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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천재시인 이상의 삶 뒤편, 민족주의자 이상을 만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천재시인 이상의 삶 뒤편, 민족주의자 이상을 만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및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3회 서울의 문학2(이상의 날개) 편이 제25호 태풍 ‘콩레이’가 한반도를 강타한 지난 6일 빗속에서 진행됐다. 전날 밤새 비가 내린 데다 당일 오전 내내 만만찮은 강수량이 예보된 상태여서 행사 취소 여부를 묻는 문의가 쇄도했다. 이 와중에 “고&고!”를 외친 데는 세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첫째 서울신문사 측의 과감한 투자로 도입한 고가의 오디오가이드시스템이 효자 역할을 해줄 것이고, 둘째 지난해 25회와 올해 22회까지 47회를 진행했지만 단 한 번도 날씨가 말썽을 피운 적이 없다는 ‘근거 있는’ 믿음이 작용했다. 셋째 만약의 경우에 대비, 통의동 보안여관과 지난달 문을연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등 실내에서 비를 피한다는 나름대로의 대비책도 세워놨다.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40여명이 궂은 날씨에 아랑곳없이 모여들었다. ‘가을비 우산 속에’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흔적과 작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오히려 즐겼다. 이날 오전 10시 사직동 주민센터 정자 앞을 출발한 투어단은 사직동 이상의 출생지~통인동 이상의 집~통의동 보안여관~경복궁 조선총독부 터~이상이 다녔던 수송동 옛 보성고등학교 터~오감도가 실린 옛 조선중앙일보 터~동헌필방~옛 화신백화점 터~소공동 옛 낙랑파라 터~날개에 등장하는 옛 미쓰코시백화점 터를 순례했다. 강영진 해설사의 노련한 해설이 돋보였다. 형형색색의 우산과 비옷차림으로 시작한 답사는 맑게 갠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산뜻하게 마무리됐다. 시인 김지하는 “이상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이상을 아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상은 허상이다. 이상은 단순한 경성의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난해한 작품과 여성편력, 괴짜 행동을 통해 본색을 감췄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상(李箱)이라는 이상(異常)한 필명 뒤에 숨은 김해경이 품은 민족의식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이상은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은 1910년 8월 29일 서울 사직동 165번지에서 태어나 식민통치가 절정을 이룬 1937년 4월 17일 일본 도쿄의 병원에서 27살의 짧은 여정을 마감했다. 그의 삶 궤적은 식민지 서막에서 시작돼 한복판에서 끝났지만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자각이 강했다. 부인 변동림(화가 김환기와 재혼 후 김향안으로 개명)에 따르면 이상은 일제에 강한 저항감을 갖고 있었고,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늘 의식했으며, 한복을 즐겨 입었다. 이상을 중심으로 ‘좌본웅 우태원’이라고 할만한 ‘절친’ 소설가 박태원이 남긴 ‘이상의 편모’라는 회상기에서도 이상은 한복차림으로 나온다. 변동림은 자신과 첫 만남에 이상이 밤색 두루마기를 입고 나왔다고 회상했다. 혜화동에서 살던 시절 한복을 입으면 일경에 불심검문당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불편해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봉두난발이나 파이프를 입에 문 데카당스한 모습과는 다르다. 기이한 행적이나 극단적 일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1937년 2월 12일 일본 유학 중이던 이상은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구인회 멤버이자 납북시인 김기림에 따르면 이상의 하숙집 책상 위에 불온 책자가 놓여 있었고, 이상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사용했고, 노트에 불온한 내용을 적어놨다는 게 좌익사상범으로 몰린 이유였다. 풀려난 지 한 달여 만에 유명을 달리했는데 폐결핵 환자에게 감방의 냉기는 결정적 사인이었다.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이상 또한 민족주의자로서 최후를 맞았다. 이상은 단순한 불령선인(불량한 조선인)이 아니라 민족 저항 작가였다. 이상은 건축가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졸업,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했다. 1926년 경성고공에 입학, 1933년 총독부를 그만둘 때까지 7년 동안 촉망받는 건축가로 살았다. ‘이상한 가역반응’, ‘조감도’,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같은 시의 제목이나 내용은 건축가의 삶과 경험이 묻어 있다. 돌연변이의 이단아로 살아가기 전까지 세상이 부러워하는 멀쩡한 건축가였다. 그러나 건축은 화가가 되고 싶었던 이상의 대안이었다. “난 말야,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어릴 때부터 그림에 미쳐 있었으니까.” 이상의 경성고공 입학기에는 그림에 대한 갈망이 나타나 있다. 보성고등학교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할 당시 미술교사가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었다. 서촌 자락 고희동의 집과 이상의 집은 지척에 있었다. 이상이 남긴 건축물은 없다. 실명이 거의 쓰이지 않는 이상의 대표작 ‘날개’에 등장하는 단 2개의 고유지명은 경성역(서울역)과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이다. 이 중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은 날개의 무대로 쓰였다. 연애담이나 퇴폐적인 일상이 아니라 자신을 옥죄는 일제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면의 몸부림이 담겼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날개야 다시 돋아라./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썼다. 이상은 표면적으로는 1920~30년대 경성 모더니즘의 절정을 누린 전형적인 ‘아스팔트 키드’였다. 여러 편의 문제작 중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종생기’에서 “나는 벼를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건축가 출신답게 경성이라는 도시 공간 속 건축물을 작품소재로 삼았다. 그가 전성기를 보낸 1920~30년대 경성은 조선총독부, 경성역, 조선은행(한국은행), 경성부청(서울시청) 같은 근대건축의 아성이었다. 철골과 시멘트 화강암으로 이뤄진 현대성의 거대한 상징물이 건축물이었다. 인간 이상을 이야기할 때 화가 구본웅과 소설가 박태원을 빠뜨릴 수 없다. 세 사람의 관계항이 이상의 인생을 완성하는 퍼즐 조각이다. 세 사람은 동행했다. 사직동에서 태어나 통인동에서 자란 이상과 필운동에서 나고 자란 구본웅은 필생의 동반자였다. ‘꼽추 화가’와 ‘폐병쟁이 괴짜 시인’으로 유명했다. 이상이라는 필명은 구본웅이 선물한 그림도구가 든 상자에서 비롯됐다. 이상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아호에 ‘상자 상(箱)’자를 넣겠다고 약속했다. 이상이라는 이름은 “이(李)씨 성을 붙이면 나름대로 묘한 여운도 있어 좋겠다”라는 두 사람의 의견일치에 따라 탄생했다. 기생 금홍이를 만난 것도, 다방 제비를 연 것도, 이상에게 창문사 직장을 알선한 것도, 파이프를 문 이상의 초상화 ‘우인의 초상’을 그려준 사람도 모두 구본웅이었다. 이상의 최후를 지킨 부인 변동림도 구본웅 계모의 동생이었다. 나이 어린 이모를 4살 아래 친구에게 소개한 것이다. 이상이 남긴 ‘차(且)8씨의 출발’은 구본웅에게 바친 헌시였다. “사실 차8씨는 자발적으로 발광하였다.”에서 차8은 구본웅의 성씨 구(具)자를 파자한 것이다. 구보 박태원과도 붙어살다시피 했다. 구보의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됐을 때, 이상은 하융이라는 필명으로 삽화를 그렸다. 다방과 술집을 전전하면서 인생과 문학예술을 논했다. 두 사람의 작품세계는 이때 완성됐다. 이상은 구보의 결혼피로연 방명록 첫 장에 ‘면회거절 절대반대’라는 호소문을 남겼다. 언론인이자 작가 조용만은 ‘구인회 만들 무렵’에서 “이상과 구보는 짝패였다”고 기록했다. 살아생전의 이상을 “우리가 가진 가장 뛰어난 근대파 시인”이라 평했고, 사후에는 “우리가 가졌던 황홀한 천재”라고 극찬했던 시인 김기림은 이상의 죽음으로 한국문학이 50년 후퇴했다고 아쉬워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일정:강동(광나루길) ●일시:10월 13일(토) 오전 10~12시 ●집결장소: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2번 출구 앞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흥미진진 견문기] 서울의 옛 골목길 전시… 과거와 현재 동시 걷는 듯

