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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납짝 납딱 납작만두

    납짝 납딱 납작만두

    밀가루를 반죽해 얇게 민 다음 동그랗거나 길쭉하게 모양을 찍어 고기나 채소로 만든 소를 넣고 빚는 게 만두다. 소로 넣은 고기나 채소로 인해 모양은 가운데가 볼록하다. 이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만두가 있다. 만두 전체가 납작한 납작만두다. 납작만두는 대구에서만 맛볼 수 있다. 납작만두는 얇은 만두피가 납작하게 포개어져 있다. 잘게 썬 당면과 부추로 속을 채워 넣고 반달 모양으로 빚어 물에 한 번 삶은 것을 기름에 튀기듯 지져 내는 게 핵심이다. 대구 납작만두의 역사는 1960년대 초로 올라간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쌀 등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이었다. 이에 미국산 밀가루가 국내에 대량 유입됐다. 박정희 정부는 분식 장려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새로운 모양과 맛의 납작만두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재료 마땅치 않았거나 중국만두 싫었거나 납작만두의 탄생 배경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싸고 흔해진 밀가루로 만두피를 만들 여건은 충분했으나 만두소로 쓸 재료가 마땅찮았다. 그래서 보관이 쉽고 씹는 맛을 낼 수 있는 당면을 사용해 만든 게 납작만두가 됐다는 것이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부쳐 먹었던 밀가루 반죽처럼 납작만두 역시 배고팠던 시절 허기를 달래 주는 소중한 간식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중국식 만두가 대구 사람의 입맛에 맞지 않아 새로운 만두를 만들었다는 설이다. 고춧가루를 듬뿍 뿌린 진간장에 납작만두를 찍어 먹는 방법으로 중국식 만두의 느끼함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납작만두는 전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권에서도 비슷한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색 있다. 대구 특유의 억양으로 납짝만두로 불릴 때가 많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은 납딱만두로 부르기도 한다.●파 띄운 간장·고춧가루 팍팍 양념장 필수 납작만두의 핵심은 종이만큼 얇은 만두피를 찢어지지 않게 굽는 것이다. 만두소가 많지 않아 사실상 무미에 가깝다. 부들부들하면서도 고소한 만두피의 맛을 살려 주는 양념장을 곁들여 먹을 때 맛이 완성된다. 파를 띄운 간장에 고춧가루를 넣어 만두피 위에 얹어 먹거나 한꺼번에 뿌려 먹으면 제맛이 난다. 최근에는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거나 적셔 먹고 쫄면에 곁들여 많이 먹는다. 납작만두와 함께 대구 10미 중 하나인 무침회 역시 납작만두와 좋은 궁합을 이룬다. 대구에서 납작만두를 만드는 곳은 여럿 있는데 저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을 보인다. 이는 업체마다 다르게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50년 전통의 미성당과 남문시장 내 남문납작만두가 유명하다. 교동시장과 서문시장에서도 납작만두를 즐길 수 있다. ●남문납작만두… 52년 대 잇는 수제만두 남문납작만두는 1970년 중구 남문시장 인근에서 문을 열었다. 50년 넘게 이 일대에서 납작만두를 판매한다. 처음 문을 연 김창출(75)씨의 아들 김동철(48)씨 부부가 가게를 이어받았다. 이곳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손수 납작만두를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대구 납작만두 중 만두소가 가장 많다. 일반 만두와 비교하면 소가 적지만 납작만두 중에서는 속이 알차 한입 베어 물면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만두소에는 당면과 부추, 당근, 파 등 6가지 채소가 들어간다. 이때 당면은 간장과 식초 등으로 간을 한 것을 사용한다. 탄력 있는 만두피를 만들기 위해 강력분과 중력분을 섞어 반죽한다. 두꺼운 무쇠판에서 굽는 것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무쇠판에 구우면 일반 프라이팬에 굽는 것보다 빠르다. 더구나 안이 골고루 익고 만두피가 부드러워진다. 남문납작만두는 입소문을 타고 전국 스타가 됐지만 체인점을 내지 않고 있다. 맛이 없어진다는 단 하나의 이유에서다. 그 대신 택배로 미식가들의 입맛을 만족시킨다. 맛을 유지하기 위해 택배 주문도 하루 15개 정도만 받는다. 몇 배나 더 많은 주문이 들어오지만 다음에 배달해 주는 것으로 양해를 구한다. 택배로 판매하는 납작만두는 30개 5000원이다. 김씨의 부인 신영숙(46)씨는 “시어른들이 지켜 온 맛의 명성에 조금이나마 흠이 가지 않도록 매일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미성당… 고춧가루 뿌려 쫄면과 찰떡궁합 미성당 납작만두는 1963년 중구 남산초등학교 정문 맞은편에서 시작했다. 고 임창규씨가 운영하다가 아들인 임수종(58)씨가 32년 전 대물림해 2대째 운영하고 있다. 미성당 납작만두가 50년 넘게 사랑받아 온 배경에는 맛과 전통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음식을 판매하지 않고 납작만두와 곁들여 먹으면 좋은 쫄면, 라면, 우동만 있다. 이곳의 만두소에는 파, 부추, 당면 3가지만 들어간다.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18개의 체인점을 가지고 있어 여러 곳에서 미성당 납작만두를 맛볼 수 있다. 현재는 체인점을 늘리지 않는다고 한다. 맛이 궁금한 미식가들에게는 택배로 대신해 준다. 하루 최대 50개까지다. 미성당 납작만두는 `일명 ‘춤추는 납작만두’로 불리며 언론에서 많이 보도됐다. 서울 등 수도권은 물론이고 제주도 등에서도 미식가들이 직접 미성당을 찾는다. 미성당 납작만두를 만들기 위해선 먼저 물에 희석한 빙소다로 미성당 특유의 밀가루 반죽을 한다. 그다음 밀가루 반죽을 국수를 만드는 기계에 통과시켜 만두피를 뺀다. 이어 분유통으로 모양을 낸다. 여기에 만두소를 넣는다. 정성과 노하우까지 더해지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다 보니 더 쫀득쫀득하고 담백한 느낌이다. 납작만두 위에 송송 썬 파와 간장, 고춧가루를 뿌려 먹는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보드라운 만두의 고소한 맛부터 냄새까지 버릴 게 없다. 젊은 손님에서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찾는 고객이 다양하다. 납작만두에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아 3일 이상 두면 변질될 우려가 있다. 빨리 먹지 못하는 경우에는 개별 포장해 냉동 보관하는 게 좋다. 교동시장에도 오랜 역사를 가진 납작만두 먹자골목이 있다. 지금은 도심 개발로 과거에 비해 먹자골목이 다소 줄었다. 교동시장 납작만두는 미성당과 역사가 비슷하다. 만두피가 유난히 얇고 고유한 밀가루 숙성으로 식감이 남다른 특징이 있다. 가게 앞 철판 위에서 먹음직스러운 소리를 내며 익어 가는 납작만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밖에 칠성야시장 등 대구 야시장과 전통시장에서도 납작만두를 파는 곳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글 사진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북핵 대화로 해결’ 불씨 지폈지만 북미 협상 테이블까지 첩첩산중

