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읽는 동화] 김꽃분 할머니를 찾습니다/이규희
“혜미야, 할머니 잘 보고 있어야 한다.”
엄마가 나들이를 나가며 단단히 일렀습니다.
“알았어요.”
혜미는 마땅찮은 듯 퉁명스레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지난 겨울 쓰러진 후 말하는 거며 걷는 거 모두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렸습니다. 걸핏하면 온 집안을 어질러 놓고 날이 따뜻해지자 자꾸만 밖으로 나가려고만 하였습니다. 혜미는 그런 할머니와 단 둘이 집안에 있는 게 싫었습니다. 비스듬히 열린 방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다행히 오늘은 낮잠을 주무시고 있습니다.
‘헤헤, 잘됐다!’
마음이 놓인 혜미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게임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나갔을 때였습니다.
‘이상하다?’
할머니가 이렇게 오래 낮잠을 주무실 리가 없는데 방안이 너무 조용했습니다. 혜미는 고개를 갸우뚱하곤 살금살금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할머니가 어느 틈에 혜미의 책가방에서 공책을 꺼내서는 온통 낙서를 하고 있었거든요.
“몰라, 몰라! 내 공책에다 이게 다 뭐야!”
혜미는 할머니 손에서 공책을 휙 빼앗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 공부했어, 공부! 참 재미있어.”
할머니는 아기처럼 웃었습니다.
혜미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바보할머니! 꼴도 보기 싫어. 어디로 없어졌으면 좋겠어.”
혜미는 화를 풀풀 내며 할머니 옷소매를 잡아끌고는 방에다 모셔놓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속이 상했습니다. 늘 깨끗하고 곱기만 하던 예전의 할머니는 어디로 가고 이상한 가짜 할머니 하나가 집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툭하면 혜미의 책을 북북 찢어놓거나 혜미가 먹던 과자를 빼앗아 먹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집으로 놀러온 친구를 보며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순이야, 어서 와. 우리 각시놀이 하자.”
할머니는 그 친구를 옛날 소꿉친구로 생각한 모양이었습니다.
“혜미야, 너희 할머니 이상해. 무서워.”
친구는 겁먹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혜미는 그 후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치, 저런 할머니는 없었으면 좋겠어.”
혜미는 입을 쑥 내밀고 공책에 그어놓은 낙서를 지우며 투덜거렸습니다.
하긴 할머니가 쓰러진 후 온 집안의 분위기도 달라졌습니다. 엄마는 할머니 목욕을 시키랴 옷을 갈아입히랴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아빠도 거의 웃는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혜미가 방에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혜미야, 왜 이렇게 현관문을 열어놓고 있니? 할머니는?”
밖에 나갔던 엄마가 놀란 눈으로 할머니 방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몰라, 몰라! 할머니 미워요! 또 내 공책에다 몽땅 낙서를 해놓았단 말이에요.”
혜미는 엄마를 보자 잔뜩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혜미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부리나케 할머니 방을 열어보았습니다.
“이런, 안 계시잖니, 어디 가셨지?”
“아까 방에 계셨는데요?”
혜미도 깜짝 놀라 할머니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할머니 방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엄마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도대체 뭐하느라 할머니 나가신 줄도 몰랐단 말이니?”
엄마는 버럭 화를 내며 안방이며 목욕탕 거실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언젠가 할머니가 숨바꼭질을 한다며 옷장 속에 꼭꼭 숨어있는 걸 찾아낸 적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온 집안을 다 찾아봐도 할머니는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현관문 여는 소리 안 났는데….”
혜미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정신을 팔고있느라 할머니가 나가신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안되겠다, 빨리 밖으로 나가보자.”
엄마는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혜미도 허둥지둥 그 뒤를 따라 나갔습니다.
“아저씨, 저희 어머니 나가시는 거 못 보셨어요?”
엄마는 경비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글쎄요, 여태 화단 손질 하고 이제 들어왔거든요.”
경비 아저씨도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는 할머니는 아파트 10층에서 계단을 걸어 내려와 경비 아저씨도 모르게 어디론가 나가신 것입니다.
엄마는 아파트 단지는 물론 큰 길까지 나가 할머니를 찾아 나섰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할머니를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경비아저씨가 안내 방송을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할머니를 못 찾으면 어쩌면 좋으니.”
엄마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그건 혜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혜미의 방을 마구 어질러놓고 공책이나 책을 찢고 과자를 빼앗아 먹긴 하지만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겁이 더럭 났습니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꼴도 보기 싫다고 소리 질렀잖아.’
혜미는 집 주소는커녕 전화번호도 자기 이름도 알지 못하는 할머니를 자기가 내쫓은 것만 같아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혜미는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스케치북을 부욱 찢어서는 마구 글씨를 썼습니다.
김꽃분 할머니를 찾습니다.