    [흥미진진 견문기] 서울의 옛 골목길 전시… 과거와 현재 동시 걷는 듯

    태풍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만나고픈 열정으로 답사를 시작했다. 차분한 목소리의 강영진 해설사가 들려주는 서촌과 이상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역관 ‘홍건익 가옥’과 ‘이상의 집’을 둘러보고, 이상이 보냈을 1930년대 서촌 골목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해 보았다.우산의 빗방울을 털며 보안여관으로 들어서자 ‘보안1942’의 최성우 대표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80여년 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여관으로 타일과 목재 기둥, 벽면 등 일제강점기부터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놀라웠다. 이곳에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머물렀으며 특히 서정주 시인이 머물며 ‘시인부락’을 만든 곳이라니 새삼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게 됐다. 이상의 흔적을 쫓아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터를 지나 이상이 다녔던 보성고등학교 터를 거쳐 ‘오감도’가 연재됐던 조선중앙일보의 사옥에 도착했다. 이상의 삶과 사랑에 대한 일화를 들으며 그 당시 문인들이 모이던 카페 ‘제비’의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 종로 네거리를 기웃거렸으나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 높다란 고층 빌딩 숲 사이 이런 유적이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 도착했다. 역사도시 서울의 옛 골목길과 건물 터가 발밑 유리 아래 전시돼 있었고, 상상 속의 역사가 ‘훅’ 하고 내 삶에 들어와 현재와 과거의 공간을 동시에 걷는 묘한 경험을 했다. 광통교를 지나 소공동 찻집 낙랑파라(플라자호텔 근처)에 이르렀다. 이상의 ‘절친’ 구본웅의 화실이 이 근처였으니, 이 찻집은 그들이 자주 만났던 장소였으리라. 개발과 보존이라는 시험에 직면한 소공동 거리를 지나 옛 미쓰코시백화점에 도착했다. 좌절된 현실을 초월하고자 백화점 옥상에서 날고 싶었던 이상에게 문득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당신들의 사랑과 고통과 열정적인 삶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고. 역사와 문화와 예술의 도시 서울이 그대들의 흔적과 이야기를 품고 안으며 변화하고 있다고. 어느덧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한 줌 햇살이 따사로웠다. 황미선(책마루 연구원)
  • [미래유산 톡톡] 보안여관·공평도시유적전시관, 미래유산 지정해야

    [미래유산 톡톡] 보안여관·공평도시유적전시관, 미래유산 지정해야

    지난 6일 투어단이 찾은 코스 중 서울미래유산은 통인동 이상의 집, 옛 조선중앙일보 사옥(NH농협 종로지점), 1930년대 미국 유학파 출신 박인준의 건축사무소로 지어진 동헌필방, 일제강점기의 월스트리트 한국은행 앞 광장 등 4곳이었다. 이상의 날개에서 실명으로 등장하는 2개의 장소인 옛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 옥상과 경성역(서울역)도 코스에 포함돼 있었지만 당일 태풍으로 말미암은 옥상 미개방과 시간부족 등으로 빠졌다. 이날 답사단이 둘러본 코스 중 현재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지 않지만 조만간 지정해야 할 곳이 통의동 보안여관과 공평동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다. 보안여관은 2009년 갤러리로 문을 연 이후 지금까지 17만명 이상이 다녀간 서촌의 ‘핫스폿’이다. 갤러리에 머물지 않고 최근 구관 옆에 아트 스페이스 ‘보안1942’라는 신관을 열어, 책방·찻집·술집·게스트하우스를 포함하는 문화숙박업이라는 새로운 문화생태계로 진화 중이다. 생활밀착형 예술공간의 재탄생이다. 서정주 시인이 이곳에서 장기 숙박하면서 최초의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한 한국문학의 산 역사 현장이다. 조선시대 통의동을 드나들었던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의 예술혼이 묻어 있는 곳이고, 시인 이상이나 화가 이중섭을 비롯한 숱한 문인 예술가들이 문턱이 닳도록 출입한 장소이기도 하다. 서울미래유산 목록에 빠진 게 이상할 정도이다.지난달 문을 연 공평동 26층짜리 센트로폴리스 지하 1층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조선의 시장 터와 관아 터, 한옥, 뒷골목과 담을 ‘생’으로 만날 수 있다. 개발과 보존의 상생을 보여준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운영하는 국내 최대의 도시 유적 박물관이다. 16~18세기 조선시대 도시유적을 통째로 보존해 유리판 보행 데크와 각종 전시물을 함께 곁들여 옛 경관을 통째 살려냈다. ‘압도적 스펙터클’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1000여평의 공간은 도시의 오아시스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도심 유적 보존 활용을 놓고 겪은 시행착오 끝에 얻은 값비싼 전시공간이기도 하다. 건축주에게 용적률을 크게 늘려 지상 4개 층을 더 짓게 해주고 지하 1층을 전시관으로 기부채납 받았다. ‘공평동 룰’의 첫 사례이자 성공적인 결과물이다.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원빈♥이나영 결혼식 유일한 협찬품은...”

    “원빈♥이나영 결혼식 유일한 협찬품은...”

    배우 이나영, 원빈이 결혼식에서 유일하게 협찬을 받은 물건은 가마솥이었다. 최근 방송된 채널A ‘풍문으로 들었쇼’에서는 패널들이 배우 이나영, 원빈의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두 사람은 지난 2015년 5월 30일 강원도 정선의 한 밀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결혼식은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가족들만 초대됐다. 소속사는 다음날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을 공개했다. 당시 소속사는 “강원도의 이름 없는 밀밭 작은 오솔길에서 평생을 함께 할 사람과의 첫발을 내디뎠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5월의 초원 위에 가마솥을 걸고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국수를 나누어 먹었다”며 결혼 소식을 전했다. 황영진 기자는 “결혼식 식사 대접을 원빈 씨 부모님께서 직접 하셨다”고 언급했다. 두 사람이 강원도 정선에서 결혼식을 한 이유에 대해 안진용 기자는 “원빈의 고향이 강원도 정선이다.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고, 부모님도 현재 살고 계시다. 그만큼 원빈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며 “저 장소를 알고 있었던 원빈은 이후 이나영과 사전 답사를 통해 결혼식 장소로 정하게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 기자는 이어 “두 사람의 결혼식에 유일한 협찬품이 있었다”며 가마솥을 언급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 있던 4개의 가마솥 중 2개는 동네에서 빌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채널A ‘풍문쇼’ 방송 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집으로’ 돌아온 조선 마지막 내시의 그림

    ‘집으로’ 돌아온 조선 마지막 내시의 그림

    서울 종로구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이자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로부터 송은 이병직(1896~1973)의 서화작품 8점을 기증받는다.구는 오는 13일 무계원에서 유 교수와 함께 송은 서화작품 기증식을 개최하고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9일 밝혔다. 이병직은 조선의 마지막 내시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미술품 수집가로 이번 기증을 통해 작품들이 원래 있던 종로구 부암동 전통문화공간인 무계원으로 돌아오게 됐다. 실제로 이병직은 생전 익선동의 큰 한옥에서 거주했는데 이곳은 6·25전쟁 후 한정식 요정 ‘오진암’으로 바뀌었다. 구는 이 오진암을 부암동으로 옮겨 2014년 3월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으로 되살려냈다. 대문과 기와, 서까래, 기둥 등에 오진암의 자재를 사용해 지었다. 유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0권 서울편에서 무계원과 오진암의 역사에 대해 이같이 소개하며 이곳에 이병직의 작품이 단 하나도 걸려 있지 않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기증을 결심했다고 구는 설명했다. 그는 옥션 등을 통해 구입한 이병직의 작품을 종로구에 기증하며 무계원을 찾는 관광객 누구나 이 공간이 지닌 오랜 역사를 알 수 있길 희망했다고 덧붙였다. 유 교수는 소동파의 적벽부 중 물각유주(物各有主·모든 물건에는 제각각 주인이 있다)는 말을 인용해 “평범한 물건도 자기 자리를 찾으면 귀해지는 법이다. 적어도 이병직 선생 작품 몇 점은 선생의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겠다고 판단해 기증하게 됐다”고 밝혔다.김영종 종로구청장은 “무계원은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도시한옥 오진암을 민관이 뜻을 모아 재탄생시킨 곳”이라면서 “이런 의미 있는 공간에 오진암을 추억할 수 있는 이병직 선생의 작품까지 전시하게 된 것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그 책속 이미지] 푸근한 골목 풍경 속으로

    [그 책속 이미지] 푸근한 골목 풍경 속으로

    골목 인문학/임형남·노은주 지음/인물과사상사/372쪽/1만 7000원눈 오는 어느 날 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을 읽고 나와 좁은 골목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니 생선구이 냄새가 진동한다. 머리에 내려앉은 눈을 툭툭 털고 자주 가던 식당에 들어갔다. TV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고등어구이를 갈비처럼 뜯었다. 그때 그곳, 종로구 피맛골에는 지금 대형 건물들이 들어섰다. 나는 그때 먹었던 고등어구이 맛을 여전히 잊지 못했건만. 큰길에서 이리저리 이어지는 골목은 한순간에 생겨나지 않았다. 그래서 저마다 역사가 있다. 지저분하고 단정하지 않은 골목이라도 특유의 향취가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그곳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사연이 서서히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리를 인간의 몸으로 비유하자면, 골목은 모세혈관이라 할 수 있다. 모세혈관으로 피가 끊임없이 흐르듯, 골목은 그렇게 끊임없이 사람들과 흘러간다. 신간 ‘골목 인문학’은 건축가 부부의 골목 답사 기록이다. 한국 골목들을 위주로 세계 유명 골목까지 모두 42곳의 골목을 다룬다. 골목이 생겨난 역사를 읽는 재미가 있다. 특히나 내가 다니던 골목이라도 나오면 더 반갑다. 수채화로 그려낸 골목 풍경이 푸근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포천에 노원구민 전용 힐링 캠프장 활짝

