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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고위간부 잇단 충성맹세/김일성사망 충격 벗어가는 북표정

    ◎김정일,당·정간부 대동 다시 빈소찾아 ○…김정일은 13일 당정 간부들을 대동하고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된 김일성영구를 다시 찾아 애도를 표시했다고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14일 보도. 이 자리에는 군장병들과 각계각층 주민들도 함께 했으며 김정일은 『가장 비통한 심정을 안고 김일성의 영전에 묵상하고 수령의 영구를 돌아보았다』고 이 통신은 전했다. 중앙통신은 또 당시 「조의장」은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였으며 참가자들은 김정일의 영도를 충성으로 받들어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할 불타는 결의를 다졌다고 소개. ○…김일성사망을 조문하기 위한 조총련대표단이 12일 항공편으로 평양에 도착. 조총련 본부와 지부 대표들,산하 사업체 간부들로 구성된 이 대표단은 이날 당비서 김용순을 비롯한 북한 관리들의 영접을 받았다고 북한 방송들은 전했다. 특히 북한 방송들은 일본 출발시 책임부의장 허종만이 인솔했던 이 대표단의 평양도착 소식을 전하면서 대표단 단장이 북한에 장기 체류중인 조총련의장 한덕수임을 강조해 눈길.○…북한 중앙방송은 13일 핵문제로 그동안 갈등을 빚었던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김일성 사망 관련 동향을 관심있게 보도. 이 방송은 김일성 사망과 관련한 지난 11일의 유엔총회 의장대변인 성명을 소개한데 이어 유엔경제사회이사회의 애도 표시,세계기상기구 총국장의 조의표명 등 관련 움직임을 상세히 보도. ○…지난해 3월 북송된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노인이 12일 김일성의 빈소를 찾아 오열했다고 중앙방송이 13일 보도. 이인모는 이자리에서 『앞으로 40년은 더 살수 있을 것이라고 하더니 이게 웬말입니까』라고 울부짖으며 조의록 말미에는 「당신의 전사 이인모」라고 밝혔다고. ○…북한은 13일 김일성 사망에 즈음하여 러시아 정계·사회계 인사들과 러시아주재 각국 외교사절이 지난 11일 모스크바주재 북한대사관을 조의방문했다고 뒤늦게 보도. 북한의 이러한 보도태도는 러시아가 북한이 옐친대통령의 조전발송 사실과 내용을 보도하지 않은데 대해 불만을 표시한 직후 나온 것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김일성 사망에 애도를 표시하기위해 국제태권도연맹총재 최홍희를 비롯한 재미동포 3명이 13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북한중앙방송이 보도. 최홍희는 이날 평양비행장에서 당비서 김용순 및 북한태권도위원회 위원장 차병옥의 영접을 받았으며 재미교포 김진경,문명자(여기자)등도 각각 조문차 평양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모두 친북성향의 재미교포들이다. ○…북한군고위간부들이 김일성사망 엿새째를 접어들면서 잇따라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 북한 해군사령관 김일철(대장)이 14일 김일성사망 「반향」에서 군부고위인사로서는 처음으로 김정일에게 충성과 효성을 맹세한데 이어 노동당 중앙위원 겸 군대장인 이하일도 이날 「반향」을 통해 군최고사령관인 김정일에 대한 충성과 한께 사회주의위업의 계승완성을 다짐한 것으로 평양방송이 이날 보도.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 총장이 지난 12일 유엔주재 북한대표부를 찾아 김일성의 사망에 조의를 표시했다고 중앙방송이 14일 보도. 갈리 총장은 김일성 초상화앞에서 애도를 표시하고 조의록에 서명.
  • 북한 통신시설/민간용 낙후… 군사용은 첨단

    ◎김일성사망 34시간 “깜깜”… 북녘 통신실태 알아보면/전화 100명에 5대꼴… 통화증가 감지 안돼/미사일발사 전산망·위성통신 대단한 수준 미국을 포함한 우리측이 한반도 주변에 첩보위성 등 최첨단 통신감청장비를 동원하고도 김일성의 사망을 34시간 동안이나 몰랐던 것은 북한사회가 워낙 폐쇄적인데다 통신시설 낙후로 특별한 통화증가현상 등이 감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의 일반전화는 유선망이 대부분이고 외부 감청이 용이한 무선은 군용 무전기와 방송용,극소수 특권층의 위성통신 등에만 이용되고 있을 뿐 휴대폰과 무선호출기 등 이동전화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함께 정보화사회의 척도로 불리는 전산분야는 일부 군사용과 연구용 등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우리의 70년대 중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북한의 통신시설을 전화와 전산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전화=국제전기통신연합(ITU)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에 보급된 전화는 88년말 74만회선이며 그후의 통계자료는 없다.북한은3차 7개년계획(86∼93년)을 통해 전화를 2백만회선으로 늘리려고 했으나 경제난으로 추진실적이 저조,현재 1백만회선 정도로 추정된다. 전화는 전체의 90% 이상이 공중전화이고 개인용은 10%에도 못미친다.개인용은 고위 당간부나 지방 주요기관장급들의 몫이고 일반 주민들은 평양·함흥 등 대도시의 경우 시내 주요거리나 백화점 등에 설치된 공중전화(동전전용)를 이용한다.시·군지역에서는 체신소의 공중전화를 이용하고 농촌지역에는 이마저 없어 기관에 찾아가 용건을 기록한 뒤 전화를 사용하고 있다. 전화보급률은 1백명당 4∼5대로 우리(38대)의 13% 수준이고 평양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계 및 수동식 교환기를 사용한다. 위성통신은 84년 인터스푸트니크(공산권 통신위성기구)에 가입한후 프랑스와 구소련의 기술지원으로 인텔세트(국제해사위성기구)및 인터스푸트니크 지상지구국을 건설하는 등 국내통신에 비해서는 상당한 수준이다.특히 87년에는 대동강변에 지하 1층,지상 14층 규모의 국제통신센터를 건설,인도양 및 태평양위성을 통해국제전화 수십회선과 텔렉스·팩스·사진전송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산=지난 82년 일본으로부터 부품을 수입,8∼16비트급 컴퓨터를 생산해오고 있다.「기술혁명」차원에서 각급학교에는 대부분 보급돼 단편적 기능습득에 중점을 두고 있다. 네트워크는 지난해 완공한 평양의 「조선콤퓨터센터」를 중심으로 구축중이나 형편없는 수준이며 「평양프로그람센터」와 김일성대학,김책공대 「콤퓨터요원 양성센터」 등에서 SW를 개발하고 있다.특히 「평양프로그람센터」에서는 최근 한글WP 「창덕」을 개발했고 김책공대에서도 DOS의 조문화(한글화)를 완성,활용 및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군사용 전산망의 경우 사무 및 보급품관리 분야는 초보단계이나 미사일 자동발사 등 지휘통제용은 상당수준에 이른다는 것이 우리 군관계자의 설명이다.
  • 조선왕조때도 없던 일이…/「울음바다 평양」을 보며/이문구

