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대동
    2026-03-15
    검색기록 지우기
  • 달빛
    2026-03-15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3-15
    검색기록 지우기
  • 다리
    2026-03-15
    검색기록 지우기
  • 무력
    2026-03-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139
  • 움직이는 암 종양까지 치료

    우리나라에서도 ‘감마나이프’,‘토모세라피’ 등으로 잘 알려진 ‘사이버나이프’의 제4세대 시대가 열렸다. 대전 건양대병원(병원장 김종우)이 최근 동북아에서 최초로 제4세대 로봇형 사이버나이프를 도입, 가동을 시작했다. 서울의 대형 병원에서도 이 장비 구입을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버나이프란 칼 대신 방사선을 투사해 병소를 제거하는 최첨단 수술치료 기기로, 외과적 수술이 불가능한 뇌나 흉부 암, 중증의 혈관질환과 3차 신경통 등의 치료에 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기존 사이버나이프는 호흡이나 심장 박동 등의 움직임 때문에 방사선이 정상 조직에 영향을 미쳐 다양한 인체 고정장치를 사용했으며, 이 때문에 감마나이프의 경우 움직임이 적은 뇌질환 치료에 사용이 국한되기도 했다. 4세대 사이버나이프는 이런 문제를 크게 해소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방사선을 투사하는 선형가속기를 로봇팔에 장착하고, 위치추적 시스템과 영상유도기술을 이용, 환자의 미세한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파악함으로써 기존 사이버나이프와는 달리 고단위 방사선의 정확한 투사가 가능해졌다. 병원 측은 이 사이버나이프에 장착된 위치추적 시스템의 최대 오차가 0.6㎜에 불과해 정상조직이 방사선의 영향을 받을 우려가 거의 없으며, 이 때문에 기존의 2배가 넘는 600MUin의 방사선을 투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특히 두경부를 비롯, 폐나 간, 방광, 전립선 등 고정시킬 수 없는 몸통 부위의 암은 물론 외과적 수술이 어려운 췌장암, 병소가 몸속 깊은 곳에 있는 뇌의 동정맥기형이나 3차 신경통, 파킨슨병, 간질, 우울증 등 신경계 질환이나 재발 암, 다발성 종양 등에도 적용이 가능하다고 병원측은 덧붙였다. 이 병원 방사선종양학과 정원규 교수는 “지난 4월부터 사이버나이프를 이용해 대동맥 림프절 전이암과 간암, 폐암, 자궁경부암, 뇌종양 등을 가진 15명의 환자를 치료한 결과 암 병소가 없어지거나 크기가 준 것은 물론 모든 환자의 암 통증이 사라지는 성과를 확인했다.”고 밝혔다.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부고]

    ●우만형(전 내무부 차관)씨 별세 낙희(미국 거주)씨 부친상 이영묵(〃)장진필(〃)씨 빙부상 21일 미국 버지니아주 패어팩스 메모리얼 장례식장, 발인 25일 오전 11시(이상 현지시간) 1-703-288-0578●장인선(국민건강보험공단 기획상임이사)씨 상배 문석(학생)수련(용인시청 정보통신과)씨 모친상 권경민(용인시 처인구청)씨 빙모상 23일 일산병원, 발인 25일 오전 9시 (031)932-9169●박동기(롯데쇼핑 이사)윤기(자영업)우기(〃)인기(덴타임 고문)홍배(픽슨 호남사업소 상무)씨 모친상 서덕범(희림종합건축사무소 이사)씨 빙모상 23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26일 오전 6시 (02)590-2660●민성기(미국 거주)씨 모친상 김영태(김영태소아과의원 원장)씨 빙모상 2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5일 오전 9시 (02)3010-2261●안석준(난쓰네코리아)석주(안석주내과의원 원장)석병(대동엔지니어링 부장)은희(식품정보코리아·푸드원텍 이사)씨 부친상 김남영(사업)오원택(식품정보코리아·푸드원텍 대표)씨 빙부상 23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5일 오전 7시30분 (02)3010-2265●김승욱(자영업)경욱(〃)동욱(〃)씨 모친상 신언항(건양대 보건대학원장)씨 빙모상 22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4일 오전 9시30분 (02)3410-6914●김경환(연세대 의대 교수)경원(서현교회 목사)경준(미국 거주)경화(에덴기독교백화점 대표)경철(재미 치과의사)씨 모친상 한기돈(부평내과 원장)씨 빙모상 23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25일 오전 6시30분 (02)392-0299●이현식(인천문화재단 사무처장)씨 빙모상 23일 인천 길병원, 발인 25일 오전 5시 (032)462-9261●마영민(법무법인 율촌 회계사)씨 부친상 23일 이대목동병원, 발인 25일 오전 9시 (02)2650-2742●이광석(서울방화중 교감)광국(전 국민은행 상무)씨 모친상 조우현(신촌세브란스병원 기획조정실장)씨 빙모상 23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25일 오전 8시 (02)392-3499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Ⅱ

