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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택민,김 대통령에 친서/4자회담 「긍정적 입장」 담아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은 최근 한·미 정상이 제주회담을 통해 제의한 한반도 4자회담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담은 친서를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낸 것으로 21일 밝혀졌다. 강주석의 친서는 4자회담에 대한 지지를 요청한 김대통령의 친서에 대한 답신형식이며,외교경로를 통해 우리측에 전달됐다고 정부 당국자가 밝혔다. 이 당국자는 『강주석은 친서에서 중국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원하고 있으며,이를 위해 건설적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전해왔다』며 『이는 4자회담 제의 직후 발표한 중국외교부 대변인 성명과 같은 것으로 그동안 중국이 견지해온 원칙적 입장을 재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한편,러시아는 정부가 외교경로를 통해 4자회담의 성사를 위해 협조해달라고 요청한 데 대해 『한·미 양국이 한반도 정전체제의 한 당사자인 유엔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유엔을 비롯한 당사국들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한 당국자가 밝혔다.〈이도운 기자〉
  • 북,북경접촉 재개 제의/정부 “화전양면전술” 분석… 거부할듯

    정부는 6일 북한이 제4차 북경 남북접촉을 거듭 제의하기 위해 5일 발송한 팩시밀리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통일원 김경웅 대변인은 이날 『북경쌀회담 북측대표단장인 전금철이 이석채 당시 우리측 수석대표(현 정보통신부장관) 앞으로 보낸 팩스를 5일 하오 받았다』고 확인했다. 김대변인은 그러나 북한이 대남비방·중상 중지,한반도내 남북당국간 회담개최등 우리측 요구를 비난,거부한데 대해 『북한이 우리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한 4차 북경접촉은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북한측 팩스에 대한 답신을 아직 발송하지 않았으며 현재 발송여부를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통일원은 특히 북한이 한편으로는 무력시위를 하면서도 지난달 20일에 이어 거듭 제4차 북경접촉을 제의한 것을 「양면전술」로 분석하고 다각적인 장단기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다.〈구본영 기자〉
  • 북 「쌀 회담」 재개 제의/정부 “공식회담 갖자”

    북한이 최근 우리 정부에 북경쌀회담과 같은 남북접촉을 재개하자고 제의해 왔으며 이에 대해 정부는 즉각 답신을 보내 한반도내에서 공식적인 당국자회담을 열자고 역제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27일 『지난해 북경쌀회담 북한측 전금철 대표단장이 우리측 수석대표였던 이석채 정보통신부장관(당시 재경원차관) 앞으로 팩스를 보내 북경접촉을 재개하자고 제의해 왔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이에 대해 우리측은 즉각 답신을 보내 3차 북경쌀회담시 우리 당국이 내세운 ▲한반도내 회담개최 ▲공식채널을 통한 당국자의 공식제의 ▲대남비방중지등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발신자 직함을 「북경접촉 북측 대표단장 전금철」이라고 사용했고 수신자도 「남측 수석대표 이석채」로 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원 김경웅 대변인도 브리핑을 통해 『북한측이 최근 북경접촉을 재개하자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고 말해 북한측의 대화제의를 공식확인했다. 김대변인은 『그러나 정부는 북측 주장이 정상적인 대화방법이 아니라고 보며 한반도내에서의 공식적 당국회담 개최와 대남비방중지 등을 요구한 우리측 입장에 호응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이같은 입장전달은 북한의 제의를 일단 거부하면서 북한측에 당국간 회담성사를 위한 우리측 전제조건 수용을 촉구한 것으로 풀이돼 북한의 수용여부 및 회담재개 성사여부가 주목된다.〈구본영 기자〉
  • 미 스커드 방어망 「사드」 개발 연기/대북 방위 차질 우려

    ◎예산삭감으로 3∼5년 지연 불가피/핵협상과 연계… 「고의적 회피」 시각도 북한군의 스커드미사일공격에 대비해 주한미군에 구축하려던 미사일방어망인 「사드」(THAAD·전역고고도미사일방어망)체제의 개발이 미국방부의 연기결정에 따라 상당기간 뒤로 미뤄지면서 당분간 한반도미사일방어망의 공동화가 우려되고 있다.이는 또한 미국이 북한과의 핵협정을 이행해나간다는 이유로 한반도의 방위와 관련된 문제들이 그 우선권에 있어서 뒤에 처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고 있다. 사드체제는 지난 91년 걸프전당시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공격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망체제의 구축요청에 따라 개발이 시작된 것으로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은 북한의 소련제 스커드미사일을 개량,막강한 위력을 갖고 있는 북한의 노동미사일에 대비하기 위해 한반도의 우선적인 미사일망구축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미국방부에서는 최근 의회의 예산삭감에 따라 미사일방어망구축보다는 해군의 방어무기인 라우티어생산에 역점을 두면서 사드체제개발은 우선권의 측면에서 상당히 뒤떨어지게 됐다. 미국방부의 케네스 베이컨대변인은 15일 정례브리핑에서 의회의 예산감축에 따른 럭 주한미군사령관이 요청한 사드체제구축의 지연으로 주한미군이 북한미사일로부터 노출되는 위험성에 대한 질문에 『미사일위협에 직면한 미군의 보호를 위해 방어망을 구축하는 계획은 서있으나 지역에 따라 빠를 수도 늦을 수도 또 철회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전체적인 재평가가 진행중이며 곧 발표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워싱턴타임스지는 이날 지난달 존 셜리캐슈빌합참의장이 럭사령관의 사드체제 조기구축요청에 대해 보낸 답신을 소개하고 국방예산삭감에 따른 국방부 합동소요평가위원회(JROC)의 우선순위판단에 따라 사드체제의 지속적 개발의 중단이 불가피하며 이에 따라 2000년까지 구축예정이던 사드체제의 3∼5년 지연이 불가피하다고 소개했다.
  • 「독도 분쟁화」일 전략에 쐐기/정부 강경대응 배경과 방침

    ◎“영유권 거론대상 될 수 없는 우리땅” 확고/관할권 강력행사… 국제기구 제소해도 불응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우리 정부의 일관된 대응은 이를 무시한다는 것이었다.독도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우리 영토라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공연히 과민반응을 보여 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다. 일본은 90년대 들어 매년 8월쯤이면 ▲국제법상으로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이며 ▲한국은 독도로부터 즉시 철퇴하고 건조물을 철거하라는 구상서(verbalnote)를 우리 정부에 보내오고 있다.정부는 『당치않은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신을 일본측에 보낸다.일단 반박기록은 남겨야 한다는 차원이다. 이에 더해 최근 일본정부가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랑)총리와 이케다 유키히코(지전행언)외상까지 앞세워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오는 16일로 예정된 일본의 2백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선포방침 발표와 관련돼 있다. 일본이 EEZ를 선포하면,우리 정부와 중국측도 잇따라 EEZ를 선포할 예정이다.한·일간의 거리는 4백해리를 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경계선을 획정해야 한다. 한·일간 EEZ경계선을 획정하는 과정에서 독도를 일본측 EEZ안에 포함시키겠다는 것이 일본측의 희망인 듯싶다.일본의 속셈을 좀더 들여다보면 독도가 일본측의 EEZ수역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독도를 한·일간의 영유권분쟁지역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정부는 이러한 일본측의 의도를 읽고 있으며,이에 따라 9일 서대원외무부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하시모토 총리와 이케다 외상의 망언을 강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일본측의 「도발」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어서 우리 정부로서도 내부적으로는 다각적 대책을 마련중이다.정부는 특히 일본측이 한·일간의 기존관계를 훼손하고,전면적인 외교전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도 있는 독도문제를 총리와 외상을 내세워 제기하는 데는 또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독도문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우리가 독도를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일본이 독도영유권문제를 쟁점화,국제사법재판소나 새로 신설되는 국제해양법재판소로 가져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을 방침이다.또 해양경계분쟁이 있다 하더라도 그와 관련해 영유권문제를 다룰 수가 없다는 게 외무부당국자의 설명이다. 정부는 독도영유권에 대한 우리의 입지를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 일본에서 발행된 역사자료와 지도 가운데 독도를 우리 땅으로 규정한 자료도 확보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북,월드컵 공동개최 타진/FIFA에 2차례 질의서 보내

    북한이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의 남·북공동개최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에서 관심을 표명,월드컵유치의 새 변수로 떠올랐다. 북한축구협회가 월드컵대회의 남·북공동개최와 관련,지난 8일과 15일 두차례에 걸쳐 국제축구연맹(FIFA)에 팩시밀리를 통해 질의서를 보냈으며 FIFA는 『2002년 FIFA 월드컵대회를 남·북한이 공동으로 개최하자는 귀협회의 아이디어는 서울에 있는 대한축구협회와 직접 협의해야 할 사안입니다』라는 내용의 답신을 북한에 보냈다고 19일 대한축구협회에 알려왔다.이번 북한의 질의 내용으로 볼 때 그동안 월드컵대회 개최권을 따낼 경우 북한과 공동개최를 추진한다는 우리측의 일관된 주장에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앞으로 월드컵대회 유치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한국과 북한은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으로 남·북공동개최는 월드컵대회를 통해 인류평화에 기여한다는 FIFA의 대회개최 기본취지에도 맞아떨어져 한국의 월드컵개최전망을 밝게 해준다. 축구협회는 북한의 제의배경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없어 빠른 시일내에 문화체육부와 월드컵대회유치위원회·통일원 등 관계부처와 협의,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 공개된 「58∼65년 외교문서」 주요 내용:1

