진 것은 2차대전때로 수송,기계수리,항공,첩보 등에까지 진출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50만여명의 여성이 암호해독과 레이더기지 운용 등 지원업무는 물론 적지에 투입돼 정보수집과 후방교란업무를 수행하는 특수작전도벌였다.인도계 영국인 베굼 누르는 프랑스 노르망디에 낙하된 최초의 여성스파이였다.암호명 ‘메덜린’으로 암약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앞서 1년여동안 정보를 보내다 독일군에 발각돼 44년 처형됐다. 유태계 폴란드인인 한나 세네쉬 역시 유고에서 첩보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23살의 나이에 총살된 비운의 주인공이다. 러시아 여군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80만명의 여군중 70%가 전방에서 독일군과 교전을 벌였다.티토의 빨치산 투쟁에는 200만명의 여성이 가담했다가28만2,000명이 처형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여성은 독립투쟁의 선봉장이었다.나이지리아에서1929년 일어난 ‘아바봉기’는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기를 든 ‘여성의 전쟁’으로 유명하다.국민당과 싸웠던 중국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의 대장정에는 35명의 여성당원이 끝까지 길을 같이 했다. 현재 미군내 여군은 육군과 해병대만 각각 3만2,000명과 4만8,000명.공군장교의 15%,사병의 10%가 여성이다.아파치 공격헬리콥터를 몰며 탱크를 호위하는 여군의 모습은 이제 더이상 생소하지 않다.‘사막의 폭풍’작전때만 4만1,000명 여군이 참전했다. 박희준기자 pnb@ * 韓·日 여성지도자 세미나 개최 여성의 힘을 빌어 ‘21세기 한-일관계’를 새롭게 모색해보려는 대규모 한일(韓日) 교류행사가 열린다. 한국여성유권자연맹(회장 이춘호)은 창립 30돌을 맞아 일본 여성 지도자 500여명을 초청,오는 24일∼26일까지 서울 힐튼 호텔에서 양국 여성지도자 세미나를 가진다. 세미나 주제는 ‘21세기 여성의 정치적 역할’.한일 여성국회의원을 비롯해지방의원, 지방자치단체장의 배우자,학계 및 여성단체 대표,여성 경제인,여성 언론인 등 한일 여성지도자 1,000여명이 참석하는 이번 세미나는 여성계최초의 대규모 한일 양국교류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이번 세미나는 일본 자민당의 모리야마 마유미 의원을 비롯,양국 모두 초당적인 입장에서 여성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해 양국 여성정치발전에 관해 진지한토론을 열 예정이다. 구체적인 논의과제는 제1주제인 ‘새천년을 향한 여성의 정치세력화’와제2주제인 ‘21세기 여성의 가치변화를 주도할 주요 요인’.이중 제1주제에대해선 ▲21세기 정치세력으로서의 여성의원의 비전(김정숙 국회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정치인 배우자는 정치자원이 될 수 있는가(김정옥 이해찬 국회의원 배우자)▲여성지방의원과 생활정치의 이상(안상현 강원도 의원) 등의소주제로,제2주제와 관련해서는 ▲멀티미디어를 통한 여성의 가치변화(신낙균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한일대중문화와 여성(하윤금 방송진흥원 연구원)▲사이버시대의 여성경제활동에 대한 전망(최영희 내일신문 발행인)▲여성의 정보화와 정치세력화(손봉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등의 소주제가 토론된다.일본측에서도 각 1인이 발표자로 나선다. 특별행사로는 참가비(각 10만원)로 마련한 장애인 전용버스 증서(1억2,000만원)를 한국지체장애인협회에 전달하는 뜻깊은 행사와 함께 이번 세미나를위해 일본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준 야시로 에이타(八代 英太) 일본 우정장관 등에 대한 공로패 수여식이 있을 예정이다. 연맹의 이춘호 회장은 “한일 여성지도자들의 잦은교류를 통한 이해를 바탕으로 양국 여성이 진정한 동반자로서 여성문제 뿐 아니라 제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2000년에는 일본 삿뽀르에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한일 양국 여성지도자 교류세미나를 정례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경옥기자 ok@ * 한국 女軍의 어제와 오늘 한국 여군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50년 9월 피난지 수도 부산에서 여자 의용군 491명으로 창설됐다.당시 여자 의용군은 정보수집,수색활동을 비롯,군가보급,간호활동을 벌였다.의용군은 곧 해체되고 51년 육군본부에 여군과가 설치돼 여군에 대한 인사행정업무를 처음으로 다루게 된다. 여군의 독자적 훈련기관인 여군 훈련소가 서울 서빙고에 창설된 것은 55년. 이후 여군은 여군처로 개편(59년)되고 70년대 들어 여군훈련소와 여군대대를예속부대로 한 여군단으로 확대되는등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기갑,포병을뺀 모든 병과에서 남자에 못지 않은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여군은 간호장교 800명을 포함,2,000명 가량.창설이후 2만명의 여군이배출됐다.엄옥순(嚴玉順·43)여군학교장과 민경자(閔慶子·47) 육군본부 여군담당관이 현역중 최고직위인 대령으로 재직하고 있다.예비역으로는 13대여군 병과장을 지낸 정영숙(鄭瑛淑) 여성단체협의회 수석부회장과 김화숙(金和淑) 재향군인회 여성회장이 사회에서 활동중이다. 여군의 최대숙원은 장군 배출.엄옥순·민경자 대령이 입대 26년이 되는 2001년 육사 31기와 함께 장군진급심사 대상에 들어간다.보수적인 군문에서 최초의 여성 장군이 탄생될지 관심을 끈다. 황성기기자 marry01@ *역대 최고의 女戰士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여전사(女戰士)는 누구인가.미국의 인터넷 정보제공 업체인 ‘네트 사라소타’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중국의 화무란(花木蘭),미국의 몰리 피처,베트남의 트룽 자매를 꼽았다. 잔 다르크는 15세기 백년전쟁 때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험에 놓인 나라를구해낸 프랑스의 여걸.소작농의 딸로 군대를 이끌고 오를레앙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둬 영국의 침략야욕을 분쇄했다. 1429년 영국군에 의해 포위된오를레앙에 군대를 이끌고지원을 나간 잔 다르크는 위험을 무릅쓰고 선두에서서 병사들을 독려,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여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냈다.1920년 5월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성인으로 추증됐다. 화무란은 5세기 중국 북위(北魏)시대때 흉노족의 침입으로 강제 징집령을받은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하고 전쟁터에 나가 큰 공을 세웠다.미국의월트디즈니사가 화무란을 ‘뮬란’이라는 제목의 만화영화로 제작,98년 전세계에 개봉함으로써 널리 알려졌다. 특히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그해 중국 방문전 이 영화를 보고 동양적 충효사상에 감명을 받아 중국을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미 독립전쟁 때 맹활약한 몰리 피처는 본명 메리 매컬리보다 별명 ‘몰리피처(물주전자 몰리)’로 더욱 유명하다.남편 헤이스와 함께 뉴저지의 몬머스 전투에 참가한 그녀는 쉴틈없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부상병과 갈증에허덕이던 병사들의 목을 축여줘 이 별명을 얻었다.포병인 남편이 쓰러지자자신이 직접 포수가 돼 싸움이 끝날 때까지 싸웠다. 베트남의 트룽 자매도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여전사들.트룽 트락과 트룽니 자매는 1세기 중국 후한(後漢)의 지배를 받고 있던 베트남의 공주들이다. 중국군이 트락을 성폭행하고 남편을 살해하자 8만명의 반군을 조직,거대 중국에 대항했다.뛰어난 게릴라 전으로 당시 중국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빼앗은 것은 물론 세력권을 중국 남부까지 확대했다. 김규환기자 khkim@
  • [고시촌 24시] (8)고시원 주인의 애환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고시촌에 공부를 하진 않지만 고시생들과애환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바로 고시원 주인들이다. 고시원 주인들이 하루를 여는 시간은 보통 새벽 5시.7시부터 고시생들에게아침 식사를 ‘대령’해야 하기 때문에 이 때부터 움직여야 한다. 영양만점의 식단은 고시생을 끌어모으는데 큰 역할을 하는 만큼 고시원 주인들이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기본식단만으로는 수험생들의 까다롭고 제각각인 식성을 만족시킬 수 없다.때문에 매일,매끼니마다 식단을 짜는 것이 고민거리다.때맞춰 삼계탕,보쌈,심지어는 보신탕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공부하는데 가장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특히 환절기를 큰 탈없이 지낼 수 있도록 환기·실내온도 조절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신경이 예민해질 수 밖에 없는 고시생들을 상대하는 만큼 고시생들의불편·불만사항이 눈에 띄면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한다. 수험생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시험날이면 바짝 긴장한다.신림9동 K고시원 주인은 “시험날에는 왠지 하루종일 안절부절하게 된다”고 말한다. 고시촌이 형성될 무렵 고시원 주인의 운영방침은 ‘엄격한 규율’이었지만요즘 들어 ‘자율’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기본적인 에티켓은지킬테니 상관하지 말아달라는 고시생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자유로운 분위기를 원하는 신세대 수험생들이 늘고 있어 ‘호랑이 같은 주인아저씨 등쌀에 공부를 안하고는 못배긴다’는 말은 이미 옛말이다. 다른 학생들의 핸드폰 소음으로 공부에 방해가 된다거나 밤늦게 왔다갔다하는 사소한 문제 때문에 애꿎은 고시원 주인이 고시생들과 충돌하게 되는일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고시원 주인들에게 또 하나의 고민거리가 생겼다.지난 9월 행정법원에서 ‘고시원은 여관업에 속한다’는 판결을 내려 최고 10%의 부가가치세를 내야 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IMF 경제위기 이후 방값을 30%까지 내려도 빈방이 채워지지 않는데,10%의 부가세까지 내야한다며 한숨이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많은 고시원 주인들이 두통과 위염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하소연한다.하지만 고시원 주인들은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신림2동의 K씨는 “우리 고시원을 거쳐간 판·검사만 해도 수십명은 넘을 것”이라고 자랑한다.수십명의 예비 법조인과 고위공무원을 돌봐주는 ‘어버이’라는 긍지다.까닭에 남들 생각만큼 수지도 맞지 않고 힘들지만 쉽게 그만둘수 없다고 고시원 주인들은 말한다. 최여경 장택동기자 kid@
  • “제2의 노근리사건 다신 없어야”

