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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픽스」·「빅또르 최」 등 10여편/충무로에 합작영화 바람

    ◎다양한 관객욕구 부응… 정부규제 완화도 한몫/부족한 자본·기술 보충… 해외진출의 발판 기대/“합작경험 미숙… 종속적 관계로 전락” 우려도 우리 영화계에 공동제작(합작)영화 바람이 일고 있다. 충무로 영화가에 대자본이 유입되면서 한층 활발해진 이같은 움직임은 한국영화 활성화에 대한 일반의 기대와 다양해진 관객의 욕구,해외시장 진출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우리 영화계의 자구책 등과 맞물리면서 두드러지게 된 것. 특히 정부에서도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갈 영화진흥법에 「공동제작영화업」규정을 신설,그동안의 합작영화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등 사실상의 지원에 나서고 있어 공동영화 제작바람은 당분간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공동제작을 준비하거나 추진중인 영화는 지난 3월 처음으로 한·영 합작영화계약을 체결한 「더블 크로스」를 비롯,「빅또르 최」「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인샬라」「언픽스」「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달빛 맹세」「K K 패밀리 리스트」등 10여편. 「더블 크로스」는 동아수츨공사가 제작비의 80%,영국의 그라나다사가 20%를 부담하고 한국판권은 동아수출공사가,해외수익은 반반씩 나눠갖는 조건으로 체결됐다.영국의 신화적인 이중첩보원 존 베이커의 활약상을 그릴 첩보물로 빠르면 오는 9월쯤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다. 최초의 한­러 합작영화가 될 「빅또르 최」는 정지영 감독이 준비중이다.한국의 효능영화사와 러시아의 렌필름이 공동제작하는 이 영화는 러시아 한인 3세이자 전설적인 록가수였던 빅토르 최(90년 사망)의 불꽃생애를 다룬다.6월초부터 러시아에서 촬영될 예정.현재 제작비(20억원) 분담비율을 타진중으로 러시아측은 주로 스태프와 기자재를 부담할 것으로 알려졌다.가수 신성우가 주인공 빅토르 최로,모델출신 배우 진희경이 빅토르 최의 삶을 추적하는 르포작가로 나온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은 영화사「백두대간」대표 이광모씨가 지난해 하틀리­메릴 국제시나리오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자작 시나리오로 직접 연출할 작품.현재 네덜란드의 「포티시모」사와 합작협의중으로 제작비보다는 포스트 프로덕션쪽의공동작업을 통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이민용 감독의 두번째 작품인 「인샬라」(신의 뜻대로란 아랍어)는 권현숙씨의 동명 장편소설을 토대로한 액션영화다.사하라사막을 배경으로 촬영은 알제리·모로코 등 1백% 해외에서 진행되며 주연배우를 뺀 나머지 배우들을 모두 현지인으로 쓸 예정이어서 관심을 모은다.8월말부터 본격 촬영에 들어간다. 한·홍콩 합작영화도 활발히 추진중이다.신예 최정일 감독과 홍콩의 양백견 감독이 공동연출을 맡은 액션영화 「언픽스」.동남아 시장진출을 목표로 한국의 정명영화사가 제작비 일체를 부담한다.한국의 한재석,홍콩의 오천련·류청운 등 인기배우들이 출연한다. 공동제작 방식은 우리 영화가 해외시장으로 뻗어나갈 여건을 조성하는 한편 부족한 자본과 기술,전문인력 등을 보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그러나 국내 영화사들의 경우 합작경험이 별로 없어 자칫 단순한 자본투자에 그치는등 「종속적」 합작관계로 떨어질 소지가 많다.그런만큼 이에 대한 보완책 마련이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지적이 높다.이와 관련,한국영화연구소 김혜준 기획실장은 『단지 돈만 대는 공동출자(Co­Financing)는 별 의미가 없다.앞으로 스태프진을 함께 구성하는 등의 공동개발(Co­Development)방식으로 합작방향을 잡아나가야할 것』이라고 말했다.〈김종면 기자〉
  • 독도서 맞은 3·1절/한승원 작가(기고)

    ◎조국의 막내 땅… 동해수문장이여! 우리들의 막내둥이 땅,독도.너를 만나기 위해 떠나기 전날밤 나는 잠을 설쳤었다.3m이상의 파도가 일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고,내 꿈은 내내 뒤숭숭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독도 너를 생각하기만 하면 「삼국유사」속의 만파식적을 떠올렸다.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면서 하나로 되었다가 둘로 되었다가 했다는 섬과 그 섬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자 외적이 물러갔다는 설화.그것은 아마 우리 민족이 섬나라 일본의 해적들에게 시달려온 첫번째 기록일 터이다. 일본의 역사를 읽어보면 자꾸만 「정한론」이 고개를 들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그 나라의 집권자들은 정치형편이 불안해지면 「정한론」으로써 돌파해 나가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일으켰고,36년간 우리를 식민지배했었다.요즘 들어서도 그들 중의 우파들은 식민지배가 우리 민족을 근대화시키는데 이바지했다는 둥,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둥 하고 허튼소리를 하곤 하는 것이다. 기상예보가 들어맞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배에올랐고 조마조마해지는 가슴을 맥주로 달랬다.갑판위에는 달빛이 어렸고,하늘은 맑았고,별들이 총총했다.겨울 밤바다라고 하기에는 공기가 너무 따뜻했고 바다도 잔잔했다.귀바퀴 뒤에 붙이는 멀미약 처방을 한 사람들은 네가 몸담고 있는 동해바다의 파도를 깔보기 시작했다.한데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막내둥이 땅인 네가 우리에게 품을 열어주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조짐임을 나는 짐작했다.맑은 하늘 저 깊은 곳에 투명한 황새깃털 모양의 구름들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 조짐대로,독도 너는 우리가 상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우리는 선상에서 흩뿌리는 겨울 비를 맞으며 행사를 치렀고,너의 품에 안겨보지 못한 아쉬움과 슬픔이 담긴 눈길로 너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뱃머리를 돌리지않으면 안되었다. 이쪽으로 가면서 어찌보면 코끼리처럼 보이고,다시 저쪽으로 가면서 어찌보면 코뿔소 처럼 보이고,눈을 씻고 다시 보면 돌진하는 성난 멧돼지 같고,거대한 군함 같은 우리들의 막내 땅,동해바다의 의젓한 수문장인 독도 너는 우리들의 숭엄한 자연이구나. 애초에 네 땅이냐 내 땅이냐 하는 논의 자체를 기분 나빠하듯 싶은 우리들의 막내인 독도.너를 위하여 어떠한 헌사를 해야 할지 나는 막연해진다. 돌부리에 다친 새끼 발가락이 아리고 쓰라려지듯,요즘 논의 되고 있는 너의 존재로 인하여 나의 중추신경줄에 아픔이 일어나 내내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불현듯 달려 왔다.하여 기분 나빠하는 독도야,다음에 찾아 올 때엔 부디 웃는 낯으로 나를 받아 들이고 기꺼이 품어다오.
  • 내가 본 파랑도(서울신문 50돌 특집)

    ◎한국해양연구소 이동영 박사는 말한다/“「태풍의 길목」 기상관측의 최적지”/기상예보 정확성 높여 태풍피해 최소화/대륙붕 개발·어업전진 기지로도 활용 『파랑도는 해양기상 연구와 구난활동·어업 전진기지로서의 활용은 물론 지구환경 변화 감시에도 이상적인 장소입니다.과학기지를 건설해 한국 해양연구의 일류화와 국제사회에 공헌하는 초석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플로리다대에서 해양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조교수로 재직하다 85년 귀국 직후부터 파랑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해양공학자 이동영박사(46·한국해양연구소 해양환경공학실장).87년부터 4차례나 격랑속의 파랑도 현장을 답사하면서 기지건설 기초 조사등을 벌여온 이박사를 만나 그간의 연구 성과와 바람직한 파랑도 이용 방안등을 들어 보았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귀국후 폭풍에 의한 재해방지 관련연구를 하게 됐는데 현장 관측자료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태풍이 지나가는 동지나 해상에 고정 관측소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게 됐습니다.미국에서의 경험에 의하면 해양 한복판에 고정구조물이 있으면 해양과 대기의 경계면에서의 와동에 의한 운동량이나 열,수증기,각종 가스등의 이동량을 직접 측정할 수 있기때문에 해양및 기상예측을 더 정확히 할 수 있거든요.그러던 차에 87년 「전설의 섬 이어도」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초대돼 현지를 방문하면서 「이거다」 싶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동안 연구성과는 어떻습니까. ▲해양과학기지 건설에 필요한 설계조건 도출을 위한 기초조사와 각종 관측연구를 했습니다.정부간 해양위원회(IOC)가 「하나뿐인 지구를 살리자」는 목표로 세계 해양관측 시스템(GOOS) 구축을 제안해 와 90년부터 「국가 종합해양 관측망 구축」을 국책연구과제로 수행하면서 동북아 지역에서의 고정연속 관측소의 필요성이 현실화됐기 때문이지요.97년까지 구조물 완공을 목표로 94년부터 파고 조위계 설치 암석채집 정밀수심 측량등을 했지요.과거 태풍 자료와 7년간의 파랑자료,위성자료등을 모으고 시뮬레이션해 설계 조건을 구했어요.섬주변에 등부표를 설치해 제한된 관측도 시도해 봤습니다. ­과거에도 파랑도 개발계획이 있었지요. ▲파랑도의 최초 이용계획은 1938년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작성됐습니다.당시 일본은 나가사키에서 상해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 부설계획을 세웠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 중간 지점인 파랑도에 인공섬을 건설키로 했어요.2차대전으로 인해 실현되진 못했습니다.그후 개발계획은 87년 어업전진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부두 물양장등 대형시설을 갖춘 축구장만한 크기의 인공섬 건설계획을 세웠으나 이 역시 수조원이 소요되는 무모한 계획으로 판단돼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파랑도 인공섬,혹은 연구기지는 어떻게 추진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파랑도는 태풍에 의한 큰 파도로 구조물의 설계 시공이 어렵고 경비가 많이 들므로 철저한 사전 조사와 연구를 거쳐 기본 설계,실시에 들어가야 합니다.우선 해양 기상 부이를 설치해 운영하면서 자료에 의한 기초연구를 수행해 나가고 고정 구조물은 최소한의 규모로 설치해 시범 운영하면서 충분한경험을 쌓은 후 규모를 키우는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정보화 사회와 우주개발시대에 걸맞게 통신과 지구환경 모니터링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국제 위성 프로그램과 연계하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활용도가 넓은 만큼 국내에서는 여러 관련부처를 망라한 기획위원회가 발족돼 부처간 업무분담과 사업추진및 활용 운영방안을 협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파랑도 과학기지는 어떻게 활용됩니까. ▲정확한 해양예보와 기상예보,조류등 해양학적 연구측면은 물론 환경 감시,해상교통 안내,구난기지로서의 활용과 나아가서는 대륙붕 개발을 위한 전초기지등 다양한 활용이 기대됩니다.사실 우리나라는 육상에는 매 14㎞마다 하나씩 조밀한 자동 기상관측망을 유지하고 있지만 해상에는 기상관측소를 하나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편서풍대에 있는 우리나라는 서쪽 지역의 기상 관측자료가 중요한데 여기에 기상관측소를 설치할 경우 기상예보의 정확성을 크게 높여 국가 산업,경제에 파급효과가 클것입니다.파랑도에는 이미87년부터 해운항만청에서 등부표를 설치해 국제적으로 공표했는데 등대를 설치하면 매년 10만척이 넘게 이지역을 지나가는 선박들의 항해지표로서 국제사회에 크게 공헌할수도 있습니다.제주도 전설에 나오는 「전설의 섬」에 대한 국민적 정서와 환태평양 시대를 맞아 전세계로 활동 무대를 넓히려는 세계화 추진 차원에서도 상징적인 계획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97년 완공계획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수대교 사고 이후 구조물의 안전성 문제가 재삼 제기됐고 예산상의 문제점도 있어 그렇습니다.우리나라는 각종 연안문제가 많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관측시스템 개선이 시급한데 해운항만청,수로국,기상청등 관련부처에서 이를 위한 예산 확보가 어려운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밖에 파랑도 건설에 장애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규모에 따라 인접국가와 영토 분쟁 소지가 있고 또 환경감시를 행할 경우 인접국들을 자극할까 하는 점입니다.따라서 초기에는 규모를 최소화해 국제 분쟁을 피하면서 실익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획득된 자료들을 국제사회에 제공해 지구환경 문제에 한국의 역할 수행으로 국위를 선양할 수 있게 추진하는것도 방법입니다.건설이후 유지 운영도 과제가 되겠지요. (결론적으로 이박사는 충분한 사전 준비와 국가의지,기상연구자들의 적극적 자세가 파랑도 사업의 열쇠가 됨을 강조했다) ◎파랑도 전설/폭풍만나 표류하던 한 선원이 도착… 과부들만 모여사는 환상의 외딴섬에 파랑도가 곧 「이어도」인지 과학적으로 규명할 길은 없으나 제주도의 대표적 부녀노동요인 「이어도 허라…」의 가사내용을 음미해 보면 파랑도와 그럴싸하게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많다. 특히 파랑도가 한국 최남단 마라도에서 서남쪽으로 81해리,중국 동도에서 북동쪽으로 1백35해리에 위치한 제주도와 중국사이의 수중 암초라는 사실과 노래가사중의 「강남가는 남해항로의 절반지점에 이어도가 있다」는 내용이 부합됨을 들어 「이어도전설」을 허구로만 볼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파랑도가 설사 이어도가 아닐지라도 제주사람들 특히 제주여인들에있어 이어도는 상상의 섬이요,사후에 돌아갈 피안의 섬이다.그것은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나 남편이 이어도에 있으며 자신들도 결국 그곳으로 떠날것을 굳게 믿고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어도」는 바다로 나간 남편을 잃은,과부들만 모여사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환상의 섬이라고도 일컫는다. 향토사가인 제주민속박물관 진성기 관장(60)은 이에 관계되는 전설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구전돼 내려오고 있다고 말한다. 『먼 옛날 지금의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리 마을에 고동지라는 젊은남자가 살고 있었다.어느 해인가 중국으로 국마진상을 가게돼 고동지는 동료들과 함께 수십척의 배에 말을 가득 싣고 조천포구인 「수진개」를 떠났다. 배가 수평선쯤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폭풍이 점점 심해지면서 배는 표류하기 시작했고 몇날을 떠다니다 마침내 어느 한 섬에 도착하게 됐다.동료들을 모두 잃은채 고동지가 도착한 곳은 바로 「이어도」였다. 이어도는 고기잡이 간 어부들이 태풍을 만나 수중고혼 되는 바람에 남자어른이 없는 이른바 과부섬이었다.고동지가 도착하자 과부들의 환영은 대단했다.이집 저집에서 다퉈가며 고동지를 묵도록해 고동지는 밤낮없이 이 과부 저 과부를 전전해가며 꿈같은 나날을 보냈다.그러나 그 즐거움도 잠시뿐,날이 갈수록 무엇인가 허전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날 고동지는 처마에서 낙숫물이 뚝뚝 떨어지는것을 보게됐다.마치 고향집 처마밑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처럼 들렸다.불현듯 고향에서 밭을 갈고 멧돌을 돌리고 있을 아내와 부모형제가 그리워졌다.아내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불길처럼 솟았다. 고동지는 바닷가를 배회하며 멀리 수평선 너머에 있을 아내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이후 달밝은 밤이면 더욱 고향이 그리워졌고 고향이 그리워지면 늘 바닷가를 찾았다. 초승달이긴 해도 달빛이 유난히 밝던 어느날 밤.고동지는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보며 저도 모르게 노래를 읊조렸다.자신의 신세를 달래는 구슬픈 노래가락이었다. 이어도허라 이어도허라. 이어 이어 이어도허라. 이엇말 허민 나 눈물난다.이엇말랑 말앙근 가라. 강남을 가난 해남을 보라. 이어도가 반이엥 해라. 여기서 「강남」은 중국이며 「해남」은 바로 남해항로인즉,강남가는 길목 절반쯤에 있는 「이어도」에 내가 있으니 불러달라는 애절한 내용이었다. 이어도사람들은 이 고동지의 노래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고 많은 여인네들이 그의 처지를 동정하게 됐다.고동지의 노래를 듣고는 잃어버린 남편을 그리며 우는 과부들도 많았다.이윽고 「이어도노래」는 파도에 실려 멀리 퍼졌으며 그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그후 고동지는 뜻밖에 중국상선을 만나 그 배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게됐다.이어도에서 고동지를 섬기며 사랑했던 한 여인도 함께 따라왔다. 고향 사람들은 태풍으로 죽은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며 큰 잔치를 벌였다.고동지의 아내는 남편을 극진히 보살펴준 이어도여인을 받아들여 한 가족이 되게했다.
  • “출판의 사각지대”/중학생용 서적 출간붐