    후금을 치는데 동참하라는 명의 요구가 날아들었을 무렵, 광해군은 정치적으로 고비를 맞고 있었다. 외교적 감각이 탁월했던 광해군이지만, 내정(內政)에서는 적지 않은 난맥상을 드러냈다.‘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廢母殺弟) 패륜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것이 대표적이다. ‘폐모’는 ‘살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양자 모두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광해군의 노심초사와 강박관념에서 비롯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논란 끝에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되었다.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仁穆大妃)는 광해군에게 극단적인 원한을 품게 되었고, 이이첨(李爾瞻) 등 광해군의 측근들은 인목대비마저 폐위시켜 후환을 없애자고 부추겼다. 하지만 모후(母后)를 폐위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밖에 없었다.‘폐모 논의’를 둘러싼 내우(內憂)가 한창일 때, 후금 정벌에 동참하라는 명의 요구는 외환(外患) 그 자체였다. ●대동법 시행·창덕궁 수리 등 국가재건 앞서 광해군이 이룩한 치적(治績) 가운데는 볼 만한 것이 적지 않다. 그는 자기 시대의 역사적 과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안으로 임진왜란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고, 밖으로 명청교체(明淸交替)가 몰고 올 파장에 대비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광해군은, 그 같은 과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정치판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위 직후 광해군은 당파(黨派) 사이의 대립을 조정하는데 힘썼다. 비록 이이첨, 정인홍(鄭仁弘), 유희분(柳希奮) 등 북인(北人)들이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 일등공신이었지만 광해군은 그들만을 편애하지 않았다. 이원익(李元翼), 이항복, 이덕형 등 선조 이래의 중신들을 우대하여 그들의 경륜을 활용하려 했다. 이원익은 1608년 경기도에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왕실이나 관청에서 필요한 공물(貢物)을 백성들에게서 현물 대신 쌀로 받아들이는 조처였다. 자기 고장에서 나지 않는 공물을 현물로 납입하라고 강요할 경우, 필연적으로 청부업자들이 중간에서 설치게 된다. 백성들은 결국 방납인(防納人)으로 불리는 청부업자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물품을 구입하여 관청에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은 치솟고, 방납인들만 떼돈을 벌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자연히 방납인 중에는 상인뿐 아니라 사대부와 왕실의 인척 등 온갖 모리배들이 섞여 있었다. 쌀은 백성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어 청부업자들이 농간을 부리기가 쉽지 않았다. 대동법의 실시는 경기도 백성들에게는 ‘복음’이었지만 방납인들에게는 기득권을 흔드는 ‘비보(悲報)’였다. 방납인들의 반발과 아우성을 일축하고 대동법을 밀어붙인 것만으로도 광해군은 ‘현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광해군은 왜란 중에 불타버린 창덕궁을 수리하고, 종묘(宗廟)를 중건하고, 사고(史庫)를 비롯한 여러 관청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이 같은 외형적인 재건 작업뿐 아니라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심신을 다독이고, 무너진 사회질서를 다시 세우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반포하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와 같은 윤리 서적을 간행한 것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폐모살제 멍에로 내정에 난맥상 광해군은 분명 임진왜란 이후 국가 재건과 외교에서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늘 정치적으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첩자(妾子)이자 차자(次子)라는 이유로 왕세자 책봉이 지연되고, 부왕 선조로부터 견제받았던 ‘전력’은 즉위 이후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집착으로 표출되었다. 더욱이 역모 사건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당파 사이의 갈등과 대결은 재연되었다. 특히 선조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의 존재는 광해군은 물론, 광해군 즉위에 앞장섰던 이이첨 등 대북파(大北派)에는 잠재적으로 왕위를 위협하는 요소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1613년 4월, 문경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한 혐의로 국문(鞫問)을 받던 서얼 박응서(朴應犀)는 ‘엄청난 내용’을 실토했다.“은상에게서 빼앗은 자금으로 역도들을 모아 대궐을 습격하여 인목대비에게 옥새를 바친 뒤 영창대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고, 역모의 우두머리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대북파의 정적이었던 남인(南人)과 서인(西人)들은 대부분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바로 계축옥사였다. 김제남은 사약을 마시고 죽었고, 여덟 살에 불과한 영창대군도 유배된 직후 살해되었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요구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를 지켜 주지 못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에게 처절한 원한을 품은 것은 당연했다. ‘광해군일기’에는 박응서를 매수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데 이이첨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계축옥사는, 우유부단하고 심약했던 광해군이 ‘왕권 강화’에 골몰하다가 빚어진 비극이기도 했다. 이이첨 등은 이윽고 인목대비마저 ‘역모 관련자’로 몰아 처벌하려 했다. 대북파는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모자(母子) 관계는 끊어졌기 때문에 따로 거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논란 끝에 인목대비는 결국 서궁(西宮-오늘날 덕수궁)에 유폐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에 대한 충(忠)을 강조한 대북파의 ‘폐모’ 시도는 재야 사림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것은 효(孝)를 무시한 ‘금수(禽獸)의 행위’라고 매도되었다.1618년 1월, 이이첨 등은 들끓는 비판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정청(庭請)이란 것을 벌였다. 조정의 모든 신료들을 동원하여 ‘국왕에게 불충한’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라고 광해군에게 요청하는 절차였다. 광해군은 ‘폐모 논의’가 인륜에 관련된 사안이라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이첨 일파를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했다. 인목대비가 유폐된 상태에서 ‘폐모 논의’는 결말을 보지 못했고, 그 와중에 명의 파병 요구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무리한 토목공사에 민심은 등 돌려 왕권 강화에 대한 광해군의 집착은 토목공사에 몰두하는 형태로도 표출되었다. 그는 1611년 창덕궁을 중건했지만 연달아 다른 궁궐들을 짓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신문로에 경덕궁(慶德宮, 뒤에 경희궁으로 개명)을 지었고, 정원군(定遠君,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자 仁祖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인왕산 부근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을 듣고 인경궁(仁慶宮)을 지었다. 단종과 연산군이 쫓겨났던 장소인 창덕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광해군은 궁궐이 완성된 뒤 이 궁궐, 저 궁궐을 옮겨다니는 행태를 보였다. 그럴듯한 궁궐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원구단(圓丘壇)을 짓고 하늘에 교제(郊祭)까지 지내려 했다. 그것은 중국의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다는 제천의식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궐들을 짓고, 교제까지 지내려 했지만 토목공사에는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인경궁과 경덕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장대한 궁궐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간에 전가되었다. 증세(增稅)에도 불구하고 재원이 부족하자 은이나 목재, 석재 등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관직까지 팔았다. 부족한 재원을 긁어모으기 위해 조도사(調度使)란 직책을 지닌 관원들을 전국에 파견했다. ●삐딱한 여론… 외교발목 잡아 백성들로부터 아우성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세금 부담뿐 아니라 목재 등을 운반하는데 사역되는 백성들의 반발도 컸다. 계축옥사를 통해 쫓겨났던 남인이나 서인 출신의 신료들은 ‘말세의 조짐’이라고 비아냥거렸다.‘폐모살제’ 때문에 얻게 된 ‘패륜’의 멍에 위에 ‘민생을 망쳤다.’는 비판까지 더해졌다.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하려 했던 데에는 궁궐 건설을 비롯한 토목공사가 방해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자리잡고 있었다. 이미 토목공사 재원을 마련하는 문제로 민심이 술렁이고 있는 형편에 파병 비용까지 더해질 경우 상황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외교와 내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빛나고 탁월한 외교라도 내정에 발목이 잡히면 그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폐모 논의’와 토목공사 때문에 삐딱해진 여론의 시선이 광해군의 외교를 좋게 봐줄 리 없었다. 내정의 난맥상은 결국 광해군 외교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창원 ‘공단도시 → 공원도시’

    경남 창원시내에 테마공원이 잇따라 조성된다. 공단 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녹지공간을 확충해 도시의 품격을 높이겠다는 복안이다. 21일 창원시에 따르면 각각의 특성을 살린 4개의 테마공원이 현재 조성 중이거나 계획 중이다.4개 테마공원은 ‘아트 존’과 캐릭터 공원, 장미공원, 가족공원 등이다. 시는 용지호수 일대를 아트 존으로 조성하고 있다. 주변의 성산아트홀과 KBS 등과 연계,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2010년까지 300억원을 들여 주변 소공원을 연결하는 도로 위에 다리를 놓고, 야외 공연장과 조각 공원, 꽃동산, 수변 데크 등을 건립한다. 용지호수에는 23억원을 들여 음악분수를 설치했다. 지난해 9월 완공된 음악분수는 워터 스크린 영상과 함께 현란한 불빛을 담은 물줄기를 내뿜고 있어 시민들의 산책 장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 캐릭터 공원은 만화영화 주인공을 소재로 두대동과 삼동동일대 112만㎡에 조성된다.2010년까지 580억여원을 투입, 애니메이션 상영관을 비롯해 캐릭터 전시관, 눈썰매장, 열기구 탐험장, 야외 인형극장 등을 건립해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계획이다. 현재 가음정동 1만 5000여㎡에 조성 중인 장미공원에는 형형색색의 장미 50종 1만여 그루를 심는다. 오는 7∼8월쯤 완공예정이다. 이 공원에는 40m에 달하는 꽃담과 장미터널 5개, 꽃탑 30개 등이 장식된다. 시민들을 꽃 향기에 흠뻑 취하게 만들어 회색빛 공단도시를 떨쳐버릴 것으로 예상된다. 두대동 충혼탑부근 삼동녹지에 조성되는 가족공원에는 너비 30m, 높이 10m의 인공 폭포와 벽에서 물이 흐르거나 뿜어 나오는 벽천분수를 설치한다. 이와 함께 물결 모양의 중앙광장과 바닥 분수, 피크닉장, 잔디광장, 수목원, 전망대 등이 들어선다. 연말 완공목표로 한창 공사를 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이들 공원이 모두 완공되면 창원이 공원도시로 거듭나게 된다.”면서 “아울러 공단도시라는 이미지도 벗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창원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詩心·문학혼’을 논에 심다