    [로스앤젤레스연합]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21보병 연대 전우회는 14일노근리사건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서한을 에릭신세키 미 육참총장과 제임스 존스 해병대사령관에게 전달키로 했다. 21보병연대 전우회는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맨처음 파견됐던 태스크 포스 스미스부대원 540명 중 생존해 있는 장교 및 사병 출신 19명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전에서 많은 전과를 올려 무공훈장을 받은 칼 F 버나드 미 예비역대령(73) 등 회원들은 이날 전우회 명의의 서한에서 “노근리사건의 교훈은 간단하다”면서 미군에 대해 “보이스카웃의 격언처럼 (전투에) 대비하라”고 충고했다. 이 서한은 “우리는 (한국전에) 대비하지 못했다”며 “오늘날 육군이 전장에서 싸울 태세가 더 잘 돼있고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진정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버나드씨가 대표집필한 서한은 “이라크,레바논,아이티,소말리아,코소보,동티모르의 정치군사적 돌발사태는 군·민 첩보기관들의 유능함,즉 정책결정자들에게적시에 신뢰할 만한 방법으로 위험상황을 설명하는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버나드씨는 이런 서한을 보내려는 이유에 대해 “미 육군과 해병대가 다시금 노근리사건과 유사한 유혈 희생을 치르지 않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고밝혔다. 그는 “한국전쟁 초기 우리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면서 “AP통신이 수치스러운 사건을 매우 분명하게 보도하고 있는데도 그런 희생은 아직 주목받지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고령 ‘득성교 폭파’ 참가 美장병 인터뷰