    포천에 노원구민 전용 힐링 캠프장 활짝

    서울 노원구가 자연 속에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구민 전용 캠핑장을 장만했다. 노원구는 오는 10일 오후 5시 경기 포천시 이동면 화동로 2530에 자리한 ‘힐링 캠핑장’ 개장식을 열고 정식 운영에 들어간다고 4일 밝혔다. 캠핑 사이트 35면과 지정 주차장을 갖췄다. 하루 최대 15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캠핑 사이트는 테라스형 데크에 에어컨·냉장고가 갖춰진 ‘방갈로’와 ‘세미방갈로’, 그늘막과 텐트를 아우른 ‘편한존’, 그늘막을 곁들인 ‘VIP’, ‘2가족용 캠핑존’, 잔디와 파쇄석 ‘캠핑부지’ 등 6개 형태로 운영된다. 넓은 잔디마당과 어린이 이용객을 위한 모래 놀이터와 그네, 트램펄린 등 놀이시설도 겸비해 가족 단위 캠핑객들이 휴식을 즐기기에 알맞다는 평가를 듣는다. 매월 9일 오전 10시부터 노원구서비스공단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 이용 시간은 1박을 기준으로 당일 13시부터 다음날 11시까지다. 요금은 4만 5000원~18만원이다. 노원구민에겐 사용료 50%를 깎아 준다. 연말까지 캠핑장 시범운영 기간에는 노원구 거주자, 또는 노원구 소재 사업장 종사자만 이용 가능하다. 오승록 구청장은 처음 사전답사로 캠핑장을 방문하자마자 “바로 여기다”란 생각을 했다고 귀띔했다. 이어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백운산 계곡이 바로 옆에 자리한 데다 캠핑장을 빙 둘러싼 아름드리 나무들 속에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해 구민들에게 사랑을 독차지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ROTC중앙회, 휴전선 이어달리기 행사 개최

    대한민국ROTC중앙회(회장 진철훈·이하 중앙회)가 오는 6일에 ‘제5회 한반도 횡단 155마일 이어달리기 및 전적지 도보답사’ 행사를 개최한다. 대한민국ROTC 창설 57주년과 ROTC 동문 20만명 시대를 맞아 ‘국가사회의 기간 ROTC!’라는 슬로건 아래 선‧후배 동문과 현역 장병이 155마일을 함께 달린다. ROTC마라톤클럽(회장 조광식) 주관으로 진행하는 행사는 소속된 마라토너 45명이 오는 6일에 강원도 고성에 있는 통일전망대를 출발하여, 휴전선 155마일 인근 도로를 따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까지 3일간 이어 달린다. 45명이 약 10km씩 조별로 나눠 달리는 동안 휴전선 인근 부대의 현역장병들을 만나 노고를 격려할 계획이다. 오는 7일에는 21사단 현역장병들과 8일에는 28사단 현역장병들과 함께 달린다. 마지막 구간에는 휠체어합창단 단원도 참여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한다. 진철훈 중앙회장을 비롯한 중앙회 임원들은 도라전망대·임진각·강안철책을 도보로 답사한 후에 마지막 구간을 ROTC 마라토너와 함께 달린다. 진철훈 중앙회장은 “초급장교 시절 155마일 철책을 지켜왔던 우리 ROTC가 조국수호의 의지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격년제로 이 행사를 하고 있다”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전의 상징인 휴전선을 따라 달리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 시대를 여는 선봉장이 될 것을 다짐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근대의 새벽을 깨운 마지막 왕조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근대의 새벽을 깨운 마지막 왕조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1회 정동(대한제국을 기억하며)편과 제22회 서초동(우면산의 가을)편이 2회 연속 진행됐다. 추석 연휴 특별프로그램으로 마련된 이번 미래투어는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달 26일 정동과 덕수궁 일대, 29일은 서초동 우면산 일대에서 각각 열렸다. 한가위 연휴와 맞물린 황금주말을 맞아 서울미래유산의 향기를 맡고자 하는 참가자들이 대거 몰렸다. 사전 온라인 예약이 일주일 전에 매진돼 준비한 오디오 가이드시스템 40개가 동났다. 예약 없이 현장을 찾아온 러시아와 루마니아 출신의 금발머리 외국인 여학생 2명은 진행자가 양보한 이어폰을 사이좋게 사용했다. 2회 차를 1개 지면에 갈무리했다.정동투어는 지난달 26일 오전 10시 시청역 4번 출구에서 시작했다. 서울시의회(옛 국회의사당)~성공회성당(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세실극장~주한영국대사관~유림면~덕수궁~정동극장~작은형제회 한국관구(프란치스코 수도원) 순서로 진행됐다. 추석 연휴를 맞은 정동과 덕수궁에는 근대 새벽을 느끼려는 순례자들로 붐볐다. 특히 이날 코스 중 성공회 성당에서는 정창진 신부가 사대문 안에 조성된 유일한 묘역인 지하 세례자 요한 성당의 조마가 주교 유해를 참배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또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프란치스코 정동수도원도 요한 수도원장이 나서서 내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앞둔 성당 내부를 공개했다. 이날 코스 중 세실극장, 주한영국대사관, 유림면, 정동극장,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명절에 어울리는 한복 차림으로 능숙하게 답사단을 안내했다.정동과 덕수궁은 대한제국에 대한 처연한 기억이 머문 곳이다. 대한제국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 13년 동안 존재했던 이 땅의 마지막 왕조다. 우리가 세운 첫 황제국이자 마지막 황제국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일제에 국권을 상실한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이다. 대한제국을 인정하지 않는 일제가 자신들이 합병한 나라를 조선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우리도 덩달아 패망한 나라를 조선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또한 13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기를 ‘대한제국 시기’라고 하지 않고 ‘구한말’이라고 부르는 우를 범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법궁, 경운궁(덕수궁 전신)이 자리한 정동은 근대의 고향이다. 이 땅에 근대정신을 알린 학교, 병원, 외국공관, 종교시설이 빼곡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옛 독일공사관(서울시립미술관), 정동제일교회, 옛 러시아공사관, 하비브하우스(미국대사관저), 영국대사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등이 120여년 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종은 왜 경복궁과 창덕궁을 버리고 대한제국 황궁으로 경운궁을 선택했을까.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에게 경운궁은 기회의 땅이었다. 외국공사관에 둘러싸여 신변 안전에 유리하다고 여겼다. 중국과 일본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적소라고 여겼다. 1년의 러시아공사관 생활(아관파천)을 청산하고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근대국가를 열겠다는 일념에 가득 차 있었다.원래 경운궁은 지금의 덕수궁보다 3배 이상 넓었다. 옛 경기여고 터는 역대 왕의 초상화를 모신 선원전이었고, 정동극장과 예원학교 자리에는 황실의 생활공간인 수옥헌이 있었다. 지금의 경향신문사와 서울역사박물관 사이에 세워진 구름다리(홍교)는 옛 경운궁과 경희궁을 잇는 다리였다. 경운궁을 둘러싼 정동 일대는 개화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대한제국은 정동에서 불길이 타올라 정동에서 꺼졌다. 고종은 경운궁 동문 대안문(대한문) 앞에 환구단(웨스틴조선호텔)과 황궁우를 세워 새로운 나라를 선포하고,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황제의 격을 과시했다. 서울시청 광장을 중심으로 한 현대 서울 도심의 방사상 도로망이 이때 구축됐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기울어진 국운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1900년 선원전 화재에 이은 1904년 대화재로 경운궁 주요 건물이 홀랑 타버렸다.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을 중건하는 동안 본궁에서 떨어진 중명전에 머물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었다. 경운궁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첫 황제였던 고종의 궁이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한 고종이 1919년 68세로 회한의 임종을 맞은 궁이다. 새로 즉위한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부왕에게 ‘덕수’라는 칭호를 바쳤다. 이때부터 고종황제의 칭호는 ‘덕수궁 이태왕’으로 격하됐다. 덕수궁 시대의 시작이다. 한때 황궁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경운궁은 나라를 잃은 ‘뒷방 늙은이’의 거처로 급전직하했다. 경운궁 시대가 그냥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고종의 인산일(장례식)을 기해 3·1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돼 대한민국의 국통을 세웠다. 우리가 국권을 상실한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선 안 된다.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의 전성기가 담긴 10년간의 경운궁 시대(1897~1907)와 덕수궁 이태왕이 기거한 12년간의 덕수궁 시대(1907~1919)는 분리돼야 한다. 덕수궁에는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대한제국의 혼이 깃들어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 [현장 행정] “현장을 알아야 면장도 한다”

    [현장 행정] “현장을 알아야 면장도 한다”