    “아따 김 시인, 거기 모줄 좀 잘 잡어. 왜 이리 모줄이 왔다갔다 혀” 19일 오전 10시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도리 늘향골. 시인, 작가 등 문인 50여명이 일일이 손으로 모를 심는 이색적인 장면이 처음 연출됐다. 지금이야 이앙기가 기계적으로 모를 심는 광경이 일상화됐지만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이맘때 모심기는 농민들의 ‘대동잔치’였다. 그 잔치를 문인들이 재현한 것이다. 한국문학평화포럼(이사장 임헌영)이 주최한 ‘논에 시(詩)를 모시다’ 행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포럼 사무총장인 홍일선 시인의 자택 근처 논에서 진행된 모심기에는 이기형, 양성우, 백무산, 박선욱, 이승철, 방남수, 박홍점, 김우영, 윤일균 시인 등과 소설가 송영, 안재성, 윤동수씨, 김학민 한국사학연금재단 이사장 등이 참여했다. 행사의 시작은 무당시인 오우열씨가 열었다. 늘향골 터줏신에게 모내기를 알리는 ‘고유제’를 행한 뒤 곧바로 모심기에 들어간 문인들은 오전내 주민들과 어울려 땀흘려 모를 심었다.들밥을 함께 먹은 뒤 시인들이 창작한 농업관련 시편들을 낭송하는 자리로 이어졌다.‘농업의 신’에게 농주를 한사발씩 올리는 의식도 함께 했다. 이승철 시인은 “손으로 직접 모를 심는 작업을 문인들이 한 마을에서 집단적으로 행한 것은 근래 보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문인들은 농민들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 이후 우리 농업의 살길을 함께 모색하는 토론의 시간도 갖고, 남한강 일대의 갈대밭을 산책하면서 시심과 문학혼도 새롭게 가다듬었다.여주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정동영 ‘6·17 김정일 면담’ 비화 공개

    열린우리당 정동영(얼굴) 전 의장이 통일부장관 시절인 2005년 6월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에 얽힌 뒷얘기를 20일 발간된 자신의 저서 ‘개성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을 통해 공개했다. 면담 장소인 평양 대동강 초대소에서 김 위원장은 “금강산 관광하러 올 때 누구라도 개인 승용차를 몰고 와도 좋다.”“걱정 하지 말라.(북으로)넘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넘어오는 족족 돌려보내겠다.”고 ‘화통하게‘말했다고 정 전 의장은 밝혔다. 김 위원장은 또 이산가족 화상상봉에 대해 “흥분되는 제안”이라고 했다고 한다. 식량문제와 관련, 김 위원장은 “실무자들로서는 남쪽에 요구하는 게 편할 수 있겠지만 북쪽도 체면이 있으니 바쁜 일이 지나가면 식량 증산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남북회담 관행에 대해서는 “5분 정도 덕담이나 모내기 얘기 하다 회담에 들어가면 주먹질하고 말씨름하고 소모적이었다.”고 평했다고 한다.6자회담 재개 요구에 대해서는 “미국이 공화국(북한)을 압살하려 하니 핵을 가지려 할 뿐이다. 미국이 업신여기니 못 나가는 것이다. 미국의 태도 변화 없이 먼저 약속했다가 못 지키면 신의없는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곰발바닥’ 요리를 내놓으면서 “다음에 폭탄주 한 잔 하자.”는 제의도 했다고 한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이정면 지음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겨레의 노래 아리랑, 하지만 우리는 아리랑을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곳곳에 산재한 아리랑들은 또 제각각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원로 지리학자 이정면(83·미국 유타대 명예교수) 박사가 쓴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이지출판 펴냄)은 아리랑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2005년부터 3년 간 강원도 정선을 시작으로 서울, 밀양, 진도 등 아리랑의 4대 유적지를 세 차례 답사한 땀과 애정을 담아 아리랑의 숨결을 찾아냈다. 국내 1세대 지리학자 가운데 한 명인 저자가 노년에 아리랑에 깊이 빠져든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여러 학문을 두루 아우르는 ‘통섭’의 관점에서 아리랑은 인문지리의 또 하나의 귀착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을 통합해 아리랑으로 민족 전통문화의 가치를 규명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리랑을 통해 세계평화와 생명운동을 펼치자고 제안한다. “오랜 옛날 아리랑은 백두대간 산간에서 민요의 하나로 탄생했지만 오늘에 와서는 이념까지를 함유한 문화어가 되었다.…아리랑은 세계 어느 민족, 어떤 나라에도 없는 특별한 예일 것이다. 이러함에서 아리랑은 과거의 노래이나 오늘의 노래로 불리고 있고 미래에도 불릴 ‘내일의 노래’다. 아리랑은 우리뿐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는 도구로 유용하다. 그래서 부르고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 저자가 규정한 아리랑의 3대정신은 저항정신, 대동정신, 해원상생정신이다. 저자는 “남북문제와 세계평화운동의 단서로서 또는 연결고리로서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를 갖게 되었다.”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저자는 아리랑의 세계적 브랜드 가치를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후지산을 국가 이미지로 연결하는 일본처럼 아리랑을 한국의 대표 문화 이미지로 활용하자는 것이다.‘아리랑문화센터’나 ‘아리랑박물관’ 같은 공적 기관을 운영하고, 외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인사동에 공연·자료·전수 기능을 아우르는 가칭 ‘아리랑의 집’을 세우자는 것이다.1만 3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5·18 민주화운동 27주년] “오월에서 유월 함성으로”

