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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광장] 무기여 잘 있거라

    지난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북쪽에 있는 그라나다 힐스에서 기관총 난사사건이 발생했다.유태계 커뮤니티센터에서 백인 괴한이 난사한 기관총탄에 어린이 3명과 직원 등 5명이 총상을 입었다.지난 7월 인디애나주에서는 인종혐오주의자들의 총기난사로 유학생 유원준군이 목숨을 잃었고,애틀랜타에서는증권에 투자한 10만달러가 물거품이 된데 앙심을 품은 사람의 총기난사로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이틀이 멀다 하고 벌어지는 총기사고는 미국이 겪고 있는 세기말적 고민이아닐 수 없다.특별한 이유도 없이 무고한 생명들이 총구 앞에서 이슬처럼 떨어지고 있는 미국사회의 병리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미국은 청교도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다.그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막강한부와 군사력으로 세계 지배의 꿈을 지켜왔다.개인의 인권과 자유는 최대한보장하면서 국가집단의 이익은 무서우리만큼 철저하게 지키는 미국사람들이지금 자신들이 만들어 팔고 소유하고 있는 총구 앞에서 떨고 있는 것이다. 총기 난사사건이 있을 때마다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것이라든지 미국 언론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총기사고로 숨진 희생자들의 장례식 실황을 보도하는 것 등이 그들의 저린 발을 실감케 한다. 1899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46년동안 미국이 만들어낸 총기는 4,571만1,000정에 달한다.그리고 1946년에서 1996년까지 만들어낸 총기를 합하면 무려 2억1,302만4,000정이 된다.미국인 1인당 한 자루의 총기를 지닌 꼴이다.미국은 총기 보유에 있어서도 세계 제일의 강국인 셈이다. 그러나 1996년 한해동안 총기에 의한 살인이나 자살자가 3만4,040명에 이르렀고,이는 세계 25개국 다른 나라들보다 12배가 넘는 숫자이다.오늘도 미국은 부단히 크고 작은 무기를 만든다.그리고 다양한 명분으로 세계 도처에 판매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총으로 대통령도 죽게 만들고,지상천국으로 믿고 찾아온 소수민족도 희생시키고,자기네 아들 딸조차도 비정한 총구 앞에서 이슬처럼 사라져 가게 하고 있다. 총구의 횡포나 만행은 미국의 경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양과 질의 차이가 있을 뿐 범세계적인 추세이다.총으로 권력도,정권도,목숨도,남의 돈도 빼앗는다.한편에서는 총없는 사회를 만들자,총기판매법을 철폐하자며 피켓을 내거는가 하면,다른 한편에서는 24시간 총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그리고 세계의 무기판매상들이 미국으로 모여들고 있다. 무기란 인간이 구사하는 모든 폭력행위의 물리적 결집체이다.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하는 것만으론 성이 차질 않아 궁리해낸 폭력행위의 극대화인 것이다.권총이나 기관총으로는 모자라 만들어낸 것이 미사일이고 핵무기이다.세계는 국방과 자위라는 미명으로 만들어놓은 핵무기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다.그리고 겉으론 핵제한협정을 이야기하면서 속으론 앞다퉈 핵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폭력은 그 자체로서 악이다.무기 역시 그 자체로서 인간의 삶을 유린하는흉기임에 틀림없다.그럼에도 ‘무기여 잘 있거라’며 버릴 수도 없고,버리지도 못하는 고뇌와 당혹감 속에 빠져 있다.성서는 칼과 창을 두들겨 삽과 괭이를 만드는 날,그날이야말로 세계평화의 날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성서의 교훈 한 구절이 생각난다.‘칼쓰는자 칼로 망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행복과 생명의 안전을 지키고 향유할 권리가 있다.그것이 폭력이나 물리적 힘에 의해 유린당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있어서도 안된다.내가 만드는 그 총구가 언젠가는 내 가슴을 노릴 것이라는 종말적 위기감을 갖는 것이 필요한 시점에 우리 모두는 서 있다. [박종순 충신교회 담임목사]
  • [사고]인기 칼럼 ‘대한광장’ ‘대한시론’ 필진 바뀝니다

    공익정론지 대한매일의 고정칼럼인 ‘대한광장’이 1일부터 올 하반기 새로운 필진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이와 함께 대한매일이 올해 신설한전문가들의 ‘특별기고’도 ‘대한시론’으로 새 출발을 합니다. ‘대한광장’은 각 분야에서 전문성과 개혁 마인드를 갖춘 필자 15명이 다양한 소재와 자유분방한 필치로 월·수·목·토요일에 여러분을 만나게 될것입니다. ‘대한시론’은 필진 8명이 한달에 두 차례씩 당면 현안에 대한 깊이있는분석과 함께 문제점을 비판하고 대안도 아울러 제시할 것입니다.독자 여러분의 더욱 큰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필자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광장 ▲金武坤 동국대 교수(40·신문방송학) ▲金芝娟(57·작가) ▲朴鍾淳 서울 충신교회 담임목사(59) ▲朴宗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무(55·전한신대 교수) ▲朴智東 광주대 교수(60·언론학) ▲方善柱 한림대 객원교수(65·재미사학자) ▲白京男 동국대 교수(58·정치외교학) ▲孫章來 현대정공고문(62·전 말레이시아 대사) ▲圓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55) ▲李東益 신부(44·가톨릭대 교수·윤리신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62·현대사) ▲林玄鎭 서울대 교수(50·사회학) ▲趙璧 미 미시건공대 교수(43·기계공학) ▲崔甲壽 서울대 교수(45·서양사학·진보평론 공동대표) ▲洪思琮 정동극장장(45)?대한시론▲姜京根 숭실대 교수(43·법학) ▲金信福 서울대 행정대학원장(52) ▲金裕南 단국대 교수(60·한국정치학회장) ▲金孝錫 정보통신연구원장(50·경영학) ▲成裕普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56) ▲李萬烈 숙명여대 교수(60·한국사) ▲李晩雨 고려대 교수(45·경영학) ▲黃台淵 동국대 교수(42·정치학)[가나다 순]
  • [특별기고] 삼베치마와 밍크 코트

    성서 기록에 의하면 인간이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은 에덴동산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아담과 이브를 위해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다는 것이 옷에 관한 최초의 기사이다.그러니까 옷이란 우리네처럼 사치품도 아니었고 자기과시의 도구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짚신,나막신,고무신 시대를 거쳐 최신 유행과 멋을 자랑하는 구두의 패션시대에 이르는 기간이 기껏 20년 미만인 것처럼 의상의 발달사 역시 그렇게 긴기간이 아니다. 광목이나 삼베로 만든 치마 저고리 한 벌 입고 아들딸 사남매를 키우는가하면 작업복과 외출복으로 겸용했던 어머니들 세대가 아직도살아 숨쉬고 있다. 의상업의 발달을 터부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그러나 그것이 도를지나쳐 사치와 허영 조장의 촉매구실을 한다면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있다. 프랑스 월드컵이 열리고 있을 때 패션과 유행의 도시로 알려진 파리에 며칠간 머물 기회가 있었다.친구의 안내를 받으며 중심가를 걷다가 유명상표를내건 의상점 곁을 지나게 되었다.진열장에 진열된 옷가지에 매달린 가격표를들여다보며 “저 옷들은 누가 제일 많이 사느냐”고 물었더니 여행업에 종사하는 그 친구는“누구겠나.한국사람들이 주된 고객이라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그런데 그 옷이 바다건너 수입품목에 오르면 값은 날개를 달고 뛰어오른다니 가히 그 값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정장에 넥타이를 메고 집을 나설 때마다 일찍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생각이 떠오르곤 한다.무명바지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논과 밭으로 나가시던아버님,그리고 때묻은 치마폭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시고 코를 훔쳐 주시던어머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동백기름을 바른 머리에 비녀를 꽂고 고무신이 제일이라며 세상을 떠나시는 날까지 가죽신발을 거부하시던 어머님,내가 지금 걸치고 신고 다니는 꼴을 비교하면 송구하기 짝이 없다. 누구나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을 가꾸고 다듬는 것은 죄될 것이 없다.그러나‘나도 8천만원만 있으면 황신혜,김희선이 될수 있다’는 발상이나 미의 접근법은 장승에 분칠하기나 마찬가지다.우리는흔히 개성미라는 말을 쓰곤 한다.그러나 미를 조형하고 상품화하는 시대라면 개성미는 찾기 어렵다. 어떤 젊은이가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아가씨와 교제 끝에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었다.그리고 2년 뒤 딸을 낳았다.남편의 바람은 엄마를 닮은 예쁜 딸이 태어나는 것이었다.그러나 태어난 딸은 엄마를 닮지도,예쁘지도 않았다. 남편은 누구의 딸이냐,누구를 닮았느냐,어떻게 이런 딸이 태어날 수 있느냐는 의심이 일기 시작했고 다툼이 시작됐다.그리고 그 사건은 얼마후 엄마가100% 뜯어 고친 조형미인이었다는 사실로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누가 이 이야기를 꾸며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문제는 우리 시대가 조형미에 길들여지고 성과 미의 상품화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필요 이상의 짙은 화장이나 몸치장,그리고 사치와 허영심리는 일종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견해이다. 의식주 문제는 그 사람이나 그 가정의 생활정도와 비례할 수밖에 없다.가난한 노동자가 값비싼 수입의상이나 호랑이무늬 털코트를 구입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그러나 가진 것이 있고 누릴만한 조건을 갖췄다고 해서 사치와 허영의 극을 치닫는다면 그것은 반사회적인 처신일 수밖에 없다. 사람은 자기를 위해 음식을 먹는다.그러나 축척된 칼로리는 자기만을 위해쓰여지는 것이 아니다.사회공익과 발전을 위해 쓰여질 때 의미도,가치도 있는 것이다.사람은 자기를 위해 옷을 입는다.그러나 옷이란 입는 자와 보는자의 공감대 속에서 가치를 발하는 것이다.다시 말하면,그 사람들이 옷입고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해보는 것이 올바른 복식문화라는 얘기인 것이다. 할리우드의 크리스마스는 눈도 추위도 없다.그러나 가끔 유명하다는 여우들이 밍크 코트를 걸치고 공식모임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그것은 입기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부(富)의 과시 때문이다.그때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솔직하게 말하면 수천만원짜리 밍크 코트를 걸친 사모님들보다삼베치마 입고 사시던 우리네 어머니들이 휠씬 자랑스럽다.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
  • 정동제일교회는 항일운동의 산실