    ‘북핵 대화로 해결’ 불씨 지폈지만 북미 협상 테이블까지 첩첩산중

    미국 국무·국방 장관의 방한과 함께 시작된 주변국과의 ‘외교 1라운드’가 한미일 3국 안보실장 협의·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끝으로 보름여 만에 막을 내렸다. 같은 날 미국과 중국에서 강대국들을 상대해야 하는 ‘줄타기 외교’로 한국 외교가 시험대에 올랐지만 북한 문제를 대화로 해결한다는 메시지를 끌어낸 것은 성과로 평가된다. 다만 북한의 도발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어 안심하기엔 이르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외교 2라운드인 ‘정상외교’ 시기를 앞당기려는 것도 대화의 불씨를 어떻게든 살려 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2일(현지시간) 미 워싱턴DC 인근 해군사관학교에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기타무라 시게루 일본 국가안보국장과 첫 대면 협의를 한 뒤 “북미 협상의 조기 재개를 위한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이들이 채택한 공동성명에는 “(북한) 비핵화를 향한 3국 공동의 협력을 통해 이 문제에 대응하고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북미 협상 재개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겠지만 한미일 3국이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같은 날 중국에서 열린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왕이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한국과 함께 대화 방식으로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프로세스를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관리’를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북한 문제에 대한 중국 측의 협력 의사를 재확인한 것은 미중 간 ‘협력 공간’을 확보하려는 우리 정부 입장에선 성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중국을 겨냥해 ‘민주적 가치’, 중국은 ‘(미국이 아닌) 국제법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강조했지만 한국을 사이에 두고 우려했던 치고받기는 없었다. 대신 중국은 최근 한미 외교·국방 장관 회의를 마친 한국과 상반기 안에 같은 형식의 외교안보(2+2) 대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방한 의지도 재차 표명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큰 틀에서 한 고비는 넘겼다”면서도 “(중국이) 2+2 대화에 적극 나선다는 건 한국이 미국에 경도되는 걸 막으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이제 남은 변수는 이르면 이달 안에 공개될 것으로 보이는 조 바이든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와 오는 15일 태양절(김일성 주석 생일)을 전후로 한 북한의 도발 여부다. 한미일 안보실장 모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대한 완전한 이행 필요성에 동의했다”는 내용은 북한의 최근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한 ‘우려’와 함께 추가 도발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의 의미가 동시에 담겼다는 분석이다. 청와대가 오는 6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전에 한미 정상회담을 추진하려 하는 것도 한반도 정세의 중대 고비가 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한미 안보실장 간 양자 협의에서도 대면 정상회담 필요성에 대해 교감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4월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 보도와 관련, “확인해 줄 사항이 없으며 한미 양국은 정상회담 개최 방안을 계속 긴밀히 협의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문재인 정부는 미국에 어떤 식으로든 북한을 달래는 유화적 제스처가 필요하다는 걸 계속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정상회담에서 이 부분이 공동발표문 형태로 들어가게 된다면 큰 의미가 있겠지만, 미국은 포괄적이고 일반적 차원에서 얘기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페미니즘은 원래 야만적이다” 할례 폐지 앞장선 아랍 여성운동 대모 [김정화의 WWW]

    “페미니즘은 원래 야만적이다” 할례 폐지 앞장선 아랍 여성운동 대모 [김정화의 WWW]

    “세계에는 ‘이집트’하면 두 개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피라미드, 그리고 나왈 엘 사다위요.” 이집트의 여성주의 단체 나즈라의 대표 모즌 하산의 말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보수적인 자국과 아랍 문화권을 넘어 전세계에 영향을 미친 이집트 여성운동의 대모 나왈 엘 사다위(89)가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최근까지도 이어지던 여성 성기 절제(할례) 관습을 없애고자 수십년간 앞장섰고, 서구 백인 여성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페미니즘 논의를 아랍 여성의 입으로 다시 쓰며 수많은 이들의 삶을 바꿨다. “이집트에서 가장 급진적인 여성”, “야만적이고 사나운 여자”로 불리던 그의 삶을 돌아봤다.6살 때 성기 절제 수술 “육체적 고통과 끔찍한 충격”사다위는 1931년 이집트 작은 마을인 카프르 탈라에서 아홉명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고등 교육을 받은, 그 시절 흔치 않은 부유한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해 정부 교육부 공무원으로 일했고, 오스만제국 출신의 어머니 역시 프랑스 교육을 받았는데 이들은 아들뿐 아니라 딸에 대한 교육 역시 중요하다고 봤다. 하지만 여성이 결코 성에 대해 자유롭게 털어놓거나 낙후된 여성 인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절은 아니었다. 사다위는 “어머니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말하곤 했지만, 나는 끊임없이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그는 이모가 딸만 셋 낳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손찌검당하는 모습을 봤고, 할머니가 “남자아이 한명이 여자아이 15명보다 더 가치가 있다. 여자애는 역병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6살에 겪은 할례의 경험은 그에게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기억으로 남았다. 여성 할례, 또는 여성 성기 절제(FGM)는 아프리카, 중동 지역에서 여성의 성욕 억제와 외도 방지 등을 목적으로 수천년간 이어진 관습이다. 4~8세 여자 아이들의 성기 일부를 자르거나 봉합해 ‘정숙한 여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사다위는 훗날 그의 대표작인 ‘이브의 숨겨진 얼굴’(The Hidden Face of Eve·1977)에서 당시의 끔찍한 경험을 상세히 설명한다. 어느날 밤 침대에서 화장실로 끌려간 그는 “알몸으로 누운 타일 바닥의 차가움과, 누군가 계속 입을 막던 것을 기억한다”며 “그들이 내 몸에서 무엇을 잘라냈는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울기만 했다”고 했다. 가장 큰 충격은 미소 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봤을 때다. 그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어머니가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며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묘사했다. 그가 여성 할례에 대해 평생 싸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감옥서 휴짓조각에 비망록…50여권 책으로 유명세사다위를 더욱 유명하게 한 건 작가로서의 그의 탁월한 능력이다. 검열과 투옥, 살해 협박과 죽음의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연극, 소설, 단편 소설 모음, 논픽션 등 50여권의 책을 썼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의사로 일했는데, 자신처럼 할례를 받아 평생 고통에 시달리는 수많은 여성을 보고 느낀 분노는 고스란히 활자로 남았다. 책 ‘여성과 성’(Women and Sex·1971)에서 사다위는 여성의 신체와 성에 대한 사회의 무지와 이중잣대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착취적인 결혼은 매춘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고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성별 간 차이는 가부장적 관행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적었다. 오늘날엔 당연하지만 1970년대 아랍 국가에서는 너무나 급진적이던 그의 주장은 곧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출판 직후 이집트 공중보건 교육 국장직에서 해고됐고, 그가 창간한 잡지는 문을 닫았다.1981년에는 안와르 사다트 정권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다 1500명의 반체제 인사들과 함께 수개월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감옥에 펜이나 공책이 반입되지 않자 눈썹 화장용 아이브로우 펜슬과 두루마리 휴지에 비망록을 썼는데, 이는 나중에 ‘여성 교도소 회고록’(Memoirs from the Women’s Prison·1984)으로 출판됐다.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된 뒤 석방됐지만, 이후 수년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살해 위협을 당했고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원래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의 설득으로 의사가 된 그에게 글이란 부조리한 사회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무기’였다. 그는 책 ‘이시스의 딸’(A Daughter of Isis·1999)에서 “글쓰기는 국가의 통치자가 행사하는 독재적 권력, 그리고 가부장적 집안에서 아버지나 남편이 행사하는 권위와 싸우는 무기가 됐다”고 썼다.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지만 사다위는 과거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책을 쓴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다시 태어나도 같은 책을 쓸 것”이라며 “성별, 계급, 식민주의, 할례와 강간, 자본주의가 어떻게 사람들을 억압하는지 등 과거 쓴 내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사다위의 책은 40개 이상 언어로 번역됐고, 각국 대학으로부터 명예 학위를 받았다. 지난해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여성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돼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아랍의 시몬 드 보부아르? 사다위는 그냥 사다위다” 미국이나 유럽 등 지구의 북부 국가들에서 주로 이뤄지는 여성운동의 한계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페미니즘은 미국 여성이 발명한 게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인 종교 문화, 제국주의는 국가를 가리지 않고 여성을 억압한다”고 말했다. 아랍 여성의 이야기가 서구에서 단편적으로 다뤄지는 것에 비판적이었고,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더 낫다는 식의 비교를 용납하지 않았다. 글로벌 매체 더컨버세이션의 아프리카판은 “사다위는 여성 할례를 ‘야만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지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여성을 구분하는 것에는 저항했다”며 “신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모든 여성은 ‘정신적인 할례’를 받는다고 본 것”이라고 했다.실제 사다위가 일으킨 변화는 결코 백인 중심의 페미니즘 역사에 뒤지지 않는다. 그의 투쟁으로 2008년 이집트 의회에선 마침내 할례 시술을 한 자를 처벌하도록 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암암리에 할례는 이뤄졌지만, 계속된 싸움 끝에 사다위가 사망하던 날 이집트 상원은 이 처벌을 최대 징역 15년형으로 강화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집트 유명 여성운동가이자 뉴스레터 ‘페미니스트 자이언트’를 펴내는 모나 엘타하위는 “나는 사다위를 ‘아랍의 시몬 드 보부아르’라고 지칭하는 데 분노한다. 우리는 백인 페미니스트의 ‘로컬’ 버전이 아니다”라며 “사다위는 사다위다”라고 말했다. 사다위는 지속적인 여성 운동과 인식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할례 폐지 이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할례를 하는 여성의 수는 여전히 많다. 법이 생긴다고 해서 뿌리 깊은 습관을 바꿀 수는 없다”며 “교육이 필요하다. 할례가 정당하다고 세뇌당한 부모와 소녀들 자신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과거 한 인터뷰에서 그가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환상적인 일을 해서가 아니라 결코 변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처럼, 별세 이후 수많은 이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지는 것도 그의 끊임없는 실천과 노력 덕분이다. 사다위가 선택한 공식 대변인이자 번역가, 친구인 옴니아 아민 박사는 “삶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 정신, 영혼에 문화 혁명을 일으킨 여성”이라고 했고, 엘타하위는 “사다위는 페미니즘이 우리가 ‘수입’하는 게 아니라 이 지역에 토착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고 했다. 그는 “페미니즘은 누군가를 어르고 달래는 게 아니다. 여성혐오자를 겁주고 가부장제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그게 사다위의 본질이자 페미니즘의 본질이다. 페미니즘은 야만적이고 위험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줬다”고 강조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나왈 엘 사다위는 누구 · Nawal El Saadawi (نوال السعداوي)1931 이집트 카프르 탈라 출생1955 카이로 의대 졸업1963 이집트 공중 보건 교육 국장 임명1972 ‘여성와 성’(Women and Sex) 출판, 이후 공중 보건 국장직 해고1977 ‘이브의 숨겨진 얼굴’(The Hidden Face of Eve) 출판1979~1980 유엔 여성기구 북아프리카·중동 지부 고문1981~1982 안와르 사다트 정권에서 반체제 인사로 구속돼 투옥1984 ‘여성 교도소 회고록’(Memoirs from the Women’s Prison) 출판2004 이집트 대통령 선거 출마   유럽평의회 남북상 수상2011 무바라크 축출 시위2015 BBC ‘올해의 여성 100인’ 선정2020 타임지 ‘올해의 여성 100인’ 선정2021 이집트 카이로에서 사망
  • 지도부에서 91년생 초선 의원까지… 與 ‘사과 총동원령’

