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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정유적지 2차 발굴,신라 神宮터서 銘文기와 출토

    신라시대 신궁(神宮)터로 추정되는 유적지에서 한자로 된 명문(銘文)기와 등이 발굴됐다. 22일 중앙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초부터 최근까지 경북 경주시 탑동 700의1 사적 제245호인 나정(羅井) 정비사업으로 시굴과 발굴을 한 결과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팔각건물 1채가 있던 터와 담벼락터가 확인됐고,한자 ‘生’자로 판단되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10여점 출토됐다. 또 팔각 건물지 북동쪽에서 크기 10㎝ 정도의 ‘官’자명 화강암 1점이 출토됐으며,북쪽에서는 중국 당나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청자편이 나왔다.발굴팀은 “이번에 출토된 유물은 신라시조 혁거세의 탄강(誕降)전설이 깃든 나정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대부분 빠르게는 고신라 또는 통일신라 유물이 차지하고 있다.”며 “신라 제21대 소지왕때 설치된 신궁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경주 나정 유적지 발굴은 1차 시굴이 지난해 5월20∼6월24일 실시됐으며,이번에 건물지 중앙에 남아 있는 우물지로 보이는 초석 주변을 중심으로 2차 발굴을 시행하고 있다. 한편 1차 조사에서 확인된 팔각건물지는 평면 팔각형으로 동·서·남·북 길이가 각각 20m 정도이며,내부면적은 300.27㎡이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
  • 대한매일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경악의 얼굴-기형도론/이성혁