    우리 근대사에서 교회는 기독교전파 이외에도 서구 근대문명 도입과 일제하애국계몽·항일운동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특히 정동제일교회는 구한말 외교 중심가였던 정동(貞洞) 일대를 중심으로 당시 양대 선구세력이었던 기독교세력과 민족세력을 규합,근대 한국 지도자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지난달 30일 정동제일교회(담임 조영준 목사)는 제1회 아펜젤러 학술강좌를열고 정동제일교회 관계자들이 3·1의거와 상해 임시정부수립 등 독립운동에적극 가담한 사실에 대한 학술평가모임을 개최했다. 조영준 담임목사는 주제설교를 통해 이 교회의 최초 한인 담임목사를 역임한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1858∼1927)목사의 충군·애국사상을 소개하면서 “탁사 선생은 한국 최초의 비교종교학자로 토착신학을 통해 한국 감리교의 기초를 닦은 주인공으로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이 땅에 기독교 문화의꽃을 피운 분”이라고 평가했다. 배재학당 교사시절 선교사들과 교분을 쌓은 인연으로 1902년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가 된 탁사는 이 교회 부담임목사로재직중아펜젤러가 순직하자 이 교회의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탁사는 특히 국권상실기에 교회내 엡윗청년회를 중심으로 ‘을사조약’반대운동을전개하였으며 협성회,독립협회,황성기독청년회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또 애국강연과 언론활동으로 동포들의 애국혼을 일깨우기도 했으며 1922년 은퇴 후에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비교종교론과 동양사상을 주로 강의하였다.이밖에 신소설 ‘성산명경(聖山明鏡)’,천주교와 기독교를 최초로 비교분석한 논문 ‘예수·천주 양교변론(兩敎辨論)’ 등을 저술하였다. 탁사에 이어 제5대 담임목사를 지낸 현순(玄楯·1880∼1968)목사,6대 담임목사를 지낸 손정도(孫貞道·1872∼1931)목사 등이 모두 정동제일교회가 배출한 대표적 민족지사.현목사는 3·1의거 당시 목사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 후 상하이에 밀파되어 임시정부 수립에 깊이 관여하였다.임정 수립후 외무·내무차장을 역임한 현목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위원장 서리에 추대돼 외교활동을 펴기도 했다. 해석(海石) 손정도 목사는 3·1의거 참가후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애국지사.2부 발표에서 발제자로 나선 이현희(李炫熙) 성신여대 교수는 ‘손정도 목사와 상해임시정부’라는 논문을 통해 “손목사는평소 혈전으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주땅에 대한민국 독립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분”이라고 말했다.이교수는 1918년 손목사가 신병을 이유로 정동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사임한 것은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현목사,의친왕 이강공(李堈公)과 함께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다고 밝혔다.최근 발굴된 ‘현순 자사(玄楯 自史)’에 따르면 당시 손목사는 입정(立丁),현목사는 석정(石丁),최창식(崔昌植)은 운정(雲丁)이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는 이강공을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수립하면서 각자 역할분담을위해 사용했다는 것.즉 立丁(손정도)은 ‘丁’(고종의 밀명)을 立(세운다)한다는 뜻으로 그 바탕은 石丁(현순)이,심부름은 雲丁(최창식)의 몫이었다는것이 이교수의 해독법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특별기고-가정과 국가

    ‘한 집안에 인(仁)이 있으면 그 나라에 인(仁)이 일어난다.한 집안에 물러서 양보하는 일이 있으면 그 나라 전체가 양보의 정신이 넘치게 된다.백성을 다스리고 덕을 미쳐야 할 군주가 자기 이익만 추구한다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분쟁이 끝나지 않는다.’(一家仁 一國興仁,一家讓 一國興讓,一人貪戾 一國作亂) 이 고전적 교훈은 가정과 국가의 관계,그리고 가정과 지도자의 인격형성의관계를 극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가정을 만드셨다.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이 홀로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긴 창조주께서 동거할 이브를 창조하여 가정을 이루도록 했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가정은 그 구성원인 가족들의 만남이 있는 곳이며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실현되는 곳이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은 외부 세계와 사회적 접촉을 시작하기 전가정에서 타인과의 교제를 시작하는가 하면 인격 형성의 틀을 잡아간다.그리고 가정에서 받은 교육과 사회적응력을 따라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고 사회 일원으로서 삶을영위해 나간다.그러니까 가정교육이나 분위기가 허술했던 사람들은 사회 적응도가 낮게 되고 가정교육이나 인격형성 훈련이 제대로 된 사람들은 사회 적응도나 기여도가 높게 마련이다. 그것은 곧 집안에 인(仁)이 넘치면 국가에도 인(仁)이 흥하게 된다는 논리와 맞물린다.그리고 양보와 덕을 배우지 못하고 익히지 못한 사람이 어느날갑자기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는 덕을 베풀지 못하고 나라를 혼란에빠뜨린다는 논리에 상부한다. 이준경은 조선왕조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사람이다.그의 어머니는 이수정의 부인인 신씨였다.이준경은 어머니인 신씨에게서 다섯 살 때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갑자사화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시골로 귀양을 갔다가 연산군이퇴위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 귀양에서 풀려났다.그 때 그의 나이 아홉살이었다.신씨는 준경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자 친정으로 내려갔다.신씨는 거기서 준경에게 엄한 교육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준 교훈 한 구절.‘옛말에 이르기를 과부의 아들은 소견이없다고 했다.너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나에게 의지하여 배우며 살아왔다.만일 네가 작은 행실이라도 잘못하면 세인에게 버림받을 것이니 아무쪼록 학업에 힘써 집안의 가업을 추락시키지 말도록 하여라’.이준경은 훗날 학문과 덕을 쌓아 영의정을 지냈다. 현모 신씨의 가정교육이 훌륭한 인재를 키워낸 옛 이야기이다.IMF사태 이후 우리나라의 가정들은 보다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경제활동과 함께 가정의 대들보 노릇을 하던 가장들이 ‘머리숙인 남자’로 전락하면서,그리고 경제 폭풍으로 인한 가정붕괴와 가족해체 현상이 사회 전반으로 번지면서 가정의 기존 가치와 의미가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가족관계나 가정의 존재 의미가 경제보다 더 소중함에도 경제적 조건 때문에 가족 해체의 비극이연달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정이 흔들리면 국가가 흔들린다.가정 도덕이 붕괴되면 국가질서가 붕괴된다.그래서 가정은 국가의 모판이며 사회구성의 원점이 된다.그런 면에서 우리는 하루빨리 가정의 원상을 회복해야 한다.전투적 가정분위기를 이해와 사랑이 넘치는 가정으로 바꿔야 한다.비록 호랑이는 육식동물이지만 제 새끼를 먹지 않는다(虎毒不喫兒)는 말이 있다.든든한 가정의 기초는 사랑과 이해,협력과 인내이다. 가정이란 지구상 유일한 혈연공동체이며 더불어 살아야 하는 작은 국가이다.가정의 평화는 곧 국가의 평화를 낳고 사회를 안정과 평화의 세계로 이끌어간다.가정의 평화는 서로의 책임을 공유할 때 성립된다.무책임 아래 평화나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부모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할 때,자녀는 자녀로서책임을 다했을 때 이상적 가정의 구현은 가능케 된다.우리 모두 책임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
  • [기고] 사이비 異端을 경계하며

    사이비 이단단체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이는 기독교계 자체의 문제는 물론 이제 사회,국가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사이비 이단 문제의 본질은 전통 기독교와 교리적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사회적 윤리적으로 잘못되어 간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대체로 현대 사이비·이단들은 비윤리적이요,반사회적이라는 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그렇게 되는 여러가지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를 든다면 바로 ‘교주 신격화’와 ‘시한부종말론’ 사상이라 볼 수 있다. ‘교주 신격화’는 교주는 일반인과 달리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아,그야말로 신이 되든지 신격화하는 모든 현상을 말한다.이것이 사이비·이단단체가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상적 배경을 제공해준다.교주를 신(神)과 같이 숭배하는 신도들에게 있어 아무리 교주가 비인격적,비이성적,비상식적 말이나 행동을 해도 그 교주를 비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됨으로 불가능한 것이 된다. 최근 문제되고 있는 ‘이재록씨(만민중앙교회)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않다.소위 ‘나는 죄가 없는 사람이다’,‘나는 물 위를 걷는 것외에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룬 사람이다’,‘나는 하나님과 하나이다’,‘나는 죄가 없는 사람이기에 해와 달에 나타나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는 등의 비성경적,비상식적인 설교를 이용해 자신을 신격화 시켜온 것이 이번 사태의 근본이유라고 본다. 결국 이씨는 자신의 신격화사상을 토대로 도박,음주등의 비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만 것이다.이번에 MBC를 점거,방송 중단사태를 야기하고 난동을 부리는 등 도저히 정상적인 신앙인으로는 할 수 없는일이 발생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금년 들어 또다시 불거져 나오기 시작하는 ‘시한부종말론’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 ‘시한부 종말론’은 사회적으로 혼란스런 상황을 직면하면 그야말로 극에 달하는 것이다.즉 세기말,기근,전쟁,또는 사회혼란 등의 상황과 만났을 때 더욱 기승을 부린다.그래서 전쟁후 메시아가 범람했는데 이는 이와같은 이치이며,국가가경제적 파탄에 빠질 때 사교들이 더욱 많아지는 것도같은 현상이다. 지난 92년 10월28일 휴거사건도 그 당시 걸프전을 통해 더 불이 붙었다.마찬가지로 최근에는 나토의 유고공습같은 전쟁이 터짐으로써 더욱 시한부 종말론을 부추기고 있다고 본다.이처럼 교주의 신격화와 시한부 종말론이 만나면 사이비·이단사상은 극에 달하게 되고 만다.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것이없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오래 전부터 사이비·이단세력에 의해 심대한 피해를 입어 왔다.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87년의 구원파 오대양 집단변사사건,92년 10월28일시한부종말론 휴거소동,93년 종교연구가 탁명환씨 피살사건과 영생교사건,97년 아가동산 사건 등 열거하기조차 끔찍한 일들이 이들 사이비·이단 세력들에 의해 발생했다.이로 인한 아픔이 아직도 제대로 치료되지 않고 있을 정도다. 이에 대하여,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교회가 교회답고,교인이 더욱 교인다워야 할 것이다.사이비·이단은 ‘기독교같은’ 것이지 기독교가 아니다. 사이비·이단단체로 인해서 기독교 자체가매도당해서는 안될 일이다.오히려 사이비·이단을 척결하는데 기독교와 사회가 힘을 합쳐야 할 때다. 최삼경[월간'교회와 신앙'발행인,빛과 소금교회 담임목사]
  • 침례교 선교 110돌 오늘 화합·전진대회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장 이봉수 광천침례교회 담임목사)가 한국선교 110주년을 맞아 5일 오후 2시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침례교회 110주년 대회’를 개최한다. 이날 대회에는 10만여명의 전국 침례교인들이 모여 새 천년을 앞두고 화합과 전진을 다짐하는 한편 어려운 이웃과 나눔을 실천할 계획이다.특히 올해대회는 밀레니엄시대를 앞두고 새로운 교단 발전과 교회상을 정립하기 위해40여년동안 사용해왔던 서울 동자동 총회 사무실 시대를 마감하고 구로구 오류동에 새 건물(대지 1,000평,건평 1,000평)을 마련한데 대한 감사의 축제를 겸해서 열린다. 대회준비위원회(위원장 최보기·한명국목사)는 특히 행사일이 어린이날인것을 감안,온 가족이 함께 참여해 즐기는 대회가 될수 있도록 텔레토비와 동물인형이 등장하는 놀이동산,얼굴 페인팅,브레이크 댄스한마당,개그맨 특별공연,청소년 사진콘테스트 등 흥겨운 식전행사를 마련해놓고 있다.또 본행사에서도 축구묘기,태권도선교단의 시범,한스밴드 공연 등을 펼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이날 모인특별헌금을 북한 비료보내기 운동기금과 소년소녀 가장 장학금에 쓸 예정이며 대회가 열리는 동안 헌혈 및 장기기증 운동도 펼친다. 침례교는 1897년 캐나다 출신 말콤 펜윅 선교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래된개신교의 한 교파로 특히 민주적인 교회운영을 강조하고 있다.2,000여년전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침례(浸禮:온 몸에 물을 끼얹어 죄를 씻는 의식)를 유지하는 교단으로 전세계적으로 1억명 이상의 신자가 있으며,한국에는 2,245개 교회에 3,000여명의 목사,65만명 가량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날 대회에는 이봉수 총회장을 비롯해 김종필 국무총리,고건 서울시장,박세직 2002년 월드컵 조직위원장,김영진 국가조찬기도회장,길자연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회장,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헤리 먼로 아시아침례교연맹 총재 등이 참석할 예정이며 50년대초 한국 선교에 헌신한 초기 선교사 부부 20여명도 초청한다. 박찬기자