    ◎군사정권 5·16홍보에 외교력 총동원/장도영 최고회의의장 케네디등에 친서/“명시된 공약 찬성” 미등서 지지의사 표시 1961년 「5·16」으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소장.박소장과 5·16세력은 국내 권력을 장악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로부터도 지지와 승인을 이끌어내야 했다. 군사정권은 5·16직후부터 7월30일까지 2개월동안 모든 외교력을 동원,국제사회에 「혁명의 이념과 정당성」을 홍보하고,각국이 바라보는 5·16에 대한 평가를 종합적으로 수집,분석했다. 우선 장도영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은 5·16 당일 케네디 미국대통령과,다그 하마슐드 유엔사무총장에게 친서를 보내 『4월 학생혁명으로 민주당이 집권했으나 국민은 기아와 절망속에 허덕이고 정부는 과거 폐습과 부패로 일관하고 있어 공산주의 위협을 물리치는 우리 능력을 위태롭게 했다』면서 『우리의 임무완료시에는 언제든지 양심적인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우리는 군대 본연의 임무에 따를 것』이라고 약속했다. 최고회의는 또 이날 각 재외공관장에게 긴급전문을 보내 주재국 국가원수에게 5·16의 취지를 설명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그 반응도 파악해 보고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5월20일 주월남대사관에서 첫 보고가 왔다.『고 딘 디엠 대통령은 「충분히 이해했다」고 언명했다』는 것이었다.월남전이 한창 진행중인 상황에서 「반공」을 내세우는 군사정부 세력에 호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날 주미대사관에서도 보고가 왔다.『19일 미 국무성 체스터 바울스차관을 통해 케네디 대통령에게 전달토록 했다』는 내용이었다.케네디 대통령이나 바울스 차관의 반응은 그 때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어 주 서독 대사관과 주 터키 대사관에서 답신이 왔다.서독측은 『윤보선대통령이 사의를 번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다행한 일로 생각했다』는 아주국장의 평가를 통해,터키측은 『이번 혁명이 반공정신의 성명과 민생고 해결을 주요목적으로 한데 대해 만족한다』는 외무장관의 발언을 통해 5·16에 지지의사를 표시했다. 최고회의측의 외교적 노력 때문이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결국 5월26일 미국정부는 『자유세계의 제원칙을 지지하고 이 원칙에 따라 한국민의 복리증진 결의를 표명한 장장군의 메시지에 명시된 공약을 미국정부는 찬성한다』고 밝히고 『정권을 민간인에게 이양할 의도를 표명한데 대하여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미국측에 대해 김홍일외무부장관은 6월9일 러스크 미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사의를 표하는 한편 『신정부의 국제적 지위는 확고하며,전통적인 한미양국의 유대는 더욱 강화됐다』고 말했다. 6월23일에는 장도영의장의 친서에 대한 아데나워 서독총리의 답신이 도착했다.『위대하고 책임있는 일이 성취되도록 당신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안부를 전한다』는 호의적인 내용이었다. 이어 7월31일까지 뉴질랜드 수상과 터키 귀르셀 대통령,이탈리아 판파니 수상,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호주의 멘지스 수상이 친서를 보내 『혁명과업의 완수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또 일본은 5월23일 고사카 외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의 신정부는 합법』이라고 말했다. 최고회의는 각국에서 보내온 5·16 지지·승인 내용의 답신을 공개하는 문제도 검토,해당국과 협의했다.일부 국가의 지지를 과시,국내외적으로 군사정부의 당위성을 인정받겠다는 속셈이었다. 외무부는 7월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에티오피아 황제와 뉴질랜드총리의 친서는 공포해도 좋다는 회답이 있었다』고 밝혔다.
  • 우즈베키스탄공 타슈켄트(세계속 한인촌 탐방:2)

    ◎30년대 연해주서 이주… 8만여명 정착/근면은 타민족 본보기… 80%가 농업 종사 옛소련 땅의 한인최대밀집지역인 우즈베키스탄공화국의 타슈켄트주에 있는 한 목화농장.초로의 황 스타니슬라브씨(53)가 이곳 치르치크구역내의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목화수확반의 작업을 일일이 지켜보며 독려하고 있었다.다른 한쪽 켠에서도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인을 비롯해 10여종족으로 구성된 종업원들이 그의 감독하에 목화송이를 거둬들이느라 여념이 없다. 불과 2년전까지만해도 황씨는 국영기업에 가까운 콜호스의 농장장에 불과했다.하지만 이제 그는 회장님이라 불린다.우즈베키스탄정부의 민영화방침에 따라 국영농장(콜호스)이던 이 목화밭이 주식회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국영농장 회장이 한인 황회장의 오늘은 아버지 황만금씨(74)의 후광이 컸다.아버지 황씨는 지난 30년간 이 목화농장을 옛소련지역 최고의 콜호스로 이끈 장본인이다.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빈농가에서 태어난 아버지 황씨는 지난 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선친과 함께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곳에 내던져졌다.타슈켄트 교외 사막 허허벌판에 던져진 이들 부자는 10년동안 막노동과 농업전선을 전전했다.그러던 1947년,특유의 한인기질인 성실성과 총명함이 돋보여 황만금씨는 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 콜호스의 관리위원장에 선출됐다.지금의 목화농장 관리위원장으로 뽑힌 것은 53년.이후 30년간 그는 이 농장을 옛소련의 모델농장으로 끌어올렸다.목화재배에 과학영농기법을 도입,다른 지역 콜호스 생산량의 최고 10배까지 달성하기도 했다.58년 노동영웅칭호를 시작으로 그는 3번의 레닌훈장과 10월혁명훈장,소련인민위원회 계관칭호 등 더이상 받을 상이 없을 정도로 모든 상을 휩쓸었다. 이곳에 사는 문 피요트르씨(64)는 『그는 어려울수록 한국인 특유의 부지런함을 발휘한 콜호스의 상징이자 한국인의 상징』이라고 치켜세웠다.황씨의 바통은 90년대초반 아들이 이어 받았다.그가 아버지의 농업철학을 계승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비닐하우스 재배기법을 우즈베키스탄에 도입한 장본인이라는 점이 발탁의이유였다. 황회장의 경영능력도 아버지 못지않다.이른바 새 콜호스건설에 신사고를 일으킨 아버지에 이어 그는 요즘 토지의 유상분배와 인센티브제의 도입,컴퓨터농정에 큰 관심을 쏟고 있다.황회장은 『일을 시켜보면 역시 한인들은 우수한 민족』이라면서 『한때 도시로 빠져나갔던 한인들이 다시 농촌으로 돌아오고 있어 기대가 크다』고 했다. 이러한 역유입은 나름의 배경이 있다.주 요인은 바로 언어문제.한인들 가운데는 소련시절 공용어인 러시아어는 하면서도 현지어인 우즈벡어는 제대로 구사할줄 모르는 이가 많다.그런데 올해부터 우즈벡정부가 우즈벡어를 공용어로 채택,우즈벡어를 모르면 공공기관 취업을 금지하는 정책을 펴고있기 때문이다.이에따라 대도시에서의 공공기관 취업이 힘들어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한인들은 22만 2천여명.이중 8만 9천여명이 타슈켄트주에 살고 있다.타슈켄트주에 거주하는 한인들 가운데 60%가 농업에,나머지가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었다.그러던 것이 최근들어 농업종사자수가 80%이상으로 다시 늘어났다.따라서 최근들어 한인들 사이에는 우즈벡어를 배우려는 노력이 한창이다.특히 40대이하 청년층가운데는 우즈벡어를 배우는 부담때문에 우리말을 배우지 못해 우리 말을 할줄 아는 교포가 전체의 3%도 안된다는 지적도 있다. ○유명 변호사도 배출 이런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현지인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한국인이 많다.김 블라디미르씨(62)도 그가운데 한사람이다.타슈켄트시에서 80㎞ 떨어진 타슈켄트주 아쿠르간 마을.마을 전부라야 2백50호정도밖에 되지않는 아담한 전원마을에 위치한 김씨의 주택에는 하루종일 이웃주민들의 발길이 북적거린다.취직문제에서부터 한인지위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교포「민원인」들의 발길이다.남의 집을 빈손으로 찾지못하는 한인들의 기질탓인지 이들은 과일을 담은 비닐백같은 선물꾸러미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교포들이 이처럼 그의 집을 찾는 것은 김씨부자가 우즈베키스탄 변호사동맹의 소문난 변호사이기 때문이다.아들 보로니야씨(38)도 변호사다.김씨는 다민족으로 이뤄진 타슈켄트사회에서 동포들의 억울한 일들을대변,사건해결사 혹은 인권변호사로 지내오기가 올해로 꼭 40년째다.그 역시 37년 극동의 연해주지역에 살다 삼촌과 함께 카자흐스탄땅에 버려졌다.아버지는 일본스파이라는 누명과 함께 시베리아로 끌려갔다.삼촌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그는 7살때 우즈베키스탄의 한 고아원에 들어갔다.고아원을 전전하며 대학을 졸업한 해인 55년.시민권도 없던 그는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변호사자격을 따냈다. ○조선인 자치지역 건의 그는 지난 89년 고르바초프대통령때 『연해주를 조선인자치지역으로 돌려달라』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이 문제는 당시 상무위원회에 보고돼 대통령에 직접 전달됐으나 고르비가 『기다려보라』는 답신을 한뒤 얼마되지 않아 실각해 문제제기에 그치기도 했다. 지난 90년때의 일.당시 우즈베키스탄인과 투르크메니스탄인사이에 종족갈등이 폭력사태에까지 이르자 우즈벡공화국정부는 「24시간안에 모든 소수민족은 우즈벡을 떠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투르크메니스탄인 등 다른 소수민족들은 대거 국경을 넘어갔다.하지만 한인들만은 모두 마을을 고스란히 지켰다.『연해주에 이어 또다시 조선사람들의 일터를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간곡한 그의 청원이 큰 작용을 했다는 후문이다. 비록 타슈켄트의 한인들이 언어에는 어려움을 겪고있지만 문화·풍습은 나름대로 보존해가고 있다.우즈벡인의 70%가 이슬람교도로 이슬람식 일상풍속의 영향이 강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것은 1%의 한인소수민족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그런데도 이곳 한인들은 주로 「고려인문화센터」를 중심으로 문화·풍습을 보존해 나가고 있다.현재 우즈벡공화국내에 24곳의 한인문화센터가 있다.이곳에서는 우리말을 가르치거나 우리 전통예술보존을 위한 전시회활동 등도 벌이고 있다.한인들의 춤과 가락을 계승하고 있는 고려악단·청춘가무단·금붕어아동무용단·한인합창단 등 예술단체만도 20여개소나 된다.이곳 한인들의 최대 명절은 역시 추석.우즈벡인들이나 한인마을에 함께 사는 다른 소수민족들도 아예 이날을 자기들의 명절로 인식할 정도다. 황씨의 목화농장에 살고 있는 30대의한 교포주부는 『설날이나 명절때 한인들은 구역별로 모여 음식을 차리고 잔치를 벌인다』면서 『결혼식과 돌·환갑잔치도 빼놓을 수 없는 한인들의 유대의식의 장』이라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명절에 한복을 입는 것,윷놀이 등은 잘 알지못한다고 했다. ◎라술로프 카리드라슬로비치 대통령 자문위원장/“한민족은 역사와 전통을 중시”/개인보다 남을 생각하는 지혜 돋보여 무려 1백40여민족이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한인들은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특출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우즈베키스탄민족을 포함해 가장 훌륭한 민족이 한인이다.특유의 부지런함과 화합하며 사는 법,개인보다는 집단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지혜롭게 보인다. 한민족은 역사와 교육·전통을 중요시 여기는 민족이다.한인들은 특히 언어와 종교,기질 등이 틀리지만 다른 민족과 쉽게 잘 화합해왔다.소수민족가운데 우즈베키스탄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민족도 한인들이다.소련에서 독립한 뒤 우즈베키스탄에는 명절이 많이 생기게 됐는데 한인의 추석명절을 다른 민족이 본받아 함께 쇠기도 한다. 한민족은 이곳에서 예술분야에서도 단연 다른 민족들을 압도한다.최근 타슈켄트에서 열린 우즈베키스탄 유명화가 초대전에 20명의 우즈베키스탄화가가 초대됐는데 놀랍게도 이 가운데 18명이 한인들이었다.우즈베키스탄이 독립된 뒤 각국에 파견하는 경제·문화사절단도 때때로 거의 한인으로 채워지기도 한다.그러한 한인들의 단점은 별로 없는 것 같다.
  • 독 의원단 방북활동 북한서 왜곡 보도/독 기사당 대변인 항의