    5·18민주화운동 27돌인 18일 광주에서는 기념식과 추모제 등 5월 영령들의 넋을 달래는 각종 행사가 개최된다. 오전 10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는 유족과 정부 주요 인사, 여야 대표 등 정치인, 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린다. 이날 행사는 개회식과 묵념, 헌화·분향, 경과보고, 기념사 등의 순으로 1시간 동안 진행된다.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옛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서 전야제가 열렸다.5·18묘지에는 이날 하루 동안 2만여명의 참배객들이 몰리는 등 추모열기가 절정에 달했다. 대구에서 온 김영석(49·택시기사)씨는 “TV에서만 보던 현장을 직접 느끼기 위해 시간을 냈다.”면서 “묘에 묻힌 수많은 희생자들을 대하니 숙연해 진다.”고 말했다. 이날 묘지를 찾은 전남대생 박모(21·여)씨는 “광주에서 태어났으나 5·18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5·18이 낯설게 느껴져 왔다.”며 “5월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교육 등을 통해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임채정 국회의장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 등 정치인들의 광주 방문도 잇따랐다. 한 전 총리는 “1980년 5월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면서 “당시 교도소안에서 헬리콥터 굉음과 총성, 함성이 울리는 역사적인 현장을 함께했다.”며 5·18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5월에서 6월의 함성으로’를 주제로 열린 이번 전야제는 공연난장, 거리행렬굿, 진혼마당, 체험마당, 주제공연 순으로 밤늦게까지 진행됐다.금남로에서는 ‘주먹밥 나누기 행사’가 열려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옛 도청 앞 특설무대에서는 일본 우타고에의 특별공연,‘무등합굿’‘님을 위한 행진곡’ 춤꾼 김은희의 넋풀이 ‘생명의 바다’가 이어졌다. 횃불행진에 이어 1980년 당시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상황을 묘사한 상황극도 펼쳐졌다. 계엄군의 발포에 시민군이 결사 항쟁하는 모습, 시민들이 계엄군이 발포한 총알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 등이 재현돼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게 했다. ‘가자 오월에서 유월 함성으로’란 분수대 탑돌이 노래시극과 대동놀이가 펼쳐지면서 추모열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밖에 시내 일원에선 5·18 사진전, 어린이 환경극,5·18 퀴즈, 통일체험행사 등의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펼쳐졌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문화재청 “왕릉재실 화기이용은 관행”

    문화재청이 지난 16일 경기 여주에 있는 조선 효종의 영릉(寧陵)에서 취사도구를 동원해 음식을 조리한 사실을 두고 비판이 일자 17일 해명에 나섰다. 하지만 “왕릉의 재실(齋室)에서 화기를 이용한 취사는 관행”이라는 문화재청의 주장에 비난여론이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격화되고 있다. 많은 네티즌은 문화재청 홈페이지 등에 글을 올려 ‘성의있는 사과’를 요구했고, 시민단체인 문화연대는 유홍준 청장의 퇴진을 촉구했다. 문화재청은 이날 박영근 사적명승국장 명의로 ‘효종대왕릉 재실에서의 오판 관련 보도에 대한 문화재청의 입장’을 내고 “사적지에서 음식 등을 제공해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하여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그러나 “예부터 왕릉의 재실은 제례를 지낸 뒤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숙식제공과 제사음식 장만, 제관들이 음복을 하는 장소로 관행에 따라 음식을 장만하고 데우기 위해 부득이 화기를 이용하여 행사를 치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의 안전관리규정은 사적지에서는 불을 피우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또 “16일 오찬은 문화재청장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지역국회의원, 여주군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이사장 등 여러 외부인사를 위한 오찬이었음을 이해해 달라.”고 당부했다. 문화재청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고궁과 왕릉 행사에서 다례 절차와 조리·식사 범위 등을 어떻게 할 것인지 심층적인 연구 검토를 통해 일반 국민들도 납득이 가능하도록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1000억원 클럽’

    대구가 지역 중견기업과의 결연을 통해 해당 기업 지원에 나선다. 이를 위해 시는 연간 1000억원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100인 이상을 고용하는 지역 21개 기업들로 ‘1000억 클럽’을 지정했다. 시는 17일 이들 기업과 시 간부간 ‘CP(Corporation Partner) 결연식’을 가졌다. 공무원들은 시청 경제부서에 근무한 경력이 있거나 현재 근무하고 있는 과장급 이상의 고위직 18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대구 1000억 클럽 기업을 1∼3개씩 맡아 결연 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때까지 지원을 하게 된다. 이들은 월 1차례 이상 해당 기업을 찾거나 전화상담을 통해 기업의 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해 문제 해결 방안을 찾는 등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지원을 하게 된다. 또 시는 1000억클럽 기업에 대해 우수기업인 인증서를 발급하고 기업 경쟁력 강화자금을 우선 지원하거나 지방세 세무조사 유예 등의 혜택을 줄 방침이다. 1000억클럽 기업에는 지난 연말 기준으로 매출 1조원대의 한국델파이·희성전자,3000억원대의 대동공업이 포함됐다.2000억원대 기업으로는 에스엘·평화정공 등 5개기업,1000억원 대기업은 이수페타시스·한국파워트레인·삼익THK 등 13개 기업이 선정됐다. 이들 기업의 전체 매출은 6조여원이다. 자동차 부품업체가 가장 많고 기계부품업, 액정표시장치 및 방송·영상 등 첨단제조업종 등이 있다. 대구시 관계자는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도 지역에서 묵묵히 기업활동을 하고 있는 지역 기업인들이 자부심을 갖고 기업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지원책을 펼칠 예정”이라고 말했다.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서울대공원 “사자·늑대 빌려 드려요”