    1.기형도 시의 가상성 그의 죽음에서 벗어나 작품속 죽음 의미찾아 이 비평문은, 그러니까 기형도의 텍스트와 텍스트를 이어보고 만져보면서 이 가상적 구성물인 텍스트에 드러나 있는 것을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재구성(‘시인'의 세계관이나 무의식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닌-)하여 다시 텍스트를 짜내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우선 기형도 시의 ‘가상성'을 부각시키려 한다. 이는 기형도 자신도 원하는 것일 게다. 그의 친구인 원재길은, 별로 주목된 바 없는 글이라 생각되는 10여 년 전의 글에서, “창작자와 시적 자아를 동일시하는 심리주의 비평의 어떤 그릇된 접근 방식은 시인 자신으로부터 이미 거부당하고 있다.”(대화적 울음과 극적 울음)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위에서 거론한 비평가들이 조야한 심리주의 비평에 빠졌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시와 기형도의 의식의 동형관계에서 벗어나 시를 문학적 텍스트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원재길은 이미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기형도의 여러 시편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장 인물과 간단한 사건과 시간에 순연하는 구성이 있는 극적인 구조를 취한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기형도 시가 하나의 독특한 가상적인 구성물임을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깊게 논의를 더 진전시키지 않았고, 그의 지적이 논자들에게도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다. 대개의 평문들에선 기형도 시의 등장 인물들-낯선 ‘그'로 자주 등장하는-은 대상화된 ‘나'로 취급되어 기형도의 자아를 반영하는 인물이 되어 버리곤 한다. 즉 기형도 시가 ‘극적 구조', 하나의 가상적 구성물임을 주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1)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 부분 2)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 부분 1)에 등장하는 서기나 ‘김'을 대상화된 기형도 자신으로 파악하는 것은 한편으론 옳고 한편으론 그르다. 옳다는 점은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는 나”라고 발언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모든 허구적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시 같은 서정적 장르에서는 그 분신의 농도가 더 짙으리라. 하지만 그 등장 인물이 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파악은 그르다. 시에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등장 인물은 시 텍스트의 공간 내에서 자기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의 ‘나'는 시인의 자아에서 벗어나게 된 텍스트 속의 ‘나'이다.시인의 자아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받은 ‘나'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서정시인일 것이다. 위의 시에서 서기는 시인의 대리일 뿐 아니라 카프카적 의미에서의 서기, 관료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무의미한 일에 탕진하고 있는 우리네 삶의 형식의 상징으로서의 서기이다. 유리창은 그 서기를 바라보고 있는 ‘나'와 서기를 갈라놓는다. 이 유리창 때문에 ‘나'는 울고 있는 서기에게 가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줄 수 없다. 하지만 유리창 덕분으로 ‘혼자 울고' 있는 서기를 발견할 수 있다. 유리창은 타자와 소통할 수 없게 하는 칸막이면서도 또한 ‘혼자' 각각 서로를 바라보며 소통할 수 있게 한다. ‘나'와 ‘그'를 동일시하여 각자 홀로 있는 ‘나'와 ‘그'의 어긋나 있는 대위 구조를 보지 않는다면 이 시가 뿜어내고 있는 의미를 붙잡기 힘들다. 원재길의 ‘극적 구조'를 넓게 본다면 이 장면 역시 그 구조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 침묵의 극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1)의 서기의 울음을 조명하여 해명해주는 텍스트로 볼 수 있는 2) 역시, 독백의 극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그'와 ‘김'은 동일 인물의 분신들이다. 1)에서 시적 화자가 ‘나'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과 달리, 이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적 화자가 담론 배후에 있고 시 표면에 등장한 ‘나'가 독백하는 형식으로 ‘김'의 중얼거림이 나타나 있다. 홀로 있는 ‘김' 옆에서 ‘김'을 ‘바라보는' ‘그'는 사물화된 김의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김이라 할 수 있는데, 성으로만 표시되어 개성을 잃어버렸음을 표시하는 ‘김'보다 더 몰개성적인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김'이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그와 김, 그리고 흐물흐물한 대명사가 되어 버린 ‘나', 또 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극적으로 어울리게 된다. 그런데 1)에서 서기의 울음을 볼 수 있는 순간은 바로 홀로 있음의 순간, 침묵의 순간이었다. 침묵이 깨지면, 이 순간은 깨지고 말 것이다. 세계를 토막내는 언어의 세계가 침묵할 때 순수한 존재 자체가 떠오르지 않겠는가. ‘두 시', 삶이 무의미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순간을 깨달을 때의 침묵의 시간, 그 직후터뜨리는 울음의 순간에 배치되는 사물과 인간을 이 시들은 포착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극적 구성은 플롯을 시에 도입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 배치된 장면을 응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런데, 이 일상을 갑자기 전복시키는 시간이 정지된 순간은 기형도 시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된다. 그는 (어느 푸른 저녁)의 시작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끔씩 어떤 ‘순간들'을 만난다. 그 ‘순간들'은 아주 낯선 것들이고 그 ‘낯섬'은 아주 익숙한 것 들이다. 그것들은 대개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방향으로 튕겨나갈지 모르는, 불안과 가능성의 세계가 그때 뛰어들어온다. 그 ‘순간들'은 위험하고 동시 에 위대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감각들의 심판을 받으며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불행한 쾌락 들이 끊임없이 시를 괴롭힌다. 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형식이 기형도의 가상적 구성물-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보여준다. 그 순간은 시간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한다는 것은 어떤 연속선상을 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텅 빈 그 순간, 침묵의 순간을 말하기 위해선 우회로를 빙빙 돌아 그 순간을 간접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즉 가상적 공간, 더 나아가 환상적 공간을 구성하여 그 순간을 암시할 수밖에 없다.(어느 푸른 저녁)에서는 그 순간을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이라고 말한다. 이 저녁엔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에서 사람들은 “가벼운 구름같이/서로를 통과해”가는 순간이 온다. 이 환상적인 순간은 어떤 예감을 통해 감지하게 된다고 시적 화자는 말한다.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것은 무방하지 않은가/나는 그것을 본다/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을 숨기고 있는가/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움직임이 홀연히 정지”한 상태, 이 상태는 환상 속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실제 상황의 묘사로는 이 상태를 그려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상태는 볼 수 없는, 예감으로서만 감지할 수 있는 상태이면서, 예감했다고 알아차린 순간 없어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이미 늦은 것이다”라고 시는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순간은 그러니까 현실 묘사가 아니라 환상 속에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환상은 의미의 블랙 홀과 같은 상태다. “보이지 않은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의미는 사라지고 언어도 사라진다. 시인은 또 “이 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역시 순간일 뿐이다. ‘검은 외투'-죽음의 외투-를 입은 사람들은 여전히,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그들의 딱딱하고 무미한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본다”고 시인은 말한다.(여기서도 시적 화자는 보는 사람이며, 증언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블랙 홀과 같은 어떤 순간을 느낀 순간, 나에게 ‘그'가 다가온다. ‘그'는 ‘나'의 분신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메피스토펠레스적인 악마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악마는 말을 걸어온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의 인생의 의미를 모두 무화시킨다.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라고 그 악마는 속삭인다.다시 말해 모든 것이 무의미의 검은 구멍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을 예감할 때 그 악마는 등장한다. 그리고 세상의 법칙, 아마도 죽음으로 가는 삶의 법칙을 가만히 상기시킨다. 기형도 자신이 말한 ‘가능성'과 ‘불안'은 그 ‘순간'이 이 악마적인 것의 출현을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악마적인 것이 죽음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시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새로운 삶,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주며 ‘위대'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 지경에 다다른 이때 투명하고 푸른 공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감추어진 ‘둥글고 빈 통로'가 열린다. 그래서 악마적인 ‘그'가 말한 숨겨져 있는 ‘법칙'은 다만 죽음의 법칙만이 아니라 환상 속의 다른 통로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형도 시의 환상은 양면적이다. 일상적 삶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되는 그의 환상은 우리의 삶을 무화시키는 블랙 홀의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다시 신비롭게감추어진 희망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시는 시의 탄생과 그 탄생이 가져오는 양면성에 대한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2.기형도 시의 이중성 파우스트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외치는 순간,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를 지옥으로 데려간다. 이때 아름다움의 순간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아름다움은 일상의 권태로운 세계를 무화시킨다. 인간은 권태의 세월보다 죽음을 무릅쓴 아름다움의 세계에 닿고자 하지 않겠는가?(그래서 아름다움은 치명적인 유혹이라 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아름다움은 죽음의 세계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일상적 삶이 도리어 죽음과 같은 삶이라는 것을 드러내어 삶을 희망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파우스트의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도 늙은 파우스트가 아름다움의 순간을 찾아 나서는 데서부터이다. 물론 그는 끊임없는 생성을 젊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순간이여 ‘멈추어라'라고 만약 자신이 말한다면 자신을 지옥에 데려가도 좋다고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결국 파우스트는 자신이 매립제에건설한 도시(악마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를 바라보며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죽음의 말을 토해내며 쓰러진다. 즉 파우스트가 산 젊음은 이 아름다운 가상에 대한 외침에 도착함으로써 끝난다. 그의 젊음과 행위는 결국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아름다움의 순간'이란 착지에서 그의 젊음과 힘은 지옥으로 넘겨진다./기형도 시가 포착하려던 그 “위험하고 동시에 위대하다”는 ‘순간'의 이중성도 아름다움에 대한 《파우스트》적 아이러니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형도의 시가 드러내는 아이러니는 순간이 가져오는 이 이중성에 대해 팽팽한 긴장을 풀지 않음으로써 이끌려 나온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시작 노트와 을 다시 상기해보자. ‘아주 낯선 것들'이면서 ‘아주 익숙한 것들'이라는, 순간들의 이중성에 대한 긴장을 시인은 계속 놓치지 않는다. 아니 순간들의 이중성의 포착은 이 대상에 대한 긴장에 찬 예민성의 끈을 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주 낯선 것들로의 ‘둥글고 빈 통로'를 마련하는 어떤 순간은 우리가 언제나 부딪히는 일상에서의 어떤 순간이다. 그래서 ‘아주 익숙'하기도 하다. 그 순간이 벌려내는 환상은 우리 삶의 현장인 일상의 삶을 무화시키면서도 어떤 다른 세계로의 통로, 다른 삶의 세계를 열어 놓는다. 이 이중적인 통로의 발견을 기록하는 데서 기형도의 시는 드러나기 시작한다. 통로의 이중성은 ‘둥글고 빈'이라는 수식어에서 이미지화되어 있다. ‘둥근 것'은 아날로지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아날로지는 모든 개체가 전체를 비추고 전체가 개체들을 끌어안는 조화의 세계 아닌가./그 세계는 둥글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비어 있다는 진술에서 ‘둥근 것'의 아날로지 세계는 아이러니의 상태로 변화된다./‘둥글고 빈' 통로는 아름다움에로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無에로의 통로이기도 하다. 이 둥글고 텅 빈 통로를 통과하여 다다른 어떤 다른 세계, 아름다움의 세계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공기 방울의 세계이다. 저녁 노을이 지면/神들의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신비로운 그 城///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에 살고 있다///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 성 안은 “아름답고/신비”한 세계이다. ‘시작 메모'에서 말한 ‘위대한 순간'이 형상화된 세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이 세계에도 해당된다. ‘존재'가 차안의 세계에만 해당된다는 개념이라면 말이다. 이 세계는 신들이 사는 세계이지 않은가. 이 세계는 신들과 농부들과 작은 당나귀는 이 성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며 어느 하나도 빠지면 성립되지 않는 세계이다. 즉 아날로지의 세계다.시인도 ‘역시' 작은 당나귀들도 평화로운 그 성에 농부들과 살고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은 공기와 같은 세계라서 “구름 혹은/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다가갈 수 없다.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지고 세계가 낯설어지며 감각이 착란될 때의 순간이 열어놓는 어떤 ‘푸른 저녁'같을 때, 사람들이 “가벼운 구름같이/서로를 통과해”갈 수 있었다. 이 ‘순간'에만 바로 ‘둥글고 텅 빈' 통로를 따라 이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성 안의 세계는 바로 그렇게 공기 방울, 구름이 된 사람들이 어우러져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이 공기 방울의 세계는 차안의 공간에 있진 않지만, 차안과 동떨어진 피안의 공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차안의 공기 안에 있다. 우리가 언제나 대하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언뜻 벌려진 공기와 공기 사이의 블랙 홀을 공기가 되어 통과하면 만날 수 있는 세계이다.그러니까 이 성 안은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는 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옆-앞에 있다. 그래서 이 세계에 들어가려는 골동품 상인-아마 차안의 세계의 속성인, 살해를 자행하는 폭력성을 보여주는 등장 인물이라 할-이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가 보았자 헛수고가 될 수밖에 없다. 골동품 상인은 차안의 세계 뒤에 있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는 숲만 자르면 성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삼차원적 세계 인식에 머물러 있다. 그가 차안에서 아무리 폭력과 파괴를 행한다 해도 이 숲으로 된 성벽 안은 의연히 평화로운 마을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만큼 불안하다. 우리가 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도는 앞에서 보았듯이 기화되는 길밖에 없다. 통로가 ‘빈' 통로여서 들어가려는 이는 빈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공기 세계는 어떤 무게 있는 물질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볍게 둥둥 떠다닌다. 공중에 투사된 영상처럼 흩어졌다 모여지는 그런 세계다. 우리가 손으로 만질라치면 그 세계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릴 것이다. 이 아날로지의 세계는 그래서 희망의 저편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은 품을 수 있으나 어느전도와 착란의 순간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차안에선 이루어낼 수 없을 세계이다. 기형도가 희망에 대해 ‘어둡고 텅' 비어 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숲으로 된 성벽' 자체가 비어 있고, 그 비어있는 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도 빈 희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 (植木祭) 중에서 기형도 시에서의 ‘죽음'은 시인의 우울한 세계관이나 유년의 기억 때문이라기보다는, 시적 화자가 희망의 포기와 선택을 통해 ‘각오'한 것이다./ 이 죽음의 각오는 ‘둥글고 빈 통로'에 들어갈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통로에 들어간다는 일은 다른 삶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앞에서 본 바 있었다. 통로 저 편에 있을 숲으로 된 성벽에 갈 수있으리란 희망은 절망으로 전화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둥글고 빈 통로를 걸어 도달할 수 있는 희망이란 빈 희망이기에 그러하기도 하고, 숲으로 된 성벽이 아름답다고 외친 순간 그 아름다움의 덧없음이 부각되면서 죽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즉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은 어두운 희망이라 말할 수 있기에 그러하기도 하다. 그 성벽은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착란과 환상을 통해 대기에 구멍이 나는 순간을 파악하려는 기형도 시는,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을 때의 죽음으로 가는 구멍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푸른 유리병' 같은 공기가 점차 탁해지면서 ‘안개'로 오염되기 시작한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 (안개) 중에서 푸른 대기 속의 둥글고 빈 통로는 ‘안개의 빈 구멍'으로 전화한다. 다른 삶으로 가는 ‘순간의 통로'가 안개에 의해 막혀버리고 순간이 가지는 죽음의 성질만이 드러난다. 이 순간은 안개로 뒤덮인 환상적인 마을을 구성함으로써 나타나고, 그 죽음의 성질은 다시 일상이란 것이 얼마나 죽은 상태와 같은가를 간접적으로 포착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차안의 세계에 대한 네거티브 필름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네거티브 필름 같은 가상적 세계는, 흐리멍덩한 색깔인 안개의 색깔로 대상의 윤곽만 드러내면서, 생명 없고 답답한 무엇으로 현상한다. 이 시를 더 읽어보자. 죽음의 공기인 ‘안개'의 빈 구멍은 사람들을 빨아들여 그 속에 가두어 놓는다. ‘이 읍' 사람들의 삶은 ‘쓸쓸한 가축들'처럼 무리지어 있지만, 안개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세계 앞에서 무력하고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그 읍은 “몇 가지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곳인데, 그것은 “한 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하기도 하고, “방죽 위에 醉客 하나가 얼어 죽”지만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같은 시에서)하기도 하는 사건이다. 겁탈당한 여직공과 얼어죽은 취객은, 윤곽밖에 보이지 않는 이 읍 안 사람들에겐 파괴당한 삶을 흐릿하게 바라보고는 쓸쓸하게 고개를 숙여보게 하는 사건 정도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그들 눈앞에서 타인들은 안개 속으로 ‘지워지고' 그들은 제각기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게 된다. 안개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 없게 만드는 세계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또는 그렇게 변화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미지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변화 없는 지속이 기억의 지속을 가져오진 않는다. 그 반대이다. 이 읍에선,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이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나 버린다. 그러므로 이런 지속의 시간성은 텅 빈 시간성이다. 기억이 없이 사는 것은 텅 빈 삶이다. 그것은 현재와 과거와의 상호적인 울림이 없는 시간이고, 그래서 미래조차 가능하지 않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현재가 끊임없이 과거로 되어야만 미래가 있을 수 있어서, 과거가 존재하지 않으면 미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개는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 존재이다. 움직이지 않는 존재는 죽은 존재이다. 죽은 존재인 안개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죽은 존재이다. 안개는 독과 같다. 그러나 그 읍 사람들은 안개를 마약처럼 마신다. 안개를 편하게 느낀다./ 안개가 끼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내보여야만 해서 “방죽 위의 얼굴들은 모두 낯설”어지고 “서로를 경계하며/바쁘게 지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읍은 ‘안개의 聖域'이 된다. 안개 속의 삶이 정상적인 삶이 된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게 되기도 한다. 이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가”게 된다. 이 반어적 표현에는, 안개가 ‘무럭무럭' 키우는 아이들의 삶이란 그들 모두 검은 굴뚝과 폐수와 겁탈의 위험이 있는 공장으로 쓸쓸히 끌려가는 가축과 같은 삶임을 암시한다. 3.작품속 죽음의 포착 (안개)를 읽으면서, 시적 화자가 희망의 포기를 선택했을 때 기형도 시가 발 딛고 있던 ‘순간'은 무서운 죽음의 세계-안개로 뒤덮인 읍과 같은-를 입벌려 드러낸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세계-지옥에서의 형벌-는 ‘느릿느릿 새어나'와 계속 ‘미친 듯이 흘러다'((안개)중에서)녀야 한다. 앞에서 본 (식목제)의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이 형벌은 정착이란 있을 수 없게 만든다. 기억도 없이, 미래도, 삶도 없이 흘러다녀야 한다. 오직 흘러다님의 지속만 있을 뿐이다. (안개) 속의 읍내 사람들은 명계(冥界)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삶을 잃어버린 이 유령의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일군의 기형도 시의 한 주제를 이룬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러 가시라고/모든 길들이 흘러 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에서 기형도는 죽음을 무릅쓰고 희망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현실의 이면에 있는 죽음의 안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이와 동일하게 안개에 중독된 유령들을 포착하기 위해선 희망을 억눌러야 한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육체를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들이 머무는 정거장으로 쓰려고 한다. 불안이 죽음을 예감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면, 불안을 머물게 한다는 말은 죽음들의 예감을 머물게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죽음들이 방문을 할 수 있도록 길이 자신에게 흘러들어 죽음이 그 길을 통해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길이 흘러드는 정거장으로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려면 자신의 육체 자체가 걸어다녀야 한다. 길이 걸어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길이 흘러 온다는 말은 자신이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길을 흡수한다는 말이다. 걸으면서 길을 흡수하고 흡수한 길을 통해 불안-유령을 만나고 그 유령의 세계를 구성하는 환상으로 시가 구성되게 된다. 이 유령과의 대면을 보여주는 대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白夜)에선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팡팡 빛나는 이 무서운 白夜” 속에서 “무슨 農具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천천히 걷고 있”는 한 사내를 보여준다.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사내는 “문닫힌 商會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그의 등에 “軍用 파커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말이다. 담배 살 돈이 없을 이 사내는 아마 어린 아들과 함께 길에 쓰러져 쓸쓸히 얼어죽을 것이다. (가는 비 온다)에서는, 어느 가는 비 오는 날,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지 않는다는 시적 화자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면서 전개하는 여러 상념들을 보여준다. 그 상념들은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나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면/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와 같은 죽음의 여러 모습이다. 주검을 직접 보여주는 시도 있다. 가령,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죽은 구름))와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검은 감정이 절제된 상태로 서늘하게 즉물화되어 있다. 시적 화자가 우울하게 가고 있는 거리엔 주검들과 죽음에 대한 상념을 유인하는 ‘낡은 간판'들이 널려 있으며 기후마저도 그러한 상념을 피워 올리게 한다. 그의 눈에 포착되는 사람들은 좀 있으면 죽을 운명이거나 죽어버린 이다. 또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유령들이다. 이들은 회한과 외로움에 말라죽어 가는, 행복과 거리가 먼 이들이다. 플랫폼에서 본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이”고((鳥致院)), 어느 카페에서 본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를 파내”면서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밋빛 인생))라고 새겨 넣는다. 삶을 박탈당한 유령들의 포착은 시적 화자 자신이 유령처럼 ‘흘러다'니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가 포착하는 대상의 대부분인 흘러 다니는 사람들은 시적 화자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촉매로 작용하게 된다. 그 사람들의 삶이 시적 화자의 삶과 다름없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다시 시적 화자의 내면 독백은 떠도는 자의 내면을 드러내게 된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 낸 추억들이 밟히고/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 (진눈깨비) 중에서 진눈깨비 뿌리던 날, 시적 화자는 그날도 역시 거리를 걷는다./ 거리에서 그는 ‘취한 사내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정거해 있는 ‘빈 트럭'도 본다. 그리고 ‘구두 밑창'으로 ‘추억들이 밟히'는 소리를 듣는다.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밟히는 소리도 듣는다. 외로운 빈 트럭과 쓸쓸하게 쓰러지는 취한 사내들에 대한 묘사와 시적 화자의 어린 시절들을 불러오는 회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시적 화자가 주체가 되어 추억들을 불러온다기보다는 저 진눈깨비와 거리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 기억들을 불러온다. 그 기억은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오”시기에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엄마걱정) 중에서)의 기억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가 거리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은 엄마가 없어 빈방에 혼자 훌쩍거린 기억을 감추고 있을 사람들이며, 역시 집에 들어가면(집이 있다면) 빈방에 홀로 앉아 있을 사람들일 게다. 죽어가는 이 유령들은 그런 기억을 깊이 품고 살아갈 것이며, 이는 다시 역으로 시적 화자 자신도 그 기억을 품고 쓸쓸히 죽어 가는 유령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죽음'을 발견하는 ‘흘러 다니기'는 점점 시적 화자 자신 안의 죽음의 흔적을 찾는 여행이 되어버리게 된다. 시적 화자는 “곧 무너질 것만 그리워했”((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다고 말한다. 무너지는 것들이 결국 그의 삶이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증언하는 시적 화자 자신이 유령과 같이 떠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자신의 다리를 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여행자) 중에서)라고 울부짖는 여행자와 같은, 떠돎을 그만둘 수 없는 유령이다. 환상적 공간의 열린 순간을 통해드러난 죽음의 세계, 그리고 그 안을 떠돌아다니는 유령적 삶의 포착은, 이렇게 자신도 유령이라고 인식하는, 안개의 구멍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도 안개에 중독되어 버렸다는 점을 인식하는 시적 화자의 등장을 통해 완성된다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죽음의 공간은 더욱 전일화되고 가공할 것으로 드러낸다. 유령의 세계를 증언하는 자신도 유령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의 그 경악의 순간은, 바로 메두사가 페루세우스의 방패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그 놀람과 두려움의 순간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기형도의 시는 바로 그 경악의 순간을 포착한 카르파치오의 (메두사)란 ‘그림'과 같은 것일 터, 시 텍스트는 그 경악의 순간 자체, 또는 그 순간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경악의 순간을 구성하여 현현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시-예술 텍스트가 구성되기 이전엔 그 경악의 순간을 우리는 ‘맞서게 되지' 못한다. 환상을 사용하여 순간을 포착하는 시-예술이 그 경악의 얼굴을 객관화할 때 비로소 경악의 순간은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입 속의 검은 잎)은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본 메두사가 경악하는 순간을 객관화하는 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그의 어린 아들은/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그 일이 터질지 모른다, 어디든지/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입 속의 검은 잎) 중에서 이 시에서 등장하는 진술과 사건들이 현실의 어떤 대응물을 지시한다고 본다면 곧바로 해석의 난점이 생길 것이다. 운전기사, 장례식, 망자의 혀, 없어진 사람들, 죽은 사람, 검은 잎,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나' 등, 이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시 텍스트 안에 배치되었을 땐 이 단어들은 그 대상들을 지시하지 않게 된다. 하나의 극적 공간 속으로 이 존재들은 새로 의미를 얻으며 움직인다. 이 움직임은 공포의 분위기에 맞추어진다. 어떤 가공할 권력에 의해 살육된 자들이라 상상할 수 있는 ‘무더기'의 실종된 자들-망자들-의 말하지 못하는 혀-잘린 혀일까?-는 유령처럼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그 유령들은 벌써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린 사람들 몸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 혀들은 이제 ‘거리에 흘러넘'친다. 장례식은 살육당한 자들 중 한 명의 장례식일까? 그 죽은 이의 잘린 혀 역시 거리에 흘러 다닌다. 물론 그 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잘린 혀들이 내는어떤 철버덕거리는 소리, 성대가 잘려나간 채 바람만 빠지는 쇳소리를 내는, 꿈틀대는 소리들을, 원한들을, 슬픔들을, 저주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환청 속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혀가 ‘천천히 굳어'감을 자각한다. 그것은 시신을 실은 ‘백색의 차량 가득' 나부끼는 검은 잎 때문이다. 살육이 자행되는 세계에서 살해당한 자들의 유령이 검은 잎일까? 그 유령들-검은 잎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릴 때 혀는 굳어져오며, 이윽고 죽은 자의 혀가 된다. 그리하여 시는 죽은 자의 혀로 쓰여지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옥에 가 있는 이들이 지옥에서 겪는 고통을 무당처럼 대신 말해주는 이가 된다. 정리하자면, 시적 화자가 온통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 와 있음을,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세계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음을, 더 나아가 ‘죽은 사람'인 운전기사가 어딘가로 그를 데려가서 이 유령들이 시적 화자의 혀를 통해 죽음의 이 세계를 증언할 수 있도록 시적 화자에게 내리는 신들림을, 언제 살육될지 몰라 두려워하는(‘그 일이 언제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이의 음산한 어조로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공포의 순간/을 객관화시키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어떤 수수께끼를 동반한 순간적 전율을 느끼게 된다. 기형도의 시가 도달한 한 극점은 바로 여기다. 앞에서 보아온, 환상적 공간이 뚫어 놓은 순간의 구멍을 통해 나타나, 죽음을 퍼뜨리는 세계와 그 속에서 떠도는 유령들이, 이 시에선 하나의 전율케 하는 장면으로 종합되어 갑작스레, 충격적으로 우리에게 현현하기 때문이다. 이 경악의 세계는 물론 가상의 세계이고 현실 세계로 치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형도 시의 세계가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향유 대상으로서의 단순한 가상과는 달리, 시어가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 뿜어내는(메두사를 본 메두사), 자기 파열이 가져오는 전율을 우리에게 이 가상 세계는 던져주는데, 그 객관화된 전율과 맞서는 독자는 충격 속에서 새로운 현실에 부딪히며 일상적 시간의 지속이 파열되는 ‘순간'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상적 순간의 충격 속에서 일상적 시간 안에 감추어진 안개와같은 죽음의 습기를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공포의 세계는 기형도 시가 열어 놓은 ‘순간의 통로'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입 속의 검은 잎)의 세계는 그 반대 극점이라 할 수 있는 (숲으로 된 성벽)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고 희망할 순 없을까. ‘순간의 통로'는 다시 저 유토피아적인 미의 세계로, 숲으로 된 아날로지의 세계, 공기 방울 같은 환상의 세계로 길을 열어 놓기도 하지 않았는가. 물론 아날로지의 세계가 급전하여 유령들의 세계, 경악의 세계가 현현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보아 왔다. 그러나 반대로, 경악의 세계가 급전하여 다시 저 아날로지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 두 극점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경악의 세계는 다시 희미하게 ‘숲으로 된 성벽'으로 가는 길을 비출 수 있지 않을까. 유토피아적 세계는 부정성을 통해서만 희미하게 빛날 수 있다면 말이다./그렇다면 기형도의 시는 일상적 삶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를 통해세계와의 화해의 열망을 담아 놓을 수 있는 용기도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를 보여주기 위해 두 세계의 연결 지점을 찾아내야 할 것이고, 이 작업은 상당한 분석과 해석을 요하는 일일 것이다. 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도 비평적 재구성은 완성되지 않았다. 아니 결코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기형도 시 텍스트는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몸을 벌리고 있다. (끝) ◆당선소감 영광이다.기쁘다.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진다.과연 좋은 글을 내가 계속 써나갈 수 있을지,두렵기조차 하다. 당선 통보를 받고 비평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좋은 비평을 하기 위해선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큰일이다. 지금은 문학의 정치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문학이 다시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정치성에 대해서,그리고 더욱 정치성이 짙은 비평에 대해서. 선거 행위만이 정치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정치는 윤리의 문제로서 생각해야 한다. 또한 윤리가 단순한 도덕의 차원이 아니라면 삶에서의 권력과 활력 문제로서 윤리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문학은 권력 망을 드러내고,비판하며 그것에서 삶이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줄 수 있고,삶의 활력을 북돋을 수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문학의 윤리-정치성은 더욱 증폭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학 그리고 비평이 정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새로운 인간 관계의 가능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나에게 사랑과 기쁨을 전해 준 사람들에게,그리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도,빈 말이 아닌 ‘고맙습니다.’란 말을 전하고 싶다. 이성혁 ●약력 67년 서울생, 한국외국어대 일어과 동 대학원(국문학), 외대강사, 99년 ‘문학과 창작'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심사평 김용하의 ‘미적인 것의 정치성과 정치적인 것의 윤리성’,오홍진의 ‘관념으로 빚은 소설의 성채’,이성혁의 ‘경악의 얼굴-기형도론’,이은식의 ‘사물과 하나가 되기까지의 여정’,장사흠의 ‘풍경의 미학과 권력의 탐색’이 주목을 받았다. ‘미적인 것…’은 미학적 범주들과 시적 언어 사이의 조응 양상을꼼꼼히 살핀 글이지만,미적 개념들을 상호 연관시켜 긴밀한 인테리어를 꾸미는 데는 실패하였다.‘관념으로…’는 짐승의 세계와 신성의 세계 사이에서 요동하는 정찬 소설의 권력의 역학을 집요하게 추적하였으나 스스로 논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말았다.‘사물과…’는 다양한 철학적 개념들을 갈아타며 정현종의 시적 여정을 차분히 밟아간 글이었으나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풍경의 미학…’과 ‘경악의 얼굴…’이 마지막까지 남았는데,‘풍경의…’는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개진된 권력의 내면화와 그에 대한 문학적 응전의 과정을,핵심 의미체들을 길어내며 흥미진진하게 추적한 글이고,‘경악의…’는 시인의 심리학에 치중한 종래의 평문들을 단김에 뛰어넘어 극적 구성의 관점에서 기형도의 시 세계를 새롭게 조명한 글이다. 그러나‘풍경의…’는 기계적인 구성과 엉뚱한 결말이 글쓴이의 설익은 문학관을 엿보게 하였으며,‘경악의…’는 미학에서 사회학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지리멸렬해지더니 급기야 막다른 길로 뛰어들고 말아,심사자들을 경악케 하였다.하지만 패기만만한 도전과 그 패기가 창안해 낸 새로운 해석 세계는 썩 강렬한 인상을 남겨 마지막 선택의 근거가 되었다.이성혁씨의 당선을 축하하며 끈기 있게 정진하기를 당부한다. 정과리 김인환
  • 리뷰/ 구본주 조각전 ‘시대의 표정-아버지’/‘작아진’ 아버지 적나라하게 묘사