    ◎「세계걸작선」·「중학생을 위한 철학교실」·「중학생이 알아야 할 소설」 등 잇달아 선보여/중학생들 정서·의식수준에 맞춘 내용/동화책·청소년서적 사이 공백을 메워 출판계에서 외면당해온 중학생용 책들이 요즘 활발하게 선보이고 있다.그동안 어린이책이나 고교생을 주로 겨냥한 청소년도서는 많이 나왔지만,「어린아이 티를 벗어나 정신적·육체적으로 막 성숙기에 접어든」중학생들을 염두에 두고 발간된 책은 거의 없었다.따라서 독서 소외계층으로 꼽히는 중학생을 위한 책들이 잇따라 나온 것을 서점가는 크게 환영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중학생 책은 「세계 청소년 걸작선」(우리교육 펴냄),「중학생을 위한 철학교실」(한샘출판사),「열려라 소설나라」(사닥다리),「중학생이 알아야 할 소설」(신원문화사)등 시리즈를 비롯해 모두 10여종.이 책들은 청소년도서의 범위를 좀더 좁혀 중학생 또래의 정서와 의식수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가운데 「세계 청소년 걸작선」은 지금까지 「라몬의 바다」「푸른 돌고래 섬」「달빛 노래」등 소설 3종을 냈다.이 책들은 청소년·어린이도서에 주는 「한스 크리스천 안데르센」상,「뉴베리」상을 각각 받은 성장소설들로 모두 미국작가 스코트 오델의 작품이다.작가는 멕시칸과 인디언 소년·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어려움을 이겨내고 어른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감동깊게 그려냈다. 이에 견줘 「중학생을 위한 철학교실」은 학생들에게 합리적인 사고와 논리적인 글쓰기에 도움을 주면서,삶의 의미도 함께 깨닫게 해준다는 뜻으로 기획됐다.「깐깐하게 생각하기」「똘똘하게 생각하기」「널널하게 생각하기」등 1∼3권이 이미 출간됐고 네째권인 「싱싱하게 생각하기」가 곧 나올 예정이다. 「열려라 소설나라」(전 2권)와 「중학생이 알아야 할 소설」(전 3권)은 문학에 관심있는 중학생을 위한 단편소설집.한국작품을 주로 하면서 외국작품을 일부 넣었다.이 가운데 「열려라 소설나라」는 국어교사 모임인 열린국어교육연구회에서 작품을 골랐으며,이 연구회는 앞으로 「열려라 시나라」등 시·수필·희곡·설화등 문학 장르별로 중학생 책을 계속 낼 계획이다. 이밖에 「선생님이 풀어주는 중·고교 한자어」1∼2(한문교사모임 지음,풀빛)는 한자어의 뜻·음을 소개하면서 관련된 고사,보기들을 들어 재미있게 설명한 교양서 성격의 학습서이다.단행본으로는 「나의 산에서」(진 조지,비룡소),「나비가 된 작은 숙녀에게」(이혜원,현암사)들이 있으며 특히 「나의 산에서」는 중학교 2학년생이 번역해 화제가 됐다. 「세계 청소년 걸작선」을 펴낸 우리교육 편집자 신명철씨는 『중학생들은 동화책을 읽자니 시시하고,어른 책은 어려워서 못 읽는다고들 한다』면서 그 때문에 국민학교 시절 부모에게 이끌려 그나마 형성된 독서습관이 흔들린다고 지적했다.또 책을 즐기는 아이들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어른 책을 읽거나,무협지·하이틴로맨스 소설에 빠지는등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청소년양서 선정을 맡고 있는 김성만씨도 『국민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나이별로 좋은책을 고르고 있지만 중학생용은 책 자체가 적어 선정에 어려움이 많다』고 밝혔다.그는중학생에게도 또래의 아이들이 갖는 보편적 정서와 갈등에 공감하면서 폭넓은 세계관을 키워줄 책들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길림성 이도강촌(압록강 2천리:4)