    북녘 김형에게 계속되는 불볕 더위에다 북한 주민들의 딱한 모습까지 겹친 요즈음 얼마나 답답하십니까.하지만 저도 답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붓을 들었으니 양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따지고 보면 김일성의 사망이야 말로 그리 뜻밖의 일도 놀라운 일도 아닐 뿐 아니라 아쉽고 섭섭한 일도 아니었습니다.살만큼 살다가 갈 때가 되어서 간것 뿐이니까요.더욱이 향년 여든둘은 누가 뭐래도 호상이 아닐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물론 이쪽에서도 그의 죽음에 일말의 아쉬움을 느낀 사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요.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처럼 합의를 봤던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된 데에 대한 아쉬움,다시 말하면 「죽으려면 일찌감치 죽든지 아니면 좀더 있다가 정상회담이나 하고 죽든지」했어야 옳다는 평론적인 여운이 흐른 것 뿐이었고,지상의 약속보다 지하의 예약에 따라 영결종천 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의 한계 내지 일종의 자연현상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쪽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저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느닷없이 왠 기미년(1919년)고종황제의 인산장면이 다나오나 하고 착각을 했었습니다.흰저고리와 검정치마가 그렇고 남녀노소 없이 땅바닥에 부복하여 호천고지하는 호곡이 그러했습니다.그렇지만 그것은 소년소녀의 붉은 목도리와 그네들 앞에 버티고 선 것이 대한문이 아닌 높이 36m짜리 황금칠을 한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 동상이었기에 역사책에서 본 제국시대의 흑백사진이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 수가 있었습니다.한결같이 체통도 없이 인사불성이 되어 가슴을 쥐어뜯거나 이마를 땅에 짓찧어가며 몸부림치고 울부짖는 꼴도 또한 황제의 인산에 없는 장면이었습니다.따라서 저 사람들도 과연 김씨 이씨 박씨 정씨 최씨 등 2백49성의 하나로 이쪽 사람들과 똑 같이 김치하고 밥먹는 한 동포란 말인가 하고 의심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그들의 본적지가 모두 김일성과 같이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의 만경대라고 하더라도 그토록이나 낯선 몰골로 일사불란하게 발작하여 실성할 수가 있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우리에 갇혀살면서 「당신이없으면 우리도 없다」는 「주체성 없는」구호가 입에 발리도록 주체사상 교육으로 세뇌당한 49년 세월을 접어 생각하면 이해를 못할 바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주체사상 교육의 본질이 저마다 타고난 주체성을 제거하고 객체성으로 대체해 우상에 대한 종속물로 처리함과 아울러 집단적인 성형수술을 겸행하여 얼굴없는 인간으로 개조함에 있었으니,오늘날의 집단적인 히스테리야말로 주체사상 교육의 성공적인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당신만 있으면 우리도 이긴다」고 받들어온 김정일의 재산상속을 기정사실화 하고 「슬픔을 힘으로 바꾸어 또다른 한 분의 탁월한 수령으로 오늘의 비통을 용기로 바꾸자」는 구호를 제창하게 된 것도 주체사상 교육을 가장한 「객체사상 교육」의 성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쪽도 갑자기 초상난 집에 상주가 어리석거나 줏대가 없으면 으레 집안싸움이 일어나기 십상입니다.하물며 그쪽에서 졸지에 신을 잃은 사람들의 허망과 허탈감인즉 오죽하겠습니까.쑤셔놓은 벌집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짐짓 꿀벌의사회를 생각해 봅니다.꿀법이 새 여왕벌의 등장과 함께 분봉할 때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습니다.외부의 자극을 받아 흥분하면 주인도 못 알아보고 덤비는 것이 꿀벌의 자기방어 본능입니다.그러나 일부러 자극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 여왕벌을 비롯하여 수벌과 일벌도 조용히 제 일에 매달리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구태여 고종황제 인산 때의 조문객이 만세운동으로 돌아섰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동해와 서해에 새로운 「보트 피플」의 출현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분봉이 안정되면 꿀을 물어나르듯이 그쪽 나름의 개방과 개혁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 인공수정 시술병원 64곳 지정/의학협회 인준

    대한의학협회(회장 유성희)는 12일 인공수태 시술을 할 수 있는 의료기관 64곳을 최종 확정,인준했다. 전국 1백4개 병원의 인력및 시설 조사 결과를 토대로 선정된 인공수태 시술기관은 ▲체외수정및 비배우자 인공수정 시술 병원 20곳 ▲체외수정 시술 병원 42곳 ▲비배우자 인공수정 시술 병원 2곳이다. 의협은 이에 앞서 지난해 5월 일부 의료기관이 불임환자에게 인공수정 시술을 하면서 정액제공자에 대한 에이즈검사등을 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인공수태 윤리에 관한 선언」을 제정했다. 의협은 앞으로 인공수태 시술자의 윤리의식을 제고해 나가는 한편 인공수태 시술 의료기관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지도·감독을 펴나갈 계획이다. ■체외수정및 비배우자인공수정 시술기관=원주기독병원 경희의료원 피엘산부인과 서울대병원 고대안암병원 대한산부인과의원 태릉성심병원 함춘여성의원 강산부인과의원 의료법인중앙병원 영남대병원 포항선린병원 동국대경주병원 부산대병원 부산백병원 계명대동산병원 경상대병원 울산동강병원 전남대병원 경북대병원.
  • “김정일,당·정·군 완전장악/총서기·주석직 모두 맡을것”

    ◎정부관계자/당정치국 비밀회의서 추대 결의했을지도 북한의 김정일은 김일성사망 4일째인 11일까지 권력승계작업을 사실상 완료하고 김일성이 갖고있던 당총서기직과 주석직을 모두 이어받을 요식절차를 곧 밟을 것으로 12일 관측됐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김정일이 11일밤 당정군 핵심인사들과 함께 김일성을 공개참배하는등 북측의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이미 김정일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현재 북한 내부는 안정돼있으며 어느 부문에도 불안정한 조짐이 발견되지않고 있다』고 전하고 『북한이 지난 20년간 김정일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해온 점과 김정일의 건재등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분석해볼 때 김정일이 당총비서직과 국가주석직을 모두 맡아 단일지도체제를 구축할 것이 확실시된다』고 분석했다. 현재 북한은 김정일을 총서기나 주석으로 선출하기 위해 당중앙위 전원회의나 최고인민회의 소집에 앞서 당정치국 위원등 권력핵심멤버들이 비밀회동을 갖고 김정일을 총서기와 주석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정부당국은 분석하고 있다. 한편 김정일은 11일 하오 9시 평양 주석궁에서 권력핵심요인인 오진우인민무력부장,강성산정무원총리,이종옥·박성철·김영주부주석,김영남외교부장,최광인민군총참모장등 당정군 고위간부들을 대동하고 김일성 시신을 공개참배함으로써 자신의 지위가 확고하게 구축됐음을 내외에 과시했다. 통일원의 한 관계자는 이와관련,『당정군 고위간부들의 김일성 집단참배에 오진우·최광및 이을설호위총국장등 주요 군간부들이 대거 참석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는 김정일이 권력향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 김성애 “담담” 김경희 “오열” 대조적/상중의 북한 이모저모