    문 밖에는 문명에 교화하지 않은 검은 개 한 마리가 눈을 번뜩이며 어슬렁거린다.그 앞을 지나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철판으로 만든 어마어마한 크기의 양복바지 밑단과 신발(길이 5m,높이 3m)이 중앙에 놓여 있다.거인국에 온 걸리버 같은 느낌이다.조각가 구본주의 작품 ‘하늘’이다. 앞만 보며 달려온 40∼50대 아버지들을 형상화한 것으로,신발로 전신 크기를 환산하면 키 50m인 거대한 영웅의 모습이 연상된다.구씨는 “어린시절 우리의 영웅이던 아버지,가장의 모습을 되살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6전시실에서 19일까지 열리는 ‘구본주-시대의 표정:아버지’는 사회와 직장에서 시달려 쪼그라들고 작아진 ‘현실의 아버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조각전이다.소재는 나무와 철판.예술의전당에서 젊은 작가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고자 마련한 ‘SAC 젊은 작가전’의 첫번째 기획전이다. 구본주씨를 두고 화단에서는 “조각의 맛을 살려서 작업하는 국내 몇 안되는 조각가”라고 평가한다.작가가 직접 두꺼운 철판을 두드리고구부려 용접해 표현해 낸 양복이나 가죽가방의 자연스러움을 손끝으로 만져 보면,그 평가가 헛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확연해진다. ‘위기의 남자Ⅰ·Ⅱ’는 직장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과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다.벽에 찰싹 달라붙어 탈출을 꿈꾸는 모습이나,잔뜩 위축돼 그림자처럼 가늘어져 인간의 외형을 잃어가는 남자는 안쓰럽기 짝이 없다. 담벼락을 붙들고 때론 전봇대에 기대어 노상방뇨를 하는 ‘아빠의 청춘I·Ⅱ’도 가슴이 짠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담배를 이빨로 질끈 물고 성기를 내놓은 채 오줌 누는,머리카락이 성근 50대 중년남자는 늘어진 가락으로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작가는 “남자들은 오줌발을 통해 젊음과 쓸모 있음을 확인한다.”며 “맹수들이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기 위한 표시로 봐달라.”고 부탁한다.‘눈칫밥 30년’은 마누라·상사의 잔소리에 말뚝처럼 땅에 쳐박혀 얼굴만 남은 가장의 씁쓰레한 모습이다. ‘내일이면 까마득히 기억도 못할 순간에 집착하는사람’이나 ‘Mr.Lee’는 움직이는 조각처럼 허공에 붙어 있는데,전시장 벽에 비친 그림자를 감상하면 된다.전시장에는 몰래카메라가 설치돼 있고 찍힌 영상이 신발 안에서 상영되는 등 재밌는 요소가 적잖다. 이제 다시 개로 돌아가 보자.‘시대의 모습-아버지’에 왜 ‘거리의 개’가 전시장 앞에 얼쩡대는 것인가.‘남자여! 아버지여! 야성을 되찾자.’는,그 자신 두 자녀의 아버지인 작가의 다짐이자 격려인 셈이다.(02)580-1515. 문소영기자 symun@
  • 오피니언 중계석/ 김영곤교수 인터넷신문 기고/상습 침수지역 주민 집단이주시켜야