    ◎해발 1,260m… “하늘아래 첫 동네”/일제때 독립군 순병지… 9월말이면 눈발/해방후 조선족 70가구… 현재 1천명 거주 길림성 장백현 용강향 이도강촌은 하늘 아래 첫 동네다.그토록 외지고 높은 고원의 산골이어서 일찍부터 일제에 항거한 독립군의 활동무대였다.1915년에 이미 독립군 군비총단이 들어와 둔병을 마련하고 자리잡은 지역이다.또 1936년에는 항일연군 제2군 제6사가 홍두산에 밀영을 세우고 일본군과 만주군을 호되게 족쳐댔다. 일본도 이에 질세라 서둘러 경찰서와 토벌대,산림경찰대를 만들고 헌병대까지 주둔시켰다.그리고 장백진으로부터 이도강까지 길을 냈다.1945년 이후 이 길을 넓히고 손질했으나 길은 여전히 험로였다.일제가 항일연군을 토벌하기 위해 닦아놓은 길을 버스가 구불부불 기어갔다.장백진에서 고작 28㎞ 밖에 안되는 지척인데도 이도강촌까지 2시간이 실히 걸렸다. ○후천적 고산족으로 장백현에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사는데가 용강현으로 전체인구 2천6백27명 중에 1천88명이 조선족이다.비교적 낮은 지역이라는 해발 1천2백60m의 이강촌을 중심으로 해발 2천12m나 되는 홍두산자락 여러 골짜기에까지 조선족들이 흩어져 살고있다.그러고 보면 용강현 조선족들은 후천적으로 고산족이 된 셈이다.백두산 천지와는 90㎞가 떨어져 있으나 쾌청한 날씨에는 흰눈을 머리에 인 백두산이 망망한 숲 위로 아련히 떠올랐다. 그런 고산지대인지라 서리가 내리지 않는 무상기래야 1년에 90여일이 고작이다.장백현의 다른 저지대에 비해 철이 한달 이상 차이가 나기때문에 벌써 가을을 느꼈다.눈이 빨리 내리면 9월말께 첫눈이 온다고 했다.마침 점심 때가 되어 향장,당서기와 어울려 간부식당을 찾았다.시금치국 한 사발에 만두와 김치 한 접시가 나왔다.식당 일을 하는 원채봉아주머니가 애써 식단내용을 설명했다. 『그래도 향간부들의 식사는 괜찮은 편이꾸마.이 시금치도 현성에서 사왔디요.아무 집에나 들어가 봅소.이만큼 먹나….고산디대라 옥수수나 콩도 안됩꾸마.봅소,벌써 긴팔 옷을 입고들 있지 않슴둥』 여름이 아무리 빨리 간다한들 설마 했던 것은 오산이었다.그날 밤에 향장의 안내로 마을 터주격인 허용학(73)노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한기를 느꼈다.장백진 여관에 맡긴 짐보따리 속의 두꺼운 옷이 그리웠다.노인의 집에는 이미 군불을 지펴놓아 한기를 녹였다.꿈과 젊음을 고산지대 이도강촌에 묻어둔 노인의 얼굴에는 산골 밭뙈기 이랑 같은 주름이 가득했다. 노인의 본래 고향은 이도강촌에서 멀다 할 수 없는 함경남도 삼수군(현재 북한지명은 양강도 삼수군)자산면이다.세살 때 모친이 세상을 뜨자 부친이 두 형을 데리고 장백현을 들어가면서 본인은 갑산 누이집에 맡겼다.18살 나던 해에 형님이 와서 장백현으로 데리고 와서 곧 바로 남의 집 데릴사위로 주었다.석달을 살고 장인허락을 얻어 조선으로 돈벌러갔다가 징병에 끌려 일본 규슈로 갔는데,해방 석달 전의 일이었다. ○민요 「사냥 아리랑」 구전 『일본에 있을 때 미군 비행기 무서운 꼴 봤꾸마.매일 폭격을 해대서리 부상까지 입었지비.그날이 7월2일인데 미군 비행기 수십대가 가물가물 떠와서 폭탄을 내리 퍼부었다 이거우다.해방 이듬해 3월 일본에 온 함남 대표를 따라고향을 들렀다가 이리 다시 와서 붙박혀 사우다』 해방 후에만 해도 이도강촌에는 조선족 70가구가 살았다고 한다.한족은 2가구 뿐이었는데,지금은 2백가구 중에 절반이 한족이다.모두가 농사랍시고 짓지만 고산지대라 소출은 보잘 것이 없다.보리는 1무(2백평)에 1백근(60㎏),귀밀은 1백50근,밀은 작황이 썩 좋아야 3백근을 먹는다.그러나 감자는 잘되는 편이다.지금은 짐승이 덜 하지만 10여년전만 해도 멧돼지와 곰 등쌀에 애를 먹었다.7월부터 돼지가 감자밭에 덤벼들면 온통 요절을 내버렸다.귀밀과 밀밭은 곰이 압발로 이삭을 끌어안고 훑어먹기 시작하면 잠깐만에 거덜이 났다. 그래서 사냥감 짐승들이 많다.겨울이면 마을 장정들은 너나없이 사냥을 떠나 용강향에는 「사냥 아리랑」이 지금도 구전되고 있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우리 낭군 영을 넘어 사냥 가네/낭군님 무사히 돌아오세요/대보름 달빛 아래 술을 듭시다」라는 민요가 그것이다.허용학노인의 백두산 겨울철 사냥 이야기는 간이 큰 사나이들의 모험담으로 들렸다. 『한번은 돼디(돼지)사냥을 갔는데 모리꾼들이 돼디간다고 소리를 티데우.돼디 여러마리가 곧추내려오는데 던댕판(전쟁판)에 당꾸(탱크)돌격하듯 달려왔지비.다섯마리 사냥개가 걸구(큰돼지)뒷 다리를 물고 늘어지자 속도가 늦어뎠디우다.그 때 최길환이가 꺾음대(화승촌)를 탕 놓았디우.앞 섰던 놈이 쓰러디니까 뒷 놈들은 샛길로 도망쳤으니 말이디 그냥 달려왔으면 다 황천객 됐을 거우다.거 안포수란 사냥꾼은 곰을 쏘았다가 선불을 맞아 끌안았디우.같이 간 다른 포수가 곰의 머리를 쏘아 떼 놓았는데,곰한테 할퀸 안포수 머리가죽이 벗겨뎠디…』 사냥을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 마을에는 잔치판이 벌어졌다.아낙네들은 국수를 누르고 남정네들은 잡아온 짐승을 삶았다.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함지물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장단을 맞추었다.중국 전역이 한 장기판이라고 하지만 이도강촌 산골마을은 문화대혁명을 수월하게 맞았다.다른 지역에서는 이른바 대식품이라는 풀뿌리 나무껍질을 먹었지만 이도강촌 사람들은 감자를 갈아 떡도 해먹고 분을 내어 국수도 눌러먹었다는 것이다.○아직도 인정만은 부자 그러다가 조사라도 나오면 겨로 음식을 해서 대접하고 조사 나온 간부들이 돌아가면 감자는 배불리 먹었다.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이도강촌을 20세기의 별천지라고 불렀다.아직도 인정 만큼은 부자다.다만 농사만으로 돈 벌이가 시원치 않아 금전적으로 빈자나 각박한 문명세계와는 다른 삶을 살고있다.흠이라면 입쌀이 없다는 것뿐이다.밀 1근 80전,귀밀 30전,감자 30전에 팔아 1근에 2원하는 입쌀을 사먹기는 사실상 힘이 겨웠다. 그럼에도 교육열은 대단했다.조선족과 한족 아이들이 같이 다니던 한조연합학교가 있었는데 지난 1988년 조선족기숙제소학교 하나를 더 만들었다.기숙생들의 한달식비 90원 중에 20원을 기꺼이 물면서도 조선족기숙제소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 「민족의태동,혼의소리」로 개막/민족음악협,1∼2일 광복50돌 공연

    ◎국악·민중가요·서양고전음악·동요 망라 민족의 소리로 광복 50년을 반추하고 미래를 그려보는 공연「민족의 삶,뜻,소리」가 9월1·2일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다. 국악,민중가요,서양 고전음악등 각 장르의 벽을 넘는 민족의 소리꾼들과 춤꾼들이 꾸미는 이 무대는 민족음악협의회(의장 강준일)가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마련했다. 모두 3부로 이어지는 이 공연은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민중가수 안치환이 엮는 「민족의 태동,혼의 소리」로 막이 오른다. 1부는 춤패 춤세상이 독립군과 정신대의 혼을 기리는 춤과 작곡가 강준일씨의 무속음악을 형상화한 무당춤을 선보인다. 또 록그룹 천지인,노래마을이 「지리산」,「광야」등의 노래로 민족의 태동과 시련의 역사를 그린다. 2부는 광복50년의 역사가 국악,민중가요,서양 고전음악등 장르를 초월한 종합공연 형식으로 진행된다. 민족음악연구회가 김순남 작곡의 「해방의 노래」를 금관5중주로 연주하고,한돌,「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70년대의 통기타문화를 상징하는 연곡을 부른다. 이어 판소리명창 안숙선씨가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염원을 담은 「남부리 북누리」를 창으로,정태춘·박은옥부부가 서정어린 민중가요 「북한강」등을 영상과 결합한 노래로 선사한다.또 노찾사는 환경파괴의 아픔을 그린 「고운동 달빛」을 재즈피아니스트 임동창씨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한다. 3부는 어린이 노래모임 굴렁쇠,노래패 꽃다지등이 미래를 상징하는 노래로 힘차게 펼쳐간다. 공연시간은 9월1일 하오7시30분,2일 하오4시,7시.문의 766­2983.
  •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이 세기의 인물탐구:81)

    ◎박진감 넘치는 심혼의 선율… 청중 사로잡아/5세에 입문… 미 줄리아드서 혹독한 레슨 거쳐/연 100회 이상 공연 스케줄 잡힌 세계10대 연주자/67년 레벤트리트경연서 주커만과의 공동우승은 세계음악사에 기록 정경화(바이올리니스트) 영국 선데이 타임스는 83년 「최근 20년간 가장 위대한 기악연주자」로 정경화를 선정한 적이 있다.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다이내믹과 이모션은 한번 활을 잡기만하면 폭풍같은 절조로 청중을 일시에 혼도시키고야 만다.흡사 「마야의 박사가 조각조각 찢어져 신비에 가득찬 근원자의 무릎앞에 펄럭이 듯이 그의 몸속에선 마혹과 초자연이 흘러나온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더구나 자기비판에 엄격하여 「열광적 도취를 알지 못하는 정관(정관)은 참으로 조용히 바라보는 정관이 되지 못한다」는 차원에서 최근에는 진주빛 화염을 가라앉힌 「진한 포도주의 바다같은 심혼의 선율을 빚어낸다」는 평을 듣는다. 정경화의 일사불란하게 화려한 연주경력을 일일이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그는 데뷔이래 「톱」의 자리에 우뚝 선 채 자신의 위상을 도도하게 지켜왔고 지금도 그렇다.그중에서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지난 70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한 런던심포니와의 차이코프스키 협연을 들지 않을 수 없다.이 한번의 연주로 그는 미국의 9대 교향악단을 비롯하여 영국에서 30회를 연주할 수 있는 계약을 맺었고 연 1백회이상의 연주스케줄을 갖는 가장 위대한 연주가의 한사람이 되었다. ○데뷔이래 정상에 우뚝 이보다 앞서 67년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레벤트리트 경연대회에서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우승을 차지한 일은 세계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기도 한다.평론가 위데 콤베는 이날 정경화연주에 대해 「하이페츠나 오이스트라흐나 스턴이 이보다 더 출중한 연주를 했다할지라도 그것은 다 지나간 일이며 그녀만이 갖는 강한 호소력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최상의 연주」라고 호평한바있다. 음악평론가 한상우씨도 『실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잭 스턴을 대부로 하는 막강한 유태계 세력이 주커만을 에워싼 가운데 고독한 싸움에서 이긴 정경화는 지금 주커만 펄만과 어깨를나란히 하면서 명실공히 세계10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돌아본다.70년대와 80년대 일본에서 여신처럼 떠받들려진 그는 75년 샤를르 뒤트와 시벨리우스를 연주했을 때는 일본의 평론가 우노 호이모로부터 「예리한 칼로 살을 베었을 때 푹 솟아오르는 선혈처럼 신선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는 등의 극찬 등 황홀한 찬사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일찍이 레코드 재킷에서나 볼 수 있는 로린마젤 게오르그 솔티 리카르토 무티 앙드레 프레빈 루돌프 켐페 등이 지휘하는 세계적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물론 영국의 데카를 통해 20여장의 레코드를 내놨고 언제부턴가 한국의 정경화만이 아닌 세계적 「대가」로 군림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그는 천재이며 타고난 재능으로 자연스럽게 오늘에 이른 것일까.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단호하게 「노!」다. 「정상에 이르는 길은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는 그는 「음악에서 기적은 일어날 수 없으며 연주할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연주에 임하고 있고 단 한번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다」고 말한다.지난번 광복 50주년 기념연주차 귀국했을 때도 그가 묵고있는 신라호텔 미팅룸에서 하루종일 바이올린을 어깨에 메고 연습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했다. 청중을 사로잡는 마력 때문에 만사에 적극적이고 어딘지 여걸스러우리라고 짐작되지만 정경화의 진짜 성격은 낯가림이 심하고 「말도 못하게 내성적」이며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서 친구도 별반 없는 편이다.다만 첼리스트인 언니 명화씨와 지휘자인 동생 명훈씨와의 트리오는 혈육다운 최상의 절창을 이루고 그리고 그를 생명처럼 키워낸 어머니 이원숙여사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용모 또한 화사하고 순수하여 무대에서의 관록이나 권위따윈 찾아볼 수 없다. ○타고난 재능보다 노력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는 5살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해서 9세때 서울시향과 협연,61년 가족이 미국에 이주하면서 줄리아드음악원에서 일류 바이올리니스트만을 키워낸 이반 갈라미언교수와 조지프 시게티의혹독한 레슨을 거쳐 「자기만의 표현능력과 음악적 언어로써 감정을 총괄하고 통제」하는 연주자로 성장했다.이는 「정말 바이올린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열정이 몸속에서 꿈틀거린 때문」이며 「수많은 장애를 극복한 일은 경이롭다고 밖에 표현할길이 없다」는 음악계의 평은 옳다.그런 점에서 「때로는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이듯 때로는 귀기가 서린 박진감으로 인해 그의 연주를 듣고난 다음 다른 연주를 들으면 어딘지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남아있는 듯 성에 차지 않는다」는 이순열씨(음악평론가)의 말은 음악애호가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위대한 음악가들은 자연과 함께 살면서 그 속에서 작품을 썼기 때문에 그들의 음악속에는 자연의 모든 색깔들이 칠해져 있다는 걸 나는 일찍이 스승들로부터 배웠어요』 따라서 「지금까지의 연주활동은 앞으로 10년을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하며 「음악이 지닌 색채감과 이디엄에 집중하여 자신감을 성취한 지예에 다다르고 싶다」는게 그의 꿈이다. 바이올린의 화신인듯 그래서 음악과 결혼한 것처럼 보이던 그가지난 84년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영국인 사업가 제프리 리게티씨와의 결혼을 발표했을 때 이로인해 그의 들끓는 정열과 현란한 선율이 한치라도 사그라들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그러나 결혼후 피아니스트 필립 몰과 레코딩한 「정경화 콘 아모레」는 『살바도르 달리가 「피는 꿀보다 달다」는 그림을 그렸지만 이젠 「정경화의 바이올린은 꿀보다도 달다」란 그림을 그려야 할때』라는 평을 받을 만큼 신기의 솜씨로 청중을 도취시켰다.영국의 평론가 에드워드 그린필드는 「정경화가 온세계를 향해 바이올린의 활로 쏜 화살은 에로스의 황금화살보다 더 감미로운 사랑의 기쁨을 느끼게 할뿐 아니라 우리들을 음악의 유토피아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쓸 정도였다.지난 봄 그의 귀국 연주에 대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강숙교장도 「음악을 끝까지 지킨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가 활을 긋는 그 순간부터 정경화는 아직도 우리의 희망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고 일깨운다.부군인 리게티씨(49)는 「성격이 온화한 정경화 음악팬」으로서 그의 음악생활에 대한 모든 것을 협조하고 외조한다고 전한다.두아들은 엄마를 따라 재곤(프레데릭·10)은 첼로와 피아노,유진(7)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고 방학을 이용해 광복50년기념행사에 다녀갔다. ○두 아들도 음악공부 실제로 결혼후 정경화만큼 눈에 띄는 변모를 보인 예술가는 별로 흔치 않다.한국에서 태어나 무수한 장애를 넘어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끈질긴 집념과 강한 개성 때문에 「때때로 발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앙칼져 보이기도 했던」 오기는 이젠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패기와 자존심과 싱싱함과 날카롭게 찔러오는 그 전율」은 한층 침후해지고 그의 손과 머리와 마음은 움직일 때마다 아름다움을 캐면서 달빛이 녹아 강물을 이루듯 흘러넘치는 광채로 청중의 온몸을 적신다. 지금 「세계가 기억하는 연주가 정경화」는 「자연의 심장인 명작의 숲」속에 서서 인간의 심장이 아닌 영혼을 깨우고 흔드는 절기의 선율로 하늘을 꿰뚫고 싶을지도 모른다. □연보 ▲1948년 서울에서 출생.정준채씨와 이원숙여사의 4남3녀중 넷째 ▲53년서울시향과 협연 ▲61년 이화여중 재학중 도미­줄리아드음대서 갈라미언및 시게티사사 ▲64년 카네기홀 독주 ▲66년 메리웨더 포스트청소년 국제 콩쿠르 수상 ▲67년 레벤트리트 국제바이올린콩쿠르에서 주커만과 공동1위­줄리아드 음악원 졸업­제네바 국제음악콩쿠르입상 ▲70∼84년 런던심포니(지휘 앙드레 프레빈)뉴욕필(지휘 레너드 번스타인)을 비롯,필라델피아·클리블랜드오케스트라,몬트리올·보스턴심포니,로스앤젤레스·이스라엘·로열필,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빈·프랑스 국립교향악단 등과 연 1백회연주,데카 EMI전속 ▲73년 「스트라빈스키 왈튼협주곡」레코드로 에디슨상,독일평론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스타상」수상 ▲80년 퀸 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 심사위원 ▲84년 결혼이후 런던필(지휘 리카르도 무티)·프랑스국립교향악단(피아노 필립 몰)·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오케스트라·프랑스국립관현악단·베를린필협연등 연 70회연주,유럽 캐나다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지역 순회연주 ▲92년 미국의 92 엑설런스 20 00상 수상 ▲94년바르토크 협주곡으로 그라모폰상,차이코프스키 협주곡 「빈티지 레코드」선정 ▲95년 정트리오 시향협연및 부산 청주 마산 독주회,광복50주년 축전음악회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대향연(잠실주경기장) 피아노 필립 몰·라두루프 등과 데카·EMI에서 레코드 20여장및 CD LD출반
  • 「군사」의 용산이 문화의 중심지로(박갑천 칼럼)