    지도부에서 91년생 초선 의원까지… 與 ‘사과 총동원령’

    4·7 재보궐선거 사전투표를 하루 앞둔 1일 더불어민주당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지지를 호소했다. 전날 이낙연 공동 상임선거대책위원장에 이어 이날은 김태년 대표 직무대행과 지도부가 “내로남불 자세를 혁파하겠다”며 대국민 사과에 나섰다. 청년 초선 의원부터 지도부까지 줄줄이 읍소 행렬을 이어 가며 지지층 결집을 호소하고 있으나 중도층의 마음까지 돌릴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김 대행은 대국민 성명에서 “기대가 컸던 만큼 국민의 분노와 실망도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그 원인이 무엇이든 민주당이 부족했다”고 밝혔다.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민주당 박주민 의원의 ‘부동산 내로남불’에는 “민주당은 개혁의 설계자로서 스스로에게 더 엄격하고, 단호해지도록 윤리와 행동강령의 기준을 높이겠다”며 무관용 원칙을 약속했다. 그러면서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는 후보에게 서울과 부산을 맡길 수 없다”며 서울 박영선·부산 김영춘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민주당은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달 25일 이 위원장이 “도와 달라”고 첫 읍소 메시지를 낸 후 사과 릴레이를 이어 가고 있다. 김종민 최고위원은 이날 라디오에 출연해 “선거를 앞두고 표를 얻기 위해 읍소한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라며 “국민의힘이 선거 때마다 하던 것이고, 그런 퍼포먼스 차원의 행동을 민주당은 잘 못한다”고 주장했다. 분노한 2030 민심을 달래는 데는 민주당 최연소 국회의원인 1991년생 전용기 의원이 나섰다. 전 의원은 지난달 31일 페이스북에 “민주당이 미우신 것을 잘 안다. 민주당에 분노하는 2030세대에 사죄를 드린다”고 올렸다. 서울과 부산 유세 현장에서도 ‘잘못했다’, ‘반성한다’, ‘도와 달라’는 메시지가 계속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한쪽에서 사과를 하면 다른 쪽에서 악재가 터지는 상황이라 민주당의 읍소 전략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또 이 위원장은 대국민 사과 당일에도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시장이 돼도 민주당이 다수인 시의회가 협조하지 않을 것이란 취지의 발언을 해 ‘거여 피로도’를 자극했다. 이 위원장은 화곡역 유세에서 “중앙정부에서는 대통령하고 싸움하고 시의회에 가서는 109명 중에 101명하고 싸우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냐”고 주장했다. 이해찬 전 대표는 이날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보궐선거에서 진다고 해도 다음 대선에서 훨씬 더 순탄하게 갈 수 있는 걸 약간의 장애물이 생기는 것일 뿐”이라며 “말하자면 비포장도로”라고 말했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저 초밥집 사장님, 아주 ‘돈쭐’을 내 줘야겠어!”[이슈픽]

    “저 초밥집 사장님, 아주 ‘돈쭐’을 내 줘야겠어!”[이슈픽]

    “초밥 먹어본 아이 없다는 말에...”보육원에 선행 베푼 초밥집 사장님“그 선행 함께 행할 수 있음에 뿌듯하다” ‘돈쭐’. ‘돈’+‘혼쭐’의 변형된 표현. ‘혼쭐이 나다’ 는 원래 의미와는 달리, 정의로운 일 등을 함으로써 타의 귀감이 된 가게의 물건을 팔아주자는 역설적 의미로 사용되는 신조어다. 형편이 어려운 형제에게 공짜로 치킨을 대접한 사실이 알려져 전국 각지에서 후원을 받은 일명 ‘돈쭐 치킨’ 점주가 화제를 모은 가운데, ‘돈쭐 초밥’ 점주도 등장했다. 초밥 먹어본 아이 한명도 없다는 말에 보육원 찾아간 사장님 제대로 된 초밥을 먹어본 적 없다는 보육원 아이들의 사연을 접하고 통 큰 선행을 베푼 초밥집 사장님이 등장해 1일 눈길을 끌었다. 지난 28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사진과 함께 한 초밥집 사장님의 사연이 올라왔다. 글쓴이 A 씨는 “사람들 선행을 눈팅만 해왔는데 본받아 나도 꼭 해야지 마음만 먹다가 드디어 실천해 옮겼다”고 말문을 열었다. 어느날 A씨는 보육원 영양사로부터 아이들의 딱한 사정을 들었다. 뷔페에서 작은 초밥 정도만 먹어봤지 제대로 된 초밥을 먹어본 보육원 아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사정을 들은 A씨는 53명이 생활하고 있는 보육원에 초밥 75개와 돈가스 30개를 들고 찾아갔다. 사진에는 차 안 가득한 음식이 담겨있다. 그는 “최근 선한 영향력 가게에도 가입했는데 아이들이 한명도 안 왔다”며 보육원으로 직접 찾아가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이어 “다행히 아내와 후원이나 기부 쪽에 마음이 잘 맞는다”며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후원하기로 약속했다. 사람들의 선행을 보고 배우며 제가 그 선행을 함께 행할 수 있음에 뿌듯하다”며 기뻐했다. 해당 사연을 접한 네티즌은 “여기 돈쭐 내줘야하는 사장님 한 명 추가요”, “존경합니다”, “감동입니다”, “모두가 힘든데 너무 훈훈한 사연이다” 등 반응을 보였다.배고픈 형제에 치킨 대접한 사장…후원금 모아 또 기부 앞서 형편이 어려운 형제에게 공짜로 치킨을 대접한 사실이 알려져 전국 각지에서 후원을 받은 치킨 프랜차이즈 점주가 그 후원금으로 또다시 기부해 훈훈함을 안겼다. 해당 점주인 박재휘씨는 최근 인스타그램을 통해 “오늘 마포구청 복지정책과 꿈나무지원사업(결식아동 및 취약계층 지원금)에 기부했다”고 밝혔다. 기부액은 후원 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배달 앱을 통해 주문한 매출 약 300만원과 후원금 일체 약 200만원, 그리고 박씨가 보탠 100만원을 포함한 총 600만원이다. 박씨는 “이건 분명 제가 하는 기부가 아니다”며 “전국에 계신 마음 따뜻한 여러분들이 하시는 기부다. 여러분을 대신해 좋은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앞서 박씨는 마포구에 사는 형편이 어려운 형제에게 공짜로 치킨을 내어주는 선행을 베풀었다. 박씨의 미담은 프랜차이즈 대표가 형제에게 받은 자필 편지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개하며 알려졌다.형제는 편지를 통해 “사장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찾아뵙기도 하고 전화도 드렸지만 계속 거절하셔서 이런 식으로라도 사장님께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글을 적게 됐다”고 했다. 18살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는 A군은 “어느 날 동생이 치킨이 먹고 싶다며 울며 떼를 써서 우는 동생을 달래주려 일단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고 집 근처 치킨집에 들어가 5000원치만 먹을 수 있냐 하니 저와 제 동생을 내쫓으셨다”고 했다. A군은 “망원시장에서부터 다른 치킨집도 들어가 봤지만 모두 먹지 못했다”며 “걷다가 우연히 철인7호 간판을 보게 돼 가게 앞에서 쭈뼛쭈뼛해 하는 저희를 보고 사장님께서 들어오라고 말씀해주셨다”고 말했다. A군에 따르면 박씨는 치킨 세트와 콜라 두병을 꺼내와 형제들에게 먹인 뒤 계산을 하려는 형제들을 내쫓듯이 내보냈다. A군은 “너무 죄송해서 다음날도 찾아뵙고 계산하려 했지만 오히려 큰 소리를 내시며 돈을 받지 않으셨다”며 “얼마 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는지, 1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같은 사연이 공개된 뒤 선행을 한 박씨를 ‘돈쭐’(돈으로 혼쭐) 내주자며 해당 지점에 주문이 쇄도했다. 박씨는 “전국 각지에서 셀 수 없이 정말 많은 분들의 응원과 칭찬도 모자라, 하루에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많은 관심으로 말 그대로 꿈만 같은 날들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1년 가까이 지나, 잊지 않고 저라는 사람을 기억해주고 제 마음에 답해준 형제에게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라며 “언젠가 허락한다면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너무 늦지 않게, 조금 늦더라도 꼭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자영업자의 매출액 손실률이 월평균 25%를 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처럼 힘든 와중에도 선행에 동참하는 가게가 늘면서 사람에게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한 끼에 60만원”…日항공사, 활주로에 선 비행기에서 식사 판매