    태풍과 폭우로 전국이 사상 최악의 피해를 입은 가운데 김영곤 조선대 생물과학부 교수가 최근 인터넷 신문 이슈투데이(www.issuetoday.com) 기고를 통해 상습 침수지역 주민 이주 등 근본적인 수방 대책을 대안으로 제시해 눈길을 끈다.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김영곤교수 인터넷신문 기고 해마다 여름이면 거의 예외없이 장마가 오고 태풍이 지나간다.장대비가 시간당 50㎜만 집중적으로 쏟아져도 물난리가 오는 것은 비일비재하다.아무리 현대 과학이 발달해도 기습적인 호우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선진국 역시 기상위성 등 첨단 정보시스템을 통해 빈틈없는 예측과 통계학적 산술을 이용하지만 하늘은 이를 비웃듯 심술을 부릴 때가 많다. 세계적으로 매년 홍수로 죽어가는 인명과 재산 피해를 계산하면 수조 달러가 훌쩍 넘을 것이다.그렇다면 이를 예방하는 슬기와 지혜만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첩경이 아닌가 싶다. 매년 여름마다 우리 주변에선 기상예보를 무시하고 등산·낚시를 즐기다 폭우에 떠밀려 죽어가고 파도에 휩쓸려 조난을 당하는 등 야단법석을 떤다.제목숨 제가 지킬 줄도 모르면서 믿는 구석이 있는 듯 제 맘대로 산다.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위한 보상은 대부분 세금으로 충당된다.일기예보를 무시하는 이들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데도 국민은 그 ‘얼간이’인생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한다. 우리에게는 안전에 대한 정량화된 시스템이 부재하다.기껏해야 다리가 견딜 수 있는 하중이 얼마이니 건너서는 안될 차량에 대한 경고,하천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니 수영금지라고 쓴 기울어진 팻말 정도가 고작이다.따라서 우리 생명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위협받을 수 있다. 안전핀이 주택가 골목의 담벼락에 붙어 있는 가스통,그에 대한 불안은 우리를 너무도 초라하게 한다.모든 이마다 스스로 안전핀을 달고 다녀야 될 날이 올지 모른다. 길거리를 가다가 맨홀에 빠져 어린이가 죽으면 그때서야 난리법석을 떤다. 하천에 농약병이 떠다니고 오물이 뒤범벅이 되어도 하류에서는 낚시를 하며 흥에 겨워 매운탕을 끓이면서 제 몸에 들어가는 독극물은 생각하지 않는다.모르고 먹으면 약이 된다면서 위안을 삼는다. 먹을 것이 넉넉하고 명품으로 몸치장을 하면 선진화한 문화인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선진국 대열은 아직 한참 멀다. 산비탈에 집을 지을 땐 그에 따른 구조공학이 도입되어야 함에도 비가 와 흙더미에 매몰되면 정부 대책만 나무란다.상습 침수지역에 살면서 생명만 겨우 건지는 쓰라린 이재민 경험을 하면서 또다시 그 자리에 집을 짓는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삼만리쯤 떨어져 있는데 또다시 악몽의 터에 벽을 바르고 문을 고치며 안도한다. 정부는 왜 근본적인 수해대책을 평소에 수립하지 않는지 모르겠다.제방을 쌓고 도로를 복구하고 다리를 놓고,또다시 장마에 휩쓸리면 다시 건설하고.이게 무슨 쥐의 학습장면 연출인가. 상습 수해지역 주민은 아예 집단적으로 이주시키는 대안이 고려되어야 한다.우리나라처럼 산이 많은 농경사회에서 과거엔 이러한 지역이 어쩔 수 없이 삶의 터전이 되었지만 이제는 좀 더 높은 지역으로 이주시켜 안전한 주거문화로 개선해야 한다. 홍수로 인한 국민의 경제적 손실과 정신적 폐해는 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이제 정부는 적어도 상습 수해지역을 등급별로 정해서 우선순위에 따라 안전지대로 이주시키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제방을 쌓고 수로를 정비하며 댐을 건설하는 등 치산치수는 원천적으로 중요하다.하지만 수해와 직접 관련되는 위기로부터의 탈출은 안전지대로 옮기거나 안전지대를 만드는 일이다.지방자치단체에서도 주택단지를 확보해 장기대여,세제 혜택 등을 통해 주거여건을 개선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서 다시는 수재의 재앙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이제 이러한 악습을 우리 땅에서 걷어내고 절망감과 삶의 터전이 교차되는 시행착오는 추억으로 남겼으면 한다. 언제까지 비만 오면 복구를 되풀이하는 시행착오를 거듭할 것인가. 정리 임창용기자 sdragon@
  • ‘광복절 특사’ 촬영현장 - 탈옥장면 NG…땅굴 드나들기 거듭

    4개의 긴 막대에서 물이 힘차게 쏟아진다.“레디 고.”10m 높이의 크레인위 카메라가 미끄러지듯 내려오자 감독이 소리친다.“승원이 형!” 이윽고 번개조명이 터지고,헐떡대는 소리가 들린다.“으∼흐∼.” 땅 속에서 불쑥두 손이 나오더니 플래시를 입에 문 차승원이 힘겹게 고개를 내민다.마치 자궁 속을 빠져나오는 쌍둥이처럼 이어 설경구의 머리가 보인다.쏟아지는 빗물에 고개를 젖히고 두 팔을 벌려 환호하는 차승원.“컷!” 영화 ‘광복절 특사’는 ‘주유소 습격사건’‘신라의 달밤’으로 코미디영화의 신기원을 연 김상진 감독·박정우 작가가 만드는 국내 최초의 탈옥영화다.이날은 전주공고 안에 지은 교도소 세트로부터 약 50m 떨어진 공터에서 촬영했다.탈옥에 성공하는 장면이다.어딘지 낯이 익다 했더니,‘쇼생크 탈출’의 패러디. 두 배우와 김감독,정광석 촬영감독,박 작가가 현장에 설치된 모니터 앞에 모였다.정감독은 “좋은 순간인데 왜 질질 짜냐.”라며 불평을 하고,김감독은 “시간이 너무 긴데….”라고 아쉬워한다.눈치만 보는 배우들.결국 다시 가기로 했다. 재촬영은 더 고역이다.스태프들은 땅굴 입구를 흙으로 다시 막으려고 흙을 반죽하고 토성을 만들 듯 하나하나 쌓는다.잠시 짬을 내 담배를 피우는 두배우에게 김감독은 “오늘 별로 힘 안들지?”라며 너스레를 떤다.머리부터 발끝까지 흙으로 뒤범벅된 차승원은 “너무 하시는 거 아니예요.”라며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새벽임에도 후텁지근한 날씨에 모기떼들의 ‘공습’으로 현장 상황은 열악했다.비가 안오는 날엔 밤샘 작업을 하기 일쑤여서 60여명의 스태프는 모두 탈진 상태.그 가운데 한 명이 “내일 쓰러져서 실려가면 육수 부족이라고 말해라.”고 농담을 던져도 웃을 힘조차 없는 듯 반응이 없다. 촬영 전 둘러본 교도소 세트는 붉은 벽돌의 아담한 2층 건물 2동이었다.학교 건물 뒤편 공터에 60t의 흙을 붓고,서대문형무소를 재현한 건물과 망루,담을 짓는 데 전체 제작비 32억원 가운데 8억원이 들었다.‘진짜’교도소에서는 촬영을 허가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묵한 설경구와 달리 차승원은 특유의 느린 말투로 “여기가 담벼락이고요.”라며 직접 설명을 해 웃음을 선사했다.교도소 세트장에 구경 온 동네 꼬마들은 마냥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학생들도 소문을 듣고 우르르 몰려왔다.구경하는 것은 막지 않았지만 “지금 사인을 받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에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교도소 안 촬영은 서울종합촬영소에서 진행된다.이 교도소 세트는 외곽 촬영 때만 쓰는 것.창살을 가르며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는 그럴싸한 건물이지만 감옥 안은 텅빈 채 쓰레기들만 나뒹군다. 준비가 끝나고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구경꾼으로서는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지루한 과정의 반복이지만,감독은 세세한 차이에도 민감해지는 법이다.두번째 촬영의 불만은 땅굴을 나올 때 배우들의 얼굴이 잘 안 보인다는 것.지친 스태프들에 대한 배려 때문인지,지상에 나온 뒤의 장면만 다시 찍기로하고 ‘OK’사인을 내렸다.이 3분짜리 장면을 찍느라고 촬영을 시작한 지 3시간여만이었다. 전주 김소연기자 purple@ ■'광복절…' 김상진감독 -“코미디가 모두 가벼운건 아니죠” “상업영화만 찍냐구요? 저도 나이 60이 되면 칸영화제 감독상도 받고 싶은 놈입니다.” 촬영현장에서 만난 김상진 감독은 검게 그을려 건강해 보였다.왜 탈옥영화를 소재로 택했느냐고 묻자 “다양한 상황을 끌어낼 수 있어 데뷔 때부터 찍고 싶었지만 돈이 많이 들어 엄두를 못냈다.”며 웃었다. ‘광복절 특사’는 탈옥과 ‘역탈옥’의 해프닝을 그린 영화.빵 하나 훔치고 감옥으로 간 무석(차승원).‘고무신을 거꾸로 신은’애인 때문에 충격 받은 재필(설경구).둘은 탈옥에 성공하지만,다음날 자신들이 광복절 특사 명단에 끼어 있음을 알게 된다. “탈옥,서울행과 돌아옴,석방 등 2박3일이 영화의 시간입니다.이 속에서 소외된 자들을 바라보는 편견,사면된 정치인에 대한 풍자를 담아 사회를 통쾌하게 비틀어 볼 생각입니다.” 코미디를 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까.그는 “코미디는 가볍다고 생각하는 게 불만”이라면서 “사실 우리 사회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코미디”라고 주장했다.김감독은 다음 영화부터는 로맨스·역사·섹스코미디 등 새 장르에 도전할생각이다. 두 배우에 대해서도 칭찬에는 침이 말랐다. “좋은 연기자들이 있는데 영화를 못 만들면 제가 죽일 놈이죠.‘오아시스’에도 교도소가 나오는데 설경구는 전혀 다르게 연기해요.‘느끼한’차승원은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연기자죠.” ‘광복절…’은 10월초 개봉이 목표였는데,연이은 비로 촬영이 늦어져 10월 말쯤이나 공개될 예정이다. 김소연기자
  • 낙동강 중·하류 범람위기, 곳곳 물난리…남부 오늘도 큰비

    중부지역에 집중호우를 뿌린 강수대가 9일 남하하면서 남부지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부산 영도에는 9일 기상관측 사상 최고치인 460.5㎜의 집중호우가 쏟아졌다.영도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는 이날 새벽 시간당 30∼50㎜의 폭발적인 국지성 호우가 쏟아졌다. 기상청은 “남서쪽에서 계속 공급되는 수증기 때문에 9일 밤부터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또다시 최고 150㎜ 이상의 국지성 호우가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10일까지 서울·경기·강원 영서·북한지역에는 10∼40㎜,충청·강원 영동에는 20∼60㎜의 비가 더 오겠다. 부산 북구 구포동·화명동 일대 비닐하우스와 김해평야의 농경지가 물에 잠기는 등 낙동강 중·하류 경상도 지역 곳곳에서 물난리를 겪었다.특히 만조가 겹치면서 수위가 계속 높아져 오후 10시30분 현재 낙동강 진동·삼랑진·구포지점의 수위는 위험수위에 육박하고 있다. 이날 오전 3시30분쯤 합천군 청덕면 유천리 유천마을 낙동강 둑 10여m가 붕괴되고 지난 8일 밤 10시30분쯤 합천군 청덕면 가현리 가현마을 앞 황강 수위가 높아지면서개축중이던 양수장 20여m가 붕괴돼 농경지 수백㏊가 침수됐다.경남 통영군 등 해안지역에는 바닷물 높이가 최고조에 이르는 백중사리가 겹쳐 일부 해안도로가 침수됐다. 이날 오전 3시쯤 부산 강서구 눌차동 강모(46)씨 집 뒤쪽 높이 3m의 축대와 영도구조양맨션 뒤쪽 담벼락이 무너지는 등 부산지역 10여곳에서 붕괴사고가 발생해 주민들이 긴급 대피했다.대구와 경북에서도 주택 51가구가 붕괴됐다. 또 여수·포항 등 남부지역에서는 모두 53편의 항공기가 결항됐다.이번 비는 중부지역에서는 11일 오전까지 이어지다 개겠으나 남부지역에서는 12일 오전까지 계속되겠다. 윤창수기자 geo@
  • 새영화/ ‘해적, 디스코왕 되다’