  • [특별기고] 질서 그리고 민주주의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름하는 기준은 여러가지일 수 있다.예를 들면 경제력,군사력,환경관리,지적 수준,정보능력 등을 들 수 있다.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그것은 질서의식이다.다시 말하면 그 나라 국민이 어느정도 정해진 기존 질서를 지키느냐로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다. 앨빈 토플러가 쓴 ‘제3의 파도’나 ‘권력이동’에서 거론되고 있는 새로운 천년 시대의 양태는 한 마디로 기존의 전통과 가치,질서와 형식이 깡그리 무너지는 일탈의 세계가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낡은 질서든 새로운 질서든 그 사회를 지탱하는 축은 질서라는 사실을 외면하면 안된다.단 질서란 그것이 정치질서든 사회질서든 정의에 모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헬라 사람들은 질서를 탁시스(taxis)라고 한다.그 뜻은 ‘정연한 정돈’ ‘고정된 계승’이라는 것이다.질서란 그 사회를 정돈시키는 기준이며 아름답고 바람직한 전통을 계승시켜 나가는 힘이라는 뜻이 된다.그렇게 볼 때 기존 틀을 깨는 혁명이나 쿠데타는 바람직한 정치형태가 못된다.얼마전 미국 시카고 교외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자동차 왕래가 그다지많지 않은 지방도로를 친구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시원하게 뚫린 시골길을달리는 쾌감은 돈을 주고라도 살 만한 것이었다.달리던 차가 네거리에 멈춰섰다.30초 정도 서 있을 무렵 오른쪽에서 다른 차 한 대가 달려오다가 역시멈춰 섰다.그곳에는 신호등도 없었고 교통순경도 없었다.‘우선멈춤’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있을 뿐이었다.네거리에 도착한 차들은 일단 멈춰서고,먼저 온 차는 먼저 건너가고,나중에 온 차는 나중에 건너갔다.그런데 그같은 평범한 질서가 그토록 부러웠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앞지르고,끼어들고,소리지르고,삿대질하고,멱살잡고 싸우고,그 뿐인가 경적소리에 호루라기 소리까지 어우러지는 우리네 서울은 시끄럽고 울화통이 치민다. 작은 질서,그것은 민주주의의 뿌리다.솔직하게 말하면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들,아무 데나 가래침을 내뱉는 사람들,자기주머니는 텅텅 비워둔 채 길바닥에 휴지를 내버리는 사람들,자기가 씹던 껌을 그대로 아무 데나 내뱉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저질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 의식 속에 자신을 방임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돈벌어 벼락부자가 되면 ‘졸부열전’을 엮어나가기 마련이고,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을 잘 만나 정치가가 되면 정치는 파행정국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출근시간에 쫓긴 아버지가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태우고 차를 몰고 있었다.빨간 신호등이 켜졌지만 아버지는 계속 차를 몰고 있었다. “아빠,빨간 불인데 달리면 어떡해” “인마,바쁠 땐 그럴 수 있는 거야” 학교 앞에 아들을 내려준 아버지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그 아들이 빨간 불이 켜있는 건널목을 건너가고 있지 않은가.놀란 아버지는 소리쳤다. “인마,빨간 불이잖아” “아빠,바쁠 땐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이것은 평범한 듯한 이야기이면서도 결코 평범한 이야기도,웃어 넘겨서도안 되는 이야기다.이것은 무서운 모방이며 소름끼치는 유전이다.우리 사회는 그동안 와전되고 오도된 질서에 의해 병들었으며 아직도 치유의 길을 찾지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병든 질서의 모판에서 건전한 민주주의의 발아나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혹시 자란다 해도 그것은 기형이고 불량성이기 때문에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성서가 말하는 천지창조의 특징은 한마디로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빛과 해와 달과 별,그리고 하늘과 땅….그 순서를 보면 과학적이고 기하학적임을 알 수 있다.그리고 섭리와 다스림 역시 질서적임을 알 수 있다.작은 질서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작은 질서 속에서 민족공동체의 정체성을 발견하고지키는 시민정신,그날에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 손으로 그토록 열망했던 민주사회,민주국가,민주정치의 꿈을 실현했노라고 소리칠 수 있을 것이다./박종순 총신교회 담임목사
  • [특별기고]천 냥 빚과 말 한마디

    “말,그것으로 인하여 죽은 이를 무덤에서 불러내고 산 자를 묻을 수도 있다.말,그것으로 인하여 소인을 거인으로 만들고 거인을 철저하게 두드려 없앨 수도 있다”이것은 하이네가 한 말이다. 어느 날 가위와 톱과 혀가 서로 입싸움을 벌이고 있었다.먼저 가위가 입을열었다.“나는 어떤 천이라도 날카로운 내 이빨로 끊어낼 수 있다.조금도 흠을 남기지 않고서 말이다”그러자 톱이 말했다.“내 이빨은 장작을 썰어낼수 있고,나무토막도 거뜬히 베어낼 수 있다” 그러자 혀가 소리쳤다 “너희가 아무리 으시대 봤자 소용없다.내가 가진 위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나는 남의 명예나 평판을 단번에 반쪽으로 쪼갤수 있다.친구 사이에 끼어들어 의리를 갈라 놓을 수 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인간사와 가정일에 파고들어 짓이겨 놓을 수도 있다.나는 닳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짓씹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그러자 가위와 톱은 입을다물고 말았다는 옛날 얘기 한 토막. 우리 사회는 언어폭력으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로 가득하다.신은 인간을창조하실 때 금수가 가질 수 없는 두 가지 기능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은 신의 품성을 닮은 이미지와 언어이다.언어는 의사소통 수단이며 신을 경배하는 신앙수단이었다.그리고 훨씬 뒤 인간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언어를 손으로 표기하는 문자를 발명했고 그것은 현재 정보통신의 시발점이 되었다.그러니까 언어나 문자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보다 더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자는 데 그 뜻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언어와 문자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인간 살상무기로 오용되는가 하면 남용되고 있다.최근 사이버 공간에서의 언어폭력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가 하면 사이버 스토킹까지 등장하고 있는데도 제도적 장치는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다. 언어폭력은 독버섯처럼 뻗어나는가 하면 독가스처럼 계층도 없이 스며들고있다.부부가 주고받는 일상대화,감정이 치솟았을 때 주고받는 대화의 수위는 어떤가.그리고 그 틈새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받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언어순화는 가정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정치권의 책임도 만만치 않다.국회의원들의 상대당 깎아내리기와 상대당 지도자 흠집내기에 동원되는 언어폭력을 지켜보노라면 그 양식이 의심스럽다.솔직하게 말하면 우리 아이들이 뉴스를 볼까 겁난다. 언어폭력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영상과 전파,그리고 인쇄를 포함한 모든 매체의 책임은 더 중하고 크다.대문짝만한 활자와 지면으로 개인이나 공동체를 파멸시키다가 그것이 오보로 밝혀졌을 때 정정이나 사과보도는 하단석줄로 얼버무리는 인쇄 매체들,한 사람의 인격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대하드라마로 엮어 짓밟은 후 정정보도는 토막소식으로 다루는 영상 매체들. 그뿐인가,건전문화 창달과 국민계도의 첨병임을 자처하는 대중매체들이 소비와 향락문화를 부추긴다면 이것이야말로 위험수위를 넘어선 폭력이 아닐수없다. 1930년대 미국이 경제공황으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미국국민들은 루스벨트대통령의 라디오연설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이유는 국민들에게 위로와 비전을 제시하는 대국민 연설을 했기 때문이었다. 인간만이 자신의 욕망과 행동,그리고 언어와 사상을 조절할 수있는 힘을가지고 있다.절제되지 않는 언어는 살상무기이며,조절되지 않는 행동은 활화산과 같아서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될지 모른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네 조상들의 금언은 전원을 가로질러 풍겨오는 꽃내음처럼 소박하고 싱그럽다.언어폭력일랑 몰아내고 우리동네를 꽃마을로 만들자.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
  • [부활절 특집]“예수의 부활생명 나눠 민족위기 극복”

    4일은 부활절이다.부활절은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을 축하하는 날로 성탄절과 함께 기독교가 가장 중히 여기는 축일이다.부활절을 맞아 국제대학생선교회(C.C.C) 원로 디렉터인 김준곤(金俊坤·75)목사로 부터 부활절의 의미와 부활절을 맞는자세 등을 들어보았다. ▒부활이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인데 요즘 일반인에게는 물론 일부기독교인조차도 이를 관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없지 않은 것같습니다.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공적이면서도 증인과 증거를 내세울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믿는 자들은 결코 그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특히 예수님의 부활은 4가지 진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4가지 증명이란? 먼저 진리가 거짓에 승리한 것을 증명합니다.그리고 선이 악에 승리한 것을 입증하고 있고,사랑이 증오를 극복하고 승리한 것을 입증합니다.마지막으로 생명이 죽음에 승리한 것을증거하고 있습니다.때문에 부활을 단순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특히 IMF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나누는 일입니다.이 부활생명이 우리 국민들 마음속에 역사할 때 우리 민족이 처한 총체적위기는 극복될 것입니다. ▒부활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부활은 더 이상 기독교인들에게만 의미있는 일이 아닙니다.십자가에 매달렸던 예수께서 다시 부활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해주려는 뜻이었습니다.사랑과 화해,희생,봉사,나눔,섬김의 메시지이지요.그리고 절망에서 소망을 볼수 있도록 해줬습니다.오늘날 세계가 봉착한 인종문제나 종교갈등,도덕적 타락은 물론 우리의 남북문제나 지역감정,노사,빈부,세대간,계층간 갈등문제 등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문제들은 이같은 예수님의 부활의 메시지속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가난하고 고통받는,소외된 자들이 부활의 축복을 받을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굶주리는 북녘동포들을 도와주고 우리사회에 만연된 문제를 풀기 위해 특히 믿는 자들이 불씨가 돼 이웃과 고통을 나누는 운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또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분위기로 바꿔가야 할 것입니다.