    【베를린 연합】 지난달 수해실태 파악차 북한을 방문했던 독일 집권 기민연합 소속 의원들이 『북한방문 활동이 북한의 선전목적에 이용당했다』고 실토한 사실이 19일 밝혀졌다. 기사당(CSU)대외정책 담당 대변인인 크리스티안 슈미트 의원은 지난달 방북시 금수산 기념관등에 참배한 사실이 알려져 F 슐로만 전 독일 국제방송 아시아국장으로부터 공개항의 서한을 받은데 대한 답신에서 이같이 밝혔다. 슈미트 의원은 동료인 페터 람자우어 의원(대외개발협력 전문가)과 함께 벌인 방북활동이 북한당국의 선전목적에 이용당했다고 밝히고 활동내용이 대외적으로 왜곡 전달됐다고 주장했다. 북한당국은 김일성 시신안치소에 있는 방명록에 쓴 내용마저도 왜곡 변형했다고 슈미트 의원은 말했다.슈미트 의원은 자신들은 방명록에도 김주석에 대한 찬사없이 단순히 「북한 주민에게 평화와 자유,통일의 미래가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기재했었다고 강조했다. 한편 그는 북한체제가 외부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폐쇄를 핵심요소로 하고 있으며 변화 가능성에 대해회의적이라고 평가했다.북한체제는 국민들을 자력으로 먹여살릴 수가 없으며 이같은 관점에서 갑작스러운 붕괴도 배제할 수 없다고 슈미트 의원은 평가했다.
  • 북한/인터넷에 수재구호 “SOS”/WP지 지원요청 경위 등 보도

    ◎유엔 등 지원 미미… 국제여론에 직접 호소 금세기 최악의 홍수로 전체인구의 4분의 1인 5백20만명의 이재민을 낸 북한이 유엔등을 통한 국제사회에의 구호요청에도 불구하고 모금액수가 미미한 정도에 그치자 컴퓨터 인터넷을 통해 국제여론에 직접 호소하는등 전례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지가 22일 보도했다. 포스트지에 따르면 유엔이 국제사회에 북한 홍수피해에 대한 긴급구호를 위해 현금 1천5백70만달러 모금을 제시했으나 막상 동참한 국가는 9개국이고 액수도 1백20만달러에 불과했다고 밝히고 이같은 국제사회의 미온적인 반응이 인터넷을 통한 보다 적극적인 세계여론에의 호소를 가져오게 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인터넷을 통한 호소는 김정일이 직접 『SOS를 세계에 보내라』는 결정을 내림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북한을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던 뉴스위크지의 도쿄주재 버나드 크리셔 전특파원의 도움으로 가능했다고 밝혔다. 현재 아시아의 한 구호단체에 근무하고 있는 그는 북한의 수해 소식을 듣고 최근 북한정부당국에편지를 보내 구호 호소를 위해 인터넷 사용을 제의했으며 북한수해복구위원회가 17일 인터넷 호소를 환영한다는 답신을 팩스로 보내옴으로써 띄워지게 됐다는 것이다.
  • 북,일에 「쌀발언」 해명/자민당 정조회장에

    【도쿄=강석진 특파원】 북한은 「일본이 사죄의 뜻에서 쌀을 주겠다고 해서 받은 것」이라는 김용순 노동당비서의 발언과 관련,일본 연립여당측이 항의한 데 대해 해명해 온 것으로 30일 알려졌다. 북한은 이 해명 답신에서 『김비서의 발언은 (한국의 말지에 보도된)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면서 『쌀이 부족해 (지원을) 부탁한데 대해 일본이 지원해줘 고마웠다』고 발언 내용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 청와대비서실/정무·홍보기능 강화

    ◎정무1­대야업무 포함/정무2­중장기정책 기획/홍보­매체통한 홍보/정조­대국민홍보 담당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를 맞아 청와대비서실의 정무 및 홍보기능이 대폭 강화된다. 김대통령이 지난 25일 기자간담회에서 밝혔듯 문민정부 초반기의 문제점 중의 하나로 여론수렴 미흡이 지적된다.사전공감대 형성 노력이 부족,엄청난 개혁조치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개혁 추진과정에서 다소 불편을 겪었던 여론 주도층의 상당부분이 정부에 비판적으로 돌아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1차적 조치가 청와대 정무수석실의 기능강화 및 개편이다. 정무수석실에는 이원종 수석아래 정무1·2,홍보1·2,사회 여성분야를 관장하는 5명의 비서관을 두고 있다.이 가운데 정무2비서관이 맡아오던 대야 업무를 정무1로 통합,정무1비서관이 여야 정당,국회,선관위,평통등의 업무를 관장토록 하기로 했다.대신 정무2비서관은 선거 및 각종 중장기정책의 기획을 전담케 하기로 했다. 정무1비서관에는 김철 정무2비서관이 내정됐다. 또 홍보1·2비서관을 홍보와 정책조사로 바꿔 홍보비서관은 매체를 통한 홍보업무,정책조사비서관은 대국민 직접홍보를 담당토록 했다. 정무수석실은 「사회·여성담당」 비서관의 역할을 대폭 강화,각종 사회단체 이외에 여론주도층 담당 업무도 맡도록 했다. 대표적 방안의 하나가 김대통령과의 서신 왕래.대통령이 직접 각계 인사를 자주 만나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우므로 서신을 통해 건의도 받고 답신으로 개혁정책에 대한 이해도 구한다는 것이다.서신을 받게될 사람은 학계,재야 법조계,언론계인사등 전형적 여론주도층 뿐만 아니라 택시운전사등 사회저변의 여론을 주도하는 전문직업인까지 포함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략 3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 “한은변화 체감때까지 내부 개혁”/이경식 신임 한은총재(인터뷰)

    ◎중앙은 독립은 관행으로 정착시켜야 이경식 신임 한국은행 총재는 24일 기자회견에서 부산지점 지폐유출 사건으로 실추된 한국은행의 공신력을 회복하기 위해 「내부의 개혁」을 강조했다. 이총재는 원래 한은출신(57년 입행)이다.한은 조사부에서 5년여 동안 근무하다 옛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관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청와대 경제수석과 국영 기업체 사장,그리고 문민정부의 초대 경제부총리를 역임한 경제통이다. 김영삼대통령이 그를 지폐유출 사건으로 곤경에 처한 한은총재로 보낸 것은 이같은 출신배경을 감안한 절묘한 개혁인사로 평가된다.그는 외유내강형이나 야무진 일처리 솜씨를 지녔다. 그는 머리회전이 빠르고 종합능력이 탁월하다.여기에 정치감각까지 겸비,타이밍이라고 판단하면 과감히 몸을 던져 행동하는 승부사적 기질의 보유자이기도 하다.한은에 비상이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취임사에서 내부개혁을 강조했는데. ▲개혁은 국민들이 믿어줘야만 가능하다고 본다.따라서 국민들이 한국은행이 변했다고 느낄 때까지 개혁을 추진해 나가겠다는 생각이다. ­한국은행 독립에 관한 견해는. ▲한국은행 독립문제에 대한 의견은 기본적으로 지난 89년 금통운위 위원으로 있을때 금융통화운영위원회가 국회에 보낸 답신서는 내가 초안을 마련했고 지금 생각도 그때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한마디로 중앙은행의 위상은 나라마다 사정에 따라 다르며 중앙은행의 독립은 법개정보다는 관행으로 정착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금통운위 위원을 그만둔 뒤 이 문제에 대해 계속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다시 생각해 보겠다. ­한은에 대한 감시·견제기구 신설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데. ▲오늘 아침 9시에 발령을 받아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중앙은행 공신력은 총재의 말이 실현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라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부산지점 사고에 대한 재조사 실시 여부는. ▲사고의 발생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났는 지를 제대로 알아야 방지책도 세울 수 있다.사건내용을 상세히 파악한뒤 대처해 나가겠다. ­앞으로의 통화신용정책방향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통화가치(원화가치)를 유지해 나가도록 힘쓰겠다.원화가치 안정에 힘쓰겠다. ◇이 신임총재 약력(경북 의성·62) ▲고려대 상대 ▲한은 조사부▲경제기획원 기획국장 ▲체신부차관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대우통신·대우투자금융·대우자동차사장 ▲금융통화운영위원 ▲가스공사사장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등산과 바둑을 즐기고 부인 이영숙씨(61)와의 사이에 2남.
  • 휴정협정 서명(6·25 내막/모스크바 새 증언:30)