    [뉴욕연합] “미안할 뿐이다.그러나 당시는 전쟁상황이었고 어쩔 수가 없었다” 미 제14전투공병대대 출신으로 지난 50년 8월3일 경북 고령군의 득성교 폭파에 참가했던 캐럴 킨즈먼(71·미시시피주 고티어시)씨는 14일 전화회견에서 폭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득성교 폭파 당시의 상황은. 미 21사단으로 생각되는데 폭파준비를 마치고 마지막 미군 병력이 다리를건너기를 기다렸다.다리 위에 많은 피란민 행렬이 있었지만 미군 병력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폭파명령이 내려졌다. ■누가 명령을 내렸는가. 당시 현장에 대령이 나와 있었다.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까지기다리다 폭파명령을 내렸다. ■득성교 위에는 얼마나 많은 피란민이 있었는가. 나는 250여명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다리 위가 꽉 찬 것으로 보였으며 500∼1,000명까지 추정하는 동료도 있었다.다리를 폭파한 뒤 곧바로 트럭을 타고 현장을 떠났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란민이 죽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다리 위에 있던 피란민들이 모두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리를 폭파한 것이 필요한 조치였다고 생각하는가.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한다.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폭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다리 폭파 직전에는 멀리서 북한군의 T-34 탱크 굉음이 들렸었다.한국어 통역을 통해 ‘다리가 곧 폭파되니 뒤로 물러서라’고피란민들에게 경고하고 머리 위로 위협사격을 했지만 필사적으로 다리를 건너려 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당시 나이와 계급은. 21세였으며 상병이었다.한국전에는 50년 7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1개월간참전했다. ■이 사건과 한국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좋지 못한 일이지만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미군 부대 PX에 일하던 한한국여성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해줘 고맙다”는 참전에 대한 감사의 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전쟁이었고 적이 한국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했으며 우리는 한국을 돕기 위해 그곳에 갔다.
  • 6·25참전 美軍증언

    [워싱턴 AP 연합] 1950년 8월 3일 미군은 왜관교와 고령교를 폭파하면서 수백명의 양민도 함께 숨지게 했으며,이 일이 있기 전에도 피란민들에게 총격과 포격을 가해 숨지게 했었다고 미 참전병사들은 증언했다. 제대군인인 에드워드 L.데일리는 왜관교의 경우 북한 인민군의 남진으로 밀려드는 피란민들을 저지하기 위해 피란민 머리 위로 경고 사격을 했지만 별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피란민의 남하를 저지하는데 실패한 미 1기갑사단 사령관 호바트 게이 소장의 지시로 왜관교에 장전한 폭약을 터뜨렸으며,폭발과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고 교량 지지대들이 산산조각났다고 데일리 등 다른 병사들이 전했다. 왜관교에서 40㎞ 하류에 위치한 길이 195m의 고령교 폭파도 이보다 약간 앞서 일어났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 육군 공병이었던 조지프 이포크는 “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외쳤지만 다른 병사들이 ‘폭파해야 한다.달리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제14 전투공병대 병장 출신의 캐럴 킨즈먼은 “제 14 공병대가 이틀간에 걸쳐 3,000㎏의 폭약을 설치한 뒤 당일 오전 7시 1분에 폭파 명령이 떨어졌으며 이어 폭발과 함께 다리가 산산조각났다.당시 다리에는 피란민들이가득했다”고 말했다. 앞서 1기갑사단 병사들은 다리 폭파가 있기 하루 전인 2일 수십명의 다른군인들과 함께 낙동강으로 퇴각중이었으며,이들 뒤를 80명 가량의 흰옷 입은 한국인 피란민들이 뒤따르고 있었다고 참전병사들은 전했다.그런데 오후 민간인으로 가장한 5명의 인민군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당시 상황을 에드워드 데일리는 “북한군이 발포하자 즉각 사살했다”고 말한 반면,유진 헤슬먼은 “인민군들이 항복해 끌려갔다”고 엇갈린 증언을 했다.헤슬먼은 “인민군들이 피란민 사이에서 나왔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우리는 피란민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대부분 사살했다”고 말했다. 이보다 1주일 전쯤에도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160㎞ 떨어진 철길을 따라 걷던 피란민 수백명에 대해 미군의 박격포 공격이 이뤄졌다고 1기갑사단 재향군인들은 회상했다. 제임스 맥리어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대령이 포대에 무전을 보내 그들이 남하하지 못하도록 죽이라고 지시했다”면서 “포탄이 떨어진 뒤 팔다리,몸뚱이가 어지럽게 널렸다”고 덧붙였다.
  • [문명자 회고록] 비화 3공의 실체들 (5) 5‘16 막후