이를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자기 자신과의 관계,타인과의 관계,자연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해야 합니다.그렇게 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처한 신앙문제나 도덕적 타락,자연환경의 파괴문제에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절을 맞아서 특별히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은? 우리는 현재 남북통일의 강가,21세기의 강가에 서 있습니다.우리는 새로운천년을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맞이해서는 안됩니다.우리 사회는 물론 세계가 처한 위기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믿는 자들이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십자가의 신앙과 부활의 능력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21세기를후손들에게 존경받는 유산으로 남겨주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죠. 부활절을 맞아 예수님의 부활 메시지를 사랑과 화해와 도덕의 부활로 맞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김목사는 올해 초 3일동안 여의도에서 금식기도회를 개최,여기서 모아진 1억원의 헌금을 결식아동돕기에 쓰는 등 몸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오고 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사우스웨스턴 침례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80년 복음화성회 대회장,84년 세계교회기도성회 준비위원장을 맡은 바 있으며 현재 기독교21세기운동 한국대표,한국대학생선교회 총재를 맡고 있다.저서로 ‘예수칼럼’ ‘영원한 생명언어’ ‘김준곤 문설집’(전6권)등이 있다. 朴燦 - 부활절 교리와 풍습 ‘부활’은 기독교의 중심 교리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지 3일째 되는 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며 그리스도가 이렇게 죽음을 정복함으로써 모든 신자들이 ‘죄와 죽음·악마’를 물리친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부활절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성탄절과 함께 그리스도교회의주요축일이다.영어이름 ‘Easter’의 기원은 정확히 알수 없으나 8세기 앵글로색슨족의 사제인 비드는 앵글로색슨족이 숭배하는 봄의 여신 ‘에오스터(Eostre)’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했다. 매년 날짜가 바뀌는 절기가 실린 교회력 전체가 부활절 날짜에 따르고 있어 한 해 예배를 위한 전례력도 부활절을 중심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부활절은그리스도교에서 1년중 가장 중심이 되는 절기이다. ▒부활절의 날짜 서방 그리스도인들은 춘분(3월21일경) 무렵이나 춘분 다음만월(滿月 부활절 달)이 지난 후 첫번째 일요일을 부활절로 기념한다.그러나 만월이 일요일인 경우 다음 일요일이 부활절이 된다.따라서 부활절은 대개3월 22일과 4월 25일 사이가 된다. 부활절 날짜를 산출하는 방법은 8세기까지 기독교 여러 분파에서 많은 논쟁을 거친 끝에 결정됐다.그러나 동방정교회에서는 다른 계산법을 따라 서방교회와 일치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1주나 4주,5주 후에 해당된다. ▒종교의식 부활절 전야예배는 2세기경 기독교 예배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할무렵 주일성찬에 앞서 성서를 읽고 ‘시편’을 노래하는 주말 전야예배에서비롯됐다.예배순서는 ‘새로운 불의 강복’ ‘부활절 촛불점화’ ‘성구봉독’ ‘세례반 강복’ ‘세례’ ‘부활절 미사’ 등으로 이루어진다. 새벽예배는 주로 개신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부활절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부활의 영광’을 보여준다는 믿음에서 시작됐다.미국 펜실베이니아베들레헴에서 시작된 새벽예배는 이제는 미국 전역으로 퍼져 초교파적으로열리는데 TV와 라디오로 중계될 정도로 관심이 높다. ▒부활절의 관습 유럽인들의 고대의식과 상징 표현에서 전래된 것이 많지만그중에서도 새 생명과 부활을 상징하는 ‘계란나누기’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관습이다.‘계란나누기’는 십자군전쟁에서 유래했다.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십자군부대로 출정한 남편을 가진 한 여인이 고향을 떠나 방황하던중 자신을 정착하게 해준 마을 이웃들의 따뜻한 정에 대한 감사표시로 계란을 삶아 줬는데 바로 그 날이 부활절 날이었다.그녀는 그 계란으로 전쟁에서 돌아와 자신을 찾아 헤매던 남편을 만나게 됐는데이후 매년 부활절이면 부부는 계란에 아름다운 그림과 글씨를 써서 사람들에게 선물했고이것이 부활절에 계란을 나누는 유래가 됐다고 한다. 朴燦- 부활절 한국에 정착하기까지 1885년 부활절 아침,외국선교사들이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한국 개신교회는 일제하에서도 교파별,지역별 연합예배를 갖고 ‘민족의 부활’을위해 기도했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부활절 연합예배는 1947년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서울남산에서 1만5,000명의 기독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진 것이 처음이다.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고통받는 민중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도록 역할을 했으나 4.19 혁명을 거치면서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1962년부터 10년동안은 정치적 상황과 연합예배에 대한 개신교내 교파간 입장 차이로 분열된 가운데 부활절 연합예배를 갖기도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가맹교단과 비가맹교단이 각각 남산과 덕수궁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던 것. 70년대 유신체체하에서도 분열과 갈등을 겪었다.그러나 75년부터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보수와 진보교단이 연합하여 예배를 갖다 96년부터는 장충체육관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갖고 있다. 한편 지난 90년부터는 남북교회간에도 부활절 축하 메시지를 나누어 오고 있다. 朴燦- 개신교 오늘 138개지역 연합예배 4일은 기독교 최대의 경축일인 부활절이다.이날은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난 날.20세기의마지막 부활절을 맞아 개신교 가톨릭 성공회 등 기독교계 교단은 부활절 연합예배,예수부활 대축일 미사 등을 통해 부활의 기쁨과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에 담긴 참뜻을 새겼다. 개신교는 오전 5시30분 서울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전국 138개 지역에서 예년과 같이 연합예배를 올렸다.부활절 연합예배는 수많은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어 있는 개신교계가 이를 초월해 함께 하는 유일한 행사.올해는 예장통합과 합동,감리교 등을 비롯한 30여개 주요 교단들이 참여했다. 장충체육관에서는 이날 0시부터 철야기도회에 이어 오전 4시30분 목회자와신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앙간증과 찬양,기도회로 시작,5시30분부터 1만여명의 신자들이 함께 한 가운데연합예배가 거행됐다. 길자연(예장합동 총회장·왕성교회 당회장)부활절 연합예배 대회장의 사회로 시작된 연합예배는 강만원 기장 총회장의 기도와 김삼환 명성교회 담임목사의 설교,이경운 예장대신 총회장,김재룡 예성 총회장의 축도 순으로 이어졌다. 연합예배위원회는 이에 앞서 지난 3월27일부터 일주일동안 ‘남산 걷기대회’‘찬양 대축제’‘민족화합을 위한 한국교회 지도자 회개기도회’‘십자가 대행진’등 갖가지 축하행사를 펼쳐 부활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가톨릭도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각 교구별로 4일 정오부터 오후 1시30분까지 ‘예수부활 대축일 미사’를 올린다.가톨릭은 부활절 일주일전부터 시작되는 성주간(Holy Week)의 전례에 따라 성(聖)목요일 성유축성 미사,성금요일주님 수난예식에 이어 토요일 오후 8시부터 9시30분까지 성토요일 부활 성야미사를 드렸다. 성공회도 4일 오전 11시 서울 정동의 대한성공회 대성당을 비롯한 전국의 150개 성당에서 ‘부활 대미사’를 올린다.성공회는 고난주간(성주간)동안 매일 예식을 올렸다.월화 수요일은 미사와 함께 기도,신앙강화에 힘쓰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성금요일에는 수난예식,토요일 오후 7시 중심예식인 부활밤 예절을 드렸다. 한편 기독교 신자들은 사순절에서 부활절까지 40여일동안 매일 정해진 시간 성경을 읽으며 자기근신의 시간,기도,묵상의 시간을 가졌다.기간중 특별금식과 단식을 하면서 이를 통해 모아진 헌금은 불우이웃을 위해 쓴다.성공회도 사순절 기간동안 금식을 권장하면서 신자들에게 미리 주어진 극기헌금함에 모인 동전등 헌금을 불우이웃과 북한동포돕기에 쓸 계획인데 지난해는 동전으로만 4,000여만원을 모았다고 밝혔다. 朴燦
  • [특별기고] 사람인가 제도인가

    늘 다니는 길목에 네 평 남짓 되는 구멍가게가 있다.오래된 건물이어서 허름하기 짝이 없는 데다 6개월이 멀다 싶게 업종과 주인이 바뀌곤 한다.언젠가 제법 화려한 실내장식으로 꾸민 양장점이 들어섰다.진열대며 조명이 건물에 걸맞지 않게 화려했고 전시된 의상들도 고가의 것들이었다.집 부근 가게였던 탓으로 하루에도 여러차례 가게 곁을 지나야 했고 주인과 업종이 바뀔때마다 자연스레 가게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가게는 문이 열려 있는 시간보다 닫혀 있는 시간이 많았고 주인이 지켜 앉아있는 시간보다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더 많았다.곁에 있는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장사를 하고 있는 오전 11시에도 문이 닫혀 있는가 하면 오후 4시에도 문이 닫혀 있기 일쑤였다.가게 안에 사람이 있어 들여다보면 젊은 여자들이 앉아 화투판을 벌이고 있을 때가 많다.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주인 여자는 가게에 있기보다는 에어로빅센터와 골프장에 있는 시간이 많다는것이다. 남의 일에 시시껄렁한 관심을 기울인다고 핀잔하겠지만 문제는 6개월 만에문을닫았다는 점이다.그리고 한달쯤 지났을 무렵 다른 사람이 구멍가게를열었다.새벽 5시에 문을 열고 자정에 문을 닫기 때문에 새로 생긴 그 가게는 하루종일 문이 열려 있었다.주인 부부가 직접 나서서 가게를 운영하는데 언제 밥을 먹는지 가게를 떠나는 법이 없다.7년이 지난 지금 아파트를 샀다는말도 들리고 낡은 건물이지만 그 가게를 샀다는 말도 들린다. 이 소박한 가게 관찰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같은 위치에,같은 건물인데도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되고 주변 여론이 달라진다.이것은 구멍가게 이야기이기보다는 국가경영에 관한 이야기이며 인생철학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우리는 그동안 성공사회와 바람직한 정치실현을 위해 부단한제도개혁을 되풀이했다.그러나 제도운영의 주체인 사람이 변하지 않는 한 개선이나 개혁의 본질은 꽃피기 어렵다. 발명왕 에디슨을 부러워한 그의 친구가 어느날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다.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려는 아들이었다.“내 아들일세.앞으로 이 녀석이 사회활동을 할 때 꼭 기억해야 될 말을 한마디 해주게나.” 그러자 에디슨은 그 젊은이에게 “결코 시계를 보지 말게.이것이 젊은이에게 주고픈 나의 충고일세”라고 말했다. 그간 우리는 힘든 일은 마다하고 쉬운 일만 찾아다녔다.일 자체는 소홀히했고 그 결과만 탐닉했다.출퇴근 시간이 무서우리만치 정확했고 반대급부에민감했다.일하기보다는 놀기에 힘썼고 벌기보다는 쓰기를 즐겼다.그러다 빚쟁이가 됐고 환란으로 인한 국치를 겪게 되었다.따져 보면 예방과 대응도 가능했던 인재(人災)였음에도 무비유환(無備有患)의 질곡에 떨어졌다. 한마디로 제도적 장치나 경제부처의 부재로 인한 재앙이 아니라 통찰력과경영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었다.제도가 사람을만드는 경우가 있다.교육제도라든가 사회보장제도 같은 것들이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고 사람답게 사는 여건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덜 된 사람들이 제도를 손질하거나 만들면 그 제도는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흉기가 될 수 있다.1807년 독불전쟁에서 독일이 패했다.당시 피히테는 14회에 걸친 강연을 통해 독일 국민의 이기심과 도덕적 타락을 경고했다. 그후 1871년에 있었던 독불전쟁에서는 독일이 이겼다.전쟁을 승리로 이끈 개선장군의 일성(一聲)은 ‘조국의 승리는 나의 공로가 아니다.독일 초등학교선생님들의 교육승리였다’라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값비싼 새 집이라도 관리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맡기면 헌 집을 만들고 만다.그러나 낡고 무너져 내리는 헌 집이라도 관리능력이 풍부한 사람에게 맡기면 새 집을 만들어낸다.사람인가,제도인가.그 대답은 사람이다. 박종순 충신교회 담임목사