    ◎중국,휴전 앞두고 “마지막 진격” 주장/소선 “미군 상륙작전 감행 두렵다” 반대/해리슨 중장­남일,7월27일 역사적 조인 중국당국은 스탈린앞으로 휴전협상 진행에 관한 상세한 현황보고를 하면서 그에 덧붙여 협상대책까지 건의했다.즉 협상속도를 싸고 미국과 이승만정부 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앞으로 미국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이승만에게 더 큰 압력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에 휴전성사 가능성은 높다는 게 중국당국의 기본 시각이었다.53년 7월3일자 북경주재 소련대사관이 모스크바에 보고한 전문에 나타난 중국의 협상대책은 다음과 같다.(N17286) ○“미­이승만 불화 조장을” 『이같은 상황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하는 바임.이는 휴전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이는 미·이승만간의 불화를 더 조장하고,미국의 내외여론을 분열시키고 미국으로 하여금 이승만정권에 더 많은 압력을 행사토록 하기 위함임. (1)7월5일자로 클라크앞으로 김일성·팽덕회동지의 답신을 보낼 것.협상재개에 앞서 미국의 입장을 비난하고 앞으로 미국의 유화정책이다시 바뀔 가능성에 대해 경고할 것. (2)휴전협정 서명 전 작전을 전개해 이승만 괴뢰군에게 일격을 가할 것.이는 전선을 조금이라도 더 남쪽으로 내려보내기 위함임.그뒤 휴전협상이 재개되면 이승만정권의 잘못으로 협정체결이 지연됐다고 비난할 것.그리고 상황이 바뀌었으니 휴전개시점을 재조정하자고 요구할 것.미국도 이 요구에 응할 것임.왜냐하면 현재 미국과 이정권과의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임.반대로 상대가 양보 대신 새로운 선전차원의 술책을 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음.그럴 경우에는 우리가 적당한 시기를 택해 양보하고 현전선에서 휴전하는 데 동의할 것. ○“최후가지 투쟁은 엄포” …중략…휴전협정체결은 7월15일에 해야한다고 생각함.중국대표단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추가로 밝힐 것.즉,중국정부는 최근 이승만정권의 잦은 도발이 한편으로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한푼이라도 더 받아내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용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온 것으로 생각함.이런 이유로 이승만은 미국과 상호원조조약 체결을 고집하고 있음.이는 만약 미국이 이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전병력이 최후까지 싸우겠다고 말하나 우리는 이것이 엄포라고 생각함. 중국정부는 미국의 이승만정권에 대한 지원이 매우 제한적일 것으로 생각함.미국은 이에게 대규모 지원을 할 경우 그가 심각한 모험을 전개해 미국을 끌어들이려할 것을 우려함.미국은 극동지역에서 더이상 대규모 모험에 끌려들려 하지 않고있음. 앞으로 개최될 정치협상 대책에서도 미·이승만간 이견이 있음.이는 이 정치협상 대신 북한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전개,중·조 국경인 압록강까지 진격하려고 함.위 상황을 종합할 때 중국정부는 휴전협정 조인이 평화에 유익하다고 판단함. 당시 중국외무차관은 이 말을 듣고 농담조로 「중국과 미국이 이승만에 반대해 공동전선을 펴고있다」고 말했음.그는 또한 중국정부는 이가 소규모 발악적인 도발을 할 가능성이 있지만 심각한 도발을 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음』 한편 소련측은 휴전협정 서명을 눈앞에 두고 공산군측 서명당사자의 인선에까지 일일이 간섭했다.유엔군 대표단의 김일성직접서명 요구에 절대 응하지 말 것을 누누히 강조했다.남한정부가 김일성의 신변에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53년 7월24일 소련공산당중앙위 간부회의는 김일성의 서명식 참석여부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해 직접 김일성 앞으로 내려보냈다.(소련공산당중앙위 간부회의 결의안 NP19/9) 『김일성을 위시한 조선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함.소련공산당 중앙위는 판문점 휴전협정서명에 북조선대표로 부수상 1명이,중국대표로는 팽덕회동지가 참석할 것을 권고함.누가 참석할지 여부의 결정은 전적으로 중·조 정부에 속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절대 미국의 압력에 이끌려가서는 안됨. 현상황에서 김일성의 판문점 여행은 위험부담이 큼.이승만 진영이 김일성에게 어떤 종류의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임.미국의 김일성 참석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휴전협정일정에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을 것임.팽덕회장군이 참석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임.만약 미국이 김의 불참을 이유로 협정서명을 거부한다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을 것임』 ○김일성 위해 우려 이유 북한측 대표는 이렇게 해서 부수상 남일로 결정됐다.53년 7월27일 남일은 유엔군 대표인 해리슨중장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휴전협정이 정식조인되기 불과 하루 전인 53년 7월26일 북경주재 소련대사는 모스크바로 다음과 같이 휴전협상 관련 보고서를 보냈다.모스크바에서 7월3일자로 보낸 중국정부의 한국전 상황평가에 대한 답신이었다.(N8019) 『본인은 모택동에게 소련정부가 한국전 상황평가에 대한 중국정부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음.이제 한국에서 적대행위를 끝낼 시기가 됐다는데 상호동의한다고 말했음.적도 군사적 이유로 전쟁을 계속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말했음.모택동은 이와 관련,깊은 사의를 소련정부에 보낸다고 말했음.그러면서 모는 적이 군사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도 휴전협정체결에 동의했다고 말했음. 군사적으로 볼때 적은 지난해동안 지상에서 진격은 물론 전선사수조차 여의치 않았다고 모는 말했음.반면 중국군은 현위치 사수는 물론 진격작전 수행에도 자신을 가졌다고 했음.정치적인 면에서는 적들이 제국주의 진영내 내분을 겪고있고 전세계 여론이 전쟁에 반대하고있기 때문에 휴전에 동의한 것으로 모택동은 설명했음.경제적으로도 제국주의진영이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다고 모는 말했음.즉 전쟁초기 2년간 미국의 독점 군수업체들이 엄청난 수입을 올렸지만 이후 휴전협상이 시작되고 반전여론이 강화되면서 이들의 수익이 격감했다는 것임』 이 보고서 내용중 흥미있는 것은 모택동이 순수 군사적인 면에서 볼때 적이 수세에 있기 때문에 군사작전을 1년 정도 더 계속해 한강주변에 보다 많은 전략거점을 확보하는게 협상에 유리하다고 주장한 점이다.반면 이 보고서를 보낸 중국 주재 소련대사는 남쪽으로의 추가진격이 매우 위험하다는 견해를 덧붙였다.추가 진격을 감행할 경우 동서 해안에까지 전력을 배치해야하는데,그러면 중·조군 후방에 미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전후복구 소도움 요청 이렇게 해서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정식조인됐다.휴전이 성사되자 김일성은 즉각 전후복구작업에 들어갔다.김일성은 전후복구 역시 소련의 지원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협정조인 며칠 뒤인 8월5일 김일성은 소련지도부 앞으로 다음과 같은 친서전문을 보냈다.(N2060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후 복구·건설계획과 관련 소련 전문가 여단을 초빙키로 결정했음.이들이 조선의 기간 산업체들의 복구,건설에 관한 계획을 수립해주기를 원함』 이틀 뒤인 8월7일 평양주재 소련대사는 다음과 같이 본부에 보고했다.(N20779) 『우리는 소련 전문가들에게 조선의 복구계획을 짜면서 가장 긴급한 문제부터 시작하되 가능한한 조선국내의 자원을 활용토록 지시했음.…중략…그러나 이미 입안된 계획을 보니 조선내부 자원활용에 큰 역점이 주어져있지 않고 대신 소련을 비롯한 여타 인민민주주의국가들로부터의 원조를 극대화하는 데 주관심을 두고있음. ○김일성 다시 모스크바로 또한 경제복구계획의 주안점이 경공업·농업부문 대신 중공업 분야에 주어져있음.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북조선 정부는 정부부처에서 우리 전문가들을 활용치 않고 대신 산업체에다 이들의 파견수자를 늘리고있음.이런 제문제를 협의키 위해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초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함』 이같은 소련의 요청에 따라 김일성은 53년 9월초 전후복구문제를 협의키 위해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했다. ◎연재를 마치면서/관련문서 계속 발굴… 속편 준비 이번 30회를 끝으로 「모스크바 새증언」 연재를 일단 마무리합니다.이번 시리즈는 주로 6·25를 둘러싼 스탈린·모택동·김일성 3인의 행적,협조관계등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밖에도 전쟁기간중 중·소·북한 정권 내부의 주요정책 결정과정등 밝혀져야할 「연결고리」는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게 사실입니다.앞으로 관련문서를 더 찾아내 추가집필의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스탈린 사망이후(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29)

    ◎소 새정권 주도로 휴전협상 급피치/소,“북한측 협상대표 남일 교체하지 말라” 지시/김일성엔 신변위험 들어 조인식장 불참 요청 스탈린사망과 함께 휴전협상은 소련 주도하에 급피치를 올렸다.흥미있는 것은 스탈린 사후 긴급히 채택된 소련공산당 및 내각의 결의안이 보여주듯 휴전협상 초기 모택동이 한동안 전권을 행사하는 듯 하다가 종전시점에 이르러서는 다시 소련이 모든 결정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앞회에 소개한 소련내각의 결정문은 조기휴전 방침과 함께 중국·북한당국이 취할 세부조치사항에 대해서도 일일이 지시를 내렸다. 『첫째,클라크장군에 대한 답변에 관해,김일성과 팽덕회동지는 클라크장군에게 답신을 낼 때 환자 및 부상포로교환에 대한 그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양측 대표간 판문점 휴전회담의 재개를 제의할 것.부상포로 및 환자교환문제의 타결은 포로문제 전체의 해결을 뜻하며 나아가 군사행동 중지 및 휴전협정 체결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임. 둘째,북경 성명에 관해,중국당국은 이 성명에서 북조선당국과클라크장군의 제의에 대해 협의,전적으로 지지키로 합의했다고 밝힐 것.아울러 판문점 자국 대표들에게 클라크장군과 협상을 시작하라고 지시할 것』 ○중·북한 취할자세 지시 기본적으로 소련 각료회의 결정문은 한국전의 즉각적인 종결의지와 함께 한국전과 관련,소련·중국·북한 3국의 유대를 다시 한번 과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3월 25일소련의 몰로토프는 김일성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내 북한에 억류돼 있는 프랑스인 14명을 조속히 석방해주라고 요청했다.소련이 종전을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섰는 지를 보여주는 한 예다.(전문번호N6352) 『3월 21일 프랑스 정부가 소련정부앞으로 북조선에 억류돼 있는 프랑스인 14명의 석방을 위해 힘써줄 것을 요청해왔음.…중략…우리는 현상황에서 프랑스정부의 이런 요청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게 정치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함』 전쟁종결을 가장 기뻐한 사람중에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은 바로 김일성이었다.사실상 거의 모든 힘이 소진된 채 마지못해 전쟁에 끌려가던 김은 소련대표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듯고 뛸듯이 반가워 했다. 김은3월 29일아침 소련특사인 쿠즈네초프,페도렝코 두 사람으로부터 소련의 전쟁종결 방침을 전해들었다.두 사람은 모스크바로 보낸 보고전문에서 김의 반응을 이렇게 전했다.(전문번호N8265)『김일성은 우리의 통보를 듣고 매우 흥분했음.그는 이렇게 반가운 소식을 듣게 돼 정말 기쁘다고 말하고 는 그 통지문을 자세히 한번 보고 싶다며 우리와 다시 만나자고 청했음』 이렇게 해서 그날 하오 소련특사 두사람은 다시 김일성과 만났다.다음은 김을 두번째 만난 뒤 이들이 본부에 보낸 보고전문.(전문번호N8298) 『김일성은 한국문제에 관한 소련정부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음.그리고 이 제의들이 최대한 빨리 실행에 옮겨지기 바란다고 했음.아울러 김은 우리측이 한반도 종전과 평화달성을 위해 이니셔티브를 취할 시기가 왔다고 말했음.김은 현상황을 지속시키는 것은 중·조선국민을 비롯,전세계 민주진영에 이익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음. 김은 현재 매일 3백∼4백명의 인명피해가 나는 등조선측 피해가 심각하니 미국과 교환포로의 숫자를 놓고 논란을 계속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음.김은 현상황에서는 소련의 제안이 최상의 방안이라고 거듭 말했음』 김일성은 이와 함께 협상이 본격화될 것에 대비해 북한에 억류중인 전쟁포로의 숫자파악과 판문점협상의 실무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한편 소련당국은 북측 협상대표를 계속 남일로 내세우라고 지시했다.이 때문에 김일성은 남일을 외교부장으로 임명하려던 계획을 다소 늦추겠다고 소련대표들에게 말했다. ○불인 포로 석방 요청 당시 북한내부에서는 박헌영 일파에 대한 숙청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어서 권력상층부의 자리바꿈이 대폭으로 이루어지던 시점이었다.전선이 38도선 부근에서 고착된 채 장기간 계속됨에 따라 전쟁이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이 본격화됐던 것이다.김일성은52년 12월제5차 전원회의에서 당조직과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역설했는데 이후 그의 연설을 연구학습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뒤인 53년초부터 박헌영 일파의 체포에 나섰다.그래서 박헌영숙청에 앞서 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윤순달·이원조·백형복·조용복·맹종호·설정식등 주요 남로당 계열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이들은 이후 전쟁이 종결된지 3일 후인 53년 7월 30일기소돼 다음달에 재판을 받았다.이후 박헌영도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하여 감행한 간첩행위」「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행위」「공화국정권 전복음모행위」등 3가지 조목으로 체포돼 55년 12월사형을 선고 받았다. 어쨌든 소련의 적극적인 자세로 휴전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53년 6월 3일 몰로토프 소련외상은 미국의 볼렌대사와 만나 판문점 휴전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막바지 의견조정작업을 마쳤다.몰로토프와 볼렌대사간의 회담을 기록한 메모랜덤은 『두사람은 판문점회담을 성공시키기 위한 방안에 합의했음.볼렌대사는 판문점회담의 성공이 모든 당사자가 희망하는 바라고 말했고 이에 대해 몰로토프,볼렌 두 사람의 의견이 완전일치했음』이라고 적고있다. 소련정부는 중·북한측에게 미국의 휴전제의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지시하면서 답신에 답을 구체내용을 일일이 적시해 보낸바 있다.소련당국은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한듯 이번에는 클라크장군이6월 29일자 서신을 통해 보내온 제안에 대해 김일성·팽덕회가 보낼 답신의 초안을 직접 작성해서 두 사람앞으로 보냈다. 다음은7월 4일 소련공산당중앙위 최고간부회의가 채택한 「김일성·팽덕회가 클라크의 53년 6월 29일자 서신에 대해 보낼 답신의 초안에 관한 결정」의 주 내용이다.간부회의는 이를 곧바로 북경과 평양으로 타전했다.(당중앙위 간부회의 결정문.NP14/1) 『소련정부는 지금까지 휴전협상 과정이 중·조 양국의 전략에 따라 성공적으로 진행돼왔음을 믿어의심치 않음.중·조 양국은 전세계에 평화의지와 협상의지를 과시했음.…중략…이에 따라 휴전협정 체결에 장애가 되는 모든 장애물이 제거됐음.아울러 미국은 국내외 정책에서 큰 곤경에 처하게 됐음. ○중도 휴전필요성 역설 이같은 새로운 상황전개에 따라 미국지도부는 군사적 광기를 유지시키는 데 심각한 정치적 어려움에 직면했음.아울러 대중 여론의 압력이 점차 커져서미국의 지도부는 한국전 종결을 오래 미룰 수 없게 됐음.물론 아직도 미국과 이승만 일당이 휴전협정 연기를 획책할 가능성은 남아 있음. 소련정부는 김일성동지가 휴전협정 서명을 위해 판문점으로 가는 문제를 의논하고 싶음.하지만 이승만 일당이 김일성동지에 대해 어떤 위험한 술책을 가할지 모르기 때문에 김일성동지는 판문점으로 가지 않는 게 바람직함.다른 조선동지를 대신 판문점으로 보내 휴전협정을 체결토록 하기 바람.중국동지들도 이에 동의할 것으로 기대함』 한편 이보다 하루 전인 53년 7월3일 북경주재 소련대사관은 휴전협상에 관한 중국정부의 입장을 입수,이를 본부에 타전했다.이 장문의 전문은 휴전필요성을 역설하는 중국정부의 입장을 상세히 담고 있다. 『최근 12일간 이승만정권은 전쟁포로를 석방하고 휴전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음.한국전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음.…중략…그러나 이승만은 오히려 미국을 설득시키려고 함.그의 요구는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미국의 결심에 배치됨.이 때문에 미국과 이승만간의 2주동안 진행된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음. 이같은 상황에서 클라크장군이 6월 29일,김일성과 팽덕회가 보낸 서신에 응답한 것임.응답한 목적은 이승만에게 미국이 그의 요구에 양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임.즉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에 관계없이 휴전협정을 체결하겠다는 것임.아울러 전 세계에 미국이 전쟁종결을 원한다는 점을 과시하겠다는 뜻임』 ◎새로 밝혀진 사실/소,중·북한에 “종전 동의하라” 지시/김일성은 “최상의 방안… 환영” 응답 이번 사료를 통해 우리는 한국전쟁의 종전이 소련의 동의로 인해 가능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종전방침을 확정하자 휴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중국에 넘어갔던 전쟁의 주도권이 다시 소련에게로 넘어갔다.그러면서 한국전쟁의 한 주체인 공산측의 세나라 사이에 합의가 이뤄졌다.이 내부 합의가 이뤄지자 다음 단계인 유엔측과의 합의는 의외로 쉬웠다.즉 한국전쟁의 종전과 관련하여 더 어려웠던 것은 때로는 공산측 내부의합의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일단 방향을 선회하자 소련은 중국과 북한에 아예 명령형 전문을 보내 『클라크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하라』고 했다.미국의 제의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까지 지시하고 있다.소련은 또한 대외적으로 발표할 성명의 내용까지 지시하고 있었으며 성명의 초안까지 작성해주고 있었다.새 지도부는 스탈린이 주로 배면에 숨어 전쟁을 조종하였던 방식에서 벗어나 앞장서서 종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소련은 북한과 중국의 협상대표 선정,김일성의 판문점 방문여부 문제에까지 깊숙이 개입하여 결정해주었다.재미있는 것은 소련이 이승만의 행동과 그 의도를 정확히 알고 대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전과 관련하여 가장 흥미있는 점은 김일성의 반응이었다.그가 소련의 종전결정에 대해 매우 기뻐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소련의 제의에 대해 『정말 기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그는 소련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최상의 방안이다』면서 흥분한 채 『정말 기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휴전과 관련한 그의 반응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이는 전쟁을 시도하고 이를 실패한 그로서는 이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또한 이는 전쟁의 지속을 주장하면서 격렬하게 휴전반대운동을 벌인,전쟁을 당한 이승만과도 극적으로 대비된다.
  • 1953년 3월5일(모스크바 새 증언:28)