    ◎“김정일과 불화설” 김영주 공개참배/북방송,“김사망에 백두산천지 요동” 북한이 11일밤 TV방송을 통해 공개한 김일성 시신과 김정일의 공개참배 광경은 남측을 비롯한 외부세계의 촉각을 모으기에 충분했다.그동안 김일성의 사인이 베일에 가려졌던데다 김정일이 모습을 전혀 나타내지 않은 가운데 권력의 향배가 어떻게 될지 많은 궁금증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사망(8일)한지 93시간만인 이날 하오 9시 평양 금수산 의사당(주석궁)지하에서 진행된 이 행사는 조곡이 은은히 울려퍼지고 실내조명이 어둑하게 비치는 가운데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수정관에만 밝은 조명을 집중적으로 비쳐 자못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 ○…「김일성화」로 보이는 조화로 둘러싸인 수정관속의 김일성은 얼굴에 특별한 상처가 없이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인민복 차림으로 붉은 자주색 모포를 가슴까지 덮고 있었으며 잠을 자듯 둥근 베개가 베어져 있기도. 김일성의 얼굴은 사망 나흘째임에도 변색흔적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망 즉시 영구보존 처리에 들어간것으로 추측되기도. 또 수정관앞에는 공화국영웅및 노력영웅 메달과 각종 훈장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으며 국방위원회 위원장 군최고사령관 명의의 김정일 화환과 노동당·당중앙군사위원회·국방위원회·중앙인민위원회·정무원 명의의 화환이 시신 주위를 장식. ○…고위 당정간부 1백여명을 대동한 채 인민복 차림으로 참배장소에 도착한 김정일은 평소 알려진 모습과는 달리 초췌한 모습. 입장직후 무엇인가를 묻는듯 손가락으로 김일성의 시신쪽을 가리킨 김정일은 옆사람에게 잠시 말을 건네는듯 했으나 시종 굳게 입을 다문채 침통한 표정. 시신을 향해 머리 숙여 참배한 뒤 수정관 주위를 둘러보던 김정일은 간간이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벗어 눈물을 훔치기도. ○…이날 첫 공식참배행사에서 가장 주목을 끈것은 참배 서열이 어떻게 되는가와 이른바 김정일과 반목관계에 있다는 가족들의 참석 여부가 주목. 김정일 좌측에는 각각 서열 2·3위인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강성산 정무원총리,우측에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최광이 서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고 이을설 호위총국장이 김정일 주변을 분주히 오가는 것이 목격됐다. 오진우등은 김일성과 함께 북한 정권 40여년을 이끌어온 「혁명1세대」로 김정일을 「업어키웠다」는 말이 있는 원로들.이들 역시 시신앞에 머리를 숙인채 눈물. ○…김정일은 자신의 참배가 끝난 뒤 군장성및 북한 주재 외교관의 조문을 받는 순서를 마련. 김정일은 조문객들의 인사말에 꼿꼿히 선채 한손으로 악수만하며 묵묵부답. 평양에 요양차 체류중이던 올해 87세의 한덕수 조총련의장은 지팡이를 짚은채 특히 울먹이며 김정일을 위로.김정일은 다른 조문객들에 대한 태도와 달리 이례적으로 두손으로 한덕수의 위로에 응답,대조를 보였다. ○…가족중 입장때부터 김정일의 바로 뒤 오른쪽에 따라 나온 친 여동생 김경희(48·노동당 경공업위원장)는 참배행사중 내내 오열.김일성과 김의 전처 김정숙의 소생으로 김정일이 가장 신임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녀는 검은 상복차림으로 자그마한 체구.이와함께 실력자로 부각되고 있는 남편 장성택도 처남인 김정일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주목을 받기도. ○…한편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와 친동생이자 김정일의 숙부인 김영주부주석등 유가족들이 김정일의 뒤쪽에 위치.확실치는 않으나 지난 3월 핀란드 대사에서 소환된뒤 행적에 관심이 모아졌던 이복동생 김평일도 일단 참석한 것으로 보이나 확인되지는 않았다.경희의 오열하는 모습과 달리 김성애는 비교적 담담한 표정. ○…북한은 12일 김일성의 사망직후 백두산에서 격렬한 기상변화가 있었다고 전하면서 『백두산과 천지도 비분을 삭이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다』고 주장,눈길을 끌었다. 북한의 중앙방송은 이날 상오 뉴스를 통해 김일성이 사망한 8일 새벽 백두산에서는 『짙은 안개의 장막속에서 깊이 잠든 듯 조용하던 천지가 갑자기 격랑을 일으키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또한 이와 때를 같이하여 초속 50m이상의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대줄기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는데 이날 시작된 비는 잠시도 그치지 않고 3일동안 3백㎜나 내렸다고 이 방송은 강조했다.
  • “후계구도 완성” 안팎 과시/김일성 시신공개·김정일 참배의 함축

    ◎오진우·강성산대동… 군·정장악 시위/자연사 비춰 “모반세력은 없다” 부각 북한이 11일밤 김일성시신을 공개하고 김정일이 권력핵심요원들을 대동하고 참배하는 장면을 공개한 것은 후계구도의 안착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즉 북한주민들과 북한권부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외부세계에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이상이 없음을 시위하기 위한 사전각본에 따른 것이다. 이같은 연출의 한 가운데에는 김정일이 있다는 것은 현재로선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그가 김일성사망 나흘만인 이날 북한의 고위당·정·군 핵심간부들을 거느리고 빈소에 출현한 것이 그 가시적 증거다. 이날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의사당(주석궁)에는 북한의 권력서열과 일치하는 장례위원 2백73명 거의 전원이 나타났다.특히 평양주재 외교사절들의 조문시 오진우인민무력부장·강성산정무원총리·김영주·이종옥·박성철부주석과 최광총참모장·김영남외교부장 등 핵심인물들이 김정일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시립」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두드러졌다. 더욱이 북측이 이날 공개한 TV화면 속의 김일성시신은 그의 사인이 자연사라는 심증을 갖게 할 만큼 훼손된 흔적이 없었다.따라서 여기서도 쿠데타나 모반세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과 함께 김부자간 후계세습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지적이다. 이날 김일성유해 옆에는 국방위원장과 군최고사령관명의로 된 김정일의 화환이 놓여져 있어 일단 당총비서직과 국가주석직 승계절차는 거치지 않는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이날 빈소에서의 여러 정황들을 종합할 경우 김일성의 사망직후인 8일 내부적으로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확정했을 가능성이 크다.즉 북한정권의 핵심인물들인 오진우·강성산 등 당정치국위원들이 비밀회합을 통해 이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주변국중 북한지도부와 교감이 가장 깊은 중국의 강택민·이붕 등이 「조선인들이 김정일동지를 수반으로 굳게 뭉쳐 전진하기를 기대한다」는 조전을 보낸 것도 이 때문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당중앙위와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김정일의 권력승계절차를 밟기 위해 당중앙위원들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11일 평양으로 소집해놓고 있다. 하지만 당중앙위와 최고인민회의가 열렸느냐 여부와 관계없이 이들 북한의 핵심기득권세력들이 일단 김정일추대에 합의했다면 그의 당총비서 또는 국가주석취임은 시간문제일 뿐이다.북한권력의 속성상 주요의사결정은 어차피 하의상달식이 아니라 상층부의 지침에 따라 일방통행식으로 결정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날 짧은 시간의 화면에서 김용순대남비서와 계응태공안비서 및 장성택3대혁명소조부장은 물론 지난해 강등된 김달현전부총리 등 김정일의 핵심측근으로 알려진 인사들이 대거 「클로즈업」된 사실도 눈여겨볼 대목이다.이들이 김정일시대에 중용이 예상되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건재사실이 곧 김정일체제구축을 역으로 입증한다는 것이다. 이날 빈소에는 또 김정일의 숙부인 김영주와 함께 김과 갈등관계이던 김성애,확실치는 않지만 이복동생 김평일의 모습도 보였다.이러한 광경 역시 이들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김일성이라는 선장을졸지에 잃은 마당에 일단 한배를 탓다는 위기의식으로 인한 잠정적 결속이 이뤄졌음을 시사한다는 관측이다.
  • 서점가/북한관련 책 불티/「북한인명사전」 폭발적 인기