    『맑은밤 텅빈강에 온갖소리(만뢰) 고요한데/발(렴)을 반만걷고 흰달빛 맞이하네/보랏빛연기 흩어지니 하늘은 넓기만하고/얼음같은 달은 반쯤떠서 금떡(금병)같구려/빈마음 함께 밝아 더욱 맑고 깨끗하나니/밤늦도록 학과 더불어 흰털 휘날리는듯/강가 어디선가 날라리(철적)소리 들려오누나/맑은흥(청흥) 유유히 강굽이 따라 퍼져나가네』(한문원문은 생략) 경도십영의 제천완월(제천정에서 달을 감상함)에서 강희맹이 읊은 시.제천정은 용산구 한남동 한강가에 있던 정자로서 왕가의 별장으로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용산.양화나루 동쪽언덕의 산세가 용이 서린 형국이라서 용두산이라 했고 용산이란 이름은 거기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토박이이름은 미리뫼였을까.용산은 군사시설과 관계를 지니면서 내려온다.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려면서부터 그랬다.황현의 「매천야록」에도 그게 보인다.『왜인들이 숭례문(남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구역을 제멋대로 금긋고서 군용지라는 푯말을 세워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그일대 3백여만평은1905년 일본군이 내부대신 이지용과 교섭하여 강제로 수용해버렸다.용산동1가에서 5가에 이르는 언저리로서 사격장등이 세워지면서 군사기지화한다.그건 광복후로도 이어진다.미군부대가 들어서서 넓은 지역을 차지해버렸으니 말이다.자연히 우리의 국방부등 군사관계 청사들 또한 이곳에 들어앉았다.용산3동의 경우 민가는 1백50채뿐이었을 정도로.이젠 그 군사시설들이 물러난다. 조선초기의 청백리 청파 기건이 살았대서 붙은 이름이라는 청파동을 안고 있는 용산.바로 옆까지 들어온 한강물이 철썩이는 「푸른언덕」은 아름다웠던 것이리라.그 청파동보다 남쪽에 있는 이태원주변에 대해서는 「용재총화」가 이렇게 묘사한다.『그곳으로는 맑은 물이 산에서 쏟아져 내려오고 절의 동쪽에는 큰 소나무들이 동네에 가득하다.성안에 사는 부녀자들이 피륙을 빨고 바래기 위해서 모여든다』 군사시설 물러가는 용산땅은 문화의 터전으로 모습을 바꾼다.얼마전 김영삼대통령은 이 용산일대가 2000년대 서울의 문화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바도 있다.고려 숙종때 최사추가 「도읍후보지」로 보고드렸다는 곳이 용산일대.시대가 흘러 문화의 도읍지로 되나보다.
  • 흑인문화 중짐지 할렘가(브로드웨이 “새바람”:14)

    ◎「블랙르네상스」 부활의 꿈 가꾼다/“범죄·마약·빈곤의 거리” 오명씻기 안간힘/중심가에 22층 국제무역센터 건립도 추진/시인 앤젤루·영화감독 울프 등 고무적 예술활동 『……/밤이 깊어지면 그는 낮은 톤으로 노래하고/별빛이 사라지고 달빛만 남게되면/가수는 노래를 멈추고 잠자리로 가네/그가 낮게 부른 고난의 블루스만이 메아리 되어 귓가를 스치고/그는 바위처럼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지네//』(랭스턴 휴스,「고난의 블루스」 The Weary Blues 중에서) 1920년대 미국 블랙르네상스의 기수로 당대 미국의 최고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랭스턴 휴스는 할렘흑인들의 힘들고 고난에 가득찬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그러나 당시의 할렘사람들은 좌절하지 않고 일어섰으며 할렘을 흑인문화의 중심지이자 흑인인권운동의 중심지로 아프리카나 카리브해에서 이주해온 흑인들의 자랑스런 고향으로 만들었다.그래서 할렘은 한때 「세계 흑인수도」라고까지 불릴 정도였다. ○한때 「세계 흑인 수도」로 블랙내셔널리즘의 대부인 마르쿠스 가베이가 1916년 국제흑인진흥회를 만들어 백인과의 투쟁을 선언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운동」(Backto Africa Movement)을 벌여 노예상태의 흑인들에게 자각의식을 불어넣었던 곳이 바로 할렘이다.오늘날 이곳에는 마르쿠스 가베이 파크가 있어 그를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할렘은 범죄·마약·빈곤 등 불안의 대명사로 불리게 됐다.온통 낙서투성이의 거리,퇴락한 빌딩군,지저분한 쓰레기 더미,이곳저곳에 널려있는 홈리스(집없는 걸인)등 같은 맨해튼 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20∼30블록 남쪽의 거리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할렘은 지리적으로 센트럴파크의 북쪽끝인 110스트리트로부터 북쪽으로 155스트리트까지를 일컫는다.그 가운데 컬럼비아대학과 세인트 존 디바인성당등이 있는 모닝하이츠라고 부르는 허드슨강변의 언덕지역은 제외된다.또한 피프스(5th)애브뉴를 사이에 두고 동쪽은 히스패닉이 모여살아 이스트할렘 혹은 스패니시할렘이라 부르고,블랙이 모여 사는 서쪽은 웨스트할렘과 센트럴할렘으로 구분된다.브로드웨이는 웨스트할렘을 종주한다.따라서 할렘은 브로드웨이의 또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블랙르네상스의 부활」.이는 21세기를 눈앞에 둔 「할렘」사람들의 최대의 희망이다.할렘을 절망의 땅에서 건져올려 희망의 땅으로 만들려는 할렘사람들의 노력은 생존의 몸부림만큼 절박하게 와닿고 있다.이를 위해 먼저 경제적 측면에서의 노력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으며 블랙문화의 정통성을 찾고 그를 보존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활발하게 일고 있다. 그 첫번째 노력은 할렘을 동서로 가르지르는 중심가인 마틴 루터 킹 블루바드(125스트리트)를 무역의 거리로 만들자는 계획이다.이를 위해 그 한복판에 22층 높이,40만 평방피트(1만1천평) 규모의 국제무역센터를 건축한다는 것이다. 뉴욕 & 뉴저지항만청이 올봄 주정부 도시개발공사의 승인을 받아 총8천3백만달러의 예산으로 98년 완공을 목표로 착공할 할렘국제무역센터 내에는 1백개 룸의 호텔과 7백50명 수용의 회의장,전시장,기타 오피스룸등이 최고급 시설로 들어서게 된다.종합유통업체들의 진출도 활발해질 전망이다.할렘국제무역센터 건립추진위의 퍼시 서튼 위원장은 『21세기의 할렘은 희망의 땅으로 이곳 주민 뿐 아니라 미국내 모든 흑인들에게 꿈을 선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있다. ○「블랙문화」 보존 움직임 할렘의 문화적 정통성을 찾기 위한 노력도 아직 크지는 않지만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마틴 루터 킹 블루바드에 위치한 할렘의 대표적 극장인 아폴로극장은 할렘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해오고 있다.1914년 백인전용의 오페라하우스로 개관했던 이 극장은 1934년 소유주가 바뀌면서 모든 인종에게 개방됐고 할렘에 흑인들의 이주와 함께 점차 흑인전용극장으로 바뀌게 됐다. 아폴로극장이 매주 수요일 개최하는 「아마추어의 밤」은 어느 최고 극단의 공연보다도 재미 있다.아마추어들이 저마다 특색있는 몸차림을 하고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박수에 따라 평가받는 이 쇼는 수요일밤의 열기로 그득하다.재즈의 원형으로 흑인 전통 대중가곡 형태인 블루스를 비롯,재즈·스윙뮤직·랩·힙합등 온갖 형태의 노래와 춤들이 어우러지는 한마당은 할렘이 생생하게 숨쉬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또한 최근 흑인예술인들의 두드러진 활동도 큰 고무가 되고 있다.93년의 경우 클린턴대통령 취임식에 시인 마야 앤젤루가 축시낭송을 위해 초청된 것을 비롯,영화감독 조지 울프는 토니상을 받았다.소설가 토니 모리슨은 넬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흑인작가가 됐으며 유세프 코무니아카는 시부문 퓰리쳐상을 받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흑인들의 독특한 창조력은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해주기에 충분하다.할렘의 이같은 회복 분위기에 따른 사회안정를 반영하듯 할렘의 범죄율은 최근 3년간 두드러지게 감소했다.지난해의 경우 할렘에서 살해된 사람은 3백50명으로 93년보다 20% 감소를 보였으며 90년의 6백50명 보다는 31%의 감소율을 나타냈다. ○범죄율 크게 줄어들어 한편 할렘의 서쪽을 달리는 브로드웨이는 114스트리트에서 아이비리그의 일원으로 미국 최고의 명문대에 속하는 컬럼비아대학을 만난다.이 대학은 120스트리트까지 계속되며 각 단과대학들이 인근 빌딩에 들어서 있어 넓은 대학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유서 깊은 교회들도 많다.허드슨강을내려다보고 있는 리버사이드처치(122스트리트)는 1930년 설립된 21층의 고딕양식 교회로 2만2천개의 파이프로 이뤄진 세계최대의 파이프오르간으로 유명하다.컬럼비아대학 남동쪽에 위치한 세인트 존 디바인 성당은 1892년 건축을 시작하여 1백년 넘게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 딜빛에도 열 있다/미 학자 보고서/보름달 지구온도 0.02도 높여