    ◎“스탈린 사망”… 소 「휴전협상 조기타결」 급선회/크렘린 새 지도부,북한·중국에 “입장 변경” 급전/모 “더 싸울수 있다” 몇차례 이견 표명후 곧 동의 전선현황을 일일이 보고받아 전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알면서도 스탈린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무슨 신념같이 휴전협상에서 이같은 강경입장을 절대 바꾸지 않으려 했다.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듯 북한은 스탈린이 라주바예프대사 앞으로 훈령을 보낸 바로 그날,51년 11월 19일,박헌영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같은 제의를 발표할 예정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난 스탈린은 이튿날 정치국 이름으로 다시 한번 평양주재 라주바예프대사 앞으로 전문을 띄워 엄청난 질책을 퍼부었다.(51년 11월20일.N334/93) 『우리는 조선동지들이 조속한 휴전성사를 위해 유엔에 청원하겠다는 건과 관련,대사가 취한 태도를 용납할수 없음.대사는 조선이 유엔에 청원할 의사가 있음을 11월 18일에서야 보고했음.귀하는 북한의 이러한 청원이 우리의 공식입장에 위배되지 않는지 문의했음. 그러나 귀하는11일,18일자로 귀하가 보낸 전문에 대한 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같은날(11월 19일) 박헌영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그 청원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고했음.도대체 누가 그것을 작성했는지 캐내 보고하라는 거듭된 훈령을 묵살하고 대사는 그것이 라디오로 방송될 예정이라는 사실만 보고했음. 따라서 조선동지들은 이같은 유해한 청원을 우리의 승인없이 내놓았음.…중략…귀하는 매우 경솔히 행동했고 조선동지들이 이 청원을 중국과 사전협의했는지 조사해 보고하라는 훈령도 묵살했기 때문에 귀하의 죄는 더 가중됐음. 모든 비판을 받아들여 후일의 교훈으로 삼을 것』 ○주북대사에 질책 전문 이런 식의 논란이 그뒤 1년간 계속된 것이다.그런 소동이 벌어진 지 1년 뒤인 52년 12월 17일 모택동은 마침내 스탈린의 생각을 바꾸기 힘들다고 판단한듯 휴전협상이 지연되니 장기전에 대비해야한다며 소련의 추가무기원조를 요청했다.(전문번호N26499) 『휴전협상이 지연되고 또한 미국은 군사행동을 중단할 정도로 전력손실이 크지 않으니 최소한 1년정도는 전투가 치열해질 것에 대비해야함.아이젠하워는 취임과 동시에 작전을 개시할 의도로 전투준비를 하고 있음.적은 우리 방어망이 견고한 전방을 공격하기보다는 후방에서 상륙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높음. 적의 상륙작전은 내년 봄,빠르면 2월에 감행될수 있음.가장 큰 과제는 이 상륙작전을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막을 것인가 하는 것임.지난해 8월 적의 대공세를 막아낸 이후 전황은 다소 안정적임.이 기간 동안 아군은 전방 방어선과 해안방어망을 강화했음. 아군은 전술적 공격을 감행해 58개 적의 진지를 뺏았고 9월­10월중 우리가 집계한 적의 피해는 미군 4만명을 포함,사상자수가 11만명에 달함.10월중순 적은 2개 사단을 동원해 아군 진지 2곳을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했음. 이같은 진지쟁탈전이 계속됨에 따라 포탄소모량이 크게 늘었음.최근 3개월간 아군은 총2백40만발의 포탄을 썼음.하지만 현재 포 보유대수는 적이 1만4천문인데 비해 우리는 1만3천문임.그리고 적은 대부분 중포 및 탱크포인데 비해 우리는 경포가 주류임.또다른 문제는 현재 아군은 소련제 포 2천문을 보유하고 있는데 소련제 포탄을 비롯,포탄이 크게 부족하다는 것임.만약 적이 우리의 실정을 알아채고 조기공세를 감행할 경우 우리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임.소련제 포탄 추가공급이 최우선 과제임』 모택동은 이 전문에서 또한 앞으로 중국은 새로 의용군을 모집해 이듬해 25만명을 한국전에 추가투입하겠다고 밝혔다.모는 또 북한에 철도,도로건설등 각종 시설을 무상으로 건설해주고 식량을 비롯,모두 미화 6천만달러에 상당하는 각종 물품을 3년동안 매년 북한에 공급키로 했다고 밝혔다.그외 전쟁고아도 대거 중국으로 데려가겠다고 모는 호언했다.이렇게 잔뜩 장황설을 늘어놓은 뒤 모는 『그렇지만 이 일들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며 본론인 소련의 도움을 거듭 요청했다. ○“미 대공세없다” 반박 모가 가장 시급하게 요청한 품목은 포탄이었다.스탈린은 이 요청에 대해 12월27일 다음과 같이 답전을 보냈다.스탈린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대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모택동의 지적에 이의를 달았다.아울러 그가요청한 추가 무기지원에 대해서도 난색을 표했다.다음은 이 답전의 주요내용. 『미국이 1953년 봄 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동지의 분석은 현 트루만정권의 계획을 기초로 한 것임.하지만 아이젠하워가 취임하면 한국전에서의 긴장을 훨씬 완화하는 쪽으로 전략이 바뀔 가능성이 매우 높음.물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미국의 상륙작전을 가정하는 것은 좋은 생각임. 동지가 요청한 53년도분 추가 무기지원내역은 우리의 능력한도를 넘는 양임.53년도에 20개 사단용 이상의 무기,탄약은 공급하기 곤란함.다시말해 동지가 요청한 양의 4분의 1밖에 공급할 수없음』 그러나 모택동은 끈질기게 추가원조를 요청했다.이듬해인 53년 1월12일에는 모의 요청에 따라 소련군사고문단의 바실리예프스키장군과 소콜로프스키장군 이름으로 추가무기요청 전문이 스탈린 앞으로 전달됐다.(대통령문서소.전문번호N738343)이 전문에서 중국은 53년 1월부터 4월 사이에 6백24문의 각종 포와 탄약 2백35만5천발을 시급히 요청했다. 이 전문에서 모는 이전에 약속한 20개 사단용 무기공급을 53년3월부터 시작해 매월 2개사단분씩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모는 이와함께 무기공급의 구체적인 스케줄까지 다음과같이 적어보냈다. 기간 탄약 포 1월 20만발 166 2월 20만발 166 3월 18만발 132 4월 18만발 132 5­12월 8만발 132 (매월) 휴전협상을 둘러싼 중·소간의 강온 의견대립은 53년 3월5일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사정이 급변했다.크렘린의 새지도부는 한국전쟁의 조속히 끝내기로 입장을 굳혔다.중국·북한도 곧바로 이같은 크렘린의 새 결정에 동의했다.물론 모택동은 한두차례 자기는 좀더 싸울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순순히 전쟁조기 종결에 동의했다. ○소각료들은 결의문 채택 53년 3월19일 소련당국은 스탈린 사망에 따른 긴급각료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전에 관한 정부입장을 변경시키기로 하고 이같은 결정을 중·조 양국정부에 통보했다.다음은 당시 소련각료회의의 결의문.(N858­372cc) 『소련정부는 현재의 전쟁 상황과 최근의 사태발전을 면밀히 검토했음.그 결과 소련정부는현재의 정책을 지속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정책방향을 현정치정세에 맞게,그리고 소련,중국,조선 인민들의 이익에 부합되게 바꾸어야함.우리 인민들은 전세계에 평화가 강화되기를 원하며 한국전의 조기종결을 위해 항상 노력해왔음』 스탈린이 그렇게 맹목적으로 추구해왔던 전쟁계속 노선이 하루아침에 돌변하고 우리 민족의 최대비극이 마침내 마감되는 순간이기도 했다.이 결의안은 「영·미 블록의 침략적인 제국주의정책」을 비난한 뒤 다음과같이 계속됐다. 『우리는 중·조 국민들의 기본적인 이익과 여타 평화애호 국민들의 이해를 고려해 이 전쟁을 끝내야한다.우리는 다음 사항의 조속실현을 주장함. 1.김일성과 팽덕회는 클라크장군이 2월27일자로 제시한 환자·부상포로의 교환에 관한 제의에 긍정적인 회신을 보낼 것. 2.김일성과 팽덕회의 답신이 발표된 직후 중국당국의 대표(가장 적임자는 주은래임)가 북경에서 역시 긍정적인 성명을 발표할 것.이 성명에서는 환자 및 부상포로교환을 포함,포로문제 전반을 긍정적으로 해결할 것과 한국전쟁의 종결 및 휴전협정을 체결할 시기가 됐다는 점을 지적할 것. 3.북경 당국자의 성명에 때맞춰 평양에서는 북조선 대표 김일성이 위 중국대표의 성명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치연설을 할 것. 4.우리 역시 북경과 평양에서의 당국자 성명이 발표된 직후 소련외무장관 연설을 통해 이 두 성명을 전적으로 지지할 것을 고려중임. 5.위에 언급한 4가지 조치에 발맞춰 유엔주재 소련대표는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조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 ◎“전쟁 계속하되 무기지원 감축”/모스크바­북경 종전까지 갈등 스탈린과 한국전쟁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우리는 그동안 공개된 자료를 통해 전쟁의 기원과 결정에서는 이미 그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전쟁의 전개과정에서의 역할은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가 최초로 그의 역할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종전과 관련된 그의 역할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그것은 그의 죽음이었다.1952년 12월 17일과 27일의 모택동과 스탈린의 전문은 전쟁의 종결이 임박한 시점에서까지도 이들의 입장이 조정이 안되었음을 보여준다.특히 스탈린의 전문은 전쟁을 계속하되 중국이 요청한 무기를 그대로 지원할 수는 없다는 그의 인식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다만 요구한 양의 4분의 1만을 제공하겠다고 단정적으로 통보하고 있다.이 답변은 그동안의 모택동의 끈질긴 요구에 대해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담고 있기까지 하다.53년 1월 12일의 모택동의 전문은 스탈린의 거부가 계속되자 아예 지원무기의 월별 필요 양까지 명기하고 있다.이는 종전시에 이르러서는 둘 사이의 긴장과 내적 갈등이 더욱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3월 5일의 스탈린의 사망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둘 사이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그것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했다.스탈린이 사망한 지 10여일이 지난 3월 19일의 소련각료회의의 결의문은 스탈린의 사망이 전쟁의 종결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지금까지 공개된 것 중 최초의 문건이다.즉 스탈린의 사망과 한국전쟁의 종결이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문건인 것이다.거기에는 『현재의 정책을 지속하는게 옳지 않다』는 분명한 지적이 나온다.소련지도부 전체의 종전정책으로의 극적 전환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실려있는 다섯가지의 권고사항은 스탈린이 전쟁을 계속하려한 이유가 얼마나 비평화적이고 무모한 것이었는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이 권고사항들은 실제의 종전과정과 일치하는 내용이다.스탈린은 자신의 죽음으로써만 이 참혹한 전쟁의 종결을 도울 수 있었을 뿐임을 이 자료는 처음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 엇갈리는 휴전전략(6·25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27)

