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형칼럼] “그 입 다물라”
한국 정당의 황폐한 문화는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의 당의장이 피를 토하듯 사퇴의 변을 하고 있는데, 한 당원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이부영 당원, 이제 (평)당원 맞지요. 그 더러운 입 걷어치워요.”
이 전 당의장이 지난 3일 시무식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관철 등 당내 강경론자들을 겨냥,‘과격한 커머셜리즘’이라고 비판하던 말 끝에 이런 막말이 나왔다. 즉흥적인 야유라고 가볍게 보기에는 너무 무거운 소동이다.
이러한 소동이 일어날 수 있는 정당 내부 토론 문화의 삭막함이 문제이기 때문이다.‘계급장’뗐으니 같은 평당원으로서 못할 말이 뭐 있겠느냐는 저돌성이 음습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나와 상대방과의 다름을 용인하고, 대화를 통해 서로 접점을 찾는 정당의 기본적인 협상 문화는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정당간에 상생은 그만두고, 정당 내부에서조차 상생 아닌 상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니 국민들은 기성 정당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연말 서울신문이 정당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국민의 63.5%가 ‘지지 정당이 없다.’고 대답했다. 한나라당(14.7%), 열린우리당(12.8%)도 겨우 10%대에 머물러 도토리 키재기였다. 상생의 정치를 내건 17대 국회가 정기 국회까지 치렀지만, 국민들의 눈에는 ‘벌써 싹이 노란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4년전 16대 국회 출범 후 실시한 여론조사 때 ‘지지정당 없음’이 47.9%였던 것에 비해서도 크게 떨어진 것이다.
집권당 지도부의 총사퇴를 불러온 이번 사태는 당내 강·온파간의 갈등과 대립 때문에 초래되었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보면, 두 가지의 원인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하나는 대통령이 당총재를 겸하던 이른바 ‘제왕적 총재’가 존재하지 않은 데서 오는 혼란 현상이다. 절대 권력의 카리스마가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으면 그저 지지고 볶는 저급한 정당 문화에 젖어 있다. 당내 자율적인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작동하기까지 겪을 수밖에 없는 과도적 ‘성장 진통’으로 볼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다른 하나는 열린우리당 내부의 정치 세대간 이념 분화에서 오는 노선 투쟁의 일면으로 파악된다. 당내 당권파, 친노직계, 재야파, 개혁파 등 계파적 친소 관계를 떠나 3선 이상 중진들의 온건 노선과 초선 중심의 강경 노선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배경이 황량한 정당 문화의 원인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정당내 극한적 노선 투쟁은 당의 분열이나 당력의 소진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이런 투쟁은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아집과 독선이 판을 친다. 자신은 선명하고 상대방은 야합으로 몰아세운다. 당내 민주적 토론을 통해 절충점을 찾기는 정말 어렵게 된다.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도 그렇다. 국보법을 폐지하여 형법으로 가든, 대체 입법으로 하든, 법 체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죄의 유무를 가릴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두느냐 마느냐가 핵심인데, 지금 강·온 양파는 본질과 관계없이 이념 논쟁으로 덧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당 문화가 갈수록 살벌해지고,‘전부가 아니면 전무’식으로 나간다면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결집하여 국정에 반영하는 정당정치의 본령을 더이상 기대할 수 없다. 계급장 떼지 않고 정장 차림으로 생산적 토론을 할 수 있는 정당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권위주의는 버려야 하지만 권위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당원간에 수평적 동지 의식을 갖는 것은 좋으나, 당직이나 국회의원들의 선수(選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정당 운영이나 국회 운영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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