    케네디는 죽기 전 마지막 국무부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당시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필자는 그 한마디에 흥분하여 “박정희 쿠데타는 오래가지 못한다”라고 단정하는 기사를 본사에 송고했다.케네디가 결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당시 30대 초반의 나로선 젊은 케네디의 이상,정의감,프런티어정신,그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미국의 국익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5·16 당시 미국의 행적에는 의문스런 점이 한두 가지가아니다.주한 미 대사관의 대리대사로서 맥그루더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5·16 반대성명을 발표했던 마셜 그린은 그후 미국으로 돌아와 케네디 행정부의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를 역임했다.필자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적이있다. “왜 미국은 5·16을 진압하지 못했나요?” “코리안 전체가 한물 갔어요.모두 기회주의자요.내가 쿠데타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고 하니까 윤보선(尹潽善·작고)대통령이 ‘우리 군끼리 충돌하면 언제 북괴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쿠데타와 같은 국가위기의 순간에 총리라는 사람이 수녀원에 숨어서나오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5·16은 장면(張勉)정부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지난 95년 위컴 당시 주한미군 부사령관의 측근으로부터 5·16 당일 반도호텔에 있던 장면을 지프에 태워 혜화동 깔멜수녀원으로 이동시킨 것이 바로 위컴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그는 직책은 부사령관이었지만계통은 정보라인이었다.박정희의 쿠데타를 뒤에서 봐줄 수 있는 위치였던 것이다.위컴은 당시 반도호텔에 장기투숙하고 있었는데, 5·16 직후 반도호텔에 피신한 장면으로 하여금 반도호텔 뒷문으로 나가서 준비된 지프에 타고깔멜수녀원으로 옮겨가게 했다는 것이다.그런데 장면이 미8군이 아닌 깔멜수녀원으로 간 것이 누구의 의사였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필자는 어쨌든 위컴이 장면을 미8군으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미국측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그 사실은 미국측이장면을 그리 달갑게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위컴의 측근에 의하면 5·16직후 당시 연평도에주재하며 사목하던 한 유명한 미국인신부를 가톨릭신자인 케네디에게 보내 5·16군사쿠데타 세력들을 인정해주라고 호소하게 한 것도 바로 위컴이었다. 바로 그런 위컴의 행적을 미 국무부 사람들이 몰랐을까? 미국이란 나라의생리상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결국 표면적으로 주한 미국대사관과 미8군 사령관은 쿠데타 반대성명을 내 합헌정부인 장면 정부를 지지했다는 명분을 확보하는 한편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은밀히 쿠데타세력을 지원했다고 볼수밖에 없다.이제와서 돌이켜보면 5·16을 둘러싸고 미국인들이 서로 짜고쇼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정부가 장면 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미 국무부는 ‘부산정치파동’ 이전부터 장면을 지지했으며 4·19혁명으로 장면이 집권한 이후에도 장면을 도와주었다.그런데 5·16후 미 국무부의 한 관리가 “장면 박사가 무력했기 때문에 한국내에서 쿠데타를 꾸미던 세력이 다섯이나되었다”고 말한 것을 볼 때 미국은 5·16직후 장면 정권에게 쿠데타 기도에 맞서 내부를 단합시킬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그렇게 안될 경우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인사들과 협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워싱턴에서 5·16군정 승인문제,공석이던 주한 미대사 부임(새뮤얼 버거),박정희 장군 방미 등 주요 외교문제가 거침없이 수행된 것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63년 11월 케네디 암살후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나의 기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언젠가 나는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한 딘 러스크에게 “한국이 언제 통일되겠는가”라고 질문한일이 있다.그는 “당신이 살아서는 못 본다”고 대답했다.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45년이 지났다.그의 말이 사실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그와 얘기중에 ‘38선’문제가 나왔다.놀랍게도 그는 “38선은 내가 그었다”고 말했다.그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청했다. “1944년 나는 미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 정책과에서 대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한 날 밤 일본군에 제시할 항복문서중 한반도와 극동지역 부분들에 대한 초안을 작성해서 30분 안에 올리라는 긴급과제가 정책과에 떨어졌다.그때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일은 소련이 수용할 수 있는 선을 그어 그 이남으로는 소련의 진주를 저지하는 것이었다.나는 정책과장 본스틸 대령과 상의한 끝에 38도선 정도라면 (한반도)절반을 공평하게 분할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경성(서울)과 미군포로수용소,주요 항만시설이 (38선 이남에) 있다는 것이 유리한 점이라고 판단,38선을 그어 전략정책단에 보냈다.그런데 소련이 그걸 수용해 뒷날 38선이 됐다” 엄청나고도 어이없는 얘기였다.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분단문제를 일개 미 육군 대령들이 30분만에 처리했다는 것이다.뒤에 이와 관련된 국무부 문서가 공개돼 당시 내가 소속됐던 동아일보에 이를 송고했던 기억이 난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문명자 회고록 내가 본 朴正熙와 金大中](1)