    “한 끼에 60만원”…日항공사, 활주로에 선 비행기에서 식사 판매

    일본에서 한 끼에 60만원이 넘는 식사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활주로에 우두커니 선 비행기에서 즐기는 특별한 식사이기 때문이다. 영국 BBC 등 해외 언론의 1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 최대 항공업체인 올니폰항공(ANA, 전일본공수)은 하네다공항 활주로에 서 있는 여객기에서 즐길 수 있는 식사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보잉777여객기에서 즐기는 한 끼는 좌석 등급에 따라 가격도 달라진다. 일등석을 선택할 경우 5만 9800엔(약 62만원)에 달하지만, 비즈니스석을 선택한다면 이보다 저렴한 2만9800엔(약 30만 5000원) 수준이다. 해당 서비스는 시작된 지 며칠 만에 예약이 모두 만료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현재 올니폰항공에는 기내식으로 해외여행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하는 사람들의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올니폰항공의 한 관계자는 “일종의 ‘날개가 있는 레스토랑’ 아이디어는 현재 활주로에 멈춰 서 있는 비행기를 더 잘 활용하고자 하는 직원들에 의해 고안된 것”이라면서 “예약 문의가 많은 만큼 4월에는 더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전 세계 항공사들은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활주로에 서 있는 비행기를 활용하기 위한 다양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공개해왔다. 지난해 10월 싱가포르항공 역시 각 도시 공항에 있는 에어버스 A380에서 즐기는 점심식사 상품을 내놓았는데, 최대 60만원에 달하는 높은 가격에도 불과하고 연일 매진 행진을 이어갔다. 영국항공은 기존에 판매하던 기내식을 택배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내놓기도 했다. 항공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여행업계는 더 이상 최악일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다만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확대되면서 백신여권, 트래블 버블(비격리 여행권역) 등을 이용한 이동 허가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트래블 버블 제도를 시행할 경우 양국을 오갈 때 코로나19 검사를 생략하고 자가 격리 기간도 없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다. 대만은 당장 오늘부터 남태평양 팔라우와 트래블 버블 제도를 시행한다. 항공업계는 다양한 서비스 제공 및 국가 간 특별 제도 확산으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할미꽃을 다시 들여다봐 주세요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할미꽃을 다시 들여다봐 주세요

    1913년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 온 미국인이 있다. 생물학을 전공한 그는 순천에 자리잡았고, 그곳에 자생하는 야생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열두 종류의 제비꽃과 네 종류의 버드나무 등 당시라면 우리가 한 종이라 생각하고 지나쳤을 식물들을 그는 세밀히 분류하고 관찰해 그려 냈다. 1931년 이 그림들을 묶어 일본에서 책으로 출간했고, 이때부터 우리나라 야생화는 세계에 널리 알려진다.플로렌스 크레인 선생의 책 ‘한국의 들꽃과 전설’ 이야기다. 이 책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148종의 식물 그림이 담겨 있다. 아주 세밀하진 않지만 어떤 식물종인지 알기에는 충분하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 책을 들춘다. 혼란의 시대에 연고도 없는 먼 나라에 와 만난 들풀과 나무를 기록한 선생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분명한 것은 그림 속 이 작은 야생화들이 낯선 곳의 생활에서 그에게 무엇보다 커다란 위안이 됐을 것이란 점이다. 나 역시 식물을 그리는 일을 하면서 식물로부터 고됨과 위안을 동시에 얻는다. 내가 갖고 있는 1969년판 11쪽에는 아주 익숙한 식물 도판이 있고, 도판 옆엔 한글로 작게 ‘할머니꽃’이라고 쓰여 있다. 나는 처음 이 이름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맞아. 할미꽃은 할머니꽃과 같은 말이지.’ 그런데 왠지 그간 부르던 할미꽃이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며 식물이 다시 보였다. 할미꽃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시작점이다. 어릴 적 성묘를 가서 할미꽃을 처음 만났다. 친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묘 가까이에 핀 꽃을 발견하고는 아빠에게 이 꽃이 무엇이냐고 묻자 내게 할미꽃이라고 알려 줬다. 그때만 해도 이곳이 할머니 산소라서 할미꽃이 피는 줄 알았다. 원예학을 공부하면서 할미꽃이 양지바른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묘 근처에서 자주 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됐다. 할미꽃은 우리에게 아련함, 가여움, 슬픔의 꽃으로 기억된다. 이것은 식물의 이미지로부터 연상되는 느낌이 아니라 대개 이름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할미꽃이란 이름은 열매에 난 긴 털이 할머니의 흰머리와 같아 붙여졌지만 할미꽃의 독특한 아름다움, 이른 봄에 피어나는 용기와 씩씩함은 어린 시절부터 늘 접해 온 식물이라는 익숙함과 이름에서 연상되는 슬픔과 아련함의 감정에 묻히기 일쑤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할미꽃을 다 안다며 지나쳐 왔다.학부 시절 동기들과 작은 정원을 만드는 공모전에 참가하며 우리나라 야생화로 정원을 꾸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할미꽃을 심자고 의견을 냈다. 우리의 대표적인 야생화이기도 하고, 내게는 어릴 적 봤던 할미꽃의 형태가 독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멤버들은 하나같이 할미꽃을 심기를 꺼려 했다. 무슨 할미꽃이냐며, 더 세련되고 화려한 느낌의 정원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할미꽃은 세련되지 않다는 건가? 이것은 할미꽃에게도, 할머니에게도 분노를 살 법한 일이다. 그러나 할미꽃을 심자는 사람은 나 혼자였고, 그렇게 할미꽃 정원을 만드는 계획은 조용히 무산됐다. 지금의 나라면 친구들에게 노랑할미꽃과 동강할미꽃을 보여 줬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자생하는 노랑할미꽃은 봄에 흔한 아주 진한 노란색의 꽃이 아닌 연노란색 꽃을 피운다. 이미 정원 식물로 널리 이용되고 있어 종종 지인들에게 노랑할미꽃을 보여 주면 “이게 정말 할미꽃이냐”며 놀란다. 한국특산식물인 동강할미꽃은 꽃이 고개를 들고 있어 화려한 꽃 내부를 볼 수 있는 데다 연한 보라색의 꽃색 역시 봄에 피는 여느 꽃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색감이다. 동강할미꽃은 지금 이 계절 식물 애호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꽃이기도 하다. 이른 봄꽃을 피우는 식물 중 할미꽃만큼 독특한 색과 질감을 자랑하는 꽃은 없다. 이것은 원예식물을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할미꽃의 꽃잎은 마치 자주색 벨벳과 같다. 몸 전체에 밀생하는 흰 털은 봄 햇볕 아래에서 광채를 내뿜으며 빛난다. 털이 햇볕 아래에서 식물을 더 빛나게 해 수분매개자의 눈에 띄기 위한 것인지 착각할 정도다. 양의 털이란 이름을 가진 허브식물인 램스이어는 오로지 몸 전체에 둘러진 털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할미꽃의 털 역시 램스이어만큼 매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올봄 할미꽃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이미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서 더욱 처음 만나는 식물처럼 이름 없는 신종을 보듯 그렇게 할미꽃을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알면 많은 게 보인다고 하지만 몰라서 보이는 것들도 있다. 플로렌스 크레인 선생이 우리나라 야생화의 다양성을 그림으로 기록했듯 이미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할미꽃과 철쭉, 진달래, 개나리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대기업들 “성과급 더 올려줄게” 불만 달래기…중소기업 “이제 그만 좀 해라” 상대적 박탈감