    ◎“김일성 사망후 남북관계 어떻게 변할까” 독자 궁금증 반영/귀순자 수기·방문자가 본 생활상도 많이 팔려 김일성 북한주석의 사망으로 남북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또 남북 통일은 언제쯤 가능할 것인다. 「김주석 사망」소식이 전해진 9일 하오부터 종로와 광화문·을지로 등 대형 서점가에는 북한관련 서적을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가장 먼저 관심이 모아진 책은 「북한인명사전」(서울신문사간).이 책에는 북한의 전·현직 요인은 물론 신진 엘리트와 당성이 투철한 청년·학생에 이르기까지 1만5천명의 인적사항이 올 봄의 경력까지 사진과 함께 망라되어 있다.이에따라 김일성 사후 북한의 권력구조를 점쳐볼 수 있는 장례위원 명단이 발표되자마자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냐」며 정부 관련 부처와 대기업 대학과 연구소는 물론 실향민에 이르기까지 서점가에는 이 책을 좀 구할 수 있겠느냐는 문의가 잇따랐다. 그 다음 독자들의 관심은 주로 ▲북한 체제의 실상과 통일전망등을 밝힌 사회과학서 ▲북한주민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귀순자및 북한방문자들의 기록에 쏠리고 있다. 특히 지난해 3월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탈퇴를 선언,남북한간에 긴장이 고조된 뒤론 관련도서가 많이 나와 남북관계를 다룬 책들은 어느때보다도 풍족한 상태이다. 지난해와 올해 나온 책 가운데 북한의 실상을 포괄적으로 다룬 책으로는「북한의 민족생활 풍습」(주강현 지음·대동 간),「신 북한지리지」(배기찬,다나),「북한 조감」(내외통신사 발행),「북한총람 1983∼1993」(북한연구소 발행)등이 우선 꼽힌다. 이 가운데「…민족생활 풍습」은 분단이후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북한주민의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상의 변화를 정리해 남북한 주민생활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보여줬다. 이에 비해「북한총람…」은 지난 10년동안 정치·경제·외교·법제등 각 분야의 변화를 수록한 백과사전식 자료집이다. 「신 북한지리지」는 행정구역의 변천을 중심으로 각지역별 특성을 덧붙였으며,「북한 조감」은「북한상식집」이란 부제에서 보이듯 북한의 실태를 부문별로 짧고 쉽게 정리했다. 이 도서들은 북한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하는 동시에 자료집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한편 북한주민들의 사는 모습을 그린 귀순자들의 수기로는 ▲시베리아벌목장에서 탈출한 장기홍씨의「울음보가 터진 남자 1∼2」(성심도서 간) ▲대학생인 전철우씨가 북한의 청소년 실태를 주로 다룬「평양 놀새 서울 오렌지」(자유시대사)등이 인기가 높다. 또 소설가 황석영씨의「사람이 살고 있었네」(시와사회사),홍정자씨의「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살림터)은 다른 체제에서 성장한 사람들 눈에 비친 북한의 실상을 보여준다. 다만 귀순자나 북한방문자가 쓴 책들은 한면의 진실을 밝히고 있지만 또다른 면에서는 왜곡상을 보일 수도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밖에 백낙청 서울대교수가 쓴「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창작과비평사),기사연통일연구원에서 엮은「분단 50년의 구조와 현실」(민중사)등의 도서는 분단현실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하는방안을 제시한 책으로 손꼽힌다.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비공식대좌 성사때 「제1후보지」로/대동강 「요트정상회담」 열릴까

    ◎북,중요외빈 초대때마다 애용 김영삼대통령의 평양 체류기간동안 거의 확정된 회담은 두차례이다.장소는 이른바 「주석궁」으로 불리는 금수산의사당과 김대통령이 묵을 백화원초대소가 될 가능성이 짙다.우리 쪽에서 원하는대로 상호주의원칙이 충실하게 지켜질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우리는 한차례 회담은 반드시 김대통령의 숙소에서 열려야 한다는 뜻을 이미 북한당국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동강을 오가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전용 요트가 제3의 회담장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지난달 28일 예비접촉에서 합의된 두차례의 회담은 모두 공식회담이다.따라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환담을 나누는 기회가 따로 마련될 수도 있다.지금까지 평양을 방문했던 외빈들의 예를 그대로 따른다면 김대통령은 요트를 타고 대동강을 유람하면서 김일성과 또 한차례 비공식 대좌를 가질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동강 요트」는 그들이 보기에 중요한 인물이라고 인정되는 사람이 평양을 찾을 때마다 으레 안내하는 곳이다.시아누크 캄보디아국왕등 주로 그들의 제3세계 우방 지도자들이 단골손님이다.지난달 중순 평양에 갔었던 카터전미국대통령도 요트에 초대됐었다.요트는 또 김정일의 파티장소로도 애용된다.김정일이 요트에서 측근들과 어울려 술잔을 나누는 장면이 TV화면을 통해 목격되기도 했다. 요트의 제원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다만 초호화판일 것이라는 상상이 가능할 뿐이다.이른바 「위대한 수령」이 이용하는 배라면 아무렇게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규모는 작지만 적어도 김강산·묘향산등에 있는 별장과 비슷한 수준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요트는 주석궁이 있는 능나도근처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을밀대와 부벽루가 바라다보이는 곳이다.5·1경기장과 능나도유원지도 보인다.요트는 국제영화관·야구장·야외축구장이 있는 양각도와 쑥섬을 거쳐 만경대유희장이 있는 두루섬 근처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전해진다.평양의 풍광을 보여주는 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김대통령이 요트에서 김일성과 마주앉게 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하지만 북한이 지금까지 취해온 관례와 현재의 이런저런 대화분위기를 감안할 때 그럴 가능성은 꽤 있다.북한측은 김대통령에게 평양의 보다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할 것에 틀림없다.우리측도 외부행사에 일체 참석하지 않는다는 방침이기는 하지만 북한측의 요구를 마냥 거절하기만은 어려운 형편이다.거절만 하다가는 회담의 분위기를 송두리째 망칠 우려가 있다.결국 우리측이 어딘가 한 군데 방문지를 선택해야 할 때 그곳이 바로 「대동강 요트」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대동강 요트」는 평양시민으로부터 격리된 장소인데다 김일성이 동승하기 때문에 경호상 문제가 없고 또 회담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 경부고속도 개통 24돌… 차9억대 통과/통행료 수입 1조8천억원

    ◎하루평균 39만여대 통행 경제성장의 대동맥구실을 톡톡히 해낸 경부고속도로가 7일로 개통 24돌을 맞았다. 그동안 이용차량은 모두 9억1천1백1만4천여대,통행료수입은 1조8천4백60억6백만원이다.개통초기 하루 이용차량은 평균 1만여대였으나 지금은 25만여대이다. 초기인 71년까지 전체차량의 47%가 승용차였고 화물차는 38%였으나 70년대 중반∼80년대 중반에는 화물차가 50%,승용차가 33%로 바뀌었고 86년이후 지금까지는 승용차가 59∼60%,화물차가 30%로 구성비가 재역전됐다. 지난 68년2월1일 착공해 2년6개월뒤인 70년7월7일 개통,짧은 공기로 공사비(4백29억원)보다 보수비(1천4백58억원)가 더 드는 난센스를 빚기도 했지만 우리 경제성장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도로공사는 차량이 날로 대형화,고속화하는 추세에 따라 지난 92년 양재∼수원간 18.5㎞를 8차선으로 확장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수원∼청원간 1백.1㎞를 6∼8차선으로 늘렸다.또 미확장구간인 서초∼양재간 5.2㎞와 청원∼회덕간 14.4㎞의 6∼8차선 확장공사도 오는 97년까지 끝낼 계획이다.
  • 정상부인들의 장외대화에 관심/손여사의 평양동행

    ◎한차례이상 30분∼1시간 환담 예상/정치보다 자녀·살림얘기 나눌듯 대통령부인 손명순여사(66)의 평양동행이 결정됨으로써 남북정상 부인들의 「대좌」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외교관례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면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가량 정상부인들의 환담시간이 마련된다.때문에 손여사가 평양을 방문하게되면 최소한 한차례 이상 김일성주석의 부인인 김성애(71)와 환담할 기회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청와대가 손여사의 평양동행을 망설임끝에 결정한 것도 이같은 「정상부인 장외대화」가 남북간의 신뢰구축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손여사는 비교적 정치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에 비해 민주여성동맹중앙위원장등을 거친 김은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인물이다.카터전미국대통령과 김주석의 대화때 김성애가 미군유해송환을 강력히 김주석에게 권고했던 것은 이같은 그녀의 현실정치에 대한 깊은 관여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같은 두사람의 차이로 설령 두사람의 대화가 이루어지더라도 정상들의 대화에 직접 도움을 줄 현안을 거론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그보다는 살아온 이야기나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남북한의 생활등이 주소재가 될 것이다.그리고 이를 통해 우호분위기를 더 넓힐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상부인들의 환담말고도 정상부부가 자리를 같이 하는 때도 여러차례 있을 것으로 보인다.우선 만찬석상에서 같이 앉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또한 정상회담 초기에 네사람이 함께 자리를 할 가능성이 높다.대동강요트위의 선상만찬이나 선상정상회담의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 셈이다. 손여사의 평양동행은 당초 북한의 선전행사 참석을 강요당할 위험성,김대통령의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때문에 부정적인 견해가 우세했다.그러나 이행사가 국제관례로 본다면 정상회담이란 점,또한 부부가 동석을 하면 남자들끼리 만날때보다 친밀감이 빨리 생기게 마련이란 점을 들어 동행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 사상 첫대좌에 의전 묘안 “백출”/청와대 “역사성 부각”준비 부심