    ◎스탈린·모택동,휴전 놓고 이해 저울질/스탈린­UNDP 조기 종전 요청하려는 김일성을 비난/모택동­“현전선서 휴전” 미안 수용… 조기타결 적극적 휴전전략을 싸고 스탈린·모택동 양자간의 이견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계속됐다. 이러한 의견대립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쟁종결을 앞두고 서로 자신의 이익을 하나라도 더 챙기려는 치졸한 속셈들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관련문서들은 보여주고 있다. 51년 10월 29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상을 지휘하던 이극농은 모택동 앞으로 다음과 같은 보고전문을 보냈다.더이상 협상지연이 무의미하니 38도선 휴전을 포기하고 미군측의 주장인 현전선 휴전쪽으로 양보를 하자는 건의였다.모택동은 이 보고전문을 그대로 스탈린앞으로 보냈다.(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N25406) ○“38도선 포기“ 건의 『현전선 사정에 비추어볼때 적이 우리의 저항에 굴복해 휴전협상과 관련,우리 요구를 받아들일 것같지는 않음.따라서 현상태를 당분간 지속시키는 것이 바람직함.현재 우리 병력이 배치된 지점이 휴전지점으로일반적으로 인정받을만한 시점이 되면 현전선에서 휴전을 하자고 우리가 먼저 수정제의를 하는 게 좋을듯함』 현전선에서의 휴전을 받아들이되 입장변화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현전선에서 전투의 교착상태를 장기화하자는 제의였다. 이튿날인 10월30일 이극농은 모택동앞으로 재차 전문을 띄워 구체방안까지 적시하며 모의 결단을 촉구했다.기존의 방침을 바꾸어 현전선에서의 군사행동 중단을 먼저 제의하자고 거듭 요구한 것이다.그는 이 수정제의가 『(1)적이 받아들일 내용을 담을 것.(2)쌍방이 철수할 영토는 비슷한 면적이어야 한다』며 입장변경의 구체방안까지 건의했다. 이에 대해 모택동은 원칙적으로 이의가 없었다.그는 10월31일 이극농에게 다음과 같이 답신전문을 보냈다. 『10월31일 회담에서 우리측이 먼저 현전선에서의 군사행동중지를 제의하기로 했다는 귀하의 건의에 동의함.만약 적대표가 이같은 우리의 변경된 입장에도 반대한다면 그를 신랄히 비판할 것.공개성명을 내도 좋고 언론을 이용해도 좋을 것임.만약 적이 우리 제의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11월1일 회담에서 우리의 구체적인 휴전방안을 제시하고 협상의 전 이니셔티브를 우리가 잡도록 할 것』 모택동은 이극농에게 보낸 이 전문사본을 그대로 스탈린에게도 보냈다.(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전문.N25465) 중국측은 이렇게 해서 수정된 제의를 내놓았다.51년 11월21일 이극농은 유엔군측 반응을 모택동 앞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전문했다. 『11월21일 협상소위 회담에서 우리가 수정제의를 내놓자 적은 몇가지 반대를 했으나 사소한 것이었음.우리대표가 적절한 해명을 했음.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음』 이어서 52년 1월31일 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협상진행상황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만들어보냈다.역시 조속한 협상타결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N16008) ○정전감시단 구성 제안 『적의 의도적인 회담지연으로 휴전협상이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음.그러나 전투중지와 관련한 기본적인 사안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음.휴전선 획정과 관련한 3가지 사안과 포로교환 문제에 대해서도 원칙적 합의가 이루어졌음.…중략… 따라서 협상이오래 지연될 것같지는 않음.적은 공항복구에 대해 여러 제한을 들고나오고 포로를 자유의사에 따라 교환하자는등 터무니없는 제의로 회담을 고의지연시키려고 하는 게 사실임.그러나 우리대표들은 이에 결사 반대하고 있음.하지만 적으로서는 전쟁을 계속하는데 대해 여론의 지지를 얻기 힘들게 돼있음.따라서 미국과 그 위성국들은 한국에서 전쟁을 중지하고 싶어함.그 결과 적은 비행장 문제를 일단 철회하고 사소한 세부문제 토의에 들어갈 것을 제의했음. 최종 협상타결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음.동시에 우리는 미지도부의 술책에 대해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음.이들이 국내외 악화된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협상을 지연 내지 결렬시키고 국제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임.어쨌든 현재 양측은 합의사항의 구체세부항목 논의단계에 와있음』 모택동이 내세운 입장의 근저에 깔린 것은 역시 휴전협상의 조기타결이었음이 이런 전문들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스탈린도 일단은 휴전지점에 대한 입장변경을 제의한 모택동의 요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그는 51년 11월20일 다음과 같은 훈령을 북경주재 로신대사에게 내려보냈다. 『모택동,그리고 라주바예프 대사를 통해 김일성에게 다음 사항을 전달할 것.비신스키가 당초 제안한 미군병력의 38도선 이남으로 즉각철수 요구 주장과 중국·조선 동지들이 현전선에서 휴전선언을 하자고 하는 두 입장 사이에 현저한 차이점이 있음.38도선 이남으로 철수하기를 거부하는 미군입장의 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비신스키가 당초입장을 바꾸기는 곤란했던 것임. 그러나 이제 비신스키가 휴전지점과 관련,입장을 바꿀 필요가 있음.이는 중·조 동지들에게도 유익함.그럼으로써 미국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만방에 보여주고 또한 중·조 동지들이 얼마나 유연하고 평화를 사랑하는지를 과시하는 효과도 있는 것임.라주바예프동지가 스탈린을 대신해 김일성에게도 이같은 입장을 전할 것』 휴전선 획정문제는 이렇게 공산군측의 양보로 해결됐다.스탈린은 52년 2월3일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정전감시단의 구체적인 구성방안까지 제의했다. ○본심은 여전히 이중적『휴전협상관련 1월31일자 동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함.우리는 폴란드,체코대표단을 정전감독위에 포함시키는 문제를 폴란드,체코동지들과 의논해야한다고 생각함.그들도 이에 동의할 것으로 믿음』 그러나 휴전협상에 임하는 스탈린의 본심은 여전히 이중적이고 부정적이었다.모택동과 김일성앞으로 보내는 시그널이 서로 달랐는가 하면 주요 고비때마다 조속한 휴전성사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것이다.스탈린은 전황이 불리하게 기울던 51년 가을,조속한 휴전성사를 희망하는 김일성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사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다음은 이와 관련,스탈린이 정치국 명의로 51년 11월 19일 북한 주재 라주바예프 소련대사앞으로 보낸 훈령.(소련당 정치국결정 NP84/422) 『도대체 누구의 뜻으로 북조선인민공화국 이름으로 유엔총회와 안보리에 한국문제의 조속해결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려는 발상이 나왔는지 이해가 안됨.전날 내게 보낸 전문에서 대사는 북한이 이 청원서에서 다음의 문제들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음.즉,조선에서 즉각적인 군사행동의중지,현전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2㎞의 비무장지대 설치,전쟁계속을 꾀하는 전범자 처벌등을 거론했음. 현재 미국이 협박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그런 요청은 중·조군이 허약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임.이는 정치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임.현재 중국동지들의 의중을 모르고,조선동지들의 진짜 의중도 모르기 때문에 귀하가 상황이 분명해질 때까지 그런 해결요청은 하지 말도록 조선동지들을 설득할 것.보다 상세한 보고를 할 것』 ○휴전 원하는 쪽은 미국 같은날 스탈린은 정치국 명의로 모택동에게도 다음과 같은 전문을 띄웠다.(정치국 결정.NP84/421) 『현재 휴전을 보다 더 바라는 쪽은 미국임.이는 국제정세에 비추어도 마찬가지임.따라서 중·조 동지들은 유연한 협상태도를 갖되 우리 요구는 확고히 지키는 것이 옳음.조급함을 보이지 말고 조속한 협상타결에 절대 관심을 보이지 말것.적은 우리보다도 훨씬 더 평화를 원함』 현상태에서 휴전을 더 원하는 쪽은 미군이니 절대로 이에 쉽게 응할 필요가 없다.끝까지 밀어붙여 요구를 관철시키자는 식의 생각을 스탈린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새로 밝혀진 사실/“협상서 조급함 보이지 말라”/스탈린,모택동에 전문 띄워 51년 10월29일의 이극농의 전문은 협상의 초기부터 이미 중국측이 『현전선에서의 휴전』이라는 미국측의 안을 받아들이려 하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이 문제에는 드물게 스탈린도 동의한 상태였다.따라서 미국측 안을 놓고 스탈린­모택동­김일성 사이에 합의가 이뤄짐으로써 우리는 51년말∼52년초에 전쟁이 종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52년 1월31일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문은 『협상이 오래 지연될 것같지는 않다』『최종 협상타결의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며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에 앞서 51년 11월19일 스탈린은 유엔을 통한 북한의 조기종전제안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조급함을 보이지 말고 조속한 협상타결에 절대관심을 보이지 말 것』이란 전문은 그가 결코 조기종전을 원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그는 중국과 북한을 앞세워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끝까지 공산측이 밀리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 전쟁을 결정할 때 그가 왜 망설이고 뒤로 빠지려 하였는지 우리는 이제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게된 것이다.그에게 한국전쟁은 자신의 의사와 구도를 실험하고 중국과 북한을 이용하여 뒤에서 이를 관철시키는 대리전쟁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이번 자료를 통해볼 때 휴전협상의 협상전선이 두개였음을 우리는 알게 됐다.그것은 유엔측과 공산측을 하나로 하고 공산측 내부의 의견조율을 다른 하나로 하는 이중전선이었던 것이다.후자는 이번 자료를 통해 비로소 그 내막이 상세하게 공개됐다.(앞으로 이는 많은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 중소의 휴전협상계획(모스크바 새 증언:23)