    ‘사자나 늑대 무료로 빌려 드려요.’ 서울대공원은 17일 잉여동물의 목록을 정해 지방동물원 등에 무상으로 임대해 주기로 했다. 1차로 표범, 사자, 늑대, 삵, 큰뿔양, 바바리양 등 총 6종 19마리를 무상임대동물로 선정했다. 이중 일부는 이미 지난 3·4월에 걸쳐 지방동물원에 빌려줬다. 또 다음달 진주 진양호동물원에 토종동물인 삵 4마리를 임대할 예정이다. 임대기간은 2년으로 하되 필요하면 연장할 수 있다. 단 임대 중 새로 태어난 새끼의 소유권은 서울대공원이 갖고 사육·관리 비용은 빌려가는 동물원측이 부담하는 형식이다. 서울대공원이 이 같은 임대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일부동물을 중심으로 지나치게 늘어나는 개체 수 때문. 무상 임대대상으로 결정된 동물들은 대부분 더 이상 개체 수가 늘어나면 관리는 물론 사육환경이 악화될 것으로 대공원측은 판단하고 있다. 대공원관계자는 “보통 동물원 사이 서로 필요한 동물을 교환하는 것이 관례지만 사육공간 확보, 사료비 절감 등을 차원에서 무상임대라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게 됐다.”면서 “한편으론 근친번식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광해군은 노회한 명과 사나운 후금 사이의 대결 속으로 말려들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가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강구하며, 자강 능력을 배양하려 애썼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정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비록 외교적 노력을 통해 누르하치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었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한, 그 때문에 양자의 관계가 갈등으로 치닫는 한, 조선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1618년(광해군 10) 누르하치가 푸순성을 함락시킨 이후 벌어졌던 일련의 상황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출병 여부를 둘러싼 갈등 명은 관응진(官應震) 등이 주장한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에 따라 조선도 병력을 내어 후금을 공략하는 데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1618년 윤 4월, 명의 병부시랑(兵部侍郞) 왕가수(汪可受)는 조선에 보낸 격문(檄文)에서 병력을 뽑아 별도의 기별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고 요청했다. 형식은 요청이지만 사실상 ‘지시’였다. 명의 통첩을 받았을 때 조선 조정의 의견은 확연히 갈라졌다. 광해군은 파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먼저 조선의 군사적 역량이 미약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1618년 5월1일, 신료들에게 내린 교시(敎示)에서 ‘병(兵)과 농(農)이 분리되지 않은 조선의 병력을 동원해 봤자 후금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굳이 병력을 보내야 한다면 수천명 정도를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기각(角)의 형세를 이루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사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국경 바깥으로 출전시킬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광해군은 명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했다. 그는 후금의 군사력이 막강하므로 명의 원정군이 일거에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오랜 동안 후금 관련정보를 수집함으로써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이자 판단이었다. 광해군은 명에 보내는 회답서신 속에 “경솔하게 정벌에 나서지 말고 다시 생각하여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을 첨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 신료들은 반발했다. 그들은 명에 보내는 서신에 명에 대해 ‘충고’의 성격을 담은 문구를 삽입하는 것 자체를 비판했다. ‘조선은 소방(小邦)이자 명의 번국(藩國)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국(大國)인 명의 군무(軍務)에 간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저 명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결정해야 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비변사 신료들은 또한 ‘명은 조선에 부모의 나라’이며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망할 뻔했을 때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를 베풀었다.’며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켰다. ‘자식’의 처지에서 ‘은혜를 베푼 부모’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면 그저 있는 힘을 다해 구원하려 노력해야 할 뿐, 자신의 강약(强弱)이나 처지를 따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광해군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조차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지키고, 재조지은에 보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채근했다. ●굴레가 돼버린 再造之恩 ‘명이 재조지은을 베풀었고, 조선은 그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 지배층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왜란 초반,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나라의 존망 자체가 불투명했던 상황에서 명군의 참전은 그야말로 한줄기 ‘복음’이었다. 더욱이 1593년 1월, 명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세가 역전되면서부터 ‘재조지은’은 조선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지고(至高)의 은혜’로 굳어졌다. 아예 ‘임진왜란’을 ‘재조(再造)’라고 부르는 인물조차 등장할 정도였다. 비록 명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회피하고, 조선 백성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조지은’의 위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같은 분위기를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선조(宣祖)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끝낼 수 있었던 모든 공로를 명군의 역할 덕분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조선 관군이나 의병의 역할은 평가절하했다.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 이순신은 두개의 적과 맞서야 했다. 하나는 일본군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선조다. 이순신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할수록, 따라서 그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선조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의병장 곽재우와 선조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난 뒤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조는 이순신을 제치고, 정곤수(鄭崑壽)를 1등 공신이자 원훈(元勳)으로 책봉했다. 그가 명군을 불러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나마 곽재우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조선군 영웅들의 위상은 낮아지고, 선조의 실추된 위상이 다소나마 회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지식인들은 조선 내부의 그 같은 분위기에 반색했다. 푸순성 함락 이후 등장한 ‘주요석획(籌遼碩)’에서 요동을 수복하는 데 조선을 이용하자고 주장했던 인물들이 내세운 논리는 거의 똑같았다. ‘임진왜란 때 우리는 모든 힘을 기울여 변변찮은 조선을 도왔다. 이제 그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신료와 명의 지식인을 막론하고 ‘재조지은’을 강조하고 있던 분위기를 광해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명에 보내는 회답서신에 ‘혈기를 갖고 있는 조선 백성은 누구라도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라는 내용으로 문장을 잘 다듬을 것을 지시했다. 외교를 위해 겉으로라도 ‘재조지은’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외교적 노력이 물거품되다 ‘재조지은에 보답하려면 출병하라.’는 안팎의 공세에 맞서 광해군은 외교적 ‘카드’를 총동원했다. 광해군은 먼저 조선에 출병하라고 요청한 주체가 명의 황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자문을 보낸 왕가수는 명의 신료일 뿐, 황제가 아니므로 번국의 입장에서는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명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황제에게 직접 알리기 위해 사신들을 줄줄이 베이징으로 보냈다. 황제에게 조선 사정을 제대로 보고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사신들이 소지한 국서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조선은 아직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의 미약한 군사력을 동원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명 조정은 후금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총괄할 경략(經略)으로 양호(楊鎬)를 낙점해 랴오양(遼陽)으로 보냈다. 임진왜란 때도 총사령관으로 참전했던 그는 조선 사정에 밝았다. 양호는 조선 사신들이 소지한 국서의 내용을 문제 삼아 베이징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조선이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사신 왕래를 통해 요행을 바란다고 질책했다. 광해군은 양호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칙서가 없는 상황에서는 파병할 수 없다고 버텼다. 양호는 조선 사신 박정길(朴鼎吉)에게 “북관과 연락하고 조선을 고무하라.(聯絡北關鼓舞朝鮮)”는 문구가 담긴 황제의 칙서를 보여주었다. ‘북관’은 당시 누르하치의 후금에 밀리고 있던 해서여진의 예허(葉赫)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양호는 또한 당시 요동지역에 ‘조선이 후금, 일본과 내통하고 있으며 후금군 가운데 3000명이 조선인’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음을 들어 협박했다. 박정길 일행은 양호의 협박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조선 영내로 돌아오고 말았다. 1618년 10월.‘조선은 병력을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는 데 협조하고, 양호의 지휘를 받으라.’는 내용의 명 황제의 칙서가 날아들었다. 광해군의 입장에 반대했던 비변사 신료들은 힘을 얻었고, 출병하라는 채근 또한 더 심해졌다. 안팎으로 곱사등이가 된 처지에서 광해군은 소신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시기 명군의 참전을 통해 떠오른 ‘재조지은’은 17세기 초에도 조선 정치와 외교 전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승승장구’ 신영 첫 시련