    ◎“한겨레 상징” 한강물­대동강 합수/북한동포 심금울릴 명문구 검토/조깅 여부 관심… 선물은 토산품될듯 한 나라의 정상이 움직이는 데는 일반이 잘 모르는 이런저런 준비가 따르게 마련이다.주로 의전쪽이다.특히 이번 남북정상회담에는 제3국 정상과의 회담 때와 달리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청와대는 정상회담의 역사성을 부각시키고 김영삼대통령의 이미지를 제고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의 개발에 고심하고 있다. ○남흙 북땅 뿌릴지도 ○…청와대쪽에서 생각하고 있는 아이디어는 한강물을 떠다가 대동강에 붓거나 남한의 흙을 북한땅에 뿌리는 것등갖가지 묘안이 백출하고 있다.남북한 주민들이 한겨레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웅변하는 이벤트를 만들자는 것이다.김대통령이 북한의 흙을 손에 움켜쥐고 감격에 젖는 모습등도 상상할 수 있다.청와대는 김대통령의 회담 기조연설이나 만찬사에 통일을 상징하고 북한동포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명문구를 집어넣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깅 코스는 양호 ○…관심을 끄는부분은 김대통령이 과연 평양에 가서도 조깅을 계속할 것인가이다.우리 대표단이 묵게 될 백화원초대소는 북한의 영빈관답게 시설을 잘 갖추고 있어 김대통령이 마음먹기에 따라 조깅은 충분히 가능하다.그 안에 있는 인공호수 주변을 한바퀴 돌고 나면 땀이 흠뻑 난다는 것이 고위급회담때 이 초대소에 묵은 적이 있는 인사들의 언급.대략 20∼30분이 걸리는 것으로 전해진다.경호에도 큰 문제가 없다면 김대통령은 매일 아침 조깅을 할 것 같다.그래서 북한주민들이 아침에 운동복을 입고 달리기를 하는 자유세계의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식단 전통한식으로 ○…호칭은 「대통령」과 「주석」으로 부르게 될 듯.김대통령은 취임연설문에서 「주석」이라는 호칭을 썼다.또 김일성도 고위급회담 수석대표로 평양을 방문했던 강영훈전총리로부터 노태우전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받는 자리에서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서로 상대방에 대한 예우를 한 차원 더 높인다면 「각하」라는 말이 「대통령」과 「주석」 뒤에 덧붙여질 수도 있으나 「대통령」과 「주석」선에서 머물 가능성이 훨씬 크다. ○과다한 선물 피할듯 ○…정상간의 만남에서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관례.청와대는 화해의 상징으로 김일성에게 건넬 선물을 고르는데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너무 비싸거나 과도한 선물은 피한다는 방침.전통적인 것 가운데서 고를 것으로 보인다.제주밀감과 죽공예품등 남쪽에서만 나는 토산품이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참고로 제3국 정상회담때의 예를 들면 김대통령은 클린턴 미국대통령에게는 청자도자기를 선물했고 힐러리여사에게는 칠보로 만든 찻숟가락세트를 주었다.호소카와(세천호희)전일본총리 내외에게도 똑같은 물건을 선물했다.또 아키히토(유인)일왕 부처에게는 청자민속놀이문병과 칠보보석함을 선물했다.강택민중국국가주석에게는 분청화병을 주었고 옐친러시아대통령 내외에게는 소형 나비장과 자수정브로치를 선물했다.김대통령은 선물외에 「대도무문」이라는 손수 쓴 휘호를 주기도 했다.
  • 판문점∼평양 북차량 이용/합의된 정상회담 실무절차