    ◎북측의 모든 휴전협상전략 모택동이 직접 지시/모,스탈린에 전과정 보고… 주요이슈 조언구해/「38도선 기준 완충지대 설치·외국군 철수」 제시 북한측 휴전협상 전략은 모택동이 직접 지시했다.물론 모는 스탈린에게 협상 전과정을 상세히 보고하며 주요 이슈에는 반드시 그의 조언을 구했다.스탈린은 기본적으로 모택동의 입장과 생각에 이견이 없었다.김일성은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이전보다 더 부차적인 조역역할에 머무르며 어쩌다 한번씩 사소한 문제에 대해 모택동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정도였다.그러면 모택동은 이를 스탈린에게 전달할 때도 있고 그냥 묵살하기도 했다. 협상에 임하며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38도선 비무장화 등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를 내놓았다.이는 한편으로는 자신감의 일단을 피력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가능한 한 더 많은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전략의 일환이었다.하지만 분명한 한가지는 중국·북한은 최소한 휴전에 관심이 있었다는 점이다.결코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수 없다는 자각과함께 더 많은 희생을 줄이자는 희망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무리한 요구 휴전회담이 시작되기 얼마 전인 51년7월1일 새로 평양에 부임한 라즈바예프 소련대사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북한의 협상기본 전략을 담은 내용이었다(전문번호 N501869sh). 『1.김일성은 51년7월2∼3일중 적에게 협상개시 시기를 제시할 예정임.모스크바의 긴급한 동의가 필요 함. …중략… 3.남일이 이끄는 북조선대표단은 다음 사항을 발표할 예정임. (a)전투행위 중지시기 (b)38도선 남북으로 각각 5∼10㎞씩 병력철수 (c)전투중지와 함께 38도선 상공의 비행월경 금지 (d)조선영해에서 해군력 철수 및 봉쇄해제 (e)2개월내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f)포로교환,강제 이주주민 귀환. 김일성동지는 필리포프동지의 적절한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 그러나 이 전문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이튿 날인 7월2일 이 제의내용이 모택동과 사전협의를 거쳤는지 물으며 이를 되돌려보냈다(전문번호N101529). 『전문에서 밝힌 북조선정부의 협상제의 내용은 중국정부와의 합의를 거쳐 공동작성돼야한다는 점을 김일성에게 전할 것.앞서 보고한 김일성의 제의 내용은 모택동과 합의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보임』 휴전협상에서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겠다는 스탈린의 의지는 확고한듯 했다.그러나 모택동은 7월3일 자신의 휴전협상전략 기본원칙을 스탈린에게 보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다음은 모택동이 이날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전문번호N21405). 『다음의 5가지 기본원칙을 보고 함. 1.쌍방이 동시에 전투중지 명령을 내릴 것.이 조항은 적도 이의없이 동의할 것으로 보임. 2.쌍방 병력은 38도선을 따라 10마일씩 밖으로 철수할 것.그리고 38도선 기준 10마일 이내에는 완충지대 설치.적이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음.우리는 이 제의가 타당하며 적이 거부하기 힘든 사항으로 봄. 3.쌍방은 조선 외부로부터 무기·병력 반입을 통한 무력증강 행위를 중지할 것.조선영토내에서 전선으로의 병력이동도 중지함.우리는 적도 이 제의를 해올 것으로 생각 함.따라서 우리가 이니셔티브를 잡아 먼저 제의하자는 것임.다음의 마지막 제의는하는 게 좋을지,하지 않는 게 좋을지 애매 함. 4.중립국감시위원회 구성.적들도 이와 유사한 제의를 해올 것으로 예상해 우리가 먼저 이 제의를 하고자 함.하지만 이 제의를 실행에 옮기는 데는 수많은 난관을 겪을 것임.적들이 추천한 중립국 감독위 회원국들은 중국­조선국경의 병력이동과 북조선내 중요 통신시설들을 사찰하게 될 것임.따라서 우리가 먼저 이 제의를 할 것인지,아니면 적이 먼저 제의해오기를 기다렸다가 이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음. 5.쌍방 모두 전쟁포로를 송환해야 함.아마 적들은 포로의 1대1 교환을 제의할 것이나 우리는 모든 포로의 일괄교환을 고수해야 함.그러나 적은 북조선군 포로숫자가 우리보다 많음.북조선군 포로중에는 남조선군 출신 포로도 포함돼 있음.따라서 이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큼.위에 언급한 5개 사항은 군사대표단 회의에서 해결돼야 할 것임. 이밖에도 몇가지 문제가 더 있음. 1.모든 외국군대는 일정기한내(예를들면 3∼4개월안에)남북한을 완전히 떠나야 함.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그러나적군 대표들은 이것이 정치적 문제라며 회담 의제에 포함시키지 않으려할지도 모름.우리가 이 문제를 제기해야할지,말아야할지 말해주기 바람. ○이극농 파견 임무 지시 2.피란민들은 일정기한내(예를들면 수개월내)원래의 거주지로 귀환해야 함.김일성동지는 이 문제를 반드시 제기하자고 주장 함.이 문제도 많은 이견과 논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큼.자칫하면 다른 중요한 문제의 해결에도 영향을 미칠수 있음.어제 우리는 외교부 부부장 이극농과 그의 보좌관들을 조선에 파견했음.이극농은 개성외곽에 머무르며 비밀리에 휴전협상 전략을 지시할 것임』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극농이란 인물의 등장이다.그는 휴전협상 내내 회담장 외곽의 비밀장소에 머무르며 모택동과 계속 전문연락을 취했고 모택동을 대신해 협상을 총지휘했다.모택동으로부터 이 전문을 받은 스탈린은 바로 같은 날인 7월3일 곧바로 답전을 띄웠다. 『첫번째 두가지 제안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음.세번째 제안의 후반부(조선영토내 전선으로의 병력이동을 가리킴=편집자주)는 삭제바람.그러나 미군측이 이를 제의하면 받아들여도 좋음.4번째 제안은 하지 말 것.만약 미군측이 유엔군 군사정전위 설치를 제의하면 유엔은 전쟁당사자라는 점을 들어 이를 거부할 것.대신 중립국 감독위 설치를 제의할 것.5번째 안은 제의한 뒤 반드시 이를 관철할 것.나머지 두가지 사안(외국군대 철수 및 피란민 문제)은 제안한 뒤 이를 관철할 것』 이렇게 북한측 휴전협상은 모택동·스탈린 두사람의 철저한 지시 아래 시작됐다.개성으로 간 이극농 외교부 부부장은 7월8일 열린 회담부터 관련보고서를 모택동앞으로 보내오기 시작했다.이극농은 이날 회담보고를 이튿 날인 7월9일 모택동에게 보내왔고 모택동은 이 보고서를 이튿 날인 7월10일 스탈린앞으로 그대로 보냈다(전문번호N21632). ○“실패할땐 결사전투” 『적 연락장교들은 대표단 신변안전 및 준비사항에 협조해 준 데 대해 우리측에 사의를 표했음.회담중 양측은 서로 인사를 교환치 않았음.회담 뒤 미군측은 군대식 경례를 했고 우리도 이에 응답했음.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상오 10시경 미군기 2개 편대가 개성상공을 무력시위 비행했음.우리는 이에 개의치 않았음.비행기 1대는 회담장 상공을 선회했음.아마 지상과 연락을 취하는 것 같았음.미군 장교들이 도착하자 이 비행기는 곧바로 사라졌음.회담시작 뒤 2시간동안 분위기는 매우 긴장됐고 휴회 직전에야 조금 풀렸음.하오 회담은 매우 조용히 진행됐음.사소한 문제를 놓고 다소 이견이 있었음.우리측 연락장교가 상대방 대표에게 필요한 사항을 말하면 도와주겠다고 제의했음.분위기는 좋았음』 7월13일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회담진행 상황을 전달했다(전문번호N21756). 『2차에 걸친 회담에서 미군측은 대중 여론을 선동하고 우리측 의도를 간파할 목적으로 기자들을 회담장에 입장시키자는 제의를 했음.이는 어리석은 속임수이므로 우리는 단호히 거절했음.다음 회담에서 만약 미군측이 기자들을 데리고 입장하면 우리는 한발짝도 양보치 않겠음. 미군측이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를 의제에 포함시키는 데 찬성해야 함.그러면 우리도 38도선 군사분계선 설정문제를 추후로 미룰수 있음.김일성동지는 38도선 분계선 설정이 합의되면 외국군대 철수는 연기할 수 있다는 점을 이극농동지한테 분명히 밝혔음.우리는 단계적으로는 이 두가지 사안­38도선 설정과 외국군대 철수­모두 합의할 수 있다고 믿음.피란민처리문제는 김일성동지도 북조선에 유리하다고 보기 때문에 제의할 방침임.이 문제들을 모두 검토한 뒤 지시를 내려주기 바람. 회담이 실패하면 우리는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할 것임.이에 대비,전투준비를 계속하고 있음』 이 전문을 접한 스탈린은 바로 이튿 날인 7월13일 모택동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내용의 답전을 보냈다(전문번호.N4153). 이와같이 휴전협상에 임하는 북측전략의 가장 핵심은 38도선에 군사분계선 설치와 외국군대의 철수였다.이중에서도 38도선 설치가 긴박한 최우선 목표였고 외국군대 철수는 이를 얻어내기 위한 협상카드로 활용할 장기목표였음을 알수 있다. ◎새로 밝혀진 사실/51년 봄 이후 모가 실질적 전쟁주도 한국전쟁의 주도권은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져들고 특히 본격적으로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모택동에게로 넘어갔다.이러한 사실은 이번 자료에서 비로소 처음으로,그리고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내용이다.모택동은 비록 스탈린에게 자문을 구하고 또 그와 갈등하기도 하였지만 1951년 봄 이후 전쟁의 주도권이 그에게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전쟁에의 표면적인 개입을 회피하려는 스탈린의 이중전술 때문이기도 하였고 또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였느냐 아니냐의 현실적인 차이 때문이기도 하였다. 1951년 봄 이후 모택동이 실질적으로 전쟁을 주도하였다는 사실은 이번 자료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흥미있는 사실은 자료에서 볼수있듯 모택동은 때로는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위해,때로는 책임 때문에라도 스탈린을 이 전쟁에 더욱 깊숙이 관여하게 하려하였다.이는 1950년 봄 전쟁을 결정할 때와는 완전히 전도된 현상이었다. 1951년 7월3일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는 향후 2년동안 견지된 휴전협상에서의 공산측의 기본원칙과 구체적인 전략이 이미 들어있었음을 알수 있다.이에 대한 스탈린의 답신 역시 직접적이고도 아주 구체적이어서 항목별 배제사항까지 들어있다.2년간의 전략전술에 대한 대략적인 합의가 이미 협상의 시각시점에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결국 2년간에 걸친 한국전쟁의 휴전협상은 이번 자료를 통해 새롭게 드러나듯이 협상테이블의 대표들을 「입」으로한 워싱턴과 모스크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이었던 셈이다.
  • 전·현 서울시 고위간부도 “의혹”/「삼풍 수뢰」 수사 어디까지