    직접 건설을 하는 시공사가 아니라 종합 부동산개발업체로 승승장구해온 신영이 최근 실패를 맛봤다. 국내 1위 시행사로 자리매김한 신영에는 사실상 첫 실패라는 말도 업계에서는 나오고 있다. 신영이 최근 의욕적으로 추진한 충북 청주시 복대동 대농지구의 대규모 주상복합단지 지웰시티 1차분 2164가구 분양이 차질을 빚고 있다. 지난 3월27일 이후 1∼3위 분양에서의 계약이 절반을 밑도는 수준이다. 이같은 계약 저조에 대해 신영은 느긋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신영 관계자는 14일 “극도로 침체된 부동산시장 상황과 비수도권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고려할 때 50%에 육박하는 분양은 비교적 선전한 편”이라며 “조급한 마음을 풀고 느긋하게 (분양완료를) 가을까지 가겠다.”고 말했다. 신영이 지웰시티에서 재미를 못본 것은 최근의 부동산경기 침체에다 평당 분양가가 1140만원 정도로 고가였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분양타이밍도 좋지 않았다. 지난해 가을에 분양했더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오는 9월에는 2차분 1940가구를 분양할 예정이지만 이것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침체된 부동산시장이 이른 시일내에 되살아날 가능성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부산시청 공무원 출신인 정춘보 회장은 84년 신영을 세웠다. 초창기 ‘복덕방’에서 출발해 종합 부동산개발회사로 끌어올렸다. 자수성가한 셈이다. 신영은 지난 97년 처음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시그마Ⅱ 1094가구를 성공적으로 분양하면서 부동산 개발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당시 시그마Ⅱ 시공사인 한라건설이 부도를 맞았지만 신영은 한라건설을 끝까지 밀어줬다. 이후 99년 분당신도시의 주상복합 로얄팰리스(624가구)를 비롯해 지난해 김포 지웰시티(267가구) 등 아파트와 주상복합을 지어 성공적으로 분양해 나름대로 입지를 굳혔다. 신영은 2004년에는 대농을 인수해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천재 골퍼’ 미셸 위와 2년간의 광고계약을 맺는 등 ‘거침없는’ 행보를 계속했다. 하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렸다는 말을 듣던 신영이 청주 지웰시티에서 뜻밖에 만난 미분양이라는 ‘암초’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 주목된다.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녹색공간] 한강은 흐른다/이기영 호서대 식품미생물학 교수

    악동들에게 한강의 봄은 칡뿌리 캐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양지바른 곳에 삼삼오오 모여 숫돌로 곡괭이와 삽을 갈아 날을 세운다. 꼬마대장은 행주산성 공동묘지에 겨우내 알배기로 뿌리를 내린 어른 다리통만한 칡을 캐올 전략을 세운다. 그러나 무서운 묘지기 아저씨가 망을 보고 있어 한강가의 이마모태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한강을 타고 올라온 왜군들이 까맣게 산성을 향해 기어오르다 부녀자들이 행주치마로 날라온 돌벼락과 뜨거운 물세례를 받고 떨어져 강물에 빠져 죽은 곳이다. 절벽 아래는 덕양산을 휘돌아가는 물살이 가장 빠른 곳이라 고깃배들도 이곳을 피해 간다. 땅은 아직 얼어 단단하지만 조금만 파고 내려가면 부드러운 흙이 나온다. 무덤에 뿌리박은 칡뿌리를 한아름 캐 안고 돌아온 아이들은 개선장군처럼 뽐내며 계집애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준다. 며칠동안 입이 검게 물들도록 씹으며 미리 찾아온 봄의 단맛을 즐긴다. 날씨가 풀리면서 여자애들도 질세라 대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간다. 흙 속에는 거미줄곰팡이처럼 하얗게 퍼진 메가 가득하다. 메를 한 소쿠리 캐 밥을 지어 무친 냉이반찬과 함께 먹으면 메향기가 입 속 가득히 퍼지며 봄의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한강이 풀리면서 강에서 처음 잡히는 물고기가 황복이다. 한강 상류로 올라가서 알을 낳기 때문에 3월 초순부터 4월초까지 한 달만 잡히는 고급 매운탕감이다. 복어는 테트로도톡신이란 무서운 독을 갖고 있어 아가미와 알, 간, 피는 빼버리고 먹어야 한다. 이 독은 복이 만든 게 아니라 산란기에 복에 기생하는 미생물이 분비한 것이다. 간혹 버린 내장을 개나 닭이 먹고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워낙 맹독성이라 먹는 즉시 소리도 못 지르고 꼬꾸라진다. 새끼 황복은 잡히면 배에 바람을 불어넣어 몸 전체가 공처럼 부풀어 오르며 물에 둥둥 뜬다. 무서워서 죽은 것처럼 위장하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큼직한 황복의 노르스름한 뱃가죽을 잘라내 씻어 말린 뒤 양재기에 씌워 북을 만들어 주셨다. 나는 비린내 나는 복북을 두드리며 동네 아이들과 성당마당을 돌며 노래판을 벌였다. 봄 햇살을 흠뻑 받은 개나리 담장에 닥지닥지 붙은 꽃망울이 화사하게 터지고 연분홍 진달래는 앞산 자락을 붉게 물들인다. 뒷산 언덕이 복사꽃으로 점점이 채색되고 한강의 양수장에서 퍼올린 물이 수로를 따라 흐르며 논밭을 적시기 시작하면 일손이 달리는 농사일을 도우러 악동들도 논밭으로 불려나가야 했다. “한강은 흐른다. 산과 들 사잇길로 복숭아 진달래 꽃망울을 터뜨리며 오늘도 무지개로 소리없이 흐른다. 한강은 흐른다.…마을과 도시를 지나 저마다 생의 등불 환하게 밝히면서 오늘도 은하수로 묵묵히 흐른다.”(www.singreen.com) ‘자연사랑 음유시 한마당’을 함께 펼쳐왔던 서울대 오세영(한국시인협회회장) 교수가 주신 이 시에 곡을 부쳐 보았다. 때마침 세계적 생명평화운동가이자 대학시절 친구인 뉴욕유니언 신학대의 현경 교수가 생태명저 ‘오래된 미래’의 저자인 헬레네 노르베리 호지 여사와 한국을 방문해 생태공연을 요청해 왔다.2005년 봄 한강 하류의 파주 헤이리 마을에서 이 노래를 초연했는데 뜻밖에도 너무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이 노래는 이제 수십여 차례에 걸친 음악회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되면서 우리 한민족의 혼을 담은 국민영가로 자리잡았다. 바리톤 최현수가 신작 가곡음반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한강은 우리 한민족의 생명을 지탱하는 대동맥이다. 그런데 요즘 선거철을 맞아 공장 건설이니 운하개발이니 하며 한민족의 대동맥을 마구 더럽히고 끊어놓으려는 개발 광풍이 일고 있다. 이 노래를 널리 퍼뜨려 위기의 한강을 살리자. 이기영 호서대 식품미생물학 교수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이덕일 지음