    TF팀·민간전문가 이끌고 공원 답사신규탐방로 발굴·문화 콘텐츠 개발 추진 “서울의 대표 역사문화공원으로 재조성”“‘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는 먼저 지식을 갖춰야 합니다. 우리 구청 직원들이 오늘 이곳에 총출동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류경기 서울 중랑구청장은 지난달 18일 망우역사문화공원 입구에 모인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류 구청장과 직원들은 이날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공원을 점검하고, 향후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현장탐방에는 망우역사문화공원 태스크포스(TF) 15명뿐만 아니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등 민간 전문가도 동행했다. 중랑구 TF는 망우역사문화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출발해 시인 박인환, 화가 이중섭, 아동문학가 방정환, 만해 한용운 등 한국 근현대사에 발자취를 남긴 유명인의 묘역을 둘러봤다. 직원들은 망우역사공원에 묻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인 김영식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류 구청장은 김 이사의 설명을 듣고 나서 “현장을 직접 둘러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묘지별로 설립된 연보비나 소화전, 안내표지판 등 공원 내 시설물에 대해서도 “좀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정비했으면 한다”,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등 세심한 지시를 내렸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조성은 류 구청장의 대표 공약사업 중 하나다. 공원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공동묘지라는 이미지로 인해 주민들이 발길을 꺼렸던 곳이다. 1933년 일제강점기에 공동묘지로 지정된 후 1973년 폐장되기까지 2만 8500여기의 묘지가 있었지만, 분묘 이전 추진 등 중랑구의 노력으로 지금은 평일에도 수많은 주민들이 이용하는 공원으로 자리매김했다. ‘망우공원 역사문화 숲길’은 2015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중랑구 TF는 이번 현장탐방을 토대로 개선안을 마련해 향후 개최되는 망우역사문화공원 자문위원회, 학술용역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아울러 신규 탐방코스 발굴, 역사·문화 콘텐츠 개발, 유명인사 묘역 추가 발굴 및 등록문화재 추가 지정 등도 추진한다. 이 외에도 인문학 교육 및 전시, 휴식 공간 등이 마련된 웰컴센터, 유스호스텔과 같은 편의시설을 조성하고, 의자·안내판·전망대 증설 등 각종 관광 인프라도 구축할 계획이다. 류 구청장은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중랑구의 미래경쟁력”이라며 “서울의 대표 역사문화공원이자 중랑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공간으로 재조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요즘 것들의 문화 답사기] “옆 학교는 매점 없앴대… 우리도 문 닫으면 어떡하지”

    [요즘 것들의 문화 답사기] “옆 학교는 매점 없앴대… 우리도 문 닫으면 어떡하지”

    2018년 대한민국의 학교는 둘로 나뉜다. 매점이 있는 학교와 없는 학교다. 기성세대에겐 학창시절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지만 최근 적지 않은 학교 매점이 문 닫았다. ‘군것질을 막으려고’, ‘위생 문제 때문에’ 등 여러 우려가 배경에 깔려 있다. 하지만 학생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고3 수험생은 길게는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보내야 하는 현실이라 매점은 선택이 아닌 필수 시설이라고 말한다. 학생회장 선거 때 ‘매점 부활’ 공약이 등장하기도 한다. 누구 말이 맞을까. 학생과 교사, 학부모, 매점 주인 등의 이야기를 토대로 매점을 둘러싼 학내 갈등의 속내를 들여다봤다.45곳. 지난 6년 새 서울 시내 전체 초·중·고교에서 문 닫은 학교 매점 수다. 2012년 전체 학교 1393곳 중 325곳(23.3%)에 있던 매점은 올해 1360개 학교 중 280곳(20.6%)에만 남았다. 매년 감소세가 계속됐다. “매점의 역할이 예전보다 줄었다고 보거나 그 존재 자체를 불편해 하는 학교장이 적지 않아 외부 운영업체와의 계약이 끝나면 폐지하겠다는 학교도 많다”는 게 현장 이야기다. 학교 매점이 문 닫는 이유는 크게 5가지 정도다. 우선 성장기 학생들의 영양 불균형을 걱정하는 어른들의 시선이 손꼽힌다. “고열량 정크푸드 위주인 매점 음식 탓에 아이들이 건강식인 급식을 남긴다”는 것이다. 4년 전 매점을 없앤 서울 A고의 교감은 “군것질하는 건 버릇인데 굳이 학교에서 나쁜 버릇을 들이게 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매점 음식이 인스턴트 위주이기 때문에 교육당국 입장에서도 급식하는 학교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건 부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학생 감소·운영 입찰 논란도 감소에 한몫 학령인구 감소 탓에 손님이 줄어 매점 매출이 타격을 받은 것도 원인이다. 학내 매점이 앞으로 더 줄어들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또 학생들이 빵 봉지를 교정에 무단 투기하는 등 위생 문제, 빵 셔틀(힘센 학생이 다른 학생에 빵 심부름을 강요하는 학교폭력의 한 종류), 매점 운영자 입찰 과정에서의 논란 가능성 등을 차단하려고 매점을 아예 없애버린 학교도 있다. 최근 매점을 폐쇄한 학교 관계자는 “운영하던 매점을 없애려면 학부모, 지역 인사 등이 참여하는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의결해야 하는데 학부모들도 매점 폐쇄를 바라는 비율이 높았다”고 말했다. ●매점 측 “생선·채소 반찬 나오면 매출 올라” “아휴~매점 빵 때문에 급식을 안 먹는 게 아니라 급식이 맛없으니 빵을 찾는 거죠.” 지난 28일 서울 강북 B고교의 3평(9.9㎡) 남짓한 지하 매점에서 만난 30대 점원 김인숙(가명)씨는 매점을 없앤 학교의 얘기와는 전혀 다른 현실을 전했다. 매점과 급식 음식의 상관관계를 학교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김씨는 “급식이 맛없는 날에는 점심 매출이 20만원 정도 늘어난다”면서 “구이·찜 등 생선 요리나 채소 음식은 학생들이 싫어하는 대표적인 반찬”이라고 귀띔했다. 2년 가까이 매점에서 일하다 보니 급식 식단표를 보면 그날 매점 매출을 대충 예상하고 대비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김씨는 “농담이 섞인 말이겠지만 어떤 아이들은 ‘매점이 빵을 더 팔려고 학교와 짜고 급식 메뉴를 빈약하게 만드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한다”고 헛웃음 지었다. 일부 중학교 학부모들은 “무상급식 실시 이후 빠듯한 단가에 맞춰 식단을 짜다 보니 부실한 반찬을 내놔 아이들이 매점을 찾는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교육당국의 설명은 다르다. 서울교육청 관계자는 “학생 측이 급식비를 내는 고등학교의 경우 한끼당 급식 단가가 평균 4715원으로 무상급식을 하는 중학교의 평균 단가 4993원(재학생 500~800명인 학교 기준)보다 낮다”면서 “무상급식 탓에 음식의 질이 떨어졌다는 건 잘못된 해석”이라고 말했다.●“커피 등 카페인 판매 금지는 눈 가리고 아웅” 학생들은 “매점을 찾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매점만 없애는 건 무책임한 결정”이라고 불만스러워 한다. 늘 배고플 수밖에 없는 존재인 성장기 학생을 종일 잡아 두는 학교에 간식 파는 곳이 없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B고 교정에서 만난 김윤식(18·가명)군은 “아침에 눈뜨면 세수만 하고 등교하는 터라 아침밥을 먹기 쉽지 않다”면서 “점심 급식 때까지 허기를 참기 어려워 1~2교시가 끝나면 보통 매점을 찾는다”고 말했다. 고교 매점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학생들이 가장 몰리는 영업 시간은 2교시 직후인 오전 10시쯤이다. 또 학내 매점에서 커피 등 카페인을 못 팔게 한 정책 역시 구조적 원인은 외면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정책”이라는 비판도 일부 있다. 지난달 14일부터 시행된 ‘어린이 식생활안전관리 특별법’ 개정안에 따라 학교에서는 캔커피·커피우유 등 고카페인 함유 제품은 매점은 물론 자판기에서도 팔 수 없다. 또 열량은 높으면서 영양가는 적은 라면 등의 제품도 매점에서 못 판다. 김군은 “학교에서 팔지 않아도 등교할 때 편의점에서 사오면 된다”면서 “하루 10시간 가까이 책상에 앉아 있으려면 카페인을 안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매점을 둘러싼 기성세대와 학생 간 시각차가 뚜렷한 가운데 절충점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다. 협동조합형 매점이 대표적이다. 서울 가재울고에서는 2015년 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이 출자해 협동조합 방식으로 매점을 만들었다. 보통 매점 식품의 질이 낮은 건 점주들이 수익을 위해 배가 부르면서 값은 싼 제품들을 들여놓기 때문인데 협동조합 매점은 수익을 목표로 운영하지 않아 유기농 등 질 좋은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한다. 이 학교 임명옥 상담복지부장 교사는 “소시지 등 제품은 시중 마트보다 더 싸게 판다”면서 “아이들이 매점 음식 때문에 급식을 안 먹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또 김포외고 등 일부 학교에서는 편의점을 입점시키기도 했다. 서울 서초구는 고열량 식품 대신 과일주스 등을 위주로 파는 ‘건강 매점’을 늘리기 위해 지역 내 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글 사진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요즘 것들의 문화 답사기] 감자○칩·나나○·내가 ○스타… 매점계 베스트셀러