    빨갛고 파란 총천연색 포스터에 ‘빤짝이’ 의상이 시선을 끄는 ‘해적,디스코왕되다’(6일 개봉).1980년대식 촌스러움을 무기로 유치찬란한 이야기를 엮어내는 그렇고 그런 코미디이겠거니 하고 생각한다면 잘못 짚었다. 줄거리는 단순하고도 황당하다.‘한 싸움하는’멋진 청년 해적(이정진)이,아버지병원비 때문에 술집에 나가는 첫사랑이자 친구 동생인 봉자(한채영)를 구하는 이야기.디스코텍 사장이 해적에게 디스코대회에서 1등을 하면 봉자를 내주겠다는 황당한 제안을 하면서 해적과 친구들의 디스코 훈련작전이 유쾌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촌스럽지도 황당하지도 않을 뿐더러 경박한 웃음을 강요하지도 않는다.74년생 젊은 감독은 황당한 소재를 기교 없이 정공법으로 풀어간다.편집은 비교적 느리고,초점은 정겨운 풍경과 따뜻한 인간에 맞춰져 있다. 꺼칠한 시멘트 담벼락,다닥다닥 붙은 판잣집 사이 작은 골목길을 울리는 ‘똥 퍼엇~’하는 외침,아침마다 데워먹던 유리병 우유,발동기 붙인 ‘딸딸이 자전거’까지 80년대 초 정감 어린삶의 풍경과 푸근한 정서가 고스란히 화면에 담겼다.고달프지만 인간 냄새가 나는 시절에 대한 향수가 현대인의 코끝을 찡하게 한다. 캐릭터들도 개성이 넘친다.해적의 두 친구인 바보스러운 순딩이 봉팔(임창정)과어설픈 반항아 성기(양동근),바가지 머리를 한 춤교사 제비(정은표),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디스코텍 사장 큰형님(이대근)등 어느 누구도, 완벽하진 않지만 미워할 수 없는 성격을 지녔다. 육두문자 섞어가며 난장판을 벌여 웃음을 끌어내지 않고도 기상천외한 소재의 코미디를 소화해 낸 김동원 감독은 이 영화로 성공적인 장편 데뷔를 한 것으로 보인다.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겉옷을 입을지 궁금하다. 김소연기자
  • 임권택 감독 ‘취화선’ 새달 10일 개봉

    임권택 감독이 오원 장승업이란 물감을 풀어 영화를 찍는다고 했을 때 다들 그게 인물화가 되겠거니 여겼다.그러나 최근 시사회장에서 두루마리를 푼 스크린은 차라리 풍속화,시대화에 가까웠다. 개인을 형성하는 시대의 요철을 밋밋하게 뭉개면서 한 천재화가의 개인적 드라마를 돋을새김하는 인물화하곤 거리가 있었다.오원의 예술혼은 구한말이란 베틀 속에 먹여지는 여러 실 가운데 가장 아기자기한 올이었다.예술과 시대,예술과 일상이 극도로 일기불순한 하늘처럼 간단없이 스파크를 일으키는 영화,‘취화선’이 다음 달 10일 극장가에 걸린다. 화면 가득 확 풀린 먹물이 일순 개이더니 선경인 양 돌아앉아 산을 치고 있는 사내가 오원(최민식).이윽고 카메라는 그의 어린 시절로 줄달음쳐 예술의 뿌리부터 냅다 훑어내린다. 비렁뱅이 고아 승업에겐 핏속을 철철 흐르는 환쟁이의 끼가 축복이고 또 천형이다.일찌감치 그를 알아본 개화파 선비 김병문(안성기)이 거두려하나,방랑의 역마살을 타고난천재를 사대부가 담벼락이 가둘 수는 없는 일.김병문과의인연은,승업이 삶의 매듭들을 하나씩 지을 때마다 번번이되돌아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로만 그치지 않는다.기둥 줄거리를 삼킬 듯 쏟아지는 인물들의 홍수속에서 잊을 만하면 되살아나는 둘의 조우는 카메라의 중심을 잡아주는삼발이이기도 하다. 외세가 조선을 한 뼘이라도 더 집어삼키려 으르렁대던 19세기 말.출신을 넘나드는 천재 화가라서 시대의 파란도 쉽게 넘나들까.명성을 박차고 “(세인의 평에) 발목 잡히면영원히 놀아나는 거야.”라며 괴나리 봇짐을 꾸리는 화가.허나 그를 편한 방에서 등떼미는 손길 하나가 갑신정변,동학혁명 등 불순한 날씨처럼 요동치는 시대라는 걸 감독은말하고 싶어 한다. 개인을 뛰어넘는 시대와 시대를 초월하는 개인의 예술혼이 전기의 음과 양처럼 맞부딪히는 영화는 거대한 기획을 요구한다.이 거대 스케일의 시대화,풍속화에는 우리 시대의내로라는 일가들이 힘을 보탰다. 한국화가 김선두가 오원 화폭 80여점을 재현,묵향을 피울때 정일성 촬영감독은 우리 국토 깊숙이 렌즈를 들이대 단아한 사계를 찍어올렸다.도올 김용옥의 박식이 난무하는대본은 국립국악원의 호젓한 정악연주에 버무려진다. ‘롱테이크(오래 찍기)’를 즐겨써온 감독이 이번엔 유난히 끊어찍기로 선회한 것은 관객의 스피드 식성을 의식한것만은 아니다. 개인사의 잔잔한 여울이 아닌 역사의 폭포를 파노라마로담기 위한 선택이었으리라.그런 화면에서 여러 부문의 쟁쟁한 일가들이 내공을 겨루다 보니 관객들은 숨이 가빠지기 쉽다.지긋이 걸터앉아 완상할 여백이라도 한 자리 있었으면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화선’은 신선하다.죽끓듯 변해가는 영화계 프레임 안에서 예술과 역사를 얽어짜는 굵은 목소리를 들은 게 얼마만인가.칸 영화제도 그걸 알아보고 일찌감치 본선무대로 불러올리지 않았던가.쉽사리 감정선을내비치지 않는 ‘취화선’을 온전히 즐기려면,값비싼 보약을 먹을 때처럼 느긋해지는 법을 알아야 하리라. 손정숙기자 jssohn@
  • 은행강도 드러난 문제점/ 범인들 軍 ‘제집 드나들듯’

    군경합동수사본부가 서울 상봉동 한빛은행 중랑교지점 소총 은행강도 사건 용의자 4명을 추궁한 결과,수방사·해병대 등 군부대의 비상근무 체제와 실탄관리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확인됐다. 군과 경찰의 공조수사에도 문제점이 드러났다. ◆실탄관리 소홀=주범인 유모(24)씨는 수방사에서 K-2소총을 탈취한 후 불과 며칠만에 자신이 근무했던 강화도 해병 2사단 모부대에 침입,K-2소총 실탄 400발을 훔쳐나왔다고 진술했다. 당시 군은 수방사 총기 탈취 사건 뒤 비상사태를 선포,총기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유씨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단급 부대에 혼자 들어가 실탄을 훔친 뒤 유유히 빠져나온 것이다. 특히 유씨는 부대 담벼락 아래 배수로를 통해 부대 안으로 침입,준비한 절단기로 탄약고 자물통 등을 절단할 때까지 초병은 맞닥뜨리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해병대측은 이 부대로부터 실탄을 탈취당한 사실을 보고받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군·경 공조수사체계 엉망=경찰은 은행 뒷문에서 발견한 불발 실탄 한 발에 대해서는수사선상에 올려놓지도 않았다. 범인 검거의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었는데도 무시한 것이다. 경찰은 실탄에 대해 의구심은 갖고 있었지만 군측에 수사 협조를 요청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은행권의 카드 남발=금융권의 대학생에 대한 신용카드 남발이 범행의 한 원인이 됐다. 경북 안동의 Y고등학교 동창생들인 유씨 등 4명은 현재 20대 초반의 지방대학 재학생이거나 휴학생으로 은행권은 직장도 재산도 없는 이들에게 쉽게 카드를 발급해줬다. 이들은 “자동차 구입 할부대금과 카드빚 1500만원을 갚기 위해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이영표기자 tomcat@ ●용의자 일문일답 “”영화 '히트' 보고 범행 모의””. 서울 중랑경찰서로 압송된 4인조 강도 용의자들은 “은행강도를 소재로 한 영화를 여러차례 보면서 범행을 계획했다.”고 털어놨다. 다음은 일문일답. ■영화에서 범행의 힌트를 얻었다고 하는데. 은행을 털기로 마음먹고 ‘히트’라는 비디오 테이프를 구했다. VTR의 비디오탐색 기능을 이용해 은행강도 관련 대목만 추려 반복해서 보았다. ■휴대전화가 추적될 줄 몰랐나. 범행 전에는 휴대전화 추적으로 경찰 수사망에 걸릴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은행을 턴 뒤 차량을 버리고 도망갈 때 2차례 정도 휴대전화를 사용했다. 뒤늦게 언론보도를 통해 휴대전화 추적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이미 휴대전화 통화내역이 기록됐다.’는 생각에 계속 갖고 다녔다. ■돈을 훔쳐 무엇을 하려고 했나. 카드 빚도 갚고… 많은 생각은 안해 봤다. ■범행대상 은행은 어떻게 정했는가.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대상을 물색하던 중)우연히 그 앞을 지나다가 결정했다. ■범행 시간을 아침으로 정한 이유는. 직원들이 출근할 때 은행 뒷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가 가장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다른 은행강도 계획은 있었나. 없었다. 액수가 많든 적든 한차례로 끝내려고 했다. ■범행에 쓴 다른 장비는. 무전기를 3대 샀다. 작업(은행털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피하면서 불안하지 않았나. 곧 붙잡힐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은행을 털고 3∼4일이지나면서 차량에 가스를 주입한 장소,차량을 버린 장소 등이 보도되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영표기자. ●'히트'는 어떤 영화. 마이클 만 감독의 1995년 액션영화 ‘HEAT’는 로버트 드 니로가 범죄조직의 보스,알 파치노가 강력계형사반장으로 나왔던 영화.LA경찰 빈센트(알 파치노)등 경찰과 은행강도인 닐(로버트 드니로) 일행이 LA도심 한 가운데를 무대로 정면 대치해 무시무시한 총격전을 벌인다.
  • [허윤주기자의 교육일기] “”며칠씩 밤을 새다니 제 정신인가요””

    ‘전학 열풍’이 조금 수그러든 지난 4일 오전.서울시교육청 별관 민원실 앞에는 번호표를 든 100여명의 학부모가 줄을 서 있었다.전경들이 차단막을 친 민원실 현관 앞에는 민원실 관계자가 확성기를 들고 “지금 갈 수 있는 학교는 강남 0고,X고입니다.”라며 목청을 높였다.“열흘이걸리더라도 원하는 학교에 된다면 기다리겠는데….”하는어떤 어머니의 핸드폰 통화 소리도 뒤섞였다. ‘해외토픽이 따로 없군.’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섰다가,마침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비서를 대동하고 나온 유인종 교육감과 마주쳤다. “어휴,난리네요.내년에는 어떻게 좀 전학제도가 바뀌나요?” 악수를 나누며 슬며시 물었다.그러자 “XX 여자들인데 뭘 신경을 써요.며칠씩 밤을 새다니 그게 제 정신인가요.”라고 말했다. 교육감의 ‘돌출 발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얼마 후 기자실에 들러서도 이 발언은 서너차례 반복됐다.“저렇게 키운 애가 효도할 것 같으냐.”는 독설도 덧붙였다. 내가 보기에도 ‘전학 밤새기’는 지나친 것 같았다.그러나 ‘맹모 삼천’이 미덕으로 자리매김한 나라에서,그것도 서울시 교육 수장의 입에서 나온 발언 치고는 지나치게‘솔직’해 거북스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과민한가 싶어 주변의 학부모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울시교육청 담벼락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면서 미쳤다는 생각이 드냐고?’ 대답은 한결같이 ‘NO’였다.며칠 밤을 새더라도 내 아이가 좋은 학교에 가서 잘만 된다면 자기라도 줄을 서겠다는 거였다. 학벌이 한 사람의 평생 직업과 임금,결혼 조건 등을 좌우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이런 상황에서 지역과 학교에따라 교육의 질이 다르다면 좀 더 나은 환경에 욕심을 내지 않을 부모가 과연 있을까.일부에서는 이번 전학 사태를 계기로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목소리도 높이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이 관할하는 학교는 모두 1182곳,학생은 154만여명이나 된다.‘교육 특구’의 수장인 서울의 교육감이 부모의 애타는 마음을 헤아리고,해마다 반복되는 기이한 풍경을 해결하겠다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지난해 자립형 사립고를 둘러싼 논쟁 때 교육 과열과 시기상조론을 내세워 불가 입장을 고수한 유인종 교육감의소신을 높이 평가한 사람들도 많았다.그러나 교육감의 이번 발언에서 그것이 ‘소신’이었는지,학부모와 학생 등교육 소비자의 불만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아집’과 ‘독선’이었는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허윤주기자rara@
  • 서울교육청 접수 현황/ 서울교육청 접수 80% 강남전학 희망