    조선 선조40년(1607) 음력 5월6일 최고의 재상이라는 서애 유성룡이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은 선조가 명한 ‘3일장’을 치른 뒤 하루를 더 애도했다. 조정은 3일 동안 정사를 중단했지만 상인들은 하루 더 철시하면서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남았겠는가.”라며 그의 서거를 애도했다. 유성룡의 삶이 도대체 어떠했기에 그토록 국민적 신망을 받았을까.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이덕일 지음, 역사의아침 펴냄)은 임진왜란과 당쟁이라는 조선의 두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유성룡의 삶을 통해 조선 중기의 현실과 그의 인생철학을 재조명한 책이다. 서애는 지금까지 사실 정통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비판해 조선을 누란의 위기에 빠지게 한 인물이라거나 한없이 우유부단했던 인물이라는 등의 평가가 그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선수실록’(선조수정실록) 등 각종자료를 바탕으로 유성룡을 둘러싼 다양한 의문을 밝혀냈다. 아울러 임진왜란 내내 도망가기 바빴던 군주(선조)를 대신해 정치, 행정, 군사, 경제 등 국정 전반을 책임진 리더로서의 역량을 조명했다. 저자는 서애를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을 넘기면서 유성룡의 행적을 하나씩 살펴 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나타난다. 땅이 없는 가난한 서민들을 공납의 부담에서 해방시킨 대동법은 그중 하나이다. 숙종34년(1708)에야 전국적으로 확대실시된 대동법은 임란 때 유성룡이 작미법(作米法)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다. 고종9년(1871) 대원군이 강행한 호포법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양반들은 호포법 실시 이후에야 비로소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성룡은 임란중 속오군을 만들어 양반에게도 병역의무를 지게 했다. 유성룡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을 모두 포기하면서 전란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가지 제도와 민생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저자는 연구를 통해 유성룡의 리더십 특징 7개를 뽑아내 제시하고 있다. 바로 ▲위기돌파 능력 ▲비전제시 능력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능수능란한 외교력 ▲유연한 사고방식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 등이다. 7년의 임진왜란 동안 도체찰사와 영의정까지 겸임했던 유성룡은 전란을 치르면서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정치·경제·민생 등 국가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했다. 또 각종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현안은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해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일본의 전략을 한눈에 파악해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뛰어난 외교전략을 펼쳤고, 성리학과 양명학 등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사고를 가졌다. 특히 하급무관이었던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해 승전으로 이끈 인물도 바로 유성룡이다. 이런 리더십은 그러나 결국 유성룡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전란의 끄트머리에서 유성룡이 실각한 것은 유성룡의 이런 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이 선조와 공모해 탄핵했기 때문이다. 그가 실각한 후 각종 개혁입법들은 무효화됐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인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또한 우리의 미래이다.” 1만 9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김회장 ‘보복폭행’ 사건일지

    ▲3월8일 오전 7시 김 회장 차남(22), 청담동 G가라오케에서 윤모(33)씨 등과 시비붙어 부상.▲3월8일 오후 7시 경호원 등을 대동한 김 회장 측 G가라오케 도착.▲3월8일 오후 9시 김 회장 측, 조모씨 등 데리고 청계산 주변 공사장 건물로 이동해 폭행(한화 측은 김 회장 부자 현장에 없었다고 주장).▲3월8일 오후 11시 김 회장 측 북창동 S클럽으로 이동한 뒤 아들을 폭행한 윤씨를 불러 폭행.▲3월9일 0시7분 112 신고, 남대문경찰서 태평로지구대 경찰관 2명 현장 출동(별 조치 없이 돌아감).▲3월20일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오모 경위 관련 첩보 입수. 서울청 형사과장에게 보고.▲3월28일 서울청 형사과장, 첩보내용 남대문서에 하달.▲4월24일 ‘보복폭행’ 언론보도.▲4월25일 김 회장 둘째 아들 중국 출국.▲4월26일 남대문서, 김 회장 경호원 3명과 경호업체 직원 3명 소환.▲4월27일 수사팀 확대 개편 전면 수사 착수.▲4월28일 경찰, 김 회장 출국금지 조치. 김 회장,2차례 경찰 출석요구 불응.▲4월29일 오후 4시 김 회장, 남대문서 출두, 다음날 오전 3시20분까지 조사.▲4월30일 김 회장 차남 귀국 및 경찰 자진출두.▲5월1일 김 회장 자택에서 압수수색 실시.▲5월2일 한화그룹 본사 압수수색.▲5월3일 보복폭행 현장조사 실시, 폭행에 협력업체 D토건 관계자 동원 사실 확인.▲5월6일 한화 경호팀장, 광역수사대 오 경위 피의사실 공표 검찰 고발 ,D토건 압수수색.▲5월7일 사건 당일 폭행 현장 3곳 중 2곳에 범서방파 행동대장 오모(54)씨가 있었던 사실을 확인.▲5월7일 한화 협력업체 D토건 김모 사장 소환 조사(불구속).▲5월8일 한화 김모 부속실장 소환(불구속), 피해자 6명 기자들에게 피해사실 진술.▲5월9일 한화 진모 경호과장 재소환, 김 회장 영장 신청.
  • 서울 洞 내년 100개 줄인다

    서울시가 행정효율을 높이기 위해 현재 518개인 서울시 동사무소를 내년까지 100개가량 줄인다. 통·폐합을 통해 생긴 빈 동사무소는 공공 보육센터·도서관 등 주민을 위한 복지·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여유 인력은 도시디자인 등 새로운 행정 수요 부서에 재배치할 계획이다. 서울시는 9일 25개 자치구 행정관리국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자치구 연석회의’를 열어 동 통·폐합을 통한 ‘대동제(大洞制)’ 추진 방침을 밝히고 자치구의 협조를 당부했다. 회의에서는 최근 20개의 동을 5개씩 4개동으로 통·폐합하기로 한 마포구가 사례 발표를 한 데 이어 서대문구가 향후 동 통·폐합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시의 동 통·폐합 방안에 따르면 현재 518개인 서울시 자치구의 각 동 가운데 인구 2만명을 밑도는 100여개 동사무소를 2008년까지 다른 동사무소와 통·폐합하기로 했다. 시는 각 자치구와 공동협약을 맺어 자율적으로 동 통·폐합을 추진하고, 통·폐합을 추진하는 자치구에는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자치구마다 폐지되는 동 하나당 10억원을 지원하고, 통·폐합한 동에는 동사무소 리모델링 비용 2억원을 지원할 방침이다. 시는 공청회, 주민의견 수렴 등을 거쳐 내년 초 동사무소 설치 조례를 개정해 하반기부터 통·폐합에 나설 계획이다. 이같은 방침에 대해 각 자치구는 대동제 원칙에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서대문구는 현재 21개인 동사무소를 16개로 5개 줄이기로 하고 관련 용역을 발주하기로 했다. 성북구도 30개인 동사무소를 20개로 10개 줄인다는 목표를 세웠다. 또 서초구와 강동구는 현재 인구 3만명마다 1개동을 두던 것을 5만명마다 1개동을 두도록 기준을 상향조정해 동사무소 수를 3분의2 수준으로 줄일 방침이다. 서울시의 동사무소 통·폐합은 소규모 동사무소를 통·폐합해 행정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현재 서울시 동사무소의 정원은 14명 이하(13.5명)로 돼 있다. 따라서 두 개 동을 하나로 묶으면 정원(가정) 27명 가운데 필수요원 5∼6명을 제외한 20여명은 주민을 위한 복지나 문화사업에 투입할 수 있다고 시는 판단했다.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다국적 건축설계社 몰려온다