    대한매일은 미국 US 아시안뉴스 서비스 주필인 문명자씨의 미공개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을 단독입수,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연재합니다.문씨는 지난 73년 ‘김대중납치사건’을 국내에 보도한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이후 30여 년간 미국서 활동해온 현역언론인입니다.그동안 그는 국내에서 접할 수 없는 한국관련 고급정보를 목격하고 기록해 왔으며 이번 회고록은 이같은 내용들을 토대로 한 것 입니다.회고록에는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는 물론 한·미관계의 이면사를 처음 공개한 것도 상당수 포함돼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도 큰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73년 4월 15일 대만대학에 박사학위를 받으러 간다며 한국을 빠져나온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이 며칠후 미국에 나타났다.그것은 영락없는 도망길이었다. 5·16 쿠데타의 주동인물중 하나였던 그는 그후 출세가도를 달렸다.63년 5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김형욱은 박정희를 위해 별명처럼 ‘곰’같은 충성심을 발휘하는 한편 자기자신을 위해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치부를 했다.이같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유는 자명했다.수십년간 충성해온 수하들을 하루 아침에 내치고 잡아넣는 박정희의 냉혹성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김형욱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 신분으로 남미를 방문하고 뉴욕에 들렀을 때였다.그때 나는 MBC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유엔 취재차 뉴욕에 있다가 당시 컬럼비아대학 연수생으로 와 있던 동아일보 기자 이웅희(李雄熙·현 무소속 국회의원)와 함께 김형욱과 뉴욕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후 나는 그와 수 차례 만난 적이 있다.73년 11월 내가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후 그는 내게 “문 여사,용감한 결심을존경합니다.우리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입니다”라며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그는 내가 망명을 선언한 후 부쩍 자주 전화를 걸어왔는데 “김대중 납치범 명단을 내가 다 가지고 있는데 때가 되면 가르쳐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77년 1월 김형욱은박 정권의 미국 의회 부정로비사건 조사를 위해 구성된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채택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들과 함께 유럽여행을한 적이 있다. 그는 뉴욕 케네디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낯뜨거운 사건이 발생했다.김형욱이 달러를 밀반입하다가 세관원에게 걸린 것이다.내가 그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유태인 친구의 제보 때문이었다. 세관원은 오리걸음(덕 워킹)으로 걸어 들어오는 동양남자가 뭔가 숨긴 것이틀림없다고 확신,김형욱을 멈춰 세웠다.꼭 아편쟁이같이 생겨 마약밀수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헤이,유,스탑”(여보,좀 멈춰요). “미?”(나요?). “예스,유”(예,당신말이오). 더욱 한심한 일은 세관원이 그를 불러 세워 몸수색을 하려 하자 김형욱은 한국식으로 세관원을 협박했다고 한다.“내 몸을 수색해서 아무것도 안나오면너 그냥 두지 않겠다”.“오케이”.세관원은 보안관에게 명령했다. “데려가 발가벗겨”. 보안관이 김형욱을 방으로 데려가 발가벗겼는데 그는 무려 7만5,000달러의돈뭉치를 다리에 붕대로 둘둘 감고 그 위에 여자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79년 10월 7일 김형욱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후 나는 교토통신의 요코가와 워싱턴특파원과 함께 처음으로 뉴저지에 있는 그의 저택을 방문한 일이있다.그의 부인 신영순(申英順·在美)에게 주소를 물어 찾아간 그의 집은 웬만한 미국 부호의 집 못지않게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실종 직전 김형욱은 이른바 ‘회고록’ 출판문제로 박 정권과 막판 거래를하고 있었다.박 정권은 김형욱에게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는 대가로 50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하고 이미 100만∼150만 달러를 먼저 지불했다고 한다.김형욱은 그 나머지 돈을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결국 실종되고 만 것이다. 김형욱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우선 중앙정보부가 파리에 온 김형욱을 납치,살해한 후 센강에 버렸다는 설도 있었고,또 산 채로 짐짝처럼 포장해 KAL기에 실어 서울로 데려갔다는 설도 있다. 그 무렵 우리 사무실에 프랑스어로 된 익명의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은 김형욱이 KAL기 짐칸에실려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의 한 항공사 화물부에 문의를 해보았다.“사람을 짐짝처럼 싸서운송하는 것이 가능합니까?”.“산소가 부족해 호흡이 곤란하고 온도·습도가 낮아 사람이 짐칸에서 파리∼서울간 15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이래저래 취재는 벽에 부딪쳤고 나는 김형욱의 사인규명을 거의 포기했다. 그런데 80년대초 나는 뜻밖의 루트를 통해 김형욱의 사인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정보에 접하게 되었다.발설자는 정일권(丁一權) 전 국무총리였다.그는유럽을 여행하던 중 파리에서 자신이 신뢰하는 모 인사(본인의 요청으로 신분을 밝힐 수 없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잔인하다 잔인하다 했지만 박정희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잘못했다고비는 김형욱이를 자동차에 실어 그대로 폐차장에 밀어넣어 버렸다네”그의 말에 따르면, 산 채로 서울로 납치해간 김형욱을 차지철이 경복궁에서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대령했는데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잘못했습니다.죽여주십시오”하고 빌었다는것이다. 정일권의 말대로라면 김형욱은 폐차장 압착기 아래서 최후를 맞았다는 얘기가 된다.정일권의 입장에서 보면 김형욱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던 ‘이북파 최측근’이었으니 분개할만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같은 사실을 정일권 본인을 통해 거듭 확인한 바 있다.지난 8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얏트호텔에서 정일권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김형욱이가 서울로 잡혀와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으시다는데 사실인가요?”“예,내가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그것은 사실입니다”. 정일권은 말년에 암에 걸려 고생하다가 94년 타계했는데 내가 그를 본 것은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文明子씨 일문일답 ■회고록을 출판하게 된 동기는. 역사를 위한 기록이다.한국사회는 가치의 혼돈시대를 맞고 있다.이대로 한세기만 지나면 한국사회에는 박정희를 미화하는 기록만 남을 것이다. 오랫동안 미국의 권부를 가까이서 취재하면서 나는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사실들을 많이 보고 들었다.우리 후손들의 역사인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바람으로 그동안 보고 들은 박정희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 ■회고록의 제목은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인데 박정희 전대통령에 관한 부분이 70% 정도를 차지하는 있는 것 같은데…. 61년 5·16쿠데타 때부터 시작해 82년 김대중씨가 사형수에서 사면을 받고워싱턴에 왔을 때까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박정희씨는 이미 관 뚜껑에 못을박은 사람이고 김대중씨는 아직 활동하는 현역 정치인이 아닌가. 김대중씨에대한 기록은 또다른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문 주필의 박정희 전대통령 비판에 대해 일각에서는 주관적이라는 지적이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박정희에 대해서 나는 한 언론인으로서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그러나독자들은 나의 책에서 사실만을 보면 된다.1961년 4월이후 현재까지 워싱턴에서 벌어진 한국정치 관련사건들을 사실에 입각해 기록했다.사실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문 주필의 회고록에는 특정인들의 실명이 거침없이 거론되고 있는데…내가 실명을 거론한인물들은 한국정치사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다.그들은 공직에 취임함으로써 이미 역사의 심판대 위에 스스로 올라선것이다. 나는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언론의 익명문화다.육하원칙의 가장 첫번째 요소가 ‘누가’이지 않은가.한국의 언론인들은 혈연·지연·학연의 인간관계 속에 깊이 편입돼 있어 실명을 거론하지 못한다. 퇴직후에도 그 인간관계 속에서 살길을 찾아나가야 하므로 ‘익명의 문화’는 극복되지 않는다.내 경우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사회에서 떨어져 40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다. ■그동안 ‘반한인사’ 또는 ‘친북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이에대한 본인의 견해는? 유신정권때인 70년대까지는 ‘반한인사’로 불렸는데 80년대말 남북 고위급회담이 본격화된 후 북한취재에 나서면서 ‘친북인사’로 호칭이 바뀌었다. ‘반한인사’,‘친북인사’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용어로 전혀 타당하지않다.굳이 말하자면 ‘반박정희 인사’나 ‘반유신인사’라고해야 옳다.‘친북’도 그렇다.남북은 같은 민족이다.서로가 ‘친북’도 하고 ‘친남’도해야 한다.‘친미’나 ‘친일’,‘친중’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94년 김일성 주석 사망후 ‘100일설’부터 ‘3년설’까지 북한붕괴론이 대단했다.내가북한에 가보고 와서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고 했더니‘친북인사’라고 했다. 한반도 남북에 사는 사람들은 분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보는 시야도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스스로 외눈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두 눈으로 보는 사람이 편파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운현기자] -文明子씨는 인가 문명자(文明子·70)씨는 38년째 미국 권부의 상징인 백악관을 출입하고 있는 현역 재미교포 언론인이다.73년 11월 당시 보도금지 사항인 ‘김대중납치사건’을 보도한 후 중앙정보부의 체포위협을 피해 미국에 ‘정치망명’을한 전력으로 그동안 국내에선 그의 활동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80년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초청으로 미국 여기자단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덩샤오핑을 인터뷰했으며 90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방북취재를 시작한이후 92,94년 두차례에 걸쳐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했다. 30년 대구 출생인 문씨는 숙명여고 졸업후 연세대 영문학과 1학년 재학중 6·25를 맞아 피란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유학,메이지대 경제학부·와세다대국제법 대학원을 졸업했다. 61년 조선일보 워싱턴특파원을 시작으로 동아일보,경향신문,MBC 워싱턴특파원을 역임한 그는 73년 미국에 정치망명한 후 미국인 동료기자들과 함께 US아시안뉴스 서비스(통신사)를 설립,국제정치담당 주필로 일하고 있다. 동양통신 초대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남편 최동현(崔潼鉉)씨와 사이에 1남 1녀.그의 미국이름 주리 문(Julie Moon)은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지어준 것이다. [정운현기자]
  • ‘노근리 사건’ 풀리지 않는 의문들