    “강남에 있는 학교에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3일 오후 서울시 교육청 보건원 2층에서는 새학기 전학 신청서를 먼저 내려고 며칠째 밤을 새운 학부모 110여명이 찬시멘트 바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일부 학부모는 며칠째 이어진 밤샘에 지쳤는지 담요를 덮어쓴 채 누워있었고 화장실에 갈 때도 자리를 빼앗길까봐 신경전을 벌였다. 이들은 지난 달 27일부터 시교육청 담벼락에서 줄을 섰던 1700여명 가운데 자녀들이 배정받은 학교의 입학식이 4일이어서 전학 관련 서류를 내지 못한 부모들이다.자녀가 배정받았던 학교의 입학식이 2일인 학부모 1400여명은 입학식을 하자마자 전학 서류를 발급받아 대부분 그날 신청서를 내고 돌아갔다. 남은 학부모들은 입학식 날짜가 늦어 전학 기회를 동등하게 받지 못하는데 큰 불만을 표시했다.일부 학부모는 강남 지역 학교의 정원이 다 차자 포기하고 돌아갔지만 남은 사람들은 강남 학군으로 갈 기회를 놓쳤다는데 대해 ‘분하다’는감정마저 갖고 있었다. 전남 목포에서 서울 강남으로 동생의 전학을 신청하러왔다는 한 대학생은 “27일부터 가족들과 교대로 기다리고 있다. ”면서 “일찍 왔는데도 뒤로 밀려 다른 학군으로 가야한다니 기가 막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남이 아니면 안된다.’며 강북에는 절대로 안가겠다는학부모도 상당수 있었다.한 학부모는 “강남에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근처에 여관을 잡고 ‘장기전’에 들어갔다.지난해에도 강남 지역에 전학을 원하는 학부모들이 3월말까지 교육청 앞에서 노숙을 계속했다고 교육청 관계자는 전했다. 서울시 교육청이 2일 접수한 전학 신청을 집계한 결과 70∼80%가 강남,서초,송파 지역으로의 전학을 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지난해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강남으로 전학한 학생은 611명으로 2000년 468명보다 30.6% 증가하는 등 매년 강남 전학생이 늘어나는 추세다. 서울시교육청 윤웅섭 교육정책국장은 “선착순 접수는 일정기간 신청을 받아 배정할 경우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됐던 것”이라면서 “빠른 전산망을통해 신속하게 전학 절차를 처리할 수 있게 된만큼 내년부터는 전학 배정 방식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교육청은 선착순 수시배정 방식은 유지하되 입학식 날짜가 달라 겪는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접수를 받는 등 보완 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다.또 학부모들이 며칠 전부터 거리에서 밤을 새워가며 줄을 서는 것을 막기 위해 온라인 접수도 검토키로 했다. 김소연기자 purple@
  • 2001 길섶에서/ 민들레

    서울 무교동 뒷골목에 키 작은 민들레 하나 서 있다.휘발유 냄새,지글지글 삼겹살 굽는 냄새 속에 꽃 향기는 아예기대하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악착같이 꽃은 피었다.시멘트철갑 속의 흙에도 생명의 자양분이 있었던가. 우중충한 대기 속에 샛노란 꽃이 앙증맞다. 아마 작년 이맘 때쯤 이 근방 어디에서 날아온 씨앗이리라.그러고 보니 담벼락 틈에도 피었고 보도 블록 사이에도납작하게 엎드려 있다.사람 눈에 안 띄어서 그렇지 어디서든 민들레는 자라고 꽃을 피운다. 넓은 세상 놔두고 하필이면 사시사철 매캐한 무교동 곱창집,문지방 틈에 뿌리를 내린 민들레가 딱하다.딴에는 멀리멀리 날아가라고 2세를 ‘낙하산’에 매달아 날려보내지만무교동 뒷골목에서 태어난 씨앗이 날면 얼마나 날까. 민들레뿐이랴.사람도 더러는 ‘어디서 태어 났느냐’가팔자소관이 돼 버린다.테러사건 이후 아프간 국민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미사일 공습보다 굶주림이 더무섭다는,영혼이 깊어 보이는 순한 눈들.그들이 무슨 죄인가?김재성 논설위원
  • [대한광장] 열린사회 흔드는 적들

    플라톤도 나쁘고 마르크스도 나쁘다.철학자 칼 포퍼가 반세기 전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한 말이다.포퍼는 자유를 열린사회의 기준으로 삼아 인류사의 자유로운 발전을저해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심판대에 세웠다.그러나 포퍼의문제의식을 우리 사회로 가져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도시 얘기로 접근해 보자.유럽의 도시가 갖는 특별한 의미는 광장에서 나온다.도시에는 성당이 있고 성당보다 낮은곳에 시청이 있으며,그 사이에는 넓은 광장이 조성돼 있다. 중요한 건물이나 역사적 조형물 역시 광장과 함께 있다.도시에서 광장의 존재는 휴식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특히 시민들 사이의 ‘회합’과 ‘의사소통’을 상징한다.따라서 광장은 시민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 열린도시의 증거로서 민주주의의 보루가 된다. 도시가 강을 끼고 발달하기 때문에 도시와 강의 유무상통역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런던과 템스강,파리와 센강처럼 도시와 강은 하나로 통합돼 있다.그러니 도시에서 강도 사람에게 열려 있다.독일 프랑크푸르트 지하철에는 개찰구도없고 검표원도 없다.자동발매기에서 기차표를 사서 자유롭게 이용하다가 집에 가면 된다.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지하철을 운영하는 것인데,지하철의 중심에 시민이 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상황이 열린사회와 열린정치를 가능하게하는 것 아닐까. 이 잣대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자.우리에게는 담벼락으로둘러싸인 폐쇄적인 휴식공간이나 놀이공원은 있을지언정 개방된 시민적 광장은 없다.도시생활에서 원초적인 휴식이나놀이는 허용하되,시민적 회합과 의사소통은 봉쇄당하고 있는 것이다.강 역시 도시를 가로지르기는 하지만 강과 도시는 분리돼 시민적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지하철 이용시 개찰구 차단장치와 씨름해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 도시는 시민을 배제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시민은 도시의 중심이 아니며,도시는 시민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도시가 공간적으로만 닫혀 있는 것이 아니다.도시의 내부를 들여다보자.모든 권력기관들이 시민들의 접근을가로막고 있지 않는가.국회,정부청사,대법원,대검찰청 모두가 닫혀 있으며 “접근하면 발포한다”고 위압하는 자세다. 청와대의 폐쇄성은 닫힌사회의 압권이다. 민주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은 권력기관 앞에서 비굴한 민원인일 뿐이다.더 깊이 들여다보면 정치와 경제와 교육 등 사회의 모든 곳이 닫혀 있다.결국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닫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닫힌사회로 전락한 것은 플라톤이나 마르크스 때문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개발독재의 경험 때문이다.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극한적인 수탈과 배제의 통치를 유산으로 물려주었다.해방 후에는 식민주의를 승계한 자들이 극단적 반공주의와 개발독재를 통해 식민주의의 경험을 재생산했다.이몰상식한 상황이 국민들에게 이기주의와 기회주의,가족주의와 지역주의를 생존의 법칙으로 가르쳤다.지배집단이 시민배제적 통치구조를 강제하고 국민들은 스스로 그 속에 숨어버린 것이다. 21세기 우리 사회의 화두는 민주화와 개혁이다.개혁의 원리는 간단한데,그것은 한마디로 닫혀 있는 모든 것을 국민들 앞에 활짝 여는 것이다.개혁은 청와대와 행정부와 국회를 비롯한 국가 기구의 문호를 개방하고 운영을공개하는데서 시작된다. 정치·경제·교육도 마찬가지다.그렇게 해야 독점과 전횡과 부패가 사라지면서 소외와 불만과 갈등도 사라진다.그과정에서 시민적 참여가 확대되면서 시민 중심의 재구조화가 이뤄질 수 있다.그것이 민주주의다. 포퍼가 우리 사회를 본다면 어떻게 말할까? 개혁을 방해하는 자들을 열린사회의 최대 적으로 지목할 것이다.극단적반공주의에 사로잡혀 남북관계를 가로막는 자들과 수구보수의 논리로 국민들을 현혹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또 있다.시민운동을 음모론으로 몰아 시세차익을 노리는자,언론자유와 탈세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식한 세도(稅盜),지역주의에 빌붙어 정치생명을 연장하려는 정치적 ‘아편쟁이들’도 모두 열린사회의 적이다.당연히 포퍼는 우리가 이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정 대 화 상지대교수·정치학
  • 문화광장 포커스

    ■석철주전…곰삭은 된장같은 깊은 맛. 자신의 생활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석철주의 전시회가 12∼26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스페이스 서울에서열린다.한국화 전통의 수용과 현대적 변용은 작가의 화두이다.그는 꽃,화분,분재,담벼락,빗물 등 우리 삶의 한 부분을이루는 소재로 작업한다. 작품은 장이나 김치처럼 한 번 담가두면 겉으로는 별 움직임이 없으나 속으로 발효되고 삭아 깊은 맛을 내는 ‘삭힘의 미학’이란 평을 듣고 있다. 출품한 20여점의 작품 제목이 모두 ‘생활일기’인 까닭은자신의 삶을 표현했다는 뜻이다.(02)720-1524유상덕기자 youni@. ■김덕수 새 사물놀이판 ‘청배-자연의 정신’. 사물놀이 공연의 대중화와 해외보급에 앞장서온 김덕수가 새로운 사물놀이판 ‘청배(請拜)-Spirit of Nature’를 선보인다. 오는 14·15일 이틀동안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열릴 이번공연에 김덕수패가 거는 기대와 의미는 각별하다. 최근 그가 발족한 문화예술벤처기업 ‘난장컬쳐스’가 내년 3월 개관할 사물놀이 전용극장 ‘아트시어터 난장’(가칭)에서 상설로 올릴 레퍼토리를 미리 공개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신(新)사물놀이 ‘청배’는 한국전통의 신명을 보여준 기존의 ‘놀이’에다,무속을 바탕으로 해원(解寃)의 세계를 표현하는 전통연희 ‘풀이’가 덧붙여졌다.한(恨)과 흥(興)이 어우러진,김덕수식의 또다른 사물놀이가 질펀하게 펼쳐질 예정이다.(02)762-7300. 황수정기자 sjh@. ■‘7인의 남자들’…한일정상급 음악가 참여. 한·일 최정상급 음악가들이 대거 참석해 감미로운 실내악의 향연을 펼칠 ‘7인의 남자들’이 11일 수원 경기도 문화예술회관,1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오후 7시30분. 97년 처음 기획돼,올해로 5회를 맞는 이 공연은 실내악의 묘미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보여 해마다 전석이 매진되는 열띤 호응을 받아왔다. 피아노는 지휘자 정명훈과 일본의 신예 요시히로 콘도가 맡는다.바이올린에 다이신 카지모토와 다카시 시미즈,첼로에조영창과 양성원,비올라에 최은식이 가세하는 등 모두가 쟁쟁한 스타급들로 구성됐다. ‘2002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염원하는 뜻도 담긴 이번 공연에서는 브람스 ‘피아노 삼중주 C장조 2번’,‘피아노 사중주 A장조 2번’등이 연주된다.(02)518-7343. 허윤주기자 rara@. ■손인영무용단 ‘소통’…단절된 인간관계 형상화. 손인영무용단이 12·13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소통’(안무 손인영)은 나날이 단절되어 가는 인간관계를 부각시킨 춤이다.어쩔 수 없이 부대끼며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발전해온 각종 매체와 연결해 보여준다.가장 원초적인 교유의 수단인 몸과 몸의 소통에서부터 소리를 이용한 만남,문자의 발견,그리고 사진과 영상에 이르는 소통방법이 다양한 몸짓으로 풀어진다. 시각적인 매체의 폭력에 휘둘리는 인간들이 결국 미디어를파괴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통해 원초적인 인간모습을 강조한다.한국 춤 전공자와 현대무용가가 한 무대에서 각기 다른 표현을 통해 인간의 순수한 모습을 창출해내는 연출이 독특하다.12일 오후8시 13일 오후4시·8시(02)2263-4680. 김성호기자 kimus@
  • 두살배기 강아지 ‘살신보은’