    『보름달 빛이 조금씩 지구를 덥힌다』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기후과학자 로버트 볼링과 랜달 서베니는 10일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실린 보고서에서 달이 열을 발산하고 있으며 달의 모양이 보름달로 바뀔 때마다 지구 온도가 0.02℃가 올랐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달이 가장 밝을 때 달빛은 지구에 ㎡당 열에너지 약 0.0102W를 전달한다.태양은 지속적으로 ㎡당 1천3백67W의 에너지를 지구에 전달한다.7백46W는 1마력에 해당한다. 달은 스스로 빛과 열을 만들어내지는 않고 태양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반사한다.38만㎞ 떨어진 지구에서 보면 달은 은빛으로 빛나지만 태양빛을 가장 많이 받을 때 달표면은 화덕처럼 달아올라 93℃까지 오른다.그 열이 지구까지 뻗친다는 것이다. 달에서 나오는 열량이 지구의 기후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고 연구진은 말했다.
  • 언기국의 고성 사십리성(서역 문화기행:11)

    ◎비바람에 크게 훼손… 한·수 유물 출토/당대부터 관개시설 발달… 보리·배·사과 등 풍성/인근엔 거대한 담수호… 연간 4백여t 고기잡아 서역에 오직 하나뿐인 지방철도 남강선은 우루무치에서 동남쪽으로 천산산맥의 북록을 넘어 쿨라까지 4백70㎞.쿨라는 그 남강선의 종점이며,서역의 몸통격인 타림(탑리목)분지의 동북단에 위치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곳은 서한때 서역에 열립했던 36국중의 하나인 거리의 도읍이었지만 동한때엔 언기나라에 합병되었던 곳이다.한·당의 서역도호부였던 오루(오뢰)·윤대·쿠차 등이 모두 쿨라의 남쪽에 위치했다. 언기는 쿨라의 서북 50㎞밖에 있었다.오늘은 비록 쿨라가 이 지역 몽골자치주의 도읍으로 그 정치적인 위상이 높지만 청나라 이전까지만도 언기의 지위가 높았다.따라서 한나라때는 「언기」,위진때는 「오이」,당나라때는 「아기니(아기니)」,송원대에는 몽골사람과 위구르족이 정착하면서 「카라사알(객라사이)」로 불리었던 언기에는 역사의 유적도 많았다.그것은 한나라때 언기국의 세가 거리국의 그것보다 우월했음을 말해주었다. 현장법사가 쓴 「대당서역기」에는 언기를 국방에 유리한 요새지요,관개가 발달하여 보리 기장 대추 포도 배 사과가 풍성한 농산지요,가람이 10여곳에 승려가 삼천을 넘는 불교의 본산이라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의 언기읍은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의 취락일뿐 아무런 역사 유적이 없었다.가장 상징적인 유적은 언기현에서 중국 최대의 내륙 담수호인 보스텅(박사등)호로 가는 길옆의 「사십리성」이었다. ○개원통보가 당대확인 그것은 필자가 서역에서 보았던 많은 고성중에선 가장 규모가 작고 풍화와 손괴의 정도가 심한 데다 출토된 유물조차 적어서 그 연대를 단정하기에 어렵게 했다.필자는 정문을 통해 고성에서 불룩한 언덕으로 올랐다.둘레의 길이가 3㎞ 남짓한 정방형의 고성,성안에는 비록 그 형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부서졌지만 판축된 토벽의 두께와 높이로 보아 장대한 요새는 아닐지언정 어느 관아의 건축이나 창고등의 용처로 보였다. 19 63년,「사십리성」의 탐사 발굴때 출토되었던 도기 동경 철검 동전 등으로 이 땅이 한대로부터 북조를 거쳐 수당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와 생활이 묻혔던 현장임을 믿게 되었다.특히 그속에는 당대의 주전인 「개원통보」가 그러한 확신을 주기도 했었다. 청대 서송이 쓴 「서역수도기」는 이곳을 한대에 존립했던 언기국의 도읍지인 「원거」성으로 추정한 바 있었다. 그 「원거」는 둥근 도랑이란 뜻,지금 황막한 사막속에 당치도 않은 말로 보이지만 지금도 사십리성의 둘레를 살피면 지형이 움푹한 데다 멀지 않은 곳에 관개의 수로가 출렁거려 어쩌면 당시의 호성하였을지도 모른다.더구나 여기서 불과 20리밖 남쪽엔 58㎞의 길이에 28㎞ 너비의 호수,그래서 「서해」로 불리는 보스텅호가 있었다. 보스텅호 선착장.우거진 갈대숲에 서서 함박눈처럼 분분한 갈매기를 보면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쯤 서 있노라는 착각을 오래 오래 씻을 수 없었다. 연간 4백여t의 어획고를 자랑하는 선창.거기엔 갈대의 늪을 이어주는 판교도 여러 군데 있었다. 옳지! 여기서 정동으로 4백㎞를 훌쩍 날면 거기엔 또 하나의 담수호 로프·노오르(나포박)늪이 있다.거기는 비록 중국이 첨단무기를 시험하는 척박한 땅이지만 그 언저리엔 지금부터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330년까지 4백년동안 선선의 왕조가 떵떵거리고 영화를 누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몰아닥친 풍사에 덮인 채 춘몽처럼 사라진 누란의 땅이 아닌가? 필자가 연민하는 그 누란의 유적지,그 길은 너무 험했다.다만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서방기선 통천하 기록 보스텅호에서 쿨라로 돌아가는 황혼,다시 언기현을 관통,언기산을 굽어 돌 때 휘몰아치는 가을 바람에 뽀얗게 모래가 일면서 시야가 흐렸다.이 때 10세기 말 송나라 시인이었던 심료의 시 「언기행」이 생각났다.세월은 천번이나 바뀌었어도 이 계절 이 고장을 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언기산두모연자. 오량성단행인지. 평사풍급권한봉, 천사궁로월여수」(후략) (언기산 산마루엔 자줏빛 저녁연기, 소·염소 움막 들고 인기척도 끊겼네. 사막에 모진 바람,쑥풀을 날리고, 하늘은 천막이요 달빛은 물이네) 언기산 너머로 서울의 안양천만한 강이 흘렀다.이름하여「개도하」.비록 천리를 굽이치는 장강은 아닐지라도 수십m의 강폭에 훤칠한 다리.그것은 공작강(공작하)에 합류되어 로프·노오르로 유입하는 강줄기였다.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유기」에 나오는 「통천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명작을 남긴 현장으로 「철문관」만한 곳이 없다.당대의 변새시인 참삼(음참·714 ∼ 770)은 여기서 「철문관누각에 쓰노라(제철문관루)」와 「철문관 서관에 자면서(숙철문관서관)」등 두편의 명시를 남겼다. ○3층누각 철문관 우뚝 철문관이란 언기현과 쿨라를 연결 짓는 협곡인 바,공작강 상류에 있으면서 망망 수천리의 타림분지로 들어가는 목이다.그래서 「철관곡」으로 불리는 험관이다.무엇보다 참삼의 「철문관누각에 쓰노라」가 12 00년전의 당시를 생생하게 투시해서 철문관 시로는 아무도 그를 따르지 못한다. 「철관천서애,극목소행객. 관문일소이,종일대석벽. 교과천인위,노반양애착. 시등서루망,일망두욕백」 (철관 서쪽으로 아득한 하늘/눈을 휘둥거려도 사람 그림자 뜸하네. 관문에 문지기,해 지도록돌벼랑 마주보네. 천길 낭떠러지에 놓인 다리와 두 벼랑 사이에 가물거리는 길. 어렵사리 그 서루에 올라,휘­둘러보면 머리조차 희겠네) 철문관은 쿨라시 북쪽 10㎞지점.쿨라시의 오아시스를 벗어나자 키질천불동이나 자오후리사원유적을 찾았을 때나 마찬가지의 숨막히는 적갈색 암벽의 산들.협곡을 돌고 돌아 차가 멈춘 곳엔 웬걸 즐비한 청사들,한눈에 무슨 관아의 건물 같았다.공작강 수력발전소요 공작강 댐의 관리 사무소였다.거기서 왼쪽으로 냇물이 흐르고 그 냇물위쪽으로 3층 누각이 보였다.그게 「철문관」이란다. 철문관뒤로 정말 천길 낭떠러지가 공작강을 중심으로 양쪽에 깎아세운듯 했다.그 동쪽이 쿠루크산(고로극산),서쪽은 허라산(하랍산).지금은 그 협곡을 잇는 다리와 낭떠러지에 가물거리는 길은 물론 온 종일 석벽을 마주 보던 문지기를 만날 까닭은 더구나 없었다. 필자는 중국문학에 출현하는 관문중 최서단의 철관문과 거리의 도읍이었던 쿨라를 떠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인양 아쉬웠다.그것은 쿨라나 언기가 누란의 인근이었고,필자에게도 당나라의 유명한 변새시인 왕창령(692∼757)이 그의 「종군행」에서 「누란을 공략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으리(불파루란종불환)」하면서 비장하게 그 개선을 맹세했던 마음이 있었기에 말이다.
  • 이슬람교 상륙 거점… 에이티갈시원 웅장(서역문화기행:8)