    ‘저영양·고열량 딱지’ 라면 대신 냉동 만두 판매 매점 식품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일종의 공식이 있다. ‘금방 먹고도 배가 든든할 것’, 그리고 ‘가격이 쌀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뻔한 학생들이 주고객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중 마트·편의점 등에서는 보기 어려운 제품을 많이 볼 수 있다. 실제 서울신문이 서울 각 학교 매점을 돌며 확인한 결과 주로 500~1500원 사이의 빵과 음료수, 캔디류 등이 많이 팔렸다. 서울 강북의 한 고등학교 매점 점원은 “1500원 넘는 과자 등 유명 브랜드 제품도 진열용으로 가져다 놓기는 하지만 잘 팔리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스낵류인 ‘감자○칩’과 ‘나나○’, 빵류인 ‘내가 ○스타’ 등 중소업체 등이 만든 제품이 많다. 또 음료 중에는 500원 안팎의 ‘피○닉’ 등 스테디셀러와 ‘○○○스웨트’ 등 캔 형태의 이온 음료, ‘○○드링크’ 등 저렴한 과일 음료가 잘 나간다. 과거 매점하면 떠올랐던 식품인 라면은 고열량·저영양 음식이라는 딱지가 붙어 요즘은 판매가 어렵다. 대신 김치·고기 등으로 속을 채운 냉동 만두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10분뿐인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매점까지 뛰어와 먹고 다시 교실까지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빨리 먹을 수 있는 식품이어야 잘 팔린다. 이 때문에 일부 매점에서는 냉동 만두를 전자레인지로 미리 데워 놨다가 학생들에게 팔기도 한다. 식중독 위험 등이 있기 때문에 위생당국의 단속 대상이다. 또 아이들은 500원, 1000원 등 잔돈을 남기지 않는 가격의 제품을 선호한다. 다만 요즘 매점에는 체크카드나 버스카드 등으로 싼 제품도 계산할 수 있는 단말기가 모두 설치돼 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천국과 지옥 오간 광희문… 그 굴곡진 삶 더듬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천국과 지옥 오간 광희문… 그 굴곡진 삶 더듬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0회 신당동(광희문 주변) 편이 추석 연휴 첫날인 지난 22일 진행됐다. 이날도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몰렸다. 추석 연휴 특별 프로그램 신청 창구인 서울미래유산홈페이지가 지난 17일 오픈 즉시 매진될 정도였다. 추석 프로그램은 26일에 이어 29일에도 계속된다.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7번 출구를 출발한 투어단은 중앙아시아거리~국립중앙의료원~동대문패션타운 관광특구~동대문운동장기념관~이간수문~옛 서산부인과~광희문~장충초등학교~신당동 성당~범삼성가주택~터키대사관~종이나라박물관~태극당 코스를 타박타박 걸었다. 이날 서울미래유산 해설사로 처음 데뷔한 윤현경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한양도성 성곽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난코스에도 당황하지 않고 설득력 있는 해설로 답사단의 마음을 잡았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다. 동서남북 사방에 4개의 큰 문을 세우고 그 사이에 4개의 작은 문을 뒀다.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부터 남쪽으로 광희문·흥인지문·혜화문·숙정문·창의문·돈의문·소덕문이 그것이다. 8개의 크고 작은 문의 역사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숭례문은 남대문, 흥인지문은 동대문, 돈의문은 서대문같이 해당 방위에 따라 쉽게 불렀지만 숙정문을 북대문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숙정문은 태종 때 풍수가 최양선의 건의에 따라 대부분 닫혀 있었기에 문의 역할을 하지 못한 탓이다. 4소문의 경우 혜화문은 동소문, 소덕문은 서소문이라고 방위를 따서 쉽게 불렀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하문 혹은 장의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숙정문이나 창의문은 도성의 통행문이 아니라 방위에 맞춘 형식적인 문이었다. 창의문 바깥 숲과 계곡을 ‘자줏빛(紫) 노을(霞)의 동네’라고 해 자하동이라고 불렀기에 문 이름도 자하문이라고 통용됐다. 창의문 바깥 동네를 ‘자문밖’이라고 했고, 창의문이라는 정식 이름보다 자하문이라는 별칭을 더 즐겨 썼다.이날 투어단이 밟은 광희문은 4소문 중 하나다. 도성의 동남쪽 문이기는 하나 남소문은 아니다. 남소문은 별개의 문이다. 혜화문이 동소문이고, 소덕문이 서소문이며, 창의문이 북소문인 것과는 딴판이다. 숙종실록(1690년 7월 19일)에 보면 “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동남에 광희문이 있다 했는데 이게 남소문의 이름인 듯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남소문과 광희문을 구별하지 못한 사례가 잦았다. 남소문은 남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의 도성통행 용도로 세조 3년에 세워졌지만 건립 12년 만인 예종 1년(1469년)에 문을 닫은 뒤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실제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예전에 광희문 남쪽, 목멱산 봉수대 동쪽에 남소문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남소문은 세조의 장남 의경 세자의 죽음이 “도성 동남쪽에 문을 낸 탓”이라는 풍수독설 때문에 폐쇄의 운명을 맞았다. 남소문을 열면 왕가에 황천살이 열려 세자가 요절하고, 임금도 시름시름 앓는다는 불길한 풍수설이 나돌았다. 또 개문파와 폐문파로 나눠 “남소문을 열면 남인이 득세하고, 닫으면 서인이 권세를 잡는다”는 당쟁의 대상물이 됐다. 남소문은 물자와 사람이 가장 많이 오가는 한강나루(한강진)를 거쳐 도성을 통과하는 최단거리 지름길이었다. 장충단공원에서 국립극장 길로 올라가다 보면 한남동으로 통하는 오르막길의 보도 왼쪽에 남소문터를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국립극장과 반얀트리호텔 사이쯤이다. 남소문과 함께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지점에 세워진 홍지문(한북문)도 4소문에 해당하지 않는다. 결국 한양도성은 4소문 체계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통로에 대한 수요가 생기면서 5~6소문 체계로 운영됐다고 할 수 있다. 광희문은 천국과 지옥을 오간 문이다. 한양풍수의 핵심 중 하나인 수구문(水口門)에서 불명예의 대명사인 시구문(屍口門)으로 명칭과 용도가 오락가락했다. 명실상부한 남소문이면서 12년간 잠깐 존재한 또 다른 남소문에 의해 위상을 위협받아 단 한번도 대접받지 못했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서 “도성의 모든 하수 모여드는 곳, 조그만 바위구멍 광희문이네, 사람의 혈맥 같은 수많은 개천 밤낮으로 이곳을 새어나가고…”라고 광희문의 풍경을 읊었지만 광희문은 대개 ‘물의 출구’라는 명예로운 지위 대신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한양은 흠잡을 데 없는 천하의 명당은 아니었다. 명당수가 부족하고, 경복궁 좌우 지맥이 허약하며, 태자의 위상을 뜻하는 동쪽 낙산의 지세가 서쪽 인왕산보다 낮고, 물이 흘러나가는 청계천 출구가 열려 있는 게 문제였다.그래서 물과 함께 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인공산(假山)을 만들거나, 옹성을 쌓거나, 사당을 지어 보호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훈련원 동북쪽에 인공산을 쌓았으니 땅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함이다”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광희문을 통해 기가 빠지는 것을 막고자 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국립의료원 옆에 가산(방산시장)을 조성했고, 동대문에 옹성을 둘러쌓고, 수구(水口)와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기를 돋우려고 동묘(관운장묘)를 세웠다. 이 모든 게 ‘풍수성형’ 즉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장치였다. 광희문은 시구문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독한 유교 논리가 판친 조선사회는 관혼상제(冠婚喪祭) 중 죽음의 비중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 탓이다. 시구문을 빠져나간 상여 행렬은 숭인동과 황학동 사이 청계천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 영도교(永渡橋)를 지나 창신동 동망산(東邙山)을 향했다. 왕족이나 사대부는 영도교를 건너 뚝섬이나 광나루를 거쳐 왕릉이나 선산으로 나아갔다. 조선시대 서울 사대문 안에서는 매장이 엄격하게 금지됐기에 1909년까지 사람이 죽으면 광희문이나 서소문을 통해 시신이 나갔다. 성저십리(성 밖 십리)에도 묘지를 쓰거나 나무를 베거나, 돌을 캐는 게 금지돼 시신은 주로 광희문 밖 금호동, 남대문 밖 이태원과 용산, 서대문 밖 아현과 홍제원 바깥에 묻었다. 일제강점기 경성부에 설치된 19곳의 화장장과 공동묘지는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 공동묘지였다.신당동의 행정구역은 18세기 이전 한성부 남부 두모방 신당리계였다. 광희문 주변인 현재의 신당동, 광희동, 장충동 일대는 군병과 유민, 걸인이 거주하는 빈민 지대였다. 광희문은 시체와 상여가 나가는 문이었기에 문밖 신당동은 장례를 치르는 무녀와 승려가 몰려 살았다. 신당동(新堂洞)이라는 동명이 신당(神堂)에서 유래됐다고 보는 근거다. 북이나 장구, 징, 꽹과리 등 무구와 목기나 철기를 제작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간수문 밖은 개천변을 따라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어서 버드나무를 이용해 가재도구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터를 잡았다. 훈련도감 군병과 가족들이 부업 삼아 시장을 열었다. 동소문 밖 동부 연화방(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던 동활인서가 광희문 옆으로 옮겨 왔다. 활인서는 전염병이 돌 때 무당으로 하여금 역귀를 쫓거나 구호 활동을 하는 공공의료기관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구휼 업무와 무당을 단속하고 세금을 거두는 기관의 역할도 맡았다. 광희문 앞에는 신당동 화장터와 금호동 공동묘지로 가는 고개가 있었는데 길이 꼬불꼬불하고 넘기 힘들다고 하여 아리랑고개라고도 불렸다. 도둑이 많아 순라꾼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고 소리쳤는데 이 말이 변해 ‘버티고개’(6호선 버티고개역)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한강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개편된 현대 서울에서도 신당동의 서울 동남 방면 관문 역할은 변함이 없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초동(우면산의 가을) ●일시: 9월 29일 오전 10시~낮 12시 ●집결장소: 서울시교육청 교육연수원 앞(사당역 1번 출구에서 5413번 버스 환승)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미래유산 톡톡] “서울서 가장 오래된 빵집 태극당, 미래유산감이네~”