    [뉴욕 AP 연합] 한국판 ‘킬링 필드’ 노근리 사건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많은 의문들로 가득차 있다.미 국방부 내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피란민들에게 발표 명령을 내린 지휘관은 누구인가.피란민들이 미군에게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는가.미군 지휘계통의 어느 선까지 노근리의 진상이 보고됐는가. 육군 진상조사단은 이와 같은 풀리지 않은 의문들의 답을 구하기 위해 참전용사들로부터 보다 상세한 증언을 확보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그러나 이 모든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확보한다 해도 국방부가 왜 노근리 사건의 기초적인 사실들을 더 이전에 적발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답변은 국방부만이 할수있다. AP통신은 지난달 말 수개월간에 걸친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10여명의 참전용사들로부터 한국전쟁 초기인 50년 7월말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제7연대가노근리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향해 기관총을 쏘았다는 증언을 얻어내 보도했다.일부 제7연대 출신 참전용사들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중대장이었던 멜번 챈들러 대위가 현장에서 “모두 없애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증언했다. 그러나 이들은 챈들러 대위가 무전을 통해 연대본부와 사전협의를 했을 것으로 믿고 있으며 한 참전용사는 대대 수준의 장교가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했다.그렇다면 더 윗선의 지휘계통,예를 들어 제7연대와 제1기갑사단 지휘부는 과연 노근리 사건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는 그리 용이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현장 지휘관이었던 챈들러 대위는 70년 숨졌고 다른 대대 장교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챈들러 대위의 상급 대대를 지휘했던 허버트 헤이어 대령은 88세 고령인데다 병을 앓고 있고 “학살사건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말하고 있어 육군 조사관들이 그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제1기갑사단 복무규정은 피란민을 포함,방어선을 넘으려고 시도하는 그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장병들이 발포할 수 있다는 규정을 담고 있다.다른 이웃 사단에서는 한 장군이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 전선을 책임지고 있었던 미8군 사령관 월튼 H 워커 중장이,나아가서 도쿄에 체류하면서 한국 전쟁을 총괄했던 2차대전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이 그같은 불법적인 명령을 재가했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대두된다.또한 사후보고도 어느 선까지 올라갔는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노근리 피란민 학살사건 규명에 나선 미 육군은 증언 확보에 앞서 먼저문서 검토를 통해 스스로에 대해 잘못은 없었는지를 엄정히 물어야 한다.
  • “軍, 세계평화에 적극 기여”

    1일 계룡대에서 열린 국군의 날 기념식을 지켜보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감회는 여느 해와는 사뭇 달랐을 것 같다.기념식에서는 동티모르 파병부대인 상록수부대의 파병신고가 있었기 때문이다.김 대통령이 파병부대장인 박인철 대령에게 지휘봉을 수여하는 등 신고식은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김 대통령은 기념연설에서 93년 소말리아 공병부대 파견 이래 7차례에 걸쳐 유엔평화유지군을 파병한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제 우리 군도 세계평화에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특히 “우리는 이번 파병을통해 의리를 아는 나라,인권과 민주주의에 헌신하는 나라로 국제적인 신뢰를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국제무대에서의 강한 자신감 피력이다. 김 대통령이 또 강한 톤으로 북한의 행태를 지적한 것도 동티모르 파병에따른 우리의 안보 의지를 확인시키기 위한 언급으로 이해된다.김 대통령은“비참한 식량난과 경제난에도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터무니없는 목표를 갖고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북한”이라고 직접화법을구사했다. 기념식 후 계룡대 벽천호수에서 열린 경축연에서는 군의 안정과 발전,그리고 정치적 중립을 거듭 강조했다.무엇보다 “정치적 중립을 의심하는 군인은 더 이상 없으며,3군 또한 어느 때보다 화합·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 대통령은 행사 참석자 3,500명과 함께 특전사 요원들의 태권무와 태권도,특전사 비호부대 병사들의 특공무술,공군 특수비행팀의 공중분열과 에어쇼등을 관람하고 귀경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동티모르 파병 상록수부대 朴仁哲단장

    “동티모르의 평화와 안정 회복을 위해 중립적인 위치에서 치안임무에만 전념하겠습니다” 동티모르 파병에 앞서 29일 오후 육군 흑룡부대에서 창설식을 가진 상록수부대 단장 박인철(朴仁哲·육사 34기·3공수 참모장)대령은 유엔의 지침을철저히 준수하면서 동티모르의 평화 회복과 한·인도네시아 우호 증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다음은 박 단장과의 일문일답. ■발탁 배경은 동티모르에 파병되는 한국군 평화유지단을 지휘 통솔하고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민병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특전부대 경험자가 낫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특전사 대대장과 작전참모,참모장 등을 역임한 것이 단장으로 발탁된 배경이라고 본다. ■작전의 중점 분야는 한국군 평화유지단은 다국적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부여된 책임지역내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동티모르 평화와 안정 회복을 위해 중립적인 위치에서 치안임무를 수행하겠다. ■대민 지원활동 계획은 지원부대인 의무·공병·통신부대는 다국적군의 활동을 지원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그러나대민지원 수요가 있으면 가용 범위내에서 적극 지원하겠다.또 현지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할 수 있는 기념품을준비,주민들과의 유대를 강화할 계획이다. ■교전 등 불상사 발생시 대응방안은 평화유지군의 임무는 전쟁을 억제하고안정 회복을 위한 치안활동을 하는 것이다.따라서 부대원들에게 감정에 치우쳐 우발행동을 하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시키는 등 돌발사태 예방에 최선을다하겠지만 무장 민병대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면 교전규칙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우득정기자 djwootk@
  • 상록수부대 파병 일정