    ◎동서문물 교류 실크로드의 중심지/중국 서쪽끝 도시 카시갈/녹색돔의 전도사 호오쟈가족묘… 궁전 방불/중국최초의 석굴시원 삼선동도 시외곽에… 생불벽화 유명 호탄에서 중국 최서단 도시로서 이슬람교의 중심지인 카시갈까지 5백9㎞는 필자에게 신선한 체험을 안겨주었다. 그밤이 팔월 한가위 어스름 저녁,고물딱지 장거리버스에 올랐다.승객은 온통 위구르족.꼬박 밤을 새우면서 열두시간을 달렸다.차창의 깨진 창틈으로 몰아치는 고춧바람에 기침이 나도록 맵디매운 담배연기,그리고 양고기 노릿내,그것들이 시간마다 코란의 독경소리와 범벅이 되어 눈과 귀를 찌르는데 창밖의 몽롱한 달빛에 스쳐가는 부연 모래빛,가도 가도 불빛 없는 바다에 뜬 느낌이었다. 카시갈은 옛날 소륵국의 도읍지.우전이나 마찬가지로 한나라 때는 36국의 하나요,당나라 때는 안서사진의 하나였다.「한서」,서역전의 기록대로라면 장안에서 9천3백50리(4천6백75㎞)지점,벌써 2천년전의 호구가 1천5백호에 인구 8천6백여명,거기다 시열,그러니까 오늘의 바자,곧 장을 말하는데 카스갈의 바자는 아직도 전중국을 대표하고 있다.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그들의 국토방위를 위한 최서단 요새로 생각했었다.후한 때의 명장 반초(33∼103)가 파미르고원을 넘어 쳐들어온 쿠샨왕조(대월씨국)를 대파하고 그의 부하인 감영을 무역의 사절로 로마에 파견한 것도 여기였었다.인도의 불교가 동점한 최초의 거점도 여기요,중동의 이슬람교가 상륙한 최초의 거점 또한 이곳이었다. ○로마로 넘어가는 관문 그도 그럴것이 카시갈은 알타이산맥으로부터 시작한 타림분지가 솟아오르면서 파미르고원으로 달려가는 바로 해발 1,294m의 낮은 고원지대라는 지리적 특색을 살린 곳이다.거기서 파미르고원을 넘으면 곧장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이란·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기스탄 등의 관문으로 통한다.그러니까 로마로 넘어가는 실크로드의 중국측 마지막 역참인 것이다. 중국에서 실크로드의 의의를 동서의 교통과 무역외로 서역의 침입을 막고 중원을 지키겠다는 국방에 두지만 그에 못지않은 의의는 예술에 있다.예술의 가시적인 성취는 무엇보다 석굴이다. 석굴은 사실상 「석굴사」 혹은 「석굴암자」의 약칭이다.그것은 벼랑이나 석굴속에 설시한 불교사원으로 초기불교가 「이진수행」을 제창함에 비추어 석굴은 적지였었다.석굴은 속세의 잡음이 들리지 않는데다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한 이점 탓에 불교의 고사와 원리를 벽화로,석가를 비롯한 보살·미륵을 조각하기에 좋았었다. 기원 3세기전부터 인도에서 성행했던 석굴 개착은 그로부터 대략 5세기 뒤인 동한말,그러니까 기원 200년 전후해서 중국에 출현했으니 그 최초의 석굴이요,최서단의 석굴이 카시갈에 있다.바로 「삼선동」. 삼선동은 위구르말로 「투쿠자우지라」.그 이름 그대로라면 세사람의 신선이 사는 동굴이지만 실상은 세개의 석굴을 말했다.카시갈에서 북쪽으로 18㎞지점,차크마크(흡극마극)강을 따라 황막한 사막을 달리다 문득 그 강둑에 멈추었다.대절한 택시기사는 남쪽 벼랑을 가리킨다.파미르고원에서 흘러내리는 설수의 강인데 강폭은 1백50m를 넘을 만큼 넓었다.필자 혼자서 차크마크를 건너서 조금전 택시기사가 가리키는 곳까지 족히 20여분을 헐레벌떡 뛰었다. 삼선동은 하상으로부터 15m쯤 벼랑,그 12m쯤 높이에 1m 남짓의 간격으로 나란히 뚫린 세개의 석굴이어서 필자는 지붕위에 매단 비둘기집 상자를 보는 느낌이었다.중간석굴이 약간 컸지만 대체로 높이 2m 남짓에 너비 2m쯤.거기서 벼랑끝도 3m 남짓 보였다. 그속에 한말 불교미술이 아직도 남았다니 나그네의 속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옛날 인수봉 타던 가락으로 적갈색 그 벼랑을 올랐지만 겨우 4m 높이서 쩔쩔매고 말았다.그 나머지 수직의 암벽은 어쩔 수 없었다.미리 알았더라면 조립식 사다리를 준비하거나 아예 벼랑의 상단에서 자일을 묶고 낙하할 것을. ○전래 불교미술의 원형 자료에 따르면 석굴은 굴마다 전후 2실로 나뉘었다고.서굴과 중간굴은 텅텅 비어 있고 오직 동쪽 석굴만이 진귀한 미술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특히 70여개의 불상이 사방을 벽화로 메운데다 조정(물풀을 그린 천장)에는 연꽃이 그려졌다고.그중에도 미술사적·불교사적 초점의 벽화는 그 벽화중의 좌불한 컷으로 ,그 좌불은 방격무늬의 가사를 입고 거기에 녹색·남색·홍색 등 세가지 색깔이 어울린 채색의 구성이라고 했다.그것은 인도불교가 중국 전래당시 불교미술의 초기적인 원형을 보인 것이다.무엇보다 쿠츠의 키질천불동이나 돈황의 막고굴보다 연대가 앞선데다 간다라의 영향조차 보이지 않는 점에서 주의를 받아왔었다. 삼선동 그 석굴에 발을 디디지 못한 채 돌아서는 필자는 청나라 시인 철보(1752∼1825)가 카스갈의 지방관으로 귀양살이하던 1810년 무렵에 쓴 「유삼선동」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칠십이동천,무지용탁석. 내찬소륵서,착공의암벽. 응고적선인,도명둔공적. 산황운불서,석쇄사여격. 위제고백인,욕상심전탕. 선인불가견,선동차친력. 적환여적선,탑연경수적.」 (세상엔 72동천의 선계가 있다지만,중 하나 설 곳 없네. 카시갈 서쪽으로 숨어,석굴을 파고 암벽에 기댔네. 신선이 여기로 귀양와서,명예를 피한 채 적막세계로 숨은 거지. 산이 거칠어 구름조차 깃들지 못하고,돌이 부서져 모래는 여울처럼 흐르네. 백길되는 아스라한 사다리에,발을 딛자 후들거리는 마음. 신선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고,사람은 여기 삼선굴에 올랐네. 귀양살이 이 사람도 속세의 신선처럼,우두커니 다시 누굴 따를까?) 근 2백년이 지났건만 차크마크강은 예대로 황량했다.예전의 사다리마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매일 다섯차례씩 예불 카시갈에서 불교의 유적이 삼선동에 상징적으로 남았다면 이슬람교의 유적은 카시갈이 이슬람교의 중심지답게 웅장하고 찬란하다.우선 이슬람의 예배당으로 4백50여년의 역사에 1만7천㎡의 면적을 지닌 맘모스의 에이티갈(애제□이)사원이 있고,이슬람의 일개 무덤으로 아바호오쟈(아파곽가)같은 궁전식 능묘가 그것이다. 카시갈시의 해방북로에 있는 에이티갈사원은 중국 최대의 청진사다.아랍어와 이란어의 복합사인 「에이티갈」은 곧 예배당을 뜻하는데 1426년 당시 카시갈의 통치자였던 사크서즈 미잘의 후예가 세운 것이다. 그 사원은 넓은 땅에 돔과 첨탑을 배합한 예배당·독경당·문루·연못 등의 장엄한 외형이 나그네의 시선을 끌지만 사원의 광장으로부터 중정·본전까지 사원 전역에매일 새벽부터 드리는 다섯차례의 예배,더구나 매주 금요일 하오에 드리는 주말예배의 성황은 열렬하다.신도 모두가 깔개를 깔고 이맘(예배의 인도자)이 암송하는 코란에 따라 무겁게 화창하는 군중의 소리는 파도되어 출렁이고,다시 신도들이 대지에 이마를 조아리며 무엇인가 외치는 장면은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카시갈시 동북쪽 5㎞지점의 하오한(호한)촌에 있는 호오쟈의 무덤은 우리의 상식과 너무 달랐다.작은 개울을 건너 낮은 언덕을 올라 고목 서너그루 아래로 말굽형의 아치를 들어서면 왼쪽으론 줄줄이 높은 기둥의 예배당이요,바른편에는 기다란 담안으로 마치 궁전을 방불케 초록빛 타일의 돔이 우뚝 솟아 있다. 궁궐의 문을 열 듯 대문을 열자 그 안에는 침침한 광선에 무거운 침묵이 덤벼오면서 울긋불긋 현란함을 느꼈다.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것들은 야외의 봉분이 아닌 옥내의 설단식 무덤이었는데 강렬한 채색의 주단이 그 관을 덮고 있는 모습은 마치 1인용 텐트를 치고 있는 야영장을 방불케 했다. 3백50여년전 이슬람교 전도사였던 호오쟈로부터 5대에 걸친 그의 가족 72명의 집단 묘지였다.그 안에는 청나라 건륭황제의 부름으로 궁궐에 갔다가 황제의 구애를 거절하고 자살하였다는 호오쟈의 딸 향비의 묘도 있다.비록 전설이지만.
  • “기생은 훌륭한 시조시인”

    ◎순천향대 박을수교수 「시화­사랑」서 기생문학 정리/재색 두루 겸비… 연애감정 자유롭게 표현/“우리 문학의 예술성 한단계 높였다” 평가 『평생에 기생된 몸이 부끄러워서/달빛젖은 매화를 사랑하는 나/세인은 내 마음을 알지못하고/오가는 손길마다 추근거리네』 「시화­사랑 그 그리움의 샘」(아세아문화사 간행)에 나오는 계랑이라는 기생의 시다.임을 향한 한마음과 구차한 현실사이에 선 고민이 잘 드러나 있다. 시조연구가 박을수 교수(순천향대)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생들의 시조와 잡문만을 따로 모은 이 책은 양반들과 음풍농월이나 일삼은 것처럼 생각되는 기생이 사실은 얼마나 훌륭한 시조 작가였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지은이는 지난 92년 고려말기부터 개화기까지의 우리 시조를 총정리한 「한국시조대사전」을 엮으면서 기생들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기녀들은 미색과 재주를 두루 갖췄으면서도 미천한 신분때문에 사대부집 규수들한테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했지요.그렇지만 한편으론 양반을 옥죄었던 유교윤리로부터 자유로웠기에 거침없이 남자를 사모하고 그 절절한 심정을 시로 남길 수 있었어요.시조사를 훑어보면서 이 시들이 양반문학에 없는 솔직한 표현으로 우리문학의 예술성을 한단계 높였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기생 시조의 또다른 특징은 책상앞에서 짜낸 것이 아니라 탁 트인 산수를 앞에 두고 양반들과 화창하는 가운데 나왔다는 점.「동인시화」「시화총림」등 옛 문헌을 뒤져 11편의 시화를 실은 이 책은 명시의 현장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재미가 있다. 여러 목석들을 녹여낸 황진이,임금을 사랑한 소춘풍,시를 통해 마음을 주고 받았던 연인 정철과 진옥,늙은 감사대신 젊은 사또의 품에 안기려고 죽음도 감수했던 매화 등 당대에 이름을 날린 이들의 절창과 이에 얽힌 사연이 흥미롭다. 시문을 샅샅이 훑어 싣고 30여 페이지에 달하는 각주를 덧붙인 이책은 여류문학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일반독자라면 한편의 연가집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 발레리나 박인자(이세기의 인물탐구:65)