    ◎방북3일전 총리명의 각서/신변보장/「각료배석 회담」 우리안 관철/회담형식 남북한은 2일 판문점에서의 두번째 실무접촉에서 정상회담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안들에 합의했다.남북 양측은 전날 접촉에서 합의하지 못했던 TV 생중계와 선발대문제에 대한 이견을 모두 해소했다.지난달 28일 예비접촉과 1·2일 실무접촉에서 나타난 양측의 자세는 매우 진지하고 전향적이었다.남과 북이 합의한 실무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회담의형식◁ 양측에서 각각 보좌요원 2∼3명과 기록요원 1명씩이 배석하는 단독정상회담으로 정했다.기록은 속기 녹음 녹화등 각자 편리한 대로 한다.1명 또는 2명의 고위급 각료가 배석하는 두차례의 회담이라는 우리측 제안이 대체로 받아들여진 합의다.북한측은 확대정상회담 한차례면 된다던 주장에서 후퇴했다.배석자로는 예비접촉 우리측 수석대표인 이홍구통일부총리와 북한측 단장인 김용순노동당대남담당비서가 유력하게 여겨진다. ▷대표단규모◁ 북한측이 우리측의 제의를 비교적 순순하게 받아들인 부분.공식·비공식 수행원 1백명과 보도진 80명등 모두 1백80명으로 합의됐다.보도진은 순수한 국내 기자들만이다.외신기자들은 북경·제네바·뉴욕에 있는 북한의 공관을 통해 교섭해야 한다.우리측은 보도진의 수를 1백명까지 늘리려 했으나 북한측이 처음대로 80명으로 하자고 버텼다. ▷왕래·체류◁ 판문점에서 평양까지 북한측에서 제공하는 차량으로 이동한다.승용차로 평양까지 가는 것은 남북회담사상 이번이 처음.고위급회담 때는 승용차로 개성까지 가서 열차로 갈아타고 평양으로 갔었다.평양체류기간은 일단 2박3일로 하되 필요할 때는 연장하기로 했다.북한측이 작성한 구체적인 체류일정은 오는 10일 판문점 연락사무소를 통해 우리측에 전달된다.김영삼대통령은 평양에 도착하는 날 「주석궁」으로 불리는 금수산의사당에서 1차 정상회담을 가진뒤 다음날 김대통령 숙소나 대동강 요트 위에서 추가 회담을 갖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선발대◁ TV 생중계와 함께 쟁점이 됐던 부분.북한측이 『잘 모르겠다』고 해서 이해시키는데 애를 먹은듯 보인다.결국 우리측 선발준비팀 17명이 오는 13일 평양에 가서 16일까지 북측 관계자들과 구체적인 일정등 세부절차를 협의하게 됐다.이 실무접촉 파견자의 명단은 9일 북한측에 통보된다.우리측 선발대의 인원은 25명으로 합의됐으며 오는 22일 평양으로 간다.우리측은 대표단의 방문 7일전에 선발대를 포함한 대표단의 명단을 북한측에 전달하기로 했다.우리측은 선발대를 두차례로 나눠 1차 선발대를 5일쯤,그리고 2차 선발대를 대표단의 방문 3·4일전에 보낼 생각이었다.그러나 북한측은 필수요원 5명쯤을 받을 수 있으며 모든 준비절차는 초청한 쪽에서 마련하므로 파견시기는 회담 3일전이면 충분하다는 주장이었다. ▷취재·중계◁ 우리측은 우리손으로 TV 생중계를 하려고 했다.하지만 북한측이 완강하게 반대해 결국 우리측이 양보했다.TV 실황중계에 필요한 설비와 인원은 모두 북한이 지원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TV 영상의 송출을 위한 전송로및 위성중계를 위한 편의도 모두 북한측이 제공한다.북한측의 생각은 생방송은 허용하되 기술적인 부분을 모두 장악함으로써 그들에게 거슬리는 대목이 그대로 우리 국민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자는 것으로 여겨진다.북한측은 또 기자들의 취재활동을 보장하되 보도에 정확성과 공정성을 기한다는 조건을 달았다.이는 그들이 우리측의 보도를 문제삼을 수도 있는 꼬투리가 될지도 모르는 애매한 조건이다.수행원과 기자의 표시는 각자 편리한 대로 표시하되 기자는 「기자」라고 쓴 완장을 두르기로 했다.수행원과 기자는 양측의 총리가 발행하는 신분증명서를 휴대해야 한다. ▷편의·기타◁ 회담에 필요한 숙식 교통 통신 의료등 모든 편의는 북한측이 제공한다.이와 함께 매일 두차례씩 판문점을 통해 우리 대표단의 행랑이 전달된다.북한측 강성산총리 명의의 우리측 방북자 신변안전보장각서는 22일 우리에게 온다.회담장과 숙소등에는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기로 했으며 회담장에도 회담에 필요한 것 말고는 아무 시설도 준비하지 않기로 했다.통신망은 이미 가설된 서울과 평양 사이의 직통전화선을 이용하기로 했으며 그밖의 실무절차는 고위급회담의 관례에 따르기로 했다. ◎14개합의사항 전문 남과 북은 1994년6월28일 부총리급 예비접촉에서 합의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합의서』에 따라 1994년7월1일부터 7월2일까지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대표접촉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실무절차 문제에 합의하였다. 1·대표단 구성과 규모=①남측 대표단 수행원은 100명으로 한다.②남측 대표단 취재기자는 80명으로 한다. 2·회담형식=①회담은 쌍방 정상사이에 단독회담으로 한다.②회담에는 쌍방에서 각기 보좌요원 2∼3명과 기록요원 1명이 배석한다. 3·체류일정=①남측 대표단의 북측지역 체류기간은 2박3일로 하며,필요에 따라 더 연장할수 있다.②북측은 남측대표단의 구체적인 체류일정을 방문 15일전에 남북연락사무소를 통하여 남측에 통지하며,쌍방이 협의하여 이를 확정한다. 4·실무접촉단 선발대파견=①쌍방은 경호,의전,통신,보도와 관련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각기 17명이 참가하는 실무자접촉을 7월13일부터 7월16일(3박4일)까지 평양에서 가진다.이에앞서 경호문제와 관련하여 쌍방 각기 3명이 참가하는실무접촉을 7월8일 오전10시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가진다.②남측은 25명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정상방문이 끝날 때까지 체류한다.③남측의 실무자접촉및 선발대의 체류일정은 북측 지역 도착직후 쌍방이 협의하여 정한다. 5·왕래절차=①남측은 정상일행의 명단을 방문 7일전에 북측에 넘겨준다.명단에는 성명,성별,직위를 밝히며 사진을 첨부한다.명단을 넘겨준후 변동되는 사항은 먼저 직통전화로 통지하고 남북연락사무소를 통하여 문서로 전달한다.②남측 대표다니의 통과지점은 판문점으로 하며 하며 대표단은 북측 지역에서 북측의 자동차를 이용한다. 6·편의보장=①북측은 자기측 지역에 체류하는 남측인원들의 숙식 교통,통신,의료 및 기타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②남측 대표단은 북측 지역에 체류하는 동안 북측의 안내와 질서에 따른다.③북측은 남측 인원들의 북측 지역 체류기간중 1일 2회 행남운반을 보장한다. 7·신변안전보장=①북측은 자기측 지역을 방문하는 남측 인원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하는 총리 명의의 신변안전보장각서를 방문 3일전에 남북연락사무소를 통하여 남측에 넘겨준다.②북측은 남측 인원들의 휴대품에 대한 불가침을 보장한다. 8·수행원,기자의 표지 및 증면서=①쌍방은 자기측수행원들을 표시할 수 있는 표지를 각기 편리한 대로 한다.②기자는 기자완장을 착용한다.③남측 수행원과 기자는 자기측 총리가 발행한 신분증명서를 휴대한다. 9·회담장 표지 및 시설=①회담장과 행사장(숙소 포함)에는 어떠한 표지도 하지 않는다.②회담장에는 회담에 필요한 시설외 다른 시설들을 설치하지 않는다.③북측은 회담장과 행사장(숙소포함)에서 남측이 연락업무를 수행할수 있도록 통신시설을 설치·제공한다. 10·회담기록=쌍방은 회담기록을 속기,녹음,녹화등 각기 편리한 대로 한다. 11·회담보도=①회담보도는 각기 편리한 대로 하되,필요에 따랄 공동보도문을 작성 발표할 수 있다.②북측은 남측에 실황중계가 가능하도록 필요한 설비와 인원을 최우선적으롤 보장하며,텔레비전 영상송출을 위한 전송로 및 위성중계를 위한 편의를 제공한다. 12·취재활동=①북측은 남측 기자들의 체류기간중 취재활동을 보장한다.②쌍방은 보도의 정확성과 공정성을 기하도록 한다. 13·기타 실무절차 문제=①남측 대표단은 북측 지역체류기간에 이미 가설된 서울과 평양 사이의 직통전화선을 이용한다.②그밖의 제기되는 실무절차 문제는 남북고위급회담 관례에 따른다. 14·합의서 발효=이 합의서는 쌍방이 서명하고 교환한 날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 공기 통조림(외언내언)

    『맑고 깨끗한 산소를 캔(깡통)으로 마신다』는 선전문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산소가 상품으로 등장한 것은 91년의 일이다.여과한뒤 압축된 공기를 섭씨 영하183도로 냉각시켜 순도95%의 산소로 액화한 것이 바로 문제의 상품.휴대용 산소캔 통조림이 시중에 나오자 『이제 산소도 사마시는 시대가 왔다』며 화제가 됐었다. 휴대용 산소를 처음 개발한 일본은 일찌감치 「공기산업」에 눈을 돌려 재미를 보고 있다.맑은 공기 보전을 위해 산소자동경보기를 거리에 설치,대기중 산소량이 18.5% 이하로 떨어지면 경보기가 울린다.「산소다방」도 있어서 손님은 커피대신 산소를 시켜 마신다.이런 산소다방이나 산소룸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한다.세계에서 대기오염이 가장 심하다는 멕시코시티에서는 공중전화 부스같이 만든 산소통이 거리마다 설치돼 있는데 매우 번창하고 있다는 것. 아황산가스에 오염된 공기로 숨이 막힐것같은 시민들이 산소를 마시는 곳이다.피로도 풀리고 기분전환이 된다고 한다.어항의 금붕어들이 산소부족으로 수면에 입을 내놓고 뻐끔거리는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대기중에는 산소가 20.9%정도 함유되어 있다.그러나 오염되고 혼탁한 공기중에는 산소의 비중이 훨씬 떨어진다. 산소판매에 이어 이번에는 맑은공기 판매라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상품화됐다.설악산의 맑은 공기를 아연도금을 한 특수 캔에 담아 「설악산 청정공기」란 상표를 달고 시중에 선보였다.이른 아침 설악산의 깊은 계곡에서 신선한 공기를 압축시켜 스프레이통에 담은 제품이다.용기를 코에 가까이대고 뿌리면 정신이 상쾌해진다는 것. 이제는 공기까지 사고 팔게됐으니 도시의 오염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를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이러다간 「지리산공기」「한라산공기」「오대산공기」등 공기의 다양한 상품화가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일찍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던 봉이 김선달도 공기를 파는 일은 꿈에도 생각못했으리라.
  • 예비접촉 뒤안/북측 「회담」 대신 「상봉」 용어사용 제의