    대기업들 “성과급 더 올려줄게” 불만 달래기…중소기업 “이제 그만 좀 해라” 상대적 박탈감

    “다른 회사는 연봉·성과급 더 주는데 우린 왜 안 올려줍니까.” 최근 대기업 곳곳에서 직원들의 급여 인상 요구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재계 서열 2위 현대자동차그룹에선 급여 인상을 위한 사무직 노조를 결성하겠다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이들은 일제히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썩 곱지만은 않다. 회사가 요구를 들어주면 상대적 박탈감은 또 다른 기업의 직원에게로 들불처럼 번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30일 재계에 따르면 재계의 성과급 논란은 SK하이닉스가 영업이익이 2배 늘었는데 성과급은 전년과 같이 연봉의 20%만 지급한다고 하면서 시작됐다. 여기에 게임·정보기술(IT) 업계의 ‘연봉 인상 도미노’가 기름을 부었고, 대한항공과 호텔신라 경영진의 ‘나 홀로 연봉 인상’까지 드러나면서 직원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대기업들은 부랴부랴 급여 인상을 약속하며 달래기에 나섰다. LG전자는 올해 연봉을 역대급 상승률인 9.0% 올리기로 했고, 삼성전자도 2013년 이후 최대치인 7.5% 인상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 역시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성과급 지급 기준을 만들고 지급 시기를 최대한 앞당기겠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에게 더 보상할 방안도 마련하겠다”며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여론은 싸늘하다. 특히 코로나19로 사정이 딱해진 중소기업 직원을 중심으로 “이미 억대 연봉에 가까운 재계 서열 최상위 대기업 직원들이 배부른 소리한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중소 건설사 직원 이모(40)씨는 “지난해 임금협상을 통해 성과급을 다 받아 챙겨 놓고, 또 성과급 인상을 요구하느냐. 얼마나 더 받아야 만족하겠느냐”라고 지적했다. 실제 현대차 직원들은 지난해 노사합의에 따라 경영 인센티브 150%와 격려금 120만원을 지난해 연말까지 이미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중견 화학기업 직원 김모(39)씨도 “게임·IT, 자동차, 항공 등 기업 업종과 업태가 서로 다르고,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한 타격도 제각각이어서 기업별 급여 상승률이 다른 게 정상인데, 매출 대비 영업이익 비중이 높고 ‘비대면의 일상화’ 덕을 톡톡히 본 게임·IT 업계를 기준으로 너도나도 급여를 올려달라 떼쓰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급여 인상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예정에 없던 급여 인상으로 회사 측의 인건비 부담이 늘어날수록 신규 채용 규모가 줄어들 수 있고, 앞으로 노사의 임금협상에서 노조 측의 임금 인상 요구가 더 거세져 파업 가능성도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영준 기자 the@seoul.co.kr
  • ‘춘천 차이나타운 반대’ 14만명 동의…강원도 “집단거주시설 아니다”(종합)

    ‘춘천 차이나타운 반대’ 14만명 동의…강원도 “집단거주시설 아니다”(종합)

    최근 중국이 김치·한복 등을 자국의 전통문화라 우기는 사례가 이어진 데 더해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역사 왜곡 논란 등으로 폐지된 가운데 춘천에서 추진 중인 한중문화타운 건설 사업, 이른바 ‘춘천 차이나타운’도 도마에 오르자 강원도가 해명에 나섰다. 현재 강원 춘천과 홍천 일대에는 2022년 완공을 목표로 한중문화타운 조성이 진행 중이다. 인천 차이나타운 10배 규모…최근 명칭 바뀌어춘천과 홍천에 있는 라비에벨관광단지 500만㎡ 내에 120만㎡(36만평) 규모로 조성되는 한중문화타운에는 중국 전통거리, 미디어아트, 한류 영상 테마파크, K팝 뮤지엄, 소림사 체험 공간, 중국 전통 정원, 중국 8대 음식과 명주를 판매하는 푸드존 등이 들어선다. 이는 인천 차이나타운의 10배 규모다. 2018년 강원도가 한 민간기업과 업무협약을 맺었을 당시 이 사업의 명칭은 ‘중국복합문화타운’이었다. 한중문화타운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지난 12일이다. 당시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한중 양국 문화가 융화되는 교류 장소로 세계인의 관심을 끌 것”이라며 “한중 수교 30주년이자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는 2022년 준공돼 한중 문화교류 증진과 도 관광은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에 이어 한복과 김치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중국의 문화라 우기며 한중 간 문화 갈등이 커지면서 이 사업에 대한 반발도 커지고 있다. 국민청원, 하루만에 14만명 넘게 동의 지난 2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강원도 차이나타운 건설을 철회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고, 하루 만인 30일 오후 6시 현재 14만 4000여명이 청원에 동의했다. 청원인은 “춘천에 건설 중인 중국문화타운이 착공 속도를 높인다는 소식을 접했다”며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 문화를 잃게 될까 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도내 차이나타운의 건설을 강력하게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어 “얼마 전 중국 소속사의 작가가 잘못된 이야기로 한국의 역사를 왜곡해 많은 박탈감과 큰 분노를 샀다”며 “계속해서 김치, 한복, 갓 등 우리 고유의 문화를 ‘약탈’하려는 중국에 이제는 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런데도 왜 대한민국에 작은 중국을 만들고, 우리나라 땅에서 중국의 문화체험 빌미를 제공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중국인 관광객을 위한 호텔 건설도 반대한다”는 의견을 냈다. 아울러 춘천 하중도에 건설 중인 레고랜드 테마파크와 관련해 청원인은 “중도는 엄청난 선사 유물·유구가 출토된 세계 최대 규모의 선사유적지”라며 “일부의 반대에도 건설을 추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강원도 “행정지원 하고 있을 뿐…도 예산 투입 없다” 이에 강원도가 악화된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강원도는 한중문화타운이 테마형 관광지일 뿐 중국인 등의 집단거주 목적 시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또 한중문화와 IT 신기술이 접목도니 사업에 강원도는 순조로운 사업 추진을 위해 인허가 등의 행정지원을 하고 있을 뿐 도 예산 투입은 없다고 강조했다. 또 사업 초기 시행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는 고고·역사 분야의 유적은 확인되지 않아 사업 추진에 문화재 관련 이슈는 없다고 도는 설명했다. 강원도 관계자는 “코로나19 글로벌 경제 위기로 사업이 다소 주춤하고 있으나 해당 사업이 지역 경제 견인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연봉 올려달라” 요구에 백기 든 대기업… 중소기업 직원은 “배부른 소리 하네”

    “연봉 올려달라” 요구에 백기 든 대기업… 중소기업 직원은 “배부른 소리 하네”

    “다른 회사는 연봉·성과급 더 주는데 우린 왜 안 올려줍니까.” 최근 대기업 곳곳에서 직원들의 급여 인상 요구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재계 서열 2위 현대자동차그룹에선 급여 인상을 위한 사무직 노조를 결성하겠다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이들은 일제히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썩 곱지만은 않다. 회사가 요구를 들어주면 상대적 박탈감은 또 다른 기업의 직원에게로 들불처럼 번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30일 재계에 따르면 재계의 성과급 논란은 SK하이닉스가 영업이익이 2배 늘었는데 성과급은 전년과 같이 연봉의 20%만 지급한다고 하면서 시작됐다. 여기에 게임·정보기술(IT) 업계의 ‘연봉 인상 도미노’가 기름을 부었고, 대한항공과 호텔신라 경영진의 ‘나 홀로 연봉 인상’까지 드러나면서 직원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대기업들은 부랴부랴 급여 인상을 약속하며 달래기에 나섰다. LG전자는 올해 연봉을 역대급 상승률인 9.0% 올리기로 했고, 삼성전자도 2013년 이후 최대치인 7.5% 인상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 역시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성과급 지급 기준을 만들고 지급 시기를 최대한 앞당기겠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에게 더 보상할 방안도 마련하겠다”며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여론은 싸늘하다. 특히 코로나19로 사정이 딱해진 중소기업 직원을 중심으로 “이미 억대 연봉에 가까운 재계 서열 최상위 대기업 직원들이 배부른 소리한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중소 건설사 직원 이모(40)씨는 “지난해 임금협상을 통해 성과급을 다 받아 챙겨 놓고, 또 성과급 인상을 요구하느냐. 얼마나 더 받아야 만족하겠느냐”라고 지적했다. 실제 현대차 직원들은 지난해 노사합의에 따라 경영 인센티브 150%와 격려금 120만원을 지난해 연말까지 이미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중견 화학기업 직원 김모(39)씨도 “게임·IT, 자동차, 항공 등 기업 업종과 업태가 서로 다르고,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한 타격도 제각각이어서 기업별 급여 상승률이 다른 게 정상인데, 매출 대비 영업이익 비중이 높고 ‘비대면의 일상화’ 덕을 톡톡히 본 게임·IT 업계를 기준으로 너도나도 급여를 올려달라 떼쓰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급여 인상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예정에 없던 급여 인상으로 회사 측의 인건비 부담이 늘어날수록 신규 채용 규모가 줄어들 수 있고, 앞으로 노사의 임금협상에서 노조 측의 임금 인상 요구가 더 거세져 파업 가능성도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영준 기자 the@seoul.co.kr
  •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희망에 대하여-서경식 선생께 보내는 편지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희망에 대하여-서경식 선생께 보내는 편지