  • 세속화 일부교회 면세 악용 영리사업

    우리나라의 종교인구는 95년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2,259만명에 이른다.종교인구의 확대 및 ‘종교경제’ 규모의 확대에 따라 일반 국민사이에서는 종교 단체에 대한 과세문제가 조세형평 차원에서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으나 세무당국은 곤혹해 할 뿐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대한 ‘종교 경제’의 규모를 이용,많은 종교기관들이 사회복지사업,실직자 지원,북한 기아 어린이 돕기 등 공공성이 높은 ‘사회구원’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그러나 대형 개신교회 등 일부 극소수 기관들은 ‘영혼 구제’라는 종교의 근본적 책무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게 상업활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영리 사업을 확장함으로써 종교기관의 면세 제도를 재검토해야 할 단계에 온 것 아니냐는 지적을 낳고 있다. 특히 일부 호화스런 대형 교회건물이나 목사들의 고급 승용차,교회의 요란한 호텔행사 등 일부 개신교 교회와 교역자들의 과소비 등 성직 본연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파행이 새삼스럽지 않아 어떤 식으로든 교회내부의 자성이 있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성직자와 종교 단체들의 세금 납부에 대해서는 사회 일반과 개신교 내부에 첨예한 견해차가 있다.교계에서 지배적인 반대주장은 성직자의 봉급이 사회교화와 복지사업에 쓰이는 만큼 일반인들의 수입과는 차별돼야 한다는 것.반면 찬성쪽은 어찌됐든 소득의 형태로 지급되는 수입은 사회형평상 똑같이 과세돼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개신교계에서 과세 대상이 되는 목사 전도사 등 교역자들은 10%내외로 추정되고 있다.농어촌 영세교회의 교역자들의 경우 월급이 대부분 1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도시 대형교회의 경우 교역자들의 수입이 월평균 200만원을 웃돌며별도로 지급되는 판공비 액수가 어지간한 대기업체 수준 이상이라는 소문이지배적인 실정에서 사회 일반의 납세주장을 비켜 나가기 어렵다. 국내 개신교계의 연간 총예산은 4조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교회수 4만여개에,신도수도 1,000만명에 이를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이들 신도들의 헌금으로 구성되는 교역자들의 봉급은 대부분 생활비,도서비,교육비,봉사비 등 10여개 명목으로 지급된다.그러나 문제는 생활비의 비중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대도시 교회의 경우 유급 교역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 사실상 교역자 생활비 비중이 교회예산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곳이 적지 않다.당연히 교회가치중해야 할 방향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현재 국내 세법상 교역자들의 개인소득에 과세할 근거는 전무한 실정.단체의 경우 과세가 되지만 유예기간과 비과세 범위 등 일반에 비해 혜택이 많은 편이다.부동산 취득세 등록세는 일반과는 달리 3년간 유예받고 있고 토지초과이득세 유예기간도 3년간 설정돼있다.법인 처분재산 특별부가세도 종전엔고유목적에 5년이상 사용시 비과세였으나 ‘사용기간 3년 이상’으로 단축됐다. 성직자의 사택에 대한 취득세 및 등록세도 전에는 담임목사 사택에 대해서만 비과세였으나 지금은 모두가 비과세로 바뀌었고 대도시내 부동산등기시등록세도 모두 비과세다.임야 토지초과이득세도 법인소유 고유목적에 한하던 것이 개별교회 소유의 종교시설 주변임야로 넓혀졌다.특히 종교단체 금융거래에서는 실명거래가 불가능했으나 이젠 교회별로 번호가 부여돼 법인격이인정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개신교쪽은 이같은 조치가 미흡하다는 입장.‘사찰보호법’ ‘문화재관리법’으로 재산을 보호받고 있는 불교와 달리 보호받지 못한 상태에서세금을 부과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교회의 대형화와 세속화는 교계에서도 인정하고 있으며 일반인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는 고질적인 부조리이다.경제성장에 편승한 교회의 물량주의가 신자 수 늘리기 경쟁과 교회당 난립으로 이어졌고 교회건물 증축과 토지·임야구입,주차장확보 등으로 나타났다.이에 따라 항간에서는 일부 교회의 부동산 투기 등 불법영업행위에 대한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 왔던 것이사실이다. 이에 대해 교계는 “사실상 교회 재정은 투명할 수밖에 없다”면서 “부동산 투기 의혹도 교회건물을 짓기 위해 부지확보를 해놓은 뒤 건축비 충당이안돼 유휴지로 방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주장한다.국세청이나 문화관광부 등 관련부서에서도 이같은 부분에 대한오해는 많이 불식됐다는 게 교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세습교회나 문서선교라는 명목으로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는 교회 등이 주장하는 교회재정 운영의 합당함과 투명성 주장이 일반인들에게 얼마만큼 납득될 지는 미지수다.특히 해외선교를 명분으로 한 목사들의 잦은 해외나들이와 엄청난 액수의 돈이 뿌려지는 교단 총회장선거 등 목사들의 교권운동이 일상적인 현상이라고 할 때 일반인들의 교계에 대한 비판이 비단 납세문제에만 국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4회)

    ◆종교계 '민주운동 거목' 박형규 목사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교회의 실천운동을 벌이면서 숱한 옥고를 치렀던 朴炯圭목사(76).유신체제 아래서의 대표적 반체제 인사로 꼽히며 민주화운동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재야 원로다. 박목사는도시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운동으로부터 시작해 남산 야외음악당사건과 민청학련 사건,그리고 교회탄압에 맞선 노상예배 등 굵직굵직한 사건의주역으로 92년 은퇴때까지 가시밭길을 걸었던 종교인.유신체제 하의 거침없는 발언으로 인한 탄압과 압박은 5·6공 군사정권까지 계속돼 민주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종교계의 거목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박목사가 세인들의 관심대상이 된 것은 73년 남산야외음악당 사건.이로부터 시작된 민청학련 사건과 이와 관련한 그의 금서(禁書) ‘해방의 길목에서’(74년 사상사刊)에는 잊지못할 사연이 담겨 있다. 남산 야외음악당사건은 서슬퍼런 유신체제에 대해 공식 항거한 첫 집단운동.10월 유신이 시작된지 6개월만인 73년 4월22일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렸다.당시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목사는각 교단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빈민들의 실질적인 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20개 교단의 연합예배가 열리던 이날 행사장에는 10만명이 운집했다.언론자유와 학원자유 교회갱신 등을 주장한 플래카드와 전단을 마련,행사 당일 알리려는 사전 준비가 돼 있었다.행사장 주변에 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펴 전단과 플래카드를 준비한 학생과 지역주민들이 정작 행사장 근처엔 접근도 못한 채 전단과 플래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모두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날 행사에 참가하려다 불발에 그친 한 주민이 장롱속에 감추어 두었던 플래카드가 보안사 출신 이웃에게 알려지면서 불거졌다.집요한추궁끝에 박목사가 행사를 주동했음이 밝혀졌다.박목사는 7월부터 9월까지재판이 진행된 뒤 내란예비죄로 7년을 구형받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선고 이틀뒤 보석으로 풀려났다. “내가 주도하는 활동중 도시빈민선교에 당국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요.보건소 이용이나 오물처리에 대한 혜택 등 실질적인 문제에서 철저하게 소외된도시빈민들이 스스로 항의하고 요구하도록 만드는 것에 치중했는데 좌경용공으로 몰렸습니다.정치적 자유없이는 이웃사랑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아래 빈민선교와 정치적 투쟁을 병행한 것인데 결국 철퇴를 맞은 것입니다” 남산 야외음악당사건이 이렇게 끝나자 맨 먼저 찾아온 사람들은 학생들과대학교수 등 지식인층이었다.그들은 서슬퍼런 상황에서 박목사가 보석으로풀려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고 있었다.이때부터 민청학련이 시작된다.당시 민청학련 10인위원회에는 박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던 서울제일교회 대학생부 학생들이 소속돼 있었다.74년 정초에 세배하러 온 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알렸다.그리고 자금주선을 요구했다.박목사가 尹潽善 전대통령에게 이야기를 전했고 尹 전대통령도 선뜻 응했다.그러나 민청학련은 결국 발각돼 모두 묶여 들어갔고 박목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사정권은 이 사건을 북한의 지령을 받고 한 것으로 몰아갔고 여기서 박목사는 대통령긴급조치4호 위반,국가내란음모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으나 10개월뒤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해방의 길목’은 박목사 재판이 진행되던 때 전국기독학생총연합회 간사였던 서울대학생인 아들 박종렬목사(현 전국기독학생회총연맹 총무)와 부인,종교계 인사들이 박목사의 좌경성을 부인하기 위한 증명차원에서 펴낸 책이다.68년부터 70년까지 박목사가 기독교잡지 ‘기독교사상’의 주간으로 일하던 때 쓴 권두언과 설교들을 묶은 것이다.박목사는 감옥에 있을 때였다. 책이 나온 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출판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입추의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이 왔다.책은 처음에 1,000부를 발간했으나 매진되자 다시 2,000부를 찍었다.그러나 이듬해 5월 마침내 ‘금서’로 묶였다.이책은 모두 압수당하고 지금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당시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습니다.서슴없이 유신비판을 하고 나선데 대한 제재였지요.그때는 박형규 일당만 제거하면 기독교계는 문제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으니까요” 5공에 들어서는 박목사에 대한 압박이 더욱 심해졌다.박목사가 제일교회에서 목회활동을 못하게 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그래서 ‘노상예배’가 시작된다.보안사의 사주를 받은 조직폭력배들이 교회건물 방에서 합숙하면서 직원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84년 추석 전날 감금당하고 다음날까지 경찰들이 포위한 가운데 깡패와 반대파 교인들이 ‘박형규는 항복하라’며 수도 전기 전화선을 끊어버린사건이 일어났다.그해 12월9일부터 노상예배의 험로가 시작돼 90년 12월9일까지 6년동안 계속됐다.매주 치안본부장에게 전화를 걸고 중부경찰서 앞에서 예배를 지속했다.이 노상예배는 일종의 ‘순례지’가 됐으며 국내외 유명인사들이 참석해 설교를하기도 했다. 그는 유신정권과 5·6공은 물론,문민정부에 들어서도 활동의 제약을 받았다.“여권 발급을 자유롭게 못받아 필요할 때마다 정부에서 내주는 단수여권을 써야만 했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1년짜리 복수여권만 받을 정도였지요.95년 사면된 뒤에야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박목사는 92년 8월 서울제일교회에서 은퇴,험하고 험한 현역 목회자 생활을마감했다. 글 金聖昊 kimus@