    두살배기 수컷 개가 집중호우에 집이 물에 잠기는 줄도 모르고 잠든 주인 노(老)부부를 구하고 숨진 사실이 뒤늦게알려져 감동을 주고 있다. 주인공은 서울 관악구 신림10동 신신림시장 어귀에 사는박영서(70)·이규자씨(63·여) 부부가 키워온 ‘벤’.박씨부부는 15일 새벽 3시쯤 복개천 배수구가 막혀 넘치면서 이웃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차량 80여대가 물살에 휩쓸리며 덮치는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집 담벼락 구석의 시멘트 철근에 끈을 묶어 매놓았던 벤이박씨 부부를 깨운 것은 바로 이때였다. 벤은 목에 묶은 끈끝에 철근을 매단 채 노부부가 잠든 방으로 뛰어들어 박씨의 저고리를 물고 당겼다.낌새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박씨부부가 서둘러 집을 빠져 나가는 순간 격류에 휩쓸린 승용차가 박씨의 집을 덮쳤다. 박씨는 “벤이 깨워 집을 나서자마자 승용차 한대가 집을덮치면서 순식간에 물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박씨 부부는 지난 99년 8월 쓸쓸한 노년을 걱정한 조카사위(45)로부터 막 젖을 뗀 벤을 선물받고 혈족 이상으로 정을 쏟았다.벤은 15일 오전 8시쯤 박씨의 집으로부터 30m 떨어진 곳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박씨 부부는 “끈에 묶인 철근 때문에 물바다를 헤쳐나오지 못한 것 같다”면서 “자식만큼이나 소중했던 벤이 우리부부의 목숨을 구하고 갔다”며 눈물을 쏟았다. 김상진씨(47)는 “수해복구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주민들이 뜻을 모아 벤의 위령제를 지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네티즌 칼럼] 보호받지 못하는 ‘친구’

    이 시대 친구의 의미는 뭘까? 요즘 뜬 영화 ‘친구’는 보호자로서의 친구상을 제시한다.사실 386세대는 보호받지 못한 세대이다.영화 속 주인공들도 정붙일 곳이 없어 모두들친구에게 자신을 ‘의탁’한다.‘함께 있을 때 우리는 아무두려움이 없었다’는 영화의 슬로건은 친구가 서로를 보호해주고 있음을 암시한다. 내가 위험에 빠져 있을 때 몸 던져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이친구인 셈이다. 마지막 순간 나를 보호해줄 그 무엇이 있다는 것,그래서 믿고 한껏 발랄해진다는 것,거기에서 얻어지는 약간의 순수.그 순수에서 사무치는 건 ‘미학’이다.일종의 아름다움.그거 하나만 믿고 행복하게 죽었다.386 세대들은 이 아름다움을 좇는 마지막 낭만파일지도 모른다. 한데 이 영화 ‘친구’를 둘러싼,권위만 앞세우는 영화평론가들의 비평이 마음에 안든다.한국 대박영화에는 무조건 별점을 안 줘야 잘난 평론가가 되는 분위기도 못마땅하다.외국영화에는 별 다섯개짜리 평론도 척척 한다.중국 영화 ‘와호장룡’ 같은 영화에 별 다섯개를 주면서,한국영화 ‘친구’는별 두개 반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볼 때 평론가들의 ‘함량 부족’에 있다.좋은 영화 ‘친구’를 융숭히 대접은 못해줄 망정 초를 쳐서야 되겠는가.영화 팬의 입장에서 볼 때 ‘친구’는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첫째,주제를 뚜렷하게 살렸다.보편적인 의제인 ‘친구는 어떤 존재인가’를 마음껏 드러내 놓았다.둘째,시나리오가 탄탄하다.셋째,주인공들의 연기도 뛰어나다.넷째,부산 사투리특유의 함축적인 대사도 돋보인다. 여기에다 친구는 한 가지를 덧붙였다.즉 좋은 영화가 되기위한 조건인 ‘공간’을 잘 쓴 것이다.주인공들이 제대로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공간을 잘 다루는 것은 연출자의필수 덕목이다.예를 들면 이명세의 ‘인정사정 볼것없다’는 미로같은 골목이나 벽,담벼락 등 좁은 공간 즉 입체적공간을 활용했다.하지만 과거 한국영화가 잘 안된 이유는대부분 이런 기본이 잘 안돼 있기 때문이었다.쌈질을 하더라도 ‘투캅스’처럼 주차장이나 허름한 공장마당 같은 데서 한다.평면적인 공간에서 하다보니 주변공간을 활용하지못한다.하지만이번 영화는 감독이 제 역할을 한 ‘공간친밀’이 두드러진다.보림극장 뒷편 범일동 산복도로,범내골언덕과 굴다리,육교 등 입체적인 공간구조를 활용해 주인공들의 연기도 살리고 영화의 입체감도 극대화하는데 성공했다. 최근 한국영화의 흥행을 주도하는 신인감독들은 그걸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반갑다.아무리 뛰어난 배우라도 정서적으로 친숙하지 않은 허허벌판에 데려다 놓으면 ‘용병이반’,‘애니깽’,‘비천무’,‘단적비연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친구는 몇 점 짜리 영화일까.100점은 줄 수 없을것이다.그러나 별 넷은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는 한마디로 새로운 의문을 던지는 영화이다.씨받이는 ‘대리모’라는 화두를 공개된 시장으로 데리고 나왔고 ‘서편제’는 판소리라는,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소재를 등장시켰다.‘친구’도 ‘이 시대 친구가 무엇인가’를 되묻게 만든 문제작이라는 점에서 좋은 영화인 것이다. 영화 ‘친구’를 비판하는 평자들은 극의 반전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그러나 친구는 드라마에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고,실화를 토대로 우리사회에 하나의 화두를던지는 작품이다.그런 평자들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보고도 극적 반전 타령을 하고 있을까? ■김 동 렬 심플렉스인터넷 고문drkim@simplexi.com
  • [대한광장] 한사람의 힘

    굳게 닫힌 미대사관 철문 앞에 한 수녀님이 서 있다.앞가슴에 걸친 간판에는 ‘한강에 독극물 방류하고도 벌금 500만원 웬말이냐! 맥팔랜드를 구속하라!’라고 쓰여 있다.이자리는 지난 1월 문정현 신부님이 ‘불평등한 소파개정 국민행동’ 1인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의해 강제로 밀려난 그자리다.가끔 추운 듯 몸을 떨기도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응시하는 그 눈빛이 맑다. 미대사관의 어마어마한 담벼락이,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닌,가만히 몸을 거기 두고 있을 뿐인 조그만 수녀님에 의해,위용을 자랑하는 궁성의 벽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가두는 감옥의 벽으로 바뀌는 순간이다.바로 1인시위의 현장이다. 국세청 앞에서는 벌써 몇개월째 참여연대가 주관하는 삼성재벌에 대한 과세 촉구 1인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에는 현직 언론인들이 대거 이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극히최근에는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점심시간을 이용한 반짝 시위가 애교스럽게 펼쳐지고 있기도 하다. 나 역시 조만간 가슴에 피켓을 걸고 머리에는 귀여운 고깔모자를 쓰고코리아나호텔 앞에서 한시간 동안 놀 생각으로마음이 즐겁기도 하거니와, 과거의 시위형태와는 사뭇 다른이 1인 릴레이 시위를 바라보면서 새삼스럽게 ‘한사람’의힘이 얼마나 큰가를 느낀다. 1인 릴레이 시위는,처음에 집시법의 독소조항을 피해 가는새로운 시위방법을 강구하면서 개발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고 보니 이 방법에는 지금까지의 시위문화를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국회 앞에서의 국가보안법 철폐 1인 시위,대우 부평공장 노동자들의 1인 시위,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1인 시위 등 기존의 이슈들을 시위하는 이의 숫자만 1인화한 경우도 있지만 삼성세습 반대, 조선일보반대 시위처럼 과거의 개념으로는 시위로 조직하기 어려운것들도 있다. 이제 시위는 엄청난 열정과 조직의 힘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시간과 마음이 있는개인도 ‘한사람’씩 할 수 있다. 이 ‘한사람’의 힘이,특별한 장소에서 한시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위를 때와 장소를가리지 않는 지속적인 시위로 바꾸어 놓았다. 물론 이 ‘한사람’들은 언뜻 보기에 참 무모하다.미군·삼성·조선일보! 몇만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로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이 거대한 조직 앞에서 혼자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러나 왕들과 지배자들의 음모와 영광의 기록을 뒤집어서바라보는 역사는, 나쁜 현실에 종지부를 찍는 변화와 진보의 물꼬가 바로 저 ‘한사람’들의 모임, 즉 ‘각성한 개인들의 연대’에 의해 터뜨려져 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과연그렇다. 1인 시위는, 그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 각자에게 스스로 반대자로서의 정체성과 반대사유에 대한 보다 치밀한각성을 요구하며, 그리하여 저항의 목소리를 개별화함으로써 권력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한결 구체적인 우리 일상속으로 가지고 온다. 아울러,일상을 억압하는 권력의 얼굴들을 과거의 ‘공’권력으로부터 분화시켜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그뿐 아니다.툭하면 한덩어리로 뭉뚱그려져서 ‘폭도’니 ‘불법시위자’니 ‘질서파괴자’니 하는 딱지가 붙기 일쑤였던 익명의 다수가 아니라,구체적인 얼굴과 이름을 지닌 ‘단독자’의 몸과 목소리를,살아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 선포한다.이제 우리는 조직과 권력의 이름으로 우리를 억압하던 거대한 힘들에게,서로 손잡고 어제에서 내일로 이어가며 항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비록 바로 그 순간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저항이라 할지라도,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또 다른 사람에의해 역사는 문자 그대로 강물처럼 흐른다. 지금 이 ‘한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바로 그 물줄기의 처음 한방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 그 물의 방향이 어디로 흐를까를근심하는 일이 아니다. 소위 대세, 소위 민심이라는 조작된전체주의적 언어들에 그들은 좌우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바로 대세와 민심의 구체적 인자들이므로. 이 ‘한사람’들을 또 다른 ‘한사람’의 이름으로 지지한다. 노혜경 시인
  • 조세형 인생역정과 심리분석

    대도(大盜) 조세형씨는 왜 다시 도둑질에 손을 댔을까. 98년 11월26일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뒤 불명예를 씻고 독실한 종교인으로 변신,새 사람이 된 듯했던 그는 2년여 만에 또다시 절도범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조씨는 경비전문업체에 취직,매달 200만원의 월급을 받은 데다 강연 등으로 200만원의 부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부인도 중소기업 사장이기 때문에 재범 동기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는 99년 4월부터 경비업체 에스원의 범죄예방연구소 전문위원으로 위촉돼 일하면서 범죄예방과 교도소 인권개선 활동도 했다.또 경찰관이 되려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범죄학 강연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5월9일에는 자동차부품생산회사를 운영하는 22살 연하인 이모씨와 결혼식을 올렸고 아들도 얻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서울 혜화동에 48평짜리 고급빌라도 갖고 있다.99년 10월부터는 해외 선교활동을 위해 최근까지 12차례에 걸쳐 일본과 미국·괌·오스트리아 등을 다녀왔다. 그러나 그의 노력도 ‘절도’의 유혹을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했다. 조씨는 현재 일본에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 정확한 동기는 알 수없지만 과거의 습관에 따른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다만 99년 3월 서울 신문로에 있는 한 빌딩에 연 ‘선교회’의 운영비가 부족해 최근 문을 닫은 점으로 미뤄 경제적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하룻밤 사이에도 수억원대의 금품을 훔치던 그가 현재 수입에 만족하지 못한 데다 ‘한탕’해서 선교원 경비도 벌자는 복합 심리가 작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씨와 절친하게 지내온 최중락 경찰청 수사자문관은 소식을 듣고충격을 감추지 못했다.조씨와 친분이 두터운 사설경비업체의 한 관계자는 “조씨가 그동안 적잖은 월급을 받아왔고 경제적으로 부족할 게 없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놀라워했다. 경찰대 범죄심리학과 표창원(表蒼園)교수는 “조씨가 절도의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은 노력과 주변의 도움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면서 “그는 국내에서 쌓았던 ‘명예’를 잃고 싶지 않아 일본을 범행 대상지로 택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고아로 성장한 조씨는 10살때 친구들과 함께 숟가락을 훔친 것을 시작으로 82년까지 절도죄 등으로 6차례나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특히 82년에는 고위층과 부유층의 담벼락을 넘나들며 ‘물방울 다이아몬드’ 등 보석류와 현금,수십억원대의 기업어음(CP)을 닥치는 대로 훔쳤다.그는 이중 일부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줘 ‘대도’‘의적’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난 83년 4월 항소심 재판 도중 구치감 창문을 뚫고 탈주,‘대도’의 면모를 확인시켜주는 듯했으나 100시간 만에 다시 붙잡혀 햇볕도들지 않는 청송교도소의 1평짜리 독방에서 15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일본에서 형 확정후 강제추방되면 국내에서 별도의 재판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보호감호처분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조현석기자
  • [세계화의 블록화](1)지역블록화, 세계화의 디딤돌인가 걸림돌인가