    [미래유산 톡톡] “서울서 가장 오래된 빵집 태극당, 미래유산감이네~”

    지난 22일 답사단이 찾은 신당동 일대의 서울미래유산은 두 곳이다. 국립의료원과 동대문패션타운 관광특구다. 첫 번째 미래유산인 국립의료원은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 이후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에 한국 정부가 의료 지원을 요청해 1956년 세워졌다. 유엔의 한국재건단(UNKRA)이 ‘한국의 메디컬센터 설립과 운영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고, 1958년부터 3국 공동운영 체제로 국립중앙의원이 개원, 1968년 우리 정부가 운영권을 인수할 때까지 운영됐다. 2002년 이후 3국의 병원과 학술 교류를 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명의로 세워진 병원 건립 기념비가 서 있고 담쟁이가 우거진 스칸디나비아기념관이 이국적인 풍취를 준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동대문패션타운 관광특구는 3만여개의 점포가 24시간 불야성을 이루는 대한민국 패션의 총집합체다. 연간 800만명이 넘는 외국인 관광객이 동대문 재래시장과 현대식 쇼핑몰을 찾는다. 밀리오레, 평화시장, 헬로APM, 현대시티아울렛 등 패션 시장의 과거와 현재 공존을 감상할 수 있다.한편 이날 코스 중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빵집 태극당과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옛 서산부인과의원 건물도 서울미래유산감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태극당은 1946년 명동에서 개업해 1973년 장충동으로 이전했다. 1945년 개업한 군산 이성당, 1956년 대전 성심당, 1957년 대구 삼송빵집과 함께 동네 빵집의 전설을 작성 중이다. 모나카 아이스크림과 전병, 카스텔라, 사라다빵 등의 리스트를 보유하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옛 서산부인과의원은 1960년대에 보기 힘든 곡선과 노출 콘크리트를 이용한 독특한 형태주의 건축물로 주목을 받았다. 남성의 생식기와 여성의 자궁에서 건축 디자인을 착안한 미학적인 건물이다.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30년 전 서울올림픽 열렸던 그곳… 2000년 전 한성백제의 고향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30년 전 서울올림픽 열렸던 그곳… 2000년 전 한성백제의 고향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9회 차 송파(백제의 꿈) 편이 가을이 익어가는 9월의 셋째 주말인 지난 15일 진행됐다. 이날 투어는 30년 전 우리 가슴을 뛰게 했던 서울올림픽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행사였다. 투어 일정을 서울올림픽 개막일에 최대한 가깝게 맞췄고 마침내 ‘D-2’에 투어를 가질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서울을 전 세계에 알린 1988년 9월 17일 역사적인 개막식을 떠올리며 메인스타디움을 찬찬히 둘러봤다. 또 88올림픽기념전시관에서 상영하는 굴렁쇠 소년의 영상을 보면서 감회에 젖었다. 투어 내내 30년 전 그날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를 출발한 투어단은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메인스타디움에 들어가서 본부석과 성화대, 관중석을 걸었다. 88올림픽기념관에서 메달리스트들의 영광스런 얼굴과 유니폼을 보면서 그날의 열기를 체감했다. 입장료는 연구원이 일괄 부담했다. 한국광고박물관~삼전도비~석촌호수~석촌동 고분군 코스가 이어지는 잠실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것은 시간상 무리라고 판단해 종합운동장~잠실 구간은 지하철로 이동했다. 이지현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재치 넘치는 해설로 투어를 안정감 있게 이끌었다. 대부분의 참가자가 처음 방문한 한국광고박물관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참가자들은 박물관을 둘러보는 데 만족하지 않고 답사가 좀 늦게 끝나더라도 해외광고제 수상작을 시청하길 원했다. 광고의 역사는 물론 수준 높은 외국 광고를 접할 기회였다. 희망에 따라 20분짜리 광고 영상을 시청, 이날 투어는 낮 12시 30분에 종료됐다. 추석 연휴를 맞아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는 22일(토)은 물론 26일(수), 29일(토)에도 진행될 예정이다. 30년 전 대한민국의 맥박을 뛰게 했던 서울올림픽에 관한 기억은 흐릿해졌지만 도시에는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올림픽 개최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 선진 시민의식의 성숙과 함께 도시공간의 뼈대를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성된 한강개발, 체육시설과 잠실아파트단지, 올림픽공원이 거대한 도시의 구조물로 남았다. 올림픽은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의 발전을 앞당긴 기폭제이자 촉매제의 역할을 해냈다. 현대도시 서울의 변혁은 한강종합개발사업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7~1970년 시행된 제1차 한강종합개발사업은 홍수 피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1차원적인 몸부림이었다. 한강변에 쌓은 제방 위에 강변북로를 만들고 공유수면 매립 사업으로 얻은 동부이촌동과 압구정동, 여의도, 잠실에서 귀중한 택지를 조성했다. 제2차 한강종합개발사업은 1981년 한강 고수부지에 체육시설을 만드는 사업으로 시작, 1986년 5월 올림픽대교 개통으로 마무리됐다. 36㎞의 수조가 정비됐고 연중 2.5m의 수심이 유지됐으며 60여만평에 체육공원이 들어서는 등 지금 한강의 얼개가 이때 완성됐다. 19세기까지 천하절경을 유지했던 구불구불한 한강물길은 사라졌지만,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현대적 의미의 한강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올림픽을 계기로 1000만 시민을 수용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스의 도시네트워크가 갖춰진 것이다.올림픽을 전후로 서울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1981년과 1989년을 비교해 보면 ‘올림픽의 힘’이 느껴진다. 1981년 867만명이던 인구는 1989년 1000만명을 돌파했다. 서울시 예산도 1조원에서 3조 5000억원으로 3배 이상 증액됐다. 지하철의 경우 9.5㎞ 1개 노선이 115㎞ 4개 노선으로, 차량은 20만대에서 77만대로 크게 불었다. 도로 총연장은 6600㎞에서 7200㎞, 시설공원은 550곳에서 943곳, 가로수는 14만 그루에서 24만 그루로 늘었다. 상수도 생산량은 9억 4000t에서 16억 2000t, 하수처리시설은 하루 36만t 처리 규모에서 300만t 처리 규모로 뛰었다. 공중화장실은 1700곳에서 8300개로 늘어났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현대화된 도시는 전무후무하다고 한다.올림픽의 성공과 잠실의 탄생은 거저 얻은 게 아니다.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은 1970년 12월 수립됐다. 15만평의 종합경기장을 포함한 210만평 규모의 사업계획이다. 여름철이면 홍수로 범람하던 잠실섬의 강남 쪽 물길을 막아 매립한 83만평과 토지구획사업으로 얻은 127만평을 합친 땅이다. 위대한 구상이었다. 1970년 서울에서 개최키로 한 제6회 아시안게임 개최권을 반납하는 수모 끝에 절치부심해서 얻은 국제경기장 공공부지이기도 하다. 그때 우리에겐 대회를 치를 국제경기장이나 도시기반시설이 없었다. 1971년 오늘의 석촌호수로 흔적이 남은 한강 물막이공사가 잠실을 상전벽해로 변모시켰다. 조선 500년 동안 서울의 동쪽 관문과 광주를 잇던 송파나루와 삼전나루는 사라지고 뭍이 되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서울의 역사는 600년이었다. 1994년 ‘정도 600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면서 남산한옥마을에 타임캡슐을 묻었다. 서울 정도 1000년이 되는 2394년에 개봉하기로 했었다. 서울은 4대문을 중심으로 한 강북도시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잠들어 있던 한성백제의 역사가 1997년 무렵 깨어나면서 600년 설은 깨졌다. 서울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기술된 기원전 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서울의 역사는 2000년으로 수정되었다. 역사교과서는 새로 쓰였다. 2000년 전 한성백제가 처음 터를 잡은 땅은 강북이 아니라 강남이었다.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대성(大城)이자 북쪽성(北城)이었고,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 몽촌토성은 남쪽성(南城)이었다. 그리고 두 성의 배후지대인 석촌동 고분군은 왕릉이었다. 한성백제는 전형적인 강남 왕국이었다. 3세기 중반부터 4세기 중반 이전에 100만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해 길이 3500m, 높이 11m, 너비 43m의 거대한 토성을 한강변 동서남북 사방에 쌓았다. 강 건너 아차산에 진을 친 고구려와 세력을 다퉜다. 현재 동벽과 북벽이 도로로 8토막이 난 채 남았다. 한강 쪽 서벽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됐다. 풍납동 대동아파트 옆 경당지구와 지금은 풍납백제문화공원으로 옷을 갈아입은 미래지구가 풍납토성 안 한성백제의 왕궁과 신전이 자리한 핵심지대로 여겨진다. 풍납토성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고적 제27호로 지정됐지만 토성 성벽만 지정해 토성 안에 민가가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해방 후 1963년 사적 제11호로 지정하고, 1964년 성 안을 발굴했지만 잠들어 있던 백제혼을 깨우지 못했다. 1997년 세 줄의 깊은 해자 즉 삼중환호(三重環濠)와 여(呂)자형 집터 등 74기의 유구와 수천 점의 백제유물을 수습, 백제왕도의 단서를 찾아내기 전까지 온조가 도읍을 정한 하남 위례성이 풍납토성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몽촌토성은 서울올림픽 덕분에 개발 압력을 이기고 현 상태로나마 보전될 수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몽촌토성의 존재감이 올림픽공원의 훼손을 막았다고 보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올림픽공원 부지는 1960년대부터 미래의 국제경기장 부지로 지정돼 있었다. 메인스타디움을 비롯한 주요 경기장 시설이 잠실종합운동장에 먼저 건설된 탓에 올림픽공원은 단순 체육시설 부지에서 몽촌토성, 상징조형물과 올림픽회관, 야외공연장, 체육학교, 공원 등 복합 체육문화시설단지로 개발 방향이 전환됐다. 한성백제의 왕릉이라고 할 수 있는 석촌동 고분군도 200여기의 돌무덤이 5개밖에 남지 않은 상태로 무참하게 훼철됐다. 사적지 내부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3호분과 4호분 사이로 35m의 차도가 뚫리기도 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쏠린 관심이 고분 안 민가를 이전철거하고 관통도로를 지하화하면서 모양새를 살렸다. 송파는 2000년 전 한성백제의 고향이다. 갓 깨어난 백제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신당동(광희문 주변), 정동(대한제국을 기억하며) ●일시: 9월 22일(토) 오전 10시~낮 12시, 9월 26일(수) 오전 10시~낮 12시 ●집결장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7번 출구 앞, 시청역 4번 출구 앞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신도시 망향비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신도시 망향비