  • 박형규목사 그의 길

    ●1923년 경남 창원출생 ●64년 서울노회 초동교회 부목사로 시무 ●68년 월간 기독교사상 주간 ●70년 재단법인 기독교방송 상무이사 ●72년 서울노회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 취임 ●73년 부활절 남산야외음악당 연합예배 시위사건으로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기소 ●81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66회 총회장 ●8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 ●84년 폭력배들의 폭력을 피해 중부경찰서 앞 노상에서 주일예배 시작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92년 서울제일교회에서 은퇴
  • 교회개혁 구심체 한목협 玉漢欽회장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상임회장 玉漢欽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는 지난달 26일 창립된 국내 범교단의 연합체.교회 일치와 한국 교회의 책임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태동한 ‘교회개혁’의 구심체이기도 하다.玉漢欽회장( 60)을 만나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향후 운동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한목협의 구성은 어떻게 돼있나.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교회 개혁운동을 벌여오던 각 협의체가 하나로 모인 것이다.현재 13개 교단이 망라되어 있고 내년 말까지 3개 교단이 더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앞으로 구호나 외형적 행사보다는 정신적인 운동으로 승화시 킬 것이다. 한목협이 태동한 배경은. 한국 교회는 지난 30년동안 경제성장에 편승,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왔지만 부정과 파행으로 얼룩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사회적 공신력을 잃어 가면 서 교단마다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는 현실에서 교회 일치와 갱신,사회적 책 임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따라서 신학적 견해차를 뛰어넘어 함께 손잡는 광장을 만들자는 교회의 자생적 욕구가 결실을 거둔 셈이다. 참여한 교단 간의 갈등은 없나. 교단끼리의 갈등이 있다면 이같은 운동을 시작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모임 자체가 NGO성격을 띤 만큼 시민운동이나 마찬가지다.한국교회가 바람직하게 운영된다면 ‘한목협’ 같은 기구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교회가 교회다움을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실패했다고 본다.교회 자체의 외 형적 발전에 치중한 나머지 교인 자체만을 위한 프로그램에 치중해 이웃에 관심을 못기울였다.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소홀히 해 말과 행동의 괴리가 심각한 실정이다. 성직자 납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성직자에 대해선 납세여부를 묻지 않는 게 서방 세계의 공통된 흐름이다. 이 문제는 개신교 뿐만 아니라 종교계 전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개인적으 로는 10년 전부터 세금을 내고 있다.종교인들의 의식 수준을 고려해 전체적 으로 논의돼야 할 것으로 본다. 그동안 교회개혁·갱신운동의 성과가 없었던 이유는.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중세기 종교개혁이 성공하기까지 200년이 걸렸다.지금까지는 입을 여는 쪽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경향이 강했 다.교회 내부의 잘못을 자각하면서도 관습과 교단의 관행에 묶여 행동에 옮 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이젠 침묵만으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에서 뜻을 모아 구체적 행동으로 나가려는 것이다.?겉那∩? kimus@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민주열사 열전:9/金宜基 前 서강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요된 침묵속 ‘광주 항쟁’ 왜곡 항거/당시 기독교회관서 ‘서울 봉기’ 외치다 추락사/어둠의 시대 역방향 역사에 맞선 ‘진실의 불꽃’ ‘80년 5월의 학살’은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고 침묵을 강요했다. 항쟁 직후 정부와 제도언론에서 연일 뱉어내는 ‘광주폭동’이란 단어에 대해 누구도 ‘아니오’라고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를 흠뻑 머금은 침묵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 강요된 침묵을 깨뜨리고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찬 어둠의 시기에 진실을 향한 한줄기 빛을 비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金宜基라는 젊은이였다.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사흘째인 80년 5월30일. 서강대 4학년생 金宜基는 그날 오후 5시쯤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졌다. 밑에는 계엄군 장갑차와 군인들이 있었으나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대신,주위에 흩어진 유인물을 수거하기에 바빴다. ○가마니에 덮인채 방치 그는 가마니에 덮여 30여분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된 채 죽어갔다. 그가 뿌린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동포여 일어나자. 우리의 힘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正)방향에 서 있다…내일 정오 서울역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金宜基는 서울에서의 봉기야말로 짓밟힌 광주를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이를 처음으로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젊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경찰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려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즉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확실히 목격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위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가 계엄군에게 발각돼 쫓겨다니며 유인물을 뿌리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숨막히는 시대와 씨름했던 불꽃같은 투혼은 그의 삶 구석구석 스며있다. 막일로 생활을 꾸리던 부모님과 광부·공장노동자로 일하던 형들을 가슴속에 빚으로묻어둔 채 대학에 다녔던 金宜基. 그러나 그런 부채의식은 집안에서 유일한 대학생으로 장차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야심보다는 도리어 사회모순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졌다. “나를 빼고 모두가 돈을 버는데 우리 가족은 왜 셋방을 전전해야 하나”“농사를 짓는 형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빚만을 불려가야 하는가”그런 의문은 그를 자연스럽게 책으로 안내했고,그는 우리 역사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감상적 농활에 실망 그는 농촌문제 연구에 빠져들었다. 2학년 여름 학교 동아리 ‘한국유네스코 학생회(KUSA)’의 하계농촌봉사활동에 참여했으나 깊은 실망감을 맛보았다. 대개 근로·의료봉사,아동지도 등으로 구성된 당시 농촌봉사활동이 저변에 감상적 인도주의를 깔고 있어 농민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연한 봉사보다는 농민들과 함께 농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가고자 했다. 발이 닳도록 농촌현장을 누볐고 농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토론을 통해 분석된 결과를 다시 농민들에게 전했다. 그가 얻고자 한 것은 농촌의 실물경제 파악과 그에 대한 농민들과의 공감대였다. 10차례에 걸친 농활과 연구에서 그가 보여준 집중력은 놀라웠다고 한다.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임부의장(42)은 “그에게는 대학 출신 농민운동가들이 갖기 쉬운 현장 농민들과의 위화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농민운동은 농민대중에 기반을 둔 자주적인 조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후일 그와 가깝게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주적 농민관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학 2학년때부터 서울 신당동 형제교회의 농촌문제연구모임을 이끌면서 농촌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고,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등 자신의 진로를 농민운동쪽으로 굳혀갔다. 80년 5월18일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이 본격화할 무렵 그는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항쟁 실상 파악과 19일 시내 한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고구마사건 승리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참히 살육되는 참상을 목도하고 이를전국에 알리기 위한 방법에 부심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금요기도회’를 디데이로 잡았다. 기독교회관에는 그가 활동하던 EYC사무실이 있었다. “30일 낮 12시 EYC사무실에 나타난 그가 광주에 다녀왔다며 잠시 좀 쓸게 있으니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부탁했어요. 오후 4시쯤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가 작성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원본을 건네주더군요. 근처 상동교회에서 청년회장과 그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기독교회관에 오니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어요” EYC에서 함께 활동했던 변광순씨의 회고다. 떨어진 쌀 수매가에 가슴치던 분노의 주먹. 농활을 준비하던 신명나던 손길. 광주를 향했던 발길. 5월의 학살을 남들처럼 가슴에 묻지 못하고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터뜨린 피맺힌 절규. 이들은 모두 역(逆)방향의 역사에 맞섰던 金宜基 열사의 민중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실천 방식이었다. □金宜基 열사 연보 ▲1959년 경북 영주군에서 출생 ▲70년 영주 중부초등교 졸업 ▲76년 배명고 졸업.서강대 무역학과 입학. KUSA 가입. ▲78년 형제교회 농촌문제연구모임 참여.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참여 ▲79년 서강대 근대사연구모임 주도. ▲80년 EYC 농촌분과위원장으로 활동. ▲80년 5월 광주항쟁 목격. 30일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남기고 떨어져 숨짐 ▲90년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 받음 ◎어머니 권채봉 여사/“5·18 사망자 공식 인정” 소식 듣고 담담/“아들이 이루려 했던 세상보는게 소원” 광주광역시청 5·18 보상지원과에 전화를 했다. 