    ◎우리측 이의제기,「회담」으로 일단락 북한측은 지난 28일에 있은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예비접촉에서 남북정상간의 「회담」이라는 용어대신 「상봉」으로 표현하자고 제의했으나 결국 우리측 제의를 수락,「회담」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합의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북측의 김용순단장은 그 당시 우리측 수석대표인 이홍구통일부총리의 첫 발언에 이은 발언에서 남북정상회담 대신 「북남최고위급 상봉」이라는 표현을 썼으며 이에 우리측이 『남북정상이 만나는데 상봉이라는 표현이 말이 되느냐』고 하자 북측은 즉석에서 이를 받아들였다고 30일 정부의 한 당국자가 전했다. 우리측은 표현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신경을 쓰는 북한측이 이처럼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채 곧바로 우리측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북한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감을 잡고 이날 예비접촉 결과를 낙관했었다고 이 당국자는 부연. 또 2차정상회담 개최와 회담분위기 조성문제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이홍구부총리가 북한의 김단장에게 마이크를 끄고 단둘이 얘기하자고 제의해 두 사람만의 비공개 단독회동이 이뤄졌으나 북한측이 10분도 안돼 마이크를 켜고 얘기하자고 번복했다는 것. 이같은 북측 태도로 미뤄 아마도 평양에서 예비접촉의 전과정을 지켜보고 지시를 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이 당국자는 전했다. ◎「주석궁」 규모/대지,백만평… 4∼5층 복합 석조건물/지하 2백m 지점 주석전용 지하철 현재 정상회담 장소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곳은 김일성 집무실로 알려진 「금수산의사당」으로 이곳은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 원수나 귀빈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최근 북한을 방문했던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도 「주석궁」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김일성과 회담했으며 지난 90년3월 북한을 방문했던 중국 국가주석 강택민도 이곳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주석궁은 평양시 중심가에서 동북쪽으로 8㎞ 떨어진 대성구역 미암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난 77년4월15일 김일성의 65회 생일기념으로 세워진 총건평 3만4천9백10㎡(1만5백75평)의 유럽식 궁전을 본뜬 4∼5층구조의 석조건물. 총부지 면적이 3백50만㎡(약 1백6만평)에 이르며 경내는 위수지역으로 지정돼 30여개의 감시초소가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하다.대동강과 합장강이 합류하는 능나도 북쪽 금수산(일명 모란봉)기슭에 위치해 주변 경관이 뛰어나다.또 천연요새인 이곳 지하 2백m 깊이에는 평양지하철과 지하 비상통로가 연결돼 있으며 전용지하철이 유사시를 대비해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정상회담/최고위급회담/명칭따라 의전 큰 차이

    ◎김 대통령의 「평양2박3일」 예상 일정/단독회담 2회­확대·실무회담 1회씩/회담장 주석궁·대동강요트 유력 평양에서의 2박3일.그 역사적인 시간들은 어떤 일정으로 채워질 것인가.28일 예비접촉에서 합의된 사항이라고는 시기와 장소뿐.장소도 막연하게 그저 평양이다.김영삼대통령의 평양 체류일정과 의전·경호등 구체적인 절차는 7월1일 남북실무자들의 접촉에서 결정된다.예비접촉의 분위기로 미루어 볼때 실무접촉 역시 순조롭게 진행될 전망이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회담의 성격을 정하는 일.정상회담으로 하느냐 아니면 최고위급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다.정상회담과 최고위급회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정상회담은 문자 그대로 정상간의 회담이다.회담의 파트너를 일국의 원수로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다시 말해 남한과 북한이 공식적으로 상대방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북한은 자기 나라를 방문하는 남한의 대통령을 위한 공식환영행사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연주해야한다.회담장과 남­북한의 회담 관계자들이 타고 다니는 승용차에도 인공기와 함께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김대통령의 숙소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민족문제를 외교적 문제로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연주하는 일을 북한이 할 리가 없다.여러차례 진행된 고위급회담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주민들에게 남한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북한은 회담의 명칭을 정상회담이 아닌 최고위급회담이라고 부르고 있다.명칭을 최고위급회담으로 하면 이런 고민들이 없어진다. 그러나 양쪽 실무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할 것 같지는 않다.상대방을 자극할지 모르는 워낙 미묘한 사안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정상회담과 같은 의전절차는 생략될 가능성이 크다.결국 의전과 경호는 고위급회담의 수준을 좀더 높이는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우리쪽의 의견도 반영되기는 하겠지만 회담이 북쪽에서 열리는 만큼 의전과 경호,그리고 일정을 짜는 일은 대부분 북한의 몫이 될전망이다. 예상대로라면 김대통령은 평양에서 매우 빠듯한 일정을 보내야 할 것 같다.현재로서 생각할 수 있는 대체적인 일정은 단독 정상회담 2차례,그리고 확대정상회담과 공동성명 작성을 위한 실무회담 한차례씩.물론 첫번째 단독 정상회담에서 원칙이 합의될 때 그렇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여기에 북한측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곳의 방문등이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은 북한의 영빈관인 백화원초대소 또는 흥부초대소에 머물면서 흔히 「주석궁」으로 불리는 금수산의사당과 대동강 요트위에서 회담을 가질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확대정상회담과 만찬장으로도 역시 금수산의사당이 유력하다.금수산의사당은 지난 90년 10월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때 강영훈전총리가 김주석을 만났던 곳.또 흥부초대소는 72년 밀사로 방북했던 이후락전중앙정보부장이 묵었던 곳이다. 김대통령은 또 북한을 방문하는 외빈이 그래왔던 것처럼 평양시내에 있는 인민문화궁전·소년궁전·평양산원·평양교예극장·김일성대학,그리고 북한이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평양근교의단군왕릉도 돌아보게 될 것 같다.평양에서 자동차로 5시간 걸리는 금강산에까지 다녀올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하지만 귀로에 짬을 내 개성에 있는 고려 태조릉을 방문할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 조직·집행력 취약… 「전국연대」 무산/전노대 파업선동 왜 실패했나

    ◎현총련 등 임의단체 구성… 결집력 약해/개별사업장의 쟁의 계획과도 안맞아/일부 노조선 교섭에 「파업동참」 명분 이용하기도 「전국노조대표자회의」의 연대파업이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철도·지하철 파업으로 비롯된 이번 파업사태는 이제 마무리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철도·지하철 파업의 장기화여부를 가름할 최대 변수였던 「전노대」의 연대파업이 이처럼 예상보다 쉽게 무산된 것은 「현대그룹노조총연합」등 법적 근거가 없는 4개 임의단체가 모인 회의체라는 조직구성의 한계로 인해 전국적인 동시파업을 지도할만한 집행력이 없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 「전노대」가 개별사업장의 복잡한 임금·단체협상 일정과 쟁의계획등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철도·지하철 파업에 대한 정부의 강경대응방침을 철회시킬 목적으로 무리수를 던졌다는 시각도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29일 현재 노동부가 「전노대」의 연대파업 지침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분류하는 사업장은 현대중공업·대동공업·한진중공업등 4곳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사업장마저도 노조가 「전노대」의 지침을 전적으로 수용했다기보다는 내부의 문제로 쟁의일정을 밟아가다 일정이 맞아 떨어져 연대의 양상을 띠었다는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특히 올해 노사분규의 핵심이 될 것으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온 현대중공업도 외견상 「전노대」의 지침을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지난달 26일 쟁의발생을 결의하고 그동안 쟁의의 수순을 밟아온 경우이다. 현대중공업 노조의 6월말 부분파업및 한시적인 전면파업은 회사나 노조는 물론 노동부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것이다. 27일부터 부분파업을 벌여온 현대중공업 노조는 29일에 이어 30일 전면파업을 벌인뒤 파업강도를 점차 낮출 것으로 전망된다. 노동부의 분석으로는 현대중공업의 임금및 단체협상은 오히려 예년보다 원만히 진행되고 있으며 파업을 지속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즘 며칠간의 파업은 연대파업동참을 명분으로 회사측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받아내기 위한 전략으로 볼수 있다는 분석이다. 연대파업불참을 선언,사실상 「전노대」의 연대파업을 무산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대우조선노조의 경우 27일 회사측과의 협상에서 교섭최종안을 내놓은뒤 30일까지 회사측이 수용하지 않으면 부분파업등 쟁의강도를 높여나간다는 전략이다. 대우조선은 노조내부의 알력이 노사분규의 변수로 작용하고 있으나 회사측이 노조의 요구를 대폭 수용할 수 있다는 융통성을 갖고 있어 전면파업등의 극한상황까지는 이르지 않을듯 하다. 이처럼 올해 노사관계 안정의 열쇠를 쥐고 있는 양대노조의 움직임에 대해서 노동부는 비교적 낙관하고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공업의 노사교섭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고 장기파업등으로 이어질 경우 현대중공업 노조를 「현총련」의 실질적 리더로 생각하고 있는 다른 현대계열사 노조의 연대파업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 첫 대좌서 통일까지 인고의 20년(동서독정상회담의 교훈:상)