    정치는 속절없고, 희망은 희미한 이즈음 당신의 글 ‘은퇴기’(한겨레, 2021. 3. 26)를 잘 읽었습니다. 이번 칼럼을 읽고 당신에게 기꺼이 편지를 보내고 싶었답니다. 칼럼에는 3월 말로 70세 정년에 이르러 20년간 일해 온 대학을 그만두는 당신의 소회가 인상적으로 적혀 있네요. 소년 시절부터 “내 출신과 문화를 홀로 등에 짊어진 채 나는 다른 모든 학생들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소년의 눈물’)는 디아스포라의 소수자 감성을 느끼며 살아온 당신, 조국의 감옥에 있는 두 형의 존재로 인해 늘 죽음의 그림자를 응시하던 당신, 적성과는 전혀 맞지 않는 파친코 가게 업무를 보면서 그 우울한 일상을 밤늦게 루쉰 읽기로 달래던 당신, 쉰 살 이전에는 정규직이 돼 본 적이 없었던 당신이 대학에서 무사히 정년퇴임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왠지 너무나 낯설게 다가옵니다. 당신 자신도 젊은 날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겠지요. 행여 당신의 여정이 한 예민하고 성실한 소수자의 인간 승리라는 관점으로 해석될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이 언젠가 제게 얘기했듯이 지금에 이른 당신의 삶에는 분명 행운이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대부분의 재일조선인들은 저 같은 이런 기회를 상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하고 싶은 얘기들이 많이 있을 텐데, 그런 기회를 못 얻은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저를 둘러싼 행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세상이 지금보다 나아지기 힘들 것이라는 우울과 두려움을 마주합니다. 여러 겹으로 꼬인 정치·사회적 상황을 응시하다 보면 환멸에 빠지기 쉬운 시대이기도 합니다. 몇 년 전 촛불혁명 이후 한국 사회에 불어온 정치적·문화적 혁신이라는 희망은 이제 강고한 진영 논리와 집값 폭등, 힘겨운 개혁 과정 속에서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늘 깊은 비관 속에서도 세계의 모순과 질곡, 죽음을 탐구해 왔던 당신의 글을 찾게 됩니다. 당신은 어떤 순간에도 희망을 쉽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절망의 극한을 끝끝내 응시하는 당신의 태도는 쉽게 허무와 회의에 빠지곤 했던 이들을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당신은 최근 저작에서도 여전히 공허한 희망과는 분명한 거리를 둔 채 짙은 비관 속에서 일본 사회를 비롯한 시대의 퇴행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나 오랜 역사를 거치고 이토록 수많은 잔혹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관한다”(‘나의 이탈리아 인문기행’)는 당신의 전언을 지금 이 시대 한국 사회에도 되비추게 됩니다. 시대의 비관을 응시하며 개혁의 지지부진함을 지적하는 과정은 언젠가는 슬며시 다가올 새로운 희망의 싹을 예비하는 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도, 저도 계속 쓰고 절망하는 과정이 늘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어느 날 당신이 연구실에서 말했던 “저는 불행하게 살다가 불행하다는 얘기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쪽에 서고 싶습니다”라는 얘기가 제 마음을 관통해 글쓰기의 근원적 의미를 생각하게 됐지요. 이런 상황은 참 역설적입니다. 불행과 절망에 대한 깊은 통찰, 희망이 없었던 사람들에 대한 글쓰기가 외려 이 시대의 힘들고 우울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힘과 위안을 주는 아이러니 말입니다. 때로 정직한 절망은 어떤 낙관보다도 미래의 희망을 향한 길을 비춥니다. 그 역설이 당신의 글이 지닌 힘입니다. 이제 완연한 봄날입니다. 당신이 한국에 오지 못한 지도, 제가 일본에 가지 못한 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구니타치(國立)에는 벚꽃이 한창이겠지요. 그곳 당신의 단골 소바집에서 함께 식사하며, 다시 그 희미한 희망에 관해 얘기하는 순간을 간절한 마음으로 고대합니다. 부디 정년 이후 펼쳐질 당신의 인생에 행운과 건강이 함께하길 기원하며, 권성우 드림.
  • ‘코로나 블루’ 달래는 서울아트시네마 수입 영화展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가 다음달 7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종로3가 서울극장 내 전용극장에서 수입 영화사 찬란과 슈아픽쳐스와 함께 ‘설레는 극장전’을 진행한다. 이번 특별전은 코로나19에 지친 영화 팬들에게 위로와 행복을 전하고자 마련됐다. ‘행복한 라짜로’(2018), ‘교실 안의 야크’(2019), ‘지구 최후의 밤’(2018) 등 국내 영화 팬들에게 선보였던 6편과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2020) 등 미개봉작 5편을 포함해 모두 11편이 상영된다. 부탄 영화인 ‘교실 안의 야크’는 호주 이민을 꿈꾸던 젊은 교사가 산간벽지 학교로 발령 난 후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인생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내용이다. ‘지구 최후의 밤’은 탕웨이와 황각, 실비아 창이 주연을 맡은 중국 영화로, 2018년 금마장영화제 촬영상 등을 수상했다. 엠마누엘 무레 감독이 연출한 프랑스 영화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은 남녀의 사랑이라는 흔하고도 특별한 소재를 중층의 이야기 구조 속에 녹여 낸 달콤쌉쌀한 드라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별이 빛나는 도림천… 관악 다리마다 LED 반짝반짝

    별이 빛나는 도림천… 관악 다리마다 LED 반짝반짝

    서울 관악구 ‘별빛내린천’(도림천의 별칭)이 별빛을 주제로 한 조명을 설치하고 관광 명소로의 도약은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까지 노린다. 관악구는 특별교부세 8억원을 투입해 별빛내린천 다리 6곳에 경관조명 설치 공사를 마쳤다고 29일 밝혔다. 별빛내린천이란 이름은 ‘별이 떨어진 집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는 강감찬 장군의 탄생 설화에서 따왔다. 관악구는 ‘강감찬 도시’를 도시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조명이 설치된 곳은 도림보도교, 신림4·5동교, 문화교, 충무교, 양산교, 신림3교다. 교량 측면, 난간, 계단 등에 발광다이오드(LED) 라인바 561개, LED투광등 68개, 디자인등주 17본 등 다양한 콘셉트의 경관조명을 설치했다. 구는 이번 조명 사업을 통해 별빛내린천이 관광 명소로 자리잡고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박준희 관악구청장은 “하루를 정리하는 저녁 시간, 별빛내린천에서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경관조명을 통해 코로나19로 지친 마음을 달래보시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별빛내린천 특화사업에 박차를 가해 관악구가 별빛내린천과 관악산이 어우러진 자연친화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100만 공무원 죄인 만드나” 부글부글… “범위 최소화 안 하면 과잉 입법” 논란도