    ◎현란한 율동의 창작무대 쉼없이/82년 「백조의 호수」서 고난도 「푸에테」 24회 선보여/토슈즈 과감히 벗고 출연… 정통발레 변혁 시도/후진 양성하며 항상 공연주역… 내년 4월 「20년 기념작」 준비 박인자 84년 음악전문지 「객석」창간호는 발레리나 박인자를 발레계의 「비범」으로 꼽은 일이 있다.조동화·김영태·채희완등 무용평론가들의 추천이유는 이랬다. 『82년9월 「백조의 호수」3막중 오딜(흑조)에 도전한 박인자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으로 눈이 부시도록 현란한 푸에테를 24회나 도는 저력을 보였다.83년5월 그가 춘 오데드 솔로 역시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무대였다.그후 쇼스타코비치의 「아다지오」와 「녹색의 변주곡」에서 그는 지체의 포물선을 감각적으로 금긋는 데 기여했다.개성이 돋보이는 박인자에게서 아직 노련미를 찾긴 어려우나 그의 작업은 신뢰감을 갖고 주시해도 좋을것 같다』는 요지였다. 한 다리로 서서 몸을 완전히 회전시키는 푸에테란 발레리나의 자존심이 걸린 고난도 테크닉의 하나다.최근에는 테크닉 발달로 이보다 긴 푸에테와 필루에트를 성공시키는 예가 흔히 있지만 10여년전만해도 그의 연속 푸에테는 무용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후 개인발표와 지방공연·춤작가 12인전·대한민국무용제등 각종 대형행사에서 박인자는 클래식과 네오클래시시즘 창작발레와 재즈발레에 이르기까지 변화되고 발전된 춤의 모습을 정열적으로 펼쳐왔다.91년 국립극장에 올려진 「레이몬다」가 「클래식의 격정과 정확성」을 갖춘 무대였다면 「불새」의 경우는 모리스 베자르의 단순화된 현대발레를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역동성을 살려 힘있고 치밀한 원형무로 만든 수작」이었다. ○격있는 화려함 과시 지난해 가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선보인 그의 「나비부인」은 긴 부드러운 의상속에서 물흐르듯 유연한 동작을 구사하여 『40대 무용가 중에서 포르드 브라(팔의 움직임)의 정지미를 이만큼 탄력적으로 과시한 발레리나는 드물다』는 평을 받았다.더구나 창작발레 「초록의 환상」에서 토슈즈를 활짝 벗고 산뜻하게 치솟는 도약은 무중력과 부력의 이미지를 꽂으면서발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지속적인 훈련이고 기교이며 동시에 「격있는 화려함」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제시했다. 평론가들의 평이 아니더라도 박인자발레의 매력은 댄서의 묘기를 완벽하게 소화한 프로의식과 아름다움이 넘치는 무대의 회화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분홍신을 신은 것처럼 그는 신들린듯 무대를 선회하고 회전하면서 그가 춤추는 공간에 오색찬란한 빗살무늬를 뿌려나간다. 그의 발레는 60∼70년대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진 정교한 클래식 발레와는 그 형식면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즉 그의 춤은 이지적이고 극적인 움직임과 육감적인 신선미를 잃지 않는다.이른바 무엇을 추어도 활기차고 선이 선명하며 창작력과 문학성이 뛰어나다.그는 춤출 뿐만 아니라 탁월한 발레조련사이자 매우 두뇌회전이 빠른 안무의 재구성자이고 「그래서 대학권에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재목」이라고 평론가 김태원은 한탄해 마지않는다. 박인자의 유년의 기억은 햇빛처럼 밝고 순탄하기만 하다.서울 충무로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박명근씨와 노오례여사의 6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는 피아노를 쳤고 금란여중에 다니면서 발레리나 서정자의 눈에 띄어 발레에 입문했다.1백62㎝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유연한 몸매를 타고난 그는 임성남 문하에서 본격적인 발레수업을 받았고 서울예고 2학년때인 69년부터 벌써 국립발레단 정기공연에 참가하여 스승·선배들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다. 대학4년때인 74년 동아무용콩쿠르에서 「지젤」솔로로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대상을 수상,신데렐라 탄생을 예고받은 그로서는 실은 더이상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그가 존경하는 선배 김혜식은 이 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았고 조승미 역시 은상에 머문 데 비한다면 그의 대상은 발레계의 모처럼의 경사이자 자랑이기도 했다.그러나 기쁨은 잠시,그를 아끼는 국립발레단의 임성남씨와 대학의 스승인 김정욱교수 사이에서 그는 프리마 발레리나냐,대학교수냐의 양갈래 길에서 무엇인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게 되었다.전문 발레리나로 그를 키운 임성남씨는 당연히 국립발레단 입단을 권유했고 대학 발레의 향상을 걱정하던 원로 김정욱교수는 대학에서 발레를 가르치는 일도 공연 못지 않게 중요함을 누누이 역설해왔다.더구나 그는 4년동안 모교인 수도여사대(현세종대)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처지였다. ○고민끝에 「대학」 선택 고민끝에 그는 결국 대학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김정욱교수의 뒤를 이어 대학에서 후배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무대를 만들자고 생각했으나 박인자의 결정에 놀란 임성남씨는 『그러려면 대상수상을 되물리라』는 농담반 비슷한 격노를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술가중의 어떤 사람들은 위대성을 타고나게 마련이지만 또 어떤 이들은 후천적으로 이를 획득한다.그러나 아무리 타고난 위대성이라도 갈고 닦지 않는다면 한낱 범용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우연이나 요행은 절대로 훌륭한 예술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금도 「피나는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그는 미국·일본의 발레학교에 나가 다양한 테크닉을 연마하면서 발레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모든 룰들을 다시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그중에서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윌리엄 포사이드와 모리스 베자르의 파격의 안무였다.특히 리옹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을 감시하기 위해 무대에 경비견까지 끌고 나온 것을 보고 그는 고질화된 형식에서 벗어나 맨발벗은 모습을 발레에 적용하는 과감한 용기를 보였다.타당성이 없이 누군가 고수하려는 것을 「누군가 깨야 한다」는 의지로 작품에 맞지 않으면 토슈즈나 튀튀 클래식 튀튀 로맨틱을 고집하지도 않았고 「나비부인」에서 창살에 비친 그림자춤이나 「피아노」에서의 파도와 달빛타기를 푸른 휘장으로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의 시도다. 박인자에겐 많은 장점이 있다.평상시의 그는 발레리나의 티는 물론 교수의 티도 내지 않는다.지젤의 분위기를 닮은 해맑은 싱그러움을 간직한 채 일상적인 대인관계를 원만하고 진지하게 풀어나간다.그가 모교를 떠나 발레전공이 없는 숙대 무용과로 옮겨간 것은 그가 지도한 후배들에게 교수자리 하나라도 내어주기 위한 배려였다.그의공연장에 장르를 초월한 수많은 무용인이 찾아들고 그의 춤을 격려하고 환호하는 것만 봐도 그의 후덕함을 엿볼 수 있다. ○무용과 음악을 분리 단지 자신의 올바른 주장은 남의 눈치를 보거나 주위를 의식치 않고 똑바로 관철시키는 주의다.문예진흥원 창작활성화 무용기금속에 음악파트가 포함된 것을 보고 무용과 음악을 따로 분리한 것도 그가 이룬 성과다.가족은 건축가인 부군 함정도(서울산업대교수)씨와의 사이에 1남(고교)1녀(여중). 우리의 본격적인 클래식 발레는 김정욱·임성남·홍정희에서 김학자·김혜식·조승미로 이어지고 이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후배를 양성하거나,발레를 지도하거나 안무에 치중하는 시기다.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지금도 끊임없이 발레무대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박인자는 단연 현역의 톱에 틀림없다.그러나 육체를 매체로 하는 무용의 세계에서 무대예술가의 활동시한은 전보다 길어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꽃처럼 무섭게 시들어버리는 육체의 언어로 예술적 광채를 영속하기란 좀체로 쉽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더더욱 인간의 영혼을 전율케 하는 「사색의 끝」에 치닫지 않고서는 모든 움직임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는 바람이나 파도나 봄을 맞는 대지의 꿈틀거림이 인간의 희비애락에 자연스럽게 접목되는 「마음의 춤」을 추구하는 시기다. 그래서 단순하게 허공중에 들어올린 팔 하나라도 가장 자연스러운 바람속의 흐름이기를 원하고 있다. 내년 4월3일 중앙국립극장 대극장무대에 올릴 「박인자발레 20년 대공연」을 앞두고 그는 겨울방학 시작과 함께 짙은 사색에 빠져 있다.그로서는 결국 몇 안되는 별중에서 끝까지 반짝이는 하나이고 싶은 것이다.그리고 그가 춤추고 지나간 자리에 언제까지나 긴 여운으로 불꽃 같은 극미의 항적이 남기를 스스로 기대하려는 것이다. □연보 ▲1953년 서울출생 ▲1966년부터 임성남 사사 ▲1969∼73년 국립발레단단원 ▲1971년 서울예고졸업 ▲1974년 동아무용콩쿠르 대상수상,ASTA총회참가 공연 ▲1975년 수도여사대(현 세종대)졸업 ▲1977년 동대학원 졸업,세종대강사,PATA총회참가 공연 ▲1979년 세종예술원창단 공연 ▲1980년 예무회창단 공연 ▲1982년 박인자발레,대한민국무용제·한국발레협회 창작발레공연 ▲1983년 박인자발레 공연 ▲1984년 일본 도쿄시티발레·아메리카발레센터연수,데이비드 하워드 발레스쿨 수학 ▲1985년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환교수 ▲1986년 김정욱발레페스티벌 출연,86아시아문화예술축전 안무 ▲1987년 박인자발레 공연,숙대교수 ▲1988년 88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서울국제무용제·현대오페라단 「리골레토」중 「집시의 춤」안무 ▲1989년 박인자발레 공연(대구·서울),발레20 창단기념·임성남 발레45주년기념공연 안무·출연 ▲1990년 세종문화회관 분수대공연,중앙일보사주최「그랜드발레 페스티벌」안무 ▲1991년 박인자발레 공연(부산·서울),춤작가 12인전안무 출연,청룡영화제 오프닝 세레모니 「코러스라인」안무 ▲1993년 박인자 창작발레(창원·대구·여수) 「대지의 소리」「승천」「연습실에서」「해적 2인무」「팝을 위한 바리에이션」「나로부터 멀리」「고귀한 승리」「파키타」「불새」「나는 뭐드라?」「나비」「나비부인」「꼬리기르기」「가을저녁의 시」「피아노」등 다수 한양대 체육대 박사과정 한국발레협회및 한국무용학회 이사 국립발레단 자문위원 숙대무용과 교수
  • 한가위를 맞으며/김광언(일요일 아침에)

    여름 짓는 일을 하늘 아래 으뜸가는 업(농자천하지대본)으로 삼아온 우리 겨레는 한가위를 가장 큰 명절로 손꼽아 왔다.설 대보름,수릿날 따위의 명절을 아니 쇤것은 아니었지만 정월은 농사 시작의 달인지라 자연 마음이 조이고 수릿날은 농작업의 힘겨운 마루턱에서 한숨을 돌리는 판이라 느긋할 수가 없었다.「오월 농부,팔월 신선」이라는 말 그대로 기껍고 뿌듯하고 먹지 않고도 배 부른 명절은 한가위뿐이었던 것이다.이를 맞는 기쁨이 얼마나 크고 설렛으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일렀겠는가. 우리가 이날을 명절로 삼은 것은 적어도 삼국시대 초기 이전부터다. 신라 셋째 임금인 유리왕때(32년) 두 공주가 성안 부녀자들을 각기 거느리고 칠월 보름부터 한달 동안 두레 삼기 내기를 해서 진쪽이 한턱을 내었으며 그 잔치를 가위라 불렀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은 우리가 다 잘 아는 터이다.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책 「수서」의 「팔월 보름이면 왕이 풍악을 베푼다」는 내용도 신라 궁중의 한가위 풍속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우리와중국 그리고 일본은 예부터 같은 문화권을 이루어 왔지만 한가위를 오직 우리만 손꼽은 사실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앞에서 한가위를 「더도 말고 덜도 말기」를 바라는 명절이라 했지만 이날을 우리가 언제나 배 두드리며 쇤 것은 아니다.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무렵에는 돈이 달린 정부에서 전공무원들에게 봉급을 주지 못하고 그대신 보리쌀을 배급하는 지경이었다. 우리집은 방이 넷이나 딸린 큰 집(?)이었던 데다가 할아버지 아버지 두 분이 체신부 공무원이었던 만큼 살림 형편은 중상류에 이를만 하였음에도 송편조차 빚을 수가 없었다.중학교 2학년이던 내가 휘황한 달빛이 마당에 가득찬 한가위날 밤 홀로 마루 끝에 앉아 「송편도 없는 한가위」를 그지없이 처량하게 느꼈던 것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우리 집이 이러하였으니 당시 국민 거의 모두가 「배고픈 한가위」를 맞았음에 틀림없다. 시대가 바뀌고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한가위 풍속도 크게 달라졌다.공휴일이 사흘로 늘어나면서 고향을 찾는 인파가 구름처럼 늘어나서 이른바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진다.더구나 올해에는 일요일까지 이어져서 적어도 2천5백만 이상이 움직이리라 한다.따라서 이들이 끌고 나서는 자동차들은 전국의 도로를 메우고도 남을 것이다.지난해에는 서울서 대전까지의 2백여㎞에 8시간 반이 걸렸으며 그 사이에 자동차가 15% 늘어난 것을 생각하면 올해에는 열시간을 잡아야 한다는 보도다.「고생길」이던 귀성길이 이제는 「지옥길」로 바뀌었다.그리고 고속도로변은 다시 인분과 소변의 바다를 이루고 쓰레기는 산처럼 쌓일 것이다.정부에서 버스 전용차선제와 요금을 휴게소에서 내는 중불제 따위의 대책을 세웠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겉으로 보면 한가위 명절은 더할 수 없이 풍요롭게 느껴지지만,실상은 썰물처럼 도시로 빠져나갔던 농촌 사람들이 고향 나들이를 하느라 법석을 떠는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이날 베풀어지던 행사는 자취를 감추었고 명절 놀이를 펼치는 마을조차 드물어졌다. 예전의 한가위는 우리 모두의 명절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이산가족 상봉의 날로 쪼그라들었다.한가위의 거품만 남고 알맹이는 없어져버린 느낌이다. 이제는 우리가 한가위의 참뜻을 되새겨 볼 때이다.농사의 풍년을 가져다 주신 조상님의 음덕에 감사하고 한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으며 단란을 누린 예전의 차분하고 정겨웠던 한가위,이웃과 즐거움을 나누고 한껏 신명 떨음을 펼쳐서 흥겹고 기쁨에 찼던 한가위.이러한 명절을 되찾아야 한다.그리고 많은 사람의 기꺼움 뒤에는 반드시 적지 않은 이의 서러움이 서리는 법.찾아 주는 이 없는 불우 시설에 몸을 담고 있는 분들도 한번쯤은 기억해 둘 일이다.
  • 실향민마을/“분단원흉 사라졌다” 막걸리파티