    *‘국경없는 경제' 신국제질서 가속. 생산체제의 다원화와 국경없는 지구촌으로 표현되는 세계화의 진전속에서도 역내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지역 블록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자유무역주의와 보호무역주의가 뒤섞여 무역전쟁이 치열히 전개되는가 하면 유럽과 아시아,아시아와 미주 등 블록간 연계를 통한 신국제질서의 주도권 싸움도 활발하다.20∼21일 열린 3차 서울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계기로 세계화와 지역 블록화의 함수관계 및 현황을 시리즈로 살펴본다. 지구촌 곳곳이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여 있다.이웃간 벽은 계속 허물어지는데도 지역단위의 울타리는 건재하다. 유럽은 자기들만의 결속을 튼튼히 하며 하나의 유럽을 완성했다.미국과 캐나다는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을 끌어들여 배타적인 생산체제를 구축했고 동남아시아는 단일상권을 만들었다.일본도 ‘엔화 블록’을 쌓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남미와 아프리카가 독자 목소리를 내지만 정치·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블록의 역할은 못하고 있다. 지구촌의 편가름은 확연하다.물방울이 뭉치듯 이웃끼리 연합체를 형성,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그러나 냉전체제에서처럼 동서로 나눠 총부리를 들이대지는 않는다.오히려 경제적 이윤을 위해 블록간 연대하거나 블록을 묶으려는 움직임도 적지 않다. 유럽과 아시아는 반상회를 열듯 2년마다 모임을 갖고 있다(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미국과 유럽도 대서양을 마주보고 ‘공동주택’의 건설을 구상한다(범대서양 경제협의체).아시아와 북미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10여년째 손을 맞잡고 있다(아·태 경제협력체-APEC).미국과 유럽연합(EU)은 남미와 동구권까지 그들의 영역을 넓히려 한다(미주자유무역지대 창설과 유럽연합의 확대). 그렇다면 지역 블록화는 지구촌을 하나로 묶는 디딤돌인가,아니면지구촌을 쪼개는 걸림돌인가. 지구촌 구성원 모두가 무역 자유화를 바란다는 것은 분명하다.물건을 값싸고 자유롭게 사고 팔도록 국경을 없애고 세금도 낮추자는 생각에 공감한다.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일반협정) 체제의 뒤를 이어 출범한 것도 이같은 세계화의 연장선상에있다. 그러나 내 물건만 더 싸게 팔아야 한다는 지역 이기주의 때문에 무역분쟁은 끊이지 않는다.미국은 ‘슈퍼 301조’라는 괴물을 부활시켜 역외국의 값싼 제품에 무차별적 제재를 가하려 한다.법적인 구속력을 갖춘 WTO가 규정 위반이라고 경고해도 미국은 ‘힘의 논리’로 밀어붙인다. 유럽과 아시아가 미국을 따돌리고 서울에서 3번째 ASEM을 열었다.그러나 회원국간 구속력이 없는데다 관심 분야마저 달라 일과성 ‘통합 반상회’에 그쳤다는 지적이다. ‘고급 빌라’에 사는 유럽으로선 ‘재래주택’이나 ‘신도시’에사는 아시아가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마치 이웃이 자녀들을 마구 때리거나 부부싸움을 한다든가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 ‘잘사는 마을’의 교육환경이나 쾌적함이 망쳐지지 않기를 요구하는것과 같다.외교적 표현으론 인권탄압,지역분쟁,환경오염 등의 문제다. 아시아에서의 ‘평화와 안정’은 공감하지만 아시아의 일차적 관심은 경제회복이다.행상을 해서라도 유럽에 더 많은 물건을 팔고 유럽의 앞선 기술을 배우고 싶지만유럽은 인색하다. 89년 창설된 아·태경제협력체(APEC)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다양한모임이라는 측면에서 블록을 통합할 대안으로 관심을 모았다.유럽연합이나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가 역외국에 배타적인 것과 달리 APEC은 일체의 차별성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APEC이 경제협의체임에도 아시아에서 일본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중국 대 일본의 대립은 APEC을 정치적 실험장에 머물게 한다. 미국 중심의 NAFTA는 역외국에 빗장을 풀지 않고 있다.아시아가 값싼 노동력으로 파고들지만 미국은 벽을 높이며 제재를 가하고 있다. 오히려 북·남미를 하나로 묶어 미주 전체를 배타적 블록으로 키우려 한다. 그럼에도 지역 블록화는 역내 시장을이웃간으로 넓혀 국경의 의미를 없앤다는 측면에서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블록간 통합을 위해선정치·경제·문화적으로 블록의 평준화가 이뤄져야 한다.유럽이 통합을 이룬데는 역사·문화적 배경이 같을 뿐 아니라 경제력에서도 큰격차가 없기 때문이다.북미처럼 수직적 생산체제를 갖추거나 아프리카,중동,남아시아와 같이 민족·종교적 갈등을 겪는 지역에서의 블록화는 세계화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백문일기자 mip@. *블록화의 사각지대. 아프리카나 중동 등에도 지역 블록이 있을까.대답은 ‘예스’지만유럽이나 아시아,북미 만큼 활발하지는 못하다.회원국간 빈부 격차가 큰데다 쿠테타 등 정정불안으로 결속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서쪽의 해지는 나라’란 뜻의 마그레브연맹(AMU)이 결성된 것은 89년.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북아프리카 5개 아랍국이 모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의 협력체를 결의했다.모로코,알제리,튀니지,리비아,모리타니 등으로 회교 원리주의의 발흥에 공동대처키로 했다. 회원국에 대한 공격을 다른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공동방위조치 규정도 마련했다.그러나 경제적 불균형과 테러국으로 지정된 리바아와 다른 회원국간 알력으로 93년 이후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서부 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는 75년 라고스협정에서 기인한다.나이지리아,감비아,가나,말리,세네갈 등 15개국 대표가 모여 90년지역경제통합체 창설에 합의했다. 그러나 경제력 차이로 인한 공동정책의 부재,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의 내전,역내의 또다른 블록 형성 등은 ECOWAS를 유명무실하게 했다. 80년 출범한 남부아프리카 개발공동체(SADC)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대한 경제의존도 축소를 기본목표로 삼은 점에서 특이하다.아직은 수자원 및 전력,도로망,통신시설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주력하는 단계다. 81년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카타르,아랍에미리트,카타르,바레인등 걸프만 연안 6개국은 경제통합을 기치로 걸프만 협력협의회(GCC)를 결성했다. 백문일기자. *‘지역블록’ 왜 생겼나. 92년 1월 싱가포르에선 4차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정상회담이열렸다.의제는 역내 무역활성화와 관세인하를 바탕으로 한 아세안 자유무역지대(AFTA)의 창설.그동안 반공(反共)을 기치로 정치적 연대를 추구해 온 ASEAN이 경제통합 쪽으로 방향을 틀며 블록을 형성했다. 한달 뒤 네델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선 유럽공동체(EC) 12개 회원국이모였다.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추진해 온 유럽통합이 60년대 프랑스드골 대통령의 ‘국가 중심의 유럽’으로 좌초될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마스트리히트조약으로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조약은 경제·화폐통합을 넘어 외교·사법 분야의 협력조항까지 신설해 명실상부한 ‘하나의 유럽’을 그려냈다. 같은해 8월 미국은 캐나다와의 자유무역협정으로 시작한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에 멕시코를 포함시켰다.미국과 캐나다의 자본·기술에 멕시코의 노동력을 접목,세계 최대의 단일시장을 이뤘다.역내에서는 관세를 낮추면서 역외국에는 배타적 관세를 적용,보호무역주의의 성격을 띄었다. 유럽,아시아,북미가 한결같이 92년에 지역 블록화를 추진한 이유는무엇일까.89년 동구권에 불어닥친 민주화의 열풍은 90년대 국제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요구했으며 그 결과 동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자본주의와 국익을 우선으로 한 실용적 외교노선이 주류를 이뤘다.이는 문화·역사적 배경이 같은 지역에서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블록화형성의 주요한 계기가 됐다. 특히 당시 세계 경제는 1947년에 맺어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따라 각종 수출입 장벽을 낮추는 무역교섭이 한창이었다.이른바 ‘우루과이 라운드’로 86년 남미 우루과이에 모여 관세인하,농산물 보조금 철폐,지적 재산권 보호 등을 놓고 다자간 협상을 벌였다. 미국,유럽공동체,일본을 위시한 아시아 개도국이 주축을 이뤘으나주도권은 미국 등 서방 선진국이 쥐고 있었고 개도국은 농업부문을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세계 자유무역의 확산을 목표로 했으나 밑바탕에는 선진국의 값싼 농산물과 경쟁력이 앞선 서비스 상품을개도국에 팔려는 일종의 무역전쟁이었다.개도국들은 자국 농민들의거센 반발에도 불구,미국 등 농산물 수출국 모임인 ‘케언즈 그룹’의 압력에 무방비 상태였다. 그 결과 2년 뒤 협상은 케언즈 그룹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 개도국은 농업부문에서 빗장을 열었다.그러나 개도국들은 협상 과정에서 경제통합체를 창설,향후 선진국의 무역개방 압력에 대비하며 지역 블록화를 선도했다. ASEAN이 먼저 깃발을 들었고 유럽은 2차 세계대전 이후미국에 대한 경제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통합의 끈을 한층 조였다.미국은 멕시코를 NAFTA에 끌어들여 유럽과 아시아의 블록화에 맞서 결국 세계경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미,유럽연합,일본을 위시한 아시아로 삼분됐다. 백문일기자
  • 화장실·담벽 낙서·길거리 음악테이프 ‘추억속으로’

    컴퓨터가 화장실과 길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었다? 공공 화장실의 욕설이 사라지고 있다.PC통신망과 인터넷 홈페이지마다 운영하는 게시판이 익명의 담벼락 낙서장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에는 반독재 구호나 사상 논쟁으로,90년대에는 인생이나 이성교제 문제,취업에 대한 고민과 음란한 낙서 등으로 눈을 둘 곳조차마땅치 않을 정도였지만 이제는 옛말이다. 인터넷에 욕과 음담패설만을 쓰는 사이트도 등장했다.‘욕한마디’라는 사이트에서 아이디 ‘뜨거운 백설기’는 “안보는데서 욕을 하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엄청 도움이 된다”고 적고 있다.‘욕한마디’의 방명록에는 “엄마 앞에서 못하는 욕을 하고 나니 스트레스가풀린다”는 글도 올라 있다.‘실컷 욕하고 정신차리라는’ac18.com사이트에서 뽑은 이번 달 최고의 욕은 ‘국회의원보다 못한 놈’이다. 서울대 사회대 학생회는 최근 화장실 낙서의 대자보 기능을 부활하기 위해 종이와 필기구를 화장실에 비치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못했다. 화장실을 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키자는 운동이확산되면서 화장실의욕설과 음담패설을 포함한 ‘속찌꺼기’ 배출의 장으로서의 기능은인터넷으로 더욱 빠르게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 고려대 김모군(25·경영학과 3학년)은 “비록 인터넷 게시판은 음란성 글로 오염되고 있지만 최근 화장실이 선진국처럼 깨끗한 문화공간으로 변하는 것 같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서울 도심의 보도블록 한 귀퉁이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길거리표카세트 테이프’를 파는 손수레도 요즘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제 컴퓨터 음악 파일인 MP3만 있으면 누구나 인터넷 사이트 ‘소리바다’와 ‘냅스터’에 접속해 상대편이 갖고 있는 MP3파일을 내려받아 음악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생 최경은(崔慶恩·26)씨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듣고 싶은신곡이 있으면 길거리에서 테이프를 샀으나 요즘에는 공짜에다 신곡도 빠르게 수록되는 MP3파일을 다운 받는다”고 말했다. 서울 구의동 테크노마트 등 전자상가에는 상점마다 MP3플레이어를사려는 청소년들이 하루 10여명씩 몰린다. 가요계는 불법복제 테이프를 팔던 길거리 손수레가 사라져 크게 반겼다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MP3로 음악을 다운받아 저작료를 못 받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한국음악저작권협회 김동현(31)씨는 “9,10월 중 소리바다 등의 운영자를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내겠다”고 말했다. 김경운 윤창수기자 kkw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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