    국방부는 28일 동티모르 파병 규모를 장교 67명을 포함,419명으로 최종 확정했다. 군은 29일 오후 3시 특전사 흑룡부대 연병장에서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동티모르 파병부대인 ‘상록수부대’ 창설식을 갖는다.특전사 3공수여단 참모장 박인철(朴仁哲·육사 34기)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상록수부대는 흑룡부대원 201명과 의무·공병·통신 등 지원요원 172명,지휘 및 본부요원 46명 등으로 구성됐다. 상록수부대원들은 30일까지 개인 전술훈련을 끝낸 뒤 10월1일과 2일 기본소양교육을 받으면 준비과정을 모두 이수하게 된다.이들은 열대성 풍토에 적응할 수 있게 장티푸스·파상풍·A형 간염 접종을 마쳤으며,추가로 말라리아·일본뇌염·홍역 예방접종 등을 받을 예정이다. 상록수부대는 오는 30일 선발대 50∼60명이 공군 수송기 C-130편으로 호주타운스빌로 출국하는데 이어 본대는 1,2진으로 나뉘어 10월 4일과 9일 출국한다.이들은 호주 도착 즉시 1주일간 현지 적응훈련을 받은 뒤 10월17일쯤동티모르로 이동한다. 상록수부대는 개인 화기 외에 장갑차 17대,81㎜ 박격포 2문 등으로 무장돼있다.장갑차와 지프,식량 등 장비는 10월6일쯤 부산항에서 대형 수송함 LSD에 탑재돼 동티모르의 딜리항으로 수송된다. 상록수부대원에게는 하루에 사병 31달러50센트,대령 63달러20센트의 위험·전투수당이 지급된다.현지에서 교전 등으로 사망하게 되면 36개월분의 월급이 보상금으로 지급된다. 우득정기자 djwootk@
  • 北, 장성급회담서 위협

    유엔사와 북한군은 1일 오전 판문점 군사정전위 회의실에서 제11차 장성급회담을 갖고 북측이 제기한 서해상 북방한계선(NLL) 조정문제를 놓고 논의했으나 서로 종전 주장만 되풀이했다. 북측은 이날 회담에서 지난달 17일 열린 제10차 장성급회담에서 자신들이제의한 새로운 해상경계선 설정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한과 미국,한국이 참여하는 실무급회담에 유엔사측이 호응할 것인지 여부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유엔사측은 이에 대해 ‘NLL은 지난 46년간 쌍방이 준수해온 실질적인 경계선으로 협상 대상이 아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협의할 사안이며 북측이 요구하는 실무협의도 군사공동위의 테두리 내에서 추진할 용의가 있다”고 응수했다. 북측 대표단은 “경계선 설정을 거부하고 NLL을 고집하는 것은 정전협정을포기하고 침해하는 행위로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면서 “조선인민군은 북측수역을 지키기 위해 단호하고 결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편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북측 대표단이 주장한 ‘단호하고 결정적인 조치’와 관련,북측의 상투적인 위협 표현으로 평가했다. 이날 장성급회담에는 유엔사측에서 던 미군 소장·금기연 한국군 준장·베이커 영국군 준장·토레스 프랑스군 대령이,북한군에서 이찬복 중장·조동현소장·박임수 대좌가 참석했다. 우득정기자 djwootk@
  • 예산절약 9개기관에 성과금 42억원 지급

    기획예산처는 27일 국방부 등 9개 기관이 올 상반기에 326억원(14건)의 예산을 절약해 총 42억원의 성과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육군 군수사령부 양승태 주사는 군납품 포장박스 규격을 개선해 재활용함으로써 5,600만원을,해군본부 병기처장 이일순 대령은 미국 유도탄 수송업체를 미 군용기에서 국내기로 바꿔 2억9,200만원을 절약해 1인당 최고 한도인 2,000만원을 받았다. 행정자치부와 국세청,병무청,관세청 등 4개 기관은 정원 203명을 줄여 감축된 정원의 1년 인건비 41억원을 성과금으로 받았다.이 돈은 각 관서가 재량으로 쓸 수 있다.내년부터 203명의 인건비는 전액 삭감된다. 국방부는 일상적인 업무추진에 필요한 경상경비 5,800만원을 절약해 2,100만원을 성과금으로 받았다.내년 예산에서는 절약액의 30%가 삭감된다. 이와 함께 법무부와 건설교통부,병무청,해양경찰청,국방부 등 5개 기관은주요 사업비 240억원을 절감해 6,200만원을 받았다. 손성진기자 sonsj@
  • 醫師 병무비리 무더기 적발

    병역 대상 치·의과대학 졸업자나 전문의들이 신검 담당 군의관들에게 뇌물을 주고 병역면제나 공중보건의 판정을 받았다가 군검찰에 무더기로 적발됐다.뇌물액수는 500만∼5,000만원이다. 국방부 검찰부(부장검사 高奭대령)는 23일 이같은 병무비리로 병역을 면제받은 14명과 공중보건의 판정을 받은 8명 등 의사 22명을 적발,사건기록을대검찰청에 넘겼다고 밝혔다. 군검찰은 또 군의관과 짜고 의병전역하면서 질병등급을 올려 전·공상자 판정을 받은 뒤 보훈혜택을 받아온 12명 등 의병전역자 52명을 비롯,병역면제자 78명,공익근무요원 판정자 24명,보훈신검 청탁자 3명 등 병무비리 관련자 157명의 수사기록도 검찰에 넘겼다.이들에게 뇌물을 받은 군의관은 모두 12명으로 이들 중 일부는 지난번 발표된 1·2차 병무비리 수사와 관련,이미 기소된 상태다. 군검찰은 이번 수사결과는 서울을 제외한 전국 지방병무청과 군병원에서 95년부터 98년 사이에 저질러진 병무비리라고 밝혔다. 한편 군검찰은 전국적으로 340여건의 병무비리와 10∼20여건의 군치·의신검비리 혐의자를 추가로 포착,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김인철기자 ickim@
  • 대한매일신보 직원출신 임치정·이교담 선생 사진 첫공개

