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4인방’을 아십니까/양필승 건국대 교수·차이나타운 건립위원장
우리 언론이 심심치 않게 쓰는 용어가 ‘4인방’이다. 그 원조는 40년 전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1966∼1976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용어로, 실제로 1975년 정치국 회의 석상에서 마오쩌둥이 다시는 ‘방(幇)’처럼 행동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언론은 4인방 단어를 남용한다. 야구 고졸 루키 4인방, 토종미녀 4인방, 닭띠 CEO 4인방 등과 같이 무조건 4인의 조합을 가리킨다.
중국의 4인방은 마오의 처, 장칭을 필두로 상하이의 실력자 장춘차오, 문혁의 신델레라인 왕훙원, 그리고 문혁의 이론가 야오원위안 네 사람을 지칭했다. 이들은 마오주의를 추종했던 인물로서 모두 중국의 최고권력기구인 당정치국의 멤버였으며, 그 중 장과 왕은 9명에 불과한 상무위원으로 권력 최정상에 섰었다.
우선 야오는 1965년 상하이의 신문에서 희곡비평을 통해 마오의 반대파를 공격함으로써 문혁 촉발의 직접적 계기를 만들었다. 장칭은 마오의 개인적 권위를 이용해 홍위병을 진두지휘했다.
장춘차오는 4인방 중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물로서, 문혁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상하이 코뮌’을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왕훙원은 상하이의 노동자에서 단숨에 당 부주석의 자리에 올랐으며 당시 서른 여덟에 불과했다.
4인방의 권력은 모두 ‘마오쩌둥의 사람’이란 추상적 기반에서 비롯된다. 마오의 처, 장칭이야말로 그 같은 속성을 가장 적절히 드러냈다. 그들은 지도자로서 객관적인 능력을 배양할 시간도 없었고, 추종세력을 따로 구축할 필요도 없었다. 마오와의 코드만이 권력의 기반이었을 뿐이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 사이의 연대를 조직화할 기회도 없었는데, 그 까닭은 마오와의 ‘관시’(관계)만이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이들 네 사람 사이의 정치적 비중은 훗날 4인방 재판의 결과에서 드러났는데, 장칭과 장춘차오는 사형, 왕은 무기징역, 그리고 야오는 징역 20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다들 감형을 받았으나, 장칭은 199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같은 4인방의 급속한 몰락은 모두 문혁에 대한 중국인의 입장, 특히 마오시대를 청산한 덩샤오핑의 고민을 반영했다. 한마디로 문혁의 과오는 모두 4인방의 잘못으로 귀결짓고, 그를 주도했던 마오에게는 면죄부를 부여했던 것이다.
4인방 그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몰락에도 억울한 측면이 있었겠지만, 그들의 권력 자체가 너무나 왜소했다는 측면에서도 스스로 억울하게 느꼈을 듯하다. 왜냐하면 문혁 기간 중 실제 권력은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구축된 관료세력이나 린뱌오가 이끄는 군에게 있었고,4인방은 고작 문화계와 관영 언론을 장악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혁을 주도할 힘도 없었고,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과 이념은 구체적인 정책에 의해 부인되거나 아예 무시됐다. 결국 ‘마오의 사람’들은 한번도 권력다운 권력을 휘둘러보지 못하고, 마오의 죄과를 몽땅 뒤집어쓰는 희생양으로 역사적 소명을 마쳤다.
그래서 중국 현대사에서 4인방이란 개념은 부정적이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 언론이 4인방이란 개념을 얼마만큼 남용하는가는 그 자체로서 별 시빗거리가 될 수 없겠지만, 최소한 4인방이 함축하는 비극성만큼은 충분히 고려하고 사용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중국의 4인방과 같은 비극이 여전히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권력도 없으면서 스스로의 목소리만 높이고 끼리끼리 챙겨주다 나중에는 신념의 실패도, 정책의 실패도 아닌 채 우왕좌왕하다가 끝나고 말 한국판 4인방. 이제 우리도 4인방을 단순히 네 명이라는 숫자를 나타내는 도구로 쓸 것이 아니라 그 비극성을 충분히 담아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 역사적 교훈이 자연스럽게 배어들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양필승 건국대 교수·차이나타운 건립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