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첫 동인지 「죽순」 키우기 46년”(지역문화를 가꾼다)
◎대구문화계 원로 이윤시씨/45년 박목월·유치환·이효상씨와 결성/재정난6·25로 폐간·복간 여러차례/천상병·이영희씨도 「죽순」 추천받아 등단
하나의 문학동인지가 몇십년을 두고 명백을 이어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특히 지방의 경우는 더 그렇다.
46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대구의 「죽순」은 그래서 더욱 값지게 보인다.
그러나 이 잡지가 46년의 긴 세월 동안 아무 탈없이 이어온 것만은 아니다.그 기간중에는 무려 30년이란 오랜 휴면기가 있었고 지난1월에야 비로소 통권25집을 낼 수 있었다.이같은 「죽순」의 긴 세월을 지켜오며 창간하고 또 복간한 사람이 바로 대구시단의 원로 이윤수시인(78)이다.
30년대 후반부터 시작활동을 해오던 그는 해방 직후인 45년 10월26일 대구에서 시를 쓴다는 사람들 10여명을 그의 집에 불러모아 「죽순시인구락부」를 만들었다.되찾은 우리의 말과 글로 마음껏 멋진 시를 써보자는 희망에서였다.「죽순」이란 이름은 바로 그 희망참의 상징이었다.그러나 종이부족 등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동인지창간호는 이듬해인 46년 4월에야 선을 보이게 믿고 이는 해방 이후 국내 최초의 문학동인지가 됐다.이후 49년 7월의 폐간호까지 짧게는 3∼4개월,길게는 10개월에 한 권꼴로 모두 12권을 펴냈다.편집과 출판은 그가 혼자 도맡아 했다.이때 활동하던 동인들은 그를 비롯해 박목월 유치환 이호우 김달진 이효상 성기원 신동집 이응창 이숭자 오란숙씨 등이 있었다.또한 동인은 아니었지만 구상 김춘수 박두진 조지훈씨 등이 여기에 시를 발표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뿐만 아니라 천상병 김요섭 이령희씨 등이 이때 「죽순」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그러나 이렇게 활기찬 모습을 보이던 동인지도 결국 해방정국의 소용돌이와 출간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4년만에 자진 폐간하고 말았으며 그 뒤 1년만에 복간호를 내려고 다시 원고를 모았으나 6·25가 터져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그는 조그만한 여유가 생겨 마침내 79년1월1일 제13집째인 복간호를 펴냈다.실로 30대의 소원을 60대에 와서야 이룬 셈이었다.
『그 때의 감개무량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복간호를 손에 들고 북받치는 감회로 한참동안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내 인생에서 이때만큼 삶의 보람을 느낀 적이 없었지요』
이때부터 매년 1집씩 지난 1월까지 모두 13집을 펴냈다.복간당시 2백쪽 분량이던 것이 4년전부터는 3백쪽이상으로 불었다.
『과거와 같이 한해에 서너번씩 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아직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특히 지역사회의 보다 많은 관심이 있어야 될 텐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죽순」을 만든 것 말고 이시인이 평생의 보람으로 삼는 일은 지난 48년3월 대구 달성공원에 대구가 자랑하는 민족시인인 상화 이상화의 시비를 세운 것이다.86년부터는 구상 조병화 장수철씨 등 문단원로들로 선고위원회를 만들어 해마다 상화시인상을 「죽순」주관으로 시상해오고 있다.또 90년부터 1백30만원의 상금을 건 「상화시전국 백일장」을 마련,운영하고 있다.
대구출신으로 일본와세다대를 중퇴한 그는 37년 「일본시단」이란 동인지를 통해 등단,50여년을 시인으로 살아왔다.「인간온실」「신이 뿌린 어둠」「전선시첩」「추억의 노래」등 시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