담당 직원은 金宜基 열사가 ‘5·18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다며 10월쯤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권채봉 여사(74)는 그 소식에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아들의 큰 뜻과 죽음,‘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강요받아온 기나긴 고통의 세월이 금전으로 바꿔지는 듯한 허탈감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글쎄 다행인것 같기도 하고. 반갑다고 해야 하나”라고만 말했다. 어머니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날(80년 5월30일) 저녁 8시30분쯤 동대문서 형사라는 사람이 와서 宜基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는거야. 그런데 그애는 영안실에 있었고,상부 명령이 없다고 다음날 낮 12시까지 시신도 안보여줬어.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고 화장을 하라고 갖은 협박을 했지” 그러나 김동완 목사의 주도로 장례식은 치러졌다. 수백명의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광주항쟁 후 첫 대규모 집회가 됐다. 어머니는 그때 자신의 울음을 신호로 학생들이 일어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그들이 다칠까봐 자식의 관에 꽃을 던지면서도 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권여사는 송파구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구순의 시어머니와 중풍을 앓고 있는 남편 김억씨(73)의 시중을 혼자 들며 살고 있다. ◎장석재 형제교회 목사가 전하는 농민사랑/농민과 일체감 위해 극도의 허름한 생활/농촌연구 삶의 일부 농민 향한 애정 각별 金宜基 열사의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과 농민을 향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형제교회의농촌문제연구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김동완 목사가 담임으로 있으면서 빈민·농민 선교를 통해 사회참여에 앞장서고 있었다. 金宜基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이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농촌문제 연구의 핵심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형제교회 장석재 담임목사(42)는 “그는 당시 가장 어려운 곳이 농촌이라고 보고 농촌현실에 몰두했던 것 같다”고 했다. “미울정도로 허름한 생활을 했어요. 군복바지에 검정고무신 청자담배 등 가장 싼 것만을 입고 먹었지요. 친구들로터 티내지 말라는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그러나 그것들은 농민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그의 사랑의 표현법이었다고 했다. 교회사적으로 볼때도 金宜基 열사는 ‘사회선교의 순교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다 체포돼 4개월간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던 장목사는 “사회운동가들이 정치인 등으로 기성화하면서 과거의 순수함과 진지함이 굴절돼 보일 때마다 宜基가 생각난다”고 했다. 당시 EYC 농촌분과위원장이었던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근부의장도 “金宜基는 현장에서 필요로 하면 두말 않고 달려갔다. 농촌은 그에게 있어 몸에 밴 생활의 일부였으며 농민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혈육에 대한 것 이상의 깊이를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 목사·장로 재신임 투표/기장,총회 헌법개정안 상정

    ◎안식년후 재시무 여부 결정/반포 서울교회선 이미 실시 목사·장로도 신도들의 신임투표를 통해 재임 여부가 결정되는 시대가 열린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교회(예장통합)는 지난 7월 개교회로는 처음으로 목사·장로에 대한 신임투표제를 도입,현재의 이종윤 담임목사에 대한 재신임을 물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도 14∼17일 열릴 총회에 신임투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총회 헌법개정안을 상정해놓고 있어 이 안이 통과될 경우 소속교회들이 모두 신임투표제를 실시하는 것은 물론 다른 교단으로도 확산될 전망이다. 목사·장로 신임투표제는 방법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시행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종교계는 물론 개신교 역사상 처음. 서울교회는 담임목사의 경우 6년 시무뒤 1년 안식년을,장로는 4년뒤 1년 안식년을 각각 갖기로 했으며 안식년이 끝날 때 당회에서 신임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여기서 3분의 2이상 찬성을 얻지 못하면 모든 교인이 참여하는 공동의회에서 최종신임을 묻는다. 서울교회는 이번 제도를 소급 적용하되 이미 안식년이 지난 대상자들에 대해선 안식년은 물론 신임투표까지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경과조치를 삽입했다. 올해 안식년을 맞은 이목사는 교회 형편상 안식년을 반납하겠다는 의사에 따라 신임투표를 실시,당회원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확정했다. 기장의 총회헌법 개정안은 소속 교회의 모든 목사와 장로에게 6년뒤 안식년을 주고 안식년이 끝날 때 전 교인이 참석해 신임투표를 실시,재시무 여부를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기장총회 업무조정부 이재철목사는 “은퇴때까지 임기를 보장하는 것은 담임목사나 시무장로의 전횡을 부추길 뿐아니라 봉사나 신앙적인 성숙 등을 게을리 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며 “안식년을 통해 재충전기간을 거친 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서 재신임을 묻는 것은 교회갱신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 親日의 군상:2/국립묘지에 묻힌 日帝경력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민족성지’에 일제고관·황군장교까지/‘과거’ 검증 안된채 안장… 끝없는 논란/백강 선생 “나는 국립묘지 싫다” 유언 “내가 죽거든 국립묘지에 묻지말고 생사를 같이한 임정요인들이 누워있는 효창원 묘역에 묻어달라.” 지난 93년 1월 타계한 마지막 임정요인 백강 趙擎韓 선생의 유언이다. 백강 선생은 왜 남들이 다 묻히기를 원하는 국립묘지 안장을 굳이 거부한 것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한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국립묘지에 누워있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립묘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모신 민족의 성지다. 그러나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사 중에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력한 인사들도 일부 포함돼 있다는 주장과 함께 이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두고 논란이 있어왔다. 국립묘지 내에서 친일단체나 일제 통치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묻혀 있는 묘역은 국가유공자묘역,애국지사묘역,장군묘역 등 세 곳.국가유공자묘역에는 제1묘역의 白樂濬·陳懿鍾·白斗鎭·嚴敏永·黃鍾律·李殷相·李瑄根 등 7명,제2묘역의 趙鎭滿 등 모두 8명이 묻혀 있다. 문교장관과 참의원 의장을 지낸 白樂濬은 1942년 4월 창간된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陳懿鍾은 경성제대를 나와 일본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도청에서 농무과장을 지냈다. 白斗鎭 전 국무총리는 도쿄제대 상대 출신으로 조선은행에 근무했다. 3공때 장관을 지낸 嚴敏永과 黃鍾律은 모두 일본 규슈(九州)제대 출신으로 嚴씨는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하여 군수를,黃씨는 만주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한 후 만주국 재정국에서 관리를 지냈다. ‘민족시인’으로 일컬어지는 李殷相은 만주에서 발행되던 친일신문 ‘만선(滿鮮)일보’에 몸담은 경력이 있으며 문교장관,초대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李瑄根은 만주국의 국회격인 협화회(協和會) 간부를 지낸 기록이 있다. 3·4대 대법원장을 지낸 趙鎭滿은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에 합격,해주지법 판사와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지냈다. 이들이 해방후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하지만 일제 당시의 행적을 무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데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애국지사묘역은 일제하 항일투쟁 공로로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추서포함)받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신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친일의 ‘흠’이 있는 인물은 근처에도 가서는 안되는 ‘성역(聖域)’이다. 그런데 이곳에도 친일단체 등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 金鴻亮(77년 독립장),崔昌植(83년 독립장),李鍾郁(77년 독립장),尹益善(62년 독립장),李甲成(62년 대통령장) 등이 그들이다. 친일파 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故) 林鍾國씨의 조사결과에 따르면,金鴻亮은 황해도 도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냈고,崔昌植은 그의 아내 金元慶(63년 대통령표창)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친일 교민단체인 계림회에 소속돼 친일활동을 한 의혹을 받고 있다. 승려로서 3·1운동에 가담했던 李鍾郁은 국민총력연맹 위원으로 불교계 친일에 가담한 일이 있으며 尹益善은 경성부(현 서울시) 원서정(苑西町) 총대(總代·지금의 동장에 해당)와 경성부 북부정회 총대회 간사를 지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해방 후 초대 광복회장을 지낸 李甲成은 상하이에서 이와모토(岩本正一)라는 창씨명으로 밀정노릇을 했다는 주장(임정 서무국장 林義鐸,유관순 열사의 오빠 柳愚錫씨 등의 증언)이 그의 생전에도 끊이지 않았었다. 장군묘역에는 1,2,3묘역 모두에 구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누워 있다. 제2묘역의 육군중장 李應俊,제3묘역의 육군중장 李鍾贊과 육군대장 출신으로 국무총리·국회의장을 지낸 丁一權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국군 ‘창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李應俊은 일본육사 26기 출신으로 해방당시 일본군 대좌(대령)였다.한국군 재임시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참장군’으로 불리는 李鍾贊 역시 일본 육사출신(49기)으로 일본군 공병소좌(소령)로 남방전선에서 해방을 맞았다.3공 당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丁一權은 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 출신으로 朴正熙 전 대통령(신경군관학교 2기 출신·국가원수묘역 안장)과 같이 만주군에서 장교를 지냈다.지난 2월 대전국립묘지(장군묘역)로 이장한金昌龍(사후 중장 추서) 전 특무부대장은 만주 관동군 헌병대에서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장군묘역에 있는 사람들은 건국후 창군과 6·25및 그 이후의 공로로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제 당시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황군(皇軍)’의 장교를 지낸 인물이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애국지사 묘역에 묻힌 선열들/일제 항거 애국열사 등 1,341위 모셔/임정묘역엔 박단식·양기탁 선생도 국립묘지내에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신 곳은 애국지사묘역(대전분소 포함)과 임정묘역 두 곳이다.