    다국적 건축설계社 몰려온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국내에서 활약하는 해외 설계회사의 활동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8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에 지사나 법인, 출장소 등을 두고 활동하는 다국적 설계사무소는 10여개에 이른다. 이들은 국내 랜드마크 빌딩인 서울 서초동 삼성그룹빌딩, 현대산업개발 본사, 스타타워 등의 설계에 참여했다. 해외 설계회사들의 국내 진출은 꽤 오래됐다.1965년 한·일 협정 이후 조선호텔·신라호텔·롯데호텔 등 호텔 건립에 일본 설계사들이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1980년대 미국계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가세했다.80년 완공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85년 완공된 여의도 63빌딩 등이 미국계 설계회사의 손길을 거친 건물들이다. 이후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체결과 함께 문호가 더욱 넓어졌다. 구헌상 건설교통부 국제협력팀장은 “이번 한·미 FTA에서 한·미 양국이 건축설계부문 자격증을 상호 인정키로 합의함에 따라 앞으로 미국계 설계기업들의 진출이 활발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해외 설계업체들이 국내의 대규모 복합단지 개발 등의 프로젝트에서 진가를 발휘하며 도심 건축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계 설계회사인 ‘저디파트너십’은 내년 3월쯤 개장 예정인 국내 최초의 제3세대 복합단지인 경남 창원시 두대동의 ‘더 시티7’에 참여하고 있다. 저디파트너십은 일본이 자랑하는 도쿄 롯본기힐과 캐널시티, 터키의 캐뇬,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페스티벌시티, 멕시코의 시티 산타페 등의 설계사다. 컨벤션센터를 비롯해 오피스텔·트레이드센터·쇼핑몰·호텔 등으로 이뤄진 더 시티7은 ‘옥상정원’과 ‘물의 흐름’이란 컨셉트로 즐거움과 여유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게 저디의 구상이다. 여기에다 도시와 사람 측이 쇼핑몰 전체를 책을 컨셉트로 조성해 ‘문화를 파는 공간’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저디파트너십은 또 최근 서울 여의도 ‘더 숍 아일랜드파크’, 자양동 ‘스타시티’의 설계를 맡는 등 활발한 사업실적을 바탕으로 한국지사 건립을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부산 해운대구에 건설되고 있는 센텀시티몰은 미국의 무역센터와 노드스트롬 백화점 설계로 유명한 ‘캘리슨’이 맡았다. 하창석 도시와 사람 회장은 “세계적인 설계회사들의 국내 진출로 국내 업체의 설계 능력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국내 업체도 설계 환경을 개선하고 경쟁력을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중계석] “결혼이민자 정책은 전시행정”/서명선 여성개발원장

    급격히 늘고 있는 결혼 이민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전시행정이고 중복투자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일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에서 열린 ‘결혼이민자 지원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자로 나선 한국여성개발원 서명선 원장은 “결혼이민자가 급격히 늘면서 정부와 지자체, 각종 단체가 지원하는 서비스의 양은 크게 증가했지만 대부분 초급 한국어, 생활예절 교육, 전통문화 체험, 한국요리 강습 등 대동소이한 프로그램만 중복 제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 원장은 “결혼 이민자들의 사회통합을 위해 체계적인 제도정비가 필요하다.”면서 접근성을 높이는 ‘찾아가는 서비스’, 각종 행정 정보, 의료·복지 정보에 대한 통합적인 통역·번역 체계, 결혼 이민자 가족들에 대한 교육, 여성 이민자의 출신국가에 대한 적극적인 문화교류와 홍보, 전문인력 육성 등을 제안했다. 또 “결혼 이민자들의 사회 참여를 확대해 우리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주체로서 우리 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다문화 사회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 가나가와 현민청의 오가와 교코 과장대리는 “1998년 설치된 ‘외국국적 현민 가나가와 회의’에는 20여명의 위원이 참여해 스스로의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장을 확보하고, 집행기관은 이를 존중해 시·읍·면의 시책과 연계하도록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 국가에서 온 외국인 배우자의 비율이 많은 타이완의 사례가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소개됐다. 경기도가 주최하고 경희대학교가 주관하는 이번 국제심포지엄은 9일 다른 나라의 결혼 이민자에 대한 민간부문의 지원 사업 사례 등이 소개된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열린세상] 아버지의 고향,평양은 없었다/김정란 상지대 교수·시인

    [열린세상] 아버지의 고향,평양은 없었다/김정란 상지대 교수·시인

    지난 달 말 평양에 다녀왔다. 겨레 숲 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평양 양묘장 준공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많이 흥분해 있었다. 떠나기 전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했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평양은 내 아버지의 고향이다. 명민하셨던 아버지는 생애의 마지막에 마치 생의 끈을 탁, 놓아버리듯, 오랜 망아(忘我)의 상태에 머물러 계셨다.10여년의 세월 동안 어머니와, 당신의 젊은 날의 동지였던 어느 목사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셨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악착같이 평양을 기억하고 계셨다. 자리에 누워 퀭한 눈으로 “여기가 어데야요? 피양이디요?”하고 말씀하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딸의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아버지는 왜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시고는 나에게는 미지인 그곳만을 악착같이 붙잡고 계신 것일까? 그 땅은 아버지에게 무엇이었을까? 무엇이기에 지성을 갉아먹힌 내 아버지의 머리 한 구석에 악착같이 남아 있는 것일까? 나는 금강산에 가지 않았다. 여러 차례 가 볼 기회가 있었지만, 떠나겠다고 약속까지 해 놓고도 떠나는 날 취소하고는 했다. 내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셨던 그 땅에 나는 도저히 ‘관광’을 하러 갈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나를 금강산 관광객 대열에 편히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이번 평양행은 어쨌든 ‘관광’이 목적인 일은 아니었다. 내가 ‘겨레 숲 살리기 운동’에 무슨 거창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단순한 ‘관광객’으로 가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평양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아버지 묘소에 다녀왔다. 나는 묘소에 별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곳에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마음이 달랐다. 이건 ‘땅’의 문제, 강요된 이유에 의해 자유롭게 밟을 수 없는 유형적 공간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아버지, 다녀올게요. 당신이 그렇게 그리워하시던 곳, 그곳에 당신 대신 다녀올게요.” 그리고 많이 울었다. 비행기는 채 한 시간을 날지 않았다. 이 짧은 거리를 수십년 동안 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한 민족의 터전인 대지를 공유하지 못하게 할 만큼 그렇게 엄청난 무엇이 있다고? 정치체제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인간에게서 대지를 빼앗아간다는 말인가? 언제까지 이 우스꽝스러운 놀음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내가 평양에서 받은 느낌은 잘 정리되지 않는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그 느낌을 글로 쓰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보고 온 것이 평양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땅은 증발되어 버리고,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평양이 이미 아버지가 그리워하시던 당시의 모습이 아니라는 뜻만은 아니다. 아버지가 그리워했던 곳은 지리적인 평양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는 아버지께 내가 보고 온 무엇을 보여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대동강 가의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몸살을 앓았을 것 같다. 나는 그 나무들을 데리고 왔다. 예쁜 나무들, 오랫동안 대동강을 지켜보았을 나무들, 내 젊은 아버지의 열망에 가득찬 시선이 닿았을 나무들, 생명의 줄을 붙잡고 말없이 대지와 하늘을 잇는 나무들을. 아버지는 나무처럼 말이 없으시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넨다. 산 자의 허망한 법석댐을 거쳐서. 언제든, 평양을 평양으로 만날 날이, 그 도시를 내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려받을 날이 기어이 올 것을 믿으면서. 간절히 원컨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김정란 상지대 교수·시인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