    “100만 공무원 죄인 만드나” 부글부글… “범위 최소화 안 하면 과잉 입법” 논란도

    공직자의 부동산 투기 근절을 위해 당정이 29일 모든 공직자의 재산등록 의무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현재 4급 이상인 재산등록 의무 대상을 공직사회 전체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당정은 9년째 국회에 묶여 있는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을 3월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법적인 강제절차와 부패방지 시스템을 정비해 제2의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당정, 부동산 적폐 청산 여론 제도화 의지 공직자 재산등록 의무화와 관련해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대표 직무대행은 지난 28일 당정 협의회에서 “공직자 투기를 근절하기 위한 제도화 수준을 높이겠다”며 추가 입법을 국회에서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입법이 현실화하면 부동산과 무관한 기관이나 부처에서 일하는 공무원도 전원 재산을 공개해야 한다. LH 사태로 촉발된 부동산 적폐 청산 여론을 제도화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 같은 극약 처방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에는 회의적 시각이 나온다. 당장 관가에서는 과잉 입법에 위헌 논란까지 부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세종청사의 한 공무원은 “공무원 수만 100만명이 더 될 텐데 이들 모두의 재산을 공개하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형국”이라며 “9급이나 7급 입사자는 큰 상관이 없지 않냐. 공무원 모두를 죄인으로 만드는 처사”라고 말했다. 당장 눈앞의 선거를 의식해 돌아선 민심을 달래기 위한 정치적 수사일 뿐 현실화하면 과잉 입법 논란도 나올 수 있다. 또 다른 공무원은 “범위를 최소화하면서 실효성을 높이는 정교한 개혁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결국 헌법 소원에 걸리고 개혁안 자체가 희화화될 수 있다”며 “공개 대상자를 늘리려면 인허가나 연구개발(R&D) 등 연관 부서를 중심으로 현실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9년 계류 이해충돌방지법 제정 더 시급” 관가 주변에서는 재산 공개를 강화하는 조치 못지않게 국회에 계류된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 제정이 시급하다는 의견도 많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주재한 ‘공정사회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이번 기회에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을 반드시 제정해 공직자 부패의 싹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며 국회 협조를 당부했다. 권익위에 따르면 LH 사태 이후 국민참여정책플랫폼 ‘국민생각함’ 의견조사에서 응답자의 85% 정도가 이해충돌방지법의 조속한 제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세종 박찬구 선임기자 ckpark@seoul.co.kr
  • LH, 신도시 입지조사 배제… 고강도 ‘슬림화’

    LH, 신도시 입지조사 배제… 고강도 ‘슬림화’

    3기 신도시 땅투기 의혹의 중심에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조직 해체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신도시 입지 조사 업무를 LH로부터 분리한다는 것 외에 조직 개편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큰 틀을 유지하면서 조직 효율성·투명성·공공성을 강화하고, 대대적인 조직 혁신을 들이댈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당장 LH 조직을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는 데는 나름 고민이 있다. 먼저 LH의 순기능이다. 누가 뭐래도 2·4 부동산 대책 추진의 중심축 역할을 해야 한다. LH만큼 대규모 주택 공급 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기관이 사실상 없다. LH의 핵심 사업은 택지개발·공공주택건설이다. 토지공사와 주택공사를 통합해 LH를 만들 땐 효율성을 높여 택지개발 비용과 공공주택 원가를 낮추자는 취지였기 때문에 단순히 토공, 주공으로 분리하는 것은 택지·주택 공급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또 LH가 맡은 주거복지, 지역균형발전사업 등은 정부 고유 사무에 가깝기 때문에 이런 업무를 떼어내려면 주거복지청 신설 등 정부 조직 개편이 전제돼야 한다. 그렇다고 LH의 조직 개편이 물 건너간 것은 아니다. LH 직원의 투기 심각성과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조직 해체에 버금가는 조직 슬림화 등의 거센 요구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 [특파원 칼럼] 트럼프인 듯 아닌 듯, 바이든의 인권외교/이경주 워싱턴 특파원

    [특파원 칼럼] 트럼프인 듯 아닌 듯, 바이든의 인권외교/이경주 워싱턴 특파원

    “미국은 중국에 대해 우리의 동맹국들이 ‘우리 아니면 그들’의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맹국들이 완벽하게 일치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를 중국과 맺고 있다는 것을 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캐나다·영국·호주·뉴질랜드 등 3개 대륙의 우군이 동시에 신장위구르 인권탄압에 대해 대중 인권 제재를 단행한 직후인 지난 24일(현지시간) 동맹의 선물을 안은 채 유럽 순방에 나선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벨기에 브뤼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본부 연설에서 예상 밖의 발언을 했다.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 아래 동맹을 규합해 대중 전선을 세운 조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 정책과는 다소 결이 달라 보였다. 동맹을 어르고 달래는 양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며 한발 물러선 것이다. 그는 중국과의 군사적 적대 관계, 5G(세대) 이동통신 등 기술적 경쟁 관계에 방점을 찍으며 ‘동맹의 협력’을 강조했지만 기후변화, 코로나19, 북한 비핵화 문제 등에서 대중 협력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대중 압박에는 동참하라면서도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일견 모순되는 발언의 배경에는 사실 ‘세계의 리더십은 되찾되 세계경찰의 역할은 더이상 할 수 없다’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어른거린다. 미국은 예전과 달리 대중 압박이 낳은 동맹의 경제적 피해를 메워 줄 여력이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동맹국들은 실질적인 보너스보다 추상적인 가치에 기대 미국의 싸움에 동참해야 한다. 미국의 군사력 제공에 대해서도 블링컨은 “공정한 몫을 부담하면 공정한 발언권을 가질 것”이라며 정확한 대가를 요구했다. 중국은 미국은 물론 EU·영국·캐나다 등에 보복 제재를 가하며 되받아쳤다. 호주산 와인에는 최대 218.4%에 달하는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대러시아 압박 수위도 높아지면서 미국은 독일에 러시아에서 천연가스를 끌어오는 가스관 건설 사업이 제재를 받을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인권이라는 대의로 뭉친 ‘민주주의연합’ 내에서 언제라도 반발이 터져 나와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다. 바이든이 국내 상황에 매몰돼 ‘외교 아닌 내치’를 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냉전이 도래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답변이 ‘미중 간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세련된 외교적 수사다. 트럼프가 ‘미국의 이익이 되는 거래’로 동맹을 줄 세웠다면 바이든은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을 앞세워 동맹을 헤쳐 모이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블링컨이 연설한 EU(27개국)는 ‘인권 제재는 미국과 발맞추고 중국과의 무역관계는 유지’하는 전략적인 균형을 선택할 외교적 공간이 한국보다 넓다. 중국과 맞닿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대중 견제를 꾀하는 쿼드(미국·인도·호주·일본) 참여를 요구받는 한국은 지정학적 위치로 봐도 양자택일의 기로에 설 확률이 높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한국의 경제 의존도 1위는 중국이 아닌 미국”, “이러다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자주 들린다. 반면 굳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중국이 반중 연대를 향해 소위 ‘본보기로 하나만 때린다’면 그 대상은 한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 바이든 인권외교 정책의 본질도 트럼프의 자국우선주의와 같이 ‘미국의 국익’이다. 외려 미국의 세련된 동맹 줄 세우기는 한국의 대응을 더 어렵게 한다. 트럼프의 일방주의에는 대부분이 반대했지만, 바이든의 인권외교는 정치 지형에 따른 한국 내 분열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고비를 앞에 두고 우리 외교의 기준 역시 오직 우리의 국익이 돼야 할 것이다. kdlrudwn@seoul.co.kr
  • ‘존재의 불안’ 달래는 방법 알고 싶다면 詩를 만나라

    ‘존재의 불안’ 달래는 방법 알고 싶다면 詩를 만나라

    낯선 자리에서 어쩌다 문학, 그중에서도 시 전공자임을 밝힐 때가 있다. “저는 잘 모르는 어려운 공부를 하시는군요.” 이런 겸손한 반응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때로는 나를 걱정하는 것인지 핀잔주는 것인지 모를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먹고살기 쉽지만은 않으시겠어요.” 네, 그러니까 생계에 보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쓴 책 좀 사 주세요. 언젠가는 이렇게 한번 대꾸해 봐야지 싶다. 그 사람이 내가 출간한 책을 사든 말든, 시가 먹고사는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야 변하지 않겠지만. 그런데도 우리가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효용성을 따지는 질문에 대한 영화적 답변이 하나 더 마련됐다. 다큐멘터리 영화 ‘시 읽는 시간’이다. 여기에는 다섯 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직장을 계속 다니면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겠다 싶어 퇴직을 결행한 사람(오하나), 장기근속 스트레스로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사람(김수덕), 갑자기 해고를 당해 복직 투쟁 중인 사람(임재춘), 특별한 계획 없이 프리랜서로 사는 사람(안태형),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페미니즘 예술가로 활동하는 사람(하마무). 영화 초반부는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각각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이들이 공통으로 고민하는 주제가 ‘존재(자)의 불안’임을 알 수 있다. 하이데거 철학에서는 존재자를 ‘있는 것’으로, 존재를 ‘있음’으로 구분한다. 더 쉽게 풀이하자. 존재자는 먹고살기에 급급한 ‘생존’을 뜻하고, 존재는 어떻게 의미 있게 살 것인가를 궁리하는 ‘삶’으로 등치된다. 요컨대 이들은 존재자로서의 생존과 존재하는 삶 사이의 거대한 간극에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다 그러하듯이. 이때 이수정 감독이 제시하는 해결책이 바로 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시의 가치를 역설한다. “허무와 절망뿐인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함께 느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의 힘을 빌리기로 작정했다. 시는 고통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가장 진실한 언어이며 기도이자 노래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시가 여하한 힘을 갖는지는 곰곰 생각해 볼 사안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시가 잘나가는 양지인보다는, 소외된 음지인과 친연성이 높다는 점이다. 호시절만 누리는 이는 시를 읽지 않는다.그래서 영화 후반부 다섯 명의 등장인물은 자신이 감응한 시를 읽는다. 이것은 물론 먹고사는 생존, 즉 존재자의 불안은 해소하지 못한다. 시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 한데 시는 어떻게 의미 있게 살 것인가를 묻는 삶, 즉 존재의 불안을 달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준다. 그것은 무슨 연유로 가능한가? 이를 알고 싶다면 ‘시 읽는 시간’을 한번 보시라고 권할 수밖에. 내가 쓴 책에도 이를 해명해 뒀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 부탁드린다. 존재자의 불안은 서로서로 도와서 줄어드니까. 허희 문학평론가·영화 칼럼니스트
  • 강남 간 朴 “재건축 원스톱 지원”