    ◎두차례회담 의견 대립… 합의도출 실패/“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실무접촉 계속 1970년 3월19일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와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가 동독의 작은 도시 에르푸르트에서 만났다.독일 분단 25년만의 첫 동서독 정상회담이었다.이 만남 뒤 20년이 지난 1990년에야 독일은 통일되었다.이 첫 정상회담이 기존 양독관계를 획기적으로 바꾼 것은 없다.회담의 성과로 내세울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만남 그 자체가 큰 사건이었다.두 정상의 직접대화는 상호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후 양독관계 진전의 디딤돌이 되고 밑거름이 되었다. 동방정책을 들고 나온 브란트가 1969년 총리가 되면서 동독에 관계정상화 협상을 제의하자 동독이 정상회담을 맞제의했다.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네차례 열렸다.실무회의에서는 회담 장소 선정이 난제였다.서독은 동베를린을 주장했고 브란트 총리가 베를린 장벽을 통과하여 회담 장소에 가는 방식을 원했다.동독은 이것의 상징적 의미를 반길 수 없었다.서독은 마침내 동독이 제3의 장소로 내놓은 에르푸르트를 받아들였다. 두 정상은 베를린 서남쪽 2백30㎞의 에르푸르트에서 만나 하룻동안 세차례의 회담을 가졌으나 기본적인 입장 차이를 줄일 수 없었다.회담 결과에 대해서 양측 모두 불만이었다.동독은 서독이 외교적 승인을 해주도록 요구했고 서독은 전독대표권의 포기를 밝히면서도 동독 승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브란트 서독 총리는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 다음날 결과를 하원에 보고했다.그는 동서독이 가까운 장래에 근본문제에 합의할 희망은 없다고 단언했다. 같은 날 동독의 실권자인 발터 울브리히트 공산당수는 동서독 정상회담이 『유용한 것이었지만 서독이 동독을 승인할 용의가 없었기 때문에 실망적이었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두달 뒤인 70년 5월 21일 서독의 카셀에서 다음 회담을 가지는데 합의했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이것이 첫 정상회담의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두번째 만남도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분위기는 경색했고 양측의 주장도 평행선이어서 아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다음 회담 약속도 공동성명도 없이 두 정상은 헤어졌다. 그러나양측은 두 정상의 직접 대면으로 입장 차이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다.그로부터 10여년간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았으나 실무 접촉이 꾸준히 계속됨으로써 양독관계는 점진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카셀 회담 6개월후인 11월부터 연쇄 실무접촉이 이루어져 서독과 서베를린간의 통과협정,동서독 교통협정 등의 체결로 국민생활과 직결된 문제들을 해결하였다.큰 매듭인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이 실현된 것은 첫 정상회담후 2년만인 72년 12월이었다. 80년대로 넘어와 슈미트­호네커 회담(81년),콜­호네커 회담(87년)등 여러 차례 정상회담이 있었다.그 이전의 정상회담과 마찬가지로 모두 당장은 감격스럽거나 놀랄 만한 결과를 내놓지는 않았다.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실무자선의 접촉으로 현실적인 문제들이 차근차근 해결되었다. 우리는 동서독의 경우보다 훨씬 첨예한 대립상태에 있었으므로 남북한 정상의 첫 만남 역시 훨씬 극적인 사건이 된다.예상외의 실질적 성과도 나올 수 있다.그러나 미리 지나친 기대를 하거나 사후에 실망을 할 필요는 없다.첫만남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동서독 정상회담의 교훈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6차례 정상회담」 의전 전례/초기 환영식­의장대 사열 생략 “의식 최소화”/87년 「4차」부터 헬기 사용… 양국국가 첫 연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의전문제가 회담의 의제만큼이나 주요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이는 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상대지도자에 대한 대우가 대외적으로 미칠 파급효과가 큰데다 상대국민들의 위신,심리적 영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유럽평화에 획을 그었던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나 1814년의 빈회의,1919년 파리평화회담 등에서도 관련국들은 자신들의 위신과 직결된 의전상의 문제로 회담의 대부분을 허비할 정도로 의전문제를 중요시했었다.남북한의 경우 정상회담 전례가 없어 의전문제로 신경전을 펼 전망이지만 분단의 특수성에 비춰 상당부분 동·서독의 경우를 준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동·서독은 모두 6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70년3월 「최소한의 의전」으로 동독에어푸르트회담을 성사시킨 이래 점차 상호의전을 확대해 나갔다.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와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간의 첫 동·서독 정상회담은 환영식,의장대 사열,예포발사,모터사이클의 경호 등이 생략된 최소한의 의전형태를 띠었다.공식연회도 없었으며 음식도 초청자측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했다.그러나 숙소,회담장 주변거리,회담테이블,차량에는 양국국기가 게양되거나 배치됐고 도착시 영접은 총리가 직접하는 방식을 택했다.또 브란트총리는 동독외무장관의 안내로 부헨발트의 유대인집단수용소 기념관을 방문,헌화하기도 했다.이같은 의전전례는 2개월뒤 서독의 카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다만 서독의 관례대로 1차 정상회담과는 달리 회담장주변거리와 회담테이블에는 양국국기를 배치하지 않았다. 81년 동베를린 근교에서의 3차 정상회담에서는 동·서독간 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의전에서도 많은 진전이 이뤄졌다.경호원과 비공식수행원의 수가 크게 늘었고 왕복교통수단으로 특별열차대신 항공기왕래시대가 열렸으며 기상영접이 도입된 외에 이동시 국빈대우의 상징인 사이드카 13대도 동원됐다.초청만찬이 베풀어진 것은 물론 선호·기피음식을 상대방에게 미리 통보하기도 했으며 상대의 협조로 직통전화가 가설돼 활용됐다.이때부터는 또 총리주치의를 처음으로 대동하기 시작했고 행사장범위가 확대,슈미트수상은 미술관과 시장,교회등을 방문하기도 했다.또 외무성 의전장을 단장으로 10명의 선발대가 상호파견되기도 했다. 87년 본회담에서는 지역내이동에서 헬리콥터가 사용됐고 동·서독 국가가 처음으로 연주됐으며 의장대사열도 이때 처음으로 이뤄졌다.4차례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변한 것이 없다면 주최측이 모든 비용을 댄다는 것과 영부인을 대동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 연대파업 7사 가담/현대중 오늘 전면파업 돌입

    「전국노조대표자회의」의 지침에 따른 민간대기업 노조의 연대파업이 28일 일부 사업장에서 계속됐으나 다른 사업장으로 확산될 조짐은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연대파업국면은 그 강도가 점차 누그러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제까지 몇차례 부분파업을 벌여온 현대중공업 노조가 29일 전면파업을 단행키로 한데다 30일에는 「현대그룹노조총연합」이 울산에서 현대계열사 노조의 대규모집회를 계획하고 있어 일부 지역에서의 노사불안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전국 7천여개 사업장 가운데 이날 파업을 벌인 「전노대」 소속 사업장은 현대중공업·한진중공업·대우기전·대동공업등 7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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