    ◎허가당시 건설국장 우명규 전 시장 “거명”/「1년반 뒤 내인가」 김용래 전 시장도 대상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관련,전·현직 서울시 고위 공무원도 수사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수사결과 서초구청 주택과 담당직원에서부터 계장­과장­도시정비국장­구청장에 이르기까지 백화점측으로부터 로비를 받는 등 「유착고리」가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수사본부가 10일 이충우(61) 전 서초구청장을 구속한데 이어 황철민 서울시 공무원교육원장과 조남호 현 민선구청장등 전·현직 구청장 2명을 금명간 소환·조사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되고 있다. 서울시가 87년 7월 백화점 내인가 절차도 밟지 않고 백화점 건축허가를 내줄 당시 건설관리국장이었던 우명규 전서울시장 등 관계공무원들이 수사선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백화점 내인가는 건축허가가 난지 1년5개월이나 지난 88년 12월 김용래 시장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밝혀져 의혹을 부풀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삼풍백화점 이준(73·구속) 회장 등의 조직적인 로비가있었을 것으로 수사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89년 11월부터 90년 4월까지 6차례에 걸쳐 설계변경 및 가사용승인을 해주고 1천3백만원을 받은 이 전 구청장은 『가사용 승인을 해 준 기억이 없다』고 발뺌한 것과는 달리 당시 도시정비국장 이승구(52)씨와 주택과장 김영권(54)·주택계장 양주환(44)·담당 김오성(39)씨 등과 「대책회의」를 가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공무원들은 89년 11월 1차 설계변경을 허가해 주고 1천여만원씩의 뇌물을 챙겼다. 수사본부는 특히 서울시와 삼풍백화점과의 유착고리를 푸는데 「열쇠」를 쥔 양주환씨를 검거하는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양씨는 87년 7월 서울시 주택기획과에 근무하면서 백화점의 건축허가를 내준 것을 비롯,89년 11월부터 90년 7월 준공검사를 승인할 때까지 서초구청에서 근무했다. 양씨가 이처럼 「노른자」위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서울시 등 고위 공무원들의 「뒷바라지」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삼풍」 구조작업 현장/중장비 엔진끄고 생존자 음향 탐지/별다른답신음 없자 실종자 가족들 “한숨”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열이틀째인 10일 서울시 사고현장 지휘본부(총본부장 조순 서울시장)는 최명석(20)군에 이어 다른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인명 구조작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지휘본부는 이날 낮 12시부터 2시간 남짓 사체발굴 및 잔해 제거작업을 전면 중단하고 미군에서 지원받은 땅굴탐지용 음향탐지기와 상·하수도 누수탐지에 사용되는 영국제 음청탐지기로 인명구조작업을 전개. 구조반은 땅굴탐지용 탐지기로 A동과 B동,중앙통로 지역 등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이 많은 3곳에서,민간업체에서 제공한 음청탐지기로는 B동 지하부분을 집중 수색. 이들 기계의 탐지능력을 높이기 위해 사고이후 처음으로 포클레인과 기중기 등 각종 중장비 사용을 중단하기도 했으나 생존자를 발견하는데는 끝내 실패. 실종자 가족들과 작업요원,자원봉사자들은 실낱같은 기대감을 갖고 작업을 지켜 봤으나 생존자에게 보내는 송신용 망치소리만 「탕,탕」 울릴 뿐 별다른 답신음이나 생존 흔적은 없어 여기저기서 실망스러운 한숨소리가 들리기도. 지휘본부측은 그러나 앞으로도 생존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대해서는 수시로 1∼2시간씩 작업을 중단하고 이들 장비를 동원해 정밀 수색작업을 벌일 계획. ○…이날 상오 3시쯤 A동 엘리베이터 타워에 번개가 떨어져 건물잔해가 일부 떨어지는 바람에 구조대원들이 긴급 대피하는 소동. 이에 따라 대책본부는 즉각 작업을 중단하고 엘리베이터 타워에 대한 안전점검을 한 뒤 빗발이 가늘어진 상오 5시쯤부터 작업을 재개. 한편 대책본부는 무너되지 않은 A동과 B동 건물에서 이상이 감지될 때마다 핸드 마이크로 상황을 지휘본부에 전파하고 지휘본부에서는 사이렌을 울려 구조대원 등을 대피시킨다는 계획. ○…9일밤과 10일 새벽사이 1m 앞의 물체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장대비가 내리는 바람에 중장비 작업이 지연됐으며 감전위험 때문에 전기용접기와 전기드릴로 통로를 뚫는 수작업도 한때 중단되기도. ○…지난 1일 구조된 청소용역업체 「신천개발」 소속 미화원 24명은 서울 강남시립병원에 입원한지 열흘이 지났으나 사고충격에 따른 신체적 후유증과 악몽으로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특히 남자 생존자 6명이 모여 있는 583호에서는 밤만 되면 악몽에 놀란 누군가의 비명소리에 환자와 가족 모두가 벌떡 일어난 뒤 다시 잠에 들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등 마치 정신병동과 다름없다는 것이 가족들의 전언.
  • 최명석군 11일만의 생환 후 첫 아침 표정

    ◎초인적 의지 감복… 축하메시지 봇물/“자고나니 「국민영웅」… 환상열차 탄 기분”/악몽 되새기며 “남은 생존자 구조” 당부 『어릴 때부터 평범하고 정직하게 살겠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나를 보는 세상의 눈이 너무 달라져 있어 당황스럽습니다』 10일 상오 서울 서초구 강남성모병원 3층 중환자실.삼풍백화점의 폐허더미에서 「2백30시간의 탈출드라마」를 엮어낸 최명석(20)군은 사지에서 벗어나 지상에서 맞는 첫 아침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룻밤 사이 세계언론도 칭찬을 아끼지 않은 「국민적 영웅」이 된 최군은 『마치 환상 특급열차를 탄 기분』이라며 소년티를 못벗은 얼굴에 쑥스러운 듯 천진한 미소를 띠었다. 하늘색 환자복차림에 머리에는 보호용 모자를 쓴 최군은 11일간의 악몽을 말끔히 떨쳐낸 듯 보였다. 중환자실 앞에는 그의 초인적인 의지에 감복한 각계각층이 생환을 축하하고 그의 쾌유를 비는 꽃바구니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최군의 병상을 찾은 시민 김정애(35·주부·강남구 신사동)씨는 『지난해 8월 암선고를 받았었는데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다』며 최군의 손을 꼭 잡고 생환을 감사하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또 이동진(46) 총무이사 등 LG건설 임원 3명도 부실공사의 희생자가 될 뻔했던 최군에게 학비와 직장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이신행 기산 사장도 최군을 졸업과 동시에 취업시키기로 하고 장학금과 입사예정서를 전달했다.이사장은 『최군의 생환은 건설회사들에게 매우 충격적이고도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완벽시공을 이루겠다는 의지로 최군의 취업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격려와 성원이 답지하는 가운데서도 최군의 야윈 몸과 얼굴에 남은 상처들이 웅변해주듯이 마음 한켠에는 악몽의 시간이 드문드문 되새겨지는 듯했다. 『며칠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손으로 콘크리트를 두드려 구조신호를 보내면 어디선가 똑같은 횟수로 두드리는 응답신호가 여러차례 있었다』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최군.아직도 붕괴현장에 생존자가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는 최군은 『구조대원들이 남은 생존자를 하루빨리 찾아내 가족들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구조에 모든 힘을 써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간밤에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천둥과 번개로 잠을 설쳤다』는 그는 『두터운 먹장구름을 가르고 밝은 햇살이 비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며 실종자 가족들이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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