    강남 간 朴 “재건축 원스톱 지원”

    “재개발·재건축 공공 민간참여형 추진”‘서울선언’ 4개 중 3개가 부동산 관련예정 없던 회견서 “부동산거래법 통과”민주당, ‘내곡동 땅’ 吳 사퇴 공식 요구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가 28일 여당 ‘험지’인 강남, 서초구를 찾아 “재개발, 재건축을 할 때 공공 민간참여형으로 하겠다”는 ‘서울선언4’를 발표하고 부동산 민심 진화에 나섰다. 민주당은 부동산과 관련해서는 납작 엎드리고,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에 대해선 부동산 투기와 거짓말 의혹을 불지피며 사퇴를 강하게 압박하는 이중전략을 쓰고 있다. 박 후보는 이날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 앞 유세에서 “시장이 되면 그동안 재건축, 재개발 추진이 느렸던 곳을 한 곳 한 곳 직접 찾아가서 챙기겠다”고 밝혔다. 그는 “재개발·재건축 활성화 특별대책팀을 구성해 원스톱 행정처리를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재개발·재건축 활성화를 위해 ‘35층 층고 제한’을 일부 완화하겠다고도 했다. 박 후보 측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투기 사태로 부동산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자 정책 공약 발표를 부동산 영역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박 후보가 유세를 진행하며 내놓는 서울선언 4개 중 3개가 부동산 관련이다. 9억원 이하 주택의 공시지가 상승률 10% 이내로 조정, 아파트값 안정을 위한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분양원가 공개 등이다. 박 후보는 이날 오후에는 예정에 없던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3기 신도시 개발예정지역 및 대규모 택지개발예정지역 내 토지 소유자 전수조사 ▲이해충돌방지법, 부동산거래법 즉시 통과 ▲대통령직속 토지주택개혁위원회 설치 ▲당 전수조사 결과 발표 등을 정부와 민주당에 건의했다. LH 국면에서 전면에 나서며 ‘부동산 해결사’를 자처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이날 최고위원회 논의를 통해 오 후보의 사퇴를 공식 요구하며 공중전을 이어 갔다. 김태년 대표 직무대행은 최고위에서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대통령이 돼 국가에 큰 해악을 끼친 MB(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례를 반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 대행은 오 후보가 내곡지구 개발용역이 시작된 2005년 6월 22일 직전에 부인과 처가 소유의 내곡동 땅 측량 현장에 있었다는 내용의 KBS 보도를 근거로 들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민생 해결에 총력전 펼치는 김정은, 새달 세포비서대회

    민생 해결에 총력전 펼치는 김정은, 새달 세포비서대회

    미국과 치열한 수싸움 중에도김정은, 연일 민생 행보 연출경제난에 빠진 北 주민 달래기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심각한 경제난에 빠진 북한 주민들의 민심 다잡기에 나섰다. 다음달 초순 세포비서대회에서도 경제난 극복을 위한 내부 결집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앙통신은 28일 “당 제6차 세포비서대회가 4월 초순 평양에서 열리게 된다”고 보도했다. 당 중앙위원회 비서국은 대회 소집과 관련해 “전당에 총비서 동지의 유일적 영도를 철저히 실현하는 데서 당세포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을 중시하고 혁명발전의 새로운 높은 단계의 요구에 맞게, 우리 당을 조직사상적으로 공고히 하며 현시기 당세포사업을 근본적으로 개선 강화하는 데서 나서는 문제들을 토의하고 지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대회에선 8차 당대회에서 밝힌 새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 달성을 촉진하고 당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세포비서들의 임무와 역할이 주로 논의될 전망이다. 북한은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2013년, 2017년 각각 제4차 세포비서대회·5차 세포위원장대회를 열었다. 김정은 총비서는 두 차례 모두 참석했다. 당세포비서는 5~30명으로 구성된 당의 최말단 조직인 당세포의 책임자를 일컫는다. 김정은 총비서는 지난 25일 미사일 발사 현장 대신 평양 주택단지 부지를 시찰하는 등 연일 민생 행보를 보이고 있다. 대북정책 검토를 거의 마무리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와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는 와중에도 김정은 총비서가 경제에 집중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그만큼 내부 사정이 열악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이날 논설에서 시·군이 나라 경제의 ‘주춧돌’에 해당한다며 “시·군들이 발전해야 사회주의 건설이 힘있게 추진되고 국가가 부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미얀마 임시정부 포스코에 공문 보내 “가스전 대금 결제 중단을”

    미얀마 임시정부 포스코에 공문 보내 “가스전 대금 결제 중단을”

    우리 기업 포스코인터내셔널이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맞서는 임시정부 격인 연방의회 대표위원회(CRPH)로부터 현지 가스전 대금 결제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받은 사실이 확인됐다고 KBS가 보도했다. CRPH는 이들 가스전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현금이 ‘미얀마 가스공사(MOGE)’를 통해 군부에 들어간다고 보고 이 사업에 참여하는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에게 사업 중단을 공식 요청했다. 띤뚱나잉 CRPH 재정산업장관은 최근 “토탈(프랑스), 포스코(한국), PTTEP(태국)에 대해 석유와 천연가스 판매 금액이 쿠데타 군부로 가는 것을 금지하는 공문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톰 앤드류스 유엔 미얀마 특별보고관도 “미얀마 가스전은 연간 10억 달러(약 1조 1000억원)를 벌어들인다. 미얀마 군정은 이 돈을 자신들의 범죄기업을 지원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공격하는 데 쓸 것”이라며 사업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미얀마의 서쪽 안다만해 해상에 쉐 가스전 지분의 51%를 소유하고 직접 천연가스를 시추하고 판매한다. 한 해 3000억원에서 4000억원의 수익을 20년 넘게 보장받는 아주 안정적인 사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MOGE의 지분은 15% 정도다. 사업 중단 요청 공문을 받은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아웅 산 수 치 정부 시절에도 사업을 진행했다면서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이정환 실장은 “(가스전) 참여사들의 프로젝트에 대한 입장, 프로젝트가 미얀마 국가에 차지하고 있는 역할과 중요성, 무엇보다도 중요한 직원들의 안전 확보 등을 종합해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강판은 미국의 제재를 받는 미얀마경제지주유한회사(MEHL)과 협력하고 있어 더욱 문제다. MEHL은 군부 요인들이 직접 투자해 설립한 회사다. 영리를 늘리려는 기업 활동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잔혹하게 인권과 민주주의를 짓밟는 미얀마 군부의 배를 불리거나 그들이 시민들을 유혈 진압하는 뒷돈으로 쓰이게 해선 안된다. 필요하면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에서도 이미 토탈 사옥 앞에서 사업을 중단하라는 시위가 열리는 등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편 미얀마 군부가 ‘미얀마군의 날’을 하루 앞둔 26일 반(反) 쿠데타 시위대 300여 명을 추가로 석방했다고 AFP 통신이 보도했다. 교정당국 관계자는 “(양곤에 있는) 인세인 교도소에서 322명이 풀려났다”고 밝혔다. 군부는 지난 24일에도 시위대 600여명을 석방했다. 잇따른 석방 조치의 배경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앞서 AP 통신은 24일 군부가 시위대를 달래려는 조치로 보인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현재 미얀마에서는 지난달 1일 쿠데타 이후 군경의 총격에 의해 희생된 시민들이 300명을 넘어서면서 민심의 분노가 ‘임계점‘에 이른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민주 진영은 국제 기부사이트 등을 동원, 연방군 창설에 나서고 있어 군부와 반(反) 쿠데타 시위대가 정면 충돌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앞서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AAPP)는 쿠데타 이후 23일까지 2812명이 체포·구금됐으며 이 중 2418명이 여전히 구금 중이거나 체포 영장 등이 발부된 상태라고 밝히기도 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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