    서울은 행정구역으로 서울특별시만이 아니라, 학교나 직장이 서울시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포함해 ‘대(大)서울’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시를 활동권역으로 하는 사람들을 단지 그들이 잠잘 집이 서울시 바깥의 도시에 있다고 해서 배제해버리면 서울과 주변 도시나, 신도시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대서울에는 광명·과천·부천·안양·의정부·성남·하남·구리·김포·인천·시흥·고양·남양주 등의 일부 또는 전부가 포함된다. 서울과 별개의 생활권으로 설계한 반월 신공단인 오늘날의 안산이나, 서울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생활권을 지니는 수원·광주·화성·오산·동탄 등은 대서울에 포함하지 않는다. 교통이 긴밀하게 연결돼 부동산 가격이 서울과 연동하는 안성·원주·춘천 등의 지역도 대서울에 묶기에는 사람들의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최근 대서울에 포함되는 서울시 바깥의 도시들을 답사하며 현지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대서울 지역의 거주자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 해당 지역에 신도시가 생긴 뒤 서울에서 그 지역으로 이주·정착한 주민, 그리고 현재 서울을 주요 생활권으로 삼으면서 신도시를 임시 거주지로 삼는 주민 등 이 세 부류가 서울의 접경도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 세 유형의 주민들은 해당 도시와 경기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최근 관심을 갖는 유형의 주민은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고향 마을을 수용당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 원주민들이다. 이들 원주민은 대개 아무 흔적 없이 이주하지만, 고향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는 망향비를 세우기도 한다. 이 망향비는 전국적이다. 최근에는 성남시의 1기 신도시 분당과 2기 신도시 판교의 딱 중간 지점에 자리한 ‘동간마을 모향비(慕鄕碑)’가 가장 인상 깊었다. 양반이나 선비가 세운 비석과는 달리 비문을 한글로 새겼고, 뒷면에는 마을 주민의 이름을 일일이 새겼다. 어떤 망향비는 여성 이름도 새겨졌지만, 성남의 이 모향비에는 남성의 이름만 보였다. 그 옆면에는 ‘신도시에 솟은 정’이라는 제목의 절절한 망향가(望鄕歌)를 새겼다. “신도시란 새 이름은 희망도 들어 있어 고향 떠날 아픈 마음 참으려 해도, 멀리 가는 아쉬움에 애가 타는 사연들, 조상님의 은공 쌓인 고향의 산천, 그 많은 세월 속에 쌓인 인정아. 못 잊을 이웃 정은 만날 수야 있지만, 정든 마을 산천초목 안타까워라”. 이런 망향비야말로 대서울 주민의 삶과 생각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소중한 자료다. 성남시 분당의 중앙공원에는 이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모 양반 가문의 묘소와 비석 등이 ‘문화유적’으로서 정비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양반의 유적보다, 신도시 고층아파트 단지 한 켠에서 신도시 주민들의 관심 밖에서 거미줄까지 처진 이런 망향비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들이 대서울에 살아온 흔적이라, 더 소중하다.
  •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

    이 컬럼의 제목에는 ‘대(大)서울’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행정구역으로서의 서울특별시만이 서울이 아니라, 집은 서울시 바깥에 있지만, 학교나 직장이 서울시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까지를 모두 서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대서울이라는 단어가 품은 뜻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서울시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서울시를 자신의 주요한 활동권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단지 그들이 잠자는 곳이 서울시 바깥이라고 해서 배제해버리면 서울과 주변 도시들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서울에는 광명·과천·부천·안양·의정부·성남·하남·구리·김포·인천·시흥·고양·남양주 등의 일부 또는 전부가 포함된다. 서울시와는 별개의 생활권이 될 것을 예정해서 계획된 반월 신공업 도시 즉 오늘날의 안산이나, 서울시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생활권을 지니는 수원·광주·화성·오산·동탄 등은 대서울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렇게 설명하면 대서울이라는 개념은 부동산 업계에서 쓰는 ‘서울세력권’이라는 말과 일부 겹친다. 하지만 나는, 교통시설이 서울과 긴밀하게 이어지면서 부동산 가격이 서울과 연동하는 안성·원주·춘천 등의 지역까지 대서울에 묶기에는 사람들의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한다.대서울에 포함되는 서울시 바깥의 도시들을 답사하며 현지 주민들을 인터뷰하는 작업을 최근 진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대서울이라는 개념을 폐기할 정도는 아니지만 대서울의 서울시 바깥 지역을 바라보려면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해당 지역이 농촌이나 어촌이던 시절부터 살아온 주민, 해당 지역에 신도시가 생긴 뒤 서울에서 그 지역으로 이주·정착한 주민, 그리고 현재 서울을 주요 생활권으로 삼으면서 신도시를 임시 거주지로 삼고 있는 주민, 이 세 부류가 서울시 접경 지역의 각 도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 유형의 주민들은 해당 도시와 경기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 이 가운데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예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다가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고향 마을을 수용당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주민들이다. 이들 주민은 대개 아무 흔적 없이 이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대대로 살아온 고향 마을이 재개발 앞에서 완전히 흔적을 지우는 것을 슬퍼하는 망향비를 세운다.이런 망향비는 전국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최근 가장 인상깊게 본 것이 성남시의 1기 신도시 분당과 2기 신도시 판교의 딱 중간 지점에 자리한 ‘동간마을 모향비(慕鄕碑)’였다. 양반이니 선비니 하는 사람들이 세운 비석과는 달리 비석의 문장이 한글로 새겨 있고, 뒷면에는 마을 주민들의 이름이 일일이 새겨 있다. 어떤 망향비에는 여성 주민들의 이름도 새겨 있는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에는 남성 주민들의 이름만 보였다. 그리고 그 옆면에는 ‘신도시에 솟은 정’이라는 제목의 절절한 망향가(望鄕歌)가 새겨 있다. “신도시란 새 이름은 희망도 들어 있어 고향 떠날 아픈 마음 참으려 해도, 멀리가는 아쉬움에 애가 타는 사연들, 조상님의 은공 쌓인 고향의 산천, 그 많은 세월 속에 쌓인 인정아. 못 잊을 이웃 정은 만날 수야 있지만, 정든 마을 산천초목 안타까워라”. 이런 망향비야말로 대서울 주민의 삶과 생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다. 성남시 분당의 중앙공원에는 이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모 양반 가문의 묘소와 비석 등이 ‘문화유적’으로서 정비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양반 가문의 유적보다, 신도시 고층아파트단지 한 켠에서 신도시 주민들의 관심 밖에 놓여 거미줄 쳐있는 이런 마을 비석을 찾아가는 것이 더욱 즐겁다. 공원 안내판에 그 이름조차 표기되어 있지 않은 이런 비석이야말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평범한 시민들이 대서울에 살아온 흔적이므로.글·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75권 방대함에도 문체 수려… 외교 현장 생생한 사신 기행록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75권 방대함에도 문체 수려… 외교 현장 생생한 사신 기행록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원고는 모두 전란의 와중에 분실됐지만 이정귀의 ‘월사집’은 원집 68권(부록 5권 포함), 별집 7권, 도합 75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거의 모든 문체를 망라해 장관을 이룬다. 이정귀는 중국에서 사신들이 올 때마다 접반(接伴)했으며, 중국에 사신으로 세 차례나 다녀왔으므로 시와 산문 모두 사행(使行) 중에 지은 것들이 많고 또한 볼만하다.시들 중 ‘조천록’(朝天錄), ‘빈접록’(接錄)과 같은 제목으로 묶여 있는 것들은 제목이 말해주듯 모두 일종의 기행록이다. 산문 기행록 중 ‘경신조천기사’(庚申朝天紀事)는 당시 생생한 외교 현장과 함께, 중국 황제 신종이 서거하고 광종이 즉위할 때 중국 조정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이 밖에 요령성에 있는 천산과 의무려산, 산해관에 있는 각산사를 답사하고 지은 ‘유천산기’(遊千山記), ‘유각산사기’(遊角山寺記), ‘유의무려산기’(遊醫巫閭山記)는 특히 볼만하다. 후대 연행록(燕行錄)에도 끼친 영향이 크다. 모두 오늘날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미리 읽어둠 직한 글들이다. 이 밖에 시집 중 ‘폐축록’(廢逐錄), ‘권응록’(倦應錄)에서는 윤근수, 신흠, 장유, 권필, 김상헌 등 당대 최고 문사들과 주고받은 수준 높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 폭우로 도로 곳곳 패여… 방북선발대 개성→평양 가는데 4시간