    ◎속초 아바이마을·철원 대마리 르포/“「일부국민 실망」 보도 도저히 이해안가”/“이제 멀잖아 고향방문길 열릴것” 기대 「내 잠시 다녀오지요」라는 한마디만을 남긴채 어스름 달빛을 밟고 고향땅을 떠난지 어언 반세기­한치라도 고향가까이에 머물고 싶은 비원을 안고 휴전선을 따라 만들어진 실향민촌 주민들의 얼굴마다에는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에 한평생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는듯 감회어린 표정이 역력했다. ▷속초아바이촌◁ 1·4후퇴때 원산과 함흥항을 떠나 피란길에 올랐다가 끝내 고향가는 길을 잃어버린 함경도 실향민들이 대거 몰려 살고 있는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속칭 「아바이」마을의 실향민들은 전날에 이어 10일에도 노인정에 모여 「김일성 사망」을 축하하는 막걸리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함경도 북청이 고향으로 1·4후퇴때 부모님,아내와 4남매를 고스란히 두고 부산으로 왔다가 아바이촌에 정착했다는 조일랑할아버지(78)는 『김일성이 죽었다가 고향에 두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솟구친다』며 멀리북쪽하늘로 시선을 모았다. 함경도 영흥이 고향이라는 아바이마을의 최연장 이춘섭할아버지(92)는 『하루에도 몇번씩 김일성을 저주해왔는데 하느님이 이제야 소원을 들어 주었다』며 『10살이나 아래인 김일성이 먼저 죽은 것은 「천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돌파구가 마련될지도 모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또 고향가는 길이 물거품이 되는게 아니냐」는 탄식도 적지 않았다. 전날 정오뉴스에서 김일성 사망 소식을 처음듣고 고향사람들과 모여 만년한을 쏟아내기라도 하듯 통곡을 했다는 함경도 북청출신의 박춘심할머니(66)는 『김일성이가 죽어 혹시나 했던 이산가족의 고향방문길이 또 막히는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할아버지를 아바이라고 부른다해서 흔히 「아바이」로 통하는 이들 함경도출신 실향민 대부분은 『그래도 민족분단의 원흉이 죽었으니 고향에 돌아갈 날도 시간문제 아니겠느냐』며 이구동성으로 한결 마음은 가볍다고 말했다. 갈대만이 아무렇게 자라던 바닷가를 억척스레 보금자리로 탈바꿈시켜놓은 함경도 실향민들은 파도소리에 고향소식이 실려올까 해서 북풍한설을 마다하지 않고 창문을 북쪽 바닷가쪽으로 내놓고 살고 있다고 했다. ▷철원 대마리◁ 『진작 죽었어야할 위인이…』 혀를 끌끌차는 70대 촌로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이 분단반세기 인고의 아픔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김일성주석 사망」소식 이틀째인 10일 낮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1,2리. 민통선 바로 남쪽 널따란 철원평야 한쪽에 자리잡은 아담한 이곳 마을주민들의 감회는 사뭇 남달랐다. 모두 2백여가구 1천여주민들 가운데 휴전선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 60여가구 4백여명.일부는 지금도 눈에 잡히는 철책선 바로 너머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피란을 내려와 조금이라도 고향 가까운데 자리를 잡았다가 못돌아간 이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내 살아생전 김일성이 죽는 것을 보고 싶었다』는 이동윤옹(75)은 고향 함경남도 고산이 불과 40여리 지척이지만피란때 못모시고 내려온 어머니 생각을 잊은 적이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휴전과 함께 빤히 바라보면서 못가는 고향에 더욱 속을 태운 김동래씨(50)는 『수년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가르쳐준 조상님의 산소 위치가 이젠 가물가물할 뿐』이라고 말한다. 『어렵사리 합의한 남북정상회담이 불투명하고 김일성사망에 일부 국민들이 실망한다는 보도를 우리는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장마비를 맞으며 논물을 보러 나가던 실향민 이인성씨(64)는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이 죽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 되돌아보는 삶/서경보 세계 불교법왕청 법왕(굄돌)

    월드컵대회에서 우리나라팀이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비기던날 밤,달빛을 밟으며 세검정 뒷산에 올랐다.그날따라 하늘이 맑아 별들이 무척 아름다웠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장마성 바람이 서울상공의 탁한 공기를 실어갔기 때문이었다.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별들의 숫자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의 숫자보다 훨씬 많다는 어느 천문학자의 말이 떠올랐다.어느 것은 붉은빛이 돌고,어느 별은 푸른빛이 도는가 하면,어느 별은 노란빛을 띠기도 하고 어느 것은 강한 빛을,또다른 것은 약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과연 「나」라고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를 되뇌어 봤다.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삶이란 무엇인가,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근본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하여 출가하여 승려가 된이래 60여년동안 자문해봤던 말,『나는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되물었다. 학자로서,성직자로서 누릴 최고의 위에 올라 세속적으로 표현한다면 성공한 삶일 것으로 보일 것이지만 그런 세속적인 영예는 언제인가는 훌훌 벗어버려야 할 육신의 옷에 지나지 않는다. 그날,그밤의 나는 어둠속에서 숨쉬고 있는 한시적인 한 생명에 불과했다.일찍이 어느 시인이 읊었듯이 그날 그 많은 별들중에 내가 본 그 별과,그 많은 사람중에 나를 내려다 본 그 별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그날 나는 모래알보다 더 작은 존재였다. 우리 인간,고작 살아야 1백년 안팎이다.그 짧은 삶을 아둥바둥 발버둥질 치며 서로 시기하고 모략하고 험담하며 추하게 살 일이 아니다.스스로 자신의 무게를 저울질해가면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그것이 참삶의 한 모습이 아닐까.그렇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마냥 떠내려가는 삶이라면 하나의 살아있음 외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바쁜 세상 바쁘게 허우적거리지 말고 자신을 한번쯤 되돌아보는 삶,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 달맞이/손정박(굄돌)

    한낮에는 시름시름 볼품 없어도,후줄근한 여름밤 달빛에 이끌려 방죽따라 걷다가 만나는 달맞이꽃은 얼마나 싱그러운가.뒷산에 올라 구멍 낸 깡통에 불씨넣고 휘휘 돌려 불굴렁쇠 만들어가며 맞이하던 정월대보름달은 마음마저 환하게 하지 않는가.바위고개 숨어서 님 마중하던 음전이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고,먹지않아도 배불렀을까를 상상하면 괜히 안면근육 위로 당겨진다. 어쨌든 마중간다는 말에는 기다림 속에 설렘과 기대감 부풀리고 만남 이루어 기쁨과 환희 갖게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고,소식에 의한 확신이나 징조에 따른 예견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얼마전 미국에서 온 친구의 얘기,곧 전쟁이 터지는 곳으로 가는구나 하고 와보니 도대체위기감이 아무데서도 느껴지지 않는단다. 글쎄,역사의 지혜로 이제는 평화공존에 대한 기미를 더 강하게 느끼는 것일까.아니면 몸서리쳐지는 전쟁의 악몽은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그도 아니면 인간은 바보가 아닌한,같은 실수를 두번 저지르지 않으며 엄혹한 시련으로 또다시 이 민족을 시험할 만큼 잔인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때문일까. 공산주의가 언필칭 약한 고리인 제정 러시아를 뚫고 유라시아 대륙건너 중국을 휩쓸고 거센 와류형성하면서 제3세계까지 튀어 번질 때는 무섭기도 했지만,이제는 고인물로 정착돼 가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까.증오와 투쟁에 근거하는 사상은 심성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나타낼 뿐이며,이기와 무한경쟁을 절제없이 허용하는 사상은 사회적 정의로 규제받는 것이 추세이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기미는 도대체 어떤 것이며,그징조에 따른 예견은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달맞이 갈 때처럼 신나고 기쁜 마음 일게하는 그런 예견을 광범위하게 공유할 수만 있다면….
  • 앙드레 김/“환상의 예술”… 부산 아주경기유치 후원

    ◎문광자씨/“전통적 천연염료만 사용” 여름패션쇼 ○…국내 톱 디자이너의 패션쇼가 관광상품으로 한몫하고 있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지난달 일본 관광객을 위한 패션투어 컬렉션을 가진데 이어 오는 26일 하오 2시와 7시 「2002년 아시안게임 부산시 유치를 위한 후원 패션쇼」를 개최,주목을 끌고 있다. 부산 파라다이스호텔 주최,「2002 아시안게임 부산유치 추진위원회」후원으로 열리는 이번 쇼의 이름은 「앙드레 김 환상예술축제」.「21세기를 향한 비상」「남태평양 별들의 속삭임」「영원한 로맨티시즘」「한국 환상곡」「천사의 시」등 5개 무대로 나눠 이브닝 드레스등 모두 1백75점을 선보인다.김씨는 컬렉션을 통해 나온 수익금을 모두 아시안게임 부산유치기금으로 전할 예정이다. ○…광주에서 주로 활동해온 디자이너 문광자씨(48)가 오는 30일 서울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해외진출 발판 마련을 위한 컬렉션을 연다. 문씨는 「햇빛처럼,달빛처럼,별빛처럼」이라는 주제로 여름 패션디자인을 선보이는데 이번이 서울에서의 첫 단독컬렉션.문씨는 특히 전통염색장인인 한광석씨로부터 독점 공급받은 쪽빛 무명베를 포함한 천연소재만을 활용,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나는 꽃과 열매,나무뿌리와 벌레집 등에서 얻은 염료가 주는 화사하고 은은한 색감을 의상을 통해 제시한다. 광주에서 정기컬렉션등의 활동을 해오다 서울 청담동 패션가에 부티크를 새로 낸 문씨는 내년중 파리 또는 밀라노 컬렉션 참가를 위해 준비를 차분히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일 미국 뉴욕 브라이언트 공원에서 개최된 뉴욕컬렉션과 지난달 파리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추동 컬렉션에 각각 참가했던 디자이너 트로아 조와 이영희씨는 21일 서울 그랜드 하얏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합동 귀국패션쇼를 열었다.
  • 틈새기/손정박 한국스포츠 TV감사(굄돌)

    요즘도 시골집에는 뒤꼍으로 여닫이 창살문이 많이 남아 있다.가을 밤 교교한 달빛 등에 이고 베짱이가 긴 더듬이 움직이며 그림자 지우는 걸 망연히 감상하노라면 소슬한 바람에 문풍지 푸르르 떨게 하는 문틈새는 여유를 느끼게 한다. 위장병에 효험이 좋다는 홍천 내면의 어느 약수터.별로 크지 않은 바위 가운데로 길게 틈새기가 나 있고,검붉은 철광석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나온 약수가 몇 만년동안 옮겨놓은 철분이 밑바닥을 불그레 수놓았다.그 틈새는 대자연의 땀구멍 같아 친근감 갖게 한다. 바닷가 갯바위 작은 게(해)들락거리는 틈새엔 물살에 몸 내맡겨 흔들거리는 해초며 말미잘이 정답기만 하다.얼마나 긴 세월을 파도와 실랑이를 했는가,수직으로 깎아지른 바위섬 저 밑에 돌돔,다금바리가 궁전처럼 터 잡은 바위 틈을 상상하면 황홀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얼마전 중3짜리 작은 딸에게 행여 근검 절약을 인식시켜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지난날 어렵던 시절 얘기를 들려주었다.양말 헤어지면 꿰매고 또 꿰매고 종내에는 밑바닥통째로 덧대어 신었다고.그런데 한다는 소리가 『새것 사신지 그랬어』캄캄한 밤길 공동묘지 지나칠 때 도깨비불에 놀라 뛰어 도망가다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져 울지도 못하고 허우적대며 눈 캄캄하던 기억을 떠올리곤 똑 같은 기분이 되는 걸 느꼈다.37년이란 세월의 틈이 만들어 낸 인식의 틈새기,그러나 상황설명을 몇 단계로 나누어 하면 접점은 나올 게다. 그런데 50년을 제 갈길로만 치달아 옹가네 된장독마냥 뚜껑 닫고 따로 지낸 남과 북은 어떤 틈새를 만들었을까.그러나 그 틈이 아무리 넓고 그 틈새가 아무리 깊어도 인간에 대한 신뢰만 버리지 않는다면,갖가지 다른 형태의 마음 속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성을 확신한다면 그 틈새기 메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게다. 조물주는 여러가지 다른 마음의 틈새기 메워 훌쩍 커진 마음,새로워진 마음으로 다음의 역사 만들어가는 능력을 우리들에게 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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