이곳에는 한말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순국선열을 비롯해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열사들이 안장돼 있다. 98년 8월 현재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는 총 1,341위(대전분소 1,136위 포함),임정묘역에는 최근에 유해를 봉환한 양기탁(梁起鐸) 선생 등 16위의 애국선열이 안장돼 있다.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애국지사들을 활동분야별로 보면,申乭石·李仁榮 등 의병장,李鍾一·洪秉箕 등 3·1운동 관련자,의거 당시 64세의 나이로 사이토(齋藤)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姜宇奎 의사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金相玉 열사등 의열투쟁가,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순국한 朱基徹 목사,외국인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하고 제암리학살사건의 진상을 전세계에 공개한 스코필드(한국명 石虎弼) 박사,여류독립운동가 南慈賢 여사,‘독립신문’을 창간한 徐載弼 박사 등 항일 독립운동계의 상징적인 인물들이 총망라돼 있다. 93년에 조성된 임정요인묘역은 임정관계자중 국무위원급 이상의 요인들을 별도로 모신 묘역. 이곳에는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朴殷植 선생을 비롯해 국무령을 지낸 李相龍·洪震·梁起鐸 선생과 임시정부 의정원(국회에 해당) 의장을 지낸 金仁全 선생·孫貞道 목사,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盧伯麟 선생,국무총리 대리겸 외무총장을 지낸 申圭植 선생,국무원 통위부 총장 金東三 선생,그리고 임정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지낸 趙擎韓(94년 3월 애국지사묘역에서 이장함) 등이 안장돼있다. 임정의 주석을 지낸 백범 金九 선생과 尹奉吉·李奉昌 의사 등은 효창원묘역에,임정 내무총장을 지낸 申翼熙 선생 등은 수유리 묘소에 안장돼 있다.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가 만원이어서 최근에 작고한 애국지사는 대전 분소에 안장되고 있다. 柳寬順 열사와 같이 후손이 없는 무후(無後)선열들은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를 봉안해 놓고 있다.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 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인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 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 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 ▲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박은경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 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親日의 군상:1­1/시리즈를 시작하며(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청산 ‘참된 역사’의 출발/日帝 앞잡이 기득권층 형성… 反통일세력화/민족자존 위해 더 미룰수 없는 ‘금세기 숙제’ 20세기 우리 현대사에 등장한 용어중 ‘친일파’만큼 불명예스런 것도 없다.‘친일파’로 한번 낙인찍히면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영원히 남아 왔다. ‘친일파=매국노=반민족행위자’라는 등식으로 인식되는 친일파문제는 지금에 와서도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 있다.이 문제는 그동안 쉽게 손대기가 어려웠고 학계에서조차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돼 왔다.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 친일파문제는 그 죄상(罪狀)에 대해 단죄는 물론 역사적 평가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간헐적으로 친일논쟁이 터질 때마다 우리사회에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수 년전 매국노 李完用 후손의 ‘땅찾기 소동’은 친일파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이슈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민감한 이슈를 이 시점에서 다시 거론하는 것은 왜인가?그 이유는 해방 반세기가 지나서도 마치 ‘역사의 미라’처럼 온존해 있는 친일파문제를 금세기내에 매듭짖고 정의가 살아있는 정직한 역사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그동안 우리 사회는 해방후 친일잔재를 척결하지 못한 탓으로 민족정기가 땅에 떨어지고 가치관의 혼란도 극심했었다.일부 친일파들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훈장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심사하기도 했다. 친일 문인의 작품이 최근까지 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는가 하면 국립묘지에는 아직도 친일 경력자가 묻혀있다.친일파연구가 고(故) 林鍾國 선생은 친일파청산의 의의를 “철저하게 짓밟혀 버린 민족자존을 회복하고 자손만대에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했다. ○親日 논리·행적 기록 남겨야 일제 앞잡이 친일파들은 해방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아래 신생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변신하였고 다시 군사 독재정권에 와서는 ‘영원한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았다.이들중 대다수는 극우·반공논리로 무장하여 반(反)통일세력을 형성해왔고 또 독재권력옹호자,매판자본가,어용지식인,심지어 한·일 외교무대에서 굴욕외교에 앞장서기도 했다.이런 상황에서는 통일과 민족정기를 논할 수 없다. 이제 친일파 청산문제는 더이상 다음 세기로 미룰 수 없다.이제라도 역사학계와 연구자들은 그들의 친일논리와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그러나 이같은 작업은 개인에 대한 단죄차원보다는 과거사 청산과 올바른 가치관 확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동국대 법학과 韓相範(64) 교수는 “우리사회의 부패·모순구조는 해방후 친일파 척결을 하지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금세기가 가기전에 우리사회가 친일파 청산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매국노·식민정책 협력자 통칭/독립신문 7개 부류 첫 거론/제헌국회 反民法 구체 규정 보통명사‘친일파’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개인이나 무리’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친일파’의 경우 그들이 활동한 시기와 일본과 친하게 지낸 정도 면에서 차이가 있다.후자의 경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해방전까지 일본제국주의와 가깝게 지내면서 매국(賣國)에 가담했거나 또는 일제강점하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한 자’들을 통칭한 것이다.따라서 이 경우 ‘친일파’는 매국노,반민족행위자,민족반역자 등과 같은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20세기 전반 외세지배를 겪은 나라들은 대개 우리의 ‘친일파’와 유사한 의미의 용어를 가지고 있다.중국은 일제에 협력한 자들을 ‘한간(漢奸)’이라고 부른다.‘중국인으로서 적과 통모(通謀)하여 반역죄를 범한 매국노’라는 뜻이다.프랑스는 나치정권에 협력한 반역자를 ‘나치협력자’로 부르고 있다.이같은 용어들은 ‘민족반역자’라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데 전쟁범죄자인 ‘전범(戰犯)’과는 의미가 다르다. ‘친일파’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가.친일파의 범주에 대한 첫 거론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보도한 ‘칠가살(七可殺)’이다.이는 당시 독립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했던 매국적(賣國賊)·친일관료·밀고자 등으로 7개 부류로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이었다.친일파의 범주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미군정하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은 1947년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을 만들면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를 따로 구분하고 있으며 8·15 이후의 간상배까지 처벌대상으로 삼고 있다.부일협력자의 경우 악질적인 친일파는 물론 일본인과 결혼한 자,일본말을 상용한 자,또 민족반역자의 경우 만주에서 활동한 경찰관까지 포함하고 있다. 한편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은 친일파의 범주를 보다 구체적이고 한정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제1조∼5조에 걸쳐 친일파의‘죄’를 규정하고 있는데 매국노·수작자·고급관료·악질분자 등을 대상자로 규정하고 있다.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愼鏞厦) 교수는 “반민법에서 규정한 친일파는 제한된 직위와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지적했다. □제헌국회 제정 반민족행위처벌법 조 항 반민족행위자 분류 현 황 제1조 ①일본과 통모(通謀)하여 ①사형또는 무기징역 한일병합에 적극 협력한자 ②그 재산과 유산의 ②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전부 혹은 2분의1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하거나 이상 몰수 모의한 자 제2조 ①일본정부로부터 작위(爵位)를 ①무기징역 또는 5년 받은자 이상의 징역 ②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자 ②그 재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이상 몰수 제3조 ①독립유공자나 그 가족을 ①사형,무기징역 또는 악의적으로 살해,박해한 자 5년 이상의 징역 ②또는 이를 지휘한 자 제4조 ①습작(襲爵)한자 ①10년 이상의 징역 ②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를 ②또는 15년 이하의 지낸 자 공민권 정지 ③칙임관 이상의 관리를 지낸 자 ③그 재산의 전부 ④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혹은 일부 몰수 ⑤독립운동을 방행할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한 자 ⑥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 ⑦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⑧도(道),부(府)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을 지낸 자 ⑨관공리로서 직위를 이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분자 ⑩각종 친일단체의 수뇌간부를 지낸 자 ⑪친일 언론·저작활동을 한 문화계 인사 ⑫개인으로서 일제에 적극 협력한 자 제5조 ①고등관 3등급 이상,혹은 ①반민법 공소시효 훈5등급 이상을 받은 관리 결과전까지 공무원 ②헌병,헌병보,고등경찰을 지낸 자임용금지(단,기술관 은 제외)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 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朴은慶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목사가 70억원 사취 도주/신도 보증세워 대출받아

    【고양=朴聖洙 기자】 경기도 고양경찰서는 고양시 일산구 마두동 B교회 담임목사 朴모씨(54)가 교회 신축비 명목으로 신도들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70여억원을 빼돌려 달아났다는 고소를 접수,수사에 나섰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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