    폭우로 도로 곳곳 패여… 방북선발대 개성→평양 가는데 4시간

    도로 유실로 평양까지 시속 60㎞로 달려 文대통령 탈 방탄 벤츠 2대도 함께 이동 고려호텔 도착하자 직원들 “반갑습니다”‘2018 남북 정상회담 평양’에 참가하는 남측 선발대는 17일 평양에서 주요 일정을 조율하고 현장을 답사하는 등 막바지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서호 청와대 통일정책비서관을 단장으로 한 선발대는 이날 주요 행사가 진행될 곳을 둘러봤다. 김상균 국가정보원 2차장과 윤건영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 등을 위주로 현장 답사에 나섰다. 선발대는 이날 정오쯤 고려호텔 2층에 남측 메인프레스센터를 열었다. 또 촬영한 화면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메인프레스센터에 송출하는 등 기술적인 부분을 집중 점검했다. 앞서 선발대는 16일 경의선 출입사무소(CIQ)를 통과, 북측이 제공한 버스 3대에 나눠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왕복 4차로 도로의 곳곳이 패여 있어 시속 60㎞ 이상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최근 폭우로 도로 사정이 더 안 좋아졌다는 전언이다. 개성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는 약 170㎞였지만 도착하는 데 약 4시간이 걸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서 이용할 방탄 경호 차량인 벤츠 세단 2대도 선발대와 함께 이동했다. 2대 모두 앞뒤 번호판을 흰색 가림막으로 가린 상태였다. 선발대가 숙소인 평양 고려호텔 로비에 도착하자 유니폼을 입은 호텔 직원이 양측에 도열해 손뼉을 치며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를 연호했다. 전종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겸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북측 소장이 선발대를 반겼다. 남측 선발대는 왼쪽 가슴에 태극기 배지를, 북한 측은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착용했다.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이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일인 9·9절과 관련해 “큰 행사가 많아서 힘들었겠다”고 하자, 전 부위원장은 “성대하게 잘 치렀다. 바빴다”고 말했다. 평양 공동취재단·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아이유 데뷔 10주년 팬미팅 “팬들에 감사..앞으로도 함께 했으면”

    아이유 데뷔 10주년 팬미팅 “팬들에 감사..앞으로도 함께 했으면”

    아이유가 팬클럽 유애나와 데뷔 10주년 팬미팅을 진행하며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아이유는 지난 15일 오후 서울 광진구 유니버셜 아트센터에서 데뷔 10주년 기념 팬미팅 ‘아이유 플러스(IU+)’를 개최하고 팬들과 만났다. 오후 2시와 6시 총 2회차에 걸쳐 열린 이번 팬미팅은 데뷔 10주년에 걸맞게, 그 동안 아이유가 고수해 온 소극장 팬미팅보다 한층 넓어진 공간에서 진행되면서 더욱 많은 ‘유애나’들과 만남이 이뤄졌다. 이날 아이유는 오후 2시에 열린 1부에서 ‘10대’ 팬들을, 6시에 진행된 2부에서는 20세 이상의 팬들을 각각 초대해 데뷔 이후부터 더욱 폭넓게 뻗어나가고 있는 다양한 연령층의 ‘유애나’들과 함께 특별한 데뷔 기념일을 자축했다. 특히 아이유는 이날 모든 입장객들에게 특별 제작한 팬클럽 ‘유애나’ 커플링과 ASMR 영상 CD, 양말, 포토카드 등이 담긴 ‘아이유 플러스’ 키트를 증정하는 통 큰 선물로 10주년을 맞아 더욱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하기도 했다. 가장 먼저 진행된 1부에서는 ‘10’이라는 상징적 숫자에 걸맞게 특별히 초청된 10대 팬들과의 훈훈한 만남이 이뤄져 눈길을 모았다. 앞서 “10대를 위한 콘서트를 해보고 싶다”며 한차례 희망사항을 밝히기도 했던 아이유는 약 2 시간 동안 ‘유애나 동생’들과 함께 생기넘치는 모습으로 호흡하며 특별한 시간을 함께 나눴다. 특히 아이유는 10대들의 트렌드와 고민을 함께 이야기 나누는 ‘핵인싸 아이유’, ‘유애나 마블’ 코너 등을 통해 연신 소탈하고 개구진 면모로 팬들과 친근감 있게 소통하면서 현장을 기분 좋은 에너지로 물들였다. 언니이자 누나, 혹은 친구처럼 10대 유애나들과 다정히 호흡한 아이유는 이날 ‘A dreamer’, ‘Someday’, ‘Teacher’ 등 모든 10대들에게 전하고픈 자신의 히트곡들을 메들리로 선사하면서 소중한 팬들을 향한 응원과 감사를 전했다. 20대 이상 팬들이 참여한 2부는 후끈한 열기 속에 아이유 10년의 활동 발자취를 돌아보는 알찬 시간으로 꾸려졌다. 2부는 그 동안 아이유의 오랜 팬임을 수 차례 인증해 온 가수 겸 작곡가 유재환이 MC로 깜짝 등장, 특유의 해피 바이러스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특히 이 시간은 10년간의 아이유를 가장 오래 지켜봐 온 팬들과 만나는 자리인 만큼, 아이유와 ‘유애나’의 진솔한 대화 시간들이 많이 이어지기도 했다. 팬들은 10주년을 맞은 아이유를 변함없는 ‘나무’에 빗대어 헌정하는 축사를, 아이유는 앞으로의 각오를 담은 선언문 형식의 답사를 전하며 서로가 함께 만들어갈 더욱 특별한 ‘다음 10년’을 약속했다. 2부에서 아이유는 ‘가을아침’과 ‘무릎’을 선곡해 감미로운 기타 선율에 맞춰 노래 한 데 이어 깜짝 앙코르 곡으로 ‘을의 연애’와 ‘밤편지’, 그리고 유애나를 향한 팬송 ‘마음’까지 연달아 열창하며 감동을 선사했다. 행사를 마치며 아이유는 “1부에서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자 했다면, 2부에서는 평소 여러분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만족스럽다”며 팬미팅 소감을 밝혔다. 이어 데뷔 10주년을 맞는 것에 대해서는 “10년이란 세월이 처음엔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졌는데 이젠 ‘특별한 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배 세 배 더 씩씩하게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한 함께해준 팬들에게는 “저를 항상 외롭지 않고, 초라하지 않게 해주는 우리 ‘유애나’ 친구들 너무 감사하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 함께하면서 좋은 추억 만들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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