    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직원출신 임치정(林蚩正)· 이교담(李交담)선생의 활동 당시 사진이 후손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15일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李貞園·50)씨는 본지 창간 95년을 맞아언론학자인 정진석(鄭晋錫·신문방송학)한국외국어대 교수를 통해 이 사진을본지에 공개했다. 사진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임치정 선생으로 임선생은 1904년 미국에 건너가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부총무 겸 회계사무 책임자를 지냈다.이교담 선생 역시 도산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의 인쇄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귀국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업무직 사원으로 근무하였다.정진석 교수는 “흔히 대한매일신보라고 하면 발행인 배설(裵說)과한국인 논객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만 떠올리기 쉬우나 임·이 두 선생은 이 분들을 도와 신보의 운영을 이끌어온 행동파였다”며 “이들은 일찍이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거나 외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자 애국지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두 사람의 복장과 사진 하단에 기록된 내용으로 봐 1907년 8월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사진 하단의 ‘한국경성(京城) 천연당사진사(天然堂寫眞師) 김규진(金圭鎭)’이라는 기록은 천연당 소속사진사 김규진이 촬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20일자 광고란에는 천연당의 개업광고가 실려있다.또 두 사람의 복장은 1906년에 개정된 대한제국 장교의 정장차림으로 앉은 사람(임치정)의 계급은 정령(正領·현 대령),서있는 사람(이교담)의 계급은 부위(副尉·현 중위).군대경력이 없는 두 사람이 어떤 연유로 장교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는지는 정확히알 수 없다.그동안 이 사진을 소장해온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씨는 “할아버지께서 미국서 찍은 다른 사진과 함께 이 사진을 보관해 왔으나 할아버지의 군대경력에 대해서는 할머니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정진석 교수는 “군대해산(1907.8.1) 직후 구 한국군을 기념해 사진관에서 복장을 빌려 촬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했다. 두 사람은 언론활동 이외에 항일투쟁사에서도 이름을 남겼다.임선생은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총감독(당수) 양기탁 선생 밑에서 재정간사를 지냈으며,‘안명근(安明根) 사건’,‘105인 사건’ 등에 연루돼 수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또 이선생은 1910년 1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양기탁 선생 등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이선생은 후손이 보훈당국에 서훈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정운현기자 jwh59@
  • 병무비리 관련자 명단

    의병전역 비리▲구속(알선수수) △박길주(48·예비역 중령)△박민식(52·예비역 원사)△임득규(52·예비역 대령)▲불구속(공여) △진동언(55·무직)△안원희(53·주부)△강의신(46·〃)△김종기(47·의류판매업)△정상철(56·노동)△송향자(53·주부)△정애돌(45·보험설계사)△이태관(57·상업)△유영애(50·주부)△이기동(53·건설업)△오세린(55·음식점경영)△구현애(50·〃)△정봉열(53·회사원)△빈창호(52·동국엔지니어링 대표)△최판수(59·무직)▲약식기소(공여) △김중희(50·주부)△김성기(64·은행원)△윤영만(57·무직)△배문자(49·주부)△김위영(55·대한정책개발연구소장)△이종희(52·야쿠르트 배달원)△신재수(57·무직)△허경(45·상업)△고경희(42·주부)▲기소중지(공여) △박창식(53)△최순희(52)△최종기(44·무직) 공익요원 판정 비리▲불구속(공여 및 수수) △임채호(52·회사원)△박종명(55·화인종합건재 전무)△진윤희(45·주부)△한영호(47·부동산중개업)△강대호(55.전 병무청 서기관)▲기소중지 △양태근(40·전 병무청 7급 직원) ▲참고인 중지 △이건혁(60·무직) 병역면제 비리▲구속 △이상호(69·보석판매점경영)△김만식(55·무직)△김병승(54·대우프로농구단부장)△배계옥(52·주부)△정재호(49·현대프로야구단홍보부장)△정재효(63·무직)△조문길(58·전 병무청 6급)△김진대(51·〃)△이상직(67·무직)△이상진(67·예비역 상사)△조진구(45.병무청 공무원)△여창대(51·부동산임대업)△정종대(52·자영업)▲불구속 △백철호(47·무직)△권정숙(50·주부)△조명숙(53·의류판매업)△이상용(53·제과점경영)△이병식(60·무직)△이석범(57·한국종합화학 상무)△권병무(48·병무청 6급)▲기소중지 △성치용(55·전 대한한의사협회 사무총장)△최경희(50·전 강남구청 병무계장)△하중홍(50·병무청 6급)△백민석(55·예비역 중령)△엄기동(58)▲참고인중지 △서정진(49·주부)△이상호(52·한의사) 군인·군무원▲구속 △이홍기(45·국군기무사 군무원 5급)△허남걸(49·국군대구병원 군무원 7급)△김수정(50·국군기무사 군무원 4급)△장치영(51·육군3군사 헌병대 준위)△이민성(35·국군수도병원 소령)
  • 유엔司·北 장성급회담 합의점 못 찾은채 종결

    주한 유엔군사령부­북한군간 제8차 장성급회담이 2일 오전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에서 열려 서해상 긴장완화 방안 등을 논의했으나 별다른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끝났다. 북한측은 오전 10시8분부터 1시간25분여 동안 열린 회담에서 “서해사태는남측이 북한 영해를 침범한 데서 비롯됐다”면서 “북방한계선(NLL)을 무조건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북한측은 이어 ▲NLL 인근 수역에서 남측 함정의 철수 ▲영해침범 및 군사도발 중지 ▲서해교전 관련 책임자 처벌 및 보상 등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유엔사측 대표들은 “서해교전은 북측의 장기간 남한 영해 불법침범과 선제공격에 의해 발생했다”고 지적하면서 NLL은 쌍방이 46년간 인정하고 지켜온 엄연한 해상경계선으로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했다. 유엔사는 또 북측의 보상요구 등의 부당성을 일일이 반박하고 NLL 인근에서의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해 ▲함정간 신호규정 마련 ▲유엔사­북한군 비서장간 직통전화 설치를 제의했다. 유엔사는 아울러 서해상 긴장완화 및 충돌방지를위한 공동노력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합의문을 작성하자고 요구했으나 북측은 이를 거부했다. 유엔사 관계자는 “지난 6·7차 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서해상 선제공격 주체와 NLL 영유권 문제 등을 놓고 양측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으나 서해상 긴장완화를 위해 추가적인 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회담에는 유엔사측에서 마이클 던 소장(미국)과 금기연 준장(한국),존 베이커 준장(영국),프란세즈 토레스 대령(프랑스) 등 4명이,북한은 이찬복 중장과 조동현 소장,박임수 대좌 등 3명이 참석했다. 김인철기자 ic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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