분홍색 스웨터에 파란 바지를 입었습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글씨는 삐뚤빼뚤 했습니다. 하지만 혜미는 한 장 두 장 스케치북을 자꾸 자꾸 찢어서는 할머니를 찾는 광고지를 만들었습니다. 누군가 강아지를 잃어버린 후 전단지를 써놓은 걸 떠올린 것입니다.
“아저씨, 이것 좀 붙여주세요, 네?”
혜미는 경비 아저씨랑 함께 아파트 여기저기에 전단지를 붙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어느 틈에 날은 금방 어둑어둑해졌습니다.
그 때 회사에 있던 아빠가 핼쑥한 얼굴로 달려왔습니다.
“그래, 파출소 쪽에는 가보았소?”
“아까 신고를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요. 어떡하지요?”
“허허, 참!”
엄마도 아빠도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혜미는 그럴수록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만 싶었습니다.
‘다 나 때문이야, 제발 우리 할머니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혜미는 할머니만 무사히 돌아오면 공책을 찢어도 마구 낙서를 해도 좋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엄마의 손전화가 다급하게 울렸습니다.
“네, 뭐라고요? 양지말 지구대에 하, 할머니가 계시다고요?”
엄마는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양지말이라면 읍내로 이사 오기 전까지 살던 곳이었습니다. “방금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어머니가 양지말에 있는 지구대에 계시대요. 어, 어서 그리로 가봐요!”
엄마, 아빠, 혜미 세 식구는 아빠 차를 타고는 부리나케 양지말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은 낡은 집들을 다 헐어내고 아파트를 짓느라 예전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혜미네도 읍내로 이사를 온 거였고요.
엄마, 아빠, 혜미는 부랴부랴 지구대로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지구대 의자에 앉아 웬 소쿠리 하나를 들고는 환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아이쿠, 이제야 보호자가 나타나셨군요. 어느 분이 저 뒷산에서 길을 잃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이리로 모셔왔답니다. 저흰 혹시나 보호자가 일부러 버리고 간 게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가끔 이런 봄철에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버리고 가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런 노인들을 보호소로 보낸 적이 아주 많답니다.”
경찰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혜미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자칫하면 할머니가 그런 곳으로 갈 뻔했으니까요.
“할머니이!”
혜미는 와락 달려가 할머니를 붙잡았습니다.
“순이야, 이것 봐라. 내가 나물 많이 뜯었지? 쑥도 있고, 냉이도 있어.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달래랑 씀바귀는 보이지 않더라. 옛날에는 저기 아주 많았는데….”
할머니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소쿠리에 든 냉이랑 쑥을 가리켰습니다.
“혜미야, 할머니가 옛날 생각이 나서 봄나물을 캐러 오신 모양이구나. 그래서 양지말까지 오셔서 저렇게 나물을 뜯은 거야.”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을까요….”
엄마 아빠는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혜미는 그때서야 문득 깨달았습니다.
‘할머니는 진짜 아기가 되신 거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돌봐 드려야 해. 내가 아기일 때 할머니가 나를 돌봐주신 것처럼.’
혜미는 흙이 잔뜩 묻은 할머니의 앙상한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할머니는 나물이 잔뜩 든 소쿠리를 소중하게 안고 차에 올랐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할머니를 위해 서둘러 쑥국을 끓였습니다. 된장을 넣고 조물조물 냉이도 무치고요.
“어머니, 어서 드세요.”
“에구, 맛있겠구나. 벌써 쑥이랑 냉이가 나왔던? 냄새가 시장에서 파는 거하곤 딴판인 걸 보니 네가 어디 가서 캐온 모양이구나. 자, 어서 먹자.”
할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쑥국, 냉이무침이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 서둘러 수저를 들었습니다. 온 집안에 가득 한 봄 냄새에 잠시 정신이 되돌아온 듯 보였습니다.
“할머니, 너무 맛있어요!”
혜미도 아빠도 엄마도 얼른 국그릇에 코를 박고는 숟가락으로 국을 퍼 넣었습니다. 모두 할머니한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지요.
●작가노트
봄이 되자 문득 잊혀져가는 우리의 봄 향기가 떠올랐습니다.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파는 향기가 아닌 우리의 봄 들판에서 풍겨오던, 흙냄새 묻은 향긋한 향기가. 하지만 들판에 지천으로 나던 쑥이며 달래, 민들레, 씀바귀, 두릅, 고들빼기, 냉이… 이런 봄나물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가 그 향기를 찾아가듯 우리들도 가끔은 그 향기를 찾아 나서보는 것도 좋겠지요.
●약력
▲성균관대 사서교육원 졸업 ▲1978년 ‘소년중앙문학상’ 동화 ‘연꽃등’ 당선 ▲한국아동문학인 협회, 문인협회, 펜클럽 회원 ▲‘이주홍문학상’, ‘세종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등 수상 ▲지은 책 ‘열세 살에 만난 엄마’, ‘흙으로 만든 귀’, ‘왕비의 붉은 치마’, ‘부엌 할머니’ 외 다수.